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생각하는 저승사자가 뭐예요?

저희 부모님 운명 하셨을 때 “저승사자 밥”이라 하여 밥 “세 그릇”, “ 짚신 3 켤레”, “ 동전 3 계”를 채반에 담아 대문 밖에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것이 저승사자 밥이라고 이라고 합니다. 저승사자가 뭐예요?

1. 저승사자의 의미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처음에 접할 수 있는 것이 저승사자이야기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전설의 고향”과 같은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저승사자의 모습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고깔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저승사자는 죽어 가는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은 완강히 거부하지만 저승사자는 인정사정없이 그를 저승으로 데려 갑니다.

저승사자 자신도 염라대왕의 명령을 받고 왔으므로 사사로운 인정에 이끌려 천도를 집행하는 일을 그르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승대왕으로 불리는 염라대왕(閻羅大王)은 불교적 개념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사용된 저승이란 개념 자체도 불교의 전례와 더불어 생겼다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염라대왕은 생(生)과 사(四)의 질서를 관장하는 무서운 존재로서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자라잡고 있습니다.

그는 저승의 대법관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인간의“ 삶의 기간”을 일종의 “재판기록”으로 간주하는 존재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저승사자는 염라대왕이 파견하는 사자를 말합니다. 저승의 심판관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이니 그가 보낸 저승사자는 냉혹한 존재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세인들은 임종하면 흐트러진 혼을 불러들인다는 뜻으로 임종 자가 평소에 입던 홑두루마기나 적삼의 옷깃을 잡고 마당에 나가 임종인의 생시 칭호로 누구 복, 복, 복, 3번 부른 다음, 그 옷을 시체에 덮고, 이때 “저승사자 밥”이라 하여 “밥 3그릇”, “짚신 3켤레” 동전 3계를 채반에 담아 대문 밖 옆에 저승사자 밥상을 차려 놓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 동전을 가져다 가계에서 군것질한 기역이 납니다.

2, 죽음을 앞둔 환자에 관한 정신과 이론

죽음을 앞둔 환자에 관한 정신과 이론인 “생 이후의생”이라는 책은 죽음 앞에서 대개 다음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저항의 단계 죽음을 바다들이 않고 나는 죽을 수 없어 하는 저항을 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는 육체를 이탈한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지나간 시간의 삶이 현실감 있게 재생되는 단계, 그래서 평소 때 하지 않던 행동을 하면 저사람 죽을 여나마, 죽기 전에는 잘 가지도 않은 자여들 집에 단여오더니 죽었어, 평소 때 옷 한 벌  사주지 않다가 옷 사주고 죽 어서 하는 주변을 정리하는 단계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어떤 알지 못할 곳으로 나아가면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초원의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위의 3가지를 모두 기술하면서 한국인들이 첫째 저항의 단계는 저승사자의 이끌림에 저항하는 형식 강해서인지 죽음의 시신 얼굴모습이 경직되고 무언가에 쪽 기고 공포감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있지는 모르지만 장례를 전문하는 사람은 시체만 보아도 임종인의 종교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필자가 유럽지역 집회를 인도 하면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덴마크에서는 돼지을 어떻게 잡는 방법에 따라서 고기 육질과 맛이 달라 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돼지을 잡으면서 고통 없이 좋은 음악소리 속에서 잡으면 육질이 경직 되지 않고 부드러워 맛이 조운데 한국식으로 도치로 머리를 처서 잡으면 육질이 경직되어 질기고 맛이 덜하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 앞에 어느 종교의 사후 관으로 죽는 야가 시신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3.기독교적인 죽음의 이해

기독교인들이 운명 할 때는 천군 천사들이 함께하므로 세인들과 같이 시신이 경직되지 않고 부드럽고 얼굴이 모습이 편하고 미소 짓는 모습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을 잠잔다고 합니다. 잠자다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의 종교입니다 부활의 종교입니다.

육체는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 나라로 각이 때문에 성도의 죽음은 평온함 가운데 운명합니다.  전7;1-2“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하였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싫어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천국을 희망하고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죽음 자체를 노래하는 여유가 이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요, 천국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할 수 없는 일이며 내세의 소망이 넘치기 않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서재생목사(서울대현교회)

.. 대우주 감상하기 ..  

상상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대 우주..
창조주의 위대함이 파도처럼 다가옵니다
 티끌같은 나란 존재에 대해 이 광활한 대 우주는
무언의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것 같습니다

"너는 누구인가?" 

- 잠시 마음의 여유를 새롭게 가져보는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




 

                 
           
< 볼륨을 좀더 높여서 보시면 더욱 신비로움이 느껴질 것입니다 >


이스라엘에서 존경 받던 랍비 카두리는 그가 죽기 얼마 전에 메시아를 만났고 그의 이름을 노트에 적은 후 자신이 죽은 지 1년이 지나면 그 노트를 열어보라고 했다. 1년 후에 그 노트를 열어보았을 때 그 노트에 적힌 대로 문장의 첫 글자를 조합한 결과 예슈아(예수님의 히브리어 이름)라는 이름이 나왔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워 지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고 계신다.







예수의 제자였던 빌립의 무덤이 터키 다도해 지역에서 발견돼 주목을 받고 있다.

세인트빌립교회서 가까운 인근 교회서 무덤 발견

▲터키에서 발견된 빌립의 무덤(영국 기독교계 신문 <크리스천투데이> 제공)
영국 기독교 신문 <크리스천투데이>는 이탈리안 고고학자들이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빌립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다고 6일 고고학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무덤은 데니즐리의 터키 다도해 지방에 있는 고대 소아시아 도시에서 발견된 것이며, 학자들은 무덤을 곧 발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발굴자인 프린세스코 디앤드리아는 “무덤의 발견은 세계의 엄청난 관심을 끌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고대의 무덤은 대체로 증거나 흔적들이 없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빌립의 무덤은 Martyrium 교회가 지어진 지역과 연결돼 있어 관련된 유물의 증거 조사가 가능했다.

지난 7월 앤드리아와 고고학자들은 Martyrium 교회에서 150피트 떨어진 더 작은 교회에 머물렀었다. 그들은 새롭게 발견한 이 교회를 정돈하는 중에 근처에서 빌립의 무덤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정밀 검사를 통해 빌립의 무덤이 이전 위치인 세인트빌립교회에서 새롭게 발견된 이 교회로 비잔틴 시대인 5세기경 이전된 것을 알아냈다.

앤드리아는 “최근까지 우리는 빌립의 무덤이 Martyrs' Hill 에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그 지역에서 실시된 지구물리학적 조사에 따르면 그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 달 전쯤 Martyrs' Hill에 있는 세인트빌립교회로부터 40미터 떨어진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교회들을 발견했고, 그 교회에서 우리는 빌립의 무덤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32년 동안 고대 도시에서 유물을 발굴해오다 이번에 빌립의 무덤을 찾아낸 고고학자 앤드리아는 “성경에 나타난 성자의 무덤을 발견하게 돼 자랑스럽고 매우 기쁘다”며 “이 무덤은 성지순례자나 고고학자,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사도 빌립은 2천년 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다 로마인에 의해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

윤화미 기자 ⓒ뉴스미션

출처: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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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물 덩어리’(water mass)가 미국의 두 연구팀에 의해 발견돼 관심을 모은다.

 
▲스페이스데일리 홈페이지 캡쳐ⓒ뉴스미션

지구로부터 120억 광년 떨어진 거대한 블랙홀 주변에 위치

스페이스데일리 등 미국의 과학 전문 매체들은 지난 22일자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보도 자료를 인용, 이와 같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구로부터 120억 광년 떨어진 거대한 블랙홀 주변에 위치한, 지구 바닷물을 다 합친 양의 140조 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 구름이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 교수들이 이끌고 있는 2개 연구팀에 의해 발견됐다.

우주가 생성된 지 16억 년 만에 생성된 것으로 분석된 이 수증기 구름의 엄청난 규모는 초기 우주의 새로운 단서뿐 아니라 수증기 근처 블랙홀의 정보를 얻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수증기 속 온도는 53℃, 밀도는 지구 대기보다 300조 배나 희박하며, 우리 은하와 비교했을 때 온도는 5배, 밀도는 10~100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편 현재 수증기의 양과 일산화탄소 등 기체들의 측정치로 예측해 볼 때, 수증기 구름이 발견된 인근의 블랙홀은 지금보다 6배 이상 규모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 상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창세기 1:6~10)

이병왕 기자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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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께서 제사장, , 선지자의 직임을 수행하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신약에서는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임에 참여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왕 같은 제사장이지만 선지자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비록 성경이 성도들에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선지자니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신자의 책임 중에 선지자적 역할이 가장 요청되는 역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이미 완성하신 일에 참여는 하는 것이고, 왕의 역할은 그 나라가 완성될 때 온전하게 되는 것이지만, 선지자의 역할은 이 땅에 국한 되면서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할 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3:1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사람들이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

그럴 경우 선지자는 성과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노력해 볼 수 있겠지만 100% 불가능한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이들을 불가항력적으로 듣게 하실 뜻도 없으신 데도 선지자는 전해야 합니다. 이런 때 선지자는 철저히 비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자들을 불순종 하는데 버려두실 것이면서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전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선지자적 비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신약 성경은 사람이 혹 더듬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일반 은총을 주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19-20에“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전도를 받지 않아도 불신자가 정직하게 만물을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핑계치 못한다.”는 말이 정당하게 되려면 앞에 한 말이 일반 은총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어야 됩니다. 따라서 특별계시가 아니더라도 핑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깨닫는 것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부패를 말씀하면서 동시에 더듬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다 간파하지 못하는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지만 신자가 아무런 대책 없이 모든 것을 성령께 맡겨놓고 팔짱 끼고 지켜보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신자는 불신자와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입장과 태도가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

성경에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 20:1-3)이 있는데, 신학자들에 따라 각기 다른 세 가지 천년왕국설이 있습니다. 천년왕국설은 그 주장에 따라 강조점이 다른데, 공통적인 것은 천년왕국설은 사회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천년왕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관이 달라집니다
.

전천년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에 천년 왕국이 온다는 설명인데,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 성도는 하늘로 들림 받아 하늘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 적대세력이고 결국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세상과 교회를 엄격하게 구별합니다
.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설입니다. 이 입장은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보는데, 사람이 노력하면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 좀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이 설명을 선호합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악이 점점 줄어들고 선이 왕성하게 되어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는데, 그 후 잠간 동안 배교가 일어나고 재림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

마지막으로 무천년설은 “천년”이란 상징적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입장은 그렇게 긍정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부정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이 이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마귀에게 모든 영역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여기에 문화 창조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문화를 통한 성령의 사역을 인정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긍정적입니다. 긍정적이라는 면에서 약간은 후천년적인 요소가 있기도 합니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 그리고 개혁주의는 무천년설 입장을 취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개혁주의가 취하는 무천년설의 입장에 서서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신학은 거의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19세기의 자연과학과 그의 배경이 되는 관념주의 철학과 오늘날의 자본주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수주의 교회들은 자연과학과 관념주의 철학의 폐해를 인하여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진보적 교회는 관념주의 철학과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무천년설의 입장은 지나치게 비관적도 아니고 지나치게 낙관적도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낙관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비관적입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정의와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회개를 외치라고 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외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아무런 긍정적 결과가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옳고 정당하고 선한 일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

그래서 성도는 현실에서 선지자적 비관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당위론 적인 것이지 목적론 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고,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현실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선지자적 비관주의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 2:7; 3:7 -

 

 

 

출처: 아멘넷/ 황상하 목사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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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영혼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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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교사가 교회를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는 중에 기도응답을 강조하다가 “하나님도 길들이기 나름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 제3계명을 범한 죄입니다. 똑 같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한국교회 강단에서 종종 들을 수 있고, 기도의 효능을 그 선교사처럼 믿는 설교자와 신자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발상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화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강조하는 분들은 “기도의 능력” 또는 “기도의 힘”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목회자들이나 기적이나 능력을 체험했다는 분들도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능력”이란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기시기도 하지만 기도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은 비단 기도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신자는 “기도의 능력”보다 “경건의 능력”을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그 누구도 충분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신자는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지만 언제나 진심어린 바른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바른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기보다 자기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참 종교의 참 신자가 드리는 기도이고,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우상종교를 믿는 자들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백성들에게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인데, 하나님을 믿는 자가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신을 섬길 리 없을 것 같은데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그렇게도 강조하여 금하셨습니다. 십계명 중 제1계명이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이고, 제2계명은 실재하지 않는 신인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순서가 중요성의 우선순위에 따라 주어졌음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 가장 철저히 삼가야 할 것이 우상숭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와 법도를 지키도록 당부를 하면서 경계를 삼도록 과거 이스라엘이 뼈아픈 경험을 했던 바알브올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바알브올의 일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물렀을 때에 이방의 술사 발람의 올무에 걸려 그곳 모압 여인들과 행음(行淫)하고 그들의 신 바알브올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24,000명이 죽은 비극적 사건을 말합니다. 그 내용이 민수기 25:1-9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모세가 강조하는 점은 바알브올을 섬기던 이들은 다 죽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붙어서 떠나지 않은 이들은 다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상종교는 멸망의 종교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생명의 종교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상을 금하신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 자체도 금하신 것이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우상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문제를 삼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화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 이스라엘은 우상과 하나님을 혼동하여 섬겼던 적이 많습니다. 바알이 화복을 주장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다산의 복, 풍작의 복을 바알이 주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긴 것은 신약적으로 말하면 기독교를 우상종교로 만들어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통해 가장 강조한 것은,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창조사건에서도 너무나 명백하고 뚜렷하게 천명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이 타락한 결과의 심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물주를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를 우상종교로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대단한 지혜라고 생각하였습니다(롬 1:21-23). 하지만 인간이 우상을 만드는 것은 부패한 증거이고, 그 부패에 대한 설명은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에서 김용옥 씨가 동서양철학을 넘나들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를 통해 기존의 교회와 성경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동서양철학을 섭렵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전문가들은 그의 학문과 주장에 대해 고증 등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분이 머리가 좋으니까 철학과 사상과 종교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독특한 자기 논리를 세우지만 아무리 탁월해도 논리요 이론일 뿐입니다. 논리적 이론은 자체의 영역이 있고 하나님과 성경은 그 영역을 초월해 있습니다.

성경은 논리적 이론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것을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우상이란 나무나 돌이나 금속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 신이라고 부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피조물과 하나님의 구별을 철폐하는 주장과 이론도 곧 우상입니다. 그러한 주장에 기독교가 일일이 대응할 필요도 가치도 없습니다. 대응할 가치가 없는 주장에 기독교가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고, 또 교회가 그런 사람과 논쟁을 하면 괜히 그 사람과 미련한 사상만 확산시키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철학은 하나님을 관념화 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교회는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관념화 하는 철학은 이성을 우상화 했고, 하나님을 형상화 한 교회는 인간의 욕구를 우상화하였습니다. 현대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섬긴다는 점입니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서 알라딘은 주인이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요정은 알라딘의 종인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만든 사람이 주인입니다. 천지를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의 주인이시고,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의 주인이십니다. 우상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우상의 주인은 인간인데, 하나님을 우상화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종처럼 필요에 따라 부리고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은 인간보다 능력은 있지만 윤리나 고상한 정신은 없습니다. 민간의 우상이나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일체 고상한 정신이나 윤리의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건이나 고급한 가치를 강조하지 않고 기도 응답만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우상화 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하나님을 우상화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화 한 것은 하나님을 엎드려 경배하고 섬기는 신으로가 아니라 부리는 신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는데 법궤를 메고 나가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우상화 한 경우입니다. 신자가 나무나 돌이나 금속을 다듬거나 세공하여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을 자기 소원이나 들어주는 우상으로 섬길 위험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요구되는 것의 특징은 싫은 것은 무조건 다 하라고 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다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입니다. 신자는 기도응답 받았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달라진 인격과 경건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신 4:15,16 -

출처: USA 아멘넷 황상하 목사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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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고
마음과 행동의 철저한 변화를 일으켜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취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세상적인 관심사보다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에
더 비중을 두게 합니다.

회개는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죄를 짓고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는 죄가 모든 악의 주범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라면 진절머리 나고
죄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며
죄가 혐오스럽고 저주스럽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죄를 짓는 자신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죄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항상 살피고 죄짓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전에는 스스로 무결하고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자신의 본성이 심히 부패해 있고 전체가
절망적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를 정결케 하시고
나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내 속에 정결한 마음을 갖도록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전에는 자기의 처지에서

아무런 위험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자기가 상실된 사람이며,
은혜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지 아니하면
자신은 결국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임을 깨닫습니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흠모할 만한

아무런 것도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자기가 찾는 진주,

감춰진 보화로 여깁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자기의 전부 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그 분을 진정으로 더 사랑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세상 것들에 미련을 두거나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섬기고 그 분께

영광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매사에 순종하며 억지로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그 분께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굴레로 생각하지 않고

유업으로 생각 합니다.

그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뿐 아니라

이를 스스로 원합니다.

그는 거룩한 생활을 좋아하고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이
그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그의 가장 큰 욕구는 은혜입니다.

그는 은혜를 목말라 하고
위대해 지기 보다는 은혜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을 기뻐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교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

들이 번영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전에는 세상에 몰두하다가 시간이 남아야
자기 영혼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이제는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이 큰 관심사가 됩니다.

전에는 재산이나 명성같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까봐 두려워 합니다.

하나님이 등돌릴때 가장 슬퍼하고
예수님과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괴로워 못견딥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고

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그는 한때 죄 속에서 살고 쾌락을 즐겼지만,
이제 그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생각만 해도

심히 메스꺼움을 느낍니다.

전에는 육체가 죄의 도구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이제 그는 거룩함과 영예, 절제와 정절,
그리고 근신함을 간직하며 주님께 온전히 드립니다.

전에는 사탄 마귀의 소리에 열려 있었고
부도덕한 말로 시시덕 거리며 남을 즐겨 판단했지만,
이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항상 조심합니다.

전에는 세상적인 계획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의 생각과 관심은 온통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에서 떠날 것인가에 몰두 합니다.

전에는 마음이 더러운 정욕의 소굴이었지만,
이제는 향기로운 제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서 항상 거룩한 사랑의 불이 타오르고
매일 기도와 찬미를 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전에는 그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었으나,
이제는 거룩하고 순결한 숨결을 내뿜습니다.

이제 그의 입은 지혜를 내고,
그의 혀는 하나님의 덕과 영광을

찬미하는 금나팔입니다.
그는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철저하게

변화된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는 선한 행위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매사에 정직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양심을 가집니다.

성령으로 회개한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죄에 항거합니다.
죄와 투쟁하고 날마다 죄와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는 동안 때로는 죄에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죄와 타협하지도 않고
죄를 대적하며 성령의 능령으로

죄를 이기고 이겨나갑니다.

날마다 알고 모르게 짓는 죄를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습관적인 죄는 모두 다 끊어버리고
죄에 대해서 만큼은 무자비하며

반드시 그 끝을 보고야 맙니다.

죄짓지 않는 고귀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세상의 즐거움들을

헛되고 귀찮은 것들로 여기며,
인간의 모든 탁월한 것들을 쓰레기와 배설물로 간주합니다.

그는 은혜를 갈망하며 썩지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기로 온 마음을 다해 정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생명과 불멸의 영생을 추구합니다.

전에는 세상에 끌려다니며 돈과 명예를 중요시했지만,
이제는 예수님만을 바라 보며 좁은 문,

좁은 길로 기꺼히 나아 갑니다.

또한,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자리에 둡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쓰레기 더미 옆에 놓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자기 앞에 내세웁니다.

전에는 자기 멋대로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면서
그 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 뜻대로 행함을 실천합니다.

삶 속에서 자신의 자랑은 생각지도 않고
오로지 주님의 영광과 영화만을 사모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공로감에서 돌이킵니다.

전에는 자기를 신뢰하며, 자기 의를 세우고,
돈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치 아니했으나,
이제는 자기의 의를 냄새나는 누더기로 여기고
오물통에 벗어 던져 버립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의로 새로 입혀지기를 간구합니다.

이제 그는 심령이 가난하고 비천하며 불쌍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의에 높은 가치를 둡니다.

매사에 자기를 의롭게 해 주시고 거룩하게 해 주실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 분 없이는 한 순간도 숨을 못쉬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항상 그 분께 꼭 달라붙어 있고 싶어하며
늘 그 분과 함께 호흡하기를 갈망합니다.

이제 그는 자기를 낮추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 소리높여 기쁨의 복음을 전합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해서,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17세기 유럽의 대각성 목회자였던 조셉 얼라인이
들려주는 "성령으로 회개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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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NZOJ/80 

 
 



예수님은 브랜드가 아니다

 

마케팅에 무릎 꿇은 복음전도의 위험성

 

타일러 위그-스티븐슨  Tyler Wigg-Stevenson January 13, 2010 장택수 옮김

내슈빌에서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I-40 도로에 있는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알코올중독자를 위한 회복 프로그램 광고였는데 광고판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살짝 얼어서 감칠맛 나게 보이는 찬 맥주를 쏟아 붓는 사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광고를 볼 때마다 맥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알코올중독자가 아닌 내가 봐도 그런데 음주로 고생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저 광고를 지나칠 때마다 회복 프로그램에 등록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당장이라도 술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야겠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홍보하려는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소비자를 끈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마케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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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딜레마
마케팅에 물든 서양 문화에서 교회가 행하는 복음전도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마케팅이란 조직의 개념을 규정하고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고 경쟁업체보다 더 많은 소비자를 유치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시장조사, 소비자 욕구분석, 제품 디자인, 브랜딩, 가격 책정, 홍보, 광고, 유통과 관련한 전략적 결정도 포함된다. 

예수 브랜드를 연구하면서 보니 교회가 소비자 중심주의 문화에서 증인의 역할과 복음전도라는 사명을 수행할 때 이런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와 메시지를 마케팅해야 하는가? (이 글에서 내가 말하는 복음전도용 메시지(evangelistic message)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예수를 생각해보라고 권하든 복음의 특정 부분을 강조하든 교회에 참석하라고 권고하든 우리는 복음전도의 여러 측면 중 하나를 실천하는 것이다.) 틈새마케팅이나 브랜딩 같은 마케팅 기법을 사용해도 될까? 어쩔 수 없는 대세인가? 메시지에 영향을 주지 않고도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마케팅 기법은 우리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왜곡하는가?

교회 마케팅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오는 것이 중요한 지역교회에서 마케팅 수용 여부는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상업주의 문화에서는 사실상 모든 것이 판매 가능하다. 마케팅을 고려하지 않고 대중에게 다가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대다. 마케팅을 하려는 의도가 없다손 치더라도 일반인들은 교회의 전도 활동을 마케팅으로 간주한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간과한다면 마케팅도 제대로 못할 뿐더러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다.

복음전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는다면, 마케팅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한편 마케팅이 우리 시대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을 유창하게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외국에 선교사로 나간다면, 그 나라 말을 배워야 하지 않는가? 마케팅은 설득이나 예시 같은 전통적인 복음전도 모델의 최신 버전일 뿐이다.

많은 주장이 존재한다. ‘처치마케팅석스닷컴’(ChurchMarketingSucks.com)이라는 웹사이트에 조슈아 코디는 이런 글을 남겼다. “불완전한 마케팅과 노골적인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리를 내다팔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교회의 형편없는 마케팅 실력이 문제다. 믿지 않는 대중에게 교회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오히려 조금도 호감이 가지 않는 브랜드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마케팅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마케팅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마케팅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케팅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바꾸어 버린다. 모든 미디어가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케팅은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기는 소비주의 사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장에 내놓으려면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잘 브랜딩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앞서 말한 ‘처치마케팅석스닷컴’의 의견을 보자. “마케팅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홍보하고 판매하고 유통하는 과정이다. 전적으로 사업 개념이지만 이와 매우 유사한 일이 교회에서 일어난다. 복음전도와 판매를 비교해보면 유사한 점이 많다.” 

유사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전도와 판매는 결코 같지 않다. 우리는 참 진리와 판매대상이 될 수 있는 진실 사이의 엄연한 차이를 무시하고 교회를 마케팅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마케팅이 주도하는 문화에서 진리 역시 또 하나의 제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대중은 시장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대하듯 진리를 소비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우리가 판촉하는 제품은 다른 제품과 전혀 다르다. 사실 제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복음을 어떻게 마케팅할 것인가? 마케팅이 불가피하다면 복음을 제품으로 대하는 일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할리데이비슨 동호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영업사원을 지난 2000년 동안 충분히 보았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사람들을 ‘구원’시키려고 노력하는 부류가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광고에 식상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적당하게 변장하고 마케터들이 접근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복음을 적절히 위장한다. 교회 십자가를 내세우는 방법은 구태의연하기 때문에 요즘에는 일대일 복음전도 모델이 교회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은 오토바이나 잔디깎기나 바비큐소스 같은 특정 브랜드 제품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의 판매기법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

그렇다고 복음전도 방식에서 교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부러 세상 속에 뛰어들기도 한다. 할리데이비슨 동호회에 가입하여 오토바이의 세계를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현대 복음전도 방법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영리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다는 말이 빠져있다.

교회가 빠진 우리의 신학 때문에 복음전도에는 판매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교회 없는 복음전도는 소비자중심주의 구원론을 조장한다. 이런 식이다. 당신(소비자)은 ‘그(제품)를 마음에 초청하여’(브랜드 수용) ‘구원받는다’(소비자 만족). 분명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일해 오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세상 문화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예수를 수많은 광고에 등장하는 브랜드로 만들어 버렸다. 

광고에 등장하는 브랜드들은 자사 제품이 자존감과 성적매력과 자신감과 쿨함을 준다고 약속하지만 사실 제품에는 아무 능력도 없다. 소비자들이 제품에 그런 능력을 부여했을 뿐이다. 즉 소비자중심주의는 약속을 지킬 능력을 상실했으며 우리 역시 속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소비자중심주의 마케팅은 결국 실존하지 않는 것을 주겠다고 말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볼 때 그럴듯한 홍보문구를 내세운 구원에는 실제로 아무 능력이 없다. 새 나이키 운동화를 사고서 운동선수라도 된 양 행동하듯이 소비주의 구원은 잠깐 거룩하다는 느낌을 줄 뿐 내실은 전혀 없다. 종교 브랜드를 잠시 바꿨을 뿐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와 구원을 분리한 채 복음을 전한다면 이는 반쪽짜리 구원이다. 구원의 공동체에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마 16:18).

예수의 복음에는 참된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다. 에베소서에 명시된 것처럼 구원 계획은 교회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엡 2:19, 표준새번역). 복음에는 교회에 속하고 회개하며 공동체에 속하여 죄를 용서받으라는 초대가 들어있다. 파멸과 죽음의 넓은 길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로 걸어가라는 초청이다.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새 신자가 힘들고 어려운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신앙 공동체와 함께 걸어가는 길이다. 신자들이 연합하여 공동체를 이룬 신실한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몸소 실천하는 증거가 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세례를 통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기반으로 복음을 전한다. 많은 교회가 구도자들에게 교회생활에 동참하도록 격려한다. 교회위원회나 특별 행사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여 특정 신앙 공동체에서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해왔던(은혜로 해왔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일대일 전도방법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이 방법은 사람들을 제자로 이끄는 데 충분히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개인 복음전도 방식은 소비자중심주의 구원론에 빠질 수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판매 방식의 복음전도가 지닌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신학에 있다. 방법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자신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중고차 영업사원처럼 느껴진다면 해결책은 교회를 강조하는 것이다. 강력한 복음전도는 하나님이 삶에서 하신 일을 단순하게 열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말을 지지해줄 공동체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이 세상의 방식
소비자중심주의 사회에서 대부분 복음전도는 판매 활동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제품이 아닌 복음의 특성상 교회 중심 사고방식과 시장 중심 사고방식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소비자중심주의의 특성과 가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방식을 개발한다면 예수를 브랜드로 만든 제단에 무심코 절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소비자중심주의 사회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구입하느냐가 곧 당신을 규정한다. 당신의 소비패턴이 당신의 정체성, 사회적 위치, 자기 이미지를 결정한다. 인종, 민족, 종교도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소비자중심주의적 마케팅을 이해하려면 이미지로 표현된 브랜드를 살펴보면 된다. “Mac vs PC” 라는 광고를 보면 각 브랜드를 의인화하여 매킨토시 컴퓨터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멋쟁이로, 퍼스널컴퓨터는 촌스러운 비호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광고를 보면 일반 컴퓨터보다 뛰어난 매킨토시만의 기술과 기능을 다루기도 하지만 기술적 측면은 부수적이고, 경쟁 브랜드보다 앞선 스타일과 개성을 내세운다. 그 개성은 소비자에게까지 확대된다. (이에 맞서 마이크로소프트는 “I’m a PC!”(나는 피씨다!)라는 광고를 내보냈다.)

이런 광고가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소비자들이 마케팅 언어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Mac vs PC” 광고를 수세기 전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매킨토시가 훌륭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형편없다는 광고의 메시지를 알아듣겠는가? 맥과 피씨로 대변된 옷과 헤어스타일과 신체와 말하는 방식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마케팅은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서만 효력을 발휘한다. 제품이 무엇이든 마케팅은 우리를 소비자로서 반응하게 한다. 마케팅을 보면 브랜드가 눈에 들어온다. 나이키, 메르세데스, 기독교, 던킨 도너츠, 쥬시 꾸뛰르, 선불교, 디월트, 할리데이비슨, 이슬람, 카하트, 존 디어 등 브랜드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쿠어스라이트 맥주를 광고하든 내슈빌바이블 교회를 광고하든 보이는 건 브랜드다.

삶에 부딪히는 충돌
교회의 마케팅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또 하나의 선택의 대상이다. 이는 명백한 신성모독이다. 우리가 말하는 대상은 브랜드 로고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로고스다.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세워지는 제자도 또한 문제다. 소비자중심주의는 사회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이다. 이것에서 파생되는 습관과 질서는 기독교와 충돌한다.

여러 부분에서 갈등이 일어나는데, 네 가지만 살펴보겠다.

“나=내가 구입한 제품” 대 그리스도의 주되심

소비자중심주의 사회에서 나의 정체성은 내가 소비한 대상으로부터 온다. 이 사회의 초점은 나에게 맞춰져있다. 자립과 책임이라는 미국의 이상은 갈피를 못 잡고 흔들거리고 있다.

경영학계의 대부인 톰 피터스는 “브랜드 유”(Brand You: 당신을 브랜드화하라)와 “나 주식회사”(Me, Inc.)를 포장하고 알리고 판매하는 방법을 다룬 책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이러한 현상은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 우리의 광고 문화는 소비를 통해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잡지를 보라. 광고들은 하나같이 자사 브랜드는 내가 누구인지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외쳐댄다.

상업 브랜드는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뒤엎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에 깊이 의존한다. 우리는 특정 브랜드로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소비한다. 브랜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감 때문이다. 브랜드 업체는 우리가 소비한 돈으로 행복을 얻는다.

따라서 종교에서도 소비자들은 교회를 브랜드 대하듯 자아도취적 태도로 대한다. 예수라는 브랜드를 구입하면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 기독교는 내 비전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까?

소비자들의 행태를 신학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했다. 나는 내가 만든 프로젝트이자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제품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 경의를 돌리지 않겠다는 거부 행위다. 심리적 수준이나 영적 수준에서 봐도 개인주의는 끝없는 사춘기를 형성한다. 십대 시절이나 중년의 위기에 형성된 자신의 정체성만 믿고 그 안에 갇혀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복음을 자아성찰의 수단으로 왜곡할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유익에만 초점을 맞춘 설교와 복음전도는 값비싼 자동차나 비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강조하는 상업광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 중심의 삶과 이웃에게 시선을 맞춘 삶을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상상을 초월한 유익이 있다. 그러나 그 유익에만 초점을 맞추면 오히려 유익이 점점 더 멀어진다.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할 때 비로소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예수라는 브랜드를 통해 만족감과 더 나은 삶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교회에 온 사람들은 두 가지 다 얻지 못한다.
영적 소비자들을 위한 비복음(non-gospel)을 전하고 싶은 유혹을 거부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자기창조(self-creation)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시킬 수 있는가? 

소비자중심주의의 자기창조는 의미를 찾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복음은 천국으로 가는 티켓 정도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불만족 대 그리스도의 충만함
소비자중심주의는 개인의 성취를 약속하지만 경제 사이클은 끝없는 불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비자중심주의에서 새 자동차를 구입하는 행위는 새로운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마케터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늘 다음 상품이 대기하도록 계획한다.

이런 구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일단 낭비가 심하다. 자기도취라는 우리의 엔진을 돌리려면 엄청난 자원이 필요하다(storyofstuff.com 참조). 우리는 재활용하고 수리하는 습관보다 쓰고 버리기에 훨씬 익숙하다.

소비자의 불만에는 두 가지 영적 함정이 있다. 첫째, 안정과 행복을 위해 물건을 사들이는 우리의 욕구는 결코 만족을 모른다. 새로운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하고 느끼는 기쁨은 잠시 지속될 뿐이다. 기쁨이 사라지면 또 다른 신상품을 고대한다.

둘째, 우리는 불편을 감수할 줄 모른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새 제품을 원한다. 쇼핑중독은 심각할 정도로 퇴보한 현대 문화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고통 없는 삶을 원하는 사치조차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필요가 항상 충족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제자가 기대해야 하는 것과 정반대다. 바울은 영적으로 성숙하면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1-13, 표준새번역). 

바울의 요점은 우리의 모든 필요가 충족된다는 말이 아니라 굳이 뭔가가 없어도 만족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소비자중심주의에서는 색다른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거기에 만족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제자의 삶은 내게 힘을 주시는 주 여호와 한 분으로 만족한다.

브랜드 상대주의 대 그리스도의 우월함
마케터들은 특정 브랜드에 강한 유대감을 느끼거나 다른 브랜드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특정 브랜드에 충성하는 집단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포드사 로고에 오줌을 누는 만화캐릭터 캘빈의 스티커를 범퍼에 붙이고 다니는 시보레 자동차 운전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키로 빼입은 남자, 맥을 피씨로 바꾸느니 차라리 타자기를 선택하겠다는 친구.

겉으로만 보면 이러한 열정은 특정 브랜드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브랜드를 향한 이런 열정은 소비자중심주의에 내재된 상대주의 때문이다.

사실 시보레가 포드보다 무조건 낫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어떤 로고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을 수는 있다. 경쟁사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품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러 브랜드 중에서 특정 브랜드가 우월하다는 주장은 보스턴 사람이 시카고 사람보다 훌륭하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브랜드는 각자 다른 것을 전달한다. 메르세데스가 고급을 추구한다면 혼다는 신뢰를 말한다. 두 브랜드 모두 각자가 전달하려는 의도에 충실할 뿐이다. 어느 브랜드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소비자의 취향과 의견에 달렸다.

교회의 마케팅을 받아들이는 소비자는 예수를 하나의 브랜드로 선택한다. 예수 브랜드에 대한 열정이 신앙의 열심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진정한 신앙의 열심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것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브랜드에 대한 열성은 자기중심적이다. 다른 브랜드에 대한 우월함이 브랜드에 대한 헌신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브랜드에 대한 열성적 지지에는 선택의 임의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선택은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보레에 싫증난 소비자가 포드로 바꾼다면 시보레의 패배이자 포드의 승리다. 그러나 다른 신이 좋아서 그리스도를 떠난다 해도 그리스도의 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브랜드의 우월함은 소비자가 머릿속에서 만든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신성함과 가치는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우리가 어떤 범퍼스티커를 붙이고 어떤 티셔츠를 입든 하나님과는 상관없다. 스티커나 티셔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보다는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종교를 고르는 소비자들에게는 기독교도 수많은 선택의 기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교회의 삶은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고,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고, 뿌리 깊은 증오를 해결하고, 슬픔 중에도 기뻐하고, 역경 속에 인내하며, 자기를 희생하고 섬기며, 소비와 처분 대신 세례와 가르침을 선택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우월함을 드러낼 수 있다.

세분화 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성공적인 마케팅의 열쇠는 적절한 세분화다. 세분화란 소비자의 기호에 근거하여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집단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를 인구통계학적으로 분석하여 마케터는 소비자의 월별 영수증이나 우편번호만 가지고도 소비자를 파악한다.

세분화를 통해 마케터들은 홍보대상을 좁혀나간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기호에 잘 들어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 동네에 모여 살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같은 교회에 다니고,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를 소비하고, 비슷한 사람들과 쇼핑을 한다. 점차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는 살아가기를 꺼리게 된다.

물론 교회가 이렇다면 큰 문제다.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최고의 성경적 가치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며 빌립보 교인들에게 했던 바울의 권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모두 서로가 필요하고 모두가 귀하다던 비유를 생각해보자.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나오듯이 그리스도의 연합은 민족, 계급, 성별 같은 로마 사회를 구분 짓던 관습들을 능가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표시도 필요 없다.

우리는 교회에까지 침투한 시장 세분화를 경계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용납할 수 없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소비자 중심의 집단으로 대표되는 동질의 교회, 대형 교회 안에 존재하는 끼리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 둘은 인종, 경제, 연령, 성별 같은 것들로 사람들을 분리한다. 우리가 피해야 하는 이 세대의 방법인 것이다(롬 12:2).

이런 구분은 소비자중심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비밀당원주의(crypto-tribalism)는 기독교에도 만연하다. 개신교계 주민과 가톨릭계 주민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북아일랜드를 생각해 보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세분화를 인정하는 것이 해결의 첫걸음이다. 세상 문화가 어떠하든 교회에 세분화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편애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사고 전환
소비자중심주의는 분명히 존재한다. 앞서 말한 자기창조, 불만족, 상대주의, 세분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압도적으로 우세할 것이다. 세계화된 경제와 국가 간 무역방식은 소비주의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황에 무릎 꿇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먼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본질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 시대에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지칭할 때 가족, 나라, 섬김의 조직, 구조선, 이웃, 비즈니스 등 다양한 비유를 사용한다.

그러나 홍보가 필요한 브랜드를 지닌 사업체처럼 교회를 대하거나 일부 특성만 강조한다면 교회를 정의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교회에는 사업과 다른 부분이 많은데도 일반 기업이 사용하는 도구들을 사용한다. 투자자수익, 공급망, CEO, 시장점유율 등을 중시하는 <포츈>지 500대 기업이나 추구할 법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끌기도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제품처럼 대하면서,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고 어떻게 불신자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비자중심주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교회를 소비자 관점에서 정의할 수밖에 없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마케팅으로 받아들여진다. 교회의 광고는 브랜딩으로, 전도는 판매로 간주된다. 이런 시각을 바꾸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영적 소비자들은 영적으로 자신의 기호에 맞는 종교를 찾아 기독교를 선택할 뿐이다. 그들은 소비를 유일한 구원으로 알고 살아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들이기에 은혜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왔던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우리 앞을 기웃거릴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미치광이요 교사이며 치유자이고 선지자며 혁명가였고 나중에는 시체가 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오늘날 그들이 찾는 것은 영적 브랜드다.

예수님 시대에는 살아계신 메시아와 주 여호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껏 찾아본 적도 없는 하나님을 만났다. 과연 이 시대의 구도자들은 성령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꾸는 주님의 몸을 발견할 것인가. 신상품을 원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 감탄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앞에는 중대한 질문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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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www.christianitytoday.co.kr)



사도신경, 절대적 신앙고백인가

정통과 이단의 잣대

 

꽤 오래전의 체험담이다.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심방하는 도중에 생긴 일이었다. 내용인즉, "이번에 새로운 목사는 이단이 아니냐?"하는 소문이 들려온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진원을 알아보니, 심방중 예배를 드릴 때에 사도신경을 하지 않았대서 생겨난 소문이었다. 함께 심 방을 다니시던 권사님 한분이 그 나름대로 수상쩍다는 생각에 '이단운운'을 하였던 것이었다.

 

이렇듯 한국교회는 예배순서(대표적으로 주일낮예배) 가운데 사도신경을 하지 않으면 이 상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착화되어 있는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이단 연구가로 유명했던 탁명환씨는 '이단분별의 기준'의 첫번째 기준 을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여부를 가지고 이단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기독교이단연구: 1990.11 국종연구소 p.75)고 주장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지역교회들은 사도신경을 당연한 신앙고백으로 하는 것은 물론, 이단 이 아닌 정통교회임을 자인(自認)하는 뜻에서도 늘상 고백하여 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제대로 이해하며 고백하는 신자들은 몇이나 될까? 그냥, 고백하자니까 밑도 끝도 없이 암송하는 신자들이 뜻밖에 많다는 사실에 매우 걱정스럽다(특히, 저리로서 의 '저리'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교인이 많다. 참고로 '저리'란, '거기로부터'라는 말이 옳다).

 

그리고 집회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호와증인,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 교회(몰몬교), 통일교, 박태선천부교 등이 이단이라고 한다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천주교회(로마카톨릭)는 무엇인가?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는 개신교회의 지도자들(목회자, 신학자) 가운데는 천주교회를 이단이라는 사람도 있고, 이단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정통과 이단, 장신대 역사신학 교수 이형기 지음 - 역자 주). 그렇다면 천주교회는 무엇인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니 이단이 아니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이라고 해야 할까? 만일, 그렇다면 사도신 경은 정통과 이단의 잣대, 곧 '이단분별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기원과 전승(傳承)

교리사적인 연구에 의할 것 같으면 사도신경의 기초가 될만한 신앙고백이 2세기 초부터 존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모체(母體)가 된 것은 5세기경의 '로마교회신조'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8세기 무렵에 로마교회를 비롯한 서방의 여러 교회들이 사용하는 신정들을 지금의 사도신경과 같은 내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같은 고대교회의 전승을 '티란니우스 루피누스'라는 사람은 사도신경의 사도적인 근원을 다음과 같이 증명하고자 하였다. 12사도들이 성령강림 이후 온 세상을 향하여 선교하 고자 결단했을 때, 그들은 선교를 위한 하나의 신앙규범을 공동으로 일치시킨 것이 오늘의 사도신경의 내용이라고 밝혔다.

 

첫째로, 베드로가 말했다. "나는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

안드레는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유일한 주를 믿는다"

계속해서 야고보가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요한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시어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어 장사지냈다"

도마는 "그는 지옥으로 내려가 삼일만에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다른 야고보는 "하늘에 오르셔서 선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빌립은 "그곳에서 그는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다"

바돌로매는 "나는 성령을 믿는다"

마태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들의 교제를 믿는다"

가나안의 시몬은 "죄의 용서를 믿는다"

다대오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마지막으로 맛디아가 말했다. "영원한 삶을 믿는다"

 

이렇게 하여 사도신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방교회(회랍정교회의 원조)는 예나 지금이나 사도신경을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내용상의 문제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마가 말했다고 하는 "그는 지옥으로 내려가 삼일만에…"와 같은 내용은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까닭이다.

 

그대신 동서방교회가 함께 정통성을 인정하는 '니케아신조'(325번)를 신앙고백으로 사용 하여 왔다고 한다. 그렇다고 희랍정교회가 이단인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오직 사도신경 을 신앙고백으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도신경을 절대화 하지말자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하지 않는대서 이단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구나 '오직 성경'을 근간으로 하는 신앙을 주장하는 개신교회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이란 문자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아도 아무 잘못이 없다. 또는 희랍정교회처럼 '니케아신조'를 신앙고백으로 한다해도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사도신경을 외울때마다 늘 불만스러운 내용의 한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이다. 거룩한 신앙고백의 순간마다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언급하게 되는 것이 늘 찝찝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기 보다는 '내 죄를 인하여서 고난을 받으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언제나 '본디오 빌라도'에게만 핑계를 대는 것인가? 라는 생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공교회(共敎會)를 탈퇴하여 독립교회 아무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사실상의 사교회(私敎會)를 이루고 있는 어느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웃긴다. 사도신경 안에는 분명 '거룩한 공회(公會)와 성도가 서로 교통(交通)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건만은 실상은 탈퇴하여 자기들 멋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한대서 정통이고, 고백하지 않는대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도 이단일 수가 있고,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고서도 정통일 수가 있다.

 

<기독저널신문 1996년 5월 6일 월요일 곧은소리>
- 정락유 목사 (울산 성광교회 담임) -


유대교인 위너에게 보낸 몰러 목사 메시지 논란 일어‥
뉴욕 출신 하원의원 앤서니 위너가 치료를 받기로 한 것에 관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가장 저명한 복음주의자 중 한 사람인 앨버트 몰러는 유대교인인 위너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충고했다.
남침례교신학교의 총장인 앨버트 몰러는 지난 주말 트위터를 통해 “친애하는 위너 의원께, 죄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속죄가 있을 뿐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메시지로 인해 논란이 일었다. 특히 위너가 유대교인이기 때문이다.
유에스에이 투데이에서는, 이 말이 팍스 뉴스의 브릿 흄이 불교신자인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가 지난 해 성추문에 휘말렸을 때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충고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최대의 복음주의 교단인 남침례교총회의 대표적인 신학교를 이끌고 있는 몰러는 이런 논란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자신의 트위터 메시지에서는 “유대교를 결코 언급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는 지난 화요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위너 의원의 문제는 종교와 관계 없이 다른 모든 인간처럼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성서적이며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리고 오직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몰러는 자신의 트위터 메시지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이 시대에 성서적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취급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앤서니 위너 뉴욕 하원의원(왼편) 앨버트 몰러 남침례교 신학교 총장 (오른편)

기사제공ⓒ 크리스찬타임스 (http://www.kct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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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내에는 믿음생활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면 가차없이 이단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심지어는 교회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공간인 인터넷 카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주로 시인하여,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주인과 종의 관계로)연합된 새생명으로 거듭났다면, 필연적으로 믿음의 행위가 삶속에서 나타나서 입증되어 지게 되어 있는데...그렇지 않는 경우, 스스로 구원을 확신할지라도 구원의 착각일 뿐,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라는 성경적인 주재권 구원론을 행위구원론으로 몰아가고 있다. 

수단방법 안가리고 많은 사람을 끌어모아 목회의 성공(?)을 염원하는 목회자나 진정한 거듭남이 없이 착각의 구원의 확신속에 사는 교인들의 입장에서 볼때 열매(선한 행위)의 입증을 말하면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에 의한 행위구원론이 된다 

그래서 구세주로 믿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게 되며, 주로 시인하지 않더라도 구원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비성경적인 논리마저 내세운다교인이 자신의 선하지 못한 행실앞에서 마음의 찔림이 오고 갈등이 오는것이 성령이 내주하는 구원받은 증거아니겠느냐는 분도 있다. 그러나 옛사람일 때에도..이교도에게도.. 누구에게나..도덕성과 양심이라는 것은 있지 않은가 

또한 영성훈련을 강조하는 한 목회자가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라'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은 구원을 이뤄 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것은 믿음의 구원을 부정하는 행위신앙이고 이단 요소라며, 모 이단 전문가가 정죄하기도 했다 

이처럼 '삶 속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는 믿음의 행위 조차도 이단사상으로 배척하는 분위기는 성도의 성경적 행위 마저도 부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성경은 물론 개혁신학에도 무지한 결과이다 

정통 신학자들은 '믿음의 행위'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행위'라는 말만 나오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이단 전문가들과는 달리 개혁 신학자들은 구원과 관련한 성도들의 '인격적인 반응 즉 믿음의 행위를 무시하지 않는다 

캘빈은 그가 작성한 제네바 요리문답 126번에서 '우리가 선한 일들을 행함이 없이 의롭게 만드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훈택 교수(총신대)'하나님의 구원도 행위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필수적인 것, 하나님의 뜻을 승화시키고 천국의 떼어낼 수 없는 한 요소로 모두에게 강요하고 있다( 7:21)'라고 말한다. (하나님나라와 교회, 생명의 말씀사, 1993, 40).

박형룡 박사도 '진정한 신앙은 선행에서 그 자체를 나타낼 것이니 선행은 사람들 앞에 이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의 생명의 의에 대해 증언할 것이다. 의인의 행함에 의한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를 굳게 한다'고 말한다. (조직신학 제5권 구원론, 1972, 294).

 개신교가 행위를 경시하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도 한몫을 한다종교개혁이란 '행위' 또는 '공로구원'을 강조하며 성경에서 빗나간 천주교에 대해 '오직 믿음'을 외치며 반기를 든 혁명이었다. 말틴 루터는 롬 1:17을 근거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외쳤고, 이러한 '자기 교리'를 근거로 믿음의 행위로도 의롭게 된다는 '성경말씀'( 2:24)무시하는 실수를 범했다.

또한 생명되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인 '행함의 의'를 경시하는 풍조는 한국 땅에 복음이 전래될 때에 , '이 땅 위'에서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유교와 차별되도록 '사후 천국' '오직 믿음' 만을 외쳤다

신광은 목사는 메가처치 논박이라는 글에서 죽은 다음 천국이라는 좋은 곳과 지옥이라는 무서운 곳이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 천국 들어가는게 너무 쉽기에 은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교회 다니면서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내고, 성가대나 교사로 봉사하고, 목사님 잘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받고 복 받는 비결이다.”라는 통속적이고 저급한 구원론이 오늘날 개신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는 주범 중 하나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런 한국 기독교의 실태를 보면서 변종 행위구원론을 떠올려 본다.

  1) 전통적인 행위구원론: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영혼이 구원받는데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하는 극단적인 펠라기우스주의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구원 이후 행위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구원론이다.

  2) 변종 행위구원론

  A :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한다버림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값싸고 쉬운 구원론을 비판하며 , 행위라는 비싼 대가가 필요함을 말한다 

  버림받는 신자란:  

  그리스도 닮은 새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말하지 않고   *예수님은 주일 낮 예배만 겨우 참석하는 사람  *인색하여 십일조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  *주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 등 교회생활에 열심있는 행위를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본다 

 극단적인 신비주의인 신사도운동으로 사도의 계시권을 주장하여 여러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판정된 변승우 목사의 경우이다 버림받지 않기 위한 믿음의 행위를 선한 행실이나 성령의 열매라기 보다는 목사가 제시하는 율법에 따라 열심히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교주 맹종형 행위구원론이라고나 할까?. 

B :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만을 강조하며 믿음의 행위는 매우 경시한다목사가 말하는대로 사영리만 따라 외우기만 하면 천국 간다고 한다그리고 그리스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 완전 생략되더라도 영화(구원)로  수 있다고 한다.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어 죄인을 멸망으로 인도한다   중세 카톨릭시대의 면죄부보다 훨씬 저렴한 현대판 개신교 면죄부이다거듭남의 변화를 교회에 출석하고, , 담배 멀리하는 정도로 본다그리고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 집회일천번제, 봉사, 전도, 목사 순종 등의 '율법적 행함'  믿음의 열매, 거룩한 행실로 간주한다.

  또한 그러한 믿음의 열매로 인하여 구원 +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상급 속에는 내생의 상급 뿐만 아니라 이생에서의 만사형통의 상급도 포함된다구원에 개념 속에도 이생에서의 질병, 가난, 실패로 부터의 구원을 포함시킨다지금 많은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복주의, 번영신학에 뿌리를 둔 이런 저질스러운 구원관을 “다목적 종교행위 구원론”이라고 부르면 어떨는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에 모두 구원받을 수 없는 행위구원관 이지만 전통적인 행위구원관이 변종보다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은 훨씬 적어 보인다.

 이웃 게시판에서

 

 

 

제가 아래에 쓴 열린성경연구회의 구원관과 폴 워셔 목사님의 구원관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행위구원론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동영상과 전문을 보시고 고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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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한글자막

http://www.youtube.com/watch?v=jv0voGJxRXY

http://www.youtube.com/watch?v=c59E-pZ8oes

http://www.youtube.com/watch?v=SwrXhY0rUS8

English 전체메시지(원본)

http://www.youtube.com/watch?v=uuabITeO4l8

<설교전문>

좁은 문 좁은 길

저는 오늘 여러분의 자존감이나,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여러분의 인생이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지, 여러분의 재정상태가 어떤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가지 걱정이 나를 잠 못들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백년 이내에, 아마 여기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에 있을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게 될 겁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내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미국의 기독교를 들여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무신론적인 문화에 더 의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복음에 속고 있습니다.

그 거짓말은 그들이 평생에 한 번의 영접기도를 따라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 옆의 크리스찬을 봅니다. 그들도 자신처럼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게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 그런데 뭘,...

모두들 TV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보고 웃고 즐깁니다, 감각적인 옷들을 입고, 세상 사람들처럼 걷고, 세상의 음악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크리스찬입니다. 왜? 어떻게 아느냐구요?
우리 교회의 다른 크리스찬들과 나는 별로 다르지 않거든요
언젠가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구하는 영접기도를 드렸었거든요...

여러분 지금 미국에서 가장 큰 이단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기를 구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들어오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50년전까지만 해도 침례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오직 예수만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만을 믿는 믿음에는 회개가 먼저 있어야하고 그 후에도 회개가 계속 따라옵니다. 죄에서 돌아서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게 되고, 점점 거룩하게 되고,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지 않게, 세상과 같지 않게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 크리스찬 같지않게 되고, 다만 예수그리스도처럼 되어갑니다.

왜 박수를 치는 거죠. 지금 여러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멘 소리 듣자고 오늘 여기 나온게 아닙니다. 박수 받으려고 여기 나온게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괜히 그냥 까다롭게 구는게 아닙니다.

5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미국의 기독교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한 줄 아십니까? 그걸로 인해 내가 치러야 할 댓가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다시는 이런데 초대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겠죠. 그런데도 왜 하는지 아십니까? 돈을 받아서도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해서만도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예요.

자 이제 성경안으로 들어가 성경이 진짜로 말씀하는 것을 살펴봅시다.
자칭 크리스찬이라는 여러분의 옆 사람에게 비추어 보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목사님께 저는 제가 구원받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면 목사님은 언젠가 영접기도로 예수님을 영접한 일이 있다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판에 박힌 대답을 할 겁니다. 이런 미신이 우리 교회를 완전히 점령해버렸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너 자신을 점검하라. 네가 믿음에 서 있는지 성경말씀에 비추어 테스트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네가 정말 크리스찬인지 시험해보라고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좁은 문이 있습니다. 이 지구상의 어떤 인간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락하였고 하나님의 증오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냥 죄를 지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 밖에는 행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지서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행한 가장 선한 일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넝마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합당한 것은 하나님의 분노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증오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죠,
잠깐만요 하나님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신걸요...
여러분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선지자도 사도들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자에게는 그의 반역함과 죄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만이 있을 뿐이라고, 내가 여러 곳에서 강연할 때, 그들은 곧잘 지적하며 말합니다. 아니오 하나님은 미워할 수 없으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여러분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낙태를 미워합니다.
내가 거룩한 것을 사랑한다면,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인들이 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많은 것을 하나님은 미워하고 계십니다. 모르고 있었죠?

부흥을 위한 청년모임에 기도하러 간다고 합시다. 그러나 가기 전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정말로 혐오하는 것들을 TV로 즐기다가 갑니다. 그리고는 기도회에 성령님이 왜 임재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하고, 가짜 불과 가짜 흥분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이 거기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가짜 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죄 많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들어보세요, 오늘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로마인과 유대인이 예수님을 박해해서도 아닙니다.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죄와 그 위에 떨어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떨어졌던 것입니다.
누군가는 죄 값을 치러야했으니까요. 누군가는 죽어야 했으니까요. 하나님의 독생자를 깨부수어서 죽인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야훼가 그를 상하게 하기를 원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자 이제 무엇을 해야하나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신학자와 철학자 사회학자들이 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교회안에서 낙태가 세상밖에서 만큼이나 자주 일어나고, 이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어떤 청년들은 부도덕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오늘 예배에 참석해서 같은 호흡으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마약을 하면서 청년회에 계속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해서는 안 될 것들을 하면서도 교회에 나오고 자신들에 만족하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그들을 보고 육적인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분명 크리스챤이기는 한데, 다만 아직 육적이라고....
여러분, 육적인 크리스챤. 그런 건 절대로 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천국가는 길은 좁은 문만이 아니라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진정한 크리스찬의 증거는 좁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미국에서의 진정한 크리스찬의 증거는 뭔 줄 아십니까? 영접기도를 한번 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믿음의 길에 있는지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 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찬은 세상과 다른 점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크리스찬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크리스찬도 죄를 짓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빛 가운데로 걷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뭐가 다른 걸까요?

제가 하려는 말은 만약 여러분이 진짜 다시 태어난(중생한) 크리스찬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삶의 방식이 의로움 가운데 살려고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의로움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아버지가 오셔서 여러분을 훈련시키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으실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좁은 문을 통과했다고 하면서도 여러분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악하고 육적인 사람들과 똑같이 여전히 살고 있다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심각하게 두려워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죠.

저는 평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해준 사람들이 걱정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했다면 저는 여러분이 걱정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가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 만을 말하십시오. 그들이 정말로 구원받았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구원이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역사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정말로 회심하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 받은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성경은 분명히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은 좁은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압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고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확신합니까?
누군가 당신이 구원받았다고 하니까. 영접기도를 했기 때문에? 믿기 때문에?
자 그럼 다시 물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모두들 믿는 다고 말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당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아는 방법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50년전까지 침례교의 교리가 어떻게 가르쳤는지 아세요? 당신의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삶의 스타일이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에 맞추어져 있을 때에 비로서 당신은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아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봅시다. 내가 이 강연에 늦어서 헐레벌떡 강단으로 뛰어 올라온다고 칩시다. 그러면 모든 다른 목사님들이 화가나서 말씀하실테죠. 폴 목사님 이런 기회를 준걸 감사해야지 어떻게 늦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말합니다. 목사님들 이해해주십시오. 오는 도중에 고속도로에서 그만 타이어가 펑크가 낫지 뭡니까. 그래서 나가서 타이어를 바꾸고 있는데 나사가 굴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고속도로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는 그 나사를 주으려는데....내가 고속도로 한 가운데 서있고 30톤짜리 통나무 트럭이 나를 향해서 170킬로의 속도로 달려와서 나를 덮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늦었습니다..... 요새는 아무도 논리는 공부하지 않지만, 어쨌든 여기에서는 두가지 논리적인 결론밖에는 없어요.
제가 거짓말쟁이이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이거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죠. 폴 목사님 정말 말도 안되요, 그건 불가능해요, 통나무 트럭같이 거대한 물체와 부딪히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구요?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뭐가 더 큰가요? 통나무 트럭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와 부딪혔다고 하면서 어떻게 완전히 변화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몇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 번 새로운 헌신을 다짐합니까? 또 하고, 다시, 다시....
여러분이 이런 집회에 참여하고 불을 받고는 교회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지속됩니까? 한 열흘쯤.. 그러면서 말 하기를 와 정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당신의 감정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은 될 수 있어도 그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역사하셨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계십니까?
무화과와 포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가 무화과 나무라고 포도나무라고 우긴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미친 것입니다.

그 열매(삶)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마음 속을 알지 못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에도 나는 자주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분. 그 분은 요즘의 크리스찬 문화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예수님은 21절에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러분이 한 영접기도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아십니까?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본문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를 고백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그들중 하나입니까?
다시 본문을 봅시다. 그 사람은 주여, 주여 라고 합니다. 그냥 주여 라고 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고백을 하는 이 사람은 갑자기 심판이 온다니까 예수 믿어 볼까하고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이 자기의 주인임을 단호하게 선언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걸어 다닐 때도 주여~, 반주자들 바로 앞에 서서 춤을 추며 주여~라고도 합니다. 주여~라고 노래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빌리그레함을 아시죠 가장 친절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빌리그레함은 교회를 다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전도 집회중에서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중에서 다만 5퍼센트만이라도 구원을 받는다면 행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 다시 제대로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신학은 뭘 하는 거죠? 교리는 뭘 하고 도대체 뭘 가르치는 겁니까? 아무도 교리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래가사나 듣고 티셔츠의 뒤에 씌여진 글귀나 읽으려고 합니다. 뭐가 진실인가요? 진실은 이겁니다. 그 증거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진실로 다시 태어난 크리스찬이라면 삶의 스타일이 하나님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됩니다.

오~ 목사님은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군요. 라고 여러분은 얘기하겠죠. 아니요! 아닙니다!!
나는 믿음의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은 여러분이 다시 태어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 거의 모두가 그렇게 고백하기 때문이죠.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65-70 퍼센트가 자신이 구원받고 중생한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악한 짓을 하는 나라가 말입니다. 매일 4000명의 아기를 죽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중의 70퍼센트가 중생한 크리스찬이라는 말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가짜가 아닌 걸 어떻게 압니까. 진정한 크리스찬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갖는 삶의 스타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에 성령님이 오셔서 말씀을 통해서 징계하시거나, 아니면 예수안의 형제 자매를 통해서 징계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크리스찬이라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에게서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22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겠죠.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지부시를 알고 내일 백악관에 가서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나를 들여보내주지 않습니다. 조지 부시가 나와서 내가 폴 워셔를 안다고 해야 들여보내 주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아는가 하는 겁니다.

여기 예수님이 이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하시는지 보십시오 불법-anomia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보다 정확한 번역은... (내가 내려가서 여러분을 껴안고 이 얘기를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 제자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내가 순종해야 할 법을 전해주지 않은 것처럼 사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거의 대부분의 크리스찬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누군가 우리가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의 성경적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누군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바로 모두들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율법주의자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지켜야 할 법을 주지 않은 것처럼 사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요즘 미국 기독교인들은 좁은 문을 통과하면, 하나님께 찬양, 그리고 나머지는 세상과 똑 같이 살아갑니다. 괜찮아요 그냥 육적인 크리스챤일뿐입니다. 언젠가는 돌아올겁니다.

이런 잘못된 복음관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수 많은 어린이들이 방학동안의 성경학교에서 주님을 영접하고는 그들 중의 대부분이 15살이 되면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마귀와 같은 삶을 살게됩니다. 그리고는 30살쯤 되었을 때에 다시 헌신을 하게되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심지어 마귀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습니까?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여러분은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두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있고, 그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고, 나쁜 열매로 인해서 우리는 그 나무가 나쁜 나무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지옥으로 갑니다. 잘려져서 불에 던지워 집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지옥을 가는 이유는 행함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행함이 없음으로 증명된 그들의 믿음의 부족때문입니다.

 

출처: 양무리 마을



박순용] 배교를 향해 나아가는 현대 기독교(10) ㅡ 성공이라는 우상을 좇는 오늘날의 교회①

지금 우리 시대와 사회는, 큰 것이 진리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대형 교회가 좋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교회라는 인식이
성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형 교회를 안전한 교회로 찾고,
교회들도 대형화를 추구하며, 외적 성장이라는 우상을 섬깁니다.


1. 성공이라는 우상을 좇는 교회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를 도입하자 진리는 왜곡되고,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뿐 아니라 교회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외적인 성공 추구에 나섰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세상적인 의미의 성공’이라는 우상을 열렬히 섬기고 있습니다.
물론 실용주의적 교회성장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교회 성장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배후에는 분명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가 깔려 있습니다. 이미 교계 전반이 교회의 외적 성장을 최우선시하는 풍조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런 수요를 따라, 실용주의에 의한 번성 신학을 교회 성장 이론으로 만든 풀러 신학교의 교회 성장학 교수였던 피터 와그너의 책이 우리나라에도 무려 서른 권 가까이나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피터 와그너를 만나본 사람은, 피터 와그너를 굉장히 열정적이고 반듯한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성품이 좋다는 것을 온전한 진리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 중 하나가 성품입니다. 참된 진리를 소유했을 때 성품이 변화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성품이 좋다고 모두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피터 와그너는 미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두터운 지지층을 확보하고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터 와그너의 견해가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교회가 성공이라는 우상을 좇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아 목회 현장에서 보아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갈수록 교회들이 ‘성공’이라는 우상을 더욱 열심히 좇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가운 현실은 그 결과, 이제는 교회의 성장도 반기기만 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 헐은 “오늘날 교회 성장은 일종의 사회학적 배경이 있습니다. 성령이 배경이 아니고, 사회학적인 배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이터만을 강요하며 실용주의라는 교단을 숭배합니다. 교리보다는 현대 비즈니스적 원리들을 더욱 존중하며, 실제로 교리를 교회 성장의 방해 요인 혹은 일종의 위안거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1992년 미국 교회들을 향해 한 말이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 현실에도 잘 부합하지 않습니까?

2. 대형 교회의 진실
저는 1980년대, 우리나라에 대형 교회들이 막 생기기 시작했던 그때,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자 몇 년 동안 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회들의 대형화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 내 대형 교회의 대부분은 주로 1970년대부터 도시 개발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의 형성과 함께 외적으로 커지면서 생겼습니다. 당연히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도시 개발과 아파트 단지를 형성하던 1990년대부터 대형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대형 교회의 등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중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의식 속에 “큰 것이 좋다!” 심지어 “큰 교회가 옳다!”는 인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바로 실용주의적인 인식입니다. 큰 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이므로, 큰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봐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대형 교회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회가 많은 사람을 얻는 것을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또한 입지 조건이 대형 교회의 유일한 성장 비결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대형 교회가 되면 모두 진리에서 떠난다거나 무조건 진리를 경시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반발을 감수하고 이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대형 교회의 형성 배경 중에는 실용주의적인 마케팅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것이 잘못이 아니듯이, 큰 것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와 사회는, 큰 것이 진리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대형 교회가 좋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교회라는 인식이 성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형 교회를 안전한 교회로 찾고, 교회들도 앞 다투어 대형화를 추구하며, 외적 성장이라는 실용주의적 우상을 섬깁니다.
대형 교회를 목표로 할 때, 교회는 더 이상 실용주의적인 마케팅 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도 개개인의 상태보다는 성도의 숫자가 더 큰 관심사이고, 더 좋은 위치와 더 좋은 환경을 생각합니다. 결국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고, 그야말로 성공이라는 우상, 아니 숫자의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제는 대형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형 교회가 많이 생겼지만, 기독교인 전체수는 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조엘 오스틴, 릭 워렌, 빌 하이벨스 같은 목사들이 목회하는 대형 교회가 등장했음에도, 전체 교인 수는 오히려 줄었습니다. 결국 대형 교회들이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커진 것이 아니라 수평 이동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수평 이동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오늘날 대형 교회가 등장한 이유입니다. 자연적인 이유는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로 사람들이 대거 이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대형 교회로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긍정적인 이유는 소위 ‘말씀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좋다’는 것이 꼭 ‘참된 진리에 부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서 ‘좋다’란 청중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일 수도 있고, 언변이 유난히 뛰어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대형 교회의 공통적인 성장 이유는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목사로서 고백하건대, 청중을 만족시키고 싶은 유혹은 너무 큽니다. 새로운 사람이 와서 제 설교를 듣고 인상을 붉히고 돌아갈 때 느끼는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름대로 일주일 동안 씨름하며 설교를 준비하고 올라오는데, 듣는 사람의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한두 번 경험하고 나면, ‘다음에는 좀 조심해야지’하는 식의 생각이 슬며시 올라옵니다. 그리고 ‘좀 더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쉬운 말씀을 전할까?’하는 유혹이 일어납니다.
대형 교회의 성장 이유로 거론되는 ‘좋은 말씀’은 일차적으로 ‘청중이 만족하는 말씀’입니다. 청중이 만족하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형 교회를 추구하다 보면, 청중의 만족을 목표로 하기 쉽고, 아무래도 소비자 충족적인 말씀을 모색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신학이 결여되는 맹점을 갖게 됩니다. 즉, 진리를 변형하고 교리를 경시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대형 교회가 등장한 부정적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마케팅 원리를 적용하여 시설, 주차, 프로그램 등의 제반 사항을 완비한 것입니다. 물론 대형 교회가 모두 마케팅 원리를 도입해서 성장했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에 비해 큰 교회가 구조적으로 소비자를 충족해 줄 만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유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즉,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의 교회 유입이라는 시대 흐름 속에서 대형 교회는 소비자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체계적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체계적 시스템은 사람들을 계속 대형 교회로 몰려들게 합니다.
얼마나 된 통계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 교회의 80퍼센트가 성도 100명 이하라고 합니다. 빌 헐은 수평 이동을 통해 대형 교회가 형성되는 현상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의 먹이 공급 체계는 소형 교회들과 스스로 불만이 가득하여 교회를 저버린 신자들이다. 그런 먹이사슬 속에서 대형 교회는 커지게 됐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대형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 결과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현재와 같은 현상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마케팅 원리로 이룬 성공과 성장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실용주의적인 세상 정신에 기대어 성장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경영 논리로 이룬 성공, 곧 마케팅 원리로 이룬 외적 성장은 건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순용 프로필
•총신대신대원 졸 •영국 에든버러 프리 처치 칼리지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영적 대각성과 청교도 연구 •전, 호주 퍼스 한인장로교회 담임 •현, 하늘영광교회 담임목사 •저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예수를 믿는다는 것은」「기독교 세상의 함정에 빠지다」

 

크리스쳔인사이드

 





회원가입을 하라는데…믿을 수 있을까요?   
인터넷을 활용해 각종 정보를 수집하거나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는 일반인들에게 웹 사이트 회원가입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자신만의 즐겨찾기 목록을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신상정보를 제공하는 횟수는 다소 적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라면, 회원가입이라는 제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많은 이슈를 몰고 다니는 것처럼 거래대상으로 삼는다거나, 외부 해킹이나 웜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혹은 내부자에 의해 개인정보가 새고 있다는 데 있다. 웹 사이트의 이용 기준이 더 이상 정보의 종류나, 상품의 가격 등이 아닌 자신이 입력한 개인정보를 보유할 기업의 신뢰성과 안전성을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문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이트가 믿을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찾는 것이다.
과연 어떤 판단 기준이 있을까. 이 글은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스스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웹 사이트의 회원가입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길…
정보보호뉴스 취재팀


회원가입도 가려서 해야 하는 시대, 당신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급증하는 스팸메일, 자신의 휴대전화로 걸려오는 광고전화, 하루에 몇 건인지도 모르는 스팸문자까지. 이런 상황을 맞이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자신이 회원가입한 웹 사이트들 중에서 개인정보가 유출됐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일부 웹 사이트 운영 업체가 회원정보를 일정한 금액을 받고 제3자에게 제공하거나, 해킹 혹은 내부자에 의해 기업의 회원 DB가 유출되는 현실 때문이다. 최근에는 사용자 회원가입 시 해당 웹 사이트가 신뢰할 수 있는 업체인지 우선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눈에 띄는 마크가 있다.

온라인 환경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상에서도 기업의 신뢰도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그 신뢰도는 소비자가 특정 업체의 제품을 계속 구매해 왔다든지, 혹은 외부 기관의 품질인증 마크를 받았다는지 등을 통해 신뢰도를 쌓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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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웹 사이트 정보보호 인증마크

온라인 상에서 회원 가입을 두려워하는 일반인이라면 공신력 있는 외부 평가 기관에 의해 부여되는 웹 사이트 인증제도를 참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난 1999년 7월부터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가 정보보호마크 인증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부여하는 정보보호마크 인증제도가 대표적인 웹 사이트 인증제도다. 이 인증제도는 개인정보보호 수준 및 내부관리 체계를 중점적으로 평가해 부여하는 ‘개인정보보호(e-PRIVACY)’ 마크와 웹 사이트의 시스템보안, 개인정보보호, 소비자보호 수준 및 내부관리체계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 부여하는 ‘인터넷사이트안전(i-Safe)’ 마크로 나눠진다. 심사기준은 정보통신망법 및 개인정보보호지침, 전자상거래보호법 등에 기초해 개인정보 수집?이용 및 관리, 이용자 권리보호 등에 관한 72개 평가 항목을 심사해 마크를 수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웹 사이트에 대해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정보보호 인증마크라고 할 수 있다.

구분 인증신청 인증탈락 최종인증
개인정보보호마크(ePRIVACY) 211개 73개 138개
인터넷사이트안전마크(i-Safe) 82개 40개 42개
293개 113개 180개

[표] 정보보호마크 인증 현황(2006년 6월 기준)


정보보호 관련 인증 마크
정보보호와 관련해 사이트의 신뢰도를 가늠할 수 있는 인증제도로 정보 통신산업협회의 ‘ePRiVACY’와 ‘i-Safe’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상거래 업체들을 대상으로 안전거래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 한국전자거래진흥원이 수여하는 ‘e-Trust’ 마크도 사용자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웹 사이트뿐만 아니라 기업 전체의 정보보호 수준과 체계를 평가하는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의 ISMS 그리고 국제 보안표준규격 ISO 27001 인증도 사용자가 웹 사이트의 신뢰성과 안전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인증제도를 신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배경에는 심사과정뿐만 아니라 인증 수여 기관이 마크 취득 사이트에 대해 상시 모니터링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개인정보관리책임자 및 실무자를 대상으로 전문교육을 실시해 개인정보 관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지침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국내 180개 웹 사이트가 획득한 이 인증마크는 대부분 웹 사이트 초기 화면 하단에 등록해 놓고 있어, 사용자는 회원가입 이전에 스크롤을 내려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정보보호 정책과 책임자가 있나요?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웹 사이트를 인증마크의 획득 여부로 판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수많은 웹 사이트 및 기업 중 인증마크를 획득한 업체는 불과 200개 미만. 때문에 인터넷 사용자의 입장에서 인증마크 이외의 판단기준도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법적으로 명시된 개인정보보호 정책과 책임자의 고지여부도 사용자에게는 유용한 웹 사이트의 판단기준이 될 수 있다. 대개 인증마크 등과 함께 사이트 하단에 고지되는 개인정보보호 책임자와 정책은 해당 웹 사이트가 개인정보를 어떤 목적에서 어떤 정보를 수집하고, 어떤 경우에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지, 또 수집된 개인정보는 언제 폐기되는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개인정보의 제3자 제공시 사용자의 동의를 구하고 있나요?

물론 사용자가 회원 가입 이전에 개인정보보호 정책을 세밀하게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사실 회원 가입 시 이를 외면하는 사용자가 대부분이며, 매번 해당 웹 사이트의 개인정보보호 정책을 확인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스팸메일 및 문자 수신 등 개인정보의 유출로 고통을 겪는 경우라면 최소한 그림 2처럼 해당 웹 사이트가 명시해 놓은 개인정보의 제 3자 제공 여부와 관련 정책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자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의 제3자 제공은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예외 조항을 구분해 놓고 있는데 관련 법령에 의거하거나, 수사 기관의 요청 그리고 학술조사 등을 이유로 개인을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제공하는 경우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지 없이도 해당 기관에 제공할 수 있도록 명시해 놓고 있다.
반면, 예외조항 이외에도 웹 사이트 업체와 제휴 관계에 있는 제휴사에게는 개인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데, 물론 이때는 반드시 회원들을 대상으로 이메일 고지 등을 통해 동의절차를 구해야 하며, 사용자가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정보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회원 정보를 타 업체에 제공할 경우에는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처해진다.
하지만 일부 업체들은 정보제공 동의 여부를 변경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편법을 동원하는가 하면, 한발 더 나아가 개인정보를 회원들 몰래 유출시키기도 하는데 이에 대비해 정통부, KISA, 정보통신위원회 그리고 시민단체가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위법 업체를 적발해 시정 조치 명령이나 범칙금을 부과하고 있다.
물론 개인정보보호 정책이나 책임자의 고지만으로 해당 웹 사이트가 회원정보 관리를 ‘완벽’하게 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KISA 개인정보보호팀의 한 관계자는 “정책고지와 책임자 공개만이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해당 웹 사이트가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보보호를 위한 노력을 펼쳐나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며 업체별 정책고지의 의미를 설명했다.

선택 항목과 필수 항목 구분이 없다?

개인정보보호 정책의 내용을 확인하게 되면, 남은 절차 중 하나가 약관 동의 내용을 거쳐 회원 가입에 필요한 내용을 입력하는 것이다. 이때 작성하는 회원가입 항목도 웹 사이트의 신뢰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적용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웹 사이트는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전자우편주소 등을 회원가입을 위한 필수항목으로 정해놓고 있으며, 소수이기는 하지만 웹 사이트에서는 주민번호를 아예 받지 않거나 이메일 주소만을 필수항목으로 설정해 놓은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웹 사이트는 직업이나 종교 등 회원 가입에 불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를 필수 항목에 포함시킨 경우도 있어 사용자의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회원 가입 시 웹 사이트의 성격과 맞지 않는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하는 경우에는 온라인 사업자가 회원 개인정보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이벤트 홍보 업체 등에 사용자 동의 없이 제공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라고 판단할 수 있다.

쇼핑몰인데 카드결제가 안 되네!

몇 년 전 하프 플라자와 같은 인터넷 사기 사이트가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당시 사기 사이트들은 고가의 상품을 절반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광고를 통해 사용자를 모집한 후 현금만으로 결제하도록 유도한 뒤 결제 상품을 보내지 않고 운영자가 잠적한 사건이었다. 그 이후 온라인 쇼핌몰의 결제 문제가 대두되면서 인터넷 카드 결제와 공인인증서의 사용 등 보완책이 등장하고 있지만, 일부 웹 사이트에서는 현금 결제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에스크로우 제도나 카드 대금 지불 유예 제도와 같은 소비자 보호 정책이 카드사를 통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카드 결제가 안전성을 갖추고 있는 반면, 현금 결제는 현금 입금 후에는 소비자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어, 소비자 스스로가 쇼핑몰 사이트 선택 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 사기가 가능한 곳이라면 회원의 가입정보 역시 아무렇지 않게 매매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회원 탈퇴 기능이 없어요

앞선 기준들을 통해 가입한 웹 사이트이지만, 웹 사이트가 회원 가입 탈퇴 기능을 찾기 어렵게 만들었거나, 아예 회원 탈퇴 기능이 없다면 자신의 개인 정보를 계속 둘 것이냐를 다시 신중하게 검토해 봐야 한다. 대부분의 사이트는 개인정보를 수정할 수 있는 ‘My page’와 같은 메뉴에 회원 탈퇴 메뉴를 만들어 놓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일단 가입한 회원이 탈퇴할 수 없도록 메뉴를 별도로 만들어 놓지 않거나, 회원 탈퇴 시 주민등록등본 사본을 요구하는 등 탈퇴를 어렵게 만들어 놓는 경우도 있다. 또한 탈퇴한 회원 정보를 즉시 삭제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DB를 보관해 놓거나 개인정보를 저장해 보유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해선 절대 안되죠!
이미지 전체보기인터넷 사기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인터넷 쇼핑몰에 대한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모니터링 서비스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전자상거래센터(http://ecc.seoul.go.kr) 역시 대표적인 인터넷 안전 감시 사이트. 한국 소비자연맹이 주체가 되고 서울시가 운영하는 전자상거래센터는 특정 사이트에 대해 소비자의 제보가 등록되면 서울시가 사업자 정보 확인, 도메인 정보 확인, 그리고 사업장 주소 방문 등의 절차를 거친 후 사기 사이트로 판명될 경우, 해당 거래은행에 입출금 거래정지와 같은 법적 조치를 요청하고 있다. 특히 사기 가능성이 높은 웹 사이트에 대한 문의가 공개돼 사용자들이 사이트에 대한 신뢰도를 간접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 개인정보 유출이나 온라인 사기 사이트로 인해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 물론 이곳 블랙리스트에 올라 온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들 사이트의 경우에는 회원정보를 수집해 제3자에게 제공하려는 목적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회원탈퇴가 어렵거나 탈퇴메뉴가 없는 경우에는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국번 없이 1336번)에 신고를 할 수 있으며, 이 역시 조사 후 해당 업체에게는 시정명령이나 범칙금이 부과된다.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않았지만 정통부와 KISA가 추진하고 있는 주민번호대체수단을 이용하는 회원정보 수집도 웹 사이트의 신뢰도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정통부,김포시청 등 국내 16개 웹 사이트에서 시범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주민번호대체수단을 이용한 회원가입제도는 이용자가 자신의 신원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 기관(본인 확인 기관)에게 제공, 본인임을 확인한 뒤 가상의 주민번호 등을 발급 받아 인터넷 사이트 회원 가입이나 성인 인증 등을 위해 주민번호 대신 사용하는 것이다.
주민번호대체수단을 이용한 회원 가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면 가입자는 주민번호를 입력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개인정보 중 가장 민감한 주민번호를 원칙적으로 보호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정보가 도용된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회원 가입 과정 등에서 개인정보의 유출이나 도용 등 침해 피해가 발생해 이에 대한 문의 및 분쟁조정을 신청하고자 한다면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를 찾으면 된다.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는 정보통신망법 상의 개인정보보호규정이 이행되는지 여부를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KISA 내에 설치돼 있다.
일반적으로 민원신청이 접수되면 신고센터 내 상담원들이 해당 민원을 1차적으로 검토하게 되며, 자세한 사실 조사가 필요하거나 법률 검토가 필요한 경우에는 신청인과 피신청인의 의견청취, 증거수집, 전문가 자문 등 필요한 사실조사를 별도로 실시하게 된다.
민원 신청은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국번 없이 1336번, cyberprivacy@kisa.or.kr)로 연락하거나, KISA 홈페이지(www.kisa.or.kr) →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로 접속한 후 민원신청 양식을 작성하면 된다.



[출처] 정보보호뉴스 2006년 9월호(정보보호진흥원 발행)

 

1 꿈(비전)을 관리하라
 
「사명을 정의하고 현실로 전환하라!」
- 비전을 전달하고 이해시켜라!
- 비전이 현실화되도록 시중을 들어라!
 
2 실수를 포용하라
 
「모험을 장려하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수를 인정하라!」
- 떨어진다는 두려움 없이 높은 줄 위를 걷는 자를 인정하라!
- 실패는 죄가 아니다. 낮은 목표가 죄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3 말대꾸를 장려하라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중시하라!」
- 믿는 사람으로부터 말대꾸는 사려 깊은 것이다!
- 말대꾸가 자신을 가르치고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하라!
 
4 반대의견을 장려하라
 
「자기 주변 에 상반되는 견해나 현실과의 차이점을 말해주는 사람을 지녀라!」
- 지도자 자신을 보완해주는 보완적 견해자를 환영하라!
- 변혁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심각성을 우려하는, 그래서 모든 석학들의 진리에 도전하는 사람을 환영하라!
 
5 낙관적 인성/신념을 지녀라
 
「낙관성과 희망은 기회를 창조하고 선택을 낳는다!」
- 머리 위로 걱정과 근심의 새가 날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지 않도록 하라!
- 망할 수도 없으며 죽을 수도 없다. 예약된 일들이 많이 때문이다!
 
6 약간 바쁘게, 그러나 감당할 수 있게 설정하라
 
「주위의 사람을 성장시켜라. 적절한 기대치를 설정하고, 책임을 지워라!」
- 너무 높은 기대, 너무 높은 책임은 의욕을 감퇴시킨다!
- 반대로 너무 낮게 하면 조직과 개인에게 큰 낭비를 가져온다!
 
7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감(感)을 지녀라
 
「조직이 성장하면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감(感)을 지녀라!」
- 지금 어디에 있느냐보다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순간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감(感)을 길러라!
 
8 긴 안목을 지녀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시장변화에 대비하라!」
- 긴 안목을 가지게 되면 오늘은 항상 새롭고 활기차다!
- 상상할 수 없는 참을성을 지니고 미래 속의 오늘을 전개하라!
 
9 중용의 조정능력을 지녀라
 
「자기 몫을 주장하는 여러 집단의 요구를 균형 있게 조정하라!」
- 흑백논리에 따라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라!
- 미래의 화려한 영광의 꿈이 깨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이해집단 조정의 실패에 기인함을 유념하라!
 
10 전략적 동맹과 협력을 유지하라!
 
「자신의 운명과 서로 연관된 다른 조직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라!」
- 시장과 시장, 기술과 기술의 동맹을 강화하라!
- 제한된 시장에서의 생존은 더 큰 것을 향한 조그만 양보(동맹)가 더 중요하다!
 

*점토판에 기록된 홍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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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앗시리아 학자 조지 스미스가1872년12월에 발견한 점토판 대홍수를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를 기록한12장 점토판 중11번째에 기록이 되어있다[."즉 2월17일,바로 그날 땅밑에 있는 큰물줄기가 모두 터지고 하늘은 구멍이 뚫렸다.그래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땅위에 폭우가 쏟아졌다"창5:-8:]에 쓰여진 내용이 실제사건이었다.이 문장이 나오기 수천년전에 쓰여진 수메르의 점토판에도 홍수이야기가 나온다."아침에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나는 밤에도 장대비가 내리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나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는데 그 두려움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첫째날에는 남풍이 무서운 속도로 불었다.사람들은 전쟁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고 앞을 다투어 산속으로 달아났다.다른 사람을 구할 엄두도 못낸채 정신없이 달아났다.이것은 성경속에 이야기와 똑같은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신이 불러일으킨 홍수이야기다.대이변의 대한 전설은 수메르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경전속에서도,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속에서도,태평양 여러민족의 민담속에서도,남북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설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대이변을 그린 그림이 아직도 남아있다.아즈텍 고사본,고대 바빌론의 그림이 그 예다.

고대 맥시코 문서 가운데[티마르포포카 그림문서]에는 대이변을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하늘이 땅에 다가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산도 물속으로 숨었다....바위가 땅위의 모든 것을 뒤덮고 테트존트리(구멍이 많이 난 용암으로 건축자제의 하나)가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끊어오르고 붉은산이 춤추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과테말라 인디오인 키체족이 가지고 있는 [포폴.부흐]라는 고문서에는 대이변이 다읍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대 홍수가 일어났다....사방이 어두워지면서 검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을 했다.비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쏟아졌다...사람들은 죽을 힘을 위해 달아났다....사람들은 지붕으로 기어올랐지만 집이 무너져 땅으로 떨어졌다.그들은 나무에 매달렸지만 나무는 그들을 흔들어 떨어뜨렸다.사람들은 동굴속에서 피난처를 찾았다.그러나 동굴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이리하여 인류는 멸망했다".브라질의 전설은,"물이 점점 차올라 땅위의 모든 것이 물속에 잠겼다.암흑과 큰 비는 그치지 않았다.사람들은 어디로 달아나야 좋을지도 모른 채 우왕좌왕 달아났다.가장 큰나무를 보고 이것을 타고 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위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다.

*예언자가 한 경고*
바벨론의 서사시에는 물의 신 에어가 크시스토로스국왕에 대해서 다가올 홍수에 대해 경고하며 말한다."우발의 아들 토우토여,너희 집을 부수어 배를 만들어라.재산을 돌보지 말고 만일 생명을 구한다면 그것만을 기뻐하라.배에 온갖 동물을 싣는 것을 잊지말라."아즈텍고서에서도 똑같은말을 한다."용설란으로 술을 담그지 마랄.그리고 커다란 나무를 베어 통나무배를 만들고 토소스톤트리[3월을 의미하는 달 이름]가 되어 물이 하늘까지 차 오르면 그 통나무 배를 타라."성경에도 이러한 사자가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지시한다.기도교의 하나님,바벨론의 신.아즈텍의 신도 인간에게 다가올 재앙에 대해서 경고한다.

*목숨을 건진 남녀 한쌍*
남자와 여자 또는 자식이라는 사실이다.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자식과 처,그리스 전설에 등장하는 테우칼리온과 피라가 그들이다.모든 전설이 목숨을 건진 두 남녀다.또한 동일 주제로 되풀이 되고있다.그리고 다음으로 동물이다.예를 들어 성경의노아,고대멕시코의 나타,카나다 인디오의 에토시,인도의 마누,보르네오의 트로우,크리스트로스홍수에 대해서 언급한 수메르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 등이다.홍수로 불어난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목숨을 건진사람은 물 속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산꼭대기에 상륙한다.".....나틸산에 이르러 배가 멈추웠다. 나틸산이 배가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배는 움직일 수 없었다....."[길가메시의 서사시].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경우 이 역할을 한 것은 아라라크산이다.또한 그리스 홍수의 주인공 테우칼리온의 경우에는 오프리스산[다른 이름은 팔나


 

소스산]이, 홍수에서 목숨을 건진 타이티인의 선조의 경우에는 피트히트산의 정상이 이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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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가지를 물고온 비둘기와 무지개
유사성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성경의 노아 홍수는 방주에서 새를 세 차례에 걸쳐 날려보낸다.성경보다 훨씬 오래된 수메르 홍수전설의 주인공도 노아의 방주처럼 목숨을 건진 사람도 육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새를 날려보낸다. 서인도제도,중앙아메리카 및 북아메리카의 인디오 전설에서도 물이 빠지자 새가 나무가지를 물고 돌아온다.2천년을 넘게 성경을 읽고 있는 인류는,홍수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무지개가 하늘에 걸린 것을 알고있다.[창:9]

                                              



   
 
  ▲ 래리 보이스와 Old First Church 교인이 함께 완성한 천장화.  
 
"안녕하세요. 전 에이즈 환자인데, 잠잘 곳을 구하고 있습니다. 잠자리를 제공해주시면 대신 예배당에 그림을 그려드리겠습니다."

1991년 8월 어느날, 덥수룩한 수염의 한 노숙자가 남루한 행색으로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교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초라한 노숙자의 어이없는 제안에 교회들은 시큰둥할 수밖에. 낡은 자전거 한 대와 지친 육신을 이끌고 교회를 찾아다니던 그는 Old First Presbyterian Church(이하 Old First Church)에 이르렀다.

   
 
  ▲ 래리 보이스는 특정한 거처 없이 평생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떠돌던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됐다. 그가 평생 자전거로 달린 거리는 250만 마일이 넘는다.   
 
Old First Church는 그 노숙자가 12번째로 찾아간 교회였고, 그를 교회 안으로 맞아들여 뜬금없는 제안을 끝까지 들어준 유일한 교회였다. 당시 담임이었던 하트 앤더슨 목사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그 노숙자가 건넨 포트폴리오를 건성으로 훑었다.

"이름은 래리 보이스. 미시건 로체스터에 있는 오클랜드대학에서 건축역사를 전공하고, 졸업 후 유럽에서 르네상스 시대 건축양식을 익혔다. 1970년 초부터 '개념예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해, 73년부터 빅토리아풍 실내 장식 전문가로 활약했다. Larry boyce & Association이란 회사를 만들고 미국 각종 유명 교회와 호텔, 영화배우의 저택 등의 실내장식 작업을 주도, 1986년에는 부통령 집무실과 국가안전보장회의실의 실내장식과 스텐실 작업에 참여해 <스미스소니언매거진>(1981년 8월호)과 <뉴욕타임즈>로부터도 조명을 받기도 했다."

잠자리를 구걸하던 노숙자는 래리 보이스라는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앤더슨 목사는 당회와 교회 건물 관리 위원회에 이 사실을 알렸다. 공교롭게도 건물 관리 위원장이었던 스티브 테이블 장로와 보이스는 구면이었다. 보이스가 몇 해 전 그의 집의 실내장식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보이스가 내민 포트폴리오가 사실이었다. 스티브 장로는 에이즈 환자인 보이스를 위해 자신의 집을 선뜻 내놓았다.

보이스 씨가 스티브 장로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예배당 천장화 프로젝트도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교회는 교인 7명과 교역자로 구성된 테스크포스를 만들어 보이스를 지원했다. 100년 가까이 된 예배당 입구는 우중충하고 지저분했지만, 보이스는 마름모꼴 무늬의 아치형 천장에 주목하며 비잔틴 양식의 천장화를 제안했다.

래리는 한때 가톨릭 교인이었지만 신앙을 버리고 선불교에 심취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보이스는 기독교 신앙을 탐독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생겼다. Old First Church 교인들은 보이스가 이 프로젝트에 "스스로를 던졌다"고 회고했다.

   
 
  ▲ 보이스가 즐겨 찾던 교회 예배당 발코니.  
 
죽음을 목전에 둔 그는 기독교 신앙전통이 새겨진 스테인글래스가 있는 이층 발코니 앞에서 수시로 묵상에 잠기곤 했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회한에 젖기도 했지만 마지막이 될 그의 작품의 밑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고, 뒤늦게 찾아온 신앙적 질문과 씨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Old First Church 교회 입구  
 
보통 디자인이란 것이 고객의 의사가 중요하기에 작가가 재빨리 디자인해 고객의 승인을 얻고 진행하면 된다. 하지만 보이스는 이 작품이 공동체적 프로젝트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구성 단계부터 회중을 참여시켰다. 교인들은 기독교적 전통이 풍성하게 담긴 그림이길 원했다. 특히 성찬과 세례와 관련된 신앙전통이 부각되길 기대했다. 2,000년 동안 이어지던 기독교 전통적 상징을 성도들이 보고 누리도록 했다.

보이스가 완성한 천장화의 디자인은 다양한 상징을 담고 있다. 깊고 푸른 배경에 있는 8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별은 초대 교회를 감싸고 있던 하늘을 뜻한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담긴 문양을 본떠서 그린 비둘기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내려왔던 성령을 의미한다. 포도와 밀은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을 기념하는 성찬식에 기초가 되는 포도주와 빵을 나타낸다. 경계선 가장자리의 꽈배기는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상호 연결되어 있는 연합의 상태를 뜻한다. 시편 100편 2장을 인용해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들의 감사하는 마음과 교회의 풍성한 음악적 전통을 보여주고자 했다.

천천히 진행될 줄 알았던 보이스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보이스가 혼자서 작업을 마칠 수 있을 걸로 예상했지만, 최종 디자인이 교회로부터 승인받은 92년 3월부터 그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막 그림을 그리려던 그때 그의 기력은 쇠약해져서 작업대조차 오를 수 없을 정도였다.

   
 
  ▲ 천장화 프로젝트는 보이스가 원하던 대로 진정한 차원의 공동 작업으로 승화됐다.  
 
거동조차 불편해진 그는 에이즈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병원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 교인들이 그의 곁을 돌아가면서 지켰다. 92년 5월 25일, 샌프란시스코 한 병원에서 당회원들과 앤더슨 목사가 보이스에게 세례를 집례했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보이스는 특유의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이봐, 내 삶의 마지막이 마치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아?" 그가 마지막 순간에 친구에게 던졌던 말이다. 그로부터 꼭 12일 만인 6월 6일, 친구들과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작품을 남겨둔 채로.

   
 
  ▲ 보이스의 마지막 처소를 제공했던 사라 테이블 씨. 사라 씨는 보이스를 가족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천장화 마무리를 위해 보이스가 별도로 남겨놓은 지침은 없었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들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됐고, 보이스가 원하던 대로 진정한 차원의 공동 작업으로 승화됐다. 교인이자 예술가였던 낸시 웨스트스미스 씨가 붓을 이어받았고, 보이스가 틈틈이 훈련시켰던 자원봉사자들과 동료 예술가들이 작업대에 함께 올랐다. 보이스의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일부분씩 나눠 맡아 3년 동안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95년 2월, 예배당 입구의 천장은 비로소 완성됐다.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던 노숙자가 그림으로 남긴 신앙고백을, 그에게 쉴 곳을 주고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준 교회 공동체가 함께 마무리한 것이다. Old First Church는 보이스와 교인들이 함께 그려낸 천장화를 "기독교인에 의해, 기독교적 주제로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지만, 제작되는 과정 자체에 기독교적 가치가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최초의 메가 처치(Mega Church)인 수정교회가 교회건물과 40에이커의 캠퍼스를 오렌지 카운티 소재 부동산 투자업체 그린로 파트너스(Greenlaw Partners)에 4천6백만 달러에 매각한다.

크리스천포스트가 28일 연방정부에 제출된 회생계획을 인용 보도한 바에 따르면 매각 대금은 3천6백만 달러는 건축비 상환에, 1천만 달러는 납품업체 미지급금 등에 사용될 계획이다.

 회생계획에 의하면 그린로 파트너스는 캘리포니아 가든그로브에 있는 수정교회를 매입 후 그곳에 아파트를 지을 예정이다.
또한 그린로 파트너스는 교회 건물을 수정교회에 15년 동안 월 21만2천 달러에 임대케 된다. 따라서 수정교회는 이 기간 동안 현재의 교회 시설 사용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수정교회가 향후 4년 이내에 3천만 달러를 내면 교회를 되살 수 있도록 옵션이 책정됐다.
수정교회 관계자는 “교회 매각을 통한 회생계획은 현재 교회가 하고 사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면서 “지난 50년간 계속 돼 온 ‘능력의 시간’(Hour of Power) 방송은 물론, 지역공동체 봉사 프로그램 및 예배는 계속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에 제출된 회생계획은 법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승인은 빨라야 늦은 여름이나 돼야 가능할 것이라고 크리스천포스트는 보도했다.

기사제공ⓒ 크리스찬타임즈 (http://www.kctusa.com/)

 

 

 

이런 적이 없다면 당신은 불신자이다.(조지 휫필드, 신도게요서 15장)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 - 1770)


“여러분의 죄를 기억하고 비통했던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이 실제로 하나님을 거역한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여러분에게 떨어져 마땅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의 일생 중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해 본 적이 있었는가? 

여러분은 스스로, ‘내 죄가 너무 무거워 머리를 들 수 없구나’라고 

탄식해 본 적이 있었는가? 

....중략....

만일 그런 적이 없다면, 

부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말라.”


설교 ‘은혜의 방편’(렘 6:14)중에서

전문은 휫필드 설교시리즈 4권 

‘피난처이신 그리스도’(지평서원 역간)의 강론 13에 있음.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1.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적 은혜이며, 

그 교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 의해 전파되어야 한다.


2. 그것으로 죄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질과 의로우신 법에 반대되는 

자기의 죄들의 위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더러움과 가증함에 대해서 보고 느낌으로, 

그리고 통회(痛悔)하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음으로, 

자기의 죄들을 매우 슬퍼하며 미워하여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와

그의 계명들의 모든 길들에서 그와 함께 걷기를 결심하며 노력한다.


3. 비록 회개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인, 

죄를 위한 어떤 만족이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으로 의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모든 죄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 15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 1-3항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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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으로 사역하지 않는 교회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부분, 부분들을 채워주고 세워주게 될 때에 팀이 하나가 되어서 큰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내 리더쉽 강의로 교회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는 Patrick Lencioni의 메세지입니다.



 

 

Worship in Greek Word


1. προσκυνέω (pros-kü-ne'-ō)
  (1) to kiss the hand to (towards) one, in token of reverence
  (2) among the Orientals, esp. the Persians, to fall upon the knees  
      and touch the ground with the forehead as an expression of
      profound reverence
  (3) in the NT by kneeling or prostration to do homage (to one) or
      make obeisance, whether in order to express respect or to make
      supplication
         (a) used of homage shown to men and beings of superior
             rank
                1) to the Jewish high priests
                2) to God
                3) to Christ
                4) to heavenly beings
                5) to demons

2. σεβάζομαι (se-bä'-zo-mī)
  (1) to fear, be afraid
  (2) to honour religiously, to worship

3. δόξα (do'-ksä)
  (1) opinion, judgment, view
  (2) opinion, estimate, whether good or bad concerning someone
      (a) in the NT always a good opinion concerning one, resulting
          in praise, honour, and glory
  (3) splendour, brightness
      (a) of the moon, sun, stars
      (b) magnificence, excellence, preeminence, dignity, grace
      (c) majesty
          1) a thing belonging to God
              a) the kingly majesty which belongs to him as supreme
                 ruler, majesty in the sense of the absolute perfection of
                 the deity
          2) a thing belonging to Christ
              a) the kingly majesty of the Messiah
              b) the absolutely perfect inward or personal excellency of
                 Christ; the majesty
          3) of the angels
              a) as apparent in their exterior brightness
          4) a most glorious condition, most exalted state
              a) of that condition with God the Father in heaven to
                 which Christ was raised after he had achieved his work
                 on earth
              b) the glorious condition of blessedness into which is
                 appointed and promised that true Christians shall enter
                 after their Saviour's return from heaven
4. λατρεύω (lä-tryü'-ō)
  (1) to serve for hire
  (2) to serve, minister to, either to the gods or men and used alike
      of slaves and freemen
      (a) in the NT, to render religious service or homage, to worship
      (b) to perform sacred services, to offer gifts, to worship God in  
          the observance of the rites instituted for his worship
          1) of priests, to officiate, to discharge the sacred office

5. θεραπεύω (the-rä-pyü'-ō)
  (1) to serve, do service
  (2) to heal, cure, restore to health

6. νεωκόρος (ne-ō-ko'-ros)
  (1) one who sweeps and cleans a temple
  (2) one who has charge of a temple, to keep and adorn it, a
      sacristan
  (3) the worshipper of a deity
      (a) word appears from coins still extant, it was an honourary title
          [temple-keeper or temple-warden] of certain cities, esp. in
          Asia Minor, or in which some special worship of some deity
          or even some deified human ruler had been established;
          used of Ephesus

7. σέβασμα (se'-bä-smä)
  (1) whatever is religiously honoured, an object of worship
      (a) of temples, altars, statues, idolatrous images

 

 

Worship in Hebrew Word

    1. שָׁחָה (shä•khä')
         (1) to bow down
               a) (Qal) to bow down
               b) (Hiphil) to depress (fig)
               c) (Hithpael)
         (2) to bow down, prostrate oneself
               a) before superior in homage
               b) before God in worship
               c) before false gods
               d) before angel

    2. סְגִד (seg•ēd')
         (1) to prostrate oneself, do homage, worship
               a) (P'al) to do homage

    3. עָצַב (ä•tsav')
         (1) to hurt, pain, grieve, displease, vex, wrest
               a) (Qal) to hurt, pain
               b) (Niphal) to be in pain, be pained, be grieved
               c) (Piel) to vex, torture
               d) (Hiphil) to cause pain
               e) (Hithpael) to feel grieved, be vexed
        (2) to shape, fashion, make, form, stretch into shape, (TWOT)
             worship
               a) (Piel) to shape, form
               b) (Hiphil) to form, copy, fashion

    4. עָבַד (ä•vad')
         (1) to work, serve
               a) (Qal)
                    1) to labour, work, do work
                    2) to work for another, serve another by labour
                    3) to serve as subjects
                    4) to serve (God)
                    5) to serve (with Levitical service)
               b) (Niphal)
                    1) to be worked, be tilled (of land)
                    2) to make oneself a servant
               c) (Pual) to be worked
               d) (Hiphil)
                    1) to compel to labour or work, cause to labour,
                       cause to serve
                    2) to cause to serve as subjects
               e) (Hophal) to be led or enticed to serve

 

 

OO님께서 올리신 글 가운데 "성경 원어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다 라고 할 때 동사 ‘예배하다(worship)’의 히브리어 어근은 “그 주인에게 속한 개”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한다." 라는 말이 있다. 어느 성경 원어학자들인지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의미가 이상하게 전달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지, 정, 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동물에게는 이러한 것이 없다. 사탄에게도 이러한 것이 없다. 천사에게도 이러한 것이 없다. 오직 사람에게만 이러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귀한 존재이다.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은하나님께서 임하시는 복의 장소가 된다. 예배는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예배할 때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bending”하시는 것은 bless의 시작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오시게 한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을 내포하는 것이다. 신령과 진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지, 정, 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예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매일매일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삶에 모셔들이는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입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God wants to bless people who worship Him; therefore, we shall be blessed through our worship Him.

 

 

 

출처: 아멘넷, 글/Apo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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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의 예수님 탄생 알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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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수의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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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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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 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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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 천 ♤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듯이 현재 기독교인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흘린 순교의 피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전국 어디에나 순교의 피가 흐르지 않는 지역이 있겠습니까마는 전남 여수는 순교의 성지라 할 만큼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이기풍 목사, 손양원 목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죠.

고난 주간, 여수종교문제연구소장 신외식 목사(월전벧엘교회 담임)가 ‘여수기독교 순교역사’와 ‘여수 기독교회사’라는 두가지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미 오래전 집필을 끝낸 원고이지만 언론에 공개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두 가지 원고 중 고난주간에 되짚어 볼 만한 여수기독교순교역사를 게재합니다. 신 목사의 글을 보며 순교의 피를 흘렸던 신앙의 선배들의 희생을 반추해 보는 고난 주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편집자주>

신외식 목사 / 여수종교문제연구소장, 월전벧엘교회 담임

머리말
구국의 성지요 순교의 성지 아름다운 도시 여수. 500백 여 교회, 9만여 성도로 부흥 성장한 여수의 교회들과 그 이면에는 순교의 역사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순교의 성지 여수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이기풍 목사, 손양원 목사, 정성균 목사의 순교는 여수의 복음화율이 왜 높은지를 설명해 주는 듯하다.

본론
여수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일제 치하에서 이기풍 목사가 순교했고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으로 많은 기독인, 특히 손양원 목사의 아들 동인·동신이 순교했다. 6.25한국전쟁에 이르러서는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순교한 열 분(손양원 목사/애양원교회, 조상학 목사/덕양교회, 지한영 전도사/율촌장천교회, 지준철 성도/지한영전도사 장남, 윤형숙 전도사/여수제일교회, 허상용 집사/돌산읍제일교회, 황도백 집사/우학리교회, 곽은진 성도/우학리교회, 안경수 성도/우학리교회, 백인수 성도/우학리교회)이 순교하셨다. 여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순교의 역사와 기독교회의 역사가 함께 숨쉬고 있는 도시다.



1. 여수 최초의 순교자 이기풍 목사(1865년 12월 23일~1942년 6월 20일)/ 제주도 선교사, 순교자, 평남 평양에서 출생

 
 
▲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는 1865년에 출생한 한국장로교회 초대목사 7명 중 한분이시다. 초대 한국장로교회의 목사이자 순교자이시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중일전쟁 후 S.A.마펫 선교사 등의 전도를 방해하고 핍박했으나 전도인 전군보(田君甫)의 전도로 결신(決信)을 하고, 1894년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1898년부터 매서인(賣書人) 자격으로 함경도 일대에서 성경 반포·전도사업을 하다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장로교단의 효시인 독로회(獨老會)가 조직되면서,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독노회는 그에게 남다른 선교열정이 있어 제주 전도에 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렸다. 1919년 광주북문내교회 초대목사가 된 이후에도 제주선교에 늘 관심을 기울였으며 1920년 전라도 장로회총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완강히 거부하며 호남지방 교회지도자들과 연대, 반대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1942년에 소천했다.

이기풍 목사는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은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 날 평양 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사무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했다.

1894년 그는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부터 1907년까지는 황해, 안악, 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돌며 조사로 시무했다.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 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천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이 너무 심해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였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한다. 봉세관(捧稅官)의 조세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반대하여 제주도 민중들이 투쟁한 제주도 민중항쟁이다)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은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은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 위해 전도인 이관선·김홍련을 파송했다. 이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 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장에 당선됐고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되었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33년에는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은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노회 산하 오석주·나덕환·김상두·김순배 목사등과 함께 1938년 체포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전에 졸도하여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 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끝내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어 있다가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 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2. 여순사건의 순교자 손동인·손동신(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의 순교


 
 
▲ 손양원 목사의 아들 손동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집결해있던 군인들 중에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여순사건이 발생한다. 반란군들에 의해서 여수와 순천은 무법천지가 되었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 죽이는 대학살을 일으켰다. 이때 학교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공산주의를 비판하던 손양원 목사의 아들 동인, 동신 두 형제가 공산당들에게 색출되어 인민재판에 회부가 된다. 그리고 여수지역과 순천 지역의 수 많은 시민들이 학살되고 여수 순천에 많은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이때 잔인한 폭도들은 그 두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을 시킨다.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들은 손 목사님 내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여순반란사건이 진압이 된 후에, 두 형제를 죽인 자들 중에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이 체포가 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을 때 손 목사는 안재선의 석방을 간절하게 간청한 후에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고, 그 후 안재선은 고려성경학교를 졸업하여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02사진: 손양원 목사의 아들 손동인

3. 6.25로 인한 열 분 순교자 배출

1) 손양원 목사의 순교

 
 
▲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咸安)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했다. 손양원 목사가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는 일본의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는 ‘동방요배’가 강요되는 시기였다. 학교에서는 항상 ‘동방요배’를 시작으로 수업을 시작했는데 손양원 목사는 1916년 3학년 때, 그러니까 15세 때 이러한 궁성예배는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여 궁성요배를 하지 않음으로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손 목사는 1924년 1월 정양순씨(19세)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한 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1926년 3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당시 감만동교회의 교인 600여명의 대부분은 한센병자들이었는데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병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나 보다.

손 목사님이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1935년 4월 5일의 일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한국 교회가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로 온통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손 목사를 비롯한 신학생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기에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지만 손 목사는 이 때 부터 신사 참배를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것을 이유로 민족이 해방되기까지 6년간 옥고를 치르시게 된다.

애양원교회에 부임한 후 손 목사는 가는 곳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결국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경찰서에서 나온 경찰들에게 연행되셨다. 그리고는 6년간 옥고를 치르셨는데 옥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손 목사로 인해 간수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인도되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애양원교회에 온 손양원 목사는 순교할 때까지 이곳에서 한센병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 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면서 살아가셨다. 당시 한센병자들은 병이 다 치유된 이후에도 주변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되고 소외받던 사람들이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두 피해 다니고, 차를 타거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식당, 다방, 극장, 목욕탕이나 이발소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센병자들은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손양원 목사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6.25가 발발했을 때 피난을 가자는 교역자, 재직, 교인들의 간청을 마다하고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시면서 끝까지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시다가 마침내 1950년 9월 28일 저녁에 여수 근교 미평에서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여 순교하셨다. 그때 손 목사님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순교하셨다.

2) 순교자 조상학 목사
* 1877년 전남 승주군 송광면 조형섭씨의 장남으로 출생
* 1899년 광주의 오웬(C.Owen) 선교사와 지원근 조사(현재 전도사)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
* 배유지(.E.Bel)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 1923년 43세로 평양신학교를 졸업
* 1930년대 초 율촌교회에서 목회중 1930년말 신사참배거부로 몇 차례 투옥
* 1950년 9월 28일 73세의 나이로 손양원목사와 함께 순교

3) 순교자 지한영 강도사
* 1906년 5월 16일 여천군 율촌면 조화리 427번지에서 지재구씨의 3남으로 출생
* 여흥중학교졸업
* 평양숭실학교졸업
* 일본 신학교 수학중 反帝思想犯 (반제사상범)으로 투옥 학업중단
* 조선신학교 졸업(현 한국신학대학교)
* 여흥학교 교사 및 교장으로 시무
* 여수 덕충교회 전도사로 시무
* 순천시 승주교회(현 순천제일교회)전도사 시무
* 율촌면 장천교회 강도사로 시무중 6.25로 공산군에 체포
*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와 장남 지준철과 함께 순교

4) 순교자 윤형숙 전도사
* 1898년 여천군 화양면 창무리에서 출생
* 윤치윤씨의 3남2녀중 장녀로 출생
*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 시위 중 한쪽팔과 눈을 실명
* 여수에서 봉산학원교원재직
* 여수제일교회 전도사 시무
* 여수중앙교회전도사로 시무중 8.15해방을 맞이함
*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순교

5) 순교자 허상용 집사
* 1906년 여천군 돌산면 군내리(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서 허재홍 씨의 독자로 출생
* 돌산부면장역임
* 6.25을 맞아 교회를 지키다 공산당에 체포되어서 여수경찰서에 투옥
*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순교

6) 함께 순교하신 분들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애양원교회) 조상학 목사(덕양교회-현여수주향교회) 지한영 전도사(율촌장천교회) 지준철 성도(지한영전도사 장남) 윤형숙 전도사(여수제일교회) 허상용 집사(돌산읍제일교회) 황도백 집사(우학리교회) 곽은진 성도(우학리교회) 안경수 성도(우학리교회) 백인수 성도(우학리교회)등 10명의 기독인이 총살에 의해 순교하였다.

현재 여수시 둔덕동 순교지에 서현식 목사가 여수중앙교회 시무중 순교기념비를 제막하였다.

 
 
▲ 여수 순교 기념비


4. 정성균선교사

정성균 선교사는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기 전인 1944년 5월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 속한 거금도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기에 아주 어렵게 공부를 하였다. 그는 정식 중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여수중앙교회에서 시행하던 성경 야학교에서 중학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의 믿음과 성실성을 갸륵하게 여긴 성도들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그는 장차 목사가 될 꿈을 안고 한남대학교 성문학과에 진학하였다. 물론 대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었지만 여러 성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등록을 할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고 어렵게 대학을 다녔지만 그의 일기 어디에서도 부자가 되어야겠다든지 권력을 추구하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주여! 부족한 인간이지만 선교사가 되게 하여 주시며 복음의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의 정신을 본받아 나도 밑에 들어가서 섬겨야 하겠다”(1964. 4. 5.).

그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공주군 반포면 마암리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세웠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는 농촌과 섬 마을을 찾아가서 봉사와 전도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늘 가난한 섬마을 출신으로서 여러 사람들의 사랑의 손길을 통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면서 항상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친 다음 그는 무작정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 순교 전의 정선균 선교사(가장 우측)와 가족들


정성균 선교사는 1974년 7월부터 방글라데시(74.7~79.7.7)에서 4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바타라초등학교를 설립하였으나 모슬렘 교도를 개종시켰다는 이유로 방글라데시의 재입국을 거절당하였다가 1980년 10월 13일에 파키스탄선교사로 파송받고 꾸즈란왈다신학교에서 교수활동 중에 14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 교육, 봉사활동을 하였다. 자신의 생명은 돌보지도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국 땅의 뭇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시다가 1984년 7월 17일에 파키스탄에서 순교했다.

결론

여수는 순교의 성지이지만 통일교와 신천지 등 많은 이단사이비가 침투하여 교회와 여수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는 우리 믿는 성도들이 먼저 깨어있어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알고 새롭게 신앙을 다지는 귀한 계기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참고자료] *『여수중앙교회50년사』(여수중앙교회50년사 편찬위원회, 1996)
*『여수노회 20년사』(예장통합여수노회20년사 편찬위원회, 2001)
* 여수노회 순교자기념위원회 자료 (예장통합여수노회 순교자기념위원회)
* 여수종교문제연구소 수집자료

참고사항
1) 손양원목사 1902. 6 .3..-1950. 9. 28.
호 는 산돌. 경남 함안(咸安) 출생. 1910년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7년 선교사 맹호은(孟晧恩)에게 세례. 1923년 일본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9년 경남성경학교(慶南聖經學校)를 졸업, 1934년까지 밀양·울산·부산 등지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다시 신학을 지망,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소록도(小鹿島)의 나병환자들의 수용소인 애양원(愛養園)교회에 부임하여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2) 정성균선교사 (1944.5.1.~1984. 7. 17.) 여수중앙교회(예장통합) 출신1944. 5. 1. 전라남도 고흥에서 출생
1967. 12. 22. 대전한남대학교 성문학과 졸업1974. 2. 22. 장로회신학대학 졸업1974. 7. 방글라데시 선교의 뜻을 품고 출발1975. 10. 27. 방글라데시 선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기사제공ⓒ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전인적 조화와 균형



영적 건강과 성숙과 거룩은 전인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인격적 특성 중에서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게 될 때,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건강이란 몸 전체가 모두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각 기관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몸의 특정 부위와 기관이 아무리 튼튼하다 할지라도 몸의 한 부분이 아주 취약하면 곧 몸 전체는 병든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건강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며, 영적 성장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격적인 모든 측면들이 골고루 건강해야 영적 상태가 건강하게 되며, 우리의 인격적 측면 모두 함께 자라게 될때 영적 성장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적 질병과 영적 미숙의 대부분의 상태는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 쪽만 비대해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부분은 취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신앙의 3요소


신앙이란 지성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와 의지적 요소가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 세 가지의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부족하면 곧 거짓 신앙, 병든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지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비이성적이며 맹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비신앙적인 것은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무조건 덮어 놓고 믿는 맹신적인 '믿습니다' 주의가 좋은 신앙이며, 무엇을 이치적으로 따져서 논리적으로 믿는 것은 신앙이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탈신앙적인 것도 없습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고, 추리하고, 분석하고 논증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변화되는 것이 바로 지성입니다. 구원을 받게 되면 가장 먼저 지성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신앙을 가지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우리의 지성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해되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는 사실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시고, 우리의 이해를 깨우치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런 연후에 우리의 감정이 설득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실을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고 그쳐서는 안되겠습니다. 단순히 복음에 대한 사실들을 지적으로 찬동하는 것으로 멈추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반드시 거기에 우리의 감정과 의지까지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감동되지 않는 지식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미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복음의 진리로 인한 기쁨 등을 넘치게 만듭니다. 즉, 우리를 감동케 하고 감격케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참된 신앙은 우리의 행동과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의탁하게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타락한 본성


그러므로 지성적 측면만 강조하고 다른 감정적 측면과 행동적 측면을 무시하는 지성주의자나 지성과 행동은 무시하고 감정적 체험만을 중요시 여기는 감정주의자나 또는 지성과 감정은 무시한 채 행동만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자는 모두 영적인 환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의 위험 속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교회의 역사는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영적 환자들로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주로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흔히 지성주의적 위험에 빠지기 쉽고, 기도원이나 사설 집회에 참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감정주의적 위험에 빠지기 쉬우며, 사회의 개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행동주의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어느 한쪽만으로 치우치기 쉬운 것은 바로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본성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부흥과 개혁사/백금산 中에서


 


풀러대 총장 몰몬교 사죄 발언 논쟁 마우 총장, '몰몬교인 친구들과의 정중한 대화 촉진코자했다' [크리스천투데이, 2004.12.16] -------------------------------------------------------------------------------- 풀러신학대학교 리처드 J. 마우((Richard J. Mouw) 총장이 몰몬교회 강단에서 몰몬 공동체에 사죄의 메시지를 전한 이후, 그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이번 사과 발언은 유명한 신학자이자 풀러신학교 4대 총장인 마우 박사(기독교철학 전공)가 몰몬교가 인구의 약 70%가량을 차지하는 일명 몰몬교주인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소재한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의 교회(몰몬교) 강단에서 지난달 14일 설교를 전하는 도중 이뤄졌다. 마우 총장은 유타주 레히에 본부를 둔 복음주의적 기독교 단체인 스탠딩 투게더 미니스트리즈의 후원으로 이틀간 치뤄진 복음주의적인 '이브닝 오브 프렌드십' 참석 중이었다. 남침례회연맹(SBC)이 발행하는 뱁티스트 프레스(BP)에 따르면, "명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당신들에게 죄를 지었다(Let me state it clearly, We evangelicals have sinned against you)"는 말을 포함한 그의 당시 발언은 대표적 복음주의적 기독교 지도자들과 몰몬교 전문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우 총장은 "우리는 종종 몰몬교 신앙을 가진 교인들의 신앙과 관습에 대해 심각하게 잘못 전해왔다.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먼저 묻지 않고 당신들이 무엇을 믿는지를 당신들에게 말해왔다"고 말했다. 솔트 레이크 시티 트리뷴에 따르면, 마우 총장은 "영원히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기독교와 몰몬교 간의 차이점에 대해 심각한 논쟁들이 있다는 것을 (나도)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것들을 친구의 입장에서 토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템플 스퀘어 예배당의 강단에 타종교를 지닌 설교자가 선 것은 105년만에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후원자들과 참석자들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린 반면,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무어 총장의 설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솔트레이트 시티에 소재한 남침례교회 목회자인 마이크 그레이 목사는 BP와의 인터뷰에서 "무어 총장은 복음주의적 목소리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오류를 범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어 총장은 틀렸다. 그는 그런 말을 할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그리고 그 발언은 상처만 낼 뿐"이라면서, 무어 총장의 발언을 평가하는데 있어 "민감하지 못한", "부정확한", "무지한"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이번 행사를 후원한 복음주의적 교회 중 하나를 담임하고 있는 그레이 목사는 무어 총장의 발언에서 가장 무례한 부분은 바로 그가 솔트레이크 시티 지역에서 복음주의적 공동체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BP와의 인터뷰에서 "무어 총장은 이 지역에 살지도 않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몰몬교 이웃들에게 추하게 행동한 적이 없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발언은 몰몬교인들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의 경계를 흐리게 했기 때문에 논쟁적이었다고 말했다."우리는 복음을 나누고자 접근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한다. 긴장과 균형은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몰몬교인들과 함께 서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찾으려고 시도하는 균형이다"라고 그레이 목사는 말했다.

유타-아이다호 침례회 연맹의 집행위원장인 타임 클라크도 그레이 목사에 동의하면서, 무어 총장의 발언은 기독교인들과 몰몬교인들 모두에게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클라크 위원장은 BP와의 인터뷰에서 "무어 총장은 몰몬교인들에게 그들이 기독교 주류에 속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몰몬교인들은 그 발언을 이용해 그런 종류의 언어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절반의 진리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바로 몰몬교가 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클라크 위원장은 계속해서 "그것은 유타와 아이다호에서의 기독교 증인들로서의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다.

유타와 아이다호 밖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무어 총장의 발언이 명백한 복음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몰몬교인들은 전도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침례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을 타겟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이의 증거는 명백하다. 왜 몰몬교인들이 뉴욕시, 달라스, 그리고 애틀란타에 예배당을 짓겠는가? 바로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르는 침례교인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공략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클라크 위원장은 말했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인 행사(이브닝 오브 프렌드십-편집자 주)에서 무어 총장의 접근은 최상의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클라크 위원장은 "내가 만약 마우 총장의 자리에 처해있었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BP는 '모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거짓 증언을 함으로서 몰몬교인들에 대해 죄를 짓지는 않았다'는 것을 무어 총장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했다.

마우 총장은 BP의 질문들에 "나는 이런 점에서(거짓 증언을 한다는 점에서-편집자 주)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죄를 지었다고 암시하려고 의도한 적이 결단코 없다"고 진술했다. 그는 "만약 내가 아프리칸 미국인들의 모임에 가서 우리 백인들이 당신들 흑인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말했다고 가정해보라. 누가 이것이 정확한 진술이 아니라고 부인할 것인가? 내가 모든 백인들에 대해서, 모든 백인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고 누가 생각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마우 총장은 "어떤 점에서도 나는 몰몬교인들이 '정통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몰몬교의 사상 가운데 어떤 요소들은, 다른 요소들은 덜 강조되는 가운데, 강조된다면, 몰몬교 안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부분을 더 증진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복음주의적 공동체에 비통을 안겨준데 대해서 깊은 유감을 표한다. 그러나 나는 몰몬교인 친구들과의 친절하고 정중한 대화를 촉진하고자한데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마우 총장은 "단순히 거짓된 종교라고 몰몬교를 전적으로 정죄한데 있어서 우리가 항상 공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최소한 인정한다"고 말했다. "복음주의자들이 몰몬교인들에게 죄를 짓는 확연한 패턴이 있다"고 마우 총장은 말했다. 그는 "몰몬교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월터 마틴, 몰몬교를 "그 영감과 관습에 있어서 사탄적"이라고 제시한 데이브 헌트 같은 작가들은 거짓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우 총장은 몰몬교의 창시자인 죠셉 스미스 탄생 200주년을 축하하면서 그가 했던 발언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는 "내가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죠셉 스미스의 탄생일을 축하하는데 참여해야한다고 말한 것으로 사람들이 들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말하려고 했던 바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아니라 나는 죠셉의 삶과 가르침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기회를 제공해주는 그런 행사들에 올해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참여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마우 총장은 자신의 발언이 "불필요한 혼돈"을 야기했다며, 그러나 스미스의 탄생일 같은 행사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죠셉의 사상에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부터 가려내고자 시도할 수 있다면" "비판적인 기브 앤 테이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나는 죠셉 스미스가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고 믿지는 않는다. 나는 몰몬경을 합법적인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만인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마우 총장은 말하기도 했다.

"나의 좋은 친구인 밥 밀레트(브리검 영 대학 교수, 브리검 영 대학은 몰몬교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편집자주)가, 천국에 이르렀을때 자신의 오직 한 가지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공로"라고 말할 때, 나는 "계속 대화하세"라고 열정적으로 말하면서 반응하기를 원한다"고 무어 총장은 말했다. 논란이 됐던 금번 이틀간 행사의 주 설교자는 철학자이자 작가로서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잘 알려진 변증가인 스가랴 박사였다. 그전까지 몰몬교인이 아니면서 템플 스케어 예배당 강단에 초대받은 이는 1899년 드와이트 무디가 마지막이었다. 무디는 무디 바이블 인스티투트의 설립자로서 당시 행사에서 몰몬교 군중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출처: 개혁과 신앙 http://cafe.naver.com/solideogloriafaith/2156 풀러대 총장 몰몬교 사죄 발언 논쟁 마우 총장, '몰몬교인 친구들과의 정중한 대화 촉진코자했다' [크리스천투데이, 2004.12.16] -----------------------------------------------------

--------------------------- 풀러신학대학교 리처드 J. 마우((Richard J. Mouw) 총장이 몰몬교회 강단에서 몰몬 공동체에 사죄의 메시지를 전한 이후, 그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이번 사과 발언은 유명한 신학자이자 풀러신학교 4대 총장인 마우 박사(기독교철학 전공)가 몰몬교가 인구의 약 70%가량을 차지하는 일명 몰몬교주인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소재한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의 교회(몰몬교) 강단에서 지난달 14일 설교를 전하는 도중 이뤄졌다. 마우 총장은 유타주 레히에 본부를 둔 복음주의적 기독교 단체인 스탠딩 투게더 미니스트리즈의 후원으로 이틀간 치뤄진 복음주의적인 '이브닝 오브 프렌드십' 참석 중이었다. 남침례회연맹(SBC)이 발행하는 뱁티스트 프레스(BP)에 따르면, "명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당신들에게 죄를 지었다(Let me state it clearly, We evangelicals have sinned against you)"는 말을 포함한 그의 당시 발언은 대표적 복음주의적 기독교 지도자들과 몰몬교 전문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우 총장은 "우리는 종종 몰몬교 신앙을 가진 교인들의 신앙과 관습에 대해 심각하게 잘못 전해왔다.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먼저 묻지 않고 당신들이 무엇을 믿는지를 당신들에게 말해왔다"고 말했다. 솔트 레이크 시티 트리뷴에 따르면, 마우 총장은 "영원히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기독교와 몰몬교 간의 차이점에 대해 심각한 논쟁들이 있다는 것을 (나도)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것들을 친구의 입장에서 토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템플 스퀘어 예배당의 강단에 타종교를 지닌 설교자가 선 것은 105년만에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후원자들과 참석자들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린 반면,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무어 총장의 설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솔트레이트 시티에 소재한 남침례교회 목회자인 마이크 그레이 목사는 BP와의 인터뷰에서 "무어 총장은 복음주의적 목소리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오류를 범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어 총장은 틀렸다. 그는 그런 말을 할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그리고 그 발언은 상처만 낼 뿐"이라면서, 무어 총장의 발언을 평가하는데 있어 "민감하지 못한", "부정확한", "무지한"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이번 행사를 후원한 복음주의적 교회 중 하나를 담임하고 있는 그레이 목사는 무어 총장의 발언에서 가장 무례한 부분은 바로 그가 솔트레이크 시티 지역에서 복음주의적 공동체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BP와의 인터뷰에서 "무어 총장은 이 지역에 살지도 않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몰몬교 이웃들에게 추하게 행동한 적이 없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발언은 몰몬교인들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의 경계를 흐리게 했기 때문에 논쟁적이었다고 말했다."우리는 복음을 나누고자 접근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한다. 긴장과 균형은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몰몬교인들과 함께 서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찾으려고 시도하는 균형이다"라고 그레이 목사는 말했다. 유타-아이다호 침례회 연맹의 집행위원장인 타임 클라크도 그레이 목사에 동의하면서, 무어 총장의 발언은 기독교인들과 몰몬교인들 모두에게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클라크 위원장은 BP와의 인터뷰에서 "무어 총장은 몰몬교인들에게 그들이 기독교 주류에 속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몰몬교인들은 그 발언을 이용해 그런 종류의 언어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절반의 진리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바로 몰몬교가 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클라크 위원장은 계속해서 "그것은 유타와 아이다호에서의 기독교 증인들로서의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다. 유타와 아이다호 밖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무어 총장의 발언이 명백한 복음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몰몬교인들은 전도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침례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을 타겟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이의 증거는 명백하다. 왜 몰몬교인들이 뉴욕시, 달라스, 그리고 애틀란타에 예배당을 짓겠는가? 바로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르는 침례교인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공략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클라크 위원장은 말했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인 행사(이브닝 오브 프렌드십-편집자 주)에서 무어 총장의 접근은 최상의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클라크 위원장은 "내가 만약 마우 총장의 자리에 처해있었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BP는 '모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거짓 증언을 함으로서 몰몬교인들에 대해 죄를 짓지는 않았다'는 것을 무어 총장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했다. 마우 총장은 BP의 질문들에 "나는 이런 점에서(거짓 증언을 한다는 점에서-편집자 주)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죄를 지었다고 암시하려고 의도한 적이 결단코 없다"고 진술했다. 그는 "만약 내가 아프리칸 미국인들의 모임에 가서 우리 백인들이 당신들 흑인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말했다고 가정해보라. 누가 이것이 정확한 진술이 아니라고 부인할 것인가? 내가 모든 백인들에 대해서, 모든 백인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고 누가 생각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마우 총장은 "어떤 점에서도 나는 몰몬교인들이 '정통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몰몬교의 사상 가운데 어떤 요소들은, 다른 요소들은 덜 강조되는 가운데, 강조된다면, 몰몬교 안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부분을 더 증진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복음주의적 공동체에 비통을 안겨준데 대해서 깊은 유감을 표한다. 그러나 나는 몰몬교인 친구들과의 친절하고 정중한 대화를 촉진하고자한데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마우 총장은 "단순히 거짓된 종교라고 몰몬교를 전적으로 정죄한데 있어서 우리가 항상 공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최소한 인정한다"고 말했다. "복음주의자들이 몰몬교인들에게 죄를 짓는 확연한 패턴이 있다"고 마우 총장은 말했다. 그는 "몰몬교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월터 마틴, 몰몬교를 "그 영감과 관습에 있어서 사탄적"이라고 제시한 데이브 헌트 같은 작가들은 거짓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우 총장은 몰몬교의 창시자인 죠셉 스미스 탄생 200주년을 축하하면서 그가 했던 발언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는 "내가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죠셉 스미스의 탄생일을 축하하는데 참여해야한다고 말한 것으로 사람들이 들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말하려고 했던 바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아니라 나는 죠셉의 삶과 가르침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기회를 제공해주는 그런 행사들에 올해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참여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마우 총장은 자신의 발언이 "불필요한 혼돈"을 야기했다며, 그러나 스미스의 탄생일 같은 행사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죠셉의 사상에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부터 가려내고자 시도할 수 있다면" "비판적인 기브 앤 테이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나는 죠셉 스미스가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고 믿지는 않는다. 나는 몰몬경을 합법적인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만인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마우 총장은 말하기도 했다. "나의 좋은 친구인 밥 밀레트(브리검 영 대학 교수, 브리검 영 대학은 몰몬교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편집자주)가, 천국에 이르렀을때 자신의 오직 한 가지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공로"라고 말할 때, 나는 "계속 대화하세"라고 열정적으로 말하면서 반응하기를 원한다"고 무어 총장은 말했다. 논란이 됐던 금번 이틀간 행사의 주 설교자는 철학자이자 작가로서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잘 알려진 변증가인 스가랴 박사였다. 그전까지 몰몬교인이 아니면서 템플 스케어 예배당 강단에 초대받은 이는 1899년 드와이트 무디가 마지막이었다. 무디는 무디 바이블 인스티투트의 설립자로서 당시 행사에서 몰몬교 군중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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