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의 일시적 형통

 사무엘하 15: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차지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지 않았음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꾀와 힘으로 왕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꾀로 마음의 우상 및 야망을 이루려는 자들은 언제나 기만이 나타난다. 철저한 음모를 꾀한다. 오랫동안 생각하며 악한 일을 도모한다. 이 기간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거나 순종하려는 자세가 없다. 계속 죄악을 자신의 머리 위에 쌓을 뿐이다.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때까지 끝없이 죄악을 쌓는다.

 

압살롬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속인다. 그 첫 단계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정한 방법으로 사로잡는 것이었다. 다윗 시대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왕께 호소할 수 있었다. 압살롬은 이러한 사람들을 겨냥하여 그들이 왕을 만나기 전 왕을 오해시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으로 “왕의 이름으로” 억울함을 해결해 준다. 억울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야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압살롬의 동기는 왕의 권한을 가로채고 자신의 권한을 늘리려는 속셈이기에 악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압살롬은 왕인 아버지를 속였으며 왕의 재판을 찾는 군중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다윗을 나쁜 왕으로 만들었다.

 

무려 4년간 이러한 일을 하다 보니 (참으로 오랜 기간 자신의 동기와 음모를 감출 수 있는 압살롬을 볼 수 있다!) 압살롬을 따르는 자들이 허다하게 많아졌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보살핀 압살롬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드디어 자신의 숨은 야망을 이룰 때가 되었다. 반란을 일으킬 날과 장소를 잡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빈틈없이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만나 헤브론으로 “여호와께 예배 드리러 가겠다”고 말을 한다.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린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마저 자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는 압살롬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께 진실한 예배, 애통하는 예배를 드린 흔적이 압살롬에게는 없다. 아무튼 그의 반란은 치밀한 계획 가운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그는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아서, 특히 영특한 다윗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다윗의 입장에서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아들 압살롬을 그 어찌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었으랴!

 

이 와중에 간신이 있다. 아히도벨이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에게 총애를 받아 지극히 높은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이 못마땅하기에 압살롬 편에 서게 되었을까! 그는 압살롬이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며 그러기에 약삭빠르게 신의를 저버린 것이다. 이제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긴밀하게 만난다. 그 장면이 위의 구절이다.

 

“제사 드릴 때에” …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가짜들은 신앙을 탐욕의 도구로 삼는다. 그들의 신앙은 언제나 거짓과 동반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우상을 이루기 위한 종교 형식이며 위선의 껍질일 뿐이다. 압살롬에게서 종교와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철저하게 진행되는 거짓과 모함과 위선을 본다. 나아가 그들의 계획이 잠시 형통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누가 이들의 계획이 완전한 멸망이 될 것을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완벽한’ 궤계를 엎으신다. 신기한 능력으로 엎으신다. 압살롬이 이길 것 같으나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의 기만과 궤계를 부끄럽게 만드신다.

 

다윗은 연약한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진실하였다.’ 한때 밧세바로 인하여 무서운 죄악에 빠졌던 것 외에는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진실하였다.

 

오늘 우리는 내 힘으로 내 원함을 위하여 사는 삶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삶은 신앙을 수단으로 삼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반드시 기만과 거짓과 악을 도모함이 진행된다. 따라서 철저하게 우리의 삶의 목표부터 점검하자.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이 나의 삶의 목표요 나의 삶의 기쁨인가? 하나님이 나의 삶의 면류관인지 분명하게 하자. 매일 순간마다 내 삶의 목표와 동기를 점검하며 살아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며 그토록 깊고 질긴, 그리고 완벽하게 기만을 진행시키는 우리 속의 죄성에게 우리 자신도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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