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5)

 

 

장대현교회 

 

 1893년 평양에 살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ㄱ 자 예배당은 1900년 건립된 것이다

 

 

 소래교회

1895년 기와 지붕의 한식교회 건물로 개축한 소래교회 (사진 상,중)



1884년 6월 29일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 (사진 하)


한국교회 초기의 자발적 전도자요, 권서인이었던 의주 출신

서상륜과 서경조 등 그의 가족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는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자발적 자전에 의한 복음의 토착, 수용사 였다.

곧 선교사 입국 이전에 한국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한국교회사(45)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2. 서울에서의 복음 전파

4) 승동교회 설립

‘모삼열’(牟三悅)로 불렸던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S. F. Moore)는 1892년 9월 19일 부인과 함께 제물포를 통하여 내한하였다. 그는 시카고 부근 그랜드 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9년 몬타나대학을 마치고, 맥코믹신학교에 입학하여 1892년 봄에 졸업했다. 대학시절부터 남다른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학교 근처 감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열렬하게 외쳤고, 신학교 시절에는 경찰서 유치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며 인간의 행복에 대해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그해 로즈 엘리(Rose Elly)와 결혼하여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가 되어 두 달 뒤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무어 선교사는 한국말을 채 익히기도 전인 1893년 서울 시내에 집을 마련하고 전도에 나섰다. 그는‘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정동 밖으로 나간 첫 번째 선교사였다. 자비로운 행동으로 한국인들 사이에 인목(仁牧)으로 불렸던 무어의 집이 있던 곳은 ‘미동’, 토박이말로 ‘곤당골’이었다.

1893년 봄 곤당골에 한옥을 구입하여 16명으로 시작한 집회 인원은 연말이 되어 43명으로 늘어났다. 무어는 곤당골교회 안에 학교도 설립했고, 개울 건너 구리개(銅峴, 을지로2가)에 있던 제중원에도 나가 전도하여 많은 교인을 얻었다. 제중원은 1885년 4월 재동에서 알렌이 시작하였으나, 1887년 구리개로 옮겨진 후 헤론, 빈튼에 이어 1893년부터 에비슨(O. R. Avison)이 맡아보았다. 뛰어난 의술로 고종의‘시의’(侍醫)가 되어 궁궐 출입도 하게 된 에비슨은 제중원을 선교 기지로 적극 활용하였다. 그 결과 제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들이 곤당골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런 식으로 치료받고 나온 교인 하나 때문에 곤당골교회에 큰 소란이 일었다.

그것은 관자골(貫子洞, 종로2가 관철동) 백정 마을에 살던 박성춘(朴成春) 때문이었다. 백정으로 태어나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이 한이 되었던 박성춘은 아들 ‘봉주리’만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저 가르쳐 준다’는 곤당골 예수교학당에 아들을 보냈다(아들은 후에 이름을 ‘박서양’으로 바꾸었고,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성춘이 돌림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그 사정을 알게 된 무어 목사가 에비슨을 데리고 관자골에 들어가 치료해 살려냈다. 그러자 박성춘은 선교사의 은혜에 감사하여 곤당골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때에 양반이 예배드리는 곳에 백정이 들어왔으니 조용할 리가 없었다. 양반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며 박성춘을 다른 교회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양반 쪽에서 타협안이 나왔는데 예배당 뒤쪽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박성춘을 거기 앉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어는 그것마저 거부했다.

결국 양반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길 건너 홍문석골(紅門洞, 지금의 삼각동)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따로 예배를 드렸다. 곤당골교회 설립 2년 만인 1895년의 일이었다. 이에 입장이 난처해진 박성춘은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수원까지 내려가 백정마을을 돌면서 ‘백정에게 인간 대접을 해 주는 종교가 들어왔다.’고 하면서 전도하여 곤당골교회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순식간에 양반 교회가 천민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백정은 조선시대 천민 계층을 일컫는 칠천역(七賤役, 광대, 무당, 기생, 갖바치, 고리장, 포졸, 백정) 중에서도 제일 아래 계급에 속했다. 다른 천민은 자신들 직업만 버리면 상인이 될 수 있었으나 백정은 자신의 직업을 버려도 여전히 백정이었고, 부모가 죽어도 상복을 입을 수 없었으며, 부녀자들은 비녀도 꽂아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비단옷 두루마기도 입을 수 없었으며 패랭이라는 테가 좁은 갓만을 쓰게 하여 상민과 식별하게 하였다. 그뿐
만 아니라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탈 수 없었으며 이름을 지을 때도 인(仁), 예(禮), 의(義)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짓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교회는 달랐다. 평생 들어보지 못했던 존댓말을 교회에서 처음 들었고, 양반·상놈 차별 없이 대하는 선교사들의 행위에 감격했다. 백정들에게 교회는 ‘인간 평등’을 체험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해방 공간이었다.

교회를 통해 해방을 체험한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에 나섰다. 그는 무어와 에비슨 등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 정책을 철폐할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정부에 냈다. 법적으로는 갑오개혁(1894년) 이후 신분 차별 규정이 없어졌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봉건적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그때에 그들은 ‘백정 해방’의 상징적인 조치로 ‘백정도 양반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입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95년 4월 백정들의 요구를 들어 주는 정부 칙령이 내렸다. 포고령이 내리던 날, 서울과 근교 백정들은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종일 종로 거리를 왔다 갔다 행진하였으며, 박성춘은 감격에 겨워 잠을 잘 때도 갓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일약 민중 지도자로 부각된 박성춘은 1898년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를 종로에서 개최할 때 정부 대표 및 양반·귀족들과 나란히 단상에 올라 백성 대표로 연설까지 하였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홍문석골 교인들이 무어를 찾아와 교회를 다시 합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분열 3년 만인 1898년 홍문석골에서 양반과 천민이 함께 ‘평등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덕수궁을 확장하려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동에 있던 선교부를 폐쇄하고 남대문 밖과 동대문 안 연못골(연지동), 두 곳에 선교 거점을 새로 조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04년 가을 제중원을 남대문 밖 복숭앗골(桃洞, 지금의 서울역 앞 세브란스빌딩 자리)에 옮겨 짓고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으로 바꾸면서 교회도 그리로 옮겼다. 이때 구리개 교인 대부분이 병원을 따라 남대문 밖 교회로 갔다. 그러나 박성춘을 비롯한 곤당골 출신 교인들은 선교부에서 새로 마련한 종로 예배 처소인 ‘절골’(寺洞, 지금의 인사동)로 옮겼다. 절골이란 동네 이름은 원각사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승려가 많다 해서 ‘승동’(僧洞)이라고 했다. 이 지역에 살던 양반들은 ‘僧’자를 싫어해‘承洞’이라 하였는데, 교인들은 1907년 승동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던 길선주의 충고를 따라 ‘勝洞’으로 표기하였다.

교회를 서울 한복판인 승동으로 옮긴 후 교인이 200명 수준에서 400명 수준으로 급증하였다. 교인이 늘었을 뿐 아니라 질도 달라졌다. 인근 양반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백정 교회’라는 오명(?)을 벗을 기회로 보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이미 교회 안에 다수 세력으로 자리잡은 천민 교인들과 새로 나온 양반 교인들 사이에 새로운 긴장관계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백정 출신으로 천민층을 대표하는 박성춘에게 어떤 직위를 수여하느냐에 있었다.

1908년 가을부터 양반 교인 일부가 재동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양반 출신 이원긍을 누르고 천민 출신 이명혁이 장로가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연동교회 교인들까지 합류하자 선교부도 양반 교회 설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해서 생겨난 것이 북촌의 안동교회이다.

1909년 안동교회가 설립되자 1908년 승동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되었던 이여한과 황기연을 비롯한 양반 교인들이 그리로 옮겨갔고, 승동교회에는 천민 출신 교인들과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만 남았다. 박성춘은 1911년 12월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5) 연동교회 설립

1893년 선교사 무어 목사는 서울시내 전도에 힘썼는데, 이때 김영옥과 천광실을 조사로 동반했고 전도인은 마영준과 이승두였다. 여기서 얻어진 신도들이 다음 해 연동교회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연동교회의 시작은 1894년 선교사 그라함 리(Graham Lee: 이길함) 목사와 서상륜 조사의 지도 하에 연못골, 지금의 연지동에 초가 한 채를 매수하여 예배 처소로 삼으면서부터였다. 1896년부터는 선교사 기포드(D. L. Gifford:기보) 목사가 연동교회를 돌보게 되었고, 교인의 증가로 선교부 내의 한 건물을 매입하여 예배 처소를 옮겼다. 연동교회가 조직을 갖추고 성장하기 시작한 때는 1900년 5월,
게일(James Scarth Gale) 목사가 연동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봉사하면서부터이다. 게일 목사는 캐나다 출신 선교사로서 1888년 12월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에는 캐나다 선교지였던 원주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게일은 원주지역에서 유명한 난봉꾼이요 도박꾼이며 일명 꼭지대장(지금의 건달)으로 알려진 고찬익을 만나서 성경책을 주게 되었다. 성경책을 받아든 고찬익은 말씀에 감동되어 게일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충성하다가 연동교회로 부임할 때 함께 왔다. 그가 불쌍하고 힘 없는 노인들의 짐을 짊어져다 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자 이 소문이 서울 장안에 퍼져서 당시 500명 교인이 1200명으로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1904년 연동교회에 당회가 조직되면서 천민 출신인 고찬익이 초대장로로 장립되었다. 이는 무어 선교사의 기독교 정신에 의한 계급타파와 기독교 윤리 구현의 선봉적 실천의 개가였다. 그 후 고찬익 장로가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식중독으로 소천하게 되어 연동교회장 1호로 장례를 치렀다.

1907년에는 천민출신이며 노름꾼 출신이었던 이명혁과 양반 이원긍을 후보로 투표한 결과 이명혁이 장로로 선출되어 장립되었고, 1909년에 3대 장로로 갖바치이며 광대 출신이었던 임공진이 선출되어 장립을 서두르자, 법무협판(법무부장관)이었던 이원긍과 함우택(함태영의 아버지) 등이 반기를 들고 100여 명의 성도를 이끌고 나가 묘동교회를 세웠다.

이때 함태영은 청년으로서 아버지의 부당성을 말하며 효를 중시하던 그 시대의 대의적 명분을 저버리고 연동교회에 남아 후에 제2대 위임 목사가 되어 연동교회를 시무하기도 하였다. 게일 목사는 교회는 사회적 전통보다 개인의 신앙적 본질과 결단을 중요시하며, 그래서 선교 방침은 ‘높고 귀한 데’있지 않고, ‘낮고 천한 데’있다고 하였다.

 

 

한국교회사(46)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2. 서울에서의 복음 전파

6) 여성 중심의 주일학교 시작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아펜젤러가 정동교회를 설립하여 조용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스크랜턴 여사도 열악한 환경과 싸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스크랜턴 여사가 한국에 와서 처음 느낀 것은‘이 나라의 가장 급속한 진보를 위해서는 여성과 소녀들이 꼭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여성들의 위치란 남성들에 의해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소외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여성들에게는 배움의 기회는 커녕 오직 가문을 계승할 아들을 낳는 의무만이 존재할 뿐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던 때였다. 이런 한국 여성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통해 자유의 기쁨을 찾아 주고 싶었던 것이 스크랜턴을 비롯한 여 선교사들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이런 때에 최성균의 아내의 회심과 세례는 다른 여인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 점점 더 여인들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여성들만의 집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888년 1월에는 이화학당에서 12명의 처녀(어린이)와 3명의 부인이 모인 가운데 주일학교가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남자들의 주일학교는 1888년 3월 11일에 시작되었다.

그 해 2월에는 스크랜턴 부인이 주일 밤마다 여자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해 가을에는 성경반의 학생 수가 35명으로 늘어났다.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글을 가르치고, 이름이 없는 여성들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그로 인해 한국여성들에게 있어 기독교의 복음은 획기적인 생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조선어가 서툰 스크랜턴 부인이 남자 매서인을 부인 성경반 성경교사로 세우자 부녀자들이 어찌 남의 남자를 볼 수 있겠느냐 하여 성경반에 오기를 꺼려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스크랜턴 여사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휘장을 쳐 서로 대면하지 않고 말소리만 들리게 하는 방법을 취했다. 교회 안에 남녀 좌석 사이에 휘장이나 벽을 세워 남녀를 구분하는 서구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 등장한 것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신분과 성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만드는 복음이 조선인들의 심성과 문화 속에 뿌리 내리기까지는 이와 같은 문화적 갈등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문화에 반(反)하는 복음의 전파 방법이 조선인의 전통을 파괴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면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다‘ㄱ’자 형태로 교회를 건축하여 한쪽에는 남자석, 다른 한쪽에는 여자석을 정하고 강대는 모서리에 설치하여 양쪽 다 설교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교회들이 생겨났다. 그 전형적인 교회가 평양의 장대현교회였다. 점차 그 같은 추세가 증가하면서 남석과 여석을 휘장이나 칸막이로 구분하는 교회들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1925년까지는 휘장이 완전히 걷혀지지는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선교사들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현안은 제사 문제였다. 게일은 원산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사 문제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결과 신자들 대다수가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처음부터 제사는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것으로 규정하여 제사를 금하고 전국 교회가 이를 지키도록 했다.

첩 문제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첩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이를 금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1895년 감리교 선교회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이것은 우리 감리교 연회에서 결의한 것인 바 어떠한 사람이든지 첩을 두는 것은 교회의 법과 규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비록 교회에 나오더라도 출교시킬 것이며, 또한 그러한 사람은 감리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장로교 선교회 역시 일본, 중국, 인도 등지의 선교사로부터 온 문서들을 참고하고 오랫동안 이 문제를 숙의한 결과 첩을 두는 것을 금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 후 장·감은 제사와 첩의 문제를 철저하게 금지하는 것을 선교회의 원칙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직분자들 중에서도 교회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선교회는 이 원칙을 준수했다.

장·감은 세례의 기준을 높여 일정 기간 신앙생활을 통해 신앙이 깊어진 이들을 대상으로 세례를 주었다. 감리교회에서는 세례 후에 바로 입교인으로 허락하지 않고 일정 기간을 거친 후에 입교인으로 받아 주었다. 그래서 감리교에는 교인이 입교인, 세례교인, 학습교인 그리고 평신도 등 4단계의 신앙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즈음부터 장로교회에서도 학습 제도를 신설하여 신입교인이 몇 달 동안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한 다음에 학습을 시행하고, 학습을 받은 후 일정 기간을 거친 후에야 세례를 주었다. 대개 6개월 동안 학습교인으로 있은 후 문답을 거쳐 세례를 베풀었다.

비록 더디기는 했지만 복음이 전래되면서 의식의 변화가 나타났고, 그와 함께 문화 변혁도 일어나고 있었다. 복음의 원칙이 제시되고, 갈등의 과정을 거쳐 그 원칙이 수용·정착되어 가기 시작했고, 자연히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한 잘못된 전통과 문화와 관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닿는 곳마다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었다.

 

 

한국교회사(4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2. 서울에서의 복음 전파

7) 순회 전도의 시작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복음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조용히 확장되어 나갔다. 2년간의 언어 습득과 정착기를 지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지방 순회 전도를 떠났다. 1887년 4월 13일 아펜젤러는 조선 세관에 근무하는 헌트(J. H. Hunt)를 대동하고 평안도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 고양, 장단, 미력, 파주, 임진강, 송도, 김천, 통천, 평산, 서흥, 봉산, 황주를 거쳐 23일에 평양에 이르는 순회 전도를 했다. 이들은 지방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무관심한 듯 해 보여서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기우임을 곧 알게 되었고, 아펜젤러는‘우리가 머무는 곳에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죄인들이 회개하는 그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펜젤러에게 평양의 첫 인상은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독립적으로 느껴졌다고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이전에 내가 보았던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독립적이고 덜 위축되어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활발하게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상점에는 많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성냥이나 물감, 옷감 등의 외국 제품들 외에도 한국에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런 상점들이 많이 있다. 오늘 아침(4월 24일 일요일 아침) 성벽 바깥에 있는 전신국에 가면서, 우리는 1마일쯤 중심도로를 따라 걸었는데, 여러 곡식들 - 콩, 기장, 보리, 옥수수 그리고 심지어 밀과 메밀 등 - 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밀은‘술’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나는 이렇게 풍부한 것에 놀라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농촌이 넓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곡식들이 잘 되어서 기쁘다.”고 하였다.

아펜젤러는 평양에서 장군(將軍)이라는 이씨가 2명의 첩을 끼고 앉아 노는‘탐관오리의 부패상’을 목도하고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람의 도덕 환경은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일으키시는 은혜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의 가슴에 닿는 길 외에는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길이 없다. 그들이 지금 이 세상 환경에 몰두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눈이 영적 필요에 따라 열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주님 어서 그날이 오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아펜젤러는 이 여행을 통해“사람들은 우리에게 친절했다. 가는 곳마다 대단한 관심을 보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때 평양 사람들이 거칠다고는 믿기 힘들다.”고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음을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첫 순회 전도를 통해 조선 사회의 부패상과 죄악의 만연으로 안타까워하면서도 이 민족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아펜젤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이 민족의 부패와 죄악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아픔은 방관자의 아픔이 아니라 결단과 실천을 전제한 아픔이었다. 1887년 4월 24일자 아펜젤러의 일기는“지금은 씨를 뿌릴 때다. 좋은 씨가 뿌려져서 풍부한 열매가 맺혀지게 하소서.”로 맺고 있다.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소원은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1887년 가을, 언더우드도 지방 순회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의 판단에 서울의 한복판에서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설립하고, 공개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상황이 개방되어 있다면, 지방에 대한 순회 전도여행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송도, 소래, 평양 그리고 의주로 첫 순회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 여행길에 가지고 간 의약품과 서적들을 나누어 주고, 돌아오는 길에 소래에서 비밀리에 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황해도 소래에 이르러 부유한 한 농부의 집에 4일간 머물면서 그 며칠 사이에, 수년간 다른 방법으로 한 것보다 더 한국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9명의 신자들이 마을 전체를 기독교 공동체로 이루어가고 있음도 확인했다. 그는 이 여행에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선교 상황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를 입수하여 돌아왔다. 즉 송도에는 10-12명의 세례 청원자가 있고 70명(혹은 더 많은 수)이 넘는 신도가 있으며, 평안도 혹은 의주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세례를 준비해 왔으며, 해주에는 더 많은 수의 신자가 있다는 소식도 접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가 지적한 것처럼 언더우드가‘경성으로부터 서북각도를 편람’한 이 전도여행은‘장래의 전도 요소와 중심지를 산정’하는 뜻 깊은 여행이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 언더우드는 첫 선교여행에서 경험한 것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소래에 도착하자 전체 마을이 나에게 경의를 표하기에 바빴습니다.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은 어떻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해줄까 하고 마음을 쓰느라 경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내가 기뻤던 것은 기꺼이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불렀던 여섯 명의 사람들을 발견했으며,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다시 혼자 작은 마을에 들어갔는데, 그때에 달려 나와서 두 손으로 나를 붙잡고 나를 환영했던 사람은 현재에는 목사로 시무하는 서경조 씨였습니다.”

언더우드는“이 여행을 시작할 때 약간은 두렵고 떨렸다.”고 고백했던 첫 선교여행을, 자신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순탄하게 마친 것이다.

 

 

한국교회사(4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3. 한국 초대 교회의 수난

1) 갑작스런 금교령

한국 초대 교회가 처음으로 당한 수난은 1888년 4월에 발표된 전도 금지령이었다. 1884년 선교사가 입국하기 시작한 이래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복음 전파는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1887년 한 해 동안 소래교회, 새문안교회, 정동교회를 창립하고, 첫 순회 전도를 실시하고 세례식도 거행하며,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토대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1888년 4월 28일에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조병식이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3국 공사에게 기독교 전교를 금하라는 조회문을 통보한 것이다. 이에 알렌이 입국한 이후부터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한국 정부를 자극할까 봐 매우 우려를 해오던 미국 공사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는 이 내용을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선교가 순조롭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 갑자기 금교령이 내려진 것이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이미 이 일이 있기 전 1887년 11월 27일 정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피어선에게 편지를 보내 "정부가 기독교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며 한국 선교의 장래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정부가 바뀌거나 아니면 더 안정될 때까지 선교사역의 진행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으며, 심지어 현재와 같이 생명과 재산의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은 무모한 짓"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금교령은 주로 천주교를 겨냥해 내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개신교만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개신교가 천주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천주교보다 개신교를 선호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개신교에 대해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금교령이 내려진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1887년에 천주교회에서 서울 시내의 고 지대(지금의 명동)에 대지를 비밀리에 큼직하게 매입해서 왕궁을 내려다볼 정도로 웅장한 대성당을 건축하는 데서 발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홍렬 교수는 그의 책‘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조선 정부의 말썽’과 건축 과정에서의‘조선 정부의 강렬한 반대와 물자의 결핍’정도로 일언하고 있으나, 사실은 고종이 그 성당 위치가 궁전보다 높기 때문에 왕실 존엄이 깎인다 해서 그 건축의 중단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불응한 천주교회의 불손이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왕실을 가장 불쾌하게 만든 것은 이 과정에서 보여 준 불란서 신부들의 오만한 태도였다. 왕실에서는 조약에 있어서도 서울이 개항지가 아니기 때문에 성당 건축을 무조건 반대할 수도 있었지만 시내 다른 터를 골라도 된다는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고종이 불란서 공사관을 통하여 성당 터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란서 신부들은 불란서 정부를 등에 업고 동시에‘동맹국 러시아의 훈수’를 받아 성당 건축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천주교는 그 자리가 자신들이 오랫동안 물색하여 온 성당 자리인 데다, 개신교가 선교열을 가속화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 선교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성전 건축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실의 요구를 천주교가 거절하자 사태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성당 건축 중단을 요구한 고종의 요구에 불응한 천주교의 불손이 급기야는 금교령으로 이어진 것이다. 금교령은 외국 공관뿐 아니라 국내 선교사들에게 적지않은 혼란을 초래했다. 고종의 금교령이 발표되자 미국 공사 휴 딘스모어는 정도 여행 중에 있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선교사에게 서한을 보냈다.

‘대군주 전하의 명령이라 하여 조선 외무부로부터 공한을 받았는데, 그 내용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 중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는 것을 조선 정부에서 알고 있다는 것과, 이 사실을 정부 당국에서는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 조약상 인정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한 것 등이 있다. 이러한 행동의 금지에 협조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므로 나는 주한 미국 공사로서 두 분은 조선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전파 및 종교 의식과 규례의 집행을 중지하도록 청하는 직무를 행사한다.’고 하였다.

이 전교 금지 칙령은‘어떤 장소에서 여하한 종류의 종교 교육이든 금’하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조건에 관계없이’‘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금지한 것’이었다.

1888년 봄, 아펜젤러와 함께 순회 전도여행을 하던 언더우드는 평양에 도착하여 금교령 소식을 듣게 되었고, 지방 전도 여행을 중단하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의 상황을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본래 이 칙령이 로마 가톨릭 교도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의 주의 사업에까지 지장이 있게 되었다고 이 소환 명령에 몹시 불쾌해 하였다. 한편으로 뭔가 이상한 낌새만 보이면 늘상 그러하듯이, 외국인 사회에서는 위기적인 긴장감이 팽배하였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문제가 그들의 무모한 지방 여행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의료 사업이나 교육 사업에만 몰두해야지, 공연히 전도 사업에 끼어들어 관리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중요한 위치를 위험스럽게 만든다든가, 그들을 곤경에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적인 원인은 금지된 자리에 성당을 세운 로마 가톨릭교인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학교 아침예배, 주일예배를 비롯한 일체의 한인들의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다. 시골에서는 정도가 더 심해 기독교 문헌들을 모두 불태우고 종교의식을 전폐시켜 과연 그곳에 이전에 선교 사업이 있었는가 의심할 정도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과연 한국에서의 선교 사업이 계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금교령이 내려진 이후 종교 활동 재기 문제를 놓고 장감 선교회 안에는 미묘한 의견 대립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알렌과 헤론을 비롯한 한쪽에서는 조정을 자극하지 않고 최소한의 명맥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종교 활동을 포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설사 생명 그 자체에 위험이 온다 해도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최우선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미국 공사는 금지령이‘학교나 가정에서 예배를 행하는 것, 또는 본토민과 함께 기도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교사들에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자신들이 운영하는 배재학당과 고아학교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실제로 종교 활동을 재개했다. 비록 일시적이지만‘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제외한 다른 선교사들은 그 칙령 공포에 따라 모든 종교 사업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유사점이 많은 이 두 선교사는 그들의 두 소년 학교와 가정에서 종교 활동을 개시하여 원기 왕성하게 찬송가를 불렀는데, 한국인들과 함께 부르는 이 찬송가 소리는 거의 1.6km 근방까지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저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지방 여행에서 돌아온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언더우드는 정부의 지도적 각료 몇 사람의 공식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언더우드에게 그들이 세운 육영공원
(government school)을 영구히 맡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원래 이 학교를 맡았던 미국인 교사들이 불만을 느끼고 사퇴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젊은 선교사가 얼마의 보수를 요구하든 가장 좋은 집안의 젊은이들로 가득 찬 그 학교를 그의 완전한 통제와 책임 하에 맡기려고 한 것이다. 외국인들의 입장, 혹은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이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곧 이 학교를 담당하는 데 있어 기독교를 가르칠 수 없다면, 자기는 학교를 맡지 못하겠다고 그들에게 통보했다. 규칙상으로 교과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조차 언급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언더우드의 제안은 두말 없이 승낙되었으며 빠른 답을 기다린다는 소식이 왔다.’그러나 이 제안을 수락할 경우 선교 일보다 학교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을 염려한 언더우드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선교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금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것도 순회 전도여행에서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제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당시로서는 현명한 처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큰 소리로 이끄는 회중들은 계속해서‘예수의 피밖에 없네’등의 찬송가를 하늘에 울리도록 소리쳐 불렀는데도 가장 비천한 조선인 신자를 비롯해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 일꾼들은 다시 나가 복음을 가르치고 선교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4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3. 한국 초대 교회의 수난

2) 영아 소동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선교 금지령이 진행되는 동안 소위 ‘영아 소동’(the Baby Riots)이 발생했다. 이는 1870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유형의 것이었다. 서양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자 서양인들에 대한 폭동으로 이어져 서양인 학살사건으로 발전했던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이 소동이 최절정에 달한 것은 6월 10일부터 25일 사이였다. 이것은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증폭되면서 터진 것이다. 외국인들이 조선인 악질분자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아이들을 꾀어다가 잡아먹고, 눈알을 빼 약용이나 사진 현상 재료로 사용한다는 음흉한 소문이 항간에 나돌았다. 이 때문에 선교사와 상종하던 관원까지 9명이나 처형을 당했다.

릴리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영아 소동의 동기는 민비의 파멸을 획책하던 정적들이 고의로 일으킨 사건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 당시 궁궐 사정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민비의 파멸을 획책하는 왕비의 적들이 모든 문제를 고의로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민비는 진보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외국인들을 좋아했는데, 폭도들은 외국인을 대적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왕이 어렸을 때 나라를 통치하던 섭정이었는데, 아들에게 통치권을 넘겨 주어야 할 때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권력을 쥐고 정사를 맡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온화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쉽사리 아버지를 물러나게 하지 못했다. 동양 종교(유교)의 규율과 관례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는 왕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서 영특하고 강력하며 두려움을 몰랐다. 때문에 본래의 왕이 이렇게 하찮은 존재로 밀려나 있는 것을 참지 못하여, 급작스럽게 쿠데타를 일으켜 놀라고 격노한 늙은 섭정자를 밀어내고 고종을 왕좌에 앉혔다. 그날부터 대원군은 복수할 기회만 노리며, 민비와 그 가족을 파멸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 중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 1884년의 폭동이었으며, 이 때문에 왕비는 농가 여인의 복장을 하고 서울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또 하나의 음모, 마지막 음모의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 1895년 궁궐에서의 민비시해 사건이었다.

아마 대원군은 민비의 행동을 배은망덕하고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를 왕비로 택한 것이 바로 대원군 자신이었으며, 그때는 민비가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은 대비가 양자로 택했었기 때문에, 대원군이 왕좌에 대해 요구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6월의 폭동에서 제일 처음으로 공격을 당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왕이 아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가마에서 끌어내려져 그 자신의 종자와 측근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당시 왕과 왕비가 아끼는 기관이었던 병원은 특히 음험한 범죄의 소굴로 지목되었다. 거기서 아기들의 심장과 눈을 잘라내어, 외국 관리와 선교사들의 요리상에 진미로 바쳐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병원 부근에는 커다란 소요가 있었다.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던 한 사람은 아기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받아 아무런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폭도들이 우리 공사관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서울 근교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 그리고 북소리와 함께 사람의 혼을 빼는 듯한 외침 소리가 계속되고, 집들이 무너지고, 군중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우리 모두는 이제 우리의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은 꺼지고 우리는 아무 해도 입지 않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셨고, 우리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영아 소동이 일종의 폭동의 성격으로 발전하였음을 말해준다. 영아 소동으로 가장 위기를 만난 것은 역시 선교사들이었다. 군중들이 이성을 잃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후에 발생한 중일전쟁이나 러일전쟁보다도 더 두려웠다고 말했다. 흥분한 군중들이 공관 건물들을 방화하고, 몇 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어 거리에 방치된것을 목격하고는 외국 공관 대표들은 즉시 조선 정부에 자기 나라 국민의 보호를 요청하였고, 제물포의 전함에 주둔해 있던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해군들이 급히 서울로 출동했다. 선교사들은 언제든지 공사관으로 달려갈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고, 심지어 상당수의 외국인들은 값진 물건을 챙겨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훗날 언더우드가 회고한것처럼 선교사들은 ‘화산(火山) 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들 정도로 너무도 불안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선교사들의 안전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정부에서도 영아 소동이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근거 없는 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진화에 나섰다.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누구든 아기를 먹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곧 잡혀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사실 두 사람 이상이 공공연히 길거리에 서서 이야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태는 곧 진정되어 갔다.’

3) 금교령과 영아 소동의 결과

금교령과 영아 소동은 한국 선교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과 폭동이 있었다는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본국 선교부는 한국 선교를 심각하게 재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신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여론은 물론이고, 이런 위협이 존재하는 조선에 선교를 계속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언더우드가 지적한 것처럼 감리교 선교부는 조선에 선교사업이 중지된것으로 알고 선교비를 삭감했고, 장로교 선교부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될 때까지 선교사를 더 이상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내의 선교 금지령은 선교부로 하여금 선교 중지를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내의 선교사들은 금교령과 영아 소동과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의 선교사역은 매우 고무적’이라며 본국 교회와 교단에 한국 선교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정부를 자극시키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했다. 오히려 금교령과 이어 발생한 영아 소동은 본래 그것을 발표하거나 그 사건의 발단의 원인과는 달리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국내 선교사들이 왕실과 민중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는 상당히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첫째, 정부가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어 두 사건은 오히려 조정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더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로 인해 발생한 금교령이었지만,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정부의 명령에 즉시 순응함으로써 정부 관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천주교의 명동성당 건축 강행으로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이미지는 더 악화된 반면 개신교에 대한 정부의 호의는 계속되었다. 왕실이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인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은 1884년 알렌이 입국함으로써 시작된 조선의 개신교가 천주교와는 달리 고종의 윤허를 받고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심 없는 국내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갑신정변 때 알렌이 보여 준 민영익에 대한 헌신적인 치료, 그의 후임 헤론의 희생적인 봉사로 개신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호의적이었다. 이처럼 천주교와는 달리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보여 준 사랑과 상호 존경의 건전한 가정생활, 1886년 콜레라 만연 때의 헌신적인 봉사정신, 그리고 계층을 가리지 않은 진료활동 등은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명성황후는 연봉 1,800달러를 지급하며 미국인 여의사를 자신의 시의(侍醫)로 고용했고, 고종은 알렌을 미국 주재 조선 공사로 파송할 정도로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 금교령과 영아 소동 이후 왕실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개신교 선교사들을 궁궐이나 외부에서 열리는 연회나 식사에 초대했다는 사실, 모든 면에서 선교회를 극진히 대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칙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교사들이 ‘칙령을 무시한 것이 아무런 반감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모두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실제로 1889년에 들어서면서 금교령은 사문화될 만큼 개신교 선교가 자유스러워졌다.

둘째, 자연히 이 일을 계기로 선교회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중과도 더욱 밀접해졌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무지와 근거 없는 편견을 가지고 보던 선교사들과 선교 사업이 결코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민중의 치료에 앞장섰던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이 두 사건을 경험하고 지적한 것처럼 선교사들은 비로소 ‘민중접촉자격험’을 통과한 셈이다. 처음 선교 사업에 냉소적이던 조선인들은 이제 전적으로 선교사들을 믿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노동을 천시하여 학식 있는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설교하고, 가르치고, 타자기를 사용하고, 책과 설교문을 쓰고, 지방을 걸어 다니고, 좋은 길을 만들고, 담과 집을 세우고, 채소와 과수를 심고 가꾸며 돌보고, 또한 가축과 생선밖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백정 일도 할 줄 아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선교사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완전한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92년 길모어 선교사가 ‘조선에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안전한 일은 아니다. 위험은 존재한다.’고 고백한 것과 같이 많은 위험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백홍준은 복음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정부에 의한 박해가 종식된 후에도 기독교로 개종한다는것은 부모, 형제, 친척, 친구, 동네 사람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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