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재 박사의 성서 건강학] 배변 습관-변비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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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는 건강의 커다란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경 쓰고 고민하며 살게 하는 몸의 현상이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변비를 숙명처럼 안고 살고 있다. 변비가 과연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현상일까.

긴 소장여행 후 대장에서는 남은 수분이 흡수되면서 소화된 음식의 찌꺼기를 고체화하는 작업을 한다. 결국 1m 남짓한 대장에서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장균이라 불리는 미생물의 작용과 수분 흡수에 의해 대변이 완성된다.

대장을 통해서 완성된 대변은 길이가 15㎝쯤 되는 직장에 쌓이게 된다. 직장에는 대변이 어느 정도 모이는가를 수시로 중추신경계에 알리는 감각수용체가 발달되어 있다. 끊임없이 밀려 내려오는 대변이 직장에 계속 쌓인다 하더라도 그때마다 대변을 볼 필요가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셨는데 자율신경계 중 교감신경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항문의 속조임근을 수축시켜 쌓여 있는 대변이 아무 때나 나오지 못하게 하여 평상시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은 것을 확인할 때 항문을 살폈다. 이는 자율신경계의 지배를 받는 속조임근이 작용하지 못해 직장에 쌓여 있던 변이 죽음과 동시에 배설되어 있음을 확인한 후 사망을 선언하는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변의 양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도저히 교감신경의 작용만으로 배변이 억제되지 못하게 될 때 중추신경계는 직장근육을 수축시켜 배변을 추진한다. 그러나 변의에 따라 배변할 상황이 아닌 경우 항문 바깥조임근에 수의적으로 힘을 주어 변을 참게 한다.

결국 항문의 바깥조임근이 속조임근을 최종 조절한다고 할 수 있다. 설사를 할 때는 어떤 병적인 이유로 미처 흡수되지 못한 수분을 포함한 많은 배설물이 엄청나게 빠르게 직장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평소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교감신경의 억제 한계를 넘어 수의근인 바깥조임근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화장실로 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배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장의 운동속도다. 장운동이 항진되면 자주 화장실에 가게 되고 장운동이 억제되면 배변이 더디게 된다. 그러면 흔히 주위에서 목격되는 변비환자들의 경우 전적으로 장의 운동속도만이 문제일까.

장운동이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1주일에 3회 이하로 대변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적게 먹는 데다 소위 ‘배변습관(bowel habit)’을 잘못 들인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즉, 변의가 있지만 그렇게 급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중추신경의 의사를 쉽사리 무시해버리기 때문에 변비는 시작된다. 그 결과 점차 강한 자극이 있어야만 변의를 느끼게 되고 이것이 만성화될 때 변비가 고착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배변습관’이라는 말을 쓴다. 장운동이 정상이라 하더라도 적은 양의 음식을 먹으면 상대적으로 변의를 느낄 정도의 대변이 모이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결국 여성이 음식을 덜 먹는 현상이나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다이어트도 변비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확실한 것은 특별히 병적요인에 의해서 변비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적당량의 섬유질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하고 매일 아침 화장실에 가서 배변을 시도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배변은 생리적 현상이지만 습관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정교하고 편리한 장치를 우리 몸에 장착해 놓으셨다. 절제되지 못한 삶 가운데 그 질서를 습관적으로 무시할 때 몸이 불편해지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바로 변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 의대 교수>


 
[이왕재 박사의 성서 건강학] 대장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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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의 FTA 문제가 오랜 논의 끝에 타결된 모양이다. 필자가 다녀 온 캐나다는 분명 자동차 산업과 같은 중공업보다는 농축산업과 같은 1차 산업이 발전한 나라이니 자동차를 파는 회사는 신이 날 것이고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울상일 것이라는 짐작은 뉴스를 통해서 확인한 바대로다.

육류가 싼 값으로 식탁에 오르겠지만 축산업 도산이 우려된다는 뉴스와 상관없이 이제 분명 더 많은 분들이 육류를 소비하게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육류소비가 연간 44㎏에 이르러 거의 육식국가가 된 듯한 기분이다.

양질의 단백질이 전 국민에게 원활히 공급되어 국민건강지수를 끌어 올린 것은 틀림없지만 우려되는 것은 대장암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육식을 주식으로 하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 국가들의 경우 대장암이 항상 상위권에 포진하는 것을 보면 분명 육식과 대장암은 그 관계를 뗄 수 없을 것 같다.

대장은 소장에 비해 길이가 현저하게 짧다. 다만 그 직경이 소장보다 크다. 소장의 기능이 소화와 흡수라고 하면 대장의 기능은 대변 만들기라고 보면 된다. 6∼7m의 긴 소장 여행을 통해서 우리 몸에 필요한 양분이 거의 다 흡수되고, 흡수될 수 없거나 흡수할 필요가 없는 물질들이 대변이 되어 배설되는데 그 과정의 핵심은 수분흡수다. 실상 수분 흡수의 양으로 보면 소장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지만 흡수율이 대장에서 더 높다는 이야기다. 즉, 하루에 약 1.5ℓ의 수분이 대장으로 넘어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90% 이상이 흡수되고 나머지 10%(100㎖ 내외) 정도가 대변을 통해 배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장의 다른 큰 특징의 하나는 그 안에 많은 균이 서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일반인들이 대장균이라고 일컫는 균을 말한다. 그 수가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수보다도 무려 10∼100배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사람은 균의 바다 위에 산다’는 어느 미생물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이 균들은 우선 인간에게 직접 감염을 통해 만날 수 없는 균들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예방주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먹고 남은 음식을 먹고 살면서 인간에게 유익한 물질을 남기는 소위,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실례가 유산균으로 한국 사람이 즐겨 먹는 김치 속에 풍부하게 살고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독자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생관계로 좋은 물질만을 인간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대변의 냄새가 그를 증명해 준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균들이 부패균이어서 먹고 남은 음식을 부패시키기 때문에 숙주인 인간에게 결코 좋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대변 냄새의 주종이 단백질이 부패될 때 발생하는 냄새인 것으로 보아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부패균과 인간이 공생한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장암의 절반이 맨 끝 부분인 직장에서 발생하고 균이 없는 소장에는 거의 암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장암은 대장균과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에 의한 흥미로운 실험의 결과는 건강을 위해 다량의 비타민C를 복용한 경우 병원성을 나타내는 대장균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비병원성 대장균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이는 비타민C의 정기적 복용이 늘어나고 있는 대장암에 대한 대비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라는 생각이다.

지나친 단백질이 부패돼 대장건강을 위협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지나친 욕심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위협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탈이 난다. 건강한 신앙, 건강한 몸을 잘 유지하는 크리스천이 되자.

<서울대 의대 교수>

강단에 노트북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 목사

광야의 소리 ㆍ 


강단에 노트북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  목사들!!!|
 
 
 
   
몇년 전에 저희 모친 상을 당하여 모친이 살아 생전 일평생 다니시든 본 교회 50대 후반의 담임목사가 저희 모친 장례식을 맡아 인도하는데 내가 맏 상주가 되어 그 장례식을 지켜보니, 그야말로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
 
 모친 상을 당하여 유족들은 슬픔에 잠겨 있는데 그 장례식을 집례하는 목사는 소위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장례식 다 마칠 때까지 그 넘의 손바닥보다 좀 더 큰 노트 북을 들어다 보고 모든 장례예식
을 다 마치는데, 나도 명색이 목사로  저의 모친이 다니시던 교회 담임목사가  인생 일대 가장 경건하고 엄숙해야 할 장례예식에 솜털보다 더 가볍고 경박스럽게 그 따위 노트북 들어다 보고 성의없이 장례식을 치루는 것을 보고 적잖이 불쾌하고 마음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 목사 참 싸가지 없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자기 교회 교인 장례식을 맡아 진행하는 담임목사가 그 장례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계산기 두드리듯이 노트북 들어다 보고 어디서 클릭해 주셔온 설교를 하는지  모르지만,연신 노트북 들어다 보고 두드리며 성의없이 건성으로 사무적식 장례예식을 진행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만 아니라 유족들에게도 하나의 모독이고 치욕에 가까운 일일게다.
 
 
 교회 담임목사가 한 영혼이 마지막가는 가장 엄숙하고 경건한 예식을 그렇게 쉽게 싸구려 땜질식을 하듯 하는 것을 보니,참 요즈음 목사들 너무 쉽게 목회하는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천국가신 저희 모친에 대한 장례예식에 보여 준 그 목사의 예의 없고 싸가지 없는 행동에 그 때 일을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 한켠에 드리우진 그 목사에 대한 부정적인 그림자는 지울 수가 없다.
 
저희 모친 장례식을 다 마치고  난 후 나는 내가 담임하는 교회로 돌아와서 그 뒤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t.v나 인터넷을 통해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 전에는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을 여사로 보았는데, 저희 모친 장례식에 그 목사가 노트북을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뒤로 요즈음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조차 노트북을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지, 아니면 손수 정성껏 준비한 원고를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지 유심히 살펴 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지켜 보면서 더 놀라고 까무라치게 경천동지한 일은 오늘날 대형교회로 부터 적은 개척교회 목사들 까지 예배시간 많은 목사님들이 노트북을  갖다 놓고 그걸 들어다 보고 설교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그걸 보고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정말 너무 충격적이고 맨붕 상태였다.
 
 대학교수는 학교선생은 자기가 연구한 것을 노트북에 준비해 저장해 놓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강의해도 그건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단언하건대 목사는 절대 강단에서 노트북 들어다 보고 설교하면 안된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첨단 디지텔 전자 문명속에 편리한 삶을  살아 간다고 해도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강단에서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교인들이 볼때에 얘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 들어다 보고 자판 두드리며 장난하며 게임하듯, 불경스럽고  경박하고  천박스럽게 강단에 노트북 올려 놓고 그것 들었다 보고
두드리며 설교하는 목사는 정말 아니다 싶다.
 
 
사실 그런 식으로 설교 할려고 하면 노트북엔 인터넷 설교 사이트 같은데 들어가면 손가락으로 몇번 안 두드리리고 클릭만 해도 수십만 수백만 설교가 주루루 쏟아져 나오는데, 목사가 가령 일주일 내내 놀다가 주일 낮 아침에도 그런 사이트에 들어가서 적당한 설교 하나 줏어 설교 한들 하나님이나 아실까, 교인들 누가 알겠는가? 
 
 또 그 주간 무슨 일로 바빠 설교준비 제대로 못한 목사는 그런 남의설교 줏어 가지고 자기것 마냥 설교하고자 하는 유혹을 떨쳐버릴 목사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나라 유명한 대하 장편 소설가들 중에 대부분 작가들이 컴퓨터앞에 앉아 자판 두드리면 원고 작성을 하지 않고 손수 자기 손으로 원고에다가 한글짜 한글짜 각고의 노력으로 소설을 쓴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힘들게 손수 자기 필력으로 원고지에 글을 쓸때 그기에 기상천외한 영감이 떠오르고  또그 글속에 작가의 혼이, 생명이 그 소설속에 묻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손으로 펜을 들고 한자 한자 마치 한폭의 천에 수를 놓듯 정성을 다해, 혼을 다해 원고지에 글을 쓰내려 간다고 한다.
 
 
그리곤 또 쓰다가 지우고 또 쓰고 그러면서 그 글 한자, 한자 속에 작가의 혼과 생명을 불어 넣는다고 한다.
 
 
영생이 없고 생명이 없는 일반 소설도 오늘날 이렇게 편리한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다 제쳐 놓고 마치 장인이 손으로 일구월심 지극정성을 다해 조각을 다듬어 명작이 되고 걸작 빚어  그렇게 작품을 만들어 간다면 오늘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은 얼마나 더 설교 말씀을 준비하는데 혼신을 다해 손수 그 말씀을 쓰고 적고 준비 하면서 마치 산모가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생명을 잉태시키듯 그런 각고의 노력과 심혈을 다 기울려 준비한 설교를 강단에서 전할 때 그 목사의 메세지에 성령님이 크게 역사하시고 그런 설교를 준비한 목사의 설교에 은혜받지 못하고 돌아갈  성도들이 없지 않겠는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순교자 주기철목사님은 그의 전기에서 그 분은 주일 설교 한편을 위해 일주일을 내내 기도하시고 골방에서 씨름하시며 설교준비를 하시고 그리고 주일 날 설교하시고 나면 온 몸에 기운이 진하여  드러누워 일어 날 기력 조차 없었다고 하셨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라는 말은 만
고 불변의 진리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은  강단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선지자가 본 환상중에 어느 골짜기에 마른 뼈닥기들 이 천을 이루고 만을 이루는데 그기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에스겔선지자로  통해 대언되어 질때에 그 바짝 마른 뼈닥기들이 살아 여호와의 큰 군대가 되듯 그런 목사의 각고의 힘든  말씀의 준비속에 이루어진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될때 많은 성도들의 상하고 병들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 날 줄 믿는다.
 
 
 
그래서 목사에게 제일 우선순위는 교회성장도 부흥도 아니고 철저한 설교 준비다. 그런 설교속에 내 마음과 내 정성과 믿음과 삶이 그 말씀속에 녹아 들어가게 되고 그리고 그런  준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 서서 전할때 비로소 그  말씀을 준비 할 때에 함께 하시며 도우시던 성령님이 그 
말씀을 전하는 강단에서도 함께 하시고 임재하셔서  그 말씀을 통해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그 날 그기에 참석한 모든 교우들에게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그들은 그 말씀 앞에 민둥산보다 더  벌거벗은 자신들의 벌거벗고 수치스러운 죄악된 모습들을 발견하고 
꼬구려지며, 그날 강단에서 쏟아지는 예배시간  말씀의 폭포수속에 늘 세상을 이길 새힘을 얻고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주님의 뜻가운데  주님을 닮아 가는 거룩산 삶을 살아가게 될것이고 또한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가게 될것이다.
 
 
 그렇니 목사님 들이여!  제발 강단에 노트북 갖다 놓고 그거 들어다 보고 손쉽게 가볍게 설교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앞에 심히 불경스럽고, 그기 앉아 예배드리는 교인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 목사들의 치명적인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싸구려 극장, 쇼구경하는 것보다 더 수준 낮고 저질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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