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논쟁의 무익성

낮은바다 ㆍ 2013-04-07 (일) 19:10 IP: 175.xxx.183 ㆍ조회: 118      

때로는 어떤 논제에 대해 서로 간에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 각자 이해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건설적인 논쟁이라면 얼마든지 지속할 수 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상대방을 굴복하고자 한다면 당장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논리를 감정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며, 결국은 상대방과의 관계가 정말 악화된다. 그리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논쟁은 개인 대 개인으로부터 집단적인데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론 논쟁으로 인해 어떤 이론을 체계화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성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도나투스와의 논쟁으로부터 다듬어진 이론이며,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의 교회론 역시 당시 재세례파와의 논쟁가운데 형성된 이론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선 논쟁이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현대에 들어서 학문의 발전을 위해 학회모임을 갖는다. 물론 비슷한 학문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끼리 모이며, 이에 서로에게 관심 있는 주제를 가지고 발제하며, 평가하면서 그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므로 학자들에게는 연구동기와 그 연구물을 발표할 수 있는 장이 된다. 이때도 평가자는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방향에서 평가해 주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리라. 이때 학문이 더 발전방향으로 나간다.

하지만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어떤 논의에 대해서 서로 입장이 다르다. 심지어 동일한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 해석의 차이도 있으니까. 또한,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해석하는 이는 이 땅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대해야 하며, 어떤 이들은 성경을 모두 아는 것처럼, 자체하는 것은 매우 교만한 사람임을 자인해야 한다(고전13;12).

필자는 어떤 계기로 불필요한 논쟁의 무익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목회자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상담을 해 오거나 질문해 온다면 목회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겸손하게 말이다. 하지만, 만일 상대방과의 대화 속에서 불필요하다고 판단이 될 때는 그만 두는 것이 서로에게 더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의 덕을 위해서 말이다(고전14;26). 필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면 그만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서로에게 유익한 대화가 아닌 논쟁으로 비화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며, 이는 신성모독죄에 해당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부로 할 순 없었다. 그에게 어떤 권위가 있었으며, 백성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대부분 지혜롭게 답변을 하시기도 하셨지만, 그 자리를 피하기도 하셨다(마12;15).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처음에는 선한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가 후에는 논쟁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치열한 감정싸움이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진리가 왜곡되지 않은 이상, 서로의 이해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리라 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속히 그 대화를 중지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둘째, 믿는 자들이라도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체험적으로 느꼈다. 각 지역의 사람들의 정서도 다르다. 예컨대, 전라도 사람들은 착하지만 고집이 있다. 경상도 사람들은 거칠지만 뒤끝은 없다. 이처럼 다르다.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인격이 고매한 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깊다. 알면서도 져주고, 양보한다. 하지만 미숙한 사람은 자기주장대로 하려고 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과 사고의 차이가 있음을 기억하고 무익한 논쟁이라면 그만 두는 것이 좋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하면서 의견이 달랐다. 바나바는 선교지에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하였으나 바울은 이에 반대하여 서로 이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행15;36-41). 18세기 웨슬리와 휫필드는 절친한 친구였으나 구원론에 대해 생각이 달라 서로 헤어지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는 자라도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에 대한 진리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 진리는 지켜야 하리라.

셋째, 가르치는 자는 말을 아껴야 한다(약3;1). 설교자나 선생만큼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이 없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나는 말로 대화하기 보다는 글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나의 멘토였던 옥한흠 목사님도 직접 대면하기 보다는 하고 싶은 말은 이메일로 하라고 종종하셨다. 말을 하면 감정적이 되기 쉽고, 그래서 상대방을 격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일단 객관적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고,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실수 없이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은 사람이나 글에 대해선 한 마디 해 주길 원한다. 요즘 페북에 보면, 마음에 맞지 않는 글들이 대단히 많다. 그렇다고 한 마디 툭 올리면 그것이 감정을 상하게 하기 마련이다. 내 마음에 맞지 않아도 좀 절제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하며, 개인적으로 문의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특히, 목회자는 말을 아껴야 복음을 전할 때 좀 더 진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넷째,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격이 있어야 한다. 성경에 보면, 말과 관련된 교훈이 대단히 많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 특히 잠언15;23,28절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말하라는 것일 게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 상사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진정한 인격자는 자기 부하에게도 상사에게 하듯 하는 것이리라.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이들을 찾아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이는 누가 나를 알든지 모르든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 번 뺏은 말은 되 담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그 말로 상대방의 인격에 금이 갔기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인격살해를 한 것이다. 가끔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는 댓글을 보면, 본인도 아닌데 내가 난감하고, 기분이 상하는 글들이 종종 보인다. 그래서 논쟁적인 댓글은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작은 배려가 있다면 논쟁이 아닌 격려, 칭찬으로 이어지리라 생각된다. 그 말 한 마디가, 그 댓글 하나가 상대방을 얼마나 기분 좋게 하고, 격려가 되는지 나는 종종 경험한다.

마지막으로는 상대방을 세워주는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입을 준 이유는 먼저, 먹기 위한 기능이 있지만, 지혜로운 말을 하라고 주셨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은 인간의 일차적인 일이지만, 말은 인격적인 일이다. 그런데 만일, 부정적이고 공격적이고 비판적이고 죽이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골4;6절에 보면, 말을 할 때 소금 치듯 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은혜로운 말을 하라는 것이다. 주변에 친구들이 많은 이들의 특징은 그가 지혜로운 말, 상대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는 사람일 게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 주변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 참, 불쌍한 사람이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함께 살기에 말을 배우고, 상대방을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은 습관이다. 이왕이면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리는 말을 한다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내 주변이 좀 더 천국의 삶을 맛보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논쟁은 득보다는 실이 크다고 본다. 만일 논쟁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혜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목소리가 크다고 이기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논리로 이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때로는 약자를 위해서 져 줄 수 있는 배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울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우리는 개인과 개인이 대화할 때, 집단과의 대화할 때, 성경이 가르쳐주는 교훈에 따라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하루아침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통해 다듬어져야 하리라. 실수함에도 또 다시 그런 실수를 낳지 않도록 힘써야 하리라.

단, 이단과 관련된 논쟁은 좀 더 적극적인 대응과 지적이 필요함을 첨언합니다. 그들은 교활하게 침투하여 이간질, 미혹질, 호리고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 유사 이단들이 더 합니다.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빵으로 끝나는 믿음  (0) 2013.04.10
목사 임직자들에게  (0) 2013.04.10
금식기도의 영적 유익 40가지  (0) 2013.04.08
거짓 회심  (0) 2013.04.07
나이 많은 부목사는 사절합니다  (0) 2013.04.0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