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 2013-11-08 () 17:34 IP: 1.xxx.17 ㆍ조회: 17      


부산총회가 과연 뭘 남겼나?

한국 KNCC측이 10 WCC 개최권을 따냈을 때 기독교 올림픽과 같은 것을 한국교회가 획득했다고 크게 자랑스러워했고 그간에 반대하는 세력가운데서도 힘들게 준비하며 10일간의 총회를 끝났다
.  
이번 총회를 통해 어떤 일들이 있었고 한국교회의 성적은 어떠한가? 평가가 나올 것이다. (올림픽이라고 했으니까
)

그렇게 내려진 평가에 대해서도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그리고 일을 추진한 분들이 할 말들이 많을 것이다
.

필자는 그런 종합평가를 할 만한 식견과 그런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나중에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자고 하고 싶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관심이 너무 같다 보니 그간 이곳 게시판에 ‘WCC 부산총회 觀戰評(통합 측을 중심으로)’ 을 비롯하여 수십 편의 글을 올린 자로서 한마디 말도 없으면 그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필자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 ‘WCC는 과연 종교다원주의로 가고 있는가?’ 라는 것만 가지고 사견(私見)을 써 본다
.

WCC는 과연 종교다원주의로 가고 있는가?’ 에 대한 필자의 시각은 ‘그렇다.’ 라고 본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WCC 지지하는 분들이 항상 하는 말- 수많은 논의 중에 나온 말을 가지고 평가하지 말고 총회에서 나온 만장일치의 공식선언을 가지고 평가하란 말에 따라 이번에 나온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 라는 선언문을 분석한 결과 내린 결론이다
.

그것은 문안을 작성한 자들이 밝혔듯이 과거의 ‘선교와 전도’ 관을 이번에 세 가지 특성의 특성을 주제로 새로운 선교관으로 바꿨다고 선언하고 있다. 첫 번째가 ‘생명’이란 각도에서, 두 번째가 그리스도 중심에서 ‘성령’중심으로, 세 번째가 ‘주변부로부터’ 라고 밝히고 있다.(이것은 기독교방송이나 언론매체의 글을 보면 알 것이다
.)

그러면서 저들이 내세우는 근거로는 선교는 창조 때부터 삼위하나님이 생명을 중심으로 선교를 하였고 성령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간에 잘못된 선교가 힘 있는 자들에게로부터 행해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하고 있다
.

과연 그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것인가?  이제 저들 선언문을 비교하면서 어떤 조항들이 WCC 반대측에서 가장 궁금하고 우려하고 있는 ‘다원주의’로의 문을 어떻게 열어놨는지를 보자
.

1.
생명이란 차원에서 선교와 전도가 이루어져야 하기에 선언문이 그런 각도에서 나왔다는 주장에 대해 저들의 주장은 그 ‘생명’을  ‘전인적인 구원’ 곧 구원을 통전 적으로 봐야 하며 심지어는 생명을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피조체의 생명까지를 동등하게 취급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        

필자는 생명이란 주제에 대해 다뤘다는 것에 대한 것에 시비를 걸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주제를 잘 다뤘다고 칭찬하고 싶다.  문제는 바로 ‘생명’을 그렇게 봤기 때문에 전도를 나가서 선교를 약화시키고 다원주의로 문을 열어놨다고 보는 것이다
.  

무슨 말인가? 생명이 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통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거기에 의도된 함정이 있다는 말인 것이다
.  

필자가 ‘의도된 함정’이란 표현을 쓴 것은 카토릭의 2차 바티칸 선언문이 나온 이후 종교통합의 길로 가기 위해 종교포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로 나가는 것을 배도의 길이라고 했는데 이번 선언문을 통해서 카로릭과 결탁해서 나온 것이기에 그런 말을 썼다
.

필자의 캐토릭에 대한 글

http://pck.or.kr/PckCommunity/FreeView.asp?page=1&Code=&ArticleId=59&TC_Board=31217


이번 문안이 카토릭과 연관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내용들
기독공보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57793
http://www.veritas.kr/contents/article/sub_re.html?no=15335

다시 생명이란 것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면 생명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그것은 종래 2000년 성경이 기록한 대로 영의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whv)와 혼과 육신의 생명인 ‘프쉬케’(yuchv) 라는 말을 사용해서 전도가 바로 이 바로 ‘조에’((zwhv)을 살리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 다음 ‘프쉬케’(yuchv)의 생명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선교방법론을 써야지를 다뤄야 했음에도 불고하고 저들은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이 ‘토탈 생명’ 영혼구원을 통한 생명(조에)과 사회구원으로 진행될 생명(프쉬케)을 동일시 취급하고 있다.

그러면 저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전도항목에서(80-92)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 생명’(2) 이란 단어와 ‘회심’(5)과 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조에로서의 생명’을 다뤘지 않느냐고 항변할 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문제라는 것이다.  WCC가 뭣하기 위해 태동되었고 뭣 때문에 모이는가? 바로 ‘선교와 전도’를 다루기 위해 생긴 단체가 WCC가 아닌가
?
그렇다면 ‘조에로의 생명’은 성경에서는 ‘영생’이란 단어로 쓰여지지 않았는가?  선교와 전도의 근본적이고 1차적 목표는 놓쳐버린 ‘영생’의 회복부터가 아닌가? 그렇다면 112항이란 장황한 선언문에 ‘영생’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단 1회도 언급되지 않았다.   1회도
.

그러고도 선교와 전도에 대한 선언문이라고 하는가?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강조하고 성경이 가감하지 말라고 한 것은 가감하지 말아야 한다. 더군다나 영생이란 단어는 주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단어인 것이다
.  

그리고 두 번 째 선교의 주체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성령님이라고 다룸으로 지금까지 정통교회의 교리를 바꾸게 하는 엄청난 우()를 범하면서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태도가 마치 느부갓네살이 내가 이 제국을 건설했노라 는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

자 그러면 Ⅳ- 3. 전도, 종교 간의 대화(93-96)  전도와 문화(97-100)에서 어떻게 그 전도에 대한 것을 휘고 悟道해 가고 있는 가를 보자
.

이 선언문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대화’ 라는 용어인데 총 18회가 언급되고 있고 11회가 이 항목에서 쓰여졌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나온 항목이 95항인데 그곳에서 약화시키고 상대화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전도는 ‘대화의 정신’ 곧 ‘존중과 우정의 태도’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가운데 전도하라는 것이다
.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것이 맞는 것이지만 ‘전도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비 성경적인 것이다.’ 라는 것이다
.

전도는 대화중에 이루지기도 하지만 선포가 일차적인 것임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4복음서에 만도 수 십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에 ‘요나’ 서를 보라. 그것은 대화가 아닌 선포요 전파인 것이다
.

이런 의도가 두 번째 요소인 선교 파송자를 그리스도에게 성령으로 옮김으로 다른 종교 권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쓰여진 문안임을 알 수 있다
.

선교의 파송자가 예수님이신 것은 성경이 너무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을 성령님이라고 변개시키는 것은 예수님과 성령님을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http://pck.or.kr/PckCommunity/FreeView.asp?page=1&Code=&ArticleId=59&TC_Board=31365
했으니 참조하기를 바란다.

문제는 왜 종래의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으로 이동시겼는가? 그것은 바로 타 문화권에도 성령님이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그렇게 말함으로 포용주의 다원주의의 길을 터놓기 위한 것임이 너무도 자명하다
.  

93
항을 보면 성령님을 우리가 알지 못하게 일하시는 ‘신비한 성령님’이란 언급을 하면서 타 문화권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언급과는 정반대의 기술(記述)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성령님의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언급 요:16:8-11에서 세상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오직 않는 것이 죄요. 세상을 책망하심이라고 하였다
.

그럼에도 성령님은 생명이란 차원에서 예수님만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생’으로서 생명을 약화시키더니 성령님을 선교의 주체라고 하면서 아예 다원주의 길을 열어놨다는 것이 분명하게 들어났다. 는 것이 필자의 확고한 견해다
.

이것은 ‘바아르’ 선언문을 넘어서 카토릭의 바티칸 선언문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저들 입으로 시인하고 있으며 실제로 바티칸 문서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티칸 문서 분량이 많아서 이곳에 자료공개는 하지 않았다. 인터넷과 시중 서점에 나와 있고 필자도 가지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굳이 알고자 하면 알려줄 것이다
)

말하고 싶은 최종 결어는 이것이다
.
한국교회가 부산 선언문을 받아들인다면 개신교의 신학과 교리는 끝났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다면 종래에 내려온 기독론을 바꾸고 성령론을 바꾸고 그간에 信條들을 다 바꿔야 할 것이다
.

그래서 필자는 WCC 부산총회가 한국교회 아니 우리 통합측의 신학(신앙)의 분기점에 서 있다고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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