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들어/최송연

외로울 때
고요히 눈을 듭니다
당신의 은총을 바라며

슬플 때
조용히 눈을 듭니다
당신의 위로를 구하며

두려울 때도
잠잠히 눈을 들게 하소서
당신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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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올라와서 함께 지내며 형님들의 자취생활을 거들어 주고 있었지만 방안은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을 공간도 없었다. 그래서 매일 형님들은 "너 어쩌자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한 거냐.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치곤 했다. 
  
나는 기술을 배워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각종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처럼 무작정 상경해서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성공해 보겠다는 꿈에 잠겨 있던 농촌 출신 청년들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았던 시절이 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빵 공장에 들어가서 잠시 기술을 배울 때는 기술자가 얼마나 구타를 하는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정비공장 인근을 얼마 동안 배회하곤 했지만 역시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조금 기술다운 기술이라고 배운 것이 양복 수선 기술이었는데 조금 배워서 미싱을 돌리고 재단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상경한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한 끼도 제대로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또한 잠은 방의 가장 구석자리에서 두 다리를 쪼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 새우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다. 겨울이 다가왔지만 방안에 온기는 전혀 없었고 잠을 잔다기보다는 그냥 밤새도록 덜덜 떨다가 볼 일 다 보는 그런 상황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서 기침을 하다가 피를 한 사발 토해냈다. 가슴에 바늘을 꽂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순간순간 찾아왔고 기침을 할 때마다 목에서 피가 올라왔다. 어머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빨리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 어보라고 하셨다. 하루 종일 보건소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간신히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 다음 날 폐병 3기까지 진행이 돼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 당시 폐병 3기가 뭔지, 얼마만큼 심각한 질병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기침할 때마다 피를 토하면서 문득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곤 했다.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고 난 후 형님들은 더 이상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빨리 대전으로 내려가서 요양을 좀 하도록 해라." 
  
형님들은 거의 반 강제로 나를 기차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보건소에서 폐병 진단을 받은 후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지만 목을 끓고 올라오는 각혈은 계속되었다. 먹을 음식도 없었지만 식욕까지 떨어져서 며칠 동안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고 그냥 집에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서 나는 '내가 바로 산송장 신세가 되었구나'라는 한탄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  
  
가족들 가운데 특별히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방안 한구석에서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며 말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서 내려온 후 며칠이 지났을까. 부잣집에 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던 둘째 누님도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둘째 누님은 식모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고 폐결핵 증세까지 있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동병 상련이라고 둘째 누님과 나는 그날부터 서로 간병을 하면서 결핵 투병 생활을 했다. 둘째 누님은 얼굴도 몸매도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거기에 마음 씀씀이도 얼굴처럼 고와서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던 나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분이었다. 누님과 함께 한 투병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은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몸은 마를대로 말라서 오랜만에 나를 본 이웃들은 놀라기까지 했다. 누님과 나는 보건소에서 결핵 항생제 약과 주사를 받아오긴 했지만 늘 약이 부족했다. 그래서 항생제 주사약이 부족할 때면 누님은 항상 내게 먼저 주사를 놓아 주고 자기는 나중에 약을 받아와서 맞겠노라며 양보해주곤 했다. 말은 쉽지만 그 당시에 항생제 주사를 양보하는 것은 마치 생명을 양보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누님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동생은 꼭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제부턴가 누님의 다친 허리에 고름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누님의 허리에 주사바늘을 꽂아 고름을 뽑아주곤 했는데,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한번은 누님이 완전히 정신을 잃었던 적까지 있었다. 그날 누님이 정신을 다시 차리고 난 후 우리 둘은 같이 손잡고 방바닥에 퍼지고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 가슴속 깊이 사무쳐 있던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정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죽으면 이런 고통도 다 끝나고 혹시 더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자살에 대한 강한 충동이 그때처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적이 없었다. 결핵에 개고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한 번이라도 누님과 개고기를 먹어볼 수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마침 옆집에서 개를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한다는 말이 들렸다. 용기를 내서 누님과 함께 고기 한 점이라도 얻어 먹어보려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들은 결핵균이 옮겨질지도 모른다면서 집 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했다. 누님과 함께 못내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마음 가운데 '아,저 개고기 한 점만 먹으면 근력을 회복할 것 같은데'라는 서러움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날 저녁 누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딘가를 황급하게 다녀왔다. 그날 저녁 따라 나는 몸이 너무도 아파서 사람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혼미한 정신으로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누님이 아침 밥상에 고깃국을 올려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고깃국이야?" 
  
"응,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먹어둬. 몸보신에 좋다고 하더라." 
  
"그래도 뭔지 알고나 먹자. 이게 뭔 고깃국이고?" 
  
누님은 한사코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내가 고깃국을 다 먹고 난 후에야 고양이를 삶은 고깃국이었다고 말했다. 고양이 고기! 나를 생각해주는 누님의 사랑이 처절하게 가슴에 사무쳐 왔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C. 성령의 지속적 사역: 다락방 강화에서의 그리스도의 맹세를 성취하는 일(요14-16장) / 마이클 호튼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성자 안에서 말씀하셨지만, 안에서 균일한 우주를 생겨나게 하시고 그래서 삼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질서 있는 영역을 창조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다. 심지어 일반 은총 안에서도 칼빈이 말하는 대로 이 타락한 세상에서 선함, 진리, 아름다움이 꽃피는 곳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가 누릴 자격이 없는 지혜와 건강과 그 밖의 유익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창조 속에서도 성령은 역사하시며 하늘의 예루살렘을 이 시대 속으로 가져오시는 한편 지상의 도성의 기둥들을 떠받치신다.

 

새 창조에 있어서 성령은 내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깨닫게 하신다. 요한복음 14~16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다스림을 매개하실(그리고 지금 매개하시는) 방식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지금 높아지신 은혜와 영광 가운데 우리를 다스리시며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면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셔서 삼위일체 창조주께 "내가 여기 있사오니"라고 대답하게 하신다.

우선 먼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은 사법적이다.
성령은 다가올 심판을 알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을 책망의 초점으로 삼아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보냄 받으셨다(요16:8). 우리는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복음의 확산을 특징짓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청중이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을 때(행2:37) 이 약속의 경험적 효과를 본다. 성령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시지는 않지만 내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죄책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설득하실 것이다.

둘째, 성자가 모든 진리의 유일한 화신이므로 성령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보냄 받으실 것이다(요16:13).
성부는 말씀하시고 성자는 위격적으로나(영원한 낳음) 사역적으로나(복음) 성부가 말씀하시는 내용(말씀)이다. 피조물 안에서 그 말씀의 발화 효과를 일으키시는 일은 언제나 성령의 역할임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성령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낳는 원천이다. 성자는 지상 사역 기간에 자신의 권위를 근거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설명하셨다(요16:13). 성령은 예수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천상의 머리에 우리를 연합시키신다. 성령은 우리의 일상적인 역사를 혼란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새 창조 속에 끼워 넣으신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성부, 성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이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의 경건한 체험을 확증하기 위해서나 우리가 윤리적 왕국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오실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물론 성령의 오심은 우리의 경험과 윤리적 행동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지만 성령의 사역의 초점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전파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역사는 우리를 지금도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는 자신의 증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그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시는 법정으로 우리를 안내하시는 성령의 사역 외에는 우리에게 멀고 사라져 가는 기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정복이 아닌 갈등을 의미한다. 신약 성경에서 '증인'이란 말은 헬라어 단어 마르튀스의 번역어이며 이 단어에서 순교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nartyr)가 나왔다. 전투하는 교회는 성령에 사로잡혀 자유롭게 그리스도께 현재 이 시대의 권력이 말하는 '아니요'와 반대되게 '아멘'으로 대답하는 세상의 일부분이다. 패배하지도 않았고 아직 완전히 승리하지도 않은 전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고난받는 증인이다. 이 둘 사이의 공간은 교회에 있어서는 불확실할 곳이며 교회가 종종 자신을 그 승천하신 머리와 같이 영광 가운데 다스리는 존재로 상상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락방으로 가서 성령 세례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행1:4~6).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교회는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처럼 모여서 말씀과 떡을 떼는 일에서 예수님을 인식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땅 끝까지 선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오순절과 재림 사이에서 성령은 죄인들을 말씀을 듣는 자들로 만드심으로써 죄책과 용서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을 주신다. 실제로 성령 자신이 말씀을 들으시는 분이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선교사로서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요16:13). 교회는 성령의 내주와 능력 주심으로 선자자들과 사도들의 외적인 말씀뿐만 아니라 성부 및 성자와 본질이 같으신 분을 통한 그 증언에 대한 내적 확증도 갖는다. 말씀 하나님을 육신으로 잉태되게 하신 성령은 성자에 관한 말씀의 원천이자 해석자다. 그리고 성령은 과거에 대한 진리(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진리(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실' 일)도 말씀하실 것이다.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우리를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이 은혜의 경륜에 집중하도록 이끄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역사하신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더불어 사명을 띠고 나아가시며 최소한 위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밖으로는 사랑과 증언과 봉사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외향적인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외향적인 분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요한복음 16장에서 가르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통해 부활까지 그리스도 자신의 숙명으로 이끄신 바로 그 성령이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발자취로 이끄신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첫 번째 증거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선포한 것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강론에서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은 소위 말하는 "개인적인 종교적 의식 속에 들어오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성령의 영감"에 대한 모호한 정서가 아니라 "그것 나름으로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봉사하는 성령의 선물로 이해해야 하는 구체적인 교회 관습의 형태를 띤" 인도하심이라는 점을 라인하르트 휘터는 지혜롭게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성령은 예수님이 누가복음 24장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말씀 선포와 성찬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이자 주님으로 인식하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세례, 가르침, 성찬, 장로들과 집사들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돌봄 등의 피조물적인 수단을 통해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은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영감받은 진리를 새로운 언약 공동체에 전달하고자 했다.

 

셋째,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말씀하신다(요16:14). 14절과 15절이 구속 언약에서 성령과 성자가 공통의 보화, 즉 그 두 분이 성부와 함께 우리와도 함께 나누시고자 하는 보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이 상호성(페리코레시스)을 강조하는 것과 같이 이 말씀은 분명 성령의 증언의 핵심을 가리킨다. 이 점은 아마도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가장 충분히 표현될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를 영화롭게 하셨고 이제 성부와 성령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성자는 내용(발화 수반 행위)이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발생하게 하며 그 말씀들을 열매 맺게 하신다(발화 매개적 효과).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그들(그리고 우리)을 떠나 계시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자신의 삼중 직분이 (이제는 다만 하늘에서) 지속되는 것임을 확신시키신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그러나 예수님의 떠나심은 역사 속에 갈라진 틈을 내고 그곳으로 성령이 그리스도를 위한 언약적인 몸을 창조하시기 위해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14:16-18).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과 교회 안에 거하시지만 직접 육체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거하신다(고후1:22. 참조, 롬8:17,26; 고전3:16; 갈4:6; 엡5:18). 이 직접적인 임재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돌아오심과 다름없는 것이 요구된다. 승천으로 인해 지상의 교회는 승리한 교회가 아니며 장차 만물의 갱신을 위해 그 머리의 육체적인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육체로 보았겠지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승인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전달하도록 주신 복음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본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함께 먹었지만 성령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인식하지 못했다(마16:17). 지금 이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스승의 경력은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다가올 시대의 첫 열매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역사상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로 인식하게 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다(고후5:16-17). 몸인 교회는 불가분적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구속사 안에서 교회에 영화롭게 된 머리와는 다른 곳에서 존재한다. 자신과 더불어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를 확보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역사 속으로 끌고 가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엡2:6). 성부는 은혜의 예전을 말씀하시는 반면 성자는 스스로 그 예전의 화신이시며 다음으로 성령은 영화롭게 된 앞서 가신 분 뒤에서 적절한 "아멘"으로 화답하며(고후1:19-22) 답가를 부르는 찬양대를 창조하기 위해 "불순종의 아들들" 안에서 역사하신다. "곧 이것(불멸)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성령 강림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시계는 현재의 이 악한 시대 위로 재깍재깍 흘러가고 있다. 지옥의 문들은 교회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은 "이 마지막 날"에 한 믿음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영화롭게 된 머리의 언약적인 역사(그리고 종말론) 속으로 삽입된 공동체를 보증할 것이다. 실제로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은 신자들 가운데로 보내심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최종적 구속의 보증(아라본)으로서 그들 안에 거하시기 위해 그들 속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기 때문이다(롬8:23. 참조, 갈4:6). 성령은 우리의 최종적 구속의 아라본(첫 불입금)으로서 우리가 새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일의 '이미' 이루어진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도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다(롬8:18-28. 참조, 고후1:22, 5:5; 엡1:14). 성령의 임재는 우리를 절망에서 지켜 주지만 승리주의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성령에게서 다가올 시대의 실재를 더 많이 받을수록 더 들뜨게 되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에서 난 동요가 아니라 이미 미래를 미리 맛본 데서 오는 동요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우리는 또한 성령이 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삼중 직분의 발화 매개 효과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은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소송을 제기하시고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선지자 사역을 매개하신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자 선포된 말씀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 안에서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바르트의 명언과 같이 "말씀의 주는 또한 우리의 들음의 주다."

 

성령은 또한 "또 다른 보혜사"(변호사)로서 그리스도를 대체함으로써가 아니라 내적으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며 용서에 대해 확신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 매개하신다. 이 강론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의 가르치시는 사역의 내용임을 강조하신다(요15:26b). 성령은 또 다른 말씀을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 대해 '아멘'을 불러일으키신다.

 

성령은 불신과 죄의 폭정을 굴복시키시고 죄인들에게 그들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믿음을 주셔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을 매개하신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목사들과 장로들을 주시고 성령은 그들을 그리스도께 속한 목자들로 준비되게 하신다(엡4:11-16). 성령의 이 사역을 통해 민수기 11장 29절에 나오는 모세의 요청("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은 모세의 가장 무모한 꿈 이상으로 성취될 것이다. 70인의 장로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온 진영이 성령 충만한 증인들의 공동체가 된다. 성령은 임명된 직분 담당자들의 사역을 통해 온몸에 주어진 많은 은사들을 주시고 조율하시며 직분을 맡은 자들은 성령의 은혜(존재적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은사들(소명)에 있어서만 서로 다르다. 따라서 누가복음 9장 1-6절에서의 열두 제자의 사명은 누가복음 10장에서 70명에게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는 오순절의 사명 위임 의식의 서곡일 뿐이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 또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즉 우주적 법정에서의 참되고 신실한 증인, 우리의 구속주를 찬양하며 화답하는 성가대로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재창조된다.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_17장 '성도로 부르심 받음'에서 발췌(555-5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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