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열정>이 아닙니다. 열정보다는 <순종>이 더 필요합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말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적인 기도 안에는 <자기 의>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기도는 말씀에 못 박힘이 있기에 주님의 뜻만을 구하게 됩니다.


열정과 순종, 한 쪽은 좋고 한 쪽은 나쁘다고 비교 우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열정 이전에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열정 이전에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미 하늘에서 정하신 뜻을 이 땅 위에서 풀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만 말씀이 기도가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앞으로 어떤 시간들을 맞이할지 이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나아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맞이하기 위한, 마치 <산고의 고통>과도 같은 시간들입니다.


무엇인가를 출산하는 과정과도 같은 앞 날이기에 중요한 시절입니다. 그래서 힘겹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 받은 자들에게는 힘들지만 기쁜 날이 되는 것입니다. 깊어지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고의 고통, 생명을 낳는 출산은 열정 이전에 듣고 따르는 자세,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길 원하는 여러분!" (행 10:35)


엘리야의 시대처럼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시하십시오. 이에 내 안에 열정 이전에 순종의 자세가 충만히 있는지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시대는 주님 말씀 하신대로 '그릿 시냇가'로 피해야만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곳에서 까마귀들이 가져다 주는 것들로 배를 채워야 하는 시절입니다. (열상 17장)


그러나 마침내 그 곳마저도 물이 말라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때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의, 자기 지식을 거두어 내고 이해할 수 없지만 "하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엘리야의 영들"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맞이할 <엘리야의 영> 말입니다. 


열정하면 생각나는 분이 베드로 사도이십니다. 그는 디베랴 바닷가 이후, 마가의 다락방을 통해 성령을 받은 이후 <순종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바로 유대인으로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리더십이었던 베드로 사도가 꿈에 나타난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간 것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 날 밤, 베드로 사도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행하심을 들은 이방인들 위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주신다는 사실에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보고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행 10:44-45)


이처럼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끝내시는, 마침표 찍으시는 시간이 마지막 때"란 것을 기억하시며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열정 이전에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순종하려는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주님이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통로되어 하늘에서 정하신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낼 주님의 사람을 찾고 계신것입니다! 산 골에 사는 자가 전하는 소리이지만 들을 귀 있는 분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마라나타!



글: 김영표 목사님

한 노병의 외침 -

 

그대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촛불따라 가는길이 그리도 밝던가?
수십년 저주하던 얼굴이 하루 이침에 그리도 곱던가?
몽롱한 정신의 세계로 빠져가고 있는 그대모습들이 참으로 가련하구나.
춤추는 언론들의 가면극의 무대가 남인가 북인가?
발목잡힌 방북객들의 목줄이 이성을 잃고 조국을 버리려 하는구나!
그대가 원하는 평화란 어떤것인가? 방탕할만큼 누리던 자유가 싫어 졌던가?
잘사는 사람 성공한 사람들을 시기질투 할수 있었던 자유도 이제는 싫어 졌던가?
주체못할 자유도 이제 버리고 싶은가? 미끼를 미끼인줄 모르고 덥석 물은 우매한 인간들이 가야할 길은 어디이던가?
오호 통재라!
그토록 악랄하고 무자비한 지옥같은 삶 을 수없이 듣고 보아왔건만 한 순간에 뒤집어진 생각들이 과연 정상적 이었던가?
몇푼의 청년수당에 젊은 패기를 버렸고, 달콤한 육아수당에 정신이 녹았고, 인상된 노년수당에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조국애를 팔았고,
최저임금 운운하며 마치 자기돈이라도 퍼주듯하며 재벌을 죄악시하고 가진자들을 적대시하는 이 나라의 평등사회란 어떤 사회이며
막 퍼준 인기의 종말은 어디이며
그 부담은 누가 짊어져야하며
그 책임은 누가 질것인가?
이미 체면상태에 들어간 몽롱하고 우매한 인간들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미 때는 늦었도다
오호 통재라!
침몰해가는 조국이여! 자유대한민국이여!
허수아비처럼 춤추는 지성이라던 언론과 평론가들.
나라살리는 일꾼으로 뽑아준 국개들은 제살길 찾느라고 나라생각 잊어 버린지 오래고, 이 나라의 보수 지성들은 겁먹은 새앙쥐처럼 궤멸되어가는 보수를 보고도 무엇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털면 먼지 날짓이라도 했는지 저항은 커녕 떨고만 있구나.
국가의 정체성에 반하는 세력에게 국가가 지원을 하지 않는것은 당연한 조치이거늘 문화계 블랙리스트라며 생사람 다 잡아가더니 언제부터인가 TV에서는 그들을 비판하던 보수냄세나는 인물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것은 브랙리스트가 아니고 보수괘멸 리스트이던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은 그대들이여! 이렇게 보수가 쉽게 무너질줄 몰랐다고 점령군들 스스로도 놀랐다던데.
국립현충원에 잠들고 있는 호국영령들이 없었다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나라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5만4천명의 전사자와 10만명의 부상자를 낸 미국을 물론이고 참전 및 의료 지원군을 보내준 21개국의 6ㆍ25참전국들을 대할 면목이 없구나.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이 나라의 국민들은 왜 이다지도 무지하단 말인가?
國破山河在라더니 이런들 어뗘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오.
참으로 태평이시던가?
이 모든게 자업자득이 이닐가?
소멸되어가는 자유대한민국이여!
소리 높여 외쳐본다
오호 통재라!
이미 때는 늦었도다.
이제는 그 업보로 가득찬 길고 어두운 터널 속으로. 몸부림쳐도 소용없으리,

월남전 참전노병 예종이 씀

★프레임의 법칙(Frame law)★
                    

 공자가 제자들과 함게 진나라로 가던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안회가 가까스로 쌀을 구해 와 밥을 
지었습니다.

공자는 밥이 다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부엌을 들여다보다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먹고 있는 안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공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회는 제자 가운데 도덕수양이 가장 잘되어 공자가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공자는 크게 실망하고 곧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윽고 안회가 밥이 다 되었다고 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더구나."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안회는 곧장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훍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습니다."

공자는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이부 끄럽고 후회스러워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나의 머리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보고 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

성인 공자도 이렇게 오해를 했는데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은 어떠 하겠습니까? 

때문에 귀로 직접 듣거나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해도 항상 심사숙고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그 사건 자체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섣불리 결론을 내려 평생 후회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어느 날 그의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 넘게 
지각을 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타고르가 해고해야 겠다고 작정했다.

3시간 후 허겁지겁 달려 온 하인에게 빗자루를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해고야! 빨리 이 집에서 나가!" 
그러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며 말했다. "죄송 합니다. 어젯 밤에 딸 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묻고 오는 길 입니다."

타고르는 그 말을 듣고 인간이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배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 대해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길 때는
잠시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장통을 거쳐가는 8번 버스엔 늘 승객들이 만원입니다. 보따리마다 
주고받은 정을 받아 온다고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참을 달리든 버스 안에서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잠시 후 그치겠지 했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세 정거장을 거쳐 올 때까지도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슬슬 화가 난 승객들은 여기저기서 “아줌마 애기 좀 잘 달래 봐요..” “버스 전세 냈나..”  “이봐요. 아줌마 내려서 택시 타고 가요!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  “아~짜증 나... 정말 “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 대한 원성으로 화난 표정들이 버스 안을 가득 매우고 있을 그 때 차가 멈추어 섭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버스기사만 
바라보고 있는데 일어서 문을 열고 나가서는 무언가를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아이 엄마에게로 다가간 버스기사는 긴 막대사탕의 비닐을 벗겨 얘기 입에 물려주니 그제사야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맙니다. 

다시 버스는 출발을 했고 버스 안에 승객들은 그제야 웃음이 번졌나왔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 아이엄마는 버스기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손등에 다른 한 손"을 세워보입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수화로 고마움을 표현한 아이 엄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내린뒤 버스기사는 아주머니와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랑의
불빛을 멀리 비추어 주고 있었어도 누구하나 
"빨리 갑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붙이는 말: 프레임 법칙이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서로 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곤 하는 것은  
자기의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상대방을 배려함이 없이 모든 걸 자기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어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선입견(先入見)은 자아의 성찰(省察)없는 자만(自慢)이나 오만(傲慢)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어 모든 오해와 분쟁의 불씨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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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인간론  

                                                               -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련하여서,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출처: 개혁하는 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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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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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궤멸, 수구 패배일 뿐
보수 유권자는 냉전 굴레 불태워
일단은 민주당에 몸 맡겼지만
기대 못 미치면 박차고 나갈 것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자유한국당이 ‘폭망’해서 보수가 궤멸했다고 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은 보수가 아니었고, 보수를 대변하지도 않았다. 세계사적 변화의 흐름에 눈과 귀를 막은 냉전적 사고, 요설(妖說)로 포장한 기득권 밥그릇 챙기기로 일관했을 뿐이다. 이렇게 보수정당이 아예 존재한 적도 없는데, 보수가 선거에서 무너졌다는 건 보수에 대한 모욕이다. 눈이 밝은 보수 유권자들이 악취가 진동하는 수구(守舊)를 심판했다고 해야 맞다.
 
자유한국당 세력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참 편하게 정치했다. 시대가 요청하는 생산적 담론과 정책은 안중에 없고 권력의 달콤한 꿀을 빠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 대표가 된 홍준표의 표현대로 “고관대작 지내고 국회의원을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과 “국비로 세계 일주가 꿈인 사람”이 “지금 이대로”를 외치면서 정치를 시궁창에 처박았다.
 
이들은 논리가 밀리면 상대에게 “너 종북이지, 빨갱이지”라고 눈을 부라렸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토론하고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할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상대를 위협함으로써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깡패정치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홍준표는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위장평화쇼’라고 했다. 서울시장 후보 김문수는 “평화협정 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겪을 후유증이 무엇인가”라는 영국 기자의 질문에 “한국은 적화되고, 나는 총살될 것 같다”고 했다. 분단 냉전시대의 승리 공식에 충실했지만 기자는 “오 마이 갓”이라고 했다. 이들은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모욕했다. 이게 자유한국당의 수준이다. 뒤늦게 “우리가 탄핵당했다”며 무릎을 꿇었지만 시대착오적 무위(無爲)의 정치, 폭력의 정치를 용서받기에는 너무 나갔다.
 
지금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는 프레임은 수십, 수백 개다. 낙관론도 있고, 비관론도 있다. 미국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에서 기대했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체제보장(CVIG)’의 맞교환은 명시되지 않았다. 미국은 많은 것을 내주었지만 북한의 양보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은 이런 비관론의 정점에 서 있다. 근거도 있고,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이다. 

동시에 미국과 북한의 최고 책임자가 직접 만나 전쟁이 아닌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표시하고 핵단추 대신 핫라인을 설치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향한 세계사적 전환에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렇다면 냉철하되 열린 마음으로,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면서, 상상력을 가지고 평화의 확률을 높이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한반도 문제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나라와 세력이 관여하고 있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어떤 인간과 집단도 완벽하게 전망할 수 없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이자 천재 자연과학자인 데카르트가 위대한 점은 자신의 감각경험을 지독하게 의심한 데 있다. 심지어 자신이 감각하고 있는 세계가 현실인지, 꿈인지를 고민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불완전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주시하고 상이한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전모(全貌)에 다가설 수 있다.
 
너무도 부족한 존재인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 결국엔 말도 안 되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은 “수구냉전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다면 국민들은 점점 더 외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반성적 인식이 당 차원의 집단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열린 보수를 세울 수 있다.
 
19세기 영국 보수당은 ‘멍청한 당(stupid party)’으로 조롱받았다. 이때 디즈레일리는 “오두막이 행복하지 않으면 궁전도 안전하지 않다”며 당이 불평등과 빈부격차 해소에 나서도록 했다. 침체했던 영국의 귀족정당 보수당이 혁신을 통해 세계 최장수 정당이 됐다는 박지향(서양사) 서울대 교수의 조언은 설득력이 있다. 기득권에 안주해 온 자유한국당이 과연 이런 치열함을 갖출 수 있을까.
 
이번 선거의 승자는 보수 유권자다. 스스로의 힘으로 ‘북한이 화해 불가능한 적(敵)’이라는 수구냉전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불태우고 합리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보수의 판단력은 건강하게 작동한 것이다. 이들은 더불어민주당에 몸을 맡겼지만 기대에 못 미치면 언제든지 박차고 나갈 것이다.
 
정당이 제대로 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면 처절하게 버림받는 시대가 열렸다. 수구를 혼내준 보수 유권자의 멋진 승리가 구제불능의 낡은 정치판을 제대로 갈아엎기를 바란다

 

출처: 중앙일보/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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