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라 Georges Seurat(1859~1891)
나는 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글미을 그렸들 뿐이다.

인상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면서도 쇠라는 방법적인 면에서 동료 화가들과 다른 면을 추구했다. 쇠라는 신인상파 화가로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순간을 화폭에 고정시키고자 했다. 색채를 분할하여 작은 색점으로 그림을 만드는 새로운 화법을 창조해내고 대상의 순간을 영원히 자신의 화폭에 고정시키려는 의도했다. 그는 인상파가 그리고자 했던 순간의 이미지를 정반대의 입장에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쇠라가 인상파전에 몇몇 작품을 전시했을 때 그는 동료 화가들의 심한 반발을 받아야 했다.
 인상파 화가들이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 즉흥적이고 직관에 의한 표현에 주력했다면, 쇠라는 과학적 접근 방법을 해결책으로 보아 순수하고 정확한 색채 분할을 화면에 창조하고 기하학적 체계를 적용시키려 했다. 쇠라는 처음부터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도서관을 출입했다. 이 당시는 색채가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서 이론적으로 보색관계나 광선에서 보색을 섞으면 흰색, 물감에서는 검은색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쇠라가 인상파에서 얻은 것은 광선에 대한 관심이었고 인상파의 자유롭고 불규칙한 터치를 질서있게 적용했다. 인상파에서 사라진 형태를 명확한 윤곽선으로 추구하게 되었고 인상주의와의공통점으로 광선과 색채에 대한 관심을 꼽는다면 그 차이점은 인상주의자들이 직관적이고 본능에 따라 분해한데 비해 신인상주의자들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한 의식적인 분할인 것이다. 또 인상주의자들이 형태를 파괴할 만큼 빛의 동요를 쫓았다고 한다면 신인상주의자들은 뚜렷한 윤곽선으로 고전적인 구도를 고수한다고 하겠다.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신인상주의의 미학을 이루는 점묘주가 등장하고 있다. 그 주제도 다양한 계층의 휴일을 즐기는 모습으로 인상주의의 향락적인 여흥보다 의식있는 주제로서 그 뒤에 많이 응용되기도 한다. 그는 아카데믹한 수업을 통해 형태의 윤곽은 포기하지 않고 반 아카데미로서 면밀한 색채에서의 관찰을 통해 당시의 발달한 색채학을 수용하여 시각적 혼합을 일으키는 치밀한 분할주의를 택한 것이다. 그래서 형태의 윤곽은 독특한 광선에 의한 명암의 차이를 이용하여 반짝이는 대상의 색조의 대비를 이용하는 것이다. '퍼레이드'등에 이르면 완전한 점묘가 이루어지면서 착각적인 깊이를 배제하고 그늘이 없는 배경을 평면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평면적인 2차원 공간이 된다. 인상주의가 근대성이라는 과제와 함께 비전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흐름의 필연적 단계로서 성립되었다고 한다면 신인상주의는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여 자칫 손끝의 기교나 매너리즘이 될 소지의 것을 구축한 것이다. '퍼레이드' '광대'등 일련의 작품의 공통점은 구성의 평면화와 형태의 기하학적 도식화이다. 그리고 그 결과러서 점묘주의적 색채효과와 형태적 견고성의 통합이라는 과제와 함께 화면의 장식성 추구하였다. 쇠라는 야외에서의 소재를 외면하고 실내에서 포즈를 취했던 모델들의 누드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점차 인상주의적인 즉흥적인 빛의 향연에서 벗어나 인공 조명의 세계에 탐닉했다. 그러면서 쇠라는 형태의 균형과 조화된 구성을 새로운 목표로 설정하게 되었다. 이후 쇠라는 고전적인 황금비율을 연구하며 매우 과학적이고 건축적인 구도를 형성해 나갔다. 고전주의적인 안정감 위에 또다시 일정한 색점을 찍어 나감으로써 정교하고 세밀한 작품 을 창조했다. 쇠라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은 형태를 단순화하고 무표정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안정된 구도와 명확한 인물의 윤곽. 하지만 그의 화폭에 담긴 모든 존재들은 운동감을 상실한 채 정지되어 있다. 이는 인상주의 기법에 반대되는 경향의 일면으로 오히려 고전주의적인 성향에 가깝다. 마치 자로 잰 듯한 직선과 타원형, 곡선 등 다양한 기하학적인 형태들의 조합이 그러하다. 미세한 점으로 가득 찬 쇠라의 분할주의(미세한 필촉에 의해 색을 분할 표현하나 사람의 눈에는 혼합되어져 보이도록 하는 기법)는 흑백 데생을 통한 경험의 결과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콘테에 의한 흑백 데생을 유난히 많이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쇠라의 데생은 선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점묘에 의한 명암의 효과, 형태와 불륨의 정확한 표현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분할주의를 옹호하고 시도하면서도 쇠라의 작품 세계에 골격을 이루는 바탕은 엄격한 고전주의와 정교한 서정의 세계에 있었다. 1890년 여름, 쇠라는 자신의 인생이 종말을 맞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고요함과 명랑함, 그리고 슬픈 이미지들이 그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랑함은 색조의 밝음과 선의 상승성을 통해서, 고요함은 온색과 난색의 조화로운 균등과 수평선을 통해서, 그리고 슬픔은 어두움을 주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결국 쇠라는 1891년 3월 29일 전염성 후두염으로 31세의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가 추구했던 과학적인 체계는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상징주의의 세계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예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신인상파의 창시자 : 과학적 지식이 풍부햇던 그는 색점들의 집합으로 표현. 점묘주의. 분할주의.

수평선의 효과 도입 : 학구파였던 그는 선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 동원. 수평선의 활용으로 정숙함과 온화함을 추구.
 
마니에르수욕 1883∼84년, 캔버스에 유채201×301.5cm 런던 내셔녈 갤러리
세잔느가 인상파 화가들의 수법과 질서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모색했던 반면, 쇠라는 인상주의 회화의 수법을 기반으로 해서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 이론을 연구하며, 순수한 색채를 규칙적인 작은 점들로 찍으면서 작품을 모자이크처럼 구축해 왔다.
쇠라는 세잔느가 시도했던 것보다 더욱 형태를 단순화시켜 수직과 수평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그의 화법은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서 점차 벗어나 흥미롭고 풍부한 구성을 화폭에 담아 내게 된다.  이 작품은 1884년 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후에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최초의 대작이며, 작품 전반에 걸쳐 여름날의 열기에 취해서 몽롱해진 느낌을 전해준다. 쇠라는 이 그림을 구상하면서 현장에 직접 나가서 예비 스케치를 했다. 그리고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해 안정감 있는 구도를 창조했다. 많은 인물들이 놀고 있 화면이 주는 인상은 매우 질서정연하다. 점묘법을 통해 빛나는 것 같은 밝은 교외의 풍경을 쇠라는 고요하게 붙잡아 놓고 있다. 쇠라는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해 안정감 있는 구도를 창조했다. 많은 인물들이 놀고 있는 풍경이지만 이 화면이 주는 인상은 매우 질서정연하다. 점묘화법을 통해 빛나는 것 같은 밝은 교외의 풍경을 쇠라는 고요하게 붙잡아 놓고 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86년, 205.7×305.8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

쇠라는 미학에 큰 관심을 가졌던 수학자 샤를 앙리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앙리는 음악에 관철되는 성격을 색과 선에 접목시켜 동일한 법칙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쇠라의 주제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을 즐겨 다뤘지만, 한편으로 상징주의자들이 애호하던 신비감과 분위기를 그 안에 부여했다
<아스니에르의 미역감기>으로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중심적 인물로 부상한 쇠라는 바로 두 번째 대작인 이 작품에 착수했다.  모티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밝은 야외에서의 인물들의 모습이지만, 등장 인물의 수가 많아지고 땅의 부분에서는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대비로 구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될 동안 쇠라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그랑자트 섬에 나가 여러 포즈를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오후에는 그 모습들을 새롭게 조형적으로 만들어 화면에 배치하곤 했다. 쇠라는 1884년 5월부터 작업에 착수해서 1985년 3월까지 대강의 윤곽을 잡은 뒤, 1985년 10월에 다시 작업에 들어가 1986년 5월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순색의 작은 반점의 병치로 더욱 완벽한 분할 묘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정감적인 인상파를 극복하고, 그 고유의 과학적 인상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1886년 제 8회 인상파전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3년 동안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쇠라는 아침 일찍부터 라 그랑드 자트 섬에 나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아틀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새롭게 창조해 화면에 배치시켰다.


포즈를 취하는 여인들 1886~88
실내에 포즈를 취한 3명의 누드 모델이 보이고 그 옆으로 쇠라의 '그랑쟈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커다랗게 벽면을 차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거대한 크기는 물론 허구적이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다시 한 번 그림에 인용함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앞에 포즈를 취한 모델들은 점묘로 인체의 묘사를 시도한다.

포즈를 취하는 여인들을 위한 습작1886~87  유채
누드화를 그리면서 쇠라는 아틀리에 내부의 빛을 통해 흐르는 인공 조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필촉의 크기가 부분 부분 다르게 사용되었으며,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점들은 자유자재로 날아 다니고 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실험 이후 쇠라의 그 다음 거대한 작품인 <포즈를 취하는 여인들>은 그가 과학적 색채 이론에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쇠라의 분할 묘법은 3세기 로마의 고전미술에서처럼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가 멀리서 보면 색이 합쳐져 형태가 드러나는 작품들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 쇠라는 색채의 순도와 명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순수한 색채들이 시각 작용으로 인해 눈에서 혼합되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할 묘법이라 불리는 이 기법은 사물의 윤곽을 허물어뜨리고, 모든 형태의 다양한 색깔의 점들이 한데 찍혀, 그의 그림을 알아보기 힘들게 하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시적인 비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왼편에 등을 돌리고 있는 앉아 있는 여인은 옷을 조심스럽게 벗고 있고, 가운데 여인은 정면을 향해 포즈를 잡고 있다. 오른편에는 스타킹을 신고 있는 여인이 있는데, 이 세 여인은 쇠라 특유의 설정으로 각각 독립된 자신으로 돋보이고 있다

서커스의 호객1888년, 99.7×150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랑자트 섬>의 자연광선과 <서있는 모델>의 작업실 조명에 이어 여기서는 인공조명이 등장된다. 가스등과 아세틸렌등은 유랑곡예단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라드(La parade)는 손님을 끌기 위한 간단한 코메디를 말한다. 쇠라가 보여주는 엄격하고 질서정연한 구도에 의해서 완성되는 조형적 구성은 견고한 현대 회화의 미래를 예고한다.  이 작품은 아마도 인체주의까지 예고하는 유일한 19세기 회화일 것이다. 파라드는 손님을 끌기 위한 간단한 코메디를 말한다. 쇠라가 보여주는 엄격하고 질서정연한 구도에 의해서 완성되는 조형적 구성은 견고한 현대 회화의 미래를 예고한다.


 

샤위춤1889~90 캔버스 유채169.1×139cm 뮐러 미술관

쇠라의 점묘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작품에는 윤곽의 선이 살아나게 되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화면의 패턴은 미끄러지듯 리드미컬한 구도를 이루며,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미지를 정적으로 표현한 것은 쇠회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화장하는 여인
쇠라의 애인 마드레느 노브로크를 그린 작품인데 후기의 양식성이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인물의 객관적인 묘사와 인물과 배경 전체를 에워싸는 분위기에 깃들어 있는 문양적(紋樣的) 패턴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일종의 음악적인 톤을 형성해 주고 있다. 이 점은 <샤이 춤>이나, <서커스>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성이다. 여인의 모습과 화장대의 모양, 그리고 배경의 곡선적 패턴이 상승하는 무드를 타고 있는데, 쇠라는 이 상승적 무드를 즐거움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 즐거움은 다른 실내 작품에서와 같이 유머를 곁들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 그려진 꽃이 있는 곳에는 원래 쇠라 자신의 얼굴이 그려졌다가 지워 버렸다

봄의 그랑드 1888 캔버스 유채 65×82cm벨기에 왕립미술관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고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완성했던 것으로, 쇠라는 야외에서 보았던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 화면에 질서를 부여하고 끈기 있게 필촉을 두들겼다. 그 필촉의 힘으로 색조에 힘을 불어넣으며 완성을 이룬다.
 
서커스 바생항구  옹플레르등대  옹플레르부둣가 포즈를취한옆모습 파라솔여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