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모님, 목사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오랜만에 한국 반찬 가게를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이웃교회 사모님을 만나게 된 필자는 그분의 남편 목사님께서 간암 말기란 소문을 얼마 전에 들었던 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어 보았던 것이 화근이다. “우리 목사님 다 나았어요. 그럼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염려 할 것 있나요?”무슨 그런 믿음 없는 소리를 하느냐? 라는 듯, 질책하는 눈빛으로 짧게 바라보시더니 휭하니 돌아서서 어느새 저만치 가버리신다.

‘아차,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것인가? 남편 목사님께서 병든 것, 그리고 그 병이 낫지 않는 것과 하나님 살아계신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만약, 저러시다가 남편 목사님의 병이 영영히 낫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 되는 걸까?’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그후로 그분을 같은 가게에서 두어 번 더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차마 그분께 남편 목사님의 건강을 물어볼 수가 없어서 진열장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기듯 피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달 후, 안타깝게도 그 목사님은 오 십대 중반의 한참 일할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소(서재생 목사님의 말씀) 하셨다.

어디 그 사모님 뿐이랴. “믿습니다! 믿습니다!” 휘황찬란한 조명등이 현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꽃장식으로 화려한 (저런 돈 아껴서 선교사들이나 밀어주면 좀 좋을까, 믿음이 없는(?) 나는 궁시렁거리며 둘러보느라 은혜도 안 된다.) 무대처럼 꾸민 강대상 위에서 쇳소리가 섞인 듯한 음성으로 강사 목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질러대는 괴성, 거기에 맞추어 “믿습니다! 믿습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성도들, 은사 집회란 곳이나 혹은 무슨무슨 부흥집회란 곳을 한 번 참석해 보면 믿음(faith, belief)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자못 희한하기 그지없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주문(?)외우듯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자기 암시 내지 자기 신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믿음(faith)의 정의부터 한 번 생각해 보자.

위키백과 사전에서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믿음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철학,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념이라 하며, 종교에서는 신앙, 신심, 신앙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믿음과 신념의 차이를 명확히 분류해 두지 않았다.

성경은 믿음(faith)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절 말씀)” 즉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자기가 소원(바라는) 하는 것들이 어느 시간에 실제적인 형태(실상)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리고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말씀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자기 신념과 별반 다를 것 없어보인다. 그러나 믿음과 자기 신념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여러 부분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믿음(faith, belief)은 자기신념이 결코 아니다.

믿음(faith)의 대상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명철과 지식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세와 부를 믿는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을 믿고 의지하다가 배신을 당해 가슴 아파한다. 우리 아멘넷 토론방에서 한참 치열하게 논의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담임 목사의 말을 믿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더란 것이고,이런 것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너무 상처가 되어서 자칫 교회를 등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한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언어)이란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말씀 하신 것일까?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인생을 살아갈 수록 그말이 더욱 절감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권력과 명예를 믿고, 돈을 믿고, 자기의 인기를 믿었지만 그 믿음이 자기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이끌어 넣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인생인 것을…, 안타깝다못해 가슴이 저민다.

우리가 진정 믿어야할 대상은 누구일까?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2:22).”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5) 우리가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했을 때,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어야 한다. ( 히 13:8절 참조)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믿음 (faith)의 근간(根幹)

믿음의 근간(根幹)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감정의 변화나 오래 교회에 다닌 역사나 또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도중 유라굴로라고 하는 태풍을 만나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고 모두 크게 두려워서 떨고있을 때,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 25절)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른 믿음의 근간(根幹)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아니요, 성경지식이 많은 신학자도 아니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율법주의자도 아니란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는다, 하는 것이고, 따라서 행동에 옮기기 전, 내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로고스(Logos) 혹은 레마(Rhema))을 먼저 받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이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창 12:1절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인간으로서는 최초, 최말로 물 위를 걸은 위대한 사람, 베드로 역시 물 속에 혼자서 마음대로 뛰어든 것이 아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주께 먼저 간구했고,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가되." ( 마 14: 28-29절 말씀)  모든 믿음의 근간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과 선택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란 것을 인지하고 그 말씀에 동의해야 한다. 믿음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10:17) 

결론적으로 믿음이란 단어는 추상명사임이 틀림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그분이 허락하시는 때에, 내 앞에 실상(현상)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자기 신념과 믿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하여 내 몸에 병이 들지 말라는 법 없다. 그리고 내가 병들었을 때 그 병에서 놓임을 받게 해주시는 은혜를 입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병에서 놓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불러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런고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치유 은사 사역자도 아니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소리질러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들뜨게 하는 유명 부흥강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Logos, Rhema) 약속한 바 없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병을 낫게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강렬한 입술의 선포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 암시적이며 자기 신념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일 뿐 참 믿음이 아니다.

믿음(faith, belief)이란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주권과 섭리하심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내가 살던지 죽던지 그분께 영광 돌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evidence)인 것이다! 고로, 신념은 인간 스스로의 정의이며, 믿음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이고 소유이며 은혜라 정의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 6절 말씀).”  

글/별똥별, 최송연의 목양연가 '영성 훈련'중에서
 

차 핵실험으로 핵 공포 현실화
미국은 북 도발에 전쟁 준비 나서
중국·러시아·일본도 대응 채비
태풍의 눈 한국은 오히려 차분
북은 사력 다해 수소탄 만드는데
빈손 한국 정부는 갈팡질팡
내년 원자력 연구예산 대폭 삭감

핵무기 원천 기술 없어질 위기

━ 누구도 원치 않는 전쟁

북한은 핵보유국이 됐다. 이제 핵전쟁 위협을 안고 살아야 한다. 딱하게 됐다. 후손들에게 정말 면목이 없다. 정확한 상황 판단이 필요하다. 핵원자로 전문가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군사전략가 이상희 전 국방부 장관과 심층 인터뷰를 했다. 그림은 주 교수가 제공했다. 두 분의 견해를 토대로 진단과 처방을 모색했다.

 

계산되지 않는 위험

한반도에 핵전쟁이 일어날까? 한반도 지축을 뒤흔든 북한 풍계리 6차 핵실험은 강대국의 무력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2017년 9월 3일로 지난 시대의 세력 균형은 무용지물이 됐다. 가공할 공포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공포심이 선제타격으로 발현되면 곧 전쟁이다. 100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은 ‘누구도 원치 않은 전쟁’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두려워서 공격했다. 경쾌한 걸음으로 참전했던 유럽인 1000만 명이 죽었다(김정섭, 『낙엽이 지기 전에』).

 

한반도 전쟁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그런데 강대국들은 계산되지 않는 위험 앞에서 극단적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상황과 맞닥뜨렸다. 김정은을 통제할 사람은 본인도 잘 모르는 자신뿐이다. 4대 강국 지도자들은 지난 세기 그 어느 때보다 독선적 성격의 소유자다.

히로시마 원폭 10배 이상의 수소폭탄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국 정부의 대응은 느리고 부정확했다. 북한 핵실험 위력은 5차보다 5~6배 이상 강해졌고, 지진관측소에 측정된 지진파가 규모 5.7 정도라고 했다. 일본은 북한 핵실험 3일 뒤 수정치를 발표했다. 위력은 5차 실험의 13배, 지진 강도는 규모 6.1로 몇십 배 커졌다는 것이다. 원폭이 아니라 수소폭탄이고 TNT 폭약 기준 160kt, 히로시마 원폭의 10배 위력을 가졌다고 최종 확인했다. 중국 지진관측소에서는 규모 6.3 지진파가 잡혔다. 무엇이 옳은가? 북한이 터트린 저 가공할 무기의 실체를 알아야 정확히 대응할 것 아닌가.

포괄적핵실험금지기구(CTBTO)는 지진파 규모를 6.1로 최종 평가했다. 미국원자력학회 펠로인 주한규 서울대 교수가 지진파 규모 5.7~6.3을 생성해 낸 핵무기의 위력을 추정했다. 지진파 규모 5.7은 TNT 폭약으로 50kt, 6.3은 200kt에 해당한다(그림 1). 한국의 지진관측소는 풍계리 핵실험 장소로부터 15도 각도 내부에 위치해 있기에 전방위적 측정이 어렵다. 지진관측소가 만주 전역에 분산된 중국이 측정한 수치, 6.3이 더 실체에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그림 2). 원자폭탄(atomic bomb)의 한계치가 20kt이라고 보면 지진파 규모 6.3을 일으킨 그 핵실험은 200kt 위력의 수소폭탄(hydrogen bomb)이라는 게 주 교수의 결론이다.

북한은 이제 수소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명실공히 핵보유국이 됐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99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이 강온전략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북한은 꾸준히 이걸 노렸고 급기야 성공했다. 그 수소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지면 어떻게 될까. 피해 범위는 그림과 같다. 반경 2㎞ 내에서는 거의 사망(초록색), 반경 6㎞ 내에선 3도 화상에 신경세포 괴사(노란색)·치명상 60만 명·총 사상자 250만 명에 달한다.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시나리오다. 공포를 부추길 필요는 없지만 정확히 알아야 대책이 나온다.

전술핵을 다시?
김정은이 마구잡이로 쏴 올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과 거기에 탑재될 핵탄두가 일으킨 미국의 공포심리는 허리케인급이다. 9·11 사태의 충격은 에피소드다. 미국 본토가 핵미사일 공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핵탄두로 뉴욕을 공격하는 평양발 포스터도 나왔다. 미국 군사기지가 밀집한 괌에 시험 발사한다고 했으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격분할 만하다. 미국은 모든 가용한 군사력 자산을 동원하는 실질적 전쟁 준비 단계로 돌입했다. 중국·러시아·일본도 군사력의 일자진(一字陣)을 펴고 있다. 한반도가 태풍의 눈이다.

 

그럼에도 몽롱한 나라는 정작 한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절박한 심정이지만 상대가 북한인지 미국인지 헷갈렸다. 전쟁 발발 여부를 좌우할 한국의 목소리는 사실 모기 소리만 한 게 현실이다. 이상희 전 장관은 북한의 괌 공격 위협을 떠올렸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당사자로서 괌 공격은 한국을 공격하는 것과 동일한 도발행위로 간주한다’고 결연히 말했어야 옳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합참의장과 전략본부장을 지낸 군사전문가다. ‘전쟁 불가론’과 ‘한·미 동맹 책임론’ 중 어느 것이 국익에 부합하는가? 어느 쪽이 상황 통제에 효력이 있는가?

 

이 전 장관은 북한의 6차 핵실험은 92년 합의한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을 최종 폐기 처분한 도발이라고 결론지었다. 공동선언은 ‘①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사용을 하지 아니하며 ②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사용한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미군의 전술핵이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그럼 다시 불러와야 하는가? 트럼프 대통령이 전술핵 재배치를 들고 나온 맥락이다. 보수 야당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맞받았다. ‘핵에는 핵으로!’ 전술핵 재배치는 강대국의 반발과 세계적 비난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 국민은 재무장론과 대화론 사이에서 헷갈린다. 그럼 손 놓고 있어야 할까? 탈핵·탈원전이 우리의 길인가?

 

탈원전의 충격

북한의 핵 위협을 정말 심각하게 고려했다면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그리 성급하게 선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탈원전이 향후 60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다고는 했지만 원전 기술은 핵무기 원천 기술을 쌓는 영역이다. 주 교수는 한국의 원전 기술이 세계 최고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손을 놓으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전마피아? 다른 분야도 관련 업계 소수집단이 그러하다. 핵무장을 전제하지 않고도 핵 기술 연구는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학자와 연구자들은 오직 ‘공익’을 위해 일했다고 억울해했다. 그런데 왜 원자핵공학자들을 이익집단 내지 안전위해집단으로 매도하는지 따져 물었다.

 

핵무기 개발에는 순도 높은 핵물질을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다. 사용후 핵연료의 고온 전기분해 과정인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은 핵물질 추출과 관련된 기술이다. 다만 순도 높은 핵물질 추출은 규제가 많아 현재는 고속중성자원자로에서 평화적 이용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내년 정부 재정에 파이로프로세싱과 고속중성자원자로 연구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미래 대비 원자력 연구도 하지 말라는 얘기인가? 주 교수는 허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관련 기관의 채용계획도 중단됐다. 전국 원자핵공학도가 갈 곳이 없어졌다. 유학 인력도 외국에 눌러앉는다. 북한은 사력을 다해 수소폭탄 제조에 성공했다. 수소폭탄 개발 충격에도 우리의 정부 방침은 탈원전이다. 사리에 맞는가? 새로운 변수 앞에 재논의가 필요하다.

 

레드라인 공방

냉정히 인정하자. 북한은 이미 핵무장국가다.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다종화가 가능해졌다. 이런 마당에 레드라인 월선(越線) 여부를 따지는 한국 정부의 공방전은 좀 한가롭게 보인다. 대통령은 ‘레드라인을 넘지 않게’ 대비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듯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는 “레드라인을 아직 넘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기준이 뭘까? 월선을 기다리는가? 적어도 냉정한 정부라면 레드라인과 상관없이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핵 앞에 궁하다. 딱하게 됐다. 공포로 가득한 국민을 대신해 물어보고 싶다. 군사적 압박? 무력 전개? 글쎄 핵을 쥐고 있는 김정은은 그런 것들을 다 비웃지 않을까. 한국 정부의 몫은 기상천외한 다른 발상에 있을지 모른다. 김정은이 대적하는 상대는 미국이다. 코리아패싱(Korea passing)은 이미 핵무장의 본질이고 한국 정부가 공언한 ‘운전대론’에는 운전할 차가 없다.

 

빈손 한국

청와대 관계자들과 여당 지도부는 대화론(對話論)의 유혹을 벗지 못한다. 대화론은 철 지난 유행가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대화가 이뤄졌다고 치자. 이상희 전 장관은 전략가답게 대화 테이블의 일그러진 상황을 예견했다. 꾸준히 북한을 설득해 대화 테이블로 유도한들 북한이 할 말은 명백하다는 것. ‘미국에 전해라, 우리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라’는 메시지. 미국과 일대일 핵군축회담이라면 몰라도, 핵도 없고 정권마다 논조가 바뀌고 레토릭을 남발하는 남한과는 대화 자체가 시간 낭비임을 북한은 알고 있다. 남한 정부의 관계자들은 정무적 판단에만 몰입한다는 사실도 이미 간파했다. 복잡한 사안은 덮고 위험한 것은 숨기고 정권에 덜 해로운 쪽으로 기우는 단기전술가·임기응변가들이다. 깊고 넓은 안목으로 핵무장에 대처할 냉철한 전략가·이론가들은 길게는 2~3년 일하다가 모조리 퇴장한다. 그 결과가 핵무장 북한 앞에 ‘빈손 한국’이다. 영화 ‘덩케르크’에서 한 영국 시민이 해변에 널브러진 20만 청년을 보며 탄식한다. ‘독일은 군사에, 영국은 민생에 몰입한 결과가 이거다’. 그렇다고 군사로 몰려가야 할까?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핵무기의 본질은 ‘전쟁 억제’다.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자기도 죽는다. 김정은도 핵무기의 두 얼굴 중 ‘죽음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틈새가 있다.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이상희 전 장관은 “우리에게도 핵무기가 있다”고 실낱같은 희망을 피력했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예를 들면 인민 봉기와 소외된 권력집단의 쿠데타, 불만세력의 김정은 암살 같은 것 말이다. 체제 붕괴를 가장 두려워한다면 한국은 북한의 아픈 점을 들춰내고 확대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비용도 적게 든다. 가성비가 최고다. 이상희 전 장관은 세 가지 전쟁을 열거했다. 대북 심리전, 정보전, 경제전.

핵무장이 심화될수록 북한 인민 심리전을 확대해 소규모 봉기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방법은 여럿이다. 정보전과 더불어 실행하면 기대 이상의 효력을 거둘 수 있다. 경제전은 유엔 안보리와 미국이 결의한 세컨더리 보이콧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이 앞장서는 적극성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당장의 실효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김정은을 좌불안석으로 만드는 핵무기다. 꾸준히 실행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국론 분열은 독약이다.

공포를 부추기는 담론은 자제해야 하지만 정확한 상황 판단은 필수적이다. ‘북한은 초근목피로 연명해도 핵은 놓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핵무장 북한’과 ‘빈손 한국’이란 극한적 대조가 몰고 올 열패감과 공포심을 이겨 낼 새로운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한국의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그래도 대화’와 ‘그렇다면 재무장’ 간 격돌의 수렁에 빠져들수록 북한은 핵 종교의 위력을 즐길 것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출처:http://v.media.daum.net/v/20170914010204702?rcmd=rn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아멘"

 

마지막 때 주님께서 구약 때 이미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인류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역사의 종말이란 것은 인본주의의 인간이 왕노릇하는 세속적이고 인간 위주의 역사와, 악한 마귀가 역사하는 죄악의 세상과 죄의 세력이 끝난다는 것이고, 주님께서 통치하는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신성모독적인 것이 끝나고 주님에 의한 신령정치가 시작이 됩니다.

 

눅21: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이런 일의 징조들은 곧 하늘에서 나타나는 징조들과, 땅의 징조들과, 성도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받는 징조들이 있고, 그리고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안일무사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있고 재난이 있는 징조들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평안한 것 같은데 재앙과 재난이 일어나고 한쪽에서는 은혜가 풍성하고 한쪽에서는 은혜가 없는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재난이 몇 십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재난이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지진으로만 봐도 전에는 몇 백번 그랬는데 지금은 몇 천번이 일어나고 강도수도 더 높으며, 재난도 더 강력하고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이런 것이 표적입니다.

 

이런 징조들은 약속하신 주님께서 오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고 하나님께서 왕됨을 원치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러 오실 날이 가까움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주님께서 너희 문 앞에 이르신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이런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오시고 계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의 진행을 보면서 주님께서 오시고 계시구나를 압니다. 또한 주님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을 깨워주시고 계십니다. 어떤이에게는 예언을, 환상을 자꾸 보여주셔서 깨워주십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하늘의 것은 볼 수 없어 영감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알 수 있지만 주님은 하늘에서 준비를 거의 다 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위에서 하실 일은 위에서 하시고 이 땅에서 하실 일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해서 오신다는 말씀도 있으시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오신다는 말씀도 하셨기에 어떤 말씀을 이루시고 오실지 모르지만 더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기름부음을 받게 하시면서 준비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우리가 사모하고 준비하고 나가는 것이 주님의 기쁘신 뜻인데 이것을 주님께서 하시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재난도 또한 표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난리가 자주 나는 지를 모릅니다. 이런 표적들이 전부 주님께서 점점 가까이 오시고 계신 표적입니다.

이런 일이 시작된 것을 보거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다고 하십니다. 완전히 구속해 주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깝고 곧 도착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웠고 너희가 이 땅을 떠날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께서도 이 장막을 떠나 주님께 갈 날이 얼마 안남은 줄 아셨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로 갈 날이 이르신 것을 아셨고, 베드로 사도는 아예 주님께서 이 장막을 떠날 것을 지시하셨기에 다시 주의 강림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뭔가 이전과 다른 은혜를 주시는 것을 보거,든 고개를 들라는 것입니다. 주위에서도 갑자기 회개하고 봉사하고 그러더니 주님께서 데려가시는 것을 봅니다.

준비하시더니 천국에 가는 경우도 있듯이 오늘 우리 안에 마음으로 역사하시고, 변화되게 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을 보면서, 이전과 다른 물붓듯이 부어주시는 것을 보면서, 이전과 다른 재난들을 보면서, 계시록의 13장에 나타나는 666을 보면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보면서, 복음의 현장에서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를 보면서,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안남은 것 같다고 많은 분들이 말을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현장을 강하게 체험하신 분이 마지막 추수를 하시고 계심을 느끼면서 두렵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역사나 변화의 역사나 성령님의 역사를 보면서 마지막 장마비임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씨를 뿌릴 때 비가 많이 오고, 마지막에 추수 때 비를 많이 주시는데 이런 마지막 늦은비를 주시고 계심을 느낍니다.

인간에게 무엇을 넣어 감시하고 이런 것이 기분 나쁜 일입니다. 문명사회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넣어서 점점 뜨겁게 하면 점점 익어 죽는다고 합니다. 갑자기 뜨거운 물에 넣으면 놀라 튀어 나오지만 서서히 물을 뜨겁게 하니까 모르다가 죽는 것처럼 문명이 그렇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과학문명에 의해 점점 과학화와 세속화시켜 결국 영혼을 죽이는데 이것이 표적중의 하나입니다.

성도들의 표적은 은혜입니다. 은혜로 변화되는 분명한 표적이 없으면 이런 지식을 알아도 안됩니다. 이런 것이 옳다, 아니다 논쟁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지옥의 군대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부터 악한 마귀가 꿈꾸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권세가 깨어지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서 주님께서 기도케 하시면서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은혜의 단계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은혜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지금 이 시대가 마지막 때가 맞는 것 같아도 어둠의 세력에 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소름끼치는 악의 영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과 영의 싸움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기도생활에 몰두해야 합니다. 수십년부터 기도하면서 이런 시대가 올 줄 알고 준비시킨 사람들은 그대로 계속해서 하면 되지만, 정말 이런 시대가 진짜구나! 하고 이제 정신을 차리신 분들은 생명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자칩이 현실로 나와버리니 성도들이 이제야 놀라 버립니다.

전쟁이나 테러나 재난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은 더 쎄진것 뿐이지만 이 칩은 나라에서 다 하도록 계획이 되어 있습니다. 우선 겁나니까 이것은 아니고 앞으로의 것이 맞다고 하는데 어떻든지 중요한 것은 진짜로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는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시대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옵니다. 사시면서 점점 피부에 와 닿게 옵니다. 온 세계를 하나로 통치하는 세계가 오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도 이런 단계를 통해 점점 오고 있고, 주님께서도 이런 일들을 통해서 오시고 계시고, 우리도 가고 있는데 지금도 깨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발에 불이 떨어지면 그때는 늦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해보려고 열심히 하고 주의 일에 몸바쳐 일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지금이라도 깨어서 기도하고 기도에 생명을 걸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성령안에서 변화 받고 주님 앞에 설 은혜의 단계에 들어올 수 있지 시간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고 앞으로 주의 일을 이렇게 해야 겠다고 이렇게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변화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내 마음대로 주님을 한두번 부른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흑암의 세력이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는 세계가 오고 있습니다. 성령님도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기름부음을 부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물결을 타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면서 회개부터 해야 하고, 기도해서 영적 수준이 충만한 은혜의 수준까지 와야 하고, 주님의 약속을 받아야 하니 제 판단으로는 주의 일을 열심히 순수하게 하시려는 분들께 이제부터 기도에 생명을 걸고 해야 소망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들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십몇년부터 준비했는데 요셉도 십사년을 준비했는데 그동안 기도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았고 또한 시간이 없으니 얼마나 달려야 하겠습니까!

이제 깨어난 분들은 판단을 잘했다 하고 기도가 내 생명이다! 하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할려고 하고 살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들이 구원도 이런 은혜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은혜가 간단한 것이 아니고 쉽게 환란을 피하고 인자 앞에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니 압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시켜주셔야 되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런 자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시는데 자기 마음대로 천국에 간다고 하듯이 지금 이런 시대적인 준비도 너무나 안되고 있습니다.

시대적인 표적이 개구리처럼 점점점 오고 있으니 이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은 둔해져서 잘 모릅니다. 몇십년부터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압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완전히 우상숭배하는 나라인데 주님께서 사십일 뒷면 멸망한다고 하신 한마디 말을 듣고 회개합니다. 성읍을 돌면서 말씀을 전한 것이기에 많은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니고 또한 미친 소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말이 왕의 귀에 들려 모든 사람들과 짐승까지 먹지도 말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고 하신 것도 아닌데 혹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사해 주실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무슨 환란은 환난이냐 재난은 무슨 재난이냐고 말을 안듣는데 니느웨 성읍은 선지자인줄도 모르면서 한마디 말을 듣고 회개하고 혹시 용서해 주실지 모른다고 도전해 봅니다. 주님께서 그 결단에 감동하셔서 심판을 오십년 가까이 연기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갑니다 해도 설마 그럴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있습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도 받아 보지 못하고 시대적인 징조도 예전부터 있었고 그랬기에 눈치채지 못하고 666도 상징이라고 하는데 이러면 자신만 손해입니다.

죄악이 너무나 쎕니다. 유라굴라 태풍같이 죄악이 심령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평안하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너무나 위험합니다.

거대한 태풍이 오려고 하면 바람부터 이상합니다. 그러면 뉴스를 듣고 빨리 대피를 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경험이 많아서 뉴스만 듣고도 대피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아직도 머뭇머뭇 주저주저 합니다. 롯의 가족처럼 그럽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강권해서 나가게 했습니다. 정말 이런 여러 가지 징조들이 합해서 주님께서 오시고 계시는데 지금은 거의 도착직전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동이 터 오듯이 우리도 곧 주님 만날 날이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인데 혹시 긍휼이라도 받게 하려고,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하면 놀래기라도 하면 소망이 있는데 생활속에 재난속에 강퍅해져서 놀래지도 않습니다.

정말 그러면 주님께서 깨어주실 방법이 더 이상 없으십니다. 나도 주님께서 직접해 주시면 깨어난다고 하면 안됩니다. 먼저 깨어주신 사람들을 통해 주님은 깨어나게 하십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악해졌는지 살아보면 압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피부로 느낄 정도로 압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머리를 들라고 하시는데 이런 일이 진작부터 시작이 되었고 상당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우리 구속이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생각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깝고 어둠의 세력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은행에서 현금을 받지 않습니다. 점점 은행의 시스템이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세금도 현금거래가 안됩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체제가 이렇게 좁혀 오고 있습니다. 진작 시작이 되었기에 진작 머리를 들었어야 하는데, 여러분도 누구를 만나보아 대화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이런 시대가 온다고 하니 이제부터 무릎을 꿇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영광중에 주님을 만나지는 못해도 환난에 긍휼이라도 받아야 하니 정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대를 안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해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준비입니다. 시대가 어느 정도까지 왔을까! 하고 알았으면 이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죽이려고 오는데 정말일까! 하지 않고 주님께 약속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하지는 않고 이것이 맞니, 아니니, 시간이 있니, 없니 이런 논쟁은 유익이 안됩니다. 기도해서 능력 받지 않으면 정보를 안다고 해도 능력이 없어 표를 받게 됩니다.

옛날 신사참배할 때 공포의 분위기로 인해 다 우상에게 경배하게 되듯이, 말레이시야에서도 알라는 오직 유일한 신이다고 스피커에 쟁쟁거리는데 영적 공기부터 다릅니다.

 

공기가 빛이 달라버리니 왠만한 성령충만치 않으면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포의 분위기가 사람을 질려버리게 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기도해야 삽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되고, 변화도 되고, 깨어있지 못함에 대한 회개도 하는 이런 열매가 되어야 하고 이것이 시작이고 계속 주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환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긍휼을 받기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영력만큼 기도할 수 있습니다.

 

30분 영력이 있으면 30분밖에 기도하지 못합니다. 한시간 영력이면 한시간 넘어가면 졸리고 안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도하지 않는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한단계 높아지려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야곱은 살기 위해 환도뼈가 위골되기 까지 기도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삼일금식하면서 혹시 긍휼을 베푸실지 모른다는 소망으로 회개기도 했습니다.

기도해서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말세에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의지로 안받고 도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만지지 말며! 이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메시지 핵심이 기도하게 해야 합니다.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모든 환난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어마어마한 가르침입니다. 기도하면 살고!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 고 이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첫 단추입니다. 기도하면 혹시 그리하지 아니할 줄 누가 알랴 하듯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주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영광에 들여보낼지 모르니 가능성이 있으니 기도하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니 최선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동안 기도를 안했으니 우리보다 두배 세배를 기도해야 하는데 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를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합니다.

진작부터 시작이 되었으니 이런 마음으로 중보기도해 주시고 혹시 이런 대화를 할 기회가 있으면 기도하라고 해야 합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환난이 와도 환난이 온 것을 알았다고 해도 기도해서 능력을 받고 야곱처럼 약속을 받은 사람만 살아납니다. 지금이라도 혹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를 들었으니 종합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회개하고, 기도해야 긍휼도 받고, 정말 잘하면 영광도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아멘

 

 

메시지: 복음교회 조호남 목사님

아래 자료는 WCC가 1990년 1월15일,

스위스 바알(Baar) 에서 선언한 바알 선언문이다.

(아래 이미지.)


그 내용인즉,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


WCC 사이트에서 공개적으로

버젓이 올려 놓은 WCC 의 선언인데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이 마귀의 공개적인 뱀소리를 보고도 듣고도

그저 WCC에 참여하는 것을

자신의 성향이 보수가 아니라

진보라서 그렇다는 목사님들도 만난 적이 있다.


한국에서 상당수의 교세 큰 교단들은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공식 선언하는

WCC에 자랑스럽게 가입하고 함께 한다.


특히 스스로를,

진리보다는 진보적이라는 틀에 가둔 자들,

혹은 연합을 예수님 자리에까지 놓고

'연합'이라는 우상을 추구하는 자들은

WCC에 장단점이 있다는 둥,

사람 앞에 옳아보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소리로

수많은 한국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WCC를 배도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조차

극단적 발언, 극우적 발언이라며 매도하며

본인들의 배도질을 합리화하고 있다.


저게 진정 보수-진보의 문제로 밖에 안보이는가?


저건 그냥 배도다!!!!!!!!!!!!!!!!!!!!!

다른 여지가 없다!!!!!!!!!!!!!!!!!!!

그냥 배도다!!!!!!!!!!!!!!!!!!


이런 대놓고 하는 배도조차도

세상이 만들어 놓은 '보수-진보', '좌-우' 진영 논리로밖에 못보는 교회들이여~!!!


세상에게 길을 제시하고 분별력을 제공해야 하는 교회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속에서 갇혀서

예수까지 버리는 쓰레기 중에 쓰레기가 되버렸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할 것인가?

사람들에게 버리워 밟힐 뿐이다.


우리 한국 교회들이 세상사람들조차 눈살찌푸리고

더럽게 여기는 이 지경이 왜 초래되었는지 알겠는가?


돌이키고 돌이키자!

이 배도를 조장하는 자들에게

예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따라

이 배도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아 회개하자!


완악하게 목을 곧게 하여

이 배도를 돌이키기 거부한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무서운 심판을 그대로 받을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좌-우, 진보-보수의 프레임에서 놀아나는

병신 짓은 그만 두자.


세상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종교놀이는 그만두자.

세상의 기준이 좌든 우든 그냥 예수님만, 진리만 추구하자.



출처: 박성업 선교사님 페이스북























 

출처: 이웃 블로그/엘샤다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들을 섬기지 말라.”


성당이나 교회에 가본 사람이라면 교인이나 신도로서 지켜야 할 10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하늘과 부처를 믿는다고 목사, 신부, 장로, 전도사, 스님 등등의 교직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공연히 “붉은 마귀”의 우상을 섬기며 그 마귀를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이 적지 않기에 욕을 해본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점집이나 찾아다니고 제사 같은 것이나 주관을 한다면야 미친 자라고 혼자 생각을 하면 될 일이겠는데 이 대한민국에서 이중 생활을 하는 교직자들은 붉은 공산마귀를 섬기면서 하는 짓마다 꼭 대중을 휘동해가지고 나라를 망하게 할 역적질들만 골라서 하기에 욕을 해본다.


그러고 보면 이런 자들은 공산마귀를 섬기면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동들을 더 크게 하기 위해 또 자기의 정체를 숨기려는 목적으로 목사나 신부, 스님의 가면을 뒤집어썼다는 결론이 나온다.


솔직히 말해, 북한 2천만 백성들만큼 “붉은 공산마귀”를 충성으로 섬긴 사람들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섬기던 수령이라는 “우상님”은 자기에게 충성하면 영생하고 배신하면 쓸모없는 고깃덩이가 된다고 설교를 끊임없이 해댄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그 공산 마귀를 대를 이어가며 가정도, 목숨도 다 바쳐서 지키고 믿고 따랐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영생하기는 고사하고 굶어죽고, 맞아죽고, 얼어죽고, 가족들은 뿔뿔이 갈라지고, 자식들은 되놈들에게 팔려가고, 그래서 나도 고향 떠나 타향살이 한 세월만 10년이 넘었다.


한국의 한심한 사람들아, 믿을 것을 믿고, 섬길 것을 섬겨야 할 것 아닌가?

공산 마귀들 때문에 탈북자들이 3만이 넘게 이 나라에 와 있는데도 그것을 모른척하고 일부 목사라는 자들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바친 돈을 긁어모아 가지고는 붉은 마귀를 찾아가서 절하며 바치고 돌아와서는 “북한에도 가정교회가 있더라.”고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을 감싸주는 헛소리나 하고...


신부라는 자들이 평신도를 휘동해가지고 나라의 군사기지 건설 반대 데모나 다니고.. 주일 예배와 미사에서는 교인들 앞에서는 공산마귀를 찬양하고 자기 나라 정부를 반대하도록 부추기며 나라를 마귀에게 바치려고 별의별 악착한 짓들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스님이란 자들도 변질되어 마귀를 섬기며 불당을 반국가 범죄자들의 은닉처로 제공하고 있다. 이제는 이렇게 목사, 신부, 스님의 가면을 쓰고 역적 짓을 하는 자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그들을 막아낼 방법도, 힘도, 교단도 대한민국에는 없다. 한국의 종교계가 중심을 잃고 통째로 흔들린다.


내가 대학 시절에 김일성이 대남담당 김중린 비서에게 내린 교시내용

“... 남조선 젊은이들을 맨날 아스팔트에만 내몰지 말고 똑똑한 애들을 선발하여 공부를 시키라. 그렇게 키워서 교육계는 물론 정계와 법조계, 언론계에 계속 박아 넣으라, 특히 종교계를 장악 하는게 매우 중요해. 교회에는 성경책 하나만 끼고 가면 누구도 의심을 안 해. 그렇게 해서 남조선의 수많은 교인들을 우리 쪽으로 포섭해야 돼. 통일은 가까이 보지 말고 멀리 내다보고 준비를 해야 돼...”를 전달 받았던 생각이 난다.



사실 그 당시에는 “저런 식으로 해서 언제 남조선을 통일한단 말인가?”하는 막연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수십 년 후에 내가 정작 한국에 정착하여 이 나라의 현실을 보니 김일성이 정말 몸서리 칠 정도로 현명한 사람이었음을 매 순간순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의 국민들과 정치가들만은 지금 자기들이 죽은 김일성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그 진실을 알려고도, 인정하려고조차 안 한다. 참 안타까울 정도로 어리석은 국민이고 한심한 정치가들이다.


그리고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인간들이 얼마나 못났으면 아무리 북한의 도움으로 공부를 했다 해도 어찌 일 푼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기 나라를 배반하는 역적 짓을 서슴없이 하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도 역적질을 하고도 살아남는 그 제도가 더 풀기 어려운 숙제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권 이후 자유민주주의라는 연막 속에서 정치, 군사, 사법,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서 북한을 추종하는 반역세력들을 매우 빠르게, 매우 많이도 길러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붉은 마귀를 섬기고도 두렵지도 않은가? 이런 자들 때문이 이 나라가 이제는 하늘의 벌을 면치 못할 것 같다. 역적질을 하겠으면 이제는 교직의 가면 즉 하늘의 가면을 벗으라.


“너희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10계명 중 제 3계명)


2017.09.06



출처: 김태산님 페이스북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2)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성경은 창조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로 시작하여, 재창조(구원)의 과정으로 이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 골자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창조와 관련하여서 많은 오해된 주장들이 있다. 그 좋은 예가 진화론의 주장으로 인한 타협적인 자세나, 천사의 창조와 관련한 귀신론의  경우이다. 그 내용과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창조와 진화

얼마 전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가 세간의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일이 있다. 그 영화에는 수백만 년 전에 살았다는 공룡들이 등장한다. 현대인들은 이런 식의 분위기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류의 시조가 유인원이었다든가, 지구는 수백만 년 전에 우주의 대폭발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든가,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고는 몇 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적이라는 말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진화론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쇠뇌를 받은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던 무의 상태에서 오직 말씀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를 하셨다고 한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창 1:11).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창 1:21).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강조되어 있다. 진화론이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신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진화론자들은 인류의 기원을 45억 년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그렇게 오래된 것으로 계산해 내기가 어렵다. 성경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일 만 년이나 일 만 오천 년을 넘게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성경을 진화론의 계산과 서로 조화되게 설명하기 위하여 몇 가지 해석들을 시도한다.

그 주장들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과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먼저 정리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성경을 과학적 근거에 맞추어서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과학이 성경에 맞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과학적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은 과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과학과 상반되지도 않는다. 성경은 과학과 잘 조화가 된다. 성경은 과학의 발전에 많은 도전을 제시한다. 그리고 과학의 나아갈 방향을 인도해 준다.

과학은 지금까지 많은 발전을 거듭해왔다. 앞으로는 그 발전 속도가 과거보다 더 빠를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과학적 성과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한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발전 속에서 과학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많이 밝혀냈다. 그리고 전에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많이 수정했다. 현재의 과학적 결과들도 마찬가지이다. 장래에는 현재 알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많이 밝혀내게 될 것이다. 현재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은 바로잡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과학 수준에 맞춘 가설에 따라서만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는 현재의 과학으로는 밝혀내지 못했던 사실들이 밝혀질 경우에, 또다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발전이나 시행착오에 따른 수정이 있을 수 없다. 성경은 불변하시고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이 지나도록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천지는 변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마 24:35).

둘째, 과학적 방법에 의한 연대측정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또 오차가 너무 크다. 그러므로 그 수치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무리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보자. 과학에서는 무생물의 경우, 우라늄(U236)이 납(P)으로 변감하는 반감기를 토대로 그 연대를 측정하는 경우가 많다. 생물체의 경우에는 주로 탄소 동위원소(C14)가 탄소(C)로 변하는 반감기를 토대로 연대를 측정한다. 또 지층의 경우에는 퇴적층이 쌓이는 기간을 토대로 연대를 측정한다. 이 측정방법들은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주에는 너무나 많은 이변들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 지진, 홍수, 화재 등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과학적 측정의 신뢰도를 근거부터 흔들어 놓는다. 록키산 중턱에서 발견되는 조개껍질 화석, 여러 지층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는 나무화석, 전남 해안 지방에서 발견된 공룡의 발자국 등은 모두 이변들이 낳은 결과이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진화론은 아직도 유인원과 사람의 중간자인 '빠진 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셋째, 최근에는 지구의 나이가 젊다는 많은 증거들이 확인되고 있다. 창조과학회의 과학자들이 제시한 증거들은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지구의 자기 능력의 붕괴속도, 대기 중의 헬륨량, 지구 회전속도의 느려짐, 우주진의 유입량, 태양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혜성의 수, 포인팅 로벗슨(Poynting-Robertson) 효과와 태양 주변의 많은 운석, 짧은 반감기를 가진 달의 동위원소 등등. 여기서 그 내용들을 일일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들은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에서 일 만 년 내외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음을 보여준다.

넷째, 하나님의 창조의 상태는 미완성이 아니고 완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산과 나무와 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보시면서 좋아하셨다. 또 완벽한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보시면서 심히 좋아하셨다(창 1:31). 갖 지음받은 아담의 경우, 그는 한국식 헤는 나이로 계산한다면 한 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지금의 한 살짜리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또 그 때의 에덴 동산과 각종 동·식물들도 한 살이었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모습은 티끌이 모여 쌓이기 시작하는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동산이었다.

과학적 계산에 의하면 수십 억 년이나 수백 만 년으로 측정될 수 있는 상태의 동산이었다. 동물과 식물들도 다 자라서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갖 지음받은 나무의 껍질이나 거북이의 등가죽을 탄소 측정방법으로 실험해 보면 수천 년이나 수만 년 전의 것으로 계산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지금도 실험실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살아 있는 달팽이의 껍질이 수천 년 전의 것으로 계산되고, 살아 있는 나무 껍질이 수만 년 전의 것으로 계산되는 일이 없지 않다. 하나님의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도 쉽게 얻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닭을 창조하시고, 그 닭이 알을 낳는 방법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인간의 진화론 가설에 조화되도록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한 예로 창조의 날의 길이에 관한 주장들을 살펴보자.

2. 창조와 날의 길이

창조를 사람이나 지구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진화론과 조화되게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간격설이나 시대설이라는 것이 있다.

1) 간격설(또는 重造說)

어떤 사람들은 지구의 나이가 오래 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근거를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서 찾는다. 1절과 2절 사이에는 무한히 긴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유는 이렇다. 1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2절에는 땅이 공허하고 혼돈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허하고 혼돈한 천지를 만드실 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땅에 공허와 혼돈이 생겨난 것은 천사의 타락 때문에 생겨난 결과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천사를 중심으로 했던 창조가 천사의 타락으로 혼돈에 이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포기하시고, 사람을 중심으로 천지를 다시 창조하셨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패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창조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추측은 있을 수 없다. 또 성경은 사람을 타락한 천사의 자리나 메꾸기 위해서 만들어진 대용품으로 보지 않는다. 지혜나 능력에서만 본다면, 사람이 천사보다 뛰떨어질런지도 모른다(시 8:5). 하지만 사람은 천사들이 흠모하는 존재이다. 그 신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천사는 하나님을 수종드는 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자녀이다(히 1:14).

2) 시대설 또는 반시대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6일 동안의 하루는 지금의 하루와 동일한 하루가 아니라 긴 시대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를 히브리어의 '날'이라는 말의 용법에서 찾는다. 히브리어의 '날'은 많은 경우에 긴 기간을 의미하는 말로 씌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시다는 것도 그 근거가 된다. 따라서 창조의 하루는 얼마든지 긴 시대를 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하루를 백만 년 정도의 기간으로 본다면 지구의 나이는 수백 만 년이 될 수 있다. 하루가 십 억 년 정도의 기간이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수십 억 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루가 긴 시대이었다면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빛과 열이 없어서 모든 것이 얼어죽는 긴 기간이었을 수 있다. 이는 지구에 몇 차례의 빙하기가 있었다는 가설과도 잘 어울린다.

또 6일 전체가 긴 시대는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첫 3일은 긴 시대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루는 해의 뜨고 지는 것으로 결정이 된다. 그런데 해, 달, 별은 4째날에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첫 3일은 긴 시대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안식일 계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제 4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를 하신 후, 이레되는 날에는 쉬셨다는 것을 근거로 주어졌다(출 20:11). 여기서 일곱째 날은 다른 여섯 날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만일 일곱째 날이 긴 기간이라면 다른 6일도 긴 기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은 긴 기간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동안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6일도 동일하게 하루로 보아야 한다. 6일이 동일한 하루이라면, 첫 3일을 예외로 보는 것도 옳지 못하다.

우리는 성경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과학도 성경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과학이 성경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진화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과학과의 조화를 위해 성경을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사실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과학이 발전하는 날, 미숙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했던 성급한 해석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천동설에만 집착하여 갈릴레오를 정죄했던 지난 날의 잘못을 또 다시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창조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하게 천지와 만물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원숭이를 비롯한 포유류, 양서류, 수중동물, 단세포 동물 등은 우리의 시조가 아니다. 천지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가 다스리고 길들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활용해야 할 도구들에 불과하다.

3. 천사의 창조

우리 주변에는 진화론으로 인한 인간성의 포기 이외에도, 마귀론에 메어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바르게 하기 위해, 천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부터 살펴보자.

1) 천사의 존재

천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피조물이다(시 148:5; 골 1:16). 그러나 사람과는 달리 육체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영적 존재이다. 그래서 천사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육체가 없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도 않는다. 결혼을 하거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도 없다(마 22:30). 죽지도 않는다(눅 20:36). 좁은 장소에서 집단적으로 거할 수도 있다(막 5:9). 이러한 존재인 천사는 능히 셀 수 없는 많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천사들은 생육하고 번성함이 없기에, 모든 천사들은 일시에 지음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창조하신 것은 수종드는 일꾼을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를 보호하는 것 등이다. 이런 일들은 각각 질서에 따라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룹이라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수호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래서 낙원의 입구를 지키고(창 3:24), 속죄소를 덮고 (출 25:18), 지상에 임하시는 주님을 모시는 천사들로 묘사된다(삼하 22:11). 스랍이라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을 한다(사 6:2~7).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일을 한다. 선지자 다니엘,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전하시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미가엘은 하나님의 군대를 지휘한다(단 10:13, 21).

2) 천사의 타락

천사는 영적 존재이기에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처럼 죄를 범할 수가 있었다. 어떤 천사들은 끝까지 자기의 지위를 지켰다. 그러나 어떤 천사들은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의지로 죄를 범했다.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교만 때문이었다(유 6). 그리하여 범죄한 어떤 천사들은 지옥에 던져졌다(벧후 2:4). 그러나 범죄한 천사들 중 어떤 천사들은 하나님의 허용하심 속에서 자유롭게 버리운 바 된 채, 악한 일들을 하고 지낸다(계 12:7~9). 하지만 그들은 모두 마지막 날에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천사도 사람의 경우처럼 자기의 자유의지로 죄를 범했다. 그러나 천사의 타락에는 사람의 경우와 다른 점들이 있다. 천사의 타락에는 대표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한 천사가 죄를 범함으로 모든 천사가 죄를 범하게 된 것이아니었다. 일부의 천사들만이 개별적으로 타락을 했다. 또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회복의 소망이 없이 계속해서 죄만을 반복하며 지낸다.

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허용하심 속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사람을 미혹하고 범죄를 조장한다. 재난을 일으키기도 한다. 때로는 사람에게 정신이상이나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사단이다. 사단이란 이름은 '대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악한 자, 옛 뱀, 용, 아폴루온, 참소자라고도 불리운다. 사단의 주변에는 타락한 악한 천사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어두움의 주관자, 공중의 권세잡은 자, 귀신, 마귀, 악령 등으로 불려진다.

귀신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어떤 존재인가? 성경에는 귀신이라는 말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존재를 입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귀신은 일부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원한 맺혀 죽은 사람의 혼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변해서 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서 선하게 지음을 받았던 천사들이다. 그러나 스스로 범죄하여 타락한 상태에 빠진 천사들이다. 마지막 날에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것이지만, 그 때까지는 자유로운 활동을 허락받아서 악한 일들을 하고 지내는 악한 영들이다.

3) 귀신과 질병

최근 우리 주변에는 모든 질병을 귀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귀신은 사람에게 정신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몸에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거라사 지방에는 귀신으로 정신이상에 걸려 무덤 사이에서 살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쇠사슬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았다(막 5:4). 예수님이 변형되시었던 산 아래에는 귀신들려 간질병을 앓던 아이가 있었다(눅 9:37).

그러나 우리 몸에 생겨난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질병들은 귀신과 관계없이 대부분 부주의함이나 잘못된 섭생 때문에 생겨난다. 때로는 귀신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는 질병도 있다. 나면서 소경된 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주님께서는 그의 소경된 이유가 부모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의 죄때문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다. 그 때 주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대답하셨다(요 9:3). 그리므로 모든 질병을 귀신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귀신에 의한 정신병이나 질병은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치료되어진다. 그러나 부주의함으로 생겨난 질병은 적절한 치료를 통해서 나아진다. 예수님께서는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향하여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하시며 귀신을 내쫓아 병을 낳게 하셨다(막 9:25). 그러나 한 소경에게는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심으로 치료하여 주셨다(요 9:7). 그러므로 귀신으로 말미암지 않은 질병은 간절한 믿음의 기도와 함께 적절한 치료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창조 신앙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평가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피조물된 위치를 지켜야 한다. 왜곡된 과학이나 귀신론이 위세를 더할수록 더욱 그러해야 한다.

 

가져온 곳 : 
카페 >행복†충전소
|
글쓴이 : DMpastor| 원글보기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살후 1:6-9)

 

참으로 두렵고 비참한 광경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의 골짜기로 분별없이 서둘러 가는 많은 가련한 죄인들을 본다. 그들의 현재의 불경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건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 그러한 죄를 범하는 그들이 반성을 않는다면 그들은 지옥의 심판대 위에서 견디기 어려운 조사를 당하고 끝내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참담과 비애, 가득 찬 시련에 잠기게 될 것이다. 얼마 후에 그들은 숨을 거두게 된다. 반면에 이성적이고 건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결코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들의 본질의 진가를 결코 망각하지 않고 사라져가는 헛된 것들을 모으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잠시 동안에 그들은 영원한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게을러지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결정적인 시간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가슴속에 묻어둔 비밀로 최후의 심판의 시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우리의 공포를 깨우치고 우리의 근면을 촉진하고 우리의 인내심을 뒷받침한다는 그러한 이유이다. 우리의 주님의 오실 날을 모르고 있는 이상 우리는 매일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리라.”고 했다. 한밤중에 부르짖는 소리가 날 것이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 나가서 그를 맞으라. 노아와 롯의 시대에 있었던 일은 주님의 아들의 날에도 있으리니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를 든다.” 무서운 생각 때문에 죄인들은 구원을 청하며 산모의 진통과도 같은 갑작스러운 파괴가 그들에게 닥쳐오며, 지구 위에는 홍수가 쏟아질 것을 생각지 못하고 탐욕에만 빠진 것이다.

 

심판의 장소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심판의 모습과 공정한 심판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땅 위에 가까운 중간 지점이 될 것 같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쓰여 있는바“...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그리스도에 주셔서 그에게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인간에게 명확한 인식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에게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부여하신 것은 참으로 합리적인 일인 것이다. 또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지식과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인 것이다. 어떠한 비밀의 행동도 그 선과 악의 구별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으로는 보실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으며 인간과 천사들에게 영원한 대가와 벌을 지우시는 것이다.

 

죄악성은 이에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날 것이며 한층 더 악화된 상태로 나타나 지독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악은 가장 부드러운 동정에 엄격함으로 다스려지게 된다. 그러한 역할은 그를 축복해 주시는 아버지(광명에 찬 영광의 보좌이며 가장 행복한 은혜의 자리인 엄격한 보좌의 중심이신)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비로운 구주가 담당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겸양에 가득 찬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그의 권력으로 다스리고 인간의 영혼을 영원의 파멸로부터 건져내고 영원한 광명과 영광에 찬 생활을 약속하시기 위해 많은 고통과 불행을 견디셨다. 그러한 피로서 겪으신 많은 고통이 지나간 후 그리스도는 구제할 수조차 없은 죄인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쫓아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죄악에 대한 혐오감을 마음속에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심판관이 되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왕궁 체제를 확실히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구제주가 최고의 마지막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죽음을 선고하신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장 7절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고 밝혔다. 최후의 심판의 권리는 그리스도가 심한 굴욕과 고난의 세월에 대한 대가로서 하나님이 주신 주 예수의 권한임에 틀림없다. 빌립보서 2장 8,9절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했다.

 

이러한 말씀은 온 세상에 엄숙한 영원의 심판대가 마련되면 그날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심판관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성경책에 있는 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머어마하고 거대한 권능으로 충만해 있으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주 예수는 하늘에서 불꽃을 감은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시리니” 지금 그리스도는 천국에 계시지만 때가 되면 천국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모든 눈이 주님을 지켜보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오실 때는 수많은 천사들에게 호위되어 오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천국과 지옥의 길로 만인에게 심판할 것이다. 준엄한 상태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경건함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권세를 가진 천사들은 틀림없이 그 최후의 심판에 정의와 자비의 권력자로 일할 것이다. 그들은 죄인을 심판대로 소환하고 그들에게 곧 판결문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즐거이 그들의 행복에 넘친 안식처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주님은 성령의 불꽃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산은 두려워서 움직이는 것 같았고 불과 연기로 둘려 쌓였었다. 그리고 불꽃 중에서 들려온 말씀은 온 이스라엘을 놀라게 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 재림의 기록은 굉장히 화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은 그의 인간미로서 감추어졌었다.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빈곤과 멸시로 태어나셨으며 인간들의 숙명적인 질병도 겪으셨다. 그러나 다음에 온 만물을 심판하려 오실 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하신 모양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엄을 드러낼 것이다. 하늘은 뒤흔들리고 땅에선 지진으로 인하여서 용암이 휩쓸고 땅 속 깊이 흔들릴 것이다. 삽시간에 하늘과 땅은 온통 성한 데가 없이 될 것이며 천사장이 부른 나팔소리는 죽은 자를 그들이 묻혀 있는 무덤에서 일어나게 하며 바다에서는 무섭게 파도가 치고 하늘에는 천둥이 몰아치며 땅에서는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저주 받은 인간들이 두려운 비명소리를 지르게 된다.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가 권능과 영광에 휩싸여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죄 많은 자들에게는 보기조차 두려운 광경일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사장의 호령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그의 얼굴은 태양같이 빛났었고 입으신 옷은 희고 빛났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가 영광과 위엄에 찬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 화려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화려함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이 쓴 성경 가운데 인상적인 구절을 잘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3-16)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동시에 오시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빛과 아름다움 장엄함과 권능은 지금 현재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좌는 크고 희며 순결하며 권능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거기서 빛과 천둥과 음성이 들려온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1900년 전에 이미 권능에 휩싸인 몸으로 계셔 그를 체포하러 왔던 사람이 되돌아가다가 땅에 쓰려져 버렸다면 그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하고 영광과 권능에 가득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실 최후의 날을 기다릴 수 잇겠는가?

 

그리스도의 권능을 나타낼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지구의 끝까지 퍼지고 하늘을 울리며 어두컴컴한 동굴을 뒤흔들고 육지와 바다의 구석구석까지 들려가며 죽은 자에게는 그들의 영혼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의 모든 과거의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정한 심판을 받고 그때부터 영원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만했던 독재자, 음흉한 정치가, 주제넘은 영웅들은 모든 지위를 빼앗기고 그들이 가졌던 권력과 힘, 위엄은 모두 잊어버린 채 산을 향해서 보좌에 앉아계시는 구세주에게 도망가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들이 멸시했던 구세주 앞에 끌려가 꿇어 엎드려 그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엎드려 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미 때가 늦은 비참한 애원에는 냉정하실 것이다.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몸이라면 그들이 죄에 대해 회개를 하고 자비와 용서를 비는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나 그들이 죽어진 다음에는 너누 늦은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일어나셔서 회개하지 않는 낮에게는 자비와 구원의 문을 굳게 잠가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죄 많은 자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이 되면 그들의 심장은 죄의식과 두려움과 수치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려운 판결소리가 온 만민 앞에서 들릴 때 공포와 당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노하신 심판관은 이미 옛날에 자기 자신을 구세주라 밝히시고 회개하기를 만일에게 종용하신 분이신 것이다. 그들이 불꽃같은 예수의 눈을 바라보고 물소리 같은 음성을 들을 때는 그들의 가슴은 날카로운 고통으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궁지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동정하거나 도와 줄 사람은 하늘이나 땅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반면에 크신 하나님과 한때는 사랑을 베푸시고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시며 그 사랑을 받아 회개하기를 권유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그들에게 냉정하시며 그들의 참회를 비웃으며 모든 천사의 무리와 영광을 얻은 성자들까지도 그들의 파멸에 기쁨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러나 무서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는 불붙는 심판대 위에 놓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구별을 둔다. “염소는 그 왼편에 양은 오른편에”(마 25:33) 이에 악한 자와 선한 자는 쉽게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니 주제넘은 위선자는 가면을 쓰고 경건한 영혼 가운데 섞을 수도 있고 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교묘한 거짓은 곧 발견될 수 있으니 곧 선한 자들의 집단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위선자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존귀한 틈으로 침입하게 방임해 두지는 않는다.

 

그리고 큰 죄뿐만 아니라 작은 죄악도 모두 조사를 받고서 이제는 별 악의가 없다고 인정이 되는 죄악도 조사를 받는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알려주시길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두려운 말씀으로 들리겠는가? 많은 죄인들의 죄가 분석되고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선한 자들이 행했던 신앙과 사랑은 자랑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그들이 옳은 일을 위해서 한 숨은 노력과 기도와 눈물과 고통 등 그들의 미덕은 기억되고 경건하게 간주되어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굶주릴 때 너는 음식을 주었고 병들어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고 헐벗었을 때 그대는 옷을 나에게 주었도다” 그에 대한 작은 사랑의 표시, 심지어 냉수 한 잔마저도 결코 잊지 않고 보답없이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영광의 보좌로부터 심판하러 오신 왕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이런 말씀을 듣는 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보다 더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어디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가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당신은 그때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을 것이다.

 

“오라, 땅 위에서 나를 저버린 자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너의 나쁜 친구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더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오라! 나의 날개 아래 있는 죄악과 비참의 세상에서 나의 가슴 안으로 와서 나의 사랑의 기쁨을 맛보라! 와서 너를 위해서 창세적부터 예비해 둔 영광의 나라를 상속 받으라! 오라 너 죄인들에게서 고난을 받아 약해진 영혼아! 오라, 너를 위해 남겨 준 것을 물려주리라!” 영광을 받은 자들은 가슴깊이 스며든 기쁨과 즐거움은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선한 자들의 영광에 가득 찬 문장이 끝난 뒤에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려 갈 것이다.

다음에는 죄 있는 자들의 재판이 행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경시한 행동이 나타나고 인정이 된 불순하고 속된 이러한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두려운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니, “너 저주받은 자여! 악마와 그의 무리들을 위해 마련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라!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헛된 욕망 속에 쾌락을 즐기며 남에게 아첨을 해왔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됐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대와 떨어져 있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종의 무리를 멸시했다.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종의 무리와는 영원히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가 판결문을 읽으신 뒤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이 불행한 영혼은 심판대에서 끌어내려져 무서운 지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지옥의 불꽃은 불이 붙었다.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온화한 성도들과 천사들에게서도 영원히 추방되는 것이다. 또한 빛과 사랑의 행복에 넘친 곳에서 모든 기쁨과 영광에서도 멀어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가질 수 없었던 어두침침하고 공포에 휩싸인 동굴 속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며 같은 죄인들의 끊임없는 비명소리와 소름이 끼치는 비탄의 소리뿐이다. 하나님의 두렵고 무서운 질책이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릴 것이다. 이 불행한 영혼들의 수치와 당황과 고통, 괴로움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 약속, 말씀을 경시할 때는 우리가 이미 수난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요 3:36). 우리가 참회를 하지 않는 이상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계속 죄악을 범한다면 주님의 생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겪었던 그 이상의 벌이 그대를 다스릴 것이다. 지옥은 그 입을 벌리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경건했던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도 역시 공포와 불안으로 떨었을 것이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히 12:21),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얼핏 보기만 했지만 그는 공포에 휩싸여, “하나님은 성스럽고 영광이로다”라고 부르짖고는 “나는 도대체 누구냐!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으니”라고 한탄했다. 여러 가지 죄로 비열한 모습을 한 그대는 어떻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심판관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그의 허리는 온갖 금 은으로 둘려 있고 그의 몸은 찬란한 녹주석같이 빛나고 얼굴은 빛 같으며 그의 눈빛은 등불과도 같으며 팔 다리는 청동이 잘 닦여진 것같이 윤기가 나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은 것이다.

 

붉은 예복을 입으신 심판관들이 심판대 위에 선 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공포로 두렵겠는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헤치고 내려오셔서 그가 심판대에 찬연히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후회를 한대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순간에 우리가 하늘의 천둥소리와 요동치는 소리를 듣고 사방에는 갑자기 무서운 불빛이 번득이고 발밑에는 대지가 우리를 삼키려는 듯이 움직이며 갈라지고 열려진 하늘의 문에서는 태양보다 밝은 광채로 천사들로 에워싸인 그리스도 심판관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서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질려 불안에 잠기어서 하나님에게 때늦은 자비와 용서를 울며 애원하겠는가?

 

그리스도는 그가 오시는 날을 연기까지 하지지만 어리석은 죄인들은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심판의 날에 대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갖가지 죄를 짓고 계속 죄악 속에 머무는 모든 불쌍한 심령들은 그대의 죄악을 다스리러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죄인들은 영원히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추방되어 무섭고 영원한 파멸과 고난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엄하신 정의와 저들의 무섭고 끝없는 파멸에 오히려 영광을 내리실 것이다. 형제들이여! 만일 그대들에게 이러한 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어떠한 벌이 그대들을 다스리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이교도인 빌립도 이러한 형벌의 말씀을 듣고서 공포에 떨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자비심을 빌어 그대들에게 빨리 다가올 어쩌면 내일 새벽이 기 전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준비하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도록 권한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는 “한밤에 커다란 소리가 있으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로서 여러분에게 최후의 심판의 날에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 빨리 회개하고 기도와 말씀 공부하기를 바란다. “죄인들이여, 회개하라”

 

나는 우리들이 최후의 심판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는 죄악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봉사로 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 다시금 겸손하게 행하는 모든 행동은 천국에 똑똑히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기록이 될 것이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준비 작업으로 여러분이 직접 교회의 봉사자가 되어 있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피의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죄악으로부터 성스러운 몸이 되시오.

 

죄인들이여!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형제들이여! 심장을 죄악의 소용돌이에서 깨끗이 닦아내십시오. 우리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이 있는지, 그대들의 손을 씻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오. 주저하는 자들이여!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시오. -삶은 짧고 영생은 긴 것, 죽음은 가깝고 심판은 문 앞에 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면 잠깐 사이에 구원의 기회는 자나가 버릴 것이다. 그대들 중에 죄악과 위기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함으로써 귀중한 보석같이 보존을 하고 그러한 확신을 일깨우시오. - 그대에게는 어떤 희생이 오더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봉사를 하시오. 진지한 신앙은 보다 큰 대가가 치러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이러한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에 비해 비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퇴폐하고 그릇된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더라도 그대는 그렇게 생각 말라는 것이다. 죄진 자들이여!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빌어 바라노니 그대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 만일 당신이 선한 행동을 진실된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는 날이 될 것이며 그대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게 될 것이며 “주 예수여! 속히 오서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아멘.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승자가 역사를 만들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며, 따라서 우파든 좌파든 승자가 되고 권력만 잡으면 됩니다. 그것이 땅의 사람들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심각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도덕과 양심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서 실패한 자가 되지 않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을 받고 영벌에 처해지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뜻을 이루고, 부정한 방법으로 승자가 되고,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을 바에야, 지옥 가는 부자가 될 바에야, 천국 가는 거지 나사로가 되는 것이 낫습니다. 결국에는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될 뿐이며, 다 죽어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세상의 승자의 논리, 권력의 논리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삶과 의식의 중심에, 핵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인간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조차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고, 심지어 세상보다 더 승자 지향적이고 권력 지향적이라서 참담함과 비애를 느낍니다. 그것은 작게 이기는 것이고, 크게 지는 것입니다.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얻고 거의 다를 잃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이 모양 이꼴이 되버린 것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경적 가치를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 실패한 인생이 되기보다, 지옥 가는 부자가 되기보다, 세속적으로 실패할지언정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비천하고 낮고 겸손한 자, 천국에 가는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다.


주여,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자비와 긍휼, 은총을 베푸소서. 제가 능력 없고 죄인이라 다 잃었지만, 그래도 당신이 주신 선한 양심 하나는 지키려 노력했나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도 당신을 진정으로 알고, 진정으로 두려워하며 살게 하소서.


그것이 모든 것의 궁극적 해법입니다.



출처: 노승현님 페이스북

갈보리 체플 서울교회 '이요나' 목사님의 강해입니다.

참조하시고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이스라엘의 시간표 제1부

 

이스라엘의 시간표 제 2부

 

이스라엘의 시간표 제 3부

 

 

이스라엘의 시간표 제 4부

 

이스라엘의 시간표 제5부

그리스도인에게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흔히 말씀을 많이 공부하여 해박하거나

많은 기도를 통해 성령충만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말씀과 기도가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자칫 말씀에 충만한 것이나 열정있는 기도로

성령 충만한 영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착각일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러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성경공부로, 부흥회를 찾아 그 뜨거워졌던 기도의 시간들이 저에게 은혜 충만하고 믿음의 일이 아니면 경원시하고 무언가 다르게 저를 이끌어 가시기를 바라고 또 그럴 것 같이 붕 떴던 마음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매 번 참석과 과정을 끝나면 뭔가 달라져 있어야 할 저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돌아갔던 허무함 조차 깨닫지 못하고 지나왔었습니다.

 

  요한 복음 15 장에서 주님은 당신을 포도나무요,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라 하셨고, 우리를 가리켜 가지라 하셨습니다. 가지의 사명은 바로 열매을 내야 합니다. 그 열매는 바로 '사랑' 임을 분명히 정의 하셨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인 것을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긍휼과 양선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니" 라며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원문은 사랑을 말하고 그 이후 단어들은 사랑의 속성을 나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인 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곧 사랑이라는 열매로 오래 참고, 절제, 온유, 부드러움, 선함, 희생, 기쁨, 희생, 겸손, 도움, 성실, 나눔, 배려, 용서, 긍휼, 친절, 양보, 신실 등등을 가지인 우리가 주렁주렁 맺을 때 농부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어려서 주일 학교에서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현재도 교회에서 성령의 충만한 삶보다는 예배 참석, 헌금, 기도, 암송, 성경 공부같은 수단을 잘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이끄는 사실들이 슬퍼집니다.

 

   하루를 살면서 본인의 부끄러움을 순간적 모면을 위해 거짓을 말하고, 유익이 안되거나 공중 도덕, 작은 약속이기에 지나쳤던 일은 마음에 걸리지도 않고, 바쁘다고 힘들어 하는 자를 외면하기도 했고, 조금 참으면 될 일을 아이나 아래 사람들에게 짜증 내기도 하였고, 일이 많다고 불평과 대충 대충 하는 등등의 사랑의 속성들과 먼 생각과 행동들이 이제는 하루를 마치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영성(靈性)을 흔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용서를 빌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지게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간다면 분명히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무시하는 나의 태도에 멀리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 나의 옛 성품과 치열한 싸움을 통해 얻어야 합니다. 이는 내게 맡기신 일이고 말씀과 기도에 매달리기만 하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말 한 마디가 작은 행동 하나가 성령의 충만한 삶인지 아닌지 척도가 되며 이런 작은 일은 하나님께서 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오늘 성령 충만한 삶을 삽시다 !

 

출처: 가나의 혼인집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는 우주적인 기관이며 살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유기적인 기관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누구도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


이처럼 주님만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를 운영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바울은 교회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오직 한 분,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직 세우시는 이도 주님이시며 이제 세워진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그리고 주님이 아니고는 어떤 사람도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라 할지라도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게 하기 위하여 각 교회마다 장로를 택하여 교회를 인도해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실 것을 위탁하였다.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위해 보냄을 받았던 것도 바울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인식한 안디옥 교회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바울을 파송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의 권능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내려 주셨음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은 교회의 부름에 쓰임 받은 일꾼이었을 뿐이다. 물론 일꾼이 누리는 기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먼저 그 일꾼은 누구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도 그에게 영광을 입혀주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일을 통하여 교회도 역시 이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면이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늘의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지혜와 권위를 가지고 다스려 보겠다고 날뛰는 직분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이다.


이 점을 명심하여 오직 주님에 의해 세워지고 다스려지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직분에 따라 모든 노력을 다하여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이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wildfield&document_srl=367389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트랙백 주소 : http://blog.cgntv.net/lib/rss/trackback.asp?ID=aboe907945
문서 주소 : http://blog.cgntv.net/document/aboe907945

수학적 확률은 연방제 사변을 향한다!

기도하는 당신이 마지막 소망의 끈입니다.


언젠가 북한은 무너진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시간은 핵을 가진 북한 편이다. 7월28일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은 7월4일 발사했던 탄도미사일 보다 진전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탄도미사일로 추정된다.


대통령은 사드의 추가 배치를 지시했으나, 구체적 실천은 따르지 않는다. 이른바 일반 환경영향평가도 예정대로 진행된다.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다 사드 배치는 지연되고 북한의 ICBM은 완성될 것이다.


ICBM이 완성되면 다급한 미국은 본토 방위를 위한 독자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손을 털고 북한·중국과 타협하거나 '북폭'하는 수순이다.


만약 미국이 북폭에 나서지 않는다면...

타협, 수년 내 평화체제라는 이름의 연방제 사변(事變)이 벌어진다.


수학적 확률의 시계는 연방제 사변을 향한다. 북한 정권, 중국 정권은 물론 한국 정부와 상당수 국민이 그것을 바라는 탓이다. 타협이건 북폭이건, 연방제건 전쟁이건, 미군과 미국인, 미국 돈은 서서히 한반도를 빠져가고 한국은 북한과 중국에 기울어 갈 것이다. 한민족 전체는 분단된 채 쇠락으로 치닫는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북한의 핵인질로 전락 중이다. 그 마지막은 기독교 문명권 이탈 및 미군과 자본의 철수, 온갖 유물론 범람과 동성애 확산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몰려도 절대 다수의 교회들은 침묵한다.


Holy Remnants, 거룩한 남은 자의 기도가 기적을 만들어 낼 때이다. 기도하는 당신이 마지막 소망의 끈입니다.



- 김성욱 대표 / 리버티헤럴드



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원 교수이신, Richard Gaffin이 Calvin and The Sabbath이란 책을 쓰셨는데 마직막에 칼빈의 견해를 19가지로 요약 해 놓은 것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1.십계명은 온 인류를 모든 세대를 통하여 구속하는 하나님께서 쓴 변개되지 않는 도덕법이다. 

 

2. 십계명의 한 부분인 4계명 역시 하나님의 불변하는 법으로 온 인류를 모든 세대를 통하여 구속한다. 이 점에서 안식일 제도는 창조 질서에 속한다. 

 

3. 구약 시대에 있어서, 4계명이 명한 안식일은 영적 안식의 모형 혹은 상징이다. 

 

4. 영적 안식은 우리 자신의 죄된 일들을 그만 두고, 우리 옛 본성을 죽임으로써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화의 사역을 우리 안에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이 안식은 한님의 뜻을 순종함 혹은 그분을 닮아감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5. 구약에서 매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다른 6일동안의 노동을 그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안식은 공적인 예배를 위해서 그리고 그 안식이 표상하고 있는 약속의 실체에 대한 개인적인 묵상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6.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미래의 실체에 미리 맛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매주 안식일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표징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중생의 성례였다. 

 

7.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 분 빛 아래에서 모든 그림자는 사라지고 영적 안식은 충만한 실체가 되었다. 그 결과 모형과 성례로서의 안식일은 폐지되었다. 

 

8. 비록 완전한 영적 안식은 마지막 날까지 이루어지지 않지만,신자들은 이 안식을 실제적으로 소유한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영적 안식은 영원한 안식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 

 

9. 엄격히 말해서 신자들은 매주 하나의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더이상 없다. 그러나 이 계명의 완화가 4계명을 폐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안식일의 4계명의 요구들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킨다. 

 

10. 신자에게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남으로 누리는 영적 안식(죄로부터의 자유, 새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1. 그러한 영적 안식은 한 주의 한 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고 영구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12. 영적 안식의 경험은 경건과 그리스도인의 봉사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묵상과 예배 행위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영적 안식은 영구적이기 때문에 매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자에게 가장 이상적이다. 

 

13. 신자는 구약시대의 신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죄의 연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지정된 시간을 따로 구별함으로 신자들이 세상적인 염려나 근심으로 부터 자유하여 사적으로 묵상의 시간을 갖고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인 현실적으로 꼭 필요하다. 

 

14. 유대인의 안식일은 이 필요성을 완전하게 충족시킨다. 하지만, 모형적인 신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장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수많은 미신들이 안식일과 결부되게 되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안식일을 주일로 대체하였다. 이렇게 바뀐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약의 상징들이 더이상 필요없게 된 날을 기념하기 때문에 특히 타당하다. 

 

15. 오늘날 주일은 그것이 원래 의도한 바를 여전히 충족시킨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주일이 아닌 다른 날을 구별하거나 일주에 한 번 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신자들이, 그런 다른 날들이 예배와 묵상을 위한 정해진 시간으로 사용되는 한, 정죄되어서는 안된다. 

 

16. 그러므로 신자들은 주일이 어떤 종교적인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의 질서와 화합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자유스럽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주일을 지킨다. 

 

17. 노예들과 노동자들을 위하여 4계명이 요구한 육체적 안식은 이 계명의 기본적인 관심에 부가된 것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이나 주일의 안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묵상과 공적 예배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18. 이 안식의 명령은 주인이나 고용인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인간적으로 억눌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것은 첫째 돌판 보다는 둘째 돌판에 속하는 것이다. 

19. 4계명의 핵심은 안식일 제도의 본질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따라야 하고 그런 본받음이 공적인 예배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적인 묵상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양무리마을/로빈슨크로소

(강추)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이 10년 전에 예언되었다!

- 짐 베이커 쇼 -



번역: 주님만이 나의 전부 님
자막 작업: 예수님을 따르는 아가페 목장 / 돌쇠

어린 양의 혼인잔치” (간증)


몇일동안 기도할 때

주님앞에 엎드려져 있었습니다.


어떤 간구도... 어떤 방언도...

어떤 부르짖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하려고 하면

입이 딱 다물어 지는 것이

입이 무거워서 도저히

기도의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세상의 소원도 고민도 걱정도

다 연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고통스러움이나 외로움이나 슬픔이나 낙심의 감정도

모두 언덕아래 놓여져 있는 풀들처럼

나의 삶과는 무관하게 느껴졌습니다.


새벽에 주님께 기도를 드릴때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그냥

넙죽 엎드려 있는 것 이외에는

어떤 다른 행동도 마음도 말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말씀 읽고 엎드려 있다가

다시 말씀 읽고...

엎드려 있다가...

처음 느껴보는 평안함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묵상의 기도를 하면서

정말 중요하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나의 뜻...

나의 의로움...

나의 목표...

나의 의지...

나의 능력...

나의 인내로...

내 자신의 무언가를 앞세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 방법이

아닌 것임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되새기며 의지해야 할 것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그리고 현재 우리안에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성령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안에서 확신합니다.


몇일 전 기도할 때였습니다.

저는 가만히 엎드려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발이 느껴졌습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다리가 보였습니다.


고개를 위로 치켜들려고 하니...

"그대로 있거라..."는 음성이 들려

그냥 그대로 가만히 엎드려 있었습니다.


"네 양손을 앞으로 내 밀어라...."


저는 양손을 앞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큼직한 남자의 손이 포근하게 저의 양손을 쥐었습니다.

너무나도 섬세하게 감싸 쥐은 그 느낌으로

저의 마음에 큰 평안함이 가득찼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눈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재림하신 모습이 보였습니다.

구름위에 너무나도 찬란한 광채를 내시며

사람의 말로 설명할수 없는 아름다움과 거룩함으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빛이 예수님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아~ 주님 오셨구나! 할렐루야!"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계신

구름의 뒷편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주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정말 순식한에 지상에 있는 영혼들이

구름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잠시후에 이땅에 있는 주님의 신부들이

모두 구름속으로 들려올라간 후에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신실한 신부들아

내가 예비한 혼인잔치로 가자..."

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공중에 계시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구름도, 빛도, 영광도, 아름다움도, 주님의 신부들도

모두 주님께서 데리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수많은 주님의 신부들이 있던 공중의 그 공간은

구름 한점 남아 있지 않는 공허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귀에서 갑자기 엄청난 기쁨의 함성소리와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는 소리와

너무나도 큰 기쁨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어느새 어린양의 혼인잔치 속에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무사히 천국에 온 사람들을 축하해 주고 있었습니다.


천군천사들이 모두 모여서

어린양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너무나도 감격스러웠습니다.

너무나도 평강의 기쁨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7:15-17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야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고개를 돌리니

하나님께서 있으신 보좌가 구름에 가리워져

그 보좌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너무나도 큰 기쁨으로 소리쳐 찬양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온 성도가 형제 자매가 되어 뛰고 구르고

천사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큰 기쁨으로 찬양하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너무나도 큰 감격과 기쁨이 넘쳐 흘렀습니다.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것이 어린양의 혼인잔치구나..."

"제발 이대로 이곳에 나도 함께 영원히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과 환희가 점점

저의 마음에서 멀어짐을 느꼈습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멀리 멀리 멀어짐을 느꼈습니다.


아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이대로 영원히 그곳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지상으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사방에 매케한 연기와 건물의 잔해가 보였습니다.


감색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저와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붙잡았습니다.


환상이었으나

방망이로 두들겨 맞는 그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하며 고통스러웠습니다.


얼굴을 그리고 코와 허리, 발등, 발목을

방망이로 힘차게 내려 쳐서 얼굴뼈는 뭉개졌으며

발목은 부러져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오! 주여!"

"이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너무나도 심하게 무차별적 구타를 당하여

몸에 아무 저항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 때문에

구타당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잠시후에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길이가 3미터 정도 되어보이는 작두가 있는 곳으로

저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억지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작두로 잘려진 수많은 사람들의

육신의 조각들이 흙무덤처럼 쌓여져 있었습니다.


잠시후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으아악!!! 으아아악!!!!"


그곳을 보니

손가락부터 천천히 한 부분씩 고통을 가하며

작두로 몸을 자르고 있었습니다.


온 사방에는 사람의 팔다리로부터 피가 흘러나와

마치 계곡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러서 그져 덜덜 떨고만 있었고

저는 너무 많이 맞아서 도망갈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잠시후 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네가 믿는 예수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에게 순종하겠느냐

아니면 팔이 잘리겠느냐!"


그 자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저의 손가락이 작두에 잘려 나갔습니다.


"아악!!!!"

저는 눈을 돌려서

잘려 나간 제 손가락을 보았습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과거 예수님을 믿었던 모든 사람들을

고문하며 천천히 그 몸을 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한다 한들

그 고통에서 건져냄을 받을 길은 없어보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자가 저를 주먹으로 가격하며

이번에는 저의 팔목을 작두로 잘랐습니다.


"악!!!!"

"그러니까 순순히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지

왜 반항을 했냐고!!!!"라고 말을 하면서

저의 어깨 부분에 작두를 대고

저의 팔을 완전히 다 잘라 버렸습니다.


정말 악소리도 안나왔습니다.

"오.. 주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는 방금 전까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있었는데

왜 저의 팔이 잘리고 있는 것인가요..."


이번에는 발목, 그리고 무릎이 모두 잘려졌습니다.


이때부터 고통이 점점 저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조금씩 멀어지면서 작두로 잘리고 있는 곳에

저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잘려나간 팔다라기 바닦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숨을 거둔듯 보였습니다.

그자는 외쳤습니다.

"다음!!!!!"


정신을 차려보니 저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무릎 꿇어 엎드려 있는 그상태 그대로...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고.

다리는 피가 통하지 않아 아무 감각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엎드려져서

아무런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이 강림하시는 것을 볼수 있는

이 세상의 끝자락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모두 세상은 끝나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 오셨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서

영원한 기쁨과 평강과 희락과 화평의

무한한 평안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속한 자입니까?


아니면 지옥과 같은 7년대환란 속에

고아와 같이 남겨질 자인 것입니까?


지금 그 자리에서 당장 엎드려

주님앞에 모든 것을 회개하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처음과 나중이 되시며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우리를 위해 몸찢고 피흘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서

이 자리에서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과 모든 세상의 죄악으로 물들어진

영혼을 십자가에 장사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만을 의지하며 사십시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인간의 수양과 도덕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오직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으로, 파멸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고통에서 평강으로,

옮겨 놓을 권능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주님 강림하심이 임박한 시대에

성령충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비없는 구름, 기름없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인 것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인 것입니다!.

불씨 없는 화로인 것입니다.


주님이 정확히 언제 오실지는 알 수 없으나

성령님을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지막까지 부르짖고 전하며

멸망받을 이땅에서 내 가족, 내 형제, 내 이웃을 건져내야 합니다.


정말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명도 낙오없이 모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만날 수 있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라나타!



: 주안의 영광

많은 교회에서 하는 주기도문은 바른 기도의 내용이 들어있지만

그것을 반복적으로 예배 형식의 한 부분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르쳐 달라한 것은 (눅11:1)

당시 요한 뿐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주었고

그 제자들은 기도문을 가지고 그대로

외워서 하였습니다.

 

바로 그처럼 제자들은 염두하고 주님께 청하였는데

주님은 그것이 아니고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하라며 기도할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일 기도문으로 주셨다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가르친 기도가 (마6:9-13 / 눅 11:2-4)

글자가 똑같아야 하는데 비교해 보면 다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원문에 '이러한 방식으로'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마6:8)

 

천주교에서는 기도문이 책으로 엮여있습니다.

그 내용을 매일 반복적으로 읽으며 기도하고

외워지면 보지않고 하면서

몇번 하는 지 손에 묵주를 돌려가며 반복합니다.

이방인의 중언부언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이며

 

주기도문을 교회 모임에서 1회로 끝난다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으나

예배나 모임의 끝으로 흔히 하는 기도문은

시간적 간격이 크다뿐이지 결국은 반복적인 것이며

내용 한 마디 한 마디에

우리의 마음의 감정과 인격을 담아 고백해야 하는

기도와는 멀어지고 형식적이 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따라

나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했고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빚진자들을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같은 기도 내용을

'주님! 제가 OOO의 잘못을 끝내 용서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의 죄도 용서해주시지 않으시겠네요.

아직도 OOO에 대한 생각이 저를 미움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합니다.

저의 마음을 다스려서 용서하게 만들어 주옵소서.....' 와 같은

내용으로 내 삶에 직접적인 마음의 진솔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다르므로

함께 기도문을 합동으로 하는 것은

결국 틀에 모두를 묶는 것이기에 옳지 않은 것이고

주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던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출처: 가나의 혼인집

 출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