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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blog.naver.com/calvianus/220059731665


 존 파이퍼

 존 파이퍼: 방언, 영적 언어인가 육적 언어인가? (John Piper: Speaking in Tongues)

 

출처 : 유튜브 http://www.youtube.com/watch?v=7K4sSTNvKu4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분의 속성과 사역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신은 그들의 상상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만들고 그것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시편 저자를 통해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50:21)라고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신과 성경의 하나님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거룩하심, 의로우심, 주권, 진노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혐오스런 표정으로 나의 하나님은 이렇지 않아라거나 나는 이런 하나님을 절대 사랑할 수 없어라고 외칠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성경의 하나님과 마주할 때 반감을 드러내며 강력히 거부할 수 밖에 없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3:19,20)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그분께 복종할 수 없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개인의 복종과 공로, 또는 신을 기쁘게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신념이다. 오직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이 없는 한,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하거나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7:14-24,2:4,5).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아무런 공포도 내세울 수 없다. 심지어 가장 훌륭한 행위조차도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64:6).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다. 20세기는 인간이 더 위대하고 고귀한 피조물로 진화될 것이라는 낙관론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혁신의 시대가 될 것으로 믿었지만, 절망과 혼란으로 귀결되었다. 성경은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상태로 태어났다고 가르친다. 자기 혁신을 위한 인간의 시도는 무엇이든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번번히 실패로 끝날 뿐이다.

 

인간의 희망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희망을 붙잡으려면, 먼저 자신의 전적 무능력을 깨닫고 스스로에 대해 절망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복음 설교의 핵심 기능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부패한 본성에 속박된 채로 태어나 사탄의 노예가 된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공중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고 있다고 증언한다(2:2).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사탄에게 지배받는 길을 선택했다. 회심 이전의 인간은 모두 마귀의 자녀로 불려야 마땅하다(요일3:8,8:44).

 

폴 워셔, 복음, PP 163-167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아바, 아버지!"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 성경말씀은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그 영 안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종의 영은 헬라어로 “프뉴마 둘레이아스”입니다.
종은 그 주인에게 생사여탈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일반적인 해석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종의 영을 받았지만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영’을 어떤 영어성경은 Spirit of son ship, ‘아들 됨의 영’으로, 또 어떤 영어성경은 Adoption, ‘양자로 삼는 영’으로 번역하는데, 헬라어 원어는 ‘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이므로 “아들 됨의 영”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무래도 옳을 것 같습니다.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 아들 삼는다면, 죄인이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신분변경이 된다면 ‘양자 삼는 영’이 맞겠지요.
그러나 죄인이었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다면, 새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양자가 되며 ‘양자의 영’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계속 읽어보면 “양자의 영(아들됨의 영이 보다 합당한 번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부르짖는 것일까요?
“아바 아버지”에서 ‘아바’라는 헬라어는 ‘αββα’로 두 알파 사이에 베타가 두 개가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바’ 보다는 ‘아빠’가 더 가까운 발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아들 됨의 영’ 안에서, 성령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크락소멘, 부르짖는다, cry, 운다는 것입니다.
왜 헬라어 ‘크락소멘(동사원형은 크락소), 운다, 부르짖는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갓난아기로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서 운다는 것입니다.
금방 태어나서 안 우는 아이 있습니까?
갓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 난 아기가 우는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

억지로 우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부르짖는 것도, 지어내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속으로부터 저절로, 억제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울음이요 부르짖음일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그 옛사람을 벗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이 죄악 된 세상, 죽음과 멸망의 파도로 넘실대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멸망으로 끌고 가는 더럽고 무서운 죄에서 벗어나,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 부르며 우는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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