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특징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
(16세기 말 종교적 대립이 끝난 뒤 바로크양식이 나타남.)

·17세기 바로크 미술이 상당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의 힘과 열정에 힘입어 피어났음
·카톨릭의 새로운 교회체제를 마련하려는 노력으로 로마는 다시 카톨릭세계의 중심이 됨.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미술의 역할 강조
·신교국가들의 성상타파에 대항이라도 하듯, 더욱 더 화려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교회를 장식
·엄격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무쌍하고 율동감 넘치는 교회를 고안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

이탈리아 바로크의 조각 및 건축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로마 성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1664-67년)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교회(1642-44년)

성 베드로 대성당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거듭난 것은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서임.

베르니니 (Gianlorenzo Bernini. 1598 ~ 1680)

17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건축가. 나폴리 출생의 베르니니는 어려서부터 토스카나의 조각가였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1562-1629)로부터 수학하였고, 1605년 로마로 이주하여 젊은 나이에 천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교회 건축, 궁정건축, 조각 등의 다방면에 그의 재능을 발휘했다.

베드로성당 광장의 열주

아폴로와 다프네(1622-25년. 로마 보르게제 박물관)
신화속의 안타까운 사랑의 순간을 묘사. 달리는 아폴로와 막 나무로 변해가는 다프네, 옷자락에서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동작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콘스탄차 보나넬리(1636년경. 피렌체 국립 바르젤로 박물관)
매우 사실적인 묘사와 심리가 표출된 초상 조각들을 남겼는데 이는 이전 로마시대 초상조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을 포착하는 방식이나 옷주름, 머리카락을 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전조각, 미술과는 다른 바로크 시대의 특징.
성녀 테레사의 환상 (1647-52년,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교회)
청동 빛줄기를 배경으로 테레사 수녀는 신의 은총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수녀의 황홀함은 펄럭이는 옷자락을 타고 흐르는 빛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베르니니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화려한 색깔의 대리석, 석회벽토, 청동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자유자재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회화

카라밧치오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 ~ 1610)
극심한 명암대비를 이루면서 형태를 강조 : 빛과 그림자가 엮어 내는 극적인 효과 대상 속에서 찾고자 함이 르네상스양식을 뛰어넘어 바로크양식의 주요 특징이다.

성인도 서민으로 그리다. : 철저한 리얼리즘을 추구. 새로운 미학으로의 전환점으로 리얼리즘 뿐 아니라 인간 육체 에로티시즘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인간미 넘치는 조형적 묘사.

자연주의 화가 : 이탈리아 북부 출신으로 고전주의의 고상함을 따르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본 것에 의지하여 추하더라도 현실을 그리고자 하였다.
카라바지오는 밀라노 근처의 롬바르디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이 곳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북유럽 사실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곳이었다. 초기에 카라바지오는 이곳에서 정물화나 장르화를 주로 그렸다. 동성애 성향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놀이 끝에 동료를 살해한 경력과 잦은 투옥 등 곡절 많은 생애를 살았던 카라바지오는 평생 제자를 두거나 일가를 이루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도하였던 혁신은 이탈리아에서 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며, 스페인, 프랑스, 플랑드르 등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의 매장
당시의 종교화가 관념적으로 흐르고 종교적인 감동이 공허해지는 데 반대하여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극적인 표현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종교적인 격정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그 시대적 인물상을 사실적으로 다루었으며, 극단적인 명암의 대조로 장면을 실감나게 그렸다. 이 작품을 통해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비극적인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신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진지하고 행동은 침착하다. 성모 마리아의 침통한 표정에서는 오열보다는 고요한 슬픔이 느껴지고 싸늘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분위기는 더욱 무겁다. 마리아 옆의 두 젊은 여성이 오히려 인생의 지주를 잃은 슬픔에 괴로워하며 탄식하고 있다. 이상적인 유형의 종교화보다 현실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구상되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젊은 바커스(1596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카라밧지오가 활동하던 당시 이탈리아는 매너리즘이 지배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사실성이 충만한 그의 이 작품은 이색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풍속화도 초상화도 아닌 이 그림은 주제가 말하듯이 그리스 신화의 소재를 세속화한 것이다. 건장한 신체와 낙천적인 표정의 젊은 바커스는 술잔을 들고 탁자에 앉아서 여러 가지 과실과 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인물은 정확한 묘사에 조소적인 표출이 되어 있고 탁상의 과실 또한 그 사실적 성격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바커스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 중에서 이 그림처럼 세속화되고 젊음의 혈기를 나타낸 것은 매우 드물다.

류트를 연주하는 사람(1595년)
인물과 꽃. 전통적인 회화에서는 인물이 회화의 중심으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겠지만, 여기에서 감상자의 시선은 꽃과 인물 양쪽으로 흐른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물화와 사실주의의 탄생을 엿볼 수 있다.

과일바구니 사기꾼 병든 바커스 점쟁이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1598년)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온 카라바지오는 성 프란체지 교회의 콘타렐리 가족예배실 제단화를 주문 받아 본격적인 종교화를 제작

예수의 저녁식사(1601-02년. 런던 국립미술관)
소스라치게 놀란 한 제자는 경이로움에 우리쪽으로 의자를 반쯤 밀치며 일어나고 있으며, 베드로의 뻗친 팔은 화면을 뚫고 나오는 것 같다. 식탁의 모서리에 비죽 나온 접시는 이러한 극적인 장면을 더욱 긴박하게 만든다. 그리고 화면의 긴장감은 강렬한 빛의 사용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어둠속에서 예수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듯한 빛은 어떠한 소란한 설명보다도 훨씬 웅변적이다. 그러나 그 빛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마태와천사 1 (1602년. 2차대전때 소실)
마태의 세가지 사건, 즉 예수의 부름을 받고, 천사의 인도로 복음을 남겼으며, 마지막에 순교하는 장면을 그렸다. 기독교에서 성인들을 고귀하고 품위 있게 묘사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성인들을 그리는데 앞시대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맨발을 드러낸 채 의자에 엉거주춤 걸쳐 앉아 천사의 목소리를 받아 기록하는 마태는 매우 당황한 모습이다. 그의 두 손은 너무 어색해서 이전에 사도들이 학식 높은 철학자로 그려졌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주문자로부터 거절당해 다시 제작했다.

성마태와찬사2(1602년.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교회 )

성모의 죽음 (1606 년. 파리 루브르박물관)
당대의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던 걸작이다. 루벤스는 카라밧지오의 회화 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카라밧지오의 강렬한 빛의 사용과 극적인 사실감에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 이러한 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반종교개혁시기의 다른 벽화들처럼 화려하게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를 과감하게 거부한 또 다른 작품으로 카라바지오는 로마의 강변에서 건진 여자의 시체를 모델로 삼아서 그렸다고 하는데, 흐트러진 머리와 옷 매무새, 퉁퉁 부은 몸과 푸르뎅뎅한 피부색까지 그대로 그려져 있어 주문자에게 거절당했는데 순진한 사람들에게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종교를 강조하는 것은 당시 교회의 대중화를 추구하였던 반종교 개혁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성마태의 소명(1599∼1600년) 도마의 의심 다윗과 골리앗 에로스 잠자는 큐피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1593-1652)

영웅적 여성을 카라바조 양식으로 그린 17세기 로마 출신의 화가. 여성화가라는 점과 작품이 그녀의 생애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성주의 미술사'(페미니즘)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
적장을 유인하여 목을 베는 유대의 여걸 유디트의 이야기는 잔혹한 그림을 선호하였던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졌다. 그러나 억센 여자들의 손놀림과 화면을 뚫고 나오는 홀로페르네스의 반쯤 잘린 머리 때문에 젠틸레스키의 이 그림은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더욱 끔찍하다. 아버지의 조수에게 추행 당했던 젠틸레스키의 생애와 이 그림이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질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남성화가들의 시선의 대상으로 재현된 유디트의 모습과 여성화가인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화상 유딧

스페인 회화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1599 ~ 1660) 에스파냐의 궁정화가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여 몇번의 단순한 필치로 작품을 완성.스페인 왕실의 공적을 알리는 선전화나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며 화가로서의 입신을 이루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찾아온 예수(1618)

성 루가복음서에 나오는 일화에 기초하여 제작한 작품 사건 그 자체는 하나의 시각적 장치를 통해 묘사되어 있는데, 몇몇 미술사가들은 그 장치를 거울이나 창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비야의 물장수(1623년)
그의 나이 스물살에 그려진 것이다. 투박한 느낌을 주는 커다란 항아리와 헤진 망토를 입은 남자의 옆모습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그림은 화면 뒤쪽으로 인물들이 엇갈려 있습니다. 당시의 정물화들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그린 큰 질그릇과 물컵, 그리고 작은 항아리도 역시 상징으로 보인다. 세사람의 연배가 서로 다르다는 점, 그들이 서로 지그재그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생의 세 단계를 은유하고 있다. 벨라스케스가 젊은 나이에 이미 다양한 질감들을 묘사해내는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펠립페 4세(1631-35)


교황인노켄티우스10세초상(1650)
뒤늦게 로마의 교황청을 방문하여 제작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에서 벨라스케스의 이 두가지 시선을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권력자의 냉혹한 초상이지만, 동시에 붉은 빛의 공단과 사그락거리는 흰 레이스 대비가 눈부시다

난장이 발레카스 (1642-45. 프라도미술관)
왕실의 노리개감이었던 난쟁이, 시종들 그리고 걸인들의 모습도 많이 남겼다
거울앞의비너스(1649-50)

빛과 대기의 표현과 구도에 대한 연구 등으로 서양 회화사에서 위대하 ㄴ업적을 남긴 벨라스케스가 그린 네점의 나체화 가운데 유일하게 전해 오는 작품으로 작가의 예술성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냉정한 통찰력과 사실적 표현으로 자연스러운 여체의 우아한 곡선을 과장이나 꾸밈없이 잘 그려내고 있다. 사랑의 신 큐피드가 거울을 받치고 있으므로 주인공은 현실이 아닌 신화 속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여인의 앞면을 거울을 통해 나타내는 공간 구성은 바로크 표현 양식의 하나이다.

라스메니나스(궁녀들)(1656년)
작가의 만년작으로 한 폭의 그림 속에 초상화, 일상생활, 화실의 화가. 실내묘사등 여러 소재들을 함께 담은 사실주의 미술의 걸작이다. 3m가 훌쩍 넘는 크기 뿐 아니라 흥미진진한 구성과 회화적인 솜씨로 인하여 이 화가의 대표작이다 . 거울에 어슴프레 포즈를 취하고 선 왕과 왕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화가 자신일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이젤을 당당히 들고선 화가의 모습으로, 동시에 가슴에 붉은 기사훈장이 선명한 귀족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이제 장이가 아닌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 그림은 궁정화가로서 성공한, 자의식이 강한 화가가 자기 세계를 자랑스럽게 반추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라스메니나스의 황녀의 빛나는 금발과 레이스를 표현한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벨라스케스는 단 몇번의 붓질로도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개의 보드라운 털, 그리고 화려한 의상의 반짝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시각적인 효과를 누구보다도 높이 샀던 이들은 근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화가의 아틀리에에 온 마르가리타 공주에게 쏟아진 빛에 의해 화면 전체가 통일감과 깊이를 얻고 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거울에 비치는 국왕 부처를 그리던 화가가 모델을 쳐다보고 있고, 마르가리타공주를 비롯한 두 명의 시녀와 두명의 난쟁이, 어릿광대와 개, 거리고 그 뒤에 남녀 시종이 있고, 문간에는 한 남자가 서서 구경하고 있다. 이러헌 인물 배치와 방 구조는 공간감을 나타낼 뿐 아니라 실내 정경에 변화를 주면서 자연스럽게 궁내의 일상생활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구경뿐을 그림의 이야기와 화면에 참가시키는 그의 기법은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말을타고 있는 펠립페3세(1628-35) 말을타고 있는 마르가리타왕비(1628-35)

마리아나왕비(1652-53)

1634년에 태어나 1696년에 죽었다. 그녀는 황제 페르디난드3세와 펠립페4세의 누이인 마리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1649년 마리아나는 겨우15세의 나이로 당시 부르봉가의 이사벨라왕비를 여윈 그녀의 외삼촌 팰립페 4세와 결혼하였다.

2(1653-54) 3

1651년에 태어난 마르가리타 공주는 펠립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딸이었다. 그녀는 1666년에 독일 황제 레오폴트1세와 결혼하여, 1673년에 죽었다.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이 공주를 모델로 그린 여려 점의 초상화 중에서 첫 번째 것으로, 당시 그녀는 세 살 가량되었다고 한다.

8세의마르가리타왕녀1(1659)

마리아테레사공주(1652)

국왕펠렙페 4세가 합스부르크가에 선물로 증정.펠립페4세와 이사벨라 왕비의 딸인 마리아테레사공주는 1638년 9월 20일에 태어났다. 1652년도에 제작된 그림이라면 14세가 된다. 공주는 프랑스 루이 14세와 1660년 결혼하였고 1683년에 죽었다.

황태자카를로스기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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