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6:7,8).

사람이 자기 죄 가운데 계속 거하며, 육신을 위하여 삶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소망을 주려 하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지옥불에 대한 보험 증서는 팔면서 죄를 이기는 권세는 주지 못하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육신의 삶을 계속 살게 하면서 육신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생명 없는 종교를 공급하며 소유(possession) 없는 고백(proession)만을 공급하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하늘에 이르는 두 개의 길은 가르치며, 우리 주님께서 마 7:13,14절에서 가르치신 ‘좁은 문’의 오직 한 길밖에 없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이 거짓 복음은 두 번째 의 길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육신적 기독교의 길이다. 이 길이 바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그것은 육신에는 매력적인 길이지만 필경 지옥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거짓복음 - 그 복음은 당신에게 아무런 요구도 없고 다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쉬운 길임을 보여 주지만 실상은 지옥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다 - 이런 복음을 경계하라. 이 거짓복음은 당신의 육신을 거스리지 않고 오히려 ‘친절한 벗(friendly pal)'이 된다. 그리고 그 복음은 바다 같은 선(good)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깨끗한 놀이이며 순결한 유희로써 이해된다. 그 복음은 당신의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고, 당신의 삶을 바꾸지도 않고, 여전히 당신의 인생을 즐기게 하며, 술집 노래 대신에 합창을, 독한 술 대신에 종교영화들을 즐기면 충분한, 그러한 복음이다. 그 강조점은 여전히 즐기는 인생에 있다든지 지적 또는 도덕적으로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누리는 그런 복음이다.

이 거짓복음은 하나의 새롭고 전혀 다른 전도 방식을 권장한다. 그 방식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기 전에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옛사람이 죽음을 당하기 전에 먼저 새 생명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즉 죄인의 방향을 약간 돌려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전도는 죄인을 보다 행복한 생활 방식을 전환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 죄인의 자존심을 구하여(saves)주려 한다. 이 거짓복음은 자기주장 강한 사람에게는 “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주장하라”고 하고, 이기주의자에게는 “오라,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하고, 감각적 자극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자, 와서 크리스천 교제를 맛보라”고 말하는 전도방식이다. 이것은 낡은 부대에 새 술을 쏟아 붓는 격이다. 이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새집을 짓기 전에 먼저 옛집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적 기독교라는 거짓복음은 십자가라는 의미, 곧 죽음이라는 의미를 완전히 간과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은혜의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인 당신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요구하고 있다. 이 은혜의 복음은 당신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단호하게 강력하게 끝내 버리고, 죄의 죄사슬을 부숴버리고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켜 세워 버린 것이다. 또한 이 은혜의 복음은 당신의 교만과 대망을 끝내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긍휼을 비는 자로 내려앉게 한다.

하나님의 참 복음은 당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하고, 당신의 벗들과 세상을 향해서는 작별을 고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당신은 옛날의 사람과 같은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참복음은 당신의 삶을 약간의 방향 전환만 하라고 하지 않고 죽음의 곳으로 가라고 말하고 있다. 히 13:13절 말씀과 같이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서 세상에 대하여 죽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좇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우리는 갈 6:14절 말씀과 같이 이 세상과 그의 모든 쾌락과 유혹들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러분은 우리가 매일 쓰는 식용 소금이 두 개의 원료(화학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것들을 각각 먹으면 독약이 되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배합되면 소금이라는 축복이 되어서 정화하고, 맛을 내고, 썩지 않게 하고, 수많은 다른 용도로 쓰인다. 참 복음,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도 그와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로 죄 용서 받는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과 우리 행실의 복음과 우리 죄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인들을 기만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설교에 필요한 요소 전부를 넣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는 영혼의 독약이 되어 구원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이 육신적 기독교라고 하는 거짓복음의 교리는 오늘날 기독교 국가에 범람하고 있으며 이 복음에는 - 이는 결코 복음이 아니다 - 죄를 미워하게 하는 회개의 요소가 없다. 또한 참 구원에는 죄의 권세가 부서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또한 거룩케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지도 않는다. 칭의와 성화란 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또한 거룩케 하신다. 곧 우리를 하나님의 쓰임을 위해 성별(聖別)하시어서 하나님의 길을 행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복음은 죄와 더불어 타협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 정결하고 하나님께 투명할 것을 요구한다. 아니면 멸망이다. 그 복음은 “죄인이여 엎드리라. 거룩하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 발 앞에 엎드려 회개하라. 그리스도의 발 앞에 믿음으로 엎드리라. 구원을 위하여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라”고 그 복음은 말한다. 그리고 모든 죄는 버리고, 모든 죄를 배척하고, 모든 죄는 회개하고, 모든 죄를 혐오하라. 당신은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하고, 세상도 당신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당신은 죄를 버리고, 나아가서 당신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참구원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결단코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당신의 죄를 덮거나 방해하거나 변명하는 것을 결단코 용납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호소력이 당신의 가슴 속에서 역사하면, 당신은 죄에 대하여 죽고 자신에 대하여 죽게 되고,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 곧 복음의 능력으로 당신을 새 생명으로 일으키신다. 이것이 당신 안에 들어온 새 생명이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조건을 제시하지 마라. 왜냐하면 당신은 지옥불에 던지움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요. 다만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약 지옥 갈 마땅한 죄인으로써 하나님께 나와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향하여 마음에 진정한 회개를 고백할 때, 당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또한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소망이다. 다시 말하면 목에 줄을 매고 그 끝을 하나님께 드리며 죽으시든지, 그리스도를 인하여 구원해 주시든지 하옵소서라고 비는 길이다. 머리를 숙이고 당신 모습 그대로, 상실된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오시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눅 19:10).

그리스도의 참 복음은 죄와 더불어 타협치 아니할 뿐 아니라 참복음에는 중간지대 즉, 좁은 길과 넓은 길의 타협도 없다.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인하여, 지옥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그에게 와서 자유함을 받을 때 - 이것이 칭의이다 - 당신은 동시에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죄의 권세와 지배로부터 해방받기 위해 그에게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화이다. 그리스도 전부를 영접받는 믿음의 본질은 칭의와성화의 비분리(非分離)를 요구한다(고전6:11).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 - 곧 그분의 인격체(person)자체 - 이 우리의 구원이며, 영광의 소망이며, 따라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위격(位格 person)을 나눌 수 없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Lord)시라 부를 수 없다(고전 12:3). 그리스도를 - 당신의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자유케 하신 - 당신의 주(Lord)로 알지 못한 채 당신의 구원자(Savior)로 알 수는 없다. 요 8:36절 말씀과 같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죄로부터,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그 권세에 대하여도 죽었다(롬 6:2).

아, 얼마나 교활한 사탄의 속임이 오늘날 막대한 대다수의 교회에 자행되고 있는가, 얼마나 교활한지 많은 사람들이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죄의 권세가 부서지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육신의 삶을 살며 육신을 위하여 심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속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만사형통하여 그 영혼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 어떤 결정을 한 적이 있으며,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롬 5:19-21절 말씀을 들어보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들어보라.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내가 제시하려는 바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선 죄의 권세를 꺾어놓으신다.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 어떻게? ‘의로 말미암아’ 또한 의와 무관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와 참 거룩 안에서 행할 수 있게 된다.

이 육신적 기독교라는 거짓복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이제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신 속에서 육신을 위하여 심고 살아가면서도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옥에서 나온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보여 온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서 5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율법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엄청남과 죄의 죄성과 죄의 심히 죄 됨으로 우리 마음을 찌를 때, 우리는 죄가 우리 마음과 우리 삶 속에 넘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의 긍휼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동시에 우리에게 새 성품을 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내주케 하신다. 그러면 이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왕노릇한다.

로마서 6장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려 고 죄에 거하겠느뇨?”이다. 결단코 물론 그럴 수 없다! 하늘 아래 그럴 수 없으며 그런 생각도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만약 우리가 죄의 책벌과 그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다면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어 버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더 계속하기 전에 우리는 ‘죽음’에 정의(定議)를 내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에 ‘죽은’, ‘죽었다’ 혹은 ‘죽음(사망)’이라는 말이 14번이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체로부터 사람이 분리될 때 성경은 육체적 죽음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구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죽었다 - 한번이자 마지막으로 영원히 - 는 것이다. 곧 우리의 삶을 왕으로서 다스리는 죄로부터 우리가 분리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은혜가 왕으로서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권세가 부서져 버린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 다시는 죄의 권세 아래로 붇들려 오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은혜의 권세가 더욱 넘치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복음 -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 이다.

그러면 은혜가 이렇게 왕노릇하므로 은혜가 더욱 왕노릇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범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이다. 왜냐하면 의롭다 함을 받고, 보혈로 씻음을 받고, 깨끗함을 받은 죄인이 우리가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 그 안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없다. 딛 2:11,12절 말씀에 지금 왕노릇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도록 가르치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롬 5:20, 21절과 6:1,2절 말씀에서 참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참아들은 죄책(罪責)과 그 형벌에 대하여 죽었고, 죄의 권세에 대하여 죽었고, 마음속에 죄가 왕노릇하는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분계선상에서 기독교계는 오늘 날 분열되어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사탄의 간교한 역사가 육신적 그리스도인이라는 교리와 함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교리인즉,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순간 죄책과 형벌로부터는 구원을 받지만, 죄의 권세는 아직 부서지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죄 속에서 살 것이며 그의 삶 속에서 여전히 죄는 왕노릇할 것이다.”는 것이 그 가르침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항의의 음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신 것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곧 구원 안에서 죄의 형벌과 함께 죄의 통치(권세)가 동시에 부서진 것이다. 물론 신자는 여전히 그의 육신 안에(in flesh) 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신자 안에서 주인으로 다스리지도 못하고 왕노릇하지도 못한다. 그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참자녀이면 그는 “나는 죄의 왕노릇에 대하여 죽었고 죄는 더 이상 내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는 죄가 아니라 은혜가 나의 마음과 나의 삶 속에서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참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출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였노라.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가 왕노룻하는 죄의 통치 아래 있거나 그래서 상실된 채로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은혜가 왕노릇하는 은혜의 통치 아래에 있어서 구원받고 안전한 신분으로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육신적 기독교라는 하는 중간 지내는 절대 없다. 만약 성령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죄의 다스림과 그의 권세, 곧 그의 통치 영역으로부터 해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상실된 자이고 그리고 영원히 상실된 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소극적인 면만 보는 것이다. 동일한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를 은혜의 통치 아래로 데려오신다. 성령께서는 이일을 구원 안에서 이루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은혜의 통치) 권세와 힘과 세력과 그 역동적 영향이 의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나의 경고를 들으시오, 기만을 당하지 마시라. 만약 여러분이 육신을 위하여 심으면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과 영원한 심판을 거둘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영생을 거둘 것이다(갈 6:6,8). 여러분, 속임을 당하지 마시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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