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젓는 제자들

< 요한복음 6:16-21>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유대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그 때 큰 무리는 병자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려고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신 주님은 그 무리를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죄인을 살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예표였습니다.
그런데 무리는 오병이어의 참뜻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 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가셨습니다.

모르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은 것을 열 두 광주리 가득 거두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말씀을 배불리 먹어도 주님을 알지 못 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쓸쓸히 산으로 아니, 천국으로 홀로 떠나가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산으로 들어가신 주님을 버려두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려고 배를 저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두운 바다 거친 물결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괴롭게 노 저어도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지 못 하는 흑암과 고통의 거친 바다였습니다.
주님 없는 인생은 일생동안 방황하며 수고하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 고통 하다가 결국은 멸망당하는 암흑의 세상바다입니다.
그들은 밤 사경까지 괴롭게 노 젓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다시 오셨습니다.
제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돌아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삼년 동안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보고 쓸모없다 싶으면 버리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부르셨고 세우셨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고 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괴롭게 노 젓는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참뜻을 깨닫고 주님을 진실로 알게 된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후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오신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야 주님의 생명, 곧 그들에게 주어진 오병이어 열 두 광주리를 들고 나섰고 온 세상에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괴롭게 노 젓던 제자들이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자 배는 곧 그들이 가려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주님 없는 인생, 하나님 모르는 인생길은 방황과 저주와 멸망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타신 배는 방황이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분명한 소망과 목표를 가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모든 고통이 끝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또 중요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또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누구신가 하는 정체에 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가 아니시라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어야 비로소 구원이 가능하며 영원한 생명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만유를 지으신 분이요 주인이시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일 이 말씀이 거짓이라면 구원도 헛것이요 성경전체가 거짓말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은 만물이 주님께 복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뻥튀기 마술이나 무리에게 배부름의 환각을 일으킨 최면술이 아닙니다.
"있으라" 말씀에 빛이 있었던 것처럼, "나누이라" 말씀에 나누어졌던 것 처럼 그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창조주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은 주님의 명령에 주님의 발이 닿는 바다가 단단해지는,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하시면 어떠한 피조물도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시는데 쓰신 주님께서 어찌 작고 미약하다 하여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지 못 하시겠습니까?
파도 치는 바닷물도 단단하라 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 주님이 어찌 우리를 강하게 하지 못 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예비하지 못 하시겠습니까?

성경과 기독교는 관념과 교리가 아닙니다. 사실과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주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손에 들려진 만인을 살릴 생명의 오병이어요 주님과 함께 절망과 죽음으로 파도치는 온 세상을 잠잠하게 만들 희망의 제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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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었습니다.



(2)
그런 믿음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잔디 위에 앉히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도 못 하는 무리들,
자신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앉히고
그리고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십니다.
원대로 나누어주십니다. 달라는대로, 먹고 싶은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어떻게 나누어 주셨을까요?
떡과 물고기를 한 사람에게 주고 나면 똑같은 떡과 물고기가 또 생기고 또 생기고.... 그랬을까요?
떡과 물고기가 뻥튀기처럼 뭉실뭉실 커지고 부풀어나고 늘었을까요?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복음서 어디에도 그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 건 궁금해 하지 마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하다면 왜 안 적었겠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11절을 보면 축사하시고, 감사기도, 축복기도 하시고 나누어 주셨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디아도켄, NIV영어성경을 보면 distributed, 나누어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4장 19절을 보면 좀 다릅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답니다.
떼어, broke, 부수어, 뜯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떼어내고, 잘라내고, 부수어내어 나누어 주어도 끝없이 남아있는 떡과 물고기...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제자들에게 열 두 광주리가 가득하게 남은 떡과 물고기....

떼어서 나누는 것은 성찬식입니다.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은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떼어서, 그 생명을 나누어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
천주교는 성찬식할 때 보면 신도가 무릎을 살짝 꿇고 앉으면 사제가 동그란 조각을 입에 넣어 주지요.
루터교회의 성찬식도 비슷합니다.
많은 교회들도 그릇에다 조그많고 납작한 빵 조각들을 담아서 한 개씩 집어들도록 하며 성찬식을 합니다만,  
저는 한 개의 큰 빵이나 떡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떡을 떼면서 “내가 지금 주님의 몸을 내 손으로 떼어내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가지사 이것이 내 피라 하셨습니다.
떡은 떼고, 포도주는 잔에 담아 주셨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마14:19)
마태복음14장 19절을 보면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면서 떡을 떼어서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떠어져서 제자들의 손에 나누어졌을 때 그것은 배고픈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광주리 가득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풍성하게, 원대로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살리고도 남는 그리스도의 참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참예한 그들은 아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실컷 배부르게 먹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붙잡아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토록 풍성한 성찬식을 베푸신 다음 혼자 쓸쓸히 산으로 피하시는 주님......
그 무리 중에도, 제자 중에도, 아무도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산으로 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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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를 보여라!


요한복음 5:31-32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시면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하나님과 동등하냐?”고 살기등등하게 따지고 덤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똑 같다.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시니 나도 죽은 자를 살린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

심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모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모든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맡긴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심판은 생사화복, 천국과 지옥의 주관자, 곧 우주의 주재자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심판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다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하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요 주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계속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면서 하신 “증거”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판주시라면 그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기적과 표적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행하신다면 그것은 참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표적을 행하셨다면 진작 마귀가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드시고 성전에서 뛰어내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병고침과 살리심과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증거는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다만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자요 광야의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시고 그 보내심의 증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마침내 그를 증거하셨습니다.
증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자,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눈을 치켜뜨고 죽이겠다고 덤비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명백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증거는 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입니다. 증거를 보이지 않으시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광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 38년 된 병자를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으니 예삿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전능자로 나타내셨다면 얼마나 통쾌하고 속시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엎드렸을 것이며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람,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믿음은 우주의 비밀입니다. 구원의 열쇠입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믿는 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네가 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증거를 보여랏!”
아담과 하와는 뱀에게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같이 된 사람 데리고 와서 보여라. 아니면 네가 선악과 먼저 따먹어 봐라. 어디 하나님과 같이 되는지 보자.”
아담과 하와가 진작 이렇게 증거를 요구할 정도로 총명하고 영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없이 뱀을 믿어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렇게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들, 유대인들이 뒤늦게 똑똑해져서(?) 정작 예수님께는 안 속겠다고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똑똑하게도 아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아, 그 때 뱀을 못 박아 죽여 버렸었더라면, 그걸로 뱀탕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 아니 죄인들에게,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고 정작 믿어야 할 것은 믿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이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경 또한 예수님이 쓰시거나 보이시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쓰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곧 성경,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가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이 막상 눈앞에 오셨는데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말씀이 너희 속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체험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기적을 요구하고 초자연적인 기도응답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해 주시면 믿겠습니다,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것이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과 응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 나서 믿겠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말씀이 증거입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 말씀,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감으로써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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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셔서

[요한복음 5:9-10]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 38년이나 죽치고 누웠던 병자를 고친 일로 분란이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이 시비를 건 것입니다.
무슨 시비를 걸었느냐, 병 고침을 받은 자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시비를 건 겁니다.

만일 이런 시비를 걸어온다면 저라면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그럼 제가 멀쩡해졌는데도 거기 계속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런데 이 친구, 대답하는 거 보세요.
“저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떠넘깁니다. 비겁합니다.

생각나는 거 없습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남에게 떠넘기는 것, 이게 죄인의 야비하고 비겁한 모습인가 봅니다.

그런데 당당하지 못 하고 비겁하고 야비하면 오히려 더  책 잡힙니다.
유대인들이 다그칩니다. "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이 친구 우물쭈물합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님이 그 후에 성전에서 그 비겁한 자에게 나타나셔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병 고치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변화 없이 병만 고침 받으면 그것은 더욱 죄를 짓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38년 동안 중풍병자로 있을 때 못 해 본 짓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고침 받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못 하고 주님을 위해 쓰지 못 한다면, 그가 하게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그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일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분, 38년 동안 절망 속에 있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분이 주님이신 것을 그 사람이 모른다면
그 사람의 고침 받은 다음의 삶이 어떻게 되겠으며 그 고침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주님은 숨어서, 어두움 속에서 선행이나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병이나 고치는 것이 주님이 오신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들로 주님을 믿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말씀에서 안식일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의 제4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 8-11)

당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심으로 유대인들과 정면충돌을 하신 것입니다.
제칠일안식일교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우리 정통기독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왜 하필이면 그 안식일에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에 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까요?
다른 날에 오셨어도 될 일을 왜 그렇게 하셔서 유대인들로부터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비난을 받고 미움을 사셨을까요?
결국 이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아닙니까?
구태여 그렇게 하셔서 분란을 일으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신 것 맞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고 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함께 안식하자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죄악으로 인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하나님은 쉬지 못 하시고 다시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구원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사역은 창조사역보다 더 험악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집이 망가져 엉망이 되면 차라리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고치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도 싹 쓸어버리고 새로 창조하시는 편이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신 일은 원수 된 죄인을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게다가 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피눈물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찢어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그 고통스러운 사랑의 일을 주님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안식일과 명절의 규례를 정해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섬기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리고 모든 유대인의 명절의 참뜻은
구세주, 메시아, 주님이 오실 때 죄악과 저주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곧 안식일은 장차 오실 주님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이 오시면 폐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식이요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안식일을 깨뜨리셔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전도 무너뜨리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안식일과 성전을 가지고 안식일의 주인이시요 참성전이신 주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지켜온 안식일과 성전제사와 율법들이 자신들이 쌓아온 공로요 근거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들을 버릴 수가 없었고
그것을 허무시는 주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진짜 안식일과 진짜 성전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입니다.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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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5장>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이하 생략)



서울의 사대문, 사소문의 이름들을 아십니까?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북대문이라고요? 아니 대문에다 동서남북만 갖다 붙이면 되나요?
아닙니다. 원래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이라고 합니다.
사소문도 마찬가지고요. 북에는 창의문(자하문), 동에는 혜화문(홍화문), 서에는 소덕문(소의문), 남에는 광희문(수구문).
수구문은 발음이 바뀌어 시구문(시체 문, 시체가 나가는 문)이 되었고요.

예루살렘 성에도 많은 문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문들도 동서남북으로 이름을 붙인 문은 없고요.
그 중 황금의 문과 미문은 오늘날도 나란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황금의 문으로 메시아가 들어온다고 믿고 있고 이슬람은 '메시아 못 들어온다.' 그 황금의 문을 벽돌로 꽉 막아놓았지요.

느헤미야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놓여나 유대인들을 데리고 돌아와 많은 훼방과 위협 속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이야기가 성경 느헤미야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3장에는 문들과 망대들의 이름과 성벽구간 별로 누가 건축을 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느헤미야 3장
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3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여기에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가장 먼저 건축한 문이 양문입니다.
그리고 나오는 문들의 이름이 양문, 어문, 옛문, 본문, 골짜기문, 샘문, 엘리야십의 집 문, 수문, 마문, 함밉갓문, 모두 10개입니다.

성경의 맨 뒷부분 요한계시록 21장에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이 몇 개라고 되어 있지요?
열 두 문이지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거기 써져 있고요.

아무튼........,

“양문”이란 양이 들어오는 문, 곧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희생제물인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양문에 어린양 예수님이 오셨으니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 병자들의 앉은 모습은 전혀 은혜롭지 못 합니다.
천사가 내려와 못의 물을 동하기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이 때다!” 비호같이 제일 먼저 달려 들어가는 한 사람만이 병이 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절에 기록된 병자들의 종류를 보십시오.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 세 종류입니다.
소경이나 절뚝발이(앉은뱅이), 혈기마른 자(중풍병자, 반신불수)는 모두 제 힘으로는 못으로 달려 들어갈 수 없는 병자들입니다.
그러니 잽싸게 달려 들어갈 수 있는 병자는 어떤 병자이겠습니까?
아마도 치통환자나 무좀환자 같은, 병자도 아닌 병자들이거나 꾀병 환자들 아닐까요?
하긴 그런 종류의 별 것 아닌 병을 고치겠다고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천사와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그 중에서 제일 병이 가벼운 재빠른 병자 한 사람만이 병 나음을 입는다면...
결국 그곳은 치열한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현장, 뒤처지는 자는 도태되어야 하는 살벌한 세상의 축소판인지도 모릅니다.
상태가 중한 혈기 마른 병자, 중풍병자에게는 절대로 가장 먼저 못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풍병자는 전혀 가능성 없는 가능성을 바라보며 38년이나 그 못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왕 나왔으니 ‘삼십팔 년’이라는 숫자도 살펴봅시다.
우리말에는 화투용어에서 나온 삼팔따라지, 따라지 인생이라는 자조의 말이 있습니다.
삼팔광땡이니 대박이니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삼팔선이라는 선으로 민족이 갈라진 비극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니 신명기 2장 14절에 비극적인 “삼십팔 년”이 나오는군요.
열 정탐군의 말에 겁을 먹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이스라엘 백성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군인이 “삼십팔 년” 동안 광야에서 멸절되었습니다.
왜 40년이 아니고 38년이냐고요?
출애굽해서 시내산에서 십계명 돌판을 받고 성막을 만들고 가데스바네아까지 오는데 2년이 지났거든요.

38년.......
38년 된 중풍병자의 모습은 범죄함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희망 없는 삶을 살다가 죽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면...
바로 고통 속에서 소망 없는 삶을 살다가 가야 하는 죄인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나긴 삼십팔 년을 베데스다 못 가에 앉아있던 중풍병자에게 주님은 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아직도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갈 희망을 가지고 사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대답은 병이 낫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에 매달려 있습니다.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나이다.”
어느덧 병이 낫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못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도 그런 게 아닐까요?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여 행복과 불행을 느낍니다.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과 누울 곳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데
풍성한 물질문명 속에서 오히려 상대적 빈곤과 절망에 허덕이는 것이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불행이 아닐까요?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목적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그게 죄인들 세상이요 영혼이 병든 병자들의 인생살이인지도 모릅니다.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인생의 목적은 잃어버리고, 어떻게 사느냐, 사는 수단에만 매달려 사는 오늘날 세태 ....!
당신은 행복합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계십니까?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당신의 삶은 목적입니까 수단입니까?
당신의 목적지는 영원한 천국입니까, 이 땅 살아가는 동안의 평안과 물질과 부귀입니까?

어쨌든 그런 병자에게 주님의 말씀은 그 병자가 생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박살나고 다시 세워지는 순간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데스다 못에 먼저 들어가는 38년 한이 된 목표가 우스워지는, 전혀 새로운 출발의 순간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삶, 차원이 다른 삶이 시작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에 38년 중풍병자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베데스다 못 가에서
왜 사는지도 모르는 채 허망한 꿈을 좇아 인생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
주님의 말씀에 벌떡 일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와 영원한 생명의 소망 가운데 걷고 계십니까?
주님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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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 뿐인 여자, 그 상처들로 인하여 몹시도 뒤틀리고 꼬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가진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한 낮 뙤약볕 아래 우물가에서 낯선 남자가 물을 좀 달라 하는데 차갑게 쏘아붙입니다.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 달라 하십니까?”
유대인에게 몹시 반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주님이 “네게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내게 생수를 구했으리라.” 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을 계시하자,
“흥, 두레박커녕 바가지도 없이 이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요?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가요?” 하고 쏘아 부칩니다.
주님이 다시 “내가 주는 물을 마신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시자,
“그래요? 그럼 그 물 내게 주세요, 다시는 여기 물 뜨러 올 필요 없겠네요.” 하고 비꼽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꼬고 쏘는 여자의 말대꾸를 계속 받아 주시며,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계시해 나가십니다.

주님이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데려오라’ 하십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여자에게는 소유권이 없고 남편에게 있습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전 남편 없습니다.”
“그래, 남편 없다고 생수 못 주겠다는 거지요?”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맞다. 네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남편은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는 놀라고 맙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지금 동거하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갈 데까지 다 간 타락한 여자, 동네사람 눈을 피해 땡볕아래 물길러 우물에 나온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이 사람이 알고 있단 말입니까?
“이제 보니 선지자시로군요.”

그런데 자신의 수치스러운 사생활과 죄를 말갛게 드러내시는 빛 되신 주님 앞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도망하지 않고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 말 속에는 그 옛날 북이스라엘이 황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고 이를 하나님이라면서 예배하던 우상숭배, 그리고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흩어지고 더럽혀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까지 잃어버리고 유대인들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당해 온 뼈아픈 민족의 과거, 그 속에서 또한 타락하여 구제불능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적 비관과 원망과 냉소가 깔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상처투성이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거기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온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메시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는 성경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 때라,”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글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는 “영과 진리 안에서”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들만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 안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들이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간 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의 예표였습니다.
성막이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겠지요.”
사마리아 여자가 그 비참한 환경과 삶과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이 그의 질문과 말 속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로라.”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었겠습니까?
그분이 그리스도라니요!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뛰어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난리를 합니다.
그 때까지의 좌절과 아픔과 차별과 모멸과 수치는 온데간데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참 생수요 진리가 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 그녀를 완전히 변화시켜버린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구원을 기다린, 상처뿐이었던, 주님을 만난 여인의 변화요 승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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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전을 헐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의 돈을 쏟고 상울 뒤집어엎으며 외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이러느냐며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되물었습니다.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헤롯성전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는 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깨달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성전 되신 주님 자신의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십자가에 죽으신 삼일 후에 부활하셔서 자기 육체를 일으키시겠다는 것만을 뜻하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죄악과 죽음, 사단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해내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몸으로 우리를 사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피로 값 주고 사시려고 말입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바꾸시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모든 믿는 자들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시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의 승리와 함께 일어나는 모든 믿는 자들도 성전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헤롯성전을 헐지 아니하였습니다. 거꾸로 성전 되신 주님을 헐어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헤롯성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성전은 결국 기원후 70년 돌 하나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철저한 파괴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이 헐지 않은 헤롯성전을 하나님께서 허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안에 계신 우리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은 우리를 주님의 임재와 다스리심 아래에 드리는 것이요 우리의 몸을 주님의 거하실 처소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삶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로마서 12장 1절을 말씀합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지금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러져 우리를 포기하고 우리를 허물어뜨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다시는 허물어지지 않을 영원한 성전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다 헤롯성전입니다. 자기를 위한 신앙은 헤롯성전입니다. 주님은 그 성전을 헐라 하십니다. 그것은 성전 아니라 하십니다. 장사하는 집이요 도적과 강도의 굴혈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헤롯성전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강도의 굴혈에 주님이 들어오시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요? 내가 헐지 아니하면 결국 돌 하나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헐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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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말씀: 로마서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NIV 영어성경을 보면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is Lord"

성도 여러분, '주'가 무슨 뜻일까요?
"주'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절대적 배타적 지배권리를 가진 주인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은 주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출발점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왜 사는 것일까요?
어떠한 학문과 철학과 연구로도 그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왜 사는가? ‘주’를 위해 삽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우주만유를 지으시되 예수 그리스도, 아들을 위하여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물과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만물이 그를 위하여 지어졌고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이 바로 만유의 주(主)인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 인간도 주(主)를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를 위하여 살도록, 주를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살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자기를 위해 살 재주도, 능력도, 방법도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산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죽도록 자기를 위해 산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 산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죽도록 노력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자기를 위하여 산 것이 아니라 돈, 출세, 명예, 지위를 주(主)로 삼아 그것들을 위하여 목숨 바쳐 산 것이 됩니다.
사랑도, 예술도, 이념도, 그 무엇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하고 무엇인가를 섬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위하고 섬길 것이 없으면 허무해 합니다. 견딜 수 없어 합니다.
내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절망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이 보다 더 모욕적이고 비참한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야말로 자기만을 위한 상태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은 왜 ‘쓸모 있는’ 인간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를 위해 살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 본성 때문입니다.

참된 주를 만나 섬기지 못 하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며
참된 주를 만나지 못 하면 거짓 주를 섬기다가 일평생 방황하다 불행하고 비참한 멸망길로 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는 얼마나 한 맺힌 말씀입니까?

만유의 주가 주라는 인정을 받지 못 했습니다.
주를 섬기라고 지음 받은 인간들이 주를 떠나서 원수 마귀 도둑놈들, 사단 귀신들, 우상들을 주로 섬기고 그들에게 복을 달라고 빌었습니다.
진화론을 만들어내고,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80억 달러짜리 강입자가속기까지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을 입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피맺힌 하나님의 외치심입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이 고백을 받으시려고,
주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음을 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배반하고 더러워진 죄인들을 던져버려도 그만일텐데
사랑의 우리 주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고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다.
Jesus is Lord!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시며 우리의 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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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19-24]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왜 누구는 택하시고 왜 누구는 버리시느냐고요?
왜 하나님은 모두를 구원하지 않으시느냐고요?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요?

그럼, 산더미같이 많은 진흙을 몽땅 파서 지고 와야 옳다는 겁니까?
자기 죄악으로 죽은 자들을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모두 구원해 주어야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되는 것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택하신 대로 구원하신다 하여 나쁜 하나님이 되고, 저녁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와 겨우 한 시간만 일한 품군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다 하여 악한 주인이 되는 것입니까?
토기장이가 자기 쓸만큼 진흙을 가져다 자기 맘대로 어떤 것은 귀한 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것은 천히 쓰는 그릇으로 드는 게 잘못입니까?
또 가져왔다 해서 모든 진흙을 공평하게 모조리 고려청자로 만들어 주어야 진흙들이 불평을 않게 되는 겁니까?
토기장이가 진흙 일부를 가지고 도자기 구울 가마를 만든들 진흙이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에서나 야곱이나 다를 바 전혀 없으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을 뿐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쓰셨을 뿐입니다.
야곱을 그렇게 택하시고 에서를 그렇게 사용하시고 성경에 기록케 하셔서 오늘날 성경을 읽는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려 한 것입니다.
먼 훗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렇게 그들을 각기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 하고 애굽 백성이 되어 혼나고, 애굽군대가 되어 바다에 수장되고, 가나안 족속이 되어 진멸 당하였습니까?
또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다 구원 받았습니까?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고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침공당하여 죽고,
겨우 얼마, 남은 자만이 구원 받지 않았습니까?
인류역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하’자, 예수님 ‘예’자도 못 들어보고 죽어갔습니까?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선택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택으로 여러분의 공로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어서 영생과 천국을 약속받았습니까?
인류역사 수 천 년에 오늘날 자유세계에 태어나서 복음을 듣고 예수 믿을 수 있게 된 것이 여러분의 공로이며 여러분의 선택입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가 할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구원의 축복이 어떻게 내게 왔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너도 나도 다 받는 축복이 아닙니다.
구원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엄청난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어찌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기 되는 구원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가? 생각할수록 그것이 귀하고, 그것이 감사하고, 그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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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난다는 것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는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고 유대인 관원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어려서부터 성경을 달달 외우면서 배웠을 것이고 관원이라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행하시는 걸 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메시아의 예언을 믿었거나 인생의 문제와 구원에 관하여 심각하고 고민하다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왔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굉장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꼭 한 번 찾아서 만나야지 생각하고 찾아 왔는지, 혹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분일지 모르니까 미리 눈도장을 받아두고 한 자리 얻어걸릴 심산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내는 주님을 찾아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오른편,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치맛바람 청탁을 했고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에게 느닷없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화들짝 놀랐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별별 생각 다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다시 태어나라고? 그럼 나는 늙어서 안 된단 말인가? 한 자리 얻어볼 요량으로 찾아왔는데 면접시험에서 불합격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묻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음절을 보면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더 어려운 말씀을 던지십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3:6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니고데모에겐 참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단 말입니까? 이것이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란 말씀은 또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우리말 성경은 “거듭 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만, 영어성경을 보면 “Born Again" 다시 난다는 뜻입니다. 즉 “거듭”이 아니고 “다시”가 맞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여태 살아온 것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효! 싹 지우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자라온 너는 육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영이요, 그 다시 태어난 영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도 성령으로 다시 영으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육신인 인간이 어떻게 영으로 다시 난단 말입니까? 그런데 7절을 보면 주님께서 “네가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이 붑니다. 나무가 흔들리고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안 보입니다.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붑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Born Again합니다. 성령으로 영으로 다시 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거듭, 아니 다시 태어납니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우리를 대신해서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요3:9)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렇게 질문하는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 선생이면서도 이러한 일을 모르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슨 굉장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이미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새롭고 기이한 방법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던 것이 바로 죽어가던 자가 다시 난, 생명을 얻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쳐다보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느껴져도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으로 다시 났으니 영인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주님의 결론적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끝부분이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광야의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새 생명, 영생을 얻습니다. 다시 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당신은 다시 났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표도 없어도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굉장한 체험이 있어야 성령을 받아 거듭 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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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났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는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고 유대인 관원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어려서부터 성경을 달달 외우면서 배웠을 것이고 관원이라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행하시는 걸 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메시아의 예언을 믿었거나 인생의 문제와 구원에 관하여 심각하고 고민하다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왔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굉장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꼭 한 번 찾아서 만나야지 생각하고 찾아 왔는지, 혹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분일지 모르니까 미리 눈도장을 받아두고 한 자리 얻어걸릴 심산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내는 주님을 찾아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오른편,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치맛바람 청탁을 했고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에게 느닷없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화들짝 놀랐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별별 생각 다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다시 태어나라고? 그럼 나는 늙어서 안 된단 말인가? 한 자리 얻어볼 요량으로 찾아왔는데 면접시험에서 불합격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묻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음절을 보면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더 어려운 말씀을 던지십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3:6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니고데모에겐 참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단 말입니까? 이것이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란 말씀은 또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우리말 성경은 “거듭 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만, 영어성경을 보면 “Born Again" 다시 난다는 뜻입니다. 즉 “거듭”이 아니고 “다시”가 맞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여태 살아온 것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효! 싹 지우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자라온 너는 육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영이요, 그 다시 태어난 영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도 성령으로 다시 영으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육신인 인간이 어떻게 영으로 다시 난단 말입니까? 그런데 7절을 보면 주님께서 “네가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이 붑니다. 나무가 흔들리고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안 보입니다.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붑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Born Again합니다. 성령으로 영으로 다시 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거듭, 아니 다시 태어납니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우리를 대신해서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요3:9)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렇게 질문하는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 선생이면서도 이러한 일을 모르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슨 굉장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이미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새롭고 기이한 방법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던 것이 바로 죽어가던 자가 다시 난, 생명을 얻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쳐다보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느껴져도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으로 다시 났으니 영인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주님의 결론적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끝부분이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광야의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새 생명을 얻습니다. 다시 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당신은 다시 났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표도 없어도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굉장한 체험이 있어야 성령을 받아 거듭 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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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아버지!"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 성경말씀은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그 영 안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종의 영은 헬라어로 “프뉴마 둘레이아스”입니다.
종은 그 주인에게 생사여탈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일반적인 해석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종의 영을 받았지만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영’을 어떤 영어성경은 Spirit of son ship, ‘아들 됨의 영’으로, 또 어떤 영어성경은 Adoption, ‘양자로 삼는 영’으로 번역하는데, 헬라어 원어는 ‘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이므로 “아들 됨의 영”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무래도 옳을 것 같습니다.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 아들 삼는다면, 죄인이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신분변경이 된다면 ‘양자 삼는 영’이 맞겠지요.
그러나 죄인이었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다면, 새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양자가 되며 ‘양자의 영’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계속 읽어보면 “양자의 영(아들됨의 영이 보다 합당한 번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부르짖는 것일까요?
“아바 아버지”에서 ‘아바’라는 헬라어는 ‘αββα’로 두 알파 사이에 베타가 두 개가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바’ 보다는 ‘아빠’가 더 가까운 발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아들 됨의 영’ 안에서, 성령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크락소멘, 부르짖는다, cry, 운다는 것입니다.
왜 헬라어 ‘크락소멘(동사원형은 크락소), 운다, 부르짖는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갓난아기로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서 운다는 것입니다.
금방 태어나서 안 우는 아이 있습니까?
갓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 난 아기가 우는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

억지로 우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부르짖는 것도, 지어내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속으로부터 저절로, 억제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울음이요 부르짖음일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그 옛사람을 벗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이 죄악 된 세상, 죽음과 멸망의 파도로 넘실대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멸망으로 끌고 가는 더럽고 무서운 죄에서 벗어나,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 부르며 우는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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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Sanctification)
(관련말씀: 로마서 7장 계속입니다.)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부르짖던 사도바울이 25절에 이르러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고 찬양합니다. 죄와 사망의 고통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터져나오는 사도바울의 찬양이 언뜻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절규하다가 갑자기 이 찬송을 하는 것은 “아하, 이토록 절망적인 죄인,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는, 구원해 놓아도 죄인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원하셨구나!” 하는 깨달음과 감사와 환희일 것입니다.
바로 뒤에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아, 그렇구나, 구원받은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소유(노예)이고, 나의 육신은 여전히 죄의 법의 노예로구나.” 하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방법을 깨달은 깨달음일 것입니다.

“대신 죽어주심으로 죽음을 면한 죄인”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구원 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죄를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우리 연약한 육신이 죄의 법을 이길 수 없다 해서 죄와의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듯,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또한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죄 때문이라면 우리가 어찌 다시 죄를 짓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4절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 명령합니다.

그러나 죄와 싸운다고 해서 우리가 온전히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평생 온전히 성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화(Sanctification)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갈 때까지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화되어서, 거룩해져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죽어주심으로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도 여전히 죄인일 것입니다.

출애굽기 29장(레위기에도 있음)을 보십시오.
제사장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에게 청색, 홍색, 자색실로 수놓고 보석을 물린 아름다운 제사장 옷을 입힌 다음, 하나님은 그들의 오른 귀, 오른손 엄지, 오른발가락 엄지에 희생제물의 피를 바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피와 기름을 옷에다 뿌리라고 하십니다.
그 멋진 제사장 옷을 입은 제사장들의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끔찍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와 그의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갈 때 이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평생을 죄와 싸우며 아버지 앞에 이르기까지, 죄에 질 때마다 어린양의 피를 뿌리며, 우리의 손과 발이 피투성이가 되고 우리의 옷이 피와 기름범벅이 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서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피투성이가 된 우리를 향하여 “너와 너의 옷과 너의 아들들과 너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하고 성화(Sanctification)를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온전히 성화가 완성되고 완전히 거룩해질 것입니다.

죄악과 유혹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말세가 가까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왠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 죄에 둔감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까지 죄 속에서 태연히 살아가야 할까요?

육신이 연약하다고 해서,
어차피 죄의 법을 이길 수 없다고 해서,
온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죄와 피나게 싸우지 않아도 구원은 받는다고 해서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리하여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말끔한 차림과 맨송맨송한 얼굴로 하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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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말씀: 로마서 7장)

예수 믿고서 누구나 한 번 쯤 그런 의구심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이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혹시 죄 지으면 도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때 회개함으로 지금까지의 죄는 모두 사함 받는 것은 알겠는데 그 다음에 다시 죄를 지으면 그 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혹시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천주교는 고해성사와 선행, 그리고 수양을 통하여 성결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면 예수님을 따라 거룩해진다는 것이지요.
기쁜 소식 무슨 교회인지 하는 소위 구원파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순간 의인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거듭 난 의인은 죄를 지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죄는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의인에게서는 죄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의인이 행하는 모든 것은 설사 도적질과 살인이라 할지라도 의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런 식의 대답들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 믿었다고 다시는 죄를 안 짓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예수 믿었다고 그 순간 몸과 마음이 천사와 같이 거룩해집디까?
아닙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구원하기 전에도 죄인이요, 구원해 놓아도 죄인입니다.
통째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씻거나 고치는 방법 따위로는 애당초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고쳐질 수 있다면 아들을 내어주실 게 아니라 고치는 방법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대신 죽어 주시는 방법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이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게 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렇다고 죄로 인해 죽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죽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헛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의(Justification)란 “죄 없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죄 없는 것으로 친다.”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죄를 말끔히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대신 죽어주는 방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은 받았지만 심령과 육신이 믿는 순간 모두 의롭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주님 오시어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여전히 육신 속에서 죄와 싸우며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7장은 구원 받은 자가 죄와 싸우는 처절한 부르짖음입니다.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죄에 팔렸다는 것은 죄의 소유물, 곧 죄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내가 율법 지키고 싶다고 지킬 수 있고 죄의 명령을 거부하고 싶다고 거부할 수 있다면 나는 죄 아래 팔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도대체 구원 받은 내가 왜 이 모양이냐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가 하는 것을 내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않는 것,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느냐 말입니다.

“(롬7:22-2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구원 받은 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나 도대체 죄를 이겨내지를 못 하겠다는 것입니다.
번번이 죄에 지고 마는 그 곤고함으로 인하여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사도바울이 한 법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은 일종의 법칙이라는 뜻입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에너지 불변의 법칙 같은 법칙 말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 속에 사는 인간은 절대로 마음의 법으로 죄의 법을 이겨낼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육신을 입고 사는 사람이 죄를 넘어설 수 있다면 그것은 중력의 법칙을 이기고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사처럼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죄를 이길 수 없고, 따라서 죄와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의, 곧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선언’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기까지, 주님 오시는 날까지 피를 흘리며 죄와 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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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죄, 진짜 도적질>
- 관련말씀: 로마서 7장 7-14절

죄에 너무나 둔감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 어때? 세상이 다 그러는데 뭐가 문제냐?” 하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말이나 도적질 정도는 죄로 여기지 않으며 자신에게 불리하면 거짓말해도 정당하다고 가르치는 세상입니다. 국민학교 학생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가 안 훔쳤다고 거짓말을 하며 돈을 훔친 캐셔도 딱 잡아 뗍니다. 미국법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을 정당방위로 인정하고 있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한국법원도 감금이나 강제, 위계, 심지어는 미란다법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의자가 한 자백의 법률적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간첩도 무죄방면을 하고 있습니다.
도적질이 죄가 아니라 도적질하다가 들키거나 도적질했다고 자백하는 것이 죄인 세상, 도적질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는 수사행위가 범죄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세대는 죄에 대한 집단 무감각증과 마비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그런다고 해도 죄는 죄입입니다. 세상이 변해도 죄는 죄입니다.
양심이 죄를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만물보다 부패한 인간의 심중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죄와 관련된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죄 문제가 없다면 기독교는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세상의 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만유의 주(主)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니거나 우주만유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대한 죄는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심판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토록 지으심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도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도적질해서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사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여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가 주인노릇 합니다.
탐심과 우상으로 놀아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애인이 도적과 놀아나듯 원수와 놀아나고 더럽혀지는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그 죄를 모릅니다.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착하게 살면 됐지,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자기 자신을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탈취한 죄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이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있다가 율법이라는 거울을 들이대니까 그제야 죄를 보고 깨닫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진 죄를 보고도, 죄를 깨닫고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주인노릇을 쉽게 포기하지 못 합니다. 탐심 때문입니다. 탐심, 자신을 자기것으로 삼으려는 도적심보 말입니다.
탐심은 죄를 깨달은 다음에도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고 주인노릇을 계속하게 만듭니다.
탐심은 기회를 보아 율법이라는 거울을 피해 자기의 욕심을 이룹니다.

결국 모든 죄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죄인은 탐심 때문에 자기마음을, 자기자신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지 못 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 자기, 자신의 주인 노릇하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바울은 바울서신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아니 바울자신에게까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 도둑놈들아..!!!".

아, 우리는 계속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탐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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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군병


그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만일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 자격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면 우린 “만고 땡” 아무 할 일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죄에 순종하지 말고 의에 순종하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순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너희 꼴이 어떻든, 자격이 어떻든, 능력이 어떻든, 오합지졸이든, 설사 절름발이요, 소경이라 할지라도 군대의 소속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네가 누구의 명령을 듣는 군병이냐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2, 13절을 봅시다.
“죄가 너의 몸에 왕 노릇하지 못 하게 하라, 너의 몸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
이것은 새로운 사령관의 명령입니다. “네 소속을 분명히 하라, 너의 사령관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 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너의 사령관이 더 이상 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은혜 사령관 아래에 소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15절: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안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세례를 받아, 홍해를 건너, 하나님의 군대, 천국을 향해 가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제 죄 사령관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우리의 사령관이신 은혜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달콤하고 추악하고 교활하고 무서운 죄 사령관에게 굴복하고  속아서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우리의 사령관 은혜 사령관에게 진짜 진심으로 스스로 자진하여 마음을 다 하여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그리고 다음절, 16절부터 순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홍해를 건너와서도 애굽의 지시를 받고 육신을 통해 전달되는 죄의 명령에 따른다면 당신은 겉으로만 하나님의 군대이지 실상은 죄 군대 소속입니다.
하나님의 군대 안에 속한 스파이입니다. 가짜입니다. 사형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믿고 지금 당장 변화하여 천사같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이 흰 눈 같이 거룩하고 성자같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애굽 노예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예수 믿고 세례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적 죄성과 습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나 하나님은 단 한 가지, “너의 소속이 어디냐? 네가 누구에게 순종하느냐?”, 이 한 가지를 물으십니다.

이 세상의 온갖 고난과 유혹 속에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 어려운 줄은 압니다. 그러나 순종하십시오.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더러운 이익이나 부정한 방법이나 추악한 속임수에 순종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돼지를 먹이로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군대로부터 이탈하게 하려는 마귀의 유혹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하달되는 죄의 명령에 순종하면, 눈 딱 감고 한 번만 불의를 저지르면 선악과의 달콤한 열매가 주어지고, 돌덩이가 떡덩이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탈영하는 길이요 죽음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단호하게 죄의 유혹을 물리치면 고통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군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군병들이 적장이 내미는 달콤한 유혹의 미끼를 물고 낚여 갑니다.

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께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과 만물이 그 발 아래 엎드리는 영광과 권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없겠습니까?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한 군병에게 놀라운 축복과 예비하심이 왜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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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럴지라도


어느 기독교 웹사이트에서 읽은⌈미안하다, 죄인이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힘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순결을 지켰습니다. 미안합니다.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공평과 정직을 행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처벌이 두려웠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남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미안합니다. 보답이 돌아오길 기대했을 뿐입니다.
나는 세상쾌락을 멀리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돈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저 그게 속 편히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그 본성과 본질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돼지도 수세식 우리에 계속 목욕시키고 닦아주면 얼마든지 오물 속에 뒹굴지 않은 깨끗한 동물로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돼지일 뿐입니다.
인간도 죄를 지을 수 없는 환경 속에 두고 24시간 감시하고 지키면 죄 안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죄인일 뿐입니다.

사과에 칼질을 하면 사과즙이, 복숭아에 흠집을 내면 복숭아즙이 나와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善)이라면 오른 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어야 하고, 원수도 사랑하여야 하며, 찔러서 상처를 입히고 설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해도 그 말과 행동과 마음에서는 악(惡)이 아닌 선(善)과 축복이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금이나 보석은 오물 속에 넣어도 금이요 보석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거룩하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고 변질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예수 믿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크리스천이라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지만, 예수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이 마음, 여전한 죄성은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나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가짜 크리스천인가?” 이런 고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조차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몸부림을 친 흔적이 로마서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롬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바울이 이럴진대 저와 여러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죄의 본질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믿고서도 도무지 변화되지 않았다 해서 낙망하거나 구원을 의심하지는 마십시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홍해를 건넜지만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벽돌 굽던 노예의 성품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행군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애굽의 고기가마 곁에 머물고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마늘을 먹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서 여전히 변화되지 못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군병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도무지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단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격이나 능력이 전혀 없는데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구원하시고, 가나안을 정복할 능력이 전혀 없는데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으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단 말입니다.
만일 인간의 본질이 바뀔 수 있다면 바꾼 다음 구원하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바꾸어지지 않는 죄악의 본질을 가진 죄인을 구원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 것,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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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 명령을 따르는가?

대장쟁이
ㅇ 로마서 6장 13절 =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ㅇ 로마서 6장 16절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성경은 세례를 예수와 합하여 죽는 것으로 말씀하면서 동시에 애굽 세상으로부터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를 지나며 세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는 애굽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광야엔 오직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천국에 비유되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험한 광야를 전진해 나갈 뿐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군대'라고 부르십니다.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군대편제로 편성하십니다.
무기도 없고 훈련도 한 번 안 받아본 오합지졸들로 말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 남자 20세 이상 60만이 넘는 대군을 열 두 지파, 12개 사단병력으로 나누시고, 동서남북에 3개 사단병력씩으로 군단을 배치하시고, 레위지파로 본부참모, 모세를 야전사령관으로 삼으시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지휘통솔을 하십니다.

“약진 앞으로! 부대정지! 오늘밤은 여기에서 야영한다, 텐트치고 은폐엄폐 실시! 아침 다섯 시 기상, 식사시간이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이거 완전 군대입니다. 최종공격목표는 가나안 고지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열두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는 ‘우리가 메뚜기? 아고, 다 죽었구나,’ 싸워보지도 않고 통곡을 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 집단항명을 하고 단체탈영을 시도합니다.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전능하신 총사령관이신 하나님, 한 사람의 전사자도 없이 전원 가나안에 입성하게 하실 능력의 하나님을 믿지 못 하고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심리전에 말려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군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가나안 땅 천국으로 가려고 하나님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세례를 받아 홍해를 건넜습니다.
우리는 이제 절대로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되돌아가면 하나님으로부터는 근무지 이탈이요, 탈영병이라 총살감이고, 세상으로부터는 배신자요, 적군이라서 교수형감입니다.

오늘 로마서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2-13)"

이 말씀은 좋은 말로 “너희를 살리려고 아들을 내어 주었잖니? 너희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죽었지 않니? 그러니 너희도 이렇게 해 주면 참 좋겠구나.”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사령관의 명령입니다.
“이제는 죄가 너를 주관치 못 하게 하라, 죄가 너의 몸의 왕 노릇 하지 못 하게 하라, 죄의 명령과 지시를 받지 말라. 너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서 이적행위하지 말라. 너희를 하나님께 드리라, 저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추상같이 엄한 명령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으면서도 적당히 죄를 짓고, 주님 싫어하시는 줄 알면서도 죄 가운데 살고,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세상과 타협하는, 애굽의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이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올바른 믿음과 신앙고백 없이 홍해를 건넜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군대지 속으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양심이 더러운 죄를 씻지 못 한 가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가짜성도는 아니라고요?
가짜 성도가 아니라면 왜 세상 죄의 유혹을 떨치지 못 하고 죄의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까?
이 편 군대에 속하였으면서, 왜 저 편의 지시와 명령을 받고 따르느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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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종이 어떤 순종이었는지

대장쟁이

로마서 5장 12-19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은 온갖 오해를 받으시면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지라 아파하시고 피곤해하시고 목말라 하시고 배고파하시고 슬퍼하시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믿어주마.’는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피투성이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2장 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범사에”는 영어로 ‘in every way,’ ‘모든 면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면에서 형제와 같이 되셨다, 즉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으로 같은 형제인 레위인을 세우신 것은 한 형제여야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같은 핏줄, 같은 형제의 입장이 되어 형제를 위하여 죄사함을 구하며 간절히 하소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입장이 다르다면, 진심으로 간절하게 죄사함을 구하는 제사장 직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으로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자기 몸을 드려 온 인류의 죄를 해결하여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던 일이 실패했다고 칩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죄와 죽음, 심판과 멸망이 자기와는 상관없으니까, “에이, 구원하려고 했는데 실패했군, 할 수 없지.” 하고 도로 하늘로 올라가버리면 그만입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은 겉모양으로만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실패하면 우리 죄인들도 끝나지만 예수님도 함께 죽는 겁니다. 한 형제, 한 운명체가 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심한 통곡과 간구로 기도하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영광 다 버리고 십자가 지셨네.” 하고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처절한 사랑이었는지,
예수님의 성육신이 얼마나 비장한 결단이었는지, 그 순종이 어떤 순종이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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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 하나님

대장쟁이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예수님을 내어주셨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다는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몸을 드린 속죄제사를 하나님이 만족하게 받지 아니하셨다면
예수님은 결코 다시 살아나실 수 없으며
우리는 여전히 진노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드린 말씀이지만 다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왜 오직 예수님이어야 하는지.....

죄인 된 인간은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죄 때문에 죽지 않으면 안 되고 죽지 않을 길이 없는 것이 죄인 된 인간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죄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살기 위하여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죄 값을 누군가가 치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죄의 값을 치러준다는 것은 대신하여 죽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 인류를 다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누군가가 대신 죽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모든 인류의 대속자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속죄제물로 짐승을 잡았지만 짐승을 아무리 많이 잡은들 사람 하나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 같은 영적존재도 안 됩니다.
그런 존재는 죽어줄 수조차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만으로만 대신할 수 있지 다른 존재로는 대신이 안 됩니다.

둘째는 그 대신 벌 받아 죽어줄 사람 자신이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자기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을 대신하여 죽어줄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설혹 죄 없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은 한 사람만을 대신해 죽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를 위해 대신 벌 받고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온 천하인간보다 더 가치가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대신 죽어주시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어떤 존재라도 천하의 모든 인간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대신 벌 받아 죽어주신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뿐 아니라 우주만유보다 더 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최초의 가장 고귀한 피조물, 미가앨 천사장이라면) 예수님의 속죄제사는 온 인류를 구할 수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앞절 24절을 보십시오.
(롬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하나님,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데 익숙해 있습니다만,
사실은 하나님이나 주님이나 다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24절을 다시 읽는다면 “곧 예수 우리 하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니라.”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신비스럽고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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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4:24-25)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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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앞에서 걸어 완전하라


(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래가 몸종 애굽여자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이 지난 때입니다. 몸종이 낳은 아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브람의 아들이요, 아브람의 86세 노년에 낳아 13년을 키웠으니 정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99세 때 하나님이 다시 오신 것입니다. 86세도 많은 나이인데 99세면....,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보니 99세까지 사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지난겨울 할머니 한 분이 100세 못 채우시고 99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그 99세가 되었습니다. 99세가 된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99세가 될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으니 아브람과 사라가 무슨 희망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아무래도 이스마엘이 하나님이 주신 씨인가 보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통하여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려는가 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운명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이라고 별 수 있겠냐, 다 그런 거야." 하며 행복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99세 때에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개역한글성경에서 “행하여”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선행을 하라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행’은 한자(漢字) ‘갈 행(行)’으로 ‘가라, 걸어라’ 하는 뜻입니다. 여기 뿐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가는 것, 걷는 것’을 “행(行)하는 것‘으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해석에 주의를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시면 ’walk'라고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13년이나 침묵하다 오셔서 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꾸중이요 경고의 말씀 같습니다. 과연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아니하고 곁길로 걸어갔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곁길로 갔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몸종과 동침하라 한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래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엎드려 불경스럽게 (속으로 씨익, 키득키득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래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목같이 늙었으니 하나님인들 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자기들 손으로 스스로 들인 뻐꾸기 새끼 이스마엘이나 키우면서, 그 이스마엘을 후손(그리스도의 계보)으로 믿으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 하였으니 하나님을 우습게 본 것이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아니한 것이요 엉뚱한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리는 셈인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앞에서 걸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 해 일을 저질러 행하는 것입니다. 이게 곁길로 가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 하여 애굽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안겼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지 못 한 하나님으로, 곧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약은 꾀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못 이루실 것이 없고 능치 못 한 일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필요한 것도 해드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다만 하나님 앞에서 걸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며 지키시며 행하시며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자가 완전한 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빛 가운데 의심없이 걸어가는 자가 되십시다.


참고: <요한일서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 보시다시피 요한일서 1장에도 우리말 성경은 “행하면”으로 되어 있으나 영어성경(NIV)는 ‘걸으면, walk)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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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대장쟁이

구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무엇도 개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하나님께서 이루지 못 하실까봐 자신의 몸종 애굽여인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하여 하갈이 잉태하였습니다. 자신이 잉태함을 깨닫자 하갈은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래가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았다 하여 하나님께서 그걸 사용하실 턱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끼어들어 만드는 것은 다툼과 고통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그 불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뻐꾸기라는 새가 생각났습니다. 뻐꾸기는 우는 소리가 ‘뻐꾹, 뻐꾹“ 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시계의 시각을 알리는 소리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뻐꾸기란 놈의 하는 짓이 몹쓸 짓입니다. 맷새, 종달새, 떼까치, 할미새 같은 자기보다 좀 작은 새들의 둥지를 찾아다니며 알을 낳습니다. 보통 열 두어 개의 알을 이곳저곳에다 한 개씩 낳으니 열 두어 새들의 둥지와 그들의 인생(조생?)을 망치는 셈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다른 새는 뻐꾸기의 알을 자기의 알과 함께 열심히 품습니다. 그런데 뻐꾸기의 알이 제일 먼저 깨어납니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뻐꾸기는 다른 알들을 모조리 둥지 밖으로 밀쳐내 버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미새는 자신의 새끼들을 다 죽인 원수인 뻐꾸기 새끼를 자신의 새끼로 알고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먹이며 기릅니다. 나중엔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커진 새끼 뻐꾸기를 먹이느라 등골이 다 빠집니다. 너무나 불쌍합니다.

사래와 아브람의 불신이 낳은 애굽여종 하갈의 아들....., 뒤늦게라도 사래가 후회를 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갈과 하갈의 아들이 아브람과 사래의 약속의 아들을 밀쳐내 버리고 둥지를 차지하는 뻐꾸기가 되는 꼴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브람과 사래가 뻐꾸기를 자신들의 둥지에 끌어들인 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하는 불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사래가 잉태한 하갈을 내어 쫓습니다. 뒤늦게라도 하갈을 내쫓으니 잘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뿌린 씨는 자신이 거두어야 합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자신들의 불신의 열매, 하나님의 일에다 뻐꾸기를 불러들인 씨앗의 열매를 후손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남겨주게 됩니다. 그 뻐꾸기 둥지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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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여종 하갈이 뻐꾸기(?)를 임신한 몸으로 쫓겨나 광야의 샘 곁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갈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를 셀 수 없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이스마엘이 들나귀 같이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은 그를 치고 그는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갈은 “내가 어떻게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하면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로 부릅니다. 그리고 사래에게 돌아가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태어나지 않게 하시거나 태어났더라도 죽거나 후손이 번성하지 않도록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번성하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대한 세력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부르신 자, 믿는 자들을 번성케 하시고 이기게 하시면 좋을 것을... 싶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을 따라 난 아들과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아들로 비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나타나셨고 이스마엘도 번성케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나 원수의 자식들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고 계십니다. 전혀 차별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차별 없이 다 사랑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들보다 하나도 더 나을 것 없는 죄인이었던 내가 구원을 얻은 것으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교만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원수이었을 때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사 아들을 내어주신 것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셨던 것처럼, 우리도 원수같은 저들에게 복음 들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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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 속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곧 예표(豫表), 그리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고 이를 위하여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고 게다가 늙어서 쓸 만한 구석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도우심과 쓰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아브람이 복을 받은, 또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후손이 아닙니다. 참 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 곧 구세주의 계보로 쓰임 받으려고 불러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복을 받을 자격,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기는커녕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도 못 했고 예수님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코앞의 후사 걱정, 아들 없이 죽는 걱정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이시면서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은 ‘후손들’이 아닌 ‘후손’, 단수명사였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후손을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후손'은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굳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고 믿었더라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그제야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거셨는데 또 증표를 요구하다니 참으로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을 요구하는가 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거신 하나님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은 이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히브리어로 ‘브릿트’하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습니다. 과연 아브람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까요? 아무튼 솔개가 내려앉을 때 쫓았습니다. 그러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났습니다. 히브리어 “브릿트”는 같은 발음이지만 ‘쪼개다’라는 단어도 되고 ‘약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도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짐승을 쪼개어놓고 그 사이를 함께 지나면서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그 짐승처럼 쪼개어져 죽임당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목숨을 거는 약속인 셈입니다. 거기를 하나님이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리로 함께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그 복을 받을 당사자인 아브람은 자빠져(?) 잠자고 하나님 혼자서 ‘하나님의 목숨을 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왜 삼년 된 희생물들일까요? 그것들은 삼년 공생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새는 왜 쪼개지 아니하였을까요? 비둘기는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솔개는 왜 덤벼들었을까요? 솔개는 훼방하고 의심케 하는 사단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쫓는 것은 아브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는 횃불, 한없이 뜨거운 사랑과 ‘열심’으로 하나님은 그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을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실 약속이었습니다. 아들을 쪼개어 지성소의 장막을 가르고 부르신 자들이 그리로 지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실 것을, 죄인들이 피 흘려 죽으신 그 아들의 몸을 지나면서 그 피로 모든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복되게 하실 것을 아브람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과연 그걸 이해했을까요? 못 했겠지요. 그러나 그 광경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일평생 한시도 잊지 못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피가 흐르는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의 예표였기 때문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평생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그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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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

대장쟁이


내가 무슨 공으로 세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혹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거나 하나님을 오해하는 생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빚을 지실 분이 아닙니다.
무엇이 부족하시거나 필요하시거나 우리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한 순간도 그렇지 않은 때가 없으십니다.

태양을 보십시오.
지구에서 1억 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태양은 지구가 130만 개나 들어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1초에 수소 약 400만 톤을 핵융합하여 헬륨으로 변환시키면서 빛과 에너지를 내뿜습니다.
수소 400만 톤이면 수소폭탄 몇 개냐고요?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몇 천억 개인지, 몇 조 개인지..
그렇게 엄청난 수소를 태우는데 태양이 금방 다 타버리는 거 아니냐고요?
그런 걱정 필요없습니다. 태양이 가지고 있는 수소는 수십억년을 쓰고도 앞으로도 수십억년을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랍니다.

인간 중에 누가 그 태양의 에너지를 사용한 대가로 연료를 넣어 주고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공기와 물을 쓰고 그 사용량을 보충하여 되갚아 드리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거저 쓰고 공짜로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태양을 있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태양 위에, 그 태양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무슨 도움이 필요하며 무슨 빚을 지시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에는 아무것도 도움 받지 않으시면서 모든 것을 베푸시는 전능자, 창조주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그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이 아니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품는 순간 그것은 내가 무엇을 넣어 주어야 태양이 나를 비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해 드려야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내게 먼저 빚을 지고 그 빚을 구원으로 갚으시는 "빚 지시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우주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다만 감사와 순종밖에,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밖에 드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비춰지게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별을 보여주시면서 후손을 약속하실 때 믿어서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 후손은 복수가 아닌 단수명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시면서 무엇을 약속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며 약속하고 계십니다.  
"저와 같으리라."
그러므로 그저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처럼.
그러면 궁창에 빛나는 영원한 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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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별을 보고

대장쟁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불러내셨을 때,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아비집을 떠나기는 했는데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하란으로 갔다가 다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가기는 했는데
기근이 들자 굶어죽을까봐 그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의 행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비겁하고 가련하고 한심한 사내의 모습입니다.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아내 사라가 바로왕에게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재앙이 얼마나 크고 무서웠던지 바로가 놀라서 사라를 돌려주고
그들을 빨리 떠나보내려고 금과 은, 육축과 노비를 아브라함에게 잔뜩 지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이 믿음 없는 아브라함에게 한 마디 꾸중도 안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이 조금 자랍니다.
그래서 조카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조카 롯이 붙잡혀갔을 때 318인 거느리고 쫓아가 찾아오는 대단한 용감성도 발휘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믿음은 연약하기만 하였습니다.

15장을 보십시오. 그돌라오멜을 쳐부수고도 아브라함이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만 내게 있으면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자식이 없이 죽는 것이 더욱 두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제게 씨를 안 주셨습니다. 이 하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저의 후사입니다, 씨를 안 주시니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믿음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한 마디도 꾸지람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여 주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런데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 참 희한한 일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니까 그것을 믿었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더 희한한 것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믿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왜 밤하늘 별을 보고 믿은 것이 의가 되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을 찾아봅시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약속의 자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6)

하나님께서 그 날 밤 밤하늘 별을 보여 주실 때 하나님은 "네 자손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자손"이라고 단수형으로 말씀하셨답니다.
아브라함은 "아니, 하나님. 후손들이라고 하셔야 맞잖아요. 하나님은 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어 문법을 잘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날 밤 아브라함에게 밤하늘 별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이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하늘 가득히 낭자히 흩어진 모습 말입니다.
그 살과 피를 믿음으로 먹고 영생을 얻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온 세상 가득할 것을 말입니다. 그들이 궁창의 빛나는 별들이 될 것을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잘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 말씀하시는 것을 그냥 그대로 거저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 말고는 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참 이상하다 싶습니다. 아니, 웃긴다 싶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것을 보면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믿음 없는 아브라함에게 억지로 보여주시고 믿으라 하시고 믿으니 억지춘향으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니 말입니다. 아무 자격 없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시고 나서 억지로 그를 이끌어내어 입을 벌려 복을 먹이시는 것처럼 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고보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 억지춘향으로 이끌려 나와 하늘의 별을 보고 억지로 먹이시는 믿음을 받아먹고 영광의 자녀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욥기 16)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대장쟁이

산염소나 사슴의 새끼들은 태어나 금방 뛰어다니며 곧 어미를 떠납니다. 들나귀 새끼는 제가 알아서 들판에서 살아갑니다. 타조는 모래에다 알을 낳고는 잊어버리지만 그 알은 태양으로 따뜻하게 데워지는 모래에서 부화됩니다. 어미가 돌보지 않아도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동물들 가운데는 용맹스럽고 날랜 말이나 하늘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같이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은 용기와 능력을 가진 것들도 있습니다. 수천리를 회귀하여 알을 낳고 죽는 연어나 수천, 수만리를 날아가는 철새나 멕시코만을 건너 날아가 알을 낳는 나비, 바다속의 기이한 동식물까지 보면 볼수록 오묘하고 신기한 하나님의 세계는 신비하고 오묘하며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와 능력과 손길이 핑계할 수 없도록 나타납니다(롬1:20). 하나님께서 욥과 친구들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세계, 천지창조와 온갖 들짐승의 이야기를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거룩하실 뿐 아니라 실수나 잘못이 없으시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시며 피조세계를 빠짐없이 지켜보시고 주관하시고 기르시고 계신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려는 것일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 참새보다 더 귀한 욥을 외면하고 욥의 고난을 내버려두실 리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우치시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욥에게 물으셨습니다.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변박하는 자’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은 ‘잇소르’, ‘비난하는’ 자입니다. ‘변론하는’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성경은 ‘검사가 피고를 논죄(論罪)한다.’ 할 때 쓰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을 감히 비난하고 논죄하다니요. 말도 안 되는 것이요, 황공하고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세 친구들과 논쟁을 하면서 스스로 ‘누가 하나님과 변론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나는 순전하다. 하나님이 내 의를 빼앗아가셨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게 하시거나 자신이 이유없이 고난당하고 있는 것을 못 보고 계시거나, 혹은 모르고 계시거나, 혹은 외면하고 계시거나, 혹은 부당하게 자신을 징벌하고 계신 것이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비난하고 논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이 황공한 말씀 앞에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납작 엎드립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말을 더하면 죄밖에 더해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하나님의 이 말씀은 욥이 지금까지 해온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실 수 없으며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기다리지 못 하고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징벌이 잘못 된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판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결론을 내리는 꼴이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질문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고, 밟고, 얼굴을 싸서 두고....” 인간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지도 못 하며 판단하여 판결을 내릴 수 없으며 징벌을 할 능력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위엄과 존귀와 영광을 옷 입으시며 찬란한 광채를 발하시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존귀케 할 능력도 전혀 없습니다. 들의 백합화처럼 하나님께서 입혀주셔야 하며 까마귀 새끼처럼 하나님께서 먹여주셔야 하는 연약한 존재요 불쌍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단 하나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이런 인간들이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나대는 오늘날의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스럽고 가소로울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아니하며 죄악의 길을 달려가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안타까움은 또 어떠할까요. 지금 이 시간에도 천지만물을 기르시며 우리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하나님, 끝날 심판으로 공의를 행하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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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5) 네가 무엇을 아느냐?

대장쟁이

인간은 피조물이며 유한한(finite)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신(infinite) 분이십니다. 유한과 무한은 비교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유한한 인간은 무한히 작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욥과 세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이 왜 이러한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토론인지 논쟁인지를 벌이고 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앞 시간에 엘리후가 욥이 자기의 의를 주장한 것이 하나님 앞에 악이라고 지적하였지만, 그리고 욥에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라고 담대하게 말했지만 엘리후인들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알 인간은 없습니다.  다른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쳐 진리로 이끌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드디어 38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첫마디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엘리후를 향한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욥과 세 친구, 엘리후 모두에게, 아니 우리 모든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柱礎)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욥이 알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물으셨습니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네가 바다 근원(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겨우 수 십 년을 살았을 욥에게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年數)가 많음이니라.”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하나님의 질문은 39장에 들어가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욥은 단 한 마디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알기는커녕 생각조차,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뿐입니다. 그 어마어마하고 끝 간 데 없이 광활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창조세계 앞에 욥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과 입을 딱 벌리고 놀라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은 욥과 그 친구들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자신들이 스스로를 똑똑하게 여긴 것과 지혜롭다고 자만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아, 그 끝을 헤아릴 수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도 없는 놀라우신 지혜의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만유의 끝은 어디인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하시는 여러 말씀 중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가 가슴에 새삼스럽게 닿았습니다. 그 까마귀 새끼가 바로 우리 같아서입니다. 광야 같은 이곳에 내팽개쳐져 먹을 것이 없어 울면서 오락가락할 때에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공급하시고 지켜주신 놀라우신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 그 지혜와 능력과 계획하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하심이 한이 없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욥기 14) 너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대장쟁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엘리후의 지적은 그것이었습니다. 말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 하면서 욥은 자기 의를 의지하고 그것을 움켜쥐었다는 것입니다. 욥이 자기의 의를 주장한 것, 하나님이 욥의 의를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교만이요 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 인간의 의는 하나님께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36장에서 엘리후는 계속 말합니다.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거만하고 건방진 것 같기도 한 엘리후의 이 말은 영적비밀,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함에서 오는 것일까요?

엘리후는 17절부터 다시 욥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욥이 바로 악인이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욥이 분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지적입니다.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이는 어떤 큰 대속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행하시는 엄위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폭풍우와 파도와 지진이 땅을 뒤흔든다 해도 땅이 잠잠하고 고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것처럼 너는 고요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분격(분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본분이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본 인터넷 신문 기사 한 토막입니다. “건강음식-화를 다스리는 것이 장수의 첫걸음. 무엇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해왔을까. 바로 노여움과 분노다. 분노로 몸을 가득 채우는지, 도전으로 승화시키는지에 따라 수명이 결정된다. 노여움은 분한 감정에서 유발되고 이는 분노로 파생된다. 쓸데없는 노여움은 자기 명줄을 끊는 칼이 되고 칼날선 분노는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어 명을 단축한다. 이것들이 자신의 몸 안에 암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즉 마음에 노여움을 품어 그것이 쌓이면 스스로 독이 되는 것. 분함을 품지 않고 노여움을 없애는 것이 즐겁고 유쾌하게 장수하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도 분노가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욱-’ 하는 성격, 순간적인 분노폭발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분노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파괴하고 비극을 초래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분노를 다스리라고 권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기의 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빼앗아 가셨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엘리후가 지적한 것입니다. 결국 욥의 이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완전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불만이라는 것을 욥 자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확신한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반드시 선한 뜻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러한 분노는 잘못일 것입니다. 죄 없으시면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전혀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아버지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하여, 엘리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수많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순교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너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분노란 당치 않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 이것이 진정 최고의 신앙일 것입니다.


(욥기 10)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대장쟁이 ㆍ 2014-04-18 (금) 17:21 IP: 96.235.163.16     ㆍ조회 235  

욥기 24장에 이르러 욥은 왜 악인이 형통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히 징벌하지 않으시는가고 묻습니다.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날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욥은 악인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그들은 거친 땅의 들 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또한 악인들은 하나님의 광명을 피하고 어두운 길을 걷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의 말대로 이 세상은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렇지 못 한 자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이지고 있으나 하나님은 눈을 감고 계신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심판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욥은 또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고 말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凡人)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욥은 지금은 악인이 형통하고 심판은 보이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임할 것을 믿으며 끝까지 낙심하지 아니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 같은 대답에 대하여 수아 사람 빌닷이 다시 나섭니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하나님은 권능(통치권)과 위엄(두려움)을 가지신 주권자로서 땅에 평안을 주시며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또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빌닷의 말도 옳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깨끗지 못합니다. 빌닷이 말한 대로 사람은 죄로 인해 죽고 썩는 존재요 인생은 벌레와 같습니다. 이것은 염세주의 사상이 아니라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억울함을 당한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피조물임과 죄인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구원의 출발점에 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죽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 곧 인간이 존귀함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곧 참된 지식과 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 길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어엿이 설 수 있는 의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원파에 구원이 있을까?>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침몰, 안산 단원고교 학생을 포함, 3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세월호가 구원파 이단 유병언의 청해진해운 소속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구원파 신도들의 맹신적 복종과 헌신을 통하여 온갖 교묘하고 야비한 수단을 동원, 재산을 축적해온 유병언의 파렴치한 행태가 밝혀지면서 세상을 아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원파는 무엇인가요?
박신찬-유병언 계열, 박옥수 계열, 그리고 이요한 계열로 나누어지는 그들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어째서 그들은 구원파에 몸을 담고 평생토록 교주 유병언에게 충성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구원파에 구원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가급적이면 짧게, 간략하게 간추려 이 문제에 대하여 쓰고자 합니다.

1. 구원파 교리
구원파의 교리는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고 구원의 핵심을 깨달아야 비로소 온전히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믿음의 비밀,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고 이를 입으로 시인할 때 그 사람은 진실로 모든 죄를 벗은 의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구원파의 핵심교리이다.

2. 구원파의 교리가 먹혀드는 이유
구원파의 교리가 먹혀드는 이유는 바로 “아하!” 하고 깨달을 때 오는 충격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크리스천들은 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은 이를 선포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구원을 받아 거듭나도 별다른 변화나 감동이 없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 확 달라지고 마음이 뜨겁고 기쁨으로 펄쩍펄쩍 뛰고 삶이 뒤집어지면 좋겠는데 믿기 전이나 믿음 후에나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마음에 의심이 생기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 지은 죄는 용서되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가, 예수 믿고 다시 죄를 지으면 도로 구원을 잃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과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교인들이 구원파의 밥이다.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연약한 크리스천들에게 다가가서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하고 물어 혼란스럽고 두렵게 만든 다음 “죄사함의 비밀”과 “의인으로 거듭나는 감격”을 가르쳐 깨닫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죄사함 받고 의인으로 거듭난” 그 감격에 일평생 구원파의 충성된 신도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구원파가 생겨나고 날뛰게 만든 것은 성도를 바로 세우지 못 하는 기성교회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이란 기쁨, 감동, 감격이나 확신, 징표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가 없어진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성도가 죄를 지었다고 도로 지옥으로 끌려간다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죄의 능력을 이기지도 못 한다는 말이냐, 성도가 구원을 얻지 못 한다면 예수님이 헛 죽으신 것이냐고 확실히 가르치지 못 하고, 바른 믿음 위에 확고히 세우지 못 했기 때문이다.  

3. 죄사함의 비밀, 의인으로의 거듭남
구원파가 가르치는 “죄사함의 비밀, 의인으로 거듭남”의 교리에는 교묘하고 무서운 함정이 들어있다. 그것은 “말씀 살짝 비틀기와 바꾸기”다. 그들은 죄의 해결에 있어 “안수”와 “전가”를 이용한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하여 세상 죄,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박옥수).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되묻는다. “이 손에 있던 죄가 안수를 통해 어린양에게 옮겨졌다면 이 손에 죄가 남아있습니까?” 그리고 답한다. “그럴 수가 없지요.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넘겨지지 않고 남는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 믿음의 코드를 꽂으십시오. 마음으로 당신의 죄를 예수님께 안수하십시오. 자, 이제 당신의 모든 죄는 한 점도 남김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러고서는 이어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죄가 남김없이 예수님께 넘어갔다면 죄인이 그냥 죄인으로 남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죄가 넘어갔다면 죄가 없는 사람, 곧 의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의인입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비밀입니다. 당신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모든 죄가 사해졌다니, 의인이 되었다니, 구원의 확신이 없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감동이겠는가?

4. 교묘한 비틀기와 바꾸기
잠깐!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파의 교묘한 말 비틀기(왜곡)를 끄집어내어야 한다.
과연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예수님께 안수하였는가?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무슨 자격으로? 세례요한이 무슨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 어린양에게 안수하는 대제사장? 예수님은 세상죄를 안수 받은 죄인이 되어 삼년동안 공생애?
말도 안 되는 왜곡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구원파는 바로 ‘우리 죄를 지시고’를 이용, 세례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안수 받은 ‘죄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해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신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아니면 죄 없으신 어린양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는가?
죄인 예수의 피는 더러운 죄인의 피인가, 흠 없는 어린양의 피인가?  
또 물어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려고 오셨는가? 우리를 죄의 저주, 곧 사망에서 구하려고 오셨는가?
당신은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가는가, 아니면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없는 몸을 속죄제물로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받으셨다. 만족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죄 없고 흠 없는 예수 어린양 제물을 만족하게 받으시고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푸시고 용서하셨다는 증거이다. 그렇다. 모든 죄인들이 용서받은 것이다. 이것이 대속(代贖 Redemption)이다.
구원파는 이 대속교리를 “죄속함”, 아니 “죄씌움 교리”로 바꾸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리고 죄인들이 의인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 게 아니라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고 말았으니 용서고 뭐고가 있을 수도 없다.  

5. 의인이 되었으니
자, 어쨌든 구원파 교인들은 감격 속에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거듭난 의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안다, 진짜로 의인이 되지는 못 한 것을. 여전히 죄인의 속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말(言語)’이다. 말의 능력.... 하나님은 ‘네 입으로 말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대로 된다는 것이다. 입으로 시인하면 시인될 것이요 부인하면 부인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 ‘의인 됨’을 지킨다.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를 죄라고 하면 죄가 된다. 그러나 죄가 아니라고 하면 죄가 아니다. 말대로 되기 때문이다. 의인이 죄를 지을 수 없다. 의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 의인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죄가 아니다.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입으로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한 죄가 아닌 것이다.  
구원파에서 늘 다그치는 이러한 가르침이 너무하다 싶었는지 이요한이라는 사람이 구원파에서 뛰쳐나와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단체를 만들면서 좀 다른 교리를 만들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영적구원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이 아직도 사단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영혼만 구원 받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초대교회 때 교회를 어지럽힌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二元論)적 이단사상이다. 이요한의 그 외의 가르침은 박신찬-유병언이나 박옥수 계열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연예인 유진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저희 교회는 기독교복음침레회와 뿌리는 같지만 구원파와는 무관해요. 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어이없고 안타깝다.

6. 구별과 종말론
이단의 공통된 행태는 자신들만이 진리에 속하고 구원을 받은 특별한 무리라고 구별하고 기성교회를 멀리하거나 심지어 공격한다는 점이다. 기성교회는 구원받지 못 한 어리석은 무리요, 타락한 종교집단이요, 그들이 구원해 내어야 할 선교의 대상이다. 거짓선지자들이 누룩을 뿌리고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 기성교회는 심지어 바벨론이요 음녀이다. 그들은 십사만사천에 속한다. 신천지가 그렇고 구원파도 그렇고 많은 이단들이 그렇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종말론이 대단히 중요하다. 임박한 종말과 심판. 모든 교회들이 무너지고 무화과 잎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떨어지는 그 두려운 날 그들은 들림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을 받아들여 유럽공동체가 단일국가로 이어지고 중동의 평화협정과 전쟁이 지구최후의 아마겟돈 전쟁과 칠년환난, 천년왕국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가르친다. 이러한 종말론이 압박감과 공포분의기를 조성하여 신도들이 이탈하지 못 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한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해석하는 이단성도 유사하다 할 것이다.    

7. 구원파에 구원이 있을까?
구원파는 명백히 이단이다. 그런데 이단이라도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그들의 믿음에 다소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된 생각이다. 이단이 무서운 것은 아주 작은 차이, 사소한 견해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차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차이를 가져오는 데 있다.
아들을 죽이려는 도적이 있다. 그 아들은 어두운 광야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바로 그 때 다른 쪽에 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 둘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나 하나는 아버지고 하나는 도적이다. 비슷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닌 도적을 따라간다면 그 아들은 죽게 될 것이다.
사단의 모습은 광명한 천사이다. 그의 말은 달콤하고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는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처럼 매끄럽다.

예수님을 죄인 만들어 죽이고 자기들은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그들,
의인이 된 그들이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가 있을까?
구원파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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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에 붕어 없는데.....^^

(짧게 쓰려고 노력했는데도 길어졌네요. 길게 쓰는 나쁜 버릇은 할 수 없나 봅니다. 아무튼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2014. 5. 9, 대장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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