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이 되면 쌍십절(雙十節)이라고 거창하게 행사하는 나라도 있는데..
제게도 그 때의 기억이 있습니다.
28년 전..., 1983년... 10월 10일 아침 10시 10분쯤...
아직 30대 초반의 젊던 저는 그 때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 517번지, 서해 바닷가 영광원자력 1,2호기 건설현장에 있었더랬습니다.
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건설현장에....

저는 그 때 한국전력 영광원자력건설사무소에서 신출내기 계장이었죠.
1981년에 약 1년간 벡텔(Bechtel)사로 보내져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벡텔사에서 두 달 정도, 그리고 애리조나 팔로버디 원자력건설현장에서 원자력건설요원 교육을 받고는 1982년에 귀국하였고
1년 동안 서울 본사 원자력건설부에서 근무한 다음 1983년 가을,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으로 투입되어서
1988년 올림픽 하던 해까지 건설현장의 기계분야 건설업무의 핵심에서 엔지니어 10 여명 데리고
도면, 기술지침, 시방서, 보고서 끌어안고 죽어라 일하는 기계기술계장을 했지요.

1983년 9월 1일, 저는 서울 쌍문동에 있는 한전연수원에서 신임계장요원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그 날 아침 전해진 엄청난 뉴스는 그야말로 끔찍하고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KAL 007기 피격.. 269명의 목숨이 한꺼번에 국화꽃잎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할린 검은 바다에 떨어진 사건.

아무리 공산당 유물사관으로 인간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저들이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밤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미사일로 피격되던 그 순간, 그 미사일은 비행기의 어느 부분에 맞았을까?
미사일이 폭발한 순간 그 자리와 그 근방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행기는 동강이 났을까, 아니면 큰 구멍이 난 채 추락하였을까, 산산이 부서졌을까?
순식간에 모든 것이 폭음과 함께 부서지고 또 고공에서 비행기 안팎 기압차이로 인하여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휩쓸려나가 흩어지지 않았을까?
그들이 잠을 자다가, 혹은 몸을 뒤척이다가? 혹은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읽다가?
1만 피트 고공에서, 영하 40도의 차가운 공중에 피투성이로, 조각난 채 내뿌려져 꽃잎처럼 바다 위로 떨어졌을 영혼들...

그 뒤로도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 자신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바다를 향하여 떨어지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몸을 떨곤 했지요.
일본의 해안에는 사지와 머리가 잘려져 나간 여인의 몸뚱이가 파도에 밀려나오고, 비행기가 떨어졌음직한 해역에는 소련과 미국의 군함들이 출동하여 수색을 벌리고,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는 흩어지고 희생자들의 시신들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그 사건.
사할린 바다를 찾아간 유족들은 바다를 향하여 오열하고 떠나간 이들을 목 놓아 부르며 꽃다발을 던져 보지만
매정스럽게 뱃전을 때리는 찬바람은 그 통곡소리조차 쓸어가 버리고 던진 꽃다발은 바람에 밀려 되돌아와 뱃머리 물결에 부딪던 그 모습...
그 허무하고도 안타까운 장면들을 보던 그 기억.....


그런데, 269라는 희생자의 숫자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그 때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게임을 유치해놓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과 88 올림픽 게임이 성공하면 세계 속의 한국이 된다고 떠들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86년 아시안 게임 때 금메달 숫자가 하필이면 269 개였을까요?
왜 그 희생자수와 같은 숫자였냐 말입니다.
그 269 개의 금메달 중 150 개 이상을 죽의 장막을 헤치고 서울로 기어 나온 중공(그 때는 아직 중국이 아니라 중공이었죠...)이 쓸어가고,
우리는 일본을 제치고 90 개가 넘는 금메달을 땄었지요.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이기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였지요.
그리고 어느 날 저는 은행에서 번호표 269번을 받아 쥐고 멀거니 그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269라...”


다시 되돌아가서... 우리는 연수원에서 2주간인가 교육을 마치고 9월 중순,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건설현장인 계마리와 사택이 있는 상하리는 약 3 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는데, 발전소와 사택을 짓기 위한 정지작업과 굴토작업을 하면서
6.25 전쟁 때 서로 죽이고 죽임 당한 참혹한 살육의 희생자 유골들을 1천 구 넘게 수습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가족이 배정 받은 사택은 17평짜리 아파트 2층이었는데, 아파트들은 바로 수많은 유골들이 나온 그 골짜기에 서 있었습니다.
6.25 때 영광은 유난히 서로 죽이고 죽는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상잔의 땅이었다더군요.
그리고 기계기술과장으로 임명받아 아직은 모든 것이 서먹하고 업무도 익숙지 않을 때였는데...

10월 9일, 한글날이자 일요일... (저는 주님도 모를 때였으니까 주일이 아니라 일요일이었죠.)
저는 그 날 회사에 가지 않고 사택 방안에서 하루 종일 뒹굴었습니다.
당시 건설현장에는 휴일이 없었는데.... "하루 공기 백만 불, 공기단축 달성하여 경제발전 앞당기자!"
이런 슬로건 밑에 누가 감히 일요일이라고 회사에 안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날은 아침부터 종일 비가 추적거리고 내렸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놀게 된 거지요.
건설현장에 비가 오면 철골용접이고, 페인팅이고, 목공작업이고, 콘크리트 타설이고 뭐고 작업이 거의 안 되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 날, 미얀마에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갔던 17명의 각료가 아웅산 묘소에서 한꺼번에 폭사하는 참혹한 테러사건이 터졌고 그 뉴스는 우리를 또다시 놀라게 했지요.
피 묻은 흑백필름에 그들이 남긴 마지막 모습, TV는 폭음과 함께 흩날리는 나뭇조각과 먼지, 아우성,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묘소건물을 보여주고 있었지요.
왜 하필이면 그들은 교회들이 예배드릴 시각인 11시에 그들은 아웅산을 참배하였나 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리고 3명의 북한군 공작원들... 두 명은 사살되고 한 명이 생포되었다던가, 한 명이 사살되고 두 명이 생포되었다던가...


그리고 이튿날, 10월 10일 월요일 아침...
구름은 걷히고 푸른 하늘에는 다시 빛나는 태양이 솟아올랐지요.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을 내려다보고 선 금정산 봉우리 위에도 한 줄기 옅은 안개가 휘감겼다 사라지고,
건설현장은 드디어 2호기 원자로 격납건물의 꼭대기부분의 철판, 즉 Upper Dome Liner Plate를 설치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최대 600톤짜리를 들어올릴 수 있다는 초대형 링거크레인은 대지를 딛고 높이 100미터가 넘는 Boom을 쳐들었고,
로프를 내려 지름 36M, 무게 178톤이나 되는 거대한 삿갓모양의 철판, 2호기 격납건물 상부돔 철판을 고리로 감아 걸었고, 그리고 고사가 치러졌지요.
웃는 모양의 삶은 돼지 대가리를 놓고 현대건설소장, 작업반장들, 그리고 몇몇 간부들이 배춧잎 만원짜리 지폐를 돼지의 입에 물려놓고 나서 두 번 씩 절하고...,
그렇게 고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작업반 노무자들이 달려들어 만 원짜리 지폐를 머금은 돼지대가리를 나꿔채어 도망가고,
또 한 무더기의 노무자들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뒤쫓아 가고...

그런 가운데 600톤 링거크레인은 우렁찬 엔진음 소리를 내며 상부돔 철판을 서서히 격납건물 위로 까마득히 들어 올렸지요.
몇 개월 동안 애써 조립한 돔 철판이 격납건물 꼭대기 위를 덮으면 격납건물도 제 모양을 갖추고,
그 위에다 콘크리트를 치면 격납건물은 공사가 끝나게 되고,
고리원자력에서부터 시작하여 숱한 중량물을 들어주었던 믿음직한 600톤 링거크레인도 조용히 은퇴를 할 참이었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이제 다 올라갔다 싶던 돔 철판이 기우뚱거리더니 크레인의 Boom이 조금씩 슬로비디오처럼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저럴 수가, 저럴 수가....!
저는 그 때 크레인 바로 곁에 서 있었는데 크레인의 Boom이 천천히 기울어지는 걸 보면서도
잠시동안은 거대한 격납건물 콘크리트 구조물과 크레인을 위로 쳐다보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까마득히 올라갔던 크레인 붐이 진짜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까지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차마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순간, Boom은 뚝! 뚜두둑 소리를 내면서 중간쯤에서 허리가 꺾였고,
돔 철판은 격납건물 위에 떨어져서 천둥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어서 거대한 Boom은 터빈건물을 덮치며 굉음과 함께 무수한 쇠막대기 철봉들을 수수깡처럼 산산이 흩뿌리면서 무너졌고,
아름드리 철골구조물들이 그 충격에 힘없이 휘어져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넋이 빠졌고,
여태 지어놓은 발전소가 모두 무너지는 게 아닌가, 여태까지 애써 해놓은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끝나는 게 아닌가,
무섭고 참담한 심정에 몸조차 가누지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얼마 뒤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상부 돔 철판은 격납건물 위에 비스듬히 걸려 멈춰 있었고,
크레인은 와이어로프를 매단 채 터빈건물철골 위로 처참하게 잔해를 눕히고 있었습니다.
아우성과 고함 속에 부상자들을 앰뷸런스에 실어 보내고 이리저리 뛰던 그 순간. 온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되던
아, 잊을 수 없는 그 시간! 이 사고는 한전, 아니 세계의 원자력건설사상 아마도 최대의 사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도 상부돔 안쪽에 붙어있던 배관행거 두 개가 하부돔 철판에 걸려서 178톤의 중량물을 멈추게 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철판이 계속 미끄러져서 떨어졌다면 아마도 그야말로 건설현장 절반은 부서지고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178톤짜리 그 거대한 두꺼운 돔 철판이 격납건물 위에서 마치 솥뚜껑처럼 미끄러져 내릴 때 철판은 종잇장처럼 찢겨지고,
돔철판 안쪽에 설치해 놓은 살수(Emergency Spray)용 배관은 마찰열로 뻘겋게 달아올라서 휘어지고,
떨어져 나온 쇳조각이 튕겨 나가던 그 속에서 사람이 그 속에 깔린다면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날 터였는데, 그 철판이 얼마간을 미끄러져 내리다가 걸려서 멈춘 것입니다.
그리고 건너편 터빈건물에서 일하던 인부 두 사람이 날아온 쇠토막에 맞아 사망하고 십 여 명이 다치는데 그쳤고....

긴급사고대책반이 구성되고, 공정복구계획이 검토되고, 과기처, 원자력안전센터, 원자력 자문위원 조사단이 현장을 조사하고, 철판, 배관 자재가 긴급발주되고,
밤을 새운 대책회의가 이어지던 몇 날 몇 주일이 우리 건설요원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답니다.

사고의 원인은 바로 전 날, 아웅산 사건의 날 그렇게 추적거리고 내린 비였습니다.
책임문제로 토목기술자들은 아니라고 우겼지만 그 빗물이 크레인이 선 자리, 팠다가 되메운 그 자리의 지반을 적셨기 때문에 크레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꺼졌던 것입니다.

그 사고를 수습하는데 우리는 8개월이나 걸렸습니다.
수백 장의 도면과 작업절차서, 텔렉스, 전화, 공급독려, 엄동설한 속에서도 계속된 철판재작업...., 저는 기계기술계장이라 그 복구작업 기술업무의 중심에 있었고...

그리하여, 8개월 뒤인 1984년 6월 8일, 다시 만들어진 상부돔 철판이, 부품을 들여와 재조립한 600톤 크레인에 들려져 8호기 격납건물 위 제자리에 올려지던 날은
사람들이 차마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혹은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지요.

5년 동안 원자력 건설현장에서 겪은 사건, 사고, 에피소드도 많지만 그 크레인 사고처럼 엄청난 사고는 없었습니다.


10월 10일, 아침 10시 10분 무렵...
(십 자가 네 개....., 글 제목 보시고 무슨 소린가 하셨죠? 띄어쓰기를 유심히 보셨다면 왜 십 자와 자 자 사이가 띄어져 있나 하셨겠고...)

저는 그 날짜와 시각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0월 10일이 되면 거의 30년 전 사건이지만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납니다.
KAL기 피격, 아웅산 폭파, 그리고 크레인 사고...

저는 그 때 아직 주님도 모른 채, 피할 산성이요 요새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멀리 있었었지요.
그 위험한 곳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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