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갈 3: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앞서 우리는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좀 죄송하지만 다시금 되풀이하여 말씀드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내(사도바울)가 예수를 믿고 보니 내가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산 것은, 이제 가진 생명은 나의 옛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 새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믿는 자는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았다는 것,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아직 안 죽었다고, 덜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으려고, 더 죽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믿고서도 여전히 부족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 때문에, 또 내가 무엇인가 노력을 해야 조금이라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더 해지고 주님의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겹침으로써 애절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정경을 만들어 가슴속에 간직하려는 일종의 감상주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더 죽어야 한다고, 매일 매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옛 생명이 아직 덜 죽었다고, 더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수입니다. 내가 거듭났다면, 내가 주 안에서 살아났다면, 또 죽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사도 바울은 그런 생각들과 요구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행해지는 행위들과 율법들이 엉뚱한 꾐이라고 말합니다. 3장에 들어가면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더욱 신랄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너희 눈앞에 뻔히 보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서 엉뚱한 꾐을 따라가니 너희가 눈이 멀었느냐,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율법 지켜서 성령을 받았느냐, 믿고서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헛되이 마치려느냐......”,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도바울이 외치는 것은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새 생명을 얻었으니 구원을 위하여 내가 더 해야 하는 일도, 더 할 수 있는 일도, 어떠한 행위도, 어떠한 율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정경이 아름답고 애절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완전한 구원에 나의 어쭙잖은 오물을 더 하는 것일 뿐입니다. 구원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는 것, 다만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어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도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믿음으로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계획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율법과 규례로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지 ‘의인은 율법 지켜 살리라.’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말고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예수 ‘예’자도 몰랐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그들도 예수 믿어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 이름조차 몰랐지만 아담과 하와는 뱀의 머리를 밟고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수많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세주,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밤하늘 별, 곧 후손 가운데 오실 구원자를 믿어서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창 15장).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오실 예수’를 믿었고 우리는 ‘오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하나님의 구원도 완전합니다. 인간의 어떠한 더함도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도 자랑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기초이며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많은 설교와 신앙생활을 통하여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그 똑같은 진부한 소리를 또 들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알면서 어째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가지고 애절하게, 아름답게, ‘내가’ 또 죽으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으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와 규례, 이치와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主)라는 사실입니다. 우주만유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티끌 하나, 먼지 하나조차도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완성될 때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어떠한 것도 허용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 하나님의 소유만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영원한 불에 소멸시키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생명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하나님으로부터의 새 생명이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이미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율법의 행위는 죽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 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만 내게 남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우리는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 즉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져서 돌이킬 수도, 고칠 수도, 취소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는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과거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미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확신하고 자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이 믿음으로 살 뿐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이 다 하도록 주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 글을 쓰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한 바를 제대로 표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이 글을 써놓고서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문구만 보면 또다시 ‘울컥’ 눈물이 나고 그 참혹한 정경에 자신을 합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의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앞 뒤 19절과 21절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감상에 빠져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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