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1690


거짓의 영, 아르뱅주의(Arvinism)를 분별하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굳이 살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직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것은 윤리의 문제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위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위기의 중심에는 윤리 실종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윤리 실종의 주범이 개신교 구원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원에 관한 복된 소식이 살인 면허로 타락해 버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밀양'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사실 '밀양'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도덕적인 질문을 넘어서 매우 근본적이고 심오한 신학적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밀양'은 오늘날 개신교의 구원론이 봉착해 있는 심각한 딜레마를 정확히 폭로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자신의 두 아이를 한강에 빠뜨려 죽인 아이들 아빠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앵커는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물었다. 살인범은 살길이 막막해서 그랬다고 답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되는 답변이었다. 앵커는 그럼 왜 같이 죽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이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앵커는 기독교인이라면 살인은 해도 괜찮으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살인범은 더욱 기가 막힌 답변을 한다. "(살인)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허무 개그가 아니다. 이건 9년 전 겨울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다. 우리는 이 엽기적인 인터뷰에서 기독교 구원론이 진짜로 살인 면허로 전락한 실상을 보게 된다. 물론 이 경우는 다소 극단적이기도 하고 또 살인범이 정신질환도 앓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사례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논리 속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 (살인)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크리스천이 이 살인범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쉽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살인범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용서받은 자라고 생각하나 보다. 그리고 그가 받은 구원, 혹은 죄 사함은 살인죄에 의해서 상실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런 유의 살인 면허가 한국교회 내에서 공공연히 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칼뱅주의 논쟁을 촉발시킨 전병욱 목사 건도 마찬가지다. 전 목사나 그가 개척한 교회로 모인 무리들은 전 목사의 범죄가 해결되었다는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들도 그 살인범과 같은 논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전 목사가 행한 죄가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별로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악행의 전모가 드러나지도 않았고, 피해자가 몇 명이며, 그들이 겪은 충격과 상처가 얼마나 큰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다. 또한 전 목사는 한 번도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한 적도 없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보상을 하지도 않았다. 피해자도 충분한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 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보는 모양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복음을 살인 면허로 전락시킨 또 하나의 명백한 사례를 보게 된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복음을 살인 면허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붙들고 있는 확신이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그런 황당하고 기이한 확신을 얻게 된 것일까? 모르긴 해도 그건 분명 통속적이고, 저급한 신학이 제공하는 확신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신학은 무엇일까? 칼뱅주의일까, 아니면 아르미니우스주의일까?

필자가 볼 때 둘 다 아니다. 앞글서 필자는 칼뱅주의가 되었든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되었든 그 두 체계 내의 논리를 충실히 따른다면 윤리적 실패를 정당화하는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살인 면허를 발급해 준 신학의 정체는 무엇인가?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아마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편의적으로 조합시켜서 만든 혼합물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칼미니즘(Calminism) 아니면 아르뱅주의(Arvinism)쯤 될 것이다. 그런데 크레이그 블룸버그(Craig Blomberg) 교수가 벌써 칼미니즘이라는 말을 다소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아르뱅주의라고 이름 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며, 그러한 타락을 정당화하고 있는 개신교 구원론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최악의 조합, 곧 아르뱅주의이다. 아르뱅주의라는 신학이 있는가? 물론 그런 신학은 없다. 누구도 그런 신학을 정리해서 발표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르뱅주의는 한국교회 저변에 상당히 뚜렷하고 잘 정리된 형태로 유포되어 있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는 아르뱅주의를 앞에서와 같이 5가지 원리에 따라 정리해 보겠다.

1) 타락에 대해 :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 인간이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을 무효화한다는 데까지 진지하게 나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타락에 관해서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중간 정도 된다.

2) 선택에 대해 : 나도 알지 못하는 때에 나를 위해 구원을 준비하시고, 나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이중 예정하셨다는 지점까지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는다. 선택에 관해서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중간 정도 된다고 봐야 한다.

3) 속죄에 대해 : 속죄에 대해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차별 없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4) 은총에 대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을 선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 주셨다. 이제 남은 건 인간의 선택이다.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 그대가 선택하라. 이들이 인간의 반응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시라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구원 초청이나 영접 기도가 가능하다.

5) 견인에 대해 :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견인에 있어서는 칼뱅주의식 견인 교리를 확실히 붙든다. 하나님의 구원 손길은 마치 로마인의 악수와도 비슷하다. 내가 손을 놓아도 하나님은 내 손을 놓지 않는 악수다. 로마서 8장 37~39절을 읽어보라. 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의 구원을 앗아 갈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상이 거칠게 묘사해 본 아르뱅주의의 스케치다. 보시면 알겠지만 이 신학의 특징은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나의 연약함을 다 받아 주시고, 나의 죄도 다 용서해 주시고… 하여간에 나의 복지가 최고의 존재 목표인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분이며, 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결국,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만들고 하나님의 은총을 값싼 은총으로 변질시킨다.

아르뱅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편의주의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나름대로 치열한 논리적, 신학적, 성서해석학적, 윤리적 고민의 산물이다. 두 신학은 오랜 사유와 피 튀기는 논쟁으로 엄격하게 사고하고, 성서에 충실하며,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 완성된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뱅주의는 실용적 목적으로 상식과 자신의 감성에 기초해서 마음에 드는 것들만을 편리하게 조합해 만든 것이다. 성서에서 아무 구절이나 마음에 맞는 구절이 있으면 가져다 인용하고,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도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 버렸다. 논리적으로나 성서적으로 '그럴듯함'이라는 기준만 통과하면 그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여 버리는 것이다. 지독한 편의주의의 산물, 이것이 아르뱅주의다.

이러한 편의주의는 당연히 반지성주의적 특성을 띄고 있다. 그것은 진지한 사유를 결여하고 있다. 편의주의가 초래하는 논리적 모순 같은 것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명백한 논리적 오류임에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건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한다. 어차피 신학으로, 논리로, 교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십자가의 보혈!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논리적인 것은 적그리스도적인 것이다. 해서 아르뱅주의자들은 지성을 공격하는 대범함마저 보인다. 사고하기를 멈추라! 사고는 먹물들의 허영이요, 책상 신학자들의 지적 유희다. 앉아서 책 읽을 시간 있으면 성경이나 한 줄 더 읽어라. 복음은 단순한 것이다. 자, 단순한 복음을 믿어라. 명백한 진리 안에 거하라. 토론하고, 생각하고, 논쟁할 시간 있으면 나가서 한 영혼이라도 복음을 전하라. 편의주의, 감성주의, 행동주의, 자기중심주의… 바로 이런 것들이 아르뱅주의 신학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힘이다.

아르뱅주의의 교리적 특징을 들자면 아르미니우스주의식 '구원의 확신'과 칼뱅주의식 '성도의 견인'을 제멋대로 결합해 버렸다는 데 있다. 자신의 구원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가르침과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가르침의 결합은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을 초래한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살인 면허로 전락시키는 범죄 행위다. 생각해 보라.

가. '나는 구원받았다.'
나. '어떠한 상황에도 나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의 결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는지 말이다. 그야말로 천하무적 구원론이 아닌가? 이러한 아르뱅주의는 먼저 기독교 신앙에서 긴장을 제거해 버린다. 자끄 엘륄의 말대로 기독교 신앙은 변증법적 긴장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내용들이 있다. 예컨대 확실과 불확실성, 이미 받은 구원과 아직 완성되지 못한 구원,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은총과 행위, 복음과 율법 등. 루터는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변증법적 긴장을 '용서받은 죄인(simul justus er peccator)'이라는 근사한 표현으로 잘 압축해서 보여 주었다. 루터를 오해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용서를 받기는 했으나 본성상 죄인이었다는 사실, 즉 모순된 자기 실존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

앞글에서 필자가 밝혔던 것처럼 (서로 다른 논리적 장치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역시 이러한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칼뱅주의는 예정의 신비라는 구멍이 성도의 견인 교리와 변증법적 긴장을 이루고 있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원의 확신이 배교 가능성과 함께 긴장을 이룬다. 그런데 아르뱅주의는 바로 이 긴장을 제거해 버렸다. 루터 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용서'에만 방점을 찍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담대하게 죄를 지으라"는 루터의 역설적 복음 선포가 진짜로 죄 지어도 된다는 식의 범죄 허가증이 되어 버리고 만다.

긴장이 사라진 기독교 신앙은 나태와 방종을 향한 고속도로를 만들어 낸다. 그 고속도로의 종착지는 이름 하여 '무율법주의'다. 아르뱅주의는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실 것이고,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는 식의 거짓된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죄 짓기에 담대하게 만든다. 물론 아르뱅주의자들도 소위 '성화'에 대해서 들어 보기는 했다. 하지만 성화는 시간적으로 차후의 문제며, 나아가 그것은 필수라기보다는 선택의 문제라고 여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 앞에서 누가 완전히 성화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결국 도찐개찐이다. 우리는 성화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다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묵상해야 한다. 정말로 성화가 필요하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나를 성화시키시겠지. 그러니 성화는 일단은 신경 쓰지 말라.

구원의 확신과 성도의 견인의 결합을 우리는 구원파의 구원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구원파의 구원론은 이 글에서 필자가 아르뱅주의라고 부르는 것과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구원파가 구원에 대해서는 아르뱅주의보다 훨씬 더 진지하다는 것이고, 그들은 교리보다는 '모종의 종교적 체험'을 무척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구원파는 기본적으로 내가 나의 구원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신앙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신앙을 동시에 붙잡고 있다는 점에서 아르뱅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

그 때문에 구원파도 긴장의 제거와 무율법주의라는 특징을 동시에 드러낸다. 구원파에서는 모종의 종교 체험의 순간에, 즉 자신의 죄가 눈처럼 하얗게 씻어지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그 어떤 순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모두 제거되는 것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신자는 바로 그 순간에 단 한 번의 회개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회개하게 된다. 하여 구원파는 한 번 회개한 이후 다시 회개하는 것을 불신앙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건 아직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한 번 회개한 죄를 또 회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들은 묻는다. 구원파는 한마디로 회개 기도 없는 기독교며, 복음을 살인 면허로 바꿔 버린 기독교다.

문제는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아르뱅주의가 내용상으로는 구원파와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아르뱅주의에 물든 한국교회는 허황된 약속을 남발하고 있다.

가. 형제/자매님은 구원받았습니다.
나. 하나님께서 형제/자매님의 구원을 영원히 지키실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만든 거짓 복음은 요한이 말한 거짓의 영이고,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요한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거짓말하는 자가 누군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요한은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열매로 영을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유의 가르침은 성서가 일관되게 가르쳐 주는 바다. 침례 요한은 자신에게 침례 받으러 나오는 유대인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눅 3:8)"고 했고,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0~21)"고 하셨다. 바울은 복음을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 8:4)"고 설명했으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 2:17)"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서는 기독교 구원과 선한 열매 사이의 그 어떠한 분리도 결코 가르친 바가 없다. 물론 2000년 신학의 역사가 말해 주듯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죄 용서의 복음과 선한 열매를 맺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하지만 금은 반짝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선한 열매를 맺는다 해서 다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진리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해서 우리는 참영과 거짓 영을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원리에 기초해서 구원의 확신과 성도의 견인을 결합시켜 탐욕의 복음을 만들어 낸 아르뱅주의는 교회를 더럽히고, 신자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거짓 영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이런 아르뱅주의가 한국교회에 판을 치게 된 것일까?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인 면허로 만들어 왔던 역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와 성전을 살인 면허로 만들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침례 요한은 침례를 범죄 허가증으로 여기는 유대인들을 탄핵했으며, 예수께서는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당대 유대인들을 위선자라 책망하셨다. 또 바울과 베드로는 자유를 빙자한 무율법주의자들을 비난했고,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은 요한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은밀하게 받아들인 버가모교회를 책망했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릇된 신학과 전통으로 면죄부 같은 실제 살인 면허를 발급했으며, 본회퍼의 말대로 "대담하게 죄를 지으라"는 루터의 말을 오해한 루터주의자들 역시 복음을 범죄 허가증으로 바꾸어 버렸다. 즉 우리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색욕거리로 바꾸고, 복음을 살인 면허로 바꾸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기회를 봐서 주인 몰래 밭에 가라지 씨를 뿌리는 기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옳다! 아르뱅주의는 사탄이 은밀하게 가라지의 씨를 뿌려 맺은 악한 열매요, 죄악 된 인간 본성이 완연하게 그 열매를 맺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것이 영 분별의 원칙이다.

필자가 추정컨대 아르뱅주의의 씨는 1970년대 이후 미국식 복음주의가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한국교회에 뿌려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1970년대는 미국식 신복음주의가 한국에 소개되어 들어오던 때였다. 사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미국식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하지만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신학적으로 칼뱅주의, 그것도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가 초기 한국 선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칼뱅주의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칼뱅주의 전통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해 주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그런데 1970년대를 전후로 빌리 그래함식 복음주의가 한국에 직수입되면서 이러한 전통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학생 선교 운동 역시 빌리 그래함식 복음주의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해 주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 아닌 '십자가의 복음'의 강조다. 70년대를 전후로 한국에 직수입된 미국식 신복음주의는 구원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두고,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자신이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빌리 그래함은 침례교 출신으로 복음 전도에 있어서 다분히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복음 전도 집회 말미에 '결단의 시간'을 가지고 구원 초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또한 4영리로 대표되는 학생 선교 단체의 복음 전도 역시 '영접 기도'로 마감된다. 이 역시 아르미니우스 신학 체계 내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복음주의의 가르침은 칼뱅주의 전통에서 신앙생활을 해 왔던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칼뱅주의 전통 안에서 자신의 영혼의 구원 문제를 별로 많이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신자들에게 이것은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신복음주의는 구원에 대한 실제적 체험을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70년대를 전후로 신복음주의가 한국교회에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큰 이유였다.

이후 이러한 형태의 신복음주의는 두 가지 루트로 한국교회에 파고든다. 하나는 수련회, 전도 집회, 찬양 집회, 선교 대회 같은 집회의 형태다. 참석자들은 주로 청소년들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집회에서는 집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말미에 자주 초청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점차 초청(calling)을 하나의 문화처럼 여기게 된다. 다른 하나는 소위 제자 훈련이라는 형태로 지역 교회 속으로 파고든 것을 들 수 있다. 지역 교회에서는 점차 지성화되고, 계층적으로 중산층으로 변화되고 있는 당시의 교회 고객들을 교회로 모셔 들여서 그들에게 맞는 콘텐츠를 제공해 주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제자 훈련 프로그램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아울러서 이러한 제자 훈련 프로그램은 교회 성장이라는 목회자의 실제적인 필요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전부는 아니겠지만, 제자 훈련을 시행했던 다수 교회는 구원의 확신을 매우 비중 있게 가르치곤 했다.

한마디로 1970년대를 전후로 한국에 수입된 미국식 신복음주의는 일종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원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거나 다루더라도 확신 있는 약속을 해 주지 못했던 칼뱅주의 전통에 신선한 충격을 가하며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하지만 앞글에서도 살폈듯이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잘 어울리기 어려운 논리 체계다. 그러나 1970년대를 전후로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의 실용적, 편의주의적 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필자는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주의, 혹은 복음주의자들의 고질병, 즉 지성적 태만이 부른 재앙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1970년대를 전후로 한국 내에 아르미니우스주의식 구원의 확신이 광범위하게 가르쳐지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검토 작업 없이 실용적이고, 편의주의적 차원에서 이를 무분별하게 수입함으로써 한국교회에는 아르뱅주의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아르뱅주의라 해서 기존의 신자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할 만한 통계 수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 '밀양'이 잘 보여 주듯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은 아르뱅주의의 공로가 분명하다. 복음으로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고, 성서로 자신의 죄를 아무렇지도 않은 양 변명하는 후안무치는 아르뱅주의에서 논리적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다.

필자가 새삼스럽게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관한 글을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영분별의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사실 꽤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신학적으로는 자신을 칼뱅주의라 소개하면서 실천적으로는 아르미니우스적 매뉴얼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다. 물론 그 반대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를 더럽히고, 한국교회 신자들을 사탄에게 내주게 만드는 거짓된 영을 분별하고, 이를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자와 신학자의, 혹은 기독 지성인의 과업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전 목사 건으로 촉발된 칼뱅주의 논쟁을 보면서 황당함을 넘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목사는 한국교회의 차세대 지도자로 여겨졌으며, 수많은 신자와 목사 후보생의 멘토 노릇을 해 왔다. 그런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범죄를 자기 교회 신자에게 버젓이 자행했다. 그런데도 그와 삼일교회는 그런 죄에 대해서 전혀 모범이 될 만한 조치를 보여 주지 못했다. 복음은 죄를 지어도 회복될 수 있는 은총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인데 전 목사와 삼일교회는 그 은총의 길을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전 목사나 교회나 상식적인 수준의 조치마저 외면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소위 '멘붕' 상태로 몰아갔다. 사태의 진상은 충분히 드러나지도 않았고, 가해자의 회개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피해자에 대한 배려와 회복, 위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저 여론에 밀려 전 목사는 교회를 그만두고,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전 목사를 사임시켰다. 그 뒤로도 이어지는 실망의 연속….

그렇게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고작 17개월 만에 그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교회로 신자들이 몰려간다는 것이다. 다시 멘붕이다. 이 시점에서 교계 책임 있는 중진들의 반응이 나올 법도 했다. 물론 소수의 양식 있는 목회자들의 움직임이 포착되기는 했으나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던 중 김동호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전 목사의 개척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페이스북은 칼뱅주의와 예정론 논쟁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게 무슨 코미딘가?

필자의 판단으로도 김동호 목사님의 칼뱅주의 발언은 다소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사료된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이 그 같은 칼뱅주의 논쟁을 할 시점인가? 진짜로 논쟁이 필요한 사안은 필자가 여기서 아르뱅주의라고 불렀던 그것이 아닌가? 대체 어째서 한국교회를 오염시키고 신자들의 타락을 조장하는 신학적 오류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전 목사의 개척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소신 있게 내놓은 김동호 목사님의 한마디 말에 대해 그토록 열띤 논쟁을 벌인단 말인가. 한국교회가 아래로부터 붕괴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을 지키면서 자신의 신학적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토록 열정을 불살라도 된단 말인가? 이렇게 불공평하게 열정을 배분해도 되는 것인가?

필자는 이 시점에서 전선을 분명하게 다시 짜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아니다(필자는 차후에 기회가 주어질 때 이 두 신학에 대한 소견을 내놓을 계획이다). 우리의 적은 혈과 육이 아니라 거짓 영과 공중 권세 잡은 자다. 도무지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울 줄 모르는 뻔뻔스러움과 버젓함, 그것을 방조하고 조장하는 거짓 영. 이것이 우리가 분별하여 색출하고 탄핵해야 하는 우리의 적이 아닌가.

한국교회여, 거짓의 영, 아르뱅주의를 대적하라!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기다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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