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특징

·르네상스 전성기가 끝나가는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초(1520년경부터 1600년경까지)

·‘정신적인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 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쇠퇴나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완전한 미를 추구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돌파구)
( 이전의 고전주의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일탈과 변형의 미술이 이루어짐)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

·매너리즘의 소산
루터의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
지동설의 학설로 그들이 믿던 중심은 해체되고 새로운 언어 갈구.

·베네치아와 스페인 미술에서도 두드러진다
·불안감, 의도적부조화,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는 시대정신의 표출

파르미지아노(1503-1540)

인체를 늘이는 과장된 표현

목이 긴 성모(1534-40년. 피렌체미술관)
얼굴도 작아서 아마 10등신 정도는 되어 보인다.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전형이 형성되자 이를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한 과장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장은 어느덧 변형의 미를 낳게 되었다. 이 그림은 성모자와 성인 또는 천사들이 같이 있는 것 같지 않고 마치 채색된 성모자 조각상에 천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 같다. 성모자의 묘사가 너무 인위적이며, 좌대 위에 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인간보다 훨씬 거대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바로 마리아의 뒤에 놓인 큰 기둥 때문이다. 그 앞에 있는 수도자는 오히려 너무 작다. 이제 미술가들은 더 이상 실제같이 보이게 하려는 재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로쏘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 1494-1540)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1521년. 볼테라성당)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면 우리는 땅에 쓰러질 듯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부터 마리아를 부축이고 있는 여자와 예수의 발을 붙잡고 있는 왼쪽의 남자, 잘 붙들고 있으라고 소리치는 왼쪽 위의 남자들까지 한 바퀴를 돌아야 한다.주인공인 예수와 성모, 요한은 중앙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늘에 가려있다. 이제 중심은 해체된 것이다.

폰토르모(Jacopo Pontormo: 1494-1557)
예수의 시신을 눕임(1528년. 피렌체 산타펠리치타)
푸른 보라빛을 배경으로 한 붉은 색의 난무와 같은 이미지. 고유색을 부정한 이러한 인위적인 색채와 빛의 효과가 특색이다. 그가 그린 예수의 시신을 눕히는 장면은 보라빛이 감도는 연한 푸른색과 연한 주황, 연분홍, 연한 살색의 배치 같다. 이러한 탈색된 듯한 색들은 그림에서의 색채가 이제는 사물의 묘사를 위한 색채이기보다 색들 자체의 유희임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엘리자벳 방문(1528-9년. 피렌체 카르미냐노)
산 미켈레 매너리즘의 여러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화면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네 사람의 머리와 발은 작고 몸체 중앙만 부풀린 채 커서 마치 공중에 약간 떠 있는 듯이 보인다. 마리아와 엘리자벳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나 뒤의 두 사람은 관람자를 쳐다 보아 네 사람의 관계는 서로 불일치하며, 그들에게 비추는 광선 또한 마리아는 화면 왼쪽에서, 엘리자벳은 화면 정면에서 오는 빛을 받아 분산된 효과를 주고 있다. 이 광선들은 한쪽에서 오는 자연광이 아니며 화가가 임의로 정한 인위적인 국부 조명인 것이다. 이 그림이 더욱 괴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경과 인물들 간의 비례 때문일 것이다. 인물들은 건물의 3층까지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여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들은 왼쪽 건물 아래에 있는 아주 작은 인물들과 대비되어 있다.
브론치노(Angelo Bornzino 1503-1572)

피렌체 코지모 1세의 궁중화가. 정확한 묘사와 차가운느낌. 생명감의 약동으로 새로운 감각의 발현을 엿볼 수 있음.

시간과사랑의알레고리
작품의 주제는 명확하다. 음탕한 쾌락 추구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그림인 것이다. 쾌락은 고통을 가져도고, 그것은 쉽게 망각될 것 같지만, 시간은 언제나 진실의 편이어서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미을 보다 보면 작의가 훈계하겠다는 건지 문제가 된 음탕함을 시각적으로나마 함께보고 즐기자는 건지 도저히 구분이 안된다. 여체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우미한 표헌 형식으로 그림 속의 관능미를 한껏 고조시켜 놓았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색채와 분위기 아래 자신의 타고난 감각을 마음껏 과시하는 작가의 붓길에서 회화라는 예술에 있어 주제가 갖는 의미가 때로 얼마나 왜소한 것인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와 그의 아들(1550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엘레오노라는 메디치가의 피렌체 공작 코지모 1세의 부인이다. 16세기 중엽 피렌체 정치는 여러 면에서 이전 르네상스시대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공작은 곧 이 지방의 주인이었으며 정치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모든 것을 지배하여서자신을 신격화 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국제 정세에서의 피렌체는 오히려 약세였으니 이러한 신격화는 과시에 불과했다. 인물의 얼굴은 마네킹 같이 차갑고, 부인이 입은 옷은 마치 의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듯이 옷의 특징 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은 마치 박제된 듯 고정되어서 주인공의 성격이나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우며 인물이 그림으로부터 소외된 듯이 느껴진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년 그리스출신.에스파냐의 화가.)

엘그레코란 스페인말로 그리스사람이라는 뜻.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렛토의 영향을 받음

스페인 최초의 위대한 종교화가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 감각으로 정열을 표현 : 현실적으로 존재할 리 만무한 형태와 색채를 그리다. 특이한 발상과 묘사력을 추구. 현실감이 상실된 왜곡 추구. 이상한 장소에 광원이 있고, 그 빛이 대상이 되는 인물을 기괴하게 비춤. 규범으로부터의 탈출.

오르가스백작의매장
인망이 두터웠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순간, 성 스테파누스와 성 아우구스타누스가 날아 내려와 백작의 유체를 묘에 안장했다는 전설에 근거하여 그려졌다. 매장에 참석한 톨레도 시민들의 줄을 경계로 천상계와 지상계가 나뉘어져 있다. 비례에 왜곡이 있는 천상계는 필치나 색채 모두 신비스럽다. 백작의 혼은 갓난아기 같은 형태로 천사들에 의해 운반되고 있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에 의한 심판을 받는 장면이다.

게쎄마니에서의 기도(1588년. 톨레도미술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예수가 공포와 번민에 싸여있는 순간의 기도이다. 데리고 간 세 제자는 잠에 빠져 예수와 함께 깨어있지 못하였으며 이때 이미 유다는 로마인들에게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준 순간이다. 엘 그레코는 기도하는 예수에게 붉은 옷을 입혀 크게 중앙에 놓고, 왼쪽엔 잠에 빠진 제자들, 오른쪽엔 로마 군인들을 희미하게 암시하였다. 길게 늘어트린 인물의 비례와 명암의 강한 대비, 마치 초점이 없는 듯 흐릿하고 어긋난 윤곽선들, 빠른 필체 등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매너리스트들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 그는 사물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현실의 고정관념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예수와 천사의 관계는 공간적으로 매우 애매하며, 잠든 세 제자가 있는 곳은 마치 동굴 속 같기도 하고 공기의 막에 싸여있는 듯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푸른 달무리와 밤하늘의 구름은 환상적인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다.
툴레도풍경(1600-10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인물 형상이 없어서 표현력이 더욱 큰 것 같다. 짙은 먹구름 아래에서 번개 빛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음산한 언덕과 건물들, 빛의 흐름만이 번쩍이는 검은 하늘은 거의 추상화 같다. 중세 종교화가 지닌 영적인 힘과 현대의 추상회화가 만난 듯한 표현력이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마리아의 승천 기증가가있는 크리스트의십자가상

성안드레아와성프란체스코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

강한명암대비, 격정된 동세감, 불안정한 사선구도

최후의 만찬 (1592-94년. 베네치아, 산 조르지오 마죠레 )
베네치아의 산 조르지오 마조레(San Giogio Maggiore) 교회에 걸려있는 거대한 캔버스화 .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틴토레토의 작품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식탁은 대각선으로 놓여있고, 예수와 사도들 보다 이들의 식사를 시중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번잡스러움이 화면을 지배한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임을 알아보게 하는 요소는 번쩍이는 두광의 빛이다. 예수의 두광은 마치 자체가 빛을 발하는 힘이 있는 듯 하며, 제자들의 두광은 화면 왼쪽 위의 등불에서 발하는 빛의 역광인 듯 처리하였다. 빛의 원천이 뒤에 있기 때문에 인물들은 모두 어둡고, 따라서 표정을 알기 어렵다. 인물의 역할보다는 빛이 화면의 효과를 좌우한다. 어두운 부분은 거의 색채가 없는 듯 검은 색이며 밝은 부분은 섬광이 빛나듯 즉흥성이 번뜩이고, 등불의 빛이 번져 나가면서 형성하는 천사들의 환영은 초자연적인 신비감마저 조성한다.

최후의 심판 터어키인과 크리스트교도들의싸움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8.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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