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렌 키에르케골(Soren Kierkegaard):「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4:10>

킬케고올처럼 많은 별명을 가진 사람도 없다. 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우수의 철학자”, “시인”, “문학자”, “신학자”, “실존주의 철학자”, “심층심리 분석학자”, “반 이성주의자”, “선지자”, “성경주석가”, “우울증환자”, “종교적인 천재”, “냉소주의자” 등 많은 별명을 가진 사람이다. 이는 별명이 옳은지는 둘째치고라도 이 여러 가지 별명이 주는 언어의 뉘앙스를 통해서 볼 때 킬케고올은 한 가지 범주에 넣을 수 없는 다양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킬케고올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기독교 사상가(religious thinker)라고 했다. Soren Kierkegaard, The Point of View, Trans. Walter Lowri(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9), 5-6. 이 말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본다. 그는 싸구려 지식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교수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옅은 감정을 자극해서 열풍을 일으켰던 부흥목사도 아니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42년의 짧은 생애를 한 가지 사명에 아낌없이 바쳤던 사람이었다. 그의 유일한 한 가지 사명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신자가 되는가 하는 것을 문제로 삼았으며 당시에 조직화되고 정치와 야합해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기보다는 세상적인 지식으로 기독교인을 오염시켰던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신자들(Christendom)의 왜곡된 신앙 노선을 각성시키고 교정하여 참 신자가 되도록 돕는 데 그의 목적을 두었다.
킬케고올은 기독교를 신학화하거나 이론화시키지 않고 기독교의 중요한 개념들(사랑, 죄, 믿음, 하나님, 인간)을 열정을 기초한 실존적인 변증법적(pathetic-dialectically)으로 명료화시켜서 이 개념들이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 섞이지 않고 원초적인 형태(primitive form)로 이해되게 하고, 이 개념들이 참 신자가 되어가는 데서 효과적으로 재현되도록 돕는 데 그 생애를 바쳤다. Soren Kirekegaard, Soren Kierkegaard's Journal and Papers Vol. I, Trans. Howard Hong and Endna Hong(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67), No. 306. 여기서 원초적인 형태란 성경을 성경대로 삶 가운데서 재현되어져야 성경 말씀이 자기 것으로 되며 동시에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진정한 신자가 되어간다고 킬케고올은 말했다.
킬케고올의 저서(20권의 책과 25권의 저널)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킬케고올의 저널은 킬케고올 자신이 20년에 걸쳐서 쓴 일기 수상, 철학적, 신학적 단장 혹은 에세이로써 킬케고올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하나는 익명으로 된 저서요, 다른 하나는 자기 이름으로 출판된 저서이다. 전자는 그 당시 많은 지식을 쌓음으로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인테리겐차들을 비판하고 각성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킬케고올은 이들의 생각을 터무니 없는 착각(monsterous illusion)이라고 했다. Soren Kierekegaard, The Point of View, 6. 후자는 교화하는 담론(edifying discourse)으로써 진정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투쟁하는 일반 평신도들에게 신앙을 격려케(building up)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익명으로 출판된 저작은 철학적이요 문학적이요 신학적이지만, 교화하는 담론은 성경을 실존적으로 주석했으며 인간의 잠재능력을 각성시킴으로써 진정한 신자가 되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처음부터 킬케고올의 저작은 익명으로 출판된 저작과 교화 담론이 동시적으로 번갈아 출판되었다. 그래서 킬케고올은 자신이 고백한 대로 기독교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킬케고올은 “기독교가 무엇이냐?”(what is Christianity?)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진정한 신자가 되어 가는가?”(how to become an authentic Christian)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what question”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how question”을 통해서 “what”을 명료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킬케고올이 자기 전 저서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신자가 되어가는가(becoming responsible Christian)를 철학적, 신학적, 심리적으로 명료하게 분석한 그의 사상을 모르고서는 현대 사상사를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의 한 예로써 두류대학 토마스 오든(Thomas Oden) 교수는 킬케고올의 심리학을 이해하면 프로이드 심리학은 누워서 떡먹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킬케고올의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는 킬케고올의 저서 중에서 기독교 생활윤리를 가장 잘 분석하고 묘사한 저서 중의 하나다. 「사랑의 역사」는 단순히 기독교 윤리를 이론화시킨 것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실존적으로 주석함으로써 인간의 사랑과 참 기독교 사랑이 무엇인가를 개념적으로 구별하고 분석하여 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독자를 각성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사랑이란 이론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동, 즉 사랑의 역사 혹은 실천이라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준 책이다. 그래서 킬케고올은 「사랑의 역사」를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단독자”(single individual)에게 증정했다. 여기서 단독자란 참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과 갈등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말하며 킬케고올은 그들을 위해서 「사랑의 역사」를 저술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속담처럼 참 사랑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인생을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사랑의 역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학적이고 재미없는 책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참 사랑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참 사랑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에겐 「사랑의 역사」는 꿀송이보다도 더 달콤하고 기독교적인 사랑이 이렇게 부드럽고 준엄한가를 새삼 깨닫고 감격과 환희가 넘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랑의 역사」의 순서를 따라서 킬케고올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을 명료화시키는데 중점을 두며 그의 생애도 간단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I. 킬케고올의 생애

소렌 킬케고올은 1813년 5월 5일에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킬케고올의 생애는 아버지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킬케고올의 아버지는 가난에 찌들린 사람으로 유틀란드 반도에서 양치는 소년으로 간신히 끼니를 연명했다. 날씨는 춥고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을 저주할 지경에 이르렀다. 킬케고올은 이렇게 썼다. “어떤 무시무시한 사건, 그는 어린 아이 때에 몹시 괴로움에 시달리고, 굶주리고, 추위에 몸이 마비되어 언덕에 서서 하나님을 저주했다... 이 사내는 여든 두 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이 사실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월터 라우리, 임춘갑 역, 「킬케고올 생애와 사상」(종로서적, 1985), 92. 아버지는 자신 스스로 저주받은 자로서 살아야 하는 운명적인 존재로 여겼지만 그는 12세에 코펜하겐에서 무역에 종사하는 삼촌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40세에 은퇴를 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남은 사십 평생을 자선을 행하며 회개로 지내게 되었다.
킬케고올의 아버지는 재혼한 사람으로 첫 아내가 죽자 흔치않게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인과 재혼해서 자녀들을 낳았는데 이렇게하여 킬케고올은 7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킬케고올의 형제 중의 첫째는 아버지가 재혼한 지 넉 달 만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속도위반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이 나중에 킬케고올의 인생 여정에서 큰 지진으로 기록된다.
킬케고올의 형제 자매들은 34살이 채 되지 못하여 죽었다. 그래서 실제로 자기 형과 자기만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축복하시고 많은 형제 자매를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으나, 나중에 자기 아버지의 속도위반과 유틀란드 반도에서 양치는 시절에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아버지를 경멸하고 용서받지 못할 더럽고 죄많은 자로 여겼으며, 자기 형제 자매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킬케고올은 코펜하겐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아이러니의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무렵 레지나 올센이라는 여인에게 반해서 약혼까지 하게 되었으나 곧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신체 조건과 우울증 때문에 레지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신의 마음속을 도려낼 정도의 깊은 고민에 빠지게 했다. 생각 끝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레지나와 그의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약혼을 파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킬케고올의 인생에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지만 결국 결혼 상대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데도 결혼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로 생각했다. 따라서 킬케고올은 파혼을 선언했다. 처음에 레지나는 죽어 버리겠다고 했지만, 얼마 가지 아니하여 프리쯔 실레겔과 결혼하여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다. 레지나가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킬케고올은 일생 동안 오직 레지나 한 사람만 사랑했으며, 죽기 전 유언에서 자신은 약혼도 결혼으로 생각한다면서 남은 모든 재산을 레지나가 원한다면 그녀에게 줄 것을 부탁했다.
킬케고올은 1835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자기 인생을 쏟아 부을 한 가지를 찾고자 몸부림쳤다. 그는 그것에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바치기를 희망했다. 그의 긴 일기를 인용한다.

실제적인 상황은 내가 앞선 여러 페이지에서 제시하려고 한 바와 같았다. 그와는 반대로 이제 내가 나 자신의 생애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얻어보려는 이 마당에 있어서는, 나는 달리 생각한다……. 나는 당시, 다른 학부에 입학하여, 내 역량을 다른 목표로 지향시킴으로써 상당한 안정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얼마 동안 나는 어느 정도 불안을 쫓아버리는데 성공한 듯이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냉수를 마신 후의 열병처럼 되돌아 오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냉수를 마신다는 것은 열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거의 치명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나 자신의 마음속에 뚜렷이 아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인식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인식이 모든 행동보다 앞서야 한다는 사실만은 예외이다. 내가 어떤 사명을 걸머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내게 진리가 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위하여 언제라도 죽고 살 수 있는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비록 내가 철학적인 여러 체계를 다 연구하고, 그리고 만일 필요하다면 그것들을 비평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내가 (헤겔처럼) 국가론을 전개할 수가 있고 또 비록 내가 허다한 출처에서 얻은 개개의 누더기로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낼 수 있거나, 하나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그 속에서 다시 살 수 없고, 내가 다만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움켜쥐고만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내가 그리스도의 의의(意義)를 해설할 수 있고, 허다한 낱낱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만일 그것이 나 자신에게만 내 생애에 대하여 참으로 깊은 의의를 가지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리가 싸늘하게 벌거숭이로 내 앞에 서서 그것을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개의치 않고, 믿음직한 헌신보다는 오히려 불안한 전율을 자아내게 한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물론 나 자신이 이성의 지상명령을 인식하고, 사람들이 그것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때 그것은 생생하게 내 속에서 체험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영혼이, 마치 아프리카의 사막이 물을 갈망하듯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완전한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지 단순한 인격의 생활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인격의 생활을 지닌 채,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도 부르는 그 무엇에나, 또는 일언이폐지하고 내 자신의 것이 아닌 그 무엇에다 내 사상의 발전의 터전을 장만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그것을 통하여 내가 신적인 본질 속에서 자라났고 또 비록 전체 세계가 무너질 망정 내가 고집해 마지않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뿌리와 연결된 그 무엇에다, 나는 내 실존의 생활 터전을 마련해야만 한다. 이것이 내게 결핍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향하여 나는 노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내적인 행동이고, 인간이 하나님을 지향하는 면이지 인식된 여러 사실의 덩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식된 여러 사실이란 저절로 생기지만 우발적 집합체로서는, 혹은 체계도 없고 또 모든 광선이 한데 모이는 초점도 없는 마구 늘어선 개개의 사물의 줄로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나 역시 그런 초점을 모색하였다. 나는 한없이 깊은 환락의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심연에서도 닻을 내리고 머물 곳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나는 하나의 향락이 다음의 향락과 손을 잡으려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나는 이것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거짓된 열광을 느꼈다. 나는 또 권태를 느꼈고, 이에 따르는 마음의 분열을 느꼈다. 나는 지식의 열매를 맛보았고, 가끔 그 향기를 즐겼다. 그러나 그 향락은 다만 인식하는 순간 뿐이었고, 내 속에 아무런 깊은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지혜의 잔에서 마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속에 빠진 듯이 보 였다. 월터 라우리, 「키르케고르 생애와 사상」, 106-8에서 재인용.

긴 인용문에서 킬케고올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의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이념이 없는 것이었으며 그 이념에 자신의 인생을 걸 수 있기를 원했다. 킬케고올은 기독교에서 자신의 인생의 방향과 사명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에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쳤다. 참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854년 킬케고올이 생을 마치기 얼마 전에 아버지와 자신이 존경하던 뮌스터 감독이 죽자 마트센이 영결사를 했다. 마트센은 당시 헤겔철학의 대가였으며 코펜하겐 대학의 유명한 조직신학자였다. 그가 영결사에서 고 뮌스터 감독을 칭하여 “‘그 대체할 수 없는’ 감독은 언사와 직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행실과 진리에 있어서도 진정한 증인이고 또 그는 사도 시대로부터 계속되어 온 증인의 ‘거룩한 쇠사슬’”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윗책, 311-12에서 재인용. 킬케고올은 진리의 증인이라는 말에 몹시 배가 아팠다. 왜냐하면 가장 안이하게 국립교회에서 감독으로 산 그 사람을 진리의 증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신약의 핵심을 무시하는 언사라고 했다. 그래서 킬케고올은 공격문을 신문에 실었으며 그 파장은 엄청나게 컸다. 당시에 국가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교황을 비판하는 것과 같아서 국가교회 목사들로부터 단호한 비판을 받았다. 그 와중에 킬케고올은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결국 죽었다. 복음의 진실을 떠나 국가에서 거저주는 봉급으로 아무런 도전도 없이 무기력하게 윤기오른 국가교회를 비판했기 때문에 죽어서 장례식도 교회에서 치르지 못하고 자기 형 피터 킬케고올이 설교하고 신학생들로 둘러쌓인 조촐한 장례를 치렀다. 결국 킬케고올은 신약성경에 기초한 진리의 증인으로서 인생을 살다가 42세의 짧은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킬케고올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자였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킬케고올은 42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이웃을 진실한 신자로 변모시키는 것에 일생을 바치고 이것을 위해서 자신의 피와 땀과 생명을 바친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어느 것이든 잠자는 자의 영혼을 일깨워서 참 신자로 살도록 깨우치고 도전한다. 이것이 그의 작품의 유일성이다. 그의 사상은 현대 철학, 신학, 문학,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II.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거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이론화시키는 강론이나 논문이 아닌 기독교 사랑의 역사(works)에 관한 숙고(deliberation)이다. 숙고라는 말은 사랑의 본질이나 성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랑에 대해서 다 알아버렸다는 교만한 마음으로는 숙고라는 말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고라는 언어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몸부림과 깊은 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의 역사」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역사에 대한 숙고이다. 기독교적인 사랑에 대한 숙고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사랑에 대해서도 고찰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elskon)과 기독교적인 사랑(kjerlighed)을 변증법적으로 분석하고 명료화시킨다. 여기서 변증법이란 사변적인 논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깨우쳐서 자신 스스로 사랑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설득하여 깨달은 대로 실천하도록 도전한다. 그러므로 킬케고올의 저서를 읽기 위해서는 알고자 하는 관심과 그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역사」는 기독교적인 사랑에 대한 성찰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아는 것처럼 기독교적인 사랑도 그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 열매를 통해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역사」에서 킬케고올은 사랑은 이론이 아니며, 실천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의 역사를 명료화시킴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켜 도전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도록 도와서 열매 맺는, 그리고 열매처럼 달고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 데 있다. 이것이 킬케고올 저서의 진수이다.
「사랑의 역사」는 2부로 되어 있다. 제 1부는 마태복음 22:3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주석이다. 제 2부는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의 주석이다. 여기서 주석이란 현대 성경신학자들이 하는 그러한 주석(편집사, 양식사, 문학적, 역사적 주석방법)의 방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개념 분석을 통하여 실존적 의미를 숙고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언어의 사용을 살펴봄으로써 사랑의 문법을 제시한 킬케고올은 언어의 분석을 시도한 사상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인용하는 번역판 「사랑의 역사」는 임춘갑 교수가 번역하고 종로서적에서 출판한 상ㆍ·하권을 사용하며 괄호안의 페이지는 이 책의 페이지를 의미한다.
킬케고올은 주께서 말씀하신 첫 계명,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주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 계명이 둘째 계명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쪽 문을 열지 않고는 다른 쪽 문을 열 수 없는 두 문과 같다고 킬케고올은 비유하였다.Soren Kierekgaard, Works of Love, Howard V. Hong and Edna H. Hong(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487.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야만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이상이 바로 킬케고올이 둘째 계명만을 주석한 이유이다.

1. 제 1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a) 그대 사랑 “하라”(You shall love)

그대 사랑 “하라”에서 주 엑센트는 하라에 주어져 있다. 영어로 본다면 “You shall love.”에서 shall에 주 엑센트가 주어져 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언어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랑은 의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도 사랑은 의무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어떻게 사랑이 의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의례껏 세상적인 관점에선 사랑은 자신에게서 생기는 느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에서 지시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계명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말이 의무가 되지 않을 때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을 네 몸처럼 사랑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킬케고올 자신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그대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이 의무일 때만, 오로지 그 때만이 사랑은 영원히 모든 변화에 대하여 안전하고 사랑은 영원히 축복된 독립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랑은 영원히 행복하게 절망에 대하여 안전하다”(Only when it is a duty to love, only then is love eternally secured against every change, eternally made free in blessed independence, eternally and happily secured against despair., 47). 그렇다. 사랑이 의무일 때만이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이 나약한 인간의 야속성을 극복할 수 있다. 사랑이 의무가 될 때 비로소 소유적이 아니고 상호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서로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사랑이 가능한 것이다. 사랑이 의무일 때만이 네 이웃이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b)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You shall love the Neighbor)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에서 주 엑센트는 “이웃”에 주어져 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란, 곧 우리의 이웃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더욱 더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이웃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는 그것이다. 만일 사랑하는 일이 의무가 아니라면, 그 때는 이웃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만, 오로지 편애의 이기적인 것이 근절되고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It is in fact Christian love that discovers and knows that the neighbor exists and, what is the same thing, that every one is the neighbor. If it were not a duty to love, the concept ‘neighbor’ would not exist either; but only when one loves the neighbor, only then is the selfishness in preferential love rooted out and the equality of the eternal preserved., 73). 그렇다. 이웃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우리의 이웃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다. 종족과 문화의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는 것이다. 발견하고 안다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발견되어지고 깨달아 아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의무가 아니라면 이웃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인간은 이기적인가! 언젠가 “밤으로 가는 쇼”에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가 나와서 북한으로부터 탈출기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감동을 받은 것이 있다. 일본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는데 뒤에서 북한의 비밀 경호원이 보고 있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대사관 문을 향하는 마지막 관문에 신상옥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최은희씨를 툭 치고 들어갔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것이 부부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는 언제나 켕긴다고 최은희씨는 말했다. 그렇다. 인간이란 이토록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이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서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자기 부인은 기독교의 본질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면 우리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 그의 제자가 될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인간의 지나친 편애(preferential love)는 자기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결핍된 무엇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할 때 사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웃으로의 사랑이 아니라 결국 자기에로의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 편애에 찌들린 인생들에게 이웃이 존재케 하고, 그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이 필수적이다(88). 자기 부정을 할 때 이웃이 존재하게 되며 진정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존재가 된다.

c)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You shall love your neighbor)

여기서 주된 엑센트는 “그대”라는 말에 있다. 사랑이 의무라면 그것을 실행해야 할 사람은 모든 사람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라는 말이 제시하듯 사랑은 공동책임적인 성향을 띤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책임을 수반한다. 책임이 없는 사랑은 불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머물게 한다. 우리는 늘상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원하며 기도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변적이거나 지나친 궤변이 아니다. 하나님, 그 분의 촉점으로 보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은 것이 진정 하나님을 속 깊이 마음으로 아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하는 신자의 성숙도는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에서 “그대”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의 말씀으로 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린 아이나 젊은이의 특성은 ‘나는...나는...나는...’이라고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의 표지와 영원한 사람의 헌사는, 이 나가 그대나 당신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의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욕구다. 영원한 분은 끊임없이 말씀하시길 이 그대를 향하여 ‘그대 해야만 한다, 그대 해야만 한다. 그대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젊음은 온 세상에서 유일한 나로 존재하기를 열렬히 원한다. 성숙은 이 그대를 자신에게 하는 말로 이해하려 애쓰는데 있다. 그대 해야만 한다.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오오, 나의 독자여, 내가 하는 말은 그대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영원한 분은 나를 향해 ‘그대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147-48).

요약하면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양심의 문제가 아닌가? 사랑할 대상을 찾아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생활이다.

d) 사랑은 율법의 완성(Love is the fulfilling of the law. 롬10:13)

사랑은 무엇인가? 율법의 완성이 아닐까?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 연약하고 죄악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할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율법은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셨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덧입는 삶 속에서 구현된다는 것이다(171).
세상 사람은 말하기를 사랑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 속에서 성립한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이란 하나님과 사람(사람-하나님-사람) 사이의 관계이고, 즉 하나님이 중간 규정(中間 規定/middle term)으로 들어 있는 관계라고 가르친다”(175). 인간의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고 진실하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서로를 홀리는(속이는) 사랑의 환상에 불과하다(175).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고,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돕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을 받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75). 여기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남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참 사랑에는 희생과 아픔이 있는 것이며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e) 사랑은 양심의 문제(love is a matter of conscience./ 딤전1:5)

사랑은 양심의 문제이다. 사랑은 양심의 문제라는 말은 딤전 1:5에서 온 말씀이다. 만일 계명의 목적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순수한 믿음에서 나온 사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이 양심의 문제라는 말은 사랑은 “충동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고, 또 감정의 문제도 아닐 뿐더러 지적인 타산의 문제도 아니다”라는 말이다(234). 인간의 사랑을 느낌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안다. 느낌이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점이기는 하나 느낌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은 무엇에 끌리는 그러한 것 또한 아니다. 이런 것은 다 상대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계산해서 이익이 있으면 사랑하는 그러한 타산적이거나 실용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의 특성은 세속적인 사랑에서 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충동(drive)에서 생기는 사랑은 에로스적이며, 성향(inclination)에서 생기는 것은 우정이다(234).
그러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이란 선한 양심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깨끗한 마음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 신뢰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뢰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신뢰를 배울 수 있으며 동시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신뢰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신뢰가 없으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으며 믿을 수 없다. 때문에 일시적이고 계산적이고 충동적인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f)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요일4:20)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과중한 요구가 아니라 지금 눈으로 보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이다. 그렇다면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그 대상에서 사랑할 수 있는 점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할 만한 점은 좋은 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말한다. 사랑할 대상의 반응에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 변할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찾아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의 사랑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사랑의 정수이다. 킬케고올의 말을 들어보자.

여기서 우리가 논급하려는 것은 현실의 세계에서 우리들이 특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이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의무라고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한다면 우리의 과업은 사랑할 대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졌거나 선택된 대상에서 사랑할 만한 점을 찾고, 비록 상대가 어떻게 변한다해도 그 상대를 계속 사랑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일이다(260).

g)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우리의 의무(롬13:8/our duty to remain in love's debt to one another)

사랑이 의무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사랑의 빚을 져야 한다.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사랑은 일방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 된다. 그러한 사랑은 얼마 가지 못하여 깨지고 만다.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 빚을 지는 사랑에는 상대를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비교할 때 하나님 앞에서 상호성과 동등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사람은 다음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사랑의 빚을 진 채로 머무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의무일 경우에는 사랑이 결코 자기 자신에 구애되거나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사랑과 비교하거나 자기 자신을 자신이 수행한 행적과 비교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자나 깨나 영원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291).
서로 빚을 지는 사랑은 공상이 아니라 우리가 헤쳐가야 할 현실이며 삶이다. “서로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의무일 진데 빚을 진다는 것은, 어떤 공상적인 표현이나 어떤 사랑의 망상이 아니라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의무의 울타리 안에 있는 행위 속에서 행위의 운동으로 나타나고, 또 그럼으로 해서 무한한 빚 속에서 계속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으로 머문다”(305).
이 세상에서 빚을 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괴로운 부담감에 마음에 초조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생을 즐겁게 하고 감동을 주는 빚이 있다. 그것은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이다. 이 삶 속에서 우리는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며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2. 제 2 부: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의 주석

a)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

덕을 세운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a metaphorical expression‍!)이다. “세운다”는 말은 어떤 것을 터전에서부터 위로 올려서 구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6).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바로 이 전제에 의거하여 상대방에 깃들고 있는 사랑을 터전으로부터 쌓아 올려서 세우는 것이다(단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안에서 사랑이 터전으로써 현존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한에 있어서 이다)”(16). 따라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찾아서 그것을 격려하여 인생을 세우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이다.

b)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 그러면서도 결코 속지 않는다(고전13:7)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신앙의 힘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인간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을 믿을 수 있으랴! 사랑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한 가지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무한한 개념에 의하면, 속인다는 것은 단적으로 사랑을 잘라 버리는 것, 사랑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경지에까지 몰고가는 것, 사랑 그 자체에 깃들인 축복까지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47). 사랑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지만 결코 속지 않는 것이다.

c) 사랑은 모든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결코 창피당하지 않는다(고전13:7)

희망이란 미래의 가능성과 관련이 있다.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항상 희망한다는 것과 같다(65). 사랑은 영원하다. 영원성이 시간 속에서 언급될 때에 영원성은 가능성이거나 미래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현재는 잡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의심할 때마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은 결국 과거와 미래의 접촉점인 순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희망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희망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희망하는 것은 순간순간 기대하는 것이다. 기대만이 가능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 어떻게 변화될지 모른다. 어떤 사람도 좋은 면으로든 나쁜 면으로든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만큼 결코 매정스럽게 사람을 저버리거나, 그 사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 왜냐하면 가장 타락한 탕자마저도 여전히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고, 일찍이 그대의 벗이었으나 지금은 가장 격분한 원수가 된 사람마저도 다시금 그대의 벗이 될 가능성이 있고, 일찍이 그다지도 높이 도사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사람마저도 다시금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랑도 다시금 불타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어떤 사람도 결코 저버리지 말고, 최후의 순간까지 저버리지 말라. 결코 절망하지 말라. 아니다. 모든 것을 희망하라!(73-74)

그렇다. 사랑은 절망의 늪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상상을 초월한 힘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희망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한 자는 누구나 창피를 당하지 않게 한다.

d)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구치 않는다(고전13:5)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의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제한적인 것이고 그는 자기 이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참 사랑은 자기 이익을 구치 않는다. 왜 그런가?
첫째, “사랑은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에 있어서는 내 것과 네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 것과 네 것이란 ‘자신의 것’에 대한 상대적인 규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만일 ‘내 것’과 ‘네 것’이 없다면 ‘자신의 것’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것’이 없다면 실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하다”(90-91).
둘째,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특성을 고집하여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각 사람을 그들의 특성에 따라서 사랑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그의 특성’은 바로 ‘그만이 갖고 있는 것’이라고 수용해 준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들의 것’을 사랑한다”(98).
셋째,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선물을 주되 그 선물이 마치 원래 받는 사람의 소유물인 듯이 보이게끔 주기 때문이다”(104).
참 사랑은 모든 인간을 자신의 특성에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희생과 아픔이 따른다.

e)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준다(눅7:47)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 “왜냐하면 사랑은 죄를 찾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이 찾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덮어주는 것을 의미한다”(110). 죄를 들춰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준다. “왜냐하면 사랑은 피치 못해 보거나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을 오랜 침묵과 관대한 해석과 끝없는 용서로 덮어주기 때문이다”(128). 상대방의 비밀을 알고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어떤 비밀은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야하는 것이 있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결코 망각되어 사그라지지 않는다. 사랑 안에서 남을 위한 값진 희생이 망각되어 버린다면 누가 관연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사랑의 액체 속에서 자신을 녹여 버리는 사람, 멈출 수 없는 사랑 속에서 남의 고난과 불행과 손실에 눈을 감아 망각의 늪에 던져버리는 사람, 그리고 남을 보살펴 주느라고 자신의 이익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런 사람은 결코 망각되는 일이 없다. 그런 그를 생각해 주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117).

f) 사랑은 언제까지나 존속한다(고전13:13)

이 세상에는 언제까지나 존속하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가변적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소멸해버린다. 로마의 찬란한 문화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이젠 흔적만 남아 있으나 얼마 가지 아니하면 그 흔적마저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계속해서 존속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사랑의 행위이다.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 소중히 남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보여준 사랑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 사랑은 죽음으로써 증명한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사랑이다(150). 영원한 사랑은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얻어진다.
콜린 맥컬로우는 그 고귀한 사랑을 가시에 찔려 죽어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가시나무새에 비유하여 이렇게 표현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소리보다도 그 새의 울음소리는 아름다운 것이다.
둥지를 떠나 하늘을 나는 그 순간부터 날카롭고 뽀족한 가시를 찾아 헤매고 그 가시를 찾을 때까지 결코 쉬지 않는다.
가시 나무새는 가시에 가슴을 찔려 피를 흘리는 아픔의 고통을 초월하면서 이 세상의 그 어느 새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
온 세상은 침묵하며 그 아름다운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하늘나라의 신 까지도 미소를 짓는다.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처절한 고통을 치뤄야만 얻을 수 있기에…
전설의 새, 가시나무새는 우리 모두의 실상이다. 콜린 맥컬로우, 「가시나무 새」, 이종두 역(고려 문학사, 1994), 서시.

가시나무 새는 우리의 실상이다. 그러나 인간과 가시나무 새와 다른 점은 새는 가시에 찔린 그 순간에도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노래를 부르며 죽어가지만 인간은 가시에 찔리면 죽는 것을 알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g) 비록 아무 것도 줄 수가 없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도, 자애(mercifulness)는 곧 사랑의 행위이다
자애심은 사랑의 행위라고 말한다. 자애심은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이기에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도 선을 배풀고자 하는 심정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자애심의 발로이다. 자애심이 없는 자선이나 선행은 결코 순수한 선행이나 자선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킬케고올은 돈을 쓸 때는 항상 자애심을 품고 하라고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돈에서 악취가 난다고 했다(179). 선한 사마리아인의 아름다운 행동이나 헌금함에다 두 렙돈을 넣은 과부의 이야기는 자애로운 사랑의 이야기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무엇을 바라고 자애를 베풀었던 것이 아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자애를 베푼 것 뿐이다.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과부도 돈을 아끼느라 그렇게 인색하게 조금 넣은 것은 아니다. 지극한 가난 중에서 최선을 다해 아니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그렇게 한 것이다. 비록 두 렙돈 밖에 안 넣었어도 부자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우리 주님은 칭찬하셨다(눅21:1-4). 자기의 전 재산을 넣었기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과부는 가진 것이 적었어도 자애로운 사랑을 베푼 것이다. 여기에 자애로운 행기로운 사랑이 있다. 자애스러운 사랑의 행위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자세이며 기도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h) 패배한 사람을 얻는 화해적인 사랑의 승리(엡6:13)

패배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화해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화해적인 싸움이라니 무슨 말인가? 그것은 선한 싸움이다. 이 싸움은 대단히 어려운 싸움이다. 패배자는 굴욕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굴욕감을 습관처럼 몸에 베인 사람에게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며 그를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패배한 자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이것이 굴욕을 방지하는 첫째 조건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은 패배한 사람을 눈여겨본다. 이것이 둘째 조건이다”(210). 패배자를 눈여겨보는 자세는 패배자가 용서를 초조한 마음으로 모색하는 동안에 사랑하는 자는 패배한 자를 품는 너그러운 사랑을 모색하는 것이다. 마침내 용서는 용서를 비는 자의 간청을 단념하게 만듦으로써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를 얻는다.

i) 사랑은 죽은 자를 기억한다.

삶이 인간의 한 부분이듯이 죽음 또한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처럼 강하게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인생의 여정에서 혼미에 빠질 때 “모든 길이 합치는” 죽음을 음미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문이 된다(213).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죽으면 사랑도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가 않다. “죽은 자를 위하여 소리를 내지 않고 통곡하라, 그는 고이 쉬고 있으니까”(시락서21:12). 소리내지 않고 통곡하는 것이야말로 산자로서 죽은 자를 가장 진실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사랑의 행위는 가장 “비이기적인 사랑의 행위이다”(219). 인간의 사랑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결국 자기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이해관계(relationship based on the interest)에서 사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 비이기적인 사랑이다.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사랑의 순수성을 잴 수 있을 것이다.

j) 사랑은 사랑을 찬양한다.

사랑이 사랑을 찬양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다시말해 “자기부정을 통하여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237). 자기부정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진정 사랑을 찬양하는 심오한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4:8). 사랑이신 하나님을 굳게 붙들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구속주를 향한 자기부정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마땅하다. 그래야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찬양하는 그 사랑의 행위는 외면적으로 사심없는 희생을 통해서 삶에서 우러나와야 하며(245),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여 자신을 무로 만들어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대여! 자기부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참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찾아내는 희생적인 것이다”(258).

III. 정리

킬케고올에 의하면 신자의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생활이다. 주를 따르는 것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이 필수적이다. 주를 따르는 생활은 진리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살아 꿈틀거리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증인이 되는 것은 희생과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생활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이다.
킬케고올에 말하길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이론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이다. 여기서 사랑이 행동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사랑에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바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은 정의를 내리거나 사랑에 대한 고전을 읽는다고 할찌라도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킬케고올은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숙고를 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 역사 혹은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이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숙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들여다보고 회개하고 기독교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전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을 통해 덧입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부드러우면서도 준엄한 자세로 우리를 가르치신다. 공의와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자기 사랑이다. 인간의 사랑은 느낌(feeling), 충동(drive)의 에로스적인 사랑이며, 친구의 사랑은 편애(preferential love)라고 말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다. 결국 뒤집어 보면 자기 이해에 기초한 제한적 사랑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사랑을 자기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모르고서야 인간은 진정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요일4:7). 그래서 참 사랑은 내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덧입어서 그것이 삶으로 표현될 때야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역사」는 킬케고올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토록 기독교의 사랑이 부드러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임춘갑 교수(「사랑의 역사」의 번역자,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고백처럼 기독교 사랑은 부드러우면서도 준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없다. 이러한 사랑의 역사에 대해서 누가 쓸 수 있겠는가? 킬케고올은 약혼녀 레지나(종교적인 이유로 파혼)를 일생 동안 사랑했다. 그는 일생 동안 한 사람만 사랑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 유언에서 약혼도 결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 레지나를 일생 동안 사랑했다. 따라서 킬케고올만이 「사랑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고 본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진정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은 사람이라야 한다. 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을 그때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요일3:19). 이런 점에서 「사랑의 역사」는 아무나 읽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사랑의 역사」가 읽기에 어려운 것은 사랑이라는 언어 자체에 있지 않고 기독교 사랑을 실천한 삶이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이여! 이것이 킬케고올이 가르치는 기독교 사랑의 문법(grammar)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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