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총회의 선교와 전도 선언문에 대한 필자의 견해

김정한 ㆍ 2013-11-05 (화) 17:57 IP: 1.xxx.17 ㆍ조회: 14      

이번 선언문은 112조항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한꺼번에 취급하는 것은 힘들어서 총론과 1-10번까지만 우선 올려본다. 이 선언문은 지금까지의 선교와 전도의 패러다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필자의 견해다로는 비성경적이라고 본다.

♣♣는 선언문에 대한 필자의 시각이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2006년 포르토알레그레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이후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확언을 채택하기 위해 수고하며 공헌하였다. 이 새로운 성명서는 2013년 한국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10차 WCC총회에 제출될 것이다. 1961년 뉴델리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와 WCC가 통합된 이후 선교와 전도에 대해 WCC가 발표한 공식성명서는 1982년에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선교성명서는 2012년 9월 5일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열린 WCC중앙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이 성명서는 변화하는 지형 속에서 선교와 전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비전과 개념과 방향을 찾는 에큐메니칼 통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 성명서는 WCC회원교회들과 그 협력선교기구들을 너머 더 광범위하게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만물을 위한 생명의 풍요를 향해 함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산총회의 엄청난 실수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를 다루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지형은 변화되었으나 선교할 내용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다. 이것에 위배하는 것은 성경을 가감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다 이루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면 위배되는 것이며 이것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알고 변개한 것과 같은 중차대한 범죄인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선교의 지형이 바뀌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 이것을 논의할 때 이렇게 바뀐 지형에서 어떤 방법으로 선교와 전도를 해야 할 것이냐를 논하는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고 도리어 선교의 내용을 바꾸는 그야말로 배도의 논의를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실로 엄청난 죄악인 것이다.  

아래의 것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가며 마침내 의도한 잘못된 선교와 전도로 오도(誤導)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 주제 소개

1. 우리는 모든 생명의 창조자, 구속자, 양육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oikoumene)을 당신의 형상 안에서 창조하셨고, 세상에서 계속 일하면서 생명을 유지시키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생명이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요 3:16)으로 믿는다.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관심이며 선교이다(요 10:10). 우리는 생명의 시여자(施與者)이신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그 분은 생명을 지탱시키고, 생명에 힘을 주시며,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신다(창 2:7, 요 3:8). 생명을 부정하는 것은 생명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로 초대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이 충만하게 생명을 누리는 비전을 증거 하도록 권능을 주셨다. 오늘날 하나님 선교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분별할 수 있을까?

♣♣ 하나님은 생명을 주심뿐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 그래서 법을 주시고 심판 하시는 하나님이란 차원이란 곧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란 입장에서 선교를 다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왜곡시키고 선교의 개념도 왜곡된다.

여기서 주제를 생명의 하나님 그랬는데 이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생명을 말하고 있는데 이번 선언문에서는 이 생명을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과 심지어는 피조물의 생명과도 같은 의미를 사용함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는 온전한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질 생명과 혼용하고 있음으로 저들의 속셈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2.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고, 거룩한 삼위를 하나로 묶는 그 사랑은 온 인류와 피조물에게로 넘쳐흐른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선교사이신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요 20:21) 소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을 주신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생명을 축하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항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의 산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을 받는 것”(요 20:22)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성령의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오늘날 변화하는 다양한 세계 안에서 하나님 선교를 어떻게 다시 계획할 수 있을까?

♣♣ 여기서부터 패러다임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오직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선교란 말을 있다. 지금까지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셨다. 요15:25 행1:8 고전12:3


3. 성령 속에 있는 생명은 선교의 본질이며, 우리가 무엇을 왜하는가 어떻게 우리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의 핵심이다. 영성은 우리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부터 오는 거룩한 선물이며 생명을 긍정하고 보살피는 에너지이다. 이러한 선교적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람들의 영적 헌신을 통하여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변혁의 역동성이다.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긍정하는 변혁적 영성으로서 선교를 회복할 수 있을까?

♣♣ 선교를 말할 때 예수님을 말하지 않고 성령님을 독자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서로 충돌되지 않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배격하고 있다.  성령 속에 있는 생명은 선교의 본질이며 이란 말부터 잘못되어지고 있다. 성령 속에 있는 생명은 삼위하나님의 속성을 성령님도 가지고 있는 하나님으로서의 영인 것이지 선교의 본질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다. 선교는 죄악에 빠져서 잘못되어진 인류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선교는 하나님의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지 본질은 아닌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만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부분적 구원을 주신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피조물의 모든 영역과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를 우주적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과 온 생명, 온 세상(oikoumene)이 하나님의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구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명백한 이때에 우리가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만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고,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성경은 사람을 구원하고 영생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요 3:16, 눅19:10의 주님 말씀을 정면으로 굴절시키고 있다.
 
오히려 복음은 피조물의 모든 영역과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좋은 소식이다. 란 말은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따라오는 것이지, 복음을 거부했을 때의 것이 아닌 것이다. 복음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고 복음을 받은 자들의 확산에 따라 모든 것들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명쾌하게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를 우주적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과 온 생명, 온 세상(oikoumene)이 하나님의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선교의 틀을 깨고 잘못된 선교를 말하며 그런 족으로 지평을 넓히자는 것을 말하고 있다.

5. 기독교 선교역사는 선교의 한 중심지로부터 “미전도 지역”, 혹은 땅 끝까지 이르는 지리적 확장의 개념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인의 다수가 남반구와 동양에 살고 있거나 그 곳에서 태생한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라고 표현되는 급속한 교회의 지형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이민은 전 세계적인, 다 방향적인 현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지형을 재형성하고 있다. 강력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이 다양한 지역에서 출현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가장 주목할 만한 세계 기독교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무게 중심의 변화”가 선교와 전도의 신학과 의제와 실천에 어떤 통찰을 주고 있는가?  

♣♣ 지형의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는 말은 맞는 말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지형변화에 따른 선교의 방법론을 논의해야지 선교의 내용을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6. 선교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사회특권층으로부터 소외계층으로 발생하는 운동이라고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주변부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교의 주된 역할을 하는 대리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선교는 변혁적임을 확언하고 있다. 선교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이러한 역할의 반전은 강한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들을 택하셔서(고전 1:18-31)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선교를 진전시키시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주변부를 향한 선교”에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로 개념의 전환이 일어났다면, 그 주변부 출신 사람들의 독특한 공헌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 선교와 전도를 재 구상 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경험과 비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 초대교회와 한국교회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중국도 마찬가지.  이 글은 서구에서 아시아나 변두리 선교의 중요성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 뭐하려고? 이런 것을 말하고 있는가?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말인 것이다.

7. 우리는 돈에 대한 숭배가 복음의 신뢰성을 위협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시장 이념은 글로벌 시장이 무한대로 성장하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선전을 퍼트리고 있다. 이러한 신화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삶만이 아니라 영적인 삶까지, 인간성만이 아니라 온 피조세계까지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글로벌 시장 안에서 어떻게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고, 시장의 영을 이길 수 있을까? 전 지구적 차원의 경제적, 생태적 부정의와 위기 속에서 교회는 어떠한 선교적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 맘몬이즘은 현대교회의 위기란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선교적 행동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광의적인 선교를 말하고 있다. 요사이 직접적인 영혼구령과 연관된 것을 선교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이 선언문은 선교와 전도에 관한 것인데도 선교와 전도의 본질적인 영혼구령에 대한 것을 취급하지 않고 정의와 평화 것을 선교와 전도의 主目標(주목표)로 끌고 가는 우를 범하며 성경의 선교를 왜곡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8. 모든 기독교인들, 교회들, 그리고 회중들은 구원의 좋은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로 부름 받았다. 전도는 우리의 신앙과 확신을 담대하지만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한 나눔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선물이다. 그것은 당연한 참된 신앙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 안에서 교회는 전도에 대해 새롭게 헌신해야 한다. 전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방법 가운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세대를 향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을까?

♣♣ 전도를 통해서만 생명(영생)을 얻는 것이고 생명을 얻은 자들이 사회구원 쪽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기존신앙이었는데 이 글의 의도는?  기존 전도의 틀을 변곡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성경에 근거한 전도는
1.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는 복음전하는 메신저다. 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도는 우리의 신앙과 확신을 담대하지만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란 말은 아닌 것이다.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도는 당신도 이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생명을 얻으라 고 하는 것인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다른 종교와의 길을 염두에 두고 구부리고 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광의도 맞지만 생명을 얻게 하는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란 것으로 명쾌하게 해야 한다.


9. 교회는 다종교, 다문화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새로운 통신기술의 발달로 세계인들이 서로의 정체성과 일상을 더 잘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지역적으로 또한 세계적으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랑, 평화, 정의가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종사한다.  다원성은 교회가 만나는 도전이며 종교 간의 대화와 문화 간의 소통에 대한 진지한 참여는 피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있는 세계 안에서 생명 살리기 선교를 공동으로 증언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에큐메니칼 신념들을 가져야 하는가?

♣♣ 다원성문제/ 다원성 속에 교회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에큐메니칼 신념들을 가져야 하는가? 라는 말은 옳지 않다. 선교와 전도에 대해 어떻게 하면 성경적인 진리를 확고히 할 수 있을까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부러 에큐메니칼을 강조하는 것은 분파를 조장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 교회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혁하기 위해 세상에 주신 선물이다. 교회가 맡은 선교는 세상 속에서 새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세상 속에 사랑의 하나님의 현존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믿고 하나가 되기 위해(요 17:21) 우리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일치 가운데서 하나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세상에 치유와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선교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갱신하여 충만한 생명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확산시켜나간다. 세상을 개혁시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정의가 아니라)를 선포하며...

선교는 세상 속에서란 용어보다 세상에 라고 해야 옳다. 세상  에서란 말은 세상  에 생명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는 세상에 하나님의 선물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선교하기 위해 그리스도 공동체가 하나 되자는 말은 맞는 말이다. 세상을 치유와 화해하는 것도 맞는 말이나. 생명을 얻기 전에는 안 되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인간의 죄악 된 죄성을 인정치 않고 하는 선교나 전도의 논의는 다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것은 잘못된 것이고 잘못된 것으로 끌고가는 비성경적인 선언인 것이라고 봐야 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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