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증언

 

     바울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1세기 유대인 이었기 때문에 동성애 행위에 대한 그 당시 유대인 사회의 만장일치적 비난에 의해 비슷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성적인 문제에 관해 사도 바울은 일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어,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라”고 명한다 (살전 4:3-5). 바울은 한 남자와 그 계모와의 성적관계를 묵인하고 (고전 5:1-11) 매춘 여성들과 성행위에 빠진 회원들을 용인한 (고린도 전서 6:12-20) 고린도 교회를 강하게 책망한다. 성적인 문제에 관한 사도의 입장은 무척 보수적이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 중에는 성적 부도덕함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쓰고 있다 (엡 5:3). 바울의 유대인으로서의 배경과 성행위에 관한 그의 진술에 비추어 볼 때, 사도가 동성 간의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대략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동성애 행위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세 본문 - 로마서 1:24-27; 고린도전서 6:9; 디모데전서 1:10 - 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분명한 입장이다.

     고린도전서 6:9절과 디모데전서 1:10절을 먼저 살펴보자. 이 두 본문은 말라코이 (malakoi) 와 아르세노코이타이 (arsenokoitai) 라는 단 두 개의 헬라어 단어로 동성애 행위를 다룬다. 다음은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문맥이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 (men who have sex with men; malakoi and arsenokoitai) 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9-10)

(8)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 (those practicing homosexuality; arsenokoitai) 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디모데전서 1:8-11)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이 두 가지 헬라어 단어 각각을 정확히 번역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수정주의자들 (Revisionists) 은 이 단어들이 학대적인 형태의 동성애 행위, 즉 성인 남성과 소년 간의 성행위 (pederasty) 와 매춘에 한정해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이런 특정한 종류의 동성 간 성행위의 착취적 성격을 거부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6:9와 디모데전서 1:10은 우리 시대의 특징인 합의된, 일부일처제적인 동성애 관계를 비난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이 해석은 최소한 세 가지 중요한 문제들에 시달린다.

     첫째, 바울이 소년대상성행위 (pederasty) 와 같은 착취적인 동성애 관계만을 보여 주었다면, 그는 정확히 똑같은 성행위를 언급하는 몇 개의 헬라어 단어들 - 바울 동시대의 저서들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사용되던 - 중 하나를 사용하여 쉽게 이것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pederast [소년과의 남색] 를 파생시킨 헬라어 단어 paiderast?s).

     둘째, 고린도전서 6:9절과 디모데전서 1:10절에서 바울이 독특한 단어 arsenokoitai 를 사용함에는 레위기 18:22절, 20:13절과 관련된 구약적 암시가 있다. 이 단어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어이다: ars?n 은 "남성"을 의미하고, koit? 는 문자 그대로는 "침대"를 의미하지만 침상에서 일어나는 성행위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조차도 arsenokoitai 라는 복합어의 두 부분이 레위기 18:22절과 20:13절의 헬라어 번역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레위기 18:22절: kai meta arsenos ou koim?th?s? koit?n gynaikeian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레위기 20:13절: kai hos an koim?th? meta arsenos koit?n gynaikos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동성애 행위를 다루는 두 가지 핵심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가 레위기 18:22절과 20:13절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왜 중요할까? 이 구약의 본문은 소년대상성행위 (pederasty) 나 매춘과 같은 착취적인 성행위가 아니라 모든 형태의 동성 간의 성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가 아마 두 남자 사이의 어떠한 종류의 성행위도 금지된 모세의 율법을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가능성은 디모데전서 1:8-9절에서 구약 율법에 대한 언급인 "율법"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됨에 의해 확증 된 것 같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바울의 arsenokoitai 라는 단어의 선택은 그가 착취적 동성애 행위 뿐만 아니라 남성이 남성과 더불어 동침하는 것에 대한 구약의 포괄적인 금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셋째로, 고린도전서 6:9절에서 두 단어, 말라코이 (malakoi) 와 아르세노코이타이 (arsenokoitai) 가 짝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부드러운" 또는 "여성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첫 번째 용어는 성관계에서 여성의 역할을 하면서 다른 남성이 자신에게 삽입하도록 허락하는 남성을 일컫고, 두 번째 용어는 다른 남성에게 삽입하는 남성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해 문법학자들 사이에 광범위한 의견일치가 있다. 이 의견의 일치는 NIV 2011 과 ESV 번역성경에 반영되어 있고, 둘 다 이 구절에는 정확히 동일한 텍스트 노트가 있다: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남성을 의미하는 이 단어들은 동성애 행위에 수동적 혹은 능동적 참여자들을 나타내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바울은 이 두 단어를 짝 지음으로써 좁게 소년대상성행위 (pederasty) 나 성매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동성애 관계이든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인 파트너 모두를 포괄적으로 일컫고 있다.

     로마서 1:24-27절로부터의 마지막 본문은 가장 중요한데, 이는 그 길이, 게이 (gay) 및 레즈비언 (lesbian) 행위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 그리고 그 논법 (argumentation) 때문이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큰 문맥 (롬 1:18-32) 은 이 구절들에서의 바울의 주된 목표가 동성애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동성애 행위가 - 우상숭배에 덧붙여 (1:21-23, 25) ? 인간의 죄의 정도에 대한 또 다른 예가 되는 지와 그러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왜 정당화되는지를 논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도의 말씀은 날카롭고 분명하다: 여성이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과 남성이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죄된 행위이다.

 

 


[1]<!--[endif]-->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15년 가을 호에 “Same-Sex Activity: What Does the New Testament Say?” 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Forum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2/5799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복 신앙 그리고 기복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

 

LA기윤실, 건강교회 교실 ‘건전한 설교’ 세미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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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기윤실 주최 건강교회 교실 세미나에서 조주현 목사가 강의하고 있다.

 

LA기윤실(대표 박문규)은 6회에 걸쳐 건강교회교실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인 가운데 그 첫 번째로 ‘건전한 설교’란 주제의 세미나가 지난 7월 29일 캘리포니아 인터내셔널 유니버시티(CIU)에서 개최되었다. 오는 8월 5일에는 ‘교회 정치’ ‘교회 정책 결정 구조와 운영’이라는 제목으로 박문규 기윤실 대표가 강의할 예정이다. 다음은 이날 조주현 목사(LA 기윤실 간사)의 강연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기복(祈福)이란 무엇인가? 

 

과연 성경에서는 복을 구하는 것을 잘못이라 하는가? 기복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신에게 복을 비는 종교적 행위이다. 신에게 복을 구하는 행위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신에게 복을 비는 행위를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위라고 보고 있다. 또한 복을 비는 행위를 위한 여러 형태의 예배(굿)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께 복을 비는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혹은 잘못된 것인지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기독교의 가장 큰 권위인 성경에서 우리는 그 정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의 많은 구절 중에 기복 행위에 정당한 근거를 주는 구절이 있다고 주장하는 가장 핵심적인 구절을 살펴보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과연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성경적 의미일까? 그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에는 “좋은 것(마7:11)”을 주신다는 것으로 답을 주시고 있다. 악한 자라도 자녀에게 악한 자가 생각할 때 “좋은 것”으로 주는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자녀의 구함에 진정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 11장 13절에는 그 “좋은 것”을 구체적으로 “성령”으로 가르치신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기복의 행위를 금지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성경의 뜻은 기복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성경에서 알 필요가 있다. 이때 우리는 건강한 기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기복신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복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 성경 밖의 복은 무엇일까? 건강한 기복신앙이라는 말이 좀 어색하다. 그 이유는 현대의 기복신앙이 병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기복 신앙을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늘 왜곡된 “복”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진정한 복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 창세기 15장 1절에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상급이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바로 복과 상급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복은 무엇인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원하며,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신앙이 아니다.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보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선택하게 된다. 즉 창조주보다 피조물이 더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이것이 타락이요 이것이 죄악이다.

 

즉 인간의 욕심은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인간의 욕심과 결함(혼인, 동거-성경에서는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하는 존재인 사탄과 함께 낳은 그 죄가 바로 병든 기복신앙이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신랑이신 예수님(창조주)과 동거하여 의의 나라를 이루어야 진정한 복임을 늘 망각한다. 그리고 마치 피조물을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그릇된 신앙이 현대의 기복신앙이다.

 

병든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복인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이 건강한 기복신앙이다. 성경이 원하는 복을 구하는 신앙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신앙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설교는 성경적 복을 설명하고, 가르치며, 선포하는 예배의 핵심이다. 

 

성경적 복과 관련이 없는 목사의 설교는 무속(shamanism)의 굿보다 위험하다. 설교는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설교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사기인 것이다. 설교에서 복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을 말해야 한다.

 

요즘 주보를 보면, 목차에서 설교라는 단어 대신 “말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말씀”이라는 말은 “성경”이라는 말과 동의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이었는데, 이제 주보의 목차에서 “성경봉독”과 “설교”를 “성경 구절”과 “말씀”으로 목사의 설교의 권위를 마치 하나님의 말씀의 위치로 격상하는 시대에 있다. 그렇다면 진정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예배의 목차에 대한 단어 선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설교에서 “복”이 마치 사업의 성공, 건강, 명예, 재물, 자녀의 대학합격, 등으로 설명되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그 “욕심의 죄악”이 “복”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욕심과 죄를 도와주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

 

현재의 기복주의 신앙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거짓 선지자의 거짓 기복신앙에 성전이 무너졌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복”을 알았다. 건강한 기독교인의 “복”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꼭 물질적 성공의 길이 아니어도, 그 길이 고난과 핍박, 환란과 고통,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어도 주님께서 계신 그 길이 복인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기복주의는 늘 “복이신 하나님”을 “다른 복을 주시는 복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신앙은 병들게 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도 감사가 아닌 불평만을 하는 것이다. 분명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데, 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감사가 아닌 불평만을 기도하며, 피조물의 기쁨(쾌락)만을 추구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자. 첫 몇 마디만이 감사이다. 그 후에는 하나님을 피조물의 기쁨 즉 쾌락을 주는 도구로 사용하여 많은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한다. 그러나 건강한 성도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다. 아니 진정 건강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찾아오실 때, 이런 고백을 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베드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년에 고백을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사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건강하고 성경적인 기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구할 자격이 있는 존재인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위치의 존재인지,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 동행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님을 고백한다. 즉 복이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인 것이다.

 

병든 기복주의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피조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창조주를 무시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건강한 기복신앙을 소개하였다.

 

우리가 건강한 기복신앙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복이신 하나님을 구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으며 더 겸손함과 회개, 그리고 한없는 감사의 삶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건강한 신앙인이 될 것이다.

 

ⓒ 크리스천위클리

가져온 곳: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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