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저도 불자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집사입니다. 그런데 절에서 남편 사업이 어려울 때 1000일 불공기도를 드리면 사업이 불길 같이 일어 날 것이라고 해서 1000만원을 드려 1000일 불공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회로 개종해서 신앙 생활하는데 담임 목사님께서는 일천번제헌금을 매일 만원씩 하면 남편 사업이 잘된다고 합니다. 목사님! 일천번제헌금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1. 성경에서 일천 번제의 의미

다윗의 뒤를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솔로몬이 먼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사실이 “역대하 1장 6절에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불교와 같이 1000일 3개월 열을 동안 기도한 것이 같이, 1000일 동안 희생을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즉 일천 마리를 번제로 태워서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일천이란 수를 제물의 많은 수량으로 보고 있습니다. 번제는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솔로몬이 회중과 함께 그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에 곧 회중의 성막 옆에 있는 놋 제단에 이르러 그 위에 번제 헌물 일천희생으로 드렸더라.(대하1;5-6), 또한 역대상 29장21절과 역대하 7장 4-7절 등 솔로몬의 제사를 다룬 다른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1000마리의 많은 생축을 태워서 제사 드린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받으시고, 꿈에 나타나서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4-5)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자신에게 맡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여기셔서 지혜 외에 부와 귀와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역하1;7-12)

2. 한국교회의 일천 번제의 의미

한국교회의 유행처럼 퍼져 가는 이 일천번제는 솔로몬 일천번제를 예로 들었기 때문에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불자들이 소원 성취를 위해서 1000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불공을 드리듯이 매일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번제는 왕이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자나 재력가가 아니면 일천번제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항한 믿음이 강했음을 보여 줍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지금 한국 교회에서 드려지는 일천 번제와는 분명이 달리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일천번제는 불교인들이 1000일 동안 소원성취를 위해서 드리는 불교의 불공문화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기독교 국가 교회에는 없는 것이 한국교회에 있다는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필자는 승려생활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불교인들이 하는 1000일 불공과 연관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한국 불교 사찰에서는 1000일 불공 프랑카트를 대웅전에 걸어 놓고 회원을 모집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제는 “사업문제”, “입시문제”, “승진문제”, “질고문제” 등 현실적인 기복적인 소원 성취를 위한 1000일 불공입니다. 한국 교회 일부목회자들이 일천번제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한 번에 1000만원 헌금하기 힘들지만 매일 1만원씩 일천번제로 1000만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한 매일 5000원씩 하면 500만원 할 수 있고, 1000원 씩 하면 100만원은 누구나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수 돈 찍듯이 일천번제 드리면 교회 재정문제는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3. 한국교회 행해지는 일천 번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기뻐하시고 솔로몬에게 내가 무엇을 주기를 원하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국민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귀와 장수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사찰에서 1000일 불공 회원을 모집하면서 불공드리는 명목으로 큰 액수의 돈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사찰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천번제 예배가 교회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권유한 다면 기복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의 일천번제는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불자들이 1000일 불공기도 드리는 모습과 너무나 유사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천번제가 한국교회에 시작된 역사는 몇 십년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불교적인 문화와 사상들이 교회 안에 정착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뜻을 성도들에게 바로 가르쳐야하겠습니다.

출처: usaamen.net: 서재생목사 / 서울대현교회





들어가며

‘개혁’(改革)이란 사전적인 의미(새롭게 뜯어 고침)에 익숙해서,

교회에서 ‘개혁주의’라 하면 기존의 체제를 부인하거나 새롭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에 제시된 작은 자료를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명칭(名稱)의 의의(意義)

‘개혁주의’란 중세 로마교회가 성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1) 중세 로마교회의 비성경적 교회 운동에 반대하여 일어난 16세기 종교 개혁의 교회를 특징짓는 이름이다.

 2)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루터파 교회나 재침례파 교회에 대하여 구별된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3) 오늘날 칼빈의 5대 교리를 천명하는 신학과 교회들에게 동일시되는 이름이다.

 

2.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特徵)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이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키며, 일명 ‘칼빈주의’라고도 한다.

1)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2) 성경중심(Bible-centered)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3) 교회중심(Church-centered)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윌리엄 스탠포드 리드는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루터파와 재세례파로부터 칼빈주의자들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서,

쯔빙글리가 기초를 놓고 그 위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정립한 신학과 성경주석을 통해서 발전시킨 개신교 신학을 의미한다”고 했다.

 

3. 개혁주의의 원칙(原則)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다.

3) 오직 은총(Sola Gratia)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구속의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4. 칼빈주의 5대 교리(敎理)

하나님 중심 사상을 기본 원리로 하는 칼빈주의는 5개의 중요한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고도 한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옛날 신학이고,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은 현대신학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실상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가 먼저 나오고 이를 반박하기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이다.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신앙 전반에 관한 것이 아니고 구원론에 관한 것이다.

 

1)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3)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able Grace)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위 다섯 개 조항의 영어 첫 글자를 모아서 '튤립'(TULIP)이라고 외우면 편리하다.

 

5. 개혁주의 기본 교리(敎理)

1) 제한속죄 구원론

인간의 전적타락,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으로 구원론을 요약한다(드르트신경, 1618-1619).

구원에 있어 인간 본유의 능력을 인정하는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징계하면서

제한속죄 구원론을 완성하였다.

2)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개혁주의는 창조, 타락으로 인한 징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마지막 심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믿는다.

3) 하나님의 예정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작정, 예정 및 선택을 믿는다.

예정론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인바 신적 구원의 확실성을 담보해준다.

4) 언약신학

성경을 해석하는 한 체계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에 중점을 둔다.

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체계화 되었으며,

성경의 언약을 크게 구속의 언약(하나님과 예수), 행위언약(하나님과 아담), 은혜언약(하나님과 백성)으로 나눈다.

 

그 밖에

1)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     2) 우상 숭배에 대한 신랄한 비판           3) 역사 속에서 이룩되는 하나님의 목적,

4) 거룩한 신자의 생활        5)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서의 생활         6)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7) 권징과 훈련된 생활        8) 조직된 교회의 중요성과 목회적 관심  9) 예배와 생활의 단순성

등을 주목한다.

 

6. 개혁주의 공통 교리서(敎理書)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나, 니케야신경(Nicene Creed, 325), 또 칼세돈신경(Creed of Chalcedon, 451) 그리고 아다나시우스신경(The Athanasian Creed)에서 고백된 신앙노선을 개혁주의는 기본으로 삼는다.

 

1)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 A.D 200)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리가 요약된 것이다. 그리스도교회는 초창기부터 변증과 교육을 위하여 신앙의 내용을 표현하는 데 간단한 정식(定式)을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의 사도신경은 갈리아에서 5∼6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기초가 되는 로마신경은 2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 이단적인 가르침이 발전함에 따라 이 신경이 불신자나 이단자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교도를 구별해 내는 <표증>이 된다는 점에서, 이 신경에 대하여 심볼룸(symbolum;상징)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2) 니케야신경(Nicene Creed, A.D 325)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채택한 신앙 조항으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관하여 규정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규정하였고,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완전한 문서가 만들어졌다. 특히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한 하나님 되심을 강조한 신조이다. 주로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3) 칼케돈신경(Creed of Chalcedon, A.D 451)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서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등이 주장한 극단적인 그리스도의 단성론과 양성론을 배격하고, 신성이 인성(몸) 안에서 혼합되거나 혼란을 일으키거나 분리되지 않은 채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규정한 신조이다. 극단적인 단성론과 양성론을 모두 배격하고 둘 사이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4) 아다나시우스신경(The Athanasian Creed, A.D 500)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계승하여 아다나시우스가 만들었다고 전해 오는 문서인데,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5세기경에 삼위엘체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지만, 세 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한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는 영원한 분이므로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시며 최후 심판을 하실 것이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아다나시우스 신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7. 개혁주의 주요 신앙고백서(信仰告白書)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학체계가 보다 성경적임을 증명하고, 다른 신학활동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들이 신학을 교리화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이었다.

독일의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이 루터란과는 다르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화란의 개혁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알미니안주의자와 다름을 도르트 신경을 통하여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도르트 신경(161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 대소요리문답(1647) 등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신앙고백을 성경과 같이 절대화하지는 않으나 신조(信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 벨직신앙고백 (Belgic Confession, 1561)

홀란드에서 가이 드브레(Guido de Bres, 1522-67)가 작성한 것으로, 그 내용은 프랑스에서 나온 갈리칸 신앙고백과 매우 유사하며, 유럽 북서부의 저지대 국가들에서 박해받던 성도들을 위해서 쓴 변증서이다. 이 문서는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네델란드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이기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83)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87)에 의해서 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것으로 작성된 이 문서는, 독일 남부 팔라티네 지방의 군주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성찬에 관한 교리는 분명히 개혁주의를 따르고 있지만, 몇 가지 교리는 루터파와 개혁주의의 중간노선을 취하는 것도 있다. 칼빈이 이 문서를 검토한 후 극찬할 만큼, 아주 간단명료하고 경건한 내용이 특징이다. 이 문서는 독일 칼빈주의 신앙 고백에서 가장 탁월한 문서로 손꼽히고 있고, 오늘날에도 개혁주의 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3) 도르트신경(Canon of Dort, 1618-9)

훌란드 지역에서 발전된 정통 개혁 신앙의 절정기에 작성된 교리의 압권으로,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조이다. 예정론을 근간으로 한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알려진 구원론에 관련된 다섯 가지 핵심 사항을 채택한 것이다. 논쟁을 거쳐서 나온 문서인 만큼, 16세기에 나온 신조에 비하면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이며 논증적이다.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8)

칼빈주의 정통 신학의 최고봉에 위치하는 가장 체계적인 문서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이 문서를 성경 다음에 표준 신앙 고백서로서 채택한바 있다. 청교도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모여 작성한 이 문서의 특징은, 스코틀랜드 언약 신학이 반영되고, 성화와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이중 예정, 자유 의지, 아담의 행위 언약 등도 계속해서 중요한 교리로 인식되고 있다.

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8)

개혁주의 요리 문답 가운데서 가장 긴 문서로, 장년 교육을 위한 지침서이다. 거의 모든 개혁주의 교리를 다루고 있으며, 주기도문과 십계명도 포함되어 있다.

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maii Catechism, 1647)

대요리 문답과 함께 성경 전체적인 가르침을 쉽게 비우도록 만든 신앙 고백과 교리를 포함하는 문답 형식의 교육 도구이다. 특히 소요리 문답은 교회의 다음 세대들을 교육하는 지침서로서 성경에 충실하면서 우리가 믿고 있는바 신앙 고백을 균형감 있게 다루고 있다.

7) 제2 헬베틱(스위스)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1562년 하인리히 블링거는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작성하였다가 1564년 다시 개정하여 자신의 유언을 덧붙였다. 취리히에 전염병이 휩쓸면서 부인을 잃어버렸고,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살아남게 되고, 1565년 12월 팔라틴의 선제후 프레데릭 3세의 요청이 오자, 정통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문서로 이를 작성하여 베자의 추인을 받고자 제네바로 우송하였다.

이 고백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다음으로 스위스 개혁파 교회들의 지지를 얻었고,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제네바에서도 채택되었으나, 바젤에서만 거부당하였다. 심지어 헝가리 개혁 교회에서도 채택하였다.

가장 성숙하고 세련된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서로 볼 수 있다.

이 고백서의 특징은 초대 교회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8) 제네바요리문답(The Geneva Catechism, 1541)

칼빈은 제네바 교회가 신앙고백적인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 강요』 초판(1534)을 중심으로 제1요리문답을 작성했다(1537). 그는 제네바 시의회의 반대에 봉착하여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했는데(1539-41) 제네바 시의회가 다시 그를 청빙했을 때 그는 권징권이 교회에 있음을 인정해 줄 것과 요리문답을 가르치도록 허용하는 것을 청빙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는 제네바에 돌아온 후에 곧 바로 제2요리문답을 작성했다(1541-42). 따라서 우리는 요리문답 교육이 복음의 강설과 함께 개혁의 추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9) 프랑스 갈리칸 신앙고백(Gallican Confession, 1559)

박해받는 프랑스 위그노들이 칼빈이 제네바 신앙 고백을 기초로 하여 약간 수정한 문서이다. 오래 지속된 박해로 인해서 프랑스 위그노들의 힘은 크지 못하였으나, 그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의 정신을 따라 가리로 결의한 놀라운 의지가 담겨 있다.

10) 스코틀랜드 신앙고백(The Scots Confession, 1560)

스코틀랜드 최초의 신앙 고백으로, 요한 낙스와 다섯 명의 목사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낙스가 유럽에서 경험한 것들이 반영되었고, 하나님의 창조, 성육신과 예정과 십자가, 불가시적인 교회관,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로서 말씀의 선포, 성례의 시행, 권징의 실시를 규정하고 있다.

 

8. 주요 신학의 비교(比較)

 1)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ism)

일명 ‘칼빈주의’라고도 하며, 개혁주의는 바울, 어거스틴을 거쳐 16세기 칼빈에 의하여 체계화된 사상운동으로,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근본적 교리를 믿고 그 위에 신학을 세운다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기독교 유신론이며 가장 순수하고 고상하며 복음주의적인 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2)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

1850년대 유럽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에 반발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의 많은 부분 특히 창조와 기적에 관한 기록을 신화나 설화로서 이해하고자 했는데, 이에 반하여 근본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은 그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였다. 즉, 성경은 정확하고 오류가 없으며, 역사와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근본주의라는 말은 1915년 근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앙변증서인 '근본'을 출판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

17세기 이후 독일에서 루터교회의 ‘신앙의 고정화 현상’에 불만하여 생긴 경건주의 운동으로, 그들은 "기독교는 생활이요 체험이다"라는 표어를 가지고 성경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다.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주장하고 말씀의 내적 의미와 성화를 강조하여 교회 제도와 교리의 의미를 축소시킨 신학 사상이다.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을 율법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고, 성경의 교훈들에 대한 상황적 해석을 반대하는 배타성이 심하다고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복음주의는 기독교 사상 또는 그 조류를 일컫는 말이므로 특정 기독교 교파가 복음주의에 해당한다고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4)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고,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도 이성에 맞지 않는다면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재성, 부활 승천 등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거부하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다. 또 인간 본성과 역사의 발전에 대하여 매우 낙관적이며 초월대신에 내재 원리를 더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신학으로 진화론 등 자연과학 사상을 수용한다.

즉, 기독교를 계시종교로부터 윤리종교로, 말씀 중심의 종교로부터 인간중심의 종교로, 정통적인 방법 보다는 인간의 주체적인 사고와 활동과 의의를 인정하는 신학이다.

 

♥ 나가며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이 될 수 있고, 근본주의 신학이 될 수도 있고, 복음주의 신학도 될 수 있고, 자유주의 신학도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대한 이해 즉, ‘성경관’에 대한 바른 정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참고로, ‘양무리 마을’에서는 위 개혁주의 주요 신앙고백서 중에 1~7번을 표준문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기획탈북… 착잡하다

중국 감옥에서 풀려난 어느 저널리스트의 단상… 이국땅에 내던져진 탈북자들만 희생 당해

▣ 자료저자: 오영필/ 비디오 저널리스트·<금지된 여행>의 저자

텔레비전을 보면서 떠오르는 몇 가지 단상이 있다.

미국의 북한인권법안이 발효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즘 부쩍 신문과 방송을 통해 중국 베이징 외국 공관에 필사적으로 진입하는 탈북자들의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 처절한 모습을 볼 때마다 2년 전 필자가 참여했던 기획탈북의 경험들과 그때 만난 탈북자들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마음의 심난함을 억누를 길이 없다. 경험의 유무는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경험이 제공하는 사물에 대한 시선의 깊이와 새로운 형태의 편견 혹은 주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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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면 가장 큰 피해자는 이국땅에 내던져진 탈북자들이다. 10월22일 베이징 한국 국제학교로 진입한 탈북자들이 교장실에 둘러앉아 있다. (사진 / 연합)

중국까지 겨냥한 미국의 북한인권법

탈북을 한 동기와 그들이 그곳에 오기까지의 힘든 여정, 그들의 현재 심경, 언론에 재생산되어지는 그들의 이미지와 그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 하는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 탈북에 연루되어 중국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하루라도 빨리 감옥에서 나가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눈을 감으면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라 그리움이 밀려온다.

사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들의 정착지원금의 상당 부분을 받는 브로커나 일부 순수성을 의심받는 비정부기구(NGO)들의 입지는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발효된 북한인권법안에는 탈북자들을 돕는 NGO들에게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해준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조항은 궁지에 몰린 그들에게 확실한 실탄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명분을 주는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심지어 돈을 따라 움직이는 브로커들조차 NGO로 행세하는 해프닝도 전혀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러한 법안을 만들었을까? 최근 2년 반 동안, 주중 한국대사관에 진입한 탈북자들의 수가 800여명인 것에 견줘 미국 공관에 진입한 탈북자들의 수는 겨우 6명에 불과하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난민을 허용하고 있으나 그것은 정치적인 난민에 한해서다. 그러나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중국에 머물고 있다. 미국은 왜 탈북자들을 돕는 NGO들은 도우면서 정작 절박한 처지에 있는 탈북자들을 돕는 데는 인색한 것인가? 이 점이 바로 미국이 탈북자들을 북한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의심받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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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30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독일 학교의 담을 넘고 있는 탈북자들. 최근 중국 공안의 탈북자 단속이 부쩍 강화됐다. (사진 / 연합)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인권법안 카드는 북한뿐 아니라 중국까지도 겨냥하고 있는 듯하다. 오래전부터 미국이 중국의 소수민족 문제를 건드리며 중국을 견제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새로 개편된 후진타오의 체제로 바뀐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로 정치·경제·외교·군사 모든 분야에 걸쳐 막강한 힘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인권 상황을 건드리기 위한 전초전으로 이 법안을 만들었다고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인권법안 조항 안에는 중국 내에 거주하는 탈북자의 인권 상황에 중국 정부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촉구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대사관 진입 사건이 발생하자 대대적인 탈북자 색출을 벌인 중국은 한동안 사안의 경중에 따라서 적당한 당근과 채찍을 구사했다. 그러나 미국이 본격적으로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공안은 다 알고 있다

한 예로 최근 베이징 외곽의 한 아파트에서 숨어 지내고 있는 탈북자 60여명과 그들을 돕는 NGO 단체 회원 2명이 체포됐고, 며칠 뒤 다른 곳에서도 10여명이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외국 공관 진입에서 사후 처리에 급급했던 중국이 상황이 발생하기 전 준비 단계부터 이들의 움직임을 차단한 것은 중국 정부가 탈북자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인 의도를 간파하고 적극적인 대응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는 탈북자들과 함께 2003년 광저우 미국 영사관 진입을 준비하면서 3월13일 광저우역 부근에서 탈북자들을 만나는 순간 중국 공안에게 붙잡혔다. 공안들은 한 사람당 세 사람이 달라붙었고, 이미 도로에는 우리를 이송하기 위해 여러 대의 지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필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수십명의 공안들은 심문할 장소에서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함께 붙잡혔던 조선족 친구가 말하기를 일이 발생하기 이틀 전부터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 마당에서 젊은 여성이 우리 호실을 바라보며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고 한다. 며칠 뒤 호주 영사관을 찾아갔을 때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여성을 다시 보았다며 그때 좀더 신중하지 못했던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결국 중국 공안은 이전부터 통화 내역을 도청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탈북자들을 색출할 수 있다. 중국 공안의 정보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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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북한 인권법안이 통과된 뒤, 기획탈북이 확산되고 있다. 10월22일 탈북자들이 베이징 창핑구에 있는 한국 국제학교 공터를 가로질러 학교로 진입하고 있다. (사진 / 연합)

수년 동안 탈북 관련 NGO들은 열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인도주의 정신을 발휘해 위험에 처해 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인권법안의 발효 이후 그나마 독립성을 견지해오던 탈북 NGO들은 외부 종속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더 이상 행위의 동기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법 조항에서 나오고, 행위의 주체는 미국이고 NGO들은 다만 일정한 대가를 받고 심부름을 해주는 모양새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탈북 문제에서의 주도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한국 정부는 붙잡힌 NGO 관계자들의 신변 안전을 지켜야 하는 자국민 보호라는 큰 명제와 중국과 북한간의 외교 관계에서 난처한 상황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될 것이다. 최근에 붙잡힌 탈북자들은 외국 공관에 진입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단지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어 외교적인 보호를 받을 수도 없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최대 피해자는 탈북자 당사자들이다.0

또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은 최근에 불거지는 탈북자 문제로 남남갈등의 증폭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최근 필자는 통일부와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감사 때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 증인과 참고인의 자격으로 출석한 적이 있다.

남한 사회의 갈등 증폭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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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25일 탈북자 19명이 베이징 주재 한국 영사관 진입을 시도한 뒤 한 직원이 망가진 담장을 고치고 있다. (사진 / AP 연합)

탈북자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결방식에 대해 야당과 여당의 인식의 차이가 너무가 뚜렷하다는 것이고, 이와 관련해 시민단체간 그리고 세대간 뚜렷한 양분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로 북한에 대한 시각이나 정책이 더욱 갈라지고 있다. 그동안 영·호남의 지역갈등의 골이 깊었는데, 이젠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그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형국이다. 탈북자 문제는 국가보안법만큼이나 북한에 대한 시각 차이를 보이는 또 다른 핵심 사안이다. 그러므로 탈북자 문제는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통합과 관련된 아주 중요하면서 민감한 문제라는 점에서 탈북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좀더 깊고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최근에 필자는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도왔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에 갔다온 이후로 정치인에서 학자와 시민단체 NGO와 언론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만나면서 내가 마치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나 된 것처럼 다니고 있는 나를 보면서 가끔씩 놀라곤 한다. 두번의 감옥 생활을 했다고 해서 내가 과연 탈북자들의 아픔을 모두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과장해서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약자의 아픔을 동일화하고 싶어서 주님의 마음을 닮고자 했던 필자의 의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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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자 취재 도중 중국 공안에 붙잡혀 16개월간 수감됐다 풀려난 오영필씨(왼쪽에서 세 번째)가 기자회견을 열고 기획탈북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 / 한겨레 황석주 기자)

탈북자 문제는 인권이란 측면에서 선한 양심 혹은 신앙심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쉽게 호소할 수 있는 문제인 동시에 미국·한국·일본의 일부 정치 세력의 북한 때리기의 가장 유용한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필자는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것이다. 필자는 비둘기처럼 순수했을지 모르나, 뱀같이 지혜롭지 못했다. 정의로 포장된 구조적인 악을 생산해내는 이벤트식 기획탈북을 통해 궁극적인 피해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자인 탈북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낯선 이국 땅에서 무시당하며 이용당하는 이 시대의 사마리아인이다.

성경의 ‘마태복음’엔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힌 것이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즉 배고픈 자와 자신을 동일화하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시는 분이다. 도움이 필요한 탈북자들에게 한 것이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그들을 이용하고 그들의 마음에 피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럽지만 나의 수치와 잘못을 드러내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필자는 텔레비전에서 탈북자들의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보면서 필자에게 일어났던 아찔하고도 가슴 시린 기억의 문을 열어보려는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필자는 국내 한 선교회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방송>(TBS)과 계약을 맺고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외교 공관 진입 과정을 도와주며 취재하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16개월 만에 무죄 석방된 바 있다. 필자는 “탈북자 문제를 상업적·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라며 “정의와 공의로 포장된 구조적인 악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중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왜 한국인은 유달리 “삼(三)”의 숫자를 좋아 할까요?

목사님! 한국인이라면 내기를 해도 삼세번 하고, 만세도 삼세번 하고, 교회에서 기도 할 때도 주여, 주여, 주여 삼세번 합니다. 그리고 고스톱도 3점이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왜 삼(三) 숫자를 좋아 하는 지요? 알고 싶습니다.;

1,우리민족과 삼(三) 숫자 의미

한국인은 “수(數)” 숫자와 더불어서 살아 온 민족이라고 합니다. “수” 숫자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홀수와 짝수, 곧 기수(奇數)와 우수(偶數)가 있으며, 한국인은 대체로 홀수(기수)는 성스러운 수 숫자의 대접을 합니다. 그리고 짝수(우수) 속된 수의 숫자는 천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홀수인 1, 3, 5, 7, 9,는 신(양귀)들의 자리에 들어앉질 수가 있지만, 짝수인 2, 4, 6, 8,은 어림 반 푼도 없습니다. 그래서 장례도 3일장 5일장을 선호 합니다.이른바 세시풍속을 따른 명절은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과 같이 기수, 곧 음양설(陰陽說)의 양수(陽數)가 겹친 날입니다. 1월에 설, 3월에 삼진, 5월에 단오 , 7월에 칠석, 9월에 중구절 등은 근세까지도 잘 지켜진 길일이요, 명절들이였습니다.

그러나 2자나. 4자나. 6자가 겹쳐봐야 그건 헛 숫자 이였습니다. 음양(陰陽)사상에서 음수(陰數)이기 때문입니다. 질문한대로 우리민족이 유달리 “3”자를 양수 가운데에서도 각별히 융숭한 대접을 하였습니다. “3” 숫자는 저 홀로 쓰여 지는 것만도 아닙니다. “3”숫자가 반복 되어 9를 이루면서 강한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을 굿에서도 세말, 세되, 세홉으로 쌀을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숫자 “3”은 신성의 의미가 한결 강해집니다. 아기를 낳고 금줄을 치면서 몸조리를 하게 되는 삼칠일(21일간) 에도 칠일이 세번 반복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삼신자루라 하여 백지로 자루를 지어서 그 안에 백미 세되, 세홉을 넣어 안방 아랫목 구석 높이 매달아 놓습니다.;

 ;2,삼신(三神)상과 숫자 삼(三)

삼신할머니는 아기를 점지하고 낳고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삼신은 “3”의 신을 한데 합친 의미의 신이라고 하여 한자로는 삼신(三神)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삼신(三神)상에서 밥과 국이 항상 “3” 그릇 씩 차립니다. 또한 태어난 아이가 남자이면 붉은 고추 “3” 개와 숯덩이 “3” 개를 번갈아 줄에 끼워 대문에 가로로 걸어 둡니다.
여자아이는 청솔까지와 숯을 씁니다. 고추는 남성의 상징인 데다가 붉은 빛은 잡귀를 쫓는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3”이라는 숫자에는 성스러움이 들어 있다고 믿고, 고추, 숯 솔가지를 그것도 셋씩 끼워 금줄을 만들어 세이레 동안 대문에 걸어 두었다가 거두어 불에 태웁니다.   

3, 저승사자 밥과 숫자 삼(三)

초상이 났을 때 죽은 망자를 데려가는 저승사자 밥을 놓을 경우에도 짚신 세 켤레와 밥 세 그릇을 차려두는 이유도 죽은 이를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셋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촌에서 배를 만드는 때가 “3”월이며 배를 진수하고 선주가 “3‘일 동안 배에 잠을 잡니다. 이렇게 해야만 사고 없이 풍어를 이룰 수 있다고 우리 선조들이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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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재 부적의 숫자 삼(三) ;정초에 삼재(三災; 수(水)재, 화(火)재, 풍(風)재)가 들었으면 삼재를 면하기 위해서 머리가 셋인 매가 그려진 부적을 문설주에 붙입니다. 새해 설의 어원은 ‘설다. 낯설다“ 등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설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해로 통합되어가는 전이과정으로서 새해에 통합되기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미지의 한해의 액운을 방지하고자 정초에 대문에 부적을 부치고 연에 액(厄)의 글자를 씁니다. 이것은 그 해의 재액이나 못된 액을 연에 실어 날려 보낸다는 의미를 지닌 세속풍속 등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가 삼재(三災)부적입니다.

4,민간신앙(民間信仰)의 우주관도 삼(三)층 구조

샤머니즘의 우주관도 천상계(天上(界), 지상계(地上界), 지하계(地下界)의 삼층구조(三層構造)로 되어있다고 봅니다.
1)천상(天上)계는 천신(天神)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신령 같은 선신(善神)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2)지상(地上)계는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금수, 초목 등 만물이 살고 있다고 봅니다.
3), 지하(地下)계는 못된 악귀와 악령들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상계는 광명의 나라를 의미하고, 하계는 암흑의 나라로 보고, 무당은 상계와 하계를 통해 신령들과 영교(靈交)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 세상에서의 행동 한데로 사후(死後), 저승으로 갈 때 상계로 올라가기도 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고 믿습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저승”이니 “염라대왕”이니 하는 것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샤머니즘의 관념을 불교에서 유입된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이러한 관습 속에서 알 수 있듯이 3(三)이란 숫자는 그 숫자 자체가 민족적으로 중요시되고 있다고 봅니다. ;

5, 우리민족의 숫자 삼(三)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동양에서는 삼(3)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음양(陰陽)이 결합한 완전한 숫자라고 합니다. (1)숫자는 홀수로 양(陽)의 숫자이지만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2) 숫자는 짝수로 음(陰)의 숫자입니다.이 역시 불안전하다는 생각 합니다.

삼(三)은 일(1의 숫자 )과 이(2의 숫자)가 합해져 만들어낸 숫자로 음양(陰陽)이 합한 숫자이므로 완전한 숫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숫자 “3”은 한국인의 생활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녀왔습니다.
한국의 통관의례에서도 “삼신(三神)상에 밥 세 그릇”, “저승사자 밥상도 밥 세 그릇”을 비롯한 한국인의 재복과 수명과 자손생산 등을 담당하는 삼불제석이 숫자 “3”의 관념이 배어 있습니다. 민족마다 수에 대한 의미를 붙이고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3‘이란 숫자는 “모든”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최초의 숫자이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합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삼(三)의 힘은 보편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 ”<탄생, 삶, 죽음>“, ”<처음, 중간, 끝>’, ‘<소승달, 반달, 보름달>“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3이 <천(天), 지(地), 인(人)>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에서도 숫자 7을 완전한 숫자로 생각하는 믿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라는 성경말씀처럼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우리 문화가 복음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보혈로 우리를 살리셔서 새 사람 되게 하셨음으로 이 세상 풍속으로 전해지는 속설에서 우리는 관심을 끊어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임을 깨달아 알고 결단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서재생목사/ 서울대현교회/



아이합(IHOP)의 사역들이 오늘날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로렌 커닝햄(YWAM 총재)도 언급했듯이, 대추수 시기,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 명령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보기도 사역의 절대적 필요와 시급함 때문이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8397 

 

 한국YWAM 열방대학 중보기도센터는 국제예수전도단의 ‘이슬람을 위한 30일 기도’ 안내책자를 번역, 배포하고 있다. YWAM은 또 라마단에 앞서 다음달 1∼3일 서울 신용산교회에서 이슬람선교를 위한 중보기도 세미나를 개최,‘이슬람 상황과 선교전략’‘영적전쟁과 중보기도’‘선교를 위한 중보기도자 양성’ 등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1&oid=005&aid=0000073538

 

화요모임은 예수전도단이 한국교회의 예배와 기도 회복을 위해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찬양과 중보기도를 드리며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494460&cp=nv 

 

친밀한 중보기도, 트리시아 매캐리 로즈 지음,  예수전도단 하기에는 어렵고, 하지 않기에는 마음이 찔리는 중보기도에 대한 지침서다. 중보기도는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누리는 열쇠임을 일깨워준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5363142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는 12주의 강의와 12주의 전도여행을 통해 이뤄지는
예수전도단의 가장 기본적인 제자 훈련과정이다. 묵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법, 예배, 중보기도, 영적전쟁, 내적치유, 성경적 세계관, 전도 및 선교 등이 주 강의내용이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6894  

 

"중보기도" 라는 용어가 적절한지 살펴보겠습니다. 


‘중보기도’ 용어는 비성경적
예장 합동총회 신학부 산하교회에 공문

위 총회 신학부(하구봉 목사)는 지난 7일 제4위원회(중보기도)를 열고 전국교회
에 이 용어의 사용을 중지하라는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고문은 “성총회의 결의와 정신에 따라 총회 산하 각 지교회에서는

즉시 ‘중보기도’라는 용어의 사용을 중지하고

성경에 있는대로 합심기도(마18:19),
도고의 기도(딤전2:11), 이웃을 위한 기도(살전5:25), 청원기도(골4:3)등으로 사
용해 주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되어 있다.  

http://www.koreamission.co.kr/kyodan/xinu_view.php3?CP=1&SN=288  

 

1. 성도들이 사용하는 ‘중보기도’란 용어는 다른 말로 바꾸어야 한다. 

중보기도란 용어는 딤전2:1의 엔튜크시스(enteuxis)의 번역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1993년에 출간된 ‘표준 새번역 성경’이 “…간구와 기도와 중보의 기도와 감사를…”이라고 번역하였다.

‘개역 성경’에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로,

1977년의 외경을 포함한 ‘공동 번역’도 “…간구와 기원과 간청과 감사의 기도…”라고 하였으며,

같은 동양권의 ‘중국성경공회’의 성경(聖經)은 이를 『…간구(懇求) 도고(禱告) 대구(代求) 축사(祝謝)…』로 번역하였으나 중보기도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엔튜크시스’는 역본에 따라서 도고(禱告:개역), 간청(懇請: 공동), 대구(代求: 중국),

중보기도(仲保祈禱: 표준)로 번역되었다.

영어 번역은 Intercession(남을 위한 간청)을, 루터는 …를 위한 간구로 번역하였다.

대개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청원 기도"(Oxford Dict. of the Christian Church) 혹은

아브라함의 소돔을 위한 기도(창18:16-33)나 모세의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민14:10-19)처럼

“누구를 위한 청원”(Zondervan Expository Dict. of Bible Words)으로 풀이된다.

프라임(Derek Prime)은 이 용어에 대하여

“하늘에서 성도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간구하시는 중보기도”(롬8:34; 히7:27; 9:24; 13:15; 요일2:1)와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하시는 성령의 간구”에 사용되는 전용 술어라 하였다(롬8:26,27).

따라서 “…위한 기도, …대신한 기도, …와 함께 하는 기도” 등의 용어를 사용함이 좋겠다.

2. 성도의 ‘중보기도’는 사실상 기독교 교리 체계를 위협하는 용어이다.

첫째,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직과 중보기도를 손상시키고,

       비성경적인 교리의 출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속론적 의미로 사람에게 중보 혹은 중보자란 이름이 사용된 곳이 없다.

물론 중보기도란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칼빈은 성도들이 올리는 ‘서로를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하시는 중보기도의 되울림”

(시편20:2주석), 또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의존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중보와 제사장직에 참여하는 기도”로 이해하였다(벧전2:9의 주석),

그리고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요, 신자들은 기도의 중보자”란 궤변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성도가 중보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직의 손상과

예수님의 고유한 중보기도를 왜곡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로마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나 ‘성자들의 중보기도’와 연계되어

교리의 혼돈을 초래한다.

로마 카톨릭의 중보기도는 9세기에 활발하였다.

“칼빈 당시에도 ‘성자의 숭배’나 ‘죽은 성자들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가 유행하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성자들의 중보기도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직의 영예 박탈과 중보직의 완전성 부인”이라고 비판하였다. 중보기도란 용어가 교회 안팎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정통 장로교 총회의 결의나
성명서처럼 용어 사용이 불가함을 인식하고 다른 좋은 말로 대체하여 사용함이 옳을 것이다.

 

 김장진 목사<수향교회 · 전 고려신학교 교수>

예장 고려총회는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파주 고려신학교에서 제55회 정기총회를 열고 
 ‘중보기도’ 용어사용 금지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각종안건을 처리하고 신임원을 선출했다.

고려총회는 성명서에서 “최근 한국 교계에 ‘중보기도’가 만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사람이 사람을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불가능하며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는 용어임”을 강조했다. 불가 사유에 대해서는 성경말씀을 인용해 “중보 혹은 중보자는 유일무이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전용” 되며, “전 성경에서 구속론적 의미에서 사람에게 중보 혹은 중보자란 이름이 사용된 곳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특히 개혁주의 교회에서 사람이 중보 기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중보기도권이 사용됨은 중세의 로마카톨릭 교리가 부활함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고려총회는 대안책으로 “성경에 입각해 ‘~대신 기도’, ‘~위하여 기도’, ‘~함께 기도’ 등의 용어를 사용할 것”을 덧붙였다. 


http://yesu.net/?document_srl=8884&mid=yesu_news

 

http://blog.daum.net/kkho1105/10720

 

출처: 양무리마을 : 진실과온유

제15장 불교(佛敎)인 전도(傳道)에는 특별한 10대 전략이 필요합니다. (전도론)

1. 들어가는 말

 불교(佛敎)란 삼계(三界) 육도윤회(六道輪廻)전생의 밖으로 해탈(解脫)하는 종교이며, 한국인이라면 불교(佛敎)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으리 만큼 한국민족사에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는 브라만교에 대한 저항에서 발생한 인도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도에서 힌두교에 압도당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숫자적으로 힌두교가 불교보다 우위이지만 실제로 아시아를 지배하는 종교는 불교라 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는 불교문화권이라 할 만큼 아시아의 종교로 정착되었고 지금은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통계 숫자로는 불교가 기독교를 능가 할 만큼 문화적, 사회적 비중은 높습니다. 많은 서구인들이 한국의 사찰에서 한국 불교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도시의 종교이고, 불교는 산 속의 종교로 생각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불교는 산중불교에서 도시속의 불교로 변모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불교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다른 지역에서 포교로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불교(佛敎)권 선교(宣敎)전략 이해론

 필자는 대한불교 조계종 승려생활에서 개종한 목사입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불교에서 승려생활 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사님이 되어 집회를 인도하시며 불교를 조직적으로 비난하자 불자들이 교회에 거칠게 항의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개종한 목사로서 2000여 교회 집회를 인도하면서 경험한 결론으로는 승려들의 사생활이 절대로 불교의 교리나 사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목회자 사생활이 기독교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불교권 전도전략은 불교종단의 비리나 승려의 사생활이 불교인양 공격하는 입장에서 대립과 투쟁적인 선교전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도방법은 역효과만 가져왔다고 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주가 되심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고백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불교를 박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종교 간의 혼돈과 갈등만을 초래하게 될 뿐입니다. 한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다종교 사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1700년 전 고구려와 신라에 전래되어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이념을 지배하였습니다. 이후 고려를 이은 조선은 불교를 배타하고 유교를 정치 사회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조선 말기인 19세기 후반에 전래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면서 한국사회에서 유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지배종교로서는 소멸되고, 현재는 불교와 기독교가 중요 종교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는 불교가 전체 인구의 24.4%, 기독교가 21,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전도의 대상은 불교요, 불교의 포교 대상은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필자는 불교권의 소기의 전도의 결과를 이룩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불교권 전도 10대 선교전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신뢰성(信賴性)이 요구(要求)됩니다.

 불교는 종교(宗敎)인을 생각할 때 친절을 베푸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친절하고 자비(慈悲)를 베푸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합니다. 특히 불교는 종교인들이 사치하거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 도(道)를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절제와 검소한 생활의 본(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많은 승려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신뢰성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개종(改宗)만하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식으로 전도합니다. 즉 의식주문제, 직장문제, 결혼문제 책임진다고 큰소리로 전도했지만 막상 개종(改宗)을 하면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래서 개종한 승려의 대부분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산사(山寺)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스님에게 전도하는 교회나 목회자는 현실을 책임지지 못할 것들은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책임지지 못하는 공수표(空手票)로 상처만 입고 돌아간 승려만 필자의 계산에 수십 명이나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인 전도에는 신뢰성이 요구됩니다.

 2) 친밀(親密)한 관계의 형성(形成)이 필요합니다.

 불교(佛敎)인들에 대한 전도의 시작은 전도하고자 하는 대상과 먼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基本)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불교(佛敎)에 대해 무조건적인 멸시(蔑視)와 저주의 시각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은 개개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국가적인 안목에서 볼 때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사상(思想)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과의 만남 자체를 거부해서는 그들을 선교(宣敎)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승려나 골수 불교신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마귀(魔鬼)새끼 같이 저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부모와의 갈등, 학교에서의 성경이나 불경 의무교육에 대한 갈등, 직장에서 특정종교 배제와 같은 종교적 갈등 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간에 분쟁이 야기될 때가 많습니다. 불교인들에게 전도하고자 하는 열정은 이해하지만 불교권 전도방법적인 면에서는 비판적인 전도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도하면서 불쾌감을 주거나 자존심을 자극하는 언행은 피해야 합니다.
불자들이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은 기독교가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혀 폭력까지도 불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불교계에서 발행된 한 잡지에는 기독교가 불교에 가한 것으로 보이는 방화, 불상파괴, 불상훼손, 페인트로 십자가를 칠하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불자들의 눈에는 기독교는 철저한 배타주의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권 선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친밀한 관계 형성이 필요합니다.

 3) 만남과 대화를 통한 복음(福音)의 증거(證據)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전도할 때 만나는 기독교외 타종교인 1위는 불교인 일 것입니다. 이런 불교(佛敎)인들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적인 만남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는 생각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놓는 것은 대화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대화는 내 생각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도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전도 현장에서도 적용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기독교인과 불교인 사이에 서로 가슴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전도할 때 일방적으로 구원의 진리만 이야기하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불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년은 걸린다는 장기적 자세로 접근하여 먼저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고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가까워진 후 서서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않고, 서로 자기의 말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고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인으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 마음의 문을 더욱 꼭꼭 걸어 잠그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만남도 갖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자들로 하여금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못하고 기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불자를 전도 하고자 한다면 불자들을 만나야 하고, 만나면 대화가 필요하고, 대화에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 전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승려들이 미운 것이 아니라. 불교를 통해 영혼을 죽이는 사탄이 미운 것입니다. 불교 문화권에서의 전도자로서 준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필자가 불교인과 대화를 해보면 껍데기만 불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과거의 한국불교 신도였지만 지금은 학문의 불교로 포교하므로 불자들이 교리적으로 체계화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필자가 승려생활 할 때만 해도 기복 불교 이였으며  불교인인 된 이유는 자기 어머니가 석탄일 날 1년에 한번 사찰에 가거나, 불교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불자들은 적극적인 학문의 불교의 포교로 불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불자들과의 만남과 대화에는 교리적인 대화가 불가피 합니다.  

 4) 불교(佛敎)의 용어(用語)와 개념(槪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불교는 한국사회와 역사를 지배해 오다시피 한 종교입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우리민족 속에 민족복음화의 푸른 계절이 오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불교를 잘 이해하고 성경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불교인이기에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더욱 불교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불교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불교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상을 알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기독교신자가 “불교는 우상숭배의 종교다”와 같은 단순한 표현으로 불교를 비판하며 전도할 때, 혹은 불교의 교리를 불교에서 주장하는 의미로 말하지 않고, 왜곡하여 비판할 때, 이를 듣는 불교신자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반성보다는 “저들이 불교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저런 허튼 소리를 한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도하려는 기독교인을 향해 자기가 믿는 종교에 대해 옹호하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려는 기독교인의 말이 전도 대상자인 불교신자의 가슴에 전달되지 않을 것이고, 그 전도는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용어와 개념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불교인과 대화를 나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대화를 하면서 경전 이야기나, 교리적인 내용들 사이사이에 불교의 의례나 종교생활에 관련된, 기본적인 사항들을 적절히 삽입하게 되면 전도는 한결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불교의 용어와 개념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불교의 열반은 무(無)의 세계이며 불자들이 열반(해탈)의 구원에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기독교의 구원(하늘나라)세계는 불교와 같은 무(無)의 세계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막스 뭘러는 불교는 절망과 보편적 운명의 종교로 정의하였습니다. 대단히 적절한 지적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불교와 같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종교임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불교의 용어와 개념을 잘 이해하고, 용어와 교리를 접촉점으로 함에 있어서 고도의 지혜와 지식이 요구됩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인은 불교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절대로 요구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불교권 전도전략에는 불교의 교리적인 전도와 설득력이 빈약합니다. 그것은 불교에 대한 교리가 부족한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상대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면 교리적인 간격을 좁혀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은 불교의 사상, 역사, 문화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불교의 교훈(敎訓)법을 활용함이 필요합니다.

 불교는 유교와 더불어 한국사회와 역사를 지배해오다시피 한 종교입니다. 불교의 경전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는 그의 교훈을 많은 비유와 예화로 일관하여 이해를 돕지만 또한 듣는 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진리를 전파하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불교인에게 불경이야기, 고타마 싯달타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참 별일이라는 듯이 하다가 점차 진지하게 대화에 임합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자신의 신앙 현실과 불교 경전의 가르침 사이의 거리감을 토로하게 되고,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불교에 대한 석가모니 교훈법의 이해 폭을 넓히는 것은 기독교인이 불교인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길을 넓히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출석하는 교회 가까이에 사찰이 있으면 찾아가서 스님이나 불자들을 만나서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40년 동안 말씀하신 교훈의 말씀이 무엇인가와 예수님께서 3년간 공생애동안에 하신 말씀을 비교 전도할 때 많은 전도 결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 어느 날 석가모니에게 외아들이 죽게 되자 여인은 죽은 자식을 살려달라고 찾아 왔습니다. 석가모니는 여인에게 죽은 아이를 살리려면 마을에 내려가 조상대대로 삼대가 죽지 않은 가정이 있으면 겨자씨 하나만 얻어 오면 살려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겨자씨 하나만 얻어오면 죽은 자식을 살릴 수 있다는 소망 속에 마을에 내려가 온 마을 대문을 두드렸지만 조상 대대로 삼대가 죽지 않은 가정이 없어 겨자씨를 얻지 못하여 좌절 속에 돌아온 여인에게 누구나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찾아오니 죽은 자식 죽은 것을 꼭 참으라는 체관의 설법으로 위로한 교훈의 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18~26에 ‘회당장 야이로가 열두살 난 외동딸이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그 집에는 피리 부는 자들과 환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하시고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을 내어 보낸 후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잠자는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와 같이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야이로의 딸이 소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세 번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직후 살리셨고, 둘째로 청년 나인성 과부의 독자는 상여에 메고 가는 도중에 살리셨고(눅7:11) 셋째로 장년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만에 살리셨습니다(요11:25)
 인간은 인간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누누이 인간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때가 이미 늦어 일이 다 틀어지고 낭패됨을 이르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능력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석가모니를 찾아간 외자식을 잃은 과부도 살려 줄 것을 믿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살려주지 않고 죽음을 참으라는 체관으로 깨달음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은 결국 전능하신 주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6) 자신의 구원(救援)관이 분명(分明)해야 합니다.

 불교(佛敎)의 사상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관이 분명치 않을 때, 불교사상에 현혹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불교에 심취하는 것은 불교교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삶의 고뇌에서 나온 인생을 사색하는 철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인들에 대한 전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확신이며 이를 전하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숫자가 많다는 사실은 한국 기독교의 구원관에 대한 교육에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구조에 대한 한국갤럽조사에 의하면 종교개종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 종교인 중 17.2% 이였습니다. 개종한 응답의 현재 신앙 종교별 개종실태를 보면 불교신자를 100으로 보았을 때, 그중 13.1%가 개신교로부터 개종을 하였고, 2.2%가 천주교로부터 개종을 한 것으로 나타났고, 개신교신자의 경우는 9,6%가 불교로부터 개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개종 경험률에서 기독교인이 불교로 많이 개종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이 철저하지 못하면 불교인을 전도하다가 도리어 불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사상을 가볍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는 것을 개종한 목사로서 느낄 때가 많습니다.
또한 비 종교인들의 과거신앙 경험률의 조사에 의하면 “과거에 한번이라도 어떤 종교를 믿었던 적이 있습니까?”에서 전에 종교를 믿은 적이 있는 비 종교인 중 63.9%가 개신교를 믿은 적이 있고, 불교는 24.1%, 천주교는 16.4%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는 잃어버린 탕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불자들이 더 많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대한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조사통계에서 분명히 기독교인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통계가 높게 나온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기독교의 구원관이 철저하지 못하여 불자가 되는 것을 막는 것도 불교 선교전략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7) 사랑의 실천으로 전도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고 가르칩니다(요3:15, 롬5: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로운 자가 되었다”(롬3:23~24)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이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히9:22). 전도는 이 구원의 은총, 기쁨을 나 혼자서 많이 간직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일생동안 사랑으로 교훈하셨고, 또한 몸소 실천을 통하여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또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에는 기독교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교인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 한 실천 방법으로 교회 기관마다 여러 복지기관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00%가 기독교와 관계된 복지관만 찾고 있습니다.
이제는 최소한이라도 불교(佛敎)인이 운영하는 복지시설인 양로원이나 고아원이나 장애시설에 예수 이름으로 후원하는 사랑의 실천을 나누면 큰 의미 있는 불교권 선교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후원은 절대로 우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며, 복지시설에 있는 분들의 의식주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6.25때 선교사들이 선교전략으로 구제품들을 예수 믿는 사람들만을 구분해서 주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굶주림 사람들을 구제하고, 병이 있을 때는 치료 해주는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마43:48),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셨으며(눅23:34) 이처럼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이었으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며, 가장 아름다운 신성의 본질이며, 요원 불멸의 진리인 것입니다.

 8) 불교는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나는 종교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전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자신의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왜 슬퍼하느냐 “인생(人生)이란 제법무아(諸法無我)요, 세상(世上)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그러므로 허무(無)하고 무상(無常)하다, 너희들도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나는 너희들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믿지 말고 너희 마음을 스승 삼아 수행에 정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불교는 절대적인 무(無), 곧 일체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무란 공(空)으로 수냐타(Sunyata)를 한역한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계의 현상 곧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을 저버린 석가의 공(空)의 이론은 요컨대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석가는 인간에게, 인간을 부정하고 허무로 돌아가라는 것을 가르친 스승입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인간답게 참 인간의 모습을 실현하도록 그 스스로 모범을 보였고 그 길을 가르쳤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만사는 항구 불변하는 절대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공(空), 무(無)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를 무아로 세상을 무상으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고통이 수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무아입니다.
인간의 고(苦)는 그러한 무아의 실현을 위한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본유의 것이라고 믿어지는 자아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짐으로써 비로소 고(苦)의 정체는 밝혀지는 것이고, 마침내 무상한 모든 삶은 극복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지닌 고의 개념은 삶의 현상을 설명하는 비관적인 표현인 허무주의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인 열반의 세계도 “불이 꺼진 상태”, 혹은 “연소의 소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무생무사, 즉 생사가 없는 세계이므로 허무합니다. 열반을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한 곳입니다. 열반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와 대칭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허무하게도 절대적인 무(無), 곧 일체의 존재가 없는 공(空)의 세계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자신(自身)이 교주가 되거나 신의 위치에서 숭배 받기를 거부했고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깨달음의 세계란 “존재와 고통은 하나다. 존재가 없어지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이었고, 이를 깨달음으로서 부처님이 되었습니다. 해탈세계인데 죽음(死)도 탄생(生)도 없는 무(無)의 세계 공(空)의 세계로써 경전에서는 생사환멸연기(生死還滅緣起)라고 합니다. 불교의 지양점인 해탈(열반)의 세계는 없어지는 세계로 허무로 끝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교와 같이 공(空), 무(無)인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영생하는 종교입니다.

 9) 불교는 극락(極樂)세계로 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전도가 필요합니다.

불교인들에게 전도하다보면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는 천국(天國)이 있다면 우리는 극락왕생(極樂往生)이 있다.”고 하면서 “지금은 서로 달리 믿고 있지만 결국 갈 곳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는 곧 그들은 천국(天國)과 극락(極樂)을 동일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극락(極樂)과 천국(天國)은 같은 것이 아니냐?”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두 종교의 중요한 내세관인데도, 극락(極樂)과 천국(天國)을 유사한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불교의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천국(天國)세계와 같이 영원한 곳이 아니라. 윤회(輪廻)세계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極樂)은 최종의 단계가 아닙니다. 극락(極樂)은 최종단계를 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 합니다
 극락(極樂)세계는 불교의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불교(佛敎)이전 브라만 종교의 내세관(來世觀)으로 사후(死後)세계로 희락(喜樂)이 충만한 천계의 세계인 극락(極樂)입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설법(說法)을 통해서 윤회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다. 천인계인 극락도 영원한 극락(極樂)이 아니라 또 죽음이 있는 곳이므로 고통의 세계로 보았습니다. 그는 ‘존재(윤회세계)와 고통은 하나다.’라고 하면서 고통(苦痛)에서 해방을 받으려면 존재의 세계인 윤회의 세계, 그 자체로부터 탈출하는 ‘해탈(解脫)사상’을 창시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윤회(輪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이상(理想)입니다.
이성철 종정스님은 한국의 불자들이 매우 존경하는 스님이었습니다. 그는 1982년 4월 8일 초파일 범어에서 “극락(極樂)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잠잘 때 꿈속에서 잠꼬대하는 소리와 같습니다.”고 말씀했습니다. 불교는 극락에 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노인들이 죽어서 극락이나 가려고 염불을 하는 종교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부처 앞에 절을 하거나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한 적은 없습니다.” (성철스님 말씀) 이것이 진정한 불교입니다.
또한 그는 죽으면서 열반(涅槃)송에서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阿比)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성철스님의 열반(涅槃)송은 과연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철 스님에게 그가 장차 들어갈 지옥을 보여 주신 것 같습니다. 기독교 천국은 죽은 후 영혼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이요 주 재림 후 몸이 부활 변화되어 영생하는 곳입니다.

 10) 불교(佛敎)는 무신론(無神論)의 종교(宗敎)라는 이해 속에서 전도 가 필요합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BC 560년경 기존 종교의 신을 부정하고 계급제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생, 노, 병, 사의 삶 문제의 해결은 절대자 신(神)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계급층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궁극적 가치와 종교적 진리(실체)가 저 멀리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바로 인간의 삶과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열반경에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미혹에 사로잡힌 중생들이 나라고 믿고 집착하는 것은 사실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오온으로서, 오온(五蘊)은 가아(假我)이고, 비아(非我) 혹은 무아(無我)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장 가까운 곳, 자기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기독교처럼 절대자를 숭배하고 찬양하고 기도드리는 종교라기보다는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수행하는 종교입니다. 석가모니가 자기의 마음의 분석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존재(存在)와 고통(苦痛)은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神)중심적 사고에서 인간과 자아의 문제로 전환한 이래 인간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석가모니는 롬비니 동산에서 태어난 직후 사방을 7보씩 걸으면서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선언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에 자신 이외의 어떤 절대자도 부정하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생한 불교가 산신, 신중신, 칠성신, 시왕신, 조왕신, 부적 등 무속잡신을 포섭하여 선장 없는 배와 같이 방황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불교 신앙의 목적은 일체 중생이 다같이 성불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잡신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교는 종교보다도 인간의 의식세계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인식을 깨달음에서 찾고자 하는 사고이지, 영적 세계나 내세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를 종교로 보지 않고 철학으로 정의하는 종교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3. 나오는 말

 최근 한국 불교는 불교 대중화(大衆化)에 힘쓰기 위해 사찰들이 최첨단 음향 시스템을 갖추고 초현대식 절을 지어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학문(교리)불교로 전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불교(佛敎)권에 복음을 들고 맞서서 불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적인 전쟁과 같습니다. 불교(佛敎)권 선교(宣敎)사명을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 한국 교회는 불교와의 관계에서 독선적이고 배타주의적인 태도를 취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와 기독교 비교론적인 성경연구가 부족한 데 있습니다.
필자는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주제별 비교론으로 예수님과 부처, 천국과 극락, 부활과 윤회, 사랑과 자비, 성경과 불경, 교회와 절(사찰), 유신론과 무신론, 영생과 열반, 목사와 승려, 창조론과 연기론, 이렇게 나누어 무엇이 다른가를 논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연구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처음부터 보면 그들의 사상과 교리를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한 다음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불교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 기독교가 불교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에 대한 교리의 이해 속에서 “효과적인 전도 방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불교에 대한 교리의 상식적 수준의 지식은 있어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본 기고 글은 “불교권 선교 전도론” 90분 강의 안입니다. 긴 글 읽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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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렇게 가다가는 이내 망한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역사학자인 이만열 교수의 생각을 듣기 위해 지난 2월 말 경복궁 근처 자택을 찾아갔다. 이만열 교수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참담하다고 탄식했다. 그리고 한국교회 개혁의 한 대안으로 '작은 교회 운동과 가난 실천 운동'을 제안했다.

- 작년에 이어 올해 들어오자마자 한국교회가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소망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삼일교회 등에서 권력 싸움, 성추행 사건 등이 벌어진 데 이어 연합 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금권 선거로 대표회장을 뽑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갈수록 사회로부터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예견할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교회가 겉으로는 십자가를 내걸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속으로는 바알이라는 물신(物神)을 섬기고 있습니다. 교권은 세속 권력 못지않게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법천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선거법은 갈수록 엄격해지고 있습니다. 100만 원 이상의 법원 판결을 받으면 바로 당선이 무효가 됩니다. 사회 선거법은 점점 엄해지는데, 교회 선거법은 그런 것이 있는지도 아예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기독교는 선거에서 돈 쓰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금권 선거가 전통이 됐는데, 그러면 어떻게 기독교가 사회의 예언자로서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선출된 대표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을 만나는데, 돈으로 당선된 사람이 도대체 무슨 대표성을 가지고 간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기독교 현상을 종교 현상에 맞춰서 보려 하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흥했지만 차츰 세력이 약해지고 고려 말기에는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당시 많은 승려들이 물질적 세속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교회 목사들을 보면 고려 말 승려의 모습과 똑같아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앞날을 매우 비관적으로 봅니다. 교회가 하루속히 개혁하지 않으면 그 당시 불교가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걷게 될 것입니다.

국내와 유럽의 종교 역사를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끝에 쇠퇴한 불교 자리를 성리학이 대신했습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기독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유럽 기독교가 쇠퇴한 것을 볼 때 한국의 기독교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 타락의 양상이 너무 다양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가늠이 안 될 정도입니다. 한국교회가 특히 어떤 부분을 개혁하고 거듭나야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너무 큰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고치는 방법은 바로 교회가 '가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너무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권력과 명예욕까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해진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우고 예수의 십자가를 겸손히 짊어지고 이웃의 고통과 눈물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해지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가난 실천과 작은 교회 운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갈수록 커지거나 커지려고 하고, 큰 교회에 돈과 권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영성을 품고 있으려면 주변에 있는 작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섬기는 데 써야 합니다. 교회가 물질을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 작아져야 합니다.

교회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 문화를 변화시키는 '풀뿌리' 역할을 해야 하는데, 큰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라도 작아져야 합니다. 작은 교회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가난 실천'과 '작은 교회 만들기'와 같은 새로운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물론 대형 교회가 가진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순과 한계가 더 큽니다. 큰 교회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공동체성을 구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담임목사는 제왕처럼 군림하고 대기업의 구조를 가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구조를 가지고 공동체성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큰 교회 교인들은 교인들끼리 삶을 나누고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를 일구기보다는 이름 있는 교회 간판 뒤에 숨어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니 목사는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일방 독주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 익숙한 큰 교회 목사들은 교단이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큰 교회들은 구조적으로도 치외법권 지역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 의식의 개혁도 제도가 먼저 개혁되어야 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패한 인간은 의식을 스스로 바꾸기보다는 현실에 안착하려는 본능이 강합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제도적으로 강제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개신교 구조는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제도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 개신교회의 한계입니다. 단일 교회라면 제도적으로 권징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은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내부적 문제나 모순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중구난방입니다. 노회에서 징계받으면 탈퇴하고 다른 노회로 옮기거나 단체를 아예 새로 만듭니다. 구조적으로 교단 탈퇴 및 재가입이 자유롭습니다.

권징 구조가 무력하기 때문에 타락이나 부패가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큰 교회가 심합니다. 그나마 작은 교회들이 모여서 제도 개혁을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도적 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채 부패와 타락이 이어진다면 한국교회의 영성은 이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영성이 없는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 교회 스스로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없을 때 외부의 기독 운동 단체들이 바른 소리를 내어서 지적하거나 경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몇 단체들이 대형 교회로부터 후원받는 부분과 비판하는 것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기독 운동 단체들이 명확한 입장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비판할 일은 당연히 비판해야 합니다. 단체들은 지원을 받는 것이지 원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단체에 지원하는 일은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단체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교회로서는 '선한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후원하는 교회가 물질을 마치 자기 소유로 여기고, 자신들을 비판하고 쓴소리를 한다고 해서 지원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물질을 관리하는 사람은 청지기처럼 하나님이 어디에 쓰시길 원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도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이러한 기독 단체들을 격려하고 후원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도 긴장하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 뉴스앤조이 박성우기자 -

"군자(君子)"는 공자와 유가(儒家)의 이상적 인간형입니다. 논어의 첫 머리인 학이(學而)편에 군자의 길을 이렇게 세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여기서 “배운다.”고 하는 것은 단지 지적(知的) 배움이 아니라 인간적 배움을 말합니다. 즉 지적 배움을 통하여 인간이 되는 배움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학문보다는 인간됨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익히는” 것은 마치 새 새끼가 쉼 없이 날기 연습하는 것과 같다고 비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거운 과제라기보다는 즐거움이 따르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쁨은 혼자만이 누릴 것이 아닙니다. “은사(恩賜)는 곧 과제(課題)라”는 독일 속담처럼 그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또는 멀리서 모여와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혼자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쁨이 흘러넘칩니다(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그러나 세상은 이런 순수함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늘같이 물량적인 가치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본질에 충실한 사람들을 바보취급 하기가 일쑤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곧 무능한 사람으로 통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정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의 몰이해(沒理解)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군자라고 했습니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 이전(또는 그 이후)에 군자란 사회적 지배계급에 있는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이런 계급의 대칭으로는 피지배계급인 소인(小人)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그랬습니다. 돈 있고, 지위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은 군자연(君子然)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에서 그것은 곧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였습니다. 군자가 특권계층이었듯이 백인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했던 군자는 인격적으로 “된 사람”이었고 소인은 그와 반대로 인격적으로 “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용어였던 군자와 소인이 도덕적 인격적 전문 용어로 변화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득권 계층에 대한 폭탄선언이요 도전이었습니다. 가히 혁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信者)"는 누구입니까? 과연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떠합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즉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항상 “아멘”하는 사람이 참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이런 사람을 찾으셔서 그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들의 모임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έκκλεσία)”란 말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그 성격이 다른 것이 교회입니다. 여기서는 높아지기를 원하지 않고 낮아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섬김 받기를 원하지 않고 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어떤 인간적인 이념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이 그 기초가 됩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인하여 “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도 “신자”가 사회적 용어로 타락하였습니다. 교회 직분은 이미 계급화 하였습니다. 중직자는 기득권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섬기기는커녕 섬김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특권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옛날 우리 사회에서 돈을 주고 벼슬을 샀듯이, 중세 가톨릭에서 성직매매가 성행하였듯이 돈과 자리 챙기기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이제는 본래의 뜻과는 반대로 세상보다 더 추악하고 덜 개혁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멸망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던 우리 주님께서 오늘 한국 교회를 보실 때 어떠하시겠습니까? 생각하면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집은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사람은 기본이 잘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그 본질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본연의 모습을 찾을 때 이 땅에는 다시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출처: 아멘넷, 김오동 목사님 칼럼 글


빙의(憑依)의 참 뜻은 귀신에 씌웠다“ 또는 ”귀신(鬼神) 들렸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0년전 중견 탤런트 김XX씨도 교회 성도의 신분으로서 빙의 때문에 기독교적인 신앙치료가 아니라 세속적인 방법으로 치료 받았다고 아침 TV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기고자가 보았습니다.

1. 귀신에 씌웠다고 하는 빙의(憑依)에 대한 정의 (비정상적인 행동)

빙의(憑依)란 단어는 낯설지 않습니다. 흔히 '귀신에 씌웠다고 하는 현상'이라고 많이 알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빙의란 무언가에 '사로잡힌'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 현상을 합리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 '귀신(鬼神)'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무언가에 사로잡혀 사회생활에 방해를 받거나,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를 빙의(憑依)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빙의(憑依)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어떤 식으로 빙의(憑依)가 일어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빙의(憑依)란 한문으로 '기댈 빙(憑)' '의지할 의(依)'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전적 의미로서 빙의란 '의지함, 기댐, 다른 힘을 의지하는 뜻을 의미합니다. 즉. 사망(死亡)하여 육신을 잃은 영혼(靈魂)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빙의(憑依)현상인 귀신에 들리면 자기의 생각과 의지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타(他)의 힘에 조종되어 비정상적(非正常的)으로 움직이는 즉, 다른 인격적(人格的)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신이 학습하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과거를 알게 되거나, 환청(幻聽)이나 환상으로 심한 고통을 겪거나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귀신에 씌웠다”, “ 귀신들렸다“, “빙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1) 빙의현상에 대하여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반적으로 빙의[憑依]라 함은 탁한 기운, 영혼이 사람의 몸속이나 다른 것에 붙어 있는 현상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② 외면에서 느껴지는 현상;-영혼이 사람의 몸속이나 다른 것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자기의 몸에 접하였다고 믿는 망상이나 환각현상으로서 빙의망상(憑依妄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빙의란 나라는 몸 안에서 또 다른 영혼(靈魂)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빙의의 증상에도 정도에 대하여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가벼운 빙의(憑依);-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풀리거나, 일상생활에 크게 방해를 받지 않는 경우로,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기도와 예배로 해결될 수 있는 상태입니다.
② 일반적인 빙의(憑依);-어떤 감정,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여, 스스로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것이 잘못된 상태임을 알고 있어도 그 상태에서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③심각한 빙의(憑依);-타인의 말을 거부하고, 어떤 감정, 생각에 깊게 사로잡힌 상태로, 스스로 상담을 신청할 수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인격 전환이나, 정신과적인 질환, 반사회적 성격장애 등이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2, 귀신에 씌웠다고 하는 빙의(憑依)에 대한 무속적인 의미 (살기에 눌림)

무속적인 세계에서는 빙의란 사람의 몸 안의 정기(精氣)보다 강한 사기(邪氣)나 살기(殺氣)가 충만한 (공동묘지, 상여집,  패가. 시체)곳에 갔을 때 순간적으로 자기 정기가 약해져 사기나 살기에 눌려 갑자기 어지러운 현기증을 느낍니다. 이런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되어 자기 정기(精氣)를 빼앗기고 살기와 사기가 들어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올바른 사고력(思考力)과 판단력(判斷力)을 상실하고, 얌전했던 성품이 갑자기 포악해지거나 광기어린 행동을 하는 것을 “귀신(鬼神)에 씌웠다”고 말합니다.

빙의(憑依)의 대표적 자각 증상은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잠자리에서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데 대개는 가족 중 죽은 사람들이 자주 나타나 자기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꿈을 꾸고 뱀이나. 고양이 같은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며 잠을 자더라도 가위에 눌려 늘 머리가 무겁고 두통이 따르며 이명(耳鳴;귀에서 소리)이 들리거나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빙의현상이 되면 신체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 초조해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숨이 거칠어지며 자살충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빙의 자)을 치료하기 위해 무속인과 스님들은 귀신(鬼神)(사기, 살기)의 한(限)을 풀어주어야 한다면서 굿을 하거나 절에서 구병시식 내지는 천도의식을 하는 것을 종종 보곤 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귀신론(鬼神論)은 한국 무속인 귀신관과 혼합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속신앙의 샤머니즘(무당)은 귀신을 추방하는 것을 중요한 본업(本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축귀(逐鬼)의 방법으로 구타(毆打)법을 사용하여 환자의 신체를 구타하여 괴롭혀서 귀신(鬼神)을 내쫓는다는 식의 해괴한 행동이 교회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귀신을 괴롭혀서 내쫓는 것은 무속의 축귀(逐鬼)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내에도 이런 관념과 기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귀신(鬼神)에게 있다.”라고 무속(巫俗)과 같이 단정하고 귀신(鬼神)을 내쫓는다고 하여 멀쩡한 사람에게 소리 지르고 눈에 압박하고, 음란 귀신을 내쫓는다고 국부를 손으로 압박하는 구타법과 벼락같은 호통을 치고 소리치는 것 등은 무속의 경압(傾壓)법과 일치하는 귀신을 내어 쫓는 방법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어느 교회에서는 귀신(鬼神)을 내쫓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환자를 때려 초죽음이 되게 했습니다. 이런 것은 세속(世俗)의 무속신앙 풍습에서 귀신들에게 벽사의미 있는 복숭아나무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본 딴 것입니다.

최근에 방송가에서 빙의(憑依) 치료자로 화제가 되고 있는 묘심화 스님은 “열병처럼 온몸을 휘감고 도는 신(神)과의 인연이 내겐 숙명이었나 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강한 예민한 체질과 영적(靈的)인 능력으로 신(神)의 세계를 넘나들었다”며 자기를 소개합니다. 특히 그는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주고혼(無主孤魂), 즉, 죽은 혼령(魂靈) 중에 윤회하지 못한 영혼이 허공계를 해매고 있다는 귀신론(鬼神論)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빙의 치료방법은 전통적으로 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구병시식, 굿, 주문, 부적, 기치료, 최면치료, 퇴마 등이 있으며, 불교적인 치료는 천도의식으로 빙의에서 치료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 귀신에 씌웠다고 하는 빙의(憑依)에 대한 의학적인 의미 (정신의 분리된 현상)

빙의(憑依)는 의학계에서도 정신의학 분야로 다루어지고 있고 빙의의 현상을 세계보건기구에서도 거론하였던 것처럼 정신의학 분야의 한 부분으로 2002년에 발표한바 도 있습니다. 미국의 정신의학(精神醫學)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빙의 현상’을 ‘포제션(possession)’이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원어를 그대로 번역한 ‘빙의(憑依)’로 해석되는데 영혼이나 강력한 힘, 혹은 절대적인 신의 영향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인격이 나타나 평소의 그 사람의 행동과는 판이하게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질병을 일컫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신의학적으로 해리현상(Dissoiation)이라는 것으로써 어떤 충격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의 성격 일부가 떨어져 나와 독자적(獨自的)으로 행동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때 그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말과 행동을 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빙의현상(憑依現象)을 설명할 때 정신과 의사들은 언제나 해리현상을 내세우면서 안정제를 주어서 잠을 재워 신경을 안정시킵니다. 뇌의 세포 간에 전기적 자극으로 정보가 전달되는데 이 전기적인 흐름이 지나치게 빠르게 될 때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한 흐름이 둔화시켜 주는 것이 안정제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정신병(精神病)을 앓는 사람들은 한 번 정신 병원에 들어가게 되면(거의 감금) 치유에 대한 기약이 없이 머물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학적(醫學的)인 측면에서 볼 때는 빙의(憑依)를 “망상 질환”이라 하여 이는 단순한 일종의 정신병(精神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의학적인 빙의(憑依) 치료 방법으로는 입원과 약물치료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병원을 1차로 가는 것 입니다. 옛날에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병원가기가 겁이 나서 많이 찾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병이 있으면 누구나 손쉽게 방문 하는 곳이 병원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동네에 있는 작은 병원에서부터 종합병원 대학병원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다니며 뇌에 관해 의학적으로 사람의 어떤 뇌의 기능이 잘못 되었는지 여러 가지 정밀검사를 하여도 빙의(憑依)로 인한 사람들은 특별하게 발견되는 이상 현상 들이 잘 밝혀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빙의(憑依)를 ( 귀신병, 무병, 신병)의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귀신(영혼)이 존재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빙의(憑依)를 미신으로  비과학적(非科學的)인 이야기로 생각 합니다.

4, 귀신에 씌웠다고 하는 빙의(憑依)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성경에서는 귀신의 존재와 귀신들림을 무속적인 즉, 사람의 혼령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임을 가르칩니다.  빙의는 영어로 퍼제션(Possession)인데 사람 속에 마귀(사탄) 혹은 귀신이 들어와 있다고 하는 개념입니다. 영어의 퍼제션은 기독교적(基督敎的) 귀신(鬼神)들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귀신들린 자를 분명히 파악하시고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 빙의(憑依), 귀신(鬼神)들림을 무속(巫俗)적인 사고에서 이해하려는 교육자들이 많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주 조상귀신(祖上鬼神)아”, “가난하게 하는 조상귀신(祖上鬼神)아”, “너는 누구야 조상귀신(祖上鬼神) 누구냐” 물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조상귀신(祖上鬼神) 물러가라고 하는 것은 무속신앙의 축사법과 같습니다.

기독교의 사후 세계에 대한 분명한 것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후 상태는 변할 수 없는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을 보면 불신자가 죽으면 즉시 음부로 가고 결코 나오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은 바로 음부에 들어가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사이를 배회하는 무속적인 조상귀신(祖上鬼神)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신명(神明)난다", 신(神)바람 난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신명(神明)은 귀신(鬼神)이 내려 귀신에 붙잡힌 현상을 의미 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의식은 대개 귀신(鬼神)의 힘을 빌리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수천년의 무속신앙(巫俗信仰)으로 굳어진 우리 민족의 생활(生活)습관과 언어(言語)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다가 입신을 했다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속신앙인 굿판에서 개인적인 신접이 시간이 가면서 집단적인 신접으로 이어지는 점과 유사점이 한국교회 안에서 있는 것 같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미혹하는 전문가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태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만든 사탄은 오늘도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갖은 수단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신자들에게 “우리의 전투상태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가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엡6;1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영혼(靈魂)들이 사탄의 공격에 노출되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本質的) 소명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전통적인 문화적인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심각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믿는 자들은 사탄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무속신앙(巫俗信仰)과 융화되지 않기 위해서 하루 속히 기독교인 생활 풍속에 물들어 있는 무속신앙의 문화를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여과시켜 진실한 기독교의 뿌리를 한국교회에 내려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정죄 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으리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1}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영적(靈的)으로 혼돈의 시대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 기독교가 샤머니즘화 하느냐 아니면 샤머니즘이 기독교화 하느냐 이것이 실로 중대한 일이 되었습니다. 즉, 오직 예수보다는 다른 것에, 소위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방 세상의 것을 벗어버리고 교회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방 세상 것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교회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귀신론(鬼神論)에서 한국교회는 하루속히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필자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혼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정서를 고찰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 합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목사 / 서울대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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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지라의 힘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퇴진 시위가 벌어졌을 때 시민과 학생에게 총격을 퍼붓던 경찰은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약탈이 벌어졌다. 교도소 문이 열리고 흉악범들이 쏟아져나왔다. 상점이 털렸고 가정집도 털렸다. 시민들은 곳곳에서 자경대를 조직했다.

초기에 BBC를 비롯한 서방 언론은 이집트의 시위 소식을 자세히 전하면서 ‘약탈’이 자행되고 있음을 빼놓지 않고 덧붙였다. 누구에 의한 약탈인지를 밝히지 않았으니 시청자는 당연히 시위대의 소행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알자지라는 달랐다. BBC 기자는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아마도 시위대에 의해서라는 뉘앙스로) 약탈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했지만, 방금 시위대와 함께 있다가 달려온 듯 알자지라 기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시위대가 약탈범을 붙잡아서 주머니를 뒤졌더니 보안경찰의 신분증이 나왔다고 밝혔다.

경찰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도 본인들이 약탈에 나서거나 아니면 깡패들을 동원하여 이집트를 치안 부재의 무질서 상황으로 몰아가서 그래도 무바라크가 있어야 혼란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이집트 국민과 국제 사회에 퍼뜨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덧붙였다.

알자지라가 없었더라면 무바라크가 사주한 약탈극은 먹혀들어가 시위대를 궁지에 몰아 넣었을지도 모른다. 알자지라가 있었기 때문에 BBC를 비롯한 서방 언론도 무바라크 정권에 의한 의도적 약탈극이 벌어지고 있음을 차차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면 때문에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BBC는 월드서비스 예산을 대폭 감축하면서 480명의 직원을 줄인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긴축 정책에 따르는 조치지만 BBC 월드서비스의 청취율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면 인원을 감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BBC를 비롯한 서방 언론의 영향력은 적어도 아랍 지역에서는 줄어드는 반면, 알자지라의 영향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무바라크 정권은 이번 시위가 터지자 알자지라 지국만 폐쇄했다. 그러나 알자지라는 시위대로부터 사진과 동영상을 받아 그대로 생생한 소식을 전했다. 알자지라는 이번 이집트 시위 소식의 진상을 알려고 알자지라에 접속한 미국인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면서 미국 정부가 알자지라 방송의 유선방송 진출을 허용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FOX 등 부자들이 장악한 미국 방송이 이집트에 걸려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 국익은 사실은 미국 대기업을 소유한 소수 대주주들의 경제적 이익일 뿐이고 그 중에는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도 많다. 그들은 임금이 낮은 무바라크의 이집트에 투자해서 큰돈을 벌 수 있지만, 대다수 미국 서민에게는 그 수혜가 돌아오지 않는다. 미국의 서민을 위한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고, 미국 국민의 혈세는 무바라크 권력의 기둥인 군부를 지원하는 예산으로 매년 13억 달러씩 들어간다.

알자지라의 힘은 약탈극이 누구의 소행인지를 밝혀내는 힘, ‘새로운 진실을 알아내는 힘’이다. 알자지라 같은 언론이 한국에 있었더라면, 적어도 아시아에라도 있었더라면, 좀 더 밝은 정권을 이룩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알자지라처럼 조직을 갖춘 언론이 아니면 쉽지 않다..

원문 주소(일부발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36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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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IT매체 엔가젯 홈페이지 캡쳐

사람의 마음을 읽는 기계가 등장했다.

미국 IT전문매체 엔가젯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수단을 읽는 기계가 나왔다고 23일(현지시간)보도했다.

이 기계를 개발피터 로빈슨 영국 캠브리지대학 교수는 '마인드리딩' 즉, 마음을 읽는 기기를 제작하고 실험최근 성공했다.

엔가젯은 이 기계가 사람의 표정과 몸짓, 목소리 등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고 추론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캠브리지 대학측에서 제작한 동영상은 비디오 카메라가 사람의 눈썹이나 입꼬리 등을 인식해 심리적 상태를 읽어내는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는 "사람들이 미래에는 어떻게 기계로 의사소통하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경닷컴 김동훈 기자

목사는 목사(牧師)여야 한다. 목사란 말 그대로 맡긴 양을 치는(牧-칠 목, 혹은 돌볼 목) '양돌봄이'이다. 양치기라 하면 격이 낮은 듯 해서 잘 안 쓰는데, 그러면 목자 혹은 목동이라 부르면 격이 맞을까. 예수님 당시에 목자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단순히 약자이기 이전에 비천한 직업이 목자였다. 예루살렘에 분뇨 처리하는 직업보다 조금도 나은 게 없었던 직업군이었다. 오히려 주인의 양새끼를 도둑질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와 사회적 편견 속에서 목자들은 밤에 잠도 못 자고 양떼를 지켰다. 혹, 양을 잃거나 이리에 찢기기라도 한다면 물어주어야 했기에 가난한 목자들은 온 힘을 다해 양들을 돌봐야 했던, 실로 고달픈 직업이었다. (세리가 소문난 도둑놈이었듯이 일설에는 목자도 도둑놈 취급 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사(師)자 붙어서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놈(者)" 이상이 아니다. 놈이란 단어가 "사람"을 바하해서 부르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할 직업은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는 '들판에 목자처럼' 밤낮 수고해야 하는 직업 아닌 직업이 목사다. 바울이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 명예를 얻고 돈과 인기와 명성을 얻고 싶다면 목사직을 내려놓는 것이 어떨까. 목사란 그런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죽어야 할 이름이 목사'란 사실을 한국교회가 진작에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무임목사 전성시대를 구가하지는 않았으리라. 주인이 맡긴 양들을 목숨바쳐(죽도록 충성하며) 잘 섬긴 목자들은 비록 이땅에서는 고난을 겪고 아픔을 당하고 애통의 눈물을 삼킬지라도 훗날, 주님이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품에 안아주시며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목사라 불리워도 좋다고 본다. 두 번째로는 목사는 목사(目四)라야 한다. 다시 말해 눈이 네 개라야 한다는 말이다. 눈이 멀지 않아야 한다. 눈이 멀면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 한다.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한다. 눈이 침침해서 김집사인지 이집사인지도 알아보지 못 하면 교인들이 시험에 든다. 목사는 사역하는 동안에 건강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상식의 눈을 가져야 한다. 이성적 판단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상식이 풍부해야 바른 이성적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상식이 부족한 목사들이 많은 것같아 안타깝다. 세상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목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상식의 잣대로 판단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목사를 사회가 인정하겠는가. 사례비도, 사는 모습도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억대 연봉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근로자 평균임금 이하로 사례비를 정하고 그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바르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성경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서야 어찌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겠는가. 말씀을 말씀답게 볼 줄 아는 목사가 바르게 목양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지력(知力)을 키워야 한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혜안(智慧의 눈)이 있어야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말씀의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사가 되려면 말씀의 눈을 부단히 길러야 한다. 그래야 목사다운 목사가 된다. 끝으로 주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밝고 상식의 눈이 있고 말씀의 눈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목사로서는 말짱 도룩묵이다. 주님의 눈으로 양들을 보게 될 때 양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목사는 온 양떼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도양(先導羊)으로서 양무리를 주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깨끗하여 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바른 목양을 할 수 있다. 주님의 눈으로 양떼를 돌보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주님의 눈빛만 봐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목사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목자일 것이다. 세 째로 목사는 목사(木死)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十字架)는 형상화 된 글이다.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로서는 의미를 잘 알기에 그대로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경에는 나무기둥(스타우로스)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의 사형법을 로마인들이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형장에 세워놓은 나무기둥을 우리는 십자가로 번역해 쓰고 있다. 가로목을 지고가게 해서 손에 못을 박고 나무기둥에 매단다. 윗 부분에는 죄목을 적은 판대기를 붙인다. 형상이 열 십자를 닮았다. 우리 주님이 이 나무기둥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신약을 눈여겨 보면 나무기둥(스타우로스)이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나무(크실론)라 하고 있다. '행전'과 '베드로서'가 그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다는 것을 강조코자 함이다. 율법에,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신 우리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단순한 나무기둥이 아니라 실로 생명나무이다. 자신의 피와 살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과일이 과육과 과즙으로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말해 나무에 달려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나무 과일 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음료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나무 이전에 선악의 지식나무였다. 모든 사람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실과를 먹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그 나무(크실론)에 달리셨다. 자기와 및 자기를 믿는 모든 자가 선악의 지식나무(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요, 그것을 기록한 말씀이 십자가의 복음 곧 나무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해(향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선악의 지식나무도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죽었다. 믿는 자에게 더 이상 선악의 지식나무는 없다. 영적으로 보자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죄악된 세상의 중앙, 에굽 혹은 소돔이였다. 세상 중앙에 우뚝 선 그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무를 지신(달리신) 이유요, 의미인 것이다. 그 나무가 생명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역설적 신비다. (바울의 복음도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죽은 자 살리는 생명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일반 성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목사는 특별히 나무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그 죽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 날마다 죽어야 하는 직분을 맡은 자이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죽었다는 의미로 목사(木死)라 이름해 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서 목회하는 자가 누군가. 목사도 안 죽는데 누가 누구보고 죽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좀 죽자! 주님 죽으신 그 나무에 함께 달려죽은 우리가 아니던가. 그러데 어찌하여 산 냄새 풀풀 풍기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날마다 죽자. 그래야 부활 할 것이 아닌가. 출처:아멘넷, 지혜자님의 칼럼 글

<변승우목사>

 

  1. 현대교회는 ‘회개’에 대해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홀리죠이>

 

회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이다. 현대교회에 뿐만 아니라, 만고에 오고가는 모든 교회에서 요청되는 기분적인 직무가 바로 회개에의 요청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설교하는 것이다. 현대교회에 이런 회개의 설교가 결핍되어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탄식해야 할 현상임에 분명하다.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변승우 목사가 이런 회개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회개에 대한 제대로 된 가르침이 아니면서 자신의 회개에 대한 견해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잘못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왜 그런가? 바로 아래에 이어지는 글을 읽어가기를 바란다.

 

<변승우목사>

 

회개는 신앙의 제 일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중에서도 제일 먼저 나옵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제일 먼저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는 신앙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믿음이 구원에 필요한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설교자나 기독교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현재 교회 안에 구원론에 대한 혼돈이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구원론에 대한 오류는 진리의 순서들을 뒤바꾸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예지와 예정의 경우 성경에서는 항상 예지가 먼저 나옵니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예지)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예정)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예지)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예정)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바꾸어 예정 다음에 예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절대주권자로 바꾸어 놓았으며 예정론을 심각하게 왜곡시켜 놓았습니다.

 

<홀리죠이>

 

변목사는 회개와 신앙 중에서 회개가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중요도에 있어서의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하면서, 그 몇가지를 예로 든다. 그 첫번째가 예정과 예지의 순서가 뒤바뀌어서 주장되는 것이 현대교회의 문제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드는 예가 롬8:29과 벧전1:2이다. 과연 이 구절들이 예정보다 예지가 앞서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가? 예지라는 글자가 예정이라는 글자보다 앞서 있다는 면에서 그렇게 주장한다면, 에베소서15절은 어떤가? 그곳에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주장한다.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헬라어원어로는 예정하셨다….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이라는 글자가 기쁘신 뜻이라는 글자보다 먼저 나온다. 하지만 질문하게 될 것이다. “기쁘신 뜻보다는 예정이 앞서 나올지는 몰라도 예지보다는 늦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반문에는, “예지가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예정이 나오고 그 다음에 기쁘신 뜻이 나온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런 주장에서 의미하는 예지라는 말, 미리 안다는 말의 뜻은, 아무 감정도 의지도 느낌도 전혀 없는 어떤 무감각, 무채색의 그 어떤 미리 앎이다. 말 그대로 단순한 앎이다. 이런 견해는 안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주장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식, 단순한 산술계산적인 앎, 아무런 감정과 의지, 느낌도 없는 그런 을 말하지 않는다. 특별히 하나님의 앎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미리 안다는 것도 그렇다. 성경에서 미리 안다는 것은, 산술계산적으로 어떤 정보가 컴퓨터에 입력되어서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렇게 출력되어지는 그런 종류의 앎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슈퍼컴퓨터가 아니다!

 

하나님의 앎,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앎을 말한다. 곧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두뇌 속에 어떤 데이터가 무감각적으로 입력되어서 출력되어지는 그런 단순산술적인 계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능동적인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참고, 개혁주의신학자, H.Barvinck, The Doctrine of God, Grand Rapids, 1951, Vol.II, p.343). 곧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엡1:5에서는 말하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그 기뻐하시는 대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그 미리 아시는 대로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로마서8:29과 벧전1:2에서 예지라는 예정이라는 보다 앞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정이라는 개념보다 예지라는 개념이 앞서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실상, “예정예지는 무엇이 더 앞서고 뒷선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예정과 예지가 동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시간적인 선후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동시에 지금 모든 우주와 만물을 통찰하신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섭리하신다. 그 분에게는 과거미래에 앞선다고 할 수 없다. 그 분에게는 과거미래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저의 설명은, 물론, 우리 피조물된 인간들에게 있어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공간 속에 제한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공간속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지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대하여 함부로 주장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예지예정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변목사가 인용한 롬8:29와 벧전1:2같은 구절이 그렇다. 하지만, “예정예지보다 앞서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도 있다. 1:5과 엡1:11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예지가 서로 앞서고 뒤서는 관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정예지보다 앞선다고만도 할 수 없고, “예지예정보다 앞선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예정예지는 동시적인 것이지, 앞서고 뒷서는 것이 아닌 것이다.

 

변목사는 하나님 말씀의 한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다른 이들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다음의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변승우목사>

 

  , 임금과 구주의 경우 언제나 임금이 먼저입니다.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5: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구주와 임금으로 순서를 뒤바꿉니다. 그래서 먼저 구주로만 영접해도 구원을 받고 그 다음 점진적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음에 영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20). 왜냐하면 예수님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1:11-13, 2:5-11).  

 

<홀리죠이>

 

변승우목사의 이런 주장도 성경의 어느 구절만 취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 36절에서 라는 말이 그리스도라는 말보다 먼저 나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로마서623절은 어떻게 해석하게 될는지 궁금해진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구절에서는 그리스도보다 먼저 나온다. “주 예수 우리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530-31을 인용하면서 임금이 항상 구주라는 말보다 먼저 나온다고 하는 변목사의 주장은 어떤가? 과연 임금㈜가 구주라는 말보다 먼저 나오는가? 그가 바로 중생칭의의 선후문제를 설명하는 허무맹랑(!! 왜 그런지 계속 저의 글을 읽어주십시오!)한 주장에 인용하고 있는 디도서3:4-7에서 나오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어떻게 해석할 지 궁금하다.

 

예수님의 구주되심주되심은 불가분리의 것이다. “구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곧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일각에서 구주되심만을 먼저 인정하고 그 다음에 성화와 성숙에 따라서 주되심을 인정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되심이 언제나 반드시 구주되심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의 한 면만을 너무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이고 그래서 복음이 왜곡되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누시지 않은 것을 나누는 것 자체가 왜곡인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과 구주되심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이 나누지 않는 것을 나누는 것은 변목사의 특기인 모양이다. 다음의 글을 계속 읽어보자.

 

 

<변승우목사>

  또한, 중생과 칭의의 경우 중생이 먼저입니다.

  

   3:4-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10, 12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칭의가 먼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용서=구원이라는 잘못된 등식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자가 많습니다.

 

<홀리죠이>

 

변목사는 주장하기를 죄인이 구원받는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중생칭의보다 앞선다고 한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는 참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주장인데, 변목사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성경구절 몇 개를 인용하면서 이 논의를 종결된 것인양 주장한다. 디도서3:4-7, 8:10,12를 그가 인용하는데, 바울이 로마서3장에서 칭의를 먼저 다루고 나서, 6장에 가서 중생을 다루는지를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는가?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사람들에게 힐문한 질문(3:2-3),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는 책망섞인 질문을 어떻게 면할 수 있다고 여기는지 궁금하다. 갈라디아서에서의 바울의 논지가 무엇인가? 다음의 바울사도의 말에 주목해 보자.

 

(323-26)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이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지금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아들됨의롭다 함의 앞에 두고 있는가?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의 순서에 주목하면서 답변해 보기를 바란다. 변승우목사가 그렇게 해보기를 바란다. 어디 성경에 이런 구절들이 한두군데인가!

 

변승우목사의 성경구절 인용은 너무나 피상적인 관찰에 기초한 것인데, 그런 피상적인 관찰에 기초한 그의 신학적인 결론은 너무나 용맹무쌍하다.

 

중생과 칭의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리하여 많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관계가 마치 쌍둥이관계라고 표현한다. 이 중생과 칭의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언제나 앞서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체험을 할 때에 다시 태어남에 대한 체험을 우선적으로 강하게 인상받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의롭다 하심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자신의 체험으로 성경구절을 읽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 방식과 그 스타일은 얼마나 다양한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자신의 신학으로 재단하여 왜곡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변목사가 그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의 용맹무쌍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그의 회개론의 본론이 시작된다. 지금까지는 예를 든 것인데, 그 예증들이 얼마나 피상적인 성경읽기와 그것에 기초한 편파적인 신학적 결론에 이른 것을 지적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그의 회개론을 살펴보자.

 

<변승우목사>

 

  마치 이와 같이, 회개와 믿음 역시 그 순서가 오래동안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믿음이 있으니까 회개도 하는 것 아니냐?” 라고 말장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회개와 믿음의 순서가 항상 일정합니다.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홀리죠이>

 

변목사는 믿음과 회개를 동시에 강조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말장난이라고 폄하한다. 참으로 말장난이 심한 양반이다. 바울사도가 빌립보감옥의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질문하였을 때 바울사도가 그에게 말하기를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던가? 변목사는 자문해 보기를 바란다. 바울사도는 분명히 말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하였다. “회개하라는 말도 없고, 그 뒤의 문맥을 보면 그 간수와 그 간수의 가족들이 회개하였다는 표현조차 없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고 그냥 믿기만 하였다고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참으로 믿음으로 구원얻는 복음의 도리를 오해하는 것이다. 바로 변목사의 설명이 그런 오해를 초래한다. ‘믿음이 있으니까 회개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말장난이라고 변목사는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오히려 말장난이라고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빌립보간수에게 바울사도가 말한 그 예수를 믿으라는 말 속에 이미 회개하라는 권면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하는 믿음회개가 동반되는 믿음이다. 그것이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의 본질이다. 회개가 동반되거나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믿음이고,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변목사가 반대하고 있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지금 그런 가짜 믿음을 고려하면서 믿음이 있으니까 회개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변목사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큰 오해이고, 변목사야말로 진짜로 말장난하는 자이다. 그를 궤변가로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사도의 또 다른 선언에 귀기울여보자.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이 마음으로 회개하여 의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믿음회개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울사도를 오해하고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다. 바울사도가 마치 회개도 없이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도, 하나님께서도 결코 그렇게 구원을 소개하지 않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또한 회개로 얻게 된다. 회개없는 믿음으로도 불가능하고 믿음없는 회개로도 불가능하다. 거짓된 것을 통찰하시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주님께서 죄인들 속에 있는 모든 거짓들을 통찰하신다. 거짓된 회개도 통찰하시고, 거짓된 믿음도 통찰하신다. 믿음없는 회개, 회개없는 믿음이 모든 것들이 거짓된 것이다.

 

이 믿음, 이 회개는 또한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들도 또한 쌍둥이관계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이런 논리에 주목하기 바란다. 거짓된 주장을 간파하는 너무나 간단한 도식이 여기에 있다. 성경에 대한 너무나도 피상적인 관찰, 그리고 진리의 한켠을 전체인양 강조하는 것….우리가 그런 주장을 대할 때에 뵈뢰아사람같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신사적이어서 과연 그런가 하고 말씀을 신중하게 살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신사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야만인들이 주의 교회에 활개를 치니, 탄식할 일이다. 가슴을 칠 일이다.

 

계속되는 변목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변승우목사>

 

이처럼 성경은 항상 회개 다음에 믿음을 말합니다. 회개와 믿음의 순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중요성에 대해 로이드 존즈는 “로마서 강해 8권”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복음 설교에 있어서 회개의 문제는 언제나 가장 먼저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규칙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복음은 우리더러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순서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명히 말해서 그 문제는 복음 전도의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줄 믿습니다. 설교의 임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식의 개념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성경 자체가 그 순서를 뒤바꾸는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과를 위해서만 이 분명한 성경의 순서를 뒤바꿔 놓는다면 매우 위태로운 일입니다. 부흥과 각성의 매우 위대한 시대마다 교회의 설교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그 성경적인 순서였습니다. 오늘날 죄의식의 증거가 현격히 적은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우는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물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의식하고 영혼의 고뇌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드문데,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에 대해 설교하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서 부흥과 각성의 시대마다 기독교회가 어떠했는지 그 이야기를 읽어보면, 회개의 문제가 언제나 중심 위치에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우선적으로 다루어진 문제였습니다.

 

<홀리죠이>

 

변목사는 자신의 지론, 곧 회개가 믿음보다 앞서서 강조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강조하기 위해서 로이드 존스목사를 인용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목사의 로이드 존스목사의 인용을 대하면서 그가 성경구절을 편파적으로 인용하는 것처럼 또한 로이드 존스목사의 글도 편파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인용하는 청교도의 글이나 개혁주의계통의 신학자들의 글을 그렇게 편파적으로, 혹은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는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

 

먼저, 위의 로이드 존스목사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존스목사가 회개를 믿음보다 앞세우고 있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 그 인용된 부분만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목사는 거짓된 믿음에 대한 강조보다 회개를 통해서 그 거짓된 믿음의 거짓됨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복음전도설교의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목사의 참된 믿음에 대한 정의를 고려한다면, 위의 인용은 오히려 변승우목사의 신학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로이드 존스목사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자. 그의 로마서강해서1권에서이다(8권을 제가 소장하고 있다면 그 8권에서 직접 인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아쉽다. 혹시 8권을 소장하고 계시는 분은, 저의 글과 더불어서 변목사가 인용하고 있는 부분의 앞뒤 문맥을 꼭 참고해 보기 바란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른 더 이상 전에 자기의 것이었던 어떤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의 자기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 분의 행하신 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만일 그가 ! 내가 내 안에 무서운 흑암이 자리잡고 있소. 그리고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여전히 죄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직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믿음은 완전히 그와 다르게 말하며 믿는 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합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죄의 생활을 살아왔다. 나는 신성모독자였다. 그리고 해악자였고 비열한 사람이었다. 내가 범하지 않는 죄란 거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를 알고 있다….’ 그는 전혀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전혀 오직,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로이드 존스목사는, 변승우목사와는 반대되는 견해를 여기서 개진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위의 인용글 속에 붉은 색으로 표시된 글은, 로이든 존스목사가, 변목사와는 반대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야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서에 주목해 보기를 바란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로이드 존스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여러분은 이 점의 중요성을 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위대한 영성의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의미에선 그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면 그것은 믿음에 대한 부정입니다.”

 

바로 이 로이드 존스목사의 말은 바로 변승우목사 같은 이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임을 알기 바란다.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다. 변승우목사와 같은 주장을 어느 의미에서 모르는 바가 아니다. 회개를 강조해야 한다. 회개의 설교가 필요하다. 하지만, 변승우목사와 같이 회개를 강조하게 되면, 그것은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거짓된 믿음과 참된 믿음에 대한 분별없이, 믿음 앞에 회개가 앞서는 것이라고 분별없이 주장하게 되면, 바로 참된 믿음의 가치가 평가절하된다는 것이다(변목사의 신앙론을 두번째로 평가할 때에 이 문제는 좀 더 심도있게 다루게 될 것이다).

 

(변승우목사)

 

로이드 존즈가 잘 지적한 대로 교회사를 보면 회개에 대한 강력하고 우선적인 강조가 있을 때마다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 부흥과 대 추수가 아주 임박한 시기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방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회개를 외치므로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했습니다. 회개는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부흥을 위한 길을 예비합니다. 진정한 부흥은 회개를 외치는 곳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나팔이 되어 회개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홀리죠이)

 

회개에 대한 강조가 부흥의 시기에 있었다는 그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언급이 믿음과 회개의 순서를 설명하는 상황 속에서 나온 것임을 고려할 때, 쓸데없는 red herring 곧 연막술임을 간파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상황에 걸맞지 않는 언급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궤변가라는 것이 이런 글에서도 드러난다. 부흥의 시기에 회개만을 강조했었던가? 과연 부흥의 시기에는 믿음을 강조하지 않았단 말인가? 과연 부흥의 시기에는 믿음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하지 않은 채로 회개만을 우선적으로 강조하였고,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조하였던가?

 

변목사의 부흥에 대한 관점이 과연 옳바른지 아닌지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질문들을 진지하게 음미해 보기만 해도, 변승우목사의 부흥과 회개를 연관시킨 이 강조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변승우목사>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회개에 대해 현대교회는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회개에 대하여 어떻게 무지한 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설교자와 모든 크리스천이 여기에 동의합니다.

 

<홀리죠이>

 

회개가 죄에서 돌이키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그는 현대교회가 이 회개에 대해서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가 현대교회가 모르는 회개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 지 궁금해 진다. 계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변승우목사>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9:43-47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런데 설교 중 “누구든 한 가지라도 습관적인 죄가 있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면 여기 저기서 난리입니다. 그러나 왜들 난리입니까? 다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끊어버리는 것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홀리죠이>

 

변목사의 설명을 듣자면, 회개는 죄를 끊어버리는 것인데, 습관적인 죄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습관적인 죄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식으로 자신이 주장하는데, 여기 저기서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난리를 치는 사람들은 회개가 무엇인지 진짜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뜻이다.

 

과연 이런 변목사의 주장이 성경적인가? 일단, 그가 죄의 습관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그가 습관적인 죄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그가 가 무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고, 왜곡시키고, 심지어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면서도 여전히 연약한 자들을 오히려 무거운 굴레에 씌워두고 있다.

 

왜 그런가?

 

따져보자. ‘가 무엇인가? ‘가 과연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완전히 그렇게 회개한 자에게 무관해져 버리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수많은 오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참된 회개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 채로 용서해 주신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크게 기독교회에서는 두 가지 견해로 대별해서 구별되는 그룹들이 존재해 왔다. 하나는, 우리가 다시는 죄를 전혀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에 이를 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룹이다. 웨슬리신학에 영향을 입은 완전성화론자들이다. 이것에 반대해서, 죄의 용서를 완전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도들은 죄에 넘어질 위험성이 있고,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한에 있어서는 죄없는 무흠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고 그 무흠한 상태는 죽은 뒤의 영화된 상태에서나 이룰 수 있다고하는 그룹이 있다. 소위 칼빈주의자들 혹은 개혁주의신앙을 가진 자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웨슬리신학에 경도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죄를 용서함 받은 후에라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들은 죄를 반복해서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반복해서 죄를 다시 지을 때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 두 그룹의 공통된 주장이다.

 

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여 죄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나 그 죄의 대가는 용서함 받고, 죄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유혹과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죄의 실체이다. 이것을 구원받은 자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Dwelling Sin)라고 표현되어 왔다(이 남은 죄의 실체와 죄용서함의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심층적인 분석과 설명이 필요하지만, 변승우목사의 견해를 비평하는 이 글에서는 이 정도만이라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죄를 끊어버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만 설명하게 되면 회개의 본질이 왜곡된다. 그 왜곡된 견해가 바로 변승우목사의 한가지라도 습관적인 죄를 가지고 있으면 지옥간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일견 옳은 말이다. “습관적인 죄만 아니라, 어떤 죄라도 여전히 지닌 채로는 천국에 이를 수가 없고 지옥에 가기 때문이다. 그것을 웨신 154절에서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멸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없다

 

습관적인 죄만 아니라 어느 죄라도 그렇다. 그런데, 변승우목사는 어느 한가지라도 습관적인 죄가 남아 있다면 지옥에 간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이런 주장은, 변승우목사가 습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묵상치 못한 채로 주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죄인이었던 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옛습관을 제어하는 새습관이 형성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원리상 새로운 습관이 신자들 안에서 지배하기 때문에 생명이 왕노릇한다는 바울사도의 표현처럼,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피조세계에서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렇다면, 옛습관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겻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개혁주의신학계에서 심도있는 토론들이 개진되어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자들에게 있어서 옛습관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남아있는 죄를 짓고 있는 그 어떤 존재를 옛사람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존 오웬 같은 청교도들이 이렇게 주장해 왔다) 아니면 옛습관이라고만 표현하되, “옛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존 머레이나 훅크마 같은 개혁주의신학자들이 개진해 온 견해)고 해야 하지 않는가? 좀 더 전진된 견해들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개진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들 어느 누구도, 어떤 견해를 취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한 가지 습관이라도 남겨두고 있다면 지옥간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과연 변승우 목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계시라도 받았단 말인가? “습관이라고 하는 것만큼 정의하기 어렵고 힘든 것이 없다. 모름지기, 이것에 대해서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중세교회의 아퀴나스를 관통하고 또한 종교개혁 이후에까지 이어온 이 습관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간주해서 어느 한 가지 습관이라고 가지고 있다면 지옥간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게 된다면 참으로 황당한 주장들을 하게 된다. 과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 어느 한 가지 습관적인 죄가 전혀 없는 상태로 살았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자기 부인 사라가 살아있는 중에라도 다른 여자를 취하여 결혼하게 되었던가?(이 문제에 대해서는 창세기26장의 그두라와 결혼하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게 된 결과로서 던지는 질문이다. 한 번 씨름해 보기를 바란다).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지냈던 그 습관을 그가 회개하였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가? 노아가 지옥에 가 있을까? 변승우목사의 주장은 그렇다고 하는 것 같다. 아브라함도 노아도 모두 지옥에 있다! 변승우목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천국이 어떤 곳일까? 과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천국일까?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그가 회개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너무 피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한 회개에 대해서도 그렇게 피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잘못된 회개관은 그의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잘못된 강조에서도 분명해 진다. 다음을 읽어보자. 

 

<변승우목사>

 

  더 심각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눈 멀어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인용하는 말씀들을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아주 명확하게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18:30-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7:11-13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벧후 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러분 모두 용규 목사님의 입신 간증을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지옥을 보고 그 목사님이 천사에게 “천사님, 지옥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천사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때 천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옥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100% 지옥에 온다.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모두 지옥에 온다.

 

<홀리죠이>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 참으로 옳은 말이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것을 비평하고자 하는 것d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비평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문제는, 윗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박용구목사라는 분의 입신간증이다. 입신간증이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기 때문이다. 그 입신간증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다. 과연, 과연, 이 사람들이 두 종류의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종류의 사람들일 뿐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그런 종류들만이 지옥에 있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는 것예수를 믿는 것을 동일시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박용구목사에게 말해주었다는 그 천사천사가 아님에 분명하다. 어떻게 교회를 다니는 것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서로 같지 않음을 천사인데도 모르고 있는가? 천사천사라면 가짜일 터이고, 가짜천사라면, 그 천사는 타락한 천사임에 분명하다. 그런 가짜천사와 대화를 나눈 박용구목사는 어떤 인물인가? 나는 그것에 관심없다.

 

바로 그런 사람을 인용하는 바로 변승우목사의 분별력이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입신간증을 인용하면,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제대로 강조할 수 있는가? 지금 변승우목사가 유도하고 있는 회개가 어떤 종류의 회개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의 회개란, 성경적인 회개가 아니라, 소위 박용규목사라는 사람 같은 이가 한 그 입신간증의 내용처럼, 분별력이 없는 회개이다.

 

회개는 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끊어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의 의지로 그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죄를 끊어버리는 첫역사부터 시작해서, 죽을때까지 계속 되어지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것은, 죄의 습관이 죄인들이 죽을때까지 죽는 순간까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죄인된 인생들이 교만치 않고 겸비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평생을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우리의 남아있는 마지막 습관까지 끊어버리는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런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은혜에 힘입어 끊임없이 죄의 습관을 벗어버리려고 하는 그 노력을 가능케 하는 십자가의 보혈,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서 가는 것이다. 오직 이것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천사가 와서 이 다른 것을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저주가 있을 진저! 그 천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저주가 있을 진저! (1:8).

 

이런 저주 가운데 변승우목사가 빠져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귀있는 자는 들을진저!

 

<변승우목사>

 

그러니 세상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해 회개의 나팔을 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오늘날 담대하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종이 얼마나 됩니까? 많은 주의 종들이 마치 구원의 조건이 믿음 하나인양 믿음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사람 낚는 어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아무리 열심을 낸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교리들을 그릇되게 전파할 때에는 사람들을 구원할 만한 권한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어느 부분에서라도 물러서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이며 또한 영혼을 구하는 참 방법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같은 책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때때로 우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며, 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듣기 좋은 것만을 설교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람들이 처해 있는 진정한 위험을 그들 앞에 제시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우려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진정한 위험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함으로 그들이 멸망에 이르게 될 경우,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할 것입니다.

 

<홀리죠이>

 

이제 변승우목사는, 스펄존의 글을 인용한다. 그가 그 인용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다. 오히려 그 보다 더욱 강한 톤으로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싶다.

 

하지만, 변승우 목사가 스펄존을 인용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스펄존목사는 결코 변승우목사가 인용할 수 있는 그런 신학을 가지고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펄존목사야 말로 변승우목사의 신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변목사의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 비평할 때에 강조하고자 한다.

 

위의 스펄존의 글을 살펴보자. 첫번째 글에서 스펄존은 잘못된 교리를 전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열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한다. 바로 변승우목사 자신이야말로 그렇지 않는가? 변승우목사의 신학이야말로 잘못된 신학이면서 열심을 품고 영혼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는가? 변목사는 스펄존목사의 글을 인용하는데, 바로 자신의 신학을 비판하는지도 모르고(혹은 알면서도?) 그의 글을 인용한다. 아전인수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가 참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열심이라면 자신의 신학부터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을 스펄존은 말하고 있다. 참고로 스펄존의 신학은 역사적 개혁주의에 속하여 있다. 그의 생전에 벌렸던 신학토론을 참고하기 바란다.

 

둘째글의 인용을 보자. 스펄존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을 하는 목사들을 비판한다. 진정한 위험을 간파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스펄존 목사의 그 말은 천만번이라도 합당한 말이다. 문제는, 그 말을 변승우목사가 인용하면서, 과연 변승우목사가 이 말의 진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지 심히 의심스럽기 하다는 것이다. 그가 과연 이렇게 스펄존목사, 로이드 존스목사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 글들의 진의를 파악이라고 한 것일까? 그들이 목청을 돋우면서 경계하였던 진정한 위험을 그가 과연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런 진정한 위험을 안다면, 허무맹랑한(!!!) “입신간증을 함부로 인용할까?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은사주의운동계열의 글들을 그렇게도 많이 인용하고 늘어놓는 것일까?

 

그가 과연 진정한 위험이라고 보는 것이 무엇인가? 과연 죄악 가운데서 사망선고를 당한 영혼들을 향한 죄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영혼의 저주의 상태를 알고 있는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그의 글을 계속 읽어가면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스스로 점검해 볼 일이다.


출처: 양무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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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신화의 교정으로서의 창세기창조기사

 

 

진보적인 구약학자들은, 모세(라는 이름의 편집자)는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에서 창세기기록의 자료들을 빌려왔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여러 학자들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 사이에 있는 무시하지 못할 차잇점들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그 차잇점들을 설명하려고 해 왔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모세가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을 참고하면서도 그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관점인가를 교정해 주기 위해서 창세기1-3장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웃국가들에 대한 교육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한 교육이고 또한 변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취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는, Bruce K.Waltke G.F.Hasel같은 사람인데, 아래의 글은, Hasel The Evangelical Quarterly 45 (1974)에 실은 The Polemic Natrue of the Genesis Cosmology라는 글의 이 부분에 대한 욧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로님께서 올려놓으신, 이집트와 바벨론의 창조설화들을 참고해서, 이 욧점들을 읽으시면, 유익한 점이 있을 것 같아서, 간단히 스케치해 봅니다.

 

하젤박사는 하나님께서 교정의 의도를 가지셔서 모세에게 영감을 주셨음을 가리키는 몇가지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합니다.

 

첫째, 창세기1:2에 나오는 깊음이라는 단어는 터훔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서 바벨론신화의 혼동의 신인 티아맛이란 용어가 파생되어 나옵니다. 터훔이나 티아맛은 모두 큰 바다(ocean)를 나타내는 단어에서 파생된다고 합니다. 바벨론에서 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는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최초의 신이 바로 신입니다. , 짠 물(염수)신인, 티아맛(여신)맹 물(담수)신인 압수(남신)의 결합에 의해서 터훔이 발생하고 그 터훔에서 신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신들 중의 하나인 땅의 신(남신으로도 여신으로도 묘사됨) 에아(Ea)압수(맹물신-남신)을 죽이고 이에 화가 난 압수의 아내 티아맛이 모든 신들을 죽이려고 할 때, 땅신 에아는 자기의 맏아들신인 마르둑을 앞세워서 티아맛과 대적하게 하고, 결국 티아맛을 죽이고는 신들의 신으로 승격하게 된다는 것이 바벨론창조설화의 핵심입니다.

 

바벨론신화에서는 터훔(티아맛)이 신화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화를 일종의 비신화화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1장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터훔 위에 있고…”

 

어쩌면, 이런 비신화화(저는 일부러 불트만의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불트만의 비신화화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터훔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터훔의 신화적 성격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모세와 하나님의 의도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에 대해서, 아마도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아무도 놀라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이미 성경에서 전제하고 있는 삶의 정황(이런 단어를 쓴다고 해서,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바벨론사람들도 압수, 티아맛이니 하는 신들의 세계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용어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영향을 미쳤던 것이 고대근동사회였었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그들은 이런 맹물(담수-강물?)짠물(염수-바닷물?) 등이 살아있는 인격적 존재였었습니다. 그들의 도시생활을 지배했던 세력이고 힘이었고, 의식세계였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짠물짠물일 뿐이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12절입니다. 맹물맹물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 더 하젤의 말을 들어봅시다.

마침 하나로님께서 정우교수의 리워야단에 관한 글의 요지를 간단하게라도 올려주셨는데, 이것과 관련된 것이 바로 하젤교수의 두번째 욧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의 다섯번째 되는 기록에 큰 물고기가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원어로는 타니님으로 되어 있는데, 우가릿문서들에 등장하는, 창조신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은 이런 문서들의 기록에서 바다와 동등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위의 첫번째 욧점에서 압수티아맛강물이든 바닷물이든 모두 과 관련된 것을 보게 되고, 바다와 연관됩니다. , 혹은 바다라는 것, 혹은, 바다큰 물고기(타니님)들이 모두 신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우가릿문서들에서 나타나는, 곧 고대근동의 신화들에서 나타나는, 바로 이런 신적인 존재들로서의 타니님들이 이곳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창세기의 창조기사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11절에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하는 단어, 바라, 이곳 타니님창조를 나타내는데, 다시 등장합니다. 이들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류의 전투를 통해서, 승리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노력도 없이 말로서 간단하게 그런 타니님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1장의 기록의도라는 것입니다. 고대근동의 신화들과는 대조되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함으로서, 변증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젤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A polemic emphasis becomes transparent; the tanninim are aquatic creatures which were created by God; they are not pre-existent rivals of the Creator which needed to be conqured as in Canaanite mythology.(p.87).

 

이런 큰 물고기들(타니님), 김정우교수가 언급하는 리워야단으로, 혹은 현대과학에서 언급하는 공룡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 고대근동문화에 있어서, 태양이나 달 혹은 다른 별들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던 것은 너무나 흔하였던 것을 배경으로 하면서, 창세기116-19절에 나오는 궁창의 광명들에 대한 창조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바벨론설화에 있어서 태양신은 세메쉬라고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1장에서는 아예 태양에 대한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고 단순하게 광명이라고만 합니다. 이름조차 붙이지 않고 있는 이런 기술태도는, 모세 자신이 처한 삶의 정황 속에서 팽배해 있는 태양숭배나 달숭배를 얼마나 혐오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신들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태양숭배나 달숭배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숭배하는 노예적 삶에서, 해방될 수 있는 인식의 근거가 제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만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해방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바로미님이 질문하셨던, 이 창조기사와 회심이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묵상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네번째, 하젤은 말하기를, Inherent in the Biblical prersentation of the separation of heaven and earth is an animythical polemic. Separation takes palce without struggle whatever. It is achieved by divine fiat.(p.88)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둘째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어지게 하라는 기록이 바로 마르둑이 맹물(강물)여신인 티아맛의 몸을 둘로 나눠서 하늘 위의 바다를 만들었다는 식의 신화적 이해에 반대해서, 단순히 말씀으로서 그렇게 나눠지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창세기16-8절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욧점들이 고대바벨로니아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신화적 이해에 대한 반박과 참된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변증의 성격이 창세기1장기록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 하젤의 주장입니다. 이런 하젤의 주장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습니다(, Mary Wakeman, D.F.Payne, B.K.Waltke ).

 

이제 이집트의 창조설화를 모세의 삶의 정황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모세는 이집트왕궁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40살 때까지 교육을 받았으니, 이집트의 최고학문을 전수받기에 충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집트를 생각할 때, 현대적인 상황에서 거의 삼류급으로 전락되어 버린 이집트를 연상하면 안됩니다. 그 당시 최고의 정치적 세력이었고 또한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강대국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보수적인 견해를 취해서 모세를 BC 15세기라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모세 당시에 이미 인류의 7대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피라미드이나 스핑크스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런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앞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 추측해 보는 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지나쳐서, 모세의 종교는 바로 이집트종교의 모방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바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프로이드 같은 사람이 그의 마지막 책인, Moses and Monotheism에서 그런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프로이드는, 모세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집트인이었다는 허무맹랑한 추측을 하기도 했었지요.

 

이런 허무맹랑한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의 창조기사는 이런 이집트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반박하고 참된 종교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집트의 창조설화들이 여러 개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최소한 네 개가 있고, 각각 중심되는 신들이 그 연관된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들의 창조설이 진짜라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도시국가시대의 산물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 도시들과 신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Heliopolis(Atum, 훗날 Re신으로 변경통합됨), Memphis(Ptah), Mermopolis(Thoth), Esna(Khnum).

 

참으로 이집트는 신들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라는 말 자체가 이집프트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프타신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프타신이 이집트신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질 지 모르지만, 신들의 역할은, 그 도시들의 역할과 그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아몬(Amon)신이나 (Re, 혹은 Ra)신이 주요신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있습니다. 도시들의 흥망성쇠에 따라서 신들이 그 중요성을 띄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집트에서 모세가 교육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교육받을 당시에 이집트이집트가 아니라, 미츠라임(억압들, 긴장들)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이 이름은 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의 관점에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돌아보면서, 억압의 땅이라고 회상했을 법 합니다. 원래 이집트의 원주민들은 미츠라임이라고 부르지 않고, 프타신의 정원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집트로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언제부터 이런 이름으로 자신들을 불렀는지는 모름).

 

프타신의 정원에서 교육을 받은 모세의 정황을 고려할 때에, 프타신의 창조설화에 대해서 모세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능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살았을 그 당시의 궁전은, 프타신을 주신으로 삼고 있는 멤피스라기 보다는, 오히려, 테베(현대의 룩소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일강의 하류에 있는 멤피스와는 달리 테베는 상당히 중류로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전체적으로 통치하기가 보다 쉬운 여건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집트역사에 있어서 신왕국(the New Kingdom)이 시작된(B.C.1570년에 셈족인 힉소스족을 쫓아냄. 이 힉소스족은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후예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 확정할 수는 없음) 뒤의 얼마 뒤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테베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정보는, Roger L. Green이란 사람의 Ancient Egypt(1963년도 발간)라는 책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곳 테베에는 성경의 모세를 건진 바로의 딸로 알려진 하셋수트여왕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시신안치성전"가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 '시신안치성전'모습을 사진으로 올려둡니다.

 

 

 

이런 자료들을 참고할 때에 이 당시의 종교는 아문신과 신이 통합되어서 아문-신으로 불려지고 있던 때입니다(모세가 태어날 당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바로에 의해서 이스라엘노예들로 인해서 건축되었던 국고성들 중에 하나가 바로 라암셋(1:11)인데, 라암셋이 현대인이 흔히 알고 있는 람세스라는 이름입니다. 라신의 아들 혹은 라신으로부터 낳아진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람세스는 모세를 람세스의 친구로 묘사하는 현대의 십계라는 영화나, 프린스 오브 이집트 같은 만화영화, 혹은 람세스2의 주인공 람세스와는 이름만 같을 뿐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종교를 통해서 창세기1장이 선포되는 삶의 정황을 이해하려면, 하나로님께서 올려놓으신 프타신에 의한 멤피스중심의 창조설화보다는, 헬리오폴리스나 그 이후의 테베중심의, 라신과 아문신에 의한 창조설화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을 고센땅이 테베보다는 멤피스에 더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서, 멤피스중심의 프타신의 창조설화에 대해서도 여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만).

 

이들의 창조설화에 의하면, 태초에 혼동’(Nun혹은 Nu)이 있었는데, 혼동의 신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것이 바로 아툼’(Atum=Ra)이었다고 합니다. ‘아툼이라는 말 자체는, ‘not to be’ 혹은 ‘to be complete’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에서는 야훼의 의미를 ‘to be’와 관계시키는 것과 함께 고려한다면, 아주 의미심장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혼동의 혼동이라고 할 수 있는, ‘아툼신 안에 모든 존재하는 것의 원형이 들어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철학적인 개념입니다. 인도에서 ’(zero)의 개념의 형성되고, 그것이 중국철학의 ’()의 사상으로 발전되어가는 것과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양이 발생하기 이전의 태극과도 같은 개념이 바로 아툼인 것입니다. 원래는 비인격적인존재였는데, 인격화된 것이 아툼신입니다. 그리고 이 아툼신이 신과 경합하고 통합되어서 아툼-신이 되었습니다.

 

신은, 원래, ‘아툼신의 형태로, ‘혼동속의 연꽃봉오리’(the bud of a lotus)에 감싸여 있는 채로 있다가, 그렇게 있는 것이 지겨워서’(weary of), 스스로 일어나 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창조하려고 하는 생각에 다른 보조신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위’(masturbation)을 해서 Shu(하늘신-남성)Tefnut(습기의 신)을 낳고, ShuTefnut이 성관계를 가짐으로서 낳게 된 자녀들이 바로 땅의 신인 Geb과 하늘여신인 Nut을 낳습니다. 땅의 신 Geb과 하늘여신인 Nut를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섹스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신은 자위를 해서, ‘하늘신과 습기의 여신을 낳고, 이들의 섹스에 의해서 GebNut이란 신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의 섹스에 의해서, Horus, OsirisIsis, Set, Nephthys 모두 다섯명의 자녀신들을 5일간 연속해서 낳습니다. 그 당시 태음력이 지배하던 달력으로는 360일밖에 안되는데, 360일 외의 다른 날 5일 동안 낳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모두 365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신들의 섹스에 의해서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개념이 이 테베에서의 창조설화의 중심모티브가 됩니다. 이런 설화들을 들으면서 자랐던 것이 바로 모세였을 것입니다.

 

여기에 프타신의 창조설화는, 바로 혼동의 신아툼심장를 창조하였다는 것이 보태어집니다. 여기서 심장를 창조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심장의 기능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을 뱉아놓는 기능을 합니다. 그리고 심장은 그렇게 을 하기 위해서 생각하는 기능을 하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프타신은,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그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멤피스 가까운 곳에 있었던 고센땅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익숙했었을 이야기입니다. 이 프타신의 형상을 묘사해 놓은 것이 다음의 그림입니다.

 


 

특별히 이 프타신은, 장인과 직공들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와 만물을 생각창조한 그의 능력을 소망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숭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생각 속에도, 프타신이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의 을 지배하고 있는 이가 바로 프타신이라고 하는 생각 말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프타신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 아피스라는 이름의 황소입니다. 곧 이 아피스황소를 숭배하는 것은, 프타신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아피스황소'의 형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마도 눈치 빠르신 분들은 무릎을 치실 것입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아론과 이스라엘백성들은 왜 황금송아지를 숭배하였고,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끊임없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유혹하였던 우상숭배 중에서 바로 이 숭배였던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프타신의 현신인 것입니다. 이집프트의 신, 바로 프타신, 라신과 아툼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신의 현현이 바로 송아지, 혹은 소를 통해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윗그림의 소의 머리 위에 있는 원반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태양신 라와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타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신이었을까,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 신이었을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 신에 대한 심판과 비판, 혹은 극복을 호소하는 성경의 기록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태양의 신-라신의 원형인, 혼동의 신-아툼신, 그리고 그 아툼신의 심장을 창조한 프타신.

 

그 프타신을 심판하는 야훼 하나님.

 

이 심판의 기록이 바로 출애굽당시의 열가지 재앙 중에 다섯번째 재앙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병의 재앙이 그것입니다. 이 재앙에 의해서 모든 가축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아피스의 황소도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프타신이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이집트신화의 배경을 가지고 창세기1장으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출처: 양무리 마을, 정리: holy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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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트, 바벨탑

http://blog.naver.com/bss2079/60012499617

 


이란 초가잔빌 유적지 전경

 


초가잔빌 지구라트의 원래 모습

 


남쪽 정문

 


남서쪽 문과 제단

 


북동쪽

 


서쪽

 


동쪽 묘지

 

지구라트 해시계                http://tong.nate.com/travel

 

지구라트 쐐기문자, 엘람어

 

지구라트 지성소

 

 

초가잔빌 [Tchogha Zanbil]


이란 후제스탄주에 있는 고대도시 유적지로 BC 13세기 중반 엘람 왕국의 왕  운타시 갈(Untash Gal:BC 1250경 재위) 건설한 도시이다. 수도인 수사 남쪽에 있으며 당시에는 '두르운타시'라고 불렸다. 수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신 인슈시나크를 모신 성소로서 엘람 왕족의 묘지가 있는 성도이다. BC 640년 무렵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수사와 함께 파괴되었으나 1935년 유전탐사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도시는 2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총길이는 약 4km이고 안쪽에는 내벽이 둘러쳐져 있다. 내벽 안쪽은 가로 470m, 세로 380m, 면적 약 18ha로서 성역으로 여겨졌다. 이곳에는 성탑  지구라트, 신전, 안뜰, 무기와 장식품을 보관하는 창고 등이 세워져 있었다. 지구라트 북서쪽 벽으로 둘러싸인 사각 모양의 공간에는 남신 이슈니칼랍·나피리샤와 여신 키리리샤를 모신 3개의 신전이 있다. 각 신전에는 안뜰 지성소·공물보관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기단은 불에 구워 만든 벽돌, 건물 위쪽은 햇볕에 말린 어도비 벽돌로 지었으며 벽에는 엘람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유적 중앙에 있는 지구라트는 서아시아 최고의 규모로서 현재 높이 28m이다. 초가잔빌은 원래 5층이였으나 현재 3층까지만 남아있으며 원래 높이는 60미터로 추정되나 현재는 25미터이다. 밑면은 한 변의 길이가 102미터인 정사각형 모양이다. 4모퉁이가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1935년 앵글로 이란 석유회사가 지역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고대 이란땅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산을 신성시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산이 없어서 산의 형상을 만든 것이 이 초가잔빌의 지구랏트로 알려져 있다.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지구라트

 

BC 3000년대 전반 이전의 기단이 있는 신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우르(Ur) 제3왕조의 수립자인 우르남무(Ur―Nammu)의 지구라트에서 기본적인 형을 거의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르남무는 우르·우르크·니푸르(Nippur)·에리두에 지구라트를 세웠는데 이 중 유명한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시대(BC 1365∼BC 609), 북메소포타미아의 각 도시에 조영(造營)된 지구라트에는 계단 대신에 경사로(傾斜路)가 설치되었다. 6개의 신전에 부속되어 있는 코르사바드의 지구라트는 4층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는 7층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엘람에서도 초가잔빌에 BC 13세기에 5층의 기단이 있는 인슈시나크신(神)의 지구라트가 건조되었다. 이와 같은 지구라트를 축조할 때에는 속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겉마무리 쌓기에는 구운 벽돌을 쓰고, 역청(瀝靑) 등을 모르타르로 사용하였다. 또한 표면의 채색은 채유(彩釉) 벽돌로 하였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다

 


우르의 지구라트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이라크의 지구라트>

 

Assur의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ASSUR

 

Assur

 

Assur  

 

Assur 지구라트 서쪽 

 

Nimrud의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NIMRUD

 
이라크 니므롯의 지구라트(대탑)

 

이라크에 있는 많은 지구라트 중 하나의 모습이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이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작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합니다. 그 신전중에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 인데 그 당시에도 이미 지그라트는 오래된 탑이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고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된다. 수천년전에 만들어진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인 '마르둑(Marduk)'이라고 쓰여 있다

 

Uruk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URUKl

 

Uruk 지구라트

 

Aqarquf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AQARQUFl

 

Borsippa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BORSIPPA

 

Borsippa 지구라트    

 

Eridu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ERIDU

 

Kish 지구라트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MESO/KISH

 

Kish 지구라트

 

6층에 바알신의 지성소가 있었다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며 8천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다. 나보포라싸왕은 ‘마르둑신이 나에게 에테메난키(바벨탑)의 기초를 지구 중심까지 닿도록 단단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래야만 하늘까지 오를 수 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Tower of Babel (바벨탑)


바벨탑의 기사는, 창 11:1-9에 보여지는데, 홍수 후의 인간의 문명의 하나의 도달점이 여기서 간결한 기사에 의해 훌륭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두 가지의 물음에 대한답이 보여져 있기도 하다. 제1은, 어찌하여 지상의 민족은 종류가 다른 말을 쓰고 있는가, 제2는, 어찌하여 고대 바빌로니아의 주민은 오늘날도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구운 벽돌의 탑(塔) 지구라트(Ziggurat)를 세웠는가의 물음인데, 이 물음과 답에서 성서기자는 심원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탑은, 인간이 자기의 위대함과 하나님 없이 인간의 일치를만들 수가 있다는 인간의 세속적 야심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에 심판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어떤 폭력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다만 언어를 혼란케 하시는 방법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호 이해의 수단을 잃고, 각자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 오순절의 일은, 이 바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판의 역(逆)이었다(행 2:1-11). 여기서는 하나의 말이, 많은 언어를 달리하는 사람에게 모국어로 말하듯이 이해되었다. 바벨에서는 하나의 언어가 말해졌지만, 형제는 서로 이해치 못했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많은 다른 언어의 사람들이 서로형제처럼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하나에서 여럿으로]가 바벨의 분열의 비극이고,[여럿에서 하나로]가 오순절의 축복이다. 성령에 의한 참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목적이시다(창10장과 행2장에 여러민족의 列記가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하다).바벨탑의 기원은 바빌로니아의 도시국가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지구라트(Ziggurat)이다. 이것은 피라미트 형(形)의 높은 탑으로서 보통은 7층루(七層樓)로 되어 있으며, 신원(神苑)의 중앙에세워졌는데, 정상에는 신전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제의가 행해졌다. 7층루는 일곱 가지 색으로 칠해지고, 5개의 유성과 태양, 태음, 또는 그것에 상당하는 신신의 상징으로 다음과 같은관계였다.


제1층 토성(土星)ㆍㆍㆍㆍ니니브(Ninib)ㆍㆍㆍㆍ흑색(黑色)

제2층 목성(木星)ㆍㆍㆍㆍ(마르두크Marduk)ㆍㆍ등황색(橙黃色)

제3층 화성(火星)ㆍㆍㆍㆍ네르갈(Nergal)ㆍㆍㆍ심홍색(深紅色)

제4층 태양(太陽)ㆍㆍㆍㆍ샤마슈(Samas)ㆍㆍㆍ황금색(黃金色)

제5층 금성(金星)ㆍㆍㆍㆍ이슈타르神(Istar)담황색(淡黃色)

제6층 수성(水星)ㆍㆍㆍㆍ느보神(Nebo)ㆍㆍㆍㆍ남색(藍色)

제7층 태음(太陰)ㆍㆍㆍㆍ신神(Sin)ㆍㆍㆍㆍ백은색(白銀色)


바벨론에 있어서의 발굴의 결과, 바벨탑은 마르두크의 신전(神殿) 에사길라(Esagila=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의 북방 에테메난키(Etemenanki=하늘과 땅의 기초의 집)라고 불리우는 지구라트로 동정된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인데, 결국 셈족의 침입에 의한 정치적 변동 때문에 준공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 미완성인 탑의 거대한 유물은 오랫동안 고대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되었다.산헤립(Sennacherib 전 704-681)이 바벨론을 점령한 때 이 유물을 제거하려 했으나 성공치못했다. 에살핫돈(Esarhaddon 전 680-669),앗슈르바니팔(Asshurbanipal 전 668-631)등도 이재축(再築)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나보폴랏살(Nabopolassar 전 626-605)도공사를 계속했으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그 완성은 겨우 느브갓네살 2세(Nebuchadnezzar Ⅱ 전 605-562)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의 비분에는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탑의 지계(地階)는 91.4㎡이고, 높이 36.5, 제2층의 주변은 지계(地階)보다 좁고, 높이는 20m, 제3층에서 6층까지는 각 층 모두 높이 6.4m, 그 주변은 층을 거듭함에 따라 좁아지고, 제7층 즉 최상탑은 높이 17m, 그 가운데 신전이 세워져 있으며 탑 전체의 높이는98.5m에 미치고 있었다. 바벨론 멸망후 이 폐허는 주변 주민의 흙벽돌 절취장(切取場)으로 되어버렸다. 옛 탑의 기초였던 부근은 현재 불과 91.5㎡의 구덩이로 되어 있다


Episode: God in America: One: A New Adam


http://www.pbs.org/godinamerica/etc/introduction.html
http://www.pbs.org/godinamerica/view/

Since the days when the Puritan "city on a hill" beckoned on the horizon of the New World, religious faith and belief have forged America's ideals, molded its identity and shaped its sense of mission at home and abroad.

For the first time on television, God in America explores the tumultuous 400-year history of the intersection of religion and public life in America, from the first European settlements to the 2008 presidential election. A co-production of AMERICAN EXPERIENCE and FRONTLINE, this six-hour series examines how religious dissidents helped shape the American concept of religious liberty and the controversial evolution of that ideal in the nation's courts and political arena; how religious freedom and waves of new immigrants and religious revivals fueled competition in the religious marketplace; how movements for social reform -- from abolition to civil rights -- galvanized men and women to put their faith into political action; and how religious faith influenced conflicts from the American Revolution to the Cold War.

Interweaving documentary footage, historical dramatization and interviews with religious historians, the six-part series is narrated by actor Campbell Scott and includes appearances by actors Michael Emerson (as John Winthrop), Chris Sarandon (as Abraham Lincoln) and Keith David (as Frederick Douglass), among others.

"The American story cannot be fully understood without understanding the country's religious history," says series executive producer Michael Sullivan. "By examining that history, God in America will offer viewers a fresh, revealing and challenging portrait of the country."

As God in America unfolds, it reveals the deep roots of American religious identity in the universal quest for liberty and individualism -- ideas that played out in the unlikely political union between Thomas Jefferson and defiant Baptists to oppose the established church in Virginia and that were later embraced by free-wheeling Methodists and maverick Presbyterians. Catholic and Jewish immigrants battled for religious liberty and expanded its meaning. In their quest for social reform, movements as different as civil rights and the religious right found authority and energy in their religious faith. The fight to define religious liberty fueled struggles between America's secular and religious cultures on issues from evolution to school prayer, and American individualism and the country's experiment in religious liberty were the engine that made America the most religiously diverse nation on earth.

God in America comprises six 60-minute episodes:

Episode One, "A New Adam"
The first hour of God in America explores the origins of America's unique religious landscape -- how the New World challenged and changed the faiths the first European settlers brought with them. In New Mexico, the spiritual rituals of the Pueblo Indians collided with the Catholic faith of Franciscan missionaries, ending in a bloody revolt. In New England, Puritan leader John Winthrop faced off against religious dissenters from within his own ranks. And a new message of spiritual rebirth from evangelical preachers like George Whitefield swept through the American colonies, upending traditional religious authority and kindling a rebellious spirit that converged with the political upheaval of the American Revolution.

Episode Two, "A New Eden"
Hour two considers the origins of America's experiment in religious liberty, examining how the unlikely alliance between evangelical Baptists and enlightenment figures such as Thomas Jefferson forged a new concept of religious freedom. In the competitive religious marketplace unleashed by this freedom, upstart denominations raced ahead of traditional faiths and a new wave of religious revivals swept thousands of converts into the evangelical fold and inspired a new gospel of social reform. In a fierce political struggle, Catholic immigrants, led by New York Archbishop John Hughes, challenged Protestant domination of public schools and protested the daily classroom practice of reading from the King James Bible.

Episode Three, "A Nation Reborn"
Hour three explores how religion suffused the Civil War. As slavery split the nation in two, Northern abolitionists and Southern slaveholders turned to the Bible to support their cause. Former slave and abolitionist Frederick Douglass condemned Christianity for sanctioning slavery. In the White House, Abraham Lincoln struggled to make sense of the war's carnage and the death of his young son. The president, who previously had put his faith in reason over revelation, embarked on a spiritual journey that transformed his ideas about God and the ultimate meaning of the war.

Episode Four, "A New Light"
During the 19th century, the forces of modernity challenged traditional faith and drove a wedge between liberal and conservative believers. Bohemian immigrant Isaac Mayer Wise embraced change and established Reform Judaism in America while his opponents adhered to Old World traditions. In New York, Presbyterian biblical scholar Charles Briggs sought to wed his evangelical faith with modern biblical scholarship, leading to his trial for heresy. In the 1925 Scopes evolution trial, Christian fundamentalist William Jennings Bryan faced off against freethinker Clarence Darrow in a battle between scientific and religious truth.

Episode Five, "Soul of a Nation"
Hour Five explores the post-World War II era, when rising evangelist Billy Graham tried to inspire a religious revival that fused faith with patriotism in a Cold War battle with "godless communism." As Americans flocked in record numbers to houses of worship, non-believers and religious minorities appealed to the U.S. Supreme Court to test the constitutionality of religious expression in public schools. And civil rights leader Martin Luther King Jr. emerged as a modern-day prophet, calling upon the nation to honor both biblical teachings and the founders' democratic ideals of equal justice.

Episode Six, "Of God and Caesar"
The final hour of God in America brings the series into the present day, exploring the religious and political aspirations of conservative evangelicals' moral crusade over divisive social issues like abortion and gay marriage. Their embrace of presidential politics would end in disappointment and questions about the mixing of religion and politics. Across America, the religious marketplace expanded as new waves of immigrants from Asia, the Middle East and Latin America made the United States the most religiously diverse nation on earth. In the 2008 presidential election, the re-emergence of a religious voice in the Democratic Party brought the country to a new plateau in its struggle to reconcile faith with politics. God in America closes with reflections on the role of faith in the public life of the country, from the ongoing quest for religious liberty to the enduring idea of America as the "city on a hill" envisioned by the Puritans nearly 400 years ago.


Watch the full episode. See more FRONTLINE.



출처:아멘넷 게시판: 준비: G2u 님
이글은 "관상기도 정체성 도입 경계령 -관상기도,신일합일 위장 자기 확신"
이라는 제목으로 "좁은 길을 걸으며"라는 개혁주의 한 카페에 실린 글을
그대로 퍼온 것입니다.

[본 글은 림헌원 목사가(한돌교회 담임목사, 예장합동, 명지대학교
교양학부 강의 역임, 협성대학교 교양학부 강의)연구한 글임을
밝힌다(편집자 주:).

시작하는 말

관상기도는 형식상으로 보면
① 거룩한 성경읽기 단계
② 읽은 것 묵상단계
③ 묵상한 것을 놓고 기도하는 단계로 나눠진다.

여기까지는 보통 QT와 거의 같아서 분별이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4단계에
설정된 관상기도의 단계이다.
그들이 표방하는 관상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불교나
천주교, 여타 동양종교의 명상 기도법이 가미된 것이다. 다 같으나 마치
이단(異端)처럼 끝이 다른 것이다. 바른 교회라 하면 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기도, 믿음의 기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신약 성경의 사도들이나 예수님은 기도를 할 때,하나님이 임재하는 시간이니
촛불을 켜라! 주먹 크기의 종을 쳐서 소리를 울려라!’는 등과 같이 어렵고도
요상하게 승려들이 좌선하고 명상하는 식으로, 혹은 무당이 폭포수 밑바위에서
촛불을 켜고 종을 흔들어 소리를 내며 신(神)내림 굿을 하듯이 가르치지 않았다.

1. 관상이란 정의와 용어 자체의 문제.

관상(觀想)이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이며, 생각과 말과 감정을 뛰어
넘어 우리의 모든 인식 활동을 활짝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수행과 노력, 지력이나 어떤 사람의 뛰어난 안목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불교 사상, 이성주의, 과학주의 사상(복음이 아닌 인본주의
사상)등이 끼여 있다.마치 인도 명상가들의 모습과 그 옛날 중국이나 한국의
도사들 모습같지 아니한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 신앙의 세계관 속에 독소같은 불순물로써 접목할 수
없는 요소가 되어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가장 싫어하시는
종교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로 급 비화 될 수 있어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물론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66권 말씀의 든든한 초석 위에서 영혼과 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다양하게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정적인 침묵 행위의 위험성.

관상가들은"내 마음이나 생각, 언어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 안에서 쉬면서 말씀하시면 듣고,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조급해 말라"
고 한다. 명상의 도를 깨우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안에 영적 바이러스가
있다. 이것들은 타 종교의 명상, 참선, 무아의 경지사상과 다를 바 없다.

'침묵기도’,‘경청기도’라고 하는 미명아래 분위기를 조성하여 놓고,
깊고도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면‘두 가지의 계시’를 인정하고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이 임한다면 이미 기록된 정경 66권 말씀과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결국 두 개의 계시를 인정하는가?’라는 질문에
관상가들은 마땅히 대답해야 한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계시의 종결성
(혹은 충족성)과 그 완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구약 성경은 계시의 방편으로 여호와의 사자(하나님의 현현), 자연, 구름,
불꽃, 사건, 말씀 등으로 임하였다. 구약성경에서는 예언의 성격에 따라서
계시되기 때문에 세미하게 또는 강렬하게 또는 강, 약, 격정적으로 계시가
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계시의 시대가 끝났기에 음성이 들려질 이유가 없다.

다른 어떤 것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음성을 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에 감화를 받고 깨달아서 그 계시된 말씀의 지표에 맞추어
걸어가며 사는 것이 오늘날 정경을 손에 든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이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말씀묵상을 통하여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3.‘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자들은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한 경험을 자기 내면에서 하게 되는데 지성적인
냉랭함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정감적인 경험이요, 직관적인 경험’
이라고 한다.
관상 기도를 통해 일상적이지 않는 종교적 신비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쟁점은 관상기도를 통해 어떤 경험을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성경이 계시한 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관상가들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경험은 타 종교, 곧 힌두교의
요가를 통한 명상법이나 불교의 명상수련, 단 수련원의 뇌 호흡, 마음
수련원의 자기를 비우는 명상 수련법 등을 통해 어떤 종교적 절정을
경험했다는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타 종교인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와 자신이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벗어나 신의 경지에 이르러 신과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말하는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체험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명상수련을 통해 궁극에는 인간이
신이 되는 정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지 않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했던 경우를 보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사 6장),
에스겔 선지자(겔 1:1; 40:1), 다니엘 선지자(단 10:5-17), 자신이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의 상태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사도 바울(고후 12:1-5),인자같은 이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던
사도 요한(계 1:9-20) 등이 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이나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의
체험은 자기들이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하는 자기 수련
기도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신비한 경험을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들에게 알리시고, 그 종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사건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들이 경험한 이런 신비한 체험에 대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거나, 객체와 주체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런 정황조차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히
이를 수 없는 영광 앞에 피조물 된 하나의 객체로서 두려움으로 주님을 뵈었다.

관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신비한 경험’이
실제로 하나님과 그들이 하나 된 것일까? 앞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면 관상가들이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경험은 내적 경험이든
외적경험이든 실제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절정의
어떤 감정적 직관적 경험을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체험을 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그렇게 말하는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씀하는‘하나 됨’은 관상가들이 말하는 하나 됨과는 다르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길은 주님 안에 있는 것, 즉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곧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이다(요15:1-10)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한다”
(요15:10)고 말씀하셨다.

또한 관상으로 기도하는 자들은‘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관계를 성찰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세계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선같아 보이고, 이보다 더
이상적인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또 무슨 사상인가?

교인들이 쉽게 도달하기 어렵고 소위 그들이 말하는‘중보기도’이상의
훈련이 된 사람들에 한하여 자기 혼자 가정에서, 또는 그들이 지어 놓은
영성수련장에서 이교도의 도사들처럼 오랜 세월 수련해 도달해야 하는
굉장한 수준의 높은 경지를 논하는 것 같아서 그 고상함의 매력에 이끌려
미혹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4.‘모든 기도가 본질적으로 관상기도’라는 말의 허구성.

예장 통합 측 J대 R 교수는 2007년 05월 16일의 인터뷰 기사에서
“관상이 란 하나님과 친밀한 삶”이라는 제목 하에 관상기도를 묻는
뉴스엔조이 기자에게 “관상기도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말로 시작하지만
사실 그는 모든 기도가 다 관상기도라고 말하고 있다.

R 교수는 관상과 관상기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관상은 방법이 아니라 상태를 말한다.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고 전 피조세계를 통해서 스스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상적인 체험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형성한다. 그러기에 모든 기도는 본질적으로 관상적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R 교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관상’으로 덮어씌우고 모든
기도를 ‘관상기도’로 덮어씌우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관련된 것들을 모두‘관상’이라 대체하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대체하자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도 관상기도요, 주님이
하신 기도도 관상기도요, 사도들이 드린 기도도 관상기도이며 묵도,
합심기도,통성기도, 부르짖음의 기도 등 모든 기도가 다 관상기도라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 영지주의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을 모르니 미혹이 따로 없는 것이 아닌가?

R 교수와 같은 관상가들의 언어적 유희를 보면 그 얼마나 기상천외한
문구를 사용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관상의 성경적
근거들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같은 소리만 그럴듯하게 전개하니 많은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다.

5. 관상기도는 성경계시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부정하는 것.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으로만 성도를 바르게
성숙케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내려놓고 관상가들이 실천하는 4단계
관상에서 신, 구약 성경 그 어디에서도 발견된 사실이 없는
‘관상’이란 용어를 새삼 끼워 넣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그의 음성을 듣겠다고 하니 그 얼마나 황당한 일이며 모순인가?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관상가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 말씀의
충분성(딤후 3:16-17)을 믿지 못하므로 ‘관상’이란 이교도의 용어를
삽입하여 새로운 반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이 탄식하시기를 “내 백성이 자기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 망하는구나”하였고, 예수님은“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셨고, 바울 사도는“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
(골3:16)라고 가르쳤고, 사도 베드로 역시“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고 하였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주님, 오직 세세토록 있을 유일한 말씀이 내
영혼 속에 채워져 하나님과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하여 주소서. 성령님이 저를 주관하셔서 내 영혼에 채워진
말씀의 능력으로 인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바르게 묵상하기 위한
기도를 한다면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은혜로 충만한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이니 뭐니 하면서 기도의 방법론을 말하기 이전에
성경 말씀의 본질이 지향하는 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6. 관상가들의 자유주의 다원주의 포용주의 신학적 해석.

기록된 66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마다 감사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성경말씀을 제쳐두고 촛불을 밝혀 놓고 구도자의 심정으로
자기 스스로 애써서 하나님을 찾아가 만나려는 수련을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관상하는 영성가들이 촛불을 사용하려는 행위는 무슨 이유일까? 촛불은
원시종교로의 회귀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모더니즘의 이성주의를
배격하는 감성주의)은 원시종교로의 회귀를 요구한다. 이러한 관상기도의
다양한 행위는 상호 종교간의 벽을 허물 수 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성경 없이도 이교도와 동일한 자리(미국의 영성수련장
'샬렘’에서는 이미 다종교가 함께 영성 수련을 하고 있다)에서 종교행위를
함께 시행할 수 있는 관상을 이용하여 서로 대화하며 종교간 통합을
유도하게 된다. 결국 관상이 세계 종교 일치(종교다원주의)로 가려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첫 단초(端初)가 아닌가 한다.

이미 한국의 유명한 몇몇 교회에서는‘관상당회’시간에 당회원들은
당회 주제에 대한 대화가 일체 없다고 한다. 아예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게 하고 당회를 끝낸다고 한다.‘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며 촛불을 켜고,두 개의 주먹크기만한 종을
갖고 임재지기들로 하여금 관상 종교의식을 시도하게 하여 관상기도와
관상회의 등과 같은 방식으로 그 열기를 더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 말씀까지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며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막힌 세상
(그래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요설이 나오는 것이다)을 구현하겠다는
관상가들의 입장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님께서 그 안에 내주해 계실 텐데
그들이 마음을 비운다면 큰 일이 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귀신이 와서 보니 그 집이 깨끗이 청소되어 빈 것을 알고 가서 다른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 갈 것이다. 물론 마음을 비운다고 성령님이
들어오시고 마음을 채운다고 나가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항상
내주해 계시기 때문이다.

좌선요가의 단계로 마음을 비우고 호흡, 즉 들숨에 성령님이 들어오고
날숨에 죄를 내보내고 하면서 어떤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니 도대체 그 경지에서 만나는 실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관상가들이 말하는 성령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성령님이 아니며 그들이
어떤 경지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성경적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 어떤 기술이나 훈련으로 도를 닦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비어 있는 데는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성령님이 분명히 안 계시니까 마음을 비우고 성령을 모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 씻음 받고 성결케 된 자에게
성령님이 계시고 주님의 자녀로 살면서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히 4:16).

관상에 관하여 성경적 근거를 제시 하였던 H대 K 교수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은 마태복음 5장 3절에서‘자기 부인’을 말하고 있다.
이를 불교의 무아(無我)나 유교의 ‘사(私)를 버려라’나 도교의
'오상아’(吾喪我 : 나를 잃어버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여타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의 결국은 “나는 없다”라든지 “마음을
비운다”라는 상태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자기 부인’의 상태는
‘죄인’이라는 존재가 전제된다. 죄인중의 괴수인 나’라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그 죄인, 자기를 부인하는 그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의롭다고 인쳐 주신다. 그리고 그 죄인은 자신을
의롭다 하신 그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빈 마음이나 ‘나’라는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이 또한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이유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이 미리 정하시고
홀로 행하신 결과일 뿐이다.

아울러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든지, “가만히 있어라”
든지 하는 말씀은 말을 적게 하고 떠들지 말고 침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7. 유혹이 전개되는 통로를 주의하자! .

21세기에 진입하여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관상기도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논쟁의 핵심은 그것이 성경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건하며 성경적인 기도라 하고, 주로
'경험을 통해서’ 강력하게 주장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다원주의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며 매우 주의할 것을 말하고 있다.

우선 관상으로 하는 이런 관상기도방법(통합측 J대 R 교수는 태도라고
말하지만 분명히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이 유행하게
되는 사회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소위 마음을 다스림으로 성공하는
세속 사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철저한 성경적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익숙치않은
'먹고 살만한’ 지성인과 중산층 쯤의 교인들이 이러한 맥락에서 상당히
호응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실력이 탄탄한 신학교
교수들과 유명한 목회자들이 비성경적인 근거를 근거랍시고 제시하며
효과를 입증하여 이른바 ‘영성신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항상 유혹이란 ‘낯선 언어’를 선봉장으로 하여 보다 새롭고
좋아 보이는’ 하나의 흐름을 조장해 내게 된다.
예를 들어 ‘경건’이라는지 극히 성경적인 용어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그 의미도 애매모호하고 충분히 다원주의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영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자
‘경건을 경직으로 오해하여 질식할 듯한 상태에 있던 자’들이 마치
해방군이 온 것 마냥 ‘밀고 들어’ 왔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경건을 질식시키고 영성을 추앙하는 교묘한 배도적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는데 조금의 부족함이나 주저함도 없이 은밀하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성경적으로 철저하지 못한 교수들이나
목회자들이 무언가 새로운 유행을 불러 일으켜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고 싶어 하는 이들’(딤전 6:5)의 이해 조건과 맞아떨어지면
이는 곧바로 기독교계의 새롭고도 강력한 도구가 되고, 적당하게
손질하면 쓸 만한 프로그램으로 탄생하여 넉넉한 재정을 충당하는
요소도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들이 이른바 ‘영성에도 색갈이 있다’는 류의
사상이나 레노바레 운동, 관상기도 등이다.

우선 관상기도만 하더라도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비슷하나 결국은 다른 길로 인도하는 극히 교묘한
유혹이다. 물론 이들의 가르침이란 관상가들이 볼 때 기도에 대한
기본 자체도 잘못 형성되어 일부 교회가 그런 것처럼 소위 막가파식으로
울부짖고 시끄럽게 ‘따따 부따’ 기도(?)하는 그것에 대한 반작용의
대안으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신바 하나님과의 진실한 대화,‘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따른 실천, 마음을 살피며 자기를 부인하는 태도,
말씀 묵상에 따른 내용을 붙잡는 의지적인 간구 등으로도 충분히
성경적인 기도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성실하게 하지 않고 아버지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가 부족하니까 기도에 대해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고
새로운 방법론 을 찾다 보니 해아래 새 것이 없음에도 ‘무언가
신선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오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영적 세계는 참으로 혼돈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철저히 성경적인 신앙으로
무장하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적인 흔들림이다.
이들은 분명히 비성경적인 열매를 보고서도 엄청난 규모로 성장해버린
오순절 주의와 성령 운동의 세력 앞에 자신의 빈곤함을 느끼는 듯하다.
그리하여 연합해서는 안 될 자들과 함부로 연합을 선언하고 실천하며,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사상과 사조를 거리낌 없이 수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영향력과 인격을 단순하게 인정하며 따르는 수많은 성도들을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영적 시력저하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수많은 개혁주의자들과, 성경을 사랑하는 동료들과 후진들이 이를 지적하고
있지만 이미 대세는 우려할만한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관상기도를 하는 유명한 목사와 교수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영향력이 막강한 지도자들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할 때
교회가 얼마만큼 영적 혼동과 피해를 입게 될지 심히 우려가 된다.

진실로 성경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제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를
각오를 가져야만 하는 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교묘하게 흐르는 유혹의
강물을 따라 배도의 대해로 서서히 나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시력마저 상실한 지금의 상황은 안타까움 그 자체이다. 아무쪼록
깨어있는 소수라도 우리의 신앙 세계를 파고드는 유혹의 통로를 잘
분별하고 끝까지 말씀을 붙잡는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 개혁주의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깨닫는 법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부르짖는
간구와 묵도와 묵상이 언제나 성경계시와 조화를 이루도록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림헌원 목사 (onestone3@hanmail.net)]
출처: 아멘넷, 교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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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생성 연대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

대부분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한다. 진화론에서는 우주가 40-50억년 전에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지구의 생성연대가 엄청나게 오래된 것으로 말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 땅이 생성된 것이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임을 보여준다. 필자 역시 분명히 그렇게 믿고 있으며 다음의 몇 가지 증거를 보여주고자 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많은 증거의 글을 올릴 것이다.

지구와 태양계가 진화론자들이 가정한 것처럼 수십억 년 전에 형성된 것이 아니고 비교적 최근에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지금까지 많이 수행되어 왔다. 다음의 과정들은 일반적으로 진화론자들이 숨기고 있는 것들인데 그 이유는 이 과정들이 지구와 태양계의 형성 연대가 그리 길지 않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진화론자들의 진화론적 시간구조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이다.

(1) 지구의 자기장(The Earth's Magnetic Field)

지구 자기장의 세기는 지난 1세기 동안 잘 측정되어 왔고, 과학자들은 이것을 통해 예외적으로 좋은 기록을 얻었다. 최근의 한 중요한 연구에서 반스(Thomas G. Barnes)는 지구의 자기장의 세기가 1,400년마다 반으로 줄어들며 지수적으로 감소한다는 것을 보였다. 말하자면 1,400년 전의 지구의 자기장의 세기는 지금의 자기장의 세기보다 두 배나 강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10,000년 전까지 역으로 추산해보면, 그때의 지구는 마치 자석별(magnetic star)의 자기장만큼이나 강한 자기장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난다. 물론 이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사실같이 들리지는 않는다. 이처럼 현재의 지구의 자기장의 반감기를 기초로 해서 지구의 형성 연대를 추정해보면, 지구 나이의 상한은 10,00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결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진화론자들이 지구의 생성 연대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해온 소위 균일론이라 불리는 가정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이 주장해 온 연대기 즉 지구의 연대가 오래되었다는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역전 가설"(reversal hypothesis)이라는 이론을 제안했다. 그들은 지구의 자기장이 지질 시대를 통해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존속되어 왔으나, 어떤 기간에서는 역전되어 영(zero)이 되었다가, 다시 역전되어 그 강도가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약 70만 년 전에 그런 역전 현상이 마지막으로 일어났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같은 "역전 가설"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 합리적이며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지 못한다. 게다가 암석 안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자체 역전"(self-reversal)과정은 지구의 자기장과 전혀 상관없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이 "역전 현상"이라고 지칭하는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암석자화현상'(rock magnetization)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구의 자기장이 지구의 핵심에 있는 순환 전류(Circulating electric currents)때문에 형성된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약 2만 년 정도까지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같은 전류에 의해 생성되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순환 전류에 의해 발생된 열은 이미 지구를 녹여 버렸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구의 자기장의 강도는 지구의 형성 연대가 그리 길지 않고 상당히 짧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2)유성 먼지(Meteoritic Dust)

근래에 과학자들은 우주로부터 지구의 대기권 안으로 들어오는 우주먼지 입자의 양이 거의 일정함을 발견했다. 결국 이러한 먼지 입자들은 지구의 표면에 가라앉아 쌓이게 된다. 피터슨(Hans Petterson)은 먼지 입자의 유입량을 정확히 측정하였고 지구가 1년에 약 1천 4백만 톤의 먼지를 받아들인다고 결론지었다.

이제 진화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지구의 나이가 약 50억 년이라고 가정한다면, 전세계에는 약 60m정도의 두께를 가진 유성 먼지층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먼지층은 지구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러한 두께를 갖고 있을 법한 달에서조차도(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므로) 우주비행사들은 그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약 1mm 두께의 먼지층만 있음). 우주 비행사들이 달표면에 발을 내릴 때, 혹시라도 유성 먼지층에 잠기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심은 완전히 근거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은 침식이나 혼합 과정이 지구내의 유성 먼지층의 부재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고 또 쉽게 논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데, 그 이유는 유성 먼지의 구성 요소들이 매우 특별하며 특히 니켈이나 철을 많이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니켈은 지각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원소이며 해양 중에서는 더욱 더 발견하기 어렵다. 반면에 유성 먼지내의 평균 니켈 함량은 지각 안에서의 평균 함량보다 무려 약 300배나 된다. 지각이나 해양에서 발견된 비교적 적은 양의 니켈을 근거로 해서 지구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지구의 나이는 수천 년 정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인구 증가(Population Growth)

지구의 형성 연대가 매우 짧음을 설득력 있게 증거 하는 또 다른 사실은 인구 증가 과정이다. 진화론자들은 인류가 적어도 1백만 년 전부터 이 땅에 거주해 왔다고 믿고 있고, 반면에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인류가 단지 몇 천 년 전부터 이 땅에 거주해 왔다고 믿고 있다. 사실 아담부터 지금까지는 약 6,000년 정도뿐이 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구 증가에 대한 통계로부터 얻은 자료는 어떤 것을 더 지지하고 있는가?"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인구 증가율을 현재 인구 증가율의 1/4인 1년당 평균 0.5% 정도로 가정하면, 현재의 전세계 인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단지 4,000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계산을 했다. 이 계산은 전쟁이나 질병으로 인해 인구 증가율이 평균치 이하로 떨어진 기간도 충분히 감안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리스 박사는 약 50억 정도인 현재 인구가 1백만 년이라는 진화 역사의 결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만일 인구가 1백만 년 동안 매년 0.5%의 증가를 한다면, 현 세대의 사람 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인 이 될 것이다! 진화론적 모델의 터무니없는 실체를 완전하게 평가하고자 한다면, 온 우주를 꽉 채우기 위해서 단지 개 정도의 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된다. 따라서 이처럼 터무니없는 인구의 증가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류 연대기에 대한 창조 모델이 인류의 형성 연대에 대해 훨씬 더 믿을 만한 수치를 말해 준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단지 수천 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수백만 년 혹은 수십억 년이나 된 것이 아니다.





아담은 얼마나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까?

 

* 다음은 헨리 모리스 박사의 "Bible has the answer"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답변 : 성경의 연대를 기록한 창세기 5장과 11장에 따르면, 아담은 지금부터 단지 몇천 년 전에 창조되었으며 분명히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사람(남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26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민속을 한 피에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5:45은 "첫 사람(남자) 아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친히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인용하시면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라고 말씀하셨음니다(마19:4). 성경에 따르면 아담은 원래 죄가 없었고 완전한 환경에서 살았지만(창1:31)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저주를 가져왔습니다(창3:11). 그 이후로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롬8:22).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진화론이 가르치는 역사는 원숭이와 인간의 공통 조상이 지금부터 약 6천만 년 전에 생겨났고 또한 현대인은 약 백만 년 전에 출현했다고 주장합니다. 진화론적 인류학자들은 요즈음 인류의 계보에 대해 서로 여러 가지 주장들을 펴고 있는데 독자께서 필히 아셔야 할 사실은 인간의 진화를 증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중간 화석"이라는 것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진화론적 가정에 기반을 준 "가상적 공통 조상"에 대한 화석의 증거란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인구 통계에 대한 연구는 성경의 연대가 진화론적 연대보다 훨씬 더 현실적임을 보여 줍니다. 인류의 인구는 최초의 첫 부부로부터 시작했음이 틀림없는데, 문제는 그 첫 부부가 지금부터 4300년 전(어셔의 성경 연대기에 따른 대홍수의 때)의 노아 부부였느냐, 아니면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이른 바 백만 년 전에 생긴 최초의 부부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세계 인구 증가율은 매년 2%가 넘으며 현재의 인구는 50억이 넘습니다. 하지만 지난 4,300년간에 걸쳐 현재의 세계 인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구의 평균 증가율이 매년 o.5% 정도여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한 사람 당 평균 수명을 40년으로 잡고 한 가족 당 부부와 2.5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가정하여 계산할 때 현재의 인구가 생성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노아 이후로부터 현재까지의 기간, 즉 4,300년 정도뿐이 안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이 숫자는 어림잡아 볼 때 매우 합당한 수치이며 성경의 연대가 모든 면에서 매우 실제적임을 보여 줍니다.

반면에 인구가 이런 증가율로 백 만년 동안 계속해서 증가했다면 현재의 인구는 온 우주에 빽빽이 들어차고도 남을 정도로 많아야만 합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류의 역사가 백만 년 되었다는 진화론의 주장은 매우 불합리한 것인 반면에 성경의 연대는 매우 합당하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이 모든 것은 간단한 계산에 의해 쉽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설혹 어떤 기적 등에 의해 중간에 인구 증가율이 감소되어 백만 년 후의 현재 인구인 50억을 만들어 내었다 하더라도 이 사실은 여전히 3조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기간에 살다가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화석을 찾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화석을 찾는 일이 그처럼 어렵다는 것은 얼른 보아도 너무 이상한 것 아닙니까? 진화론의 이론대로 하자면, 사람의 유해는 어디에서나 발견되어야만 하는데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선사 시대의 6천만∼7천만 년 동안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었다고 그들이 추정하는, 이른 바 원숭이/사람들의 경우에도 더 더욱 맞아 떨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화석은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원숭이/사람에 관해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널리 홑어진 한 줌의 뼈조각에 불과하며, 인간의 진화에 대한 전문가로 자처하는 여러 사람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불확실한 진화 사슬의 여러 가지 중간 고리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화론은 반성경적, 반기독교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비과학적이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무신론, 불가지론, 사회주의, 파시즘, 그 밖의 다른 거짓되고 위험한 철학들의 기반이 되는 유사 과학적 근거로 효과적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확증하신 바 아담에 관한 기사의 역사적 정확성을 거부하고 진화론적 철학자들의 자기 잇속만 차리는 추측들을 찬성할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출처: 양무리 마을, grace
2.4. 인도 북부 개혁 불교

기원전 3세기경에 “마우랸”(Mauryan) 제국의 왕 “아쇼카”(Asoka, 기원전 273-232)가 불교로 개종함으로 불교는 인도 전 지역에서 세력을 얻게 되었다. 아쇼카 왕이 죽은 후에 마우랸 제국은 분열되었지만, 이후에도 여러 왕조 계승자들은 자신들이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불교에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불교를 후원하곤 하였다.

아쇼카 왕이 불교로 귀의한 이후 기원전 2세기부터 주후 2세기까지 불교가 인도 내에서 크게 번창하면서 불교 내에서 교단 분열이 일어났다. 이 시대를 “부파불교시대”라고 한다. 특히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와 교류가 빈번했던 인도의 북서지방에서 기존 불교의 가르침에서 탈피하려는 개혁바람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Mahayana, 大乘佛敎)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불교는 이론에 치우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오랫동안 수행하는 출가 승려만을 위한 소승불교(Hinayana, 小乘佛敎)였다. 혼자만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한 불교였기에 일반 대중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이에 반발하여 대승불교는 보살(Bodhisattva, 菩薩) 사상을 바탕으로 이타적인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보살”이란 먼저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의 대자대비(大慈大悲) 때문에 세상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교화시키는 일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대승불교에서 관세음보살(Avalokitesvara, 觀世音菩薩)은 자신의 부처됨을 연기하기로 맹세하고 어려움에 처한 중생들의 기도를 들어주며 일체 중생들이 열반(Nirvana, 涅槃)에 들어갈 때까지 세상에 남아 중생들을 돕는 보살을 가리킨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다 보살이 되어서 중생들을 깨닫게 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불교는 많은 부처와 불보살들을 가진 대중종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불(成佛)하자는 대중화된 불교인 것이다. 소승불교에 의해 대중에게 닫혀있었던 불교의 문을 대승불교가 열어 개방시킨 것이다.

2.5. 해외로 전파되는 인도 불교

불교는 인도 내에 머무르지 않고 해외로 진출했다. 중국에는 이미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 때 불교가 들어와 번성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213년에 시작된 진시황의 억압으로 불교가 탄압을 받았었다[신문 “차이나 데일리”(China Daily) 2009년 5월 13일자에 따르면, 중국 산시성(陝西省, Shaanxi) 고고학 연구소의 학자인 “한 웨이”(Han Wei)는 “중국 최초로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서인 사기(史記, The Historical Records)에 진시황제가 불교와 불교 사찰들을 심하게 탄압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로는 한나라 명황제(漢明帝, 주후 28-75) 때에 불교가 중국에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불경이 처음으로 중국어로 번역된 것은 주후 148년경 즉 후한(後漢) 시대에 불교 포교사로 중국에 들어온 안세고(安世高, An Shingao)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안세고는 인도 북서쪽에 있었던 파르티아(Parthia) 제국의 왕자였다가 승려가 되어 불교 포교사로 중국에 들어왔다.

동쪽 끝에 있는 한국에까지 불교가 들어온 것은 주후 3, 4세기경이었다. 고구려는 인도 승려라고도 하고 중국 위나라 승려라고도 하는 순도(順道)에 의해 주후 372년에, 백제는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Marananta)에 의해 주후 382년에, 신라는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에 의해 주후 263년에, 불교가 유입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기도 전에 고구려 승려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했느냐?”란 의문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체로 주후 4세기경에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인도 불교가 주후 2세기에는 중국에 들어와 번역된 경전을 만들고, 4세기에는 인도와 전혀 국교도 없었던 한국까지 포교사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부터 국가로 통합되어 정치 문화적인 교류를 맺고 있었던 로마, 그리스, 아프리카 등에 불교를 포함한 인도 종교가 소개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도마복음』이 들어있는 낙하마디 문헌이 만들어지던 주후 4세기에 이집트에 인도 종교인들이 분명히 있었다. 이 사실을 밝히기 전에 먼저 인도 종교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3. 인도종교 이해

3.1. 힌두 경전 『리그베다』

힌두 종교의 기반은 『베다』경전이다. “베다”(Veda)란 말은 고차원적인 종교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도 아리안들은 힌두 종교의 내용이 수록된 산스크리트어로 된 여러 권의 책들을 만들었다. 이 책들을 『베다』라고 한다. 『베다』의 종류로는 네 개의 수집본(Samhita)이 있는데, 이것들은 『리그베다』(Rg Veda), 『야주르 베다』(Yajur Veda), 『삼마 베다』(Sama Veda),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 등이다.

또한 이 네 개의 경전에 붙어 있는 부록들이 있다. 그것들로는 『브라마나스』(Brahmanas), 『아랑야카』(Aranyaka), 『우파니샤드』(Upanisad) 등이다. 힌두 종교인들은 위에 모든 경전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계시의 책이라고 믿는다. 『베다』에서 나온 가지들이라는 『베당가』(Vedanga)들은 베다 경전들과 같은 계시의 수준에 들지는 못하지만 넓은 의미로 『베다』경전에 속한다.

『리그베다』는 베다 경전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028곡의 노래와 약 10,000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노래들은 수백 년 동안 여러 시인이나 제사장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기원전 1,200-1,000년 어간에 한권의 책으로 수집되었다. 이 수집본은 거의 3,000 년 동안 인도 종교인들에 의해 거의 변경 없이 암송되고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다.

『리그베다』의 노래들은 펀잡(Punjab) 지방에 거주했던 인도 아리안들의 종교적 관심과 사회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 노래들은 다양한 신들을 찬양하고 있다. 물론 그중에 가장 중요한 신은 의심할 것 없이 활동적이고, 강력하고, 예상할 수 없고, 전투적인 신 “인드라”(Indra)이다. 즉 “인드라”(Indra)는 전쟁 신이었다. 둘째로 중요한 신은 불의 신 “아그니”(Agni)이다. 아그니는 태양 불, 난로 불, 제단 불, 사람 배속에 소화시키는 불, 시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불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아그니는 신들의 제사장이며 또한 인간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제사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그니는 제사에서 신들과 인간들을 함께 묶을 수 있는 중재자로 역할을 한다.

『리그베다』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소마”(Soma)이다. 소마는 제사에 쓰이는 식물이름이며 또한 그 식물을 짜서 낸 즙을 가리키기도 한다. 더욱이 그 식물을 혼합한 음료를 마심으로 생기는 현상들을 인격화한 신이기도 하다. 『리그베다』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것을 먹으면 정신이 아주 맑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음료를 영감, 환상, 계시의 음료라고 부른다. 희생제사 때에 시인들은 소마 주스를 마시고, 그것을 통하여 신들과 연합한다. 소마 음료에 의한 계시들은 단순히 꿈이나 환각으로서가 아니라 정상적인 지각 이상의 더욱 분명한 깨달음을 준다고 한다.

인도 아리안들이 기원전 1200-600년 동안에 인더스 강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도시 문명을 만들어 냈다. 기원전 600년경까지 인도 아리안들은 유목민 생활에서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민으로 바뀌어 졌다. 이 시기에 도입된 철기는 갠지스 강 평원에 있던 깊은 밀림 지대를 없애는 데에 사용되었고 또한 농사 경작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더욱 안정된 인구와 풍부한 식량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정착시켰다.

인도 아리안 유목민들은 정착하면서 초기 계급사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인도 아리안 민족이 아닌 외부사람들이 노동자로 병합될 경우 이들을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 “수드라”(Sudra)들로 취급했다. 정치적으로도 체계화되면서 초기 왕국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 초기 왕국 탄생과 더불어 무역의 중심지로서 도시들도 생겨났다. 기원전 600년까지 수십 개의 도시들이 북부 인도에 있었다.

이러한 안정된 생활로 인해서 『리그베다』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 적들을 패배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희생제사가 이제는 사회와 우주 질서를 유지 또는 안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리그베다』의 후기 노래들을 보면 제사 의식이 자세하게 체계화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에 『리그베다』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신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후기 『베다』에서는 희생제사 자체만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제사의식이 강화되면서 제사 업무를 담당하는 계층인 “브라만”(Brahman)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리그베다』의 시인들은 베다 노래에서 강력하고 능력 있는 말씀을 “브라만”(Brahman)이라고 했다. 결국 “브라만”은 제사장 즉 사람을 가리키기는 말이기도 하고 말씀을 가리키기는 말이기도 했다. 종교 의식에서 사용하는 예전적인 말씀들이 본래 능력이 있다는 사상은 인도의 여러 종교 학파들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예전적인 말씀들을 노래 부르듯이 운율에 맞추어 주문(呪文)으로 발전시킨 것이 “만트라”(Mantra)이다. 『리그베다』 시인들은 노래를 만들고 암송하는 사람에게도 “브라만”이란 이름을 적용시켜 브라만 계층을 확대시켰다.

초기 브라만 암송자들은 혈통으로 상속되거나 또는 같은 부족 간의 결혼을 하는 그런 사회 계층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기 『베다』경전에 보면, 브라만들이 『베다』를 가르치거나 제사의식을 주관하는 특별한 사회 계층이 되면서 자손에게 상속되었다. 브라만 계급이 사회적으로 공식화된 가장 중요한 최초의 근거는 『리그베다』에 들어있는 찬송집 『푸루샤숙타』(Purusasukta)에서 발견된다.

이 노래에 의하면 네 가지 사회 계급이 “푸루샤”(Purusa)로부터 나오는데, 그의 입으로부터 “브라만”(Brahman) 즉 종교인들이 나오고, 그의 팔로부터 “크샤트리야”(Ksatriya) 즉 용사들이 나오고, 그의 허리로부터 “바이샤”(Vaisya) 즉 상인들이 나오고, 그의 발로부터 “수드라”(Sudra) 즉 종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 노래는 이 네 종류의 사회계층들이 창조의 순서에 의해서 지위가 구분된다고 가르친다. 결과적으로 브라만은 푸루샤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최고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3.2. 힌두 경전 『우파니샤드』

『아랑야카』(Aranyaka)는 문자적으로 “숲속에 있음”이란 의미가 있고, 『우파니샤드』(Upanisad)는 “스승 옆에 앉아 있음”이란 의미가 있다. 이 두 책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희생제사에 기초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 책들은 세속을 떠나 숲속으로 들어가서 지혜의 스승 옆에 앉아서 은밀하게 대화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들은 대중을 위한 경전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제한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우파니샤드』는 후에 ‘베다의 절정’(Vedanta)으로 받아들여졌다. 『브라다랑냐카 우파니샤드』(Brhadaranyaka Upanisad)는 가장 초기 것들 중에 하나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우파니샤드』이다. 이 책에서 브라만의 스승인 “야즈나발캬”(Yajnavalkya)가 소개된다. 궁정 제사의 결론에서 야즈나발캬는 자신이 베다 문제에 있어서는 현존하는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윤회(transmigration) 사상에 대한 대변인으로 기록된 최초의 인물이다.

윤회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보면, 사람은 죽음을 통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세상으로 영원히 옮겨가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으로 되돌아와서 새로운 죽을 운명으로 다시 살다가 죽게 된다. 이런 삶과 죽음과 재탄생을 『우파니샤드』에서 “삼사라”(Samsara, 윤회)라고 말한다. 삼사라는 단지 한 개인의 윤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영원토록 같은 윤회의 과정에 속해 있다는 말이다. 『우파니샤드』의 이런 세계관은 낮과 밤, 계절 변화 등에 관심을 두었던 초기 『베다』경전에서 나왔다.

이런 윤회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야기한다. “다음 탄생 때에 모습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영속적인 윤회 외에 다른 것은 없는가?” 첫째 질문에 야즈나발캬는 『베다』경전 안에 있는 “칼마”(Karma, 인연, 業) 개념을 다시 정의 한다. 칼마는 넓은 의미로 ‘행동’을 의미한다. 『베다』경전에서 모든 제의적인 행동들은 때로는 그 당시에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열리게 되는 열매(Phala, 결과)를 만들어낸다. 야즈나발캬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 개념을 확장시켜서 그것을 도덕적 차원에 적용시켰다. 생전에 사람의 도덕적 행위가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신처럼 행동하면 다음 세상에서 신이 된다. 그러나 신도 역시 영원한 신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천상의 오랜 향락 생활 후에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야즈나발캬는 끝도 없이 돌아가는 윤회 외에 다른 길도 소개한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을 ‘해방, 해탈, 구원’이란 의미의 “목샤”(Moksa)라고 부른다. 야즈나발캬에 따르면, 개인이 자신의 욕심, 욕망을 소멸시키면 목샤 즉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욕심, 욕망이 삼사라 즉 윤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상의 삶을 초월한 상태를 가리키는 목샤는 개인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목샤 즉 해탈에 관한 가르침은 후기 인도 종교사에서 발전된 모든 『우파니샤드』 사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그동안은 『베다』경전이 가르쳐 온 제사 사상을 통해서 사회적이며 집단적인 종교생활을 추구해왔다. 그런데 해탈 사상의 등장으로 인해 개인 스스로 윤회에서 벗어나서 종교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다른 면으로 보면, 『베다』경전에 따라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세상의 현상 유지에 집착하는 것이고, 해탈을 추구하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것으로 서로 완전히 반대가 되는 가르침이다.  

이런 상반된 가르침은 인도 종교사 전반에 거처 “세속을 떠난 금욕주의적 출가 생활이냐?” 아니면 “세속 안에서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생활이냐?”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들은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지식을 깨닫기 위해서는 세속을 벗어나는 탈속이나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탈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과의 인연을 점진적으로 끊어야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가자”(Sannyasin)는 집과 가족을 떠나서, 상대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하며, 가혹한 환경에서 견디며, 땅위에서 자며, 음식을 조절하고, 호흡을 조절하며, 한마디로 세상에 얽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끊어버려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탈속적인 수행을 『브라다랑냐카 우파니샤드』(Brhadaranyaka Upanisad)와 같은 본문에서 처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전에 『베다』경전들은 우주와 사회의 질서를 발생시켰던 제사의식들을 제시했다. 이런 제사에 대한 가르침들은 당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공헌을 해왔다. 브라만과 같은 계급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입증하는 정치적 힘으로서 이런 제사의식 가르침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 중심의 종교생활이 『우파니샤드』에 의해 개인 중심으로 바뀌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은 사회나 정치 등 세상에 얽매인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는 탈속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이전에 집단적인 성격을 가진 제사의식보다는 개인적으로 엄격한 금욕생활과 깨달음을 통하여 목샤 즉 해탈을 추구하도록 힌두종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발췌: 큐복음 상권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 289-299페이지)

목차(상기 내용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 목차를 추가한다)
VIII. 부록: 인도종교와 혼합된 『도마복음』

1. 항아리에서 쏟아진 영지주의 문헌들
   1.1. 『도마복음』이 들어있던 항아리
   1.2. 침묵하는 항아리

2. 그리스 로마 세계에 포함된 인도
   2.1. 낙하마디 문헌들의 뿌리를 찾아서
   2.2. 기원전 6세기 이후 인도와 문화 교류
   2.3. 그리스 로마 문헌에 기록된 힌두 종교
   2.4. 인도 북부 개혁 불교
   2.5. 해외로 전파되는 인도 불교

3. 인도종교 이해
   3.1. 힌두 경전 『리그베다』
   3.2. 힌두 경전 『우파니샤드』
   3.3. 기원전 6세기 힌두 개혁종교: 자이나교, 불교
       3.3.1. 자이나교
       3.3.2. 불교
   3.4. 정통 내에 개혁바람: 힌두 육파철학
       3.4.1. 상키야(Samkhya) 학파
       3.4.2. 요가(Yoga) 학파
       3.4.3. 베단타(Vedanta) 학파
       3.4.4. 미맘사(Mimamsa) 학파
       3.4.5. 바이세쉬카(Vaisesika) 학파
       3.4.6. 니야야(Nyaya) 학파

4. 인도종교와 기독교의 혼합
   4.1. 영지주의의 본산 이집트
   4.2. 영지주의 문헌 안에 힌두사상: 브라만교, 불교, 자이나교
       4.2.1. 영지와 깨달음
       4.2.2. 영지주의와 힌두종교의 신관        
       4.2.3. 영지주의와 힌두종교의 세계관
       4.2.3. 영지주의 기도와 힌두종교 만트라
       4.2.4. 영지주의와 인도종교의 일치

5. 절대로 신약정경이 될 수 없는 『도마복음』
   5.1. 첫째 이유: 복음과 독약이 혼합된 『도마복음』  
   5.2. 둘째 이유: 초대교회 교부들도 인용 안한 『도마복음』
   5.3. 셋째 이유: 현존하는 2만5천여 개의 성서사본들의 증거

6. 결론

출처: 아멘넷, 김기천/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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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시대착오性 (The Anachronism of Jonathan Edwards)

by H. Richard Niebuhr
(1958년 조나단 에드워즈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시무하던 Northampton에서 H.R. Niebuhr가 행한 기념사)

http://www.religion-online.org/showarticle.asp?title=177


맥긴리가 전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상에 대한 유명한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즈가 교회에서 저주에 관한 설교를 할 때마다 청중들이 요동하여 좌중에 지진이 일어난 듯 하였다고 한다. 한편 패링턴의 다소 냉소적인 견해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위대한 "시대착오자"이었다.

패링턴에게 있어서 에드워즈는 옛 교리와 새 자유주의가 대립할 때 옛 교리를 택한 시대착오자이었다. 탁월한 이상주의 형이상학자가 전통 신학자와 내면적 투쟁을 벌여 구시대의 신학자에게 굴복한 것이다. 성스런 삶을 지향하는 에머슨류의 신비로운 의식이 에드워즈의 주변에 넘쳐흘러 그를 神性한 자로 만들어서, 내면의 교조적 칼빈주의자와 투쟁했으나 결국은 칼빈이 이긴 것이다. 하나님과 막 화해하여 안식처를 구하는 풋나기 새 교인들에게 성전 문을 연다는 일이, 하나님께 반역적인 세상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정예돌격대원으로 훈련된 소수의 선택된 무리들, 즉 옛 교리에 충성하는 성도들의 성역이어야 한다는 신념과 갈등 대립하였다.

패링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에드워즈는 다른 지식인과의 건설적인 교류를 끊고 활기찬 철학에서 무미건조한 신학의 영역으로 멀어져갔다. 타고난 본성과 능력을 발휘해 해방시켜야할 제도에 대해, 오히려 그 제도 내의 New England정신에 자신의 고귀한 재능을 가두어 소모해버리는 운명을 타고났던 것이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을 해방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칼빈주의자를 고수하였다.”

밀러 교수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죄인들" 같은 설교가 아닌 경로를 통해 에드워즈를 접한 학생들은 맥긴리의 견해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미국 내의 개신교나 신학계의 공통된 견해는, 에드워즈가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옹호했던 거의 모든 이슈에 관한 그의 견해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불가지성, 전능, 편재, 위대, 진노; 인간마음의 철저한 타락; 교회가 집단적 공회로서가 아니라 확인되고 선발된 소그룹으로 재구성되어야 함; 결정론, 인간존재의 비자유성에 관한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여, 화목하게된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온 우주적 군병으로 자처하며 파멸의 길을 가는 맹목적 순종을 정당화한 사실 즉,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파국적 종말을 정당화한 사실이 그 예라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대한 미국의 신앙인들과 지성인들의 평가가 이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슨 근거로 에드워즈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에드워즈를 추모하는 무리들 틈에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추모예식에 참예하는 정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드햄튼에서 유리되고 현대적 지성인들로부터 괴리된 그를 생각하며, 우리는 예수께서 위선자들을 질책하신 그 말씀을 우리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23:29-30)

200년전 뉴잉글랜드 지방의 풍토를 고려하며 에드워즈가 노드햄튼교회에서 해임된 이야기를 읽으면, 그가 다른 지방의 교회에서 목회했더라도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스톡브릿지(노드햄튼에서 해임된 후 그가 목회했던 신개척지)가 아니라 캠브리지나 뉴헤이븐 같은 곳에서 목회했더라면 노드햄튼보다는 다소 나을 수 있었을 지는 모를 일이다. 만약 천연두로 프린스톤에서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대학총장으로서 얼마나 영예롭게 살았겠는가? 그가 18세기로부터 오늘날의 우리세대에 와서 산다고 하더라도 1750년대에 받았던 존경 이상을 받으리란 보장이 없다.

에드워즈가 그당시 추구하고 시도했던 이슈들은 미국인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전적으로 거부당해서 오늘날 문제거리로도 남아있지 않다. 만약 그가 강단에 서서 우리의 사악과 부패, 우리의 부자유와 삶의 결정론,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저주, 거룩한 공동체를 재구성해야함을 우리에게 설교한다면 어떤 반응을 가져올 것인가?

우리가 에드워즈의 동시대인보다 더 그의 주장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근거로 그를 존대할 수 있겠는가? 에드워즈의 200주년 서거를 기념하는 이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그에 대한 신실한 마음의 존경을 나타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유명인이라 하니까 피상적이며 희미한 영광이나마 끼어들어 나누어 가지려함은 아닌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한다.

에드워즈를 기리는 정당성을 다른 측면에서 모색하여보자. 만일 우리가 오늘날 그의 <정신; 영성 spirit>과 만난다면? 쓰라린 고행에 필요했던 그의 인간적 허영심에 부합하는 형식으로서의 존대가 아니라, 에드워즈가 진심으로 원하고 바랐던 그의 주된 <목적과 의지>에 부합하는 방도를 찾아봄이 어떠한가? 인디언에게 선교하던 사위 브레이너드의 죽음을 대하는 에드워즈의 행적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에드워즈가 그렇게 수호하고자한 신념과 의도가 무엇인지 그때의 상황을 모르고서는 우리가 그를 존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를 존대하기 위한 어떤 다른 방식이 존재하는가? 그를 위대한 사변가로 받든다며 마치 에드워즈가 자신의 날카로운 지성이 칭찬받는 일로 내심 흡족한 듯이 보이게 해서 저희들 멋대로 에드워드를 제단하도록 하겠는가? 그를 탁월한 설교자라고 찬양하며 그의 시각적 표현을 선망의 대상인냥 말하지만 자신들은 진작 무얼 상상하는지 알기는 하는가? 뉴튼, 로크, 플라톤 등을 연구한 위대한 배움의 사람으로서 에드워즈를 숭배한다고 하지만, 에드워즈가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알고 있는가? 그러므로 에드워즈를 존대하는 길은 그를 존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를 존대함이란 마치 니체를 위대한 크리스챤으로, 조지 3세(1738~1820)를 위대한 미국인으로 추앙함과 같다. 이는 에드워즈의 <영성; 정신 spirit>을 이해하는데 모순되는 일이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탁월함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뛰어나고자 하는 욕망, 동료들보다 자기가 더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에게 가득차 있다고 에드워즈는 설파하며, 이는 인간의 왜소함, 삐뚤어짐, 병적인 곪음증 때문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진심으로 에드워즈를 존대하는 길은, 그가 살았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그의 삶의 참된 동기를 새롭게 재발견하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 그의 동기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무리들이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을 때 이 동기를 생각하며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고양시켜 그 고귀한 상념의 영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위대한 cause에 헌신하는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단지 내가 아는 사실은, 당신의 목사는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하기 위해 고른 구절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전1:17)을 가지고 설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거라는 말이다.

당신의 생각을 움직여서 에드워즈를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일은 내 의도와 정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므로, 부족하더라도 그를 다소나마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불러내어 그의 <정신 spirit>을 되살려내는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에드워즈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이야기를 걸어보는 모험을 해보자.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당신들이 첫째로 나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렸다는 주장이다. 당신들은 내가, 인간의 경험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성서의 진리를 가르치고, 인간은 마귀적이고 사탄적이며 탐욕스럽고 악의, 질투, 살인, 다툼, 사기,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 인간은 이웃을 모함하고 비방하며 하나님을 싫어하고 오만불손하며 허풍을 떨고 악을 궁리하며 부모에 불순종하고 어리석으며 신의가 없고 매정하며 무자비하다고 내가 말한다고 한다. 당신들은 인간들이 여러 좋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예를 들자면, 어린이를 귀여워함이나 남녀간의 사랑이나 조국애 등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서를 인용하여 그 영민한 마음 모두가 부패하고 타락해서 알지못할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져서는 결국에 쓸모없게 되어버린다고 말한다고 한다."

어떤이는 이러한 에드워즈의 주장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한다. 특히 에드워즈의 후세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찬양을 많이 들어왔다. 성서 대신 교과서로서 배우며 끝까지 읽지도 못한 세잌스피어를 인용하여 거기 나온 햄릿과 같이 "얼마나 인간은 위대한가! 그 고귀한 이성! 무한한 능력! 아름답고 숭고한 몸짓! 천사와 같이 우아하여라! 신과 같은 지성! 세상은 아름다와라! 영용한 동물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생겼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 낭만적 人間像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잔악한 人間性의 무한한 한계, 그리고 동물적 인간성이 공격을 받을 때 배출되는 그 광포함을 경험하게된 일이다. 돈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인간성을 삐딱한 냉소로 받아들이는 것; 한편으로는 이성의 힘이 얼마나 미소한가 하는 심리분석과 다른 한편으로는 애매한 욕망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받아들이는 것; 어머니의 애정과 아버지의 분노가 어떻게 그들의 자식들을 파멸시키는가 하는 것; 쓰리고 환멸적인 소설에서, 그리고 인간의 비인간적 행위를 기록한 역사에서 묘사되는 인간과 인류의 모습들; 이들 모두 20세기에 일어난 人間像들은 에드워즈가 말한 인간의 타락상을 넘어서는 모습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표면적으로는 우리시대사람들이 에드워즈가 예상했던 그런 모습들을 받아들이는 듯 하지만, 다른 이유로 여전히 에드워즈를 배척하고있다.

에드워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떤 기준으로 너는 네가 판단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냐?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취하는 기준에 의해 그 사람을 평가해야한다는 내 말에 너는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혐오스런 벌레를 인간에 대비하는 것은 인간을 영원한 하나님과 대비하는 것에 비교된다는 나의 말을 싫어했다. 너는 인간의 기준을 다른 인간들에게서 또는 네 자신에게서 찾았다. 그러고 나서 인간 스스로가 신과 같다고 하다가 이제와서는 인간은 악마와 같아서 인간 자신을 파괴할 것이라고 한다.

자 이제, 누가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렸는가? 인간성의 기준을 낮게 본 자인가 아니면 고귀하게 드높인 자인가? 인간을 소시민적 애정의 대상으로서 판단하는 자인가 아니면 보편적 연합체의 한 구성원으로 판단하는 자인가? 재물을 신실하게 혹은 부실하게 관리하는 사람 정도의 차원에서 인간을 보는가 아니면 영원한 부요를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인간을 보는가? 잘 건축되고 장식된 8베드룸 하우스와 廣場이나 파르테논의 잔해 중에 어느 것이 더 위대한가?”

에드워즈가 마음 속 깊이 믿고 깨달았던 바는, 인간은 영원불멸의 절대적 영광 앞에 서기 위해 지음을 받았고, 모든 타락, 파괴, 부정으로부터의 전우주적 구원에 참예하기 위해 만들어 졌으며, 온 우주의 캔버스에 별들을 흩뿌리고 천사적 권능의 모습을 빚어내며 그 세계 안에 정겨운 小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예술가를 찬양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그러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과 그 부르심의 위대함 때문에, 인간들이 그러한 자신들의 유산을 내던져 버리고 뜨내기 동료 인간들로부터 위로받고 인정받는 바람보다 더 큰 소망이 없이 사소한 존재로서 만족해함을 보면서 에드워즈는 낙담하고 우울하여졌던 것이다. 위대함에 봉사하도록 지음을 받았던 인간이 유일하신 위대한 주님께 대한 봉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아적 세계 내에서 극도로 사악하게 되어 금새 사라질 안락을 탐닉함을 보았다. 그러나 종국에, 사람의 길이 그 자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을 그토록 왜소하게 되도록 할 수 없음을 에드워즈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에드워즈에게 제기할 두번째 질문을 가져다 준다. 그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첫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믿음의 논리를 따를 수 없는 비신자들이 神政과 사도권을 동등하게 여기는 데서 기인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한 통치를 믿는 에드워즈가 그러한 전제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非자유성 – 로부터, 설교자들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신과 동등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이야말로 비논리적인 유추에서 나온 어불성설이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전제하의 결론이 "그러므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므로 내가 다스려야 한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므로 나의 의지는 좌절돼야 한다. 노드햄튼에서의 분쟁을 포함한 에드워즈의 삶에 대해 읽어볼 때 내가 믿기는, 그가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여하간 그에 대한 주된 고발점은, 에드워즈의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에드워즈가 어떻게 이러한 질문에 응답할 것인가? 철학에 열심이었던 그로서는, 그의 논리전개 방식이 그의 시대의 기계적인 사고방식과 개혁주의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한다. 이런 견해에 에드워즈 자신이 수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주된 요점은 유효하다.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퇴락에 대해서는 지난 역사가 그의 적대자들의 의견을 반전시켜 놓았다. 그들의 에드워즈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 놓지는 않았지만.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우리가 <자유의지>에 대해 고심하는 이유는 의지의 선한면을 선택하기 위해, 또는 선과 악, 하나님과 마귀를 분별하여 선택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우리는 말하기를, 인간은 어쨋건 그의 운명의 주체이어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없이는 하나님 자신도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에드워즈는 지적하기를, 인간은 그의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동기란 자기사랑 자기만족에 가득찬 것이어서 그런 동기가 선한 행위을 촉발하게 하여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는 불가능 하다는 나(에드워즈)의 주장에 굴복하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다. 우리 사회를 볼 때, 숨겨진 손에 의해 조정되고 개방된 시장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라고들 한다. 누가 자유한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추구하는 데에 자유하다고 한다. 하지만 참으로 인간이 그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했던가? 인간은 자기이해 외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

국제정치는 어떠한가? '자국의 이익'이란 말은 국가들이 추구하는 변함없는 원칙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따르고 지켜야할 근본원리가 아닌가? '종교의 자유'를 생각해 보자. 이는 우리가 종교적이어야 하거나 비종교적이어야 한다는 자유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나에게 좋으냐 안좋으냐에 따라 종교예식에 참석하거나 안하거나 하는 그런 자유가 아닌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종교자유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든다. 종교 안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도록 되어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의지가 의지의 가장 강력한 동기로서 작동하듯이, 인간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자기자신의 이해관계이다. 그에 의해 인간은 결정되어지고, 그가 행사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자유도 자기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 것을 바꿀 수 없다.

200년이 지난 지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와 굴레에 대한 에드워즈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 '자기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시민적 자유를 만끽하는 일을 계속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한다. 어떤 나라들은 자기이해가 그들 스스로의 불멸의 동기 그 자체로 느껴지게 하여, 우리가 말한 자유를 포기하기까지 하는 사실을 보아왔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시민적 자유나 종교적 자유가 에드워즈의 반대자들 편에 기반을 두고도 성립할 수 있는지, 또는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결정론에 연관되어서만 가능한 일인지 의구심이 든다. 인간의 비자유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그렇게 시대착오적이지는 않다. 허나 우리가 비록 그의 전제를 얼마간 받아들이더라도 그의 논리를 따를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우리가 결단한다는 사실이다.

에드워즈에 대한 세번째의 고발은 예전에 가졌던 설득력을 좀 잃어버린 주장인데, 바로 에드워즈가 흔히 청중들을 향해 사용했던 파멸적 지옥에 대한 위협이다. 에드워즈는 이것으로 청중들에게 새 자유의 길목에서 가져오는 혁명적 사고와 양심의 강력한 반응을 일으키려 하였다.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일은 소위 진보적 사상을 가진자들이 꺼리는 바이다. 고뇌의 상처가 어떻게 자비로운 하나님의 통치와 병존할 수 있는가? 어떤 인간의 사악함이 그러한 벌을 받기에 마땅하다는 말인가?

이 경우에도 역시 에드워즈가 예전 보다 덜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죄인들"를 다시 읽어 보면, 강조점이 지옥이 아니라 삶의 비통한 불확실성에 있음을 알게될 것이다. '그들의 발을 미끄러운 곳에 두었다' 우리들의 이 편안한 삶이 언제까지나 지속될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미끄러움 밑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고, 언제 닥칠지 모른다.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이는 또 다른 무엇의 시작이다.

우리가 에드워즈 신화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허나 우리가 우리자신을 선택하여 존재하게 하였거나 할 수 있지 못하며, 거기(존재)로부터 우리자신을 밖으로 빼내지도 못하는 현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신화를 얼마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 불가해한 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여 우리의 생물학적 죽음 후에도 삶이 있게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 외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화가 있다. 우리는 실제 미래에 가능한 지옥을 개인적이 아니라도 사회적으로 우리 앞에 대면하고 있다. 살기로 저주받은 살아남은 영혼의 존재 상태가, 살 수 없지만 살 수 밖에 없는 곳에서 잠행성 독약의 방열과 독가스 가운데서 비참히 꿈틀거리는 곳이다. 또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그들의 이웃을 적대시하는 무정부 상태의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진실은 없고 오직 사기와 거짓만이 남은 곳. 혹은, 우리가 그려내는 지옥은 헉슬리의 또는 오웰의 <1984>, 또는 조직적 인간 삶의 정점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화는 변화하였다. 에드워즈가 예전에 보았던 인간 앞에 놓인 가능성은 지금 우리의 것이 되어있다. 비록 다른 배경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인간으로의 진보와 지상낙원 외에는 대안을 보지 못했던 에드워즈의 비판자들은 지금 다소 조용한 편이다. 그들은 우리가 전쟁과 기계를 다른 지구로 수출하고 우리에게 낯익은 역사의 사건들을 거대하게 재현시키더라도 별로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움켜쥐고 있는 사소한 것에 대해 에드워즈와 의견을 더 같이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알듯이, 우리는 미끄러워 넘어지기 좋은 곳에 자리잡혀 있다.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폭격기 조종사가 어느 때든 단지 한방의 버튼을 누름으로써 전 인류의 종말의 개시를 고할 수 있다. 미사일의 조그만 부품이 잘못되어 빗나가면 우리를 향해 날아와 불지옥을 만들어 버릴 것이다. 또는 한 국회의원의 부주의한 언사가 당장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멀지않은 장래에 길고 긴 파멸의 시작을 촉발시킬 수 있다.

에드워즈는 이점에 있어서 그의 시대에서와 달리 그렇게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그의 19세기 비판자들이 오늘날 시대착오자인 것 만큼 그렇지 않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우리와 19세기 비판자들로부터 여전히 유리되어 있다는 주된 요점은, 그와 동시대 18세기의 벤자민 프랭클린에 비할 때 그는 시대에 동떨어진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그 당시에 우리에게 이방인 같았으므로, 우리와 의견을 같이할 수 있는 다른 의견들은 피상적이고 비실제적이 되어버린다.

에드워즈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사악하다고 우리가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바는 에드워즈 자신이 아는 만큼의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우리는 우리 지혜 내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어진 아버지로 대치하였다. 거룩한 하나님은 광대하고 절묘하며 오묘한 창조의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 받은 그들이, 나이와 상관 없이, 개인이나 국가나 문명이나를 막론하고, 멸시를 당하거나 자기 의지에 의해 상처를 입거나 약간의 직무태만에 만족하는 것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우리들은 거룩한 하나님을 주권의 원천과 존재의 결정권으로 대치했다. 존재란 간단히 말해서, 무작위적인 확률로부터 결정되어 있게 하는 우주의 본질이다. 우리의 발이 미끄러운 곳에 서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힘과 결정론에 의해 파멸의 한쪽편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미끌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것은 chance 이다. 우리를 향한 진노가 하늘에 쌓여있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온전-고결-영광을 위한 거룩함과 의지란 없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없고, 유일한 희망이란 우리의 타협과 탁월한 동물적 영민함으로 (파멸을) 잠간 더 모면하는 일 뿐이다.

에드워즈가 자주 말하기를 인간이 고난을 당한다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주 조금 밖에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인간 그들의 왜소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ideas)이라는 사실이다. 에드워즈의 시대착오성을 기념하려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무신론의 시대에 그를 기리려는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전능하신 주님, 스스로 계신 자, 모든 권세 위의 주제자되신 분의 종으로서 헌신하며 살다 간 사람 에드워즈을 알고 존대하기 위하여서이다. 우리의 종교적 헌신을 통해 유지시켜 보려는 존재로서의 하나님,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 또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찾는 세대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이미지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룩함 없이 상징을 그려냈으니까.

만일 에드워즈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사악성과 결정론 그리고 파멸의 위협에 대한 그의 전제에 동의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의 사악성에 대한 느낌에 회개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고뇌가 삶으로 이끄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뇌가 아니라 냉소적이고 패배적인 죽음으로 이끄는 염려가 된다. 결정론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갈등과 투쟁을 통한 극복이 없는 이유는, 어떤 권능으로도 우리를 마침내 자유케할 수 없음을 믿기 때문이다. 파멸의 한가운데 있는 한 삶에 대한 비젼이, 영광과 영원한 기쁨 가운데 있는 삶의 비젼과 함께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우리가 에드워즈를 기억하며 사람들의 그에 대한 회상을 떠올리며 한 가능성이 보여진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말한 많은 말들의 진실성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 우리의 역사에 일어난 사실들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바뀌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 그가 본 악마를 본 것이다. 우리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꿰뚫고 들어왔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또한 일어날 것임을 왜 희망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는가? 한번 더, 아마 갑작스러운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악마적 공허를 감지하게 하는 비슷한 류의 축적된 영감에 의하여 우리가 들어올려져서, 우리 시대에 목격하고 알게 될 그 거룩한 존재, 영원 가운데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참회하는 마음에 가까우신 분,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에드워즈를 그 자리에서 함께 볼 것인데, 그가 찬양하기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출처: 아멘넷, 정리: Thomas 님...

신사도 집회에 나타나는 현상을 정리한 비디오를 올렸었습니다만..

교제 님의 격려에 힘입어서 많은 역경(^^)을 물리치고 어설픈 자막 비디오를 만들어 봤습니다. 없는 기술에 공짜로 하려다 보니 질이 좋지는 못합니다.
줄바꾸기와 글자 크기 등이 조정이 안 되네요. ㅠㅠ

영어 히어링이 안되는 두 군데 단어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 알려 주세요. ^^

틀린 부분이나 모자란 부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막이 안 나오면 비디오 플레이 중에 우측 하단 위로된 삼각형에 마우스를 대어서 한국어 캡션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자막처리 더 잘 하실 분 혹시 계실까봐 캡션파일 내용을 아래 댓글에 붙이겠습니다.
자막이 영 안 보이시는 분들은 읽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N8LaL8_FQMY

1부와 2부를 합친 자막 버전은 살짜쿵 님의 블로그에서 퍼 왔습니다.


출처: 아멘넷, 정리: cy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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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목회자로 훈련받고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알게 된 것은,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신앙을 바로잡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목자로 부름받았으면서도 마치 끌려가는 자처럼 행동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목회는 프른 초장은 커녕 삭막한 사막 한 가운데 있었다.

많은 목회자가 자신이 목회자로서 바른 판단을 내렸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 한 차례 큰 홍역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이런 감정적인 홍역은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실은 매년 매주 주일마다 일어난다. 목회자로서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양 떼를 늑대한테서 지켜내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든 교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회자를 통해야 한다.

나는 내가 처음 곁길로 벗어나 우리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을 허용했던 때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성령의 불을 꺼 버렸으며" "지금이 바로 성령님을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게할 절호의 기회"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성령의 불을 끈"교회의 중죄를 참회하기 위해서는 예배 때마다 "무슨 일이든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질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소서, 성령이여!"와 같은 외침이 울려 퍼지는 혼돈이 도래했다. 이런 외침은 성령이 무슨 일을 행하실까 기다리는 가운데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기대감이 점점 고조되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라는 말씀을 임의로 적용하며 어떤 불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위로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마법의 '사ㅤㅌㅏㅌ 방패'가 어디까지 말아 줄까? 약 100미터? 아니면 한 60센티미터? 사탄의 앞잡이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는 데 시간 제한이 있을까?

우리 중 몇몇은 이런 속임수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죄의식을 감추려고 내가 그동안 너무 인간적인 리더심에 의존했고, 교회를 너무 통제하려 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죄를 고백하며 몰려가자 나도 그들에게 슬쩍 동조했다.

성경 어디에도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이렇게 잘못 해석하는 것을 옹호하는 구절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고전 14:17-19)질서를 명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혼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나 스스로 질서를 유지해야하는 나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대신 주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회개해야 했고, 다시 참 목자로 서야 했다.

아내와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빈야드 교회 연합 지도자 모임에 참석하려고 준비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연습해 보았다. 즉, 우리 교회에 파고든 주관주의를 제거하는 것과 복음주의와 제자도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성도들의 매일의 삶에 성경공부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이었다.

우 리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빈야드 교회 연합 지도자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고,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을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진리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모 임이 계속되면서 많은 지도자가 이런 '예언'을 추구하는 경향이 미치는 결과가 심각하다는 데 관심을 모았다. 몇몇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고백했다. 그러자 즉각 경고가 들어왔다. '예언자' 즉, '그들의 말이 한 번도 땅에 떨어진 적이 없는 자들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지금 우리가 하는 대화를 들을 것이고 그러면 분명 제재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큰 형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도 금기시되었다.

어떤 지도자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사역의 방향을 알려 주셨다고 말하며, 말씀을 함께 나누었다. 또 어떤 지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진정한 교회는 셀 교회고 따라서 모든 공적인 성경적 가르침과 복음 전도를 그만 두고 소그룹 모임만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이는 '기사와 이적'을 통해 진정한 복음 전도가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로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복음 전도자들을 비웃으며 예언자들의 사역을 지지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들이 집회 때 자주 사용하는 속임수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결국 일주일 동안의 열띤 토론과 기도와 모임 가운데 한 사람이 전날 밤 꾼 꿈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어떤 것도 결정하지 말고 그저 "기다려 보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실망한 나는 덴버에 있는 교회로 돌아왔다. 나는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절친한 친구들,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향해 "교리로 말미암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제 우리의 사역은 실패한 실험실 같아 보였다. 모든 것을 주관성에 의존한 것은 목회자로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수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모순되는 메시지를 '듣는' 것일까?

나는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돌보라고 주신 교회를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게 해야 할 때임을 말이다. 그러자 진리가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선포했다. 우리가 만일 다시 기독교의 기본으로 돌아가, 기본을 잘 행한다면 하나님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성도들도 동의했다.

나 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성경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것이 요한복음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응했다. "왜 요한복음이죠? 이건 초신자였을 때 이미 읽엇는데요."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성령 안에서' 떨고 비트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불평했다. 4,400명이었던 교회가 사람들이 '거룩한 웃음' 집회에 참여하려고 떠나 버리면서 감소하기 시작했다. 나를 증오하는 메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심지어 그 운동의 지도자는 공적으로 나를 비난하면서 하나님이 내 '죄' 때문에 나를 죽이실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모략을 받은 해'라고 부른 그 시간들을 참고 견디자 하나님이 말씀에 신실하게 응답하시기 시작했다. 불과 몇 달 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지식을 알고자 ㅤㅊㅏㅊ아왔다. 세례받는 자의 숫자도 늘어났다. 사람들의 삶이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교회가 다시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밤 사이에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1년도 채 안되어 우리는 주일 예배를 세번이나 더 드려야 했다. 현재 우리 교회는 6천 명가량 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 가고자 애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마로 기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매우 간단하다(히 4:12-13; 왕하 22:8-13; 렘 15:16).

여러분도 아시다 시피, 사도 바울 시대에도 바울의 사역을 막으려는 거짓 예언자들과 이교도들과 율법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잘못된 교리를 심어 놓으려 애썼다. 몇 달씩 집을 떠나, 열기와 먼지 속에서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먼 거리를 여행하고, 또 힘들여 성경을 하나하나 베껴 쓰는 일을 한 것은 바로 거짓 교리가 전파되는 것을 막기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은 이상하게도 거짓 교리가 너무나 철저하고 신속하게 파고든다. 성경적으로 바로 잡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때다. 15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교회는 요한 테첼이라는 세속적인 사제의 계책에 말려들어 오염되어 있었다. 테첼은 사람들을 속여 형벌을 면하려면 면죄부를 사야 한다고 현혹했다. 분노한 마르틴 루터는 테첼이 사람들의 영적 불안감과 무지를 이용해 구원의 중재자로 자처하는 것을 반박하며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항목의 반박문을 붙였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가짜 부흥 운동이 출몰하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이 그런 시대라면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이 책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책이 진정한 영적 은사를 사모하고,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에 현혹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자들의 손에 들려진다면 좋은 도구가 될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가짜 부흥 운동에 현혹되었던 사람들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되돌아오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교회는 진정한 개혁을 경험할 때, 비로소 진정한 부흥을 맛볼 것이다.


톰 스타이프/ 덴버 십자로 교회 목사

1997년 1월


출처: 아멘넷, 정리: G2u 형제님.
P>신비주의적 신사도 집회의 비성경적, 비이성적 현상들을 총정리(^^)한 비디오를 소개합니다.

토론토 블레싱으로 대변되는 이런 대책없는 현상들에는 대표적으로 임파테이션을 통한 "주체하지 못하는" 취함, 웃음, 쓰러짐, 발작 등이 있습니다.

이 영상은 비정상적인 은사운동과 신사도 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았다가 빠져나온 어느 사역자가 편집한 비디오입니다.

(편집자인 앤드루 스트롬이라는 사람에 대해 개인적으로 검증을 하지는 못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사도 집회들의 문제 현상들을 매우 간결하게 모두 모아 넣은 비디오라서 꼭 소개를 하고 싶습니다.

비디오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드리자면,

가장 "Low Grade"는 존 크라우더와 벤 던이라는 작자들이고, (아래 비디오 표지에 "짐 골" 좌우에서 "여호아화나"를 빨고 있는 자들입니다.)

가장 "Bad Grade"는 릭 조이너이고, 현실적으로 가장 "Dangerous Grade"는 마이크 비클이라고 봅니다.

(비디오 종반에 나오는 앤드류의 "사견"을 제외한 비디오의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잘 살펴 보시고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위에 소개한 것은 3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의 마지막 비디오입니다만, 1, 2편도 아래 올리니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더 보시기 바랍니다.


자료 출처: 아멘넷 게시판, 정리: cy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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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부흥운동(1)  (0) 2010.10.22
나는 한번도 영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떤 일에 관여해 본 적이 없엇다. 그런데 사역을 하면서 영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바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졌다. 내가 진리에서 그렇게 멀리 벗어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 는 늘 빈야드 교회 연합회(AVC) 지도부에서 일하는 것을 큰 특권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다른 지도자들과 무척 가깝게 교제했다. 우리는 함께 여러 나라를 여행하기도 하고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사역에 대한 비전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 모임의 리더는 대단히 존경받던 인물이었으므로, 우리 모임은 곧 새로운 교파로 급성장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우리는 그 교파의 지도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 확신했다.

미국 중서부에서 리더 회의가 일주일 동안 열렸는데, 몇 사람이 사적인 모임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모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예언자들'을 만나는 자리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교회 안에서 영적 은사를 열심히 사용하고 있던 터라 이 만남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보여주실지 기다리고 있었다.

예언자들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교회에 다섯가지 사역, 즉 사도, 예언자, 목사, 교사, 복음 전도자의 사역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중에서 특히 예언자와 사도의 사역이 회복된다는 것에 큰 도전을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이미 목사와 교사, 복음 전도자들이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언자와 사도의 사역만 회복된다면 분명 이 땅위에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이었다.

예 언자들은 우리가 바로 이 마지막 때의 부흥을 이끌 자들로 선택받았다고 했다. 또한 이런 마지막 때의 부흥을 이끌 기름부음받은 자들을 ㅤㅊㅏㅊ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 '예언자들'에게 자신들과 우리 빈야드 교회 연합이 선택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너무나 솔깃한 말이었다. 매일매일의 사역을 힘겹게 해 나가며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움도 느끼던 우리들에게 이 말은 정말 듣고 싶던 말이었다. 우리의 애씀과 노력이 하나님의 눈에 특별하게 보였다는 말은 위로 그 자체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때 놀랍고 기이한 일들이 나타나리라는 약속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는 아첨하는 새 친구들의 말을 너무나 열심히 경청했다. 일말의 의구심도 의식 저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또 나중에 예언자들을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이 우리를 한 사람씩 데리고 나가 우리의 비밀을 상세히 드러냈을 때 의구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예언자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온 자들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하게 예언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예언자들을 신뢰하게 되었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며 개인적인 일들을 '들여다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사역이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각자의 교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후 몇달 동안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서 자신이 하게될 하게 될 역활과 위치와 성공 여부에 대해 '개인적인 예언'을 받았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위대한 '회복'과 우리가 거기서 중요한 역활을 감당하리라는 예언을  받았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땅'으로 오게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즉시 짐을 꾸려 달려가 확신 가운데 예언을 예언을 받았고, 성공적으로 사역하게 되리라는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다. 심지어 예언자들은 목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 교회 직원을 교체하기도 하고, 교회의 정책과 관행을 바꿔 버리기도 했다. 예언자들은 목사들 개개인에게 기름부음을 행하고 그들에게 치유와 사도적 약속을 주었다. 그러자 점점 목사들은 예언자들이 전화를 걸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예언자에게 전화를 걸어 가르침과 조언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불편해하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름 부음을 받는 땅'으로 달려 갔다가 뭔가 일이 실패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어떤 목사들은 자신들이 영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예언자들의 꿈과 예언 때문에 잘못 비난받기도 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하기보다는 '점괘가 든 과자'를 믿으려는 신앙이 더 활개를 치게 되었다.

몇몇 목회자들은 이런 모임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조금 마음이 꺼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영적인 은사가 늘 완벽한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풀이 다 자랄 때까지는 베지 마라"는 철학을 들이대며 계속 밀어 붙였다. 즉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다려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분간 손을 놓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자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며 교회를 마음대로 휘둘렸다.

약 2년이 지나자 모두가 예언자가 돼 버린 것 같았다. 수백명의 빈야드 교회 성도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지도자며 성도며 할 것 없이 부지런히 예언을 하며 다녔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해준 해 준 예언을 작은 노트에 적어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또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격으로 열리는 예언집회에 떼로 몰려다녔다. 노트를 들고 몰려다니는 군중은 더 많은 예언을 들으려는 희망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치유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세미나를 열어서 치유 기도의 공식과 방법을 가르쳤고, 몸에서 '열점: 연약한 부분'을 ㅤㅊㅏㅊ아내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기도받는 사람의 몸에 육체적인 '떨림'이 일어날 때 그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예언집회에서 꿈과 끔 해석이 중앙무대를 차지하면서 사람들은 꿈을 그대로 노트에 일일이 적어서 가지고 오곤했다. 그러면 이 꿈을 나중에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했다. 사람들은 예언의 약속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길 기다리며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다림은 수포로 돌아갔을 뿐이다.

하 지만 이런 '예언 행렬'이 유행한지 얼마되지 않아 수 많은 사람이 절박한 심정으로 목회자에게 상담을 받고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십 대들은 성공하여 스타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지만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십대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수 많은 사람이 위대한 사역을 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지만,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가 그런 자신의 '기름 부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은사를 '발전시켜' 주지 못하는 것에 분노하여 지도자들에게로 몰려들었다.

어 떤 사람들은 너무 예언에만 치중한 나머지 점점 성경에는 무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보다는 그저 '직통 계시'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이 받은 예언이 성취될 수 없을까 두려워하며 이 예언자에서 저 예언자로 옮겨 다녔다. 예언자의 전화번호를 하나라도 더 알고 있는 것은 마치 보물지도를 얻는 것과 같았다. 이제 예배 시간에도 성경보다는 작은 노트르르 더 소중히 여기며 붙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떨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사역팀이 그것이 하나님의 사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높이 들고 "주님, 더 임하소서!"라고 기도해 주기를 원했다. 몸을 떨고, 웃고, 울고, 눈을 씰룩거리는 것은 성도들이 지도자들과 동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 집회에서 8천 명을 대상으로 설교하던 설교가는 목사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주석서를 보거나 원어 사전을 들척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신 목사들은 예언을 통해 주일날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 지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우리 교회의 한 성도는 문가를 결정할 때 자신의 손이 '뜨거워'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징조를 추구하는 현상은 바로 우리 교회에서부터 시작했다.

내 가 속한 노회의 교회들은 점점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복음주의가 신비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출석률이 뚝 떨어졌다. 이유인즉, 사람들이 다른 동네에 사는 자신의 친척들을 교회에 초대하기 꺼려해서였다. 사람들은 너무나 이상한 모습으로 진행되는 예배에 사람들을 초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5년된 우리 교회에도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내 잘못임을 깨달았다. '풀'이 이제는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자라버렸다. 사역은 밑바닥을 치고, 실패가 눈 앞에 있었다.

목 회 초기에 나의 멘토가 되어주셨던 분이 이런 가르침을 주신 적이 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확신이 서지 않거든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라." 바로 성경이다!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나는 그동안 우리 교회에 일어나는 일들을 정당화하려고 과거의 부흥 운동과 교회 역사들을 살펴보는데 완전히 지쳐 있었다. 목사로서 나는 내가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을 얻고자 분명히 알았던 것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말씀을 붙들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계속)


톰 스타이프/ 덴버 십자로 교회 목사

출처: 아멘넷,정리: G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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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할로윈 데이라 하여 아이들이 마귀나 마녀, 사탄, 유령, 해골, 해적, 요정, 야수....등 각양각색의 이상한 복장(costume)과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면서 <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테야! Trick or Treat>을 말하며 캔디나 쵸코렛 등을 얻으러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의 문화’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 할로윈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할로윈’은 귀신들의 잔치(party)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할로윈 데이는 고대 켈트인들이 섬기는 ‘삼하인(Samhain)’이라는 죽음의 신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으로써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각별하게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필자는 아동부 사역을 4년 동안 담당하면서 교회에서 또는 를 할로윈을 대신하여 교회에서 열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친구들과 먼저 한 약속 때문에 할로윈 행사에 참석한 아이들이 영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모임이 잘 이루어지게 되면 아이들은 다음 해에는 거의 모두가 교회에서 베풀어 주는 행사를 기다리며 참석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할로윈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돌봐 주어야 할 이유입니다.

‘할로윈 데이’는 기독교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사탄니즘(Satanism)’으로부터 출발한 비기독교적이고, 반복음적인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자녀들이나 교회의 아이들이 할로윈에 참여하게 된다면 이것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상을 숭배하며, 영적으로 더렵혀질 수밖에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문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어린이들이 귀신들의 잔치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결코 속아서는 안 됩니다. 각 교회에서는 캔디나 쵸코렛 등의 선물을 준비하고 할로윈을 대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아이들에게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분명한 것은 올해 할로윈에도 어김없이 사탄을 숭배하는 사탄교회에서는 사람을 희생 제물로 하여 살인을 하는 불법적인 사탄숭배 예배가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할로윈은 사탄을 경배하는 의식(예배)입니다. 결코 자시하거나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할로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할로윈 = 죽음의 신을 달래는 의식

호박 속을 파서 만든 ‘호박등’이나 횃불을 들고 마녀와 귀신 분장을 한 의상행렬, 가장무도회가 벌어지는 ‘할로윈 데이’의 기원은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 1세기 중반,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켈트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승려 ‘드루이드’ (Druid)에 의해 전파되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켈트족은 마법에 걸린 사후의 인간 영혼은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神)인 ‘삼하인’(Samhain)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삼하인’은 인간의 죽음과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죽음의 신이었기에 당연히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켈트족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로 동물을 제물로 바쳐서 희생 제사를 드렸는데, 때로는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인신제사로 죽음의 신인 샴하인을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이 할로윈의 시작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겨울이 10월 31일에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열리는 ‘삼하인’ 축제날에는 죽은 자들이 긴긴 겨울밤 동안 활동을 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즉, 유령이나 마귀, 마녀, 해적, 요정들이 인간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가능한 한 바깥출입을 삼가 했고 귀신들에게 자신들의 집이 볼품없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벽난로의 불을 꺼뜨렸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귀신들이 보기에 불쌍하고 초라하게 보이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발전되어 오늘날에는 폐허가 된 허름한 집처럼 집안 곳곳을 장식하는 할로윈만의 독특한 장식 문화가 된 것입니다.

켈트족을 포함한 유럽인들은 11월1일을 ‘모든 성인(聖人)들의 날(All Hallow Day)’로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성인의 날 전날 밤에 열렸던 ‘삼하인 축제’를 ‘모든 성인들의 날 이브(All Hallows
빈야드 운동과 신사도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이 글은 부흥과 개혁사에서 발간한 행크 해너그라프의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이란 책에서 옮긴 글입니다.


" 이 책은 존 윔버, 베니 힌, 존 아놋, 밥 존스, 마이크 빅클, 릭 조이너 등 거짓 부흥 운동 지도자들의 비 성경적인 주장과 행동을 통해, 성령 운동의 제3의 물결이라 불리는 빈야드 운동과 최근 신사도 운동 등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기독교 왜곡 현상을 보여 준다."

"이 책은 진리의 깃발 아래 몸을 숨긴 채, 우리를 신비한 경험으로 유혹하고, 영적으로 기만하며, 거짓 경험을 부추기는 많은 자가당착적인 행위들을 낱낱이 파헤친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빈야드와 신사도의 부흥 운동이 수 많은 교회에 끼친 악영향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나아가 현대 기독교의 핵심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막고자 명쾌한 성경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행크 해너그라프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자신의 재능, 지식, 풍부한 자료 조사, 경험 등을 총동원하여 오늘날 일어나는 가짜 부흥 운동을 평가한다. 해너 그라프 문체의 특징은 읽기 쉽고, 암기하기 쉬우며, 방대한 증빙 자료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의 우두머리다. 사탄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 '계몽'이라는 천사의 탈을 쓰고 있다. 사람들이 사탄을 만날 때, 마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이런 사탄의 속임수가 바로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이다.:


책의 구성

모 든 책이 그렇듯 저자나 독자 모두 힘이 든다. 이전 책 "위기에 처한 기독교"에서도 독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했지만, 사실 최종 목표는 이번 책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을 쓰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독자들이 이 책을 전부 다 읽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황별로 정확한 자료를 제시하고 또한 내용을 쉽게 기억하게끔 애를 썼다.

아무리 무능한 선장도 갈 길을 정하지 않고는 출발하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당신이 우리가 어디로 갈지, 또 어떻게 거기에 도착할지 분명히 이해하길 바란다. 이 책에 있는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도록 머리글자어 FLESH로 대표되는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의 역사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갈 5:19-26).


1부 거짓말, 환상, 기만(Fabrications, Fantasies, and Frauds)

2부 거짓 기사(Lying Signs and Wonders)

3부 종말 회복주의(Endtime Restorationism)

4부 쓰러짐(Slain in the Spirit)

5부 최면술(Hypnotism)


1부 거짓말, 환상, 기만

빈 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설교와 사역을 거짓말, 환상, 기만으로 장식했다. 아마도 이에 따라올 심각한 결과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가짜 부흥운동의 강력한 센터로 몰려들었던 수 많은 사람이 이제는 환영에서 깨어났고, 그 중 일부는 이단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단의 손아귀에 넘어간 자들은 더 이상 무엇을 믿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대변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여겨질까 남몰래 두려워하고 있다. 진리보다 인기 몰이가 더 중요시되다 보면, 우리 믿음의 근간은 흔들리게 된다.

가짜 부흥 운동이 거짓말, 환상, 기만에 기초를 두고 있는 반면, 진정한 부흥 운동은 언제나 믿음과 사실 위에 확고히 서 있다.


2부 거짓기사

가 짜 부흥운동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거짓 기사와 이적의 근거를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ㅤㅊㅏㅊ으려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바로 그런 기사와 이적이 1차 대각성 운동을 몰락으로 이끈 원인이라고 믿었다. 1차 대각성 운동에서는 경솔함과 변칙성이 부산물로 생겨난 반면 2차 부흥운동에서는 경솔함과 변칙성이 기저에 깔려 있다. 에드워즈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순회 설교가인 피터 카트라이트도 거짓기사와 이적을 만날 때마다 강하게 비난했다. 그런 거짓 기사와 이적을 부추기기 보다 오히려 "치료책은 단 하나, 열심히 기도하는 것뿐입니다"하고 외쳤다. 에드워즈와 카트라이트가 비난했던 거짓 기사와 이적이 오늘날 가짜 부흥 운동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극적인 일은, 가짜 부흥 운동이 거짓으로 역사를 바꾸는데 그치치 않고 거짓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가짜 부흥운동은 거짓 기사와 이적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하지만, 진정한 부흥운동은 언제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기원을 ㅤㅊㅏㅊ는다.


3부 종말 회복주의

종 말 회복주의, 즉 종말에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이적과 영웅적인 사도와 예언자를 회복시키신다는 믿음은 가짜 부흥 운동이 만들어낸 핵심적인 신화다. 20세기가 시작되는 첫날 새벽, 찰스 파함이 아그네스 오즈만이라는 어린 학생의 머리에 손을 ㅤㅇㅓㄶ고 기도하자 아그네스가 갑자기 중국말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를 쓰러고 하면 중국 글자만 써졌다. 파함은 이런 아그네스의 경험이 전 세계적인 부흥의 전조이며 종말 회복주의의 서곡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저 방언의 언사를 받기만 하면 이 세상 끝까지 어디라도 가서 자신들이 한 번도 배워 본적이 없는 언어로 설교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세기 중반쯤에는 또 다른 새로운 믿음이 등장했다. 알렌, 윌리엄 브란함, 잭 코이 같은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치유의 회복이 일어나 첫 성령감림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역사를 이룰 것이라는 신화를 유포했다. 20세기가 저물어 갈 즈음,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종말의 때에 교회에 영웅적인 예언자와 사도들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지금껏 존재했던 예언자나 사도도 지금 이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 자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앨리야나 베드로, 바울도 지금 이 군대에게 임한 엄청난 능력을 소유해 보지 못했다."

가짜 부흥 운동이 종말의 회복을 예언했다면, 진정한 부흥 운동은 참된 회개를 예언했다.


4부 쓰러짐

오 늘날 수많은 사람이 마치 성령의 능력을 가장 명확하게 조여 주는 방법인 것처럼 쓰러지고 있다. 빈야드 교회 창시자인 존 윔버는 이런 현상이 성경과 교회 역사와 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윔버는 수년 동안 이 현상을 관찰한 결과 평신도들은 뒤로 넘어지고, 지도자들은 앞으로 넘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9미터 공중 위로 붕 날아 벽에 처박히는 경험"을 한 후 회심한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가짜 부흥 운동지도자들은 쓰러짐 현상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힌두교의 구루(힌두교의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나 협잡꾼, 최면술사들이 하는 행위와 더 공통점이 있다.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을 현혹하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을 왜곡해서 적용하기도 하고 사회심리학적인 조작을 이용하기도 한다.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 백과사전]에서도 "수 많은 성경 구절들을 증거로 들이대며 그 현상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 성경구절들은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하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런 현상을 성령이 행하시는 일이라고 경건하게 포장하고, 심지어 실용적인 방법을 동원해 '잡아 주는 사람'들도 배치했지만, 여전히 수 많은 사람이 이 행위 때문에 정신과 영 그리고 육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가짜 부흥 운동은 쓰러짐 같은 감각적인 현상에 초점을 맞추지만, 진정한 부흥 운동은 성령 안에서 얻은 구원과 성화에 초점을 맞춘다.


5부 최면술

오 늘날 최면술사들은 축제나 친교 모임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활약한다. 한때는 이교 사원에서만 행해지던 일들이 이제는 교회 제단 위에서 행해진다. 최면술사들이 힌두 구루라고 불리든 성령 바텐더라고 불리든, 최면술사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이들과 너무나 비슷하다. 최면술사들은 모두 대상자를 의식변성 상태에 빠지게 하고, 주변의 압력을 이용하여 대상자들이 일정한 행동 패턴에 따르도록 유도하고, 사람들의 기대감을 자극하고, 암시의 힘을 이용해 대상자가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행동하게끔 유도한다. 비평가들은 이런 의식변성상태, 주변의 압력, 기대감, 암시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사회심리학적으로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쉽게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 안에 더 중대한 위협적인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런 기술로 사탄의 영적 속임수가 난무한다는 사실이다.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최면술과 같은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지만, 진정한 부흥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깨우친다.


많은 사람이 수적으로 거대한 부흥을 열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거대한 개혁이다. 교회가 개혁할 때 문화도 되살아날 수 있다. 진정한 영적 체험은 FLESH를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기본으로 돌아갈 때 경험할 수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즉 간절한 기도와 찬양, 말씀 선포가 있는 예배말이다. 또한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고백하고 우리의 시간과 재능, 물질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증인으로서 삶이 변하는 궁극적인 경험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누구를 믿는지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엉뚱한 곳에서 하나님을 ㅤㅊㅏㅊ는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체험은 오직 예배와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고, 증인으로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출처: 아멘넷, 정리: G2u
[타락한교회] 더 꼬인 가족 분쟁, 순복음교회는 어디로?|♣ 。율법과 복음
향기 | 조회 1092 | 2010.10.16. 07:57 http://cafe.daum.net/jesus330/Xm4/1049 

기사위치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101013183813299&p=sisapress


국민일보 노승숙 회장에 대한 고소 사건을 둘러싸고 조용기 목사 가족 내부 다툼으로 격화하던 순복음교회 사태가, 그동안 관망해 오던 조용기 목사가 전면에 나서면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조목사는 국민문화재단 임시이사회를 열어 사퇴 의사를 밝힌 노승숙 회장 대신에 자신의 부인인 김성혜 한세대 총장을 국민일보 회장 겸 발행인으로 추천했다. 이로써 순복음교회와 국민일보 사이에 골이 깊어지는 등 분쟁의 양상도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조용기 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전면에 나섰다. 점점 격화되는 가족 간 분쟁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서다. 조목사는 지난 9월27일 국민문화재단 임시이사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부인인 김성혜 한세대 총장을 차기 국민일보 회장 겸 발행인으로 추천했다. 재단 이사직도 김총장에게 양보했다. 조목사와 사돈 관계인 국민일보 노승숙 회장이 사내 게시판에 사퇴 의사를 밝힌 지 불과 열흘만이다. 하지만 김총장의 국민일보 입성은 이사회의 반대와 법적인 문제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러자 조목사는 법적 절차를 보완해서 이사회를 재소집할 것을 측근에게 지시했다.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분위기이다. 순복음교회의 한 관계자는 "(조목사가) 마음을 확실히 굳힌 것 같다. 10월18일 재소집되는 이사회에서 노회장의 사의 표명 건과 김총장의 회장 선임 건을 정식 논의할 예정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조목사는 그동안 순복음교회의 가족 분쟁에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고소 사태 초기만 해도 노승숙 회장이 사표를 제출하겠다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을 불러 강하게 질타하기도 했다. 순복음교회 관계자는 "(조목사의) 호통 소리가 비서실 밖까지 들릴 정도로 화를 많이 냈다"라고 귀띔했다. 김성혜 총장의 '국민일보행'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조목사는 지난 9월7일 국민일보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집사람에게 여러 번 얘기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자포자기하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토로했다.


왼쪽부터 조용기 목사,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 김성혜 한세대 총장, 조민제 국민일보 사장.

순복음측, 국민일보 지원 중단 검토

그런 조목사가 갑자기 김성혜 총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교회 안팎에서는 조목사의 입장이 급선회한 배경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순복음교회 및 국민일보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조목사는 최근 개최된 임시이사회 이후 화가 많이 났다고 한다. 국민일보는 최근 1인 주주(국민문화재단)로 독립했지만, 여전히 교회의 울타리 안에 있다. 매년 교회로부터 수십억 원의 돈을 지원금 형식으로 제공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50억원, 올해는 30억원을 지원받았다. 순복음가족신문 등 교회 인쇄물도 모두 국민일보에서 인쇄하고 있다. 이로 인한 매출도 10억원에 이른다. 교회를 통해 나가는 판매 지원금 30억원까지 합하면 국민일보는 올해에만 순복음교회로부터 72억원을 지원받았다. 그럼에도 조목사는 국민일보에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최근 송인근 재단 사무국장을 집무실로 불러 이사회 재개최를 위한 법적 보완을 지시한 것도 같은 이유로 풀이되고 있다. 순복음교회의 한 관계자는 "이럴 것이라면 무엇하러 국민일보를 지원하느냐. 차라리 지원을 끊자는 불만이 교회 내부에 팽배해 있다"라고 말했다.

순복음교회는 이미 국민일보에 대한 지원을 끊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민일보에 맡겼던 인쇄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인쇄소의 가격까지 조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민일보와의 관계 단절이 현실화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과연 지원을 끊을 수 있겠느냐'라는 회의적 시각도 국민일보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일부 가족 간의 분쟁이 교회와 국민일보의 싸움으로 확대되는 형국이다. 순복음교회의 한 관계자는 "교회 지원금 문제 역시 조목사의 지시하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국민일보측은 "예정된 수순이었다"라고 평가한다. 국민일보 노사공동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공동위원장 백화종 부사장·조상운 노조위원장)의 한 관계자는 "지난 2000년 파업 때도 교회 지원금을 삭감하겠다고 압박했다. 지원금을 끊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정된 카드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경영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 관계자는 "교회 지원금은 조희준 전 회장이 경영할 때와 비교할 때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 돈 없이도 국민일보 경영에는 문제가 없다"라고 강조했다. 이참에 순복음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조상운 국민일보 노조위원장은 "명분상으로나 법적으로 국민일보에 불리하지 않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교회와도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로들 "우리도 목소리 내겠다"

순복음교회 사태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장로들의 움직임이다. 조목사와 마찬가지로 장로들 역시 그동안 가족 간 분쟁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최근 기자가 만난 한 장로는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조용기 목사의 얼굴을 봐서 참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목사의 이미지 훼손이 순복음교회 추락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개입을 자제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장로들이 최근의 분쟁에 끼어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가족 간 분쟁으로 교회나 국민일보가 훼손되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순복음교회의 한 관계자는 "교회는 물론이고, 국민일보도 사유 재산은 아니다. (조목사의) 가족들이 교회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장로들 사이에서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실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태도이다. 현재 다툼을 벌이고 있는 조희준 전 회장이나 김성혜 총장뿐 아니라 노승숙 회장도 같은 부류로 보고 있다. 어차피 모두 조목사의 가족·인척으로 교회 경영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성혜 총장은 교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사·재정 등 교회 핵심 요직을 이미 장악한 상태이다. 2년 전 순복음교회 원로 장로를 중심으로 '김총장이 교회 일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해달라'라는 내용의 건의서가 조목사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노회장 역시 10년간 국민일보 사장과 회장을 지내면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이렇게 곪은 문제가 최근 가족 간 분쟁으로 외부에 표출된 것뿐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번만큼은 순순히 넘어가지 않겠다는 공감대가 원로 장로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장로는 "조목사의 가족들이 교회 관련 일에서 모두 물러나지 않을 경우 실력 행사에 나설 예정이다. 어떤 식으로든 조만간 장로들의 목소리가 나가게 될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이 경우 순복음교회가 다시 격랑에 휘말릴 수 있다. 그동안 순복음교회는 기독교 단체로부터 적지 않게 공격을 받았다. 온 가족이 교회 경영에 나섰다는 점이 빌미가 되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조용기 목사의 은퇴와 친·인척 경영 배제 등을 요구하며 순복음교회를 압박했다. 비슷한 시기 언론개혁시민연대는 '국민일보가 족벌 세습 경영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장로 1천5백명이 '방패막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들마저 조목사에게 등을 돌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장로는 "(조목사가) 갑자기 입장을 선회한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각이 특히 많았다. 장로들이 움직일 경우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재산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경영권 다툼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국민일보 사옥과 관련 내용을 보도한 국민일보, 비대위 회보. ⓒ시사저널 윤성호

잠복했던 구조적 문제들 다시 불거질 수도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한 관계자는 "포스트 조용기 체제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조목사가 은퇴했고, 지성전이 독립하는 등 최소한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잠잠해진 것이다. 장로들의 무력 시위는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8년 이후 잠잠했던 순복음교회의 구조적 문제들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 지원금 문제의 경우 언론사의 독립성과도 얽혀 있어 변수로 꼽히고 있다. 한국기자협회(회장 우장균)는 지난 10월4일 "김성혜 총장이 국민일보를 장악하기 위해 언론사 회장에게 강제로 사퇴서를 쓰게 하는 등 온갖 월권 행위를 하는 데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김총장과 조희준씨는 더 이상 언론사를 개인 회사로 보는 우를 범하지 말기 바란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순복음교회측은 "국민일보에서 조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엘림직업전문학교의 비리 문제를 보도하는 등 조용기 목사 부부를 공격하면서 불거진 일이다. 교회 지원금을 무기로 국민일보를 압박할 의도는 없다"라고 밝혔다. 그동안 거취 표명을 자제했던 김성혜 총장도 10월7일 측근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그녀는 "국민일보 경영에 간섭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10년 이상 장기 집권하고 있는 노회장에게 사퇴를 권고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순복음교회 가족 분쟁이 어떤 식으로 결말날지 교회 안팎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노승숙 회장 감금 후 사퇴 종용' 주장은 사실일까

순복음교회 가족 분쟁의 또 하나 쟁점은 노승숙 회장에 대한 사퇴 강요 여부이다. 국민일보 비대위는 지난 9월28일과 10월3일 두 차례에 걸쳐 특보를 배포했다. 이 특보에는 김성혜 총장이 노회장을 감금하고 '사퇴 각서'를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김총장이나 조희준 전 회장은 그동안 "국민일보 경영권에는 욕심이 없다"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번 분쟁 역시 "노회장의 개인 비리가 문제의 핵심이다"라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4시간 동안 노회장을 감금하고 사퇴를 강요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보에 따르면 김총장은 지난 8월28일 노승숙 회장을 11층 집무실로 호출했다. 이 자리에서 김총장은 "사표를 쓰기 전에는 못 나간다"라면서 노회장을 압박했다. 심지어 조 전 회장에게 회사 기밀을 유출해서 해고된 경리팀장 김 아무개씨까지 나서 "그만두지 않으면 양심선언을 하겠다"라고 협박했다. 노회장은 결국 김총장이 직접 작성한 사퇴 각서에 서명하고서야 집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노회장은 현재 입을 다물고 있다. 그는 지난 9월17일 사내 게시판에 사표 의사를 밝힌 후 두문불출한 상태이다. 사무실을 5층에서 3층으로 옮긴 후 출근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민일보의 한 관계자는 "회장직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 같다. 전화번호까지 바꿔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내부에서는 김총장이 국민일보 경영에 대한 욕심 때문에 노회장에게 사퇴를 종용했을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국민일보 비대위는 10월7일 조 전 회장과 경리팀장 등을 형법상 감금 및 강요 혐의로 고발했다.

하지만 김성혜 총장의 입장은 달랐다. 김총장은 측근을 통해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힘 센 남자를 감금할 수 있느냐. 노회장의 개인 비리 문제와 함께 그가 둘째아들 민제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점을 따지는 자리였다"라고 해명했다. 김총장은 이어 "노조에서 내가 경영권을 장악하려는 것처럼 왜곡해서 전하고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진실은 검찰 조사에서 드러날 전망이다.

조용기 목사는 왜 갑자기 입장을 바꾸었나

조용기 목사는 지난 10월3일 일요일 여의도 순복음교회 예배당에서 4부 예배를 마친 후 국민일보 노조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성도들이 피와 땀으로 만든 신문을 노조가 먹으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조목사는 "국민일보를 어떻게 세웠는데 노조가 들어와서 이 짓을 하느냐. 본때를 보여줄 수밖에 도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조용기 목사가 특정 세력을 지목해 비난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신도들 앞에서 노조를 상대로 독설을 퍼부은 터여서 교회 내부적으로 적잖은 파장이 일고 있다. 국민일보 노조는 조용기 목사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통해 조목사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조상운 국민일보 노조위원장은 "국민문화재단을 만들어 국민일보를 한국 교회에 내놓았던 약속을 어기려는 이유에 대해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조용기 목사의 가족들.

ⓒ시사저널자료

조목사의 입장이 선회한 정확한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노조는 "조목사가 김총장에게 약점을 잡힌 것 아니냐"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이는 비대위가 최근 발행한 조희준 전 회장과 조상운 노조위원장의 녹취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 전 회장은 "조용기 목사와 나는 일반적인 부자 관계가 아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못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조목사를 옹호하는 측은 "비대위나 노조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국민일보는 지난 9월8일 엘림직업전문학교(교장 설상화 장로)가 유령 학생을 등록시켜 서울시에서 지급하는 운영 보조금을 횡령한 내용을 지면에 보도했다. 국민일보 노회장을 고소하면서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설상화 장로를 타깃으로 한 기사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조목사 흠집 내기'가 아니냐는 시각도 나왔다. 엘림직업전문학교가 조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엘림복지회 산하에 있기 때문이다.

비대위나 노조측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라는 입장이다. 비대위측은 엘림직업전문학교의 비리가 제보된 데 따른 취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비대위는 특보에서 "악의적인 여론몰이 가능성을 우려해 기사 게재 여부를 고심했다. 엘림직업전문학교가 일부 인사의 부정과 비리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는 소명 의식에서 기사 게재를 최종 결정했다"라고 밝혔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 일로 '순복음교회'(조용기·조희준·김성혜)와 '국민일보'(노승숙·조민제)로 조목사와 친·인척의 편이 명확하게 갈렸다는 점이다. 조희준씨는 조목사의 첫째아들이고, 조민제 국민일보 사장은 둘째아들이다. 형제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독립한 21곳의 제자 교회가 국민일보와의 전쟁에 합류하는 등 '국민일보 사태'의 불길은 점점 순복음교회 중심부로 번지고 있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기하성)' 소속 여의도 제2지방회와 영산제자교회 담임목사협의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는 김경문 목사와 회원 일동은 지난 10월10일 성명서를 내 노승숙 회장과 국민일보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국민일보는 순복음교회, 성도, 조용기 목사 부부에 대한 비방을 중지하라"라고 밝혔다.

이석 / ls@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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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진짜 크리스천일까?”

다양한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져 보지만 여성 크리스천 질마이어 씨도 해 봤다. 그러면서 그는 전에 해 보지 않았던‘짓’을 했다. 도서관에 가서 오바마의 저서‘희망의 정당성’을 찾아 읽은 결과 거기서 마침내 답을 얻은 것이다. 다음은 간추린 내용.

우리는 판단을 조심해서 해야한다. 오바마는 자신의 책‘<희망의 정당성>의‘신앙’장(226쪽)에서 자신의 말로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밝혔다. 그는 죽음 후 어떻게 되냐는 어린 딸의 물음에 대하여“그건 먼 훗날 걱정해도 된다”는 식으로 대답해 일단 딸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오바마는 계속 쓴다. “나는 딸에게 진실대로 말했는지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웠다. 나는 사실 우리가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신이 없었다. 영혼이 어디 거하게 되는지, 빅뱅 이전에 무엇이 존재했는지도.”
 
오바마가 딸에게 한 말에서 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기독교적 요소가 담겨있지 않는 듯 보인다. 만약 크리스천 아빠라면 어린 딸에게 당연히 최소한 하나님과 천국에 관해 말해줄 법한데도 말이다.


기사제공ⓒ 크리스찬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us) 발행인 서종천 목사 편집국장 서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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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背敎)에 관한 단상(1)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배교는 진리에 반하는 가장 전형적인 종교 운동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명석한 목회자요, 뛰어난 칼빈주의 신학자로 평가되는 존 오웬(John Owen)는 “복음으로부터의 배교”(원제, Apostasy from the Gospel, 한국어 번역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로마 가톨릭이라는 당대의 보편 교회가 추구했던 은밀하면서도 전격적인 배교 현상을 매우 통찰력 있는 성경 언어와 신학 논리로 정확하게 규명한 바 있다.

오웬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신들의 배도를 정당화 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성령께서 사도들의 입술을 통해 예언한 배도의 네 가지 기본적인 경고들 - (1) 어그러진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목사와 교사들 중에서 일어날 것 (2) 양떼를 아끼지 않는 흉악한 이리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 (3)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 듣는 일을 싫어하여 진리로부터 돌아설 것 (4) 배도 현상은 가견(可見) 교회 전체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 - 이 자신의 시대 속에서 불의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하지만 교회 역사를 정직하게 대하는 성도는 그의 지적이 그 시대만을 향한 거룩한 슬픔이 아니었음을 안다. 배교는 교회 역사가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교회 안에 상시적으로 발생하였던 일이다. 사탄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진리를 거짓 것으로 속이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가장 유구하고 전형적인 진리에 반(反)하는 종교 운동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 드러난 배교의 실체와 음모

배교의 역사성과 지속성, 그리고 현실성에 대해 성경만큼 적확하게 언급하는 기록은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기억해 보라.

어느 민족보다도 확실한 구원의 은혜를 몸소 경험한 백성이었음에도 그들의 전체 역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한 반역과 배역으로 점철되어 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였던 다윗과 솔로몬의 왕정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배교는 그치지 않았다. 유대 왕국의 몇몇 선한 왕들과 느헤미야 때에 나타난 일시적인 신앙 부흥 운동을 제외한다면, 구약 시대는 곧 끊임없이 연속된 배교의 역사로 기억될만하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는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초기 공생애 사역은 겉으로는 성공적으로 보이는 듯 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거하시자 모두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순간에는 그의 열 두 명의 제자들마저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포기한 뭇 사람들과 함께 배교의 행렬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믿음에 관한 이런 형태의 배교는 마지막 때에 나타날 가장 일반적인 종교 현상이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예언은 그 분의 부활이후 수 세기에 걸쳐 전개된 초대교회의 현장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초대교회는 진리에 관한 한 순전한 교회 모델이라기보다는, 음험한 목적을 갖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짓 선생(목사)과 그들이 전파하는 다른 복음(교리)의 위력 앞에서 명목뿐인 교회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도들은 초대 교회의 배교라는 참담한 신앙적 현실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저주와 경계와 비판의 날을 세워 진리로부터 등을 돌리는 신앙의 무모함과 위험성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곧이어 진리의 편에 선 정통 교부들과 초대 변증가들의 생명을 건 순교 정신과 활기찬 논증 덕택에 배교의 큰 흐름이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지만, 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변형을 거듭한 배교의 물줄기는 세상으로부터의 이해와 동정, 비신앙적인 세력으로부터의 원조와 협력, 그리고 세속적인 사상으로부터의 지지와 호소와 한데 어울려 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범접하기 무서운 거대한 탁류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정통 신학과 교리를 포기한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 거친 배교의 물살에 몸을 내던지고 있다. 이처럼 배교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 걸쳐 항상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숨길 수 없는 교회의 영적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배교는 절대로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부분 복음과 부분 진리로 위장한 거짓 목회자나 거짓 성도에 의해 주도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꺼번에 절대 진리를 무너뜨리려 하는 대신, 주로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진리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허무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교는 구약 시대에는 이교도 사상과 영합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 활동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에 의해, 사도 시대에는 거짓 선생과 거짓 형제라 이름 하는 이들과 초대 교회 때는 영지주의와 같은 기독교 이단 그룹에 의해, 중세에는 교황을 위시한 로마 카톨릭 교역자들에 의해, 그리고 근세와 현대에는 자유주의와 은사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입으로 복음을 말하지만 순수 복음과는 상관없는 가르침을 펼치는 복음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과 그들의종교적 허세에 현혹된 성도들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분별하기 쉽지 않다. 이들은 보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으며, 외적으로는 경건과 학문적 배경이 견고하며, 신앙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노력이 남다른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때로는 보통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인격적이며, 그들의 말은 호소력과 설득력을 겸비하고 있으며, 사고와 논리역시 이성과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들”(마 7:15)이다. 이들은 성경을 방편삼아 성경을 속이는 자들이요, 진리의 명료함을 왜곡하는 자들이요, 참된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허무는 자들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진실한 성도에게 분명 배교는 기독교 신앙에 가장 강력한 적(敵)인 동시에 진리 사수를 위해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임을 잊지 말자(*).



 배교(背敎)에 관한 단상(2)

지난 학기(3월-7월) 동안, 필자가 섬기고 있는 연구회에서는 첫 번째 공개강좌 주제로 기독교 역사를 탐구할 기회를 가졌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의 장구한 교회 역사를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역사적 교훈이 있다.배교는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예나 지금이나 참된 교회와 참된 신앙을 훼손하는 가장 커다란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세대를 비교해 보더라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현대 교회보다 덜 심각해 하는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믿기 어렵다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설교나 서점가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라. 과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과 비교하여 신앙고백과 교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영적 분별과 안목을 중요시하며, 진리에 의한 바른 확신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자가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탁월한 성경 지식과 경건한 양심을 소유한 진리에 붙잡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의 평가는 이와 반대이다. 그토록 많은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활개치고 거짓 가르침이 유포되고 있지만, 진정 이들을 기독교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일성(一聲)조차 듣기 힘들다.

성경과 신학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날로 깊어지고, 세상과의 타협과 관용과 축복으로 포장된 안이한 평온주의가 복음의 핵심인양 증거되고 있어도 이것을 기독교 신앙의 위기로 여기는 성도들이 많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배교의 현실과 배후 세력

그럼에도 오늘날 배교라는 단어는 교회안에서조차 터부시되고 있다. 배교라는 말을 꺼내는 즉시, 몰인정하고 편협한 신앙인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배교라는 단어는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는 단어이다. 한국어 성경에는 ‘배도’(살후 2:3)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기도 한 이 말은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에서 유래된 것으로 ‘분리, 변절’(departure) 또는 ‘진리로부터 멀어짐’(falling away)을 의미한다. 배교자란 진리를 포기하거나 배반한 자를 가리킨다. 즉 배교란 본질적으로 진리 운동에 반하는 것으로 교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비성경적인 종교 현상이다.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이 같은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증해 준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중략) …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14:10-24 중 일부 구절).

이 말씀은 세상 끝에 나타날 일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답변이다. 예수님은 종말이 다가올수록 교회 안에서 배교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을 기정사실화 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배교 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하신 대상이다. 다름 아닌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신약 성경을 통해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수차례 주의할 것을 당부한 거짓 선생들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공략 목표로 삼는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를 미혹한다.

그러나 겉모습만으로는 이들의 정체를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들은 교묘한 위장술의 달인이며, 속임의 명수들이다. 교회의 부주의함과 성도의 연약함을 틈타서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다(유 4). 그리고 경건한 사도와 목사로, 교회의 헌신적인 일꾼으로 행세하며, 때로는 지극히 경건한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한다(고후 11:13-15). 능숙하게 성경을 다루며 사람들에게 호감과 신뢰를 받는다(갈 1:6). 그들의 입에서는 늘 평강의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의 심령에 만족을 주는 설교를 쏟아낸다(렘 6:14). 때로는 놀라운 표적과 신비한 기사를 행하여 수많은 동조자들을 모은다(마 24:24).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 존경할만한 지도자로 인정받기도 하고 그리스도처럼 높임을 받기도 한다(벧후 2:1).


배후 세력의 음모와 영적 전쟁의 승리 위한 기도

하지만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도 이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한 가지이다.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영적 자만과 방탕에 빠지게 하는 일이다. 그로써 교회와 성도가 진리와 무관하거나 혹은 진리에 반대편에 서도록 하는 것이다. 이들이 더욱 위협적이며 위험스러운 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기 때문이다(마 23:27).

이들은 진리를 가지고서 진리의 도를 훼방하며(벧후 2:2), 말씀을 거짓되게 해석하며(딤후 2:17), 허탄한 자랑으로서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며(벧후 2:18),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게 하며(약 1:14),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유 4). 또한 으뜸되기를 좋아하도록 하며(요삼 1:9), 육체의 현저한 일을 행하게 하며(갈 5:19-20),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며(딛 1:16),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킨다(롬 16:17).

우리는 어느 시대의 성도들보다도 이러한 배교의 현실을 더욱 분명하게 목도하고 있다.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진리의 대적자들과 변절자들의 유혹과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들과의 피할 수 없는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권면에 귀를 기울이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빌 1:9-10) 소원하는 사도의 기도가 우리의 영적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개혁신보
출처: 양무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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