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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삼월 소묘 - 1951년 4월 25일

      벚꽂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영수
      노송은 정정 정자는 우뚝
      복숭아꽂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거리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냐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춘삼월 긴긴날에 때가는 줄 모르도다.
      바람은 솔솔 호수는 잔잔 저건너
      봄사장에 갈매기떼 날아가네
      우리도 노를저어 누벼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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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1952년 7월 2일 밤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지언정
      길이 빛나고 아름다와라.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화되어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의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서
      인생코스가 되어 주오.
      그대 편안히 잠자는 모습을 보고
      이 밤이 다 가도록 새날이 오도록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보고 앉아
      행복한 이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저도 바닷가에 혼자 앉아서 ―1976년 8월 5일

      똑딱배가 팔월의 바다를
      미끄러듯 소리내며 지나간다
      저멀리 수평선에 휜구름이 뭉개뭉개
      불현 듯 미소짓는 그의 얼굴이
      저 구름속에서 완연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이가 있는 곳에는 미치지 못한다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망연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에는 또다시 일군의
      꽃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흰 치마저고리 옷고름 나부끼면서
      그의 모습은 저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다
      느티나무 가지에서 매미소리 요란하다
      푸른 바다 위에 갈매기 몇 마리가
      훨훨 저건너 섬쪽으로 날아간다

      비몽(比夢)? 사몽(似夢)?
      수백년 묵은 팽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소리없이 스쳐간다
      흰 치마저고리 나부끼면서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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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송이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1974년 8월 20일

      상가(喪家)에는 무거운 침묵속에
      씨롱 씨롱 씨롱 매미 소리만이
      가신 님을 그리워하는 듯 팔월의 태양아래
      붉게 물들인 백일홍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듯
      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가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단장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리

      비오는 저도의 오후 ―1976년 8월 6일
      비가 내린다
      그다지도 기다리던 단비가
      바람도 거칠어졌다
      매미소리도 멎어지고
      청개구리소리 요란하다
      검푸른 저 바다에는
      고깃배들이 귀로를 재촉하고
      갈매기들도 제집을 찾아 날아간다
      객사 창가에 홀로 앉아
      저멀리 섬들을 바라보며
      음반을 흘러나오는 옛노래를 들으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명상속에
      지난날의 그 무엇을 찾으려고
      끝없이 정처없이 비오는 저바다 저하늘을
      언제까지나 헤매어 보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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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1974년 9월 4일(수)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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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저 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1974년 11월 1일

      한국의 밤은 깊어만 가고
      초생달 밤하늘에 은빛의 별
      슬픔을 안겨준 국민의 벗이여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바다에 해가 저물고
      산 하늘의 새 날아가도다
      세월은 유사같이 행복은 사라지고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당신이 그리우면 ―1974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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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오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마디 없오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애
      당신도 잘 있었오
      홀로 얼마나 외로왔겠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다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 오겠오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 올테니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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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흰 목련 ―遺芳千秋 1974년 8월 31일 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 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극락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는 사랑을 베풀고
      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 보리
      그 누구에게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오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없이 지고 가 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

      당신이 먼 길을 떠나던 날
      청와대 뜰에 붉게 피었던 백일홍과
      숲속의 요란스러운 매미소리는
      주인 잃은 슬픔을 애닯아하는 듯
      다소곳이 흐느끼고 메아리쳤는데
      이제 벌써 당신이 가고 한달
      아침 이슬에 젖은 백일홍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매미소리는 이제 지친 듯
      북악산 골짜기로 사라져가고
      가을빛이 서서히 뜰에 찾아 드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되노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 오고
      가을이 가면 또 겨울이 찾아 오겠지만
      당신은 언제 또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번 가면
      다시 못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아 이것이 천정(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아 그대여, 어느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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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ake의 왕과 나의 사랑 이야기 중


▲사진-절에서 운영하는 사주 카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사주팔자(四柱八字) 타령을 자주 하곤 합니다. 나는 ‘왜 하는 일마다 이렇게 안 되는지?’하면 어머니께서는 ’네 사주팔자가 좋다‘고 하시며 조금만 인내하라고 합니다. 사주팔자가 세면 고생한다고 하는데 사주팔자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나요? 목사님 사주팔자가 운명을 좌우하나요? 하는 집사님 전화 상담을 받고서,


1. 들어가는 말

사주팔자는 한국인의 정서에 알게 모르게 뿌리 깊게 박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어떠한 일이 잘 되었을 때는 “운(運)이 좋았다”, “일진(日辰)이 좋았다”, “내 사주팔자(四柱八字)가 좋은가 봐” 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잘되지 않을 때는 “내 팔자소관인가 봐” 라고 사주팔자타령을 하곤 합니다.

옛날에는 혼례(婚禮)를 할 때 두 남녀의 사주팔자를 맞추어 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사람이 마음에 들어도 파혼을 하고, 다른 짝을 찾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결혼하기 전에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무속인은 “진짜 기독교(基督敎)인들이 오면 단번에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둘려 보낸다” 며 “이들은 사주(四柱)나 점괘(占卦)가 나오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지 만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교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장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기꺼이 봐준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사주팔자를 볼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운(運)이라는 것은 운명술(運命術)의 관점에서 성취될 확률이 1%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100%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사주팔자가 운명(運命)을 좌우하나요? 하는 집사님의 상담을 상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사주팔자가 기독교에 끼친 영향을 논하고자 합니다.

2. 사주(四柱)의 의미

사람이 태어난 “생년(生年), 생월(生月), 생일(生日), 생시(生時)”를 사주라고 합니다. 사주(四柱)는 중국의 음양오행설에 기초해 사람의 운명을 예측하는 일종의 명리학(命理學)이라고 정의 합니다. 사주는 사람을 집에 비유 할 때 집의 네 기둥으로 보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주(四柱)의 사(四)자는 넉 사이고, 주(柱)자는 기둥 주를 쓰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 지은 집이란 의미의 몸을 담고 태어난 사주의 사람을 좋은 사주를 같고 태어 남 사람이고, 기초가 허술하고 환경이 좋지 못한 집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사주의 사람을 좋지 못한 사주를 같고 태어난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사주는 선친 복(福)이라 하여 조상 때부터 공덕이 있는 사람은 후손이 좋은 사주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세속풍속에서 왕 대나무 밭에서 왕대나무가 나오고 신우대나무 밭에서 신우대나무가 나온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사주(四柱)란 사람의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따져 길흉화복(吉凶禍福)를 점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근거한 것입니다.

3. 팔자(八字)의 의미

사주에 간지(干支)가 되는 여덟 글자를 말하는데. 즉, 생년(生年), 생월(生月), 생일(生日), 생시(生時), 사주에다 “갑자(甲子), 을축(乙丑)”등 하는 육갑을 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갑자년(年), 을축월(月), 병일일(日), 정묘시(時)에 태어난 사람은 갑자(甲子), 을축(乙丑), 병인(丙寅), 정묘(丁卯)라는 여덟자(八字)를 가집니다. 이것이 한 사람의 운명의 팔자가 되는 것입니다.

간지란 천간(天干)지지(地支)의 준말입니다. 중국 은나라 때부터 있던 것으로서 10간과 12지를 결합하여 이루어지는“간지(干支)”를 통해 년도를 나타냅니다. 견합 순서는 10간의 처음과 12지의 처음 즉 “갑자(甲子)”부터 시작하여 을축(乙丑), 병인(丙寅)- 계속해서 진행되어 60번의 순환을 마치면 다시 갑자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환갑이 넘으면 사주팔자가 안나오는 것은, 중국에서 역학으로 인생의 주기를 60십으로 본 것입니다. 환갑상을 살아 있는 산제사 상이라고 필자의 고향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조상귀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간지(干支)에서 간(干)는 하늘을 가리키며,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莘), 임(壬), 계(溪)의 10간으로 나눕니다. 지(支)는 땅을 가리키며, 자(子;쥐때). 축(丑;소때), 인(寅;호랑이때), 묘(卯토끼때) 진(辰;용때), 사(巳; 뱀때), 오(午; 말때), 미(未;양때), 신(申;원숭이때), 유(酉; 닭때), 술(戌;개때), 해(亥; 돼지때)의 십이지(十二支)로 나눕니다.

10간과 12지를 차례로 따라 붙여 가면 60간지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사주팔자를 본다” 함은 이러한 간지를 대조하여 사람의 미래의 운세를 점치는 행위 나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국인은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사주팔자(四柱八字) 타령으로, 조상(祖上) 타령으로 또는 운명(運命) 타령으로, 돌리는 관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사주팔자가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 여자 사주팔자가 세어서 그렇다” 등의 말은 한국인들의 생각과 생활문화 속에 깊이 뿌리박힌 것입니다.

사주팔자를 보는 것을 “운명(運命)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라는 뜻에서 명리학(命理學)이라 부릅니다. 일본에서는“운명(運命)을 추리한다”고 해서 추명학(推命學)으로, 중국에서는 “운명(運命)을 계산해 본다”는 의미의 산명학(算命學)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뜻은 같으며, 한자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한-중-일 삼국은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있어서 공감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사주팔자(四柱八字)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까요?

한국에서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주팔자타령을 한 번 이상은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주팔자는 한국인의 정서에 알게 모르게 뿌리 깊게 들어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목회현장에서 “목사님. 저는 왜 이렇게 팔자(八字)가 기구합니까? 라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듣곤 합니다. 어느 사주팔자에 대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본 사주팔자 내용에 대하여 50%가 맞아도 잘 맞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응답이 나왔습니다.

사주에 따라서 행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주팔자대로 사람의 운명(運命)을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씀하고자 합니다.. 무속(巫俗)인들은 역학(易學)이나, 주역(周易)으로 사주팔자를 풀어 좌절과 절망으로 귀정하고 액운(厄運)을 막아준다면서 부적(符籍)이나, 살(殺)풀이나, 굿(㖌) 등을 통해서 악행을 일삼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액막이란 방편으로 돈을 갈취하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무속신앙(巫俗信仰)의 문제와 현실입니다.

사주팔자(四柱八字)는 통계학적 이론으로 보자면 동일한 사주팔자를 가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주팔자가 동일하다면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주팔자를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해외(海外)선교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국내 문화(文化)선교가 급선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무속문화(巫俗文化)를 학문적으로 연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무속문화를 무조건 미신으로 비판과 저주로 일방적으로 폄하하기보다는 학문적으로 비교하여 접근하는 방식의 필요가 요구됩니다. 사주팔자를 주업으로 하는 무속인, 역술인, 철학관등을 다 합치면 5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학문적으로 양육하는 학원들이 성업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진-한국 역술 대학

그런데 한국 교회 목회자(목사, 강도사. 전도사)수는 교단을 초월하여 다 합쳐보았자 10만(교회 수는 5만-6만)명 정도입니다. 무속(巫俗)인들에 비해 교회나 목회자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무속인과 역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나 목회자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필자가 집회를 인도 하면서 마음속으로 느낀 것은 교회나 목회자들이 원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교회 부흥과 재정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에서는 성경공부는 많이 했지만 한국 전통문화인 무속의 세계를 가르치는 않고 있으니 잘 못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생각으로 오늘 한국 교회의 신앙행태를 보면, 생각은 불교적(佛敎的)으로고 하고, 생활은 유교적(儒敎的)으로 살고, 신앙은 무속적(巫俗的)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속신앙이 한국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혼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정서를 몇 년간에 년이어 여러 곳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무속신앙화 하느냐 아니면 무속이 기독교화 하느냐 하는 것이 실로 중대한 일입니다.

우리는 운명이니 사주팔자이니 하는 생각과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 속에 말이 있고 말 속에 생각이 함께하며 말에는 분명한 사상과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 무속신앙은 귀신(鬼神)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을 사주팔자가 전부 지배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고방식입니다.

4. 사주팔자(四柱八字)는 참 허구성을 알아야 합니다.

사주팔자를 조합해 보면 인간의 운명(運命)의 총수는 51만 8천4백수입니다. 지금 남한 인구가 약 5천만 명이라면 약 100명 정도는 사주팔자(四柱八字)가 같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사주팔자는 원천적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사주팔자가 같은 사람의 인생을 조사해 보면 결단코 그들의 삶의 운명(運命)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람들이 고통과 환란이 닥쳐올 때 자기 운명이 그래서 그렇다고 체념하며 받아들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八字)야”. “다 내 죄(罪)지“, ”내 운명(運命)이 그렇고“, ”내 팔자(八字)가 고런데 어떻게 하겠나“, 등 모든 고난과 고통을 자신의 운명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즉, 모든 것을 내 팔자(八字)소관으로 팔자(八字) 타령으로 돌립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한국인의 문화적인 단면이라고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첫째로는 중국 고대부터 사주팔자(四柱八字)는 문제가 있다 지적하고 있습니다. 명나라 말기 사람인 정중기는 이신(耳新)에서 “년월일시가 똑 같은 사람들의 실제인생이 완전히 다르다”며 사주팔자를 비판했습니다. 청대(淸代)의 왕사정(王士禎)이라는 사람은 지북우담(池北偶談)에서 “군자와 소인,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그리고 잘남과 못남이라는 각도에 착안하여 산명술(사주팔자)이 단지 사람의 귀천, 부귀, 요수, 화복만을 추산하는 것은 문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주팔자는 고대 중국인들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현상을 하늘에서 정한 천명에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발전 되어오다가 오대말(五代末) 송초(宋初)의 서자평이 년월일시(年月日時)를 동시에 따져 사주(四柱)의 방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둘째로는 한국 조선시대 때 사주팔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명종(明宗) 때 소문난 점술가 홍계관은 당대의 정승 상진대감의 사주팔자를 풀어 모년 모월 모시에 죽을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대감은 그날을 당해 죽을 준비를 해는 데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에 대감이 점술가을 불러 죽지 않은 이유를 따지자 그는 은덕 때문에 수명이 연장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상진대감은 “사주(四柱)란 하늘이 정해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구먼”하고 비평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종(成宗)은 자신과 사주팔자가 똑같은 과부가 성 안에 살고 있는 소식을 듣고서 그 과부를 불러 들여 살아온 삶을 물었습니다. 성종이 세자로 책봉되던 해 과부는 어머니와 사별했고, 성종이 임금이 되던 해 과부는 남편과 이별했습니다. 따라서 성종은 “못 믿을 건 사주팔자(四柱八字)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안점식 교수(한국선교훈련원)는 “간지(干支)의 태음력이나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 태양력이 혼합되어 있어 기준상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에도 마치 통계학처럼 과학으로 위장한 사주팔자(四柱八字)는 그 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다”며 “사람의 운명을 숙명론(宿命論)이나 운명론(運命論)에 묶어 스스로 자유 함을 잃게 하는 것이 사주팔자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주팔자(四柱八字)의 문제는 미신임에도 불구하고 맹신을 불러일으키거나 사기성이 농후한 경우도 있습니다.

5, 교회는 왜 사주팔자(四柱八字)를 금해야 하는 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사주팔자(四柱八字) 타령을 합니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이 팔자(八字)대로 살아간다는 동양사상인 음양오행설의 운명론(運命論)이 짙게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지난날 미신으로 여겨왔던 사주풀이가 오늘날 정보통신기술이라는 문화 속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아리 고개 점술집들이 이제는 “사주(四柱) 카페”라는 이름으로 강남의 압구정동에 점술(占術)거리가 조성 된지 오래입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고객이라는 현실 앞에서 왜 사주팔자를 금하는가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사주팔자(四柱八字)는 통계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주팔자는 통계학(統計學)이고 철학(哲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의 유전에 의해서 특별한 기질과 체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또한 사주팔자 보는 사람에 따라서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이 다르고 그 사주팔자 산출 방법도 다르고 또 운명(運命) 감정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사주팔자는 통계학이 되지 못합니다. 로마서 8;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팔자(八字) 더럽다”, 팔자(八字) 사납다“, ” 팔자(八字)가 그러니 어떻게 하느냐“ 는 말을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사용도 금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사주팔자(四柱八字)는 인간을 스스로 거짓 예언의 올무에 자신을 소박하는 것입니다.

사주팔자는 사람에게 운명론(運命論)을 강요합니다. 개인의 노력여하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다 정해져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자질과 결정에 대한 것을 운명에 맡겨버리고 요행을 바라게 합니다. 또한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보는 것은 사탄의 궤계에 말려들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미래에 대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면 우리의 불안이 해소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우리가 장래를 안다고 해서 우리의 장래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사로운 마음만 불러일으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不安)은 미래의 불확실이 아니라 만유의 주권자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의 미래는 오히려 더욱 확고해집니다.“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또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사주팔자(四柱八字)는 귀신(鬼神)의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주팔자를 잘 맞추는 사람일수록 신기(神氣;강신무)가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운명술(運命術)은 통계학이나 철학보다 오히려 접신(接神)으로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사소한 과거의 문제는 알아맞히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결정적으로 중대한 거짓말을 함으로써 파멸로 몰고 갑니다.

성경도 거짓예언자의 배후에는 거짓말하는 영이 있다고 말합니다.(왕상 22:22). 그리고 그러한 거짓 예언의 목적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하는 것이다(렘 23:23-3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점(占)술을 금하고 있으며 무당은 죽이라고 출애굽기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넷째로는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보는 것은 영적인 결핍을 가져 옵니다.

그러므로 사주팔자의 폐단은 기독교를 현세 기복적 신앙으로 유도하는 것입니다. ‘운(運)이 좋다’는 기준은 재물, 지위,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 현세적인 가치관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국회 청문회에서 여실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적·도덕적 상태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현세적인 관운(官運)을 위해서는 좋은 이름으로 고치고, 좋은 관상을 위해 성형 수술하고, 조상 묘도 이장을 합니다. 이방인 하면 조금 이해 할 수 있으나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眷顧) 하심이니라(벧전5;7)”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는 사주팔자(四柱八字)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무속(巫俗)적인 신앙의 행태를 갖고 있었고, 지금도 갖고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사주팔자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사주팔자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속담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 팔자(八字)가 상팔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놀고 있는 개가 부럽다는 뜻으로 현실의 고통스러울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팔자(八字)는 독에 들어가도 못 피한다”, “ 뒤로 오는 호랑이는 속여도 앞으로 오는 팔자(八字)는 못 속인다”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운명론(運命論)은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속담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주타령이나. 팔자타령하면 마귀에 속하므로 사주팔자에 묶여 지게 됩니다. 꼭 기억하세요. 좋은 사주는 없습니다. 좋은 팔자도 없습니다.

원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에게 무슨 좋은 사주가 있겠습니까.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좋은 팔자가 있겠습니까. 마귀의 종노릇하며 사는 사람에게 무슨 좋은 사주가 있으며 팔자가 있겠습니까. 잠시는 좋은 듯이 하나 결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안점식 교수는 “사주(四柱)는 기독교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통계가 아니며 설령 무속(巫俗)인들이 말하는 것에 일리가 있어 보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그 안에 모시 고 사는 사람은 타고난 기질과 체질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 받는다” 며 “사주(四柱)는 구원(救援) 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탄에 이용 당하 는 사술에 불과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진리의 말씀 위에 온전히 서서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 있는 무속신앙(巫俗信仰) 연구가 절실 하다고 생각 합니다. 기독교가 사주팔자를 왜 금하는가를 이해시키려면 한국교회는 전통문화(傳統文化)를 학문적으로 연구가 필요합니다.

6. 나오는 말

언제부터인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참 신앙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속신앙의 영향을 받아 세시풍속(歲時風俗)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래 된 지 한 세기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전통문화인 무속신앙 풍속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침식당하고 있으니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러한 무속신앙에 대해 정학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지함에 대한 소설을 읽었을 때,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관상, 수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심상(心相)이다”라는 구절 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주팔자보다는 심상(마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주팔자는 한국인에게 운명론(運命論)을 강요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점괘(占卦)나 사주팔자(四柱八字)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을 묵상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 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 하리라(마10;32-33) 말씀 하셨고, 또한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씀 하셨습니다.

혹시 아직까지 교회 안에서 사주팔자(四柱八字) 타령을 하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든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 해방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한국 종교사에 나타난 불교(佛敎),유교(儒敎), 도교(道敎)가 결국은 무속신앙화 된 것이 입증합니다. 한국 교회는 기나긴 역사의 변천에도 소멸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해온 무속신앙의 저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겉은 기독교인이나 속은 무속신앙인 기독교인의 옷을 입은 무속신앙(巫俗信仰)인이 부적 필자의 눈에 많이 띄고 있습니다.

이의용 소장(교회문화연구소)은 ”사주팔자(四柱八字)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일종의 사기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주팔자를 맹신하는 데 문제가 있다”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곳을 출입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악하게 대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소장 은 “새해 벽두부터 장난삼아 운세(運勢)풀이를 하는 것조차 그리스도인 들은 금해야 할 것이다”며 “이는 성경이 금하는 것이고 또 인간의 모든 생명(生命)이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전통(傳統)에 기반 한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은 여전히 토착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행태를 갖고 있었고, 지금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2-3)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 한국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으로 회복되기를 함께 소망합니다. 그래서 ‘팔자(八字)가 더럽다’, ‘팔자(八字)가 사납다’, ‘팔자(八字)가 그러니 어떻게 하느냐’, 혹시 아직까지 교회 안에서 사주팔자(四柱八字) 타령을 하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한국 전통적인 운명론(運命論)에서 해방되시길 소망합니다.

서재생목사 / 서울대현교회 / 승려생활에서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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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해주는 정의의 사도 슈퍼맨(?)

누구든지 어렸을 때에는 한번쯤 슈퍼맨/슈퍼우먼이 되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망상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슈퍼맨 망상 신드롬"이라는 영적인 병이 만연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슈퍼맨이란 신의 초능력을 가진 신인(神人), 즉 갓맨(Godman)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인류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배교적) 기독교 안에서도, 이교 미스테리 바벨론 안에서도, 뉴에이지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창조 이래 사람은 슈퍼맨 망상 증후군이란 병을 지속적으로 앓아 왔다. 물론, 이런 영적 병의 병원균은 마귀에 의해 만들어지고 퍼트려져 왔다. 마귀는 우리 조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도 슈퍼맨이 될 수 있어"라고.. 영어 성경에는 "you shall be as gods"라고 표현되어 있다. 느낌 상으로 "너도 신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어" 정도의 어감이다.

슈퍼맨이 되고 싶었던 조상은 "전지(全知)"를 얻을 수 있다는 뱀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뱀의 추종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류의 조상은 그 순간 "빛의 사자"로부터 "빛"(illumination 깨달음)을 받아 자신 속에 신성이 있음을, 즉 자신에게 슈퍼맨의 DNA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 귀에 대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너는 이미 슈퍼맨이야. 다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라고..

종교마다 이런 슈퍼맨을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며, 슈퍼맨에 이르는 길도 각각이지만, 사람이 신의 초능력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핵심 사상에는 예외가 없다. 이들이 되기 원하는 슈퍼맨의 대표적인 특성으로는 전지와 전능, 그리고 (영원)불멸을 꼽을 수 있겠다.

1. 늦은비/신사도운동의 슈퍼맨

종말 시대의 슈퍼 사도와 슈퍼 선지자로 대표되는 늦은 비의 "선택된 세대"는,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무한정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슈퍼맨/갓맨이 된다. 이 슈퍼맨들은 죽지 않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순간이동을 하며, 대부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 신의 가족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한 늦은비/신사도들의 말을 들어 보자:

"종말 오메가 세대 슈퍼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적의 만 배"를 행할 것이다. 그들은 '백만 명 이상"의 집회를 인도할 것이며, 거기에서 그들은 "그들의 손을 움직이면 하나님의 권능이 번개의 섬광 같이 나갈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백만 명의 사람들을 향해 갈 때, 만약 사람이 팔을 잃으면...팔은 순간적으로 재생될 것이다..." 그들은 "벽을 뚫고 지나가며...그들은 순간이동을 할 것이며...야외경기장 집회 중에 수백 명의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며... 십억 이상이 구원받을 것이며...안구가 눈구멍에 되돌려질 것이며...무적이며--죽지 않는다." - 밥 존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에 오르기를 원하시며, 그는 우리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기를 원하시며,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기를 원하십니다. - 릭 조이너

나는 아주 높이 올라가기 원한다. 나는 정복자가 되기 원한다. 나는 능력의 산이 되기 원한다. 나는 위대한 자가 되기 원한다. 우리는 '위대함'이란 단어를 좋아 한다. 지극히 높은 자의 비밀장소에 사는 자는, 자동적으로, 전능자와 모든 것이 같게 된다. 그렇게 된다. - 타드 벤틀리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은 주장하기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라 불린다...우리는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이다!..." 케네스 코플란드(Kenneth Copland)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이유는 그 자신을 복제하고 싶어서였다...그는 하나님을 조금 닮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하나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종속적이지조차 않았다."라고 선언한다. TV 선교사인 존 아바자니(John Avazani)는 성령께서 "시대를 통한 영원한 목적이...그 자신을 땅에서 복제하는 것이라고 오늘날 땅에서 선포하셨다"라고 주장한다. 모리스 세룰로(Morris Cerullo)는 : "태초부터 하나님의 모든 목적은 그를 복제하는 것이었음을 아셨습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서, 누구입니까? 어서, 말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들! 어서, 말하십시오! 형제여,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것은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가지심의 표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섰을 때 당신은 모리스 세룰로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케네스 코플란드가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할 때, 베니 힌(Benny Hinn)이 "나는 세상에 걸어 다니는 작은 메시야입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지나친 이단사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늦은 비의 슈퍼맨(supermen 복수) "선택된 세대"는 "남자아이(Manchild)", "요엘의 군대",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선십(Sonship)", "집합 그리스도(Corporate Christ)" 등으로 불린다.]

신사도 운동 외에도 기독교 속에 침투한 갓맨 사상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퀘이커, 일부 형제단, 속 생명파, 그리고 지방교회들에서는 신자들 속에 들어 있는 "신적 불꽃(divine spark)"이 자라서 신자들이 신화(神化)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2. 고대 미스테리 신비종교(Ancient Mysteries)의 슈퍼맨

영지주의의 주류로 볼 수 있는 "고대 미스테리(종교)"에서는, '입문자'(initiate)들은 '신적 지식(영지)'을 깨달음으로써 한 단계씩 영적으로 상승한다. 물론, 최고의 단계에 이른 어뎁트(adept)들은 '빛의 아들들' 슈퍼맨/갓맨이 되어 신적 경지에 이른다.

고대 미스테리 종교의 입문자였던 신자학회의 창설자 헬레나 블라바츠키는 그녀의 '시크릿 독트린'에서 이렇게 적는다: "오랫동안 슈퍼맨들의 단체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왔다." 여기에서 그녀는 티벳 샴발라에 살고 있는 대백색형제단의 입문자들을 말하고 있다.

다음은 랄프 에퍼슨(Ralph Epperson)의 "신세계질서(The New World Order)"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미스테리(종교)에는 목적이 있다 -- 그것은 우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슈퍼맨을 창조하고 '참' 신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프리메이슨 W. L. 윌름허스트(Wilmshurst)는 이런 사상을 그의 "프리메이슨의 의미(The Meaning of Masonry)"라는 책에 적었다:

이것--사람이 슈퍼맨으로 진화하는 것--은 언제나 고대 미스테리(종교)의 목적이었으며, 현대 메이슨의 참 목적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회적 자선적 목적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본성을 완성시켜서 보다 신적인 특성으로 변형(transform)시키기를 갈망하는 자들의 진화에 있다.

윌름허스트는 그의 책 뒷 부분에서 이 사상을 더 자세히 서술한다: '땅에서 솟아나서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음을 뜻함) 저급한 자연왕국을 통해 현재의 이성적 상태까지 발전되어왔던 인류는, 그들이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또한 그들의 의식을 전지자와 합일시킴으로써, 그의 진화를 완성시켜야 한다. 이것을 증진하는 일은 언제나 입문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왔다... 사람이 신적 의식 속으로 융합하고 신이 아는 것을 아는 그런 수준은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이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선악을 아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며 사탄이 인류를 유혹한 것과 똑같이, 이제 메이슨은 고대 미스테리(종교)로의 입문을 통해서 그들 역시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3. 뉴에이지의 슈퍼맨

뉴에이지는 고대 미스테리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뉴에이지의 슈퍼맨 사상은 신비종교의 그것과 거의 똑같으나, 뉴에이지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뉴에이지의 '전인류적' 진화의 사상에 있다. 다시 말해서, 고대 신비종교에서는 각 개인의 슈퍼맨화에 우선적으로 초점이 맞춰졌었다면, 종말의 시대를 준비하는 뉴에이지 사상에서는 인류 전체의 슈퍼맨화에 초점이 맞춰지는 듯하다. 즉, 지금까지는 선택된 소수만이 깨달음을 통해 슈퍼맨이 되었다면, 진화의 완성점(떼이야르의 오메가포인트)에서는 모든 인류가 '루시퍼 입문'을 통해 집단적으로 슈퍼맨이 되는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뉴에이저들의 슈퍼맨 사상을 들어 보자:

인류가 "하나님"으로 점차 진화해서 최종점인 오메가 포인트에 이를 때, 이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 때에는 우주 그리스도에 속한 우리 모두도 신격을 실현하도록 완성되어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때가 오면 인간정신이 공간과 물질을 초월한다. - 떼이야르 드 샤르뎅

(떼이야르의) 우주 그리스도 신학은 인간의 신화神化에 당황하지 않는다... 신화와 함께 의무가 부과된다. 그것은 바로 창조하는 의무다 - 매튜 폭스

루시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임을 체험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킨다. - 데이비드 스팽글러

이런 나타남으로 인해 (신들인) 너희가 서로를 신들로 보게 되기 바란다. = 마이트레야 뉴에이지 그리스도

하나님은 우리가 신 자체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신성을 향해 자라나고 있다. - 스캇 펙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체험은--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곧, 나는 너무나 완전해져서 사람이 아니고 신이 될 것이다. - 존 덴버

우리는 신의 일부이다... 만약 누가 '내가 신이다'라고 말하면, 소리의 진동이, 문자 그대로, 육체 에너지를 더 높은 상태로 조율한다. - 셜리 멕크레인 뉴에이지 전도사

4. 기타 인용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근본적으로는 결국 미스테리 루시퍼 종교로 수렴되지만..)

기타종교의 슈퍼맨 사상도 잠깐 예를 들어 보자 :

당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게될 때, 당신은 신성의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

우리는 신이며 이에 익숙해질 수 있다. - 마르고 애들러 마법사

사타니즘의 핵심 포인트가 여기 있다. 자신의 잠재력에 따라 자신의 신성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각자는 사타니즘의 신이다. - 안톤 라베이 사탄교주

너는 신이다. - 채널러 J.Z. 나이트, 통일교주 문선명 등등

5. 맺음말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마귀의 치명적인 유혹은 너희가 "신과 같이 되리라"는 바로 이 한방이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귀의 이 한방에 바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그러니.. 누구라도 아직 초자연적 능력을 구하고 있다면, 이제 마귀의 슈퍼맨 바이러스를 극복하고 슈퍼맨 망상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진심으로 바란다.

참고자료:

DNA 활성화를 통해 신인(God-man)으로 태어나다<<

Who Wants to be a god?<<

p.s.

다음은 슈퍼맨 캐릭터들의 이미지에서 보이는 거슬리는 부분들이다. 신비종교 냄새가 나지 않는가?

     [뱀을 연상시키는 S자]               [손가락 사인]           [펜타그램과 양날개]

 

[출처] 영적 전염병: 슈퍼맨 망상 신드롬|작성자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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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태양흑점 왜 줄었나 했더니 “자기흐름 빨라진 탓” (0)
BY 오철우   l  2010.03.18

자기의 흐름이 빨라지면?>    

 미국 연구팀, 태양관측 SOHO 위성의 13년치 관측자료 분석

 자기 흐름의 ‘거대 컨베이어 벨트’, 흑점 생성 좌우하는 새로운 힘으로 주목

 다음 태양주기와 우주날씨 예측에 중요한 ‘선행지표’로 활용 기대




sun_nasa

태양의 자기력 요동으로 태양 표면에서는 흑점, 폭발(플레어) 같은 여러 현상들이 늘 나타난다. 자외선 촬영. 출처: 미국항공우주국(NASA)



강력한 자기력의 요동과 거대한 핵융합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태양의 활동에도 여러 주기들이 나타나며,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게 ‘11년 주기’다. 강한 자기력 다발이 모여 검게 비치는 태양 흑점은 지구 자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데, 그런 태양흑점의 수는 대체로 11년마다 극대·극소기를 거듭하며 나타나기에 ‘11년 주기’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번 태양 주기에선 과학자들의 애초 예측보다 15개월이나 늘어난 기나긴 극소기가 나타났다.  


이런 태양 활동의 침체는 학계에서도 여러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11년 주기의 말미에는 태양흑점 수가 크게 줄어드는 극소기가 나타나는데, 지난번 주기(제23주기)에선 극소기가 너무 길어지면서 새로운 24주기의 시작도 예상보다 훨씬 늦춰졌지요. 23주기의 극소기가 왜 이리 길었는지, 극소기를 마치고 새로운 24주기가 시작되긴 한 것인지 한동안 이 분야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한국천문연구원 태양우주환경연구그룹의 조경석 박사는 “대중매체에서도 관심사가 됐지만 학계에서도 궁금증은 컸다”며 이렇게 말했다.



적도에서 극지로 자기력 실어나르는 ‘거대 컨베이어 벨트’


‘무엇이 태양 흑점의 주기를 좌우했는가’라는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만한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근호에 실린 논문1) 에서, 미국항공우주국(NASA) 마샬우주비행센터의 데이비드 해서웨이 박사와 테네스주 멤피스대학의 리사 라이트마이어 박사는 태양 표면에서 흘러가는 이온화 가스(’플라스마’)의 속도는 변화하며 그 속도가 매우 빨라질 때 이런 흐름은 태양 흑점의 생성을 저지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sunconvey_nasa

이온화 가스의 흐름은 자기를 극 지역으로 실어날라 태양흑점 생성에 기여하는 '컨베이어벨트'의 구실을 한다. 출처: 미국항공우주국(NASA)


이런 결론은 미국항공우주국과 유럽우주국(ESA)이 함께 쏘아올린 태양 관측위성 ‘소호’(SOHO)가 지난 13년(1996~2009) 동안태양 표면에서 일어난 이온화 가스의 흐름을 추적한 대량의 관측 데이터를 분석한 데에서 나왔다.


연구자들의 분석을 보면, 태양 표면에서는 적도에서 극 쪽으로 이온화 가스들이 흘러갔다가 다시 표면 아래로 내려가 되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식의 자기 흐름이 나타나는데, 특이하게도 태양 흑점의 수가 적은 시기에 앞서 그 표면의 흐름이 빨라지는 ’상관성’을 보여주었다. 나사가 낸 보도자료에서, 해서웨이 박사는 “이런 현상이 지난 태양 주기 때 보았던 이례적으로 저조한 극소기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본다”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 순환 모델에 도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태양 표면에서 일어나는 자기 흐름의 평균 속도는 태양 흑점의 수가 정점에 이른 2000~2001년에 시속 30㎞가량이었던 것이 태양 흑점의 극소기인 2008~2009년에는 시속 47㎞로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태양 활동 활발·침체 가늠하는 ’징후’로 활용될까?  


조경석 박사는 “태양 적도에서 극지로 향해 움직이는 자기의 흐름이 빨라지면 극지의 자기력이 약해지고, 그 영향으로 흑점의 생성과 이동을 저지하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이번 연구팀의 결론”이라고 말했다. 흑점은 흔히 자기력이 다발로 모이는 극지 부근에서 작은 규모로 생성돼 점차 적도 쪽으로 나아가는 운동의 궤적을 나타내는데, 컨베이어 벨트의 자기 흐름이 빨라지면 태양 흑점을 만들어낼만한 세기의 자기력이 다발로 모이지 못하고 흩어지기 때문에 흑점 생성이 저해되는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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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표된 이번 태양활동의 제24주기(2009년 초 이후) 예측. 출처: 미국항공우주국(NASA)


이번 연구결과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난 태양 주기 때 모두가 궁금해했던 이례적인 태양활동 침체의 원인을 설명해주는 새로운 분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 흐름(이온화 가스의 흐름)의 속도 변화가 뒤이어 나타날 태양 활동의 수준을 미리 가늠해주는 ’선행지표’로 활용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만일 태양 표면의 자기 흐름이 빨라지는 것으로 관측된다면 태양 흑점의 활동도 저조할 것이며, 극소기의 기간도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양 흑점 수가 많아질 때에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나 자기 요동을 일으키고 고에너지 입자들을 뿜어내는 태양풍을 만들어내어 지상의 민감한 전자기기와 지구 궤도 위성 장치들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에, 태양 활동의 새로운 예측 기법은 요즘 주목받고 있는 우주 기상 관측 분야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더 근본적 물음: ‘그럼 무엇이 자기 흐름을 빠르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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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나사는 "올해 2월에 쏘아올린 위성 SDO가 태양 내부(최대 20만km 깊이)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컨베이어 벨트 식 흐름을 좀더 자세히 관측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미국항공우주국

하지만 근본적인 물음은 다 풀리지 않았다. 태양 표면에서 자기 흐름이 빨라졌다면 그 흐름의 속도를 높인 요인은 무엇이냐는 물음은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다. 조경석 박사는 “태양 표면의 자기 흐름이 무엇 때문에 빨라지는지 그 근본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지만 이런 새로운 현상이 자세히 관측된 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며 “다음번 태양 주기가 얼나마 오래 지속될지, 얼마나 세게 나타날지 보여주는 선행지표로서 이번 새로운 관측 결과가 활용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논문을 실은 <사이언스>는 해설 뉴스에서 “이번 연구성과가 기후 연구자들한테는 더 정밀한 기후 모델을 만드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요즘의 태양 흑점 활동은 어떤지도 궁금해졌다. 이와 관련해 조 박사는 “태양 활동은 이미 바닥을 치고 극소기를 벗어나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며 “최근 관측에서도 태양 흑점들이 여럿 보이고 있으며 태양 표면의 대규모 폭발(플레어)도 관측된 바 있다”고 말했다. 미국 나사 쪽은 새로운 태양 주기(24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해선 극소기가 끝나고 3년가량 지나야 신뢰할 수 있는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면서, 현재로선 이번 주기의 극대기가 2013년 6월께 나타날 것이며 기간은 지난 주기 때보다 더 짧아질 것으로 보인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 태양흑점은  고대에도 알려졌으나 처음으로 정밀 관측을 시작한 사람은 17세기 갈릴레오였다. 그는 자신의 천체관측용 망원경에다 아주 어두운 필터를 달아 흑점에 나타나는 변화를 자세히 관측했다.   현대 과학으로 보면, 흑점은 태양 내부에서 바깥으로 뚫고나온 일종의 강한 자기력 덩어리 또는 다발이다. 지구 자기장의 1만 배 정도나 된다. 흑점에는 지구보다 작은 것부터 10배 이상 큰 것도 있다. 이 강력한 자기장 지역의 온도는 다른 표면의 온도인 섭씨 6천도보다 낮은 4천도 정도라, 지상에선 어둡게 보이기에 ‘흑점’이란 이름을 얻었다.  흑점이 나타날 때엔 태양의 활동도 활발해지는데, 태양 폭발은 강력한 자기장의 에너지가 빛이나 운동에너지로 바뀌면서 일어난다. 초대형 폭발은 수소폭탄 100만개가 터지는 것과 맞먹을 정도. 대개 강한 전자와 양성자 같은 무수한 고에너지 입자들을 뿜어낸다. 흑점의 강한 자기장은 20세기 초에 규명됐다.



▲스님시절 학생회와 함께

1. 들어가는 말


불교(佛敎)에서는 인생의 삶을 <일체개고(苦)>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일체개고의 원인이 욕망(慾望:번뇌)이라고 생각하고, <욕망(慾望)을 버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욕망과 번뇌 망상에서 존재의 일체개고가 근원이 되므로 그것을 버릴 때, 끊을 때, 불교의 구원이며 해탈 세계인 열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부단히 추구해 온 해탈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밝혀내는 일(자각)입니다.

미혹(迷惑:욕망)의 세계에 있는 윤회에서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 구원의 지향점입니다. 인도에서 윤회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초기 우파니샤드문헌이 최초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달세계로 들어가 이 세상의 선업(善業)의 과보를 누린 뒤에 비가 되어 지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물로 인간에게 섭취되어 정자가 되었다가 여성의 태내로 들어가 새로운 신체로서 재생(再生)한다는 것입니다. 윤회의 근본은 욕망이므로 욕망이 없어지면 윤회의 세계에서 해탈되어 불교의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할 인간을 죄에서부터 구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죄로 인하여 죽은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죄 사함으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불교가 말하는 욕망(慾望)에서의 구원과 기독교가 말하는 죄(罪)에서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불교의 욕망(慾望)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세계관(世界觀) 또는 인생관(人生觀)의 기본은 <윤회>입니다. 윤회(輪廻)는 생사윤회 또는 생사윤전(生死輪轉)이라고도 하며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의 반복을 말합니다. 불교는 생사윤회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윤회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이나 집착(執着)을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을 세상과 연결시키고 또는 세상에 태어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욕망과 집착을 끊는다면 더 이상 생사윤회 세계에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 불교의 욕망(慾望)의 종류
불교는 생사윤회의 근본을 욕망으로 봅니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고”,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교의 존재의 근본인 욕망의 종류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업보(業報)입니다.

업(業)이란 산스크리트어로는 카르마(karman)인데 그 뜻은 조작, 행위, 소작,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의미합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현세에 좋은 행위를 하면 내세에 좋은 과보(果報)가 있고, 나쁜 짓을 하면 나쁜 과보가 있다고 믿어졌었습니다. 그리고 현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은 전생(前生)의 선업이나 악업의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선악의 행위는 어떤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런 업의 힘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존속하여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업(嶪)에 기인하는 윤회사상이 생겨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업(業)은 윤회하는 세력의 힘이 되고, 이 업(業)은 신체가 짓는 신업(身業), 입에서 출발하는 구업(口業),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업(意業)의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사바의 모든 중생들이 자기가 몸으로, 마음으로, 언어로 지은 업력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계(三界)에 걸쳐 무한히 계속되는 생사(生死)윤회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축생, 인간, 천계 등으로 태어난다고도 합니다. 물론 천계(天界)의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좋은 과보도 있지만, 그렇다고 천계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윤회의 관념(觀念)은 불교 특유의 것은 아니며,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이미 인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 또는 인생관(人生觀)이었습니다.

불교(佛敎)에서는 윤회의 주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실체가 아니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적 존재로 봅니다. 전생의 업(業)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규정하고, 현세의 업(業)에 따라 미래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윤회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그것이 영혼이라고 하면 이해가 갈 것이나, 그들은 원래 기독교적인 영혼을 인정치 않습니다.

어느 날 아난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유(有:존재)라는 것은 어떤 범위로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스승 석가모니는 “아난이여! 만일 미래의 과보를 받을 업(業)이 없다면 미래라는 존재가 나타날까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난이여! 그러므로 업(業)은 인(因)이고, 식(識)은 종자이며, 갈애(渴愛)는 물이며, 무명(無明)에 덮이고 갈애에 결박되어 중생들의 미래의 재생과 전생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불교는 이 업(業)을 도와 고통[존재]의 과보를 낳게 하는 것으로 다름 아닌 미혹(迷惑)이라고 합니다. 또 이것을 다른 말로 번뇌(煩惱)라고도 말합니다.

(2) 번뇌(煩惱)입니다.

번뇌(煩惱)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크레샤(k1esa), 곧 <마음을 더럽히는 것>, <상처주는 것>, <괴롭히는 것>등 미혹하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범죄행위를 하게 된다면 그 원동력이란 선악을 가리지 못하는 마음의 미혹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번뇌에 의해 업(業)을 짓게 되며, 업의 힘으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는데, 이러한 과정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게 하여 미혹의 세계에서 헤매게 하는 근본번뇌(根本煩惱)를 탐, 진, 치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① 탐(貪)-<탐욕(貪慾)>이라고도 번역됩니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집착, 탐심, 욕망입니다. 혹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활동 내지 그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진(嗔)-<진애>라고도 번역되고, <탐>과는 반대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혐오, 기피이며, 분노이기도 합니다. 혹은 “싫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활동 내지 그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③ 치(癡)-십이연기의 처음에 놓입니다. <무명>과 동의어이며, 제행무상 등의 진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근본적 무지>라고도 할 만한 것입니다. 앞의 탐과 진도 사실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번뇌는 가장 기본적인 번뇌라고 합니다. 불교는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삼계와 육도의 윤회 궤도에서 탈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3) 무명(無明)입니다.

무명(無明)이란 범어로 avida로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불여실지견을 말합니다. 즉 진리에 눈뜨지 못하고 사물에 통달하지 못해서 사물과 현상의 도리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없는 정신 상태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인간의 마음을 상술한 욕망(갈애)은 형편에 따라 세 가지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올바른 동작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12연기설을 보면 인간의 존재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명성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역으로 무명이 멸하여지면 곧 노사(老死)의 세계가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시불교에서는 이 무명을 과거의 지은 업력이 무지 즉, 맹목적인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진여자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근본불각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의하면 “하나인 진리를 잘 알지 못함으로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며 홀연히 생각이 일어남으로 무명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무명은 하나의 충동력 또는 생사의 발동력 즉 맹목적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혜의 결핍으로 온다고 하여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명은 불(佛)을 덮는 번뇌(煩惱)를 일으켜, 인간의 존재인 12연기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불교의 욕망(慾望)으로부터 구원자는 누구인가?

기독교가 죄에서 구원받는 종교라면 불교는 욕망으로부터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즉 생사윤회로부터 해탈되는 무생(無生)무사(無死)인 생사환멸연기에 이루는 것입니다. 불교는 욕망으로부터 해탈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에서 해탈하려면 그것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는 이론이 성립됩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서 욕망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무한한 행복을 욕망하면서 다른 한편 사욕의 만족을 욕구한다고 봅니다. 완전한 생의 만족을 이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감관(感官)의 욕망이 크면 클수록 내적 모순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적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서 감관의 욕망이 완전히 제거 되었다고 하여도 이성의 욕구가 만족하지 못 한한 완전히 해탈(解脫)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에서 해탈 하고자면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욕망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욕망으로부터 구원의 세계인 해탈하기 위해서는 십계명과 팔정도를 실천을 강조합니다. 십계명은 욕망을 제거를 위한 소극적인 면으로써 감관(感官)의 욕망(욕구)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계명이고, 욕망의 제거에 적극적인 면을 보이는 욕망의 소멸과 동시에 이성의 충족을 목적으로 이여 요구 되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석가 출가 원인이 바로 “인생의 생존가운데서 겪는 생,노,병,사의 존재을 절실히 느껴 이것을 벗어나고자 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석가는 인생의 존재의 그 원인을 자아(自我)를 위한 욕망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제거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하였습니다.

1) 욕망에서 구원자는 자신 본인이 구원자가 됩니다.

석가모니는 인간(人間)의 본질을 생명에다 두면서 이것이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마음(心)과 사랑(意) 식별(識別)이라 불렀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맹목적 갈애>를 본질로 욕망으로 가득 차있고. 이 무명 때문에 탐욕으로부터 백팔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108번뇌의 근원은 무명 즉 무지인데, 이 무명의 한 생각이 홀연 일어나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을 움직이고 다음으로 이 업(業)으로 말미암아 일체고(一體苦)를 받게 되나니 이렇듯 인생은 삼업(三業)의 무한한 순환으로 마치 다람쥐가 채 바퀴 돌리듯 삼계육도를 윤회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상(理想)세계는 윤회전생의 근원인 번뇌[미혹], 업[욕망]을 끊고, 고통의 존재가 멸하는 곳, 깨달음의 세계, 즉 열반을 이루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이란 일반적으로 불교가 신앙하고 소망하는 최고의 경지, 구원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불교는 욕망(慾望)으로부터 구원받아 ‘해탈’, ‘열반’에 이르는 방법론에서는 어떤 실체적인 하나님이나 신들에 의해 구원(救援)을 받는 것이 아니고, 심리학적 자기수양이라는 엄격한 통제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은 그 자신(自身)의 구원(救援)자입니다. 인간은 그 자신의 힘과 자신으로부터 욕망을 제거하는 것을 향한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이 불교의 구원론입니다.

결론적으로 불교의 구원의 완성은 욕망의 근원인 생명의 소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완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가 욕망(慾望)의 소멸을 구하는 반면에, 기독교(基督敎)는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욕망(慾望)의 만족을 계획합니다. “다스리라”, “정복하라”,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거룩한 욕망(慾望)을 완성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온 것은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4. 기독교의 죄(罪)란 무엇인가?

불교(佛敎)에서 인간을 <일체고>라고 규정하고 고통의 세계에서의 탈출인 해탈사상, 열반사상을 가르친다면 기독교(基督敎)는 인간을 죄(罪)인으로 규정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죄(罪)인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죄인(罪人)으로서 선언합니다. 이런 선언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죄(罪)로부터 자유와 해방, 여기에 죄를 묻는 근본적인 목적과 의의가 있습니다. 죄를 묻는 본뜻은 죄 그 자체를 밝히는 데만 있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을 구원시키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罪人)이라는 규정은 인간의 구원(救援)의 전제조건입니다.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에서 구원을 지향합니다. 기독교가 구원(救援)의 종교(宗敎)라면, 인간의 죄(罪)를 묻는 것은 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묻기 전에, 먼저 죄(罪)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罪)라고 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법률적인 쪽, 윤리․도덕적인 쪽, 사회․경제적인 쪽, 그리고 종교적인 쪽이 그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지금부터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罪)의 개념을 검토해 보기로 합니다.

(1) 기독교의 죄(罪)의 정의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죄(罪)의 본뜻을 <불신앙>이라 합니다. 죄의 물음을 반도덕적인 행위에 국한시키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불신앙이란 <신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신에 대한 불신앙이란 단순히 교회에서 말하는, 신에 관한 교리 따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신에게서 전인적으로 떠나 있는 상태나, 신의 뜻을 어긴 행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앙이란 신에 대한 지식, 이를테면 신은 하늘․땅을 지은 창조주라든가 신은 전지전능한 절대자라든가 하는 것과 같은 신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신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罪)란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 곧 성경에서 죄(罪)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죄(罪)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성경소요리문답 14에 “죄(罪)가 무엇이뇨?”란 대답에 “하나님의 법(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이다.”라고 정의(正意)하고 있습니다.

롬4:15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고 했으며, 또 요일3:4에서는 “죄(罪)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 없는 상태로 창조(創造)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축복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말씀 하셨습니다. 바울은 롬5: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罪)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사망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基督敎)의 구원(久遠)이란 “죄(罪)로 인하여 죽은 영혼(靈魂)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1:21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말하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했습니다.

(2) 기독교의 죄(罪)의 종류

성경에서는 세상의 많은 죄(罪)를 크게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罪)”의 두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요일5:16].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죄(罪)라고 말한 근본적인 죄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죄(罪)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중심의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의 죄(罪)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는 인간관계에서의 윤리적인 죄를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회개하고 죄의 가지를 잘라도 근본적인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죄의 뿌리가 뽑아져 가지의 죄들은 저절로 말라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가 있습니다.

①원죄(原罪)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죄악에 떨어진 사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인류는 필연적으로 조상이 저지른 죄의 값을 짊어지고 살아야하는 운명에 처했으며,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그 원죄로 말미암아 아무리 죄를 짓지 않고 올바로 살아보려 해도 죄의 인자가 있기에 사는 것 자체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했습니다.

요일 1:8에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 성도가 죄인(罪人)인가 하면 성도는 죄인(罪人)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김씨의 자손이 김씨이듯 죄인(罪人)의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罪人)입니다. 성경은 죄(罪)의 근원을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罪)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죄악 가운데 출생하는 원죄를 지닌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인간은 죄악에 오염된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시51:5에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다윗이 잉태되는 과정에서부터 원죄로 인하여 오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갓난아이라도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죄가 없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며 그 이유는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요한1서 1:8)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②자범죄(自犯罪)란 무엇인가?
죄(罪)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덕에 반대되는 악한 행위” 또는 “형벌 받을 불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사람은 양심의 법을 어기고 규율을 파괴하는 등 법을 범하면 죄의식을 느끼곤 합니다. 자범죄[실제적 죄]란 몸을 통하여 행해진 외적 행위들 뿐 아니라, 원죄에서 유래하는 모든 의식적인 사유와 의지를 가리킵니다. 결국 원죄(原罪)는 하나지만 자범죄는 다양합니다. 자범죄(自犯罪)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적인 의심이나 악한 계획 또는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특별한 의식적인 욕망과 탐욕 같은 내적인 자질을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속임, 도둑질, 간음, 살인 등과 같이 외적인 행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짓는 범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③죄(罪)의 결과 죽음
기독교의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잘못된 수직적 관계의 결과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고통, 질병, 죽음이 모두 인간이 타락한 상태인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엡2: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고, 롬 3:23에는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죄의 결과로 죽게 된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5. 기독교의 죄(罪)로부터 구원자는 누구인가?

성도가 신앙고백에서 죄(罪)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告白)하는데 그러면 누가 죄(罪)를 사하여 주시는가? 죄(罪)는 성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하여 주십니다. 불교(佛敎)의 석가모니는 윤회(輪廻)로부터 해탈(열반)하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慾望)이나 집착(執着)을 불자 스스로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신을 세상과 연결시키고 또 세상에 태어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욕망과 집착을 끊는다면 더 이상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는 죄(罪)로 인해 죽었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막2:5에 침상에 누운 채로 들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소자야 네 죄(罪)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들이 참담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罪)를 사하여 주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으로 하는 말을 아시고. 막2:10절에 “인자가 땅에서 죄(罪)를 사하여 주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셨습니다. 곧 죄(罪)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만이 사하여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罪)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15:3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1:4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 사함의 근거인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구원론입니다. 롬10: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그 신앙고백이 바로 죄 문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갈2:16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라고 하면서, 예수 외에는 죄(罪) 사함을 받을 길이 없음을 말합니다. 예수 외에는 그 어디를 가서 죄(罪)를 뉘우치고 공덕을 쌓고 선을 행한다고 해도 구원(救援)의 길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불교와 같은 인간의 노력이 0.1%도 첨가될 수 없습니다. 전적인 주님의 대속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피의 공로의 능력이 효력이 나에게 미치고 적용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죄(罪)를 사하여 주시는 분인 줄 알게 되면 그 앞에 나가 그에게 죄(罪)를 자복하고 회개해야합니다. 요일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며 회개를 강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 하지 않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세인들이 교회에서 밤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하며 우는 소리를 듣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밤마다 저렇게 우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기에 울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罪人)인지를 알기에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 나오는 말

기독교(基督敎)는 죄(罪)를 가지고는 천국(天國)에 들어갈 수가 없고, 불교(佛敎)는 욕망(慾望)을 가지고는 해탈(解脫)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인생은 하나도 없으며, 죄가 없는 인생은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죄(罪)사함을 받아야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죄(罪)사함을 받아야 성령을 내주하심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이 내주해야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욕망(慾望)의 불이 활활 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욕망(慾望)의 불이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사(生死)윤회(輪廻)가 계속 되고, 윤회가 계속 되는 한, 일체(一體)고통에서 해방을 가져 올 수 없고, 오직 자기 스스로 욕망[번뇌]을 제거함으로써 존재(存在)의 고통(苦痛)의 세계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현실에서의 고통을 현실에서 해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땅 위에 사는 존재이기에 고통을 속에 담으면서 욕망에 눈이 먼 인간이지만, 그 고통을 소멸하고 욕심의 초극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이상의 경지인 니르바나 열반(涅槃)세계는 기독교와 같이 실상 있는 세계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획득하려는 것입니다.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신비한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전능자(全能者)나 절대자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실의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마지막 유훈(遺訓) 가운데 “모든 것은 변한다, 너희 마음을 스승삼아 부처가 되라”는 말씀에는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즉 석가모니는 불교에서 고통의 문제가 되는 욕망(번뇌)에서 해탈은 각자의 인간의 능력에 있지 다른 유영(有靈) 무영(無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4~7)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9~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죄(罪)사함을 불교와 같이 인간의 노력으로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죄사함 받아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욕망의 세계에 해탈하기 위해서는 “너 스스로가 노력해야만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 종교의 구원받는 방법의 다른 점입니다.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

히브리인 랍비의 예언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예언, 곧 히브리인 랍비의 예언입니다.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것, 신앙생활의 참조 정도만 해야함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참된 예언은 신구약 66권 속에 있는 예언들 뿐입니다. (-목양연가 섬기미 - )

** 성경에 등장하는 숫자들이 의미가 있다 라는 것은 성경 연구가들은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다. 


유태 랍비들은 인간의 역사가 존속하는 기간을 6,000 년으로 보고 있다. 창조부터 6천년간이 인간의 시간이고 창조 때 처럼 7천년째의 천년은 메시야 통치에 의한 천년왕국기로 본다.


유태 히브리력으로는 2010년인 올해는 5770년이다. 그러므로 유태 랍비들에 의한 인간역사가 앞으로 지속될 시간은 230년이 남았다는 것이 되지만, ... 만일, 유태 히브리력이 고장난 히브리력이라면 ? 말이 달라진다.


헌데, 유태 히브리력이 고장난 히브리력이라는 주장이 여러 곳에서 나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성경예언가로 활동하는 J.R. 쳐치 목사가 설명하는 240년 오차설이다. 그는 히브리 달력이 몇 곳의 비의도적 실수와 의도적 고집으로 240년을 줄여 셈한 결과를 빚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240년 오차의 기준은, 1658년 영국의 제임스 어셔 주교가 그리스도의 탄생년이 BC4년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아담이 창조된 해를 BC4004년으로 한 계산에 근거했다. 거기 따르면 히브리의 정말 년도는 올해가 5770 + 240 = 6010년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탈무드 랍비들이 말하는 인간역사 6천년설을 넘어버린다.


히브리력은 360일을 일년으로 하고 신년은 대체로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9월이나 10월경에 든다.


1217년에 죽은 독일의 탁월한 랍비 유다 벤 사무엘은 예루살렘의 회복에 관해 정확하게 맞추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오스만에게 8번의 회년을 지배당하고 난 후 한번의 회년동안 주인없이 지내다가 예루살렘으로 속량된다는 내용이었고, 실제 예루살렘은 오스만에 1517년 점령당하고 1917년 오스만이 물러났다. 또 오스만이 물러나고 50년동안 영국과 요르단 아래 있었고 정확히 50년만인 1967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영국은 유태 화학자이자 시오니스트 회장인 와이즈만이 발명한 아세톤 제조법 덕분에 적보다 많은 화약확보에 성공하면서 패색이던 전쟁을 승리로 바꾸게 되고 그 보답으로 1917년11월 벨푸어 선언을 와이즈만과 유태민족에게 약속했고 그 약속은 1920년2월 런던에서 모인 참전국 회의, 4월 산 레모(이태리)에서 열린 영, 프,러,이 4자회의에서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들에게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 전역 (지금의 요르단까지 포함한)에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하기로 약속했고 그 선언을 53개국이 승인하면서 영국에게 이스라엘 국가설립의 조건 하에 팔레스타인 점령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만일 영국이 이스라엘 국가 설립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국제사회는 영국 단독에게 팔레스타인 점령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은 1920년 국제사회에서 미래이스라엘 국가 설립을 조건으로 팔레스타인 임시 점령을 인정받으면서 - 영국은 당시 수에즈 운하와 인도 통치 때문에 교두보인 팔레스타인이 절실히 필요했다. - 동시에 이면으로는 이스라엘 정착민을 살해하여 에티오피아로 추방된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를 다시 불러들이고 그 테러범에게 무슬림 자치회의 의장 및 무슬림 승려 최고직을 맡겼다.


알 후세이니의 유태인 전문 테러, 살해에 대해 영국군을 지원, 돕고 부추기면서, 정책적으로는 고토에 유태인들이 이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기 시작했는데, 그런 이유는, 단 하나,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인을 소수민족화 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의 지배를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영국 알렌비 장군의 예루살렘 진격은, 랍비 유다의 예언대로 히브리력으로 마카비 봉기[BC163]를 기념하는 하누카 [Kislev 26, 5678] 명절에 되어졌으며 총 한방 쏘지 않고 무혈입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1917년에 일차대전에 당시 지구 상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다 참전했다.


1917년과 1920년 거듭, 팔레스타인에다 유태민족의 이스라엘 독립국가를 세울 것이며 그리 해주기 위해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임시조치한다는 벨푸어 약속을 그때 그 참전국가들이 다 보증하였다. 게다가 그 땅은 지금처럼 형편없이 쪼그라든 크기가 아니라 요르단까지 포함된 팔레스타인 자치령 전체 - 현 이스라엘의 열배에 해당하는 - 를 유태민족에게 주기로 했던 약속이었다.


1차세계대전이 정말로 세계대전으로 시작된 날은 히브리력에서 Av월 제9일이다.[Av 9, 1914] 이 날 러시아와 독일이 1차대전에 비로소 참전함으로써 전쟁은 비로소 세계대전화한다.  Av는 히브리 일년 중 제 11월에 속한다. 특히 Av 제 9일은 유태인들이 고래부터 여호와의 심판과 결부지은 날이며 이 날 일어났던 사건들은 이와 같다.


1. 열두 가나안 정탐꾼들이 나쁜 보고서를 갖고 돌아온다.[BCE1435]

2. 솔로몬성전이 바벨론에게 파괴되다.[BCE 587]

3. 두번째 헤롯성전이 로마군에게 파괴되고 예루살렘에 소금이 뿌려진다.[CE71]

4. 로마에 저항해 일어난 바코바 반란군 성채 베타가 함락되었다.[BC133]

5. 1290년 영국에 거주하던 유태민족에게 에드워드 일세로부터 추방칙령이 떨어졌다. 이후 350년간 유태민족은 영국을 밟지 못했다.


랍비 유다 벤 사무엘의 예언은 이랬다.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된 상태로 예루살렘은 8회년을 지날 것이고 9번째 회년은 주인없이 지날 것이고 열번째 회년에는 이스라엘이 지배할 것이고 열한번째 회년에는 메시야가 오신다라고 하였다.


그 열한번째 회년이 되는 년도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1967년에 50년을 더한 2017년이다. 2017년에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이다.


거기에 하나 더 감안할 것이 있다.


"또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요한계시록6:12


이것을 개기일식과 개기월식 현상을 말함이라 보았을 때, 앞으로 올 개기일식과 개기 월식은 다음과 같다.


네 번의 월식이 일어날 예정일:

1. 2014년 4월 15일, 이스라엘 유월절 시작

2. 2014년10월8일 이스라엘 초막절 시작

3. 2015년4월4일, 이스라엘 유월절 시작

4. 2015년9월28일, 이스라엘 초막절 시작


이런 형태로 월식과 이스라엘 명절이 겹쳐 일어났던 전례:

1. 1967-1968년: 6일전쟁과 예루살렘 탈환 발생

2. 1949-1950: 이스라엘 독립 선포 발생


성경예언가로 알려진 J.R. 쳐치 목사에 의하면, 2008년9얼29일 새 안식년 주기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2015년에 끝난다.  즉 2014년부터 2015년에 걸쳐 히브리 달력으로 안식년 - 땅을 쉬게 하는 - 인 것인데 그것과 맞추고 이스라엘 유월절, 초막절과 맞추어 개기월식이 일어날 것이며 두 번의 개기일식도 일어난다고 하였다.


두 번의 개기일식이 일어날 예정일:

1. 2015년3월20일 - 아달월 29일 또는 니산월 1일

2. 2015년9얼13일 - 나팔절


니산월의 제 1일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첫 기념일이며 모세는 이 날 첫 장막을 세웠고 주의 영광이 내려왔다. 이 날에서 두 주 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서 들어가 출애굽 후 첫 추수를 거둔 날이다.


니산월에서 여섯 달 후인 티스리월 제 1일에는 유태민족은 로쉬 하사나, 나팔절을 지낸다.  이 날은 아담의 창조일, 출생일이기도 하다.


일식이 부분일식으로 일어난 경우가 근래 세 차례 발생했다.


1. 2008년8월1일 - 아브월 1일,

2. 2009년7월22일 - 아브월 1일.

3. 2010년7월11일 - 아브월 1일.


아브월 1일은 유태인이 애통으로 들어가는 달이다. (** "아브달이 시작되면, 우리 기쁨은 사라진다." 바벨론 탈무드) 아브월 1일은 아론이 죽은 날이기도 하다. 또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돌아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한 날이다.


본 필자가 발견한, 러시아(** 에스겔에서 곡으로 상징된)의 시리아와 군사협력, 특히 동지중해로 백해함대를 끌고 내려와 시리아 항구를 반영구조치 하고 주둔한 일이 시작된 것이 2008년8월중순의 일이고 그 8월1일이 이스라엘이 애통하는 아브월1일이 시작되었으며 그 날부터 부분일식이 거듭 아브월 시작과 맞추어  발생하고 있으며, 그럴 가능성 없을 것 같던 곡, 러시아가 남하를 그 달부터 시작했고 예루살렘과 반나절 거리로 남하했다. 이 사건을 알기 전, 본 필자는 에스겔38,39장 곡의 이스라엘 침략으로 글을 쓴 사실 있다. (**관련글] 데브카 보도- 러시아를 향한 부시의 경고 - 러시아 혹은 곡의 마지막 2008.8.15  / 러시아, 곡의 집단죽음, 그 집단 매장지 2008.8.16.  러시아 해군, 이스라엘 인근 지중해 진출 2008.8.25. )


에스겔은 러시아와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치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보화를 약탈하기 위해서라고 예언하는데,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에는 2009년정월, 빈약하던 땅에서 거대한 천연가스전이 하이파 앞에서 발견되었고 이어 성탄이브일, 텔아비브 근처에서 물량을 알 수 없는 유전 또한 발견되었다. 러시아가 탐낼 보물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BC4004년에 아담이 출생했다는 어셔 주교의 계산과 6천년을 인간의 한 주기로 본 탈무드 랍비들의 해석이 일치한다고 보았을 때, 인간의 끝, 즉, 심판과 천년왕국의 시작은 AD1996년으로 보아야 한다. 이 점 때문에 현대의 어떤 랍비는 구세주가 1997년에 올 것이란 예언을 내놓기도 했다.


히브리 달력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대한 연도상의 오차를 갖고 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해를 유태기록에 의하면 AM(창세후)3338년이다. 예루살렘함락은 서양력에서 BC586년이다. 3338년이 그래도 현재까지 이어졌다면 올해는 3338+586+2010로 단순계산하더라도 현재는 AM 5933, 4년이 되어야 맞다. 그러나 현 히브리력은 올해를 5770년으로 하였으므로 이 단순계산만으로도 167년 정도가 빈다.


쳐치 목사에 의하면, 현재 쓰이는 히브리 달력은 주후132-135년 일어났던 바코바반란에 적극 가담했던 랍비 아키바의 제자 랍비 코흐바에 의해 작성된 세데르 올람을 따른 것이고 랍비 코흐바는 스승이 메시야로 난의 주동자 바코바를 지목하고 그에게 야곱의 별이란 별칭까지 붙였던  뜻을 잇기 위해, 다니엘이 예언한 메시야 출현의 해가 바코바 반란의 해와 맞아지도록 할 의도로 적극적으로 페르시아 왕조의 시기를 대폭 줄여 세데르 올람을 작성했다고 하였다. (** 본 필자는 아직 다니엘이 예언한 날수 계산을 모르므로, 이 부분을 검증하지는 못한다.)


쳐치 목사에 따르면, 세데르 올람이 범한 또 한 가지의 실수는 아브라함을 데라가 몇 살에 낳았는가 하는 부분이다. 데라가 250세에 하란에서 죽자,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나안을 향해 출발한다. 그는 창세기12장4절을 이용하여, 데라가 아브라함을 낳은 것은 데라의 나이 70세가 아닌, 최소한 170세 경이라고 보았고 이리 되면 세데르 올람에서 누락한 년도는 데라의 60년 더하기 페르시아 왕조 154년으로  214.5년이 비며 그것을 더하면 올해의 히브리력은 대략 5984년 이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또, 아담창조년도가 BC4004년이라고 계산했던 어셔 주교의 계산에는 솔로몬성전과 헤롯성전건립과 년도차가 497년이라 하였고 세데르 올람에는 그것을 480년이라고 하였다. 이것까지 감안하면 6,000년은 이미 지나게 된다.


아뭏든, 현재 우리가 사는 시점이 탈무드 랍비들이 말하는 인간의 역사 육천년의 매우 임박하거나 거의 끝이 다 된 시기이고, 2017년이 이스라엘 독립에서 70년, 예루살렘 속량에서 50주년이 겹쳐지는 해이고 1217년의 랍비 유다 벤 사무엘이 예루살렘에 관해 여러 예언을 맞추면서 2017년 메시야가 온다라고 예언했다는 점과 2017년의 앞전해에 연달아 히브리력의 주요 명절과 겹치는 날에 개기일식, 개기월식들이 도합 여섯 차례 일어난다는 것. 천사(요한계시록)가 6번째 인을 뗄 때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가 된다는 것, 이것들 뿐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관해 성경이 예언한 많은 일들이 이미 속속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들 등, "그 날"이 가까워 졌다는 것이 여러 곳에서 보여지고 감지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날이 이르기 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일어나리라고 예언하셨고 그것은 아직 끝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 역시, 지구 위 있던 거의 전 나라들이 전쟁에 가담했던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으로 성취되어졌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리란 예언은, 한국동란, 베트남전쟁, 세르비아전쟁, 최근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후투족과 투치족의 전쟁, 무슬림 시아파와 수니파의 자살테러전쟁 들로 성취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 흐름으로 보아, 미구의 2차 한반도 전쟁 역시, 조만간 규모의 정도만 있을 뿐, 민족이 민족을 치는 전쟁으로 진실로 매우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사도행전2:20  -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긴 글을 쓴 오늘은 히브리력으로 테벳월20일이고 조금 전 저녁이 되며 21일로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테벳월20일은 구전율법에 속하던 바벨론 탈무드와 베라홋 탈무드가 이태리 손씨노에서 1483년 비로소 인쇄되었다고 나온다.


명심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다시 오시게 될 때는, 사람의 말 전달이나 방송보도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번개 치는 것을 알 듯이, - 번개 치는 것은 말로 전해 아는 것 아니다. - 그렇게 알게 된다라고 하셨다. 명심하고 기다릴 일이다. 다니엘9:27이 말한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오늘도 무르익어(?)가고 있다. 오바마의 두국가 설립안으로.


2010.1.07. 파아란 한은경.

 

배교(背敎)에 관한 단상(1)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배교는 진리에 반하는 가장 전형적인 종교 운동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명석한 목회자요, 뛰어난 칼빈주의 신학자로 평가되는 존 오웬(John Owen)는 “복음으로부터의 배교”(원제, Apostasy from the Gospel, 한국어 번역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로마 가톨릭이라는 당대의 보편 교회가 추구했던 은밀하면서도 전격적인 배교 현상을 매우 통찰력 있는 성경 언어와 신학 논리로 정확하게 규명한 바 있다.

오웬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신들의 배도를 정당화 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성령께서 사도들의 입술을 통해 예언한 배도의 네 가지 기본적인 경고들 - (1) 어그러진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목사와 교사들 중에서 일어날 것 (2) 양떼를 아끼지 않는 흉악한 이리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 (3)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 듣는 일을 싫어하여 진리로부터 돌아설 것 (4) 배도 현상은 가견(可見) 교회 전체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 - 이 자신의 시대 속에서 불의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하지만 교회 역사를 정직하게 대하는 성도는 그의 지적이 그 시대만을 향한 거룩한 슬픔이 아니었음을 안다. 배교는 교회 역사가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교회 안에 상시적으로 발생하였던 일이다. 사탄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진리를 거짓 것으로 속이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가장 유구하고 전형적인 진리에 반(反)하는 종교 운동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 드러난 배교의 실체와 음모

배교의 역사성과 지속성, 그리고 현실성에 대해 성경만큼 적확하게 언급하는 기록은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기억해 보라.

어느 민족보다도 확실한 구원의 은혜를 몸소 경험한 백성이었음에도 그들의 전체 역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한 반역과 배역으로 점철되어 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였던 다윗과 솔로몬의 왕정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배교는 그치지 않았다. 유대 왕국의 몇몇 선한 왕들과 느헤미야 때에 나타난 일시적인 신앙 부흥 운동을 제외한다면, 구약 시대는 곧 끊임없이 연속된 배교의 역사로 기억될만하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는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초기 공생애 사역은 겉으로는 성공적으로 보이는 듯 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거하시자 모두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순간에는 그의 열 두 명의 제자들마저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포기한 뭇 사람들과 함께 배교의 행렬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믿음에 관한 이런 형태의 배교는 마지막 때에 나타날 가장 일반적인 종교 현상이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예언은 그 분의 부활이후 수 세기에 걸쳐 전개된 초대교회의 현장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초대교회는 진리에 관한 한 순전한 교회 모델이라기보다는, 음험한 목적을 갖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짓 선생(목사)과 그들이 전파하는 다른 복음(교리)의 위력 앞에서 명목뿐인 교회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도들은 초대 교회의 배교라는 참담한 신앙적 현실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저주와 경계와 비판의 날을 세워 진리로부터 등을 돌리는 신앙의 무모함과 위험성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곧이어 진리의 편에 선 정통 교부들과 초대 변증가들의 생명을 건 순교 정신과 활기찬 논증 덕택에 배교의 큰 흐름이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지만, 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변형을 거듭한 배교의 물줄기는 세상으로부터의 이해와 동정, 비신앙적인 세력으로부터의 원조와 협력, 그리고 세속적인 사상으로부터의 지지와 호소와 한데 어울려 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범접하기 무서운 거대한 탁류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정통 신학과 교리를 포기한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 거친 배교의 물살에 몸을 내던지고 있다. 이처럼 배교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 걸쳐 항상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숨길 수 없는 교회의 영적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배교는 절대로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부분 복음과 부분 진리로 위장한 거짓 목회자나 거짓 성도에 의해 주도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꺼번에 절대 진리를 무너뜨리려 하는 대신, 주로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진리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허무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교는 구약 시대에는 이교도 사상과 영합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 활동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에 의해, 사도 시대에는 거짓 선생과 거짓 형제라 이름 하는 이들과 초대 교회 때는 영지주의와 같은 기독교 이단 그룹에 의해, 중세에는 교황을 위시한 로마 카톨릭 교역자들에 의해, 그리고 근세와 현대에는 자유주의와 은사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입으로 복음을 말하지만 순수 복음과는 상관없는 가르침을 펼치는 복음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과 그들의종교적 허세에 현혹된 성도들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분별하기 쉽지 않다. 이들은 보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으며, 외적으로는 경건과 학문적 배경이 견고하며, 신앙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노력이 남다른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때로는 보통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인격적이며, 그들의 말은 호소력과 설득력을 겸비하고 있으며, 사고와 논리역시 이성과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들”(마 7:15)이다. 이들은 성경을 방편삼아 성경을 속이는 자들이요, 진리의 명료함을 왜곡하는 자들이요, 참된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허무는 자들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진실한 성도에게 분명 배교는 기독교 신앙에 가장 강력한 적(敵)인 동시에 진리 사수를 위해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임을 잊지 말자(*).



 배교(背敎)에 관한 단상(2)

지난 학기(3월-7월) 동안, 필자가 섬기고 있는 연구회에서는 첫 번째 공개강좌 주제로 기독교 역사를 탐구할 기회를 가졌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의 장구한 교회 역사를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역사적 교훈이 있다.배교는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예나 지금이나 참된 교회와 참된 신앙을 훼손하는 가장 커다란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세대를 비교해 보더라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현대 교회보다 덜 심각해 하는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믿기 어렵다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설교나 서점가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라. 과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과 비교하여 신앙고백과 교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영적 분별과 안목을 중요시하며, 진리에 의한 바른 확신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자가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탁월한 성경 지식과 경건한 양심을 소유한 진리에 붙잡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의 평가는 이와 반대이다. 그토록 많은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활개치고 거짓 가르침이 유포되고 있지만, 진정 이들을 기독교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일성(一聲)조차 듣기 힘들다.

성경과 신학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날로 깊어지고, 세상과의 타협과 관용과 축복으로 포장된 안이한 평온주의가 복음의 핵심인양 증거되고 있어도 이것을 기독교 신앙의 위기로 여기는 성도들이 많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배교의 현실과 배후 세력

그럼에도 오늘날 배교라는 단어는 교회안에서조차 터부시되고 있다. 배교라는 말을 꺼내는 즉시, 몰인정하고 편협한 신앙인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배교라는 단어는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는 단어이다. 한국어 성경에는 ‘배도’(살후 2:3)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기도 한 이 말은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에서 유래된 것으로 ‘분리, 변절’(departure) 또는 ‘진리로부터 멀어짐’(falling away)을 의미한다. 배교자란 진리를 포기하거나 배반한 자를 가리킨다. 즉 배교란 본질적으로 진리 운동에 반하는 것으로 교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비성경적인 종교 현상이다.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이 같은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증해 준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중략) …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14:10-24 중 일부 구절).

이 말씀은 세상 끝에 나타날 일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답변이다. 예수님은 종말이 다가올수록 교회 안에서 배교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을 기정사실화 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배교 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하신 대상이다. 다름 아닌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신약 성경을 통해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수차례 주의할 것을 당부한 거짓 선생들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공략 목표로 삼는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를 미혹한다.

그러나 겉모습만으로는 이들의 정체를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들은 교묘한 위장술의 달인이며, 속임의 명수들이다. 교회의 부주의함과 성도의 연약함을 틈타서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다(유 4). 그리고 경건한 사도와 목사로, 교회의 헌신적인 일꾼으로 행세하며, 때로는 지극히 경건한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한다(고후 11:13-15). 능숙하게 성경을 다루며 사람들에게 호감과 신뢰를 받는다(갈 1:6). 그들의 입에서는 늘 평강의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의 심령에 만족을 주는 설교를 쏟아낸다(렘 6:14). 때로는 놀라운 표적과 신비한 기사를 행하여 수많은 동조자들을 모은다(마 24:24).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 존경할만한 지도자로 인정받기도 하고 그리스도처럼 높임을 받기도 한다(벧후 2:1).


배후 세력의 음모와 영적 전쟁의 승리 위한 기도

하지만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도 이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한 가지이다.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영적 자만과 방탕에 빠지게 하는 일이다. 그로써 교회와 성도가 진리와 무관하거나 혹은 진리에 반대편에 서도록 하는 것이다. 이들이 더욱 위협적이며 위험스러운 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기 때문이다(마 23:27).

이들은 진리를 가지고서 진리의 도를 훼방하며(벧후 2:2), 말씀을 거짓되게 해석하며(딤후 2:17), 허탄한 자랑으로서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며(벧후 2:18),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게 하며(약 1:14),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유 4). 또한 으뜸되기를 좋아하도록 하며(요삼 1:9), 육체의 현저한 일을 행하게 하며(갈 5:19-20),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며(딛 1:16),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킨다(롬 16:17).

우리는 어느 시대의 성도들보다도 이러한 배교의 현실을 더욱 분명하게 목도하고 있다.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진리의 대적자들과 변절자들의 유혹과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들과의 피할 수 없는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권면에 귀를 기울이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빌 1:9-10) 소원하는 사도의 기도가 우리의 영적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개혁신보(출처: 양무리 마을)

이방신화의 교정으로서의 창세기창조기사

 

 

진보적인 구약학자들은, 모세(라는 이름의 편집자)는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에서 창세기기록의 자료들을 빌려왔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여러 학자들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 사이에 있는 무시하지 못할 차잇점들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그 차잇점들을 설명하려고 해 왔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모세가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을 참고하면서도 그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관점인가를 교정해 주기 위해서 창세기1-3장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웃국가들에 대한 교육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한 교육이고 또한 변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취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는, Bruce K.Waltke G.F.Hasel같은 사람인데, 아래의 글은, Hasel The Evangelical Quarterly 45 (1974)에 실은 The Polemic Natrue of the Genesis Cosmology라는 글의 이 부분에 대한 욧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로님께서 올려놓으신, 이집트와 바벨론의 창조설화들을 참고해서, 이 욧점들을 읽으시면, 유익한 점이 있을 것 같아서, 간단히 스케치해 봅니다.

 

하젤박사는 하나님께서 교정의 의도를 가지셔서 모세에게 영감을 주셨음을 가리키는 몇가지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합니다.

 

첫째, 창세기1:2에 나오는 깊음이라는 단어는 터훔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서 바벨론신화의 혼동의 신인 티아맛이란 용어가 파생되어 나옵니다. 터훔이나 티아맛은 모두 큰 바다(ocean)를 나타내는 단어에서 파생된다고 합니다. 바벨론에서 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는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최초의 신이 바로 신입니다. , 짠 물(염수)신인, 티아맛(여신)맹 물(담수)신인 압수(남신)의 결합에 의해서 터훔이 발생하고 그 터훔에서 신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신들 중의 하나인 땅의 신(남신으로도 여신으로도 묘사됨) 에아(Ea)압수(맹물신-남신)을 죽이고 이에 화가 난 압수의 아내 티아맛이 모든 신들을 죽이려고 할 때, 땅신 에아는 자기의 맏아들신인 마르둑을 앞세워서 티아맛과 대적하게 하고, 결국 티아맛을 죽이고는 신들의 신으로 승격하게 된다는 것이 바벨론창조설화의 핵심입니다.

 

바벨론신화에서는 터훔(티아맛)이 신화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화를 일종의 비신화화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1장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터훔 위에 있고…”

 

어쩌면, 이런 비신화화(저는 일부러 불트만의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불트만의 비신화화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터훔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터훔의 신화적 성격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모세와 하나님의 의도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에 대해서, 아마도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아무도 놀라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이미 성경에서 전제하고 있는 삶의 정황(이런 단어를 쓴다고 해서,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바벨론사람들도 압수, 티아맛이니 하는 신들의 세계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용어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영향을 미쳤던 것이 고대근동사회였었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그들은 이런 맹물(담수-강물?)짠물(염수-바닷물?) 등이 살아있는 인격적 존재였었습니다. 그들의 도시생활을 지배했던 세력이고 힘이었고, 의식세계였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짠물짠물일 뿐이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12절입니다. 맹물맹물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 더 하젤의 말을 들어봅시다.

마침 하나로님께서 정우교수의 리워야단에 관한 글의 요지를 간단하게라도 올려주셨는데, 이것과 관련된 것이 바로 하젤교수의 두번째 욧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의 다섯번째 되는 기록에 큰 물고기가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원어로는 타니님으로 되어 있는데, 우가릿문서들에 등장하는, 창조신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은 이런 문서들의 기록에서 바다와 동등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위의 첫번째 욧점에서 압수티아맛강물이든 바닷물이든 모두 과 관련된 것을 보게 되고, 바다와 연관됩니다. , 혹은 바다라는 것, 혹은, 바다큰 물고기(타니님)들이 모두 신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우가릿문서들에서 나타나는, 곧 고대근동의 신화들에서 나타나는, 바로 이런 신적인 존재들로서의 타니님들이 이곳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창세기의 창조기사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11절에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하는 단어, 바라, 이곳 타니님창조를 나타내는데, 다시 등장합니다. 이들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류의 전투를 통해서, 승리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노력도 없이 말로서 간단하게 그런 타니님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1장의 기록의도라는 것입니다. 고대근동의 신화들과는 대조되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함으로서, 변증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젤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A polemic emphasis becomes transparent; the tanninim are aquatic creatures which were created by God; they are not pre-existent rivals of the Creator which needed to be conqured as in Canaanite mythology.(p.87).

 

이런 큰 물고기들(타니님), 김정우교수가 언급하는 리워야단으로, 혹은 현대과학에서 언급하는 공룡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 고대근동문화에 있어서, 태양이나 달 혹은 다른 별들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던 것은 너무나 흔하였던 것을 배경으로 하면서, 창세기116-19절에 나오는 궁창의 광명들에 대한 창조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바벨론설화에 있어서 태양신은 세메쉬라고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1장에서는 아예 태양에 대한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고 단순하게 광명이라고만 합니다. 이름조차 붙이지 않고 있는 이런 기술태도는, 모세 자신이 처한 삶의 정황 속에서 팽배해 있는 태양숭배나 달숭배를 얼마나 혐오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신들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태양숭배나 달숭배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숭배하는 노예적 삶에서, 해방될 수 있는 인식의 근거가 제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만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해방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바로미님이 질문하셨던, 이 창조기사와 회심이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묵상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네번째, 하젤은 말하기를, Inherent in the Biblical prersentation of the separation of heaven and earth is an animythical polemic. Separation takes palce without struggle whatever. It is achieved by divine fiat.(p.88)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둘째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어지게 하라는 기록이 바로 마르둑이 맹물(강물)여신인 티아맛의 몸을 둘로 나눠서 하늘 위의 바다를 만들었다는 식의 신화적 이해에 반대해서, 단순히 말씀으로서 그렇게 나눠지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창세기16-8절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욧점들이 고대바벨로니아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신화적 이해에 대한 반박과 참된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변증의 성격이 창세기1장기록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 하젤의 주장입니다. 이런 하젤의 주장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습니다(, Mary Wakeman, D.F.Payne, B.K.Waltke ).

 

이제 이집트의 창조설화를 모세의 삶의 정황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모세는 이집트왕궁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40살 때까지 교육을 받았으니, 이집트의 최고학문을 전수받기에 충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집트를 생각할 때, 현대적인 상황에서 거의 삼류급으로 전락되어 버린 이집트를 연상하면 안됩니다. 그 당시 최고의 정치적 세력이었고 또한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강대국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보수적인 견해를 취해서 모세를 BC 15세기라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모세 당시에 이미 인류의 7대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피라미드이나 스핑크스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런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앞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 추측해 보는 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지나쳐서, 모세의 종교는 바로 이집트종교의 모방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바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프로이드 같은 사람이 그의 마지막 책인, Moses and Monotheism에서 그런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프로이드는, 모세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집트인이었다는 허무맹랑한 추측을 하기도 했었지요.

 

이런 허무맹랑한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의 창조기사는 이런 이집트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반박하고 참된 종교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집트의 창조설화들이 여러 개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최소한 네 개가 있고, 각각 중심되는 신들이 그 연관된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들의 창조설이 진짜라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도시국가시대의 산물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 도시들과 신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Heliopolis(Atum, 훗날 Re신으로 변경통합됨), Memphis(Ptah), Mermopolis(Thoth), Esna(Khnum).

 

참으로 이집트는 신들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라는 말 자체가 이집프트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프타신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프타신이 이집트신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질 지 모르지만, 신들의 역할은, 그 도시들의 역할과 그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아몬(Amon)신이나 (Re, 혹은 Ra)신이 주요신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있습니다. 도시들의 흥망성쇠에 따라서 신들이 그 중요성을 띄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집트에서 모세가 교육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교육받을 당시에 이집트이집트가 아니라, 미츠라임(억압들, 긴장들)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이 이름은 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의 관점에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돌아보면서, 억압의 땅이라고 회상했을 법 합니다. 원래 이집트의 원주민들은 미츠라임이라고 부르지 않고, 프타신의 정원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집트로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언제부터 이런 이름으로 자신들을 불렀는지는 모름).

 

프타신의 정원에서 교육을 받은 모세의 정황을 고려할 때에, 프타신의 창조설화에 대해서 모세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능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살았을 그 당시의 궁전은, 프타신을 주신으로 삼고 있는 멤피스라기 보다는, 오히려, 테베(현대의 룩소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일강의 하류에 있는 멤피스와는 달리 테베는 상당히 중류로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전체적으로 통치하기가 보다 쉬운 여건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집트역사에 있어서 신왕국(the New Kingdom)이 시작된(B.C.1570년에 셈족인 힉소스족을 쫓아냄. 이 힉소스족은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후예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 확정할 수는 없음) 뒤의 얼마 뒤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테베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정보는, Roger L. Green이란 사람의 Ancient Egypt(1963년도 발간)라는 책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곳 테베에는 성경의 모세를 건진 바로의 딸로 알려진 하셋수트여왕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시신안치성전"가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 '시신안치성전'모습을 사진으로 올려둡니다.

 

 

 

이런 자료들을 참고할 때에 이 당시의 종교는 아문신과 신이 통합되어서 아문-신으로 불려지고 있던 때입니다(모세가 태어날 당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바로에 의해서 이스라엘노예들로 인해서 건축되었던 국고성들 중에 하나가 바로 라암셋(1:11)인데, 라암셋이 현대인이 흔히 알고 있는 람세스라는 이름입니다. 라신의 아들 혹은 라신으로부터 낳아진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람세스는 모세를 람세스의 친구로 묘사하는 현대의 십계라는 영화나, 프린스 오브 이집트 같은 만화영화, 혹은 람세스2의 주인공 람세스와는 이름만 같을 뿐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종교를 통해서 창세기1장이 선포되는 삶의 정황을 이해하려면, 하나로님께서 올려놓으신 프타신에 의한 멤피스중심의 창조설화보다는, 헬리오폴리스나 그 이후의 테베중심의, 라신과 아문신에 의한 창조설화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을 고센땅이 테베보다는 멤피스에 더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서, 멤피스중심의 프타신의 창조설화에 대해서도 여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만).

 

이들의 창조설화에 의하면, 태초에 혼동’(Nun혹은 Nu)이 있었는데, 혼동의 신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것이 바로 아툼’(Atum=Ra)이었다고 합니다. ‘아툼이라는 말 자체는, ‘not to be’ 혹은 ‘to be complete’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에서는 야훼의 의미를 ‘to be’와 관계시키는 것과 함께 고려한다면, 아주 의미심장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혼동의 혼동이라고 할 수 있는, ‘아툼신 안에 모든 존재하는 것의 원형이 들어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철학적인 개념입니다. 인도에서 ’(zero)의 개념의 형성되고, 그것이 중국철학의 ’()의 사상으로 발전되어가는 것과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양이 발생하기 이전의 태극과도 같은 개념이 바로 아툼인 것입니다. 원래는 비인격적인존재였는데, 인격화된 것이 아툼신입니다. 그리고 이 아툼신이 신과 경합하고 통합되어서 아툼-신이 되었습니다.

 

신은, 원래, ‘아툼신의 형태로, ‘혼동속의 연꽃봉오리’(the bud of a lotus)에 감싸여 있는 채로 있다가, 그렇게 있는 것이 지겨워서’(weary of), 스스로 일어나 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창조하려고 하는 생각에 다른 보조신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위’(masturbation)을 해서 Shu(하늘신-남성)Tefnut(습기의 신)을 낳고, ShuTefnut이 성관계를 가짐으로서 낳게 된 자녀들이 바로 땅의 신인 Geb과 하늘여신인 Nut을 낳습니다. 땅의 신 Geb과 하늘여신인 Nut를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섹스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신은 자위를 해서, ‘하늘신과 습기의 여신을 낳고, 이들의 섹스에 의해서 GebNut이란 신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의 섹스에 의해서, Horus, OsirisIsis, Set, Nephthys 모두 다섯명의 자녀신들을 5일간 연속해서 낳습니다. 그 당시 태음력이 지배하던 달력으로는 360일밖에 안되는데, 360일 외의 다른 날 5일 동안 낳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모두 365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신들의 섹스에 의해서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개념이 이 테베에서의 창조설화의 중심모티브가 됩니다. 이런 설화들을 들으면서 자랐던 것이 바로 모세였을 것입니다.

 

여기에 프타신의 창조설화는, 바로 혼동의 신아툼심장를 창조하였다는 것이 보태어집니다. 여기서 심장를 창조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심장의 기능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을 뱉아놓는 기능을 합니다. 그리고 심장은 그렇게 을 하기 위해서 생각하는 기능을 하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프타신은,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그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멤피스 가까운 곳에 있었던 고센땅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익숙했었을 이야기입니다. 이 프타신의 형상을 묘사해 놓은 것이 다음의 그림입니다.

 


특별히 이 프타신은, 장인과 직공들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와 만물을 생각창조한 그의 능력을 소망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숭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생각 속에도, 프타신이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의 을 지배하고 있는 이가 바로 프타신이라고 하는 생각 말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프타신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 아피스라는 이름의 황소입니다. 곧 이 아피스황소를 숭배하는 것은, 프타신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아피스황소'의 형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마도 눈치 빠르신 분들은 무릎을 치실 것입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아론과 이스라엘백성들은 왜 황금송아지를 숭배하였고,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끊임없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유혹하였던 우상숭배 중에서 바로 이 숭배였던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프타신의 현신인 것입니다. 이집프트의 신, 바로 프타신, 라신과 아툼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신의 현현이 바로 송아지, 혹은 소를 통해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윗그림의 소의 머리 위에 있는 원반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태양신 라와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타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신이었을까,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 신이었을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 신에 대한 심판과 비판, 혹은 극복을 호소하는 성경의 기록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태양의 신-라신의 원형인, 혼동의 신-아툼신, 그리고 그 아툼신의 심장을 창조한 프타신.

 

그 프타신을 심판하는 야훼 하나님.

 

이 심판의 기록이 바로 출애굽당시의 열가지 재앙 중에 다섯번째 재앙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병의 재앙이 그것입니다. 이 재앙에 의해서 모든 가축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아피스의 황소도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프타신이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이집트신화의 배경을 가지고 창세기1장으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출처: 양무리 마을


▲최종수 박사 (전 미 연합감리교 한인 선교감리사) "반 고흐의 성화를 통한 치유목회"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과 신학대학 뉴욕동문회, 연목회는 6월 28일(월) 오전 10시30분 뉴욕신광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열었다. 대뉴욕지구 한인목사회와 연세대학교 뉴욕동창회가 후원했다.

첫 강연은 최종수 박사 (전 미 연합감리교 한인 선교감리사)가 "반 고흐의 성화를 통한 치유목회"라는 독특한 주제로 강의를 했으며, 노순구 박사(구약신학전공, 리버데일 침례교회 담임)은 자신의 박사논문을 주제로 한 "신명기의 의문문"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고흐의 그림속에 숨겨진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보자.

명화를 모은 달력에서 아니면 우리의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접하는 그림 중의 하나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이다. 혹자는 고흐를 정신병자 또는 자살을 한 불운한 화가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고흐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는 개신교  신앙을 가졌지만 결국 개신교를 버렸던 화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그려야만, 예수님의 모습이 있어야만 성화는 아니다'라고 최목사는 말한다.

다음은 최목사가 말하는 '고흐 그림 다시보기' 강의 내용이다.

번역 일을 많이 하던 아주 우연한 기회에 헨리 나엘 신부가 고흐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엘 신부가 예일 대학에서 목회학 강의를 할 때 부교재로 쓰인 것이 고흐 그림의 슬라이드였고, 그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목회자가 가야할 길과 어떤 마음의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고흐의 그림에서 성처입은 치유자의 모습을 보거나 자기 성찰의 기회를 삼는 다는 것도 놀라왔지만 그림 안에 예수님의 모습과 나 자신의 모습을 볼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흐는 38세로 생을 마감하기 까지 총 2300 여편의 그림을 그렸다. 그 중 한편을 제외하고는 그의 그림은 생전에 돈으로 환산되지 못했다. 동생인 테흐 반 고흐가 그의 생활비를 지원했고, 그의 생활은 여동생과 테흐 반 고흐와 주고 받았던 편지로 엿볼 수 있는 정도이다. 지금은 그 편지들이 거의 고전으로 평가 받고 있기도 하다.

고흐와 그리스도를 접목한 내용을 담은 책들은 많지 않다. 나엘 목사가 'Confession' 이라는 책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언급하고 있지만 더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음이 무척 아쉽기도하다. 클립 에드워드가 'Gogh and God'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고흐를 칼벵주의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고흐의 성장 배경이 알메니즘 계통의 신학적 배경임을 내세워 썩 좋은 평을 하지는 않았다.

나엘 신부는 '고흐는 감리교 신앙에 뿌리를 둔, 가슴에서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을 갈구' 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실천적인 신학을 몸소 실천한 그리스도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 평한다.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거리의 여자였던 씨엘과 결혼하려 했다는 것, 화풍이 전체적으로 암울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귀를 자르는 기이한 행동과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들은 그를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는 무리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한 고흐의 극단적인 그리스도를 본받는 체험적인 행동들이 미친 신비주의자라는 평을 받기도했다.

변론 같지만 어떤 마음이면 씨엘과 결혼까지 생각 할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정신병자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우울증과 간질환자 였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평생 가난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면서까지 소외된 계층에 있고 싶어했고, 영양실조까지 걸리면서 남을 도우려 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마음이 읽혀진다.  또한 고흐만큼 많은 책을 읽은 화가도 드물다. 많은 그림들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 작가들의 면모를 볼수 있기도 하다.

초창기는 대체로 데생에 가까운 그림들이고 나중에 노란색 화풍으로 옮겨진다. 주변의 흔한 인물들이 그림의 대부문의 모델이며 인물화와 손을 사실적으로 많이 묘사하고 그렸다.

거실의 벽을 장식할만큼 편안한 그림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시대의 소외맏았던 계층의  수많은 눈빛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게 되고, 나를 보게 되며, 그가 반 미친 사람이 되어 쏟아 내고자 했던 상심한 자들의 영혼들의 슬픔이  절절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될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반 고흐의 작품들


▲반 고흐의 작품들


▲반 고흐의 작품들


▲반 고흐의 작품들


▲반 고흐의 작품들

출처: USA 아멘넷 기사
허정무호가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이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의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은 23일 새벽 3시 30분(한국시간) 남아공 더반 경기장에서 진행된 2010 남아공월드컵 나이지리아와의 B조 마지막 경기에서 이정수, 박주영이 골을 기록했지만 나이지리아 칼루 우체와 야쿠부 아이예그베니에 골을 내주는 등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가운데 2-2로 무승부를 거뒀다.

▲박주영 선수의 기도와 경기가 끝난후 기도

그러나 1승1무1패로 조 2위에 랭크, 1위 아르헨티나(3승)에 이어 조 2위로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한국은 오는 26일 넬슨 만델라베이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16강전에서 A조 1위 우루과이와 8강 진출을 다툰다.

경기 전 여러 경우의 수가 존재했지만 같은 시간 폴로크와네 피터 모카바 스타디움에서 진행된 B조의 아르헨티나-그리스전에서 아르헨티나가 2-0으로 승리함으로써 한국은 그리스(1승2패)를 따돌리게 됐다.

승리할 경우 양팀 모두에게 16강 기회가 있는 마지막 일전에서 양 팀은 한치의 물러남도 없는 승부를 펼쳤다. 결국 2-2 무승부로 승부를 가리지는 못했지만 부부젤라의 굉음속에 승리의 환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었다.

선 제골은 나이지리아의 몫이었다. 전반 12분 치디 오디야는 오른쪽 사이드 라인을 파고 들다가 문전 왼쪽으로 달려드는 우체를 발견하고 송곳 패스를 찔러줬다. 차두리가 우체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우체가 한발 먼저였다. 공을 이어 받은 우체는 지체 없이 슈팅을 날려 선제골을 기록했다.

선제골을 기록한 나이지리아는 더욱 기세를 올렸다. 전반 22분 우체의 프리킥 직접 슈팅도 위력적이었으며 전반 35분에는 우체가 정중앙에서 날린 슈팅이 오른쪽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져 나가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는 12일 그리스전 첫 골 상황과 거의 흡사했다. 한국 수비수의 맏형 이영표는 전반 37분 왼쪽 측면을 파고 들다가 상대 공격수 오바시의 파울을 유도해냈고 주심은 오바시에게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키커로 나선 것은 기성용. 심호흡을 가다듬을 기성용은 문전 앞으로 정확히 크로스를 올렸고 오른쪽 문전으로 파고들던 이정수는 헤딩으로 이를 이어 받으려했지만 이는 발을 맞고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들어갔다. 이정수는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월드컵 본선 3경기에서 2골을 기록, 한국 대표팀 선수중 최고의 골 결정력을 보이고 있다.

전 반을 1-1로 끝낸 한국은 후반들어 더욱 공세를 가했다. 그리고 후반 4분만에 박주영의 천금같은 역전골이 터져나왔다. 아르헨티나전에서 자책골을 기록하며 속앓이를 했던 박주영은 이날 상대 골키퍼 에니에아마가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환상 프리킥골을 터트리며 한국 축구대표팀의 16강 진출에 밑돌을 놨다.

이번 월드컵에서 염기훈과 함께 직접 슈팅이 가능한 지역에서 프리킥을 담당하고 있는 박주영은 후반 4분 PA 왼쪽 외곽에서 주어진 프리킥 찬스에 키커로 나섰다. 잠시 심호흡을 한 박주영은 지체 없이 공을 감아찼고 이는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정확히 빨려들어갔다. 이번 대회에서 많은 선방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에니에아마가 손을 뻗어봤지만 이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한국이 역전골을 기록한 뒤, 나이지리아는 필사적으로 공격에 나섰고 결정적인 위기가 닥쳤다. 후반 21분 나이지리아의 아일라는 한국 수비수들을 제치고 왼쪽으로 빠르게 드리블해 들어와 골키퍼 정성룡까지 제쳤다. 정성룡이 이미 넘어진 가운데 문전으로 다가선 야쿠부는 공을 잡고 골문으로 툭 차넣으려 했으나 이것이 골문을 살짝 비켜나갔다.

결정적인 위기를 넘겼지만 한국은 염기훈과 교체되어 들어간 김남일이 후반 24분 상대 공격수 오바시에게 반칙을 범하며 페널티킥을 내줬고 이를 야쿠부가 골로 연결, 또 다시 동점을 허용했다.

한국은 이후 후반 29분과 31분 각각 박지성과 이청용이 결정적인 찬스를 맞아 슈팅을 날렸지만 골로 연결되지 않았고 나이지리아 역시 후반 34분 마틴스가 정성룡까지 제친 완벽한 득점 상황에서 골을 놓치는 등 공방전을 계속하다 승부는 그대로 마무리 됐다.

ⓒ CBS 노컷뉴스
한 연예인 고 최XX 49재(四十九齋)가 5월 16일 오전 10시 30분 경기도 양평 갑산공원에서 기독교 예배로 조용히 진행 됐습니다. 신문 기사, TV방송 뉴스를 보면서 본인의 저서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어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고 최XX 누나도 똑 같은 장례예식은 기독교식으로 해놓고, 이방종교적인 49재란 이름으로 기독교 예배는 --뭔가 기독교적인 신앙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 하면서, 분명한 것은 기독교에는 죽은 자를 위한 49재(四十九齋)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1. 들어가는 말

불교(佛敎)의 의례에는 죽은 자를 위한 의례(儀禮)가 두드러지게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49재(四十九齋)입니다. 49재란 죽은 사람을 위해 음식을 바치며 정성을 들여 죽은 이의 명복(冥福)을 비는 천도재(遷度齊)를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재(齋)란 본래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업(業)을 깨끗이 하여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파생하여 법회 때 승려들이나 속세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가리키게 됩니다. 지금도 사찰에서는 법당에 있는 부처상 앞에 공양하는 것을 재(齋)라고 합니다.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재(齋)로는 살아 있는 자를 위한 예수재와 바로 죽은 사람을 위한 천도재인 49재(四十九齋)가 있습니다.

ㄱ. 재(齋 )란 무엇입니까?

49재(四十九齋)를 설명하기 전에 불교에서 말하는 재(齋)란 의미를 이해가 필요 합니다. 재(齋)란 몸과 입과 뜻을 정제(整齊)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교에서 행하는 49재(四十九齋) 백일재 성도재 같은 것이 모든 영혼과 산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밝히는 일이므로 불교에서는 불사일체를 재로 총칭한다. 인간들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행위를 삼업이라고 하는데 삼업을 바르게 가다듬어 다시는 나쁜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다짐으로 행하는 것이"재"의 본래의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게 공양하는 것을 "재"라고 하였으며 그 후에는 성대하게 불공드리는 것을 뜻하기 시작하여 요즘에는 죽은 이를 위하여 천도하는 법회를 흔히"재"라고 합니다,

재"에는 "부처님 오신날"이나 "성도일"등 봉축일에 올리는 축재(祝齋)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 그 넋이 천도되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천도재로 칠재, 사십구재, 백재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수계식과 결혼식 등에 올리는 "재"등 여러가지 의식의 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재"라 하면 죽은 이를 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특이한 "재"로 "예수재와 수육재"란 것이 있습니다, 예수재는 죽은 후에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살아있을 때 미리 딱아 주는"재"이며 수육재는 허공중에 흩어져 극락왕생을 못하고 떠도는 모든 망령(亡靈)을 천도하는 "재"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재(齋)에 대해서 한번 다시 설명하고자 합니다. 재란 '삼가다'라는 뜻으로 재를 지내는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언행을 삼가며 부정을 멀리하여 맑은 몸과 마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회를 열어 수행승이나 신도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 불공이나 공양, 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법회나 의식을 재라고 합니다.

나, 재(齋)의 종류

재(齋)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보면 성도재, 우란분재, 49재, 천도재, 수륙재, 예수재 등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재란 석가모니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음력 12월 8일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하는 의식이 아니고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찬탄하고 귀의하여 자신의 수행의지를 굳게 세워 재발심하고 더욱 열심히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정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수행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몸과 마음을 더욱 맑게 하고자 의식이지요.

둘째로 우란분재는 음력 7월 15일에 지옥이나 아귀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처님과 법력이 있는 수행자들에게 지극 정성으로 공양 올리어 대접하고 그 분들의 법력을 빌어 삼도고에 떨어진 인연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의식입니다.

셋째로는 49재(四十九齋)는 죽은 사람의 넋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로서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일곱 번에 걸쳐 49일 동안 행하는 의식입니다.불교의 내세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이생에서 지은 악업을 느끼고 후회하며 다음 생의 과보를 받습니다.그 동안에 죽은 자를 위해 인연 있는 산 사람들이 49재를 지내므로 해서 공덕을 지어 보태어 주어서 좀 더 좋은 곳으로 태어나고자 원하는 뜻으로 지내는 불공의식입니다. 이 49재(四十九齋)의 종류는 보통 1. 상주권공재 2. 대례왕공양재 3. 영산재 등이 있습니다.

넷째로는 천도재란 49재(四十九齋)가 대표적인 천도재이지만 그 외 죽은 지 100일 만에 100재와 1주년과 2주년에 지내는 소상재와 대상재라는 것도 있고 또 수시로 하는 천도재도 있습니다.이것은 죽은 자의 공덕(선업)이 부족하여 49일이나 삼년 안에 다음 생을 받아날 수 없는 영가의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수시로 천도재를 지낼 수 잇겠지요. 예를 들면 자손들의 꿈에 자주 죽은 자들의 모습이 보여 괴롭힘을 당한 다든지 조상이 죽고 난 후 자손들의 삶에 나쁜 일들이 자주 생겨 고통을 받는 다든지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천도재를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섯째로는 수륙재란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무주고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설하고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입니다.마지막으로 예수재로서 앞서의 재들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무주고혼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인대 비해 살아있는 동안에 미리 재를 올려 자신의 공덕을 쌓고 죽어서 극락왕생 하고자 하는 신앙에서 비롯된 의식입니다.이와 같은 재의 형태로 볼 때죽은 자들은 대부분 육도윤회를 하지만 그 중에는 육도윤회를 하지 못하는 영혼들도 많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은 정한 곳 없이 오도 가도 못하는 정처 없이 떠도는 불쌍한 영혼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어나 세상구경도 하기 전에 유산된 영아나 살아생전에 원한이나 미움이 사무쳐 죽어서도 풀리지 못하여 오도 가도 못하는 그런 영혼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이 들을 구제하기 위한 천도재도 있기 때문에 절에서는 수시로 재를 지낼 때도 있는 것입니다.

또 우란분재 같은 경우는 비록 윤회는 하였으나 지옥이나 아귀와 같은 곳에 떨어져 고통 받고 있는 조상이 있다면 불보살과 법력 있는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그 공덕으로 그들의 법력을 빌어 좀더 좋은 윤회(輪廻)처로 옮기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실 당시 목련제자와 관련된 일들로부터 시작된 재의식입니다. 이러한 모든 중생들의 행태는 자신이 짓는 업력에 기인하는 것들이지요. 업력이 있는 동안에는 윤회하고자 하는 힘을 가진 육신과 정신(마음)이 만들어져 한 개체를 이루고 그 업력의 힘을 발휘하고 그에 대응하는 응보를 받고 하며 살아갑니다.

2. 49재(四十九齋)의 의미

불교(佛敎)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49재(四十九齋)를 지내는 것이 자식 된 도리로서 최소한의 효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인들이 49재(四十九齋)를 지내는 이유는 사람이 죽은 후 후손들이 고인의 명복(冥福)을 비는 의례로써 돌아가신 날로부터 49일이 되는 날에 부처에게 공양하고 돌아가신 이에게 경전을 읽어줌으로써 망령(亡靈)이 지혜의 눈이 열려 좋은 곳으로 왕생(往生)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인도에서 창시된 종교입니다. 인도의 생사(生死)관을 보면 사후에는 생전에 지은 자업자득(自業自得)에 의해 죽은 영혼이 삼계육도에 윤회전생 한다고 합니다. 윤회의 과정을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로 이루어진다고 하며, 생유(生有)는 태어난 순간, 본유(本有)는 탄생에서 죽는 순간까지, 사유(死有)는 죽는 순간 그리고 중유(中有)는 죽어서 다음 생이 결정되기까지의 기간인 49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49재를 지내는 것은, 사람이 사망 후 매 7일째마다 일곱번 명부시왕들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재판을 하는데, 그래서 절에서 스님들은 사망 후 매 7일째마다 재를 올리고 마지막 날인 49일되는 날에는 고인을 위해서 온 가족과 친척들이 법당에 모여 극락세계로 천도하는 49재(四十九齋)를 지낸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매 7일째마다 한 번씩 재를 올리게 되는데 그것을 7회에 걸쳐 올립니다. 그러다 마지막 7번째로 드리는 재를 막재 또는 49재(四十九齋)라고 합니다. 보통 칠일마다 올리는 재는 간소하게 합니다. 마지막 49(7x7)일이 되는 일곱 번째 재는 49일 중 중유기간의 끝이고 다음 생을 결정하는 명부시왕의 판결 중에서도 가장 대표인 염라대왕이 심판을 한다는 날에 올리는 재입니다.

그러므로 49재(四十九齋)란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의식이며, 다른 말로 칠칠재(七七齋)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다음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중간기를 중유(中有)라 합니다. 따라서 중유(中有) 기간인 49(7x7)일 동안 죽은 이를 위해 지극하게 재를 지내게 되면 죽은 이의 악업이 소멸되어 좋은 곳으로 왕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백만 원, 또는 수천만 원을 주고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재를 치루는 것입니다.

3. 한국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죽음 후 중음 신(神)

한국무속신앙에서는 사람이 이 땅에서 한 생을 마감하면 육체는 소멸되기 시작하여 물질의 기본원소로 분해되어 우주공간 안으로 흩어진다는고 합니다. 그러나 무속신앙에서 사람은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 속에 혼(魂)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이 나가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혼(魂)은 정신, 영혼, 혼령, 혼백, 영가 등등으로 불러지는 유령체로, 육체의 여러 구멍 즉 머리꼭대기인 백회(百會)혈, 척추 끝과 항문사이인 장강(長强), 목뼈의 1번과 2번사이의 추돌 맥인 아문(瘂門)등 그 외의 여러 구멍을 통하여 빠져나오고, 그 후에는 자신을 담았던 혼령의 그릇인 육체가 썩기 시작하는데 시체 위 4.6미터~15미터 상공에서 49일 동안 머뭅니다. 이때의 존재를 사람도, 귀신도 아닌 중음신(神)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유령체의인중음신은 육체의 수명이 끝나자마자 바로 떠나 다른 곳의 집을 찾아서 우주 공간 안에 무엇이든지 전생(前生)의 업인(業因)에 따라 즉 직시 탄생을 하는 경우도 있고, 일주일 후에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49(=7x7)일 만에 정들었던 육체와 이별을 하는 것인데 그 중에 이승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크면 49일이 지나서도 다른 곳에서 탄생을 못하고 가족 주변을 맴돌며 영파를 보냅니다. 이런 현상을 흔히들 제사를 얻어먹지 못한다는 무주고혼이라고 합니다. 한국무속신앙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혼백이 중음기간인 49일 안에 좋은 곳으로 천도 받지 못하면 가족과 사람들에게 고통(우환)을 준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이 죽은 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국인은 중국에서 유교의 문화를 받아들여 사람이 죽을 때 음양(陰陽)으로 일컬어지는 기(氣)의 작용으로 생긴 혼백(魂魄)을 영혼으로 보고 있습니다. 혼(魂)과 백(魄)을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로 보는데 사람이 죽은 후 각각 하늘과 땅으로 흩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혼백은 기(氣)의 굴신(屈伸)인 귀(鬼)와 신(神)이 되어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장례의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처음으로 초혼(招魂)을 하는데 이것은 사자(死者)의 흐트러진 혼(魂)을 불러들인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이 평소에 입던 홑두루마기나 적삼의 옷깃을 잡고 마당에 나가 사자의 생시 이름을 부르며 돌아오라는 뜻으로 복, 복, 복(復)을 3번 부른 다음 그 옷을 시체에 덥고, “사자 밥”이라 해서 밥 세 그릇, 짚신 세 켤레, 동전 세 닢을 채반에 담아 대문 밖 옆에 놓습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날 아침에는 몸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데 이것을 염습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유교적인 상례는 크게 나누어, 1)초종(初終:죽음), 2)염습(殮襲:입관), 3)성복(成服:입관 후 상복을 입음), 4)장과 천구, 5)발인(發靷)과 반곡(反哭), 6)우제(虞祭)와 졸곡(卒哭), 7)부고와 소상 대상, 8) 담제와 길제, 9)사당과 묘제의 아홉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상례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변하고 지방마다 풍습을 달리하게 되고 있습니다. 생존시에는 불효막심한 사람들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대단한 효도를 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제례행위입니다. 한국무속신앙에서의 중음신(神)인 혼백이 죽은 시신에 배유한다는 사상은 불교의 사후 중유기간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4. 49재(四十九齋)의 의례

49재(四十九齋는 영혼 천도를 위한 의례입니다. 영혼천도 의례란 망령(妄靈)의 구제를 위한 의례로 후손들이 죽은 이가 극락왕생 하도록 49재를 드리는 것입니다. 49재 의례는 다음과 같이 진행 절차를 갖고 있습니다.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상단권공, 시식, 봉송으로 진행됩니다.

1) 시련(侍輦)-49재 (四十九齋)의례의 처음 순서로, 연(꽃가마)을 메고 천도 받은 영혼을 모셔오는 의례 절차이며, 사찰입구에 나가 연으로 모셔온다는 뜻을 지닌 것입니다.

2) 대령(對靈)-의례 도량에 모셔진 영가(靈駕)에게 간단한 요기를 대접하고, 청해서 모신 불(佛), 보살 전에 나아갈 차비를 갖도록 하는 의례입니다.

3) 관욕(灌浴)-영가가 불단에 나아가 불법(佛法)을 듣기 전에 더럽혀진 몸을 깨끗이 목욕(沐浴)한다는 의미를 상징화한 의례입니다. 그런데 목욕비를 가족들로부터 받는데 그 비용이 산 사람 사우나 비용보다 비쌉니다. 죽은 영혼(靈魂)이 목욕을 해야만 깨끗한 몸으로 극락(極樂)에 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돈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4) 신중(神衆)작법(作法)-신중작법은 불, 보살을 청하여 불법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하여 먼저 도량을 청정하게 한다는 의미로 행하는 것입니다.

5) 상단권공(上壇勸供)-상단권공은 위의 의례 절차가 끝나면 비로소 불, 보살을 청정 도량에 청하여 공양(供養)을 권하고, 불법을 들어서 부처님의 피력 입는 것을 발원하게 됩니다. 상단권공의 순서에는 독경과 여러 가지 진언, 범패, 바라춤, 나비춤, 승무가 등장하고, 영가에게 들려주는 법문이 있습니다. 법문(法問)의 요지는 영가에게 “부디 남아 있는 가족일랑 염려말고 아미타불 부처님 곁으로 극락왕생(極樂往生)하시라”는 내용이다. 이어 참석한 유족들에게는 “아무리 극악무도(極惡無道) 했던 사람일지라도,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阿彌陀佛)을 한번만 불러도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도 못했을 경우는 그의 유족들이 대신 해주면 된다”라는 내용입니다. 49재는 유족들에게 영가를 극락으로 보냈다는 위안을 줍니다.

6) 시식(施食)-시식은 영가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재사 의례의 절차입니다. 상단권공은 불단 앞에서 행하나 시식은 별도 마련 된 영단(靈壇) 앞에서 행합니다. 영단은 죽은 이를 위해서 설치하는 제단입니다. 이 영단은 법당 한쪽에 설치해 49재를 지내는 곳, 즉 죽은 자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을 말합니다.

7) 봉송(奉送)-시식 후 법당에 있던 위패를 가지고 마당으로 나와서 스님, 대중, 위패, 유족의 순으로 마당을 돌면서 염불하고, 영가의 생전 옷가지 등을 태우면서 죽은 이를 돌면서 염불하고, 영가의 생전 옷가지 등을 태우면서 죽은 이를 보내는 의례를 하면 49재의 모든 의례가 끝납니다. 보통 불자들이 죽으면 사찰의 스님을 청해 장례를 치르기까지 염불과 독경을 합니다. 장례 후 바로 절에 위패를 모시고 반혼재를 지냅니다. 그런 후로부터 죽은 지 7일 째 되는 날마다 재를 올립니다. 이는 염라대왕의 재판 후, 다시 태어날 때 좋은 곳으로의 탄생을 기원한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49재는 끊임없이 생사(生死)가 되풀이되는 윤회사상으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윤회사상을 개혁한 종교로서 근본적으로 무신론이고 석가모니는 자신이 영혼문제를 부정하였습니다. 영혼이 없는데 내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승려들은 대부분 영혼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일반 불자들에게는 영혼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해야만 불자들이 시주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9재(四十九齋)는 죽은 자의 영혼을 천도하려는 목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시주를 위해서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5. 기독교들이 각성해야 될 장례 후 49재(四十九齋) 예배

필자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목회자들과 대화 중에 자주 듣는 말 중에 간혹 성도들이 부모님 돌아가신 지 49일이 되었으니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장례 후 삼오 예배와 같이 생각하는 한국문화의 영향에서 기인한 일들입니다. 기독교는 단생을 믿는 종교입니다. 한번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생(多生)을 믿는 종교입니다. 탄생과 죽음이 연속해서 반복된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예배란 말은 아무데나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도라고 가르친 곳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돌아가신 사람들은 하늘에 있고, 현재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후손이나 친척, 친지들은 하늘에 가면 자연히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인 통과의례의 영향으로 장사 후 3일 날에 산소에 가서 죽은 이를 위한 삼오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무속(巫俗)과 타협(妥協)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도의 장례 후에 드려지는 삼우제(三虞祭) 예배는 한국 장례풍습의 방법을 단지 예배로만 바꾼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3일이건 5일이건 날짜에 구애됨이 없이 묘지 봉분이 잘 되었나 잔디는 잘 입혀졌나 미비된 것은 없나 살피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사의 개념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혹시 가드라도 묘가 잘 되었나 살피는 것으로 끝나야 할 것입니다.

6. 나오는 말

전국에 집회를 인도하면서 장례에 관하여 많은 크리스챤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회의 관습대로 지켜나가시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49재(四十九齋) 예배를 부탁한 분들이 있어 애를 먹었다는 목사님들의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49재(四十九齋) 기독교식 예배를 들렸다고 중앙 있는 신문과 TV 방송이 되었으니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들에게 가족 49재(四十九齋) 예배를 인도 해달라고 부탁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도 49재(四十九齋) 미사가 이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있다고 합니다.

49재(四十九齋)는 불교의 중유(中有)기간인 영혼(靈魂)천도 의례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히9:27).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허락되지만,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영령을 위하여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그 영혼의 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고전10:20).

만해선사는 “불교 유신론”에서 불교에서 행해지는 재 공양 의식을 “매우 번잡하여 질서가 없고 비열 잡박한 연극”이라고 까지 힐난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 불교에는 불공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 불교는 바른 깨달음으로 자아(自我)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지양합니다. 불교(佛敎)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49재(四十九齋)는 6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유교적인 조령숭배사상과 불교의 윤회사상이 절충된 것으로 봅니다. 원래 불교의 업(業)에 따르면 개인이 살아서 지은 업보(業報)에 대한 과보는 그 사람 개인에 한정되며, 자녀나 후손에게 전가될 수가 없으며 전가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교사상에서는 후손들이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정성껏 제를 올리면, 죽은 조상이 그 공덕에 힘입어 보다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고, 또 그 조상의 혼령이 후손들에게 복을 주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의식은 유교와 도교가 불교 윤회 사상에 혼합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봅니다. 천주교에서는 49재 미사를 행하고 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 49재를 산소에서 미사를 행했고, 그 영향으로 천주교에서는 49재를 산소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향이 기독교에도 조금씩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고 최xx씨 49재 기독교식 예배 영향은 미래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줄 것 같습니다. 심히 우려가 됩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의 칼럼 글



성경은 몇 권인가

(성경은 66권이 정경이다.)

성경은 왜 66권만이 정경인가요 ?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기독교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즉 카도릭과 개신교지요. 보통 사람들은 카도릭에서 개신교가 나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카도릭을 예수교로 믿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카도릭은 다른 우상 종교와 마찬가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 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66권을 사용하지 않고 외경을 포함한 73권을 사용하고 있 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나 카도릭은 동일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따로 주셨는가 ? 둘 중에 하나는 틀려야 된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다. 예수님은 말씀이신데 66권도 되시고 73권도 되실 수 있는가 ?

이 문제를 알기 위하여서는 먼저 성경이 유대인 즉 히브리인들을 통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시작하여 유대인으로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역사를 통하여 유대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한 것이 구약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으로 시작한 성경의 역사가 결코 다른 족속을 통하여 마루리를 짖게 하실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을 통하여 마무리 짖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1.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계시하셨읍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2).”
   즉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온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성경66권에
대한 스스로 하신 증거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1) 메시야가 유대인을 통하여 오신다는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1)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 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
하리로 다(창49:8,10).”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
에게 있으리라(대상5:2)”

 (2) 이 말씀은 성경은 유대인을 통하여 시작되었고 또한 유대인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을
계시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 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보를 시작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 라(창12:1,2)”

(3)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유대인이 성경을 맡았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3:1,2).” 이 말 씀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 39권을
히브리인들로서 얌니 아회의 (AD90년.
       유대 정통 랍비들의 회의)에 의하여 39권을 정경 으로
결정하셨다.

    1)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 39권(당시22권)을 정경으로 사용하여왔다.
       그러나 BC 250 년경에
알렉산드리아 70인 역이 번역이 되어질 때
       외경과 위경이 번역됨으로 하나님께서는 정경을
결정할
       절대적 필요가 있게 되었다.

    2) AD90년경에 신약이 완성된 시기로서 모든 사단의 역사가
       성경에 나타날 것에 맞추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시작한 유대인들을 통하여
       정경화 시킴으로서 유대인의 사명을 감당케
하셨다.

    3) 실제로 AD200 년경에 구약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루시퍼” 라는 거짓 사단의 이름이
탄생되기 시작함.

    4) 마틴 루터는 성경66권을 가지고 개혁교회를 시작함

    5) 카토릭이라는 종교는 30년 후인 AD1547년 외경7권을 삽입하여
        73 권이 정경이라고 공포
하였다.

2. 결론 :

    (1) 정경은 구약39권과 신약27권외에는 정경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2) 모든 성경(영문 혹은 개역) 이 번역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3) 킹제임스 성경에도 오류가 있으므로 킹제임스만 오류가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

    (4) 번역의 정확성은 성경 전체의 목적과 일치함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 이다.

    (5) 개역 성경에 오류가 있으나 성경을 바꾸는 것은
 더욱 큰 혼란을 일 으킬 수 있으므로 개역
성경을 기준으로
 오류를 알리는 것이 타당하다


  모든 이단은  성경 66권에 더하든지 빼든지 말을 바꿉니다.

  도마 복음을 정경처럼 인용하는 자들은  성경에  더하는
  자들로서  계22:18,19 절에 정확하게
해당하는 자들입니다.


펌글

6월 12일(토) 오전 7시30분 2010 남아공 월드컵 한국의 첫게임인 그리스전이 열려 전반 7분 이정수의 선제골과 후반 7분 박지성의 추가골로 2-0으로 승리했다.

뉴욕에서는 대동연회장, 금강산연회장, 뉴저지 파인플라자등에서 합동응원전이 펼쳐졌다. 또 한인교회에서도 토요일 새벽기도를 마친 교인들이 모여 응원전을 펼폈다.

처음 조용히 진행되는 응원전은 이정수 선수가 한골을 놓고 분위기가 올라 한국선수들이 공을 잡으면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 주심의 편파적인 판정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후반 박지성 선수가 한골을 넣자 분위기는 최고조로 올랐다.

화면은 프로젝트가 이용됐다. 전반에는 화면은 히스패닉 방송, 소리는 한국어 라디오를 이용했으나 시간차가 있어 후반은 히스패닉 방송으로만 경기를 시청했다.

한편 골득점후 기도 세레머니로 유명한 박주영 선수는 그리스전에서 여러차례 찬스를 맞았으나 득점에 실패해 세레머니를 다음경기로 연기했다. 한편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축구대회에서 선수들이 기도 세리머니 자제를 요청한바 있다.

16강에 한걸음 다가선 한국의 남은 경기는 17일(목) 오전7시 아르헨티나, 22일(화) 오후2시 나이지리아전 등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박지성 선수의 득점장면

▲박지성 선수의 득점장면

출처: USA 아멘넷

대구 지하철 화재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집사님께서 구역예배 시간 사고현장을 설명하시면서 지하철 역사는 암흑 같고, 화재 연기로 숨을 실수가 없고, 여기저기서 신음과 고통 소리는 완전히 아비규환(阿鼻叫喚) 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사의 기로의 대구 지하철 화재 현장을 설명 들으면서 아비규한은 불교용어적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아비규환(阿鼻叫喚)이란 뭐예요?

1.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어원

아비규환은 불교 사후 세계인 지옥(地獄)에서 고통을 참지 못 하고 울부짖는 현상의 소리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비규환이란 불교 교리에서 팔열지옥 가운데 아비지옥(阿鼻地獄)과 규환지옥(叫喚地獄)을 합친 말입니다.
두 지옥이 합하였으니 그곳의 고통(苦痛)은 극심한 하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두 지옥의 광경처럼 처참하고 참혹한 경우를 아비규환(阿鼻叫喚)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1) 아비지옥(阿鼻地獄)
아비(阿鼻)는 범어 Avici의 음역으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비지옥은 불교에서 말하는 8대 지옥 중 가장 아래에 있는 지옥으로 “잠시도 고통이 쉴 날이 없다”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도 합니다.
이 지옥에는 오역(五逆)죄를 범한 자들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첫째로 부모님을 살해한자가 가는 곳, 둘째로는 부처님 몸에 피를 낸 자가 가는 곳, 셋째로는 삼보를 훼방한자가 가는 곳, 넷째로는 사찰의 물건을 훔 친자들이 가는 곳, 다섯째로는 비구니를 범한 자 등입니다.
이곳에 떨어지면 옥졸이 죄인의 살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으로 죄인을 묶어 불 수레의  훨훨 타는 불 속에 던져 태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곳에선 하루에 수천 번씩 죽고 되살아나는 고통을 받으며 잠시도 평온을 누릴 수 없는 곳 이라고 합니다.

2) 규환지옥(叫喚地獄)
규환(叫喚)은 범어 ‘누갈(raurava)’에서 음역하며 고통에 울부짖는다 하여 ‘규환’으로 의역 한 것 입니다. 이곳에는 전생에 살생, 질투, 절도, 음탕, 음주를 일삼은 자들이 떨어지게 되는 곳 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 지옥에 떨어진 이들은 물이 펄펄 끊는 가마솥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는 불이 훨훨 타오르는 쇠로 된 방에 들어가 뜨거운 열기의 고통을 받게 되는 곳을 의미 합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울부짖음으로 규환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비규환 지옥에서처럼 눈뜨고 보지 못할 광경처럼 처참하고 참혹한 경우를 아비규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2.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

 한국인의 생활 속에는 불교사상(佛敎思想)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많은 불교용어들이 사용되고 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대구 지하철 화제현장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처절한 고통의 현장 모습을 일컬어서 아비규환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비규환(阿鼻叫喚)은 불교용어라는 사실입니다.

 한국 기독교 선교 2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도 중요하지만 한국 문화 선교가 시급함을 일깨워야 합니다. 아무생각 없이 사용되는 언어 속에서 무속적인 사상 불교적인 사상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란 용어 속에는 불교(佛敎)가 믿는 지옥사상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불교적인 사상이 있는 용어들을 색출하고 그 대처하는 기독교적인 용어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최초로 세워진 초대 교회는 바른 생활 신앙을 가졌음으로“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주님은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셔셔”(행2;47) 부흥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필자는 불교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한국 교회에 있는 불교적인 요소들이 제거되면서 부흥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복음의 순전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타종교문화권에 토착화 되어있음을 방관만을 할 수 없기에 이를 역 토착화시켜서 신앙적인 건전성은 물론 민족적 문화의 순정성도 회복함을 바라는 바입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의 칼럼 글

안중근 의사의 유언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윤봉길 의사의 유언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라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중략>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의 보통과 졸업 사진

1996년 이화여고에서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실제로 유언처럼  당했다고 합니다. 시신 인도시 머리 몸통 사지 등 6토막, 코와 귀도 잘려 있었다는군요.

그녀의 마지막 유언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너무 가슴 절절하게 와 닿지 않습니까?

일제가 3.1만세 독립운동을 무력진압하면서 시위 도중,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꽃다운 17세  때, 처참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cf)  오래전 한겨레 신문에 의하면 왜놈들은 초등학생까지 위안부로 잡아갔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정말 분해서 부들부들 떨었지요.

일제시대 왜놈들의 만행을 생생히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꼭 아래 링크로 들어가셔서 일독하시고 추천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764155&pageIndex=2&searchKey=subjectNcontent&searchValue=위안부&sortKey=depth&limitDate=0&agree=F

최근 국내외에서 단군상 관련 집단의 실체를 폭로하는 언론 보도가 잇따른 이후 초등학교 등 공공기관에 세워진 단군상의 정체성 논란도 커지면서 문제의 단군상을 학교가 자진해서 철거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단군상 철거 논란이 있었던 학교 중 하나인 서울신석초등학교는 27일 단군상 철거문제를 두고 학부모와 교사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찬반표결을 한 결과 대부분인 98.4%가 철거를 원해 교내에 단군상을 즉시 없애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단군상 철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찬반 논란이 팽팽한 양상을 보인 경우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서울신석초등학교의 경우 4학년 이상의 학부모와 교사 321명이 찬반투표를 실시해 절대적 다수인 316명이 철거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고 존치하자는 의견은 극소수인 5명에 불과했다. 이는 학부모와 국민들이 이승헌 대선사 집단의 실체와 단군상에 대한 인식이 급변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번 서울신석초등학교의 단군상 철거 결정 과정에서는 단군상 설립자 이승헌 대선사와 관련된 단체인 홍익문화운동연합(홍문연)측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단군상을 존치해 줄 것을 주장하고 유도하려 했으나 단군상 관련 집단의 실체폭로에 따른 학무모들의 반감을 넘어서지 못했다.

단군상 철거가 결정된 27일 토론회에서 학부모 대표는 단군상 철거 입장과 관련, “교내에 세워진 단군상은 정부의 선현에 대한 동상 및 영정제작에 관한 지시(국무총리 지시 제6호, 1973.5.8.)를 위반해 국가가 지정한 단군할아버지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에 학생들의 분별력을 흐릴 수 있고 청동이나 석조상이 아니라 인체에 해로운 합성수지 재질로 만들어져 있어 어린이들에게 유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학부모 대표는 교내의 단군상과 관련된 집단에 대한 언론보도를 주목하면서 “올해 1월5일~7일 미국의 CNN에서 특집방송에서 이승헌 대선사가 사기와 여제자 성폭행 혐의로 집단소송을 당한 사건을 다뤘고, 이외에 포브스 및 97개 언론에서 최근 그와 관련해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며 “국내에서는 동아일보 신동아에서 ‘단월드 대해부-의혹으로 얼룩진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제목으로 2010년 1월호에 특집으로 다뤘고,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단요가 스캔들-진실인가 모함인가?’라는 제목으로 3월6일 방송에서 집중 조명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신석초등학교의 단군상 철거 결정에 대해 바른문화운동국민연합(바문연) 이기영 사무총장은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 백과서전을 인용, “이승헌 대선사는 1993년 6월3일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교육법 위반, 음란공연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며 “그는 무허가로 정충단, 천화죽염, 죽염수 등을 제조 및 판매해 2억여 원의 부당이득을 취했고, 통신대학을 무인가로 설립했고, 수강생 500여명으로부터 수업료 및 등록금 명목으로 1억4000만원을 받았고, 그에게 내려진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3년 벌금 1억5천만원 판결은 확정판결”이라고 강조했다.

이기영 사무총장은 “국내 초등학교 등에 설치된 단군상은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단군민족종교일체화협의회에서 설계를 하고 한문화와 이승헌 대선사가 기증자로 확인되고 있다”며 “기증된 물품은 그 소유가 학교로 이전되는 것이므로 학교는 단군상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으며, 기증 단체가 이후에 철거문제를 두고 학교행정에 깊이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홍문연은 단군상 기증 당사자도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또 바문연 이기영 사무총장은 “학교의 단군상 기증서에는 해당 공작물이 국민성금 2000만원으로 만들어졌다고 기록돼 있으나 사실은 싸구려 합성수지라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단군상 제작비 의혹도 밝혀질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출처: 파워뉴스

Søren Kierkegaard (1813-1855)

dänischer Philosoph, Theologe und Schriftsteller 덴마크의 철학가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가 &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

대표작 = Entweder – Oder I/II (1843) (E-Text) 이거냐 저거냐

            Der Begriff Angst (1844) 두려움이라는 개념

            Die Krankheit zum Tode (1849) 죽음에 이르는 병


"Dass das Weib sinnlicher ist als der Mann, das zeigt sogleich ihre leibliche Bildung an." - Der Begriff Angst

여자는 남자보다 더 감각적이다. 이것은 벌써 육체의 형태에서 나타난다


"Der Augenblick ist jenes Zweideutige, darin Zeit und Ewigkeit einander berühren." - Der Begriff Angst

순간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안에는 시간과 영원성이 서로 함께 하고 있다


"Je weniger Geist, desto weniger Angst." - Der Begriff Angst

정신이 적어질수록 두려움도 적어진다


"Es gilt, eine Wahrheit zu finden, die Wahrheit für mich ist, die Idee zu entdecken, für die ich leben und sterben will" - Die Leidenschaft des Religiösen, Reclam Verlag, Ditzingen, 1968, S. 4

나를 위한 진리를 찾아내고, 내가 생사를 걸고 싶은 이념을 발견해내는 것은 중요하다


"Heirate - und du wirst es bereuen, heirate nicht - und du wirst es auch bereuen." - Entweder - Oder

결혼해도 후회하게 될 것이고, 결혼하지 않아도 후회하게 될 것이다


"Nach Veränderung rufen alle, die sich langweilen." - Entweder - Oder

지루해하는 자들은 모두 변화를 외친다


"Was ist ein Dichter? Ein unglücklicher Mensch, dessen Lippen so geformt sind, dass sein Seufzen und Schreien sich in schöne Musik verwandelt, während sich in seiner Seele geheime Qualen verbergen." - Entweder - Oder

시인이란 무엇인가? 불행한 인간이다. 그의 영혼 속에는 비밀스런 고통이 숨어 있고, 그의 입술은 한탄하고 비명을 지르지만 그것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변화시키도록 만들어져 있다


"Was wird kommen? Was wird die Zukunft bringen? Ich weiß es nicht, ich ahne nichts. Wenn eine Spinne von einem festen Punkt sich in ihre Konsequenzen hinabstürzt so sieht sie stets einen leeren Raum vor sich, in dem sie nirgends Fuß fassen kann, wie sehr sie auch zappelt. So geht es mir; vor mir stets ein leerer Raum; was mich vorwärtstreibt, ist eine Konsequenz, die hinter mir liegt. Dieses Leben ist grauenhaft, nicht auszuhalten." - Entweder - Oder

무엇이 오고 있는가? 미래는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예감하지 못한다. 만약 한마리의 거미가 어느 한 점에서부터 결론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고 있다면, 언제나 공허한 공간만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리 발을 뻣어보아야 닿지 않는 공간을 앞에 두고서 그 거미는 얼마나 버둥거리고 있는가. 내가 바로 그렇다. 내 앞에는 언제나 텅빈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나를 앞으로 내몰고 있는 것도 내 뒤에 있는 하나의 결론이다. 이러한 삶은 진절머리나고, 유지될 수 없다.


"Denn wer unendlich resigniert hat, ist sich selber genug." - Furcht und Zittern

끊임 없이 체념하는 자는 스스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Alles ist eine Modesache: Gottesfurcht ist eine Modesache und die Liebe und die Krinoline und ein Ring in der Nase." - In vino veritas, 1844

모든 것은 유행이다. 신을 두려워 하는 것도 유행이다. 사랑과 치마 그리고 코 안에 반지도 다 유행이다


"Es ist keine Kunst, ein Mädchen zu verführen, aber ein Glück, eines zu finden, das es wert ist, verführt zu werden." - Tagebuch des Verführers

한 소녀를 유혹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지만, 유혹할만한 가치가 있는 소녀를 찾아내는 것은 행복이다


"[…] danke ich Gott, […] dass kein lebendes Wesen mir sein Dasein verdankt." - von Karl Kraus zitiert in "Die Fackel" 706, S. 26

나는 신에게 감사한다. 그 어떤 생물도 내게 자기 존재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Das Selbst zu sein, das man in Wahrheit ist." - Kierkegaard 1924, S.17

진실은 자기 자신이다


"Die Sorge ist das Verhältnis zum Leben." - Die Krankheit zum Tode

걱정근심은 삶과 관계를 맺게 해준다


"Es ist wahr, was die Philosophie sagt, dass das Leben rückwärts verstanden werden muss. Aber darüber vergisst man den andern Satz, dass vorwärts gelebt werden muß." - Die Tagebücher 1834-1855

철학이 인생을 거꾸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다른 문장을 망각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마지막 말 =

"Fegt mich weg!" - Letzte Worte, 11. November 1855

나를 지워버려라!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는 최근 자칭 사도라는 박수인 씨에 대해 취재하여 기사화한 바 있다. 박 씨는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며 그녀를 따르는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달하는 형태로 설교하기도 했다. 자신이 말세의 영적 사령관이라는 등 박 씨의 황당한 설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박 씨에게 맹종했던 까닭 중 하나는 그녀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리자, 즉 사도라고 주장해왔고 추종자들은 이를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도를 거역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박 씨뿐 아니라 소위 신사도운동의 물결을 타고 자신을 사도로 칭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과연 이 시대에도 사도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사도란 무엇인가? 현재 특정인을 사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기자와 통화한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특정인을 사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 좌측부터 정병준·박문수·이승구 교수
정병준 교수(교회사, 서울장신대)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사도란 예수께서 직접 선택한 제자들을 의미하며 교회 역사 속에서 단회적으로 나왔던 특별한 직분이다”며 “신약성경의 반을 기록한 바울조차도 당시 사도성 문제로 논란이 됐을 정도로 사도란 직분은 아주 ‘스페셜’하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사도 시대 이후에 등장한 신앙의 선진들조차도 ‘사도’가 아닌 ‘속사도’나 ‘교부’로 분류한다”며 “교회사적으로 사도 시대 이후에 사도로 불린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 자신을 사도라고 하거나 특정인을 사도라고 추종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외면하는 행위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성경에 기록한 직제 중 계속 이어지는 직제가 있고 단절되는 직제가 있다”며 “칼빈은 이어지는 것을 4가지, 목사, 장로, 교사, 집사로 봤고 사도는 스페셜한 것으로서 그 시대에만 있는 것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박문수 교수(조직신학, 서울신학대학)는 “사도란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로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성도들이 사도성을 계승한다고 봐야 한다”며 “따라서 특정인을 사도라고 부르며 추종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이 시대를 제 2의 사도 시대라고 주장하며 하나님께서 특정인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이룬다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런 시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보다 특정인을 우월하게 만드는 불순한 시도이고 영적 은사로 포장한 권위주의의 남용이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2세기의 몬타너스가 자신을 특별계시를 받은 사람으로 자처했다”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은 교회사에서 주변적 인물로 전락해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우려했다.

이승구 교수(조직신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현저히 이단성을 보이는 단체들이 특정인을 사도로 칭해왔다”며 “사도가 지금도 존재한다면 그 말은 성경이 다시 쓰여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서 매우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1세기의 사도들이 죽은 이후에 또 다른 사도들이 주어질 것이라는 시사를 성경은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다”며 “오히려 성경은 1세기의 사도와 선지자의 터 외의 다른 터를 닦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사도적 가르침이란 성경의 가르침에 무엇이라도 더 하지 않으며,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적 가르침에 자신들을 겸손히 복속시키는 일이다”며 “이러한 가르침에 순복하는 것이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고 교회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한편 현 시대에도 특정인이 사도가 될 수 있다는 소위 신사도개혁운동에 대해 예장 고신측은 2007년 지극히 불건전한 사상으로서 관련 저술을 읽는 것을 금지하고 집회참여를 금지한다고 규정했다. 예장 합신측은 2009년 신사도개혁운동에 대해 이단성있는 운동이라며 참여를 금지한다고 규정했다.
기사제공ⓒ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인도 붉은비, 두달간 내린 핏빛 폭우는 외계인 증거 의혹(신비한TV 서프라이즈)

뉴스엔 | 입력 2010.05.23 12:33

[뉴스엔 유경상 기자]
2001년 인도의 한 지역에 폭우가 내렸다. 두달간 지속된 폭우는 놀랍게도 붉은비. 두달간 내린 핏빛 비에 인도 사람들은 경악했고 그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5월 23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의 'Extreme Surprise'에서는 2001년 인도에 쏟아진 붉은비에 대한 의혹을 공개했다.

2001년 7월 25일 인도 케랄라 지역에 핏빛 폭우가 내렸다. 9월 23일까지 두달간 핏빛 폭우가 계속되자 각계각층의 학자들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케랄라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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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은 핏빛 피가 새나 박쥐들의 피라고 주장했다. 새나 박쥐들이 상공에서 서로 부딪히거나 운석에 맞아 그 피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가 오던 당시 케랄라 지역에 새나 박쥐 떼는 목격되지 않았다.

기상학자들은 사막먼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제트 기류를 타고 사하라 사막의 붉은 모래가 날아와 비와 함께 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도 전역에 붉은비가 내렸어야 하는데 붉은 비가 내린 것은 케랄라 지역뿐이었다. 또 두달 동안 지속적으로 먼지가 포함된 비가 내린다는 것도 설명이 안되는 현상이었다. 학자 모니카 그래엄은 붉은비에서 미세한 모래입자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인도 열대 식물원 연구소에서는 해조류의 포자 때문에 붉은비가 내렸다고 주장했다. 모래에서 해조류의 포자가 발견됐으며 그 포자로 해조 배양에 성공했으며 같은 종류의 해조가 실제로 인근 해변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해조昰?포자로 의견이 좁혀지던 중 2006년 11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고드프리 루이스 교수는 새로운 생명의 존재 , 즉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붉은비가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연구팀의 산토시 쿠마르는 붉은 비에서 발견된 세포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포와 다른 점이 있다고 밝혔다. 세포벽이 두껍고 DNA가 존재하지 않으며 남다른 복제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315도에서도 살아남고 황산을 부어도 죽지않는 등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들은 외계 유성이 대기권과 만나 분해되면서 외계 세포들이 비가 돼 내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비가 내린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는데 고드프리 루이스 교수는 이 소리가 유성이 대기권에 충돌하면서 난 폭발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주장은 외계생명기원설, 즉 외계에서 온 박테리아에 의해 지구 생명이 시작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큰 발견이었다.

한편 찬드라 위크라마실헤 교수는 이 주장에 반박했다. DNA(유전자)가 없다고 꼭 외계생명체는 아니며 지구상의 새로운 세포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찬드라 위크라마실헤 교수는 실제로 인도에서 유성 파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로 세포는 지구상의 새로운 생명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붉은 비에 대한 의혹이 계속되는 가운데 2008년 8월 콜롬비아에 또 붉은 비가 내렸다. 붉은 비에 대한 의혹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날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이외에도 미해결사건의 살인자를 잡은 '화이트 노이즈', 21세기 최초의 전염병 '사스'에 얽힌 의혹이 방송됐다.

유경상 yooks@news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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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귀면문

서울시 남부 순환 도로 개봉역에서 시흥방향 버스 정류장 투명 방음벽에 그려져 있는 “귀면문(鬼面門)”사진으로서 귀면(鬼面)이란 “귀신의 탈”, 또는 “귀신의 얼굴”로서 악귀의 침입을 막는 다는 벽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본 주제인 한국 전통적인 귀신 퇴치법 중 하나입니다. 국가의 공공시절에 전통문화라는 미명하에 귀신의 탈, 귀신의 얼굴인 귀명문을 그려 놓고 자세한 설명까지 되어 있습니다.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전통적인 귀신(鬼神)이란 죽은 사람의 넋(혼령) 또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준다고 하는 정령(精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귀신(鬼神)은 한자어 귀(鬼)와 신(神)의 합성어입니다. 귀(鬼)는 사사스럽고 악한 마귀를 뜻하고, 신(神)은 착한 신을 뜻합니다. 성경적인 귀신은 천사들이 추락하여 공중권세를 잡은 자로서 이 세상을 악으로 유혹하는 마귀와 귀신들을 말합니다. 이 시간은 한국 전통적인 귀신론(鬼神論)과 성경적 귀신론과 귀신 퇴치방법을 논하고자 합니다.

2. 한국의 전통 귀신론(鬼神(論)

1) 음양설(陰陽說)

귀신(鬼神)의 존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원시시대부터 믿어 왔었고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귀신을 주로 음양설(陰陽說)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보면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귀(鬼)는 음양설의 음지령(陰地靈)이고, 신(神)은 양지령(陽地靈)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은 음(陰)과 양(陽)의 두 기(氣)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서 이 음양의 기(氣)가 떠나는 경우에 혼(魂), 백(魄), 정(精), 신(神) 또는 귀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귀신은 음(陰)을 좋아하고, 양(陽)을 싫어하므로 원기가 왕성하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붙지 않고 원기가 없고, 허약한 사람에게 붙는다고 하는 것이 음양설의 귀신론(鬼神論)입니다.

2) 원귀설(寃鬼設)

한국의 귀신(鬼神)은 깊은 원한이 맺혔거나 정당한 죽음을 얻지 못하고 넋이 이승을 떠도는 혼이 원귀(寃鬼)가 된다고 합니다. 원귀 중에서도 목매어 죽은 귀신(鬼神)이 가장 잔인한 악귀(惡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예부터 객사(客思)한 시신은 집안에 들이지 않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는 집안에서 편히 죽지 않고 비명에 죽었기 때문에 원귀(寃鬼)가 이승을 떠돌며 가족이나 친척에게 해를 끼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귀신은 원한을 품었거나 횡사나 요절한 넋들이 정당한 죽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영혼이 하늘(저승)로 올라가지 못해서 이승을 떠돌면서 시끄럽게 울기도 하고 원한 맺힌 집에 붙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무속신앙(巫俗信仰)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귀신(鬼神)입니다. 이 귀신(鬼神)이 사람 몸에 들어가 병이 생기므로 귀신(鬼神)을 쫓아 병을 고치는 현상이 굿(㖌) 주문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만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한국 무속신앙(巫俗信仰)입니다. 그래서 이 혼령이 미련 없이 승천할 수 있도록 해원(解寃)굿을 하거나 절(사찰)에서 회혼(回魂)재를 지내주기도 합니다.

3. 한국 무속신앙(巫俗信仰)의 귀신(鬼神)의 종류

우리민족의 귀신은 선귀와 악귀가 있으며 악귀란 죽은 넋, 곧 사령(邪靈)으로 현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죽은 경우 잡귀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이 귀신들은 사람에게 해로운 존재로서의 악귀를 말합니다. 이 시간은 무속신앙의 악귀의 종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1) 미명귀신(未命鬼神)
미명귀신란 남편에게 못다한 미련 때문에 후처에게 붙어서 괴롭힌다고 하는 귀신입니다. 후처가 병이 들게 되었을 때에는 미명귀의 짓이라 하여 무당을 불러 귀신을 달래는 굿(㖌)을 하였습니다.

2) 무자귀신(無子鬼神)
무자귀신란 자손이 없는 사람이 죽으면 제사를 지내 줄 사람이 없어, 망령이 위안을 받지 못하게 되므로, 이러한 영혼은 원귀(寃鬼)가 되어 온갖 심술궂은 가해행위를 자행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제사를 얻어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몽달(총각)귀신(鬼神)
몽달귀신은 총각귀신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즉 장가를 못간 총각이 죽어서 되었다는 귀신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죽으면 몽달귀신이 면했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총각으로 죽은 자를 위한 영혼 결혼이 있습니다. 집회를 다니면서 간혹 교회 중직 자들이 영혼결혼을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4) 손각시(처녀) 귀신(鬼神)
손말명이라고도 합니다. 처녀가 죽어서 미련이 남아 귀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서 만족한 생을 보내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 원귀(寃鬼)가 되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작용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귀신(鬼神)관인데, 손각시 귀신도 그런 종류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처녀가 죽으면 원혼(冤魂)이 손각시라는 악귀로 변해 다른 처녀에 붙어 다니며 괴롭힌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로부터 처녀가 병이 나면 손각시가 붙었다고 하여 무당을 불러 처녀의 의복을 전부 꺼내 놓고 옷에 붙은 손각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도록 굿을 합니다. 처녀가 죽으면 손각시가 되지 않도록 남자 옷을 입혀 거꾸로 묻거나, 가시가 돋친 나무를 관 주위에 넣고 매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사거리의 교차점이 되는 곳에 시체를 은밀히 매장하여 많은 남자가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처녀귀신의 못다한 한(限)과 정분을 달래는 매장풍속도가 있었습니다.

5) 명도귀신(冥途鬼神)
명도귀신이란 3세 미만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죽은 귀신이라고 합니다. 보통 영매들이 이 귀신을 접하면 말은 하지 않고 휘파람이나 여러 손짓 발짓을 한다고 합니다. 이 귀신은 구천을 떠돌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승천한다고 합니다.

6) 동자동녀귀신(童子童女鬼神)
동자동녀귀신은 주로 무당의 몸을 빌려서 나타나는 행동을 합니다. 무당들이 몸신으로 모시는 귀신의 의사를 전달하면서 몸신인 어린아이의 말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민족 종교인 무속신앙에서는 죽은 사람의 넋(혼)을 귀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 한국의 전통적인 귀신(鬼神)퇴치 방법

민간신앙(民間信仰)에서 질병과 재앙은 귀신(鬼神)이 몸속에 침입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질병과 재앙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귀신을 몸 밖으로 쫓아내야만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질병과 재앙을 몰아내는 것을 전문적인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을 무당(巫堂)이라고 합니다. 무당(巫堂)들의 귀신퇴치방법은 천태만상이지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적대법(敵對法)

적대(敵對)법이란 일반적으로 질병의 원인인 귀신에 항거하고 귀신의 침입에 대항하여 적극적 반격을 취하거나 협박을 가하여 귀신을 격퇴시킴으로 질병을 고치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에는 구타, 경악, 화공, 자상, 봉박법이 있습니다.

(1) 구타법(毆打法)
구타법은 귀신(鬼神)들린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여 귀신(鬼神)을 쫓아내는 방법이며 대개의 경우 귀신들린 사람의 신체를 구타하여 고통을 주면 환자의 몸 속에 숨어 있던 귀신(鬼神)이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나감으로 질병이 낫는 다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을 고치려면 환자를 묶어놓고 마구 때리며 주문을 외우면 환자가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귀신이 떠나는 것이라 하여 마구 구타하여 실신시켜 놓습니다. 그리고는 귀신이 나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기독교 기도원에서도 정신병 환자를 고친다고 안찰로 때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2) 경악법(經幄法)
경악법은 귀신(鬼神)을 무섭게 하여 쫓아내는 방법인데 귀신(鬼神)을 놀라게 하거나 위협하고 윽박질러서 귀신으로 하여금 무서움을 느끼게 하여 환자에게서 떠나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깊은 밤 환자를 공동묘지 등 인가가 드문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귀신이다”라고 갑자기 소리를 질러 놀라게 한다든가, 살아 있는 뱀을 환자의 목에 갑자기 걸어 준다든가 하여 귀신(鬼神)을 놀라게 하여 떨어져 나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호랑이 그림을 등뒤에 붙인다든가, 길을 가는 환자에게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는다든가, 환자를 겁나게 하여 귀신(鬼神)을 떨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경악법이란 것입니다.

(3) 화공법(火攻法)
화공법이란 불을 가지고 귀신을 격퇴하는 방법으로 이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귀신이 기탁(寄託)하고 있는 물건을 불 태워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어 물러가게 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연기를 씌어 귀신을 도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화기를 쓰는 이유는 불(火)은 양(陽)이니까 음(陰)에 속한 귀신을 이길 수 있다는 음양설(陰陽說)에 기초한 이론적 관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염병을 앓는 사람의 집과 떨어져 있는 변소를 태운다든가, 열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 머리 약간 위에 잘게 썬 짚을 올려놓고 불을 지피어 화기를 쬐인다던가 하는 법을 말합니다.

(4) 자상법(刺傷法)
자상법은 출혈법으로서 이는 병마를 퇴치시키기 위해서 인체 환부에 침을 가지고 찔러 피를 낸다든가, 피부에 상처를 내어 거기에서 피를 내게 하는 방법으로 인체에 자상(몸의상처)을 주어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뇌막염이나 경기로 위독하면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침으로 찔러 피를 낸다든가, 정신병자를 치료할 때 귀신이 잠복해 있을 만한 곳을 침으로 찌르면 귀신이 쫓겨나 낫는다는 것입니다.

(5) 봉박법(封駁法)
봉박법이란 귀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묶거나 가둬놓아 그 위력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막아서 재해와 병화에서 면하려는 방법으로 환자를 실제로 줄로 묶거나 가두어 환자 속에 들어있는 귀신(鬼神)으로 하여금 움직이거나 활동을 못하게 하여 종국에는 쫓아내는 방법입니다.
이제까지 설명한 방법들은 대적법에 속하는 것으로서 귀신(鬼神)을 정면 대결하거나 싸우고 괴롭혀서 몰아내는 방법들이었습니다. 다음은 정반대로 귀신(鬼神)을 달래거나 무엇을 바쳐 그 재화에서 벗어나고, 그 뜻에 복종하거나 순종함으로 그 노를 피하고, 용서를 빌거나 즐겁게 해줌으로 재액을 면해 보려고 하는 순종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2) 순종법(順從法)

순종법은 앞서 설명한 적대법과는 정반대의 귀신 퇴치방법으로서 귀신의 요구를 들어주고 귀신의 진노를 가라앉혀 귀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귀신이 물러가게 하는 방법을 순종법이라 합니다. 순종법으로는 공물, 공순법이 있습니다.

(1) 공물법(供物法)
공물법은 귀신(鬼神)에게 음식이나 의복 등과 같은 것을 바쳐서 귀신의 재해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입니다. 감기가 걸렸을 때 사방(동서남북)귀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밥을 뿌린다든가, 이질을 앓는 사람이 옷가지, 밥, 돈, 흰쌀, 맑은 물, 반찬 등의 제사상을 차려놓고 북을 치거나 방울을 흔들면서 주문을 외우게 한다든가, 타박상을 입은 사람이 그 멍든 부분에 귀신이 붙는다고 바가지에 쌀을 가득 담아 이것을 보자기에 싸고 그 부분을 신이 쌀을 먹어서 생긴 것이라 하여 곧 멍든 곳이 나을 것으로 믿는 것 등 이러한 것들이 공물법입니다.

(2) 공순법(恭順法)
공순법은 귀신을 존경하고 귀신에 의뢰하고 또 귀신의 뜻을 따라 근신하여 귀신의 동정을 받고 귀신의 비위를 맞추므로 그 재화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의 정신은 제사(祭祀)의 근본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정초가 되면 보름달이 뜨기 전에 부락에서 집집마다 제물을 거두어 일년간 악병이 유행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성황당에 빌고, 음력 섣달 그믐날 밤 거목 밑에서 당산제를 지내면 악질병이 부락에 침입하지 않는다든가, 산신, 용왕, 선왕. 퇴신 등 제신에게 질병쾌유를 빈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다 이 공순법에 속하는 것입니다.

3) 의타법(依他法)

한국의 전통 귀신 퇴치방법으로서 세번째로는 의타법이 있습니다. 의타법이라는 것은 귀신을 퇴치하는 데는 전적으로 타력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자력으로 귀신을 쫓지 못하고 남의 힘을 빌어 쫓는 방법을 의타법이라 합니다. 의타(依他)법에는 주부, 차력, 음식, 고묘법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 할 수 있습니다.

(1) 주부법(呪符法)
주부법이라는 것은 악귀의 침입을 막고 병마를 퇴치시킬 목적으로 주문을 외우거나 문자나 그림을 그려 주부(呪符: 즉 부적)를 만들어 그것을 문간, 벽 등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거나 태워 마시거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신(鬼神)들린 자나 정신병자가 있을 때에는 침을 놓고 종이에 붉은 글씨로 주문을 써서 태워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임산부가 난산을 겪을 때 발바닥에 천(天)자를 쓰면 곧 순산하게 된다든가 하는 것을 주부법이라고 합니다.

(2) 차력법(借力法)
이 방법은 자기 힘이 아닌 다른 힘을 빌어서 병귀를 퇴치하는 방법으로 자기 이외의 어느 물건에 속한 힘을 그대로 이용하는 퇴치 방법입니다. 즉 천연두(天然痘)를 예방할 때 흰 개를 잡아 그 피를 집 근처 또는 문 입구 등에 바르고, 그 고기를 가족들끼리만 먹으면 반드시 병과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외의 힘을 빌어서 자신을 강건케 하여 악운(惡運)을 떼어버리고 병마의 침입을 막을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음식법(飮食法)
맵고, 짜고, 쓰고, 신 자극이 강한 음식물이나 냄새가 고약하고 더럽게 여겨지는 혐오스러운 음식물은 모두 귀신이 싫어하는 것이므로 그런 음식을 환자에게 먹임으로 그 환자 속에 병 귀신(鬼神)을 내 쫓으려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4) 고묘법(顧墓法)
고묘법이란 모든 악운과 질병의 원인이 조상의 분묘에 있다고 생각하여 분묘의 상태를 처리함으로 질병과 악운을 퇴치하려는 방법입니다. 한국에서는 예부터 중국 고대의 풍수설(風水說)을 믿어왔기 때문에 자손의 운명(運命)은 조상의 유해에 의하여 지배되고, 이 유해의 능력 유무는 그 유해를 묻고 있는 분묘의 상태의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고묘법은 지력을 받을 분묘의 형상을 돌보아 조상의 귀신(鬼神)을 힘있게 만들어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고 병귀(病鬼)를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모든 신경질환은 조상의 분묘에 매장한 시체에 나무뿌리가 침입하면 발생한다고 믿고 묘소를 파헤쳐 이 나무뿌리를 제거해 주면 정신병이 낫는다든가, 조상(祖上)의 묘안의 유골에 벌레가 생기면 자손에게 문둥병이 발생한다든가, 처녀의 시체는 총각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 주지 않으면 가족에게 재액이 내리니 묘소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하는 것 등의 모든 것이 고묘법(顧墓法)에 속하는 행위입니다.

4) 기교법(奇巧法)

한국의 전통 귀신 퇴치법으로는 기교법이 있습니다. 기교법이란 것은 여러 병기나 재액의 귀신을 몰아내고 재화를 모면할 목적으로 귀신을 대항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기교를 사용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1) 색감법(色感法)
황토를 까는 것, 붉은 고추 매달아 놓는 것, 동짓날 팥죽을 쒀서 집 주변에 뿌려 악귀를 물리치려는 생각 역시 붉은 색을 음양(陰陽)사상에서 양(陽)으로서 음(陰)인 귀신을 쫓으려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2) 소리법
이 방법에는 가무음곡(歌舞音曲)으로 귀신을 즐겁게 하는 방법, 애절한 소리로 귀신(鬼神)을 슬프게 하는 방법과 귀신을 아프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귀신이 혐오하여 견디기 어려워 나가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도 소리로 귀신을 퇴치하는 방법입니다.

(3) 향법(香法)
향법(香法)은 대체로 냄새가 독한 것을 태우거나 먹거나 바르면 악귀(惡鬼)가 싫어서 도망가게 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고추씨나 목화씨를 태워서 병 귀신(鬼神)을 내쫓는 방법, 머리카락 등을 태워 지독한 냄새를 내면 병 귀신이 물러가 질병이 낫는다거나, 옆집에 환자가 발생하면 한약재 등을 화로에 태워 고약한 냄새를 뿜어 귀신(鬼神)을 내쫓는 등의 방법입니다.

(4) 촉감법(觸感法)
이것은 피부감각에 큰 자극을 주는 것, 다시 말해 열감이라든가 통감이 강한 것에는 악귀(惡鬼)를 추출하거나 방지할 수 있다는 방법입니다. 뜸을 뜬다든가하여 심한 열감과 통감을 주면 귀신이 달아나고, 또한 칼이나 창이나 침으로 통감을 심하게 주면 병 귀신(鬼神)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달아난다고 하는데, 이것이 촉감 축귀법(觸感法)입니다.

5) 기타법

(1) 광명법(光明法)
귀신(鬼神)은 광명을 싫어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귀신을 쫓는 데는 광명한 빛이 최고의 축귀 방법이라고 합니다. 등불이나 빛이 나는 물건은 어느 것이든지 귀신(鬼神)쫓는 축귀 무기로 사용 될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 돋는 해를 향하여 무수히 절을 하여 병을 고치려는 염원, 정월대보름 달맞이의 모든 광명으로 악귀(惡鬼)를 쫓으려는 것도 무속 신앙적인 동기에서 연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밝고 빛난 곳에는 악귀(惡鬼)가 인접하지 못한다는 것이 광명 축귀(逐鬼)방법입니다.

(2) 매매법(賣買法)
이 방법은 자기의 악운(惡運)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겨줌으로 모든 재액에서 모면하려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정월보름날이 되면 아침 일찍 친구의 집에 찾아가 친구의 이름을 불러 친구가 대답을 하면 “내 더위”하고 외침으로 더위를 친구에게 파는 것은 매매법(賣買法) 입니다.

(3) 열십자법(十字法)
열십자(十字)는 완전 숫자로서 막강한 벽사(辟邪)의 힘이 있다고 한국의 무속신앙에서는 믿고 있습니다. 이 방법은 옆구리가 저릴 때에는 두더쥐 발톱으로 옆구리에 열십자(十字)를 그으면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열십자로의 황토를 가져다가 정월 초하룻날 온 집안에 뿌려두면 일년내내 온 가족이 무병하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 눈시울에 종기가 생길 때 오른손 인지손톱에 십자를 써 놓으면 그 종기가 낫게 된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 축귀법입니다. 기독교 십자가와는 무관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던 축귀(逐鬼)하는 무속신앙(巫俗信仰)입니다.

(4) 소금법(巖鹽法)
소금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소금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이나 신앙이 생겼습니다. 소금은 흔히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신성(神聖)한 것으로 여겨져 정결하게 하거나 액운을 쫓는 데 쓰였습니다. 민간신앙에서는 나쁜 사신(邪神)이나 마귀를 쫓는데 소금을 뿌리는 습관이 지금도 행하고 있습니다.

5. 성경적 귀신론(鬼神論)과 귀신 퇴치법

1) 성경적 귀신론(鬼神論)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신(鬼神)의 정체에 대하여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慾心)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眞理)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또한 성경 속에서 귀신(사탄)이 최초로 등장하는 구절인 창세기 3:1~5의 기사는 인간과 하나님의 신뢰 신앙 관계를 파기시키는 사탄의 궤술이 뱀을 통하여 나타났음을 잘 증명해 줍니다. 여기서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욥기 1:6이하를 보면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모였을 때 그들 중에 사탄이 끼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탄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대로 창조된 천사 중 하나였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배역한 고로 얻게 된 이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악의 두령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광범위한 권능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하고 세속(世俗)의 역사에 영향을 끼치어 세속의 풍속(風俗)을 좇아 살게끔 영향력을 미칩니다. 사탄은 성도를 향하여 참소와 비방의 풍조, 불신의 만연, 영적 교만과 범죄의 유혹으로 의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사력을 다하며, 거짓 종교에 미혹(迷惑)하게 함으로서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여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과 사역 역시 하나님의 계획과 수중 속에서 제한되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날, 세상 역사를 완성하는 날에 완전히 멸망을 당할 사탄입니다.

2) 성경적 귀신(鬼神)의 종류

(1) 더러운 귀신(鬼神) (마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鬼神)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權能)을 주시니라(마 10:1)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음욕이 불같이 일어나게 하여(롬1:27) 보디발 아내같이 사람을 유혹(誘惑)하여, 스스로 망하게 합니다. 아담 하와는 인간을 더럽혀 망치는 귀신의 역사를 받아들임으로 망했습니다.

(2) 악한 귀신(鬼神) (삼상 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르신 악신(惡神)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 16:14) 더럽게 하는 귀신과 악하게 하는 귀신이 들어가면 사람이 사나워집니다. 이 귀신은 정신혼란, 불안 초조한 마음이 들게 하고, 남을 죽이려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 짓이 요한복음 8:44에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라고 합니다. 마귀성질이요, 귀신의 짓이니, 사울왕이 악신이 들어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3) 거짓말하는 귀신(鬼神)(대하 18:21)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하는 귀신이 뱀을 통하여 접근하였고,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참말같이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려는 귀신(사탄)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적하여 그의 목적을 방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리 체계를 모방한 거짓 진리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장려하고 유혹(誘惑)으로써 방해 공작을 수행합니다. 거짓 선지자로, 거짓 교리(敎理)를 장려하고, 거짓 그리스도,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計劃)을 방해하기 위해서 귀신(鬼神)은 거짓 진리 체계와 교리를 만들어 장려하여 세상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鬼神)이 아무리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방해하려고 해도 그가 뜻하신 구원(救援)의 계획은 파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4) 미혹(迷惑)하는 영(靈)인 귀신(鬼神)(딤전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4:1) 여기에서 미혹(迷惑)은 “길을 잃게 한다, 속인다, 세상 것이 크게 보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미혹의 귀신(鬼神)이 미움과 어둠과 사망(死亡)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迷惑)하며 죄에 빠지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인격과 지배에 대한 자신의 반역 의지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귀신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그 미혹에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술에 빠지고, 여색 남색에 빠지고, 채팅에 빠지는 것은 미혹의 귀신 때문입니다.

(5) 점치는 귀신(鬼神)(행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鬼神)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지라”(행16:16) 손금보고, 관상보고,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봐준다는 것은 귀신(鬼神)의 역사입니다. 점치는 귀신은 과거는 압니다. 그러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점쟁이가 자기 죽을 날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6) 눌러 아프게 하는 귀신(鬼神)(행10:38, 눅8:30)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귀신(鬼神)은 사람을 누릅니다. 신경계통, 근육계통, 소화기계통을 눌려서 아프게 합니다. 사울 왕이 비참하게 죽은 이유는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대상10:13)와 같이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사람의 길흉을 말하고, 생사화복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월권이요, 거짓입니다. 생사화복은 하나님만 주장합니다(신30:1).

3) 성경적인 귀신(鬼神) 퇴치법

성경에서 귀신을 퇴치하는 방법은 목회자나 축사하는 사람의 능력에 의하며 좇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입니다. 마12:28에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막9:17절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막9:25) 귀신이 퇴치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귀신을 퇴치할 때는 성경이 가르친대로 해야 합니다. 필자는 귀신을 퇴치 할 때 특히 조심할 것은 무속적인 방법이나 물리적인 어떠한 방법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필자의 목격에 의하면 귀신을 퇴치한다면서 복숭아나무 가지로 매질하고, 몸의 급소와 눈을 짓누르는 등의 압박을 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들은 앞서 언급한 전통적인 무속신앙의 귀신 퇴치방법으로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鬼神)을 퇴치함
우리 주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퇴치하셨고 또 제자들에게도 권세를 주어 퇴치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믿음과 주님이 주신 권세로, 말씀으로 꾸짖어 쫓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첫째 천국 복음을 전하고, 둘째는 인간을 해치는 귀신의 일을 멸하려 오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서 25차례나 귀신(사탄)을 퇴치한 언급이 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14:12)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鬼神)을 퇴치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권세로 귀신(鬼神)을 퇴치 함(마10:1)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16:17)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상속받은 자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모든 악령을 제어할 권세가 있습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무당들이 굿을 하고 점을 치는 데 신접이 안 될 때가 있는데 그 곳에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행16:16절에 점치는 귀신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무당들이 점치는 것은 귀신에게 신접되어 점을 치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면 귀신이 무당에게 신접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권세를 가진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귀신은 자연히 물러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쫓는 권능을,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권세는 특수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성경 적인 귀신의 역사를 알았으니, 귀신의 역사를 한국의 전통적인 귀신(鬼神) 퇴치 방법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귀신을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6. 한국 전통적인 귀신(鬼神) 퇴치방법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귀신론(鬼神論)은 한국 무속인 귀신관과 혼합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속신앙의 샤머니즘(무당)은 귀신을 추방하는 것을 중요한 본업(本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축귀(逐鬼)의 방법으로 구타(毆打)법을 사용하여 환자의 신체를 구타하여 괴롭혀서 귀신(鬼神)을 내쫓는다는 식의 해괴한 행동이 교회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귀신을 괴롭혀서 내쫓는 것은 무속의 축귀(逐鬼)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내에도 이런 관념과 기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귀신(鬼神)에게 있다.”라고 무속(巫俗)과 같이 단정하고 귀신(鬼神)을 내쫓는다고 하여 멀쩡한 사람에게 소리 지르고 눈에 압박하고, 음란 귀신을 내쫓는다고 국부를 손으로 압박하는 구타(毆打)법과 벼락같은 호통을 치고 소리치는 것 등은 무속의 경압(傾壓)법과 일치하는 귀신을 내어 쫓는 방법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어느 교회에서는 귀신(鬼神)을 내쫓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환자를 때려 초죽음이 되게 했습니다. 이런 것은 세속(世俗)무속신앙 풍습에서 귀신들이 벽사의미 있는 복숭아나무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본 딴 것입니다.

이런 풍토(風土)는 무속신앙의 신앙 형태가 기독교 속에서 융합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목회현장에서 교회의 부흥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많은 현상들을 보았습니다. 부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심지어 최면술(催眠術) 학원에 많은 목회자들이 수강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수 배워서 교회에서 또는 부흥집회 능력자로 인정 받고자하는 행위가 아니가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의 일부 교회의 대형 집회와 부흥회는 샤머니즘에 있어서의 부락제와 무당의 단골판과 흡사합니다. 무속신앙(巫俗信仰)의 3가지 직능 즉 사제직과 의무직과 예언(점)직인데, 이 직능의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나타납니다. 본 주제는 무속신앙의 귀신론 으로서 한국인들은 모든 병은 귀신(鬼神)영향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무속인의 의무 기능인 질병치료 수단으로 한국 전통적인 귀신(鬼神) 퇴치방법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7. 나오는 말

한국의 샤머니즘은 외래종교(外來宗敎)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수 천년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내려오면서 민족성, 사고방식, 신앙(信仰)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의 샤머니즘의 특징은 끈질긴 생명력과 놀라운 수용력이 있습니다. 대륙에서 불교(佛敎), 유교(儒敎), 도교(道敎) 등의 외래종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크게 번창하기도 했으나 어느 외래종교도 샤머니즘을 완전히 제압한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 외래종교가 샤머니즘에 흡수되고 변형되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타종교의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으면서도 샤머니즘 자체는 변질됨이 없이 발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그동안 목회현장에서 교회의 부흥을 빙자한 수많은 샤머니즘적인 현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심각성을 느낌에는 멀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이 무속신앙(巫俗信仰)의 귀신 축귀 방법으로 환자의 신체를 구타하며 괴롭혀서 귀신(鬼神)을 내어 쫓는 구타법, 공순법, 공물법 등이 언급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내에도 이런 관념과 기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상이 종종 많이 있습니다.

필자에게 상담전화가 온 내용인즉 병을 낫기 위한 안찰 기도를 받았는데, 사람들이 붙잡고 온 몸에 안찰기도를 하여서 새파랗게 멍이 들었고, 어떤 성도는 음란 귀신이 들었다고 급소에 안찰기도를 하여 실신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구타법(안찰기도)으로 죽게 하는 사건, 벽력같은 호통으로 강대상을 치고, 인격을 경멸하는 경압법 같은 것은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 유래된 방법들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임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진리의 반석위에 굳게 선 바른 교회의 자세를 확립하고 말씀을 중심한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칼럼 글


▲ 에덴동산 추정 지도

‘문명의 창세기’ 저자인 영국의 고고학자 데이비드 롤 박사가 국내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 참석, ‘성경에 기록된 에덴동산의 위치가 오늘날 이란 북서부에 위치란 아드지 차이 골짜기’라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강연했다.

에덴동산 발원 4개의 강 통해 위치 추적

롤 박사는 3일 오후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한민대 주최 ‘제7회 한민족 국제학술대회’에 강사로 나서서 에덴의 동산의 위치에 대해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강연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1998년 ‘문명의 창세기’라는 책을 통해 발표한 내용이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이 책은 1987년 발표된 영국의 레지널드 아서 워커(1917-1987)의 논문 ‘에덴땅’의 내용에 롤 박사가 후속 연구를 통해 알아낸 사실들을 덧붙여 펴낸 책이다.

롤 박사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 대한 지리적 묘사와 면모를 살펴 에덴동산의 위치가 오늘날 이란 북서부 아드지 차이 골짜기와 동일시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현재 이 지역의 중심에는 타브리즈라는 대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4개의 강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통해 에덴동산의 위치를 추적했다. 추적의 힌트는 △4개의 강이 에덴동산에서 발원한다는 것과 △그중 2개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는 나머지 2개의 강, 즉 기혼강과 비손강의 위치를 추적해 에덴동산의 위치를 찾고, 2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들 강과 관련된 지명(구스, 하윌라) 및 에덴동산에 대한 또 다른 면모의 확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나갔다.

기혼은 오늘날의 아락세스, 비손은 우이준

그는 먼저 △지금의 아락세스 강(최근에는 아락스 또는 아라스로 불림)이 8세기에만 해도 ‘가이훈’이라 불렸고, 19세기에는 ‘지크혼-아라스’로 불린 것과 △빅토리아 시대에 편찬된 성서어휘사전과 해설서에 ‘기혼-아라스’라는 이름이 나오는 사실에 입각해서 기혼 강을 아락세스 강과 결부시켰다(이하 설명 그림 참조).

따라서 그는 북동쪽 기혼, 북서쪽 유프라테스, 남서쪽 티그리스라면 비손을 찾을만한 곳은 남동쪽밖에 없음에 주목하고 비손 강에 해당되는 강을 찾았다. 이 지역을 흐르는 ‘유일한’ 큰 강인 우이준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강 이름의 음운변화 설명을 통해 ‘비손’이 바로 ‘우이준’임을 증명했다. 우이준(Uizhun)에서 첫 모음 ‘U'을 빼면 이준(izhun)이 남는데, 음운변화를 고려하면 성경에서 나오는 이숀(ishon)과 결부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롤 박사는 “이렇게 볼 때 에덴은 오늘날 이란 북서부 아드지 차이(옛 이름은 메이단) 골짜기와 동일시 할 수 있다”며 “이 지역의 중심에는 타브리즈라는 대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고 밝혔다.

데이비드 롤(David Rohl) 박사

데이비드 롤은 베스트셀러 「세월의 풍상(A Test of Time), 도서출판 해냄」을 통해 고대 이집트의 새 연표를 제시함으로써 성서의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도록 해 주었다. 그는 흥미진진한 시간 여행을 통해,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중요한사건과 인물들의 역사적 진위를 입증해 주는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또한 국제적인 찬사를 받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3부작 <파라오와 왕들>의 캐스터로 직접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을 여행하면서 「문명의 창세기, 도서출판 해냄」를 위한 증거 자료를 수집했다. 쿠르디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을 탐사한 뒤에는 바레인 섬을 답사했고, 세 차례에 걸쳐 이집트 동부 사막의 고고학적 유적을 조사했다. 동부사막 탐사에서는 최초의 파라오왕조가 수립되기 수세기 전에 이방인들이 나일 강 유역에 칩입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고대 암각화를 새로 발견했다.

데이비드 롤은 런던 대학에서 이집트학과 고대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오론테스강 연안에 있는 카데시에서 ‘고고학 연구소’의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현재 그는 학제학 연구소 소장이자 서식스 이집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병왕 기자 ⓒ뉴스미션

석가모니와 예수님 이름 속의 권위(權威)는 어떻게 다른가? (기독론)

▲서울 대현 교회 예배 설교 모습

1. 들어가는 말

어느 종교(宗敎)나 창시자가 있기 마련이며. 그 종교의 창시자 이름 속에는 그 종교 사상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 창시자 이름 속에는 권위(權威)가 따르게 됩니다. 이 시간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의 창시자 석가모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어떠한 사상과 권위(權威)가 있는 가를 비교 설명(說明)해 보고자 합니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신화적 인물(人物)이 아니라, 실존(實存)한 역사적인 인물(人物)이란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먼저 불교(佛敎)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이름 속에 있는 권위에 대해 살펴본 다음 기독교(基督敎)의 예수 그리스도 이름 속에 있는 권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석가모니(釋迦牟尼) 이름의 의미

불교(佛敎)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란 말의 원래 의미는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부처는 석가모니를 말하는 것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한 사람의 <인간>을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불교는 다불 사상(하나의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를 섬기는 사상)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아미타불, 미륵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약사여래보살과 같은 신과 같은 영원한 존재로서의 부처님을 더 섬기고 있는 현실입니다. 처음에는 무신론적이었던 불교도 어느 사이에 <영원히 실존하는 부처>의 존재(存在)를 인정하는 형태로 변모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사색을 좋아하는 사상가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80평생 유랑한 선생이며 지도자일 뿐입니다.

이상의 명제들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입증해 줍니다. 석가모니는 어느 날 주위의 요청으로 제자 밧카리를 병문안 한 일이 있었습니다. 병이 너무 위독해서 그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제자 밧카리는 입을 열어 소원하기를 “대덕이시여! 저는 이제 마지막입니다. 병은 더해질 뿐이어서 아무래도 회복될 가망은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 소망으로 세존의 모습을 우러러 뵈옵고 두 발에 정례(최대의 경례)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밧카리여! 이 나의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이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를 신(神)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청을 거부하고, 죽어 가는 제자에게조차 “너는 나보다는 법(法)을 보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석가모니 부처가 멸도(죽음)에 들어가기 전에 수제자 아난을 불러오게 한 후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아난이여! 너는 스스로 괴로워하여 스승이 멸도에 들어가고 나면 역시 해탈(解脫)할 때도 없을 것이라고 슬퍼할 것은 없다. 내가 도를 이룬 이래 설(설법)해 온 일체의 법(진리)과 계(계율)야말로 곧 이는 너의 스승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석가)를 의지하지 말고, 너의 마음을 의지하라. 나는 세간의 아버지며 세간의 친구이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는 자기를 신격화(神格化) 하거나 신앙(信仰)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는 세간의 아버지 친구라고 하여 인간 이상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었고, 그리고 자기가 죽고 난 후 불상(佛像)을 만들어 섬기는 일 하지 않도록 당부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후세 불자들이 이를 유념치 않고 별의별 불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우상불교가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본명(本名)은 <고타마 싯달르타>이며. 기원전 6세기경 인도, 지금 네팔 지방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 성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위와 풍요를 누리지만 20세를 넘어서면서 처음으로 사멸의 세계로 숙명에 지워진 채 태어나는 인생의 본행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서 29세 때 인생(人生)의 생(生) 노(老) 병(病) 사(死)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고 번민하다가 처자를 버리고 출가(出家) 했습니다.

그는 6년 동안 고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수행과 신적인 능력으로 인생의 생노병사의 해결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6년간 동안 고행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되고 결국 극단적인 고행(苦行)이나 극단적인 괘락(掛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에 석가모니는 중도의 명상에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가르침을 전파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붓타>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붓타>란 인도 고어 산스크리트어로서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붓타> 라는 발음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불타>이며 그 약칭이 불(佛)입니다. <붓타>는 원래 종교적 성자를 일컫는 일반적인 말이었는데, 이것이 후세에 와서 불교의 전문 용어가 되었습니다.

1) 석가의 여래(如來) 십호성(十號性)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가 어떤 분인가를 알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불교의 경전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석가모니 부처의 공덕성을 나타내는 열 가지 명칭인 십호(十號) 성 이름이 있습니다. 각각의 명칭은 응공, 전등각자,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타, 세존 등이며 간략하게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1) 응공(應供)
응공(應供)이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응공 이름은 중생들로부터 공양(供養)을 받을 만한 덕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공양의 풍속은 인도에서 종교적 성자(聖者)나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음식이나 옷을 공급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공양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하는 것이 공양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공양을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 하여 응공(應供)이라고 합니다.

(2) 전등각자(傳燈覺者)
전등각자란 “올바른 깨달음 얻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전등각자 이름은 일체(一體)의 온갖 우주간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서, 즉 세간(世間)의 지혜를 두루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전등각자라고 합니다.

(3) 명행족(明行足)
명행족이란 지혜와 실천이 갖춰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명행족 이름은 명(明:지혜)과 행(行:실천)이 갖춰진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지혜로 법(진리)을 밝게 보고, 밝게 아는 지혜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완전히 갖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 선서(善逝)
선서(善逝)는 다시는 윤회(輪廻)를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선서 이름은 일체 번뇌(煩惱)로 가득 찬 고해 바다인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윤회세계를 잘 건너서 깨달음의 세계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다시는 생사(生死)의 바다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다시는 윤회(輪廻)를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에서 선서(善逝)로 부르는 것입니다.

(5) 세간해(世間解)
세간해(世間解)란 세상(세간)을 잘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세간해 이름은 세상의 진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윤회(輪廻)를 하지 않으려면 세간을 잘 알아야 하므로, 석가는 세상의 모든 생활원리를 알아서 고통받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깨우쳤다는 뜻에서 불리는 이름이 세간해입니다.

(6) 무상사(無上士)
무상사(無上士)는 “최상의 인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무상사 이름은 중생 가운데서 그보다 더 이상 가는 스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신의 도움이나 인간 스승에게서 배워서 안 것이 아니기에 다른 스승보다 높은 진리를 깨달으셨으므로 “더 이상 위가 없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이보다 더 완전한 이가 없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다른 말로는 무상장부(즉, 최상의 인간이란 칭호를 듣게 되는 분)가 있습니다.

(7) 조어장부(調御丈夫)
조어장부 (調御丈夫)는 “마음을 조어하는데 있어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조어장부 이름은 석가모니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절하여 일체의 번뇌를 버리고 해탈(解脫)에 이르셨다는 뜻으로서 마음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심심불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업보(業)를 제어하지 못하면, 윤회의 속박에서 해탈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8) 천인사(天人師)
천인사(天人師)는 천인(天人)의 대도사, 또는 신과 인간의 스승이란 말입니다. 즉 선과 악을 잘 가르쳐서 도법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게 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천인사 이름은 천인(天人:하늘사람)의 스승이 되는 사람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 천인사입니다.

(9) 불타(佛陀)
불타(佛陀)란 “진리를 깨달음을 얻으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즉 부처를 의미합니다. 부처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붓다”를 한자로 음역한 “불타”가 우리말로 읽혀지면서 부처로 변화된 것입니다. 부처라는 말이 처음에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고타마 싯달르타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부처는 진리를 깨달은 수행자로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이름은 진리를 깨달음 사람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불타(佛陀)입니다.

(10) 세존(世尊)
세존(世尊)이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으로서, 세상에 있는 모든 스승들 가운데 으뜸이 되며, 모든 인간과 똑같은 인간이지만 누구보다 위대한 수행을 통하여 가장 높은 진리를 깨우치고, 다른 이에게 설법(說法)하여 세존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써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尊貴)한 사람이란 의미가 됩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의 십호(十號)성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석가모니 부처가 결코 신(神)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불교(佛敎)는 석가모니 부처를 교주로 창시된 종교(宗敎)임이 틀림없지만, 십호(十號)성에서 소개한 석가모니 부처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된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예찬의 극치일 수는 있어도 석가모니 부처가 초자연적인 절대 존재(存在)가 아니고 단지 위대하면서도 뛰어난 <인간>임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이름과 의미

불교(佛敎)의 창시자인 석가(釋迦)는 자신의 신성(神性)이나 권위(權威)를 부정하면서 불교교단을 영도했습니다. 석가는 자신의 지도력을 부인하고 하나의 권위로서 그의 가르침인 교법(敎法)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너 자신이 너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어떤 자신 밖에 있는 것에서 피난처를 구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피난처가 되는 교법에 굳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석가모니의 교법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서 교법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법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하면 석가모니와 비슷한 불타(佛陀)가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근본적으로 그 자신이 성취했던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권위적(權威的)인 요소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자신의 신격화(神格化) 현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거절하면서 40여 년 동안 자신의 깨달음을 설법하다가 80세에 제자 아난다의 팔베개에 안겨 돌아가시면서 “생사는 필연이니 근행으로써 각자의 마음을 스승 삼아 해탈의 길을 찾으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을 뿐 권위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

불교(佛敎)가 석가모니 부처가 창시한 사상을 믿는 종교라면, 기독교(基督敎)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바로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연대(年代)를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점으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歷史)의 획을 그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을 기원전(B.C.)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는 A.D.(라틴어로 주님의 연대에서 Anno Domini 의 약자)를 사용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의 기원이 되며 분기점을 이루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지지하든 반대하든 오늘의 세계역사는 주님의 탄생의 기점의 연대(BC와 AD)를 쓰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기독교(基督敎)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름의 칭호에 대하여 가족관계를 중요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쪽이 예수님의 성(姓)이며 어느 쪽이 이름인가를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인 칭호의 뜻을 알아보는 것이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예수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전에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예고할 때에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고 말한 대로 미리 예언된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유대인들의 사이에서 흔한 이름이며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또는 “예수아”라는 인명의 헬라식 발음입니다.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위에 오신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주어진 개인적인 이름입니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로서 예수님의 특별한 직분,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을 가진 직명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베들레헴 지경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선포할 때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고 알려 주었고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마16:16)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그 신앙고백을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원래 기름을 붇거나 바르는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거룩하게 쓰기 위하여 구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제사장을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할 때(레8:10)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할 때(왕상19:16)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눅1:18) 그리스도라는 말은 인류의 구세주로서 하나님 앞의 제사장이시며 만민을 다스리는 왕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인 선지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처음으로 분명히 고백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메시아의 역할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는 분으로 보이셨습니다.

(3) 주(主)
초대 교회 때에는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였습니다. “예수는 주이시다”라는 표현은 초기 신앙의 고백 중에 하나이며, 예수를 주(主)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을 유대 지도자들은 신성 모독이라고 반대하였고 로마인들은 황제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주님>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주(主)라는 말은 재산이나 노예의 소유주로서 절대 주권자의 대명사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주(主)라고 불렀는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주(主)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인정하는 말이 됩니다. 누가복음2:11에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고지할 때에 “그리스도 주(主)시니라”고 전하였고, 의심 많은 사도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나의 주(主)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요20:28)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주(主) 되심을 강조하여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롬1:4)라는 복합된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권세를 예수께 돌리는 호칭입니다.

본래 “주”라는 뜻은 “주인”(마20:8)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만드신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예수님의 것입니다(요1:3, 11). 예수님께서 종려주일 아침에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셨을 때에 나귀의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마21:3)는 말에 자기의 나귀와 나귀 새끼를 지체하지 않고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우리 주 예수”라고 할 때 성도는 “성도의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예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라고 신앙과 결심을 가지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주”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여러 이름들 중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주”라는 이름은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통치권과 하나님으로서의 경배권을 뜻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4) 인자(人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말할 때에, 어떤 다른 호칭보다도 인자(人子) 라는 호칭을 더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마태, 누가, 마가 세 복음서에만 70여회나 이 호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칭호를 사용한 것은 당시 메시야란 말이 정치적 구원자로서의 오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메시야라는 표현보다 이 인자란 칭호를 좋아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 자신만이 이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마태16:16에서 주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호칭을 세 가지 경우에 즉 자신의 지상 사역과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장래 영광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이 호칭은 인자를 영원한 왕국을 통치하는 분으로 표현하는 다니엘서에서 끌어온 말입니다(단7:3). 인자란 호칭은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5)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의 뜻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요3:1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1:14)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2:6,7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 같이 되었고”라고 하셨습니다. 요10:29-39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란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께서 기뻐하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6) 임마누엘
임마누엘이란 이름도 예수님의 명칭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은 이사야7:14, 8:8에 예언한 것인데 <마태>사도가 이 곳에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말입니다(마1:28) 천지에 있는 가장 높고 귀한 이름 <임마누엘>, 이것은 신약 성경에 단 한번 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명칭입니다. 그것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는 말씀대로 택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택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것은 믿는 자요(행13:48) 죄인인줄 아는 자요(마1:21)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자(눅18:7)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입니다.

(7) 평강의 왕
평강의 왕은 예수님께서 택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평강)을 주시려고 오셨음을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찬양의 내용입니다. 노아 때 범죄 한 온 세상은 물로 심판을 당하여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죄는 소돔과 고모라 도시를 심판하여 불로 태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 롯과 두 딸은 구원받았습니다. 죄는 인간에게 평화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죄의 심판과 결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평화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평강은 결코 땅의 것, 곧 없어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한 평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14:27에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이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 기묘자(奇妙子)
기묘자란 이름의 뜻은 “너무 신기하고 오묘하여 인간으로서는 가히 해석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이런 이름을 가지기에 합당한 이유는 남성의 간섭 없이 처녀에게서 출생하신 일과 죄가 없는 분이 정죄를 받아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과 완전히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과 40일간 부활한 몸으로 계시다가 대낮에 500여 성도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신 일과 같은 기이한 일 때문입니다. 가나 혼인집에 가셨을 때 모자라는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였습니다. 예수님께 오면 병든 자는 모두 치료되었습니다. 죽은 자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에는 인간이 해석 못할 일이었기 때문에 기묘자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9) 모사(謀士)
모사란 이름의 뜻은 “일을 계획하고 설계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누가 이것을 계획하시고 설계를 하셨습니까? 천지만물을 조화롭게 창조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창조의 순서도 잘 살펴보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들어 인간들이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사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시사 우리가 지혜롭게 인생을 살도록 살펴 주셨습니다. 또한 이 이름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지모(智謀)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2:3에서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11:33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구원은 천국만큼 높고 우주만큼 넓고 영생만큼 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영원한 지모(智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독특한 아이디어까지도 주시는 주님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속의 권위(權威)

(1) 구원(救援)의 권위
마1:21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일러 준대로 예수님의 이름은 인간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자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하여야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요사이 일부 신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를 가르치다가 자기 교단에서 제명처분을 받았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불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요1:12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행4:12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밝혀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라고 하셨습니다.

(2) 치료(治療)의 권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할 때 한평생 걷지도 못한 자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3:6~8)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동일하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2/3를 치료 사역에 할애하셨습니다. 현대와 같이 의학이 발달한 사회에서도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큰 문제인데, 예수님 당시의 원시적인 의술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질고로 인한 고통이 대단했을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질병은 죽음을 전제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욕망을 꺾고 절망에 빠뜨리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병 고치는 능력은 모든 사람의 비상한 관심거리가 되었고, 그것으로 예수님 당신이 보통 사람 이상의 신적 존재임을 당신의 백성에게 인식시키셨습니다.

4. 나오는 말

예수님의 권세는 부활(復活)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며, 또 이것을 제자들은 신앙을 통해 받아들이는 데에 반하여, 석가(釋迦)의 이름의 권세(權勢)는 교리와 법을 주는 그 자신의 자율적 지위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基督敎)의 권위와 자율적인 자기의 힘을 향한 불교(佛敎)의 권위에는 큰 차이점이 있으며, 석가(釋迦)의 권위란 각성(자각)에 의거하며, 법의 이해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법(진리)은 성경과 같은 권위나 능력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佛敎)의 창시자의 권위는 힘(타력)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는 예수 이름의 권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救援)이 불가능합니다.

기독교(基督敎)는 예수를 믿고 죄(罪)에서 속죄함 받아 구원을 얻게 되는 타력(打力)의 종교입니다. 예수의 신성의 권위는 석가 이름 권위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 중심적이고, 석가(釋迦)의 권위는 철학적이고, 지혜서 중심적이었습니다. 예수는 충성과 순종을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합니다. 불교의 석가는 예수와는 정반대로 충성과 복종을 원치 않고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자각(마음)을 스승 삼아 실천을 요구합니다. 십호성(十號性)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창시자의 위대한 덕성을 하나의 이름으로는 다 나타낼 수 없으므로 열 가지 이름이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같이 어느 것도 권위적이고 초월적이고 신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결코 초인간이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으며, 또한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인간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어이없게도 석가모니를 신격화해서 그를 섬기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를 “구원 실현의 부처”라고 믿고 있습니다.

서재생 목사입니다. 강의 안은 본인의 저서인 불교권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와 기독교 주제별 비교론 책에서 발취한 비교 종교 특강 입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칼럼 글
▲ 이승구 교수
칼빈 신학을 다루면서 이단 문제를 다루어 달라는 요청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이단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며, 우리 시대의 영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요청이라고 여겨진다. 이 글에서는 일단 교회사에서 나타났던 명백한 이단들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생각해 보고, 칼빈 시대에 나타난 잘못된 사상과 실천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그 후에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이런 이단이 융성할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를 마련하는 몇 가지 본문들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명확히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나 사이비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을 시도해 보도록 하겠다.

이런 작업이 중요한 것은 칼빈의 가르침은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준과 같은 것이므로 이와 같은 노선에 서 있으면 이단이나 사이비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분명하고 바른 신앙의 길에 서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의는 단순히 어떤 것이 이단인지 아니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장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우리 주변에 이단 사상들은 물론이거니와 사이비 신앙적 요소가 근절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는 것이다.

I. 명백한 이단들

이 항목에서 논의할 것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성경에 근거해서 이단이라고 규정했던 바들을 중심으로, 이런 명백한 이단적 사상에 대해 칼빈이 어떤 입장을 표명했는지를 알아보고, 그에 근거해서 자신이 살던 시대의 잘못된 신앙의 풍조와 사상에 대해서 칼빈이 말한 바를 찾아, 칼빈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으며 이단적이라고 여긴 사상과 실천들을 논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여기서 언급하는 사상의 요소들을 자신의 가르침 가운데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단적인 가르침을 자신도 모르게 가지는 것이며, 그것을 유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주 명확히 정리를 하여 우리 안에 이런 이단적 사유나 실천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단들

1) 아리우스주의(Arianism)
아리우스와 아리우스파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그가 이들의 이단성을 어떻게 지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가 된다:

아리우스(Arius)는 … 그리스도께서 다른 피조물들처럼 창조되셨고 그가 존재하게 된 시발점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그의 다재다능한 간교함을 그 은신처에서 끌어내기 위하여 …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시오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시다(consubstantial)고 선언하였다[니케아 회의, 325]. 그러나 아리우스파 사람들은(the Arians) “동일본질”(homoousios)라는 단어를 지극히 사악하게 미워하고 저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의 불경스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1)

칼빈은 이들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고 진정으로 전심으로 믿었다면, 그가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심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를 부인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논의하는 것이다.

2) 양태론(Modalistic Monarchianism)
이와는 정반대로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주장이 어떻게 이단적이지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며 비판하고 있다:

그 후에는 사벨리우스가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 어떤 구별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 성부가 성자요, 성령이니 계급도 구별도 없다고 하여 옛 노래를 다시 부른 셈이다. 그 당시 마음에 경건을 지닌 의로운 학자들은 그 사람의 사악함을 깨뜨리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three subsistences)가 계심을 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2)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의 견해가 이단적이라는 것은 이미 칼빈 이전에 확립된 것이므로 칼빈은 이와 같은 견해의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정통적 삼위일체 교리를 아주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성자는 성부가 아니고, 성령도 성자가 아니시며, 그들이 각기 고유한 존재(peculiar subsistence)를 지니신다는 이 믿음.”3) 바로 이것이 정통 기독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이에 따라서 이전 시대에 이를 벗어나 말하거나 설교하면서 교회에 영향을 미치려 하던 아리우스주의나 사벨리우스주의와 같은 명백한 이단들을 칼빈은 정확히 언급하여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3)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뿐만 아니라 칼빈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이와 같은 정통적 삼위일체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제시하는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53) 같은 사람을 그 시대의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삼위일체론자들과 같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이단이라고 단언하였다.4) 이와 같은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칼빈은 “자! 이제 경건한 독자들은, 지금까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해 온 온갖 비난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반박된 것을 인식하리라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5) 그러므로 칼빈은 이단들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를 반박하는 것이 바른 가르침과 신학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4) 칼빈 이후 시대에 나타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들
칼빈 이후에 나타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들로는 소시누스주의(Socinianism)와 유니테리언(Unitarian),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모든 후대의 신학들, 그리고 삼위일체를 이야기 하나 정통적 삼위일체론에서 교묘히 벗어나는 이들이 다 삼위일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단에 속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야만 한다.6)

2. 기독론적 이단들

1)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단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던 아주 뛰어난 인간 예수에게 세례 때에 하나님의 권세가 임하셔서 사역하게 하셨다가 십자가에서 그 권세가 떠나갔다고 주장하는 에비온주의자들(Ebionites),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에게 요한의 세례 때에 하나님의 속성인 비위격적 로고스가 임하여 사역하게 하셨다가 십자가에서 떠났다고 주장하는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의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 요한복음을 거부하면서 동정녀 탄생으로 탄생하였으나 단지 사람인 그리스도는 로고스가 아니셨다고 주장하는 알로기파(the Alogi), 사모사타의 바울의 견해를 포함하여 본래 아들이 아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주장하는 양자론(adoptiism), 그리고 영원에서 한동안 성자가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 등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단들이다. 칼빈은 이런 이단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는 사람이셨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소시니우스주의(Sociniansim)의 이단성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단들
:가현설(docetism),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us, 310~390)

칼빈은 이전 시대의 정통적 성경적 견해를 따르면서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실제로 가지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가현설(Docetism)을 강하게 비판한다. 칼빈은 마르시온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그저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상상하였다고 하면서 비판한다.7)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지니고 계시므로 그가 우리를 만지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8)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육체로 보이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유령이 아니심을 친히 증명하신다”고 단언한다.9)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의 온전성을 부인한 아포리나리우스(Apollinarius)의 사상도 칼빈은 강하게 비판한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영[로고스]을 지니셨으나 (인간적) 영혼은 없으셨고, 그리하여 그는 절반쯤만 사람이셨다고 주장했다.”10)

3)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을 오해한 이단들
:유티케스주의(Eutychianism),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신성과 인성이 연합하여 두 성질이 합하여져서 하나의 본질을(fused into a single nature) 형성했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그리스도는 “신적인 몸”을 지녔다고 주장한 유티쿠스(Eutychus, or Eutyches, 378-454)를 따르는 사람들과 이를 발전시켜 그리스도는 아주 한 본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단성론자들(Monophysitism)도 잘못된 것임을 칼빈은 분명히 한다.11) 그런가 하면 신성과 인성은 그 나름의 위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결국 그리스도 안에 두 인격이 있다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Nestorius)주의자들은 이단임을12) 칼시돈 정의(451)에서 명확히 선언되어졌기에 칼빈도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13)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분하기 보다는 서로 완전히 분리시켜서 두 분의 그리스도를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14)

칼빈은 또한 자기 시대의 세르베투스가 유티케스주의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몸을 삼켜 버렸다”는 “정신 나간 사상”을 말한다고 하면서 강하게 비판한다.15) 그리스도께서 “결국 하나님도 사람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유티케스와 칼빈 당대의 세르베투스의 주장이라고 언급하면서 비판하는 것이다.16)

4) 칼빈 이후에 나타난 기독론적 이단들
칼빈 이후에 나타난 기독론적 이단으로는 이 땅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신성에 속한 성질을 전적으로나 일부를 실질적으로 비우셨다는 극단적 형태의 케노시스(Kenosis) 이론들과 그리스도를 그저 사람으로만 여기려는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를 생각할 수 있다. 칼빈은 케노시스 이론들이 나타나기 전에 활동하였으나 그의 저작 전반에서도 그러할 뿐만 아니라 특히 빌립보서 주석에서는 그가 마치 케노시스 논쟁을 지켜보는 것처럼 후대의 케노시스 이론을 효과적으로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그러니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 실질적인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들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또한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으며,17) 혹시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18) 대한 칼빈의 입장이 어떠할지는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 성령론적, 계시론적 이단들

1) 노바티아누스주의(Novatianism)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나아갔던 또 하나의 이단이 3세기 중엽 이후에 강하게 나타났으나 그리 오래 가지 못했던 노바티아누스주의이다. 칼빈에 의하면 이들은 히브리서 6장 4~6절과 10장 26절 말씀들을 “잘못 오해하여 그들의 이단적 사상의 근거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19)

2) 재세례파 열광주의자들(Spiritualists, ἐνθουσιασταί)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고 하는 칼빈의 말은20) 이 맥락에서 특히 인용할만하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솔하게 저버리고 결별하면서도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몽상들을 붙잡는다”고 하면서21) 이들을 강하게 탄회(坦懷)하는 칼빈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일부 재세례파 사람들은 모종의 광적인 무절제 상태를 영적 중생으로 오해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죄 상태로 회복되었으므로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인도자이신 성령을 따르며 그가 주시는 충동 아래 있으면 절대로 곁길로 빠질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데, 이런 주장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칼빈이 비판하고 있음을 잘 알게 된다.22)

3) 성경 이외의 계시를 인정하는 일의 이단성
이와 같은 정통적 이해와 이에 충실한 칼빈의 모습을 볼 때에 성경 이외의 계시를 인정하는 일은 모두 다 이단성이 있다고 칼빈이 판단하리라는 것은 아주 명확하다. 몬타누스파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칼빈이 이들을 비판적으로 볼 것임은 아주 분명하고, 따라서 오늘날 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박태선, 통일교, 그리고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현대인 등 성경 이외의 것에 계시적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이들은 다 이단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4. 구원론적 이단들

1) 영지주의 (Gnosticism)
몸과 영혼을 날카롭게 구별하면서 몸을 천시하고 악한 것으로 보면서 영혼만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칼빈은 여러 번 강조한다. 칼빈 자신이 몸보다는 영혼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영지주의자들의 영육 이원론과는 아주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칼빈이 부활한 몸을 강조하며 영원 상태를 몸을 가진 상태로 강조하면서 말하는 부분을 들 수 있을 것이다.23)

2)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어거스틴과 같이 칼빈은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와 그의 추종자 셀레스티우스(Celestius 또는 Coelestius)는 원죄를 부인하면서 아담의 후예들의 죄악은 모두 “모방에 의한 범죄”라고 잘못 주장함을 강하게 비판한다.24) 이에 대해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이들에 대한 반박을 높이 사면서 논의하고 있다.25)

3)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펠리기우스의 사상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한 천주교회 안에도 잘못된 이해가 지속적으로 나타났으니 이는 결국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 결과였다. 예를 들어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우리가 선행을 하려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어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역사하는 은혜(operating grace)와 선한 의지를 돕는 “협력하는 은혜”(co-operating grace)라는 두 가지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였는데(Sentences, II. xxvi. 1),26) 칼빈은 이에 대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점은, 그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효력 있는 열심을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기는 하나, 그러면서도 사람이 자기의 본성으로 무언가 선을 추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하여 정확한 비판을 하고 있다.27) 논의의 요점은 이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에 우리가 협력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28) 이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칼빈은 “피터 롬바르드는 소망의 기초를 두 가지로 -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의 공로로 - 제시하는 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고 한다.29)

또한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우리가 타락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신학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30) 이것이 큰 문제라고 칼빈은 비판한다. 이들은 또한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지 않다”고 주장하는 데31)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노예라고 말하는 어거스틴에게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32) 칼빈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어거스틴의 다음 같은 말들을 인용하여 제시한다:

“성령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그 의지가 정욕에 사로잡히고 정복당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33)

“의지가 타락하여 악에게 정복 당했을 때에, 인간 본성이 그 자유를 잃기 시작했다.”34)

“사람은 창조함을 받을 때에 자유의지라는 위대한 능력을 부여받았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그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35)

“자연적 은사들은 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람들에게서 빼앗긴바 되었다.”36)

“우리에게는 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37)

“자유를 통해서 사람이 죄 가운데 있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형벌로 나타난 부패성이 자유를 필연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38)

“은혜가 모든 선행에 먼저 작용하는 것이며, 의지는 은혜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추종자로서 은혜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39)

“사람이 선한 의지를 갖기 이전에 하나님의 수많은 은사들이 선행하므로, 선한 의지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사들 가운데 속한 것이다.”40)

“오직 은혜만이 우리 속에서 모든 선행을 이루어낸다.”41)

한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끌레르보의 버나드의 말도 동의하면서 인용하고 있다: “저에게 의지가 없사오나 저를 이끄사 의지를 갖게 하옵시며, 제가 걸음이 더디오나 저를 이끄사 달리게 하옵소서.”42)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사람들은 심지어 자연적인 은사도 다 부패한바 되었다는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이 어떤 영적인 선을 조금이라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논의하는 것은 다 반-펠리기우스주의적인 것이고, 이런 입장의 논의들을 칼빈은 강하게 논박한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자기 당시의 천주교 신학들, 즉 오늘날 우리가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을 “오늘날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라고 언급하곤 한다.43) 그리고 그들이 “사실상 자기들의 조상 격인 펠라기우스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44) 특히 칼빈은 이런 자들의 오용에 반해서 어거스틴의 의도를 잘 밝히는 데 열심이다: “어거스틴이 인간의 의지를 은혜의 추종자라고 부르지만, 그는 선행에서 의지가 은혜 다음으로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다만, 구원의 첫째가는 원인을 사람의 공로에다 두는 펠라기우스의 악한 가르침을 반박하고자 하는 것뿐이었던 것이다.”45)

칼빈은 천주교회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사용하여 타락한 사람들은 “절반쯤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절반쯤 살아 있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복된 생명에 관한 한 완전히 죽어 있는 것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에베소서 2:5, 5:14, 요한복음 5:25 등의 말씀을 인용한다.46) 이와 같이 칼빈은 이전 시대에 명확히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들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에 이단적으로 나아가는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의 문제점을 아주 명확히 드러내어 주는 공헌도 하고 있다.

4) 반법주의(Antinomianism) 이단들
또한 칼빈 시대에 이제 구원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이런 사악한 생각은 머리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모세는, 율법이 죄인들 가운데서는 죽음 이외에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지만, 성도들 가운데서는 더 낫고 훨씬 탁월한 용도가 있다는 것을 훌륭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47)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율법 준수는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지, 구약 율법을 그대로 준수하는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 한 예로 주일과 안식일 문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칼빈은 “미신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이 뒤로 제쳐진 것이요, 교회의 품위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하여 다른 날이 지정된 것이다.”고 말한다.48)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완성과 연관된 변화이다. 그래서 칼빈은 “고대의 안식일이 나타내었던 바 그 참된 안식은 바로 우리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이 그 그림자를 종결지은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그림자와 같은 의식을 고집하지 말도록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49) 이 때 칼빈이 “교회들이 다른 날을 엄숙히 지정하여 모임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할 때50) 그 의미를 좀 주의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겨진다.

많은 분들은 칼빈이 꼭 주일이 아닌 날 예배를 허용한 것으로 이를 해석하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그러하나 이 때 칼빈은 주로 유대인이 안식일로 모이는 토요일을 고집하는 분들을 주로 염두에 두면서 이 말을 하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칼빈은 이 말에 “미신이 개입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이 오늘날 안식교와 같이 이날 주께서 안식일로 정하셨다고 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혹시 그 날 모여서 공식적 예배를 해도 정죄하지는 않겠다고 한 것이다. 다른 주석이나 논의 중에서 주일에 모여 예배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쉬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안식일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려는 이들에 대한 반박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에 대해서 칼빈은 “자신들의 규정을 고집하는 그런 자들은 안식일에 관하여 유치하거 더러운 미신을 조장하는 면에서 유대인들보다 세 배는 더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51)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 가운데서 신앙이 쇠퇴하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거룩한 모임들을 자주 부지런히 가져야 하고,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돕는 외형적 보조 수단들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또한 강조한다.52)

5)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이단들
오늘날에는 이에서 더 나아가서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이단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그리스도 속죄의 “결과적 절대적 필요성”(consequent absolute necessity)을 강조하는 칼빈이53) 어떤 태도를 나타내어 보이려는지는 명약관화한 것이다. <계속>

<각주>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LCC edition, edited by John T. Mc 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1. 13. 4 . 이하에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다음과 같이 약하기로 한다. Calvin, Institutes. 1. 13. 4.
2) Calvin, Institutes 1. 13. 4.
3) Calvin, Institutes 1. 13. 5.
4) 이에 대해서는 Calvin, Institutes 1. 13. 22를 보라.
5) Calvin, Institutes 1. 13. 29.
6) 이런 것들에 대한 칼빈적, 정통주의적 입장에서의 좋은 논의로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51, paperbak edition Grand Rapids: Baker, 1977), 288-89=이승구 역, <개혁주의 신론> (서울: CLC, 1988), 422-24. 그는 또한 사벨리우스주의의 후대적 변형으로 세르베투스와 야콥 뵈메의 사상, 쉘링과 헤겔의 사상 등을 언급하고 있다. Cf. Bavinck, The Doctrine of God, 290-93=
미국의 다큐멘터리 전문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이 30일 저녁 <예수의 진짜 얼굴은?>이란 특집 프로그램에서 첨단 컴퓨터 기술로 복원한 예수의 얼굴을 공개한다고 뉴욕포스트 등이 보도했다.


▲ 복원된 예수의 정면 얼굴©히스토리 채널

이번에 공개되는 예수의 얼굴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진 뒤 시신을 감싸는 데 사용됐다고 전해져오는 ‘토리노 수의’와 기타 정보를 토대로 멕베스 스튜디오 팀이 복원한 것이다.

이들은 수의 앞면과 뒷면에 남아있는 피와 먼지, 물자국들로 예수의 인상을 추정해 얼굴을 살려냈다. 그러나 컴퓨터로 되살아난 예수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얼굴과 닮지 않았다는 게 복원 작업에 참여했던 기술진들의 설명이다.

이들에 따르면 예수는 거무스름한 피부에, 키는 약 176.8cm이다. 흔히 알려진 예수의 인상과 달리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지지도 않았다.

또한 복원의 토대가 된 수의가 시신을 감싸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수의 상의 얼굴 인상은 평면 이미지와 달리 일정 부분 왜곡이 있어 복원 작업에 걸림돌이 됐다는 게 작업에 참여한 기술진의 설명이다.

한편 토리노 수의는 1988년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에서 13~15세기 옷감이라는 결과가 나와 위조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 복원된 예수의 측면 얼굴©히스토리 채널

신혜숙 기자 ⓒ뉴스미션

출추: 아멘넷
나는 왜 이런 운명(運命)을 타고 태어났습니까? 라고 하는 상담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당황스럽고 억울하고 좋지 못한 일을 당할 때마다. “내 운명은 왜 이럴까”, “나만 왜 이렇게 살지? ” 하는 식의 “운명(運命)”을 한탄들 합니다. 목사님! 운명은 거부할 수 없는 사슬입니까? 운명론(運命論)이란 뭐예요?


▲탑골공원 거리 점술 사진

우리 민족은 불교(佛敎)와 유교(儒敎)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모르지만 모든 불행을 숙명적(宿命的)으로 해석하면서 인생의 불행이 휘몰아 칠 때 자기의 운명론(運命論)으로 맡기고 삶을 저주하며 불행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基督敎)문화에서는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서나 가혹한 고난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칠지라도 자신의 환경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이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사고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 생각은 “조상 때문에”, “내 사주팔자(四柱八字)때문에” 하면서 내 운명론으로 돌리면서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1, 운명론(運命論)의 어원

동양사상(東洋思想)인 역학(易學)에서 인간의 운명론은 음양오행(陰陽五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많은 행성(行星)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까이 있는 행성으로 목성(木星).화성(火星).토성(土星),금성(金星),수성(水星),이 있습니다. 이 행성들은 태양이 발산하는 천기(天氣)를 받아서 또 하나의 기(氣)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목기 ,화기, 토기, 금기. 수기의 기(氣)라 합니다. 이 목(木).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가지를 오행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행(五行)의 하늘의 천기(氣)가 땅의 지기(地氣)와 어울리면서 춘하추동(春夏秋冬)사계절이 생겨난다고, 사람도 태어나는 순간 어떤 오행의 기운(氣運)을 더 많이 받았느냐에 따라서 체질과 성격은 물론이고 운명(運命)까지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운명론입니다.

2, 운명론(運命論)의 의미

1)선천명(先天命)

인간은 수태되는 순간부터 오행의 구성 상태가 각기 다르게 결정되며, 수태 후 출산 직전까지 변화작용을 계속하면서 철저히 외부의 기(氣)와 차단된 자궁 속에서 자라나 출산의 순간을 맞게 되는데 출생하는 그 날의 일진에 따라서 우주 오행(五行)이라는 천기(氣)를 부여 받는다고 합니다. 그 오행의 상태와 불급의 차이에서 성별이 결정되고 체질과 용모와 성격이 형성되고, 질병에 걸리고 직업과 빈부귀천이 이루어진다고 하며 이것을 선천명(先天命)이라고 합니다.

2)후천운(後天運)

후천운이란 일생동안 살아가며 대운(大運;십년주기)과 세운(世運;일주기)에서 어떠한 오행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제각기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후천운(後天運)이라고 합니다. 선천적인 명(命)과 후천적인 운(運)을 총칭하여 운명(運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 가운데 운명론(運命論)에 잡힌 자들은 모든 것이 운명으로 결정되는 것이므로 체념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무슨 큰일을 결정 할 때는 점(占)쟁이나 역학(易學)자를 찾아서 그것이 내 운명과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어보고 결정합니다.

만일, 그 재미로 본 ‘오늘의 운세(運勢)’가 좋으면 은근히 기대하게 될 때는 이미 운명론의 사슬에 자신을 어느 정도 맡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점(占)이나, 사주(四周), 운명(運命), 길일(吉日)에 자기 인생을 맡겨서 사는 사람은 항상 곤고합니다. 왜냐하면 사주나 점에 의존해 살면 하나는 좋으면 분명히 하나는 나쁘기 때문에 굿(㖌)이나 고사나 부적의 필요가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굿하다 망한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운명론(運命論)자들은 항상 하루 시작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고 조금만 일진이 안 좋아도 “재수가 없느니”, “운대가 맞느니”, “운수가 사납느니”, “액땜을 했느니” 말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고 말씀하셨습니다.

3, 운명론(運命論)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사람은 누구나 미래와 자신의 운명(運命)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점술(占術)의 미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에 점(占)을 보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수는 점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재미 삼아 점(占)을 본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 재미가 함정이 되고, 그것은 자신의 삶을 사탄에게 의탁하는 것이며, 결코 재미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위대한 사상과 신앙과 인격은 다 고난의 산물입니다, 시련과 고통을 한국의 전통적인 운명론으로 비관하면서 도피주의자의 방법으로 응하지 말고,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하였습니다. 한국인의 운명론(運命論)은 우리 민족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삶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맡기고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고백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한국적인 운명론(運命論)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서양격언에“생각을 심어서 사상을 거두고, 사상을 심어서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서 성격을 거두고, 성격을 심어서 운명을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삶음을 좌우한다는 교훈을 담은 격언입니다.

동양적인 숙명론(宿命論)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체념하고 운명론에 순응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그 사람의 됨됨이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에 스스로 운명(運命)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삶을 교훈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문화입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의 칼럼 글

▲CTS TV 방송 “42번가의 기적” 1,2부 출연 사회자 박상규 집사와 함께 사진

본 주제 강의에 참석하여 오해하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불교를 너무 미화하고 있다는 오해합니다. 그러나 타 종교를 연구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종교를 처음부터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사상과 교리를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타종교를 이해하고 그 다음에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타종교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 불교와 기독교의 인간론은 어떻게 다른가를 기고 하고자 합니다.

1. 들어가는 말

누구나 인간(人間)이라면 한 번 정도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생(人生)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는데 이는 깊이 사색하지 아니하는 지성은 생각할 수 없고 성찰이 없는 생활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색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 파산의 선고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삶에 대한 사색이 깊으면 깊을수록 진지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창시자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인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오는 고뇌의 의문을 풀고자 하는데서 출발한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진면목은 인간론에 총망라 된다고 보면 됩니다. 두 종교의 인간론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부터 적지 않은 차이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인간론에서 인간 이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반면에 불교의 인간론에서 인간 이해 는 모든 존재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적인 현상을 전개시킨다는 연기론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통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업보 행위에 대한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수행을 통해서 고통스러운 세계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불경은 가르칩니다. 두 종교가 제시하고 있는 인간론에 대한 이해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불교에서의 인간(人間)의 기원

기독교(基督敎)가 하나님께서 우주와 일체 모든 존재를 창조(創造)한 것을 믿는 종교라면 불교는 처음부터 절대자인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고 일체 의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原因)이 되고 서로 관계가 되어서 인연(因緣)으로 생겨난다는 연기설(緣起說)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의 존재(存在)를 연기설에 의거한 오온설(五蘊設)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釋迦牟尼) 당시 인도 사회에는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종교(宗敎)가나 사상(思想)가가 등장하여 일가견을 이룸으로써, 가히 이 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라 불릴 만 했습니다. 이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흔히 정통 사상계와 일반 사상계로 구분합니다. 전통 사상계란 인도의 전통(傳統)종교인 브라만교의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적 흐름을 지칭하고. 일반 사상계란 브라만교의 권위주의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견해를 피력하는 새로운 흐름을 지칭합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전통의 사상계에 대두되고 있던 일체 존재가 절대적 존재에 의해 창조(創造)되었다는 설에 대해 비판하면서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서로 관계가 되면서 생겨난다는 인연(因緣)에 의한 연기설(緣起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연기설에서 보는 인간은 윤회하는 존재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따른 작용(행위)을 업(業)이라고 부르고, 이에 따르는 결과를 보(報)라고 부릅니다. 불경에서는 행위(업)와 과보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도 동일성을 띤다고 말합니다. 즉 선한 행위를 하면 좋은 결과를 불러오고, 악한 행위를 하면 괴로운 결과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불경에서는 사람의 행위를 세분하여 “열 가지 악한 업과 ”,“열 가지 선한 업”을 말합니다.

열 가지 악한 업이란 살생, 도둑질, 그릇된 음행, 거짓말,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 추하고 악한 말, 꾸며내어 하는 말, 탐욕, 성냄, 그릇된 생각을 말합니다. 또한 열 가지 선한 업이란 십악업에 부정접두사 “부(不)”, “무(無))”를 붙여서 그 반대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생명체를 죽이지 말라”를 “생명체를 살리는”것 방생을 생각하면 됩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를 “베푸는 것 ” 보시“ 로 표현하는 것처럼 십선 업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악업의 반대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기서 보듯 불교의 업(業)설에는 사회 윤리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불교의 인간론에서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되는 모든 것이 업보(業報)인연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인간이 팔정도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따르는 무리들이 중생으로 불교교단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진면목은 인간론에 총망라 되었다고 보아야합니다.. 불교(佛敎)교리를 기독교인들에게 설명하면서 그 차이점을 조직신학의 분류법에 따라 분석한다면 불교는 인간론(人間論)에서 시작 해서 인간론에서 끝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론을 가장 귀중히 생각하며 교리(敎理)의 핵심(核心)으로 여깁니다. 일찍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소년시절 4대문 유관을 통해 인생 <생, 노, 병, 사>의 무상(無常)함을 보고 출가해서, 고행수도를 닦은 목적은 인간의 근본(根本)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면 불교는 인간의 기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우선 알아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것으로 창조(創造)설을 믿는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없는 곳에서 있게 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창조자인(브라만교)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고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서로 관계가 되면서 단순히 자작자수(自作自受)한 것으로 인간론을 해석합니다. 따라서 불교는 인간론에서 창조자가 없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사색하는 종교입니다. 근본불교의 경전인 아함경에서 고타마 싯달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오온설(五蘊說)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성요소(構成要素)

불교(佛敎)는 인간의 구성요소를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으로 보는 이원론을 주장합니다. 육체의 물질적인 것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를 사대(四大)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대(四大)란 흔히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적 형체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창시 될 때 당시 인도의 유물론자들은 인간을 오로지 사대(四大)의 화합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창시자는 인간이 외형상 물질적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을 구성하는 또 다른 근간적 부분으로서 정신적(精神的)인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에도 역시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으며, 물질적인 부분을 색(色)이라 칭했던 것처럼, 정신적(精神的)인 부분을 명(名)이라 칭했습니다. 결국 고타마 싯달타는 인간이란 정신(精神)과 물질(物質)의 결합체라고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온(五蘊)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이란 물질적인 색온(色蘊)과 정신적인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薀)인 오온(五蘊)으로 인간이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1) 오온(五蘊)

오온(蘊)이란 “다섯 가지가 쌓임, 모임, 집합”을 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특히 인간(人間)존재를 해석하기 위해, 인간의 구성요소를 다섯 가지의 집합(集合)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형체인 색(色)이라는 집합과 정신(精神)을 구성하는 네 가지의 집합을 일러 오온(五蘊)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불교의 인간론(人間論)이라고 할 수 있는 오온설이 성립되었습니다.

오온이란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인 색온(色蘊)<지(地)수(水)화(火)풍(風)>과 정신적인 요소를 심리작용의 진행과정에 붙인 이름으로서 수(受)는 수동적인 감각작용이며, 상(想)은 주어진 감각에 의하여 표상을 구성하는 과정을 말하며, 행(行)은 인간의 정신작용이 대상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의지를 말하고, 식(識)은 대상을 신식한 후 그것을 기초로 판단을 내리는 주관을 의미하는 데, 이러한 네 가지 요소가 더하여져서 인간 존재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인간론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관찰법입니다.

불교(佛敎)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 오온(五蘊)사상을 입으로 불러 봤을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의 모든 예배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듯, 불교인들도 공식적인 의례가 있을 때마다 독송하고 있는 ”반야심경“ 앞부분에서 이 오온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별개의 것인 양 집착하지 말기를 촉구하며 그 구체적 내용인 오온(五蘊)도 마찬가지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색온(色蘊)
색온(色蘊)은 인간의 육체를 말하는 것인데, 사람의 몸을 세분하면 사대(四大), 즉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의 네 가지 요소가 화합하여 물질을 이룬 것이 모든 생명체의 육체란 것입니다. 색온의 네가지 요소는 실제에 있어서 각각 다음과 같은 성질을 의미합니다. 고체성(地)은 굳고 단단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만물을 실을 수 있는 흙(地)을 의미합니다. 액체성(水)은 습한 성질의 물질로 만물을 포용하는 물(水)을 의미합니다. 열(火)은 따뜻한 성질로 물질을 성숙시키는 힘을 의미합니다. 운동(風)은 움직이는 성질로 물질을 성장케 하는 바람을 뜻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적절히 화합하여 물질적인 형체를 이루는데, 이런 물질적 형체를 색온(色)이라고 부릅니다.

(2) 수온(受蘊)
수온(受蘊)이란 오온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느끼는 감각기관(感覺器官)을 말하는데, 사람의 실체라 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곧 생명의 실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하며, 생명의 활동을 느끼며 감지하는 기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희로애락은 바로 마음의 감정에 의해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육체 속에 정신이 있으며, 육체 속에 있는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외부 통로가 여섯 군데 있는데 이것을 육근(六根)이라고 합니다. 수온(受蘊)은 육근을 통해서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이 즐거움이나 괴로움, 고통 등의 감정을 느끼는 감수 작용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외부로부터 보고, 듣고, 만져보고, 그 자극에 대한 어떤 감각이나 지각이나, 인상 등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감수 작용을 의미합니다.

(3) 상온(想蘊)
상온(想蘊)이란 생각하는 기관, 즉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각을 관념이라고 하는데 관념이 쌓이고 쌓여서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아 이 생각들이 눈덩이 불어나듯 부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고뇌라고 하는 번뇌(煩惱)망상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의 마음은 입력되지 않은 컴퓨터의 디스크와 같이 맑고 깨끗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끗한 마음에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이 하나하나 쌓여 진다는 것입니다. 상온(想蘊)이란 수온(受蘊)에 의한 감수 작용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표상(表象)작용을 의미합니다. 수온(受蘊)이 감정을 느끼는 감수 작용이라면, 상온(想蘊)은 그 대상을 인식하고 마음속에 이미지를 갖는 것, 상상 또는 관념 그리고 표상(表象)하여 개념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4) 행온(行蘊)
행온(行蘊)이란 상온(想蘊)을 거친 대상에 대하여 스스로 의지하고, 또는 충동적 욕구로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마음을 구성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행온(行蘊)은 외부로부터 보고, 듣고, 만져본 것들이 마음속에서 감수작용, 표상작용에 의해 생긴 대상들을 의지하고 행동(行動)으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식온(識薀)
식온(識薀)이란 감수작용, 표상작용, 행동작용에 대하여 판단이나 추리에 의해 식별(識別)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식온(識薀)은 대상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이며, 또한 어떠한 인식에 대해 판단하는 의식(意識)작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마음의 작용 전체를 통괄하는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에 의한 마음의 인식(認識)작용을 다시 설명하면, 인간이 한 꽃밭을 지나가다 눈길을 끄는 꽃을 보고서 기쁨을 느꼈다면 이는 감수 작용인 <수온(受蘊)>때문이고, 그 마음에 드는 꽃을 꺾어서 자신의 집 응접실에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면 표상작용인 <상온(想蘊)>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꽃을 꺾어서 집으로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하여 행동작용을 취하려 했다면 이는 <행온(行蘊)>이고 그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하여 그래도 될지 안 될지 등의 판단을 내렸다면 이는 식별작용인 <식온(識薀)>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내면에 있는 몇 단계의 정신이 유기적이면서 거의 동시적으로 활동함으로서 육체를 통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고 합니다. 오온(五蘊)은 인간구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인간이 왜 고통의 존재(存在)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며, 인간은 물질과 정신의 두 힘이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에 고통(苦痛)의 존재(存在)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존재는 자업자득(自業自得)에 의하여 윤회(輪廻)전생이 있기 때문이라고 불교는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인간(人間)이란 오온(五蘊)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 몸을 불변하는 실체처럼 여기고, 그 욕구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견(身見)이라고 합니다. 신견이 기독교의 원죄와 같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신견이라면 극복할 수 없지만, 신견(身見)은 유연이므로 극복과 타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몸은 오온(五蘊)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몸에 대한 집착이 제거될 때 진여(眞如:사울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를 보게 되는데, 그 진여를 제대로 본 근본적(根本的)인 주체가 바로 법(法:진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을 별립적(別立的)으로 보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같은 영혼의 영생 따위는 있을 수 없고,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은 창조주가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그 물(物)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물체 간에서 상호작용하는 상의 상자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논리입니다. 즉 만물이 생멸하는 것은 만물이 상호작용하는 것이고, 그 주체가 되는 힘은 업(業:행위) 번뇌라고 합니다. 업의 작용에 의하여 연기현상(생사존재)이 일어난다는 인간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4. 불교의 인간의 생사(生死)관

불교(佛敎)에서는 모든 중생(衆生)이 미혹한 그 업인(業因)에 따라 삼계육도 윤회한다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창조론에 근거한 인간의 생사관이 있다면 불교에서는 우주만유의 성립의 양상인 연기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생사관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연기란 “말미암아(緣)” “일어나 있다(起)”의 합성어로 <말미암아 일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연기론에 의하면 현재를 자기 존재의 기준으로 삼으면 현재의 존재는 과거 전생의 인연연기에 있고, 미래의 존재는 현재의 삶의 인연연기의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영혼 불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를 인정한다면 연기설은 설 땅을 잃는 것입니다. 신체를 떠나서 정신이나 영혼이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신체를 떠나서 <호홉작용>이 있고 지각하고 감각하고 인식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무아(無我)론을 주장합니다. 무아(無我)란 주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체가 없는 자아(自我)에 집착하므로 애취(愛取), 탐(貪), 욕(慾)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연기가 되어서 생사(生死)반복된다는 것이 불교의 인간의 생사관이라고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이 윤회(輪廻)의 과정을 삼계육도(三界六道)라고 합니다.

1) 삼계(三界)

삼계(三界)란 산스크리트어로 <다투>라 하고, 계(界)로 한역된 것입니다. 계(界)라고 하면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삼계라고 하는 것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킵니다. 모든 중생이 세상에 태어나 죽고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가지 세계 즉 생물이 사는 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① 욕계(欲界)
욕계(欲界)는 가장 아래에 있으며 음욕, 탐욕의 두 가지 욕망을 가진 생물(중생)이 사는 곳이며, 욕망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세계를 말합니다. 이 속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계의 육취(六趣: 또는 六道)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세계의 존재양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천계인 하늘의 신들도 육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욕계라고 합니다.

② 색계(色界)
색계(色界)는 욕계 위에 있으며 식욕, 음욕, 탐욕을 벗어난 생물이 사는 곳입니다. 여기는 절묘한 물질(色)로 이루어진 색계라고 합니다. 요컨대 욕망을 벗어난 청정한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무색계와 같이 완전히 물질을 버리고, 순정신적인 것은 되지 못한 욕계와 무색계의 중간의 물질세계를 말합니다.

③ 무색계(無色界)
무색계(無色界)는 색계를 더욱 넘어선 최상의 영역이며 여기는 정신만이 존재하는 고도의 정신적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육체의 몸을 벗어나 정신적으로만 사는 세계이지만 아직도 자유(해탈)계가 아닌 어정쩡한 세계입니다.

2) 사생(四生)과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세계

불교(佛敎)에서는 모든 중생은 업보(業報)에 따라서 삼계육도 윤회전생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사생(四生)과 육도윤회(六道輪廻)로 돌아다니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교(佛敎)의 생사관인 사생육도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사생(四生)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은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火生) 등 네 가지의 생으로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사생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난생(卵生)으로 알을 깨고 태어나는 동물이나 날짐승의 새, 그리고 물 가운데서 사는 고기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태생(胎生)으로 인간과 같이 네발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서 포유류 동물을 말합니다. 셋째는 습생(濕生)으로 지네, 굼벵이 같이 축축한 습기를 타고나는 곤충들입니다. 즉 모기, 파리 등을 의미합니다. 넷째는 화생(火生)으로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 육도윤회(六道輪廻)
불교에서 생사관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소치라고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여섯 가지 세상의 업력(業力)에 따라서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간다는 사상으로서 이를 육도윤회라고 합니다. 육도윤회의 과정을 살펴보면 모든 생명체(중생)들은 다음과 같이 육도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 천도(天道)는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하늘세계입니다.
- 인도(人道)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 아수라도(阿修羅道)는 노여움이 가득 찬 세상으로서 남의 잘못을 철저하게 따지고 들추고 규탄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 축생도(畜生道)는 네발 달린 짐승을 비롯하여 새, 고기, 벌레, 뱀까지도 모두 포함합니다.
- 아귀도(餓鬼道)는 지옥보다는 육체적인 고통을 덜 받으나 반면에 굶주림의 고통을 심하게 받는 곳입니다.
- 지옥도(地獄道)는 가장 고통이 심한 세상입니다. 지옥에 태어난 이들은 심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은 현세에서의 업보(業報)에 따라 죽은 뒤에 다시 여섯 세계 중의 한 곳에서 내세를 누리며 다시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저지른 업보(業報)에 따라 내세에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윤회의 여섯 세상에는 절대적인 영원세계는 없고, 인연이 다하면 업보에 따라 또 다시 윤회세계에서 해탈 할 때까지 삼계육도의 존재가 계속 된다는 것이 불교의 생사관입니다.

5. 12 연기론(緣起論)

12 연기론이란 인간의 생사윤회 과정을 12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인간(人間)의 기원(起源)을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것으로 인간의 창조(創造)론 내용을 말하나, 불교에서는 인간의 창조자를 부인하고 12연기론이라는 것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그 인연(因緣)에 의하여 삼계육도로 윤회전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최초의 인간 출현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고 있고 다만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연기설(緣起說)은 불교의 교리(敎理)로서 모든 존재(存在)의 본질(本質)과 현실(現實)을 파악하는 교리입니다.

불교(佛敎)교리의 중심사상은 인간의 탐구에서 출발되었습니다. 불교는 존재론에서 존재와 고통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존재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럴만한 인(因:원인)과 연(椽: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椽)에 의하여 생기고” “연(椽)이 다하면 멸” 한다는 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즉 12연기란 인간의 생사의 존재를 12가지 인연으로 나누어서 서로의 관계(인연)를 설명한 것입니다. 12연기의 내용은 무명(無明), 행(行),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입니다.

1) 무명(無明)
무명(無明)은 무지란 뜻으로서, 진리에 미혹해서 사물의 도리를 옳게 알지 못하는 최초의 일념(一念), 무명일념이 일체 번뇌를 낳고 번뇌로 말미암아 악업을 짓는 악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명이란 맹목적 생존력과 생식욕을 지닌 본능적인 생명력으로 생의 의지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탐욕과 함께 생명자체의 유지력이며 발전력으로 모든 중생의 생명원자로서 이 종자가 세력을 가지고 잠재해 있는 한 해탈(解脫)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은 과거세계에서 모든 번뇌를 일으켜 모태에서 생명이 생기기 직전까지 일으킨 모든 번뇌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이란 인간존재의 고통스러운 삶 근원이므로 무명을 멸하면 고통도 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2) 행(行)
행(行)은 행위, 동작 또는 행업(行業)의 뜻으로 무명으로 말미암아 식(識:의식)을 일으키는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즉 육체적 행위인 몸(身)과 입(口)의 두 가지 업의 정신적 행위가 인간의 몸과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行)은 전생의 근본인 번뇌에 의하여 소작(小作)된 선악의 행업을 의미합니다.

3) 식(識)
식(識)은 행업으로 말미암은 전생의 업보에 의하여 현세에 모태로 들어가는 수태(受胎)를 받은 것을 뜻합니다.

4) 명색(名色)
명색(名色)에서 명(名)은 이름만 있고 형상(形象)이 없는 정신적 작용을 뜻하고, 색(色)은 지수화풍(地水火風)등 물질적 존재인 육체의 구성 원소를 뜻합니다. 이 명색은 앞의 식(識)에 의해 형성(수태)되는데 태내에서 오직 오관이 형성된 (태내의 4주정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5) 육입(六入)
육입(六入)이란 태중에서 눈, 코, 입, 몸, 마음의 여섯 감각기관을 말하며 점차로 완비해서 출산(出産)하기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6) 촉(觸)
촉(觸)이란 앞의 6가지 감각기관이 외계(外界)의 대상에 대하여 서로 접촉하는 상태로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느끼고, 피부로 느낌을 갖는 등의 단순한 감각작용의 접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생후 3~4세까지의 단순한 감각작용의 접촉을 말하는 것입니다.

7) 수(受)
수(受)란 감각기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즐겁고(喜), 괴롭고(悲), 좋고(樂), 언짢음(哀) 등의 감각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욕심은 많이 생기지 않은 4~14세까지를 가리킵니다.

8) 애(愛)
애(愛)는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탐하는 본능적인 욕망, 애욕(愛慾)을 일으키는 시기인 14~15세부터 시작되는 사춘기를 가리킵니다. 이때에는 여러가지 애욕을 강렬하게 느낄 뿐 아니라, 언제나 무엇을 애착하고 탐내고 갈구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한 끊임없는 충동의 시기를 말합니다.

9) 취(取)
취(取)란 성인 이후 애욕이 성장하여 <나>라는 집착에서 <내 것>이라는 집착심으로 굳어지는 아집을 말합니다. 이 시기는 자기의 사랑하는 바를 놓칠세라 집착하는 아집을 뜻합니다.

10) 유(有)
유(有)란 존재의 뜻으로 앞의 애(愛:욕망), 취(取:집착)로 말미암아 미래의 과보의 원인이 되는 업보 작용을 말합니다. 즉 애(愛)와 취(取)의 번뇌(煩惱:업보)의 부름을 받아 여러가지 업보(業報)를 지어 내세의 과보를 가져올 원인을 쌓는 것을 말합니다.

11) 생(生)
생(生)이란 현재 살고 있는 형태(形態)로 위와 같은 원인(인연)으로 생존을 보유(保有)하는 것, 현재의 번뇌와 업보로 인하여 내세에 윤회육도(천계,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12) 노사(老死)
노사(老死)란 전생의 업보에 의해서 탄생해서 늙어서 죽는 결과를 가져오는 생의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윤회하는 중생의 생명원자인 번뇌를 멸하지 않으면 또 생사가 12인연 연기한다는 것이 불교의 인간론입니다.

결론으로 위 12연기는 즉 인간이란 어떠한 절대자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조건이 있어 일어났으니까 그 조건을 없애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가장 근원적인 원인을 무명(無明), 무지(無知)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근원인 무명을 없애면 고(苦:존재)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고에서 벗어난 <생사윤회>가 없는 <해탈의 세계>, <무생무사의 세계>, <생사(生死) 환멸의 세계>를 가르치는 것이 불교의 구원론 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가 말하는 고뇌로부터 해탈의 길은, 고뇌의 원인을 무명(無明)에서 발견하고 이 무명(無明)을 멸하여 명(名)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아(무명)의 집착이 윤회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남이 해탈(解脫)이며,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한 번도 생기지도 않았고 따라서 죽는다는 것도 없는 불생불멸임을 깨달아 통달한자를 부처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란 생(生)기거나 사(死)가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의 세계인 열반(涅槃)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정적,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 공(空)의 상태입니다.

6. 동물과 미생물과 구별 되지 않는 불교의 인간론(人間論)

기독교(基督敎)의 6계명은 살인(殺人)하지 말라고 했지 살생(殺生)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人間)을 죽이지 말라고 했지, 동물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의 1계명은 살생(殺生)하지 말라고 합니다. 불교나 브라만교에서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곧 사람이나 짐승을 같은 생명체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의 기본사상이 범신론(汎神論:만물은 다 신)이기 때문입니다. 불교(佛敎)에서 육식(肉食)을 금하는 것, 미생물의 살생을 금하는 것은 윤회(輪廻)의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쇠고기 갈비를 뜯는 것은 자기 조상의 살을 뜯는 불경한 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조상 중에 한 분이 죽어 소가 되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이도 죽이질 않습니다. 혹 사람이 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基督敎)는 모든 존재의 구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면 사람, 짐승이면 짐승, 이렇게 엄격히 구별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포수가 산토끼를 발견하여 쫓아갔습니다. 어느덧 절속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포수는 잡아야겠다는 일념 때문에 절간인줄도 모르고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옆에서 말하기를 “산토끼를 죽인 자는 죽어서 산토끼가 되고--”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다가 보니 산토끼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만 이 포수는 스님을 향해 총을 겨누었습니다. 스님이 깜짝 놀라면서 “왜 이러시오?“라고 했습니다. 포수가 말하기를 ”중을 죽인 자는 죽어서 중이 되고--"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하루에도 천여 명 가량 굶어 죽는 다는 비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유야 여러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소가 많은 까닭이라고 합니다. 소가 많으면 부자로 살 것 같지만 그들의 종교사상 때문에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소에게서 사람이 나왔다고 믿기 때문에 소를 신(神)으로 모시고 대접하느라고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거의 사람의 숫자와 소의 숫자가 비슷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도 정부에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소의 생식기에 “루-프”장치를 하여 번식을 막으려고 했지만, 힌두교 교도들의 “데모”를 만나 중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 나라는 그릇된 종교사상 때문에 망해 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소를 외국에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고, 소가 먹는 양식을 굶은 사람에게 배불리 먹게 하고, 소고기를 먹게 하여 영양실조에서 건져낼 수도 있습니다. 불교의 살생하지 말라와 기독교의 살인하지 말라는 두 종교 계명(戒名)에서 인간론의 큰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9:3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였습니다.

7. 기독교(基督敎)의 인간론(人間(論)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태초의 인간은 누구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太初)의 인간(人間)은 없습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우주의 생성원리와 인간의 기원을 연기설(緣起說)로 설명합니다. 연기설(緣起說)은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라는 설입니다. 모든 존재현상은 원인이 되는 인(因)과 그 결과인 연(緣)에 의하여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의 존재론인 인간론입니다. 모든 존재현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이분법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설로 독립된 자아(自我)가 없다는 불교의 인간론을 앞에서 설명 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이 무엇인가 규명해 보고자하는 노력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앞서 불교는 연기론(緣起論)으로 인간의 기원을 찾고, 또한 진화론(進化論)주의자들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되었다고 하면서도 진화한 원숭이는 누가 만들었는가를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만물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기독교의 인간의 기원(起源)

성경은 인류기원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7-28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지음을 받을 때부터 짐승과 구별되었습니다. 불교(佛敎)는 짐승과 인간을 동일하게 보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상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그 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면서(출3:14) 무에서 유를 말씀으로 창조하신(히11:3) 전능하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형상(形象)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창조(創造)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책은 성경(聖經)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1:27, 2:7에서 인간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그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형상이란 말은 하나님의 실체의 모양 즉 사진과 같다는 말은 아니고 다만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 지어 주셨다는 뜻이며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2:24)라고 말한 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상과 같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지 원숭이에게서 진화된 것도 아니고 단군 신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곰의 후손도 아니고 불교(佛敎)와 같이 기원은 없고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연기(緣起)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지정의(知情意)로 구성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특정한 육체의 모양을 지닌 유형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자인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또 여호와 형상을 보겠거늘”(민12:8)라고 하였는데 형상이란 어떤 유형적인 형체를 지녔다는 말이 아니고 유사한 모양이란 뜻이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육신의 형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성과 도덕적인 속성과 불멸의 영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류의 시조로 창조하신 아담에게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할 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고 하신 것으로 보아 인간이 처음으로 지음 받을 때에는 하나님과 같이 불멸의 영원한 존재로 지으심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구성요소
기독교(基督敎)의 인간의 구성요소는 몸, 혼, 영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는 삼분설과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는 이분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구성요소를 논하는 것은 기독교(基督敎)적인 인간론을 성경적으로 바로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교리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靈)과 육(肉)으로 된 특수한 존재로 만들어, 영육(靈肉)이 유기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인격체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불교와 같은 범신론(汎神論)적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특수한 존재(存在)입니다. 즉 하나님의 대리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萬物)을 다스리는 존귀한 직책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구성요소에 있어 이분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2) 육(肉)이란

불교(佛敎)에서는 인간의 구성요소를 오온(五蘊)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온(五蘊)에서 색온(色蘊)<지, 수, 화, 풍>이 기독교(基督敎)에서 말하는 육체의 구성요소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육체는 흙에서 창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육체(肉體)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인간의 육체의 기원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2:21-25). 그리하여 사람의 육체는 흙의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되어 있습니다(창3:19).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나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 매일 먹지 아니하면 죽는 존재요, 죄 중에 신음하는 존재며 작은 세균도 이기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人間)의 육체(肉體)만 따지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고 짐승처럼 땅의 것만 생각하다가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빌 3:18~19). 그리하여 결국에는 죽어 땅으로 돌아가고 마는 흙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육체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육체는 죽게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의로 지으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습니다.

(2) 육체(肉體)의 구성요소

① 마음-마음은 육체의 요소 중 비물질 부분에 속하여 시공(時空)을 초월하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 존재입니다.

가) 양심 : 마음 중에 가장 깨끗한 요소로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 제일 완전한 것을, 선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지식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지식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양심이 존재합니다. 양심이 영(靈)이 될 수 없음은 양심은 지식에 따라 지배받기에 잘못된 지식으로 더러워지기도 하며(딛1:15)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주인으로 두어 섬길 수 있는(딤전4:2) 변질적인 요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에게만 피동(被動)되고 다른 무엇에게도 피동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 이성 : 자기의 지식을 토대로 사물(事物)과 사건(事件)에 대해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의 요소로 자기의 지식에 따라 잘못된 것도 옳다고 비판 평가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다) 지성 : 이미 알고 있는 지식 뿐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해서도 알고자 하는 마음의 요소로 보존(保存)과 향상(向上)은 추구(追求)하나 비판(批判)과 평가는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라) 감정 : 보고 듣고 접하는 대로 느끼는 마음의 요소로 가장 저급의 요소이며 본능(本能)이라고 하기도 하는 마음입니다. 본능의 특징은 희로애락, 생애 애착 등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크게 이 네 가지가 합쳐진 것이며, 이들이 움직여 몸으로 보고 듣고 접한 것을 느끼게 하며 생각하고 판단하고 소원하고 작정해서 다시 몸으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영(靈)일 수 없음은 구성요소의 근거에서 밝혔거니와 그래도 마음인 혼을 영이라 한다면 결국 짐승도 영(靈)을 가진 영적 존재라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감성(본능)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그러할 뿐 그들 나름대로의 모든 양심과 이성과 지성과 감정을 다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과 같이 발달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민22:28~30).

② 육체(肉體(흙))는 죽도록 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위치는 말할 수 없이 존귀한 것이었으나,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배반(불순종)으로 인류는 비참한 고통 속에 살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 아래 놓였습니다(창3:16~19).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습니다. 이는 흙으로 지음 받은 육체는 영원토록 이 땅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3:2)라고 하였으며 다윗은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라”(왕상2:2)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6:6, 12절에서 육체의 죽음은 몸 자체의 고유한 성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사망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7:24). 그러나 죄와 사망이 물질로 되어있는 몸 자체나 몸의 어떤 조직 안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성질과 습성 안에 육체의 죽음이 거주합니다.

불교(佛敎)는 욕망(慾望)에서 죽음이 거주한다고 합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한번 태어나면 늙지 않을 수 없고, 늙으면 병들지 않을 수 없으며, 병들면 죽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화려한 임금의 수레가 필경은 부서져 썩고 말듯이 사람의 육체도 늙으면 죽는다.”는 <생, 노, 병, 사>로부터 오는 죽음에서 해방(解放)을 찾고자 출발된 종교입니다. 그가 찾은 해답은 존재와 고통(죽음)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회의 존재가 없어지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진리를 깨달아 불타가 되는 것입니다.

3) 영(靈)이란

영(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르아흐”와 헬라어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 천사, 악령과 천사들, 별세한 사람들, 인간의 영을 지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으로 이를 이해하게 된 것은 어떤 이들의 주장과 같이 헬라철학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과 함께 하는 내적 자아(자기의 영)의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① 영(靈)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 곧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 받은 단일체로서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지배받고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에게도 피동이나 지배되지 않는 심신의 주격 요소로 지음 받은 범죄 하지 않는 요소입니다.

② 영(靈)에 속사람이라고 하는 이 영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는 산영이며, 심신을 향해 주권을 가진 영(靈)이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을 때는 죽은 영으로 심신에게 아무 주권도 행사할 수 없는 영이 됩니다.

③ 영(靈)은 불멸(不滅)의 존재이므로 영의 죽음이란 소멸(消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서의 모든 활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불택자에게 있어서도 그 영이 존재하지 않거나 육의 죽음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이 있으나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함으로 자기의 심신을 다스릴 기능을 조금도 부여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영(靈)의 활동력은 두 가지에 의해 구속을 받게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짐으로 죽은 영이 되어 활동할 수 없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용할 심신이 없어 활동을 못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지배받는 면에서만 모두가 동일하지만 자기의 심신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각기 차이가 있는데, 이를 영의 장성의 척도로 삼은 것입니다.

⑤ 영(靈)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 받아 범죄 할 수 없는 존재이나, 인류 시조가 범죄 하였을 때에 즉시로 죽게 된 것은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의 영입니다. 또한 영과 분리된 육은 서서히 죽어지게 된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을 다시 살리신 것이 중생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중생시킨 인간의 영 안에 내주하시면서, 신자의 심신의 성화구원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영을 다 가지고 있으나 중생된 영만이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그와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주시어 살아난 것은 영이요, 몸은 부활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 영이 죽어 있으므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난 자 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성화의 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1) 영(靈)의 구성요소
불교(佛敎)는 인간을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으로 구분하는데, 기독교(基督敎)는 육체(肉體)와 영혼(靈魂)으로 인간이 구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① 영(영혼)은 하나님께 속한 생령체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되 흙으로 육체를 지으시고 생기로(하나님의 생명력) 생령(살아서 움직이는 영)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와 영이 하나 되어 살아서 움직이는 영이 되었습니다. 천사는 영물이나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고 동물은 육체는 가지고 있으나 영이 없고, 사람은 육과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물과 다른 것입니다.

영혼(靈魂)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 중에는 선재설이 있고 유전설이 있으며 창조설이 있는데 기독교(基督敎)는 창조(創造)설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동물(짐승)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 세계는 도덕이나 양심 종교가 있을 수 없고. 본능대로 생식하여 번성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靈魂)이 있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전 3:11)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성이 있는 것입니다(행17:22-29). 그래서 짐승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으나 사람은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영혼(靈魂)은 세상적인 것만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靈魂)은 육체를 지을 때처럼 흙으로 하시지 아니하시고 비물질적인 생기를 직접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시36:9)고 하였고, 다윗은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라고 하였습니다.

② 영(靈)은 죽지 않게 되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혼(靈魂)은 죽지도 않고 죽임을 당할 것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 가서 영벌을 받고 구원받은 영혼은 영생에 들어간다(마25:46)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그 결과는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라고(벧전1:9)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히10:39)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짐승과 달리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영혼이 구원받아 영생복락에 들어가 영원무궁토록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불자들중에는 인간의 마음을 영혼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마음(양심)은 지식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지식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양심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육체 중에 비물질 부분이 마음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영이 될 수 없음은 양심은 지식에 따라 지배받기에 잘못된 지식으로 더러워지기도 하며(딤1:15)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주인으로 두어 섬길 수 있는(딤전4:2) 변질적 요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에게만 교통하고 다른 무엇에게도 교통 될 수 없습니다.

4) 기독교의 인간 구성요소의 결론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구성요소는 육(肉)과 영(靈)으로 이분됩니다, 또한 영은 단일체이지만 육(肉)은 크게는 마음(정신)과 몸으로 이분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과 몸을 더 세분하면 마음도 수많은 요소로 되어있고, 몸도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불교(佛敎)에서는 이렇게 세분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靈)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은 영이 아닙니다. 마음은 육체(肉體)에 속한 요소입니다. 인류시조가 범죄 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즉시 죽은 것은 영입니다. 영이 범죄 한 것은 아니지만 육의 범죄를 영이 주격으로서 그 책임을 지고 죽은 것입니다. 이를 영과 하나님이 끊어진 영의 사망, 영적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중생할 때에 다시 살아난 것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산 것을 말합니다. 이를 영의 중생이라고 합니다. 기독교(基督敎)는 불교(佛敎)와 같이 자기의 행위(行爲)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8. 나오는 말

지금까지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의 인간론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간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고, 인간의 구성요소는 영과 육으로 이분되어있습니다. 또한 영은 단일체이지만, 육은 크게는 마음과 몸으로 이분할 수 있습니다. 영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은 영이 아닙니다. 마음은 육에 속한 요소에 불과 합니다. 마음이 영이라면 결국 짐승도 영을 가진 영적(靈的)존재라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인간론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두 종교의 인간론에 있어서 다른 점입니다.

불교(佛敎)에서는 인간의 기원론은 없고, 연기(緣起)론으로 조건(인연)이 있어서 태어나고 조건이 없어지면 죽는 것을 12인연설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고, 존재하는 세계는 일체고라고 가르치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일체고의 존재인 윤회전생으로부터 해탈을 이루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사상이기에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간론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해탈은 자기 마음 밖의 어느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으므로 <존재와 고통>은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존재가 있으니 고통이 있고, 고통이 있으니 존재가 있으므로, 존재가 없어지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구원(救援)론인 해탈사상입니다.

다시 한번 두 종교의 인간론을 결론으로 정리하자면 불교는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육체(肉體)(색온 : 지, 수, 화, 풍)와 정신(精神)(수온, 상온, 행온, 식온)의 오온(五蘊)설로 설명하고 있고, 기독교(基督敎)는 육체(肉體)와 영혼(靈魂)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인류시조가 범죄 하였을 때에 영적 사망이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영이 끊어진 영의 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중생(구원)할 때에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이 중생한 영 안에서 중생한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이 영을 다 가지고 있으나 중생된 영만이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그와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몸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부활(復活)한 이후의 몸은 다시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 영이 죽어 있으므로 영적으로 죽어있어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구원 핵심은 심심불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불(佛)이 있으며 해탈이 있습니다. 이성철 종정스님은 초파일 법문(法問)에서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심히 부패 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요(렘17:9),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재생목사 불교와 기독교 주제별 비교론 인간론 강의안 입니다.>

출처:아멘넷, 서재생 목사 칼럼 글
 
    미국 목회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설교자는 올해 91세의 빌리
    그래함 목사로 나타났다. ⓒ빌리그래함전도협회

    빌리그래함(Billy Graham)의
    리더십의 비밀 21가지.
















    1. 불씨를 집혀라. 예술과 교육은 취향을 발달 시킬 수 있을
    지언정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단순하나 뜻이 깊다. 그리고 그 말씀은 사람들을 뒤흔들어 영접과
    거부를 야기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켤코 이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른 이들은 자신의 세대에서
    특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마음이 제대로 뒤바뀌었기에 그들은
    세상을 거꾸로 뒤바꾸었다. 그들 이후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2. 팀을 조직하라. 유머는 내키지 않는 일을 참고,
    상식적이지 않는 일을 이해하며, 불편한 것을 견디고,예상치 못한 일을 극복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3. 유혹에 대처하라. 부를 잃으면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무엇인가 잃은 것이다. 인격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4. 한 가지 사명만 붙들어라. 나는 하나님의 로비스트가 되고 싶을 뿐이다. 5. 비판을 사랑하라. 뜨거운 머리와 차가운 가슴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6. 낙관과 희망을 전염시켜라. 나는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모든 것은 괜찮을 것이다. 7. 자금을 동원하라. 사람이 돈을 소유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문제는 돈이 사람을 소유할 때 생긴다. 8. 영혼의 친구들을 사귀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손을 주셨다. 하나로는 받고, 하나로는 주라고. 9. 접경 지역을 넓혀라. 설교자에대한 평가는 성도들이 "훌륭한 설교였어!"가 아니라 "나도 무엇인가 해야겠다."라고 하며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0. 용기를 끌어 올려라. 용기는 전염된다. 용기를 낸 자가 단호한 태도를 취하면, 주변인들의 등에도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11. 실패에서 배워라. 산 정상에는 경치와 영감이 있으나, 열매는 계곡에서 얻는다. 12. 상처와 배신을 경험하라. 역경은 평안과 번영보다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13. 자아를 죽여라. 하나님은 사람을 그 성취나 역량의 거대함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겸손함의 작은 범위로 평가하신다. 14. 꿈을 잉태하라. 기도는 단순히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15. 교량을 구축하라. 자신을 위한 눈물은 약한 눈물이다. 허나, 타인을 위한 눈물은 강함의 눈물이다. 16. 다른 지도자를 세워라. 그리스도를 따른 이들은 자신의 세대에서 특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마음이 제대로 뒤바뀌었기에 그들은 세상을 거꾸로 뒤바꿨다. 17.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일하라. 가장 우아한 기도는 상처를 낫게 하고 축복하는 손을 통한 기도이다. 18. 학습으로 약점을 보충하라. 하나님의 경제에서 어떤 사람의 영적 영광의 높이를 재기 전에 그 사람은 반드시 슬픔의 계곡을 건너야 한다. 진실로 생을 얻기 전에 자신을 죽여야 한다. 19. 영적 전압을 높여라. 우리 자신의 끝에 도달하면, 주님의 시작에 다다른다). 매일 영혼을 배불리 먹이고, 운동시키지 않으면, 영혼은 약해지고 오그라들어 불행하고 혼란스럽고 불안정해 진다. 20. 혁신을 주도하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상품을 팔고 있다. 비누 상품처럼 광고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21. 사랑으로 이끌어라. 냉소와 냉랭함과 의구심으로 팽배하고, 하나님의 불길과 따뜻함이 세상에 드물기에 눈에 잘 띄는 시대에, 나의 마음이 부르짖는 바는, 불길이여 떨어져라... 오 주님이시여 우리에게 사랑의 불길이 떨어지도록 하소서.
 

구역 예배를 드리고 권사님이 중매를 서 주겠다며 아들의 나이와 띠를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무슨 띠라고 했더니 띠 궁합이 서로 안 맞다며, 다른 사람을 소개하겠답니다. 띠가 뭐 길래 서로 좋아하면 되지, 사람들의 띠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한국인의 출생과 함께 하는 띠란 뭐예요?,,,” 띠(12간지)라고 하나요? 그 동물의 12간지에 대해서도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목회자님들도 서스럼 없이 사용하던데...그래도 되는 것인지요.....“본 주제를 질문 해주신 별똥별, ol=D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십이지신상 사진>

한국인은 누구나 무의식속에서 자신의 띠를 알고 있습니다. 12띠 이야기는 토템신앙에서부터 내려온 것 같습니다. 토템신앙이란 자연물을 숭상 하는 것 동물숭배만이 아니라. 식물에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토태미즘(totemism)의 토템신앙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체제 및 종교 형태.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 족(族)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식물류(독수리·수달·곰·메기·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 되었습니다.  띠란“ 각 사람들의 심장에 숨어 있는 동물”이라고도 일컫는데, 이는 토템사회에 인간이 동물을 숭배하던 풍습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삶을 같이 영위하는 동물은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인간과 유사·유관한 관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국 신화의 경우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 곰이라고 하는 동물과 환웅(桓雄)이 혼례식을 치른 것도 그와 같은 하늘의 질서와 땅의 질서간의 융합을 뜻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띠의 유래

한국 모든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해에 따라 “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띠”는 열 두 동물을 차례로 나열해서 계속 윤회됩니다. 열두 짐승의 띠는 학술이나 종교적 심념에 관계없이 우리 한국인의 심성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십이지(十二支)라고 합니다.

12라는 숫자는 일 년 두 달을 의미하는 부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시간과 방위의 개념이 결합되고 나이가 열 두 동물과 결합하여 십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연월일시를 나타내는데 사용된 십이지는 사람의 생년월일과 연결되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운세를 점치는 등 한국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려있습니다.

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띠의 기원은 도교(道敎)장자설이, 불교(佛敎)여래설이, 유교(儒敎)황제설이, 등이 있으나 불교여래설이 유력합니다. 불교여래설은 석가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 모든 동물들을 다 불렀는데 열두 동물만이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고 합니다. 석가는 동물들이 도착한 순서에 따라 그들의 이름을 각 해(年)마다 붙여 주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사람이 태어난 해의 12지기(地支)를 동물 이름으로 상징하여 이르는 말이 띠라고 말합니다. 경인(庚寅)년 2010년에는. 12간지의 의미로 백호(白虎)의 해(年)라고 사람들은 예년과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경인이 1950년 이 후 60년 만에 돌아온 인간의 환갑을 의미와 같은 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사가들은 백호의 기상을 닮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에 따라 아이를 출산할 계획을 가진 여성들이 올해에 아이를 출산하려고 노력들을 한다는 소식을 접해 봅니다. 길거리고 백화점이고 호랑이 그림을 부적처럼 집집마다 모시고 핸드폰 걸이, 목걸이 등 경신년 호랑 띠 해를 상술로 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2, 띠로 보는 이야기들

띠란 사람이 태어난 해를 십이지상의 동물과 결부되어 있는 동물의 이름으로 호칭합니다. 띠 동물에 대한 의미와 상징도 세대를 거듭해 전승되어 오는 동안 우리 민족에게 어떤 특수한 의미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 입에서도 아무 의심 없이“나는 소(축;丑)띠다” 또는“말띠 쥐(자;子)띠다” 하면서 띠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띠 동물을 통해서 한해의 운수 이야기와 아이들의 성격과 운명을 논하고 궁합을 통한 결혼생활의 운세를 점치기도 합니다. 많은 부분이 그 “띠”에 해당하는 동물의 습성이나 외양과 관련 내용입니다.

쥐(자;子)는 생명력이 질기고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쥐띠는 다복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특히 주로 밤에 활동하는 쥐의 특성을 고려하여 밤에 태어난 쥐띠는 부자가 된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소(인;丑)띠는 소가 평생 일을 하며 사는 것처럼 소띠는 고달프게 일을 하며 살 팔자라든가, 양(미;未)뜻은 온화하고 순하여 그 해에는 며느리가 딸을 낳아도 구박을 받지 않는다거나, 잔나비(신;申)띠는 원숭이처럼 재수가 많다느니 하는 식의 무속적인 말을 합니다. 그리고 닭 해에 태어난 사람은 마치 닭이 무엇을 파헤쳐 먹을 것을 얻듯이 돈을 써야 돈을 번다는 생각과 범띠는 사내아이가 동지섣달 밤에 태어나면 바람기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띠는 각기 다른 동물을 정해놓은 열두 가지 한자로 이루어진 것으로 12년을 주기로 돌아가면서 각 1년을 가리키게 됩니다. 12지수(十二支獸)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자신의 인생을 영수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2띠 동물의 순서를 정하는데 달리기 경주를 해서 도착하는 순서에 따라 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큰일이 난 것은 쥐였습니다. 다른 동물에게 다 가서 물어 보아도 나름대로 시간계산을 하고 있는데 짧은 다리로 빨리 갈 수 있는 궁리를 했습니다. 머리를 굴려 보았습니다. 다른 동물보다 황소가 걸음이 늦지만 가장 먼저 출발한다는 것을 알고 황소의 귓속에 숨기로 작정하고 숨어 있었습니다. 황소는 쥐가 귓속에 숨어 있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냥 가기로 했습니다. 다른 동물보다 먼저 출발해서 쉬지 않고 열심히 걸어서 골인 지점이 보일 때 쥐가 튀어나와서 먼저 통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열두 동물의 순서는 자(子)(쥐), 축(丑)(소), 인(寅)(호랑이), 묘(卯)(토기), 진(辰)(용), 사(巳)(뱀), 오(午)(말), 미(未)(양), 신(申)(원숭이), 유(酉)(닭), 술(戌)(개), 해(亥)(돼지) 이런 순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 영향으로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 버는 인간들을 말하기를 쥐새끼처럼 남을 이용하고 잔머리 굴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띠는 이러한 순서가 반복하여 돌아가며 해마다 적용되는데 그 해에 태어난 사람은 그 해의 띠를 갖게 됩니다. 원래 이 열두 마리 동물은 불교(佛敎)에서 나온 것으로 땅을 지키는 십이지신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 띠로 보는 궁합(宮合)

띠로 보는 궁합은 동양사상인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와 음양(陰陽)의 상생상극 관계에 따라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쳐보는 풍속이 있습니다.
기독교(基督敎)인들 중에도 서로 무슨 띠인가를 묻고서 궁합(宮合)이 맞는가 보자고 하는 성도가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필자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띠 궁합에 의하면 말(午)띠와 쥐(子)띠는 가정불화가 많다고 했더니 앞에 앉아있던 어느 권사가 “맞다 맞아”하셨습니다. 아직까지 믿는 성도들이 옛 사람의 탈을 벗지 못하고 세속적인 의식구조에 사로잡혀 머물러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띠 궁합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1)불화 띠 궁합(宮合)과 이유

(1)쥐(子)띠와 말(午)띠의 불화는 말은 직립동물로서 콧구멍이 유난히 크므로 쥐가 콧구멍에 들어올까 하여 싫다고 하여 불화 띠 궁합이라고 합니다.
(2)소(丑)띠와 양(未)띠의 불화는 서로 뿔이 있으므로 자랑하는데 특히 양은 자기 뿔이 더 세다고 함으로서 싫어하는 궁합이라고 합니다.
(3)호랑이(寅)띠와 원숭이(寅)띠의 불화는 호랑이는 산중의 왕이면서도 나무를 못타는데 원숭이는 잘 타므로 서로 싫어하는 궁합이라고 합니다.
(4)용(辰)띠와 개(戌)띠의 불화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려는 데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방해되므로 서로 싫어하는 궁합이라고 합니다.
(5)토끼(卯)띠와 닭(酉)띠의 불화는 닭은 붉은 것을 보면 흥분을 잘 하는데 토끼의 귀와 눈이 붉어 더욱 흥분되므로 서로 싫어하는 궁합이라고 합니다.
(6)뱀(巳)띠와 돼지(亥)띠의 불화는 뱀은 보기에 징그러우나 깨끗한 이슬과 살아 있는 것 만 먹는데 돼지는 더러운 것까지 먹으므로 서로 싫어하는 궁합이라고 합니다.

2)행복 띠 궁합

(1) 쥐(남)띠와 쥐(여)띠는 자식 궁이 좋다. 출세할 수 있는 귀자(貴子)를 낳으며 부부 관계는 평탄 한 궁합이라고 합니다.
(2)범(남)띠와 소(여)띠는 원앙금침에 행복을 수놓고, 실속 있는 생활 운영으로 재물을 모으는 복 된 궁합이라고 합니다.
(3) 토끼(남)띠와 범(여)띠는 여성이 남편 역할을 하고 남편이 여성 역할을 하게 되는 궁합으로 여 자가 사회 활동을 해야 남편에게 불만이 없는 궁합이라고 합니다.
(4)용(남)띠와 뱀(여)띠는 여성의 헌신적 사랑으로 고난도 스스로 없어지고 상하화목하나 여성의 건강에 애로가 있을 궁합이라고 합니다.
(5) 뱀(남)띠와 닭(여)띠는 태워도 재가 되지 않을 열정으로 부부 사이가 대단히 좋아 화촉동방에 원앙 한 쌍이 노니는 연분의 궁합이라고 합니다.
(6)닭(남)띠와 용(여)띠는 하늘이 맺어 준 천생연분으로 부귀영화가 문 안에 가득하고 자식 덕과 명예 덕이 있는 최상의 궁합이라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신앙 의식 속에는 세속적인 것들로 잠식되어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실례로 작명, 일진, 풍수지리설, 사주관상, 궁합, 점을 보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비신앙적인 행위는 인본주의 사상이며, 미신행위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속적인 풍습을 아무런 여과 없이 하나의 민속적인 전통이라는 사상으로 인식하며 수용하는 교인들이 있으니 슬픈 현실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띠 궁합으로 인간의 미래를 점치는 것은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4. 띠에 대한 기독교(基督敎)적인 이해

새해 정초가 되면 누구나 올해는 무슨 띠의 해이며, 그 해의 수호동물(守護動物)이라 할 수 있는 십이지의 띠 동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서 새해의 운수를 예점(豫占)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 해에 태어난 아이의 운명과 성격을 띠 동물과 묶어서 해석하려는 풍속도 있어 왔습니다.

새로운 띠 동물을 대하면서 그 짐승의 외형, 성격, 습성 등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새해를 설계하고 나름대로 희망에 찬 꿈과 이상을 품었습니다. 물론 이들 12지의 띠 동물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게 제시할 수 없지만 우리 조상들은 각각의 띠 동물로부터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서 나름대로 한 해의 운수를 예견하려 했고, 나아가서 생활 교훈과 행동 원리까지 얻었다는 사실은 여러 풍속과 문헌, 유물,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옛 구습의 탈을 벗지 못하고 세속적인 의식구조에 사로잡혀 성도들의 대화에 “집사님의 ”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무슨 띠”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하나 실상은 아직도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여 세속적인 의식구조 속에서 머물러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결혼할 때 ‘띠’ 궁합(宮合)을 봐서 좋지 못한 띠를 피하고자 하는 모습을 버리고 믿음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 띠는 12간지에 의해서 각종 짐승의 이름을 갖는 것은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또한 “갑자(甲子)생”이니 “병신(丙申)생”이니 하는 것은 주역(周易)에서 유래 된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띠로 말하지 말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한 몇 년생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은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미신적인 의식과 세속(世俗)풍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철저히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서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으로 무장하여 세속적인 의식구조와 비 신앙적인 세속풍습과 미신행위를 배격하면서 사회변혁의 주도적인 임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믿는 자에게는 철저한 기독교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과 기독교역사관이 요구됩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칼럼 글
한국 기독교계의 원로이자 신학자인 김명혁 목사가 한국의 설날인 구정을 맞아, 2월15일 ‘한국교회가 고쳐야하고 개혁하여야 할 것 열가지’란 제목의 칼럼을 발표했다. 이 칼럼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첫째, 주일 예배 시간에 드럼과 각종 악기로 연주하는 시끄러운 음악을 올간과 피아노 위주의 경건한 음악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방지일 목사님과 랄프 윈터 박사님이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둘째. 주일 오후 예배를 주일저녁 예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성수를 회복하는 것인데 방지일 목사님이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셋째, 현세적인 성공과 축복 중심의 메시지를 십자가 중심의 복음적 메시지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최복규 목사님과 이영훈 목사님 등이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넷째, 현세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인 관심으로부터 종말적이고 내세적인 천국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신약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우선적인 관심이었고 김삼환 목사님이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다 섯째,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소금과 빛’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를 바꾸는 것이고 암암리에 자기 부정과 희생보다는 자기 긍정과 현현을 바라는 인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섯 째, ‘묵상 기도’라는 말을 ‘묵도’라는 말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옳지만 기도를 묵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박종렬 목사님이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느헤미야가“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다”(느2:4)고 했다.

일 곱째, 화려한 예배를 드리면서 진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을 긍휼과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 이전에 은혜가 충만했고(요1:14), 제사 이전에 긍휼을 원하셨고(마9:13),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6:44). 이것을 성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이 지적하며 실천했다.

여덟 째, 나의 옳음을 강조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의 그름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위선과 교만과 분열의 자세를 이단이 아닌 다양한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들을 품으려는 온유와 겸손과 연합의 자세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가 이룬 것이 바로 화해와 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경직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이 강조했다.

아홉째, 너무 부해지고 강해지고 커지려고 하는 욕망을 가난해지고 약해지고 작아지려는 소원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목사님이 지닌 모습이었다. 또한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친근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교회와 교회당을 무한대로 대형화하려는 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가난하고 약하고 작은 교회들과 연대하며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열째, 과시적인 행사 위주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 위주의 삶과 사역으로 바꾸어야할 것이다.

주님과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이고 과시적이고 배타적인 죄를 진솔하게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사도 바울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 등이 지녔던 제물 된 삶이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아니하시리이다”(시51:17).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 크리스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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