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요구하는 사랑 참된 진리(드흐라프)

2) 요구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의 율법으로 요구하시는가?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정당한가?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한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여러 방면에서 거부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오직 주기만 하는 가장 숭고한 속성이 있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반대한다. 그들은 당장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13:1)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 가운데 자기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주셨다고 이해한다. 사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런 응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만일 인간적 사랑이 사랑의 응답을 요구하거나 주장할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러한 권리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우리는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사랑의 응답을 요구할 수 있다. 인간의 사랑 자체에는 그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러한 요구가 가능하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을 사랑의 패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종종 우리들 중에는 그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사랑도 아무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모든 것을 주는 사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요구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의 정당한 요구를 다시 분명하게 깨닫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 사랑 안에서 심지어 자신까지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신 만큼 또한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즉 우리의 전심을 요구하신다. 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자아-사랑이라는 것을 계시할 때 더욱 분명하여진다. 하나님은 자신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신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은 주고 요구하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정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 이러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세우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신을 다 주신 후 그 언약을 유지시키기 위해 사랑의 응답을 율법 조항으로 넣으셨다. 그 조항은 아담에게 명령으로 요구되었지만 그는 그 조항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담과는 다른 상황에서도 그 조항을 완벽하게 이루셨다. 이에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한때 언약을 통해 사람에게 하셨던 요구를 이루셨다.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언젠가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사랑과 순종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다.           

 

따라서 처음부터 우리의 삶은 사랑의 요구에 의해 얽매여 있었다. 지금 우리가 더 이상 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하여 그 명령의 권리나 요구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그 권리에 기초하여 서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요구는 언제나 타당하다. 만일 우리에게 그 요구에 응답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응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권리의 기준을 하나님의 위치와 작정에 두지 않고 인간의 능력 여하에 달려있게 하려는 것과 같다.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본성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으며 그 결정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말이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본성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정하셨다. 주관주의는 사람의 본성의 능력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의 기준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며 자가당착이다. 또한 역사주의는 인류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 권리도 비례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거짓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으면 황제라도 권리를 잃는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조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잃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에 따라 주권적인 결정을 통해 우리 삶에 그분의 사랑의 공의를 세우시고 그 관계를 통해 우리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에 각 사람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할 수 있었다. 지금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이는 과거 한때 인간이 무분별하고 주의없는 결정을 내린 결과이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지만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 그의 방자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의 존재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부조리한 상태는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불합리한 상태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려는 생각을 철저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합당한 요구를 함부로 바꾸려는 욕구가 사라질 것이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고의적인 불순종을 행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맞지만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이 부분은 이미 앞 과에서 다루었는데, 이러한 반대는 인류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우리가 모두 개인주의자로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각은 날 때부터 죄성으로 인하여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후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대해 개인주의적인 접근을 취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전적으로 부패하였을지라도 나의 생각만은 여전히 순수하고 건강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모두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람들과 분리된 상태로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아로부터 생각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내 스스로 내가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각은 처음부터 전부 잘못되어 간다. 이에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생각의 패턴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생각의 기능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그릇된 생각으로 형성된 죄악된 관점과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올바르게 되려면 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기 시작하며 인류 공동체의 위치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난관을 벗어나게 되면서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가졌던 이의를 내려놓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은 믿음을 통해 정화되어 하나님을 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리 문답의 답변에 동의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주지한 것처럼, 교리 문답의 답변은 죄성이 제시하는 질문을 육신의 차원에서 반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하나님의 계시로 죄성을 대면하여 그 논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은 아담 또는 우리라고 언급하지 않고 아담 안에서 공동 책임을 진 모든 인류를 포함하여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우리는 육신의 질문을 대할 때 교리 문답의 답변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 , 죄성에서 나오는 그러한 고의적 질문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취해야 한다.

 

사람의 책임은 마귀의 꾐에 빠졌다는 이유로 줄어들지 않는다. , 사람의 책임은 온갖 종류의 외부의 요소들을 겪게 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모든 영향은 우리를 죄로 유인할 수는 있지만 죄의 원인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다고 해도 그 자극을 범죄의 요인으로 삼을 수는 없다. 만일 외부의 자극을 범죄의 요인으로 여긴다면 인간은 그 어떤 책임도 부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로 유인하는 유혹과 범죄의 요인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둘을 혼동할 경우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리 문답은 마귀의 꾐을 말할 때 죄성이 사용하는 의도와 전혀 다른 의도로 언급한다. , 변명을 위해서 마귀의 꾐을 언급하지 않고 도리어 죄에 떨어진 범죄를 강력하게 조명하기 위해 언급한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여 마귀같은 존재에게 이끌리는 것을 허락한다! 그는 신성한 것보다 마귀적인 것을 선호한다. 사람은 신령한 것보다 마귀적인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겼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게 우리가 스스로 범죄하였음을 큰 소리로 고발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한 숨에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 마귀의 꾐에 빠지려고 마음을 활짝 열고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음을 보여준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인간의 죄성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육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그 답변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법적인 결정에 따른 선포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결정은 하나님 자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결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 결정하신 공의 앞에 항복하는 자세로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한 눈에 무의식적으로 비참과 구원을 보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내 대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좇아오는 것과 굴복시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를 거부하며 그 공의의 기준을 변경시키려고 할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요구 자체를 아는 것이 싫어서 고개를 돌리거나 그 요구를 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안다는 것과 동의한다는 것은 함께 있어야 하며 서로 상호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리과 공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권리와 공의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 역시 그 공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 공의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죄를 통한 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공의에 동의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공의의 충족을 발견한다. 그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온 맘으로 인정하게 된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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