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

그 어떤 대리석에도 인체는 이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각가는 단지 그것을 해방시킬 뿐이다.
로마.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시인. 미켈란젤로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 왔다. 수 많은 그의 회화,조각,건축 작품들은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그중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임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조각가라고 여겼다. 그는 평생 대리석 조각에 몰두 했으며 단지 일정 기간에 다른 분야의 예술작업을 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유명해 진 또다른 이유는 그의 예술생애에 대한 기록이 당시나 그 이전의 어느 예술가보다도 훨씬 풍부하게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훌륭한 전기가 2권이나 출판된 최초의 예술가였다. 그중 하나는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르조 바사리가 쓴 <예술가 열전 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Sculptures & Architects>(1550) 의 마지막 장으로, 이 장에서 바사리는 현존하는 예술가로서 유일하게 다룬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그 이전의 다른 모든 예술가들의 역작을 능가하는 최고봉으로 평가했다. 이같은 찬사에도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미켈란젤로는 조수였던 아스카니오 콘디비를 시켜 별도로 짤막한 책(1553)을 쓰게 했다. 아마도 미켈란젤로의 구두 설명을 기초로 해서 썼을 이 책은 그가 원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의 2번째 판(1568)에 반박론을 실었다. 학자들은 콘디비의 권위있는 저술을 선호하지만, 바사리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과 그의 책이 지닌 전반적인 중요성 및 여러 나라 말로 자주 재판되는 등의 이유에서 바사리가 쓴 미켈란젤로의 전기는 가장 일반적인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수 백통의 편지, 스케치, 시 등의 유품은 생전에 누린 명성으로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많이 보전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듯 엄청난 자료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종종 미켈란젤로의 주장만 알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13살에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로렌초 디 메디치의 주목을 받으면서 메디치家가 수집한 고대조각들을 자유로이 접하고 이를 통해 조각의 기술을 익혀갔다. 이 시기에 제작한 <센토들의 싸움>과 로마체제 중 제작한 <바쿠스>는 그의 초기 학습과정을 잘 보여준다
1494년 그는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에 잠시 머문 후 로마에 체재하였다. 이 기간 중 제작한 <피에타>와 피렌체로 되돌아가 제작한 <다비드>는 그가 이전기간에 습득한 고전적인 조각기법의 완성을 보여준다.
1500년경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공화정의 피렌체는 그에게 다비드 상을 주문한다. 조각상의 공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던 피렌체 공화정은 이를 시청 앞에 놓음으로써 나라를 구한 소년 영웅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미켈란젤로가 구현한 고대 남성 조각의 조형미, 사실과 이상의 조화는 조각으로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공화정의 이념으로서도 더 없이 적절하였던 것이다.
교황 줄리오 2세는 1506년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청 안의 시스틴 예배실 천장화를 주문하였다. 교황의 처음 주문은 창문들 사이에 12사도를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장식 모티브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훨씬 거대한 계획을 세워 교황을 설득하고 지금의 천장화를 남겼다. 그는 빛의 창조에서 노아의 홍수에까지 이르는 <천지창조>의 주제를 택하였다. 그는 기존의 건축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천장에 이와 연결된 건축구조를 그림으로 만들었다. 9개의 면적에 천지창조이야기를 그리고, 창문 위 삼각형 사이의 큰 공간엔 예언자와 무녀들을 그렸다. 이 장대한 프로그램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빛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그들의 원죄, 노아의 타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양쪽의 예언자와 무녀들은 구원자가 오실 것임을 알려준 존재들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도 주문하였다. 이 또한 오랜 기간에 걸친 큰 프로젝트였고,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여기서는 이의 부분으로 제작한 일명 노예상 두 점을 보겠다. 16점의 노예상중에서 완성된 것은 현재 루브르에 소장되어있는 1점뿐이며, 미완성 몇 점이 피렌체 아카데미에 소장되어 있다.
1513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고, 죠반니가 레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올라 1515년에 그의 고향 피렌체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으며, 이후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후의 교황 클레멘테 7세)과 함께 메디치家의 재건을 서두르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메디치가의 가족묘를 주문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건축과 조각, 회화가 어우러진 묘실을 구상하였으나 완성되지는 못했다.
파르네제가의 교황 바오로 3세(PaoloⅢ: 즉위 1534-49)는 교황이 되자마자 메디치 예배실에 전념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여 <최후의 심판>을 주문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켈란젤로는 주문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웠다.

시대적 배경
그의 성장기부터 1564년에 죽기까지, 즉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역사는 격변기였다. 평온을 유지하던 피렌체는 1492년 로렌조 디 메디치가 죽자 1494년에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1495년엔 메디치家가 피렌체로부터 추방되었다. 그후 공화정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힘은 약하였고, 1512년엔 메디치家의 코지모(Cosimo I di Medici)가 장악하면서 피렌체는 거의 군주 국가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교황청 국가는 1527년 신성로마제국(현재의 독일)의 침략과 약탈에 위기를 겪는 한편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카톨릭의 권위마저 흔들렸다. 메디치와 공화정의 집권이 번복되던 피렌체와 로마의 교황청은 위기감을 느낄수록 위안과 과시의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주문으로 이어졌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대에 공화정과 메디치, 그리고 교황의 가장 큰 주문들을 받아왔으며 그의 작품들은 정치 속에서 예술가가 겪는 보호와 갈등,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육체미를 추구한 최고의 천재 : 강한 예술적 신념과 자신감으로 그는 점차 '신'같은 존재로 인식.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파악했고 웅장하고 힘이 넘침.아무리 작은 근육이라도 정확하게 그리고자했기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그가 그린 인체는 씩씩하고 위압적.

강력한 필치와 묘사로 인체의 내면 세계까지 그려내다 : 인간을 창조하는 것. 후기에 이르자 인체의 움직임이나 비율에 대한 고집에서 벗어난 좀더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을 찾게 됨.

<피에타상 1498∼99년, 대리석 174 x 195cm 로마, 베드로 성당>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나와서 조각 작품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 옷을 이용하여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조형적인 해결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옷이라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가지며,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수호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작품은 피라밋형의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안정감을 만들기 위해 마리아의 어깨와 치마폭을 좀 더 넓게 잡고 있다.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놓는 자세는 중세부터 내려온 도상인데, 이와 더불어 마리아는 33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이기보다 수태고지를 받던 10대의 소녀 나이이다. 순결한 성처녀 마리아를 강조한 도상이라 할 수 있다.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에타 상은 한 정신병 환자가 휘두른 망치에 손상을 입고 난 뒤 보수되어 방탄 유리 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다.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1498∼99년> <작가미상, 피에타, 1400년>

<성가족 패널에 유채 지름 120cm>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조각같이 그려진 마리아의 모습이며 회화보다 조각이 수수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인물 배치에 있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가족그림과 비교해 볼 때 다른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전통적인 구성에서는 요셉이 이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닥에 앉은 성모마리아가 몸을 뒤로 젖혀 요셉이 안고 있는 어린 예수를 어깨 너머로 건네받는 모습에서 주요 인물 세사람이 보다 밀접한 구성체가 성립된다. 특히 허리를 비틀은 마리아의 인체 표현과 특수한 운형 화면을 사용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비드 1501∼04년, 대리석 높이 410cm >

두오모 성당 건축 시 성경에 나오는 12 예언자들의 거대한 동상을 세우려던 계획을 대폭 축소하여 도나텔로와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가 하나씩 완성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1464년 두치오에게 한명을 더 조각하게 해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110km 떨어진 카라라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다가 발과 가슴 그리고 옷 주름 정도 작업하다가 그만두니 10년 후쯤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이어서 작업을 진행하지만 신통치 않아 25년동안 성당 작업실에 방치되었고, 그 대리석을 구입하느라 많은 돈을 썼던 두오모 책임자들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1500년 성당 작업소 기록에 '다비드'라는 제목의 대리석 형상 계획에 차질이 생겨 방치 중이라고 적혀 있다. 1501년 위원회는 완성시킬 예술가로 다빈치,안드레아 산소비노가 물망에 오르지만 당시 26세였던 미켈란젤로는 밀랍으로 작은 모형을 가지고 가 자기가 적임자라고 위원회를 설득시켰다.
1494년 메디치가의 몰락과 더불어 피렌체를 떠났던 그는 1501년 아직은 힘이 미약한 공화정 정부에 맞선 거대한 세력들을 물리치는 힘을 상징하고 싶은 목적으로 '다비드'라는 성경의 영웅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게 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크기만 컸지 두께가 45cm정도로 얇았던 대리석을 가지고 이 기념비적인 입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기술적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한 번만 손을 잘못 움직여도 작품 전체가 망가져 버릴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원석의 크기 때문에 형상의 자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골리엇의 잘린 머리를 밟고 서 있는 전통적인 다비드의 모습은 도저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대작의 전체를 봐가면서 작업을 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게다가 그는 키가 155cm밖에 되지 않음) 어려움이 따랐기에 그는 씻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마시는 일도 거르면서 작업에 매달려쓴데 일어나서 바로 작업하기 위해 옷을 입은 채로 신발까지 신고 그대로 작없실에서 잔 적도 있었다.
1503년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성요한 축일에 미켈란젤로는 작품을 거의 다 완성하게되고 위원회는 설치 장소 논의에 많은 귀족과 예술까들을 초빙해 논의했던 회의록이 잘 보존되어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원래는 두오모 성당의 12m 높이에 설치할 계획이였으나 그 크기와 무게 때문 불가능해 회의 결과 시뇨리아 광장 앞이나 시뇨리아 광장의 돋보이지 않는 장소인 로기아 데이 란치였다. 특히 다빈치가 세 번째 장소를 주장했는데 이 노 예술까는 어쩌면 급성장하고 있는 젊은 예술까에 대한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성공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짐. 미켈란젤로 역시 다빈치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결코 인정하지 않음) 그러나 대 평의회가 고집을 부려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 곳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도나텔로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계속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행정부의 수반이었던 소델리니가 코를 좀 다듬길 요구했지만 그 말을 듣는 척하면서 그냥 들고 있던 대리석 가루를 조금 떨어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소델리니도 그 결과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다비드가 대중들의 호응을 얻자, 소델리니는 그 옆에 다른 작품들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여 헤라클레스와 삼손의 밀랍 모형까지는 제작하지만 '바키오 반디넬리가'는 조각가가 실제 조각을 하여 나란히 서있음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 뒤 1530년대 메디치가 다시 집권하면서 미켈란젤로는 처형 대상에 올라 피렌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죽은 후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다비드'는 여전히 광장을 지키며 이번에는 메디치 왕조르 상징하는 역할을 맡는다.
1800년대에 들어서자, 시정을 담당하던 관리들은 3백년 동안 비바람과 햇빛과 베키오 광자에서 흘러노오는 오물이 대리석에 스며들면서 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1813년 보수가 시작되고 전체에 보호액을 발라 비자연적인 흰색을 띠게 된다.
하지만 1843년 코스톨리가 쇠수세미로 작품 표면을 밀어 버리는 바람에 섬세한 디테일이 지워져 버리고 대리석 표면도 심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이 한창이때는 다비드가 어떠한 역경도 고귀하게 이겨내는 '이탈리아 민중들의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다비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작품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져갔다.
마침내 옮겨야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지만 16세기 초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디로 옮겨야 할 지가 문제였다.
석고로 본뜨기를 함으로서 다시 한번 더 작품은 손상되고 1866년 복제품은 바르젤로 미술관에 설치되고 1871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진품은 보호상자에 갇혀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질 때까지 볼 수 없었으며, 20년 넘도록 논쟁만 계속되고 상자 안에 갇혀 있으므로 곰팡이까지 생겼다. 그 대신 청동으로 제작된 세 번째 '다비드'는 산로렌초 메디치가 무덤에 세우므로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이제 광장은 어느새 미켈란젤로 광장이라는 새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 시뇨리아 광장의 같은 자리에 또 하나의 복제 다비드가 설치된다.
매년 백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을 아카데미아로 불러들이는 다비드의 위력은 그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확신과 불안, 초인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도도함과 소박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조각상은 제작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초월하여 믿음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만약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부분을 통해 누군가의 얼굴과 자세가 확연히 떠올랐다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델을 보고 작품을 제작한다 하더라도 신성한 힘이 돌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건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죠.

율리우스 2세 묘비에 조각된 작품

<빈사의 노예1. 노예2 1513∼16년, 대리석높이 229cm>
이 작품은 1512년 <시스틴 천장화>가 완성된 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 건립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반항하는 노예>와 한 짝을 이루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서의 자존심은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교황과 왕들이 그에게 작품 의뢰를 요구했던 것을 번번이 물리쳤다는 것이 일화로 남아 있다. 이 작품도 원래는 한 후원자를 위해 만들다가 그가 죽은 후 율리우스를 위해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의 "노예"는 곧 죽음에 이를, 그런 상태에 있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과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에 부여한 생명성에 기인한다. 즉 덩어리 속에 한 인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한 것, 삶의 투쟁과 긴장에서 해방되는 이 노예의 마지막 순간을 실제 노예를 앞에 두고 묘사한다는 믿음으로 작업한 것이, 이 작품을 살아있게 만든 것이다조상의 윤곽선에는 대리석 덩어리라는 본래의 형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조상의 포즈가 복잡한 구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본래의 단순하고 안정된 통일성을 획득하고 있다. 피로와 육체의 고단함으로 가득 찼던 지상에서의 고단함을 이제 놓을 수 있게 된 노예의 나른한 표정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휴식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쯤 벗은 옷을 이제 막 올리려고 하고 있다.
<모세상1513-1516년 로마, 빈콜리, 산 피에트로 성당>
시스티나 천정화가 완성되고 얼마있지 않아서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II가 사망했는데, 그때 유언에, 1505년에 계약한 바 있는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II 묘당을 위해 10,000 두카덴(Dukaten)을 남겨 놓았다. 사실 이 묘당을 위해서 계획하고 추진하던 미켈란젤로의 그간의 노력은 그 시스티나 천정 벽화의 고난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식은 적이 없었다. 그곳에 안치될 상의 하나로 예정된 것이 바로 이 모세상이다. 머리 위의 뿔과 십계의 石板(석판)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고자로서의 모세는 그 위엄의 모습을 대리석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여러 예언자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감을 넘어서서, 평생 대리석을 유일한 매체로 삼던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 서의 본격적인 대결이 그의 응집된 量塊(양괴) 속에서 이 <모세>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의 중앙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걸작품으로 불타는 정열로 거대한 기념비를 시작했는데 시기하던 사람들 때문에 백지화되었다가 몇십년이 지난 후 대폭 축소되어 고령에 접어든 미켈란젤로가 혼열을 기울려 제작했지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온 모세가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분노에 찬 눈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힘과 정기가 넘치는 모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각이 완성 되었을 때 로마의 유태인들은 샤바트(유태교 안식일 ) 때마다 찾아와 경배를 드렸다 한다.


<승리 1520-1525년 피렌체, 베키오광장>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한 조각 가운데는 1505년 최초의 계획 이후 여러 번 그 계획이 바뀌거나 축소됨으로써, 제외되거나 방치되거나 새로 계획되는 조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가운데에 <승리>의 이름으로 불리는 조각은 같은 시기에 만들다 미완성한 채로 남아 있는 4체의 노예상(수염이 있는 노예, 젊은 노예, 아틀라스 노예, 잠이 깬 노예)과 의미 내용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승리>의 상이 나타내고 있는 상 자체에서 부터다. 노인(老人)을 발 아래 밟고 있는 젊은이의 나체상, 거기에서 그는 단순히 한 노인에 대한 승리가 아니고, 적어도 노인으로 상징되는 내용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中世) 이래 내려오는 '시간의 할애비'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나타내는 4체의 의인상과 더불어 이를 초극하는 승리를 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메디치가문의 로렌초 묘비
미켈란젤로는 이 두 조각상을 통하여 인간의 두 유형 즉 행동하는 유형(칼을 들고 있는 줄리아노)과 명상하는 유형(생각하는 자세의 로렌조)을 만들었습니다


<메디치가의줄리앙 부분 1526∼34년, 대리석높이 173cm 피렌체, 성 로렌초 대성당 >
미켈란젤로가 위촉받은 메디치가 묘당은 교황 레오 10 세의 아버지, 로렌초, 로렌초의 동생인 쥴리아노, 그리고 또 레오 10세의 동생인 쥴리아노, 그의 조카 등 로렌초가의 4명의 묘를 안치하는 묘당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로렌초의 상과 그 아래 남녀 한쌍인 <아침과 저녁의 의인상(擬人像)>, 쥴리아노의 상과 그 아래 남녀 한쌍인 <낮과 밤의 의인상>, 그리고 성모자상(메 디치 성모상)이 벽면 건축과 함께 있다. 묘당 자체는 작지만 전체적으로 높은 인상의 공간감을 주고 원 천정으로 덮어져 있다. 대로렌초와 쥴리아노 형제의 두상(頭像)은 대조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생각에 잠긴 듯한 로렌초에 비해서 행동력이 보이는 쥴리아노를 대치시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들 주요 조각 작품을 위해서는 자기 손으로 전부 완성을 해야겠다는 성의를 편지에서 전하고 있다.
<메디치가의 로렌초>

<피에타 1546-55, 대리석 높이 233cm, 피렌체 두오모성당>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누구로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자신을 위한 피에타상들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이 70세쯤에 자기무덤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미완성이지만 종래의 피에타 도상과는 전혀 다른 이 <피에타>의 구성은 그의 종교관을 짐작케 합니다. 양쪽의 두 마리아가 시체를 부축이고 있지만 시신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듯 미끄러져 내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니코데모는 마치 건물의 도움과 같이 그를 보호하며 얼굴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을 새겨놓았다. 니코데모는 원래 예수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나 모험을 무릎쓰고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사람이다.

<론다니니 피에타 1552-64년, 대리석높이 195cm, 밀라노, 스포르제스코성당>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붙들고 있던 작품이다. 시신은 길게 늘려있고 예수를 부축하여야 할 마리아는 오히려 시신에 얹혀있는 듯 불안정합하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만든 이 작품은 그가 청년기에 만든 바티칸 소장의<피에타>와 너무나 큰 대조를 보인다.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기법은 모두 사라지고 절절한 간구만이 남았다. 이미 하나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지키고 있는 마리아의 인상으로서도 박약하고, 또 마리아에 안긴 그리스도의 인상도 박약하리만치 그야말로 특이한 자태의 미완성 상이다. 피에타는 무르익던 르네상스 시대가 가고,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미켈란젤로가 구원을 갈구하는 참 모습일 것이다. 미술의 세계도 조화를 버리고 왜곡과 과장으로 새로운 방향을 찾는 매너리즘으로 향한지 벌써 반세기가 되는 시기이다.
<천지창조1 시스틴 성당 천장화 1508∼12년, 프레스코> <시스틴 예배실> <시스틴성당>
긴쪽 벽면에 보티첼리의《모세의 생애》를 비롯한 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린 그림과 그 반대 벽면에는 《예수의 생애》 등 신약성서의 내용을 비롯한 도합 12점의 벽화를 좌우의 벽면에 나누어 제작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들 벽화는 보티첼리를 중심으로 D.기를란다요, P.디코시모, L.시뇨렐리, 페루지노, 핀트리코 등이 3개-년에 걸쳐 그렸다. 그 뒤 1508년에는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미켈란젤로에 의해 유명한 천장 그림의 제작이 시작된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궁 시스티 나 예배당의 벽화를 의뢰 받았을 때(1508) 성당 옆벽에 이미 15세 기 화가에 의해서 모세전과 그리 스도전의 주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그는 구약성서 속의 장면 들로써 이를 완결지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노아의 이야기에 이르는 장면,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예언 하는 사람들, 즉 선지자들과 여자 예언자격인 무녀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모습이 이에 해당된다.
그때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해 제작을 추진 중에 있었다.
그것이 중단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천정화를 위해 회화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천정화를 입구에서 제단쪽 으로 진행하였고 표현형식도 4단 계-천지창조연작, 예언자와 무당 및 구약성서: 그리스도의 조상- 로 나누어 발전시켰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로부터 요구되어진 천장벽화의 주문을 거역하고 논쟁을 벌였다. 미켈란젤로는 장식 계획의 확장을 원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당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시오"라는 말로 율리우스 2세는 갈등을 끝냈다고 한다.
540평방미터 넓이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완성하는 것은 거의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만큼 방대한 작업이었다. 대부분 그림의 주요 장면은 연대기적으로 전개되는데, 미켈란젤로는 작업 당시 이와 반대로 연대기를 거스르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작업했다. 1510년 8월까지는 <술 취한 노아>에서부터 <이브의 창조>까지 천장의 첫 번째 다섯 개의 장면이 완성 되었다. 나머지 네 개의 장면인 <아담의 창조>에서 <빛과 어둠의 창조>까지, 그리고 창문 위의 반달 모양의 공간에 그린 그림들은 1512년 10월에야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몸에 심각한 무리가 왔다. 갑상선종이 점점 더 커지고 목덜미와 가슴에 통증이 악화되었으며, 신장과 골반이 뒤틀리는 몸의 불균형이 나타났다.
<시스타나 천장 벽화>에는 결코 미켈란젤로가 혼자 생각해 낸 것으로는 볼 수 없는, 매우 지능적으로 고안된 신학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 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노아의 만취까지를 담고 있다. 양쪽에는 구약에 나오는 일곱 명의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던 다섯 명의 <고대 무녀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천장의 반달형 공간에는,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에서 열거된 '그리스도의 선조'들이 그려져 있다. 중앙 화면의 구석에 있는 삼각형의 벽면 네 곳에는 신약의 사건과 예형학적으로 관련된 구약성서의 네 장면이 각각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이 살고 있는 하나의 건축학적인 체계 속에 주요 그림들과 인물들을 고정시켰다. 그는 예언자들과 고대의 무녀 사이에 부조 형태의 푸토(벌거벗은 동자상)들이 떠받치고 있는 낮은 주춧대를 설치했다. 그로부터 천장의 구획을 나누어 그림의 경계를 만드는 가름대가 형성된다. 주춧대 위에는 나체의 청년상인 <이뉴디>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 중, 비교적 작게 그려진 다섯 개의 그림들을 네 명의 이뉴디가 둘러싸고 있다. 그들에 대한 해석은, 주춧대를 떠받치고 있는 <대리석 느낌의 푸토상>이나 원형의 <청동상 느낌의 청년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고 있다. 바사리는 이뉴디를 황금 시대의 전령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푸토들과 이뉴디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알레고리화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와 '예언자들과 고대의 무녀', '그리스도의 선조들'과 연결될 수 있다.


<천지창조>
시스틴 천장 벽화를 구성하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성당 제단 쪽에서 시작해 입구 쪽으로 주제별로 전개되고 있다. 이 작품은 벽화들 중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그림에 속하며, 나체상을 뜻하는 4명의 이그누디(Ignudo)를 작은 형태와 큰 형태 교대로 배열하면서 펼쳐진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19절에 해당되는 이야기, 즉 해와 달, 별, 식물을 창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내용상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밝은 빛을 품고 해와 달, 별을 창조하는 역동적이며 힘있는 하나님의 비상하는 모습과 더불어, 식물을 창조하는 하나님이 저 멀리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모습이 한 벽화 안에 그려져 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두려우면서도 경이로운 존경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 그림 뒤에 나오는 <아담의 창조>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거리를 두면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켈란젤로의 이 천장 벽화에는 여느 화가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뛰어난 상상력과 필치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중앙부분의 천지창조관련

<빛과 어둠의 창조>
천정화 중간축(中間軸)의 마지막에 해당되며, 구약성서 순서로는 첫째 장면이 되는 이 그림의 장면은 바로 창세기 1장 45절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빛과 어둠의 창조 내용이다. '-하나님의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내용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담홍색의 옷에 싸인 신령이 두 팔을 들고 위를 쳐다보며 빛과 어둠을 만들고 있는 것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의 그림 내용에 일치하고 있는 듯이 사방 귀퉁이에 낮(右下), 아침(右上), 저녁(左上), 밤(左下)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의인상(擬人像)이 있고, 그 각각 한 쌍씩이 끈으로 메다이용에 연결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한쪽 팔을 머리 뒤로 가져가서 몸을 옆으로 틀고 있는 <아침>의 상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정신적인 상태를 육체적으로 표출할 때 많은 움직임도 보인다.

<해와 달과 초목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하늘에서 물을 분리하는 일은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창조하신 다음 둘째날에 이룬 일이지만, 앞서 말한 그림의 순서로서는 천체(天體)의 창조 다음에 배치하였다. 그 이유는 네 귀퉁이에 물질계의 상징으로 보이는 4원소의 의인상을 함께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창세기 1-9, 10) 이런 내용에 그림의 주제를 맞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나체상의 상징과 어느 정도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람, 즉 공기의 상징과 물, 불과 흙의 상징을 이들 속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푸른 옷을 둘러 쓴 여자같은 상은 물(左上)을 나타내고 곱슬머리는 불(右下)이 아닐는지. 두 손을 번쩍 든 하나님은 아래를 보면서 부유하고 있다.

중앙부분 아담과 이브관련

<아담의 창조>
하늘로부터 강렬하게 돌진하는 하나님은 아기 천사들에 둘러싸인 이브를 옆에 끼고, 아담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뻗고 있다. 대지에 밀착된 아담은 하나님을 향해 몸을 내밀고 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아 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브를 보며 묘한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설정은 아담의 표정과 육체와 영혼을 부여하는 신의 강렬한 눈빛으로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몸이 반쯤 세워진 아담이 하나님에게 생명의 힘을 전해 받으며 짓는 표정에는, 앞으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고통스런 현실 공간으로 떨어지게 됨이 어렴풋이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취하고 있는 역동성과 신비함은 아담과의 절묘한 대비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아담의 창조>는 성당 입구에서 출발하여 구약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간 지점에 그려져 있다. 이는 인간과 신이 함께 표현되는 양식을 과감하게 창조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창조적 힘과 인간이 만들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이브의 창조>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창세기 2-21, 23). 커다란 망토에 둘러싸인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어 그야말로 나무 밑에 자고 있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듯한 이브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그가 볼로냐(Bologna)에서 본, 그가 많은 영향을 받은 쿠엘치아(Gacopo della Querciar)의 힘찬 구약성서 부조와의 유사점을 지적받기도 한다. 주위의 나체상은 인체 속에 흐르는 네 가지의 액체 내지 네 가지의 인간의 기본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혈액으로서의 다혈질(右下), 황담즙으로서의 담즙질(右上), 점액으로서의 점액질(左下), 흑 담즙으로서의 우울질(左上) 등으로 지적된다.

<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낙원추방1 2>
여기서는 두 가지의 장면이 동일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중앙의 지혜의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나무를 감고 있는 뱀에 유혹되어 이브와 함께 나무 열매를 따려는 아담, 오른쪽에는 천사에 의하여 낙원에서 추방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 열매를 따려는 아담의 뻗은 파로가 유혹하는 뱀의 팔, 그리고 천사의 검 (劍)을 피하려는 아담의 뻗은 팔에서 다시 양 면(面)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균 제감과 나무를 이중(二重)으로 감고 있는 여자 얼굴의 뱀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천사로 두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오른편의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는 브란카시(Brancasi) 예배당의, 울면서 쫓겨나는 마사치오(Masaccio)의 같은 주제의 상을 방불케 하는 바 없지 않다. 그러나, 젊은 시절 흠모하던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감정이 흐르고 있다.

중앙부분 노아관련

<노아의 번제1 2>
노아의 번제의 주제로 알려진 내용은 홍수에서 구제된 노아가 그의 처와 딸, 그리고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에게 감사의 번제를 올리는 장면으로 창세기 8장 20-21절에 나온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미켈란젤로는 이 천정 벽화에서 캇시나 전투 하도(下圖) 이후 처음으로 프레스코 벽화 제작에 임하였고, 힘든 경험을 겪게 되었다. 방주 문 앞에 딸과 처 사이에 서서 하늘을 가리키며 준비를 지시하고 있는 흰 수염의 노아의 모습에는 <도니가의 마돈나>상의 요셉과 닮은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표현은 후기의 작품에 비하여 딱딱하다. 둘레에는 인간의 네 가지 감각 [후각, 시각(右下), 촉각(右上), 청각(左上), 미각(左下)]이 나체 의인상(擬人像)으로 표시되고 있다.

<노아의 홍수1 2>

<술취한 노아>
'방주에서 돌아온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고하매 이들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는 창세기 9장의 이야기 내용이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묘사되었다. 커다란 포도주 통이 놓여 있는 막사 안에 취해 있는 노아와 그 앞에 세 아들이 서 있고, 밖에는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이는 일에, 덥고 춥거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낮과 밤을 끊이지 않는' 농사를 짓는 노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 네 귀퉁이에는 다름 아닌 4계절의 의인상(擬人像)이 그 의미의 내용에 일치시키고 있다. 봄(右下), 여름(右上), 가을(左下), 겨울(左上).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의<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낙원 추방> 마사치오의<낙원추방>



<리비아의 무녀> <드로잉>

주제의 좌우(12선지인)

<예레미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미래에의 희망을 강조하면서 살던 선지자 예레미야가 무녀(巫女) 리비아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앞선 무녀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그리고 생각에 잠긴,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는 노인상(老人像)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에서와 같이 시스티나 천정화에서 여러 가지의 독자적인 해석과 조형적인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와 작업의 범위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범인(凡人)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은 그 하나하나의 그림의 내용과 도상(圖像)과 그들이 전하는 사상을, 특유한 인간과 인체의 표현으로 매개하면서, 한편 전체의 구성에 대한 그 나름의 리듬에 한 몫을 담당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형태의 표현만이 아닌 특유의 미적 색채감을 남기고 있다.

<페르시안 무녀(Persian )>

에제치엘(Ezekiel)>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대왕국 4대 예언자의 한 사람. 구약성서 속의 한 책인 《에제키엘》의 저자. 에스겔이라고도 한다. 에제키엘은 BC 597년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많은 유대인 포로들의 신앙지도자로서 신망을 한몸에 지닌 사제(司祭)였다. 포로생활 5년째 되던 날 바빌론의 그발강(江)가에서 야훼 신으로부터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숭배한 죄의 대가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BC 587년에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그 뒤 절망에 빠진 유대 민족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은혜와 영광이 빛나는 미래를 예언하였다

<에르트리아의 무녀(Erythrean )>
노아의 이야기를 둘러싼 선지자 그룹, 즉 입구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 <에리트레아의 巫女>는 이사야와 마주하는 비교적 정적인 표현 세계에 속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육체와 영혼의 표현상의 균열이나, 도상(圖像)내용과 표현 형태 사이의 일치의 초극이라 는 문제가 그의 중요한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런 면의 한 경우를 이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을 말한 에리트레아의 무녀가 비록 책장을 넘기면 서 무시하는 모습에 그의 그 놀랍고도 엄숙한 예언의 기미를 담고 있다고도 하겠으나, 역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체의 움직임이 그다지 크지 않은 조용 함이라 하겠다. 뒤의 기대의 박공을 떠메고 있는 장식 조각의 푸토(putto)들이 입구 위의 예언자 군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정면성을 넘어서 사선으로 움 직이고, 그에 못지 않는 배경의 어린이의 움직이는 포즈도 이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요엘
구약성서 <요엘서>의 주인공. 거대한 메뚜기 떼가 이스라엘 땅에 재앙을 몰고 왔다. 예언자 요엘은 그것을 심판의 날을 알리는 조짐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묵시적인 언어로 하루 빨리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뒤이어 미래에 대한 환상을 펼쳐보인다. 그 환상 속에서 야훼는 그의 백성이 받은 고통을 보상해 주고 그들의 적을 징벌한다. 요엘의 신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책이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온 기원전 400년에서 35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쏟아짐을 예언하는 구절은 성령강림절에 성령의 선물을 예시하는 것으로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 인용되어 있다.
즈가리야
이스라엘의 예언자. 《즈가리야서》의 저자로, 위로와 소망과 영광의 선지자이다.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이 성전(聖殿)을 재건할 때 여러 가지 방해로 중단되면서 백성의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할 때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무관심과 나태함을 깨우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자연적으로 성전재건을 주제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생활이 다시 부흥됨은 물론 이 회개한 민족을 통하여 메시야가 강림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선지자이자 제사장이었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임과 동시에 선지자로 파악하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델포이의 무녀>
<빛과 어둠의 창조>에서 노아의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9구분으로 된 구약성서 내용의 천정 중심 화면 전 후 좌우에 12체의 선지자, 그리고 무녀가 그 아래 건축적인 틀에 억눌려 있는 그리스도의 선조 그림들보다 훨씬 위풍있게 그려졌다. 그런 예언자의 위치는 입구 바로 위에 있는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를 비롯하여 첫째 그림, <노아의 만취>를 두고 왼쪽에 <델포이 의 무녀>와 오른쪽에 <선지자 요엘(Gioele)>, 그 다음의 삼각 벽면을 건너서, <노아의 번제>를 두고 왼쪽에 선지자 이사야와 오른쪽의 에리트레아의 무녀와 <에바의 창조> 그림을 두고, 구마의 무녀와 선지자 에제키엘, <하늘과 물의 분리>를 두고, 선지자 다니엘과 페르시카의 무녀, <빛과 어둠의 분리>를 두고, 리비아의 무녀와 선지자 예레미야, 그리고 제단 바로 위에 선지자 요나가 위치하게 된다. <델포이의 무녀>는 후반 이후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대담해지고 커지는데 반하여, 균형이 잘 잡힌, 전반의 그림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이다.

<이사야>
메시아를 기다린 선지자 이사야가 정면을 향해 옆을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는 데서 드러난다. 직각에 가까운 팔과 다리의 포즈는 등뒤로 둥글게 윤곽을 주는 망토의 곡선과 함께 이 천정 벽황서 미켈란제로가 여러 번 시도하던 경향으로, 여기서도 반영시키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가만히 앉아 있는 좌상에서도 주로 그 포즈나 형태감의 흐름에서 정적인 고전주의를 초극하고 있다. 그런 예를 이 천정화에서는 수없이 헤아린다. 조각가인 그가 그림 세계에서 보여주는 조상적(彫像的)인 것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그와 같은 특수 경향은 그의 예술로 하여금 고전적 이상주의 속에 이미 싹트고 있는 매너리즘적인 특성을, 그것이 나아가서는 과장되는 공간감과 더불어 바로크적인 특성을 지닌 것의 근거로 지적 받기도 한다.

<Cumaean 무녀>

<다니엘>
구약성서 《다니엘서》의 주인공으로, 구약시대의 4대 예언자 중 마지막 인물. 유대 민족이 처음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BC 597) 소년인 다니엘도 같이 연행되었다. 처음에는 궁정에서 시동(侍童)으로 일했으나, 시종일관 조국의 복권을 기원하며 이교(異敎)의 권력과 박해에 대항해 싸웠다. 뒤에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몽해 준 일로 인하여 명예로운 지위에 올랐으나, 고관들의 질시로 두 친구와 함께 풀무불 속에 던져졌으나 무사하자, 다시 사자 굴에 던져졌는데도 신의 가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흔히 ‘믿음의 용사’ ‘신의 절대적인 가호’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리비아의 무녀>
고대의 여자 예언자격인 시빌라(Sibylla)라는 무녀(巫女)들은 열 명 정도가 세계 여러 곳에 살면서 앞으로 닥쳐올 일을 말하였던 것으로, 후에 와서 그리스도나 그의 가르침에 관한 예언으로도 가끔 인용되었다. 여기서는 남자 예언자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예언자 연작에서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게, 대개가 책이나 종이 두루마리를 펴고 있거나 들고 있는 포즈를 취하게 함으로써 그 부분의 특성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도 '그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모든 일들을 기록한 책을 내놓을 것이다.' 커다란 책을 두 손으로 들고 뒤에서 옆으로의 움직임의 공간을 예상케 하는 이 리비아의 무녀의 그림에서 앞의 예언자 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격렬한 움직임의 '요나'에 가까운 커다란 움직임의 자태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이 그림을 위한 습작에는 남성상(男性像)의 데상이 돋보인다.

<요나>
천정화의 입구에 위치한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와 마주 보며, 안쪽 제단 위의 중요한 벽면에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요나>이다. 조용하고 균형이 잡힌 전자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표현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심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뒷배경의 유동성도 이에 호응하여 한층 더 고조되는 공간을 낳게 한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먹혀 하나님에게 기도 한 결과 3일 만에 그것에서 토해 내어졌다. 그런 뜻에서 부활의 상징이 덧붙기도 한다. 커다란 입의 물고기가 요나 옆에 보인다. 이와 같이 12체의 선지자와 무녀(巫女)의 배치라는 구성이 타에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이들 선지 자 내지 무녀를 그리는데서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해석이나 의미 부여도 독자적인 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요나가 있는 천정에 붙은 벽에 바로 최후의 심판 그림이 위치한다.

네모퉁이

<유디스와 Holofernes>
구약성서의 외경(外經) 가운데 하나인 <유딧書>의 주인공. 유딧이라는 미모의 한 유대인 과부가 민족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하여, 미모를 이용하여 베툴리아를 완전포위하고 있는 아시리아군의 적진 속에 들어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을 구하고 동족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교훈적 이야기이다. 가공적인 설화이지만 종교문학적인 기교는 뛰어나다. 마카비 시대 초기에 저자는 바리사이파(派)에 속하는 사람에 의해 헤브라이어(語) 또는 아람어로 쓰여졌다. 가톨릭에서는 이 책을 제2정경(第二正經)으로 채택하였으며, 한국에서도 1977년에 완간한 《공동번역성서》(외경부)에 새로이 번역·수록하였다. 16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7장은 서론에 해당하고, 8장 이하가 유딧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윗과 골리앗>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 왕. 이스라(이새)의 아들로서, 소년시절 사무엘이 사울왕(王)의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성장하여 사울왕을 섬기고 페리시테(블리셋)의 거인 골리앗을 돌로 때려죽여 용맹을 떨쳤으나, 사울의 질투로 적대시당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의 우정과 보호를 받아, 사울이 죽은 후 BC 1000년 유대의 왕, BC 994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신의 언약궤를 옮기고, 제사제도(祭司制度)를 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교[猶太敎]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자식들 간에 왕위계승의 싸움이 일어나는 등 평온하지 못하였다. 또 하프의 명수였고,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구약성서 시편의 상당부분은 다윗이 지은 것이라고 알려졌다. 그의 사적(事績)은 구약성서 《사무엘 상(上)》 l6장 이하와 《열왕기 상》 2장 및 《역대기 상》 11∼29장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교활한 독사>

<하만의 형벌>

아홉 주제의 그림 네 귀퉁이 마다 다양한 포즈의 《Ignudo》를 배치하였고, 아홉가지 그림의 좌우 옆쪽으로는 《12명의 무녀(巫女)와 예언자》를, 삼각형 모양의 요면벽과 반월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가족과 조상들을,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의 그림들을 각각 그렸다.

그리스도 조상들

<Achim 과 Eliud> <Manasses와 Amon 그리고 Ezekias>

그리스도 선조 가족들

<Zorobabel의 가족> <어머니 아비아와 어린 Roboam>

<Ozias 가족> <어린 솔로몬과 그의 어머니>

이구누도1 2 3 4 5 6





<최후의 심판 1534∼41년, 프레스코 1450 x 1300cm> 부분도1. 2. 3
세상과 인간의 탄생과 그에 관련된 것들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낸 혈기왕성한 37세의 대화가 미켈란젤로는 회갑이 넘어 신이 창조한 세상의 종말을 그리기 위해서 다시 이곳을 찾는다. 1534년부터 7년간에 걸쳐 작업한 이 작품은 391명의 군상이 난무하며 장대한 구도와 복잡한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움직임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는 그의 만년의 대작이다. 성경에 예시된 최후의 날의 그리스도 재림과 그 때 행해지는 심판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천국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지옥의 공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최후의 날에 부활하는 사람들과 심판에 의해 끌어올려지는 선인과 밀려나는 악인은 당당한 심판간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 천국을 묘사하면서 그 곳에서 만난 인물들을 비평하고 평가하여 오랜 역사를 심판하였듯이 미켈란젤로는 그의 벽화에서 그러한 심판을 하였다.
중앙에 있는 예수는 오른손을 들어 심판을 하고 왼손으로는 주위의 착한 자들을 부르고 있다. 곁에는 인자한 성모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들러싸고 있고, 예수의 발 아래 오른쪽에는 사도 바르톨로메오가 영혼과 육체가 빠져 나간 미켈란젤로의 껍데기를 쥐고 있다. 작가는 덧없는 인생을 살아온 자신의 위치를 그렇게 예언했다. 예수의 오른쪽에 열쇠를 들고 있는 백발의 노인은 성 베드로이고 그 왼쪽은 성 바울이다. 마리아의 왼쪽에는 십자가를 든 성안드레아와 노인 모습의 성 요한이 있다. 글미의 윗부분은 천국에서 만나는 기쁨을 그렸고, 중간 부분에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심판관에게 순교자의 심벌을 각자 보이고 있으며, 하단의 좌측에는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묘사되어 있는가하며 우측은 반대로 천당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는 장면이다. 무거운 죄를 지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천사들의 부측을 받아야 천당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 작품은 '천지창조'를 그리던 때와는 달리 종교개혁으로 전 기독교계가 몸살을 앓고 있던 때라 당시의 비극적인 시대상과 노년에 접어든 미켈란젤로의 비관적인 인생관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벽면전체를 4구역으로 나누어 7년에 걸쳐 위에서부터 1.천사들, 2.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과 순교자들 , 3.천상으로 끌어올려지는 무리와 나팔을 부는 천사들 ,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리들 그리고 맨 아래층에는 4.지옥을, 높이 20m나 되는 벽면에 391명의 다양한 인물군들로 가득 채움.
-미술사가 노성두에서-
1541년 만성절.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경사스런 행사에 맞추어 시스티나 예배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수십 년 째 완공이 지체되는 바람에 줄곧 여기서 의식을 치러왔으니 새삼스런 걸음은 아니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예순 여섯의 늙은 예술가에게도 감회가 밀려왔다. 이윽고 창문을 가렸던 휘장을 걷어내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올려보는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후의 심판 날, 뭇 영혼들의 찬양과 울부짖음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재림 예수가 하늘 복판에 앉았다. 천사와 악마, 꽃다운 생명을 던져서 신앙의 사표가 되었던 순교자와 열두 제자들, 그리고 400명이 넘는 성자와 성녀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퍼렇게 빛나는 하늘은 어떤 심판의 칼날보다 무섭고 전율스러웠다. 그런데 그림을 뜯어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술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쥐어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최후의 심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두둔하다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고 막말을 듣기도 했다. 뒤이어 성좌에 오른 네 명의 교황들은 제단 프레스코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안팎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성자, 성녀 알몸으로 그려

그림 한 점을 두고 이단의 의혹을 천 가지 이상 꼽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성자들 뒤통수에 후광이 없고 천사가 날개를 달지 않은 것도 시빗거리였다. 예수 얼굴을 수염 없는 애송이로 그려놓았으니 교회의 권위를 어디서 찾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들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빨간 알몸으로 벗겨놓은 게 탈이었다. 의전관 체세나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음탕한 그림을 교황 예배소에 버젓이 그려두었으니 자칫 목욕탕이나 술집에 온 줄 착각하겠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모신 제단 바로 위에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걸 보고 이건 예배소에 모인 사람들더러 곧장 지옥불로 직행하라는 이야기라고 수군댔다. 더군다나 명부의 뱃사공 카론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타고 노를 휘두르는 판이니 첫 교황 베드로가 일군 천오백 년 역사의 가톨릭 교회가 그림 속 푸른 바다에서 뱃멀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24년 시비끝 수정결정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바오로 4세는 `그림을 바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종장의 전언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교황 성하께 먼저 세상을 바로 잡으시라고 전하게. 그러면 그까짓 그림 따위야 저절로 바로 잡힐 테니.” 그러나 뒤를 이은 피우스 4세에게는 그런 발뺌이 통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는 그림 수정을 결의한다. 1564년 1월 21일 트렌티노 공의회의 결정은 미켈란젤로가 여든 아홉 나이로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내려졌다.

수정 작업을 그의 제자 볼테라가 맡은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스승의 뜻을 크게 다치지 않고 최소한의 가리개만 씌우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다만 엉덩이를 흔들어댄다고 비난을 모았던 성녀 카테리나는 본격적으로 손보았다. 성자들의 부끄러운 곳을 덮는 가리개는 회벽을 파내고 젖은 석회를 새로 바른 뒤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볼테라는 이후 `브라게토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가리개 귀신'이란 뜻이다.

살가죽에 미켈란젤로 자화상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돌로 쳐죽이거나, 자루에 넣고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은 극적 효과를 노리고 가장 참혹한 순교방식을 선호했다. 잔혹 주제가 판치던 17세기에는 심지어 성자를 십자가에 매단 상태에서 인피를 벗겨 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단검으로 발라낸 성자의 껍질에다 자신의 자화상을 새겼다. 이로써 육신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 예술의 고귀한 유령이 깃들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미켈란젤로는 제 얼굴을 그리면서 두 눈을 후벼팠다. 실명의 달콤한 유혹이 그의 붓을 이끌었다. 또 그의 표정은 젖은 걸레처럼 일그러졌다(그림2). 무슨 심사였을까? 성 바르톨로메오 말고도 살껍질을 벗겨서 죽은 인물이 또 있었다. 마르시아스. 반인반수의 괴물이었으나 아폴론의 키타라를 능가하는 피리 솜씨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순교자로 추앙 받았던 신화 속의 존재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도 예술의 순교를 꿈꾸었을까?

'목욕탕에 어울리겠습니다'

시인 아레티노는 탁월한 미술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에게는 간지러운 아부를 서슴지 않았으나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주특기인 독설을 쏟아냈다. <최후의 심판>을 보고 나서 1545년 일흔 먹은 미켈란젤로에게 쓴 편지다.

“천사와 성인들은 지극히 고귀한 소재입니다. 그런데 당신 그림을 보면 지상의 진지함이나 천상의 엄숙함을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군요. 알만한 예술가라면 디아나에게 옷을 챙겨주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베누스도 손으로 가릴 곳을 가리게 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그대가 예술을 구실 삼아 신앙을 깔보는군요. 순교자와 성스런 처녀들이 창피한 줄 모르고 넋빠진 자세로 저마다 성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설령 유곽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쳐도 도저히 눈뜨고 못 볼 희한한 볼거리가 되겠군요. 이 그림은 교황의 성스러운 예배소보다 고급 목욕탕에 갖다두면 어울리겠습니다.”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4.html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