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1: 얘기를 해야 ?

대니얼 하이드(Daniel Hyde)

 

이제부터 예정론 시리즈를 시작하려 한다. 그렇다. 예정론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꺼내기에는 그리 인기가 없는 주제이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 하기 알맞은 주제 아닌가? 5세기, 어거스틴은 자신의 편지에예정론은 설교의 유용성을 방해한다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누가 그런 방해꾼을 원하는가? 16세기, 칼빈은 설교자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나 천지창조를 설교하는 만큼으로 예정을 설교해야 한다고 힘주어 설파하였다.

우리는 예정론을 이야기하거나 설교해야 하는가? 답은그렇다!”이다. 예정론은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이다. 예정이 없다면 성경도 존재할 없다.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선택을 받았다 ( 12). 이스라엘은 지상 만국 중에서 선택을 받았다 ( 4:37; 7:6-8; 105:6). 포로기 새로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선택을 받았다 ( 41:8-9; 42:1; 43:1-7; 44:1-2; 45:4). 예수님은 예정을 가르치셨다 ( 11:25-27; 13:11-16; 4:11-12; 6:37, 66; 10:26-30; 14:1; 17:6, 9, 벧전 2:5-10). 성경적 교리인 예정론을 우리는 이야기 밖에 없는 것이 . 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618년부터 1619 사이, 네덜란드의 도르 트레흐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럽의 신학자, 목회자, 장로 등이 모여 알미니우스 논쟁을 다루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논쟁에 답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계획하심으로 신구약 시대의 선지자, 그리스도, 사도들은 신적 선택에 관한 가르침을 선포했고, 성경에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의도에 따라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도 가르침을 분별력을 갖고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확고히 설파해야 하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방식들을 불필요하게 탐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력 넘치는 당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함이다.” (도르트신조 1.14)

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정을 말하고 설교해야 하는지, 방법론을 위한 기본적 원리들을 살펴보려 한다.

 

분별력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거나 설교할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로마서 9장은 사도 바울이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서 구분되어 크리스천 회중으로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믿는 유대인들은 약속의 자녀들인 반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의 자녀일 뿐이다 ( 9:3; 6-8). 바울은 이같은 개념을 또다르게 묘사하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바다에 모래 같을지라도 소수의 남은자 무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 9:27).

이것은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 어떤 대상들이 이를 듣는지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는 뜻이다.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마음이 강퍅하여 예정론을 비웃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참되게 궁구하는 이들 속에서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믿는 자들의 회중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믿음이 강해져 그와같은 교리의 깊이와 규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또다른 이들은 믿음이 약해져 의심과 걱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차이점들을 지닌 성인들에게 말하는가? 아니면 청중들 속에 어린아이들도 섞여 있는가? 그런 회중들에게 말할 때, 그 속에는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참된 신자들도 있고, 마치 위선자들마냥 믿는 척만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명심하라.

 

경외감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바울은 로마서 9:20-21에서 경외감을 갖고 예정론을 이야기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이것은 바울이 9장에서 논하는 내용의 절정 부분이다. 그는 옛언약 백성들, 자신의 동료 유대인이 보이는 불신앙을 말하면서 논의를 펼쳐간다 (vv. 1-5). 바울이 언급한 첫번째 반론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졌는지의 여부였다 (v. 6). 바울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신 이래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와 진실로 이스라엘에게 속한 자들” (v. 6), 그저 아브라함의 외적인 육신의 자녀인 자들과 아브라함의 약속의 참  자녀들 (vv. 7-8) 사이의 차별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역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문제로 되돌아가 말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v. 11).

그 다음 반론은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 반론에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v. 14)라고 답한다. 그는 어떤 사색적인 것이 아닌지 성경의 인용을 통해 답변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는 말로 결론을 짓는다 (v. 18).

하지만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v. 19). 이같은 반론이 들리지 않는가? 예정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는 교리이다. 이같은 반론에 바울은 어떤 철학적 답변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이다. 이것이 바울의 답변이다 (vv. 20-21).

예정론은 많은 오해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신비에 쌓인 주제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이 교리를 경외감을 갖고  말해야 한다. 로마서 9-11을 바울이 어떤 식으로 마감하는지 주목해 보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 11:33).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논할 때 항상 우리 언어와 사고방식 모두를 억제해야하며,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하는 지점에서 말할 때, 우리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놀라움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말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패하셨다.”,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다루신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예정은 인간의 지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이런 반론들을 저지한다고 강조한다.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v. 20).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토기장이에게 권이 없느냐?” (v. 21). 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하나는 귀히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그릇” (v. 21) 있으므로,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영화로우시다. 결국 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통해 스스로 영화로워지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vv.22-23).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 그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드리기 위한 행위인가? “찬송하리로 하나님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1:3-4).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함인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1:6).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차고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 소서 1:12 14절을 통해 번이나 반복하여 송영을 노래한다.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 , 로마서 11 36절로번역 있는 것인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11:36).

 

우리의 안위를 위해....


마지막으로, 예정을 말할 우리는 우리의 안위를 설명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로마서 9장에서 우리와 세계를 위한 어떤 안위를 찾을 있는가? 바울은 구약에 기록된 구속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세계로 되돌아가 논의를 진행해 간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복음을 바로 우리 앞에, 개인의 역사에 정치시킨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9:24).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나 불공평하신 분으로 비난하지 말라. 우리를 로봇처럼 만드시는 하나님이라 참소하지 말라. 그분을 믿으라.

하지만, 여전히 반론하는 이들의 주장은 우리가 예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예정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예정하셔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때 나의(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내 백성”,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신다는 사실에 기뻐하게 된다 ( 9:25-26).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로마서의 순서를 따르라. 먼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고민하라.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자신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정한 다음 죄와 싸우라. 8장까지 등장하는 십자가와 고난 아래서 그대는 9, 10, 11장을 통해 미리아심을 배우게 되고, 그 사실이 어떻게 우리의 안위가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정론을 말해야 한다. 예정에 대하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위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를 북조선에 남겨두는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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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고 병들고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도 밥을 준다고 하니 냇물을 건너 오셨습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징검다리를 하나 둘 조심조심하며 건너 오셨습니다. 옷은 남루했습니다. 추워보였습니다. 신발은 다 해어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검게 아니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그래도 조선족이 큰 소리로 “김씨 아저씨 저녁 자시러 오시라고 해라!” 외치니 세 명의 젊은 친구들과 함께 건너오셨습니다.
젊은 친구라야 60대 후반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79세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룩함과 경외함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저는 이야기를 나누기 전 한 마디 말을 던졌습니다.
“왜 나오려고 하셔요?”
“찬송이나 마음 놓고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눈길을 피하려 땅 바닥에 시선을 두고 우물우물 쏟아 낸 말입니다.
‘왜 탈출하려는가’라는 질문에 노인은 겸손하게 답을 하셨습니다.
“찬송 한번…”
할아버지가 건너 온 그 냇물 소리마저 들리는 듯 했습니다. 허름한 집 마루에 걸터앉은 우리, 아니 그 분들의 모습이 잊혀질까 오히려 두려운 적막이 흘렀습니다.
“언제 나오실 수… 있으셔요?”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순간 내 머리 속에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65명의 탈출자들이라는 말을 들었던 터여서 비용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방법과 이동할 길목들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공안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그리고 어느 산을 넘어야 할지, 아이들도 있다지 않는가? 긴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도울 것 뿐인데… 찬송 한 번 마음 놓고 불러보고 싶다는데 무슨 설명을 붙여야 할까?
‛도와 드리겠습니다’ 한 마디로 결론을 이끌려고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을 쏟아냈습니다. 순간 노인의 입속에서 흘러내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그리고는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고 계셨습니다.
한 10분이나 걸렸을까? 노인이 돌아오고 계셨습니다.
제 눈은 노인의 얼굴에 멈추었습니다. 그 거친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먹을 쥐고는 몸을 곧게 세우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물었소이다. 저 미국에서 온 이목사가 우릴 돕겠다는데 따라 갈까요? 라고…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두는지 아느냐?’고 하시는 군요.”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노인의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니다. 혹시 기회가 주어지면 남조선으로 가서 찬송이라도 실컷 부르고 집에 가고자 했는데… 이 땅에 남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시니…”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어서 가시라요! 경찰이 온다지 않소?”
누군가가 노인에게 알린 모양이었습니다. 일단은 철수해야 했지만 저는 좀 더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가지고 간 돈도 드려야 했고, 노인의 말도 좀 더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서울로 가시자고 한 번 더 권하는 제게 노인은 “나도 아오.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배당 종도 쳐봤고, 성가대도 주일학교 교사도 해봤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니… 자유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소? 압네다. 나도 압네다. 자유라는 게 좋은 게지…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고…”

노인 외에 다른 이들이 재촉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려다가 무릎을 꿇고 노인이 신고 온 신발에 입술을 대고 우는 동안 나의 목에 눈물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재촉한 손길이 있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드리고 “안녕히 계시라요.” 인사를 하자 그렇게 점잖았던 노인의 음성이 강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자요!”
저는 죄인의 모습이 되어 노인에게 작은 소리로 “예, 천국에서 뵙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서둘러 떠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작아지는 소리 뒤에 분명한 음성.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죽음이라도’라는 말은 제가 생각해서 넣었을 뿐입니다.
서둘러 산골짜기를 빠져 나왔습니다. 먼 길이었습니다.
운전하는 아저씨는 예수를 믿은 지 몇 년 안 되는 조선족이었습니다. 뒷자리에 앉은 나는 그냥 울어야 했고 운전하는 기사는 내 모습을 계속 확인하며 같이 울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궁금해진 나는 그 산골짜기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 기사 아저씨를 찾아가 차를 대절해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기사가 사뭇 공격적인 말투로 쏟아낸 말,
“무얼 하러 오셨오? 그 할아버지랑 노인네들이랑 그 가족들이랑 모두 죽었단 말이요. 수용소로 끌려가던 성도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 하지 않소? 여섯 명의 젊은이들은 끌려가지 않겠다고 덤비다가 매 맞아 현장에서 죽었답니다.”
기사 아저씨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구를 비난하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고난을 겪어야 하나? 할아버지와 함께 탈출하려던 그들의 생의 목적은 뭐였지? 지금까지 살아 온 것도 지옥 같은 것이었는데…  굶주리고 매 맞고, 억울함이란…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들의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고… 아! 그리고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79세 노인네야 그렇다 치자구요. 오랫동안 믿음을 지켜온 자랑스러움이라도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 아니 어린아이들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로 죽어가야 했다니… 노인의 말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선교현장에서 일하는 우리 중 ‘왜 이렇게 고난당해야 했나?’를 생각하지 않은 이들이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저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설교하다 말고 울고 글을 쓰다 말고 통곡을 합니다.
왜냐구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사랑 고마워…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가 끊어질 수 있을까?
주님은 나 같은 죄인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북한의 성도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여러분과 저를 통해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신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공산권 국가였던 헝가리의 성도들도 그 말씀 붙들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북한의 성도들도 그 말씀 붙들고 주님이 회복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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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 일부에 자기장을 통과시키는 것만으로 사상이나 종교 등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외신들은 14일(현지시간) 영국 요크대학교와 미국 UCLA 공동 연구팀이 ‘경두개 자기자극’(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이하 TMS)이라는 기술을 통해 실험 참가자들의 두뇌 일부 기능을 ‘차단’해본 결과 이러한 사실을 알아냈다고 보도했다.

 

기사원문 >> “뇌에 ‘자기장’ 쏘아 종교·사상 바꿀 수 있다” (연구)

 

 

* 2003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고 2012년엔 뇌의 해부학적 구조와 기능을 밝힌 뇌 정밀지도가 완성됨으로 이 정보들을 활용한 본격적인 마인드컨트롤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뇌에 ‘자기장’을 쏘아 종교와 사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 결과는 바로 이 지식들을 활용한 연구 사례 중에 하나인 것이다.

 

머리에 미세한 전기자극을 주는 패치 하나로 못생긴 피오나 공주를

백설공주처럼 보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한국인 과학자가 주도한 미국 연구진이 개발한 이 패치는 뇌에 간단한 전기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보상회로를 조절하여 기분을 좋게 만드는 화학물질을 분비케 함으로 대상자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뇌 시스템으로, 15분간 이 패치를 붙이고 있던 사람들은 못생긴 ‘피오나’ 공주를 예쁜 ‘백설공주’로 느끼게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었다.

 

뇌 정밀지도를 통해 밝혀진 뇌의 보상회로에 간단한 전기자극을 주거나, 사상과 종교를 관장하는 두뇌 일부에 ‘자기장’을 통과시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심지어 종교적 신념까지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정부주의자들의 통제수단으로 그 개발이 완성된 베리칩에는 이미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밝혀진 유전자정보(지도)가 담겨질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베리칩의 60%나 차지하고 있는 전기코일(안테나)은 이를 삽입한 사람의 몸(뇌) 속에 전자기적 자극을 보내 마인드컨트롤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이기도 하다.

 

베리칩의 60%나 차지하고 있는 전기코일(안테나)은 이를 삽입한 사람의 몸(뇌) 속에 전자기적 자극을 보내 마인드컨트롤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이기도 하다.

 

베리칩이 사상과 종교를 관장하는 두뇌 일부에 전자기적 신호를 보내 종교적 신념 자체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베리칩을 받으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를 받으면 구원에 자리에 설 수 없다(계 20:4)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요한계시록 20장 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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