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수프' 생명기원 가설 뒤집혀

2010년 02월 05일(금)
최초의 생명체는 유기물 분자로 이루어진 `원시수프'에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지배적인 가설이 80여년 만에 영국 과학자들의 새 연구로 뒤집히게 됐다고 사이언스 데일리가 보도했다.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UCL) 연구진은 `원시수프' 이론은 실현 불가능한 것임이 자신들의 연구로 입증됐으며 실제로 생명체를 탄생시킨 것은 해상(海床) 열수구에서 나온 지구의 화학에너지라고 `바이오 에세이즈(BioEssays)'지 최신호에서 주장했다.

연구진은 "교과서에 따르면 최초의 생명체는 유기물 수프에서 탄생했으며 최초의 세포는 이런 유기물이 발효되면서 ATP(아데노신3인산) 형태의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으로 돼 있지만 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실제로 최초의 생명체는 H₂(수소), CO₂(이산화탄소), N₂(질소), H₂S(황화수소)와 같은 기체로부터 태어났으며 여기에 소요된 에너지는 미세한 구멍들이 서로 연결돼 있는 특수한 종류의 심해 열수구에서 일어난 지구화학적인 물질대사를 활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시수프 이론은 영국의 생물학자 J.B.S 홀데인이 지난 1929년 발표한 것으로, 그는 초기 지구의 바다에서 메탄과 암모니아, 물이 자외선에 의해 최초의 유기화합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수프에는 이런 반응을 일으킬만한 원동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런 에너지원이 없다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해 왔다.

연구진은 "생물에너지학과 열역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원시수프' 가설은 80년 동안이나 생명체 기원에 관한 주류 논리의 중추 역할을 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심해 열수구에 벌집 모양으로 연결돼 있는 미세한 구멍들에서 일어나는 지구화학 변화가 최초의 생명체 탄생에 에너지를 공급했을 것으로 보고 연구를 집중한 결과 이런 미세한 구멍이 지질과 단백질, 뉴클레오티드(핵산의 구성 성분) 등 최초의 세포를 탄생시켰을지 모르는 성분들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오늘날 단순한 화학 성분에서 자라나는 모든 유기물, 또는 어쩌면 독자적으로 살 수 있는 최초의 세포에 있어 탄소 및 에너지 대사에는 화학적 삼투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유기물이 열수공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메커니즘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화학적 삼투작용은 최초의 생명체를 탄생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과정"이라면서 이제 원시수프의 발효라는 해묵은 족쇄를 벗어던질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제공) | youngnim@yna.co.kr


저작권자 2010.02.05 ⓒ ScienceTimes
음력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설날 아침이 되면 차례(祭禮)를 지냅니다. 온 가족이 깨끗한 옷을 입고 정성을 다해서 조상에게 예를 올립니다. 그런 다음에 차례 음식을 나눠 먹고 어른들에게 세배(歲拜)를 합니다. 설날 아침에 지내는 차례(茶禮)의 의미는 뭐예요?


▲차례상 사진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본래 설날의 차례는 조상숭배(祖上崇拜)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는데, 조상신(祖上神)과 자손이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평소의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설날의 차례(祭禮)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명절 때마다 조상숭배(祖上崇拜)인 차례(茶禮)문제로 가족 간에 갈등으로 고민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고 봅니다.
 
1,설의 어원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즉 설은 원단(元旦), 세수(歲首),연수(年首),신일(愼日)이라고도 하는데 일년의 시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설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게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설은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은 ‘새해에 대한 낯섦’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로는 설은 ‘선날’ 즉 ‘개시’라는 뜻의 ‘선다. 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설은 ‘삼기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합니다.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과정으로서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설은 정월 초하루에서 대보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2.설날의 유래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국지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曆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때에는 중국에서 역술(曆術)을 익혀 와 조력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 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수서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서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 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 제사 편에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제사(祭祀)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동면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합니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조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2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습니다. 계속 중국의 여러 가지 역법 체계들을 사용해 오다가 , 일단 공식적으로 역법이 양력(陽曆)으로 바뀐 것은 고종31년(1895)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뿌리 깊은 음력(陰曆) 설날 풍속은 계속되었고 , 그 후 일제하에서도 신정 과세를 강압적으로 추진했지만 “일본산‘이라 취급되어 민가에서는 구정을 해방 후에도 많은 논란을 겪어 오다가 1985년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설이 부활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정과 구정의 논란은 계속되었고, 1989년에 이르러서 “설날”이라는 명칭을 갖고 3일간의 연휴 오늘날과 같이 명절(名節)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차례(祭禮)의 의미

한국의 세시풍속(歲時風俗)에서는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날을 설날이라 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먼저 조상신(祖上神)에게 제사하는 것을 차례(茶禮)라 합니다.

차례(祭禮)는 언제 지내는가 하면 예전에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명절에 지내는데 지금은 대개 설날과 추석 명절에만 지내며 형제와 가까운 친족이 전부 종가 집에 아침 일찍 모여 차례를 지내며 차례(茶禮)의 대상은 돌아가신 조상 가운데 자신으로부터 4대까지 해당됩니다. 고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다음 돌아가셨다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까지입니다.

5대조 이상은 차례(茶禮)를 지내지 않고 제삿날 기제사도 지내지 않고 10월에 지내는 묘사로 대신합니다. 차례를 지내는 장소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 있을 때는 사당에서 지내고 그렇지 않으면 대개 대청이나 큰방에서 지냅니다.

차례(茶禮)음식은 계절의 특식을 조상신(祖上神)에게 올리되 설에는 떡국을 올리고 추석에는 송편을 올립니다. 또한 특징은 축문이 없으며, 나머지는 기제사 음식과 유사한 술과 과일과 적과 전이며, 술은 한번만 올리는 단 잔으로 하며 원칙적으로 소주는 쓰지 않습니다.

설날 차례(祭禮)는 떡국이 주식이므로 “떡국차례(祭禮)”라하고 8월 한가위차례는 “송편차례(祭禮)”라고도 합니다. 이 설날에는 타향에 나가 있던 사람도 모두 고향에 돌아가 생존하신 부모님과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고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제례를 지내기 때문에 여러 일가들이 이때에는 거의 다 모이게 됩니다. 이 풍속이 현재에도 내려와서 섣달그믐이나 8월 추석 전에 귀성객으로 복잡한 것은 이 풍속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4. 차례(茶禮)와 제사(祭祀)의 차이점

차례(茶禮)는 한자에서 보듯 차(茶)를 올리는 것으로 정월의 조상숭배 행사의 중요한 세시풍속(歲時風俗)입니다. 차사(茶祀), 정조다례(正朝茶禮)라고도 합니다. 본래의 뜻은 여러 명절과 조상의 생일 또는 매월 음력초하루, 보름에도 지내는 간단한 아침 제사를 의미하던 것입니다. 지금은 명절(설과 추석)에만 지내고 있으며 이를 차례(茶禮)라고 합니다.

제사(祭祀)는 죽은 사람에 한하여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기제나 문중들이 모여 지내는 시제가 있습니다. 즉, 차례는 2대 봉사(부모와 조부)에 대한 것이고 시제는 조상 전체를 기리는 것입니다. 또한 차례(茶禮)상은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을 올리는 것이고 제사(祭祀) 때는 메(밥)와 갱(국)을 올리는 것이므로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행사에는 주관자가 있듯 제사에도 제주(祭主)가 있으며 제주는 제사의 주인입니다.

즉, 장자세습에 따라 제주가 정해지고 이 제주 외에는 제사의 참석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은 전통 제사의례가 많이 변화 되고 있습니다. 즉 대가족 제도가 약화되면서 형식적인 유형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5,설날과 차례(祭禮)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크리스천들은 설날과 추석 명절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차례(祭禮)는 분명히 이방인의 조상숭배(祖上崇拜)입니다. 설날 차례는 조상신(祖上神)에게 제사로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신으로 모시지 않는 모든 이들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차례는 귀신(鬼神)에게 제사(祭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고 말씀 합니다. 우리는 차례제사나 풍어제(豊漁祭)나 민속놀이 등을 풍속(風俗)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하려하나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귀신(鬼神)에게 제사는 형벌이 따를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이나 추석의 차례(祭禮)는 귀신(鬼神)과 교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설날 세배(歲拜)하는 것은 살아계신 부모와 자녀 관계를 성숙시켜 자녀들이 올바른 가치관 형성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요셉이 노년에 연약해진 야곱에게 자녀들을 데리고 와 축복기도를 받았던 일을 기억하며 자녀들에게 세배를 받고 축복하는 것은 좋은 미덕입니다.

자녀들을 축복하는 것이야말로 신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명절엔 가족이 모두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차례(祭禮)인 제사(祭祀)문제로 대립하기 쉽습니다. 신앙적인 문제로 대립하지 말고 명절 기간 동안 가족들을 사랑으로 극진히 섬겨 감동하게 만들어 전도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가족모임에 참석 못한 가족에게 행복의 메시지를 보내고 작은 선물이라도 우편으로 보내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가족전도의 기회입니다. 또한 크리스천 가족이 신앙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통해 믿지 않는 친지들을 자연스럽게 전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칼럼 글
매년 전승되는 세시풍속(歲時風俗)이 뭐예요? 글쎄요, 세시풍속(歲時風俗)의 여러 부분에 대해서는 저보다는 우리 아멘넷의 칼럼니스트이자, 스님이셨던 분, 서 목사님께서 더 잘 아시고 계실 것 같구요, 매년 전승되는 세시풍속(歲時風俗)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 주시면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특별히, 띠(12간지)라고 하나요? 그 동물의 12간지에 대해서도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목회자님들도 서스럼 없이 사용하던데...그래도 되는 것인지요....목사님의 좋은 글 계속 기대해 보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본인 승려때사진

1, 들어가는 말

한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삶의 풍요와 안녕을 바라며 살았습니다.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1년 열두 달 동안 좀더 풍요로운 삶, 그리고 좀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행하던 전통적인 관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해마다 일정한 시기가 오면 습관적(習慣的)으로 반복하여 거행하는 주기적(週期的)인 전승의 의례적인 것으로서 자연신앙(自然信仰)과 조상숭배(祖上崇拜)를 바탕에 깔고 무속종교적(巫俗宗敎的), 주술적(呪術的) 복합행위와 놀이가 한데 어울린 계절 갈이 행사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통과의례(通過儀禮)나 관혼상제(冠婚喪祭)가 개인의 일생을 통해서 시기적으로 한 번씩 통과하는 의례라고 한다면 세시풍속(歲時風俗)은 해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시간은 매년 반복 전승되는 한국의 전통적인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주제를 기고 하고자 합니다. 본 주제는 “별똥별” 사모님께서 댓글에서 주신 것입니다.

2. 세시풍속(歲時風俗)의 의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해마다 관례로서 행하여지는 전승적(傳乘的) 행사로 집단적 또는 개인적으로 집집마다 촌락마다 또는 민족적으로 계절에 맞추어 관습적으로 되풀이되는 민속풍속을 말합니다. 오늘날 행하여지고 있는 세시풍속(歲時風俗)은 예로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며, 또 옛 문헌에 보이는 것 중에는 이름만 남아 있고, 현재 일반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한(韓)민족에 의하여 발생되고 전승되어 오는 고유(固有)의 것도 많이 있지만 외국과의 문화 교류를 통하여 전래된 것도 있고, 또 이 외래의 것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한(韓)민족의 색채가 가미되어 있는 것도 많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통사회(傳統社會)에서 우리의 주 생업은 농경이었습니다. 농경의 주기는 세시풍속의 주기와 맞물려 이는 생활의 주기이기도 했습니다. 세시풍속은 농사의 풍농을 예축·기원·감사하는 의례였으며, 인간 삶과 직결되어 액(厄)막이와 복(福)을 비는 의례 이였습니다. 이때에 즐기는 민속놀이는 단순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풍요를 기원하는 기복적인 의존적(依存的)의미를 그 저변에 깔고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수세로 불을 밝히고 대불을 놓는 것은 묵은 한 해를 폐기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기 위해서입니다. 세시풍속(歲時風俗)은 해마다 같은 양상으로 반복됩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한 해에 획득한 풍요와 건강은 한 해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반복하여 풍요와 건강이라는 삶의 요건을 획득하려는 것인데, 이처럼 다시 새롭게 추구한다는 점에서 세시풍속(歲時風俗)은 재생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3. 세시풍속(歲時風俗)의 성격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음력 정월부터 섣달까지 같은 시기에 반복되는 주기전승의례(週期傳承儀禮)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시의례라고도 하는데 그 성격으로 시계성(時季性)과 주기성(週期性), 그리고 순환성(循環性)을 들 수 있습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세시풍속을 세시(歲時)·세사(歲事), 또는 시령(時令)·월령(月令) 등으로 일컬어 시계성을 강조했으며, 일본에서는 연중행사라고 합니다.

세시풍속은 농경문화(農耕文化)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농경의례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통사회(傳統社會)에서 세시풍속은 농사의 개시·파종·제초·수확·저장 등 농경주기와 관련될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주기와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세시풍속(歲時風俗)은 고사(告祀),점복(占卜),예조(禮曹,금기(禁忌).무속(巫俗),부적(符籍)등의 민간신앙(民間信仰)을 비롯하여, 음식·복식·놀이·예술·농경생활 등에 이르기까지, 개별적인 사실들이 복합된 종합성을 띤 전통적 문화현상입니다.

세시풍속(歲時風俗)은 1년을 주기로 해마다 행해지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1년 주기가 아니더라도 세시풍속에 포함시키는 예가 있습니다. 격년, 또는 윤달이 든 해에 지내는 장승제라든가, 5년 또는 10년 단위로 지내는 별신제(別神祭)를 비롯하여 윤달에 행해지는 행사는 세시풍속에 포함시킵니다.

윤달(閏月)이 드는 해에는 1개월이 더 있어 13개월이 일 년이 됩니다. 그러나 윤달은 월력(月曆)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일 년 12개월에서는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1년이라는 단위 속에 포함되므로 윤달의 주기성은 세시풍속을 개념화하는 범주에서 있어, 따라서 윤달에 행해지는 관행도 세시풍속(歲時風俗)에 포함시킵니다. 윤달에 액(厄)이 없는 달이라고 하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고 할 만큼 무슨 일을 해도 탈이 없다는 달이라고 믿는 것이 윤달입니다.

그러므로 윤달에 아무런 부담 없이 이사를 가고, 집수리를 하고, 새집을 짓고, 산소를 단장과 이장하고, 삼베 떠다 수의를 마련하고, 혼수를 준비하고 불교에서는 예수재(預修齋;살아 있을 때 사후를 위하여 공덕을 쌓아서 지옥고통을 받지 않고 극락왕생하도록 법의 공덕을 저축하는 의식이다}를 지내는 등 평소에 쉽게 하지 못했던 일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달이라고 믿는 윤달입니다. 이유는 윤달에는 지상에 있는 귀신(鬼神)들이 모두 하늘로 소풍을 가기 때문에 지상에서 무슨 일을 해도 탈이 없다는 것이 윤달의 세시풍속(歲時風俗)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속지 않았으면 합니다.

4, 계절에 따른 세시풍속(歲時風俗)

세시풍속(歲時風俗)은 다달이 행해지는 주기전승의례로서 계절에 따른 의례라 하여 계절의례라고도 하고 계절제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계절은 음력 정월을 시작으로 3개월 단위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을 구분합니다.

1) 봄철의 세시풍속(歲時風俗)
봄은 사계절의 시작일 뿐 아니라 한 해의 시작이므로, 어느 계절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계 가운데 봄철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이 가장 다양합니다. 봄철의 대표적인 명절로는 설날인 정월 초하루와 대보름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세시풍속은 설날과 대보름 15일 사이에 설날 차례, 복조리, 가신제인 고사. 동신제인 당산제, 산신제, 장승제, 풍어제, 쥐불, 복쌈, 대보름음식 등 거의 반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2월 초하루 머슴의 날, 또는 영등날과 3월 초사흘 삼짇날이 있습니다.

2)여름철의 세시풍속(歲時風俗)
세시풍속에서의 여름은 음력 4월부터 6월에 해당됩니다. 농작물은 파종기가 끝나고 이제 한창 성장을 할 때여서 여름철을 농작물의 성장기(成長期)라고도 합니다. 농사일이 바쁠 때여서 봄처럼 세시풍속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5월 초닷새 단오(端午)와 유두(流頭)를 명절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복 날 역시 각별한 날로 지냅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진덕왕 2년에 처음으로 삼복 제사를 지냈는데 성안 4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蟲災)를 방지했다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먹는 개고기는 일반적으로 질병을 물리치는 벽사적(辟邪的)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 때나 상가에 개고기를 먹은 자는 참석하지 못합니다. 삼복 때 보신탕은 영양 섭취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동지 때 붉은 팥죽이나, 고사 때와 개업식 때 팥떡은 액(厄) 추방하는 벽사적인 의미가 컸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3)가을철의 세시풍속(歲時風俗)
세시풍속에서의 가을은 7월에서 9월에 해당됩니다. 7월부터는 바쁜 농사일도 대충 끝나 이제 수확 준비를 할 때입니다. 가을철에는 추석(秋夕)과 같은 큰 명절이 있고 그밖에도 백중(百中)은 7월15일로 여러 풍속이 전해져옵니다. 각 가정에서는 익은 과일을 따서 사당에 천신(薦新)을 올렸으며, 궁중에서는 종묘에 이른 벼를 베어 천신을 올리기도 하였고 불가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조상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올리는 천도재가 있습니다.·중구 또한 가을을 대표하는 명절이 있습니다. 음양(陰陽)사상에 따르면 홀수를 양(陽)의 수라고 하고, 짝수를 음(陰)의 수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로 여겼습니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절기일로서 설(1월1일) 삼진날(3월3일) 단오(5월5일) 칠석(7월7일) 중구(9월9일)는 양수(陽數)가 겹쳤다는 의미에서 계절 세시풍속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음양사상은 한국인의 장례에도 영향을 주어 꼭 3일장, 5일장을 주장합니다. 2일장 4일장은 음(陰)임으로 피하여는 음양(陰陽)사상이 교회에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4)겨울철의 세시풍속(歲時風俗)
세시풍속에서의 겨울은 시월(十月)에서 섣달까지입니다. 시월이면 벼농사의 수확도 마무리단계가 됩니다. 겨울의 두드러진 명절은 동지(冬至)입니다. 그러나 다른 달에도 고사를 지내거나 큰 굿을 하며 그동안 농사일이 잘되게 해준 하늘에 감사를 드립니다. 벼농사의 수확을 마치면 천신제를 지내기도 합니다. 겨울은 마지막 계절로서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상달의 성주고사, 동짓달의 동지고사, 섣달의 송년(送年)의례 등으로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세시풍속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봄을 파종기, 여름을 성장기, 가을을 수확기라 한다면 겨울은 저장기라 할 수 있습니다. 농산물도 저장해야 하지만, 인간의 힘도 저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듬해에 노동을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시풍속은 1년을 주기로 해마다 행해지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1년 주기가 아닌 것으로 포함된 것은 윤달이 든 해에 지내는 장승제와 5년 또는 10년 단위로 지내는 별신제(別神祭)를 비롯하여 윤달에 행하는 행사도 모두 세시풍속(歲時風俗)에 포함합니다. 세시풍속의 목적은 일 년간 재액초복(災厄招福)하여 풍요와 건강을 획득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그러나 한번 획득한 풍요와 건강이라는 삶의 요건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1년이면 폐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섣달그믐에 수세로 불을 밝히고 대불을 놓는 것은 한 해를 폐기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5.세시풍속(歲時風俗)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기독교(基督敎)가 한국에 전파되면서 무속(巫俗)의식인 세시풍속(歲時風俗)을 타파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가 무속(巫俗)적인 종교(宗敎)의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 사람은 누구든지 세시풍속(歲時風俗)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설날과 추석에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은 인생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통과(通過)의례와 세시풍속(歲時風俗)을 한국 기독교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중적 인격과 종교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여 집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가지만 생각은 불교적(佛敎的)으로 하고, 생활은 유교적(儒敎的)으로 살고, 신앙은 무속적(巫俗的)으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사탄은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악마의 표적은 교회이며 성도입니다. 그런 형편을 아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시풍속(歲時風俗)의 복음적이 아닌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한국의 종교를 설명하기 위해 흔히 말하는 ”유불선(儒彿仙) “혹은 ”유불도(儒彿道)“라는 ”공식“은 잘못이다. 한국 종교의 공식은 토착 신앙인 무교(巫敎)를 포함한 ”무불유(巫佛儒)“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최 교수에 따르면 고대 한국인들이 신봉했던 종교는 샤머니즘, 즉 무교였습니다. 그 예로 단군왕검은 샤머니즘적 사제를 겸한 정치 수장(首長)이었고, 신라 초기 임금을 뜻하는 “차차웅”은 신라 말로 무당(巫堂)을 뜻했습니다. 이후 불교와 유교가 전래되면서 세력은 줄었지만, 무교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각 지역의 “마을 굿(㖌)”이나 “풍어제(豊漁祭)” 같은 무속 행사는 이제 국가무형문화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수 천 년을 이어온 세시풍속(歲時風俗)인 무속신앙(巫俗信仰)을 기독교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의 생각과 삶에서, 안타까운 것은 오늘 교회 안에도 시몬처럼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그 임하심의 현상들이 나타나자 사도에게 돈을 주며 청하기를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8;19)라고 했습니다.

마술이 기술이었듯이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도 그에게는 새로운 기술, 신기술로 여겨졌고, 그래서 이 기술을 돈으로 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망할지어다”라면서 그를 꾸짖습니다. 시몬처럼 최면술(催眠術)학원에 목회자들이 수강한다는 소리가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한수 배워서 최면술로 넘어지게 하고, 입신 시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착각시키는 현실입니다.

6, 나오는 말

한국의 기독교(基督敎) 신자들에게서 세시풍속(歲時風俗)은 반듯이 극복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 합니다. 전통세시풍속은 첫째로는 제의(祭儀)의 세시풍속입니다. 명절이 되면 귀신(鬼神)이나 조상(祖上)을 위해 천신(薦新), 고사(告祀), 제사(祭祀). 차례(茶禮) 등 지냅니다. 둘째로는 액(厄)막이의 세시풍속이 있습니다. 명절날 음식은 먹거나 버리거나 또는 몸에 지니는 것으로 벽사(辟邪)의미가 있습니다. 동짓날 팥죽은 먼저 문간에 뿌려 모든 액(厄)을 가져다주는 잡귀를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풍습입니다. 셋째로는 예방과 치료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세시풍속입니다. 정월 대보름 이른 새벽에 깨물어 먹는 부럼은 1년 내내 무병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넷째로는 보신(補身)하는 세시풍속입니다. 삼복 날에 개고기 먹는 것은 개고기가 제사음식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귀신을 추방하는 것과 같이 질병을 가져오는 귀신을 추방하기 위에서 삼복 날에 개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금기의 세시풍속입니다. 정초에 돈이나 곡식 등 재물이 집에서 나가면 재산과 복이 남에게 나가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시풍속(歲時風俗)의 영향들이 기독교인들 사고 속에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전멸하라고 엄격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나아가 그들의 관습(慣習)과 풍속(風俗)을 따르지 말 것을 거듭 천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무심코 세시풍속(歲時風俗)을 수용하다보면 어느새 그 사상까지도 믿게 된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 주제는 “별똥별” 사모님께서 주신 주제입니다. 십이지(十二支)인 12띠의 동물적 의미와 띠 궁합은 다음 기회에 올리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해를 부탁합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칼럼 글

[질문] 서 목사님. 그렇다면 周易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왜냐하면 태극기의 4卦인 乾坤坎離가 周易의 64卦에서부터 비롯된 것인데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태극기에 경례를 하는 것은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미신에게 경례를 하는 거나 다름이 없는 것인데 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만약 태극기가 미신이라면 우리나라의 국기(國旗)를 바꿔야 되는 것인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주역의 기본 8괘 사진

참 무거운 주제 입니다. 본 주제는 “신년 점괘(占卦)본다는 성도” 댓글에서 박종남님께서 질의한 것입니다. 주역사상과 기독교사상은 분명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 하고자 합니다. 한국은 국교가 없는 나라입니다. 태극기가 만들어질 시기에 국민의 정서를 의식하면서 태극기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서구 기독교 국가 의 국기에는 십자가. 별 등 기독교적인 사상이 국기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 합니다. 박종남님! 좋은 주제 주셔서 감사합니다.

1, 주역(周易)의 어원

주역(周易)이란 유교의 경전인 사서(四書; 논어,대학,중용,맹자) 오경(五經;주역,서전,시전,예기,춘추)중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역에서 역(易)은 바꿀 역(易)자로서 변역(變易), 즉 “바뀌다”, 변하다“는 어원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역은 천지만물이 끝임 없이 변천하는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하고 풀이한 것으로서 자연을 그대로 본받은 뜻이 있으므로 자연의 운행질서 및 인류사회의 근본원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동양문화권의 점복(占卜)술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흉운(凶運)을 물리치고 길운(吉運)을 잡느냐 하는 점치는 책이 주역(周易)입니다.

2, 주역(周易)의 기원

기원전 11세기에 중국에서는 자연재화에 대한 공포와 무지로 인해 자신들의 미래와 삶을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던 중 복희(伏羲)라는 중국 고대의 제왕이 황하에서 용마라는 거북이 등에서 알 수 없는 무늬들을 발견합니다. 이 그림은 수리에 관한 해석으로 적용되었습니다. 그것이 주역(周易) 소성괘(3효괘)의 시초이면서, 그 그림으로 미래를 점쳐보고 가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주나라 문왕이 비로소 괘를 풀이라는 말을 붙여 역(易)이란 이름이 생겼고, 그 후 문왕의 아들 주공이 “효사”를 지어 일단 완성되었고, 공자가 다시 십익-단전-상하, 상전-상하, 문언전, 설괘전, 서괘전, 잡괘전,을 지어 보충 설명하였으니 그것이 사서오경(四書五經)중에 주역으로서, 공자가 이들에 대한 해설을 붙어서 이루어진 것이 주역(周易)입니다.

3, 주역(周易)에 대한 정의

주역(周易)은 적어도 네 단계를 거쳐서 만들어진 점복(占卜)서입니다. 주역이란 사상이 표현된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상징부호인데 주역에는 64가지 상징 부호가 나오는데, 이것을 64괘라고 합니다. 둘째, 문자입니다. 각 괘는 대부분 한 글자 가끔 두 글자로 이름이 붙었고, 두 종류의 부호로 이루어졌습니다. 한자의 한일자처럼 죽 그은 선(-)이 양(陽)효고, 양(陽)효에서 가운데가 끊어진 모양(--)을 한 것이 음(陰)효 입니다.

그러므로 주역에 나오는 상징부호는 결국 양효와 음효의 2효입니다.(효는 본받아 사귄다는 뜻, 천지의 현상을 본받아 서로 사귀며, 또한 다른 것으로 바뀐다는 의미) 이것이 세 번 겹침으로써 건괘(乾卦)는 변함이 없이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을 의미, 태괘(兌卦)는 맨 위가 물이니 바다, 호수 강 등을 의미하고 이괘(離卦)는 가운데 혹점이 있으니 태양을 의미하고, 진괘(震卦)는 대기의 에너지의 교류인 천둥, 번개를 의미하고, 손괘(巽卦)는 목기운과 기류의 변화인 바람을 의미하고, 감괘(坎卦)는 달이나 물을 대표적인 형상의미하고, 간괘(艮卦)는 맨 위의 고정적이니 육지나 산을 의미하고, 곤괘(坤卦)는 언제나 가운데 아래에 있는 땅을 의미하는 팔괘(八卦)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역(周易) 부호의 기본 단위인 효가 6개씩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64괘입니다. 또한 주역의 64괘 384호는 우주 만상의 변화 원리를 알리는 부호이고, 64괘는 기본 팔괘(八卦)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역의 팔괘(八卦) 가운데 건(乾), 곤(坤), 감(坎), 이(離) 사괘(師卦)는 대한민국의 태극기에 들어 있습니다. 초기의 태극기 중에는 팔괘(八卦)가 다 그려진 것도 있었습니다.

계상전에서“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고 하여 기본 팔괘가 생성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교감작용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자연(自然)의 도(道)이며, 그 과정을 64괘라는 틀 속에 넣은 것이 바로 주역(周易)입니다.

주역(周易)의 기본원리는 음양(陰陽)으로 나누어지는 이원론에 있습니다. 음양이 바뀜으로 밤과 낮이 바뀌고, 1년의 4계절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 라고 합니다. 주역의 근본적인 사상은 모든 것이 결말에 이르면 변화가 생기고 변화가 생기면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다는 이론입니다. 주역은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吉凶禍福)은 하나도 빠짐이 없이 64괘의 어느 한 상태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4, 주역(周易)과 태극(太極)이해

태극(太極)이라는 말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극으로부터 양의(兩儀:음양), 양의로부터 사상(四象), 사상으로부터 팔괘(八卦)라는 생성론적 도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태극에 관해 오늘날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송대(宋代)에 이르렀습니다.
송대에는 리기(理氣)·심성(心性)에 대한 논의가 중시되었는데 리기는 곧 실재로서 본체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노장(老莊)과 주역 계사전의 사상을 취하여 유가 철학의 본체 관념을 수립하였습니다.

주돈이(周敦)의 태극도설은 태극·음양·오행(五行)·만물의 순서로 본체우주론을 세웠고, 소옹(邵雍)의 태극경세서는 태극(太極)·음양(陰陽)·사상(四象),·팔괘(八卦)의 순서로 태극일기의 운화(運化)를 해명하였으며, 장재(張載)의 태극론은 태허(太虛)·음양의 기(氣)로써 유무혼일지상(有無混一之常)을 주장하였습니다.

1) 한국 국기 태극기 기원

한국에서 국기 제정이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876년(고종 13년 1월)이었습니다. 윤요호 사건을 계기로 한ㆍ일(韓日)간에 강화도 조약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 측은 '윤요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을 가하였느냐?'라며 트집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조정의 대신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 지조차 몰라서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비로소 조정에서는 국기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 8월9일 특명전권대사겸 수신사인 박영효와 그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 당장 게양할 국기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이어 이미 조정에서 구상되고 논의되어 어느 정도 찬성을 본 국기의 디자인을 다소 수정한 태극(太極) 사괘(師卦)의 기를 국기로 게양할 것에 의견을 모아 박영효가 타고 간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에서 이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 메이지 마루에는 후일 개화당의 주역이었던 서광범, 김옥균등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 고베에 도착하여 니시무라야에 숙소를 정하고, 이 건물 옥상에다가 배안에서 만든 태극(太極) 사괘가 그려진 기를 게양하였으니,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뒤 1883년 1월(음력),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太極) 도형과 사괘(師卦)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ㆍ반포 하였습니다.

2)태극기의 담긴 뜻

한국 국기인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太極)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이 사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태극기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파랑)과 양(陽)(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陰陽)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네 모서리의 사괘(師卦)는 음(陰)과 양(陽)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 가운데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달을, 이괘(離卦)는 해를 각각 상징합니다..  이들 사괘(師卦)는 태극(太極)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太極)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한민족의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 국가 의 국기에는 십자가. 별 등 기독교적인 이상이 국기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태극기에 담긴 이러한 정신과 뜻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5, 주역(周易)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주역(周易)은 원래 점술서 이였으나, 공자가 여기에 심오한 원리를 붙여 십익이 첨부된 이래 철학(哲學)과 수양을 위한 책으로 기울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역술(曆術)인들이 철학관 간판을 내걸고 역술을 보는 것도 미신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미명하에 작명, 택일, 궁합, 사주를 점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역(周易)이 철학이란 미혹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고대 동양 사회에서 점복서(占卜筮)가 공자 이후 유교적인 수양서로 발전했습니다. 주역은 점서(占筮)입니다. 점서에서 서(筮)란 시를 헤아려 괘(掛)를 구하고 신명(神明)에 응대하며, 미래에 있을 일의 길흉(吉凶)득실을 미리 아는 도(道)로서, 역(易)의 시원적(始原的) 의의는 주로 이 점서(占筮)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설괘전 첫머리에“옛날 성인이 역(易)을 만듦에 있어 천지신명의 활동을 깊이 탐구하여 이를 창조한다는 의도 아래 시를 써 괘를 세우는 점서(占筮)의 법을 시작했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계상전에서도 “이에 시라는 것을 만들어 사람이 그 행동을 일으킴에 앞서 미래의 길흉을 미리 알게 했다”라고 했으니, 주역은 점서(占筮)임을 알 수있는 부분입니다.

사실 요즈음에는 대학가에까지 신년초가 되면 토정비결(土亭秘訣)이 등장하고 대학가의 카페에서 역술인들이 주역(周易)으로 점(占)을 치는 곳에 젊은이들이 진을 치는 실정입니다. 성도들이 생활하는 곳곳에 우상과 미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역술인과 무속(巫俗)인 들이 유명인사가 되고 지성인들의 호응을 받는 사회 분위기에 성도들은 사리 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혼미한 가운데 이 세속(世俗)풍속에 젖어가고 있습니다.

박종남님! 주역(周易)을 동양사상적 철학이라고 하지만 점복(占卜)서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국 국기인 태극기가 태극(太極)사상인 음양오행(陰陽五行)사상을 근원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한국의 국교가 유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유교적인 사상이 국기에 담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국기는 어느 국가나 민족적인 정신이 상징성으로 국기에 담겨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앞서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국기에 십자가, 별 등 기독교사상을 담겨져 있다고 말씀 했습니다.

박종남님! 한국의 국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한국이 국교가 정해진 것이 없고 혁명적인 사건이 없이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국기에 대한 경례문제는 롬13;1-7절에 사도바울이 권세에 대해 존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왕명으로 국가의 상징으로 만든 국기이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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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사진 본인 사진입니다.

‘인연(因緣)'이란 단어도 불교의 윤회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요, 우리 기독교에서는 '인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거든요 그럼에도, 많은 성도, 심지어는 목회자와 사모님들조차 글을 쓸 때 인연이란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목사님께서 한 번 정리해 보아주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1. 인연(因緣)의 어원

인연은 인도 범어 (hcnpratyaya)의 번역어로서 결과를 낳는 내적인 직접 원인이 되는 '인(因 hctu)'과 주변에서 이를 돕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는 ‘연(緣 pratyaya)’을 말하고 있으며, 한자로는 인연(因緣)이란 인할 “인(因)”과 인연인 “연(緣)”으로서 뜻은 “인하다, 말미암다, 의지하다, 쌓이다. 인하다. 연분, 등의 어원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연은 인(因)과 연(緣)의 복합어 있고, 사전적 어원을 찾아보면 “사물들의 사이에 서로 맺어지는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불분하고 인연(因緣)은 불교의 교리에서 나온 용어라는 사실입니다.

불교 창시자는 경전에 이르기를 ‘인(因)과 연(緣)을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나(佛性)를 보리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인연(因緣)의 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불교는 모든 존재의 현상 세계는 인연(因緣)이 모여 있을 때 존재하고, 인연(因緣)이 흩어지면 없어지기 때문에 현상세계를 바다위의 파도처럼 부질없는 것이요, 덧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연에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여 흩어지면 없어지기 때문에 나와 세상은 실아(自我)도 실상(無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없어지는 무상(無常)세계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실상(實狀) 있는 세계를 믿는 종교요, 나의 실존이 없는 무아(無我)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생이 있는 자아(自我)를 믿는 종교라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입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치는 인연(因緣)을 맺어지기 위해서는 전생에서 500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겁(劫)의 한자적 의미는 오랜 시간이며, 화엄경에서는 1겁이 4억3천2백만 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오늘의 형편은, 과거에 지은 인연(因緣)으로 인한 것이요, 미래의 모습은 오늘 내가 택하는 인연(因緣)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아무생각 없이 쓰는 인연(因緣)이 불교의 모든 교리 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2. 인연(因緣)의 의미

불교의 문화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 어느 종교에 관계없이 한국인은 “또 인연(因緣)이 있으면 만나겠지요,”, “우리가 만난 것도 다 전생에 인연(因緣)이지요.”라고 아무생각 없이 말들 합니다. 즉 모든 만남을 인연(因緣)으로 돌리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인연(因緣)의 의미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처의 깨달음을 요약하여 설명한다면 연기(緣起)와 중도(中道)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연기(緣起)란 불교의 세계관으로서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한 내용이 십이연기(十二緣起)론으로서 인간의 괴로운 생존이 열두 가지 요소의 순차적인 상관관계에 의한 것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즉 무지(無知)한 무명(無明)을 근본 원인으로 하여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가 순차적으로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불교의 인간론으로서 윤회의 과정을 십이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기회가 되면 불교(佛敎)의 인간론 90분 강의안 기고하겠습니다.

중도(中道)란 불교에서 거문고 줄을 끊어지지 않게 매고, 튕김 소리가 적당하게 나도록 매는 것을 뜻합니다. 줄을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안 나고 너무 단단히 매면 줄이 끊어지는 것과 같이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道).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밝힌 수행의 길로서 불교에서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한국인들은 “당신과 나는 전생에 인연(因緣)이 있었나 봅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때 인연이란 전생에 내가 당신에게 했던 일과 나에게 했던 일을 의미합니다. 즉 당신과 나는 전생에 어떤 관계를 맺는 일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깨달았다는 연기(緣起)사상입니다. 즉 연기사상은 인연(因緣)사상과 동일하게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석가는 연기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법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연기법은 불교가 이 세상의 현상 세계의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교리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창조론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누구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된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연기법 즉,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따라 <생기고>,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연을 일으키는 것이 있는 데, 불교에서는 업(業), 번뇌(煩惱)라고 말합니다. 업은 인간의 마음의 작용이 근본이라고 불교에서는 봅니다. 즉, 인간은 마음의 작용에 따라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업(業), 업보(業報), 업장(業障)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업(業)이 현상세계를 만든다는 연기법은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구원론 핵심은 심심불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불(佛)이 있으며 해탈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성철 종정스님은 초파일 법문(法問)에서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라고 말씀도 심심불사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요(렘17:9)”,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롬8:4-7)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인간론의 차이점이라고 생각됩니다.

3.인연(因緣)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한국 대부분의 문화가 불교적(佛敎的)인 정서가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생활을 불교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활 속에서 흔히 쓰고 있는 말들 중에 불교의 사상이나 교리가 담겨져 있는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인연(因緣)이란 말도 그 하나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인연(因緣)은 우연(偶然)이 없어 보이지요, 인연이 있으면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가 봅니다”라고 말들 합니다.

교회생활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떨쳐 버리는 것은 생활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고, 건강한 기독교문화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교회 단합을 강조 하고자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因緣)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교회에서 이 만남의 인연(因緣)은 우연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서 만남의 인연(因緣)입니다.”라고 한 인사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인연(因緣)이란 말을 단순하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인연(因緣)이란 글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불교(佛敎)의 기본 틀이 되는 교리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신앙 단합대회에서 사회를 인도하시는 장로님께서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의 만남입니다.”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불교(佛敎)권 선교(宣敎)에 전념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교회가 기고자에게 원하는 것은 불교는 “마귀(魔鬼)의 종교요”, “우상(偶像)의 종교요” 라는 것과 한국불교와 승려들의 타락된 모습을 폭로(暴露)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도들의 귀는 즐거울 수 있을지라도 혹 불자들이 왔었다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사생활이 기독교(基督敎) 교리가 될 수 없듯이, 승려의 사생활이 불교(佛敎)의 교리는 될 수가 없다고 기고자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직선적이고 비판적인 전도방법보다는 논리적(論理的)이고 이론적(理論的)인 교리를 비교론적인 전도(磚道)방법이 효과적(效果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 교리를 많이 알았으면 합니다.

한국 교회는 불교와의 만남이 불가피합니다. 이제는 불자들이 성도 집을 찾아와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포교하는 시대 속에서 야기될 수 있는 종교 간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이를 극복(종교 분쟁 없이)하고, 상호이해 속에서 전도는 절대 절명의 과제입니다.

불교의 사상에 이해가 있으면 전도대상자인 불자가 소승불교(小乘佛敎)를 믿는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믿는지, 무속불교(巫俗佛敎)를 믿는지, 보살계를 받은 불자가 인가를 아는 것이 불교권 전도전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지역의 사찰 수나 불자들이 사찰에서 드리는 예불의 의식을 아는 것도 전도에 많은 도움이 것입니다. 즉 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자들과 대화가 되면 그들이 적대시 하지 않음으로써,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기고 글을 통해서 불교(佛敎)권 선교적인 전략 차원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인연(因緣)이란 주제 범위를 조금 넘은 점 이해를 바랍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뛰어난 인재들이 하는 학문이 신학(神學, Theology)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신학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당혹하게 만든 폭탄이 터졌으니 이른바 ‘길가메시 서사시’(敍事詩; Epic of Gilgamesh)라는 것이다. 이 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로 수메르 남부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Gilgam)를 노래한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보다 1,500년 가량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주에 언급한 홍산문명(紅山文明)이 발굴되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중 가장 그 기원이 오래된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었다. 이곳에서 인류 최초로 수메르 문명이 꽃을 피웠고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설형문자들을 발견하고 판독해 가면서 비로소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이 수메르 문명을 창건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동이족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지금 여러 학자들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동일한 유물이 몽골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의 기록과 연대는 아브라함 시대 보다 수세기 앞서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인간 세상에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까지 올라가며 이로써 성서고고학이 독점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만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인류최초의 문명 발상지가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여겼고, 에덴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오던 터에 수메르 유적(지금의 이라크에 위치함)의 발견은 그야말로 전세계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뒤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수메르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을 판독해나가는 과정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이야기, 에덴동산 이야기, 노아홍수 이야기, 욥기, 아가서 그리고 바벨탑 사건 등등 수많은 내용들이 수메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지자 성서학자들은 충격과 참담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노아라는 이름은 지아슈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수메르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이며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보다도 무려 1,000년 전의 문명이라는 데에 성경고고학자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이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직조기술의 발달로 옷을 물들여 입으며 멋을 내고 다닐 때 히브리인은 문자는커녕 동물가죽을 벗겨서 입고 다니는 야만적인 삶을 산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으니 바로 도자기를 구워 그 시설을 한 것이다. 전 세계인들이 읽고 있는 성경이 수메르 문자의 판독으로 이제 한낮 휴지조각에 처해지게 된 것에 성서학자들은 참담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BCE 3,300년경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수메르 문명이 태동되었다. 수메르 문명은 현 서양문명의 뿌리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계승되었다. 130년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문자, 법률, 학교,의회제도 등 수메르 문명을 창조한 고대 수메르 민족은 메소포타미아의 원주민이 아닌 동방에서 온 이주민이었으며 우리 한민족과 혈통이나 언어, 문화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수메르 신 이난나와 우르지역 신 이난나

수메르인들의 창세신화를 보면 자신들이 머리 뒷부분이 평평한 검은머리의 인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수메르어는 우리말 ‘은,는,이,가' 처럼 토씨를 사용하는 교착어이며 모음조화현상과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어순 등 동일한 문법체계를 가졌다. 수메르인들이 남긴 점토판의 설형문자(쐐기문자)는 서양의 최초 문자로 알려져 있다. 고든박사는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고유한 문자인 설형문자를 가지고 왔다‘고 했으며 일본학자 우에노 등은 수메르가 사용했던 설형문자는 복희씨가 창제했다는 팔괘부호와 흡사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수메르인들은 60진법(중국과 우리나라의 60갑자 역시 60진법이다)과 태음력을 사용했으며 결혼 전에 함을 지는 풍습까지도 우리와 비슷하다. ‘수메르인들이 동방에서 왔다’는 크래머의 주장과 중앙아시아에서 왔다고 한 번즈의 주장은 수메르의 원고향이 환국의 천산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준다.

환국은 우리 동이족이 세운 고대의 환국(桓國)으로서 광명사상(光明思想)속에서 탄생한 동서양 인류의 원고향이다. 중앙아시아 동쪽에서 태동한 환국문명은 사방으로 뻗어 동서 4대 문명권을 형성하였다. 수메르인들은 동방의 종주국을 ‘하늘나라’로 말하고 자기들의 하늘 산(天山, 천산)을 넘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동방의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을 아버지라 불렀고 선생은 제자를 아들이라고 했다. 이는 우리의 삼신문화에 뿌리를 둔 군사부일체,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똑같이 받드는 문화의식의 표출로서 서양의 도덕주의나 윤리의식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이 방면에 문외한이고 아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글을 발표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운 것이다. 다만 인류의 시원과 상고사의 관심을 가지고 약간의 책을 읽은 정도이다.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의 일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상상을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몽골체험기 6회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유난히 신(神)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단어들이 많은 민족이다. 나라를 열었다(창업이 아니다)는 개천(開川) 사상으로 시작해서 하늘에 제사를 드린다의 제천(祭天),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의 천훈(天訓) 혹은 신훈(神訓) 등등의 어휘는 우리 조상들의 신관(神觀)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조상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노아의 홍수 이후 그의 자손들은 전 세계로 흩어지는데 그중의 한 무리가 시베리아의 동편 산악지대에서 거주했다는 말이 있다. (창세기 10장 30-32) 노아의 홍수 이후 비로소 세계는 나누어진 것이다. 그러면 시베리아의 동편 산악지대가 어느 곳을 말하겠는가. 바로 오늘날의 시베리아인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부터 만주 벌판과 백두산 일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노아의 후손 중 어느 분이 동편으로 이주를 하셨는가? 창세기 10장을 보면 욕단이라는 어른이신데 이 분은 노아의 장남인 셈의 고손자가 되신다. 이 분은 노아의 홍수를 비롯한 모든 사건들을 겪은 조상들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믿음과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중에 동편으로 이주를 한 것이다. 이 욕단 할아버지가 바로 단군 할아버지라고 가정을 한다면 우리의 상고사의 비밀이 쉽게 풀리는 것이다. 이 어르신이 그의 신학과 신앙을 근거로 나라를 열었으니 바로 개천이요 개국이요 천훈이요 신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고조선의 8조 금법이 출애급기의 십계명과 똑같은 이유를 누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는 욕단이 단군이라고 가정할 때만 가능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단군은 동이족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멀리 팔레스틴에서 아라랏산을 넘고 파미르 고원을 넘고 천산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통과하여 동방의 시베리아로 먼 여정을 이동하려면 상당한 베짱과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며 지혜가 있고 명철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대장정인 것이다. 하여 이들이 홍산문명이라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문명을 이룩했으며 그 후 그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메르 문명을 이룩한 것으로 해석을 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그래서 수메르 문명에서 발견된 길가메시의 서사시에 나오는 성경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조상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남겨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더 이상 놀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뉴욕한굴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출처:아멘넷, 글/신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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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트, 바벨탑

지구라트, 바벨탑

http://blog.naver.com/bss2079/60012499617

 


이란 초가잔빌 유적지 전경

 


초가잔빌 지구라트의 원래 모습

 


남쪽 정문

 


남서쪽 문과 제단

 


북동쪽

 


서쪽

 


동쪽 묘지

 

지구라트 해시계                http://tong.nate.com/travel


지구라트 쐐기문자, 엘람어


지구라트 지성소

 

 

초가잔빌 [Tchogha Zanbil]


이란 후제스탄주에 있는 고대도시 유적지로 BC 13세기 중반 엘람 왕국의 왕  운타시 갈(Untash Gal:BC 1250경 재위) 건설한 도시이다. 수도인 수사 남쪽에 있으며 당시에는 '두르운타시'라고 불렸다. 수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신 인슈시나크를 모신 성소로서 엘람 왕족의 묘지가 있는 성도이다. BC 640년 무렵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수사와 함께 파괴되었으나 1935년 유전탐사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도시는 2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총길이는 약 4km이고 안쪽에는 내벽이 둘러쳐져 있다. 내벽 안쪽은 가로 470m, 세로 380m, 면적 약 18ha로서 성역으로 여겨졌다. 이곳에는 성탑  지구라트, 신전, 안뜰, 무기와 장식품을 보관하는 창고 등이 세워져 있었다. 지구라트 북서쪽 벽으로 둘러싸인 사각 모양의 공간에는 남신 이슈니칼랍·나피리샤와 여신 키리리샤를 모신 3개의 신전이 있다. 각 신전에는 안뜰 지성소·공물보관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기단은 불에 구워 만든 벽돌, 건물 위쪽은 햇볕에 말린 어도비 벽돌로 지었으며 벽에는 엘람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유적 중앙에 있는 지구라트는 서아시아 최고의 규모로서 현재 높이 28m이다. 초가잔빌은 원래 5층이였으나 현재 3층까지만 남아있으며 원래 높이는 60미터로 추정되나 현재는 25미터이다. 밑면은 한 변의 길이가 102미터인 정사각형 모양이다. 4모퉁이가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1935년 앵글로 이란 석유회사가 지역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고대 이란땅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산을 신성시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산이 없어서 산의 형상을 만든 것이 이 초가잔빌의 지구랏트로 알려져 있다.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지구라트


BC 3000년대 전반 이전의 기단이 있는 신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우르(Ur) 제3왕조의 수립자인 우르남무(Ur―Nammu)의 지구라트에서 기본적인 형을 거의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르남무는 우르·우르크·니푸르(Nippur)·에리두에 지구라트를 세웠는데 이 중 유명한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시대(BC 1365∼BC 609), 북메소포타미아의 각 도시에 조영(造營)된 지구라트에는 계단 대신에 경사로(傾斜路)가 설치되었다. 6개의 신전에 부속되어 있는 코르사바드의 지구라트는 4층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는 7층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엘람에서도 초가잔빌에 BC 13세기에 5층의 기단이 있는 인슈시나크신(神)의 지구라트가 건조되었다. 이와 같은 지구라트를 축조할 때에는 속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겉마무리 쌓기에는 구운 벽돌을 쓰고, 역청(瀝靑) 등을 모르타르로 사용하였다. 또한 표면의 채색은 채유(彩釉) 벽돌로 하였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다



우르의 지구라트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이라크의 지구라트>

 

Assur의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ASSUR

 

Assur

 

Assur  

 

Assur 지구라트 서쪽


Nimrud의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NIMRUD

 
이라크 니므롯의 지구라트(대탑)


이라크에 있는 많은 지구라트 중 하나의 모습이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이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작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합니다. 그 신전중에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 인데 그 당시에도 이미 지그라트는 오래된 탑이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고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된다. 수천년전에 만들어진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인 '마르둑(Marduk)'이라고 쓰여 있다


Uruk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URUKl

 

Uruk 지구라트


Aqarquf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AQARQUFl

 

Borsippa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BORSIPPA

 

Borsippa 지구라트    


Eridu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ERIDU

 

Kish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KISH

 

Kish 지구라트


6층에 바알신의 지성소가 있었다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며 8천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다. 나보포라싸왕은 ‘마르둑신이 나에게 에테메난키(바벨탑)의 기초를 지구 중심까지 닿도록 단단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래야만 하늘까지 오를 수 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Tower of Babel (바벨탑)


바벨탑의 기사는, 창 11:1-9에 보여지는데, 홍수 후의 인간의 문명의 하나의 도달점이 여기서 간결한 기사에 의해 훌륭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두 가지의 물음에 대한답이 보여져 있기도 하다. 제1은, 어찌하여 지상의 민족은 종류가 다른 말을 쓰고 있는가, 제2는, 어찌하여 고대 바빌로니아의 주민은 오늘날도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구운 벽돌의 탑(塔) 지구라트(Ziggurat)를 세웠는가의 물음인데, 이 물음과 답에서 성서기자는 심원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탑은, 인간이 자기의 위대함과 하나님 없이 인간의 일치를만들 수가 있다는 인간의 세속적 야심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에 심판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어떤 폭력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다만 언어를 혼란케 하시는 방법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호 이해의 수단을 잃고, 각자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 오순절의 일은, 이 바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판의 역(逆)이었다(행 2:1-11). 여기서는 하나의 말이, 많은 언어를 달리하는 사람에게 모국어로 말하듯이 이해되었다. 바벨에서는 하나의 언어가 말해졌지만, 형제는 서로 이해치 못했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많은 다른 언어의 사람들이 서로형제처럼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하나에서 여럿으로]가 바벨의 분열의 비극이고,[여럿에서 하나로]가 오순절의 축복이다. 성령에 의한 참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목적이시다(창10장과 행2장에 여러민족의 列記가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하다).바벨탑의 기원은 바빌로니아의 도시국가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지구라트(Ziggurat)이다. 이것은 피라미트 형(形)의 높은 탑으로서 보통은 7층루(七層樓)로 되어 있으며, 신원(神苑)의 중앙에세워졌는데, 정상에는 신전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제의가 행해졌다. 7층루는 일곱 가지 색으로 칠해지고, 5개의 유성과 태양, 태음, 또는 그것에 상당하는 신신의 상징으로 다음과 같은관계였다.


제1층 토성(土星)ㆍㆍㆍㆍ니니브(Ninib)ㆍㆍㆍㆍ흑색(黑色)

제2층 목성(木星)ㆍㆍㆍㆍ(마르두크Marduk)ㆍㆍ등황색(橙黃色)

제3층 화성(火星)ㆍㆍㆍㆍ네르갈(Nergal)ㆍㆍㆍ심홍색(深紅色)

제4층 태양(太陽)ㆍㆍㆍㆍ샤마슈(Samas)ㆍㆍㆍ황금색(黃金色)

제5층 금성(金星)ㆍㆍㆍㆍ이슈타르神(Istar)담황색(淡黃色)

제6층 수성(水星)ㆍㆍㆍㆍ느보神(Nebo)ㆍㆍㆍㆍ남색(藍色)

제7층 태음(太陰)ㆍㆍㆍㆍ신神(Sin)ㆍㆍㆍㆍ백은색(白銀色)


바벨론에 있어서의 발굴의 결과, 바벨탑은 마르두크의 신전(神殿) 에사길라(Esagila=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의 북방 에테메난키(Etemenanki=하늘과 땅의 기초의 집)라고 불리우는 지구라트로 동정된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인데, 결국 셈족의 침입에 의한 정치적 변동 때문에 준공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 미완성인 탑의 거대한 유물은 오랫동안 고대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되었다.산헤립(Sennacherib 전 704-681)이 바벨론을 점령한 때 이 유물을 제거하려 했으나 성공치못했다. 에살핫돈(Esarhaddon 전 680-669),앗슈르바니팔(Asshurbanipal 전 668-631)등도 이재축(再築)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나보폴랏살(Nabopolassar 전 626-605)도공사를 계속했으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그 완성은 겨우 느브갓네살 2세(Nebuchadnezzar Ⅱ 전 605-562)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의 비분에는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탑의 지계(地階)는 91.4㎡이고, 높이 36.5, 제2층의 주변은 지계(地階)보다 좁고, 높이는 20m, 제3층에서 6층까지는 각 층 모두 높이 6.4m, 그 주변은 층을 거듭함에 따라 좁아지고, 제7층 즉 최상탑은 높이 17m, 그 가운데 신전이 세워져 있으며 탑 전체의 높이는98.5m에 미치고 있었다. 바벨론 멸망후 이 폐허는 주변 주민의 흙벽돌 절취장(切取場)으로 되어버렸다. 옛 탑의 기초였던 부근은 현재 불과 91.5㎡의 구덩이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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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라함 링컨의 어록
      1.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해지려고 결심한 만큼 행해질 수 있다. 2.내가 성공했다면 오직 천사와 같은 어머니의 덕이다. 3.어머니의 눈물은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진한 애정이 담겨 있다. 4.나는 계속 배우면서 나를 갖추어 나간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5.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책을 한 권 선물하는 사람이다. 6.나는 영의 식탁에 나가기 전에 육의 식탁에 나간 적이 없다. 7.정직과 지식은 나의 보배요 재산이다. 8.거짓이 잠깐은 통할 수 있지만 영원히 통할 수는 없다. 9.만나는 사람마다 교육의 기회로 삼아라. 10.타인의 나쁜 점을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상대의 좋은 점을 말하라. 그리하면 자신도 남도 이롭게 되리라. 11.술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암으로 사회를 파기하기 위해 벼르고 있 다. 12나같이 밤낮으로 긴장하는 사람이 만일 웃은 일도 없었다면 벌써 죽었으리라. 13.길이 약간 미끄럽기는 해도 아주 낭떠러지는 아니야!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 14.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나쁜 감정을 해소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15.꽃이 자라는 곳에는 언제나 잡초가 난다. 나는 잡초를 뽑고, 꽃을 가꾸는 사람이고 싶다. 16.신앙은 옳은 것을 만드는 힘이다. 17.나는 내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른다. 그보다는 구분의 손자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가에 더 마음을 쓴다. 18.불행한 사람의 특징은 그것이 불행인 줄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불행과 행복의 두 갈래 길이 항상 놓여앴다. 우리는 매일 두 길 중에 한 길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19.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결심한 사람일수록 사사로운 언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사사로운 일들은 크게 양보하라. 14.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이 더 좋아졌음을 보는 일이다. 15.내가 싸워야 함은 승리가 아니라 진리를 지키기 위함이다. 16.나는 어려울 때마다 무릎 꿇고 기도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가 알지 못했던 지혜가 떠오른다. 17.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속이려 하고 감추려 해도 반드시 드러납니다. 18.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노예를 부리는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19.남의 자유를 부인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자유도 누릴 자격이 없다. 20.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 21.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당신의 친구롤 만드는 것이다. 22.만약 누군가를 설득하려 한다면 먼저 당신이 그의 진실한 친구라는 것을 알게 하라. 거기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 방울의 꿀이 있다. 23.누구든지 의로울 때 나는 그의 편에 서고 누구든지 불의할 때 나는 그를 떠나리라. 24.내 지혜, 내 능력, 내 노력만 가지고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한다. 25.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다. 26.미국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에이브러햄 링컨보다 더 하나님의 기준을 완벽하게 만족시킨 사람은 없다. - 존 웨슬리 힐 박사- 27.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28.나는 최후까지 경주를 했다는 것이 즐겁다. 29.한 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혐해 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 30.여러 사람을 일시에 속일 수 있고 또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다. 31.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업마다 조용한 동반자이시다. - 전광 저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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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는 1876년 이웅찬,이성하,김진기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이 되었던 백홍준이 의주방면으로 성경을 숨기고 잠입한 것과 전회에 기술된 서상륜이 1883년 100권의 성서를 지니고 조선으로 잠입한 것이 최초로 기록된듯하나 사실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그보다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며 그 현장은 서해 백령도이다.

중국측에서 튀어나온 산동 반도로 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백령도는 그 거리가 불과 오백 리 (200 Km) 미만에 위치하여 과거로 부터 중국을 통한 서역의 문물과 선교의 물결이 쉽게 다다른 곳이었다.

(1) 선교사의 행적
 
기록상의 최초 인물은 1816년 9월에 백령도에 도착했으며 " 조선 서해 탐사기"를 기록한 리라호 함장인 바실 홀과 이ㅤㄸㅒㅤ 동행했던 영국 해군 대위 클리포드이다. 클리포드는 후에 해군 선교회를 만들기도 했던 독실한 신자였으며 이ㅤㄸㅒㅤ 그는 선물과 성경 , 전도 용지등을 수레에 끌고 다니며 기회를 엿보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영국 함대가 다녀간후 16년후인 1832년 이번에는 영국 런던 선교회 파송 선교사의 신분인 귀출라프가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의 발을 한국에 내딛게 된다. 다만 당시 그의 신분이 정식 선교사의 신분이 아닌 통역겸 선의로 승선했으며 성경등 전도 문서와 작은 선물을 배에 싣고 왔다.

승선했던 암허스트호가 해무에 갇혀 다다른 곳은 후에 남한 최초의 교회인 중화동 교회가 세워진 중화동 포구였다. 당시 쇄국 정책의 영향으로 외국 선박을 꺼려하는 분위기였으나 해무에 밀려온 덕에 해안 언덕의 집에서 주민에게 식사 대접을 받았고 필담을 통해 대화가 오가던중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항해일지에 기재된 그의 기록 " 이 방문이 무익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 을 통해 당시 그의 심정을 엿볼수 있다.

이어서  남행을 게속한 귀출라프 일행은 충남 보령 근방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에게 성경과 전도문서, 의약품들을 나누어 주었다. 지방 관리를 통해 통상 여부를 문의했으나 거절을 당하자 그의 일행은 8월경에 그곳을 떠나 중국 마카오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조선의 땅을 바라보며 귀출라프는 갑판에 무릎을 끓고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나의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반드시 열매맺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저는 이것을 믿었던고로 영광에 찬 십자가의 도를 저들에게 전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이미 성경을 받았으니 저들을 통하여 복음이 조선의 온땅에 퍼져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도록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만을 기도할 따름입니다."
 
귀출라프 선교사가 다녀간 후에 약 33년이 지나서야 개신교 선교사가 다시 서해로 접근해 온다.
당시 조선의 강력한 쇄국 정책의 위험을 무릎쓰고 서해를 건너온 사람은 토마스 선교사였다.
 
1840년 9월7일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런던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부임하였다. 1866년 한국선교를 희망하여 내한 1865년에 서북해안을 찾아와 백령도를 비롯 황해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했다. 이듬해 토마스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1866.9.2. 평양 대동강 양각도에서 순교했다. 토마스는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와 순교당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그를 처형한 박춘권은 1899년 세례를 받아 영수가 되는 이적을 낳았다.  


▲토마스 목사의 대동강변 순교장면,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그림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에 대한 소식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고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조선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인물이 있으니 로스선교사이다. 그는 1876년 쇄국 정책으로  인해 접근이 어려운 조선 입국보다는 당시 중국으로의 사신들이 머무는 고려문을 통해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조선인이 의주 출신의 청년 이응찬이며 로스의 한국어 선생이 되어 다음해 조선 선교를 위한 " 한국어 입문서'를 발간하게 된다.

이어서 이응찬과 고향 친구들인 백홍준,이성하,김진기들의 도움으로 1878년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이 번역된다. 로스가 본국으로 간사이 후임 선교사인 매킨 타이어가 1879년  백홍준과 이응찬등  4명의 조선인에게 처음으로 세레를 베풀었으며 계속되는 젊은이들의 활동으로 조선으로의 간접 선교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들에 의해 전회에 기술된 소래교회와 의주교회가 세워진다.  
 
(2) 내국인의 행적
 
한편 전술한 바와 같이 일찍부터 복음의 씨가 떨어진 백령도에 이를 잘 경작하여  열매를 맺게한 이가 있으니 그는 허득공이다. 조선말 정조(22대) 이후 어린 임금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정권은 외척의 손에 전단되었고 정치는 혼탁해졌다.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민심이 동요되고 이에 동학란이 야기되며 이 세력은 걷잡을수 없이 퍼져나갔다. 1886년 동학의 세력이 황해도까지 이르자 조정은 각 지역의 토호들에게 관직을 주어 왕조편에 서게 만든다. 바로 이때 백령도에서는 허득공이 당상관의 관직을 받게되며 1894년 황해도에 번진 동학란을 대항키위해 장연군 관아에 이르게 된다.

허득공은 이때 전란의 와중에서 동학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동학도들을 굴복시키고 후에는 패전당하여 쫓기는 동학도들을 보호하고 돌보아주며 끝내는 기도교로 개종시킨 당시 소래교회의 매켄지 선교사와 소래교회에 깊은  인상을 갖게된다. 동학군의 토벌후 백령도로 돌아온 허득공의 마음에 심겨진 기독교가 싹트는 기회가 왔으니 1897년이었다.

당시 조정은 을미사변후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고 고종은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라 칭했으나 어수선한 상태였다. 이ㅤㄸㅒㅤ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가 체포된  김성진 , 황학성 , 장지영등이 백령도로 유배되어 오게된다. 이들중 김성진은 소과에 급제한 진사의 선비로서 유배오기전 감리교 신자였던 조카에게 받은 성경책을 갖고 있어서 허득공과 성경에 대한 토론을 나누며 백령도에 교회를 세울 의견을 주고 받기에 이른다.

1898년 6월 조정에서는 북 장로회 소속의 선교사 소안륜( W.L.Swallen ) 에게 호조(여행증) 을 발행해주며 선교의 해금이 이루어 졌음을 공식화했다. 이에 허득공과 김성진은 백령도민을 한자리에 모으고 예수를 믿을 것을 권유하고 의중을 묻는 회의를 하기에 이른다. 이는 평소에 도민 전체가 허득공을 존경하고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학란을 통한 어수선한 시국에 아직 예수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 누구나 그를 믿고 따르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허득공의 연설을 듣고 박수로 화답하며 호응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허득공은 장연군 소래교회로 가서 서경조장로를 만났고 1898년 10월 몇몇 집사들과 김씨 여전도사와 서장로가 백령도를 방문해 10월 9일 한학서당에서 역사적인 중화동 교회 창립에배를 드릴수 있었으며 이는 현재 남한 지역에서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것을 생업으로 하던 주민들에게 필수였던 당산제를 비록 모든 미신행위를 없이하느라 숫한 고초를 겪었고 이를 통해 교회는 성장했으며 허득공은 다시 서경조장로에게 의논을 하여 소래교회의 도움으로 교회당을 신축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1900년 11월 8일에는  언더우드 목사내외가 이곳을 방문하여 성례식을 베풀고 학습과 세례문답을 통해 허득,허간,허륜, 허근,허권,최영우,김홍보등 7 인이 세례를 받게된다.




 
교회를 설립후 수년이 지난 1902년 6월에 허득공은 천수를 다하며 운명하는 순간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유언을 남긴다. " 예수를 잘 믿어라. "
 
공의 유언은  그대로 이루어져 현재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이 백령도가 속해있는 옹진군으로서 35.5 %에 이르른다. 백령면의 경우에는 무려 65%이르며 10여개의 민간교회와 2개의 군부대 교회가 있다.
 
한편 공의 후손중에는 후에 중화동 교회를 담임한 허간 목사와 63년동안 전도사와 목사로 10개 교회를 개척하고 성전 건축을 이룩한 허응숙목사가 있다. 현재 뉴욕에는 퀸즈장로교회를 출석하는 후손들이 있으며 허태형장로(4대) 허경화장로(5대) 허강집사(6대) 허남원(7대)에 이르는 후손들이 믿음의 선친의 유언을 기리며 한교회에서 4대가 어우르는 귀한 믿음의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예수를 잘 믿어라 "


 출처: 아멘넷,
 글/누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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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에만 무려 1천 3백만명이 넘는 임사체험자가 있었다고 한다.  잠시동안 육체의 기능이 정지되어, 의학적으로 죽었거나,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알수 있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임사체험의 일반적인 유형은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1.육체를 빠져나와 허공에 뜨는 기분이다.
 
  육체를 이탈한 영혼이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 보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말을 들을 수 있다.
 
 
2.어두운 터널을 통과한다.
 
  블랙 홀과도 같은 어두운 구멍 속을 통과해 간다. 바람 소리가 들리거나, 무엇이 분출되는듯한 "쉿" 하는
  소리가 강하게 들린다.
 
 
3.어둠 끝에 있는 빛에 접근하거나, 그 속으로 들어간다.
 
  온화하고 눈부시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빛이다. 사람, 동물, 식물, 숲으로 우거진 야외풍경, 심지어 그
  빛속에 도시들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4.다정한 목소리, 사람이나 어떤 존재의 영접을 받는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 아니면 평소 신봉하던 종교적인 인물이 그를 맞이한다. 정보나 메시
  지가 주어지기도 한다.
 
 
5.방금 떠난 인생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출생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혹은 그 역순으로 경우에 따라 영화를 보듯 아무 감정이입 없이 초연하게 지켜보
  기도 하고, 실제 자신이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인생이 한꺼번에 혹은 부분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인생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평가해 보고픈 느낌이
  나, 욕구가 들어서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배우지 않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존재들이 평가에 참여하거나 조언을 주기도 한다.
 
 
6.시간과 공간에 색다른 감각을 가진다.
 
  시간과 공간이 꿈 속의 기억처럼 느껴지며, 그것이 본래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논리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된다.
 
 
7.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예외없이 그곳에서 머무르기 전에 아직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거나, 조언을 듣는
  다.
 
 
8.다시 살아난 것에 실망한다.
 
  육체로 되돌아오는 과정이 불쾌하고 힘들게 느껴지고, 실망해 한다. 밝은 빛과 행복에 가득찬 영계로 돌아
  가고 싶어한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임사 체험자에게 100%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절반 정도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한 임사체험자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은 눈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었어요. 마치 태양을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거꾸로 선 것처럼 내 앞에 내 발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저 그 아름다운 빛 안에서 둥둥 떠돌아 다녔을 뿐, 터널같은 곳을 통과한 기억은 없어요. 그 빛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온화함과 사랑이 뿜어져 나왔지요.
 
그 빛 안에서 사람의 형상이 서 있었는데, 뚜렷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자 같았어요. 빛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같았어요. 빛이 내 주위를 둘러싸자 보호받고 안전하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빛속에 있던 사람이 정신력에 의한 텔레파시 같은 걸로 나에게 말을 하더군요. " 돌아가야 한다. 지금은 올 때가 아니다." 라고요.
 
너무나 기쁘고 평화스러워서 그곳에 그냥 남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목소리가 다시 나에게 말을 하더라고요. 아직은 나의 때가 아니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것을 마친 후 돌아오라고요."
 
 
임사체험자들이 공통적으로 보고하는 사항은, 빛을 보았을 때, 그 빛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사랑의 느낌을 받았다는 것 입니다.
 
그 사랑 안에는 완벽한 평화, 절대적인 수용, 그리고 神의 존재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치명적인 폐렴과의 투병 중 임사체험을 한 환자는 이렇게 자신의 임사체험을 말합니다.
 
"내 앞에 서 있는 나의 영혼을 보았어요. 나의 영혼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가벼워서 마음대로 움직였으며, 무릎을 덮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어요.
 
밝으면서 보드라운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군요. 영혼이 육체와 떨어져 있던 거리는 8피트 정도였어요. 참으로 이상했던 것은 나는 내 영혼을 볼 수 있었고, 내 영혼은 나의 죽은 육체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나는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며, 완전히 시들어버려 차갑고 생명없는 육체였습니다.
 
나의 영혼은 온화했으며, 마치 천국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천천히 멀어져 가던 내 영혼은 내 육체에 "안녕"이라는 작별 인사를 했어요.
 
영혼은 빛 속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지요. 그 빛은 둥근 구멍 같았는데, 따사롭고 밝았지요."
 
모든 임사체험이 이렇게 천국과 같은 밝은 경험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부 임사체험자들은 지옥과 같은 광경과 악령들에게 쫓기는 악몽과도 같은 임사체험을 하기도 했다고 보고가 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임사체험자들은 임사체험 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며, 육체를 초월한 영원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죽음 뒤에는 밝고 평화로운 천국과 같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P.M.H 에드워터 (에드워터는 1977년 3번에 걸친 임사체험 후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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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초기, 당시의 시장에 모여든 서민들. 누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할꼬?

2009년 9월 이라는 시점에서 아멘넷을 드나드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해준 그들에게도 누군가가 복음을 전달해 주었을 것이고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달된  뿌리를  찾아가는 귀한 여행을 같이 시작하기를 원한다.

1  한국 개신교의 요람인 소래 교회와 서상륜,서경조 형제

소래교회를 세운 장본인은 서상륜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장수를 하던 사람이었다. 순조롭게 매약행상을 하던 그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 것은 30세 되던 1878년이었다. 만주에서 인삼을 팔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열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소식을 듣고 고향친구 몇명이 달려와 그를 현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그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로스 선교사(John Ross)다. 또 그곳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매킨타이어 선교사(John MacIntyre)의 끈질긴 전도도 받게 된다.

당시 서상륜의 병세는 매우 위독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로스 선교사는 ’서상륜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그는 결국 병이 완치되면 예수를 믿기로 약속한다. 여러달 동안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로 완쾌되자, 그는 약속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그는 당장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현재 우리가 로스역(譯)성경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서상륜을 비롯한 여러 한국인 신자들의 힘이 합쳐져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1904년 국내에 입국한 와그너 선교사(Ellasue Wagner)도 로스역 성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로스 번역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서씨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지 않은가? 로스 목사가 어려운 한국어를 배워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가졌을 것 같지 않다. 합리적 결론은 ’로스 번역’은 이들 한국 청년들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1883년 그는 이렇게 완성된 성경 100권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조선왕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기독교가 인정된 것은 후에 의료선교사 알렌이 고종의 시의가 되고 나서부터다. 하지만 밀입국을 시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되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권만을 지닌채 탈출한 그는 가족의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의 본래 이름은 ’솔샘’이었다고 한다. 소나무와 샘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솔샘의 한문표기는 松泉(송천), 후에 일본인들에 의해 송천이 솔내(松川)가 되고, 다시 음운현상에 의해 ’소래’로 바뀐 것이다. 소래는 결코 번화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평화로우면서도 농사를 지을 물이 풍부해 곡식이 잘 열리는 풍요로운 고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래에 터전을 마련한 서상륜은 곧 만주의 로스에게 연락해 성경 6,000권을 선편(船便)으로 전해 받고, 마을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나섰다. 얼마 안있어 20명의 세례지망자가 생겼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들이 기도할 장소였다.

일반적으로 소래교회의 시작은 산간 구석에 세워진 초라한 초가집에서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리 관청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작은 마을이지만, 국금(國禁)에 속하는 기독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남의 눈을 피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세는 이미 바뀌어 버렸다. 기독교는 급속히 전파됐다. 고종은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알렌(H. N. Allen)은 고종이 기독교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조선 땅에 최초로 내한 한(1884년 4월 5일) 정식 선교사로 기록된다. 1896년 7월 25일에는 한국교회가 고종탄신 기념 경축예배를 드릴 정도였다.

이 무렵 소래교회의 교세는 신도가 약 80여명으로, 58세대가 사는 소래에서 50세대 정도가 기독교를 믿게된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더 큰 예배당이 필요했다. 이미 마을주민 90% 이상이 기독교인이 된 소래에서 이제 예배당 증축은 마을 전체의 문제였다. 마을 공동회가 모인 자리에서 교회건축 문제가 제기됐다. 마을 유지가 선산의 소나무를 베어 건축목재로 제공했으며, 마을 사람들도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헌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서상륜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그의 동생 서경조다. 서경조는 후에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중 한사람이 되는 인물이다.

소래교회 소식을 접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서상륜과 마을사람들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후에 소래 교인들이 교회의 역사를 남기고자 작성했던 대구면지(大救面誌)에 당시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무렵 언더우드 목사는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비 일부를 부담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서상륜 형제는 지극히 고마운 일이나 우리가 우리 교회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본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므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외국인이나 어느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힘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기록은 계속된다. 도움을 거절당한 언더우드는 돕고싶어도 돕지를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미국에서 큰 양등(洋燈)을 다섯개 사다가 교회에 기증하는 것’으로 달래야 했고, 소래 교인들은 ‘그가 기증한 양등을 남녀방에 각각 두 개씩 걸고, 한 개는 강대상 위에 두어 아주 밝은 등불 밑에서 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서 소래교회는 마침내 1895년 7월 8일, 8칸 기와집으로 거듭나게 됐으며, 그리고 약 1년뒤, 소래교회는 다시 16칸 32평으로 증축 상량했다.

즉 한국 민족은 선교사가 들어 오기 이전에 복음이 자생됐고 최초의 교회도 선교사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초가 마을.


▲초가집 여관에서 출발하는 선교사 일행.


▲시장 저자 거리에서 행상중인 아동들의 남루한 모습.


▲1894년 서립후 중축된 소래 교회 모습 , 한국 교회의 요람이라 일컷는다


▲소래 교회의 서상륜 장로와 가족들 , 동생인 서경조목사( 한국 최초의 목사중 1인)


▲소래 교회의 김씨(이름은 모름) 여전도사와 가족 , 이 김여전도사는 후에 중화동 교회에도 연관이 있음.

2.  남한 최초의 교회인 백령도 중화동 교회

육지에서는 1883년 서상륜이 100권의 성서를 지니고 조선으로 잠입한 것이 최초로 기록된듯하나 사실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그보다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며 그 현장은 서해 백령도이다.

중국측에서 튀어나온 산동 반도로 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백령도는 그 거리가 불과 오백 리 (200 Km) 미만에 위치하여 과거로 부터 중국을 통한 서역의 문물과 선교의 물결이 쉽게 다다른 곳이었다.

기록상의 최초 인물은 1816년 9월에 백령도에 도착했으며 " 조선 서해 탐사기"를 기록한 리라호 함장인 바실 홀과 이떄 동행했던 영국 해군 대위 클리포드이다.

클리포드는 후에 해군 선교회를 만들기도 했던 독실한 신자였으며 이떄 그는 선물과 성경 , 전도 용지등을 수레에 끌고 다니며 기회를 엿보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추신 ;  글의 용량이 길어 다음회에 백령도의 복음 전파 과정과 남한 최초 교회인 중화동 교회의 설립 과정을 이어서 올릴것을 약속합니다.

출처: 아멘넷, 정리: 누지문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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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초, 일본의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쇼죠 모리모토씨는 자신의 회사가 망하게 되자
자결로서 남들에게 진 빛을 갚으려 했습니다.

욕조에 누워 동맥을 절단한 모리모토씨는,
죽기 직전 자신의 앞이 검은색의 무엇인가로 덮이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몇초가 지났을까요.
작은 고통을 겪은 뒤 욕조에 죽어있던 자신의 모습을 본 모리모토씨는 본능적으로

"이건 실수였어, 큰 실수.."라고 소리치며,

'자살이란것은 이 세상의 인간이 저지를수있는 실수중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는것'을
말로 표현 못할 엄청난 두려움과 함께 느꼈다고 합니다.
 
 
자신의 주검위에 몇분간 떠 있었을때,

목욕탕 주위를 밝히고 있던 형광등의 빛들은
송곳과 같은 이상한 꼬챙이들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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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그 꼬챙이들은 해골과 박쥐, 그리고
엄청나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있는 저승사자의 모습을 한뒤,
모리모토씨를 계속하여 아프게 찔렀다고 합니다.

그는 울면서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제 자신을 죽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실수였습니다"라며
빌었으나, 저승사자는 그의 머릿칼을 잡고

깊은 땅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땅속으로 들어갈때 차가운 땅기운을 느꼈다는 모리모토씨는,
갑자기 나타난 시뻘건 용암을 통과한 뒤, 불에 이글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던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을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시뻘건 용암물에 떨어진 그는
살아 생전의 고통보다 몇백배가 더 아픈 영적인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 하며,
용암 위에 앉아있던 빨간색의 악마와 같은 형상을 하고있던 Gargoyle들은
삐쭉한 꼬챙이로 소리를 지르던 자신의 눈을 계속하여 찔러댔다고 합니다.

그 순간 모리모토씨의 옆에는, 살아생전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타나,
"왜 이런곳에 왔는가, 얼른 돌아가라!"는 경고를 하고

그를 잡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고 합니다.

모리모토씨가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났던 것은 바로 그때 였습니다.

그 후 병원에 문병을 왔던 그의 가족들과 직장 동료등 주위사람들에게
"절대로 자살을 하지말라!"는 충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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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의 지옥간증

1981년 미국의 센프란시스코시 금문교에서는

이른 새벽 자살을 하기위해 다리에서 뛰어내린 카일이

우연히 다리 반대편으로부터 다리 밑을 지나가던 경비정에게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높은 다리에서 떨어진뒤 물에 빠진 카일은 곧장 깊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하며,

당시 이 상황을 지켜본 경비대원들은 곧바로 물에 뛰어들어가 그를 찾은 뒤 배 위로 옮겼으나

그의 숨은 이미 넘어간 뒤였습니다.

 

즉시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한 경비대원들은 몇분간의 시도 끝에

카일이 물을 토하며 소생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하며, 만약을 대비해 카일의 손에 수갑을 채운 그들은

카일이 아무말도 하지않고 허공을 쳐다 보고 있자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가 방금 지옥에 갔다 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숨이 넘어간 직후 물속에 있는 자신의 죽은 시신을 볼수 있었다는 카일은

누군가 옆에서 '너'라고 불러 돌아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양복의 눈알 전체가 검은 신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것을 보았다고 하며,

순간 그에게 멱살 잡혀 깊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카일은

엄청난 지층을 통과해 용암이 펄펄 끓는 지옥에 내동댕이 쳐졌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지옥에 들어간뒤 시뻘건 요괴들이

날카로운 꼬챙이를 들고 눈 코 입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잘린 목을

고정 시키고 있는 모습을 본 카일은

요괴들 중 한명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날카로운 흉기를 든 뒤

자신의 목을 절단하려 쫓아오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때 자신의 눈 앞에 하얀 구멍이 열리는 모습을 본 카일은

쫓아오던 요괴가 무언가 허탈한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보트 위에서 깨어났다는 주장을하였고,

그날의 사건 이후 카일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자신의 사연을 알리고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종류의 강연회들을 가져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탁발전도 여행을 떠나보자는 말이 기독교적 용어로 합당한지요? <불교적인 용어>


목사님! 기독교 주간신문에 탁발전도여행을 떠나보자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목사님 절에서 스님들이 탁발 수행 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스님들이 시내에서 탁발모습도 보았습니다. 탁발전도여행을 떠나보자는 기독교적인 합당한 용어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목사님 탁발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1. 탁발(托鉢)의 의미

탁발(托鉢)은 불교에 출가한 수행자의 음식공급 방법으로 엄중한 규율이 정해져 있습니다. 탁발을 걸식(乞食)이라고도 합니다. 두 타행 중에 상행걸식(常行乞食)과 차제걸식(次第乞食)을 탁발의 수행 정진으로 삼고 있습니다. 즉 항상 밥을 걸식하여 생활할 것과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걸식해야한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발(鉢)이라는 것은 보통 발우(拔羽)라고 부르는 것으로 걸식을 행할 때, 얻어진 음식물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따라서 탁발(托鉢)이란 목숨을 발우에 기탁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걸식과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 탁발은 재가신자들에게는 출가자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 상당한 공덕이었으므로 재가신자들의 복덕을 위한 출가자들의 의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2. 탁발(托鉢)의 유래와 풍속

1) 탁발(托鉢)의 유래
탁발의 유래와 제도는 석가모니부처님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 이였습니다. 인도의 출가수행자들은 일체의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대신 탁발을 통해서 식생활을 해결했는데, 불교 교단에서도 그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스님들의 수행생활방편으로 삼았던 것 이였습니다.

2) 탁발(托鉢)의 풍속
불교는 출가한 비구(남자스님), 비구니(여자스님)는 어떠한 직업과 노동이 금지되어 식생활은 오로지 탁발하여 얻어진 음식으로 오직 수행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는 수단이었던 만큼 거기에는 엄격한 규칙들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일좌식(一座食), 부작여식(不作餘食)이라는 규칙이 있습니다. 일좌식은 비구는 오전 중에 거리에 나가 음식을 얻는데, 탁발해서 얻은 음식을 오전 중에 한 끼만 먹는 것으로 오후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작여식이란 생명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만 먹는 것을 의미하고, 만약 탁발한 음식이 많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남방의 불교(소승)에서는 시행하고 있습니다. 태국에서는 아침 5시에 예불이 끝나면 발우를 들고 거리에서 탁발 걸식을 합니다. 그러면 불자들은 준비해 두었던 음식물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와서 스님의 발우에 담아 줍니다. 탁발은 한 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집이고 다니면서 탁발한 음식을 절에 가져와서 아침(공양)식사로 대중스님들에게 골고루 배분해서 하루 1식으로 먹고 하루의 수행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을 걸사(乞士)라 하는데, 이것은 밥을 빌어서 몸을 기른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걸식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북방 불교(대승)에서는 수행생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수행의 한 방편으로 탁발이 가끔씩 행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이비승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불교종단협회에서 탁발행위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터미널, 지하철 출입구, 상가나, 가정집에 탁발(托鉢)다니는 스님은 100% 사이비승려라고 보면 됩니다. 그 이유는 불교종단협의회에서 탁발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김해 집회에서 들은 이야기는 집회한 교회에 주일학교 학생 아버지께서 아들을 데리고 사는 것을 알고, 여전도회에서 김장도 해주고 2년 동안 구제하는 마음으로 보살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도 매주일은 나오지 않으셨지만 교회를 나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사를 갔고 주일학생과 아버지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산에 목사님 모임이 있어 마산 버스터미널 앞에서 탁발함을 놓고 목탁을 치면서 탁발하는 것을 발견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분과 조용한 식당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혼하고 아들 데리고 이 직업 저 직업 찾았지만, 먹고 살길이 막막한 중에 친구가 탁발을 가르쳐주어서 하게 되었다는데, 어떠한 직장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종단협의회에서 탁발 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지금 탁발하는 거리승려들은 100%로 가짜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3. 탁발(托鉢) 전도 여행을 떠나 보자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

교회에 여름철 학생회 수련회를 탁발전도 훈련을 시키면 그들의 신앙이 확 바뀔 것이라는 기사가 나온 것을 필자도 보았습니다. 탁발(托鉢)전도여행이란 이집 저집에 전도하면서 식사 때가 되면 밥을 얻어먹고, 밤이 되면 잠자리를 얻어서 잠을 자면서 복음을 전도하는 의도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탁발(托鉢)전도여행이란 불교적인 용어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부처도 탁발을 통한 걸식(乞食)으로 평생을 일관했습니다. 이러한 불교 용어인 탁발(托鉢)의 의미로 “탁발 전도여행을 떠나보자!”, “탁발 전도 훈련을 시켜보자!”, “탁발 전도 훈련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탁발 전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참된 삶을 알게 되었으면 하는 탁발 훈련처럼 좋은 훈련도 없다”는 등 불교적인 용어 사용은 기독교 신앙에 합당치 않습니다.
필자의 친 동생인 서제홍목사님은 군산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간사를 역임 했는데, 한국대학생선교회는 거지 전도 여행이 있다고 합니다. 돈도 없이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이 마을 저 마을 복음을 전도 한다고 합니다. 탁발전도여행보다도 거지 무전 전도 여행이 신앙생활에 큰 은혜로운 추억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탁발은 불교적인 사상이 있는 용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서재생목사/서울대현교회

롱기누스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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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황실보물관에 전시된 성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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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창 위 명각

사진 출처: 위키백과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그가 살았나 죽었나 확인 차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로마 병사 롱기누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롱기누스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병사와 창을 언급하고 있다. 창에 찔린 상처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고 요한복음은 묘사한다.

그 후 민간에 퍼진 속설에 의하면 그림 왼편에 창질을 해댄 병사의 이름은 롱기누스였고, 창으로 예수를 찌른 순간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창에 흐르는 예수의 피로 눈을 씻으니 회복되어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곤 그 예수의 피가 묻은 창을 고이 간직해 후세에 전해 줬다고 한다.

(사탄이 롱기누스를 조정해 예수의 심장을 찔러 부활을 못하게 하려 했으나 롱기누스의 의지로 빗나가 부활할 수 있었다고 해 롱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운명의 창, 성령의 창, 성스러운 창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창은 예수의 유물 중 유일하게 오래, 잘, 그리고 공식적으로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현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실물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에서 실제 예수의 몸을 찌른 창으로 전시를 할만큼 이 창은 오늘날 진품으로 널리 믿어지고 있는데...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자와 고고학자, 그리고 디스커버리 채널이 나섰다.

이 창의 금속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이 창이 제작된 정확한 시기를 알아냈는데...

그 결과를 알아보기 전에, 왜 이 창이 그렇게 유명해졌는지 역사 공부부터 해 보자.

신의 아들을 찌른 창이라 하여 롱기누스의 창은 하나의 '힘의 상징'이 되었다.

미신 상 퍼진 이야기로는 '롱기누스의 창'을 소유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여 1000여년간 45명의 제왕이 소유했다고 하니 창이 제왕을 만든 것인지 제왕이 창을 소유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롱기누스의 창을 소유했던 (혹은 손에 넣으려 했던) 제왕들

콘스탄티누스 대제: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최초의 황제. 롱기누스의 후손으로부터 창을 물려 받은 첫번째 황제이기도 하다. 그는 이 창이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어서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고 함. 창의 힘이었는지 뭔지는 몰라도 그는 로마 제국을 석권하고 유일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제의 칭호를 얻었다.

칼 마르텔: 분열 직전의 프랑크 왕국을 재건한 중세 서유럽 왕조의 시조. 프랑크 왕국을 일으켜 세웠을 뿐 아니라 아랍인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 항상 창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샤를마뉴 대제: 771~814.  칼 마르텔 왕의 손자다. 수많은 전투로 서유럽 최강의 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 운명의 창을 갖고 47번에 걸친 각종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우연히 이 창을 떨어트린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서기 900년 초 `운명의 창`은 독일 작센(Saxon)왕가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도 이를 지니고 있던 하인리히 1세(919~936)는 작센 왕가의 재배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그의 아들 오토 대제(AD 955~963)에게 창을 물려주었다.

교황 요한 12세(AD955~963)는 오토 대제에게 세례를 주면서 이 창을 사용햇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토 대제는 이 창을 지니고 `렉 전투`(The Battle of Leck)에서 몽고족을 격파했다.

나폴레옹 역시 롱기누스의 창에 대한 이야기를 믿었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사라진 롱기누스의 창을 찾기 위해 전 유럽을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끝내 손에 넣지는 못했다.

히틀러: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학자 발터 슈타인(Walter Steinmeier)으로부터 '이 신성한 창을 소유하는 사람은 이 世界의 통치자가 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창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당시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창에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그 후 1938년 4월 비엔나로 입성하여 창을 손에 넣게 된다.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45년까지 파죽지세로 몰아쳐 유럽 전역을 지배하였다.

롱기누스의 창을 최후에 손에 넣었던 지배자는 히틀러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연합군이 그의 비밀 창고를 수색하다가 여러 고대 유물을 발견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롱기누스의 창이었다고.

그리고 이 창을 오스트리아의 박물관에 고이 모셔다 두고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

(히틀러는 자살하기 전에 창을 연합군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모조품을 만들어 두고 진품은 다른 곳에 숨겨 두었다는 설이 있다. 연합군이 발견한 것은 히틀러가 만든 모조품이라고 하는 설도)


정리: 누지문서님

이방신화의 교정으로서의 창세기창조기사

 

 

진보적인 구약학자들은, 모세(라는 이름의 편집자)는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에서 창세기기록의 자료들을 빌려왔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여러 학자들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 사이에 있는 무시하지 못할 차잇점들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그 차잇점들을 설명하려고 해 왔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모세가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을 참고하면서도 그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관점인가를 교정해 주기 위해서 창세기1-3장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웃국가들에 대한 교육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한 교육이고 또한 변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취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는, Bruce K.Waltke G.F.Hasel같은 사람인데, 아래의 글은, Hasel The Evangelical Quarterly 45 (1974)에 실은 The Polemic Natrue of the Genesis Cosmology라는 글의 이 부분에 대한 욧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로님께서 올려놓으신, 이집트와 바벨론의 창조설화들을 참고해서, 이 욧점들을 읽으시면, 유익한 점이 있을 것 같아서, 간단히 스케치해 봅니다.

 

하젤박사는 하나님께서 교정의 의도를 가지셔서 모세에게 영감을 주셨음을 가리키는 몇가지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합니다.

 

첫째, 창세기1:2에 나오는 깊음이라는 단어는 터훔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서 바벨론신화의 혼동의 신인 티아맛이란 용어가 파생되어 나옵니다. 터훔이나 티아맛은 모두 큰 바다(ocean)를 나타내는 단어에서 파생된다고 합니다. 바벨론에서 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는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최초의 신이 바로 신입니다. , 짠 물(염수)신인, 티아맛(여신)맹 물(담수)신인 압수(남신)의 결합에 의해서 터훔이 발생하고 그 터훔에서 신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신들 중의 하나인 땅의 신(남신으로도 여신으로도 묘사됨) 에아(Ea)압수(맹물신-남신)을 죽이고 이에 화가 난 압수의 아내 티아맛이 모든 신들을 죽이려고 할 때, 땅신 에아는 자기의 맏아들신인 마르둑을 앞세워서 티아맛과 대적하게 하고, 결국 티아맛을 죽이고는 신들의 신으로 승격하게 된다는 것이 바벨론창조설화의 핵심입니다.

 

바벨론신화에서는 터훔(티아맛)이 신화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화를 일종의 비신화화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1장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터훔 위에 있고…”

 

어쩌면, 이런 비신화화(저는 일부러 불트만의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불트만의 비신화화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터훔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터훔의 신화적 성격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모세와 하나님의 의도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에 대해서, 아마도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아무도 놀라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이미 성경에서 전제하고 있는 삶의 정황(이런 단어를 쓴다고 해서,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바벨론사람들도 압수, 티아맛이니 하는 신들의 세계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용어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영향을 미쳤던 것이 고대근동사회였었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그들은 이런 맹물(담수-강물?)짠물(염수-바닷물?) 등이 살아있는 인격적 존재였었습니다. 그들의 도시생활을 지배했던 세력이고 힘이었고, 의식세계였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짠물짠물일 뿐이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12절입니다. 맹물맹물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 더 하젤의 말을 들어봅시다.

마침 하나로님께서 정우교수의 리워야단에 관한 글의 요지를 간단하게라도 올려주셨는데, 이것과 관련된 것이 바로 하젤교수의 두번째 욧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의 다섯번째 되는 기록에 큰 물고기가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원어로는 타니님으로 되어 있는데, 우가릿문서들에 등장하는, 창조신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은 이런 문서들의 기록에서 바다와 동등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위의 첫번째 욧점에서 압수티아맛강물이든 바닷물이든 모두 과 관련된 것을 보게 되고, 바다와 연관됩니다. , 혹은 바다라는 것, 혹은, 바다큰 물고기(타니님)들이 모두 신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우가릿문서들에서 나타나는, 곧 고대근동의 신화들에서 나타나는, 바로 이런 신적인 존재들로서의 타니님들이 이곳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창세기의 창조기사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11절에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하는 단어, 바라, 이곳 타니님창조를 나타내는데, 다시 등장합니다. 이들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류의 전투를 통해서, 승리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노력도 없이 말로서 간단하게 그런 타니님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1장의 기록의도라는 것입니다. 고대근동의 신화들과는 대조되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함으로서, 변증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젤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A polemic emphasis becomes transparent; the tanninim are aquatic creatures which were created by God; they are not pre-existent rivals of the Creator which needed to be conqured as in Canaanite mythology.(p.87).

 

이런 큰 물고기들(타니님), 김정우교수가 언급하는 리워야단으로, 혹은 현대과학에서 언급하는 공룡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 고대근동문화에 있어서, 태양이나 달 혹은 다른 별들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던 것은 너무나 흔하였던 것을 배경으로 하면서, 창세기116-19절에 나오는 궁창의 광명들에 대한 창조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바벨론설화에 있어서 태양신은 세메쉬라고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1장에서는 아예 태양에 대한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고 단순하게 광명이라고만 합니다. 이름조차 붙이지 않고 있는 이런 기술태도는, 모세 자신이 처한 삶의 정황 속에서 팽배해 있는 태양숭배나 달숭배를 얼마나 혐오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신들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태양숭배나 달숭배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숭배하는 노예적 삶에서, 해방될 수 있는 인식의 근거가 제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만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해방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바로미님이 질문하셨던, 이 창조기사와 회심이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묵상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네번째, 하젤은 말하기를, Inherent in the Biblical prersentation of the separation of heaven and earth is an animythical polemic. Separation takes palce without struggle whatever. It is achieved by divine fiat.(p.88)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둘째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어지게 하라는 기록이 바로 마르둑이 맹물(강물)여신인 티아맛의 몸을 둘로 나눠서 하늘 위의 바다를 만들었다는 식의 신화적 이해에 반대해서, 단순히 말씀으로서 그렇게 나눠지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창세기16-8절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욧점들이 고대바벨로니아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신화적 이해에 대한 반박과 참된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변증의 성격이 창세기1장기록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 하젤의 주장입니다. 이런 하젤의 주장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습니다(, Mary Wakeman, D.F.Payne, B.K.Waltke ).

 

이제 이집트의 창조설화를 모세의 삶의 정황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모세는 이집트왕궁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40살 때까지 교육을 받았으니, 이집트의 최고학문을 전수받기에 충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집트를 생각할 때, 현대적인 상황에서 거의 삼류급으로 전락되어 버린 이집트를 연상하면 안됩니다. 그 당시 최고의 정치적 세력이었고 또한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강대국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보수적인 견해를 취해서 모세를 BC 15세기라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모세 당시에 이미 인류의 7대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피라미드이나 스핑크스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런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앞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 추측해 보는 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지나쳐서, 모세의 종교는 바로 이집트종교의 모방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바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프로이드 같은 사람이 그의 마지막 책인, Moses and Monotheism에서 그런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프로이드는, 모세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집트인이었다는 허무맹랑한 추측을 하기도 했었지요.

 

이런 허무맹랑한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의 창조기사는 이런 이집트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반박하고 참된 종교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집트의 창조설화들이 여러 개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최소한 네 개가 있고, 각각 중심되는 신들이 그 연관된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들의 창조설이 진짜라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도시국가시대의 산물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 도시들과 신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Heliopolis(Atum, 훗날 Re신으로 변경통합됨), Memphis(Ptah), Mermopolis(Thoth), Esna(Khnum).

 

참으로 이집트는 신들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라는 말 자체가 이집프트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프타신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프타신이 이집트신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질 지 모르지만, 신들의 역할은, 그 도시들의 역할과 그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아몬(Amon)신이나 (Re, 혹은 Ra)신이 주요신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있습니다. 도시들의 흥망성쇠에 따라서 신들이 그 중요성을 띄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집트에서 모세가 교육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교육받을 당시에 이집트이집트가 아니라, 미츠라임(억압들, 긴장들)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이 이름은 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의 관점에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돌아보면서, 억압의 땅이라고 회상했을 법 합니다. 원래 이집트의 원주민들은 미츠라임이라고 부르지 않고, 프타신의 정원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집트로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언제부터 이런 이름으로 자신들을 불렀는지는 모름).

 

프타신의 정원에서 교육을 받은 모세의 정황을 고려할 때에, 프타신의 창조설화에 대해서 모세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능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살았을 그 당시의 궁전은, 프타신을 주신으로 삼고 있는 멤피스라기 보다는, 오히려, 테베(현대의 룩소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일강의 하류에 있는 멤피스와는 달리 테베는 상당히 중류로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전체적으로 통치하기가 보다 쉬운 여건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집트역사에 있어서 신왕국(the New Kingdom)이 시작된(B.C.1570년에 셈족인 힉소스족을 쫓아냄. 이 힉소스족은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후예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 확정할 수는 없음) 뒤의 얼마 뒤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테베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정보는, Roger L. Green이란 사람의 Ancient Egypt(1963년도 발간)라는 책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곳 테베에는 성경의 모세를 건진 바로의 딸로 알려진 하셋수트여왕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시신안치성전"가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 '시신안치성전'모습을 사진으로 올려둡니다.

 

 

 

이런 자료들을 참고할 때에 이 당시의 종교는 아문신과 신이 통합되어서 아문-신으로 불려지고 있던 때입니다(모세가 태어날 당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바로에 의해서 이스라엘노예들로 인해서 건축되었던 국고성들 중에 하나가 바로 라암셋(1:11)인데, 라암셋이 현대인이 흔히 알고 있는 람세스라는 이름입니다. 라신의 아들 혹은 라신으로부터 낳아진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람세스는 모세를 람세스의 친구로 묘사하는 현대의 십계라는 영화나, 프린스 오브 이집트 같은 만화영화, 혹은 람세스2의 주인공 람세스와는 이름만 같을 뿐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종교를 통해서 창세기1장이 선포되는 삶의 정황을 이해하려면, 하나로님께서 올려놓으신 프타신에 의한 멤피스중심의 창조설화보다는, 헬리오폴리스나 그 이후의 테베중심의, 라신과 아문신에 의한 창조설화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을 고센땅이 테베보다는 멤피스에 더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서, 멤피스중심의 프타신의 창조설화에 대해서도 여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만).

 

이들의 창조설화에 의하면, 태초에 혼동’(Nun혹은 Nu)이 있었는데, 혼동의 신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것이 바로 아툼’(Atum=Ra)이었다고 합니다. ‘아툼이라는 말 자체는, ‘not to be’ 혹은 ‘to be complete’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에서는 야훼의 의미를 ‘to be’와 관계시키는 것과 함께 고려한다면, 아주 의미심장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혼동의 혼동이라고 할 수 있는, ‘아툼신 안에 모든 존재하는 것의 원형이 들어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철학적인 개념입니다. 인도에서 ’(zero)의 개념의 형성되고, 그것이 중국철학의 ’()의 사상으로 발전되어가는 것과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양이 발생하기 이전의 태극과도 같은 개념이 바로 아툼인 것입니다. 원래는 비인격적인존재였는데, 인격화된 것이 아툼신입니다. 그리고 이 아툼신이 신과 경합하고 통합되어서 아툼-신이 되었습니다.

 

신은, 원래, ‘아툼신의 형태로, ‘혼동속의 연꽃봉오리’(the bud of a lotus)에 감싸여 있는 채로 있다가, 그렇게 있는 것이 지겨워서’(weary of), 스스로 일어나 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창조하려고 하는 생각에 다른 보조신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위’(masturbation)을 해서 Shu(하늘신-남성)Tefnut(습기의 신)을 낳고, ShuTefnut이 성관계를 가짐으로서 낳게 된 자녀들이 바로 땅의 신인 Geb과 하늘여신인 Nut을 낳습니다. 땅의 신 Geb과 하늘여신인 Nut를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섹스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신은 자위를 해서, ‘하늘신과 습기의 여신을 낳고, 이들의 섹스에 의해서 GebNut이란 신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의 섹스에 의해서, Horus, OsirisIsis, Set, Nephthys 모두 다섯명의 자녀신들을 5일간 연속해서 낳습니다. 그 당시 태음력이 지배하던 달력으로는 360일밖에 안되는데, 360일 외의 다른 날 5일 동안 낳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모두 365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신들의 섹스에 의해서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개념이 이 테베에서의 창조설화의 중심모티브가 됩니다. 이런 설화들을 들으면서 자랐던 것이 바로 모세였을 것입니다.

 

여기에 프타신의 창조설화는, 바로 혼동의 신아툼심장를 창조하였다는 것이 보태어집니다. 여기서 심장를 창조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심장의 기능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을 뱉아놓는 기능을 합니다. 그리고 심장은 그렇게 을 하기 위해서 생각하는 기능을 하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프타신은,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그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멤피스 가까운 곳에 있었던 고센땅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익숙했었을 이야기입니다. 이 프타신의 형상을 묘사해 놓은 것이 다음의 그림입니다.



특별히 이 프타신은, 장인과 직공들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와 만물을 생각창조한 그의 능력을 소망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숭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생각 속에도, 프타신이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의 을 지배하고 있는 이가 바로 프타신이라고 하는 생각 말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프타신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 아피스라는 이름의 황소입니다. 곧 이 아피스황소를 숭배하는 것은, 프타신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아피스황소'의 형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마도 눈치 빠르신 분들은 무릎을 치실 것입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아론과 이스라엘백성들은 왜 황금송아지를 숭배하였고,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끊임없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유혹하였던 우상숭배 중에서 바로 이 숭배였던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프타신의 현신인 것입니다. 이집프트의 신, 바로 프타신, 라신과 아툼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신의 현현이 바로 송아지, 혹은 소를 통해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윗그림의 소의 머리 위에 있는 원반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태양신 라와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타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신이었을까,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 신이었을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 신에 대한 심판과 비판, 혹은 극복을 호소하는 성경의 기록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태양의 신-라신의 원형인, 혼동의 신-아툼신, 그리고 그 아툼신의 심장을 창조한 프타신.

 

그 프타신을 심판하는 야훼 하나님.

 

이 심판의 기록이 바로 출애굽당시의 열가지 재앙 중에 다섯번째 재앙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병의 재앙이 그것입니다. 이 재앙에 의해서 모든 가축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아피스의 황소도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프타신이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이집트신화의 배경을 가지고 창세기1장으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자료 출처: 양무리 마을
이번회에는 전통적인 연대기에 반하는 수정 연대기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글을 올린다. 그들이 주장하는 수정 연대기의 근거는 무엇인가?



표준 이집트 연대기는 BC 3000년을 넘어서 확장되어 있다. 이것은 노아의 전 세계적인 홍수가 고왕국(Old Kingdom) 시대 동안 일어났다는 것이 되어진다. 또한, 요셉은 제2 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 동안 애굽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모세는 신왕국(New Kingdom) 시대에 이집트에 놓여지게 되지만, 번성했던 왕국에서 애굽 전역을 황폐화시켰던 질병들, 홍해에서 바로와 그의 군대의 괴멸 등과 같은 사건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없다.

왕조들이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개정된 연대기는 극적으로 시간 척도를 무너뜨리고, 성경적인 연대기와 조화되어진다. 제1 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는 제2 중간기와 같은 것이 되며,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시기와 부합한다. 제3 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 또한 사라지게 되고, 그 왕들은 신왕국(New Kingdom)과 후기 페르시아 시기(Late and Persian Periods)들의 왕들과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이집트는 대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에서의 분산 이후 미스라임(Mizraim,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10:6) (현재의 이집트(Egypt) 라는 이름은 미스르(Misr)에서 나왔다. 참조; 창50:11)

또한 전번글에서 기술되었던 여리고성을 6년동안 발굴하였던 케슬린 케년( Kathleen Kenyon ) 의 주장은 이러하다. '제반 자료들을 현대의 지식에 비추어 분석하여 보면, BC 1580년과 BC 1400년 사이에는 무덤 양식과 고대 건축물에 있어서 양쪽 다 완전한 간격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실제로 그녀는 성경의 출애굽기에 해당되는 BC 1400년 경에는 여리고 현지에 주민이 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애굽에 내려진 10대 재앙 (The Ten Plagues on Egypt)

바로는 이집트 땅에 내려진 10 가지 파괴적인 재앙과 악질로 인해서, 모세의 요구대로 그의 노예들을 놓아주었다.(출애굽기 7―12). 성스러운 나일강물은 피물로 변하였고, 모든 생축은 악질로 죽었으며, 번갯불은 가연성 물질들을 모두 태웠고, 우박이 내려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치고, 과일 나무를 꺾었으며,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 남아있던 지상의 모든 식물을 먹어치웠다. 이집트의 경제가 그토록 피폐했었다면, 어디엔가 그와 같은 국가적 대재난에 관한 기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런 기록이 있다.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 박물관에는 한참 나중에 기록했을 파피루스 기록이 보관되어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파피루스 기록은 어떤 초기 왕조 때의 파피루스 기록을 복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재앙이 휩쓸고 간 이후에 풍미했을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그 기록은 제 13대 왕조 때의 것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 기록은 이렇다. 즉, '아니, 그 보다는 심정이 광포하다. 재앙이 땅을 휩쓸었고 방방곡곡은 유혈이 낭자하다…. 아니, 그 뿐이랴. 강은 핏물이 범람한다. 사람이 그걸 마실까? 인간으로서는 못 마시리라.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 아니, 그 뿐이랴. 지체 높은 집 아들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 …. 외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애굽으로 들어왔으니…. 아니, 그 뿐이랴. 알곡은 곳곳에서 말라죽는다. 사람들은 옷조차 걸치지 못한 알몸이고 향수나 기름은 어림도 없다. 사람들은 입을 떼면, '더는 못 참겠네.” 다들 한숨이다. 곡간마다 텅텅 비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곤궁한 백성들은 마침내 왕을 끌어내렸다.' 20



이집트의 연대기에 대한 수정 제안
(A Proposed Revision of Egyptian Chronology)


‘그 당시에’ 모세의 흔적이나, 이집트에 내려진 10대 재앙, 또는 출애굽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은 이집트 역사의 연대기 계산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수 세기를 삭감하여 계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수정된 연대기 계산은 제 12대 왕조를 모세의 시기로 끌어내려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조 기간에는 성경 기록을 지지하는 상황 증거들이 풍부하다.

제 12대 왕조의 말기에 재위하였던 왕들 중에 세소스트리스(Sesostris) 3세가 포함된다. 그의 석상에 묘사된 인상으로 보아, 그는 능히 백성들에게 냉엄한 노예제도를 시행하고도 남았을 잔악한 독재자로 생각된다. 그의 아들 아메넴헷(Amenemhet) 3세도 못지않게 잔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의 통치는 46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그의 통치 초기 어느 때에 탄생했을 것이다.

아메넴헷 3세한테는 아메넴헷 4세로 불려졌던 아들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이 왕자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서 부왕을 추종하였든지, 아니면 부왕과 공동섭정을 하였던 것 같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아메넴헷 4세는 모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메넴헷 4세는 아메넴헷 3세의 서거 이전에 신비롭게도 종적이 묘연해졌다.

아메넴헷 3세한테는 소벡네페루(Sobekneferu) 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 공주는 아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만약에 그녀가 목욕하려 강가로 내려갔다던 바로(Pharaoh)의 딸이었다면, 강가로 갔던 이유는 쉽게 이해된다. 그것은 공주의 방에 목욕시설이 없어서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정(洗淨) 의식을 거행하고, 다산(多産)의 하신(河神) 하피(Hapi) 에게 기도를 드리려고 그 곳에 내려왔을 것이다. 아기를 못 가졌던 그녀로서는 그와 같은 신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기 모세를 그 곳에서 발견하였을 때에 그녀는 이 아기가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쉽게 믿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5―6).

그러나 나이 들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식한 모세는 이집트를 도망쳐야만 했다. 이 일로해서 왕위에 공백이 생겨 아메넴헷 3세가 서거하였을 때에는 대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공주 소벡네페루가 바로로 즉위하여 8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왕조도 끝나고, 뒤이어 제 13대 왕조가 대두하였다.

이스라엘 노예들 (The Israelite Slaves)


▲플린더 페트리(Flinders F. Petrie) 경이 발굴한 페이윰에 있는 도시 카훈(Kahum) ,

플린더 페트리(Flinders F. Petrie) 경은 페이윰에 있는 도시 카훈(Kahum)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로잘리 데이비드(Rosalie David) 박사는 그의 발굴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 그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즉, '이 도시에는 상당수의 아시아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집트의 다른 곳에서도 이 사실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시리아나 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었을 그들의 고국은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 그들이 이집트에 와서 살게 된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15

로잘리 데이비드나 플린더 페트리도 이 셈족 노예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걸 확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의 사건을 제 12대 왕조보다 수 세기 이후로 산정하는 전통적인 연대기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트리는 또 다른 한 가지 흥미진진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마도 원래는 옷가지나 다른 소유물들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나무 상자들이 카훈(Kahun)에 있던 많은 가옥들의 방바닥 밑에서 발견되었다. 이 상자들은 아기들의 유골들이 담겨 있었는데, 때로는 한 상자 안에 2명 또는 3명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죽을 당시 아기들의 나이는 몇 개월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16

이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는 히브리인 조산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를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출애굽기 1:16). 조산원들은 이 명령을 무시하였던 결과,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1:22). 수많은 산모들은 품속에서 빼앗긴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비탄의 눈물을 삼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죽은 아기들을 상자에 넣어 살던 집 방바닥 밑에 묻었던 것 같다.17

페트리가 발견한 것 중에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노예들이 돌연히 현장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다. 로잘리 데이비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제왕의 피라미드 건설의 완공이 카훈 주민들이 연장과 가재도구를 일터나 집에 내버려둔 채 끝내 그 도시를 떠나야했던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

'이 최초의 카훈 거주가 어떻게 막을 내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가옥들 안에 내버려진 일상용품들의 수량, 그리고 그 용도의 범위나 형태들의 다양성은 능히 그들의 이탈이 돌발적이며, 사전에 계획된 바 없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9

그들의 이탈은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돌발적인 것이었다! 이보다 더 성경의 기록과 부합하는 기사는 없을 것이다. '사백 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애굽기 12:41).


출처: 아멘넷, 글: 누지문서님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옛말이 있다. 노인네가 자기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옮기려고 한 삽 두 삽 부지런히 삽질을 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산을 옮겨주셨다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것은 신영복 선생의 글과 그림이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로 우공이산이라는 말을 우리는 잘알고 있다.

太形王屋二山, 方七百里, 高萬仞, 本在冀州之南, 河陽之北.
태형 왕옥 두 산은 사방이 7백리 높이가 만길로 본래 기주 남쪽, 하양 북쪽에 있었다.

北山愚公者, 年且九十, 面山而居.
북산의 우공은 나이가 곧 90인데 산을 맞대고 살고 있었다.

懲山北之塞, 出入之迂也, 聚室而謀, 曰
산 북쪽이 막혀 드나듦에 멀리 돌아가는 고생을 하니, 집안 사람들을 모아 도모하여 왈

"吾與汝畢力平險, 指通豫南, 達于漢陰, 可乎?" 雜然相許.
나와 네들이 힘을 다해 험지를 평탄히 하여 예남을 열고 한수의 남쪽까지 이르려는데 괜찮겠는가? 하니 분분히 서로 동의하였다

其妻獻疑 曰 "以君之力, 曾不能損魁父之丘.
그 처가 의문을 내어 묻길 당신의 힘으론 괴부의 언덕조차 덜지 못할텐데 ▶괴부 : 고대의 작은 산 이름

如太形王屋何? 且焉置土石?"
태형와 왕옥을 어찌한다는 것이며, 또 흙과 돌은 어디에 두시려구요?

雜曰 "投諸渤海之尾, 隱土之北."
분분히 말하길 발해의 끄트머리 은토 북쪽에 던지면 됩니다, 하여

遂率子孫荷擔者三夫, 叩石墾壤, 箕畚運於渤海之尾.
드디어 자식과 손자를 거느리고, 짊어지고 멘 세 남자가 돌을 두드리고 땅을 일궈 삼태기로 발해 끄트머리로 옮겼다.

隣人京城氏之孀妻有遺男, 始齔, 跳往助之. .
이웃사람 경성씨의 미망인이 사내 아이가 있어 이갈이를 시작하는데 뛰어와서는 이를 도왔다.

寒暑易節, 始一反焉. 河曲智叟笑而止之, 曰
여름과 겨울 계절이 바뀌고야 비로소 한번 되돌아오게 되었다. 하곡 지수가 웃으며 만류하여 왈

"甚矣汝之不惠! 以殘年餘力, 曾不能毁山之一毛; 其如土石何?"
당신의 어리석음이 심히 깊도다! 얼마 남지 않은 일생과 여력으로 산의 터럭 하나조차 헐지 못할 것인데 흙과 돌을 어찌 하겠는가?

北山愚公長息 曰 "汝心之固, 固不可徹, 曾不若孀妻弱子.
북산 우공이 장탄하여 말하길 당신 생각의 고루함이 굳어 가히 통하지가 않으니 과부의 어린애만도 못하오.

雖我之死, 有子存焉. 子又生孫, 孫又生子, 子又有子, 子又有孫
비록 내가 죽어도 자식이 있소. 자식이 또 손자를 낳고 그 손자가 또 자식을 낳으며, 그 자식은 또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은 또 손자가 있어

子子孫孫, 無窮匱也, 而山不加增, 何苦而不平?"
자자손손 끝이 없으나, 산은 불어나지 않으니 어찌 수고롭다 불평하리오?

河曲智叟亡以應. 操蛇之神聞之, 懼其不已也, 告之於帝.
하곡 지수가 대답할 말을 잃었다. 조사라는 신이 이를 듣고 그가 그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천제에게 고하였다. ▶조사지신 : 뱀을 들고 있는 태형 왕옥의 산신

帝感其誠, 命夸蛾氏二子負二山, 一厝朔東, 一厝雍南.
천제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과아씨 두 아들에 명하여 두 산을 짊어지고 하나는 삭동에 하나는 옹남에 두게 하였다.

自此, 冀之南, 漢之陰無隴斷焉.
이로부터 기주의 남쪽 한수의 남쪽으로 높고 험준한 산등성이가 없다.


사람들이 볼때 어리석고 볼품없으나 그의 진실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현대의 우공은 누구인가 ?

현대 교회의 번영 신학과 교회 성장 우선주의는 많은 소자들을 힘들게 하고 좌절케한다. 이를 논문으로 발표한 자료가 있어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저자 이은영, "신자유주의와 1990년대 한국 대형 교회의 변화")

국경을 초월하는 메가처치의 등장

현대 신자유하의 대형 교회는 교단과 국경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성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온누리교회의 경우 국내에 9개의 캠퍼스와 해외에 29개의 비전교회가 있다. 온누리교회의 지성전 체제는 중앙 통제 방식이다. 제정과 인력도 모교회에서 관리한다. 이런 지성전 체제는 견제 장치가 없다. 교단과 교파의 규제도 의미가 없다.

이런 대형 교회의 등장으로 교단과 교파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지고, 교회의 브랜드와 스타 목사의 이름만 남는다. 교회의 브랜드가 강조되기 시작하면 새신자 교육이 강화된다. 일반 대기업에서 신입 사원에게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회사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자유주의에 물든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도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된다. 변화된 구조 속에서 현 사회를 긍정하고, 사회에서 성공해, 주변 사람들에게 성공의 콩고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패는 개인의 선택과 태도의 문제로 소급될 뿐이다. 교인들이 교회와 설교자에게 들을 수 있는 대안은 결국 가난하지 말고 부자가 되라는 말이다.

신보수 주의와 담론의 유행

불안이 상존하는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는 성공을 위한 자기 계발의 중요성이 필연적으로 강조된다. 선발 대형 교회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했다면,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후발 대형 교회들은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친절한 매뉴얼까지 제시하고 있다.

"예수 믿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욕심내고 도전해야 할 것은 우리가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할 수 있는 대로 강한 자가 되라. 높은 자가 되라. 부한 자가 되라. 뛰어난 사람이 되라. 그렇게 되기를 힘쓰라.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 로마 시민권을 쓴 것처럼 부함과 강함을 주님을 위해 선용하라."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

결국 한국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사회로부터 변화를 받아 성장이 정체된 교회 구조와 내용에 개조하고, 교인들을 변화된 사회 속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사회화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 연고로 우리는 현대 교회의 설교에서 "좁은문으로 들어가라(마 7 ; 13)"라던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낳도록 주의하라 (마 6 ; 1),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rich man)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 19 ; 24)라는 등등에 관한 말씀을 듣기가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민의 푸른 꿈을 간직하고 이땅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일부만 성공했을뿐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혹은 하루하루 경제적인 어려움에 살아간다. 바라건대 현대의 우공들에게 올바른 설교,진실되고 깨끗한 설교 , 하늘에 소망을 갖게하는 설교, 갈릴리 빈촌에서 소외된 자들을 연민의 눈동자로 바라보시던 에수님의 마음을 담은 설교가 더 많은 이민 교회에서 주일마다 선포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현대의 우공들이 세상적으로는 볼품없고 고생이 되어도 주일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예배를 통해 힘을 얻고 변화되어 저들의 진실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자손손에게 전해져 산을 움직일수 있는 힘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출처: 아멘넷
하나님께서는 2천년전에 육신화되셨고 오늘날까지 존재하십니다.
육신화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 예수님은 2천년전이나 오늘날이나 유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육신화된 또다른 예수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이 "우리의 빵 역시 육신화되신 진짜 예수님이시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2천년전에 이미 육신화되셨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이 1:7~8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은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를 지적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형상으로 물질화시킨후 그것을 예수님이라 부름으로 또다른 육화된 예수가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육화되신 유일한 메시야를 부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구약시대에 빈번했던 하나님을 임의로 형상화시키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긴 행태를 말합니다.

느 9:18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이런 우상숭배행태가 구약시대 내내 지속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지탄 받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우상이 참 하나님이 아닌데도 하나님으로 부르고 그것에게 절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은 임의로 예수님을 형상화시키고 그것을 예수님이라고 무릎꿇어 경배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빵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 예수님이 아닌, 가짜 예수요, 다른 예수입니다.
그것을 섬기면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이므로 귀신의 영을 받게 됩니다.
그런 형상을 예수님으로 섬겨도 된다는 가르침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라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가톨릭의 교리가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참된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은
제가 앞의 여러 단원들에서 설명드렸습니다.
이 단원에서는 가톨릭이 예수라고 부르는 그 존재의 정체부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세가 자기 이후에 올 지도자를 예언합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실제로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을 이끈 인물은 바로 "여호수아" 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근처까지만 이끌었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는 못하고 죽습니다.
모세를 이은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바로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 곧 천국으로 이끌 메시야의 예표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도래한 메시야를 여호수아,곧 예수라고 이름지었던 것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즉,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의 여호수아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에 나온 여호수아를 예수로 지칭하고 있음에서도 확실해 집니다.

히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위의 여호수아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 예수로 되어 있습니다.
위의 구절의 의미는 구약성경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준 안식은
메시야가 메시야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인 천국을 주는 것의 예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위 구절의 여호수가가 원문에 예수로 되어 있으므로,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예수라는 이름이
구약성경의 여호수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약 천년 후인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여호수아"의 축약형인 "예수아"로 바뀌어가게 됩니다.
바벨론 1차 포로귀환자인 학개와 스가랴의 선지서에서 여호수아로 표기된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가
바벨론 2차 포로귀환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에스라서를 보시면,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로 불림을 알 수 있습니다.

스 5: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

이처럼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여호수아라는 발음보다 축약형인 예수아라는 발음이 더 많이 쓰이게 됩니다.
느헤미야서에서도 모세의 후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예수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마지막 시기를 기록한 역사서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여호수아라는 표기는 완전히 사라져 단 한번도 나오지 않고, 대신 예수아라는 표기로 28번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후 신약시대에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널리 쓰였던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어로 표기하면 IHSOUS , 즉 IESOUS 가 됩니다.(그리스어의 H 는 E 와 호환됩니다)
S 가 끝에 추가된 것은 그리스 이름이 끝에 S 가 붙는 관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로마자에서는 이 그리스 표기를 따라 IESUS 로 표기됩니다.

가톨릭의 빵이 진짜 예수가 아닌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육화되신 예수님은 오직 한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또다시 육화되어 생겨난 그 빵은 가짜 예수요, 다른 예수 입니다.
또한 가톨릭이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는 빵에 보면 이름이 써져 있는데, IHS 라고 쓰여있습니다.



엄연히 로마자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을 IHSOUS 라고 쓰지 않고 IESUS 라고 씁니다.
그런데도 로만 가톨릭은 빵에 IHS 라고 표기해 놓은 것입니다.
그 문제는 제쳐놓더라도 저렇듯 예수라는 이름의 앞의 세 글자만 따버리면
예수가 아니라 바커스가 됩니다.

왜냐하면 바커스의 이름이 DIONYSUS IHS 이기 때문입니다.
즉, 가톨릭의 빵에 새겨진 IHS 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바커스의 성, 곧 SERNAME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빵은 DIONYSUS IHS,
곧 그리스에서 디오니수스라 불리고 로마에서는 바커스라 불리는 태양신을 의미하는 빵입니다.
가톨릭의 예수가 그리스의 디오니수스라는 것은 가톨릭이 그린 그림으로 입증됩니다.
실제 그리스 사람들이 디오니수스라고 그린 그림과 가톨릭이 예수라고 그린 그림을 보십시오.



보시다시피 뉘앙스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예수가 저 디오니수스라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가톨릭은 디오니수스와 바커스를 숭배하는 종교로써 행세하여 이교도들을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가톨릭의 예수가 성경의 예수님이 아니라는 증거는 이 외에도 많습니다.

1. 가톨릭의 예수는 포악한 신

가톨릭의 예수를 믿으려면 여신이 필요하다는 점이 그 증거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에게 직접 기도할게 아니라,
마리아에게 기도하여 마리아가 그 기도를 받아서 예수님에게 전해주게 만드는 것을 권장합니다.
이것을 전구기도라고 하는데,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교에서 남신은 포악하므로 사람들의 소원도 외면하고 사람들을 마구 대합니다.



이때 여신이 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남신에게 대신 빌어주어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이교에서는 으례 이런 여신들이 있어서 남신에 의해 학대받는 사람들이 위로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신은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로 불립니다.

또한 이교에서 여신은 부드러운 성품이며 곧잘 비둘기로 묘사됩니다.
세미라미스 신화를 보면, 세미라미스를 기른 것도 비둘기였고, 세미라미스가 죽어서도 비둘기가 됩니다.
이것은 아스타르테 신화에서도 그러한데, 알을 비둘기가 품어서 아스타르테가 나옵니다.
그리스의 아프로디테와 로마의 비너스 역시 비둘기로 상징됩니다.

가톨릭에서 마리아도 비둘기로 상징되고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필요하다는 가톨릭의 주장은
가톨릭의 예수가 이교의 포악한 남신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2.가톨릭의 예수는 으뜸신

또한 이교에서 신은 단순히 으뜸신일뿐이지, 유일신이 아닙니다.
이교에는 으뜸신 외에도 기타 신들이 있어서 신의 역할을 맡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마리아와 저세상 성인들은 이런 기타신들의 개념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저세상 존재들 중에서도 특히 마리아에 대한 예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특별한 예배형태로 마땅히 영광받아진다.
신성한 종무원들은 이 가톨릭교리를 신중하게 가르쳐야하며
축복된 처녀에 대한 의식, 특별히 예배의식이 자상하게 촉구되어야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서류록

그래서 가톨릭 교도들은 마리아에게 예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할뿐 아니라,
심지어 가톨릭은 천사를 천신으로 규정하고 섬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호수천신에 대하여 특별한 신심을 가져야 하고,
그를 공경하며,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의 잠잠히 타이름을 따르고,
그가 우리를 계속 도와주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교황 비오 10세의 교리문답

그러므로 가톨릭의 예수는 유일신이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들과 천사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 중의 으뜸신일뿐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십계명의 제 1계명은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라가 아니고,
하나님을 다른 존재보다 높이 섬기라고 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형상을 섬기지 말아라는 제 2계명은 아예 삭제시켜 버렸습니다.

-천주 십계-

1계명: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여 높이고
2계명: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맹세를 발치 말고
3계명: 주일을 지키고
4계명: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말고
6계명: 사음을 행치 말고
7계명: 도적질을 말고
8계명: 망령된 증참을 말고
9계명: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10계명: 남의 재물을 탐치 말라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라고 일컫는 존재는
성경의 예수님이 아니라 이교의 으뜸신일 뿐인 것입니다.

3.가톨릭의 예수는 여신이 낳은 아들신

이교에서 아들신은 여신이 낳은 아들이며 여신에게 안긴 아이로 묘사됩니다.
가톨릭의 예수도 흔히 마리아에게 안긴 아이로 묘사됩니다.



이렇듯이 가톨릭에는 마리아를 강조하는 형상들이 많은데,
이것은 이교에서 여신을 강조하는 형상들을 본딴 것입니다.
이교도들이 아들을 안은 여신에게 기도하고 배례하고 분향하듯이
가톨릭도 아들을 안은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배례하고 분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왼쪽 그림이 바벨론의 세미라미스와 담무스이고, 위의 오른쪽 그림이 이집트의 이시스와 호러스인데,
잘 아시다시피 담무스와 호러스는 태양신입니다.
이들을 본딴 가톨릭의 예수도 역시 태양신인 것입니다.

가톨릭의 본부인 바티칸의 예배당을 보면
가톨릭에서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
여신이 태양신을 안고있는 모습임이 더욱 입증됩니다.



위의 사진은 바티칸 안에 있는 예배당인데, 보시면 왼쪽의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고
오른쪽의 여자도 아이를 안듯이 무엇을 안고 있습니다.
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래 그림에서 보십시오.



위의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바로 태양신인 것입니다.
가톨릭의 모자상에서 아이가 태양신이라는 것은 가톨릭이 그린 모자상들을 보면,
흔히 아이의 머리에 바알의 표식을 의미하는 후광이 붙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저렇듯 가톨릭이 그린 그림에는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이의 머리에 바알의 표식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또는 위 그림의 왼쪽 하단 그림에서 보시듯이 마리아가 태양수레바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이가 태양신이라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가톨릭의 예수는 성경의 예수가 아니라, 태양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예수는 기독교 교리를 이용해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은 이교의 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동일 본성이신데,
가톨릭에 있어서 예수는 바커스, 즉 디오니수스라는 태양신이고
디오니수스와 동일본성인 아버지는 번개의 신인 제우스입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신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태양신 바커스이자, 궁극적으로 번개의 신인 제우스인 것입니다.
이것은 페니키아의 바알과 엘, 이집트의 호러스와 오시리스, 바벨론의 담무스와 니므롯과도 같은 것입니다.
태양,불,광명,번개같은 숭배의 대상들은 모두 태양숭배의 산물이며 태양신은 신들중의 으뜸입니다.

구약시대의 바알,몰렉.그모스.마르둑 같은 신들이 이름만 다르지
모두 각 국가의 으뜸신이며 태양신들인 것입니다.
신약시대 적그리스도체제가 이런 번개,불,광명의 태양신을 섬길 것이
성경의 예언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계 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이처럼 신약성경에는 적그리스도가 섬기는 신이 태양신일 것이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예언을 가톨릭이 성취한 것입니다.

신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출처: 내가 매일 기쁘게
 "승리하는 삶 위한 완전무장의 비결"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요즈음의 그리스도인이 가장 빠지기 쉬운 죄악들은 무엇일까.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도 죄악의 덫에 걸릴 기회가 더 많은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여기에 <히틀러의 십자가>와 <다빈치 코드 깨기> 등의 저자인 어윈 루처 목사(시카고 무디기념교회)가 지적한‘그리스도인이 경계해야 할 7가지 덫’(Seven Snares of Enemy)의 주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생명의 면류관은 순교자와 함께 유혹의 시험을 극복하는 자들에게도 주어진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복음을 위해 순교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죄악의 덫은‘탐욕과 도박, 알코올중독, 포르노, 불법섹스, 쾌락, 신비주의’등이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기 만해도 갖가지 프로그램과 광고들이 이들 덫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특히 전 세계에 뻗어 있는 인터넷망은 유익하고 좋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사람들에게 타락한 열정을 불어넣기도 한다. 일단 죄악을 선택하면 그것을 더욱 자극하고, 표현하며, 거기에 중독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기쉽다.

‘더 많이’라 불리는 괴물… “탐욕”

돈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로 바뀔 때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위치에 둔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탐욕의 씨앗이 심어진다. 바울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했다.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탐심을 품어 먹어서는 안될 열매를 따 먹었다. 룻의 아내는 소돔을 탐하여 소금 기둥이 되었다. 다윗은 이웃의 아내를 탐하여 심적 고통을 겪었고 가정이 깨지는 아픔을 맛보았다.

탐욕은 단지 부유한 자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수입을 넘어선 생활을 하는 자의 죄이며, 현재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저당 잡히는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는 자의 죄다. 다른 이와 같은 수준의 삶을 살기 위해 신용카드를 이용한 대출은 탐욕이다. 하나님이 돈을 허락하지 않으시는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요구를 채우는 데 필요한 시간을 그분께 드려야 하며, 그분이 주실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야 한다. 오늘날에는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흔하지만, 차용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조성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탐욕을 이기는 방법은 먼저 마음속에 탐욕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탐욕을 간파하기 힘든 이유는 사회에서 그것을 전혀 치욕스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괴물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죄를 보여주며 그것을 극복하려는 동기와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근원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달리 삶에서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일 뿐이다. 베푸는 것은 많이 소유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공급함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다.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상호 합의에 의한 도둑질… “도박”

한 연구자료에 의하면, 십대들 중 67% 가량이 도박을 한 적이 있다. 코네티컷에서는 고등학생의 24%가 도박을 하기 위해 수업을 빼먹은 경험이 있었다. 메사추세츠에서는 고등학생 20명 중 한 명 정도가 도박 관련 범죄로 체포된 적이 있다.

도박은 상호 합의에 의한 도둑질이다.

도덕적이지 않은 어떤 일을 하기로 서로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박은‘부해지려는 갈망’에 기초한다. 도박업계는 도박의 부정적 이미지를 감추기 위해 ‘게임’이라는 명칭을 쓴다.

문명국이라면 착취당하는 자들을(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서라도 한 몫을 잡기위해 돈을 허비하는 자들을) 발판으로 삼아 경제를 일으키려 해서는 안 된다.

도박은 실제로 주 정부의 재원을 확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재원을 허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도박에서 비롯되는 다른 범죄들을 처리하기 위해 많은 비용이 지출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마귀가 도박을 창안했다” 고 말했다. 도박은 노동윤리를 위반한다.

노동을 조롱하는 행위다. 도박은 일하지 않고 버는 불로소득이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3:10)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돈을 얻는 성경적인 방법은 첫째는 일이다. 둘째는 유업으로 물려받는 것이다. 셋째는 투자이다. 넷째는 증여이다. 도박은 이 범주들 중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도박은 부유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것을 훔치는 짓이다. 그것은 인간의 약점을 발판으로 삼는다.

도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또한 △진리를 통해 자유해지라 △관계를 통해 힘을 얻으라 △회복의 계획을 철저히 세우라 △ 감시받고 통제받으라.

파멸에 이르게 하는 황홀한 도피처…“알코올 중독”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이 교회에 가져다주는 슬픔과 수치와 궁핍 등의 폐해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마 이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깔린‘은밀한 덫’ 중 하나이다.

중독자는 자신이 슬픔을 피할 방법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중독증은 만족감과 생동감을 약속하며, 현실의 심한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이 도피감을 갖게한다. 알코올로 인한 도취감이 그 고통을 대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중독문제와 관련하여 자기 의를 내세울 근거는 전혀 없다. 중독은 우리 모두에게 위험한 것이다. 그 덫이 설치되면 우리의 삶은 거기에 걸려들어 파멸될 수도 있다.

중독은 계층이나 남녀의 성이나 직업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 수많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십대들도 중독되어 있다. 성직자와 의사, 변호사, 회게사들도 약물에 의존한다. 어느 목회자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사기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부정행위를 정당화했다. 성경은 술취함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하고 있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단계는 하나님의 손길로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게 되면서 곧바로 구원을 경험한다.

술에 대한 관심보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분께 나아갈 때만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독자는 자기 자신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중독을 감추면 그것이 더 심하게 곪는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개입하여 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성경암송 훈련이나 위업과 더불어 매주 1회 이상 상담 등 관리도 필요하다.

영혼을 죽이는 은밀한 성적 망상…“포르노”

포르노의 70% 가량이 아이들 손에도 들어간다고 한다. 인터넷은 포르노 가게를 각 가정으로 옮겨 놓은 듯하다. 그리스도인 남자들 중 절반 가량이 어떤 형태로든 포르노와 싸우고 있다고 한다.

비기독교 세계에서는 포르노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포르노와의 접촉은 영혼을 죽이는 은밀한 망상으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마치 몸을 파는 곳을 지날 때 여성이 접근해서 잡아당기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결국은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게 된다고 경고한다.

올해 미국에서 태어나는 여아들 네 명중 한 명이 언젠가는 성추행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에는 성적 욕구를 이용하는 포르노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휴 헤프너가 본격적으로 포르노 사업을 시작했던 때인 1953년에만 해도 누군가의 아내나 딸이 6분마다 강간당하지는 않았다. 소아성애는 드물었다. 지금은 소아성애가 매일 매시간 범해지고 있다. 포르노에서는 온갖 형태의 성도착이 소개되며, 그런 욕구들이 행동으로 표출되면서 갖가지 성범죄들이 발생한다.

정욕은 집요하게 들러붙기 때문에 끝까지 싸워야 할 싸움이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지체를 잘라버리는 것같이 절단하는 것이 해결책 중의 하나라고 했다. 실제로 눈을 뺄 수 없고 손을 잘라버릴 수는 없지만 그런 고통을 동반하는 절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정결을 위한 싸움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달콤한 독이 들어있는 오아시스…“불법 섹스”

하나님은 서로 헌신하며 언약으로 결속된 남녀에게만 성적 경험을 허용하셨다. 그들은 일생 동안의 헌신을 통해 온전한 상호수용과 조건 없는 사랑을 지켜내야 했다. 남녀간 결혼언약 밖에서의 섹스는‘이질적 결속’즉 다른 사람과의 옳지 않은 결속 관계를 조성한다. 그런 불법적‘영혼의 결속’은 중독증을 유발 하기도 한다.

불법 섹스 중독자는 탄로날까 봐 항상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가족들과 친밀하게 지내지 않는다. 성관계를 갖되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주저 없이 상대방을 바꿔 대는 이들도 있다. 어떤 식으로 하든 죄를 혐오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회피할 수는 없다.

난잡한 성관계는 결국 자기 부인과 다른 여자들이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과 같다. 에이즈 연구가들은 성관계를 맺을 때 결국 전에 상대방과 성관계를 가졌던 다른 사람들 모두와 함께 성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난잡한 섹스를 일삼았던 상대방은 자신의 상대들과 형이상학적으로도 결합되었다. 그들은 서로‘하나’ 가 된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라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라 △회개 유지를 위해 매일 노력하라 △가족 관계의 치유를 경험하라 등을 실천해야 한다.

결코 채울 수 없는 격렬한 갈증…“쾌락”

우리는 쾌락으로 흠뻑 젖은 문화 속에서, 영원한 가치에 관한 깊은 생각을 멀리하는 쾌락 추구자들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세상 쾌락에 몰두하는 것을 가리켜‘쾌락주의’라고 지칭한다. 이것은 섹스와 음식, 돈, 여가 그리고 온갖 종류의 소비를 즐기는 삶이다. 이러한 생활방식은‘이 세상’중심의 사고방식을 소중히 여긴다. 모두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실제로 우리의 문제는 쾌락 추구 자체가 아니라 그릇된 곳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시험거리다. 그릇된 쾌락은 행복에 대한 환상을 제시하지만, 결국 쓰라림과 공허함과 후회를 가져다준다.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의 목적이 마음껏 즐기고, 좋은 시간을 갖고, 행복해지고, 돈을 벌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단호하게 버려야 한다.

그것은 참된 삶이 아니다. 우리가 기진 돈을 하나님께 맡기고 모두 그 분의 것임을 진심으로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는 시간을 재량껏 하나님께 드려야하며 TV를 끄고‘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푹 빠져 있는 것만이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한 유일한 예방접종이다.

매혹과 음모를 지닌 암흑의 세계…“신비주의”

신비주의의 미끼는 TV와 인터넷, 서점, 영화 등 어디에나 있다. 한때 그것은 사회의 언저리에 존재했지만 오늘날에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덫은 호기심, 은밀한 지식, 성취, 힘 따위의 미끼로 우리를 유혹한다.

신비주의로 들어가는 입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TV와 영화가 가장 넓은 그물을 드리우고 사람들을 가장 많이 사로잡고 있다. ‘머피와 벰파이어’나‘마법에 걸리다’(Charmed) 같은 TV 프로그램들과‘프랙티컬 매직’이나‘크래프트’같은 영화들이 신비주의를 대중화 시킨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사탄의 나라를 접하거나, 마녀의 집회에 참석하거나, 피 의식에 동참하거나, 마귀에게 우리 영혼을 팔 수도 있다.

점성술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행위이다. 점판, 별점 그리고 점 따위는 사탄의 통제를 받는 신비주의에 복종하도록 유혹하는 매력적인 올무들이다.

초자연적인 치유(외적 치유이든 내적치유이든) 능력을 주장하는 것 역시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명상과 마약, 하드 록과 프리 섹스 등도 마찬가지다.

신비주의로 연결된 모든 경로를 배격해야 한다. 점판과 별점 책 또는 격렬한 게임 따위와 같은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라. 당신을 신비주의의 죄악 속으로 이끌었던 사람이나 장소로부터 철저히 떠나야 한다.

우형건 기자 ⓒ 크리스찬투데이



출처: 아멘넷
 

애굽에서 벽돌을 굽는 데 대한 전통적인 그림이다. 인부들이 물에 젖은 진흙을 괭이로 짓이기고 있으며 다른 인부가 그 흙덩이를 벽돌 굽는 자에게 나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주전 15세기 테베의 무덤에서 발견됐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 ( 창 15 ; 13 )

1. 힉소스 ( The Hyksos )

주전 18세기는 서아시아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불안정하여 많은 민족들이 이리저리 이주하던중 아케아인,고대 헬라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며 메디아 지방의 셈족들에게 압력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들 셈족속들이 고향을 떠나 다른 시리아 족속들과 더불어 남쪽 팔레스타인과 애굽 델타 지역을 목장을 찾아 방랑하기 시작했다.

이들 혼합이 된 민족이 애굽 델타로 침입했을때 애굽 사제 이며 역사가인 Manetho는 이들을 '힉소스( 애굽말로 "힉"은 "왕"을 의미하며 "소스"는 "목동"을 의미합니다.)라고 부르고 이들이 두왕조를 세워서 통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기치 않았던 때에 동쪽 지역들로부터 천한 태생의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우리 나라에 대한 승리를 호언하였다. 그들은 순전히 많은 숫자의 힘으로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우리 나라를 진압하였다."

애굽 역사상 힉소스의 통치 기간을 주전 1720 - 1570 년으로 잡고 있으며 본래의 애굽 왕조는 남쪽 테베(Thebe)로 피난하여 거기에서 왕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후 세게넨레왕은 힉소스와의 교전중 전사하여 (왕의 미이라가 전사나 피살당한 경우인 부서진 상태로 발견됨) 그의 아들인 카모세가 이어서 육상과 해전에서 승리하고 다시 왕위를 이어받은 아모세(Ahmose)때에 이르러서야 힉소스의 수도인 아바리스를 점령하게 ㄷㅚㅆ으니 주전 1570년이었다.

2. 힉소스에 대한 다른 견해.  

1824년 영국의 고고학자 윌킨슨(G.Wilkinson)은 이집트 중부 지방의 한 유적지인 베니 하산에 들러 절벽의 중턱에 만들어진 바위굴 무덤들을 조사하였다. 모두 39개나 되는 이 무덤들 중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귀족의 무덤 내부에는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턱수염과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산양 한 마리를 붙들고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힉소스 ‘아비샤’로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림의 위쪽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위해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윌킨슨은 바로 이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비롯한 창세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족장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무덤은 서기전 1900년경 건설된 것이어서 어느 정도 연대상으로도 가능한 추론이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이집트의 한 무덤벽화에서 히브리 족장들을 연상시키는 가나안 출신의 유목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히브리 족장들중의 하나인 야곱은 스캐럽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도장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최고신은 태양신 라(Ra)였다. 이른 아침에 짐승의 똥을 공처럼 둥글게 뭉쳐서 굴리고 가는 말똥구리를 그들은 태양신의 운반자로 여겨서 풍뎅이 형상을 부적으로 만들었으며 도장으로 새겨서 반지에 끼고 다녔다.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수집되어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된 한 스캐럽에는 ‘야쿱-헤르’라는 이름이 파라오를 의미하는 타원형 테두리로 싸여 있었다.

1969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 근처 쉬크모나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스캐럽에도 분명하게 상형문자로 ‘야쿱-헤르’가 표기되어 있었으며 베를린의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함께 출토된 토기들을 통하여 이 무덤의 주인공 야곱은 서기전 1750년경의 인물로 밝혀졌다. 또한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스캐럽에는 이집트 제 15왕조의 파라오임을 증명하는 표시와 함께 야곱의 이름이 나타난다. 그는 힉소스 왕조의 제 2대 왕으로서 서기전 1600년경 통치했었다.

서기전 1900년경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아비샤를 비롯한 서른 일곱 명의 힉소스들, 서기전 1750년경 이스라엘 항구도시에서 발견된 한 도시의 왕 야곱, 그리고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했던 서기전 1600년경의 파라오 야곱 등은 모두가 창세기 족장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해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비록 창세기에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등장하지만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라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은 파라오로서 약 10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식민지로 통치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로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
 


 
3. 신 왕국 시대 ( The New Kingdom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 출애굽기 1 ; 8 - 14 )

애굽 18조 왕조의 첫 바로인 아모세는 이민족인 힉소스의 침입 경험으로 국방과 강한 왕국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ㄲㅒ달았고 국내적으로는 건설 사업에 이스라엘 민족을 동원했고 국외적으로는 적극적인 군사적 제국주의를 취하여 이방 나라들을 점령하는데 힘쓰게 되었다.

아모세가 죽은후(BC 1546 ) 그를 계승한 아멘로테프 1세 ( BC 1546 - 1525 ) 와 투트모스 1세 ( Thumose ; BC 1525 - 1508 ) 는 남쪽의 누비아 왕국과 서쪽의 리비아 ,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군사 정복을 시행하게 됐었다.

이후 투트모스 2세때 그의 여동생인 핫셉스트(Hatshepsut) 가 자기 남편을 시켜 오빠를 제거하고 아들인 투트모스 3세가 바로가 되기까지 22년간 여왕으로 애굽을 다스렸는데 이 여왕이 모세의 양어머니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으며 다음회에 이를 다시 고증하고자  한다.  
 
 

출처: 아멘넷, 작성자: 누지문서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성경책 중 가장 오래된 '코덱스 시나이쿠스'. 이 문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고대 희랍어로 쓰여져 있다.(출처:1611kingjamesbible)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책이 디지털 복원화로 인터넷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AP 통신이 최신 보도했다.

영국 기술자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에 만들어진 성경 문서들을 따로 사들여 하나의 ‘이 북’(E-Book)으로 재탄생시켰다. 현대 테크놀로지로 인해 고대 기독교의 문화가 부활한 셈이다.

4개국 기술자들이 모여 디지털화 시도

최근 영국국립도서관 측은 고대 기독교인들이 만든 ‘시나이티쿠스 사본’(Codex Sinaiticus)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났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이번 주부터 신학자들은 물론 일반 네티즌까지 웹사이트 주소를 치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책의 구절들을 직접 볼 수 있게 됐다.

‘시나이티쿠스 사본’이란 이름은 ‘시나이 반도에서 온 책’이라는 뜻이다. 양피지에 고대 희랍어로 작성된 이 성경책은 신약 성서고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것으로 역사적, 종교적으로 매우 상징적인 기록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지난 19세기 중반에 독일 신학자 콘스탄틴 티쉔도르프(Constantine Tischendorf)가 시나이 산에 위치한 성 캐서린 수도원에서 이 문서들을 처음 발견했다. 문서 대부분은 당시 프러시아로 옮겨졌다. 독일이 아닌 러시아로 사본이 이동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라고 한다.

그 후에 1933년 영국이 소비에트 연합으로부터 사본의 347 페이지를 구입했다.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 도서관이 43페이지를 사들였다. 나머지 부분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박물관이 가지고 있었다. 1975년에는 이집트 출신의 몇몇 성직자가 성 캐서린 수도원 지하에서 사본 문서를 추가적으로 발견해, 이를 본국으로 가져갔다.

영국, 러시아, 이집트, 독일 신학 및 기술자들은 사본을 디지털화를 통해 복원시키고자 한 자리에 모여 작업을 같이 진행했다. 이들은 사본의 65만개의 고대어 단어를 현대 영어로 해석했다. 해석하는데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시나이티쿠스 사본’은 신약성서의 모든 구절이 실려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약 성서와 외경서의 절반 정도는 없다. 이 사본에는 구약 창세기부터 역대상까지의 내용이 누락돼 있다. 전문가들은 원래 이 부분도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영국국립도서관의 스캇 맥켄드릭은 “이 책은 고대 기독교도의 진일보 한 모습과 세대와 세대를 걸쳐 완성된 성경책의 직접적인 형체를 직접 느낄 수 있게 해준다”라고 말했다.

주안 그레이시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 작업 매니저도 “두말할 것 없이 매우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평한 뒤, “만일 (우리 곁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책을 보고 싶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인터넷에 접속해 직접 경험하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기 인턴기자 ⓒ뉴스미션
출처: 아멘넷
지 옥 에서 들 려 오는 소리/ 동 영상
조무웅, 2009/07/15, 조회 : 2
계시록 20 장 15 절 말씀
" 누 구 든지 생명 책 에 기록 되지 못한자 는 불못 에 던지 우더라"

http://keywui.chosun.com/contents/102/45/view.keywui?mvSeqnum=120716

영 어 클릭 하면 " 동 영상"  뜸

대구 산돌교회; 조 무웅 목사
노방 전도자 ( 23 년 쨰 실시중)
전도 집회 강사 ( 100 여 차례 인도)

기독교 방송 " 새 롭게 하소서" 출연
이메일 : j 3909@hanmail,net
010-5400-3909

다음카페 ; 산돌3909


출처: 아멘넷


나일강 하류 삼각주 지대 동북의 한 지역이다. 헤브론 남서쪽 약 19.2km 지점으로 애굽의 동북부 카이로 동북 50키로 지점 벨레스 부근으로 추측 이 지역은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살아온 지역이며, 그들이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미 350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라암셋 2세의 문장이 새겨진 돌들과 볏짚을 섞어 만든 벽돌의 흔적을 완연히 볼 수 있다


1. 서론
신석기 시대의 정착자들이  갈대아 (수메르의 우르 근방) 의 진흙 평지에 배수 시설과 관개 시설을 하고 있을 즈음에 , 아직
왕조가 수립되지 않았던 애굽의 최초 백성들은 공동 생활을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민족의 이동을 먼저 말하고 싶다.
원래 노아의 아들 함 자손은 임시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 퍼져 한때는 최초로 니므롯(Nimrod) 이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레센이라는 큰성을 세웠다.( 창 10 ; 12 )
그후 그 지역을 셈 자손이 차지하고 함 자손은 밀려나 애굽으로 이동하여 애굽인의 조상이 되었다.

함의 아들중 하나인 구스 (Cush ) 와 그의 자손이 애초에는 바벨론의 Kish에 거주하다가 이주하여  현재의 에디오피아 - 즉 북쪽 나일강 유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함의 다른 아들 미스람 ( Mizram )은 고대 애굽의 이름이다.
또 다른 아들인 붓 ( Put ) 은 리비아 ( Libya )를 이루며 애굽 서북방을 차지했다. 함자손이 이와같이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된것이다.
이들은 고대 애굽에서 선사시대에 게르시아( Gerzean ) 문명을 세워 고대 애굽인의 중심 인종이 된것이다.

성경에서 애굽의 첫 주역은 기근을 만난 족장들의 피난처로서의 역할이었다(창12:10이하,42-47장). 애굽은 나일강을 끼고 있어서 수리아.팔레스타인에는 극히 중요했던 지중해성 기후의 강우량과는 상관없이 번영할 수가 있었다. 히브리 민족의 선조를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애굽에서 기근을 피하였다. 옛 왕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굶주린 외국인들이 조각된 그림의 장면들에 나타나는데 그로부터 천년 뒤에는 (B.C. 1230년경)에돔 부족의 일부가 "바로의 큰 배려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축들을 살리기 위해서"비돔의 연못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애굽은 그 동편 경계에 국경수비대와 관료들을 두었고 방문자들은 가끔 애굽 땅에 들어가고 나올 때 호위를 받았다.(창 12:20에서의 아브라함처럼 )

2 . 이스라엘 자손의 이동.
야곱이 130세에 애굽으로 내려가 가족들과 고센에서 430년간을 기류하게 됐다. ( 창 15;13 )
이것에 대해 고고학적으로 여러 증거가 나타난다.
1) 레위 족보에 많은이름이 애굽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요셉에 대한 이야기에 애굽 정부 관리들의 명칭이 나와있다 ( 창 40;2 )
3) 성경에 나타난 것처럼 애굽인들도 꿈을 대단히 중시했다.
  귀족이나 천민 할것 없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은 꿈이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학식있는 서기관들이 갖가지 꿈을 해석하는 데에 도움이 될 교과서를 쓸 정도였다.
  일곱 암소의 주제는 바로의 꿈(창41:18이하)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책(The Book of the Dead) 주문 148번에도
  역시 나오는데 후자는 내세의 음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4) 애굽문서가 지적하는대로 애굽에서 마술이 큰 역할을 했다.
5) 요셉이 110세를 살았는데 기록된 그당시 애굽의 고위층 평균수명과 비슷하다.
6) 야곱과 요셉의 몸을 미이라로 한것( 창 20;2,26 ) 은 애굽 풍속에 의한 것이다.
7) 애굽인들이 유목 민족을 혐오스럽게 보았다. ( 창 46;34 ) 그래서 야곱 가족을 고센땅에 거주시켰다.
   고센은 고대뿐 아니라 현대에도 이집트에서 비옥한 땅이다.
8) 애굽 동북쪽에 고센이 있고  이곳  지명이 가나안 지방 이름으로 명칭한 것은 셈족속이 그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것을 증거한다.
    숙곳( Succoth , cnf 12;37 ) 바알스본 ( Baal - zephon , 출 14;2 ) 믹돌 ( Migdol, 출 14;2 )
     실루( Zilu ) 고센 ( Goshen , 출 8;22 )
9)  경제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애굽의 행정당국이 토지 소유주들의 상세한 기록대장을 비치하고 있다가 추수 전날에 조세를 위해서 정해진
곡물의 예상 수확량을 결정했다. 그러한 제도를 통해서라면 요셉이 제안한 기근대책은 쉽사리 실행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창41:34-3548-49,47:23이하)
또 삼각주 지역은 목축에 알맞는 땅이었다(창 46:34).이것은 B.C. 1600년경의 한 비문에서도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다.
10)요셉이 대신으로서 입은 세마포 관복(창 41:42)은 수많은 애굽의 그림들에서 익히 알려져 있다. 한편 애굽의 미이라와 관들(창 50:2-326).
그리고 무덤들(출14:11)은 그 당시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것들이었다


3. 왕조 시대
1) 초기 왕조시대 ( 주전 2900 - 2700년경 ) ; 애굽의 상부와 하부가 Thinis와 Menes에 의해 통일되어 왕조의 시초가 됐고  이 시기에 근동 지역과 교역이 확립 됐다.
2) 고 왕국 시대 ( 주전 2700 - 2200 년경 ) ; 거대한 피라밋의 건축으로 그 특색을 이루었다.
3) 중간 왕국 시대 ( 주전 2200 - 1570 년경 ) ; 애굽 상부는 남쪽의 Nubia까지 확대되었으며 , 사회는 봉건 조직하에 이르게 됐다.

4 . 요셉을 알지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 출 1;8 )
  제 13대및 14대 왕조에 와서 중간 왕국은 쇠퇴하여  셈족과  아시아족 후손들의   혼합 민족인 힉소스족에 의해 지배를 당하게 됐다. ( 1750 - 1550 B. C. )
   요셉시대는  12대 왕조 ( 2040 - 1785  B. C. )  즉 기원전 1870년경으로 추정한다.
  이민족의 정권인 힉소스 왕조 시대에는 평화롭던 이스라엘 민족 ( 출 1;7 ) 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게 되자 ( 출 1; 8 )
- 즉 힉소스 정권이 파괴되고 다시 애굽 정권이 시작되는
  신왕조 시대 ( 주전  1570 - 1075 년경 ) 에는 노예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글/누지문서님
출처: 아멘넷


1. 창세기 11장 31절의 세계

전장에서 언급하였거니와 문자로 기록된 토판 문서가 발견된 시대 - 유사시대의 시작이다.

이 발견의 중심인물은 George Smith(1840-1876) 으로서 원래 지폐 도안공으로 일하던중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대영박물관에 취직이 되어 수많은 토판문서를 해독하다가 1872년 노아홍수에 필적할만한 길가메쉬 서사시를 발견하여 런던의 성서고고학회에 발표하게 되었다.

"갈대아판 대홍수"라는 이 발표로 영국 언론의 후원금이 주어지자 그는 1873년 니느웨에서 앗시리아의 왕 앗슈르바니팔의 도서관 자리를 발굴하다가 길가메쉬 서사시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하는 쾌거를 이루며 이 사건이 성서고고학의 초석을 놓은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다.

2. 아브라함의 시대.

많은 고고학자들의 잇달은 발견으로 또한 문자의 해독으로 수메르 문명의 세세한 정보가 밝혀졌는바
주전 3500년경에 바빌로니아에는 북쪽에 아카드,남쪽에 수메르 왕국이 있었고 수메르인에 의해 세워진 "제3우르 왕조(2100-1728 주전) 시대가 아브라함의 시대이다.

3 . 아브라함의 고향.

첫째, 고고학자들의 발견으로 드러난 우르의 위치는 유프라테스강 오른쪽에 있고 바그다드에서 220마일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2년 Leonard Woolley가 제일 중요한 발굴을 시작하여 우르 왕조의 무덤을 발견했다. 또한 이곳에서 지구랏이라 불리는 피라밋 형태의 제단도 발견했다.

현 위치는 유프라테스강에서 6마일이나 떨어져 있지만 그것은 강의 위치가 변형된 것이고 그 당시에는 강의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풍부한 물자들 - 거대한 창고들에는 농산물과 외국에서 들여온 공물들이 저장되었고 금속공예와 모직 산업이 이 시대에 이미 중요한 산업이었다는 것이 조사에서 들어났다. 이 우르는 당대의 가장 거대한 고대 성읍이었으나 또한 이들이 섬기던 신들로 우상이 만연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성서 지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보고 있다.

둘째 , 다른 학설이 있다.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는 이라크 남부보다는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 지대인 하란 근처로 알려졌다. 터키의 한 도시인 우르파를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여기며 여러 전승들과 장소들이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다.

익소에는 그의 생가터가 이슬람교 사원으로 보전되어 있으며 이라크의 우르보다 터키의 우르파를 지지하는 학설은

(1),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우르를 출발하여 하란에 도착하였고, 아브라함은 하란을 출발하여 가나안에 도착하였다(창 11:31-12:6). 그렇다면 여정 상 우르는 하란과 가나안의 연장선 상에 위치하여야 하며 당연히 가나안이 남쪽에 있으므로 우르는 하란 북쪽에 자리잡은 도시가 되어야 한다.

(2),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늙은 종을 고향으로 보냈다(창 24:1-10). 이 종은 아람 나하라임에 위치한 아브라함의 할아버지 ‘나홀’의 성에 가서 리브가를 데려왔다. 아람 나하라임은 한글성서에서는 메소포타미아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서기전 3세기에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성서에 따른 것이다(창 24:10).

왜냐면 당시 메소포타미아라는 지역은 오늘날의 이라크라기 보다는 하란을 중심으로하는 시리아와 터키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명의 오류 때문에 성서지리학자들은 아브라함의 고향을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즉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서 찾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아람 나하라임은 ‘두 강의 아람’이라는 뜻으로서 발릭크 강이 유프라테스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3), 창세기의 다른 구절에서는 리브가의 고향을 밧단 아람이라고 밝히고 있다(창 25:20).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두 아내와 두 여종을 통해서 모두 열 두 아들을 낳았고 이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아카드어로 ‘파다누’가 ‘길’을 의미하기 때문에 밧단(파단) 아람은 같은 의미를 지닌 하란을 지칭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밧단 아람은 다름 아닌 아람 나하라임과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4),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조상을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신 26:5). 아람 민족의 지리적 고향이 바로 시리아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하란 지역과도 일치한다. 사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적 아비 집을 떠나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 현장이 바로 하란이었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르"라는 도시 이름이 오래된 지도에 보면 다른데서도 몇군데 발견된다고 하는바 이는 셈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지않을까 추정된다는 점이다.


출처: 아멘넷


들어가는 말 ;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때 , 성경공부 시간에 답이 미진한 부분에 대한 의문들을 끝까지 찾아보려는 마음의 욕구가  언제부터인가 시작됐고 나름대로 애쓰던중 성경고고학이란 책을 통해 많은 해결을 봤으며 이것이 더 많은 성도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생겨났습니다.

인간 관계가 작은 일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기에 조심스러움으로 글을 올리지만 매번 부족함을 느낍니다. 다만 제목 그대로 초신자와 성경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예정이며 말씀을 잘 아시는 분들이나 더욱 깊은 내용을 원하시는 분들은 미흡할 것이고 깊은 양해를 구할 따름입니다.

바라기는 적은 분들이라도 이글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거나 말씀에 손이 쉽게 가게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1. 서론

성경 고고학  ( Biblical  Archaeology )  

성경적 ( biblical ) 이란 용어는 "성경"에서 파생된 용어임을 우리 는 잘알고 있읍니다. 성경 자체는 헬라어 비블리아이며  그 어원은 "비블로스( Byblos )" 로서 지중해 연안에 위치했던 고대 페니키아 ( Phoenician ) 인의  도시 이름입니다.  이 도시는 당대의 문서 기록의 수단이었던  파피루스의 상업중심지였었고 그래서 이도시이름이 "책"이란 명칭을 가지게 됐다고 합니다. 고고학 ( archaeology) 은  고대의 역사를 탐구하며 과거의 시대가 남긴 물적 증거와 시간의 흔적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이 칼럼에서는  고고학적 발굴 방법이라던가  연대 결정법은 이미 과학자들에 의해 인정됐으므로 고고학에서 발견된 사실들을 영적 의미에 대한 이해력을 가지고 성경의 역사적 사실에 적용하여 성경의 말씀이 사실임을 확증하는 작업을 해나갈  것입니다.

2. 성경의  시대 ( Biblical Age )
 
William Albright 교수는  성경 고고학시대를  주전 9000년부터 주후 700년까지로 잡고 있는데  그 근거는 첨가한 지도에 있는 성지 팔레스타인의 요단강 골짜기에 있는 우바이디야 ( Ubaidiyah ) 에서 인공적인 도구를 발견한데 있읍니다.
     
이어서 굴속 생활의 흔적 역시 갈멜산 굴속에서 발견되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몇개의 사람뼈와 자갈 , 도끼와 고기잡는 갈고리등을 발견했는데 학자들은 기후의 변화 ㄸㅒ문에 굴밖에서 굴속으로 변하게 됐다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주전 9000 년부터 주전 3500 년경까지를 선사시대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주전 35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에서 문자가 출현하여 기록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자 출현 이전을 선사시대 , 그 이후를 유사 시대라고 칭하는데  대체로 창세기 11장까지는 선사시대를 취급하고  , 12장부터는 유사시대로서  한 족속의 네 세대를 기록하고 있읍니다.

정리: 누지문서
출처: 아멘넷


벨하우젠( Wellhausen) 학파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히브리 족장인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역사적 사실을 부인해 왔지만 근대 고고학 발견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족장의 역사적 사실성을 확증하고 있다.

1925년 , 1941년에 누지( Nuzi ) 를 발굴한 결과 수천개의 토판문서 ( the clay tablets ) 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히브리 족장 역사의 증거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누지는 니느웨 동남쪽에 위치하고 주전 15세기에 미타니( Mitani )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 문서에 나타난 생활상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족장들의 사회생활, 풍속과 같다.

첫째, 양자를 구하는 풍속
당시에 자녀가 없는 부부가 흔히 양자를 삼었는데 이는 부부가 늙은후 양자가 부모를 봉양하고 또한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양자가 상속하여 본 가족을 계승시키는게 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양자 삼으려고 생각한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다 ( 창 15 ; 2 ) 만일  양자를 삼은 후 친아들이 출생할 경우에는 친아들이 양자에 우선하여 수석 상속자가 되는 것으로 누지문서는 말한다.

둘째, 결혼 풍습
만일 본처가 아들이 없는 경우 , 자기 남편에게 첩을 구해주어 상속자를 얻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풍습에 따라 사라는 자기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이스마엘이 출생함으로 상속자를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사라 자신이 이삭을 낳게 되어 결국은 본 상속자가 생기게 되었다.

세째, 장자의 특권
누지 문서는 명백히 장자가 가진 특권을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야곱과 에서에 관한 구약의 기록과 똑같은 상황을 제공해 준다 . ( 창 25 ; 27 - 34 ) 만일 장자의 특권을 동생에게  인계하는 경우에는 동생은 형에게 보상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네째, 가신 ( 드라빔 )에 대해.
창세기 31장 34절에 보면 라헬이 자기 아버지 라반의 소유인 드라빔을 훔친 사건이 등장한다. 라헬이 이런 도적질을 하게된 이유를 누지문서가 설명해 주고 있다. 즉 , 라반이 소유했던 드라빔은 그 가정이 숭배하는 가신을 의미한 것인데 누구든지 드라빔을 소유하는 것은 그 가정을 관할하는 권리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한 딸이 가신을 소유하면 이 권리가 남편에게 가게 되어 라헬이 그런 행동을 취하게 된것이다. ( 창 31 ; 17 - )

상기의 몇가지 예에서 보는대로 구약에 기록된 족장에 대한 기록은 그 당시의 사회 생활과 풍습에 일치하고 있으며 , 이와 같이 누지문서는 창세기의 족장의 역사성을 확증해주고 있다.



출처: 아멘넷

영화 ‘소명(Calling, 2009)’

 

- 아마존 정글의 선교현장, 뭉클한 감동으로 전하다



  한국 선교사의 아마존 선교 현장과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국내 최초로 극장에서 개봉된다.





위험천만한 아마존 정글에서의 헌신…감동적으로 담아내

  부활절을 앞두고 4월 2일 중앙시네마에서 개봉되는 영화 <소명>은 브라질 아마존 정글에서 10년 동안 사역해온 강명관 선교사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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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부족 전체인구가 불과 10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바나와 족의 일상과 아마존 오지에서 살아가는 강명관 선교사 부부의 일상, 강 선교사가 그들에게 어떻게 문자를 만들어 주고 교육하는지, 교육 후 바나와 부족의 삶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등을 다뤘다.

  <소명> 제작진은 개봉을 앞두고 24일 오후 중앙시네마에서 시사회 및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영화 시사회 후 신 감독은 “방송생활 13년 수많은 프로그램을 제작했지만 이번 촬영처럼 고되고 열악한 촬영도 없었지만 강명관 심순주 선교사 부부의 삶을 카메라에 담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됐다”면서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어 신 감독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소명을 따라 숱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아마존 정글로 들어가 헌신의 삶을 살고 있는 선교사 부부의 모습은 가진 것이 많은 가운데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뭉클한 도전을 던져줄 것”이라며 “그 감동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극장 개봉까지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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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관 선교사는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영외고 국어 교사 재직 중 소명에 따라 선교사가 됐다. 강 선교사는 1999년 서울 명성교회(김삼환 목사) 파송으로 아마존 ‘바나와’ 부족에게로 들어가 바나와 부족을 위한 문자를 만들고 성경 번역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강 선교사 부부는 45~5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독사에 물려 죽어나가는 아이들, 독충ㆍ모기ㆍ피라니아ㆍ아나콘다 등 위험이 가득한 자연환경, 원숭이와 거북이, 대형쥐, 뱀 등을 잡아먹는 생활 등을 견디며 바나와 부족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한편 <소명>을 연출한 신현원(38) 감독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동물농장> 등을 제작한 바 있다.

    다음은 신현원 감독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신현원 감독과의 인터뷰 전문

강 선교사 선교 현장을 어떤 계기로 촬영하게 됐는지?

  모 방송사 아침방송 제작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8월 중순경 교회 후배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왔다. 통화 중에 느닷없이 강명관 선교사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명성교회 파송선교사라는 것 정도는 안다고 했더니 그 선교사의 사역지를 촬영해야 하는데 문득 내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노라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석 달을 비워야 하는 스케줄을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하고 주님이 주신 소명이라면 가야 하고 머리가 복잡한 채로 저녁예배에 참석했는데 그날 저녁 예배 중 유난히 해외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목사님께서 “젊었을 때 한 1년 정도는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주님께 바치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주님께서 나보고 가라 하시는구나 마음의 결정을 하고 준비과정을 포함한 3개월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게 됐다.

바나와 부족, 강 선교사의 신앙과 생활모습은?

  아침이 되면 바나와 부족 사람들은 강 선교사 집 앞에 삼삼오오 모여 어슬렁거린다. 먹을 것이 항상 부족한 그들에게 강선교사 부부가 커피와 비스킷을 대접하기 때문이다. 저녁 때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은 주로 사냥을 통해 해결하는데 사냥을 못하면 굶기 때문에 열량 소비를 최소화 하기위해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은 원숭이, 야생들쥐(꾸찌), 거북이 등을 잡아먹는데 모든 사람의 꿈과 소망은 멧돼지를 잡아 맘껏 먹어 보는 것이다. 주일예배는 많은 어른들과 어린이들이 모여 드리는데 비록 글자는 잘 모르지만 얼마 전 만들어진 그들 말로 된 최초의 찬양집으로 하나님께 정성껏 찬양드린다. 주일저녁에는 ‘바나와’어로 번역된 영화 <누가복음>이 상영된다.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없는 그들에게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줌으로써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다. 영화상영 후 심순주 사모가 끓인 80인분의 잡탕죽과 포도주스가 제공된다.

강 선교사의 성경 번역사역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강 선교사의 성경번역 사역은 참으로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우선 바나와 말을 알아듣는 것이 급선무였다. 모든 사물에 대해 일일이 묻고 답을 얻어서 터득한 바나와 말을 포르투갈어 알파벳을 빌려서 문자로 만든다. 그렇게 창조된 글자 즉, 포르투갈어 알파벳으로 표기된 ‘바나와어’를 글자를 모르는 그들에게 가르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나와 언어로 현재 성경 번역이 약 30% 가량 진행됐고, 2015년에 바나와 성경번역 사역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촬영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직업상 유럽, 호주, 동남아, 아프리카 등 해외 촬영을 수도 없이 다녀서 오지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는데 아마존에 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3가지 무서운 독충 무꿍이, 삐웅, 메롱이의 공격이었다. 증상은 그야말로 미치도록 가려운 것, 물집, 고열 3가지였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몸 속을 헤집고 다녀 팔 다리가 온통 벌집처럼 되었다.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다. ‘네가 이곳 아마존에 와서 강 선교사의 사역을 촬영하는데 이 정도의 고통도 경험하지 못하고 어떻게 강선교사의 사역을 논할 수 있겠니. 너는 길어야 한 달이지만 강 선교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역이잖니? 네가 이 고통을 잘 참고 경험해서 영상으로 표현하거라’ 그 후론 기쁜 마음으로 견딜 수 있었다.

 

 


촬영 기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강명관 선교사의 수고도 수고지만 심순주 사모의 내조는 참 감동적이었다. 믿음의 동역자로때로는 한 남편의 아내로 그림자처럼 묵묵히 내조하는 그 모습은 하나님 가정의 표본이었다. 또한 바나와에서 1000km 떨어진 쁘라켓꽈라 선교사자녀 정글학교에 다니는 예슬이와 한솔이,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벌레들의 고통을 이기고 맨발로 학교를 누비며 공부하는 그 아이들을 볼 때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물밀듯 밀려왔다. 예슬이와 한솔이를 인터넷도 되고 학원과 뛰어난 선생님이 있는 상파울로 같은 도시학교에 보내지 않고 이렇게 비전공자가 가르치는 정글학교에 보냈느냐고 물었을 때 강 선교사님께서 예슬이와 한솔이도 대를 이어 선교사로서 헌신하게 만들려고 정글학교에 보냈다고 했을 때 큰 감동을 받았다. 참으로 이런 귀한 가정을 보니 날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고민했던 내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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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daum.net/san05/13757344



상영타입 : 


원제 : Calling, 2009


감독 : 신현원


주연 : 강명관 선교사 외


나레이션: 유열


제작국가 : 한국


등급 : 전체관람가


상영시간 : 72 분


장르 : 다큐멘터리


개봉일 : 2009-04-16


홈페이지 : blog.paran.com/calling2009

 

 


출처: CGN TV "서빙고 수요여성예배 中 소명(2009/05/08)"
자전거여행지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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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의 역사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신약 시대에는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에 반해 사탄은 구약 시대에는 이방인에게 나타나 신으로 군림했고, 신약 시대에는 프리메이슨에게 힘을 실어줘
온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고 타락시키며 사망으로 인도하는 흑암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아예 인류의 역사가 흑암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탄은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류가 흑암의 역사로 기울은 것은 정신 문명을 멀리하고,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물질 문명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작고 초라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명 나무를 멀리하고, 크고 화려하지만 사망으로
인도하는 선악 나무를 선택한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예전에 하나님 최 측근에 있던 케루빔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왔으나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의 보좌를 탐내
자신 밑에 있는 천사들과 함께 배반을 일으켰습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심판을 받아 하늘에서 쫓겨나 지상으로 내려왔으나,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에게 나타나 신으로
섬김을 받았습니다.

사탄이 케루빔이었을 때의 모습은 머리가 4개(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이고, 날개가 4개이며, 손이 4개 입니다.
이 모습은 이집트와 바빌론과 그리스와 인도의 고대 신앙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신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고대 신화도 정의로운 신이 불의한 창조주를 하늘에서 쫓아내고 인간을 다스린다는 불손한 내용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이런 사탄 숭배 요소는 현대에도 프리메이슨과 힌두교(요가, 기수련, 뉴에이지)에 남아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직간접적인 영향 하에 살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진리 말씀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성령으로 거듭나기 이전에는 사탄의 주관권 아래에서 내 의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하리라.

나도 모르게 솟아 오르는 분노와 욕심, 불안과 의심과 음란한 생각 등은 사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탄은 교활해 온갖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고 있으며, 어떤 때에는 진리와 거짓을 섞어 놓아 구분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이단종교나 철학사상에 있어서 이치에 맞는 진실을 한번 신뢰하면 그 뒤의 거짓말은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사탄의 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와 역사 속에 숨겨진 진실을 깨달아 이를 분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최종 목표는 이 땅에 예전의 바빌론 같은 자신을 숭배하는 사탄의 왕국을 만드는 것이며, 지금까지 프리메이슨과
금융세력을 중심으로 모든 계획이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이상시 했던 세계화, 자유무역, 무한경쟁, 신세계 질서, 신자유주의 등이 모두 세계 정부를 세우려는
이들의 계획 중 일부입니다.


시편 36/12 악인은 의인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며 그를 향해 이를 가는도다.

이사야 24/16~18 땅의 맨 끝 지역에서부터 나오는 노래가 우리에게 들리니 곧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이라 하는도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나의 쇠약함이여, 나의 쇠약함이여, 내게 화가 있도다! 속이는 자들이 속였으니 참으로 속이는
자들이 심하게 속였도다, 하였느니라. 오 땅의 거주민아, 두려움과 구덩이와 올무가 네게 이르렀은즉 두려운 소리로부터
도망하는 자는 구덩이에 빠지겠고 구덩이 한가운데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창문들이 열리고
땅의 기초들이 흔들리기 때문이라.

마태 10/26 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워 말라. 가려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누가 8/17 비밀로 간직된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도 알려지고 공개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음모 이론

◆ 음모의 사전적 의미:
        1. 남이 모르게 꾸미는 꾀 (A Plot)
        2. 범죄 행위를 의논함 (a Conspiracy)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대형 사건에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 이외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불법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흔적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음모'
(陰謀 나쁜 목적으로 몰래 흉악한 일을 꾸밈)라고 합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인 일은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계획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진주만 기습,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유고 내전, 걸프전, 미 이라크 전쟁, 링컨 암살, 케네디 암살, 911 테러 등에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음모를 파헤치는 방법은 언론에서 보도하는 기사를 그대로 믿지 말고, 더 깊숙히 들어가 사건의 배경과 의문점,
모순점을 등을 찾아내며, 그 사건을 통해 누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음모 이론을 믿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언론 보도에 의해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뇌란 거짓말이라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그것를 진실로 믿게 되는 과정입니다.

고급 정보들은 미국이나 영국의 비밀기관에 의해 독점이 되고, 일반인은 겉 껍데기에 불과한 정보만 얻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사건의 내막을 모른 채 조작된 언론보도를 그대로 믿게 되고 잘못된 여론이 형성됩니다.

미국의 검은 집단이 담대히 음모를 자행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국민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언론사와 방송사를
소유하고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모이론을 표현한 영화 "컨시피러시"에서는 멜 깁슨이 미국 정부의 비밀 조직에 의해 테러범으로 세뇌되어지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얼마전 미국 CIA의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73년 칠레 쿠데타가 미국 닉슨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감행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30년이 지나서 비로서 공개된 이 문서에는 음모와 공작이 얼마나 만연되었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고문과 테러, 학살로 수천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바 있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엘살바드로의 군부 독재 정부의 만행을 로메로 대주교가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다음날 피살되었는데, 이에 미국 정부가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엘살바드로 대사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미국은 중미와 남미의 친미 정권을 지원하고, 반미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CIA를 통해 많은 비밀공작을 자행했습니다.


* 다음은 백과사전(http://www.encyber.com)에 나오는 음모론입니다.

음모에는 모반(謀反) ·정체변혁(政體變革) ·암살 등을 위한 정치적 음모와 범죄의 공동수행을 위한 합의를
가리키는 형법상의 음모가 있습니다.

a) 정치적 음모

두 사람 이상이 비밀리에 공모하여 폭력이나 그 밖의 비합법적 수단에 의하여 정체의 변혁, 정권의 탈취,
정부 요인의 교체나 암살 등을 획책하는 것을 말합니다.
혁명 ·쿠데타 ·폭동 ·암살 등의 공모가 음모에 포함되나, 때때로 소규모의 형태로서 정당 ·노동조합 ·회사 ·
대학 ·종교단체 등의 소집단에서도 나타납니다.

BC 1200년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고문서(古文書)에도 궁정음모(宮廷陰謀)에 의한 람세스 3세의 암살기록이
있고, 구약성서에도 이에 대한 많은 기록이 보이며,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음모가 정치적 수단으로서
상식화되어 있었습니다.

절대주의 전제정치하에서나 독재정치하에서는 반대투쟁이 공공연히 행하여지는 관계로 음모사건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영국의 화약음모사건(가이 포크스 사건이라고도 하며, 의회의 회의장에 화약을 장치하여 제임스 1세와
황태자를 암살하려 한 계획. 1605년 11월 5일 밀고에 의하여 사전에 발각), 반히틀러 음모사건(1938년 위츠레벤
샤하트 계획, 1939년 초센에서의 육군의 계획, 엘사의 계획, 1944년 7월 20일 사건, 1945년 A.슈페어에 의한
지하방공호 환기장치 독가스 주입계획 등), 반스탈린 음모사건(1956년 흐루시초프의 보고에 따르면, 1937∼1938년
사이에 1934년 당대회의 대표자 1,966명 중 1,108명이 체포되었고, 당중앙위원회 위원 134명 중 98명이 체포 ·
총살되었다고 함), 베리아 음모사건(1953년 12월 정부전복음모죄로 총살),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毛澤東]파가
실권파를 음모라고 비난한 일 등, 그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또한 KKK(Ku Klux Klan), 프리메이슨(Freemason), 시오니즘단(團)과 같은 비밀결사는 음모의 소굴과도 같이
의심받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프리메이슨에 의한 전유럽적인 대음모라 함).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경찰권 ·비밀경찰 ·스파이망(網) 등이 총동원되는데, 음모를 획책하는 쪽에서는
고도의 비밀성, 강한 단결, 특별한 전달방법 등으로 대항하며, 지도자 ·자금 ·수단 ·시기(타이밍), 대중의 지지 등이
그 성공조건의 관건이 됩니다.
발견되면 즉각 체포되고, 간단한 형식적 재판을 거쳐 극형에 처하여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음모는 발견되어도 그 진상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점이 많으므로, 이 점을 역이용하여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하여
음모사건의 날조(捏造)가 자주 행하여집니다.
독일의 국회의사당 화재사건(火災事件)이 그 예로서 자주 취급되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날조가 아니라는 설도
나와 진상불명의 상태에 있습니다.

국제적인 음모도 적지 않아 제5열(第五列) ·스파이가 암약하며, 중립국가가 책원지(策源地)로 자주 이용됩니다.
독일 참모부가 봉함열차(封緘列車)로 N.레닌을 러시아에 보낸 사건이나, 나치스가 획책하였다고 전하여지는
두하체프스키 사건(반스탈린 음모의 용의로 1937년 총살, 1958년 명예회복)이 국제적 음모의 예로서 유명합니다.

음모는 그것이 가진 비밀성과 폭력성 때문에 나쁘게만 생각되기 쉬우나, 러시아 혁명의 공산당, 레지스탕스
운동 등과 같이 성공을 거두면 평가(評價)가 전혀 달라지는 특색이 있습니다.


b) 형법상의 음모

두 사람 이상이 특정한 범죄의 실행을 협의하는 일. 범죄의 단계로서는 예비 이전의 단계에 속합니다.
음모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처벌되지 않고, 다만 예외적으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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