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준비제도 FRB,

 

그리고 칩을 통한 인류 노예화!

 

 

미국의 영화 감독 '아론 루소'가 지난 2007년에 제작한
음모 관련 다큐 'America Freedom to Fascism' 입니다.


미국의 실질적 지배권을 쥐고 있는 연방준비제도(FRB)와
'생체이식 칩'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인류의 노예화를 꾀하고 있는
어둠의 비밀세력들에 대한 실체를 공개합니다!


참고로, 아론 루소는 이 영화를 만든 후 얼마 안돼 사망
(암으로 사망했다고 하나, 과연 사실인지는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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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칠 대 신비 (이사야 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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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칠 대 신비 (이사야 9:6-7)

이태리 알프스 산에 있는 한 마을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당 안에는 사면 벽 둘레에 구약시대의 선자지들의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이 다 같은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보면 맨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큰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이 동상들 즉,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가르키고, 그들의 눈은, 갈보리산을 향하여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중에도 예수님에 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는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예고할 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고(이사야 7:14)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 5)"라고 예언했습니다. 특히 9장에 가서는 "그의 이름은 기묘라(Wonderful)"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의 신비 일곱가지를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1.탄생의 신비

때가 차서 영원의 시계가 정시를 칠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내려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낼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천사로 보낼까? 왕으로 보낼까? 장성한 어른으로 보낼까? 그러나 다 합당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작은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하면서, 모든 인간의 욕망도 알고 시련도 알고 유혹도 받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탄생시킬 그릇이 될 여인을 찾고 계신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눈이 멈추어졌습니다. 마리아는 헌신적인고 마음이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옆에 있던 천사 가브리엘을 불러서 "마리아에게 내려가서 이르기를 너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아들을 잉태하리라 고 일러라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또 한가지 말하기를 "그 이름은 예수라고 하라고 일러 주어라"하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곧 결혼하기로 된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달했습니다. 이 두사 람이야 말로 이 귀중한 책임을 맡기기에 합당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때가 차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중 밤에 천사의 찬송이 들려오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고 들려왔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처녀 탄생이라니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입니까? 아담과 이브이래 남녀의 융합이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만은 아무 남자도 관계가 없고 하나님 자신이 아버지요 마리아가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는 어머니의 품에 안기워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어떤이는 동정녀 탄생을 못믿겠다는 이가 있으나 성경의 말씀을 못믿으면 무엇을 믿겠으며 천지를 장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쯤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이태되신 분이 아니라면 나는 안믿겠습니다. 그분이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인데 무슨 숭배할 것 까지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다 남자의 후손이지만, 예수님만은 여인의 후손으로 죄없는 사람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은 네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말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닌라"고 예언했습니다. 저는 그전에 마리아도 죄인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죄가 없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여러분 여자는 밭이라면 남자는 종자입니다. 밭은 콩을 심거나, 팥을 심거나, 심어 주는대로 내 놓기 때문에 종자를 결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 이와 같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셔서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요사이 어느 과학자가 말하기를 어느 서 식 동물은 숫놈이 없이도 새끼를 낳기 때문에, 성령의 잉태설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삶의 신비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기록한데가 몇 곳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입에 궤사가 없으시다"(벧전 2:22)라 했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서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비교적 선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완전한 사람은 한분 밖에 없습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악한 것이라고는 한가지도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에서 악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수 없습 니다.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우리는 그에게서 허물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게 되었으니 아무날 아무시에 다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인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날이 되서 관을 강단앞에 놓고 주위에 꽃을 장식하고 설교를 하는데, 고인이 누구라고는 하지않고 이 사람도 죄를 짓다가 죽은 사람이므로 영원한 슬픔을 다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설교를 끝마치고 누군지 알고 싶으면 한사람씩 이 관속을 들여다 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와서 들 여다 보는 사람, 자기의 얼굴이 비쳤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루도 일분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해서 보게 했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기도 했 고 문둥이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므로 신비한 일들로 꽉 찼습니다. 오늘날도 그 믿음으로 많은 병자가 고침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착한 일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 의 말씀은 세상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훌륭한 진리의 말씀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기다리는 영광스러운 천국에 대해서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도 신비로웠습니다.

 

3.죽음의 신비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도 죽어보지 못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어떤이는 희생적인 죽음을 죽기도 하고 어떤이는 큰 업적을 남기면서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아도 되었었습니다. 그는 생 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해서 그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아침 일지기 십자를 짊어지워서 골고다로 향해 끌어 갔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 밑에 몇번이고 몇번이고 한없이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다가 구레네 시몬이 그 십자를 떠메어 가지고 갔습니다. 골고다 산정에 이르러서는 상처나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눕히고 굵은 쇠못을 양 발과 양 손에 사정없이 망치로 내리 박았습니다. 그 망치소리, 그 십자가를 구덩이에 털석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리는듯 합니다. 6시간이는 긴 시간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고 해도 그 빛을 읽었습니다. 마침내 오후3시가 되어서 고뇌와 저철한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 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죄를 씻는 샘이 터졌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구속받은 죄인을 위해 영광의 문을 열으셨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받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미국에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 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읍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하더랍니다. 가 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알닭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닭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닭은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요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읍니다. 예수님은 움직일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 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는 멸망 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4.부활의 신비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서 무덤에 장사했으나 지상의 어떤 무덤도 그를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제 삼일째 되던날, 살아 나리라고 예언하셨던대로 무덤에서 걸어나와 영원히 살아나셨습니다. 그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명했습니다. 또 그의 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였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부활은 그의 신성을 증거합니다. 해리 린멜 박사가 고관인 모스렘교도와 주고 받은 말입니다. (해리린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음을 믿는다. (모스렘 교도)-우리도 그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창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도 그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우리도 코란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모슬렘 교도) - 우리도 모하메드를 통해서 계시한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 예수님을 믿는자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 (모슬렘교도) - 우리도 모하메드가 그 백성을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예수님은 부활하신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는 그 선지자의 죽은 후에 관해서는 모른다. 옳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부처 도 모두 그 무덤 앞에는 "그가 여기 누워 계시다"고 묘비가 새겨 있으나 예수님의 무덤 앞에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고 한 천사의 말을 기억하게 됩니다.

 

5.승천의 신비

1961년 봄에 한 사람이 우주에 올라갔을때, 온 세상이 인간의 과학에 놀라고 떠들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주로 올러간 첫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읍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세상에서 지내시다가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 위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그 들은 놀라서 입을 벌리고 바라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우주선이나 우주 로켓트를 탄 것도 아니고 우주복이나 헬멧을 착용한 것도 아니며 무슨 전자기구를 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구름을 타시고 올라 가셨읍니다. 천국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신 것이며, 우주 창조 이전의 영광으로 되돌아 가신 것입니다. 고향으로 되돌아 간 것과 같습니다. 천사도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고 모든 성도들이 기뻐하며 외친 것입니다. 승천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었음이 증명되었고 승천을 통해서 주가 만유의 주가 되심이 증명된 것입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이기셨고 승천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도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부활로 증거 되었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승천으로 보여 주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고 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면 성령이 오셔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히 역사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현재 사역의 신비

현재 예수님은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는 우리 위해 도고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는 펴지를 받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더 기쁜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의 이름을 아시고 사정을 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재림의 신비

구약성서에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초림을 예언했는데 해가 갈수록 그 소망이 희미해지다가 그 약속이 잊어버릴 즈음이 되었다가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그를 몰라 보았습니다. 그를 맞을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몇배나 더 말 씀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나감에 따라 예수님이 정말 재림하실까? 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니 그 약속은 헛된것이 아닌가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림과 같이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모든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었습니다. 헛 된 약속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은 우리 믿는 자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니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모든 믿는자를 끌어 올려 그의 형상과 같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성도들을 하늘에서 모으시고 그들과 함께 다시 지상에 오십니다. 그때 만물이 새롭게 되고 예수님은 의로 세상을 1,000년 동안 다스리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 재림하실때, 모든 성도들을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아 상급을 받게 하십니다. 이것은 상급 심판입니다. 행한 일이 없으면 상급이 없고 행한 일이 많으면 상급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후 1,000년 왕국시대가, 지난뒤 모든 불신자는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피하려면 지금 예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당신의 구세주를 영접해야 합니다.
- 아 멘 -



이스라엘 대통령 이란핵시설공격 가능성  높아져...

(서울=뉴스1 나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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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News1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이 이란 핵시설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페레스 대통령은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보고를속속 올리고 있다"며 이같이 경고했다. 그는 "국제사회는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고 덧붙였다.

AFP통신에 따르면국제원자력기구(IAEA)는 8일 내지 9일께 이란이 핵탄두를 미사일에 장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새로운 내용의 보고서를 회원국들에게 돌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아비도르 리베르만 이스라엘 외교부 장관은 이란 핵 시설이 매우 위협적이라고 전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이란에 새로운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국무총리와 에후드 바락 국방부 장관이 이란 공격에 대한 내각의 승인을 얻으려 한다고 이스라엘 하아레츠 신문이 전하기도 했다.

바락 총리는 군부와 정보기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나서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에서도 미국의 지원 없이 이란을 공격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하아레츠 신문이 지난 3일 공개한 이란 공격 찬반 설문조사에서 41%가 찬성, 39%가 반대했다.

이란은 자국의 핵시설이 무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밝혀왔다. 이란은 핵시설이 전력 생산과 의료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라고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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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종교 자유의 위기 가정 내 성경모임에 벌금형!

 

당국 “허가 없이 종교적 단체 설립·활동 금하는 법 위반” 종교자유 탄압 국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캘리포니아 주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 시의 척과 스테파니 프롬 부부는 최근 집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다는 이유로 300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시 당국은 프롬 부부가 조건부 사용 허가(CUP) 없이 거주 지역에서 종교적 단체의 설립과 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어겼다며 이같은 처벌을 내렸다.

 

척이 발행인인 기독교 음악 잡지인 ‘워십 리더 매거진(Worship Leader Magazine)’는 워십을 위해 필요한 영성 훈련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척은 그들이 매주 열고 있는 성경공부 모임은 이 잡지와는 무관하며, 또한 이 모임을 통해 어떠한 단체를 세우려고 한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스테파니는, “어떻게 우리의 집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이는 잘못된 일이고 슬픈 일이다”고 말했다.

 

한편 이 법은 해당 활동에 대한 민원이 있을 때만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변호를 담당하고 있는 퍼시픽저스티스인스티튜트(Pacific Justice Institute)측은 프롬 부부의 성경공부 모임이 일상적 대화 수준의 소리를 넘는 어떤 소음도 발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며, 시 당국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있는 도시로, 이 곳의 종교자유의 전통이 위협받고 있다고 이들은 우려했다.

 

가정에서의 성경 공부와 예배를 규제하는 미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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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의 성경공부와 예배 모임


이것이 마귀가 관장하는 세상의 인심이다. 다른 모임, 즉 먹고 마시고 춤추며 떠드는 모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경건한 모임인 성경공부 모임과 예배 모임을 허용할 수 없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이것이 오늘날 자연인들이 판치는 미국의 현실이다.

 

미국은 참으로 불행하게도 믿음을 잃어버린 나라로서 영적으로 파선한 난파선과 같다. 그 많은 인구 중에 겨우 소수의 무리들이 난파선의 돛대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가운 모습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위로를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세 때 일어날 일들 가운데 믿음 없음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한을 속히 갚아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시더라』 (눅 18:8).

 




출처:http://blog.naver.com/midas7000?Redirect=Log&logNo=120020060720

 

두 주요 교리의 학파-칼빈주의 학파와 알미니안 학파- 성경자료

 

http://blog.naver.com/midas7000/120020060720

히브리서나 마태복음 25장에서의 "징계와 보상"의 문제를 진지하게 살펴보시면 두 학파가 양극단으로 치우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래 글이 길지만 찬찬히 살펴보시면 두가지 다 옳지만 두가지 학파의 주장을 보완하고 균형잡아 주는 것이 바로 "징계와 보상"의 문제입니다.



1. 두 주요 교리의 학파

이 점에서 우리는 두 주요 교리의 학파-칼빈주의 학파와 알미니안 학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칼빈聆� 학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과 예정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 학파에 따르면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더 이상 문제가 없으며, 일단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우리의 구원은 영원토록 안전하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한복음 10장 28절부터 29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의 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들에 따르면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멸망할 수 없다. 의심할 바 없이 칼빈주의는 일단 우리가 구원받으면 우리가 영원토록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이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들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너무 지나쳐 나간 것이다. 우리가 구속받고 거듭났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구속받고 거듭났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아이는 가장 어리석은 아이다. 그렇다. 우리는 거듭났지만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멸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히브리서 6장과 같은 말씀을 사용하여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늘에 속한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된 사람들이 떨어질 수 있으며, 회개할 기회가 없을 것이며,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불살라진 땅과 같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서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고들을 포함하고 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나 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형벌, 즉 다시 멸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오용하고 있다. 그들은 이 말씀들을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멸망할 수 있다는 그들의 가르침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부분의 말씀을 그들의 가르침과 조화시킬 수 없으므로 여기에 언급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된 사람이 거짓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엉뚱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나 또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징계에 관한 성경 말씀을 조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국 안에서의 상과 징계의 문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국 안에서의 상과 징계에 대한 이 문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다리이다.


2. 은혜와 책임

칼빈주의자들은 절대적인 은혜의 문제를 강조하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거룩한 은혜는 인간의 책임을 위한 것이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말했다.『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40). 베드로는 흠정역이 번역하는 바와 같이 『너희 자신을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한다. 너희 자신을 구원하라는 말은 너희 자신이 이것을 하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원을 받으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하지만 당신이 그로 하여금 그것을 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우리의 동역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그녀의 어린아이에게 『너 스스로 먹어라.』고 말하지 않고 『받아먹으렴. 말썽부리지 말고 네 입을 다물지 말고 입을 벌려서 받아먹어. 잘 받아먹고 그것을 삼켜라.』고 말할 것이다. 구원이 절대적으로 은혜의 문제일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구원받기를 원해야 하며 기꺼이 주님을 믿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 기꺼이 믿는 것은 우리의 책임으로서 곧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동역하는 것이다. 은혜가 우리에게 미칠지라도 우리는 모두 기꺼이 주님을 믿어야 하며, 그분을 앙망해야 하며,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하며, 은혜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단지 재능만 갖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없다. 우리의 재능에 더하여 우리는 주님에 의한 재능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재능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달란트를 사용해야 한다. 오직 우리가 달란트를 사용할 때 이익이 올 것이다. 이익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지만 이 은혜가 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달란트를 사용하고, 우리의 기능을 발휘하고 행사하는 것에 근거한다.


3. 히브리인들을 향한 경고들은 왕국 보상을 놓치고 하나님께 징계 당하는 것을 말함

우리가 본 대로 오는 왕국에서 상을 잃어버리는 것, 즉 장자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상을 잃고 손실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며, 여전히 『구원을 받으나 불을 통과하여 받은 것 같을 것이다』(고전 3:14-15, 헬). 이것은 이 책의 다섯 가지 모든 경고들에 기본 관념으로 주어졌으며 그 모든 경고들에 충만하다(2:3, 4:1-11, 6:8, 10:27, 29-31, 12:25). 이 경고들의 모든 소극적인 점들이 오는 왕국에서 상을 잃어버림을 당함과 하나님에 의해 징계받는 것에 관계되어 있는데 비해 모든 적극적인 점들은 보상과 왕국의 누림과 관계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서신들도 모두 동일한 관념, 즉 왕국의 보상이나 또는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결론 맺고 있다. 오직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마태복음 5:20, 7:21-23, 16:24-27, 19:23-30, 24:46-51, 25:11-13, 21, 23, 26-30, 누가복음 12:42-48, 19:17, 19, 22-27, 로마서 14:10, 12, 고린도전서 3:8, 13-15, 4:5, 9:24-27, 고린도후서 5:10, 디모데후서 4:7-8, 히브리서 2:3, 4:1, 9, 11, 6:4-8, 10:26-31, 35-39, 12:16-17, 28-29, 계시록 2:7, 10-11, 17, 26-27, 3:4-5, 11-12, 20, 22:12에 있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합당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이 없이는 이러한 구절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잘못되거나 또는 칼빈 학파의 극단적인 객관성이나 알미니안 학파의 극단적인 주관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왕국의 보상을 보지 못했으며, 더욱이 그들은 왕국의 보상을 잃어버리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두 학파는 모두 이 구절들 안에 있는 모든 소극적인 요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간주한다. 칼빈 학파가 영원한 구원 즉 어떤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그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이 모든 소극적인 요점들을 거짓 믿는이들의 멸망으로 간주하는데 비해 알미니안 학파는 어떤 구원받은 사람이 타락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믿으며 그 소극적인 요점들을 타락한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형벌에 적용한다. 그러나 완전한 성경의 계시는 이 소극적인 요점들이 왕국의 보상을 잃어버리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구원은 영원하며 일단 우리가 그것을 받으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잃지 않는다(요 10:28-29).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왕국의 보상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전 3:8, 14-15). 히브리서에 있는 모든 경고들은 영원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 보상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 믿는이들은 왕국을 받았지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하나님의 새 언약의 길로부터 물러난다면 그들은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보상을 잃을 것이다. 이것이 머뭇거리는 히브리 믿는이들에 관한 저자의 주요 관심이었다.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게으른 종을 거짓 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당신의 자녀 중 하나가 게으를지 모르나 이것은 그가 거짓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왕국 보상의 문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게으른 종을 거짓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 게으른 종은 타락해서 그의 구원을 잃어버린 참된 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이 그의 형상으로 그분을 표현하고 그의 다스림으로 그분을 대표하며 땅을 소유하는 단체의 사람을 갖는 것이었음을 보았다. 이것이 합당한 인간 생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며 그 안에는 세 방면의 장자권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제사장들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왕들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하여 잃어버린 땅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장자권 안에 산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왕국의 실제 안에 있게 되는데 이는 왕국의 실제가 장자권, 즉 장자권 전체의 실제를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기꺼이 동역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장자권을 상으로 정하셨다. 만일 우리가 은혜를 취하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동역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장자권을 살아낼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늘날 왕국의 실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내는 실제는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우리의 보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의 성취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온전케 됨이요 영화롭게 됨이요 오는 시대에서 우리의 혼을 얻음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높여지고 부활한 인성을 가지고 합당한 인간 생활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온 성경의 중요한 초점이며 성경은 그것에 대해 매우 일관성이 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오직 우리가 영으로 돌이키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모든 풍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생명의 법으로 하여금 우리를 침투하게 하고 우리를 적시게 하고 피의 형상을 본받게 함으로 우리를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이끌도록 허락함에 의해서이다.

히브리서 12장 29절은 『우리 하나님은 또한 소멸하는 불이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은 그분의 본성이다. 그분의 거룩한 본성과 부합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소멸하는 불이신 그분에 의해 소멸될 것이다. 만일 히브리 믿는이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일반적인(거룩하지 않은) 것이었던 유대교로 빗나간다면 그것은 그들을 거룩하지 않게 만들 것이며 소멸하는 불이신 거룩한 하나님은 그들을 소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 아니라 또한 거룩하시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케 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의롭게 될 필요가 있다. 그의 거룩함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우리는 하늘에 속한 현재의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별되어야 하며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로마서가 하나님의 의를 인해 칭의의 문제를(롬 3:24) 강조하는데 비해(3:25-26)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해(12:14) 성별의 문제를 강조한다(2:11, 10:10, 14, 29, 13:12). 이 때문에 히브리 믿는이들은 그들 자신을 거룩하지 않은 유대교로부터 새 언약 아래서 아들 안에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신 거룩한 하나님께로 분별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낡고 망령된 종교로 더럽힘으로써 소멸하는 불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소멸될 것이다. 그것은 「무서울」 것이다(10:31)! 바울이 「주의 두려우심(무서움)」을 매우 관심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후 5:11).

히브리서의 초점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이끄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행정을 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행정을 범하는 것은 하나의 다스림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그분의 행정을 범하는 것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행정적인 경륜에 그분과 동역하지 않고 도리어 그분의 행정을 범한다면 우리를 징계하시리라는 것을 계시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적극적인 면에서 왕국의 보상을 잃어버리게 되고 소극적인 면에서 징계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0장과 12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취하고 달리고 통과해야 할 길과 경주와 길들을 본다. 이 장들에서 우리는 또한 징계와 보상과 왕국을 본다. 이 세 가지 것들은 이 책의 구성에 있어서 기본적인 관념의 중요한 세 방면이다.

신약의 어떤 책도 히브리서만큼 분명하게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을 계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책도 우리에게 지성소와 법궤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을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2절이 생명의 그 영의 법을 언급하고 있지만 히브리서는 로마서보다 더 철저하게 생명의 법을 다루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계시를 취하도록 우리에게 경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행정적인 경륜을 범함으로 인하여 어떤 징계를 당할 것이다. 실체화시키는 감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나 또는 그것을 사용하기를 실패한 사람들은 이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지만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 메시지들에서 본대로 하늘에 속한 계시의 빛 비춤 아래 우리는 곧바른 길 위에서 경주를 달리는 데 심각하고 진지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달리는 길은 우리의 장래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장래의 운명에 대하여 염려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은혜를 얻어야 한다. 『주여, 당신의 은혜로 나는 나의 운명을 염려하지 않으며 나는 오직 당신의 경륜을 관심합니다. 당신은 나의 운명을 관심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경륜을 관심할 것입니다. 주여, 나는 나의 장래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당신의 경륜을 인하여 당신과 동역하기 원합니다. 나는 수 세기를 통하여 수행되지 않았던 당신의 경륜이 오늘날 성취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발전시킴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가운데서 성취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을 추구하는 진지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지성소 안으로 인도하사 그들로 생명의 법을 체험케 하시어 표준 모형, 즉 그의 맏아들의 단체적인 재생산이 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이 단체적인 재생산에 달려 있다. 이것이 완성되기 전에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가 표준 모형의 재생산을 가지시는 것은 우리 안에서의 생명의 법의 역사에 달려 있다. 우리가 본 대로 생명의 법은 바깥 마당이나 성소에 있지 않고 지성소 안의 증거궤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증거궤 안으로 뛰어들어야 하며 생명의 법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법이 우리의 영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의 긍휼과 은혜로 나는 여기에서 당신과 동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전진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여, 당신이 하실 수 있는 것과 당신이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나는 내 장래의 운명을 주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오늘날 당신의 회복의 경륜과 합당한 교회 생활의 회복을 주의합니다. 주여,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이 길 안으로 당신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을 인도하소서!』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주님의 회복이다.
내용출처 : 한국복음서원 『히브리서 라이프스타디』 메시지 21번, 54번

이슬람 교리를 가르치는 파키스탄의 ‘마드라사’는 현재 1만5000개가 넘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르치는 것은 이슬람 교리만이 아니다.

상당수 학생이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실전 테러 훈련을 받고 있다. 7~19세의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건 주로 폭탄제조 기술, 자살폭탄 테러 방법 등이다.

고국을 찾는 상당수의 파키스탄계 영국 젊은이도 이런 과정을 거쳐 ‘이슬람 전사’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과 영국 등에서 각종 테러를 일으키고 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10년째 하고 있지만, 알 카에다와 탈레반은 이렇게 소리 없이 세력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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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무장한 탈레반 군인들

2005년7월7일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지하철·버스 동시다발 자살폭탄 테러로 56명이 사망하고, 7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7월7일에 발생했다고 해서 ‘런던 7·7테러’로 불리는 이 사건의 범인은 4명이었다. 테러범들은 4.5㎏짜리 폭탄배낭을 메고 킹스 크로스 역에 집결해 각자 목표물을 향해 흩어진 후 폭발물을 터뜨렸다.

테러범들은 현장에서 전원 사망했다. 유혈이 낭자했던 그 사건의 범인 4명은 모두 파키스탄계 영국인이었다. 이 테러는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한 내국인에 의한 자살폭탄 공격이었다.

 

런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으로 피폐화된 바 있고 1970~90년대는 북아일랜드공화군(IRA)의 잇단 테러로 몸살을 앓은 적은 있지만, 자국민에 의해 안보를 위협당한 건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영국판 9·11테러로 불린 이 사건의 범인들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영국 북부 리즈의 가난한 동네에 살던

모하마드 시디크 칸, 셰자드 탄위르, 저메인 린지, 하시브 후세인이었다.

리즈 시는 인구의 15%가 이슬람계로,,,


美-英, 이란 핵시설 공습계획 준비중”

 

英 가디언 “우라늄 농축 우려로 오바마 결단 임박”
이스라엘도 “모든 가능성 논의”… 선제공격 가능성

 

이란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미사일 공습을 위주로 한 ‘비상 계획(컨틴전시 플랜)’을 준비 중이라는 보도가 나와 파장이 예상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일 이란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미국이 이란의 핵심 핵시설에 대한 미사일 공격 계획을 추진할 것으로 영국 국방부는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군은 이에 대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갖춘 해군과 잠수함을 앞으로 몇 개월 내에 어디에 배치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영국군은 실제 공격이 이뤄질 경우 미국이 인도양의 영국령인 디에고가르시아 섬을 미사일 발사 등을 위한 군사기지로 사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내년 11월 대선 전에는 새로운 군사적 모험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란의 호전성과 우라늄 농축에 대한 우려가 커져 미국의 태도가 바뀔 수도 있다고 영국 관리들은 보고 있다.

미국 강경파들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다음 주 발표할 보고서에서 이란의 핵무기 개발 계획 진전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강한 군사적 조치를 취하라고 미 행정부를 압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IAEA 보고서가 이란이 진행한 ‘연구와 실험’에 대해 유례없이 자세한 내용을 담아 (국제사회가 강경 대응으로 돌아서게 하는) ‘게임 전환자(game changer)’가 될 것이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이란은 지난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투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컴퓨터 바이러스 ‘스턱스넷’에 의해 상실됐던 핵시설 원심분리기의 기능도 모두 회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방 관리들은 이란이 1년 안에 요새화된 벙커에 핵무기 비밀 제작에 필요한 물질들을 은닉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내년 봄이 ‘중대 결정의 시기’가 될 수 있다고 한 영국 관리가 말했다.

 

군사 작전이 시작되면 사거리 800마일(약 1287km)의 토마호크 미사일 등을 사용한 공습과 일부 해군의 개입이 주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영국 정부 관계자는 지상군 투입은 없을 것이며 소수의 ‘특수부대’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도 연일 ‘대(對)이란 공격설’이 나오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될 경우 중동지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핵 시설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아비그도르 리에베르만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선제공격 관련 보도를 부인하면서도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2일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서방이든 이스라엘이든 이란 핵시설을 겨냥한 군사 행동을 감행하면 중동은 다시 긴장과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이란은 중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도 더 커질 수 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세계 최고의 리더십 전문가이자 성공학 강사 존 맥스웰이 전하는
“나와 세상을 행복으로 이끄는 아주 특별한 인간관계의 법칙”

나와 타인의 삶을 바꾸는 강력한‘변화’의 힘! 영향력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한다.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자신의 저서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는,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리더십 전문가이자 성공학 강사로 알려진 존 맥스웰도 피터 드러커와 같은 생각을 오랫동안 세상에 전파해온 인물이다. 저자는《존 맥스웰의 위대한 영향력》을 통해 이처럼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실천해야 할 10가지 삶의 태도와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끌어당겨 행복과 성공으로 이끄는 힘을 ‘영향력’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영향력의 질과 수준이 바로 삶의 질과 수준을 바꾸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과 타인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지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지독히도 평범했던 사람이 중요한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한 사례들을 통해 보여주고 크고작은 말과 행동이 어떻게 인간관계와 삶의 수준을 바꾸는지 조목조목 짚어준다.
한마디로 이 책은 인생의 가치를 두 배로 키워주고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또 삶에 걸려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놀라운 지혜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공동 저자이기도 한 짐 도넌의 아들인 에릭은 이 책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실제인물이다. 이 책에는 태어나자마자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던 에릭이 실의에서 벗어나 정상인보다 더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기까지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부모와 친구, 주변 사람들, 훈련 파트너 등이 보여준 ‘영향력’의 위대한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소중한 인생에 꼭 필요한 10가지 지혜와 단계별 실천법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간다. 박지성 선수나 반기문 총장처럼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람도 있고, 작은 말 한마디로 울고 웃는 연인처럼 정해진 관계 안에서 영향력을 주고받는 관계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모두 부모, 자녀, 친구, 연인, 상사, 동료, 교사, 학생, 종교인, 비즈니스맨, 경영자, 소비자 등 수많은 인간관계의 고리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생을 완성시켜간다. 그러나 정작 서로에게 유익한 영향력을 주고받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인생의 성패 여부는 바로 어떤 영향력을 어떻게 주고받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부모가 아이에게 똑같은 얘기를 해도 아이가 엄마보다 아빠의 말을 잘 듣는다면 아이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아빠이다. 또 회사에서 김부장을 어떤 이는 좋아하고 어떤 이는 싫어한다면 김부장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전자이다. 즉, 관계의 차이가 곧 영향력의 차이이며, 흔히 말하는 ‘존재감’의 차이가 곧 ‘영향력’의 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달하고, 서로에게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까? 존 맥스웰은 진정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으로 10가지 태도를 꼽고 있다.
ⓛ 매순간 진실하라(Integrity)
② 믿음과 격려로 양육하라(Nurtures)
③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라(Faith)
④ 타인의 말을 경청하라(Listens)
⑤ 인정하고 이해하라(Understands)
⑥ 더 크게 성장시켜라(Enlarges)
⑦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함께 항해하라(Navigates)
⑧ 특별한 관계를 맺어라(Connects)
⑨ 권한을 부여하라(Empowers)
⑩ 또다른 리더를 양성하라(Reproduces)이다.

공교롭게도 첫 시작자의 이니셜을 조합하면 INFLUENCER(영향력 있는 사람)가 된다.
또한 저자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4단계’를 설정하고 ⓛ역할모델 되기→②동기부여 하기→③멘토 되기→④확장하기 과정을 소개한다. 각 단계별로 해야 할 역할과 태도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신중하고 중점을 둬야 하는 자세를 소개한 것이다.
영향력은 변화를 만들어가는 리더들이 갖춰야 할 자세라는 측면에서 리더십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저자는 ‘영향력’이 멘토링, 리더십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반드시 리더만이 갖춰야 할 덕목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남녀노소, 지위고하, 관계대상을 막론하고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생의 기본 자세라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자세 그리고 사소하지만 인생을 바꾸는 습관이자 태도로서 10가지 덕목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인생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영향력이 없다면 성공도 없다. 물건을 더 팔고 싶은 세일즈맨이라면 고객에게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고, 경영의 성공은 직원에게 미치는 CEO의 영향력의 크기에 달려 있다. 목사는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며, 코치는 선수에게, 부모는 자녀들에게, 교사는 학생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쳐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회자되거나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하는 위대한 전파자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책은 경영 문제로 고민하는 경영자부터, 자녀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부모, 학생과의 관계에서 당황하는 교사는 물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수많은 직업군의 사람들이 갖춰야 할 기본 자세를 알려준다. 또한 부부, 직장인, 친구, 연인, 세일즈맨 등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거나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긍정적인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특히 저자가 교회 목사인 만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길 간청하는 종교인들이라면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가 가득하다.
누군가가 뿌린 작은 사랑의 씨앗이 세상을 바꾸고, 누군가의 작은 격려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이 책은 누군가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도록 위대한 힘을 전해주는 작은 희망의 씨앗이다. 소중한 내 인생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이다.

 

 

매일경제 기사--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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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홍수

 

 더블린 물난리

 

 

 

 

태국물난리

 

 

IT업계 "태국 홍수가 日 대지진보다 심각"

박수형 기자 psooh@zdnet.co.kr 2011.10.24 / PM 02:56 태국, 홍수,


IT 업계 전반에 태국 대홍수 여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부품 생산은 물론 일부 완제품 제조기지가 태국에 대거 몰린 탓이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태국 홍수에 따른 IT 산업에 끼칠 악영향이 올초 일본서 발생한 대지진보다 클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는 피해 기업의 수가 일본 지진 때보다 많고,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등 부품 공장이 대거 몰려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완제품 조립 공장도 인건비가 싼 태국에 많이 위치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홍수로 인해 사회 인프라망 피해가 커 복구까지 걸리는 기간이 일본 대지진보다 길어질 것이라고 업계는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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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대홍수로 IT 업계 전반에 큰 타격을 줄 전망이다. <사진 = 美 CBS NEWS>

■HDD 가격 폭등 조짐, PC업계 직격탄

 

이번 홍수로 피해가 가장 심각한 곳은 HDD 업계다. 태국은 HDD 생산량 2위 국가로 웨스턴디지털, 히타치, 도시바 등의 생산 공장이 홍수 피해를 입었다. 현재 생산 재개는 물론 공장 복구 시점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업계 한 관계자는 “HDD 제작에 쓰이는 모터, 헤드 등을 생산하는 주요 부품 업체도 수해를 입어 당분간 공급 중단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HDD 생산 정상화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웨스턴디지털의 경우 아예 다른 나라로 공장 이전 계획도 고려중이다.

 

당장 연말을 앞둔 PC 제조사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연말부터 연초 신학기까지 이어지는 성수기를 앞두고 있다. PC업계는 주로 이 시기에 그해 전략 제품을 대량 생산하기 때문이다. 대만 PC 업체 관계자는 "PC 가격 상승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며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탑재 노트북이 대안이 될 수도 있지만 가격도 비싸고 무엇보다 수량도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소비자용 PC 외에도 서버, 외장하드, NAS 등 HDD 수요가 높은 점도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조립PC 이용자들이 구입하는 소비자 시장은 벌써부터 높은 가격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당분간 제품 입고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한 소매상들이 이미 판매가를 20~30% 가량 올렸다"며 "재고가 바닥이 보이면 최대 2배까지도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지털카메라, 日 지진 이어 '또'

 

지난 봄 일본 대지진 여파를 톡톡히 치룬 디지털카메라 업계는 다시 생산 차질을 빚게 됐다. 본국인 일본과 중국, 태국 등에 생산기지를 따로 둔 업체가 대부분이지만, 태국 공장 피해가 예상보다 큰 것으로 알려졌다.
미러리스 카메라 신제품 넥스-7 출시를 앞두고 있던 소니는 출시 발표 연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반투명 미러를 탑재한 알파65 생산 역시 태국에서 이뤄진다. 소니 카메라 주력 제품군 생산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특히 소니 카메라 공장이 위치한 아유타나 지역은 홍수 피해가 극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니콘 역시 소니 공장과 인접한 곳에 위치해 생산이 중단된 상태다.

 

니콘도 소니처럼 주력 제품 유통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보급형 DSLR 카메라 생산기지가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니콘이미징코리아 관계자는 "생산 중단이 장기화되면 국내 카메라 유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제품별 국내 재고 상황이 달라 일부 카메라는 이른 시기에 공급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니콘이 발표한 미러리스 카메라 니콘1은 중국에서 생산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회사측은 설명했다.

 

캐논과 파나소닉은 카메라 생산과 관련해 직접적인 피해는 없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지진 피해를 수습한 후 잇따라 전략 제품을 발표한 상황에 닥친 피해라 생산과 유통에 겪는 어려움이 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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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칠레)=AP/뉴시스】최성욱 기자 = 칠레 정부가 26일(현지시간) 체로 허드슨 화산 폭발에 대한 적색경보를 발령하고 반경 40㎞ 이내에 주민대피를 지시했다.

칠레 로드리고 힌즈페터 내무장관은 이날 화산 폭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화산 인근 지역에 총 97명이 거주하고 있어 대피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남안데스화산관측소는 25일 밤부터 체로 허드슨 화산의 움직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며 이 지역의 지진 활동과 관련돼 있다고 보고했다.

체로 허드슨 화산은 수도 산티아고애서 남쪽으로 1600㎞ 떨어진 곳으로 1991년 폭발 당시 대규모 재산 피해와 항공대란을 야기했다.

한편 칠레에서는 앞서 지난 17일에도 푸예우에 화산이 폭발하면서 날아온 화산재 구름으로 남미 국가들의 항공기 운항이 차질을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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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

 

 

 

 

예루살렘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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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화약고인 예루살렘에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는 찬송 소리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총성 속에 엘리야가 들었던 세미한 음성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도성 예루살렘의 하늘 위로 올려지고 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 23:35)

 

현지 예루살렘에서는 전쟁 가능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랍비들조차 예수께로 돌아오는 영적회복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세계뉴스를 접할수록 종말에 관한 성경말씀을 상기하게 되는 시대이다. 특히 이스라엘에 관련된 상황과 말씀은 민감해진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7).

 

한세기 간격으로 통계를 낸 지진, 기근과 민족 간의 전쟁 발생 그래프를 보면 19세기까지는 평평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래프 경사가 갑자기 70도 이상의 급경사로 치솟는다.

 

필연적 성경에 기록된대로 이스라엘이 국가로 재건된 1948년을 기점으로 더욱 선명히, 컴퓨터와 핵발전 등 과학문명의 진보도 같은 함수관계이다.

 

그런데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만큼, 지구는 더욱 타락하고 위험해지고 있으며 미래는 불확실해지고 어두워져가고 있다. 세상의 윤리도 임박한 심판으로 다가서고 있으며, 주님이 다시오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부로서 준비되지 못한 교회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주님의 신부된 교회의 상태는 어떠한가? 역사 속에서 개혁을 시도할수록, 개혁되는 만큼 교파는 분열되고 초대교회의 생명력과 삶으로부터 멀어져 왔다.

 

세상은 성경에 기록된 죄 가운데 더이상의 타락을 전개시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주의 재림이 임박한 것 같으나, 교파로 분열된 이 세대의 교회는 아직도 먼 성숙의 기간이 필요한 것 같은 역설적인 모순, 이 두 가지의 공백 사이에, 이스라엘과 유대 그리스도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존재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한대로 역사의 기적처럼 2500여년만에 이스라엘은 국가로 재건되었고, 성경 안에만 갇혀있던 히브리어가 유대인의 언어로 복원되었으며, 사도행전 이후 교회사에서 사라졌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최근 20년 사이에 이방교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나라로 회복되어 구약의 예언말씀이 성취되면서부터 멈추었던 종말을 알리는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 유대인들이 주님께 돌아옴으로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현 중동의 정치상황을 에스겔 37장과 같은 예언말씀과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 사이에서 바라보고 있다. 세계 어느 국가가 자기 나라의 현 상황을 성경에서 직접 인용할 수 있을까?

종말을 향한 긴장감을 주는 세상에 대한 우려와 신부로서 아직 준비되지 못한 교회의 모순 사이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이방교회에 외치는 말씀이 있다.

 

“저희(유대인)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롬 11:15).

 

유대인으로서 리차드 범브란트는 이 말씀을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교회, 그 교회가 커지고 있으나 생명력에 있어서 왜 쇠해가는지 그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가 지난 15세기 동안 오류를 범하고 쇠퇴하는 가운데서 유대인을 보류해 두셨다. 교회를 완성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방교회에 실제적인 깊은 의미를 주도록 유대인은 고난 가운데 예비되었다. 현재의 교회가 교회의 참모습의 전체라고 생각하지 말라. 유대인이 주님께 돌아올 때 유대인은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교회에 부여할 것이다.”

 

유대인이 버려진 동안 교회는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는 양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헬레니즘의 특성상 확산과 성장이 강조되고 교파분열은 어쩔 수 없던 결과라고 유대인들은 말한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가 긴박하게 성취되는 가운데 이방교회가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종말론적인 딜레마이다. 현재를 개혁하지만 분열을 거듭해온 헬라화된 이방교회의 한계이다.

유다이즘은 헬레니즘과 비교해 볼 때 다양성보다는 일체성을, 성장보다는 성숙을, 효과보다는 본질을, 열매보다는 뿌리를 먼저 중요시한다.

 

유대인들이 주께 돌아올 때에 이방교회는 참 감람나무인 유대적인 본질로부터 도움을 얻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는 것 같은 질적 성숙이 일어날 것이다.

개혁(Reformation)이란 용어 자체가 헬라적이다. 유대인들은 회복(Restoration)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초대교회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 중에 현대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재림에 관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행 3:21).

 

이원론적인 헬라적 시각만으로는 계속 타락해가고 어두워지는 징조를 강조하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종말론에 치우치기 쉽다. 그래서 이런 종말론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교회가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소극적이 되고 세상을 방관하게 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야가 다시 올 시기는 믿는 무리를 통해 만유가 회복될 때이다. 어두워져 가는 마지막 때의 흑암 가운데 새벽별빛이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상황을 살피는 종말론이 아니라 메시야를 모셔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만유를 회복시키는 종말론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세계인구의 0.33%밖에 되지 않으면서 강대국들의 경제, 정치, 과학, 문화의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유대인들은 실제적인 인구비율에 상관없이 그러하다. 헬라적 종말론안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동안, 유대적 종말론을 가진 유대인들은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이스라엘에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를 묻던 유대인들(행 1:6)에게 예수님은 먼저 엘리야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다(마 17:12).

 

예수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을 잊은 제자들은 때와 징조에 대한 관심만을 가진 것을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성전에서 만유의 회복을 상기시킨 설교를, 오늘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교회에 다시한번 반복하고 있다.

끝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재림찬송을 들은 구절을 소개하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 23:37~3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찬송할 때까지 주의 재림시기가 보류된다는 뜻이다. 긴박한 종말론이 유행할 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아직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주님이 오실 수 있느냐고.

 

그런데 이곳 예루살렘에서는 현재 전쟁 가능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랍비들조차 예수님께 돌아오는 영적 회복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황폐하여 버린바 된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에서 유대인들은 한맺힌 통곡의 기도를 올리고 있으나 그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상 두번째로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화약고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신앙이 회복되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는 소리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총성 속에 엘리야가 들었던 세미한 음성처럼 주님이 다시오실 도성 예루살렘의 하늘 위로 올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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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구원론 연구

신원균 목사

Ⅰ. 서론

Ⅱ. 본론

A. 구원의 질서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

B.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의 견해

차이

1. 개혁파의 견해

2. 루터파의 견해

3. 로마 카톨릭의 견해

C. 칼빈의 구원론에 대한 이해

1. 구원론에 대한 원칙들

a.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짓된 가르침이다.

b. 하나님께서 의롭다 絿척� 것은 인간의 협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d. 택자에게 주신 칭의의 은사는 상실되지도 않으며, 고해성사와

같은 어떠한 내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기독교 강요의 구조와 구원론

a. 기독교 강요(1559)의 전체구조 가운데 3권의 바른 이해

b. 기독교 강요(1559) 3권을 통해 살펴본 구원의 서정

(1) 말씀과 성령의 신비적 연합에 관하여

(2) 신앙에 관하여

(3) 중생, 회심, 성화에 관하여

(4) 칭의에 관하여

(5) 예정, 견인에 관하여

Ⅲ. 결론

 

 

Ⅰ. 서론

 

우리는 흔히 도르트 신조를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일컫는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도르트 성직자들이 당시 이단이었던 알미니안주의자들을 대항할 때 칼빈의 가르침을 근거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잘못을 가리기란 오늘날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구원에 관련된 그들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고, 어쩌면 칼빈의 가르침이나 도르트 성직자들의 가르침보다 널리 보급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의 내용을 읽고 이것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인지, 아니면 도르트 성직자들의 가르침인지 판단해 보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믿어 같은 신앙과 신앙의 같은 순종 가운데 그의 생의 마지막까지 보존된 자들을 그러한 자로서 보존하시기로 결정하였던 결정이나 의지가 선택의 유일하고 온전한 결정이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그럴 듯 하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믿어’라고 하기 때문에 마치 도르트 성직자들의 가르침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리고 선택을 인정하기 때문에라도 그렇게 오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예지 예정을 말하고 있고 신앙의 공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달리 도르트 성직자들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부터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아담 안에서 그와 함께 타락하였으며 죄가 있고 부패한 그의 씨와 후손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하셨는데, 같은 기뻐하심 가운데 그들을 은혜롭게 그리고 능력있게 부르시며, 믿음으로 은혜를 주시며, 의롭다 하시며, 중생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하시며, 그리고 이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것들 이후에 결국에는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하나님의 것으로 특별히 정하셨다”. 이 말은 결국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제한된 백성을 무조건으로) 선택하여 주시고, 거절할 수 없는 은혜로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구원의 전 과정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사고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칼빈의 가르침을 좇은 도르트 성직자들의 대표적인 견해였던 것이다.

 

본 글은 먼저 구원의 질서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의 견해의 차이를 살피되 Louis Berkhof의 조직신학의 도움을 받기로 하겠다. 끝으로 칼빈의 구원론에 대해서 살필 때, 구원론에 관한 대원칙이라고 말할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그의 기독교 강요(1559) 구조와 구원론을 살피기고 하겠다.

본인이 칼빈의 구원론을 짧은 식견으로 연구하고 이것을 글로 작성하여 소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본인이나 독자들이 본래 알미니안주의적 가르침이라는 토양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일은 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개혁주의적 가르침을 소개받았기에 이 일에 더욱 전념하여 좋은 결실을 맺길 소원할 뿐이다.

 

Ⅱ. 본론

 

A. 구원의 질서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구원의 질서를 정하셨음을 안다. 구원의 질서(ordo salutis)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거룩한 지혜와 은총으로 실행하시기 위하여 정하여 놓으신 순서 혹은 과정을 의미한다. 구원의 질서에 대한 순서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쳐지고 있다.

구원의 순서는 전적으로 주권적 은총에 의하여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하고 있다. 이같은 의미에서 은총론은 곧 예정론이며 예정론은 곧 은총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파에서는 성령의 구원사역의 순서를 하나님의 예정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와의 결합(또는 연합), 소명, 중생, 홰개, 신앙,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광화로 보고 있다.

처음부터 이러한 순서로 구원의 질서를 이해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작성되었다.

제10장 유효한 부르심

제11장 칭의

제12장 양자됨

제13장 성화

제14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

제15장 생명에 이른 회개

제16장 선행

제17장 성도의 견인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

제19장 하나님의 율법

제20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그런가 하면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구원의 질서에 따른 개념들은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석만 박사에 의하면 칼빈이 그의「기독교 강요」제3권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그 방법으로부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생기며 어떤 결과가 따르는가?”라는 큰 제목 아래 25개의 장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고 설명한다.

제1장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한 것은 성령의 신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유익하다.

제1항.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하는 끈으로서의 성령에 관하여

제2항. 그리스도에게는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심에 관하여

제3항. 성경에 계시된 성령의 명칭들에 관하여

제4항.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신앙에 관하여

제2장 신앙 : 신앙의 정의와 속성에 관하여

제3장-제5장은 중생, 즉 회개에 관하여

제3장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① 회개는 믿음의 열매라는 것(1-4항). ② 회개의 정의(5-9항). ③ 신자들은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세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화는 아니다(10-15항). ④ 회개의 열매는 거룩한 생활, 죄의 고백, 죄를 용서받음이며, 회개는 평생 계속되는 것(16-20항). ⑤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주님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전적으로 거부하며 전인적으로 완전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21-25항).

제6장-제10장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하여

제11장-제16장 칭의에 관하여

제17장-제18장 복음과 율법에 관하여

제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제20장 믿음의 훈련에 관하여

제21-제24장 예정에 관하여

제25장 최후의 부활에 관하여

조석만 박사에 의하면 이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신앙을 회개의 앞에 놓고 있으며(이러한 경우는 회개를 신앙의 열매로 봄) 신자의 성화의 생활과 중생, 즉 회개(중생과 회개를 동일시 함)를 계속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칭의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석만 박사는 성령의 구원사역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논리적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과 논리적 체계적 이해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우에는 두 가지 점을 유의해야 하는데, 첫째는 구원을 적용하는 성령의 활동이 다양하여 교리학적 개념과 다른 경우가 있다는 것과, 둘째 구원의 질서의 과정에 있어서 상호 관계가 다양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Louis Berkhof의 도움을 받아 구원론에 대한 개혁파와 루터파, 로마 카톨릭의 견해의 차이를 살핌으로써, 개혁주의 내에서의 다양성의 차원이 아닌 인간론적인 이해의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B.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의 견해 차이

 

Louis Berkhof는 성경이 구속 사역의 적용에 따르는 정확한 순서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순서에 대한 상이한 의견들이 존재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교회들은 구원의 순서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하지만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서 이해하고 칼빈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큰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각각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개혁파의 견해

Louis Berkhof에 의하면 개혁파 구원론의 출발점은 성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과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언약에서 성립된 신비적 연합이라고 한다. 그 구원의 언약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영원히 전가된다. 이렇게 법적인 요소가 도덕적인 요소보다 우선하고 있으므로 멕코비우스(Maccovius), 컴리(Comrie), 카이퍼 1세와 2세(A. Kuyper Sr.와 Jr)는 구원의 순서를 중생이 아니라 칭의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칭의’라는 명칭을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선택받은 자에게 관념적으로 전가되는 것에 적용시킨다.

게다가, Louis Berkhof는 개혁파 신학에서 구원의 순서를 논의할 때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해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모든 용어들이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루터파의 견해

Louis Berkhof는 루터파의 견해에 대해서 말하기를,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 항목 중 어는 것으로부터도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인의 심령과 삶에서의 구속 사역의 주관적인 실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편에서(a paret Dei) 행해지는 것들보다는 인간 편에서(a parte hominis) 행해지는 것들을 더욱 강조하는 구원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선 신앙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신앙을 인간 편에서 능동적 원리 즉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여 구원의 순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피퍼(Pieper)는 “구원의 획득에 관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복음에 대한 신앙이 생성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파의 견해는 당시 칼빈의 시대에 오시안더(Andreas Osiander)라는 인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중보자의 은혜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즉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히 또는 완전히 제공되는 것을 곡해한 인물이다. 조석만 박사의 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지적 받고 있다.

오시안더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의가 죄인에게 전가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원질이 심어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고난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며, 카톨릭교회가 말하는 성령의 거룩한 성질과 새로운 은혜의 주입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부여되거나 주입되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의 그 자체라고 하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본질적 의이며, 신적 본질이며,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죄인에게 내주하신다는 것이다.

이상의 표현은 우리들에게 굉장히 낯설기 때문에 언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조석만 박사는 다음과 같이 오시안더의 주장을 비판했다. 오시안더의 이러한 주장은 “칭의를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본질이 주입되는 것으로 보는 일종의 신비주의인 동시에 범신론적 사고방식이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는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오시안더를 가리켜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 이입하기 위해서 마니교와 비슷한 그 무엇을 생각하였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주장에 대해서 “검고 탁한 피를 뿜어 그 많은 꼬리를 숨기는 오징어와 같다. 우리에게 구원을 자랑할 확신을 주는 유일한 의를 우리가 알면서 또 기꺼이 빼앗기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맹렬히 배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칼빈의 보다 예리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데, “오시안더는 본질적 의라는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거저 주시는 의를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나 이 의를 깊은 안개 속에 묻어버리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뚜렷이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오시안더에 대한 평가는 신앙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는 루터파의 견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지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로마 카톨릭의 견해

Louis Berkhof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의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구원의 순서에 대한 논의 보다 선행된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은 영세에 의해 중생되지만,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복음에 접한 사람들은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는 “충족 은혜”(gratia sufficiens)를 받게 되는데, 인간은 충족 은혜에 저항할 수도 있고 혹은 이에 동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 은혜에 동의하면 이 은혜는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되며, 이로써 인간은 칭의를 예비하는 데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 칭의에 대한 예비 과정은 다음 7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1)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함, (2)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자각함, (3)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함, (4)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함, (5) 죄를 혐오함, (6)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겠다고 결단함, (7) 영세를 희망함. 여기에서 믿음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단지 여타의 예비과정들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신앙이란 단지 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을 의미하며(fides informis), 주입된 은혜(fratia infusa)에 의해 부여된 사랑을 통해서만(fides caritate formata) 칭의의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Louis Berkhof는 우리가 로마 카톨릭의 주장으로 인해 칭의가 값없이 주어지며, 선행된 예비 과정에 의해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루터파의 견해 보다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되는데, Louis Berkhof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의 견해에 따르면, 칭의의 은사는 계명을 지키고 선행을 함으로써 보존되며, 주입된 은혜에 의해서 인간은 선행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차후의 모든 은혜와 영생에 합당한 공로-실제적 공로(meritum de condigno)-를 이룰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에게 구원에 합당한 능력을 부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죄의 용서를 계속 보유하게 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칭의의 은사는 불신앙뿐만 아니라 중죄로 인해 상실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저들이 고안해 낸 것이 칭의의 은사는 참회, 고백, 사죄 선언, 보속 행위로 구성된 고해 성사에 의해 재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죄 의식과 영원한 형벌은 사죄 선언에 의해 제거되지만, 현세적인 형벌은 단지 보속 행위에 의해서만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당시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부당한 견해를 비판하기를 쉬지 않았고, 그가 더욱 비중을 둔 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짓을 증명해야만 했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은 인간의 협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야만 했고, 따라서 인간의 공로 사상을 배격하는데 힘을 기울여야만 했으며, 나아가 택자에게 주신 칭의의 은사는 상실되거나 고해성사의 어떠한 내용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가르쳐야만 했다.

C. 칼빈의 구원론에 대한 이해

 

1. 구원론에 대한 원칙들

 

a.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짓된 가르침이다.

종교개혁 당시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는 로마 카톨릭의 사상은 후대에 아르미니우스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아리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가 신앙과 회심 쪽으로 향하도록 그를 중생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은혜의 사역을 다 이루신 후에라도 인간은 하나님과 성령에 저항할 수 있는데, 이 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중생하기를 바라며 그를 중생시키고자 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반면에 칼빈의 입장을 고수했던 도르트 성직자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사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시되 죽음에서 부활의 새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은, 결코 복음을 외침으로나 도덕적 권면으로, 또는 -물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후에 인간편에서는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지고 효력을 낼뿐이며, 인간은 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믿고 회개함에 이른다고 말해야 옳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도르트 성직자들의 입장이란 결국 칼빈의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뒷부분을 다룰 때 보다 자세히 소개될 것이다.

 

b.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은 인간의 협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가운데 제3권 11-16장에서 칭의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가운데 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 내용에 대하여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각 항의 제목을 보아서도 이러한 내용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4.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

7.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8. 사람과 행위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12. 반대자들의 핑계

13. 잉여 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중대성을 오해하였다.

14.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더라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또 완수할 수도 없다.

15. 우리와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잉여 업적은 있을 수 없다.

16. 행위를 믿거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

17. 행위는 결코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18. 그러나 선행을 보면 믿음이 강화될 수 있다.

19. 행위는 소명의 결과이다.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신자들의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21. 간혹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이상과 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부단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과 선행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립해 줌으로써 오해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는다”. 따라서 칼빈은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공로를 쌓았다면, 칼빈의 견해는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알아나가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겸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c. 인간의 공로 사상은 배격되어야 한다.

칼빈이 인간의 공로 사상을 배격하기 위해 힘을 써야만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15장의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전복시킨다”. 단순히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도 지지 받을 수 없는 것이며, 고대 교부들 또한 저들의 견해와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칼빈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에서 인간의 공로를 증명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성경 말씀은 히13:16절과 집회서(외경) 16:14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들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증명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눅 17:10)

칼빈은 로마 교회가 성경의 말씀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의 가르침마저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저들의 잘못의 극치는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인간의 의로움의 기초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돌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칼빈처럼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어찌 감히 그분의 공로를 가로챌 수 있겠는가.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하려는 사람은 그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닦아 놓은 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3:10). 그리고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고전 3:11).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울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는다(고전1:30).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든든하게 터로 삼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것은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고전 1:30).

로마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위와 같은 칼빈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가?’. 바울은 “창세 전에” 영원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 아니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고 어떻게 고해성사나 보속의 교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d. 택자에게 주신 칭의의 은사는 상실되지도 않으며, 고해성사와 같은 어떠한 내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4-5)는 성경의 말씀을 뒤로하고 인간의 공로를 앞세웠던 무리들은 역사 가운데 계속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도 죄를 공중 앞에서 자백해야만 한다는 로마 교회와 같은 가르침 때문에 문제가 되었었고,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될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유전된다고 하는 ‘가계 저주론’과 같은 것들이 성도들을 혼란케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이러한 잘못된 교리는 이미 13세기 이노센트 3세(1198-1216 재위)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시대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써 성경에서부터 출발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단지 교회가 타락하던 시점에 나타난 후대의 인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로마 교회가 이처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야고보서 5:16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는 것은 고해성사를 합당하게 입증하는 말씀이며, 고백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는 사제들이라고 저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야고보서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의 견해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야고보가 여기서 상호 죄를 용납함으로써 형제로서의 화목을 다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가 설명했듯이 그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다. 그는 상호간의 기도와 상호간의 고백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백의 이점이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우리 형제의 기도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데 있어서 소극적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이해하는 자들은 당장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귓속으로 속삭이는 고해성사라는 것을 여기서 추리해 내는 카톨릭의 어리석음-아니 이것은 사악이 아닌가?-에 대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야고보서 5:16은 고해성사와는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간에 “약점을 서로 고백하여 서로 충고를 받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의 약점을 알았으므로 그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엉뚱한 가르침에 반대하여 칼빈은 누가복음 18:13에 나오는 세리의 고백을 제시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을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더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했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를 잘 담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6을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하며,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 해야 한다. 그렇게 간구 할 때, 그리고 죄들을 버릴 때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형제나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험담한 사람은,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자기의 죄를 기꺼이 고백하며 통회하고,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회개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 사람과 화목해야 하며, 사랑으로 그를 영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로마 교회의 사제들은 고해성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이 피는 교회의 열쇠에 의해서 나눠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보속의 교리’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사악한 짓인가? 심지어 주교와 추기경 그리고 교황이 발부하는 면죄부의 종류에 따라 죄가 사면되는 기간까지 다르다고 한다.

 

2. 기독교 강요의 구조와 구원론

 

a. 기독교 강요(1559)의 전체구조 가운데 3권의 바른 이해

이미 지난 「칼빈의 기독론」이라는 글 가운데 소개한 바와 같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이해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오해를 피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칼빈의 기독론을 다룸에 있어서 먼저는 기독교 강요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대개 칼빈의 기독교 강요(1559)를 1권은 성부(혹은 신론), 2권은 성자(혹은 기독론), 3권은 성령론(혹은 성령의 내적 사역), 4권은 교회론(혹은 성령의 외적 사역)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 강요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칼빈의 기독론에 관해서 연구할 때 제2권만을 살피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2권의 제목에 알 수 있듯이 제2권의 하나님(Dei)은 제1권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인 것이다. 단,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o) 구속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Dei Redemptoris)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은 ‘성령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식. 그것이 주는 유익과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효력”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목에서 우리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출발점이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따라서 인간의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칼빈의 가르침은 루터파와 같지 않고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나 로마카톨릭의 가르침과 다른 성격임을 깨닫게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신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효력은 성부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기독론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폈듯이 구원론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 살펴야 할 것이다.

b. 기독교 강요(1559) 3권을 통해 살펴본 구원의 서정

(1) 말씀과 성령의 신비적 연합에 관하여

조석만 박사는 칼빈의 신비적 연합(결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칼빈은 구원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근거를 그리스도와 결합이라 하며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활력은 성령의 숨은 사역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신비적 결합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이 신비적 결합이 일체의 구원의 은혜에 선행하는 동시에 주관적 자각적 행위에 선행하는 잠재의식적 사실이라고 한다”.

Louis Bekhof는 말하기를 “칼빈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구원의 혜택들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상을 반복적으로 서술하여 이를 매우 중요한 진리로 강조한다”. 또한 Louis Berkhof는 신비적 연합의 교리에 대한 루터교와 개혁파 신학의 차이에 대해서 “루터교인들은 신비적 연합의 교리를 ‘인간론’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따라서 신비적 연합이 신앙에 의해 확립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개혁파 신학의 신비적 연합 개념을 공정하게 다룰 수 없다. … 개혁파 신학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론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이 중요한 주제를 보다 공정하게 취급한다”고 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3권 1장 제목에서 “그리스도의 효력은 성령의 신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고 함으로써 신비적 결합을 논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성자)께서는 아버지(성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원하시는데,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띠로서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우리와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로서 성령의 작용이 필요한 이유는 성령의 작용이 없다면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주신 유익들이 우리에게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받으신 것을 나눠주시기 위해서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계셔야 했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또한 가지 얼마나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롬 11:1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이와 같이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라고 하였고, 우리 편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으며,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몸이 되어야만 그가 가지신 것이 우리와 상관이 있는데, 그러한 신비한 역사를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누리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성령의 신비적 결합의 필요성을 가르친다.

신비적 결합차원에서 이해해야할 신학적 혹은 성경의 내용들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라고 부르며,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시지만 아들에게 특히 성령을 아주 충만하게 주셔서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를 나눠주는 수종자와 청지기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며,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로마서 8:11에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들로 인하여 찬양을 아버지께 돌리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꼭같이 돌리는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때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아가 요한복음 7:37에서 목 마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는 것도 같은 성격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와 그것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심을 논할 때에 성령을 다음과 같이 다양한 칭호로 부른다고 한다. “양자의 영”(롬 8:15),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인”(고후 1:22; 엡 1:14), 의로 말미암는 “생명”(롬 8:10), “물”(사55:1; 44:3; 요 7:37; 겔 36:25), 사람들에게 은혜를 시냇물같이 부으시고 그들의 생기를 회복하며 강하게 키우시기 때문에 “기름”과 “기름 부음”(요일 2:20, 27), 우리의 사악한 육욕을 태우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렬한 헌신의 불길을 일으키시기 때문에 “불”(눅 3:16),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에 “샘물”(요 4:14), 권능을 행사하시는 “주의 손”(행 11:21)과 같이 다양한 칭호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칭호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며 거룩한 생명을 불어넣으시므로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자극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오용되고 있는 ‘성령의 기름 부음’, 혹은 ‘성령 세례’, ‘성령 충만’에 대해서 칼빈의 이해를 좇아 접근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가르치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결국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 신앙에 관하여

①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이며, 특별히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

칼빈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소개한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그리고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에 관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설명하고자 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무신앙으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을 일으키셨던 것이다(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만 해당). 이 외의 칼빈이 제시한 요일 4;13절, 요일 3:24절, 요 14:17절 등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석만 박사는 개혁파 신앙관은 예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예정대로 신자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신앙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말이 신자 자신의 행위나 태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오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조석만 박사는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신앙이란 신자 자신의 행위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께 대한 전인적 인식기능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파 신앙관, 즉 칼빈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1에 잘 반영되어 있다.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 그 믿음의 은사는 그들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며, 통상적으로 말씀의 증거에 의하여 역사한다…”.

② 신앙의 요소 가운데 지적 요소를 강조한다.

Louis Berkhof는 신앙은 전인적 인간의 행위인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요소가 있다고 한다. 첫째, 지적 요소(notita, 지식)이다. ‘이 신앙의 지식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말씀하신 모든 것, 특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진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의미한다. 카톨릭의 견해에 반대하여 이러한 확실한 진리가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는 입장이 고수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둘째, 감정적 요소(assen년, 동의)이다. 셋째, 의지적 요소(fiducia, 신뢰)이다.

이 세 가지 신앙의 요소 가운데 Louis Berkhof는 의지적 요소를 신앙의 요소 중 정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경건한 무지, 맹신을 대적하여 지식을 강조했다. 이러한 내용은 종교개혁이 무엇으로부터의 개혁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지식의 이해에 대한 칼빈의 표현이다.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뿐 아니라 그의 뜻까지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교회가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에 또는 묻고 알아내는 일을 교회에 일임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믿음의 ‘지식’이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다르며, 믿음은 감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 외에, 칼빈의 신앙에 관한 가름침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내실적 신앙과 형식적 신앙, 그리고 진정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버림받은 자(사울왕과 같은 경우)들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고 있다.

(3) 중생, 회심, 성화에 관하여

① 중생, 회심, 성화의 관계

연세대 이양호 교수는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중생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중생은 성화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 했다. 조석만 박사는 이양호 교수보다 자세한 설명을 제시하는데, 중생의 의미는 기독교에서 언제나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칼빈의 경우는 아주 넓은 의미로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여 사람이 새롭게 되는 과정 전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와 중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나는 회개를 한 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성화는 회개의 열매로 설명하는데, “우리는 회개에서 생기는 열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이다”고 했다.

② 회개에 대해서

칼빈은 회개를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쪽으로 전향하는 일이며, 그를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향이라고 하였다. 회개의 요소는 옛 사람과 육을 죽이는 것과 성령에 의한 새로운 삶으로써 성립된다고 가르친다. 칼빈의 회개의 두 요소에 대한 내용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88-90문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88문 : 참다운 회개 또는 회심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답 :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옛 사람이 죽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새 사람으로 사는 일입니다.

제89문 :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답 : 우리의 죄를 마음 깊이 슬퍼하고 그것을 더욱 더 미워하고 피하는 일입니다.

제90문 : 새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즐거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회개가 죄의 용서가 되는 근거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한다. 사 56:1; 59:20; 55:6-7; 행 3:19절에서처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는 가르침이 있다고 할지라도 회개 자체가 죄 용서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회개시키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시고 만일 그들이 은혜를 얻고 싶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를 알리신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당시 로마카톨릭의 거짓된 가르침을 드러내고 성경의 바른 개념을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③ 성화에 대해서

칼빈은 당시 재세례파가 자신의 가르침과는 달리 완전성화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재세례파의 그러한 완전성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시대 가운데도 빈야드와 같은 단체들을 통해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친숙한 표현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 데 부심할 필요가 없고 지도자인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면 결코 빗나갈 수 없다고 한다. … 재세례파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은 ‘쓸데없는 공포심은 내버리라. 성령이 시키는 대로 믿고 대담하게 복종하면, 성령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칼빈 당시의 재세례파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에 대해서 칼빈의 평가는 냉혹하다. 칼빈은 “현대의 어떤 재세례파 사람들은 영적 중생 대신 어떤 광적인 무절제를 불러 일으킨다”고 하였고, “감히 하나님의 진리를 허위로 만드는 자들”이라고 했으며, “맹목적인 정욕에 눈이 어두워 상식을 내버린 자들”이라고 말했다.

(4) 칭의에 관하여

Louis Berkhof도 그의 책에서 “칭의의 근거는 로마 교회와 종교 개혁자들, 개혁파 신학과 알미니우스파간의 가장 주요한 논쟁점들 중 하나였다”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칭의의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2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 부정적으로 칭의의 근거는 인간의 어떤 덕목이나 선행에서 발견될 수 없다. 둘째, 긍정적으로 칭의의 근거는 오직 칭의시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서만 발견된다.

앞에서 로마 교회의 인간의 공로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비뚤어진 것인가를 소개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 받기 전 인간은 율법 하에서 저주를 받은 인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인간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다음과 같이 칭의에 대해 가르친다. “칭의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당시 칭의의 교리와 관련하여 루터파 신학자였던 오시안더의 가르침을 논박하는 일에 기독교 강요를 많이 할애하였다.

칼빈에게는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칼빈은 “행위의 의를 믿어서는 안 되며, 행위를 자랑해서도 안된다”고 했으며, “성경은 그리스도의 결백에서 향기를 얻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취를 풍긴다고 가르침으로써 항상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한다”고 했으며,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는 그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행함에 대해서 항상 문제시 되는 성경 말씀은 야고보서 2:14-17절일 것이다. 게다가 21절에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아브라함이 행함 때문에 칭의를 받은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만약 그렇다면 칼빈의 지금까지의 견해는 상당히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로마서 4:1-3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3권 17장 12절에서,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칼빈은 야고보서의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로마서와 잘 조화됨을 말한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지 않고 또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야고보서가 말한 것은 결코 위의 견해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 두 견해를 조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야고보가 사용한 논증의 성격을 고려해 보는 것이다. 야고보의 경우 문제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의를 얻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의롭다 하심 받은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헛되이 자랑하는 위선자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서와 로마서의 가르침이 결코 모순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의의 전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공표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칼빈은 말한다. 야고보가 칭의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체하며 믿음을 구실로 삼아서 선행을 경멸하는 자들의 사악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창세기의 기록을 살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로마서의 표현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야고보서의 표현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칼빈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를 더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성경 가운데 간혹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고 소개하는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칼빈은 성도의 구원을 위한 4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믿음은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The efficient cause)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The meterial cause)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The formale cause)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The final cause)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까지는 앞선 은혜들이 원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아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5) 예정, 견인에 관하여

‘예정론’을 말하면 많은 학자들이 칼빈을 대표적 인물로 가르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이는 칼빈이 예정론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까지 말한다. 칼빈의 예정에 관한 가르침을 다룸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를 살펴보길 원한다. 첫째는 예정론을 한국교계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고, 둘째는 예정론의 위치와 구원론의 관계, 셋째로 선택과 견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①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음

기독교 교리 가운데 예정론이 가장 특징적인 교리라는 입장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이 많다. 특별히 예정론은 개혁파 교회, 즉 장로교에서 가장 많이 가르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 말씀 가운데 소개되고 있는 예정론에 대해서 칼빈이 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정론에 대해서 오늘날 교계에서는 칼빈의 기대와는 달리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음 글은 예정론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대신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기독교 인구가 아직 20% 미만인 다원종교 사회이다. 교회는 아직도 성장 도상에 있으며 선교의 과업을 충실히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목회자는 네덜란드의 목회자처럼 교인들의 신앙적인 성숙을 위하여 설교하며 교인들을 돌아보며 “Seelsorce" 개념의 목회만을 할 수는 없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전도와 선교의 과업도 아울러 감당해야 한다. 한국과 같은 선교지에서는 복음주의적인 전도 설교가 필요하며 주효하다. 개혁주의 목회자는 개혁주의 신학 역시 소위 복음주의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본래 균형과 체계를 갖춘 신학이지만, 다른 신학과 차별되는 특성을 말하다 보니까, 예를 들면 예정론 등 논란이 되는 교리를 변증하다 보니까 예정론과 더불어 하나님을 중심하는 신학을 더 강조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특징으로 부각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가 내포하는 복음주의적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위의 내용은 결국 예정론이 선교와 전도, 그리고 설교에 있어서 한국 교인들에게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신학자였던 보에티우스(Voetius)는「교회개척론」(De plantatione ecclesiarum)에서 선교의 목적은 택자들의 소명과 회심으로 보고 미래에 대한 약속과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강조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예정론과 선교가 잘 조화되었던 것은 그의 섭리에 정확한 이해에 기초하였다고 김영규 교수는 가르친다. 따라서 김영재 교수가 말한 것,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선교와 전도의 과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예정론과 같이 성숙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의 내용은 맞지 않는다고 한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예정론을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며, 무분별한 변덕자로 만든다고 하는데 그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그의 주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칼빈은 예정론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자비’를 드러냈고,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지 예정이 거절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공로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소할 뿐만 아니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한 것을 인간이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지 예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 이런 이해를 뒤로 한 채, 칼빈이 말하는 예정에 관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만든다고 욕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잘못된 견해와는 달리 조석만 박사는 예정론을 칼빈 한 사람의 저작품이 아닌, 성경이 주장하는 바의 진리로 가르친다. 이것은 칼빈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라 정통적 역사적 기독교의 공동신조에 표현되어 있는 교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안양대 신학대학원의 김영규 교수는 예정론의 실제적 가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 필요성을 가르친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전통적인 예정론이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앞세웠다. 이런 입장은 웨슬레주의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 그러나 … 예정론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특별히 순전히 영적이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로 남아 있는 예정론 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 받는 자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부패에 대해서 비판정신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 칼빈은 예정론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정의함으로 복음의 순교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즉 예정론은 개척하는 교회에 신실과 정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되게 한다.

이러한 견해는 앞서서 다루었던 김영재 교수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와 전도는 물론이고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예정에 관한 가르침을 잘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칼빈은 예정론을 다루면서 두 가지 위험성을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헛된 호기심을 버리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침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② 예정론의 위치와 구원론의 관계

바빙크의 말대로 예정론이 신론의 한 부분인가(선험적 순서), 아니면 구원론의 시작과 중간에서 다루어져야 하는가(후험적 순서) 하는 문제는 반드시 본질적 차이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개혁신학자들은 선험적 순서를 따랐고, 루터파와 알미니안,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대부분의 근대 교의학자들은 점차 후험적 순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바빙크는 초기의 많은 신학자들도 선택을 신론과 관련해서 보다는 구원론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정론의 오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로부터 원인에로, 열매로부터 뿌리에로 추론해 나가기를 애호했다고 한다. 즉, 신앙과 회개에서부터 시작하여 선택에로 추론해 갔다고 한다. 즉 신앙과 회개에서부터 시작하여 선택에로 추론해 간 것이며, 이는 예정론을 위로와 확신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 바빙크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접근법을 가리켜 종합적 접근방법이라고 했다. 종합적 접근방법은 다음과 같은 성격이다. ‘신앙의 생활은 참으로 선택론을 고백케 하는 조건이 되나, 선택의 사실은 모든 영적 은사의 원천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과 첫 원인인 것이다’.

다음의 김영규 교수의 가르침은 이러한 바빙크가 말하는 칼빈의 종합적 접근방법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개혁주의자들은 신론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과 교회에 관련해서도 예정론을 강조하였다”.

③ 선택과 견인

미래에 대한 불안이 몰래 숨어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견인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큰 확신을 더해줄 것이다. 칼빈은 견인이 첨가되지 않으면 부르심과 믿음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경험하기에, 견인의 확신이 없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견인에 대한 내용을 갖는 것은 아니며, 선택된 자에 한하여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칼빈은 견인에 대한 교리의 내용을 선택과 함께 생각하고 있다.

요한복음 6:37 말씀인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 외에도 요한복음 10:27절을 인용함으로써 선택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고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는 확신이 있을 것을 가르친다. 반면에 마태복음 15:13과, 요일 2:19절을 제시함으로써 선택받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의 백성같이 보일지라도 결국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Ⅲ. 결론

구원론은 성도의 삶에 너무나 밀접한 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관심이 있다고 바른 가르침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신론이나 인간론, 기독론을 다루며 살폈던 핵심 내용이 총체적으로 녹아져 있지 않다면 구원론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믿고, 거룩하게 되고,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고는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칼빈은 이 문제를 그렇게 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제시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자신의 공로로 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앞에서 구원의 질서에 대한 여러 입장이 있음을 확인했다. 먼저는 루터주의나 로마 카톨릭의 견해처럼 개혁주의와 다른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다음으로는 개혁주의 안에서도 구원의 순서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았다. 학자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시대에 살았던 칼빈의 구원론과 관련된 여러 개념과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개념과 다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Louis Berkhof의 구원의 순서를 토대로 글을 전개해 보았다.

칼빈의 구원론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의 공로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떠한 협력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분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의롭다 칭하여 주신 은혜는 상실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같이 인간의 고안된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서정을 살피면서 본인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회개, 신앙, 성화와 같은 과정도 소명, 중생,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을 뿐이지 인간의 의지의 결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칼빈의 글은 그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이 부분에 있어서 명쾌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오늘날 잘못된 형태의 신앙 생활을 바로잡고, 성경의 참된 가르침으로 접근해 나가길 소망하며 이 글을 마치길 원한다.

참 고 문 헌

Calvin. J.,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nglish edition., translated by Henry Beneridge, WM. B. B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Banvink, H.,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Berkhof, L., 조직신학 下, 이상원․권수경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Calvin, J., 기독교강요 中, 김종흡 외 3인 역, 생명의 말씀사, 1998.

-------., 야고보서 주석,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편, 성서교재간행사, 1995.

-------., 로마서 주석,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편, 성서교재간행사, 1995.

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 안양대학교신학대학원, 미간행, 1999.

김영재, 개혁주의란 무엇인가,「개혁신앙의 확립」,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대한신학원, 2001.

이양호, 칼빈의 개혁 신학,「개혁주의 신학의 현주서」, 안양대학교신학연구소, 1998.

이오갑, 칼빈신학의 정수와 그 한계는,「목회와 신학 9월호」, 1999.

조석만, 조직신학 下, 도서출판 잠언, 2001.

기독교 연합신문, 제657호(2001. 10. 14일)


출처: 양무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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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퍼센트 경영

현대미디어,278쪽

8,000원

 

저자 홍준기

한국방송대학, 동국대학 무역학과를 나와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학 행정대학원, 한양대학․중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립인천대학교에서 재무관리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LG상사, 한양투자금융(現 하나은행)에 근무했고, 현재는 신흥증권 상무로 재직 중이다. 대학, 기업, 금융기관, 사회단체 등에서 재테크 및 기업부실 관련 컨설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죽은 기업 살리기 - 부실예측만이 우량기업을 만든다』『부처와 함께 하는 주식투자』가 있다.

 

1. 상품이 아니라 믿음을 판다

 

우리는 제품을 만들면서 그것을 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국제적인 브랜드 평가기관인 인터브랜드 사의 2000년 조사에 따르면 세계 100대 브랜드에 한국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삼성이 43위에 올라 있다. 이쯤 되면 세계적이라고 할 만한 브랜드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기업이 만든 제품 가운데 세계적인 인정과 신뢰를 받는 상표는 얼마나 되며, 그 가치는 어느 정도로 환산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상품은 우수하고 실용적인데 고객인 소비자에게 알려지지 않아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훌륭한 경영자는 고객의 만족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는 상품의 가치와 통할 수 있는 브랜드 경영에서만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브랜드의 이미지는 결코 우연히 고객에게 인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비자의 관심과 소비자에 대한 유인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브랜드 경영은 결국 참신한 아이디어와 품질, 홍보와 광고를 적시에 런칭하는 등 소비자에게 차별화된 타깃 마케팅이 병행되어야 한다.


노키아의 경우 브랜드는 알아도 국적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브랜드가 강력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키아는 흔히 일본 회사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동전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핀란드에 있는 세계 최고의 이동통신 단말기 회사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노키아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퇴출 위기에 있었던 회사였다. 그러나 노키아는 난관을 뚫기 위해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 쇄신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원래 노키아는 ‘노키아’라는 마을에 세워진 펄프 제지 공장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잘나가던 목재, 케이블, 타이어 공장을 매각하고 미래의 무선 이동통신시대에 대비하여 브랜드를 키워 왔다. 이런 전략들이 오늘날의 노키아를 있게 했고, 이동통신 회사로 세계 시장의 30.6%를 석권하게 했다. 이제 노키아는 미국의 모토로라의 시장점유율 13.3%를 따돌리고, 브랜드 가치로도 미국을 제외한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초우량 기업으로 변신하였다.


영속성을 가진 브랜드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환경에 맞는 기업으로 변신하거나 제품을 혁신해야만 한다. 우리 기업이 살아갈 길은 세계적인 브랜드 상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보유하는 길밖에 없다. 세계 경영이 곧 국제적인 브랜드 경영임을 모두가 새롭게 인식할 때이다.



2. 비즈니스는 전쟁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승리의 조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 싸워야 할 때와 싸워서는 안 될 때를 구별하면 승리한다.

둘째, 대군(大軍)과 소세(小勢)를 부리는 방법을 알면 승리한다.

셋째,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맞으면 승리한다.

넷째, 언제나 미리 대비하고, 상대방이 방심할 때 공격하면 승리한다.

다섯째, 장군이 유능하고 주군이 간섭하지 않으면 승리한다.


기업을 경영하는 최고경영자는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실전과 같은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의 생존이 경각에 있음을 절감하고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쟁에 이긴 자는 모든 것을 취하고 반대로 진 자는 온갖 굴욕과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게 된다. 기업은 승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때 손자병법을 적절히 이용하면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고객과 만날 때 “고객은 항상 옳다. 그리고 고객의 모든 말이 맞다.”는 자세로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GE의 전 최고경영자 잭 웰치가 “현실을 직시하라”고 강조한 것도 고객의 욕구에 따라 바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최고경영자들은 현실 파악에 많은 시간을 쓰면서 정작 행동은 엉뚱하게 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면 할수록 사업을 반전시킬 기회는 빨리 온다는 사실을 무심코 지나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외면한 이러한 결정은 그만큼 실패를 초래하게 된다.


둘째, 고객은 내부 고객과 외부 고객으로 나누어 관리해야 한다. 외부 고객은 소비자, 주주, 협력회사, 지역주민 등의 대군(大軍)을 말하며 내부 고객은 소세(小勢)라 하여 조직 내부의 모든 구성원으로 상사, 부하, 동료는 물론 경영자, 관리자 모두를 포함한다.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는 누가 만들어 내는가?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정서에서 만들어지고 외부 고객에게 제공됨으로써 고객 만족은 물론 고객 감동까지 창출되는 것이다. 고객은 상품과 서비스를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서 그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제공하는 직원들도 포함된다는 게 휴렛패커드 사의 기본 철학이다. 휴렛패커드 사의 'HP way‘에 나타난 바와 같이 최고경영자 빌 휴렛은 “직원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면 모두 최고의 결과와 창조적인 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셋째, 조직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맞추어 가는 화음이다. 조직 상하 간의 커뮤니케이션 여하에 따라 조직의 성패가 갈라진다. 기업 흥망의 열쇠는 바로 사람이다. 따라서 조직 내에서 화합을 우선시하는 기업문화는 그만큼 중요하다. 기업(corporation)은 원래 라틴어의 ‘협동(corporate)’에서 유래한 것으로 협동을 통해 기업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기업 조직에서도 얼마나 힘을 합하여 움직이는가에 따라 조직의 활력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최고경영자는 협동에 큰 관심을 두어야 한다.


넷째,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면서 경영을 해야만 영속적 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품의 경우에도 세상에 나오자마자 바로 퇴출되는 상품이 있는가 하면 소비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장수를 누리는 상품이 있다. 이는 소비자인 고객의 기호 변화를 재빠르게 감지하고 틈새를 공략하거나 시장을 세분화하여 신규고객을 창출할 수 있도록 충분히 예측한 결과이다.


다섯째, 직원들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최고경영자가 사소한 부분까지 참견하다 보면 직원들의 역할이 없어진다. 조직의 각 부분에서 개성과 특기를 살려가며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일의 의욕도 느껴야 하는데 지시와 지침에 따르다 보면 일종의 부속품이 되고 만다. 이런 조직에서는 독창성이 사라져 구성원들에게 동기 부여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부하직원들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상사의 충고나 지시를 싫어한다. 자신이 결정하여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어한다. 지나친 간섭은 신뢰를 말살할 뿐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최고경영자는 기차의 기관사 역할이 아니라 역장의 역할이면 족하다. 역장이 기관사가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방향과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며 넓은 마음으로 가이드를 해 주듯 최고경영자의 자세 역시 그래야 한다.



3.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온통 화염에 싸여 있을 때 영국 수상 처칠은 짐을 싸들고 미국의 루즈벨트를 찾아갔다. 도버해협을 넘어와 폭탄을 퍼붓고 가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청하러 간 것이다. 처칠은 이 사실을 말하며 루즈벨트에게 사정해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호텔로 돌아온 처칠은 풍전등화 속에 놓인 영국의 운명을 걱정하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맹국 수상에게 마땅한 선물을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 루즈벨트가 불쑥 호텔로 찾아온 것이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알몸으로 나온 처칠과 루즈벨트의 만남에서 두 정상은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알몸인 처칠은 태연하게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 영국의 수상인 저는 더 이상 숨길 게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순간 서로의 공감대가 이루어져 루즈벨트는 영국을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직이 작든 크든 간에 조직을 운영하면서 고객을 잘 배려할 수 있다면 그 조직은 성공의 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객에 대한 이러한 배려를 바탕으로 기업과 고객을 이어주는 새로운 영업제도가 금융기관에서 활발하게 시행되고 있다. 은행마다 기업을 전담하는 기업 금융 전담역(RM: Relationship Management)이라는 은행원이 있다. 전에는 앉아서 들어오는 기업 금융을 처리하던 것을 이제 기업을 제대로 알고 자문하기 위하여 현장에서 직접 처리하는 인력을 전담 배치한 것이다. RM은 은행 일보다 해당 기업을 더 소상히 알고 있어 담보 위주의 대출에서 신용대출의 관행을 정착시키고 있다.


공자가 말한 강직하고 의연하고 소박하고 말을 아끼는 ‘강의목눌(剛毅木訥)’에서도 인간관계에 대한 배려를 관조해 볼 수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는 사람, ‘주이불비(周而不比)’는 두루 사귀되 편당(編黨)을 짓지 않는 사람, ‘선행기언(先行其言’)은 번드레한 말보다 묵묵히 행동을 앞세우는 사람으로 이들이 바로 배려 경영을 할 줄 아는 최고경영자인 것이다. 제자인 자공과의 대화에서 공자는 배려에 대하여 보다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선생님 평생을 듣고 실천해야 할 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건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싫어하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4. 내부의 만족이 고객의 만족

 

기업에서는 인재가 중요하다. 결국 기업과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직구성원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조직에서든지 자기계발이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며, 단순히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여기에는 몸만 움직이는 단순 노동 외에 아이디어와 서비스가 겸비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에게 단순히 접시 닦는 일만 시키면 물기가 있든 없든 닦기만 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왕 닦을 바에야 물기가 없도록 깨끗하게 하는 것이 고객에게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직접 실천한 한 여대생은 입사의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녀의 이런 행동들은 직장생활에서 계속되어 불과 5년만에 마케팅 이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인재를 놓치지 않는 곳이 바로 미국의 외식업계 4위 그룹인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의 인재풀이다.


에버랜드에서 티켓을 팔던 평범한 여직원이 눈에 젖은 신발 때문에 발을 동동거리는 아이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어준 서비스 정신은 보상을 바란 행동이 아닌 순수한 마음 그대로였다. 회사에서는 그녀를 서비스 아카데미 강사로 발탁하여 살아 숨쉬는 서비스 정신을 전 직원에게 심고 있다. 그리고 한 사파리클럽 버스 운전기사가 운전 중에 야생동물과 직접 연출한 코믹한 행동과 개그는 1인 다역을 통한 주인의식 경영의 좋은 본보기이다.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 직원 모두가 최고경영자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은 최고경영자가 이렇게 함으로써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직원들의 질문에 대해 충실하게 답변할 때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최고경영자가 진심으로 직원들을 챙기고 보살피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직원들을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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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눅 21: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마 24: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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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 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옳지 않은 인간을 믿게 하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불의로 심판받아 죽을 인생을 살리시는 능력이라고 했다.

아담의 자손은 불의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롬5:14)으로 오신 분이다. 쉽게 말하면 아담은 오실예수님의 본 보기라고 했다.(롬5:14) 로마서1:16-17절은 가장 심오한 예수교 교리를 농축시킨 복음이며 마틴 루터를 감동시켜 종교개혁을 이룬 구절이다.

중생(重生) 성화(聖化) 영화(靈化)의 구원론은 이 구절을 바탕으로 성경을 상고 하지 않으면  복음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로서 이단사상이 된다. 여기에 인간의 행위가 끼어들 여지가 있는가? 요즘은 이행득의(以行得義) 사상자들까지 출현하여 복음의 능력을 훼손한다.

헌금을 구제 사업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우리 신앙의 정체성까지 훼손하는 이단자들이 있다. 예수교가 자선사업단체인가? 그럴듯한 말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단사설은 없다. 일본인 우 찌무라 간조는 “자선사업을 하려면 지옥의 사령장을 목에 걸고 하라”고 까지 말 했다.  

인간의 심리상태를 관찰하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으로 탄복이 나온다. 나는 일생을 전도만 하며 산 사람이다. 내가 줄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전도하려고 주어 봤으나 준 사람은 더 주지 못해 배신당한 경험뿐이다. 교회는 복음전하는 곳이요 자선단체가 아니다.

인도주의적으로 구제는 해도 보리밥알 낚시에 끼워 잉어 잡으려는 생각은 금물이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인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전도하는 곳이다. 전도를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내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의 육신을 도구로 사용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이다.

전도의 말씀을 듣는 것 역시 인간이성으론 절대 불가능하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선행의 대가(代價)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요, 인간의 어떤 선행이 개입된 게 아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성도의 구원은 무슨 선한 일을 하여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게 하셔 주신 선물이 구원이요, 복음이다.

때문에 복음은 주님의 선물이다. 요즘은 전도가 안 된다고 한다. 복음을 자랑해야할 가치를 인간이 부끄러운 일만 한 자가 받았으니 조금이라도 자기는 선한 일한 것을 자랑하려고 믿고도 행해야 구원 얻는다는 천주교신앙은 복음과 무관한 선행을 자랑하는 교인들이다.

믿음은 예수 자랑하는 일이고 행함은 자기 자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 간증은 조심스럽다. 설교 중에 예화나 간증을 끼워 넣어 은혜를 나누려하나 예화나 간증은 실상 따져보면 치료제가 아니라 소화제에 불과하여 치료에 효력이적은 게 사실이다.계속...



출처: USA 아멘넷/ 작성자: 유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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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 피해를 당한 북한의 한 지역 병원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어린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다. 이 사진은 '머시코' 등 미국의 5개 구호 단체 대표들이 지난 9월 4일부터 10일까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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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주님 오심이 가까운 마지막 때에

아주 많은 자연 재앙이 일어날 거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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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창세기로 돌아가라!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론이 무신론의 토대를 제공하는 어떤 절대적인 과학적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들이 계속 들어 나고 있으며, 오히려 최신 과학 정보들을 볼 때 설계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걸 보면, 성경을 떠나 진화론과 타협을 시도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언젠가 또다시 그 이론의 수정을 요구할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이제 답은 분명하다. 교회는 성경에 기술된 분명한 창조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선포 하고 전하는데 조금도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일부 교회가 진화론 과학자들의 눈치를 적당히 보면서 이론적 타협을 하고 있는 동안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진화론을 잉태한 동일한 과학의 이름으로 이제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고 계시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전도할 때 창조의 메시지를 들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처럼 (행 14:15, 17:24-25), 오늘날 과학시대의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초가 들어갈 마음의 밭을 준비케 하는데 창조과학적 내용이 도구로 사용되어 질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진 말세에 천사가 전할 ‘영원한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7)”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을 새삼 선포하는 것이며, 동일한 그 분께서 이제 곧 심판주로 오실 것이란 뜻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도전을 받고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교회 내에 침투한 세속주의의 영향,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new age의 물결, 세상문화에 대안으로 내놓을 기독교 문화의 부재,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첨단 과학기술의 개발과 그에 따른 교회적 입장의 요구 등등. 신학교 3-4년 동안의 교육만으로 목회자들이 이 모든 문제에 답을 명쾌히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미 선교 사역에 전문인 평신도 사역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교회 내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총체적 방향과 목표는 성경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여전히 목회자 중심으로 세워져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역의 내용은 각 분야의 전문 사역자를 중심으로 상호간의 긴밀한 협력 아래에 진행되어야 한다. 창조과학자들은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들에 대하여 성경적 이면서도 과학적인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하여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창조과학은 교회의 여러 지체 중에서 주일학교 및 성인 교육부와 연결 되어 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하거나, 선교 및 전도부와 협조하여 바울의 이방인 전도처럼 창조의 메시지를 들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초가 들어갈 마음의 밭을 준비케 하는데 필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창조과학 사역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16).

 

하나님께서는 그 분께 예배할 자를 찾으신다 (요 4:23).

 

 우리들이 입을 열어 그 분을 창조주라고 인정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 분을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행 17:31).

 

올바른 과학은 참 신앙과 대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말씀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 그 분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고후 10:5). 아멘.





출처: 영혼의 친구님 방

한국시간 10월 2일(일) 오후7시00분 기준

한주간(7일)동안 발생한 지진현황 입니다.

 
[ 아시아,오세아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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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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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지구 종말에 대비한 덴버(Denver) 지하 벙커!

 

미국정부가 다가올 인류 대재앙을 맞이하여,
덴버(Denver)에 지하 벙커를 만들어서
선택된 소수의 권력층들만 살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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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분이 '사도', '예언'의 현재성을 주장하시길래 반론으로 제시합니다.

먼저 '신사도운동'은 2010년 이단 목록에서 2개 교단으로부터 '교류/참석 금지'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 몰라 속는 지체가 있는 것 같아 글을 올립니다.

1) 조금 '깊이' 알고 싶으신 분은 이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복음주의에서 파생된 신사도개혁운동> -신광철 목사님

http://www.voamonline.com/trend/newapostles/

2) 간략히 왜 '신사도운동'이 비성경적인지 아시고 싶으신 분은 이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출처는 네이버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이며, 작성자는 '이인규' 권사님이십니다.>

2. 사도와 선지자

그렇다면 오늘날도 사도와 선지자들의 직분이 있을까?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신사도운동은 사도와 선지자도 성경에 기록된 직분인데 왜 지금은 없는 직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을 한다. 목사와 교사,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이 있다면 사도와 선지자들도 있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사도"란 단어는 아포스톨로스로서 "보냄을 받는 자, 사자"라는 일반명사이다.

그 단어가 예수의 사도라는 초대교회의 직분적 명사의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더이상 계승되어진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느 성경도 그러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즉 초대교회의 특별한 직분적인 개념의 사도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임명하신 직분이며, 예수님이 보내신 직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도가 몇단계로 구별되어진다고 주장을 한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큰믿음교회에서 사도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변승우의 사도일 뿐이며,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사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과연 성경에서 사도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차적으로 사도란 용어는 초대교회의 직분들 중 첫번째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직분을 말한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사도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이 성경구절은 사도라는 직분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하여 사도라는 직분이 인정된다는 어떤 근거도 될 수 없다.

"사도"라는 말(아포스톨로스)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일반적인 뜻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열두 제자와 바울, 특별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사용된다. 그리고 아무나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님이 직접 보냄을 주신 중요한 직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3)
-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행1:26)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사도란 거의 12명의 예수님의 제자에게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단지 예외적으로, 신약 원어 성경에서 사도행전 14:4, 14에 "바나바"에게도 "사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적이 있었다(두 사도). 그리고 예수님의 아우인 야고보(고전15:7. 갈1:19)도 사도라고 불리워졌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 직분이 바나바와 야고보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도와 함께 병용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사도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 가서 소리질러(행14:14)
-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1:19)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직접적인 제자들이었던 감독들조차 사도라고 불리움을 받지 못하였다, 교회사는 그들은 사도와 구별하여 속사도라고 불렀을 뿐이다.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자격과 특징은 원칙적으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사도는 예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자로서 예수님께서 직접 임명한 직분이다.
-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3:13-14)
-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1;1)
- 주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둘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그의 부활을 직접 본(목격한) 자이었다.
-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l:21-22)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분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주를 직접 보았다는 확증을 말하고 있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직접 목격하였으며, 직접 임명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9:1)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15:7-9)

셋째, 사도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할 능력을 주신 자이었다.
-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4-15)
-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결론적으로 성경을 통하여 살펴본 바로는, 사도라는 명칭은 극히 제한적이며, 신약에서도 열 두 사도와 바울과 바나바, 혹은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는 사도라고 불려진 외에는 구체적인 호칭이 없어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또 교회 역사상 대단히 중요했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도 결코 사도라고 불려진 적은 없었다는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교회사를 통하여 보면, 속사도라고 불렸던 초대교회 감독들의 책과 서신은 그 사도성의 문제로 인하여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이 초대교회에 있던 직분이라는 성경적인 증거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세운 기초적인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와 선지자라는 직분은 지속적인 역할이 아니라 교회의 기초적인 터를 제공한 것이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공동번역]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이요, 그리스도 예수 스스로가 그 모퉁잇돌이십니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집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은 친히 그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KJV] And are built up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Jesus Christ himself being the chief corner [stone];
[NIV]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신사도운동이 사도와 선지자가 지금도 있는 직분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건축이 끝난 건물 위에 다시 기초를 세울 수 있는지를 답변하여야만 할 것이다. 더불어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님이 또다른 사역을 시작하여 또 다른 모퉁이돌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특히 우리는 항상 어떤 이단이라고 불리는 종교적인 교주나 지도자들이 사도, 선지자로 불리우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계시록 2장2절은 거짓 사도가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는 자칭 사도라고 불리웠으며, 거짓 사도들도 있었다.

누구든지 사도가 될 수 있다면 왜 거짓사도라는 것이 분별되어야만 할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2:2)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13)


출처: 아멘넷, 게시자/기다림

개척하여 잘 모였다 쉽게 흩어지는 교회 근본문제 공통점

젊은 목사가 개척하여 짧은 기간에 교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소문이 난다. 얼마 지나고 보면 교인들이 갈등을 빚고 흩어지고 빈 둥지를 지키고 목회자가 지처 번린 자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공통적인 원인과 문제를 진단하여 보고자 한다.

1.갑작 스리 잘 모이는 이유?
그 목사는 말재주가 있고 설교를 잘하고 매너가 좋다.  한번 듣고 보니 마음에 속 든다.
그래서 등록하고 그 교회 교인으로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 한다.

2.얼마 있다 교인들이 떠나고 흩어지는 이유?
1)제직 임명받고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하며 깊은 內면을 보게 된다.
2)목사의 인격과 성격에 비상식적인 문제가 발견된다.
3)목사가 고집이 세고 권위주의로 교회 운영을 하고 교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미러 붙인다.
4)교회 재정을 자기 호주머니 돈 같이 자기 마음대로 쓴다.
5)강단에서는 겸손히 섬기는 종이 되라고 가르치고 밑에 내려와서 군림하는 상전 행세만하고 강단의 설교와 삶이 너무도 불일치하다.
6)자기 사례를 아부 꾼을 동원하여 분수에 넘치게 끌어올리고, 분수에 넘치는 고급차를 사려고 제직회를 붙여 아부 꾼과 반대파에 싸움을 붙인다.
7)인간관계가 부드럽고 공평하여야 하는데 아부 떠는 자만 좋아하고 바른말 하는 성도는 싫어한다.
8)나 싫은 자는 떠나라고 강단에서 난도질을 한다.(서울 큰 D교회 목사도 그런 설교 하더니 얼마 후 쫓겨났다)
9)사모님이 너무 설치고 소다니며 교인들 간에 이간을 붙인다.
10)교회 비추어 분수에 넘치는 사치 생활한다.(한 예로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300여명이 모여도 자가용이 없었고 핸드폰이 없었다. 그런데 이웃 개척목사가(50여명교회) 로얄사롱을 타고(당시최고) 당시180만 원짜리 핸드폰을 갖고 자랑삼아 왔다. 내속으로 그렇게 해도 교회가 될까? 얼마 후 교회는 파산되고 말았다)

이상의 것들이 모였던 교인들이 떠나고 흩어지게 하는 공통적인 원인이라고 필자는 분석한다.  

출처: 아멘넷, 글/장달윤 목사님

한국교회(이민교회 포함)에서 유난히도 강조 되어지는 십일조에 대한 시비론은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닌줄 안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내외적으로 심한 타락상을 보임과 동시에 많은 치부를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사회로 부터 불신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 되어지며 이는 앞으로 더욱 더 뜻있는 자들에 의한 논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매우 민감한 문제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어떠한 부분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한국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참으로 많은 부분들이 비 성경적이요 비 진리적인 커다란 모순속에 빠저 있지마는 그중에서 특별히 지적 하고자 하는 것이 율법주의적 신앙과 기복주의적 신앙이라 하겠다.
율법주의 신앙이란 징계에 의한 벌과 저주가 두려워 계명 및 말씀을 지키며 복종하는 것을 의미 함이요 기복신앙이라 함은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타산적인 동기에서 예배와 헌금(특히 십일조)을 바치며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살아가는 복음주의적 신앙 생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겠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율법주의와 기복사상에 의한 신앙관을 복음적 신앙으로 승화 시키는 개혁이 필요하고 율법주의의 노예적인 맹목적 복종과 극히 타산적이며 이기적인 기복주의적 신앙을 하나님께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되돌려 놓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 되어진다.
십일조에 관해서 논하다 율법과 복음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언급 하게 됨은 이 문제를 나름대로 정립하지 못할 경우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계명들이 인간들의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겠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나마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십일조 하면 의례 첫번째로 제기 되는 것이 모세가 받은 613 가지의 율법에 속한 계명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를 지킬 의무가 없다하며 십일조를 배척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신약에 의해서 구약 성경의 일점 일획이라도 무시 되어지거나 경시 되어저서는 결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율법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를 속박하며 우리의 삶에 참으로 성가시고 부담을 주는 계명들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 받은 율법이 과연 그런것들일까.
바울은 로마서 4:13 이하의 말씀에서 성경(구약)을 율법의 선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약속의 선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있게 말하기를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
12)라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바울처럼 한차원 높은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서 주신 율법을 볼것 같으면 복과 저주를 놓고서 우리로 하여금 둘중 하나를 택하라 하시는 융통성 없는 엄하시기만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해 우주보다 크신이가 실오라기 하나하나 까지도 간섭하시며 가르쳐 주신 참으로 자상하신 사랑이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을 유대인들 처럼 율법이기 때문에 지킨다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품격에서 발현된 선한 일이기 때문에 지키겠다고 할때에는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율법의 개념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구안록을 집필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속죄의 원리편에서 "구약적인 엄중한 도덕을 가르치지 않고 대번에 신약적인 부드러운 은혜를 가르치는 자는 자활(自活)의 길을 걷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막대한 유산을 넘겨주는 미련한 아버지와 같다" 라고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바 있다.
십일조를 율법이냐 아니냐 하는 단순한 논리로만 전개시킨다면 이제까지 논란 되어저온 그 범위를 벗어저 날 수 없을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시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과 회막에서 봉사하던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 제정된 것인데(민18:21)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그리던 동물제사 제도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서 더 이상 제사장도 동물제사도 레위인들의 회막 봉사도 필요없게 되므로서 이 모든 것들이 폐지 될때 십일조도 함께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것 같다.
그러나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대책 이전에 그 근본이 하나님의 것(레27:30) 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활이 끝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은 결단코 폐지될 수 없다 하겠다.
인류 최후의 심판이 있기까지 이 지상에는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업이 중단 되어질 수 없기에 하나님의 것은 절대 필요하며 또한 지켜야 할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사업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겠기에 이일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의 생활을 돕고 선교와 구제등 지상 교회에 맡겨진 사명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물질 또한 필요 하기에 교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극히 경계해야 할것은 아직도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며 찬반 논쟁을 벌이는 자들의 주장과 참으로 많은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십일조와 세상의 물질의 복을 연결시키는 기복주의적 신앙관이다.
우리가 율법을 존중한다면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더욱 더 존중하며 지켜 나가야 하듯이 십일조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 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22:37) 하셨고 이 말씀의 뜻을 깨달은 사도들 및 믿음의 선진들은 기꺼히 목숨까지도 드리지 않았던가.
초대교회때에 사도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그에 따른 영혼 구원을 크게 외치며 가르쳤을 때 구원의 확신과 은혜 받은 성도들은 그들 소유의 밭과 집을 팔아 전액을 사도들 앞에 가져왔고 이를 위임 받은 사도들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율법 시대의 때가 아니요 은혜 시대의 신앙 생활이었을 때이다.
이러한 믿음 앞에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옳다 그르다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인가.
사도들 및 바울은 이미 이러한 믿음을 소유 하였기에 십일조에 대해서 일체 언급함이 없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그러기에 십일조는 율법에 의한 것이기에 하지 않아도 된다 함이 아니라 더 깊은 큰 뜻을 따라 행함이 옳고 좋은 행위라 하겠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십일조 및 헌금관을 바로 세워야 하겠다.
칠일중에 하루를 성별하여 안식일로 지키는 교인중에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면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참된 믿음의 발로라 하겠다.
그러나 일반적인 율법의 개념을 가지고서의무적으로 드린 십일조라면 바리새인들이 바치던 의미의 십일조이기에 이는 아직까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증거요 아무런 유익함이 없는 행위라 하겠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더 많은 세상의 재물을 얻기 원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신성해야할 연보가 뇌물성 헌금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 신 이시므로 조건부적인 뇌물성 헌금을 기뻐 하시지 않으시며 순수한 연보를 원 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좀 더 성숙된 신앙인으로서 생각 행야 할 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으로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십분의 일이 아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린다 해도 무엇이 아까울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뜻을 외면하고 바친즉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 주신다며 싸구려 축복과 가치없는 은혜와 구원을 외쳐대며 설교를 하는 목사들,
그뿐 아니라 많이 바치는 자가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며 십일조 외에도 주정헌금,  월정헌금,  갖가지 감사헌금,  각종 적기헌금,  구역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교육헌금,  부흥회헌금,  사경회헌금,  수양회헌금(일일히 다 나열할 수 없어 줄임)등 갖가지 명목을 부쳐서 교인들로 부터 헌금이란 명목의 돈을 거둬들이는 이러한 일들이 정말 성경적이며 합당한 행위들인지는 생각 해복 문제인것 같다.
신앙 교육을 앞세워 교묘한 말을 내세우며 헌금에 대한 설교를 열심히 하는 목사일수록 하늘의 신령한 복이 교인들 위에 임하시기를 바라는 것 보다는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이고 자기는 지지 않으면서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멍에를 지우는 자들은 아닌지.
이러한 자들이 목회하는 교회일수록 교회적인 일은 외면 하면서 무엇 하나 교회가 이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참된 교회 교육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는 것이요 그러한 가르침만 잘되면 헌금 강조는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 뿐 아니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 하는데(신14:29)도 사용 하라 하시었건만 현 사회로 부터 억눌리고 소외당한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과연 얼마나 생각하며 사용 하였는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가르침은 풍성하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선을 찾아 보기 힘든 한국교회들을 보면서 거둬들인 것을 하나님의 뜻 하신대로 사용치 않으면서 자기들만의 유익을 위해서 호사스러운 일을 위해 아낌없이 지출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가 없다.

그러기에 십일조는 거둬들이는 일이 문제가 되서는 아니되고 거둬들인 십일조가 하나님께서 제정 하신바 대로 사용 되어지고 있는 지가 문제가 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아멘넷 게시판, 작성자/ 마란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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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묵시록  " 그림 입니다 (소름끼치는곳 이네요~~)

 


원문보기 : http://blog.chosun.com/b2bomber/5768176

1925년에 제작한 한국의 모습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독일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신부는 1911년에 이어 1925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한국의 모습을 영화에 담았다.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는 아름다운 내 나라의 당시의 모습이다.

원문보기에서 KBS 스페살로 제작된 전체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칼빈과 세르베투스 (Servetus)

칼빈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는 것이다. 자, 그럼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세르베투스가 정죄 받게 된 그의 저서

세르베투스는 1530년에 “De Trinitatis Erroribus”(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그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머리 셋 달린 Cerberus(신화 속의 동물)이며, 어거스틴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다“고 주장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편지를 보냈고 1546년에서 1548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편지가 오가게 된다. 그 편지 중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징계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 밖에 없습니다.”

 

세르베투스의 저서

이 당시 칼빈은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완성하였다. 세르베투스는 그것을 누르기 위해 ”Restitutio Christianismi”를 썼다 (사진 참조). 그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를 모두 반대하였다. 거기서 그는 믿음에 의한 칭의, 그리고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대해 공격한 것이 훗날 재판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원고를 미리 칼빈에게 보냈다. 그는 그의 출판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책 끝에 M.S.V. 라고만 적었다. (Michael Servetus, Villanovanus의 약자.) 그러나 그 책이 출판 된 이후 그의 이론을 전에 들었던 사람들은 단 번에 그 책이 세르베투스의 책임을 알았다.

비엔나에서 로마교회로 부터 사형 선고를 받음

그 당시에 제네바에는 Guillaume de Trie라는 프랑스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리용(Lyon)에 Arneys라는 친척이 있었다. Arneys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었는데 그는 Trie를 다시 로마교회로 돌이키고자 했다. 개혁교회는 불의한 집단이며 리용으로 돌아오라는 Arneys의 편지에 대해 Trie는 반대하며 “이곳보다는 그곳에 더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믿음에 관하여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된다. 솔직히 내 심정을 말하겠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화형대에서 불살라지는 마당에, 너의 있는 곳 비엔나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를 우상이라고 하며 신앙의 모든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세르베투스 같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 당시 리용의 감옥에는 개신교도들이 많았다.

 

Arneys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고 Trie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그 사실을 증명하라고 했다. 여기에 칼빈 보다 더 적합한 증인은 없었다; 그에겐 세르베투스와 오랫동안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Tire는 칼빈을 간신히 설득하여 세르베투스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Trie는 그것을 Arneys에게 보내며 이렇게 적었다 ”이 편지들을 칼빈으로부터 얻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신성모독이 벌 받아 마땅하지만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잘못된 사상은 처형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통해 징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도움 없이는 내가 거짓 증언자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결국 이 편지들을 주었다.

 

Villanovanu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세르베투스는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장에서 끝까지 자신이 세르베투스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울면서 자신은 가톨릭 교인으로 살고 죽기를 원한다고 외쳤다. 그러던 가운데 감시의 틈을 타 그는 거기서 탈출하게 된다. 결국 그가 자리를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은 진행되었고, 그의 사진을 놓고 “산채로, 천천히, 그의 몸이 숯으로 변할 때 까지 불사른다”는 사형선고가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날 그의 책들은 불살라졌다. 중세 로마교회는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긍휼이 없었다. 세르베투스가 도망치고 얼마 되지 않아 칼빈이 있던 제네바와 또 로잔에서 공부하여 프랑스에서 복음을 전하려던 다섯 명의 학생들이 리용에서 붙잡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이 시대는 칼빈이 제 멋대로 자기를 주장하던 시절이 아니다. 칼빈 자신 조차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던 시대이다. 이와는 반대로 제네바에서 가톨릭 교도가 죽임을 당한 일은 없었다.

탈출 후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 나타난 세르베투스

이처럼 이미 이단자로 낙인 찍힌 세르베투스는 몇 개월 후 제네바에 나타났고 거기서 체포되었다. 이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르베투스는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그가 애초에 숨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엔나 또는 툴루즈(Toulouse)에서는 Grenoble, Modane, 그리고 Turin을 거쳐가도록 되어 있지, 제네바까지 멀리 돌아 갈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미 1546년 당시 칼빈은 그의 친구 Farel에게 편지를 쓰며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다면, 제게 영향력이 있다면 그가 살아서 나가도록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런 단호함을 당시 편지를 주고 받던 당사자들인 칼빈과 세르베투스는 더욱 잘 알았다. 그런 세르베투스가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 갔다면 그 이유로 추정되는 것은 그 당시 제네바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Libertine (자유당)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칼빈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칼빈은 그들 때문에 많은 곤란을 당하였다.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은 제네바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바울이 로마를 은혜의 복음 전파를 위한 기점이 되어야 할 것을 깨달은 것 처럼, 칼빈은 제네바를 그 기점으로 생각하였던듯 하다. 개신교회를 저해하려는 것은 로마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의 주장을 무너뜨리려 했던 세르베투스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칼빈이 “교만하고 악마적인 세르베투스를 무너뜨릴 망치”가 되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철저히 논박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다시 재판을 열었다. 이것은 비엔나에서 열렸던 로마교회의 재판과는 다르다. 이단자들에 대해 무자비했던 로마교회 앞에서 그는 울면서 자기를 숨겼을지 모르나 제네바 시의회라면 다르다. 거기서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주권을 제거하려는 Ami Perrin, Berthelier, 그리고 Vandel 같은 사람들의 당파가 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라면 세르베투스는 승산이 있었다. 얼마나 자신만만했냐면, 그의 이단성을 증명할 증언자로 선 칼빈에게 던진 그의 공격을 보면 “마술사 시몬 같은 자, 범법자, 살인자여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는 불쌍한 자 … 거짓말장이이며 사악한 말다툼꾼 … 너의 뻔뻔함은 눈이 희다는 사실도 논쟁하려는구나 …  웃기는 난쟁이 같으니라고 … 너의 개짖음으로 재판장들의 귀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불쌍하구나, 불쌍해” 세르베투스의 이런 말들을 갖고 그를 너무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에는 이런 강한 말투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모습 속에서 세르베투스가 얼마나 자신만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특유의 차분함으로, 때론 반박할 차례가 와도 세르베투스에게 더 말할 기회를 주는 등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하나씩 지적해 나갔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모든 물질이, 심지어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발등상”도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물질 중 하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시의회 주관이었던 재판

칼빈은 제네바에 거주하는 이방민이었다. 어떤 이들은 칼빈이 그의 죽음을 승인했다고 하나, 그는 시민권이 없었고 고로 투표권도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고 그래서 칼빈은 거기서 목회를 하였다.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종교회의에서뿐이었는데,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시의회 주관이었다. 거기서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정죄할 권리도 없었다.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도 신학적인 자문을 구하는 등 두 달이 넘는 시간에 걸쳐 힘들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최후의 단계에서 삼일에 걸친 논의 끝에 가장 고통스런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때 칼빈은 의회 쪽에 그의 형벌을 감해 달라고 구하게 된다.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형으로 바꿔달라고 구한다. 그러나 시의원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신성모독으로 사형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칼빈이 1553년 10월 26일에 Farel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내일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형 방식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Opera, XIV, pp. 590, 613-657).

 

더 자세한 사건의 흐름은 적지 않겠다. (Emanuel Stickelberger의 ”Calvin – An Authentic Account of the Life & Ministry of John Calvin”이 좋은 참조 문헌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내거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겠다. 그 시대에는 오늘 우리 사회가 일부 죄에 대해 사형을 행하는 것처럼 신성모독에 대해 사형을 시행하던 시대였다. (사형 제도가 옳다는 주장을 지금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칼빈이 사형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 우리로서 그의 잘못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은 오류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종을 데리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 시대의 사회 제도에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통념들을 고려하지 않고, 칼빈을 자기 의견과 다르면 마구잡이로 사형시키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왜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세르베투스를 죽인 것이 칼빈인가? 아니면 그는 시대의 현실 아래서 사형이라는 형벌을 당한 것인가?

 

칼빈의 전한 말이 어떤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는 제쳐두고 그에 대한 인신공격 아래 그러한 칼빈이 한 주장들은 틀렸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을 최종 권위로 생각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칼빈이 싫은 것이 아니라 칼빈 뿐만이 아니라 루터 등 개혁자들이 한목소리로 전한 바 죄인은 자유의지로 구원의 신앙을 만들어내지 못하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의 복음을 못 마땅해 함이 아닐까.


출처: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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