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는다(에이든 토저)

 

진리를 체험으로!

지금 내가 당신에게 말하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짧고 단순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엡 5:18).

사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다. 만일 내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빌려다가 그대로 반복한다면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내가 발견하고 깨달은 것만을 이야기하겠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말은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극단적인 것도 아니고 광신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복음주의적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적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거론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믿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저 구석으로 밀어둔 진리를 다시 한복판으로 가져와 횃불처럼 높이 쳐들고 “이 진리를 단지 믿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이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만듭시다”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의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 충만한 백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단지 목회자나 선교사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미 앞에서 나는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나는 성령 충만과 관련된 네 개의 성경 본문을 결론 부분에서 더 언급할 것이다. 이런 방식이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본론에서 요점이 한 개 나오는 반면에, 결론에서는 요점이 네 개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이 설교학 전공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판단이다. 우리는 선한 신자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고?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 마나한 이야기를 왜 굳이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봐 분명히 말하건대, 마귀는 선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푸른 초장에 뱀이 있다고 겁을 주고 있다. 육신의 정욕을 따른 이상하고 섬뜩한 사람들과 마귀가 성령 충만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개념을 퍼뜨리기 때문에 우리는 겁을 집어먹고 초장에서 자꾸 멀어지고 있다. 성령 충만의 이야기만 나오면 “나 같은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어. 그것은 신앙이 뜨거운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낙심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님이 계시다. 만일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령님은 다시 태어남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시키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후 13:5).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령 충만의 정도가 다를 뿐이지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신다.

그런데 단순히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구속의 일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거기에는 우리의 성령 충만도 포함된다. 당신은 이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이 점에서는 당신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무슨 비정상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편견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충만의 상태에 있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비정상적 상태이다. 성령 충만이 왠지 섬뜩하고 이상한 것이라는 편견은 우리 머릿속에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려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확신하지 못하면 믿음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령 충만을 원하신다고 이미 선포하신 마당에 우리가 그분께 부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혹시 당신은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다른 것을 하지 말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령 충만에 관한 구절들을 찾아 묵상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믿고 평안을 느껴라.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려라.

성령님은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신다.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고통당한다면, 그것은 사탄 때문이거나 우리가 지나친 상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님은 악인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불안하게 하지 않으셨다. 신약성경을 보면 은혜를 사모하고 의에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럴 때 그분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아무리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화를 내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셨다. 그러나 자기의로 이미 배부른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거짓말쟁이들이 찾아왔을 때 그분은 언제나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다.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당신이 오직 하나님의 뜻만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의에 굶주린 사람들을 대하셨듯이 당신을 친절하게 대하실 것이다.

성령 충만을 갈망하라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내게 “토저 목사님, 지금 목사님은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갈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왜 목사님은 당연한 이야기를 자꾸 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갈망한다고?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성령 충만은 그저 머릿속을 스쳐가는 희망사항 정도일 뿐이다. 즉, 그들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거룩해진다. 마찬가지고 우리는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만큼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마 5:6) 배부른 자에게는 산해진미가 다 소용 없고,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지 않는가?

여러 세대 전에 아주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거 경건한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듣고 멀리서 젊은이들이 그에게 찾아오곤 했다.

어느 날 두 젊은 목회자가 먼 길을 걸어서 그에게 찾아왔다. 이 경건한 사람은 문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맞아 인사를 하면서 “그대들은 그대들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한 후 뒤로 돌아 문을 닫아버렸다. 두 젊은이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 후,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우리가 좋은 말을 들으려고 경건한 사람에게 갔는데, 그는 단지 ‘그대들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우리에게 잘 가라고 인사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이 말은 사방으로 퍼졌으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경건한 사람의 말은 매우 짧았지만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원한다’는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갈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원하되, 우리의 마음속에서 불이 날 정도로 갈망해야 한다.

기독교 경건 서적 작가들은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진정으로 갈망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였고, 어린양의 보혈로 죄의 장벽이 제거되었고,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령 충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께 순종하라

성령님은 곧 예수님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이시다. 예수님의 영도 마찬가지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이시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성령님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신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하신 동시에 당신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이 당신 안에 거하시기를 진정 원하시는가? 혹시 당신은 이 질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가?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당신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예수님의 영, 즉 성령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갈망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성령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셨을 때 그분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말씀은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왕좌 우편에 계신 ‘살아계신 말씀’ 곧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자아’에서 나오는 모든 죄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우리의 자애, 자기의 또는 방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만일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분은 우리가 회개하여 이런 것들을 버릴 때까지 우리를 징계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이런 것들과 동거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은 함께 나란히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서로를 가로지르며 상대를 잘라버린다. 이 과정에서 마찰과 적대와 갈등과 심지어 핍박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복되신 성령님은 세상의 편한 길을 철저히 반대하신다. 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성령님은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세상의 적대적 태도를 두려워하여 움츠러들지만, 성령님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셨던 예수님을 보라. 그분이 이 땅에서 살면서 활동하실 때 세상이 얼마나 그분을 반대하고 핍박했는가? 교회의 역사를 보라. 성령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려는 교회는 언제나 핍박을 받지 않았던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기독교를 세상에 잘 적응하는 종교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세상에 적응하려는 것은 십자가 때문에 당할지도 모르는 수모를 피하고자 함이 아닌가?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가 말씀의 빛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당신의 것을 내어 놓으라

성령님은 당신의 삶의 어떤 부분들을 바꾸기를 원하실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분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만일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당신에게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에게는 당신이 지극히 소중히 여기는 것을 당신에게서 거두어 가실 권리가 있다. 그분이 그 권리를 행사하실 때에 당신은 어느 정도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매를 들 때 자식이 어느 정도 상처를 입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이 당신을 연단하실 때마다 당신이 상처를 입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당신을 연단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고통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성령님이 당신을 대하실 때 그분은 당신에게 지극히 소중한 것들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 당신은 그것들이 무해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분이 보시기에는 매우 위험한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그분이 보시기에도 위험한 것이 아니고 진정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들을 다시 돌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내어놓으라고 명령하셨지만, 아브라함이 순종하였을 때 오히려 이삭을 돌려주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일하신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독침이 달려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독침을 제거한 후 돌려주실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신의 마음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독침이 달린 것을 가지고 있다가 찔려서 죽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당신의 안전에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은 독침을 제거하신 다음 그것을 돌려주시면서 “이제 내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당신에게 있는 것이 재물이든 야망이든 연인이든 재능이든 간에 그것들에는 독침이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빼앗아 독침을 제거한 후에 다시 돌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허락하시는 연단은 이런 독침 제거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독침 제거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미래를 이해 참아야 하듯이 연단도 참아야 한다. 그러면 연단의 아름다운 열매가 열릴 것이다.

세상을 따르지 말라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장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다. 과거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름답고 혈색 좋은 신부였으나, 지금의 교회는 쪼글쪼글한 늙은 걸인 같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거리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을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한 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말했다(행 3:6).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즉 ‘혼혈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의 성경적 원리 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열매를 맺고 승리의 삶을 살고 전도의 열매를 맺고 평안히 죽어서 그리스도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다고 믿는가?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모세는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렸다(출 33:15).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롬 7:18).


출처: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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