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 신학논평 “영혼 취침설, 그리고 궁극적 구원론”

 

 

29e0b870de1de55181141bc9cc55b535_1489891146_49.jpg최근 미주한인교계에서는 두 가지 신학적 논쟁이 있어왔다. 하나는 ‘천국환송예배’라는 용어가 정당한 것이냐 아니냐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느냐 아니냐’이다.

 

모두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구원론이 이슈가 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교리논쟁 때문에 수많은 인명이 처형되는 비극도 여러 번 있었다. 특히 금년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인데 종교개혁 역시 중심 이슈가 바로 구원론이고 구원교리 논쟁이었다. 

 

‘천국환송예배’라는 말을 쓰지 말자는 주장은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입성했는지 못했는지를 알지 못하니까 그런 용어를 쓰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필자와도 친분이 있는 장로 한 분이 일간신문 광고를 통하여 그런 주장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이 문제는 결론부터 말한다면 ‘장례예식, 입관예식, 하관예식’을 사용할 것을 추천한다. 세례예식, 성찬예식, 목사 안수예식, 임직예식, 결혼예식 등 교회의 예전용어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천국환송예배라고 해서 죄를 짓는 일은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내는 유가족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전도의 효과가 있지 않은가. 언어는 논리성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천국환송예배 용어를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로, ‘죽으면 영혼이 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 마지막 부활 때까지 잠을 잔다’는 ‘영혼 취침설’(soul sleeping theory)을 제시한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그것은 전혀 건전한 기독교교리가 아니다. 주요 개신교단들은 신자가 죽으면 바로 낙원(paradise)에 가게 된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 

 

예수님도 십자가 동창생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명확하게 선언하셨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11:11)고 하신 말씀 등에 근거하여 영혼 취침설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적 표현이 아니고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성경말씀이 이를 명확하게 풀어주고 있다. 

 

□ 구원론의 다양한 주장들 

 

두 번째 논쟁은, ‘한 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이다. 한국의 총신대학교가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이 중도에 취소될 수 있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47.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것과 관련된 논쟁이다. 설문에 참여한 목사들의 81%가 장로교회 소속이었다. 성결교회, 감리교회, 순복음 교회 목회자들은 당연히 ‘취소될 수 있다’는 답변을 했을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장로교회 목사들 가운데 33.5%가 ‘한 번 받은 구원도 취소될 수있다’는 주장에 찬성한 것은 확실히 상당히 큰 교리적 지진에 해당된다.

 

장로교회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곧 한 번 받은 구원은 궁극구원이요 결코 빼앗기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고한 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이를 근거로 교리체계를 만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강조된 오대교리 곧 ‘TULIP’의 마지막 조항에 해당된다. 근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도 그 선주가 바로 이 궁극구원론 곧 구원취소불가론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구원파’ 교회 교주였다.

 

그런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정통장로교회는 여전히 한 번 받은 구원은 궁극구원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경말씀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혼구원론에 대하여는 타종교와 무신론을 포함하여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 왔다. 인간은 누구이건 어떤 종교를 믿건 죽으면 그 영혼이 궁극적으로는 구원받게 된다는 보편적 구원론, 기독교가 구원의 확실한 길이지만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로마 가톨릭교회, 양심과 율법에 따른 선행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주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견해,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선택하여 부르신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교리, 자기네 교회나 교파에만 구원이 있다는 14만 4천론자들....아니, 아예 인간은 죽으면 영혼도 없고 부활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전혀 없다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의 선언도 있어왔다. 이 가운데 어떤 ‘구원론’을 믿느냐는 물론 각 종교, 각 교단, 각 이데올로기, 그리고 개인들에 따라 다르다.

 

□ 구원계획 변경은 절대주권자의 권한 

 

한 가지 더 말해야 한다. 구원은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돈’ 비유처럼 하나님의 일방적 예정과 은혜로 받기도 하고, 탕자의 비유처럼 타락한 자의 결단으로 받기도 한다. 그리고 잃은 양의 비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과 잃은 양의 응답으로 받게도 된다. 구원과정을 획일적 원리로만 설명하던 것을 넘어 인간 하나 하나가 절대적 생명이라는 점에서 전개한 ‘개별성중심의 구원 패러다임’이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목적지는 같으나 그 도달과정은 개인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뜻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한번 받은 구원은 궁극적 구원’이라는 논리에 대하여 그 허점을 보완해야 한다. 구원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할 축소, 인간의 자유 의지적 참여가 전적으로 부인된 것, 도덕폐기론(antinomianism)의 폐해 등을 극복해야 한다. 그런 신학자들이 바로 아르미니우스이고 요한 웨슬리이고 칼 바르트이다. 

 

특히 이민교회는 목회자들이 어떤 한 가지 구원론만 주장하여 설교하기가 어렵다. 어느 교회에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 등의 출신들이 모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목회현장적 고민을 거쳐 생성된 것이 바로 ‘개인마다 구원과정 곧 은혜의 작용 방식이 다르다’는 원리이다. 

 

지금까지의 구원론은 획일적 원리만으로 설명하려는 데서 무리가 있어 왔다. 구원은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이시라는 단일원리가 대전제이지만 구원받는 도정(ordo salutis)도 기계적으로 결정하신 것은 아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실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하나 하나의 구원체험과정은 천차만별적이라는 설명이다. 거듭 말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원한 구원은 절대 주권자이신 성삼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그런데 그분은 큰 틀에서는 하나의 원리 혹은 경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 구원과정은 개인 개인에 따라 다르다. 특히 은혜와 믿음의 작용방식이 천차만별로 다르도록 경륜하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양처럼, 어떤 사람은 돈처럼, 어떤 사람은 아들처럼....다양한 방식으로 구원받게 된다. 

 

따라서 절대 주권자이신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궁극구원의 계약을 파기하실 수 있는 권한도 있으신 분이시다. 궁극구원을 취소하시는 것 역시 성삼위 하나님의 절대주권행사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정근(성결교회 목사)

대표저서 <목회자의 최고 표준 예수 그리스도>

ⓒ 크리스천위클리

 

가져온 곳: USA아멘넷

THAAD(사드) 전문가들이 판치는 세상!


나는 미사일 분야에서 20여년을 일해 왔지만 내가 전문가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해당 무기체계를 운용하고 유지관리를 해보았지만 무기체계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는 엄청난 시간을 투입해야만 가능했는데, TCO(Tactical Control Officer-전술통제장교) 1년을 제외하면 사실 미사일을 직접 만지거나 관리를 해오지는 않았다.


물론 사령부에서 미사일 통제 장교도 하고, 한미 연합작전 담당을 맡기도 하고, 대대 작전통제소에서도 근무를 했지만 실제로 미사일과 직접 접해서 일을 한 것은 1년여 조금 넘는 기간이다.


그러나 그 전체의 과정에서 엄청난 비밀들과 관련 자료들 그리고 메뉴얼 등을 공부하고 숱한 전문가들(한국국방연구원 박사님들)의 강의와 마지막 국방부 군비검증단에서의 감시 및 검증을 위한 무기체계무력화 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면서 군생활을 마무리하였다.


연합작전을 담당할 때는 패트리어트 도입과 관련한 사전 연구보고를 진행했었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KAMD(Korea Air & Missile Defense)의 모태가 되는 연합합동전구탄도탄작전통제소에서 제대로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특히 무기체계와 체계연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sensing에서부터 shooting까지의 맥락적 개념을 배웠을 때의(Kill Chain 개념) 전율과 종심타격을 수행하는 실 전투상황에서도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는 미군의 인본주의적 작전실태를 목도하면서 경외심을 느낄 정도였다.


실무장한 미사일 사격을 위한 훈련도 진행했었고, 분기마다 SIM훈련을 통해 작전가능평가를 보아왔고 97년도에는 최우수 작전장교 표창도 받았었다. (조종사의 TOP GUN과 같은 상)


주야로 작전비상대기 근무를 서며 장비를 운용하고 적 지역을 레이다로 탐지하며 실 항적을 추적하고 포착훈련을 수시로 진행했었다.


그런데...

기껏 구글로 자료들을 번역하고 어설프게 유리한 항목만 뽑아내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사용하면서 자신을 THAAD(사드) 전문가라고 뻔뻔하게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THAAD는 현존하는 가장 정밀한 무기체계이다. 더욱이 지구상 가장 불량국가인 북한이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이를 방어할 최소한의 수단이 THAAD인 것이다.


40~150km 높이에서 직접 맞춰 파괴하는 탄도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아무런 효과가 없다느니 수도권은 방어를 못하느니 하면서 호도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마인드로 글을 쓰는지 의심스럽다.


모든 무기체계는 그 목표와 함께 한계점 또한 갖고 있다. 제한된 자원으로 제한된 방어를 해야 하는데, 최소한의 방어자산을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설프게 중국 눈치를 보면서? 같은 동포인 북한은 절대 핵을 쏘지 않을거라서? 핵은 미국을 향한거지 남한을 향한게 아니라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칼을 든 자가 그 칼을 어디에 휘두를지는 칼을 쥔 자만의 의지이지 옆에 있는 사람들의 바램으로 휘두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칼을 나에게 휘둘렀을 때 그걸 방어할 수 있는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패권을 쥐고 싶어하는 국가로써 그 영향력을 쉽게 행사하지 못하는게 싫은 것이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배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생존방식이 있어야 한다. 함부로 우리를 쉽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메시지를 늘 주어야 한다.


2차세계 대전, 독일이 영국을 침공하기 전에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상당한 시간을 주었다. 어차피 침공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고 영국은 힘을 읽었으니 화평을 맺고 독일은 소련으로 화살을 돌리려 했었다.


이때, 기라성처럼 나타난 리더가 바로 윈스턴 처칠 수상이다. 그는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지로 영국 의회를 설득하고 국민들을 독려했다.


독일이 영국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수천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출격시키자 영국 조종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고 레이다기술 덕분에 독일군의 침공을 사전에 대비할 수 있어서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영국공군전투기 조종사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본토 공습을 막아낼 수 있었다.


(훗날 처칠은 “인류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당시 헌신했던 조종사들을 칭찬했다)


THAAD(사드)가 그렇다. 이 무기체계로 북한의 핵미사일을 막아낸다면 인류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무기체계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 무기체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슬플 뿐이다.


국가의 리더십이 부재하고 정치인들이 썩었으며 재벌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것과 국가 안보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들이 밉다고 해서 국가안보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밉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지켜져야 하며 유지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있는 것이다.




출처: 정창욱님 페이스북


(창 49) 복 된 인생

 

 

만일 이 세상 삶이 전부라면, 인생의 부귀영화가 복이라면, 일평생을 나그네로 고생하며 살아온 야곱의 삶은 결코 복 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길은 130세 될 때까지 험난한 고난길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그토록 붙잡았지만,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복 주신다 약속하셨지만, 130세가 되도록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생전에 이루어지고 누린 것은 없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을 섬기며 고생하여 얻은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어버리고 라헬이 낳은 요셉마져 악한 짐승에게 먹혀서 죽고 눈물로 보내는 세월 끝에 극심한 기근까지 닥쳐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아들들을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보냈더니 애굽 총리가 아들들을 염탐 간첩으로 몰아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라헬이 낳다가 죽은 베냐민까지 내어놓으라 하니 어쩌면 야곱은 무슨 운명이 이다지도 가혹한가고 한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놓고 나서 야곱은 또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밤을 지새웠겠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야곱의 인생은 복된 인생도 형통한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복된 사람이었고 야곱의 인생길은 복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고 야곱의 그 험한 인생길, 나그네길을 통하여 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일평생을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고 일평생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쓰임 받았으니 이 보다 복된 사람, 이 보다 복된 삶이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가장 복 된 자요 자신의 삶이 가장 복 된 인생이라는 이 사실을 130세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고 애굽이라는 생각지도 못 했던 곳에서 자손들의 번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147세가 된 이제 복 된 야곱은 복 된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복 된 약속 안에서 잠들게 될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라면 죽음도 복 된 죽음일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야곱은 이제 빈손으로 죽지만 가장 큰 복을 안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 복 된 믿음을 품고 잠들 것입니다. 야곱은 자녀들에게 분부합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나의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야곱은 이제 거기 에브론의 밭 굴에 부여조와 함께 누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릴 그 날까지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죽는 것이 복 된 죽음이요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캄캄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을 가지고 담대하게 죽음 너머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품에 뛰어들어 안기는 것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후반은 그러한 믿음의 선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복된 것은 그들이 고난당하고 죽임 당할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말씀)를 붙잡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캄캄한 가운데서도 버리지 않고 믿음만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복 된 삶의 마침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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