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생활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 선배 목사님께서 저에게 목사에게는 3가지(설교, 이사, 죽음) 준비가 항상 필요하다는 권면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현대교회의 목회 현실의 여러 문제점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천국으로 이사하신 선배 목사님의 권면하신 말씀을 회상해봅니다.

첫째는 설교 준비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설교 준비를 깨달음을 준 것은 15년간 남서울중앙교회 부목사 사표 후 서울대현교회를 개척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개척 후 4년 동안 부흥회를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즉 부흥회란 말 그대로 교회를 부흥 시키는 부흥회입니다. 개척 시무하는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것이 저의 마음에서 허락하지 아니 했습니다.

남서울중앙교회(피종진목사시무) 15동안 부교육자 생활은 주일 1번 설교하고 수천교회 부흥회 집회만 다녔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를 하면서 한국교회 목사님들께서는 한 주간의 공식적인 설교만 11번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 설교 7번, 주일날 오전, 밤 설교 2번, 수요일 밤 설교 1번, 금요설교1번, 그러므로 설교가 많은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잠을 자면서 설교를 들어도 3년 정도는 기억한다고 하고, 예화 같은 설교는 5년까지 기억한다고 합니다.  

불교의 승려들은 설법에 부담을 갖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불자들은 존경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가 예화를 들면 성경에 없는 설교를 한다고 하고, 성경강해 설교만 하면 어렵고 딱딱하다고 하고, 은혜롭게 하면 신비주의로 미신적이라고 하고, 학문적인 것을 소개하면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하고, 이런 것 없이 하면 무식하게 설교한다고 하고, 노트를 보고 설교를 하면 은혜가 없다하고, 원고 없이 하면 즉흥으로 설교하는 목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예불과 시식의 의례하는 염불만 한 번 외우면 평생을 승려생활 할 수 있습니다. 불자들은 스님이 염불하면 염불하는 것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사 갈 준비라는 것입니다.

선배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꼭 목사님이 좋다고 청빙한 교인이 목사 이사 가게 하는데 제일 앞장선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에 의하면 목사가 너무 젊으면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고, 목사가 머리가 희면 너무 늙어서 희망이 없다하고, 목사가 자녀가 3명 이상이면 무절제하게 많이 나서 교육비가 많이 들어간다고 하고, 목사가 자녀가 없으면 무슨 저주나 받은 것 같이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성가대에 앉으면 사모가 너무 설친다고 하고, 부자 집에 심방가면 가난한 사람 무시하는 돈만 아는 목사라고 하고, 가난한 집에 가면 인기운동 한다고 하고. 목사가 과감하고 단호하면 독재한다고 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절충하면 무능한 목사라고 하고, 성도들의 잘못을 책망하면 사랑 없고 냉정하다고 하고, 헌금이 부족하면 목사가 밥값도 못한다고 하고, 일 처리를 잘하면 수단꾼이라 하고, 일 처리를 잘 못하면 무능력하다고 합니다.

목회자가 교회직무도 감당하기 힘든데 자기들이 못하는 세상 모든 일들까지 처리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가 무너지면 목회자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온지 3년만 지나면 여러 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말도 갈아 타봐야지”, “신도 바꾸어 신어 봐야지", “머슴도 바꾸어 봐야지"하고 목회자를 쫓아낸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는 언제나 이사 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국 교회집회 인도 하면서 선배 목사님께서 왜 이사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 교회에서 이사 문제로 세상법정까지 가면서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웬지 쓸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사 문제는 성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목회자에게도 있다고 봅니다. 유임(평생목회)한지 얼마 되지도 아니 했는데도 더 좋은 교회가 있으면 주저 하지 않고 이사를 가고 있는 것이 현실 목회 현장입니다. 또한 이사를 함으로서 교회가 평안을 가져 올수 있는데 이사 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는 모습이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개종한 목사로서 승려생활을 회상해보면 불자들이 승려를 절에서 “염불 못 했어”, “설법 못 했어”하며 내쫓았다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불교 종단에서 주지 임명 때문에 승려들끼리 싸움은 있어도 불자들이 주지 승려를 내어 보낸다는 것은 한국 불교사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승려 생활에서는 이사 갈 준비는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는 죽음 준비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죽음으로 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남으로 나그네 인생길이 시작되어 한 평생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로는 육적인 죽음-일반적 죽음으로 육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영혼이 잠시 육에 붙어살았던 몸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요 11:11~14) 둘째로는 영적인 죽음-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범죄로 영적 죽음이 생겼습니다(엡 2:1) 그러므로 사람이 창조된 이후 하나님이 엘리야처럼 직접 데려가셔서 죽음을 피한 사람은 있어도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빈부귀천을 떠나 만민 앞에 유일하게 평등한 법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죽음(저승)보다 죽음이 없는 세상(이승)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임종을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잔다(고전15;20)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은 이별이 아닌 긴 수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성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부활체에 대해서 세세하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몸은 썩어 없어지는 몸이 아니며(고전15:42), 다시는 죽지 않는(눅20:36), 완전히 변화된[고전15;52], 신령한 몸(고전15:44),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부활체는 이 세상처럼 육체적 삶이 아니라 영혼을 중심으로 한 영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도의 부활은 최후 심판의 교리와 바로 연결됩니다. 최후 심판은 곧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기독교에서 구원을 받은 자의 마지막 표상인 천국과는 참으로 다른 세계인 열반(무생 무사)의 세계는 존재가 없으면서 존재가 있는 것으로 말하는 점에서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진정한 실재성이란 모든 것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유전의 원리에 의하여 모든 현상 세계는 어디로 가나 생사의 고통으로 충만하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생사가 반복 되는 고해와 같은 사바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적정(생사가 없는 무, 공의 존재)의 세계로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바울은“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 하였으니 주님 계신 곳에 들어가는 기쁨이 그렇게도 영광스럽고 즐거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 그 이후의 삶이 기쁘고 즐거운 나라이기에 바울은 그 집에 가기를 심히 원하였던 것입니다.

나그네 삶음을 베드로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하였으니 세상에 사는 동안 삼욕(물질, 이성, 감투)의 죄 짓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종교나 기독교나 성직자에게 있어 삼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건들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재생목사 (서울대현교회)

출처: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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