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전통은 구별되어야 한다

 

바빙크가 그의 교의학에서 잘 지적했듯이, 교회의 전통을 성경보다 '위에' 혹은 동등한 '옆에' 두는 것은 중세 교회가 범했던 실수였고 악습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개혁하여, 전통을 성경 '아래에' 두면서, 오직 성경을 기치로 내걸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온 교리조차도 저런 '전통'과 같은 것이라고 혼동을 해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즉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아래에' 두고자 했던 그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교회의 전통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구분되며, 반드시 성경 아래에 있어야 한다. 교리도 소중하다. 전통과는 다른 이유에서 소중하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소중하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 위에 혹은 옆에 혹은 아래에 두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교리는 항상 성경에서 비롯되며,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교리를 배운다는 것은 곧 성경을 배운다는 것이다.

 

교리가 역사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다음 세대의 교회에 상속되면서 교회의 전통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출발점도 다르고 개념도 다른 것을 혼동하여 '교리와 전통은 배제해야 한다'거나, '교리와 전통을 배우기 전에 성경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교리와 전통에 대한 개념의 혼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오고 성경으로 돌아가기에 성경 연구를 통해 성경과 다른 점이 밝혀진 교리가 있다. 그 교리는 즉시 자기 자리를 상실하고 개혁된다. 그 위치에서 개혁되지 않고 버티는 교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다. 이처럼 교리를 만들기도 하고 개혁하기도 하는 주체는 오직 성경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전통을 만들고 그 전통을 따라 잘못된 교리를 고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단과 사이비를 양산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따름이다. 이러한 개념조차 구분이 없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교리는 성경을 가로막는 전통일 뿐이다.

 

차제에 우리는 역사적인 보편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서와 그에 따른 교리문답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문서들을 전통이라는 명찰을 붙여서 배제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고백하는 역사적인 신앙의 내용들조차 무시하는 잘못된 관행을 낳을 뿐임을 명심할 일이다.

기독교개혁신보

http://rpress.or.kr/xe/index.php?mid=private&document_srl=362035

 

 
개혁주의마을/Grace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씨앗의 기도  (4) 2014.10.18
가을은 가네...  (0) 2014.10.14
가을 애수(哀愁)  (0) 2014.10.05
가을 호수  (0) 2014.09.27
가을 그리움  (0) 2014.09.23

예정론 4: 예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그리스도인은 예정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은 예정을 말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 규칙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왜 누구는 예수를 믿는데, 또다른 누구는 예수를 믿지 않는지에 대해 예정론과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경건하고 호의적인 형제나 자매들이 예정론은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교리 같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지 않는가? 혹은 그 교리는 모든 영적 열심을 흡수해 버리는 메마른 스펀지 같다는 말도 하지않는가? 그런 사람들은 예정론이 너무 이지적이고생기 없으며, 무익하다고 주장한다.

예정론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준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 위로를 받아야 하며 구령을 위해 기도하고 소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가 영화로운가? 예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에베소서 1장의  바울의 말을 통해 그 이유 다섯가지를 알아보자.

 

* 불변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불변성 때문이다. 에베소서, 혹은 다른 어떤 성경에서도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셨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선택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 (도르트신조 1.7)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항상 확고부동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의 특징이 바로 불변성이다” ( 6:17-18).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바꾸신다 주장했던 자들은 누구인가? 17세기,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선택을 가르쳤다. 이들 추종자들이 도르트회의에서 어떻게 선택의 교리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는지 귀를 기울여보자.

영생에 이르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일반적이고 명확한 선택이 있는가 하면, 특별하고 불명확한 선택이 있다. 결국 후자의 경우 불완전하고 취소 가능하며 비결정적이고 조건적이거나, 완전하고 취소 불가능하며 결정이고 절대적인 선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에 이르는 선택이 있고, 구원에 이르는 선택이 있다. 따라서 구원을 위한 결정적 선택이 없을지라도 의로워진 믿음을 얻게 되는 선택도 있는 것이다.” (도르트신조 1항 오류의 거부 2)

우리는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한 약속을 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므로 역시 변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고서 그들이 참된 구원을 받았으나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선택은 그 불변성 때문에 영화로운 것이다.

 

* 영원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영원성 때문이다. 예정은 창조 전에” (1:4) 일어났다. 우리는 투표를 위해 투표소를 찾거나 부재자투표를 하곤 한다. 어떤 일에 참견할 권리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이 있기 전에 오직 하나님만 계셨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창조 전에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으셨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므로 그분의 계획 역시 영원했다. 우리를 향한 그  영원한 계획은 은혜로운 계획이었고,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딤후 1:9)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영화로울 뿐만 아니라 영감어린 가르침이다. 영원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특별히 당신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는가?  

 

* 은혜로움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은혜로움 때문이다. 바울은 성부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심에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1:4) 영원한 사랑이다. 우리를 예정하신 원인은 그분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1:5). 때를 맞춰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 영원한 사랑을 알았고, 그분의 예정하신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 ( 1:5)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에 앞서서 그 사랑하시는 자” ( 1:6) 성자를 향한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도르트신조는 이런 이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 당신의 의지는 주권적이고 선하며 기뻐함으로 가득한데, 이에 따라 순전한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도르트신조 1.7)

하나님께서 친히 이 영원한 은혜를 시작하시고 수행하시며 목적한 바대로 이루시는 것이지, 우리는 그 주체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택” ( 1:5) 하셨고, “예정” ( 1:5)하셨으며, “그 뜻의 목적대로” ( 1:5) 이루신 사건이다. ‘목적’ (eudokian)이라는 단어는 선하신 기쁨’ (NIV; NKJV), 혹은 온유한 의도’ (NASB)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임의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모세가 신명기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밝히고 있듯이,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월등히 많아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어떤 이는 선택하시고 다른 이들은 선택하시지 않았는가? 좀더 개인적으로 말해보자면, 왜 하나님은 당신은 선택하시고 당신 외의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당신 안에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 (도르트신조 1.9) 등의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에베소서 1:4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해,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란 것이다. 에베소서 1:5-6을 다시 읽어보자.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를 예정하심은 당신의 아들들로 삼기 위함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에 예정하신 것이 아니란 뜻이다.

한 설교가가 하나님께서 퍼레이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방송중계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 위치에서 하나님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당신 앞을 지나는 모든 인간들을 보실 수 있으며, 그 가운데서 선택을 행하신다. 에베소서 1장은 이것을 하나님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시간이 시작되기 전(before time)에 선택하신 것이며, 시간이 시작된 후(in time)에 그 믿음을 보시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그러므로 죄인인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은 진정 영화로운 사역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 중에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찬양이 솟아나오는 것이다. “빚에 억눌린 자에게 이 얼마나 크나큰 은혜인지, 날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도다!”

 

* 명확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의 송영은 우리에게 복 주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 1:4). 불특정한 무리를 언급하지 않고 나와 당신 같은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복 주셨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특정한 어떤 사람들, 믿음과 믿음의 순종으로 믿고 보존되는 사람들’ (도르트신조 1항 오류의 거부 1)이 예정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예정의 명확성이란 개인적이라는 뜻이다. 만약 예정이 불명확하고 집단적이라면, 우리 자신들이 예정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들을 명확하게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칼빈은 바울이 에베소서 1장을 저술한 목적을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품고 열정을 북돋으며, 그 감사와 열정을 우리 안에 가득히 채우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 그리스도 중심성

끝으로,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성은 우리 개혁파 신자들이 그 지식에 충분히 자라나야 할 영역 중 하나이다. 선택의 교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잊은 채로, 우리는 예정을 너무나 자주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에베소서 1장의 예정, 1-3장의 선택 교리, 4-6의 우리의 삶의 방식 등을 말하기 전에 바울은 그 모든 것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삼았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v. 3)를 찬양하게 되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v. 4) “그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를 복주셨다” (v. 6)고 말한다.

도르트신조는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유효한 부름심을 통해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과 교제하기로 결정하셨다. , 선택하신 자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고 의롭다 칭하시며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는데, 그 뿐 아니라 성자의 교제 안에서 그들을 강력히 보존해 주신다.” (도르트신조 1.7)

이것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선택의 거울과도 같다는 의미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과 강력한 사랑에 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의심에 쌓여있다면, 유일한 치료책은 마치 거울을 응시하듯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러면 그분의 형상으로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선택받은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선택의 교리는 얼마나 영화로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우리는 찬양과 거룩함으로 이 교리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묵상할 때, 우리는 이렇게 찬양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 1:3),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v. 6). 그리고 그 영광을 묵상할 때, 우리는 거룩을 추구하게 된다.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무리로부터 우리는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 (v. 4)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신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