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Raffaello Sanzto di Urbino (1483 ~ 1520)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작가의 한 사람으로 조숙한 천재였으며,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이다.
1483년 우르비노의 화가 지오바니 산지오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서의 수업은 아버지와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했었다.
초기의 작품은 페루지노의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으나 <기사의 꿈> <삼미신> 에서 <마리아의 결혼>에로의 발전은 서정적인 스승의 예술을 점차 순화하고 형식미로 통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504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옮겨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위시해서 바르톨로메오, 미켈란젤로의 조형법도 단시일에 익혔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그란듀카의 성모=대공의 성모>등 일련의 우아한 성모 그림과 성 가족그림, 초상화 <도니부처>, 그리고 미켈란젤 로의 영향을 나타내는 극적인 <그리스도의 매장>등이 있다.
1508년 말에 고향 친구인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초청되어 포마로 옮 긴 라파엘로 는 1520년 4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바티칸 궁정화가로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아래에서 일하고 시대의 총아로 그의 작업의 정점에 이르렀다
바티칸궁 <서명실>의 벽화 중 특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상징적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아 테네 학당>과 <성체논의> 등의 벽화 제작은 그의 총체적인 재능이 그리이스 정신과 그리 스도교 정신의 총합이라는 교회의 세계주의적인 의도와 혼하연 일체가 되어 르네상스 인문 주의 예술의 정화로 되어 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장대한 건축공간과 다수의 인물군상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실현하 여 고전양식의 규범이 된다.
건축에도 손을 대 1514년 브라만테의 사후 뒤를 이어 레오 10세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주임에 임명되어 그 조영사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다음해에는 고대 유물 감독관에 임명되고 고대 유품들을 조사하였고, 유적지도의 제작 도 시도했으나 미완에 그쳤다.
그의 설계로 알려진 건축작품에는 앞서 말한 키지가의 교회 외에 비드니카파렐리의 저택, 로마 근교의 빌라마다마 등이 있다.
그 작품은 프란체스코 마우라나와 브라만테를 계승한 우아하고 엄격한 고전주의라 하지만 오늘날 그 작품의 대부분이 대폭적으로 수정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는 어렵다.
라파엘로는 살아 있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성숙한 르네상스의 도달점

독창적인 구도와 인간미 넘치는 묘사 : 세련되고 새로운 조화의 품격을 빚어낸 천재. 특히 많이 그린 '성모자상'은 조화와 독창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청량감과 우아함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세속적인 측면으로 서민들로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적 배경

로마는 카톨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고대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야심이 있는 교황들은 언제나 '세계의 머리'로서의 로마를 재건하려 하였고 그때마다 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경향의 미술이 적용 또는 이용되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Ⅳ: 재임 1471-84)는 로마의 도시계획을 정비하고, 옛 문서를 모아 도서관을 설립하였으며, 고대 조각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었다.
식스투스4세의 조카였던 줄리오 2세(율리우스2세)는 교황이 되자 로마가 고대의 위용을 다시 갖추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계획하고, 고대 조각들을 열성적으로 모아(아폴로상. 라오콘상등) 바티칸박물관을 만들었으며, 조각전시를 위한 정원도 조성(벨베데레 정원)했다. 또한 궁 안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의뢰하고, 라파엘에게는 <서명실>의 벽화를 주문했다. 교황의 이 왕성한 미술사업은 로마제국을 되살리고, 자신이 줄리우스 시저의 이미지를 갖추는 것이었다.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에게 설계를 의뢰한 <벨베데레>정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8각형의 정원에 고전적인 건축방식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배치된 조각의 전시방법은 실로 쾌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어서 이 후에도 조각 전시방법의 모델이 되었다.
매우 정치적이었던 교황 줄리오 2세는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506년엔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형태의 <베드로 성당>을 완전히 다시 지을 계획에 착수하고, 1508년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주문하여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시작한 시스틴 예배실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듬해엔 라파엘에게 현재의 서명실벽화를 주문하였다. <아테네 학당>과 <성체에 대한 논쟁> 등의 주제로 그려진 소위 <서명실> 벽화는 라파엘 회화의 가장 완숙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줄리오 2세의 고전주의 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다. 주문자의 정책과 화가의 스타일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서명실>이라 부르는 바티칸의 이 방은 줄리오 2세 당시엔 개인 도서실이었다. 당시의 서재는 외교적인 공간이었고, 이 그림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물이었다. 그럼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어떻게 이교의 학문인 <아테네 학당>을 이러한 공간에 그리게 되었을까? 교황 줄리오 2세는 군사원정도 마다하지 않던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가 단순히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이 그림을 주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네 벽면에 그려진 이 방의 회화는 각기 신학을 나타내는 <성체에 대한 논쟁>, 詩를 나타내는 <파르나소스>, 법학을 나타내는 <세 덕성>, 그리고 철학을 나타내는 <아테네 학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 철학, 문학, 법학 등의 이들 네 주제는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분류이기도 하며 대학의 전공분류이기도 하였으니 학문의 네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 로마'라는 이미지는 로마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하는 교황의 정책이었다. 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왕정의 세력 확장 속에 힘이 약화되었으며, 교황청은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해야 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교황 줄리오 2세는 비록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사원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로마를 지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는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의 초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이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의 교황들도 끊임없이 지속하였다. 베드로 대 성당의 개축은 브라만테, 라파엘로를 거쳐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져 오늘의 위용을 낳았으며, 교황 파올로 3세가 주문하고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 또한 16세기 로마에 고대 로마의 유적을 되살린 사업이었다.
'미술을 동원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로마를 예술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정치적인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카톨릭 역사상 최악의 현실에 부딪힌 것이다.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고전적인 이미지로 미화시킨 정책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양식도 곧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었으니 이 시대 고전주의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였는지도 모른다.


<자화상>

<마리아의 결혼>
라파엘로의 초기를 장식하고, 페루지아 시대의 최후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카스텔로 시의 성 프란체시코 성당을 위하여 당시의 명문 알바치니가의 의뢰로 제작된 것이다. 그림의 구상에 있어서나 그 구도에서도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가 그린 <성 베드로에 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다. 이그림의 특징은 전면과 후면과의 관계를 공간 구성으로 통일시키고 있고, 공간의 원근과 넓이를 통합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배후에 있는 사원 건축물의 구조에 따라 그 기본선이 광장을 규제하고, 또 전면의 인물 배치도 이에 따라 이루어 지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공간성에 대한 엄격한 탐구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聖母子(성모자)와 아기 聖(성)요한>
라파엘로의 성모자 회화 작품 중에서 다음의 두 작품과 함께, 대표적인 것이 여기에 소개되는 그림이다. 시원한 초원에 한가하게 앉아 있는 성모는 아기 예수와 아기 성요한이 서로 어울리고 있는 장면을 애정에 넘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일견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로 성모의 연민어린 모정이 은연히 이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 전원적인 자연 풍경은 멀리 마을이 있는 산천을 넓게 보이게 하고 있으며, 자연 공간성에 대한 라파엘로의 이해를 시사해 주고 있다. 라파엘로는 정적이며 종교적 분위기를 온건한 색조로 조절하고 있으며, 인물의 동세, 묘사적인 선, 색채 등에서 강렬한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성모의 동세는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에서 아기까지 연결되어 합류돼 있고, 독특한 음악적인 리듬을 낳고 있다

<검은 방울새의 성모 1506년. 목판, 유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성 모자의 주제의 라파엘로 작품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풍미를 나타내는 그림이다. 제목은 어린 요한이 쥐고 있는 검은 방울새에서 비롯되었는데 가시나무의 가시를 먹는다고 하는 검은 방울새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한다. 앉아 있는 성모가 화면의 중심이 되고, 그 앞의 두 아기는 성모와 함께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며 안정감을 주면서 그 좌우로 자연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을 같은 주제를 가진 '목장은 성모', '아름다운 여 정원사'와 비교해보면 크기가 가장 작고, 구도는 세 점이 모두 비슷하지만 명암의 대조가 가장 강하며, 명쾌한 색채보다는 통일된 색감을 주고 쓰고 있다. 친구의 결혼 선물로 그려 준 이 그림은 지진으로 인해 17조각으로 파손되어, 복원할 때 가필되었으나 라파엘로 필적의 정확한 모습이 잘 나타난 걸작 중 하나이다.

<어린 코퍼와 마돈나 1505년, 패널에 유채59.5 x 44cm 워싱턴 내쇼날 갤러리>
온화하고 자애로운 눈빛의 이 성모자 상은 라파엘로의 많은 성모자상 중 하나이다. 그란듀 카의 성모상과 구도가 유사하다. 성모상에는 하나의 형식이 있다. 옷은 주로 빨강과 파랑 색 이며, 성모의 발은 항상 맨발로 표현한다. 맨발은 겸양 또는 땅을 뜻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정원사의 성모 1507년. 목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
이 성모화는 가련미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이름이 높다. 지혜의 상징인 책을 든 성모 마리아와 요한은 꿇어앉아 동경어린 눈길로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 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요한의 모습을 잡는 동시에 성모의 얼굴로 유도된다. 성모마리아 가 들고 있는 책은 <솔로몬 지혜서>로 지혜와 지식과 교양이 있음을 나탄낸다.

의자의 성모
원형 화폭의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는 성모를 그 자신이 사랑했던 포르나리나를 닮은 모습으로 그렸는데, 그녀의 단아한 이목구비와 그윽한 눈길이 인상적이다. 처녀같기도 하고 어머니같기도 한 여인의 미묘한 분위기는 성모의 신비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절묘하게 혼합해 놓은 것 같다.

서명의 방 작품들

<바티칸궁 서명실 천정도>

<아테네학당 1510∼11년, 프레스코 579.5 x 823.5cm >
이 작품은 율리우스 교황의 스탄자(거처)에 그려진 벽화이다. 내부는 거대한 홀로 이루어진 하나의 바실리카(로마의 공회당)처럼 인물 초상화, 브레만테의 건축 기법, 조각, 실내 장식 등을 과학적 원근법을 적용시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꾸며놓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 "아테네 학파"들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그리스 철학자들의 군상을 각자의 성격에 맞는 포즈와 행동으로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중앙의 거대한 아치를 배경으로 소실점이 가운데로 모이는 입구에서 들어오는 두 철학자의 모습이 보인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를 옆에 끼고 다른 한 손으로 이데아(Ideal)를 말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그 옆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땅을 향해 자연과 생물에 관한 학구적인 몸짓을 하고 있다.
구성에 있어 수평선을 강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계단에는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반라의 차림으로 누워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책상에 기대어 필기를 하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으며, 바로 뒤에는 잣대를 든 피타고라스가 무언가 적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화면 오른쪽 구석에는 유클리드가 컴퍼스를 그리면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으며, 약간 뒤쪽으로 검은 베레모를 쓴 라파엘의 자화상이 슬쩍 그려져 있다. 이밖에도 그 오른쪽에서 지구를 들고 있는 톨로메오, 천계를 들고 있는 조로아스터등 거대한 드라마가 펼쳐져 있는 이 그림은 네 개의 수평적 계단 위로 서 있는 인물들과 아치를 받치는 두꺼운 벽기둥, 그리고 평면적으로 넓게 퍼진 공간 등 모두 플라톤이 있는 위치로 아치가 순서적으로 후퇴하는 양상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거대한 작품은 주제의 뛰어난 형상화와 조각적 입체감이 균형감 있게 하나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성체논의 1509년, 프레스코 바티칸 미술관 >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바티칸 서명의 방에 그려진 성체논의(왼쪽 벽)와 아테네 학당(오른 쪽 벽)으로 중앙 윗쪽에 그리스도 지상의 옥좌에는 성모와 세례 요한이 좌우로 반원형의 양 날개에는 왼쪽부터 성 베드로,아담,복음성의 요한,다윗,성 로란, 성 지오르지오,성 에티엔느, 모세,성 자크,아브라함,성 바울로 가 차례로 앉고 그 위에 천사들이 둘러서 있다. 하단에는 성 그레고리오,성 제롬,베르나르,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위인들과 철학자,시인 등이 있으며 단 테, 라파엘로 자신과 스승 페루지노 등이 그려져있다.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마태오의 복음서》 17장 및 그 밖의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의 내용을 근거로 하는 이 성화는 베드로·야고보·요한 등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간 그리스도의 모습이 변하고, 거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에는 “그 때 예수의 모습이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마태오 17:2)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이는 중요한 장면의 하나이다.

이 장면은 6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처음으로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편도(扁桃) 모양의 만돌라(대형 만돌린) 속에 그려져 있다. 공중에 뜨는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성화에 묘사한 사람은 B.조토였으며, 바티칸의 피나코테카에 소장되어 있는 라파엘의 변모도(變貌圖)가 가장 극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공중에 뜬 그리스도가 화면 위쪽에 그려 있고, 산 위에는 겁에 질려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세 제자, 화면 아래쪽에는 이 장면을 보고 경련을 일으킨 아이와 사람들의 무리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발다사르 카스틸료네의 초상 1514∼15년, 캔버스에 유채 82 x 66cm>

라파엘로가 제작한 초상화 중에서 걸작의 하나이다. 로마 체류시의 초상화로서, 강한 개성의 표출이 인물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되고 있다. 이 작품의 인물은 라파엘로의 친구이며 당시의 저명한 문예가이며 또한 정치가였다. 밀라노와 우르비노 궁전에서 봉사하였으며, 정신론의 자로서도 유명하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현명한 자기의 친구의 모습을 예지에 차 있는 표정으로 보여 주고, 활달한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눈의 총기로 시사해 주고 있다. 확고한 인물의 자세는 안정감을 나타내 주고 있고, 차분한 색채는 인물의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의 대가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보고 감동되어 모사를 한 바 있으며, 그의 자화상 및 초상화의 영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또한 플랑드르의 대가 루벤스도 이 작품을 모사하였다 한다.
이 작품은 루이 14세의 컬렉션 목록에 있던 작품으로, 1661년 이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의 모델은 귀족의 이상을 담은 『조신(朝臣)』의 저자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이다. 영웅적인 군인이자 문인이었던 발다사레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귀족이었다. 그는 1528년 발간된 『조신』에서 이상적인 미학과 정신의 완전함을 주장했는데, 이는 라파엘의 회화관과 합치되는 것이었다. 이 초상화는 두 사람 사이의 공감과 우정을 시사하는 작품이다. <대공의 성모>를 그린 지 5∼6년 후 한층 완성도가 높아진 라파엘의 초상화는 조금씩 변화의 양상을 띤다. 이 작품은 비교적 그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대공의 성모>에서 사용되었던 극명한 명암 대조법은 배제되었으며 고전적인 균형과 절제가 돋보인다.
기품 있는 자태와 더불어 우아한 의상과 모자는 그가 귀족의 신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살짝 튼 자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연상시킨다. 라파엘은 세밀한 묘사를 과감히 생략한 대신 얼굴 묘사에 있어서 특징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켰다. 맑은 눈빛, 지긋이 다문 입술 등 온화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통해 모델의 내면 세계까지 드러내고 있다. 또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면을 응시한 모델에게서 화가에 대한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교황율리우스2세의 초상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 소장>
바티칸 궁의 서명실 천정화를 그릴 당시의 교황으로 라파엘로를 총애했다.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이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레오 10세 1518 년, 패널에 유채 154 x 119cm 우피치미술관 소장.>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있을 때 바티칸 궁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라파엘로는 레오 10세 때 더욱 신뢰받는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이은기의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색채 표현의 비교-


라파엘은 붉은 벨벳의 밝은 부분은 붉게 하고 어두운 부분은 검게 함으로써 상체의 양감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티치아노는 밝은 부분을 흰색으로 어두운 부분을 붉은 색으로 나타내고 있다. 라파엘의 방법은 소묘와 고유색을 중요시한 화법이라면 티치아노의 방법은 햇빛을 비춘 벨벳의 인상을 중요시한 화법이다. 티치아노는 짧은 기간의 로마방문기간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이 그림의 붓터치가 더욱 빠르고 즉흥적이었다고 하는데 티치아노는 오히려 이 방법을 즐긴 것 같다. 그는 이후에도 이러한 효과를 살리고 그와 함께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한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기사의 꿈1500년경. 목판, 유채 런던, 국립회화관 >
라파엘로는 어려서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 지오반니 산치오에게 그림을 배우고 페루지 노 문하에서 수년간 그의 화풍을 익혔다. 이 그림은 페루지노풍의 평온하고 감미로운 시정 이 넘쳐 흐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악덕과 미덕 사이에 있는 헤라클레스' 또 기타 몇 주제로 해석되고 있다. 우의적(友誼 的)인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성숙기에 다가서고 있는 시기의 것으로, 후기 그의 미술의 능숙한 표현력을 엿 보게 하여 준다. 라파엘로 미술의 발전은 그의 성장 과정의 도표로 볼 수 있는 우르비노, 페루지아, 피렌체 시 등으로 엮어진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옮겨 갈 무렵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은 중심에 나무 하나가 배치되어 좌우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고, 그 밑에 기사가 누워 있으며, 또 좌우로 인물이 배치되어 삼각형의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삼각형 구도를 통하여, 농촌의 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원근법이 이에 적용되고 있다. 간결한 구성과 시정(詩情), 그리고 환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埋葬)>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은 많은 밑그림과 구상이 필요하였고, 또한 완성된 성과에 대한 논리도 많았다.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의 라파엘로의 화풍은 극히 종교적인 명상과 고귀한 정관의 경향이었음에 비하여, 이 그림은 너무나 동적이고 격정적이며, 극적인 세속성까지 표출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라파엘로 작품에서 특성이 되고 있는 구도의 통일성과 그 간결한 일체성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고, 사방으로 분산되는 동세로 복잡한 선을 구성하고 있다. 부드러운 음율적인 선은 여기서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체는 미켈란젤로의 < 피에타 像>을 연상시키며, 한편 기절한 성모를 떠받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같은 작가의 <聖家族>에서 빌어온 상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나, 지적된 점은 양자의 관계를 시사해 준다.

<젊은 부인의 초상 1518-1519 목판 유채 85x60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라파엘로 애인 포르나리나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에서는 시에나 태생으로 로마 빵집 아가씨였던 마르가리타 루티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매너리즘적 기질이 강하게 나탄난다. 팔찌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문자가 새겨져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트리나>

카트리나는 4세기 초 그리스도 박해 시대에 순교한 전설적 성녀로서, 로마의 황제 앞에서 기독교를 변호하고 50명의 철학자들과 토론 설파하여 마차에 몸을 찢기는 형벌을 받고 참수당한 인물이다. 성모는 붉은 옷에 푸른 망토를 걸치지만 성 카트리나는 반대로 푸른 옷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다. 몸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는 옷 주름이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라파엘로의 이 붓끝의 능숙한 솜씨와 커다란 양감에 의한 표현은 바티칸의 대벽화로 연결된다.

폴리그노의 마돈나 갈라티아 정령 가톨릭 추기경의 초상 시칠리의 스파시모 예수의 죽음동정녀의 즉위식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5.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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