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마! 그래도 괜찮아!

 
기독교인이라면 듣는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해.”
"원수도 사랑해야 해.” "빨리 용서해야 해.”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복을 받지 못해.”
“그래가지고 구원받지 못할 지도 몰라.”

상처가 미처 치유되기도 전에 들리는 이런 말들이 
또 다른 심리적 문제가 되는 것을 아십니까? 
신앙적 강요와 억압의 상처가 제2의 문제를 유발하여 
정신분열이 오는 경우도 있고 깊은 우울증과 불안증세로 
오는 것을 수없이 지켜보면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고말고요.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처럼 살아야지요. 
그렇게 살 수 있을 만큼 내면이 성숙하고 인격이 훌륭하다면 
조금쯤 흉내는 내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도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자주 넘어지고, 
자주 외로워하는 한 인간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위와 같이 권면하고 

조언인양 쉽게 말합니다. 누군가 우울하다고 하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면 다 해결됩니다. 성령충만하면 다 해결됩니다. 
새벽기도 다니세요’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이 말이 해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말이 또 다른 불안이 되고 

죄책감의 올가미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때로는 정답이 오답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향해, 그 당시 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려고 번득이는 눈초리로 팔을 높이 쳐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예수님이라면 10년도 100년도 기다려주실 것입니다. 

조급한 인간들은 잠시도 기다려주지 못하고 너무 쉽게 정죄하고 
너무 쉽게 비판합니다. 우리 중에 그 누가, 그 누구에게 비판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정말 비판받을 만한 잘못이나 연약함이 
정말 하나도 없습니까? 정말 없나요?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 바울 역시 성정이 불같고 다혈질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착하고 온유한 성품의 바나바와 극심하게 싸우고 헤어졌지요. 
그래서 그가 이렇게 외칩니다.

“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너무 정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바울처럼 더없이 훌륭한 분도 이러했는데, 하물며 우리일까요?

성폭행을 당한 20대의 자매가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 믿는 사람인데, 빨리 용서해야 될까요?”
제가 말했습니다.

“용서하지 마! 괜찮아!”

가해자에 대한 깊은 상처와 원한과 분노에 사무쳐 있는데, 

너무 성급하게 누군가가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해주라고
 조언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우울증이 왔다고 했습니다. 
내가 말해주자 그 자매의 눈이 희망으로 빛났습니다.

너무 쉽게 하는 정답보다는 이런 말이 치유적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았으면 합니다.

“괜찮아. 지금은 용서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네가 지금은 너무 아프다는 걸 알아. 기다려 줄게. 

언제까지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주고 용납해주고 치유되기를 기도해주면, 

반드시 가식적이지 않은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해줄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상처가 성장의 자원이 되어 더욱 인격이 성숙한 사람으로 
새롭게 서게 될 것입니다.

신앙적 잣대로 쉽게 판단하거나 조언하지 말아 주세요. 

그 사람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병들어가는 것을 당신이 알아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갈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태복음 18: 6)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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