출생과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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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가 태어난 1917년엔 유럽에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이 3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전장을 하늘과 물밑으로 확장 시켜 영국 상공에서는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대서양은 잠수함작 전의 무대가 되고 있었다. 1916년 9월에는 영국이 솜 전투에서 최초 로 탱크를 사용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박정희의 생일보다 한달 빠른 1917년 10월17일,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한강에서 인도교 준공식을 가졌다. 이 다리는 그로부터 43년 7개월 뒤 혁명군을 이끌 고 서울로 진격하는 박정희의 주요 기동로가 된다. 박정희가 태어나 기 1주일 전인 11월 7일(러시아력으로 10월25일)엔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켰다. 전쟁과 혁명이 세계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어렵게 태어난 한 생명이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주인공이 될지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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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1917년에 태어났을 때, 가난한 가족의 구성원은 부모와 5남2녀였다. 아버지 박성빈(당시 만46세), 어머니 백남의(45세), 장남 박동희(22 세), 차남 박무희(19세), 장녀 박귀희(15세), 3남 박상희(11세), 4남 박한생(7세), 차녀 박재희 (5세), 5남 박정희. 동희,무희 두 형은 장 가를 간 뒤였고 귀희(진실누님 또는 수희)도 옆 동네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출생과 죽음을 다 목격했던 박재희(1996년에 84세로 작 고, 박대통령보다 다섯살 위)씨는 1987년 10월6일 (당시 67세), 서울시 서대문 구 창천동의 2층 주택에서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에게 박대통령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며느리 둘을 보신 어머님이 동생을 임신하셨을 때는 귀희언니가 형부 은용표씨와 결혼한 뒤였습니다. 언니는 정희가 태어나던 해에 딸을 낳았지요. 그러므로 마흔 다섯에 임신한 어머니는 딸과 함께 아 기를 밴 것을 퍽 부끄럽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또 집안이 원 체 가난하여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이 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 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셨습니다. 시골사람들이 흔 히 쓰는 방식대로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 누우시고, 밀기울 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라치기도 했답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 도 하고, 장작 더미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도 했더랍니다. 아무리 해 도 안되니까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고는 정신을 잃어버 렸肉�. 정신을 다시 차리고보니 뱃속의 아기가 놀지 않더랍니다. 이 제 됐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또 놀더래요. 그 뒤 어머 니는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져 버렸어요.

낙태를 시키려고 스스로 방아에 깔려버린 것이지요.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어머니가 죽는다고 울고불고 했답니다. 어머니는 허리를 못 쓸 정도로 다치셨는데 뱃속 아기는 여전히 놀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 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고 아기 지우는 일을 포기했더랍니다.".

박재희의 증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같은 시기에 임신한 딸은 박 정희의 큰 누님 박귀희(1974년에 작고)를 가리킨다. 박귀희의 아들 은희만이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한번은 내(귀희)가 친정에 다니러 갔는데 어머니께서 누구한테도 말을 못하시겠다면서 임신한 사실을 나에게 털어놓으시는 거야. 어머 니와 나는 뒷동산에 올라갔단다. 나는 어머니가 다치실 때 대비하기 위하여 낮은 데 서 있었다. 어머니는 높은 데서 몇번이나 뛰어내렸다. 한번은 내가 어머니를 부축하다가 함께 엉켜서 뒹굴기도 했단다. 정 희가 태어나기 열흘 전에 나는 큰 딸 봉남(1995년에 작고)이를 낳았다.".

다시 박재희의 추억은 계속된다.

"동생 정희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 날 저는 혼자 마당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엄마야'하고 찾아 보아도 안 보여요. 방문을 열어보니까 어머니는 이불을 덮어쓴 채 끙끙 앓고 계셨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또 아기 지 우는 약을 먹고 그러시는 줄 알고 겁이 나서 아버지를 찾으러 논으로 뛰었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꽃신을 신고 달렸습니다. 돌밭에 넘어져 발등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오리는 뛰 었을 거예요. 숨이 차서 헐떡거리니 나락을 베고 계시던 아버지가 보 시고 얼른 논에서 나오시더니 대님을 풀어서 저의 상처를 동여맨 뒤 나를 업고서 집으로 오셨습니다.".

태어날 수 없는 생명이 될 뻔한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1917 년 11월 14일(음력 9월30일) 오전 11시경이었다.

"삽작문을 들어서는 데 울음소리가 들리더군요. 아버지와 함께 방 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혼자 아기를 씻어 옆에 뉘어 놓고 당신도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아기가 새빨갛고 꼬물꼬물 하던 것이 예쁘게 보였다고 기억이 납니다.".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 맨 끝에 자리한 허름한 초가집 삽작문에는 그 날 붉은 고추와 숯을 끼운 새끼줄이 내 걸렸다. 박정희가 배냇생명을 마감하고 태어난 이후에도 난관은 이어 졌다.

"어머니는 젖꼭지가 말라붙어서 정희는 모유 맛을 모르고 자라났 습니다.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 같은 것을 숟가락으로 떠 먹였습니다. 그게 우유 대용이었지요. 변비가 생겨 혼이 난 적도 있 었지요.".

박재희의 이 말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들 은희만에게 한 박귀희의 생전 술회이다.

"딸을 낳은 뒤에 산후조리를 하고 친정에 갔더니 정희가 태어났더구나. 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아 내가 정희에게 젖을 물려주었단다. 시집에서 나와 낙동강을 배로 건너서 30분만 걸으면 친정에 도착할 수가 있어 나는 젖을 먹여주려고 자주 상모리에 갔었지.".

다시 박재희의 증언.

"정희가 두 살때, 아직 기어다닐 적인데 어머니가 정희를 큰 형님 (장남 동희의 아내)에게 맡겨 놓고 출타를 하셨어요. 형님은 바느질 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정희가 기어다니다가 문지방 아래로 굴러 떨어졌어요. 그 아래로는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정희는 벌건 화로에 처 박히면서 한 바퀴 굴렀어요.

시뻘건 숯을 온 몸에 뒤집어 쓰고 말았지요. 머리카락과 눈썹이 다 탔어요. 형님과 나는 정희의 얼굴에서 숯을 털어내고 입 속에 들 어간 숯을 끄집어 내는 데 정신이 팔려 양쪽 저고리의 소매에 불이 붙어 타 들어가는 것을 뒤늦게 알았어요. 저고리를 찢다시피 하여 불 을 껐는데 양쪽 팔뚝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황토를 물 에 짓이겨 상처에다 바르고는 베 조각으로 감아 놓았어요. 화기가 빠 지고 한 달만에 겨우 딱지가 앉았는데, 그때의 화상 흉터는 정희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어 소매가 짧은 옷을 잘 입지 않았지요. 이 사건 뒤에 보얗던 정희가 까무잡잡하게 되더군요."

 

젊은 날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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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하숙생활

박정희 교사는 학교 바로 밑에 있는 김순아(金順牙)라고 하는 아주머니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는 남편을 잃고 임창발(林昌發)이라는 아들하나를 데리고 하숙을 치며 사는 여인인데 인정이 많고 성격은 남자처럼 호탕한 편이었다. 박 교사가 하숙에 든 다음 달에 문경군청의 농회(農會)기사인 허동식(許東植)이 하숙생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집에서 하숙을 하다보니 친하게 지냈고 퇴근 후면 술친구가 되었다. 당시의 생활에 대하여 허동식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왔다. 박 교사의 첫인상은 꾀죄죄했는데 눈빛만은 빛나고 다부진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곧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매일 집에서 술을 마신 것 같다. 술마신 것이 기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걸리를 동이로 받아와서 쪽박을 띄워놓고 허연 배추속과 된장을 안주 삼아 밤새도록 마셔댔다. 하숙집 주인도 가끔 끼어들고 했는데 박정희는 평소에 말이 없다가 술만 한 잔 들어가면<왜놈들><왜놈들>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순신(李舜臣)이나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노래는<황성옛터>가 십팔번이고 방학 때도 집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한 줄은 전혀 몰랐다. 집안 이야기는 도통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스파이크를 갖고 다니며 애지중지했고 아침 6시에는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어김없이 나팔을 불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이 나팔소리가 들리면 문경사람들은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하고 일어날 정도였다. 그때 박 교사가 특별히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술만퍼마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박 교사한테는 꼼짝 못하고 생선을 사면 그에게 몸통을 주고 나한테는 꼬리만 준다고 내가 핀잔을 주기도 했다. 당시 문경군청 서기로 있던 이동년(李東寧)도 가끔 어울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박 교사는 누구보다도 대일감정(對日感情)이 좋지 않았다. 말끝마다<왜놈들>이 튀어나왔으며 의식적으로 일본말을 회피하는 눈치가 역연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그 새끼 때려 죽이려다가 놔주었다. 왜놈이면 다여!"하면서 아리마(有馬)교장을 패주고 와서는 씩씩거리는 것을 보았다. 임창발(林昌發)은 박 교사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러나 때로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도록 호되게 꾸짖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친동기간이나 다름없이 허물없이 지냈다. 그래서 박 교사는 만주군관학교 시절에도 휴가 때는 문경하숙집에 들려 오래도록 묵어갔다. 그러므로 1969년에 옛 하숙집 아주머니였던 김순아가 죽었을 때 박대통령은 임창발에게 친필 위로편지를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30년 전 문경 재직시에 피몽(被蒙)한 갖가지 후의를 다시 추억하게 됩니다. 문경선(聞慶線)개통식에 참석하려다가 급한 용무가 있어서 불참했는데, 모친께서도 오래간 만에 나를 만났으면 하고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편지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었다. 옛날의 은인을 잊지 않으면서도 쓸데없는 은혜를 베풀지는 않았고, 아무리 바쁜 중이라도 정중한 인사만은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다.


20세의 젊은교사 박정희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리하여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갓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월급45원을 받는 선생님이 되어 사회의 첫출발을 하게 되었으니 집안에서는 무엇보다도 가난을 좀 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고 구미 일대에서는<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교육은 인격을 완성해 가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①튼튼한 몸 ②밝은 지식 ③아름다운 마음씨를 길러 줘야 한다는 것은 박정희가<교육학>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박정희 교사는 본래 운동하기를 좋아했다. 체조에는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육시간에는 더욱 흥미 났다. 달리기, 철봉, 뜀틀, 멀리뛰기, 맨손체조 등을 위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씨름, 기마전, 축구 등 시합도 시키고 체육훈련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그가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 몇 달 뒤부터는 가끔 아버지가 찾아왔다. 늙고 병든 아버지로서 첫째 자식이 보고 싶기도 했고 둘째 술좋아 하는분이므로 용돈이 궁하기도 하였으며 셋째 장가를 가고도 제 처를 돌보지 않는 자식을 타이르기 위해서였다. 박 교사는 그때 월급 45원을 받으면 하숙비8원, 가난한 집 아이들의 월사금으로 2~3원(1인당1원씩 2~3명)을 지출했다. 그리고 본인의 용돈으로 약10원을 쓰고 나머지는 상모리 집으로 송금을 했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온 데는 세 번째가 가장 큰 이유이다. 하기 싫다는 결혼을 억지로 시켜 놓았더니 제 식구를 데리고 가서 살림할 생각은 꿈에도 없는 것 같고, 하숙집에만 틀어박혀 집에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끔 아들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박정희는 아내가 더욱 싫어지기만하여 여름방학 때나 겨울방학 때도 아내가 있는 상모리 집에는 가지 않고 밖에서만 얼씬거렸다. 그러다가 교사로 부임한 지 1년 만인 1938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당시 아버지의 병은 깊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따로 살림을 내어 오손도손 살기를 바랬지만 그 소망은 이룩되지 않았다. 한 번은 아버지로부터 송금(送金)은 필요 없으니 너의 처와 동거(同居)하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편지가 온 적도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박정희의 마음도 착잡하였으나 당시로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젊고 패기 만만했으며 반골정신이 농후했던 박정희 교사는 나날이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은근히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 "학생 여러분!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20세기의 후반기가 된다. 우리는 남을 이길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하면서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제자 이영태(李永泰)의 증언이다. 그는 사범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수석 졸업


박정희가 군인이 되려고 했던 기본적 동기는 무엇보다도 '긴 칼을 차고 말을 달리며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군 인이 되어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의 힘을 비축하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총구의 힘을 이용하여 독립이 나 국가개조를 하려는 생각의 씨앗은 아마도 만주군관학교의 연병장 에서 그 최초의 싹을 틔웠을 것이다. 군대를 단순히 전쟁수단으로 보 지 않고 정치의 수단으로 보게되는 쪽으로의 시각 변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가 딛고 있었던 만주국이 우선 일제 관동군의 작품이 아니었던가. 관동군 작전참모로서 만주사변을 기획하였던 이 시하라간지 같은 청년장교들에 대한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 던 때였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5학년 때 일어났던 1936년의 2·26사 건은 그에게 중요한 화두를 제공해 주었다.

이소베, 안도, 다케시마 같은 30대 초반의 가난한 농촌출신 대위 들이 주동이 되었던 이 거사는 그 동기가 군국주의적 책동과는 성격 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대륙 침략정책에 희생되고 있던 농촌의 현실 을 농민 출신 부하 사병들의 비참한 경험담을 통하여 알게 된 이 청 년장교들은 천황에 직접 호소하여 이른바 '소화유신'을 단행함으로써 관료화된 군상층부를 숙청하고 사회적 모순을 일거에 해결한다는 구 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군 내외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도쿄의 요 충지를 점거하였으나 거사 초반에 사이토 내무대신(조선총독 역임), 와타나베 육군교육총감, 다카하시 대장대신 등 요인들을 죽이고 스즈 키 시종무관을 중상에 빠뜨림으로써 천황의 노여움을 샀다. 그들은 도쿄 근방의 부대에서 동원한 1천5백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천황이 '반도'라고 규정하자 자살하거나 투항해버렸다.

2·26사건을 주동한 장교들은 만주사변을 주동한 엘리트 참모들과 는 달리 농민출신 사병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애환을 동감 했던 일선부대의 장교들이었다. 이런 사건의 성격은 가난한 농민출신 의 장교후보생인 박정희의 주의를 끌 만한 것이었다. 더구나 만주군 관학교에는 2·26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밀려나서 온 장교들이 교관이 나 구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침략적 군국주의와는 성격이 다소 다른 아시아주의자의 성향을 갖고 있어 민족차별 의식이 덜했다 (2·26주모자들은 만주사변의 주모자 이시하라 간지를 암살 대상자 명단에 넣어놓고 있었다). 박정희가 좋아했던 만주군관학교의 중대장 간노히로시와 일본 육사의 사카키 구대장이 그런 장교들이었다. 이런 장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도 박정희는 '국가개조의 수단으로서 총구 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을 것이다.

군대, 권력, 개혁이 하나의 화두로서 그의 가슴 속 깊숙이 자리잡 으면서 그는 더욱 과묵해졌다.

간노히로시 소교(소령)는 2·26사건에 가담했다가 파면된 뒤 만주 군 장교로 넘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인 생도들에게 관심이 많았 다. 어느날 1기생 방원철 최창윤 강재순을 자신의 관사로 초청했다. 점심을 대접하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너희들 조선독립을 원하지? 앞으로 독립운동을 열심으로 하게. 그러나 지금은 적당한 시기가 아니야.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 때 독립운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해.".

박정희의 동기생 이한림(1군사령관과 건설부장관 역임)은 '또렷한 특색을 지닌 박정희 생도'에 대해서 이런 요지의 증언을 남겼다(회고 록 '세기의 격랑').

'조그마한 체구이지만 어깨를 딱 벌리고 당당하게 걷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결심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 사이는 혈우라고 할 만했다. 특히 나에게 감명을 준 것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그 불굴의 정신이었다.

동기생 이병주는 만날 때마다 나를 혼돈시켰다. 자신은 무신론자 라고 하다가 끝에 가면 공산주의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는 체질적으 로 공산주의에 젖어 있었다. 나는 이병주에 대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되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가끔 그와 어울리며 그의 말을 반박하 지 않는 태도를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만계와 일계의 교관이었던 오다카 가쓰에(뒤에 일본 사관전자센 터 사무장)는 1941년 가을 종합연습 때의 박정희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다카 교관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계속되는 행군훈 련때 소대장이었고 박정희는 그 아래 분대장이었다. 오다카 교관은 박정희에게 진지공격 명령을 내리곤 했는데 명령을 받아 실천하는 자 세에 기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성실함이 느껴졌다. 투지 를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사나이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동남아 시아로 쾌속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남방작전이었다.

이미지 전체보기1942년 3월 23일 박정희 등 2기생은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했다. 이날의 졸업식 기사는 우등상을 받는 박정희의 사진과 함께 만주 일보에 실려 있다. 이날 군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졸업식에 부의황 제는 참석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우치안부대신과 우시 종무관이 참석했다. 만주군관학교 교장 나구모(남운) 중장의 상황보고에 이어 열병식과 생도대표의 강연이 있었다. 일계 우등생인 오카미 고야마 두 학생이 강연을 했다.

우 시종무관이 전달한 우등상장을 받은 5명의 명단에 오카미, 고 야마 두 일본생도와 함께 다카키 마사오, 즉 박정희(선계)와 유장 두 만주계 생도의 이름이 들어 있다. 누가 1등인지 이 기사는 밝히지 않고 있다. 박정희의 동기생들 중 생존해 있는 두 사람 이한림과 김 묵은 "박정희가 2백40명 만계 전체에서 수석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박정희의 이름이 두 만주계 생도보다도 먼저 나오고 수상자 사진도 박정희가 대표로 받는 모습이라 두 동기생의 증언이 사실로 보여진다. 일본계의 수석은 아마도 강연을 한 두 사람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몇달뒤 고향에 들러 누님 박재희에게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는데 나 를 축하해주는 가족이 곁에 없어 눈물이 날뻔 했다"고 말했다. 구미 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뒤 대구사범에서 꼴찌로 떨어졌던 박정희 는 다소 늦은 나이에 다시 1등으로 복귀했다.

수년의 방황 끝에 정열을 쏟아부을 천직을 확실하게 붙들었다는 징표였다

 

 

첫 아내 김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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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봄방학 때 선산으로 내려가 4월1일에 세 살 아래인 열일 곱 처녀 김호남과 결혼식을 올렸다. 김호남은 선산군 도개면에 사는 선 산 김씨 김세호-이말렬부부 사이에서 난 4남매 가운데 큰딸이었다. 김 씨의 외가가 상모리 아랫 동네에서 살았는데 박성빈에게 김호남을 중매 했던 것이다. 김호남은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던 2년제 간이학교를 졸 업한,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처녀였다. 박성빈이 막내 정희의 결혼 이 야기를 꺼냈을 때 장남 동희와 상희는 반대했다.

앓고 있던 박성빈은 생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것을 꼭 보아야겠다고 우겼다. 박상희는 동생 이 졸업하여 교사로 취직을 했을 때 결혼을 시켜도 늦지 않다고 아버지 를 달랬으나 황소고집인 박성빈은 듣지 않고 화만 냈다. 일방적으로 혼인날짜까지 받아버렸다. 박정희는 펄펄 뛰었다. 혼인날짜는 다가오는 데 박정희가 집에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박상희가 대구로 올라가서 박정희를 달랬다. 상희형에게 잡혀오다시피하여 내려온 박정 희는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결혼식 날에 달아날 궁리'까지 했다('이 락선비망록'). 5학년 신학기가 시작되는 날 내키지 않은 결혼식을 올린 박정희는 아내를 상모리 오막살이에 데려다 놓고는 달아나다시피 대구로 올라왔다.

1937년11월24일(음력10월22일) 김호남은 큰 딸 재옥을 낳았다. 박정희는 딸을 본 뒤에도 아내에게 냉정했다. 아버지가 강권하여 시킨 결혼이었던 데다가 역시 2년제 간이학교 출신인 아내와는 문 화적인 격차가 있었다. 박정희는 방학 때 고향에 들러도 아내와 같은 방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보통학교 동기인 이준상(작고),장 월상의 집에 자는 일이 많았다. 이준상의 어머니와 박정희의 어머 니는 친한 사이였다. 이준상의 동생 이일상(67)에 따르면 두 어머 니들이 박정희 부부 문제로 걱정을 하다가 하루는 박정희를 강제 로 아내의 방에 밀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두 어머니가 밤새도록 문앞 섬돌에 앉아 보초를 섰다 고 한다.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큰 아들 재석은 작은 삼촌이 큰 삼 촌에게 혼이 나는 것을 보았다. 여름방학 때 문경에서 구미로 온 박정희는 친구들과 놀러다니기만 했다. 박상희는 구미역전 뒤에 있던 자신의 집으로 동생을 불렀다.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6척장신인 그는 작은 동생을 달랑 들어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문고리를 잠그어버리는 것이었다. 박재석은 겁이 나서 마당에 서 있었다. 김호남도 달려 왔다. 방안에서 노성과 매질소리가 동시에 들려 왔다.

"니는 임마 뭐하는 놈이고. 재수씨가 재옥이를 혼자서 키우면 서 저 고생하고 있는데 모처럼 와서는 한 방에도 안자고 어디로 돌아다니노. 월급을 45원이나 받는다는데 그건 다 어디에 썼노.".

김호남은 남편이 맞아죽는 줄 알고는 문에 매달려 울면서 사정 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다음날 박정희는 사라져버렸다. 문 경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이즈음 박상희는 지방언론인의 신분 으로 사업에도 성공을 하여 집을 세 채 샀다. 그 중 한 채를 어머 니에게 주어 며느리 김호남과 함께 살도록 했다.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이 1938년9월4일에 68세로 사망했기 때문에 백남의는 외로 운 며느리와 함께 따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특별한 감상을 남긴 적이 없 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아버지에 대 하여는 평소에 좀 차게 느껴 졌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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