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 누구를 의지할 수 있으랴.

대장쟁이 ㆍ 

[욥기 7:1-6]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그는 몹시 두려웠습니다. 함께 가 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에겐 친구가 셋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고, 세상에 둘 도 없는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 또한 그가 사랑하고 있었으나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친구로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평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는 세 친구에게 차례로 함께 가자고 청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싫다고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대궐 문 앞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함께 가주고말고. 내가 왕에게도 잘 말씀드려 줄게.” 세 친구는 누구이며 왜 그렇게 대답할 걸까요?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을 말합니다. 아무리 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둔 채 혼자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과 친구를 말합니다. 무덤까지는 함께 따라 가주지만 그를 무덤 속에 남겨둔 채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세 번째 친구는 善行(선행)을 말합니다. 선행이란 평소에는 남의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까지도 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 이야기가 꼭 성경적이지는 않지요. 선행(善行)을 우리가 죽을 때 가지고 갈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라고 바꾸어서 읽는다면 좋을 것 같네요.

인간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극한 고난이나 죽음 앞에서는 결국 혼자 남겨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결국은 혼자 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가깝던 친구라도 아무도 함께 해 줄 수 없습니다. 아내조차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 하고 떠나버린 다음 홀로 고통 가운데 남겨진 욥, 그 욥에게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셋이 찾아와 칠일칠야를 곁에 있어 주었지만, 생각하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친구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서도 인간이라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사야 2장 2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시편 146편 3절은 말씀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인간은 의지할 존재가 못 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 그 근본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은 한계를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들의 꽃 같고 풀잎 같은 존재,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46편은 오직 하나님만이 도움이시며 소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4절)

또한 인간은 공감하고 고통이나 마음을 나누는데도 한계를 가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世界觀, World View)을 가지게 됩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틀과 모양과 색깔을 갖춘 창(窓)을 통하여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똑같이 느끼거나 나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보십시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자기가 셋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욥의 친구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욥에게 충고하려고 나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나름대로 욥의 처지와 욥이 당하는 고난을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래서 충고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욥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알지도 공감하지도 못 했으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도 못 했습니다. 엘리바스의 이야기를 들은 욥은 “너도 평소에는 푸르다가 막상 마시고자 하면 말라버리는 시냇물 같은 자로구나.” 하고 실망과 분노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친구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 인생은 애당초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인생이 하소연할 곳,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7장에 들어가면 욥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순간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죽기보다 못 한 생명이라고,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러시느냐고, 나는 가련하고 불쌍한 생명이라고, 이제 내가 죽어 흙에 누우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으실찌라도 다시는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소연하며 간구합니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돌아보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건지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던 우편강도가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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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대장쟁이
[욥기 6:1-4]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진실로 엄위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저 세상종교의 한 종류로, 혹은 사상(思想)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마저도 그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심판하실 것을 안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악한 일마저 해치울 정도로 타락한 오늘날입니다. 교회에서마저 ‘경외(敬畏)가 실종되고 있는 지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일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시각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느껴지지도 않고, 아무런 응답도 없고, 아무런 역사나 기적이나 증거나 체험도 없고,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소리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 도대체 계시는 증거가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그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싸움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나 방언보다도, 성령충만보다도, 어떠한 신앙생활보다도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욥이 말로 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찾아온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들이 한 주일동안 욥의 곁에 앉았다가 드디어 욥의 고난을 놓고 토론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욥이 탄식하며 자신의 생을 저주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토론의 첫 번째 주제가 “경외”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욥이 탄식한 그 탄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생에 대한 저주.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복일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복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천한 것으로라도, 아무리 짧게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어 존재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 설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생을 저주하고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3장 26절,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입니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은 고통” 때문입니다. 욥이 누구입니까? 그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두 번이나 사단에게 자랑하신 자입니다. 욥 또한 그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도 두 번이나 그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적신으로 나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하나님이 복도 주셨으니 재앙도 주시지 않겠느뇨?”고 말한 욥입니다. 그러나 그 욥도 완전하지는 못 하였습니다. 만일 욥이 완전하였더라면 어떠한 고난, 고통도 그를 흔들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도 한계성을 가진, 극심한 고난 앞에서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욥의 탄식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 때문에 참소하는 자의 공격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그 욥에게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입을 열어 지적합니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히브리어 '라아'; ‘싫증이 나겠느냐?’) 염증이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쉽게 말하자면 “야, 도저히 못 참겠네. 보자보자 하니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구나. 내가 한 마디 안 하고는 안 되겠구나.” 그러고는 공격이 시작됩니다.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그래, 남은 잘 가르치더니만 너 자신은 그게 뭐냐?” 참으로 약점을 찌르는 아픈 지적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다시 말하면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더니, 그것이 너의 모든 것이라더니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의 제기입니다. 그리고 공격의 화살을 날립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욥이 남모르게 죄를 범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에 의한 단죄요 정죄입니다. 욥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사실은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재앙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지적이 욥에게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죄악들이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벌어지는 시대입니다. 진실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코람데오"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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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욥기를 깊이 음미하면서 살펴보는 것도 좋겠지만 42장까지 계속되는 욥기를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주마간산이 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간단간단하게라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욥기 3:1-5]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어떤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일까요? 무병장수, 부귀영화, 평안한 삶이 복 된 삶일까요? 가난과 질병, 전쟁과 재앙으로 뒤덮인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 그런 재앙과 한난을 만나지 않고 안전하고 평탄하고 순적하며 부유하게 사는 것도 복 된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인들은 고래(古來)로 ‘복(福)’자와 ‘희(囍)’자를 숟가락, 밥그릇, 베개, 장롱에까지 새겨 넣고 평안하고 풍족한 삶의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평생 평안히 살다 가는 것이 복 된 인생일까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생겨나서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 알지 못 하는 채 그저 태어나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이 복이라면 인생은 동물과 무엇이 다르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복 된 인생이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만나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인생이 무엇인지,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우주만유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인지 창조된 것인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와 나라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한다면, 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알지 못 한다면 아무리 평안하고 잘 먹고 잘 살아도 그것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삶이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난다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복 된 삶이라 할 것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복되고 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욥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사단의 극악한 발톱에 할키우면서도 그것을 죽어도 빼앗기지 아니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작은 고통을 이기지 못 하고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을 바꾸어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오늘 말씀을 보니 욥이 가졌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엄청난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놓지 아니하자 사단은 더욱 혹독한 시험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속담입니다만 사단이 말하는 것은 “그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겠지만 생명을 생명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생명이 죽음 같이 되게 해 보십시오. 사는 게 죽는 게 되게 해 보십시오. 그 살과 뼈를 쳐 보십시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을 저주할 것입니다.”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손에 욥을 붙이십니다. 사단은 욥의 전신에 악창이 나게 합니다. 그 악창이 단순히 지독한 종기였을까요? “욥이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고 있더니.......”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극심한 가려움 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살과 뼈’를 쳤다면 견디기 어려운,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정도였으면, 욥의 세 친구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참담하고 기막혀 칠일칠야(한 주일 꼬박) 동안 한 마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였으면 욥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단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하려고 작심하고 치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가혹한 고문보다 더 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욥은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기의 난 생일을 저주합니다. 자신의 태어난 것을 한탄합니다. 죽음이 차라리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놓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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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에 들어가면서


‘욥기’, 하면 우리는 먼저 욥이 당한 무서운 고난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욥기는 욥과 세 친구들의 긴 대화와 쟁론이 좀 지루하여 잘 읽어지지 않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깊고도 오묘한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의 피에 젖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가장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 중 하나라고 합니다. 저자는 전통적으로 욥 자신이거나 모세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욥기의 말미에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고 되어 있어 욥이 최소한 200살은 더 살았던 것으로 보아, 또 제사방식이라든지 엘로힘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브라함 이전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도 하고, 우스 땅이 에돔과 아람지역이라는 점과 수아, 데만, 엘리바스 같은 지명 또는 인명들이 역대상 1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 후 족장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또한 욥기는 솔로몬 시대에 쓰인 것이며 실제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희곡(드라마)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 성경의 욥기 말미에는 욥이 아브라함의 5대손이었다는 언급이 나온다고 합니다.

어쨌든 욥기는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과 처절한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인하여 부르짖으며 괴로워하고 하소연하지만 결코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음으로써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그 몸을 찢기우신 어린양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는 욥의 아내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생에서의 물질적 축복과 형통에서 찾다가 고난의 바람이 불면 낙엽처럼 떨어져 가버리는 어리석은 성도의 모습이,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사람의 욥의 친구의 비판과 쟁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사랑과 섭리에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을 붙잡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고통의 격류 속에서 몸부림하는 욥에게서 성도의 믿음의 싸움, 그리고 모든 것을 이미 아시며 결코 버리거나 떠나지 아니하시며 능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욥기를 관통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또한 욥기에는 하나님 앞에 등장하는 사단과 하나님께서 그 사단의 손에 욥을 맡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와 아울러 사건과 쟁론 가운데 나타나고 언급되는 여러 가지 일들과 철학과 사상과 신앙고백들이 우리의 신앙에 많은 도전과 의문과 사색과 묵상과 깨달음을 주는 수준 높은 문학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 고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되기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자를 가장 극한 고통과 고난에 내어주시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회복시키시고 더욱 높이시는 욥의 야야기를 통하여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이를 통하여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을 다듬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여 있음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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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행하리라.

대장쟁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심판은 속히 이루어지며 신속하게 임할 것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 도적같이 임할 것이며 그 심판을 벗어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하만에게 임하는 심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만의 아내 세레스가 하만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거꾸로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그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왕의 내시들이 들이닥쳐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의 베푼 잔치자리에 나아가는 모습은 하만이 자신에게 느닷없이 임한 심판의 미끄러운 웅덩이에 신속하게 빠져드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 심판의 웅덩이는 실상 하만이 스스로 판 무덤이요 함정이요 올무였습니다. 하만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그 잔해가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이 자기 정수리에 내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며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리고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히는 것입니다(시5:10, 시7:15, 잠26:27).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그 손을 벗어날 자는 없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10:31)” 우리는 또한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하며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시9:18)

왕은 사랑스러운 에스더 왕후에게 무엇이든지 해 줄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왕은 다시 묻습니다. 세 번째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찌라도 시행하겠노라.” 왕의 마음이 에스더의 소원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고 애탔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행”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갑니다. 이 ‘시행’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에스더서에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네 번).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 두 번 연이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14:13-14)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시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라”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요.

이제 에스더는 드디어 그 소원을 왕에게 아룁니다. “왕이시어, 내 목숨을 내게 주시고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에스더는 '내 목숨, 내 민족이 하나요, 나와 내 민족이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돌아보소서.' 하고 왕에게 아룁니다. 자신과 유대민족을 같은 목숨, 공동운명체로 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제가 되셨고 우리의 한 생명이 되셨고 우리와 공동운명체가 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님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다면, 구원에 실패하셨더라면 우리 죄인들만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우리와 함께 멸망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하셨을 것입니다. 왕이 대경실색하여 묻습니다. “뭐라고?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왕이 어떤 표정이며 어떤 음성이었을까요? ‘감히 어느 놈이 나의 사랑하는 왕후 에스더를?’ 아마도 왕의 눈에 뵈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대답합니다.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너무나도 놀라고 기가 막히고 분노한 왕은 자리를 박차고 잔치자리를 떠납니다. 그의 마음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배신감과 수치심으로 걷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자리를 박차고 왕궁 후원으로 나갔던 왕이 다시 돌아왔을 때 왕의 눈앞에는 하만이 왕후의 앉은 의자에 엎드려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하만은 목숨을 살려달라고 에스더를 붙잡고 의자에 엎드린 것이지만 이성을 잃고 눈이 뒤집힌 왕의 눈에는 그것이 왕후를 강간 하려고 하는 모습으로 비치었던 모양입니다. “저놈이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하려는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쌉니다. 얼굴을 싸는 것은 ‘보기도 싫다, 듣기도 싫다’는 뜻이며 사형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왕후를 죽이려고 한 원수, 저놈에게 내가 속았구나. 저놈을 어떻게 갈아 마셔야 속이 시원할까?’ 왕의 심중은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왕에게 내시가 말합니다. “저가 모르드개를 달려고 집에다 오십 규빗이나 되는 나무를 세웠나이다.” 왕의 눈은 다시 뒤집힙니다. “뭐라고? 저놈이 내 목숨을 구해준 충신 모르드개를 달려고 했다고? 저놈을 거기에다 매달아라!” 그리고 그 날에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붙이고 모르드개에게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줍니다. 실로 통쾌하고 극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 통쾌한 이야기를 읽으며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같이 시행하사 우리의 대적을 무찌르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단번에 꺾으시고 우리로 승리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일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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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히는 반전(反轉)


대장쟁이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책, 유대인들이나 부림절로 지키면서 읽는 책, 그래서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 할 뻔 했던 에스더서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승리의 모습이 여자인 에스더를 통하여 이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일간의 금식을 마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의 앞에 나아가는 에스더의 모습에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은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에스더에게 내어밉니다. 왕이 금홀을 내어 밀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만일 왕이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럽지” 아니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만일 왕이 에스더를 보고 “이 당돌한 것이 감히?”라고 생각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 만일 하나님께서 주님을 기뻐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요?

왕은 “심히 사랑스러운” 에스더에게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자기 앞에서 춤을 춘 살로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던 미친 왕 헤롯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사랑에 눈 먼’ 왕의 모습에서 또한 우리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자기 몸으로 드린 화목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 먼’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무엇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무엇으로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었습니까? 오직 주님의 ‘심히 사랑스러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그 자리에서 바로 왕에게 하만을 고자질하고 유대인의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자신의 베푸는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잔치는 즐거움을 주는 자리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잔치를 베풀어줌으로써 왕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청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의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하면서 그 청을 거절할 수 없도록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아무튼 빈손으로 나아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을 바라지 아니하고 왕의 기뻐하는 것을 먼저 드리는 에스더의 모습은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기쁨과 잔치의 화목제물로 드리는 주님의 모습의 예표라 할 것입니다.

에스더는 첫 번째 잔치자리에서 왕에게 청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잔치에 재차 초청을 합니다. 아마도 처음 베푼 잔치의 기쁨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왕에게 드리는 잔치와 자신과 유대인을 위한 청을 드릴 잔치를 구분하는 현명함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잔치는 단순히 즐거움만의 자리만이 아니라 심판과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라든지, 임금의 잔치자리 초청(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라든지, 바깥 추운 곳에 내어던지라든지 하는 모든 이야기,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천국혼인잔치는 오직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참예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웃기는 것은 그 잔치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는 원수 하만이 왕과 함께 초청받았다고 으쓱대며 기고만장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착각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전개과정에서 하나님의 한 치도 틀림없는 섭리하심이 진행됩니다. 에스더 왕후의 잔치에 왕과 함께 단 둘이 초청 받았다고 기고만장하여 퇴궐하던 하만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르드개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 하만이 집으로 돌아와 아내 세레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고, 세레스는 하만에게 높이 오십 규빗의 나무를 세운 다음 왕에게 청하여 모르드개를 매달라 합니다. 그러나 그 날 밤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왕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내사들에게 역대일기를 읽도록 하고 그 역대일기에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모의를 밝혀내어 자신의 목숨을 구하였다는 사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편 이를 알 길 없는 하만은 그 다음날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를 청하기 위하여 왕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자기 꾀에 빠져 욕을 당하게 되는 대반전,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쩌면 이렇게도 오묘한지요.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당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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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으리라.

대장쟁이

페미니스트(여권운동가)들이 보기에 성경은 남자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남성으로 지칭하고, 출애굽 때도 20세 이상의 남자만 숫자를 세고, 오병이어의 이적기사도 ‘여자와 어린아이’를 빼고 오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거의 모든 기록이 남자위주로 되어 있어 남녀차별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격한 여권운동가들은 하나님을 남성명사 ‘He'로 쓰지 않고 여성명사 ’She'로 고쳐쓰고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 어머니'로 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또 다윗부터 요셉까지 순수혈통을 이어 내려왔는데 주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오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실속과 알맹이는 여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명분의 계보를, 여자에게는 생명의 계보를 주셨다 할 것입니다.

에스더라는 이름은 하닷사, “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에스더는 룻기와 함께 여성의 이름으로 제목이 붙은 두 권의 성경 중 하나입니다. 룻기는 이방여인의 이야기인 반면 에스더는 이방에 사로잡혀가서 이방인과 피를 섞는 유대인 여자이기 때문에 어쩌면 룻기, 에스더, 모두 스스로를 유일한 선민, 택하신 백성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치욕적이고 숨기고 싶은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흘러나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일 것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함께 하심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성경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신다 해도 역사를 주관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사단의 역할을 맡아서 등장합니다. 그 한 사람 실력자의 계략에 의하여 민족이 진멸당할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죄악 가운데 죽음의 고통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르드개는 하닥을 통하여 자세한 연유를 전하며 에스더에게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 간절히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누구든지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왕의 안뜰에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인데, 자신은 이미 30일 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못 하였다.” 하면서 왕에게 나아가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네가 왕궁에 있다 하여 모든 유다인 중에서 홀로 화를 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잠잠하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할 것이라.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고 에스더를 질책합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모든 유다인들로 삼일간 금식하게 해 달라 하고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삼일 동안 금식한 다음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목숨을 건 결심을 합니다.

우리는 에스더의 망설임과 또 목숨을 건 결단을 보면서 에스더의 용기와 믿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스더의 이 모습에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신 겟세마네를 기억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의 그 처절한 몸부림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만 매질과 조롱과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버림당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하는 부탁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더러운 죄인들을 위하여 부탁을 한다는 것은 더욱 맹렬한 진노를 부를 일이었습니다.

부름 받지 않고 왕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부터 목숨을 건 일이지만 총애를 받는 왕후라 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슨 부탁을 한다는 것은 더욱 위험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삼십일 동안 자신을 부른 적이 없는 왕 앞에 나갔다가 왕이 혹시라도 에스더의 정체를 의심하거나 당돌하고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날이면 그대로 죽임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백성을 심판하는데 네가 감히 밤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거냐.'고 받아들인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더는 온 유다인들의 삼일 금식기도를 요청하고 스스로도 삼일동안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유다인들을 위하여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을 내어놓고 왕의 앞에 나아가는 에스더의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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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드개 같은 사람 없나요?

대장쟁이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 말씀과 신앙을 두렵고 무겁고 힘 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은 힘들고 두렵고 어렵고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들게 듣고 하나님을 어렵게 섬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 같습니다. 하나님은 재미 있으시고 유머러스하신 분입니다. 율법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는 금방 혼인한 남자는 군대도 빼주고 집에서 아내를 즐겁게(♥) 해 주라고 말씀하시고, 성경 한 가운데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노골적인의 언어로 쓰인 아가서도 넣어놓으시고, 또 신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 같은 에스더도 넣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나게 읽는 책이 에스더가 아닐까 합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에스더에 나오는 부림절을 가장 신나는 명절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아달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이른 봄인 2-3월의 음력 14일이 되면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두루마리로 된 에스더를 읽으며 유대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인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기리고 다채롭고 즐거운 행사들을 즐깁니다. 에스더서를 낭독할 때 ‘하만’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도구들을 이용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발을 구르면서 야유를 보낸답니다. 에스더 이야기를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목숨을 걸고 자기 민족을 구해낸 에스더의 애국 애족심을 가르치고, 또 만두 같은 크기로 사람 귀 모양의 떡을 만들어 ‘하만의 귀’라는 뜻의 ‘오젠 하만’을 만들어 먹는답니다. 예쁜 공주의상, 카우보이 차림, 옛 로마 호민관의 관복, 색색의 가면 등을 차려 입은 어린 아이들이 온 거리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일 때면 축제는 절정에 이릅니다. '벤 예후다'라는 예루살렘의 중심거리는 울긋불긋한 옷, 머리에 쓴 마스크 등으로 뒤덮이고, 사람마다 플라스틱 망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삑' 소리가 나게 때리고 때린 사람이나 맞은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웃고 즐긴답니다. 그렇게 부림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신나고 즐거운 명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에스더서의 줄거리 앞부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로는 연회를 베풀고 만조백관 앞에서 황후 와스디(Vashti)의 미모를 자랑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출두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황후는 왕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진노하여 황후를 폐위하고 전국에 영을 내려 후임 황후를 간택하게 되는데 유대인 처녀 에스더가 황후로 선택받게 됩니다. 그 에스더는 부모를 여읜 후 그녀의 사촌오빠 모르드개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모르드개는 대궐 문 앞에 앉아 있다가 황제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되어 에스더를 통하여 황제에게 보고토록 하였고 황제는 화를 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각의 후손 하만이란 자가 왕의 총애를 받아 하늘을 찌르는 세도를 휘두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모르드개만 그에게 무릎도 꿇지 않고 절도 하지 않습니다. 하만은 화가 나서 모르드개만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진멸할 흉계를 꾸밉니다. 진멸할 대상이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숨긴 채 ‘악한 족속’이라고 써서 그 악한 족속을 일시에 진멸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왕의 재가를 받아냅니다. 각 도에 유대민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는 조서가 내려가고 이에 유대민족은 통곡하며 부르짖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연락하여 왕의 앞에 나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거절합니다. 함부로 왕의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는데 에스더가 한 달 넘게 왕의 부름을 받지 못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어찌 아느냐?’고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에스더는 유대인들에게 금식을 요청하고 자신도 삼일 동안 금식을 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에 가장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오늘 화를 불러온 모르드개의 뻣뻣한 자세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어찌보면 모르드개는 지나치게 꼿꼿한 태도로 불필요한 박해를 불러일으킨 사람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모르드개는 대궐문에 앉아서 천하를 호령하는 하만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대궐문에는 왜 나와 앉는단 말입니까? 대궐문에 앉았으면 적당하게 하만에게 허리 굽히는 시늉이라도 하든지, 그게 정 싫으면 대궐문에 나오지 말든지, 꼴보기 싫으면 하만이 올 때는 화장실에 가는 척 피해버리든지 했더라면 쓸데없이 그렇게 엄청난 위기와 화를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모르드개는 굳이 대궐문 앞에 나와서 화를 자초하고 하만을 피하지도 숙이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이 일로 유대인들이 굵은 베를 입고 애통하며 금식할 때 에스더가 다른 옷을 보내면서 굵은 베를 잠깐 벗어놓고 대궐로 들어오라고 권하였을 때도 이마저도 거절합니다. 참으로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깐깐한 고집불통, 대쪽 같은 딸각발이 선비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이 같은 고집과 기개와 지조를 사용하셔서 기이한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모르드개 같은 그리스도인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눈을 뒤집고 찾아도 없습니다. 왠만하면 티나지 않게, 적당히 타협하고 모나지 않게 처신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요 슬기요 요령인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고 싶으셔도 모르드개 같은 사람이 없어서 도무지 그럴 기회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 시대에 어디 모르드개 같은 사람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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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느헤미야 12장]

보면 볼수록 느헤미야에 기록된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기록은 성도의 신앙과 교회를 세우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수산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세상적으로는 부러울 것 없이 잘 나가던 느헤미야가 어느 날 동생 하나니로부터 퇴락한 예루살렘, 유다 성읍들의 참상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전도인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결국은 바벨론의 포로라는 사실, 자신의 영혼은 돌아갈 곳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신앙과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와 사망의 포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 한 채 그렇게 살다 가고 마는가요? 가을에 단풍이 붉게 물들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종점, 지옥불의 예고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하고, 그 단풍잎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하고 어느 날 바람에 뚝 떨어져 날아가고 마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져 있다면, 성벽이 무너지고 훼파되어 있다면, 어떠한 부귀영화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곳,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는 것만이 인생의 해답이라는 것을 느헤미야는 그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의 삶을 청산하고 예루살렘, 하나님의 도성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졌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일이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난과 희생의 길이었고 숱한 조롱과 조소와 원수들의 훼방과 발악과 위험이 따르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우리를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내고 마침내 이루어내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52일 만에 성벽수축이 완성되자 낙담하며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승리에 환호하였습니다. 성벽은 완성되고 백성들은 에스라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아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온전히 놓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초막절의 감격과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그것은 주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성도들의 모습이며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보다, 이생의 목숨보다 그것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이제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대적의 온갖 훼방과 위협을 이기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격 속에서 초막절 행사를 마치고 다시금 하나님 앞에 모여 '이제부터는 나 이렇게 살리라.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 살리라,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며 신앙을 지키며 떠나지 아니하리라....' 굳세게 다짐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11장은 그들 족속들의 이름과 모습들을 기록하면서 “책에 기록되었고, 역대지략에 기록되었고, 다 용사였느니라, 큰 용사니.....” 등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큰 용사'라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싸움, 성벽재건의 싸움에서 이긴 큰 용사들로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12장 27절에 보니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 낙성식을 행하려 모여듭니다. 각처에서 레위사람들을 찾아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합니다. 사방에서 모여오고 몸을 정결케 하고 백성과 성문과 상을 정결케 합니다. 모여들고 정결케 하는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께 돌아와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된 자들의 세례의식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 위로 오릅니다. 두 떼로 나누어 한 떼는 좌편, 한 떼는 우편으로 성벽 위를 돌게 합니다. 나팔을 잡고, 제금, 비파, 수금 등 다윗의 악기를 잡고 에스라가 앞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스바냐 3:19)’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같고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는 요한계시록의 큰 무리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인생에 그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 그 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진 성벽을 버려둔 채 세상살이에 매여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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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을 치나이다.

대장쟁이 ㆍ 2014-02-19 (수) 16:57

[느헤미야 10장] "그 인친 자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


오늘 생각해볼 것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입니다. 인간은 그 본질이 죄인입니다. 죄인의 본질의 하나는 연약함과 낡아짐과 부패함입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육신은 무너지고 정신은 희미해지고 기억과 약속조차 변하고 사라지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이 들고 몸이 늙고 치매로 기억을 상실하고 마음과 정신마져 무너져내리는 것이 죄인의 본질 중 하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늙음과 후패함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원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서 얻은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노쇠와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러한 죄인이 된 것을 하나님 앞에 송구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로원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모세처럼 늙어서도 온전한 육신과 마음을 지키다가 가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몸과 마음이 함께 허물어져 내립니다. 앙상하게 노쇠한 육신은 수발을 받아야 하고 기억과 마음은 치매증세를 보이며 함께 피폐해 집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인의 몸을 입고 사는 것을 우리가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소망하노니 그 날이 오면 새 몸을 입으리다. 그 날이 오기까지 이 연약한 몸이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나의 심령을 날로 날로 새롭게 하소서.” 이것이 죽는 날까지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늙기도 전에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악을 행하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는 악(惡)이로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의 에녹성을 짓고 하나님을 잊고 대적하며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홍수가 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살면서조차 불순종하며 악을 행하였습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바다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마라의 쓴물과 엘림을 보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 구름기둥, 그리고 시내산의 화염과 말씀 돌판, 반석의 물, 성막, 그리고 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백성들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도록, 그렇게 그들의 가슴에 새기듯 하나님을 각인했건만 그들은 가나안 땅을 얻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잊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대적들에게 파셨고 백성들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때마다 사사를 일으키셔서 구원하셨는데......., 문제는 그것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인간의 패역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언약의 도장을 팍, 찍으셨지만 인간들은 그것이 가슴에 팍, 찍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찍어도 잊어버리고 다시 후패하는 것이 죄인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나서 모든 백성들이 모여 에스라에게 율법책 낭독을 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울며 통회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초막절을 지키는 감격적인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모여서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며 서원합니다. 느헤미야 9장에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열조들이 반복해온 범죄를 자복하며 그 조상들과 그들을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지켜 오신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9장 마지막 절 38절을 보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며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문서를 작성하고 거기에다 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도장을 찍어서 다시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0장 1-27절은 그 인 친 자, 도장을 찍은 자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8절부터 그 나머지 백성들,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찬양대, 느디님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사람들, 그 가족들은 저주로 맹세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당하겠습니다,” 하는 무서운 결단입니다. 그 맹세의 내용을 보면, 자녀들을 이방사람들과 혼인시키지 않겠다,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고 빚을 탕감해 주겠다, 연수입 3분의 1을 하나님 전을 위하여 사용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 첫 열매. 첫 소산, 첫 생축, 처음 익은 곡식, 과일, 새 포도주, 기름,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겠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는 세부실천사항들입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백성들이 감격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초막절을 지키며 그들이 다시금 맹세한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초막절의 감격, 구원의 감격, 하나님 앞에 나아온 기쁨이 단회성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잊어버리는 인간의 속성과 약점으로 인하여 반복되는 죄로 연결될 것입니다. 물론 십일조나 절기나 규례와 율례를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규례와 율례가 잊지 않게 그들을 붙잡아 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결사적으로 스스로에게 인을 쳤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기 힘쓰고 아침저녁 소제를 드리며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려고 애쓴 것은 매 순간마다 날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약한 죄인의 심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부패하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같이 겸손하게 우리의 죄인이라는 본질을 깨닫고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시간과 물질과 삶을 드리며 날마다 심령을 새롭게 하는 삶을 살기 힘쓰며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힘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을 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죽는 날까지 우리에게 규칙적인 신앙생활이 필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켜서 인을 치지 않습니다. 스스로 결단하고 스스로 그런 인 쳐봐야 소용 없습니다. 쳐지지도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인을 쳤지만 우리에겐 성령님께서 인을 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늙어 후패해지고, 결단도 희미해지고, 기억도 사라지고, 마음도 무너져내린다 해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치신 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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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짜리 일본처자가 해냈단다.

대장쟁이


서른 살짜리 일본 여성 과학자가 ‘제3의 만능세포’를 개발했다는 소식이다. 10여년 전 대지진 참사가 일어났던 고베에 있는 이화학연구소 발생·재생과학 종합연구센터의 오보카타 하루코(小保方晴子) 연구주임이란다. 이 발견으로 하루코는 단번에 노벨상 후보가 되었단다.
오보카타 하루코가 발견한 만능세포(STAP: Stimulus-Triggered Acquisition of Pluripotency)는 세포를 약산성 용액에 잠깐 담그는 자극만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단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니!!

이렇게 간단한 방법을 두고 온 세계 과학자들과 의료계가 그렇게 찾아 헤매고 그 때 대한민국이 그렇게 난리부루스를 추었단 말인가? 허탈하기까지 하다. 2005년이었던가? 황우석 박사가 젓가락 기술을 이용한 포도쥐어짜기 방법으로 배아줄기세포를 배양성공했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뒤집어지다시피 한 그 때를 기억하시는가? 원천기술이니 뭐니 하면서 금방이라도 온 세상의 돈을 다 긁어모을 것 같은 황우석 환상에 빠졌던 그 때를.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 때 내가 황우석 바람을 보면서 썼던 글을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어 조금 고쳐서 올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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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휩쓴 배아줄기세포의 황색바람

황우석, 배아줄기세포....... 2004년과 2005년에 걸쳐 사이언스지에 실린 황우석 교수의 "환자맞춤형 배아줄기세포' 논문은 수많은 난치병환자들을 구원해내고 국제특허로 금방이라도 해외로부터 수백 조원이 굴러들어오게 할 것 같은 환상의 바람은 대한민국을 몰아쳤고, 논문의 진실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의 소용돌이로 이어졌다. 황우석 박사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졌고 "황사모" 웹페이지가 뜨고, 황우석 교수가 백의종군을 선언하자 그를 "환생한 성웅 이순신"으로 치켜세우고, 삼천궁녀들처럼 일 천 명이 넘는 여자들이 난자제공을 하겠다고 줄을 섰다. 그렇게 논문사기와 생명윤리의 논란의 상처를 남기고 너무나도 애절한 수많은 난치병환자들의 소망과 절망 속으로 휘몰아쳤던 황우석 바람, 우리는 이제 냉철하게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배아줄기세포가 무엇이기에? ‘환자맞춤형 배아줄기세포 치료법’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1). 미토콘드리아 DNA
인체의 약 60조 개의 세포, 지름이 약 1,000분의 1 밀리미터에 불과한 작은 세포.... 그 세포의 모양은 달걀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중심에는 노른자같이 세포핵이 있고, 인간의 유전자, DNA는 이 노른자 같은 세포핵 속에 들어있다.
그런데 흰자에 해당하는 부분...., 그 흰자 속에는 약 3,000개에 달하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는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들어있고 이 미토콘드리아들 속에도 작은 규모의 DNA, 이른 바 미토콘드리아 DNA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모계(母系)를 통하여만 유전된다. 그러므로 같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형제자매는 똑같은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가진다. 그래서 시신의 형태가 사라져도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분석하면 신원확인이 가능하다.

2). 거부반응
난자라는 하나의 세포가 정자와 수정하여 어머니의 뱃속에서 분열되어 아기로 자라나고 태어나서 성장하기 때문에 인간의 온 몸의 모든 세포는 똑같다. 아니, 똑같은 DNA를 가진다. 따라서 자신의 피부나 근육의 일부를 잘라서 자신의 다른 부위에 이식할 때는 아무 거부반응이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조직을 이식하면 대개의 경우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우리 몸의 면역체제가 다른 사람의 조직을 세균이나 적(敵)으로 인식하여 공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콩팥이나 간을 이식할 때는 부모형제 또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DNA 구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찾아서 거부반응을 최소화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거부반응을 억제하는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3). 복제인간과 배아줄기세포치료의 개념
그렇다면 자기와 똑같은 DNA를 가진 인간을 태어나게 해서 그로부터 장기를 이식받으면 거부반응이 전혀 없을 게 아닌가? 인간의 악한(?) 지혜는 여기에 착안하기에 이른다.
복제인간이란 무엇인가? 복제인간은 자신과 똑같은 DNA를 가진, 세포핵의 DNA뿐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의 DNA도 똑같은 인간을 말한다.
그런 복제인간을 어떻게 만드는가? 당신의 어머니, 누이 혹은 이모나 이종여형제의 난자를 가져다가 거기에 당신의 체세포 핵을 집어넣어 수정시켜 분열시켜 태아를 만든다면 그 태아는 당신과 세포핵의 DNA도 똑같고 미토콘드리아의 DNA도 똑같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복제인간이다.
그리고 그 난자세포가 아직 태아로 자라기 시작하기 전에, 그 세포는 장차 어떠한 기관이나 조직으로도 자라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아줄기세포(Stem Cell)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줄기세포를 잘라다가 당신의 망가진 조직에 이식하면 그 조직이 살아날 것이다. 이것이 배아줄기세포치료법이다.

4). 난자, 그 희생자여
인체 세포 중에서 가장 큰 세포가 바로 난자이다. 난자세포는 보통 인체세포의 10만 배나 되는 대형세포이다. 지름이 약 10분의 1밀리미터나 되어 육안으로도 보인다. 이렇게 난자세포가 큰 것은 난자세포가 수정된 후 분열되어 태아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창조주의 배려일 것이다. 난자세포는 남자의 정액으로 사출된 정자들이 도달하면 가장 먼저 도달한 정자만을 받아들이고 즉시 세포막을 딱딱하게 굳혀 다른 정자들이 들어가지 못 하게 한다. 그리고 그 행운의 정자가 난자핵과 결합하여 수정이 이루어지고 아기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상적으로 수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난자세포를 가져다가 그 껍질을 뾰족한 칼로 찔러 구멍을 낸 다음, 작은 대롱을 집어넣어 핵을 끄집어내고 거기에 자신의 체세포에서 꺼낸 세포핵을 대신 집어넣는다. 이렇게 해서 난자가 수정된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난자세포는 자신의 핵을 강탈당하고 엉뚱한 체세포 핵이 강제로 집어넣어진데 대하여 완강히 저항을 하거나 거부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난자에다 미세전류로 전기충격을 가한다. 전기고문을 하는 셈이다. 그러면 혼절하고 기진맥진한 난자세포는 강제로 넣어진 체세포 핵을 받아들여 자신이 수정된 것처럼 착각하고 분열을 시작하게 된다. 약탈당하고 찢겨져 만신창이가 된 난자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형국이다.

5). 포도즙 짜내기 젓가락 기술
이 난자 강제수정 과정에서 대부분의 난자는 그 상처로 죽게 되거나 심한 손상을 입게 된다. 보통 300개, 400개의 난자를 사용해서 겨우 1개 성공할까 말까 하는 것이 당시까지의 배아복제기술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황우석 팀은 난자로부터 난자세포에 구멍을 낸 다음 대롱을 집어넣어 핵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젓가락으로 난자를 이리저리 굴려서 포도알갱이를 짜듯이 부드럽게 짜내는 이른 바 "포도즙 짜내기 기술", "젓가락 기술"로 난자 20개 정도에 한 개를 성공할 정도로 그 성공률을 획기적으로 높여서 실용화가 가능한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굴리고 눌러서 핵을 짜내는 과정 역시 난자세포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6). 줄기세포 (Stem Cell)
어쨌든 이렇게 수정(?)된 난자세포는 2개, 4개, 8개, 16개.. 식으로 분열해간다. 이렇게 분열된 세포들은 아직 어떠한 형태를 갖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다리와 팔, 머리, 장기, 근육, 신경세포 등, 무엇이나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진 세포이다. 나뭇잎의 밑줄기(Stem)처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춘 세포......, 이것이 바로 줄기세포(Stem Cell)요 만능세포이다. 이 단계에서 이 세포들을 잘라내어 환자의 아픈 부분, 치료불능, 재생불가능했던 조직에다가 주입하면 이 줄기세포가 어떤 부분이라도 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줄기세포 치료방법이다.

7). 난자기증 (Egg Donation)
황우석 팀의 여성 연구원 중에서 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자신의 난자를 제공한 것을 놓고 윤리문제가 제기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아시다시피 여성은 한 달에 한 개씩 배란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여성에게 배란촉진제 주사를 놓아 한꺼번에 20 여개의 난자가 나오도록 만든 다음 이 난자들을 채취하는 것이 이른 바 난자기증이다. 한 번에 20여개의 난자를 촉진제 주사를 놓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채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건강한 젊은 여성이어야 가능하고 상당한 고통이 따른다. 여성인권 문제가 대두된 이유이기도 하다.
황우석 팀이 난자를 이용한 배아복제기술이 20개 정도에 1개꼴로 성공확률을 높인 것이 왜 실용화가능성으로 비쳐졌느냐 하면 바로 여성 한 명에게서 한 번에 추출해낼 수 있는 난자의 수가 20개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난자를 제공하겠다고 1천명의 여자들이 줄을 섰던 것이다.

8). 산 너머 산
“환자맞춤형 배아복제”란 결국 “자신의 모계 혈족의 여성으로부터 기증받은 난자에다가 자신의 체세포를 집어넣어 수정시켜서 자신과 똑같은 DNA를 가진 배아줄기세포를 얻어내는 것”이라고 요약된다.
그러나 난자세포를 여성의 몸 밖에서 배양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어느 단계에서 줄기세포를 잘라내느냐를 결정하는 것도 어렵고 그 잘라낸 세포를 환자에게 주입하였을 때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느냐도 문제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계대세포배양이니 테라토마시험이니 하는 시험들이다, 줄기세포를 흰쥐의 몸에 주사하여 쥐의 몸에 혹을 만드는 것을 확인하는 등 별나고 희한한 실험들도 있다. 그런데 이 계대배양과 테라토마시험 과정에서 황우석 팀은 사진을 바꾸고 뒤집어서 시험에 성공한 것처럼 거짓논문을 작성하였고 이것이 탄로 나자 사진은 바뀌었지만 시험은 성공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거짓말이 세계과학계에서 한국의 과학자들의 논문을 불신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줄기세포를 환자의 몸에 집어넣었을 때 의도대로 손상된 신경세포를 회복시켜주고 손상된 장기를 다시 자라나게 해 줄 것이냐가 가장 큰 문제이다. 주입된 줄기세포가 엉뚱한 조직으로 제멋대로 자라나거나 암세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9). 복제동물들, 그리고 복제인간
복제양 돌리, 복제소 영롱이, 복제개 스너피.......,
이 동물들은 난자의 핵을 끄집어내고 체세포를 집어넣어서 만들어낸 복제 동물들이다. 정상적으로 정자의 수정에 의하지 않고 노화된 (텔로미어가 짧아진) 체세포로 수정되었기 때문에 복제양 돌리는 일찌감치 각종 노환과 성인병에 시달리다가 보통 양의 수명 절반도 살지 못 하고 죽었다. 그런데 이렇게 복제동물을 만드는 목적은 바로 인간도 이런 식으로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배아줄기세포는 윤리문제에 부딪힌다. 배아줄기세포를 계속 성장시키면 복제양이나 소, 개처럼 똑같이 복제인간이 태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난자의 핵을 강탈하고 환자의 체세포의 핵을 집어넣고 전기고문을 하여 억지수정 시킨 난자를 계속 배양한다면 그 배아가 제대로 자라나 정상인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십중팔구 불구, 지체장애, 정신박약아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복제양 돌리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 수명을 살지 못 하고 노환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복제인간 배아는 인간의 배아가 아니란 말인가? 자연적인 방법, 성교에 의하여 임신된 배아만 인간배아란 말인가? 복제인간 배아도 생식의 방법이 다를 뿐 엄연히 인간의 배아인 것이다.

10). 생각할수록 끔찍한 죄악
아무튼 이렇게 만든 줄기세포를 계속 그냥 자라게 하면 나를 꼭 닮은 아기가 된다. 그런데 이 배아를 줄기세포단계에서 잘라내어서 난치병 치료에 쓰자는 것이다.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의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배아를 만들고 그 배아의 몸통을 잘라내어서 쓰자는 것이다. 제 자식 토막내어 잡아먹기와 무엇이 다른가? 난치병환자가 되어보지 않고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단 하루라도 고통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까?

11). 대안,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집중해야
아무리 병으로 고통 받는다 해도, 아무리 오래 살고 싶다고 해도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성체줄기세포가 제시된다.
성체줄기세포란 무엇인가? 인간의 피는 매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인간의 적혈구는 11주, 백혈구는 불과 1주일 만에 새롭게 만들어져 바뀌게 된다. 피뿐만이 아니라 피부, 내장의 벽, 털, 손톱, 뼈까지도 인간의 세포는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져서 바뀌어간다. 11년이 지나면 인체의 모든 세포는 다 바뀐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생명을 주고 계신 셈이다. 피는 골수에서 만들어진다. 골수는 도대체 어떻게 피를 계속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바로 골수부분이 일종의 줄기세포, 즉 성체줄기세포이다. 이 성체줄기세포를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면 복제배아줄기세포를 만들지 않고도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산모가 아기를 낳고 버리는 탯줄의 혈액에도 성체줄기세포가 있어 질병치료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히려 배아줄기세포 보다 성체줄기세포가 훨씬 안전하고 거부반응도 적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란다. 골수나 태 말고도 피하지방에서도 줄기세포를 배양할 수 있다고 한다.

12) 원천기술?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특허로 한 해에 수백조원의 로열티가 굴러들어올 것 같은 희망에 들떴다. 황우석은 자신이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원천기술”.....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황우석 박사의 이 원천기술 주장을 믿고 혹시 다른 나라가 특허를 선점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황우석 박사의 원천기술 주장에 대하여, 과연 배아줄기세포치료기술특허의 가능성에 대하여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포도즙 짜기”와 “젓가락 기술”이 과연 원천기술일까? 만일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를 이용한 난치병치료방법을 세계최초로 생각해내거나 발견해 내었다면 그것은 원천기술이요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난자세포의 핵을 제거하고 체세포를 주입하여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방법을 세계최초로 고안해 내었다면 그것도 원천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도즙 짜기”와 “젓가락 기술”이 과연 원천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13) 윤리문제
근년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배아줄기세포연구를 재개하도록 허용하였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아기를 갖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시행하는 인공수정 과정에서 잘못되어 폐기되는 배아세포를 활용하는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차피 폐기할 배아들이니까 실험용으로 사용하자는 것인데, 그러나 폐기되는 배아세포라 할지라도 이것도 엄연히 인간의 배아라는 점에서 생명윤리의 논란이 많다. 일본에서는 생명윤리의 문제를 비켜가기 위하여 IPS라고 불리는 유도만능줄기세포라는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세계의 움직임에 황우석 박사의 한바탕 회오리를 치른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다른 나라가 먼저 배아줄기세포치료방법을 개발하여 특허를 얻으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인간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기술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생명윤리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면 이를 특허나 실제적용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14) 매머드 복제?
2011년 10월 17일, 황우석 박사는 체세포 수정으로 코요테 8마리를 복제하였다고 김문수 경기지사의 축하 속에 발표하였다. 코요테의 체세포를 개의 난자에 집어넣어 수정시킨 다음 개의 자궁에 착상시켜 개가 코요테를 낳았다는 것이다. 개의 복제도 어려운데다 같은 종류가 아닌 이종 동물의 체세포복제는 더욱 어렵다는데 한꺼번에 여덟 마리나 성공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황우석 박사는 매머드도 시베리아나 북극의 영구동토에 보존된 손상되지 않은 매머드의 체세포를 코끼리를 이용하면 복제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란 언급도 하였단다. 우리 시대에 매머드를 볼 수 있다니! 꿈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수 만년 동안 툰드라 동토(凍土) 얼음 속에서 조직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매머드 체세포를 채취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태양에서는 엄청난 수의 중성미자(뉴트리노)가 쏟아져 나와 광속으로 모든 물체를, 우리 몸과 지구를 거침없이 통과하고 있다. 아무리 미세한 중성미자라 하더라도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맞으면 세포나 DNA가 손상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그랬다. 황우석 박사팀은 분명히 세계최고의 복제기술을 가진 팀임에 틀림없다. 그의 말대로 쇠 젓가락을 쓰는 한국인 특유의 손기술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가 그 젓가락 기술을 원천기술이라고 억지주장을 하며 논문사기 쇼를 벌일 것이 아니라 그의 섬세한 배아복제기술을 가지고 멸종위기의 동물보존과 특이동물의 복제로 방향을 잡았더라면 지금쯤은 아마도 세계최고권위의 동물배아복제권위자로 존경받고 있지 않았을까?

15) 지방세포 복제 줄기세포 치료기술
2013년 6월 처조카 성폭행혐의로 물의를 일으키고 주가조작혐의로 구속된 라정찬 알앤엘바이오 회장, 왜 그런 나쁜 짓들을 저질렀는지 괘씸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는 2005년 세계최초로 지방줄기세포 계대배양(繼代培養)에 성공하였던 인물이다. 라정찬 회장은 5g의 지방조직을 채취하여 2억 개의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기술을 개발하였고 이 줄기세포를 혈관에 주사하면 줄기세포가 아픈 부위를 찾아가서 치료한단다. 황우석 박사의 일이 있은 다음 한국은 줄기세포치료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환자들은 일본, 중국,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라정찬 회장이 개발한 줄기세포치료를 경험한 환자는 이미 1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여기에는 릭 페리 텍사스주 지사도 포함되어 있고, 이수성 전총리, 조용기 목사, 최필립 전 리비아대사, 연예인 김창숙, 이경규씨 등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들의 줄기세포를 영하 196도로 보관중이라 한다. 인간 라정찬은 한심스럽지만 비윤리적인 복제인간 줄기세포가 아니라 자신의 체세포를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였던 것이다.

16) 그런데 2014년 초, 오보카타 하루코(小保方晴)가.....

그런데 일본의 30살 짜리 여성연구원 오보카타 하루코가 약산성 용액에 세포를 담그는 간단한 방법으로 만능세포를 만들었단다. 그토록 오래 온 세계 생명공학 과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찾아온 것을 마치 컬럼버스가 달걀 세우듯이 간단하게 해치운 것이다. 아직 확인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것이 입증되면 이것이야말로 황우석이 그토록 외치던 대박 “원천기술”이며,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에게 구세주 같은 일이며, 노벨상깜이다.
일본은 이미 물리학, 문학 등 여러 분야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만능줄기세포도 일본, 그것도 30살짜리 처자가 해냈단다. 김대중 선생이 절룩거리며 평양에 가 김정일에게 5억불 갖다 바치고 받은 노벨상 하나가 유일한 대한민국으로서는 좀 자존심상하고 빈정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아낌없이 박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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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대장쟁이

[느헤미야 6: 15-16]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


1960년대, 우리나라가 아직 6.25전쟁의 폐허 위에서 허덕이던,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되던 세계최빈국이었던 때, 복싱 세계챔피언이 나온다는 것도 아득한 꿈만 같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서강일이라는(지금은 70세가 넘으셨겠지요) 뛰어난 선수가 있었는데 세계챔피언 도전에서는 번번이 좌절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벌어진 시합에서 미국선수에게 지던 그 중계방송을 들으며 안타까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김기수 선수가 아시아 챔피언이 되자 국민적 영웅이 되었으며 “내 주먹을 사라.”는 영화도 찍어 인기스타가 되었고, 1967년엔가 그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 선수 벤베누티를 이기고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챔피언이 되자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뒤집어지다시피 했습니다.

1970년대 들면서 아시아 최강 유재두 선수가 등장하였고, 홍수환 선수가 남아공에서 세계챔피언전에서 이기고 국제전화로 어머니에게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고, 어머니는 “그래, 그래, 장하다 내 아들, 대한국민 만세다(대한민국이 아니고 대한국민).” 하던 대화가 온 국민이 지금도 기억하는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홍수환 선수는 또 파나마에서 지옥의 사자라고 불리던 카라스키야 선수에게 네 번이나 다운을 당하고도 다섯 번 째 일어나 카라스키야를 침몰시킨 4전5기의 신화를 만들어내어 텔레비전 앞에 모인 국민들을 열광하게 하였습니다. 못 먹고 못 살 던 그 시절 라디오와 흑백TV앞에서의 환호성....... 지금은 지나간 옛이야기이지요.

복싱의 묘미의 하나는 얻어맞아 다 쓰러져가던 선수가 포기하지 않고 회심의 한 방으로 상대를 쓰러뜨려 역전승 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복싱뿐이겠습니까? 모든 경기가 다 그렇지요. 야구도 다 진 것 같던 경기를 9회말 2사후에 뒤집어 역전승을 연출하는 것이 가장 짜릿하고, 미식축구나 농구나 축구나 그 어떤 운동경기도 불굴의 역전승이 가장 멋있고 재미있습니다. 운동경기만 아니라 무술영화나 전쟁영화도 다 죽어가던 주인공이 마지막 힘을 내어 최후의 일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려 이기는 것이 재미있고, 우리의 인생살이도 포기하지 않고 역전승하는 최후의 승리가 멋있습니다. 싸움이란 완전히 끝나야 끝나는 것이고 최후의 승리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포츠이든 세상살이든 주의 일이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싸우고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포츠 이야기를 해서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겨내는 싸움이란 결국 상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싸움, 자신의 내부와의 싸움, 자신을 이겨내는 싸움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느헤미야의 싸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외부의 대적들을 향한 싸움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고 내부의 적을 물리치는 싸움이기도 하였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무리의 위협과 훼방 속에 한 손으로 무기를 잡고 한 손으로 성벽을 쌓으며, 내부적으로는 동족에게서 고리채 이자를 받고 자녀를 종으로 취하는 악행과 싸우는 악전고투, 그리고 끝없이 밀려드는 두려움과 외로움과 의심의 먹구름, 낙담과 좌절과 고통의 가시밭길을 극복해야 하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싸움은 대적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무리는 끝까지,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역사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도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내 오노평지에서 만나자 하고, 왕이 되려고 한다는 모함을 하고 소문을 내고, 살해위협을 하면서 제사장을 매수하여 느헤미야가 성전에 가서 숨어야 자객으로부터 살해당하는 것을 면할 것이라는 거짓예언을 하게 하는 등 얻어맞아 죽어가면서도 역전승을 노리는 선수같이 끝까지 악착같이 갖은 훼방과 술수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둘레 4마일에 이르는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역사가 52일 만에 완전히 끝나자 그제야 두려워하고 낙담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마귀는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기는 순간까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갖가지 훼방과 유혹과 위협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싸움을 마치고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에 이르러 영광의 면류관을 쓸 때, 그 때에야 비로소 두려워하고 낙담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끝까지 믿음의 싸움과 경주를 하였습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도 이같이 끝까지 달려 승리하기 원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돈놀이, 이자놀이

대장쟁이



[느헤미야 5장]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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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돈벌이 방법이 돈놀이, 이자놀이라고 합니다. 만일 2,000년 전 예수님 탄생 때 야구방망이 만 한 금덩이를 가지고 연리 5% 이자로 꼬박꼬박 불려나갔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 그 금덩어리는 지구보다 더 커졌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어려서부터 자녀에게 교육하는 것이 돈놀이, 곧 이자의 무서움, 이자의 위력이라고 합니다. 아이 이름으로, 예를 들어, 1,000 달러를 가지고 채권이나 확실한 금융상품을 사게 합니다. 만일 연리 10% 짜리 금융상품을 샀다 치면 10년 뒤에는 2,593불, 20년 뒤에는 6,727불, 30년 뒤에는 17,449불이 됩니다. 30년 만에 17배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또 매달 아이로 하여금 10달러씩 적금 붓듯이 꼬박꼬박 금융투자를 하도록 하여 20년, 30년 뒤에 얼마나 불어나는지를 체험하도록 합니다. 돈을 빌리고 이자를 무는 경우와 반대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의 극명한 대비를 통하여 재산을 모으는 자세와 재테크 방법을 철저히 교육하는 것입니다.

‘72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72는 복리이자로 원금이 두 배로 불어나는 기간을 쉽게 계산하는 숫자입니다. 예를 들어 연리 8% 이자율이라면 72 나누기 8 = 9, 즉 9년이 지나면 원금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연리 8% 이자로 모기지를 내어 집을 사고 30년 동안 상환한다면, 9년 동안 모기지 내는 돈으로 만일 거꾸로 저축을 한다면 2배로 늘어나는 돈을 반대로 갚는다는 계산이 되고, 18년 뒤에는 4배, 27년 뒤에는 8배라는 계산이 되므로 30년 동안 갚는 모기지 상환총액은 빌린 돈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결과가 된다는 계산이 됩니다. 연리 8%만 해도 이렇게 큰데 보통 크레딧카드 회사들이 물리는 이자 연리 16% (연체이자는 24%도 됩니다만) 정도를 가지고 계산한다면 72 나누기 16 = 4.5, 곧 4년 반마다 2배, 9년이면 4배. 13.5년이면 8배, 18년이면 16배, 22.5년이면 32배, 27년이면 64배라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 이자놀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결사적으로 금융기관을 장악하려 하고 크레딧카드 회사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자라던 60년대, 70년대에 일수놀이가 성행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돈이 급히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선이자 10%, 20%를 떼고 나서 100일 동안 갚도록 합니다. 석 달 열흘 만에 이자 10%, 20%이니까 대단한 고리채였습니다. 그래서 일수놀이 하는 아줌마는 악바리 같은 무서운 사람이었지요. 또 전당포도 많았습니다. 돈이 급하면 시계나 보석, 옷 같은 물건을 맡겨놓고 돈을 빌리는데 이자가 비쌌습니다. 결국 돈을 갚지 못 하고 물건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참 많은 사람들이 이자에 매여서 살고 있습니다. 크레딧카드 대금, 자동차할부금, 집 모기지, 학자금......  주위에 빚 없이 살고 있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매달 모기지를 내며 크레딧 카드 미니멈 페이먼트를 내며 허덕이는 서민들은 마치 중세시대의 소작농 같은 모습 같다 싶기도 합니다.

빌려주고 담보잡고 이자 받는 돈놀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 깊습니다. 그 옛날 애굽에도 있었고, 그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를 따라했던 것 같습니다. 소위 알토란같은 금융투자와 재테크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도 귀가 솔깃합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현명하고 지혜롭게 투자하여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일까요? 오늘날 자본주의, 자유경제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것이 옳고 정당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돈놀이, 이자놀이는 그 놀이를 하는 편에서 보면 “신나는 돈벌이 게임”이지만 살기 위해 그 돈을 써야 하고 이자를 물어야 하는 편에서 본다면 올가미요 족쇄요 피를 빠는 노예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자놀이를 금하셨고 토지소유를 금하셨습니다. 토지를 안식년에는 쉬게 하고 희년에는 원상복귀토록 함으로써 땅이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5-7절 =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그러나 근본이 죄인들인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어디에서나 이러한 돈놀이, 이자놀이 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이때에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그 형제 유다사람들을 원망하는데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재산을 전당 잡혀야 합니다. 토지를 팔고 빚내어서 세금을 냈습니다. 우리 자녀가 종으로 팔려가도 이제는 토지가 없으니 속량할 힘조차 없습니다.”는 한심하고 가련한 처지들을 하소연합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끼리 이런 돈놀이 이자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참상을 듣고 느헤미야는 크게 노하여 귀인들과 민장들을 꾸짖고 전당잡힌 것들을 돌려주고 이자 받은 것을 돌려주도록 합니다. 귀인들과 민장들 앞에서 옷자락을 떨치면서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같이 떨치시리로다.” 하면서 받은 것을 모두 돌려주고 이자를 받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자신이 12년 동안 총독을 하면서도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며 오히려 베풂으로써 솔선수범합니다.

저도 소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톰 싸인이 자신의 책 “맥월드 vs 머스타드 씨드”에 쓴 것처럼 교회가 젊은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이자와 모기지의 족쇄를 벗고 자본주의와 금융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할 수 있기 원합니다. 느헤미야를 부요케 하시어 12년 동안 자비량 하며 오히려 베풀었던 그 축복이 이 교회에도 임하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교회를 풍성케 하사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할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목사가 이러한 생각을 한다니까 이상합니까? 그렇다면 느헤미야도 이상하겠군요. 우리는 천국에 가면 한없는 풍성함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천국의 모습을 이 땅에서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천국의 풍성을 맛보도록 허락하시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만인에게 보이도록 하는 축복을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아무튼 느헤미야의 이러한 결단과 과감한 조치는 돈놀이 이자놀이로 착취하고 착취당하고 원망하고 분열되고 있던 귀환백성들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힘을 합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하나로 뭉치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 돈거래는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꾸어주되 이식을 취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도울 힘이 있으면 힘껏 도울 것이며 내미는 손을 거절치 말라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주의 백성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모든 재산을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주의 백성이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 온 세상이 이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대장쟁이

[느헤미야 4: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온 세상이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대적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때로 놀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느헤미야 때도 그랬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고 보수되어간다는 말을 듣고 심히 분노합니다. 왜 그들이 분노한단 말입니까? 자기들에게 무슨 피해가 있는 것도,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화를 내고 대적한단 말입니까? 이유가 안 됩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영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기독교, 아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대적과 탄압을 보십시오. 불교와 천주교는 서로를 대적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수녀, 불교의 비구니, 천도교의 정녀들이 사이좋게 모여서 만들어진 삼소회도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괴한 무속신앙과 점집과 우상들이 나라를 뒤덮어도 그들 사이에는 별 싸움도 없고 별 말도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손가락질과 지탄과 훼방과 대적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에게 아무런 손해도 없는데 사랑과 도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기독교를 향하여 이유 없는 분노와 폭력과 조롱과 비웃음을 퍼붓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본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주를 믿는 자는 대적들의 한 가운데 던져진 외톨이 군병이거나 적으로 둘러싸인 외딴 성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자 보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의 수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 혹독한 재앙과 진노 가운데서도 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용, 곧 옛뱀이요 마귀요 사단을 잡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인봉하고 천년왕국을 다스리시는데, 천년이 차면 사단이 그 옥에서 잠깐 놓여나와서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는데 그 수가 바다 모래 같고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마귀는 불과 유황불에 던져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년왕국의 끝에도 그토록 많은 수가 하나님의 도성을 에워싸고 대적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택한 자의 수는 적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더욱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주의 성도들의 외로운 싸움, 고군분투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느헤미야는 대적들 가운데 던져진 것 같은 상황에서 성벽을 수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하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적들 앞에서 유대사람들은 낙담하고 힘이 빠집니다. 도저히 성벽을 세울 수 없다고 체념하려고 합니다. 대적들의 위협에 겁을 먹고 열 번이나 와서 구해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다 사람들에게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독려합니다. 그렇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죽습니다.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파숫군을 세우며 백성들을 무장시켜 대기시키고 든든히 방어하도록 합니다. 한 손에 무기를 잡고 한 손으로 일하는 치열한 싸움을 이끌어갑니다. 그 때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대적의 꾀를 폐하시고 성벽을 수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싸움으로 세워집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구원도 싸움으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싸움, 곧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49)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부모자식간, 형제지간이라 할지라도 그 싸움은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 영접하면 구원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얻어질 것 같이 생각하기 쉬운 우리에게 그것은 충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 없이 얻어지는 승리 없고 피 흘림 없이 이루어지는 생명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생애 또한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대적들과의 싸움, 십자가의 승리를 막으려는 마귀의 유혹의 치열한 싸움을 주님은 끝내 싸워 이기시고 “다 이루었다.”고 승리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대적의 수가 바다모래같이 많다 해도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것입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기꺼이 복음을 들고 용감하게 달려나가 분전하여 이기는 승리의 기쁨을 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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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발랏과 도비야가 두려워하고 근심하나 대장쟁이 ㆍ 페르샤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 왕의 술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돌아온 형제, 아마도 동생인 것 같습니다만, 하나니로부터 황폐한 유다와 예루살렘 성읍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울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니는 아마도 아닥사스다 왕 7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에스라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13년만에 형 느헤미야가 있는 수산으로 돌아와서 형에게 그간 사정과 예루살렘 형편을 자세히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니산월, 수산궁에서 왕의 앞에 술을 따라 드렸다가 왕으로부터 ‘네가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크게 두려워하며 근심하게 된 사연을 아뢰게 됩니다. '수색이 있느냐?'는 왕의 질문에 느헤미야가 왜 크게 두려워하였을까요? 술관원은 왕이 마실 술에 혹시 독이 들어있지 않은지를 먼저 시음해보고 올려드리는 왕의 신변안전요원입니다. 술관원은 마음먹거나 반역자와 내통하여 음모를 꾸미면 술에 독을 타서 왕을 암살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습니다. 술관원은 술을 마시는 왕의 마음을 안심하게 하고 편하고 즐겁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술관원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는 것은 왕에게 암살기도의 징후로 오해되거나 혹은 왕의 술 마시는 기분을 잡치게 했다는 죄가 되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수색이 왠 일이냐는 왕의 질문에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느헤미야에게 수색의 이유를 묻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에게서 유다 땅과 예루살렘 성읍의 형편을 듣고 느헤미야가 고향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허락하면서 금과 은, 식량과 제사에 필요한 희생제물, 건축에 필요한 재목 등 모든 필요한 지원을 하도록 조서를 내립니다. 그리고 군대장관과 마병까지 딸려 느헤미야를 호위하게 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왕이 느헤미야를 신임하고 아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강 서편으로 가서 총독에게 조서를 전하자 호론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사람 도비야가 크게 두려워합니다. 느헤미야를 읽으면 느헤미야의 영웅적인 신앙과 행적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유다 땅과 예루살렘의 참담한 형편을 듣고 슬퍼하고 울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이미 70년을 작정하셨고 때가 차매 고레스 왕을 세워 유다의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룹바벨과, 그 다음엔 에스라, 그리고 다시 느헤미야를 차례차례 부르시고 보내어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스룹바벨을 보내어 성전을 먼저 세우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에스라를 보내어 말씀을 세우게 하시고, 이제 느헤미야를 보내어 성벽을 세워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는 모습은 마치 교회를 세우는 순서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훼방과 억압이 따르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낙망, 그리고 중단과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루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비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과 감옥을 거쳐 애굽총리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하심은 차질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리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금식과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끌어내거나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순종하는 느헤미야 앞에 산발랏과 도비야는 몹시 근심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것은 느헤미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저들은 발악하고 훼방할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능력이 저들에게는 없습니다. 승리는 우리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속한 우리의 것입니다.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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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려내어야 한다면

대장쟁이

[에스라 10:1-3]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엘람 자손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 일행은 겨우 1,700명 남짓 되는 숫자였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1차 귀환 때의 약 5만명에 비하여 훨씬 적은 수였지만 그들이 운반해 온 금, 은 기명, 하나님의 전에 드릴 금은보화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스룹바벨 때에 비하여 가치로 따져 6~7 배나, 많았습니다. 따라서 수개월이 걸리는 노정에서 그들이 가진 금은보화를 노리는 도적과 대적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호위군대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능히 그들을 지켜주실 전능하신 구원자 하나님의 손을 두고 사왕에게 그러한 요청을 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하고 겸비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노중에서 도적들과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여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토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금은보화를 하나님의 전 제사장들에게 인계하고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 난 다음 심각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유대 땅의 이방족속의 풍습을 따르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가 저녁제사 드릴 때가 되어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고 기도하며, 또 엎드려 울며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무리가 이 모습을 보고 함께 통곡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놓고 단순히 에스라와 백성들이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했다고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것은 가나안 족속의 풍속을 따르고 혼합하여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의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통째로 혼합되었습니다. 이방여인과 혼합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패는 하나님의 버리심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되면 아무 방법이 없고 더 이상 긍휼도 자비도 소망도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스가냐가 일어나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오히려’라는 번역이 좀 이상합니다. ‘오히려’가 아니라 ‘아직’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에게 살아날 길이 남아있다. 그것은 지금이라도 이방여인 아내와 소생을 다 내보내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는 것이다.” 살아날 방법은 전체가 썩기 전에 부패부위를 과감히 도려내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은 것처럼, 범죄한 한쪽 눈과 한쪽 발을 뽑고 찍어버리는 것 같은 처절한 고통의 단절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몇 달 동안 조사를 하고 112명에 달하는 이방여인과 혼인한 자들의 명단을 발표하고 기록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모든 이방여인들과 그 소생을 내보내는 결단을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다면,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에스라서에 기록된 이방여인들을 쫓아내는 기사는 어처구니없는 인권유린이요 무책임한 가족방기행위입니다. 특히 여성권익운동가들이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무서운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 아래로 불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만으로 확고한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돌아온 것만으로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와 엎드려 울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해도 그 믿음이 혼합되고 부패하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혹 우리에게는 과감히 도려내어야 할 죄악과 혼합과 타협의 부패부위는 없을까요?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된 우리에게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려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미혹과 혼합과 타협과 불순종이 소용돌이치는 어둡고 악한 세대입니다. 부패하면 안 됩니다! 부패하면 죽음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도려내어야 할 것은 도려내어야 합니다.

일어나라, 하나님이 하신다.

대장쟁이

[에스라 6:11]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포로생활에서 놓여나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전 지대를 놓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옛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대성통곡하며, 여호와의 전을 재건하려는 역사를 시작하였지만 대적들의 훼방으로 공사는 중단되어 다리오 2년에 이르게 됩니다. 많은 시간이 흐릅니다. 이대로 성전재건은 영영 물 건너가는 것일까요? 유대 땅과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득실거리는 이방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강압에 의하여 건축을 중단당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유대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좌절감과 낙담은 어떠했을까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전은 구원이 되신 주님의 오심을 의미하고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면 머리를 밟히고 모든 권세를 빼앗길 원수마귀의 성전을 막으려는 훼방은 결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속이고 낙담시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들이 성전건축을 막고 주님의 오심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사람들의 손을 약하게 만들고 사람의 뜻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막고 주님 오심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사람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리고 기이한 섭리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낙담하고 있던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어 격려하고 위로하며 힘을 주시어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전 역사를 계속하게 됩니다.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너희들이 누구의 명령으로 이러한 역사를 하느냐?”고 물으며 역사를 중단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총독은 다리오 왕에게 보고서를 올립니다. 총독은 성전재건을 막으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이로 인하여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보고를 받은 다리오 왕은 서적 곳간을 뒤져 그들의 태조격인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명령하였던 칙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레스 왕의 칙서를 발견한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전폭적으로 돕고 지원하되 절대로 훼방하지 못 하도록 더욱 강화된 칙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전재건은 일사천리로 진척되어 4년 뒤인 다리오 6년에 감격적인 준공을 보게 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백성들은 대적들의 훼방과 억압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니 백성들은 힘을 얻고 기이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 성전건축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어 격려하고 위로하신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들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느냐?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일어나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다가 대적들의 훼방으로 주저앉아 낙담하고 있는 유대백성 뿐 아니라 오늘날 복음을 가진 채 이곳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먼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하심과 같습니다.

수룹바벨과 예수아와 백성들을 꾸지람하시면서도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그 옛날 이세벨에게 쫓기며 두려움과 낙담으로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를 위로하신 하나님을 기억나게 합니다. 낙담하고 곤비하여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를 그릿 시내에 숨기고 까마귀를 보내어 떡과 고기를 먹이시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불러서 영광을 나타내시며 숨겨놓은 칠천인과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가 있음을 말씀하시며 새롭게 힘을 주시고 사명을 주시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위로와 힘주심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기 원합니다. 일어섭시다.

성전건축을 막아랏!

대장쟁이

[에스라 4장 1-2절]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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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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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하여 바벨론에서 귀환한 약 5만 명의 사람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한 인원이 포로생활에서 놓여나 돌아와서 유대 각 성읍에 흩어졌다가 7월에 다시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열악한 형편 가운데서 목수와 석공을 사고 두로, 시돈 사람들로부터 백향목을 구해 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대를 놓을 때 무리는 기뻐 소리하고 노인들은 대성통곡을 하는 감격적인 성전재건 기공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대적의 훼방이 시작됩니다. 그 사이에 유대땅에 들어와 살던 이방족속들이 찾아와 함께 성전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여호와의 성전을 함께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수룹바벨과 예수아와 족장들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이들은 노골적으로 성전건축을 훼방하기 시작합니다. 방해와 협박, 그리고 모함과 궤계를 동원합니다.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건축을 방해하고 바벨론 통치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일이 진척되지 못 하게 하고, 바벨론 왕에게 유대인들을 모함하는 연판장 상소를 올려 기어코 성전건축을 중단시키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다리오 왕 제 이년이 되기까지 성전건축은 중단됩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이 왜 이렇게 훼방을 받으며 고난과 역경이 따르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그러는 것일까요? 그 옛날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며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7)”

하나님의 전이 단순히 기도하고 복을 비는 곳이라면 저들도 바알과 아세라 등 온갖 신들의 전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훼방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전은 세상의 우상의 전과 다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심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주님이십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되신 예수님, 임마누엘 주님이 오실 때 사단의 권세는 뭉개어지고 모든 죄인이 죄의 사슬에서 놓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권세를 빼앗기게 될 사단, 죄인이 구원 받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원수 마귀의 훼방은 결사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헤롯은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 어린 남자아기를 다 죽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유대인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기어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단의 궤계로 베드로는 주님의 앞을 가로 막으려 했고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았습니다.

포로에서 놓여나 돌아온 남은 자들의 성전재건은 피나는 싸움과 고난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그들을 막아선 마귀의 대적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혼합과 타협, 둘째는 위협과 공갈, 셋째는 거짓과 모함의 궤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적은 결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훼방이 있을 것입니다. 대적들은 결사적으로 훼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훼방을 필사적으로 이겨내고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성전 된 주님의 교회와 우리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원수마귀의 모든 훼방과 술수를 깨뜨릴 수 있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려고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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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에스라 2장]

에스라 2장에 들어가면 예루살렘과 유다로 귀환한 사람들의 계보와 숫자가 나옵니다. 3절 ‘바로스 자손이 이천일백칠십이 명이요’부터 시작하여 많은 이름의 계보들이 나오고 64절에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이천삼백육십 명이요, 그 외에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로 되어 있어 전체 귀환인원이 약 5만 명이라는 숫자가 계산됩니다. 사람 수가 적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짐승들의 수도 넣었습니다, ‘말 736, 노새 245, 약대 435, 나귀 6,720 마리’, 자세히도 세었습니다. 그리고 ‘금 61,000 다릭, 은 5,000 마네, 제사장 옷 100 벌’이라는 재산내역도 나옵니다. 짐승의 수를 일일히 세어서 기록한 것도 이상하지만 그 짐승들이 정결한 짐승, 곧 제물로 쓸 수 있는 소와 양이 아니라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어쨌든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하는 모습이 그 옛날 애굽 종살이로부터 이끌어내어져 나오는 것과 비슷하기는 한데 인원수가 10분의 1도 안 됩니다. 금과 은의 규모, 재산의 규모도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솔로몬왕의 세입금 규모가 금 666달란트였다고 하는데 금 61,000 다릭은 그 40분의 1 정도밖에 안 됩니다. 어떤 족장들이 예물을 즐거이 드리고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그 규모는 그 옛날의 영화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하였을까요? 그 인원, 그 재산, 그 힘으로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고향인 유대 땅 각각의 본성으로 돌아가 거합니다. 그렇지만 폐허가 되고 이방족속들이 들어와 살고 있을 본성들이 그 옛날 고향과 같겠습니까?

어쨌든 그들은 7월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라(신 16:16, 출 23:15), 하신 말씀대로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성전은 무너지고 폐허만 남아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단을 그 터 위에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열국 백성들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 땅 예루살렘과 유다에는 많은 이방잡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적은 숫자의 유대인들은 그런 상황에서 무너진 성전터에 단을 쌓고 주변의 눈치를 보아가며 두려워하면서 초라하게 제사를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그들은 여호와의 전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사람과 두로 사람들에게도 값을 주고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로 수운(水運; 물로 운반)하게 합니다. 유다자손과 레위자손을 세워 공사감독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자손들은 제금을 들고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는 지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함이로다.” 무리가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를 때 그 옛날 여호와의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합니다.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로 뒤범벅이 된 감격과 눈물의 기공식입니다. 너무나 슬프고 처연한 성전기공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전 건축은 곧 주변의 이방인들의 훼방과 모함을 받아 오랫동안 중단되게 됩니다. 한 번 잃어버린 에덴동산이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 것처럼 한 번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솔로몬성전 또한 다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후 400 여년 동안 그렇게 유대인들은 다시는 잃어버린 옛솔로몬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그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성전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성전은 우리 몸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로 뒤범벅이 되어야 할 성전기공식은 십자가 아래 엎드려 주님을 영접하는 우리의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대장쟁이

 [열왕기하 25:16-17]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취하였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중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그 한 기둥은 고가 십 팔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머리가 있어 고가 삼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빼앗아간 금은 그릇들과 놋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에스라 1장 7절부터를 보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레스 왕이 느부갓네살이 약탈하였던 성전기명들을 되돌려 주었는데 금쟁반 30, 은쟁반 1,000, 금대접 30,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 도합 5,400 개나 되었습니다. 여기에 놋기구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고레스 왕이 놋기구까지 되돌려주었더라면 운반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 옛날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놋기구들은 깨뜨려서 가지고 갔으니 그 놋들은 무기나 그릇이나 또 여러 다른 용도로 쓰여 흩어지고 없어져 버렸겠지요.

느부사라단이 깨뜨려서 바벨론으로 가져간 놋의 중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름 4규빗(약 2미터), 높이 18규빗(약 8.5미터)이나 되는 거대한 두 놋기둥과 그 위에 얹힌 머리, 지름 10규빗(약 4.5 미터)에 높이 5규빗(약 2.4 미터), 두께 10센티미터의 거대한 놋바다와 그 놋바다를 떠받치고 있는 놋으로 만든 10 마리의 소, 너무 크기가 커서 깨뜨려서 옮겨갔다고 하는데, 그 많은 놋기구들은 오늘날 크레인을 동원하고 대형트럭들이나 기차로 수송한다고 해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물건만 빼앗아 가져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숨도 무자비하게 가져갔습니다. 다 죽이고 사로잡아가고 빈천한 자만 남겨놓고 포도원을 갈도록 했습니다. 시드기야왕은 도망치려다가 잡혀 아들들이 눈앞에서 참살당하고 시드기야 자신은 두 눈이 뽑힌 채 결박되어 끌려갔습니다.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서 잡은 대제사장과 전 문지기와 내시와 시종들 60명을 바벨론 왕에게 끌어가자 바벨론왕은 이들을 남김없이 다 쳐 죽였습니다. 자비도, 긍휼도, 인정사정도 없는 잔혹하고 처참한 멸망이었습니다. 심판의 마지막날도 이러하겠지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왜 이렇게 참혹한 멸망을 맞이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습니다. 사울이 버림당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고 다윗이 세움 받은 것은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멸망하는 최후순간까지, 마지막까지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멍에를 지워 예레미야를 보내어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하면 바벨론이 빼앗아간 성전기명들이 곧 돌아올 것이며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드기야왕에게 바벨론을 섬기고 배반하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불순종하면 처참한 마지막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순종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끝까지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멍에를 부수었고 시드기야는 듣지 않았으며 왕족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벨론을 섬기자 하던 그달리야를 쳐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끝까지, 그야말로 끝까지 불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유다는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까지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고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70년을 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불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구속사까지 중단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철저히 불순종하였어도 하나님은 ‘여호와의 열심’으로 구속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여호야긴 왕을 37년만에 끌어내어 회복시키셨고 바벨론에서 스알디엘을 낳게 하심으로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장 12절 참조). 유다의 남은 자들을 귀환시키시어 예루살렘을 재건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400년의 암흑기,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때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지키시리라 하신 약속과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끝까지 불순종한 인간들을 끝까지 ‘여호와의 열심’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불순종이라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순종하던 나까지도 기어히 구원하셨습니다. 





아하스의 죄, 므낫세의 죄

대장쟁이 ㆍ 2013-12-10 (화) 20:41 IP: 173.xxx.141 ㆍ조회: 10      

[열왕기하 24:1-4]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요시아가 앗수르를 치러 올라가는 바로느고를 대적하였다가 허무하게 죽은 후 국민들은 요시아의 시체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장사지낸 후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기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습니다.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아버지 요시야와는 전혀 달랐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즉위한 지 불과 석 달 뒤에 애굽왕 바로느고가 여호아하스를 잡아다 립나에 가두었고 애굽으로 끌고 갔으며 여호아하스는 거기서 죽었습니다. 바로느고는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여호야김(여호와는 세우신다)라고 고쳤습니다.

우리는 애굽왕 바로느고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애굽왕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앗수르를 치러 올라가며 또 자기 앞을 막아서는 요시야 왕에게 “내 앞을 막지 말고 비키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였을까요? 또 여호아하스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자 여호아하스 왕을 끌어가고 엘리야김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는 새 이름을 주고 유다의 왕으로 세우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징치하는 모양새입니다. 이방 애굽왕 바로느고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다를 간섭하고 가르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을까요? 이렇게까지 하셨건만 여호야김마져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유다는 끝내 돌이키지 못 하였습니다. 결국 애굽의 세력도 약해지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중동지역을 석권하게 되면서 유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맙니다. 여호야김도 죽고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는데 여호야긴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벨론이 쳐들어와 즉위한 지 3개월밖에 안 되는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그 아자비 맛다니야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쳐 왕으로 세웁니다.

바로느고는 금과 은을 벌금으로 부과하여 빼앗아가는 정도였지만 바벨론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유린하고 죽이고 훼파하고 약탈해갑니다. 유다는 이제 더 강하고 더 악한 이방 바벨론의 치하에 들어가 빼앗기고 바치고 섬겨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도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시드기야 왕 9년에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섬기지 않고 배반하자 바벨론은 유다를 재침공하고 시드기야 왕 11년에 시드기야는 도망치다가 잡혀 그 아들들은 눈앞에서 참살당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약탈, 파괴되고 유다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24장 3절은 유다의 멸망 원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유다에 임함은 여호와께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함이니 이는 므낫세의 모든 죄로 인함이며 그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흘린 무죄한 자들의 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라.’ 므낫세의 죄가 어떠했기에 하나님은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며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셨을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대표적인 유다왕으로는 아하스와 므낫세를 들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앗수르왕 디글랏 블레셀의 우상신전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보고서 제사장 우리야를 시켜 예루살렘에 큰 제단을 만들게 하고 그 제단에서서 일월성신과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습니다. 요아스의 할아버지 므낫세도 아하스와 같이 일월성신과 우상들을 섬기고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퇴락하고 제사는 폐하여졌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행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성전 밖에서 우상의 제단을 만들고 악행을 저질렀고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여호와의 전 마당에다 일월성신 우상제단을 쌓고 성전 안에다 바알, 아세라상을 세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죄한 자들을 죽여 예루살렘을 피로 가득하게 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아하스는 성전 밖에서 악행을 하였고 므낫세는 악행을 성전 안에서 저질러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짓밟고 욕보인 것입니다.

아하스와 므낫세의 악행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비교하자면 아하스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죄에 해당하고 므낫세는 그리스도를 밟아 현저하게 욕보인 죄악을 행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은 믿음을 버리고 타락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인 자들로서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그리스도를 버렸고 므낫세는 그리스도를 밟고 능멸한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욕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하스와 므낫세의 악행, 특히 므낫세의 악행으로 인하여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음에도 유다와 예루살렘을 버리시기로 하신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밟아 현저히 욕보인 자에게 다시 구원의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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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는 어떻게 그리 악한 왕이 되었을까?


악한 왕 아하스에게서 히스기야 같은 선한 왕이 나고, 히스기야에게서 다시 므낫세 같은 악한 왕이 나는 것도 참 희한한 일입니다. 신앙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히스기야를 이어 12살에 즉위한 유다 왕 므낫세는 장장 55년을 집권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릅니다.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그 부친 히스기야가 헐어버렸던 산당을 다시 세우고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과 아세라상을 세우고 일월성신의 단을 쌓아 유다왕국을 우상숭배소굴로 만듭니다. 여호와께서 “내 이름을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다 우상의 단을 쌓고 바알과 아세라상, 일월성신의 단을 세우는 악하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점치고, 사술과 요술을 행하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여호와의 진노를 격발합니다. 유다백성들도 므낫세의 꾀임에 빠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게 우상숭배를 합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심판하고 무서운 재앙을 내리고 대적의 손에 붙여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말갛게 씻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를 다시 일으켜 모든 악을 씻어버리겠다 하심 같습니다. 므낫세 시대의 이 극악한 패역과 타락은 결국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므낫세가 왜 그토록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와 패역의 악행들을 행한 악한 왕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므낫세가 왜 이런 악행을 했을까요? 므낫세가 원래 악한 인간이어서일까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의 성전에다 우상의 단을 만들만큼 그는 포악하고 겁도 없는 무모한 인간이었을까요? 어떻게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었던 산당과 부수어버렸던 우상을 다시 세우고 감히 여호와의 성전을 더럽힐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측해본다면 아하스는 용감하거나 포악무도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겁 많고 우유부단하고 소심하고 두려워 떠는 자였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히스기야가 54세에 불과 열 두 살 된 자신을 남겨두고 죽은 다음 자신을 지켜주고 이끌어줄 보호자가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점을 보고 접신한 자의 말을 듣게 되고, 우상과 일월성신에 의지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목숨을 구걸하여 15 년을 더 살지 않았더라면 므낫세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의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어머니 헵시바라도 아들을 여호와 신앙으로 굳세고 용감하게 세우고 바른 신앙으로 잘 이끌었다면 므낫세가 이런 악한 왕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부모의 신앙교육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인간은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는 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고 이 불안을 통하여 사단은 미혹과 위협과 장악의 검은 손을 뻗쳐옵니다. 바른 신앙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가는 진시황의 거대한 무덤과 그 속의 병마 등 부장품들, 이집트의 피라밋 같은 유적들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연재해와 빈곤, 질병 같은 것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무서운 위협이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샤머니즘과 온갖 종교, 심지어 인간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아즈텍 문명의 유적같은 것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는 자신을 지켜줄 수많은 우상들과 일월성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인간을 움켜잡고 사단은 얼마든지 조종하고 농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에다 우상의 단을 쌓고 바알과 아세라상, 일월성신의 단을 세우는 악하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게 하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심지어 아즈텍 신전에 산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어 바치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살얼음판 같은 세상, 외줄타기 같은 인생살이, 실업과 불황, 경제위기, 전쟁과 재해, 불안한 미래가 두렵습니까? 당신을 찾아오고 덮쳐들 늙음과 병이 두렵습니까? 죽음이 두렵습니까? 무언가 의지할 것, 돈, 재산이라도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습니까? 아마도 이러한 불안들이 오늘날 이 시대에도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죄의 출발이요 우상숭배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불못에 참예할 자의 명단 첫 번째에 ‘두려워하는 자’를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군병은 어떤 위험이나 환난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 27:3)’


[열왕기하 20장]

‘내탕고(內帑庫)’란 조선시대 임금의 재산을 보관하던 창고를 가리킵니다. 태조 이성계가 원래 함경도 땅을 3분의 1이나 소유한 부호였는데 이 재산이 조선왕실의 대를 이어 내려왔고 이를 관리하는 ‘내수사’라는 관직도 두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성경이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자에게 열어 보여준 궁전과 여호와성전의 보물창고를 ‘내탕고’로 번역했군요.

오늘 말씀을 보니 멀리 바벨론왕 부로닥 발라단이 편지와 예물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오고 히스기야는 그 사자의 말을 듣고 내탕고를 열어 몽땅 보여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왜 내탕고를 몽땅 보여주었을까요? 앗수르 왕 산헤립의 협박편지를 하나님의 전에 펴놓고 울며 기도하던 히스기야에게 걱정하고 위로해주는 바벨론왕의 편지와 예물이 그토록 고맙고 감격스러워서 그랬을까요? 자신의 지위와 부를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아무튼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내탕고를 다 보여준 것이 왜 그렇게 큰 문제가 되며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되는지, 그것이 그렇게 큰 죄라면 하나님은 왜 미리 경고하시거나 막지 않으시고 일이 다 벌어진 다음에야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심판의 말씀을 하셨는지, 왜 히스기야는 그 말씀을 듣고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엎드렸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이사야 39장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하 32장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거민이 교만의 죄를 뉘우쳤다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 그것이 교만의 죄였다는군요.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교만의 죄로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내탕고를 열어 보인 죄, 이것을 에덴동산 선악과 사건과 함께 생각해 봅시다.
내탕고가 무엇입니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넣어둔 창고입니다.
당신의 내탕고에는 지금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금덩어리? 현찰? 통장? 부동산등기권리증?
아니지요. 당신의 내탕고,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는 주님이 계시지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생명의 말씀과 믿음이 들어 있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내탕고사건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히스기야는 사자의 말을 듣고 내탕고를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뱀을 받아들이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저지른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닮아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자기 생각으로 해버린 것입니다.
바벨론 사자가 보여 달라고 졸랐는지 모르지만 히스기야가 뭐라고 했어야 옳았을까요?
“안 됩니다. 제 것이라면 얼마든지 보여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전은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금하셨습니다.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전 뜰만 밟아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히스기야가 내탕고를 열어 바벨론 사자에게 다 보여준 것은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 죄였던 것입니다. 나의 생명이 되신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이방인에게 내어보여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하신 불신자, 원수마귀의 자녀에게 나의 귀중한 것을 내어준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버린 것이요, 나의 생명을 원수의 손에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이사야가 전해준 말씀을 듣고 비로소 이 무서운 범죄를 깨달았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시다 하면서 그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뒤늦게라도 그 죄를 깨닫고 뉘우친 히스기야에게 살아생전에는 평안을 허락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를 불쌍히 여기시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며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잠언 4장 23절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이 된 여러분, 목숨보다 더욱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붙잡으십시오. 내탕고를 굳게 잠그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주님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 생명을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아무도 캐내어갈 수 없게 단단히 지키십시오. 너무나 많은 유혹과 시험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악한 자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 악한 시대입니다.  


편지를 펴놓고 올린 기도

[왕하 19: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의 전에 펴놓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당시 중동의 패권자였습니다. 중동지역의 모든 나라들을 쳐서 정복하고 굴복시켰습니다. 열왕기하 18장, 19장에는 그가 정복한 하맛, 아르밧, 스발와임, 헤나, 아와, 고산, 하란, 레십, 들라살 등 많은 나라들과 성읍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정복한 나라의 왕들을 갈고리로 코를 꿰고 입에 재갈을 먹여서 소처럼 끌고 가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아가고 이리저리 흩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잔인한 산헤립의 침공을 두려워한 히스기야는 유다 성읍들을 견고히 수축하고, 특히 예루살렘에는 기혼샘으로부터 1,750 피트(약 525 미터)에 이르는 지하수로를 파서 성 안 실로암 못으로 연결하는 대공사를 하여 침공에 대비하였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지하수로는 ‘히스기야의 수로’로 불리며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한 코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헛수고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나온 바와 같이 애굽과 내통하였다가 앗수르의 보복을 당하고 앗수르왕에게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은을 다 바치고 기둥에 입힌 금까지 다 벗겨서 갖다 바치고도 앗수르 군대장관 랍사게로부터 모욕을 당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에워싼 산헤립의 부하 랍사게는 ‘탈 사람이 있다면 말 이천 필을 내겠다, 내기하자. 너희 신이 너희를 건지겠느냐.’ "내 주 앗수르 대왕이 나를 보내 너희들로 자기 대변을 먹고 소변을 마시게 하려..." 하면서 히스기야와 유다백성들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는 것 같이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궁내대신과 서기관과 장로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앗수르 군대에 붙이지 않겠으며 그들이 오히려 본국으로 돌아가 죽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앗수르 왕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보내 ‘너의 하나님이 내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해낼 수 있을 줄 아느냐, 열방의 어떤 신이 자기나라를 건졌는가?’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훼방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산헤립의 편지를 펴놓고 부르어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교만한 산헤립의 코를 갈고리로 꿰고 입에 자갈을 먹여 오던 길로 끌어 되돌아가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처녀 딸 이스라엘이 저들을 비웃으며 예루살렘의 딸이 머리를 흔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들은 히스기야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하룻밤에 산헤립의 18만 5천 군대를 송장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산헤립은 돌아가 두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유명한 한 대목입니다. 통쾌하기도 합니다. 하룻밤에 18만 5천 대군을 송장으로 만들어버린 천사의 그림을 그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만 관심을 두기 쉽습니다. 기도제목을 적은 종이를 펴놓고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신 말씀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히스기야가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편지를 펴놓고 기도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응답하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앗수르 왕이 하나님을 훼방했다 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것은 ‘나와 내 종 다윗’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세게, 열심히 해서, 편지를 펼쳐놓고 기도해서 하나님을 내게로 끌어와 나를 도우시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여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움직여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은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종 다윗"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다가

대장쟁이 ㆍ 2013-11-02 (토) 23:52 IP: 173.xxx.141 ㆍ조회: 17      

[열왕기하 18:21]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찌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다메섹에서 본 우상의 제단을 본떠 예루살렘 성전을 뜯어고친 어리석고 악한 왕 아하스에게 히스기야라는 걸출한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아하스가 우상 앞에서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한 아들이 바로 히스기야는 아니었을까요?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것은 아들을 우상에게 바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에게 바쳐진 아들을 기뻐하셨을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히스기야가 이미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라면 아버지가 아들을 우상에게 바치는 해괴한 짓거리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우상에게 빼앗기거나 버리실 리는 없겠지요. 우상은 헛것이거든요. 돌과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일 뿐입니다.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하는 짓거리도 헛것이고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불교를 믿던 저희 어머니는 아들들 잘 되라고 대한민국 전국의 큰 절마다 찾아다니며 불사(佛事) 돈을 바치고 절간 기왓장에다 아들들의 이름을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미 만세 전에 택정하셨기 때문이겠지요.
히스기야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키운 것은 못된 아버지 아하스가 아니라 어머니 아비야와 외할아버지 스가랴 제사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가 외조모 로이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을 물려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요.

오늘 말씀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스기야는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수어 없애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그 계명을 지켰으며 하나님께서는 저와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셔서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된 역대하 29장을 읽어보면 히스기야 왕은 버려지고 퇴락하였던 여호와의 전 문을 열고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제하고 수리하고 성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다시 세워 폐지되고 중단되었던 제사를 회복하고, 레위사람들을 세워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타게 하고 나팔을 불며 노래하게 하고 백성들과 함께 수많은 번제물을 드림으로써 남유다왕국이 여호와 신앙회복을 이루는 감격적인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8장은 1절부터 8절까지는 히스기야의 신앙과 형통함을 기록한 다음 9절부터 12절까지는 하나님을 떠난 북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비참한 마지막과 멸망을 기록함으로써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주상을 깨뜨리고 목상을 찍으며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고 제사를 회복한 히스기야를 보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시원해 하셨을까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왕국이 우상숭배와 멸망의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요시아 같은 왕을 얼마나 기다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히스기야와 요시아를 아시고 정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히스기야와 요시아를 만나시려고 멸망해가는 이스라엘을 지키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를 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며 기뻐하는 우리를 만나시려고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이 악한 세상의 심판을 미루시고 우리를 기다리셨을까요? 우리도 그런 히스기야들일까요?

그런데 히스기야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던 모양입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를 보면 히스기야의 한심하고 비참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배반하고 애굽왕과 내통을 하였습니다. 앗수르왕이 쳐들어왔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왕 앞에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은을 다 바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기둥에 입힌 금까지 다 벗겨다 갖다 바치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그러고서 앗수르 군대장관 랍사게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네가 싸울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찌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랍사게의 꾸지람이 하나님의 꾸지람같이 들리는 기가 막히는 꼴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의지하던 히스기야가 잠시 실족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아버지 아하스가 앗수르왕에게 뇌물을 주고 아람을 치도록 했던 것처럼 애굽군대를 의지하려고 약은 세상 술수를 부렸을 때 이방인으로부터 이렇게 비참한 굴욕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믿음을 떠나거나 실족하지 맙시다. 상한 갈대 같은 세상의 재물이나 사람의 힘을 의지하려는 약은 꾀 부리지 마십시다.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의지할 도움이시며 방패시며 요새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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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3장>

양로원에서 일하는 분들이 노인환자들을 수발할 때 가장 힘 드는 건 축 늘어지는 노인환자입니다. 사람이 축 늘어지면 아주 무겁고 힘듭니다. 열왕기를 살펴오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인간들이 바로 축 쳐지고 늘어지는 존재들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 일으켜 세워보시려고 애쓰시지만, 다윗을 도우셔서 왕국을 이루게 하시지만, 인간들이나 인간들의 왕국은 모래성인지, 사상누각인지, 노인환자인지 하나님이 잠시만 돌아보지 않으시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인간들은 타락하여 축 늘어지고 하나님은 붙잡아 일으키시고 또 끌어올리시고..... 인간의 끝없는 타락은 하나님도 못 말리겠다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시고 남왕국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끝없이 타락하여 무너져 내리자 예후를 세우셔서 아합과 이세벨을 징벌하셨고, 남왕국 유다에서 악한 태후 아달랴가 왕자의 씨를 진멸하려 할 때는 여호세바와 여호야다를 통하여 아달랴의 마수로부터 요아스를 빼내어 왕국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40년간의 통치기간 중 고모부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부하 방백들의 세력에 굴복하는 비굴한 군주의 모습을 보입니다. 아람왕 하사엘이 올라오니까 지레 겁을 먹고 예루살렘성전과 왕궁의 모든 금과 보물을 갖다 바치는 유약한 겁쟁이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결국 부하들의 손에 죽습니다.

13장에 들어가면 한심스러운 일이 북이스라엘왕국에도 계속됩니다. 북이스라엘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17년 동안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노하시어 아람왕 하사엘의 손에 붙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학대를 당하자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이스라엘이 주십니다.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다시 타락과 범죄의 수렁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아람왕의 손에 붙이십니다. 여호아하스가 죽자 그 아들 요아스가 대를 이어 똑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어쩌면 사사기에 기록된 반복되는 타락과 그렇게도 닮았을까요? 왜 인간은 이러한 한심스러운 죄와 타락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혼나면서도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를 못 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인간들은 축 늘어지는 양로원의 노인환자처럼 손을 놓으면 무너져 내리는 반복을 끝없이 계속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 하는 불신앙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또 하나 기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을 때 엘리사를 찾은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엘리사가 화살로 땅을 치라 할 때 겨우 세 번을 치고 말았습니다. 엘리사는 대여섯 번을 치지 않고 겨우 세 번을 치고 그만 둔 왕에게 노하였습니다. 요아스왕은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원기와 패기, 열정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요아스에게 하나님은 그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요아스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였다면, 하나님이 요아스의 전부였다면, 절대로 세 번만 치고 그만 두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늙어 죽을병이 든 엘리사를 찾아와 '내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며 눈물을 흘리던 요아스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며 아람을 진멸하도록 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방방 뛰고, 펄쩍펄쩍 뛰었어야 할 것입니다. 화살을 세번이 아니라 열번, 스무번이라도 신이 나서 꽝꽝 내리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세 번을 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원기와 패기로 행하십시오. 양로원 노인환자처럼 축 쳐지지 마십시오. 겨우 세 번 두드리고 힘이 빠져 주저 앉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격으로 방방 뛰십시오. 펄쩍펄쩍 뛰는 야생마같이 달려 나가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자의 모습은 자신감과 패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나타남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요, 소망이요, 생명이요 나의 전부인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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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2:17-18]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취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한고로 유다 왕 요아스가 그 열조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


남유다왕국의 악한 왕비 아달랴가 왕의 씨를 진멸할 때 요아스는 갓난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급한 중에 고모 여호세바가 훔쳐내고 고모부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에 숨겨 6년 동안 길러져서 일곱 살에 유다왕국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요아스는 여호와의 전에 드려지는 은을 거두어 퇴락한 전을 수리하고 여호와의 신앙을 다시 세우는 선한 왕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요아스의 치적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요아스는 치리 마지막에 가서는 아람왕 하사엘이 쳐들어오자 전과 궁의 온갖 금붙이 값나가는 것들을 모조리 갖다 바치는 나약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중상을 입은 채 신하들에게 죽임당합니다.

요아스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열왕기에는 요아스의 마지막 행적이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역대하 24장을 보면 고모부 여호야다 제사장이 130세로 죽자 요아스왕은 유다방백들에게 회유당하여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던 고모부가 죽자 부하들에게 휘둘려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 하는 한 마디로 줏대가 없고 마음약한 어른아이, 겁쟁이 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하여 이를 경고하셨으나 유대방백들의 모략대로 스가랴를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로 쳐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스가랴가 누구입니까? 자기를 구출해낸 은인 고모부 여호야다의 아들, 곧 요시아 자신의 고종사촌입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부하들이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악행을 저지르도록 방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남유다왕국과 요아스왕을 아람왕 하사엘을 들어 징벌하십니다. 역대하 24장을 보면 하사엘이 적은 군대로 쳐들어왔으나 하나님께서 유다의 대군을 그 손에 붙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과 궁의 보물이 약탈당하고 요아스는 중상을 입은 체 궁에서 배반한 신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비겁한 왕의 비참한 최후였던 셈입니다.

앞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타락’을 선과 악, 성품이 착한가 나쁜가 하는 것으로 구분지어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선하지 못 한 성품 뿐 아니라 연약함, 어리석음, 미련함, 두려워함, 교만함, 무지 같은 것을 포함합니다. 세상에는 “몰라서 지은 죄이니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통할 수도 있지만 심판대 앞에서는 어리석고 몰라서 속임 당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몰라서, 속아서 이단에 넘어가 잘못 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변명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몰라서, 속아서 그랬다는 변명이 통한다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부터 죄가 아닐 것입니다.

몰라서 저지른 죄도 문제이지만 겁이 많아 두려워서 믿음을 버린 죄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두려워서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하는 죄를 하나님은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목 잘리는 게 무서워서, 사자가 두려워서, 끔찍한 기름가마 때문에, 목을 겨눈 총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믿음을 버렸다는 변명이 통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순교자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유황불못에 던지우는 자들의 명단입니다. 믿지 않는 자, 살인자, 행음자 보다 먼저, 맨 앞에 “두려워하는 자”가 나옵니다. 민수기 13장, 14장의 사건, 가데스바네아에서 열 정탐군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랑하다가 엎드러져 죽었으며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외친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두려움이란 타락한 인간 죄성의 가장 밑바탕인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기에 믿음은 귀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담대한 용기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진정한 믿음은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죄성인 두려움을 밟아 이기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두려움 없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원합니다. 우리를 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같은 마귀의 이빨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원합니다. 두려움 앞에 너무나 연약한 우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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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줄

대장쟁이 ㆍ 2013-10-12 (토) 07:03 IP: 173.xxx.141 ㆍ조회: 24      

신학적으로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도 구원을 지켜낼 능력도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시고 이끄시지 아니하였다면 아브라함도 이스라엘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시고 이끌어주시지 않고서 제 힘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고 예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손에 쥐어주셨다 해도 인간들은 그것을 지켜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이 쥐어주신 구원마저도 내버리고 돌아서서 제 갈 길로 가는 타락의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원수가 구원을 끊임없이 빼앗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북이스라엘만이 우상숭배의 길로 간 것이 아니라 남유다왕국도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이세벨 같은 여자가 남유다왕국에도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남유다왕국의 이세벨(계시록 2:20)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달랴, 여호사밧왕의 아들 악한 왕 여호람의 아내 아달랴였습니다.
아달랴는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로서 막강한 태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폐하고 바알 신당을 섬겼습니다. 아들 아하시야 왕이 사마리아에 갔다가 요람을 죽인 예후에게 쫓기다가 죽자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습니다. 아들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아예 다윗의 혈통을 진멸하고 자신이 최고의 권력을 틀어쥐고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 한 것입니다. 참으로 악한 여자였습니다. 아달랴가 왕자들과 왕의 씨를 모조리 죽여 버림으로 인하여 유다왕국의 혈통은 사라지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 곧 구세주의 혈통이 거의 진멸되었습니다. 아달랴는 이로써 유다왕국이 완전히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으로 믿었고 사단은 승리의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북이스라엘은 스스로 성전(여호와 신앙)을 떠나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타락의 길을 갔고 이세벨에 의하여 악한 우상의 국가가 된 반면, 남유다왕국은 어리석고 악하고 유약한 왕들과 내부에 스며들어온 사악한 아달랴에 의해 우상의 국가가 되고 메시아의 계보가 끊어지는 참담한 위기를 맞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에 엘리야와 엘리사를 세우시고 예후를 일으킨 것처럼 하나님은 남유다왕국에도 여호세바와 여호야다 부부를 숨겨놓으셨습니다.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는 아달랴가 왕자들을 진멸하는 가운데 오빠 아하시야의 아들이자 조카인 갓난아기 요아스를 훔쳐내어 유모와 함께 자신의 침실에 숨겨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남편 여호야다 제사장이 왕자를 6년 동안 여호와의 전에 숨겨놓고 키웁니다. 그리고 제사장 여호야다는 어느 날 거사를 일으킵니다.

여호야다는 가리사람 백부장들과 호위병들의 백부장들을 여호와의 전으로 불러 맹세시킨 다음 일곱 살짜리 요아스 왕자를 보이고 나서 치밀하게 준비하고 요아스 왕자에게 면류관을 씌우고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뒤늦게 성전에 달려와 반역이라고 외치는 아달랴를 몰아내어 죽이게 하고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우게 하고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당을 부수고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바알 제사장을 죽이게 하는 일대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단의 무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도 타락시키고 메시야의 계보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니, 인간은 메시야의 계보조차 지켜낼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타락으로, 그리고 사단의 모략과 공격으로 금방이라도 끊어져버릴 것만 같은 메시야의 계보..... 그러나 하나님은 그 메시아의 계보를 지키셨습니다. 메시아는 그렇게 바람 앞의 촛불 같고 아슬아슬 실오라기 같은 계보를 통하여 오셨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셨다면 메시야의 계보는 금방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약해보여도, 사단이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결코 끊어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매어놓으신 그 사랑의 줄은 아무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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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8장과 9장....

북이스라엘 왕조,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타락의 길에서 헤어나지를 못 합니다. 온 나라는 우상의 국가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고 악인들이 득세하고 의로운 자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담한 시대에도 어두움과 맞서 싸우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와 또 숨겨놓으신 7천인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패역하고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 같고 악이 횡행하며 믿음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러내신 에클레시아, 믿음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패역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을 지키시며 그들을 사용하셔서 어두움을 대적하고 물리쳐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8장에 수넴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공궤하였으며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가 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그 여인에게 7년 가뭄을 피하여 블레셋에 가 살게 하시고 또 돌아와 다시 잃었던 땅을 되찾도록 하십니다. 이는 환난 속에서 그 택하신 자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와 보살핌을 보여줍니다. 이 험악한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이처럼 지키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악인들을 징벌하실 것입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들의 시대가 영원할 것처럼 융성하다가도 하나님께서 손을 펴 보응의 칼을 뽑으시는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소멸되고 날아가는 먼지같이 된다는 것을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극심한 굶주림 속에 아들을 잡아먹고 비둘기똥콩 한 사발이 수십만원씩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하룻밤 사이에 반전되어버린 ‘네 문둥이 사건’처럼 순식간에 말입니다.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모략과 섭리는 치밀한 소설이나 각본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떨어짐 없이 성취되는 것과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을 아무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건 하나하나, 과정 하나하나마다 오묘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 벌어지는 사소해 보이는 모든 과정이나 사건들까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하나도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 아람왕 벤하닷을 징벌하십니다. 벤하닷은 아합왕때부터 이스라엘을 노략하고 공격하였을 뿐 아니라 아합왕에게 사로잡혔을 때 형제라고 부르며 자기를 놓아준 아합왕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징벌에 의하여 부하인 하사엘에게 죽임 당합니다. 다음은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과 한 통속이었던 악한 유다왕 여호람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왕국을 지키시고 그 등불을 끄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에돔과 립나의 배반을 징벌하지 못 한 채 죽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합이 이세벨의 계교에 따라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죄악을 인하여 아합의 집안 모든 남자를 다 멸절시키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자신에게 닥칠 그러한 최후를 예상조차 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왕일 뿐 아니라 유다왕과의 관계도 돈독하고 70명의 왕자들까지 있었을 정도로 융성하고 형통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식간에 여호람과 그 집안을 멸절시켜버리십니다. 군대장관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십니다. 예후는 나봇의 포도원 땅에서 여호람왕을 활로 죽입니다. 여호람과 내왕하던 유다왕 아하시야는 도망치다가 죽습니다. 이어서 이세벨을 내어던져 죽여 개의 먹이가 되게 하고, 여호람의 70 아들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죽입니다. 아합의 집안 모든 남자들이 말갛게 씻김같이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후는 또 계략을 써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서 진멸해버리고 바알신전을 변소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야말로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징벌이 일사천리로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오늘날도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형통이 지금은 영원할 것 같아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 저들의 운명은 겨와 같고 재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려버리실 것입니다. 잠시 후 악인들은 사라지고 자세히 살필지라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인내하며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시편 37:8-10=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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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절의 능력

대장쟁이 ㆍ 2013-10-01 (화) 03:31 IP: 173.xxx.141 ㆍ조회: 82      

<열왕기하 2장>

이 마지막 시대에 주를 믿는 자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더욱 핍박받고 교회를 세우는 일도 더욱 힘들어져 갑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도 엘리야 같은 능력, 그것을 곱절로 받은 엘리사 같이 굉장한 능력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라 신약시대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님께 이르러 성취되었음을 믿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이 예수님을 나타내고 예표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읽으며 구약시대의 능력을 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원과 복음의 능력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며, 엘리야, 엘리사 같은 능력이 아니라 한 번에 오천 명을 주께 돌아오게 베드로와 핍박을 이기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이 가졌던 말씀의 능력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속법에 의하면 장자는 두 몫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구나.’ 하면서 ‘그러나 네가 하나님께서 너에게서 나를 취하여 올리시는 그 일을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엘리야가 예수님, 엘리사가 제자를 예표한다고 보면 이 말은 “네가 나의 승천(부활)을 목격하고 나의 증인이 되면 그 일이 너에게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는 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이를 신약에서의 성취로 연결시켜 본다면 결국 주님의 부활의 증인, 곧 복음을 전하는 제자에게 곱절의 능력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 보다 더 큰일을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께서 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고 수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구원에 이르는 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기적과 표적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 하였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기적과 표적이 아니라 복음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였을 때 오천 명이 한꺼번에 주께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부활의 증인들이 외치는 복음은 세상을 뒤집어 놓고 수많은 생명을 살렸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다음 엘리사에게 가장 먼저 나타난 표적은 소금으로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한 다음 모세가 광야에서 가장 먼저 행한 표적이 마라의 쓴물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어 단물로 바꾸는 것이었지요. 복음의 능력은 생명입니다. 부활의 증인,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생명을 살리고 이 땅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하고 조롱하는 젊은 아이들 42명이 곰 두 마리에게 죽임 당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를 놀렸다는 이유로 42 명이나 죽임 당하는 사건이 너무 잔혹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엘리사를 건드리는 악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나타내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조롱하고 비웃던 무리들, 복음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을 의미한다고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악한 자가 손도 대지 못 하게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엘리야의 승천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승천의 증인이 되는 것이 더욱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엘리사보다 더 큰 말씀의 능력이 갑절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실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로 곱절을 받는 장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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