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쓰여진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음영이 중요하다.그림자로 인해 입체적으로 보이는 미와 불가사의를 놓쳐서는 안된다"
 
그에게는 그에게 중요한 과학적인 발견들을해게 했던 날카로운 눈과 빠른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의 생각들을 결코 출판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들을 좋아하고, 전쟁을 경멸했던 친절한 채식주의자이었다. 그래도 그는 치명적인 무기들을 발명하기 위해 군엔지니어로서 움직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 중의 1명이었다. 그래도 그는 소수의 완료되었던 그림들만을 남겼다
당시 종교적 이유로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도 그의 인체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아주 정교 그리고 사람의 몸에 혈액이 흐른다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유럽인이다.
그의 연구결과는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19세기말에 들어서 주목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기 시작했고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있다.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전 분야에 걸친 그의 지칠줄 모르는 탐색과 광범위한 업적은 당대의 특징인 '全人(L'uomo universale)의 최고 전형이라 하겠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피렌체 근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빈치에서 온 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변호사와 농촌여인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는 14살쯤에 베로키오(Andrea Verrocchio)의 제자로 들어가 화업을 시작했고, 3-4년 후인 1470년경엔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처음으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세례> 그림 가운데 좌단의 천사가 실로 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 붓을 버렸다고 하는 일화는 이 화실에 있었던 무렵의 일이다. 사실 베로키오는 그 후 조각에 전념하였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완성하지 못한 채 밀라노에 갔으며 거기서 거의 17년을 머물게 된다. 루도비코 스포르자(Ludovico Sforza)의 초청으로 밀라노에 가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엔지니어 역할이다. 움직이는 다리를 설계하고, 대포나 전쟁무기를 고안했으며, 건축설계도 하였다. 그가 최초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실제로 제작된 것은 많지 않지만 그는 물리적인 이치를 적용하여 도구를 만드는데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있는 동안 제작한 그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의 화업에서 빼 놓지 못할 작품들이다. 그 중 하나가 <동굴의 성모>이며 다른 하나는 <최후의 만찬>이다. 밀라노에 도착하자 성프란체스코성당의 제단화 <동굴의 성모>를 시작했으며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동굴의 어스럼으로 부터 나타난다. 수증기를 품은 대기가 그들을 감싸고 그 형태에 보드라운 베일을 씌우고 있다. 이 엷은 안개를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동굴의 성모>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 소장. 2 점의 서로 다른 버전이 전해진다. 1483년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가 주문하여 완성한 것은 루브르 소장의 작품이며, 이것을 후에 프랑스의 루이12세에게 선물하면서 다시 그 자리를 위해 그린 것이 런던의 대영박물관작품이라고 연구되었다.
<동방박사의 경배> 나 <동굴의 성모>는 독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초기르네상스와 뚜렷하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12년 후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 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모나리자>는 <동굴의 성모>에서 이미 주목한 미묘한 스푸마토가 이 회화에서 완성을 보였다. 형태가 극히 엷고 섬세한 겉칠의 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화면 전체가 부드러운 빛으로 빛나고 있다.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만년에 이르러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 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등 다방면에 이르며,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회화론등이 많이 남아 있다.

 미술을 통하여 자연을 탐구 : 사물과 보는 이 사이엔 공기가 있으며, 자연의 관찰자 레오나르도는 이 공기의 존재를 우리에게 인식시켜줌.
인물의 제스춰와 표정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고 많은 드로잉을 보면 실제 인물의 행동을 관찰한 후 글로 써서 이론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바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탐구의 과정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천재 : 지적 호기심은 철저한 관찰과 과학적인 논리에 근거한 방법으로 발휘.
레오나르도는 공간에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기 위하여 미리 정확한 원근법의 스케치를 하고 이를 확대하여 패널에 옮긴 후 그 위에 비례에 맞게 인물을 배치.


스푸마토와 대기원근법을 창안 :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윤곽에 해당하는 부분을 미묘하게 문질러 맞은편으로 계속 이어지는 느낌을 주고자했다.
평생 완성시킨 회화는 10점 내외로 독특한 회화적 공간을 표현하고 있음.인간은 공기를 통해 사물을 본다는 현실을 새삼 직시, 그중에서도 색채의 변화를 포착. 질감포착. 원근감포착 

그림자효과 추구 : 그는 사물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은 음영 때문이라고 생각함. 그의 작품에서 그림자는 어떤 화가의 작품보다 색이 진하다.
 
<그리스도의 세례>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 부분>
레오나르도와 그의 스승 베로키오가 합작하여 그린 사실적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좌단의 천사가 실로 빼어난 것이기에 그의 스승이 붓을 버리고 조각에만 전념했다는 일화가 있다.
천사가 예수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천사와 예수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그 옆의 천사가 다른 천사를 향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세례 장면을 강조하려는 배려로 보인다. 뒤로 멀리 뻗어 있는 요단강은 물로 세례를 받아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얀 비둘기는 하늘에서 강림하고 있으며, 암벽의 돌들은 신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스승 베로키오가 그린 예수 모습은 색채나 윤곽선 묘사가 분명한데 비해 레오나르도가 그린 부분은 다소 어슴프레 하다. 천사의 머리카락이나 눈, 또는 옷 부분을 보면 잔 선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경계를 흐릿하게 하였다.

<수태고지> 1472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가브리엘이 나사렛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니 그대가 한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십시오.'라고 전하는 장면이다. 그 때 책을 읽고 있던 마리아는 놀라면서 왼손을 치켜들고, 천사는 순결의 상징으로 백합을 들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안개나 구름. 비. 연기까지도 밀도가 다르게 표현하고, 생물의 움직임까지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서 딱딱한 선 원근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기 원근법을 개발했다. 이 그림에서 먼 산의 흐릿한 윤곽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많은 화가들이 이 주제로 그림을 그렸으나 다빈치의 작품만큼 훌륭한 작품은 드물 것이다
 

<지네브라 데 벤치> 1474-76년. 목판, 유채 워싱턴, 국립화랑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메리고 데 벤치의 딸로써 1474년 루이지 니콜리니와 결혼하였다. 뛰어난 미모와 직접 시를 쓸 정도로 교양이 풍부하여 로마 교황청에 까지도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미모가 소문이 났었다. 배경의 침엽수가 이탈리아어로 지네브로라하며 토스카나 방언으로 여성명사가 되면서 지네브라가 된다

<암굴의 성모> 1483년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동굴의 어스럼으로 부터 나타난다. 수증기를 품은 대기가 그들을 감싸고 그 형태에 보드라운 베일을 씌우고 있다. 이 엷은 안개를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1510년, 패널에 유채, 168 x 130cm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화는 15점의 많지 않은 작품이 현존하는데 비해, 소묘는 상당수가 남아 있다. 1510년경 밀라노에서 그려진 이 그림도 많은 밑그림과 데생을 거친 작품이다. 현재는 이 작품의 소묘 단 한 점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어머니 성 안나의 무릎에 마리아를 그리는 소재는 중세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성모는 성 안나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 두 팔을 뻗쳐 아기 예수를 끌어안고 있다. 아기 예수는 어린양을 꼭 붙잡은 채 성모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성 안나는 두 모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성 안나의 시선이 성모의 머리 부분을 통과하여 아기 예수의 눈과 정확하게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구도는 마사치오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공기 원근법 연구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공기 원근법으로 인해 풍경은 안개가 흐르는 듯 부드럽고 신비롭게 채색되어 있다. 다 빈치는 윤곽선으로 형태를 나타냈던 이전 화가들과는 달리 풍부한 명암법(키아로스큐로)으로 사실적인 입체감을 나타냈다. 윤곽선을 흐릿하게 하고, 어두운 색에서 밝은 색으로 미묘하게 변해 가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은 형태를 부드럽게 드러내면서 주위와 융화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명암법은 세 사람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통일체로 비춰지게 한다. 이 작품과 내셔널 갤러리의 소묘를 비교하면, 어린 세례 요한이 양으로 바뀌었으며 소묘에서는 서로 마주 보았던 성모와 성 안나의 시선 또한 수정되었다. 성 안나가 성모를 아래로 굽어봄으로써, 그림은 수평 구도에서 수직 구조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성 안나의 시선의 변화는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의 모성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섬세한 요소들에 힘입어 작품은 종교적 메시지보다는 가족의 화목한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자화상>  1512년. 붉은쵸크 이탈리아 토리노 왕립도서관

최근 이탈리아의 다빈치 전문가 카를로 페드레티 교수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모델이 다빈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 신 프로메테우스를 그려넣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영국 윈저성에 소장된 초상화의 얼굴이 다빈치라고 주장하였다.그 근거로 윈저성 초상화는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그림위에 다빈치의 이름과 1515년이라는 제작연도까지 있다는 것이다.

<스케치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비례연구 >

마돈나리타 밀라노 왕궁 여인의 초상 흰 족제비와 여인 베노아의 마돈나
 
<모나리자> 1503∼06년, 패널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77 x 53cm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이상의 최초의 고전적 표현이라 한다. 중앙의 인물 그리스도 뒤쪽에 소실점이 있어 공간감과 원근감이 잘 나타난다.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에 구애받는 것이 싫어 템페라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벽에 잘 붙지 않아 훼손이 심하다.
"모나(Mona)"는 이탈리아어로 "부인"을 칭하는 말로써, 작품의 제목은 <리자 부인>정도가 될 듯하다. 피렌체의 은행가 자놀리 델 지오콘도(Zanoli del Giocondo)의 부인, 리자 지오콘도(Lisa Giocondo)가 이 작품의 모델로 알려지고 있다. 1479년생인그녀는 음악을 아주 좋아했던 관계로 레오나르도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할 동안 가수와 연주자를 동원하여 그녀의 미묘한 미소를 항상 유지시켰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델의 이름을 따서 <라 지오콘다(La Gioconda)>, 혹은 불어로 <라 죠콘드(La Joconde)>로 소개되기도 한다. 모나리자는 3/4 측면 자세로 약간 몸을 비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대 로마 이래 초상화의 기본적인 자세는 측면이었다. 15세기 중엽 플랑드르 화가들이 3/4 측면 자세를 시도하긴 하였지만, 다음 세대의 초상화 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다 빈치의 <모나 리자>이다. 명확하지 않은 윤곽선, 은은하고 부드러운 색채를 겹겹이 덧발라 형태는 대기 속에 부드럽게 녹아 있다. 다 빈치가 창안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은 형태와 형태가 겹쳐지고 융화되는 부드러운 화면을 만들었다. 모나리자의 생기 있는 눈가와 입매는 흐릿한 그림자로 처리되어 조금씩 계속 변하는 미소는 이 작품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냈다. 다 빈치는 이 작품에서 얀 반 아이크가 시도하였던 공기 원근법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멀리 보이는 구불구불한 길, 다리, 계곡, 암벽들은 점차 푸르스름한 빛으로 채색되어 모델이 있는 곳으로부터 상당한 거리감을 나타낸다. 풍경은 왼쪽 지평선이 약간 낮게 깔려 있고, 모나리자의 얼굴도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모나 리자>는 보는 이의 시점이 바뀜에 따라 그림의 일부분이 크게 보이거나 다른 쪽이 작게 보이는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다 빈치는 1503년 밀라노에서 그리기 시작한 이 작품을 자신이 프랑스 궁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미완성이다. 이 작품은 그의 사후에 프랑수아 1세의 컬렉션에 소장되었으며, 1804년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미술사가 노성두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이 그림을 <라 조콘다>라고 부른다. 모나는 마돈나, 리자는 엘리자벳을 줄인 말이다. 리자는 1479년 피렌체 남쪽 시골에서 태어나 열여섯 나이로 열아홉 연상의 홀아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와 결혼한다. 이때부터 조콘다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참금은 겨우 170플로린. 삼십 년 뒤 리자의 조카딸 카산드라가 시집가면서 챙겨간 1400플로린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다. 그러고 보면 피렌체에서 비단 장사로 큰 돈을 번 남편은 어린 리자의 미모에 단단히 반했던 모양이다. 리자의 초상 그림을 당대 최고의 화가 레오나르도에게 부탁한 것도 아내 사랑이 지극하지 않고서야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1500년대 피렌체 비단상인의 부인

<모나 리자>는 미소가 일품이다. 만약 보험설계사한테 미소의 가치를 매겨보라고 맡기면 클레오파트라의 콧대나 양귀비의 발바닥보다 더 후하게 쳐줄지 모른다.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도 그 덕에 한 몫 알뜰히 챙기고 있으니까. 미소 이야기는 1550년 바사리가 레오나르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처음 썼다.

“물기 밴 두 눈의 광채는 흡사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가에 더없이 섬세한 연보랏빛 그림자가 드리웠고, 믿을 수 없이 정교한 붓으로 완성된 속눈썹도 기가 막힐 따름이다. 눈썹은 보일 듯 말 듯 솜털부터 시작해서 점차 짙어지는 터럭들이 하나하나 솟아 나와 이마와 눈 사이에 융기한 눈썹뼈의 흐름을 따라 새겨졌는데, 살아 있는 자연이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코의 생김새와 발그레한 콧구멍은 살아서 숨쉬는 듯하다. 입술 가장자리는 알 듯 모를 듯 부풀어올랐고, 바로 여기서 입술의 붉은 색조와 뺨의 살색조가 만난다. 그래서 이 여성은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피와 살로 빚어낸 창조물처럼 보인다. 목우물에서 맥박이 느껴진다…얼굴 표정에서 사랑스런 미소가 피어나는데, 이 미소는 지상보다는 천상에 속한 것 같다. 어찌나 생생한지 사람들은 그림을 보고 한결같이 입을 모아 예술의 기적이 탄생했노라고 말한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그후 크게 유명세를 타게 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유명해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1858년 테오필 고티에는 사랑스런 천상의 미소는 커녕 “뱀처럼 꼬여드는 입술이 도도하고 우아하고 달콤한 미소를 뿌리며 남성을 제압하고 쪼그라들게 만든다”고 탄식했고, 1873년 월터 페이터는 한 술 더 떠서 “병든 관능의 고통이 영혼 속에 녹아들어…무수한 죽음을 경험하고 무덤의 비밀을 품은 흡혈귀의 아름다움”이라고 몸서리쳤다. 이런 주장들은 <모나 리자>를 두고 레오나르도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여성으로 바꾸어 그리면서 입가에 비웃음을 흘린다고 보거나, 싸구려 창녀가 지어 보이는 음탕한 미소일 뿐이라고 얕잡아보는 입장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또 레오나르도가 어려서 헤어진 친모의 자애로운 미소를 떠올리며 리자의 초상에다 옛 추억을 투사했다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설명도 그리 딱 부러지지 않는다. 화가가 왜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뒤늦게 그리움이 사무쳐서 초상을 그렸을까 의아하기도 하고, 모델 없이 그린 사후 초상이 그토록 생생한 느낌을 뿜어낼 수 있을지도 미심쩍다. 이 모든 의문들은 그림에 작가 서명이 없고 주문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서 더욱 깊어졌다. 4년 넘게 붙들고 있던 초상화를 다 그린 다음에도 주문자한테 안 넘긴 까닭도 석연치 않다. 레오나르도는 뭐 하러 남의 안사람 얼굴 그림을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있었을까?

미술사학자들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놓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우선 바사리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나 리자> 연구는 바사리의 기록을 엉터리로 보고, `숨은 진실'을 밝히려는 쪽으로 치우쳤다. 바사리가 <모나 리자>를 본 적이 없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레오나르도가 죽었을 때 바사리는 겨우 여덟 살이었고, 커서도 퐁텐블로에는 간 적이 없으니 그곳에 걸린 실물 초상화를 뜯어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눈썹 없는 <모나 리자>의 눈썹 터럭이 볼만하다는 둥, 콧구멍이 발그레 숨을 쉰다는 둥, 꼭 제 눈으로 본 것처럼 써놓은 건 어림없는 흰소리라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꽉 다문 입술이 관행

이 문제는 1994년 프랑크 쵤너가 옛 기록들을 찾아내면서 해명되었다. 바사리가 예술가 전기자료를 수집하러 피렌체에 갔을 때 메디치 저택에 머물곤 했었는데, 리자가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고, 남편 프란체스코도 이전부터 메디치와 거래를 트고 자주 내왕했으며, 피렌체에 살고 있던 남편의 사촌 둘하고 바사리가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모나 리자>의 탄생을 설명할 일차 정보원에게 접근이 가능했다면 전기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의혹도 해소된 셈이다. 또 16세기초에는 유랑화가들이 많았다. 종교 개혁 이후 뒤숭숭하던 시기에 예술가들은 새로운 주문을 찾아서 알프스를 넘나들며 피렌체와 퐁텐블로를 오갔다. 그렇다면 누가 <모나 리자>를 보고 와서 바사리에게 얼마쯤 과장을 섞어가며 들려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바사리는 왜 하필 <모나 리자>의 미소에 주목했을까? 피렌체 시민 초상화들을 훑어보면 16세기까지 웃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우는 표정도 없다. 화가들은 한사코 진지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만 고집했다. 비탄과 희열의 표현은 성모나 성자들에게만 유보된 종교화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달랐다. 그는 영혼의 움직임을 포착할 줄 알았다. 붓 끝에 미소를 묻혀서 성과 속의 경계를 물렀다. 그의 붓이 미소를 머금고 백 년이 지난 뒤, 초상화 장르는 만면에 주름을 잡으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영혼을 빛내기 위해 더없이 수수하게

레오나르도는 <모나 리자>를 더없이 수수하게 그렸다. 검은 너울과 나무 의자를 빼고는 아무 장식도 덧붙이지 않았다. 심지어 왼손에 결혼반지도 빼고 그렸다. 화가는 그림에 착수하기 몇 해 전, 유랑 수사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에서 영혼의 덕목을 설교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자들은 미모를 뽐내지 말라. 추악할 따름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가?…경건한 이들의 내면에서 신성의 아름다움과 열기가 솟아나는 것을 보아라. 기도하는 이들의 얼굴에서 신성의 아름다움이 거울처럼 비추어 천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아라.”

피렌체 시인 단테도 영혼의 아름다움이 오직 눈과 입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영혼의 표정은 두 군데서 드러난다. 눈과 입이다…눈빛과 부드러운 미소는 보는 이의 눈길을 끌고 기쁨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눈과 입을 두고 육신의 건축에 거주하는 영혼의 창이라고 말한 비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너울을 쓴 여성일지라도 영혼은 눈과 입을 통해서 말하기 마련이다


-오카베 마사유키의 청소년을 위한 명화의 길잡이에서-

레오나르도의 위대함은 인간존재의 신비를 예술로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는 윤곽선이 없다. 그 대신 형태는 빛과 그림자의 대조, 즉 스푸마토 기법에 의해 그려졌다. 그것이 그녀의 입가에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또 전체적으로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공기를 통해 대상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형태와 색채는 서로 미묘하게 녹아들었으며, 분명한 경계선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이 환상적인 분위기는 단순히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사물을 보고 그것을 회화로 구현할 때, 어떤 기법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했던 레오나르도의 예술관이 화면에 반영된 결과이다.
 
<최후의 만찬> 1498년, 템페라, 460 x 880cm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

예수께서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셨다.(마태복음 26:21-28)

'최후의 만찬'은 같은 주제로 많은 작가들에 의해 그려졌었다. 그러나 다 빈치의 작품은 인물들의 배치와 성격 묘사가 뛰어다. 그리스도의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노니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는 말에 놀라는 12제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인물의 구성은 12제자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3명씩 4그룹으로 좌우에 배치하였다. 그리스도 왼편에 요한과 그에게 손을 대고 있는 베드로, 그들 사이에 유다가 어깨를 약간 뒤로 기대고 있다. 그리고 안드레,베드로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있는 야고보, 그 끝에는 바르롤로메오, 그리스 오른 편에는 작은 야고보,의심많은 토마,빌립보,그 다음은 성 마태,성 유다, 성 시몬이다.
공간 전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원근법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오른쪽 눈에 있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고안된 구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등뒤에 후광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1498년)    틴토레토(1592-94년)

레오나르도는 예수를 중앙에 놓고 12명의 제자를 식탁의 양쪽에 놓았으며, 마치 그들이 방의 한쪽에서 식사하고 있듯이 보이도록 하였다. 넓은 방의 양쪽 창문과 천장의 선들에 기하학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소실점이 주인공인 예수에게 모아지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된다. 반면에 틴토레토는 식탁을 대각선으로 놓았다. 주인공인 예수와 제자들보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더 크고 번잡스럽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선은 예수를 찾게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예수의 두광에 강한 빛을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화면 왼쪽에서 오는 은은한 광선을 적용하여서 모든 인물과 사물은 양감과 함께 중간 톤의 색채를 띄는데 반해, 틴토레토는 인물들의 뒤에 강한 등불을 놓아 인물들은 역광을 받아 어둡게 처리되었다. 결과적으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과학적인 공간묘사와 안정된 구도, 사실적인 인물묘사를 끌어내었고,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역동적인 구도와 인물의 순간적인 묘사, 그리고 사건의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전자는 르네상스양식을 후자는 매너리즘양식을 대표한다.

그림이 있는 방의 모습
만약 현장에서 이 벽화를 본다면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바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식당의 넓은 벽 위쪽을 가로지르는 실제 선은 그림 속의 창문 윗 선으로 이어진다. 실제공간과 그림 속의 공간은 하나인 셈이다. 식당에 있던 수도사들은 아마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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