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장)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


  혹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인류 보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으면 모든 인류를 그냥 구원하시면 되지, 왜 믿어라, 말아라, 귀찮게 그러시나?...." 그럴까요?
  동물의 왕국을 보니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자 한 마리가 이빨에 커다란 뼈가 끼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어 먹지도 못 하고 물도 못 마시고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걸 본 국립공원 관계자들이 마취총으로 그 사자를 기절시킨 다음 입안에 단단히 박힌 뼈를 끄집어내 줍니다. 이윽고 마취에서 깨어난 사자는 영문도 모르고 일어나서 갑니다. 이제 먹을 수도 있고 물을 마실 수도 있게 되었지만 그게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알지도 못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남도 그 아들을 가만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십자가에 내어주사 죽게 하시고 모든 인류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구원을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려고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조차 싫어 합니다. 여자의 후손, 구세주를 보내시겠다 하신 약속도 믿지 못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이 마침내 보내신 그 아들조차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배척하고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처럼 그를 죽였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달콤한 뱀의 속임은 잘도 믿은 인간들은 정작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악한 죄인들의 본성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삭과 야곱,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나긴 구약성경, 기나긴 구세주 기다림의 이야기가 써져야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의 증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그냥 아들을 보내셨다면 누가 그를 믿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대목도 예수님의 예표, 그리스도의 이야기요 연극(?)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요셉이 예수님의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채색옷을 입히는 것은 모든 영광과 하늘과 땅의 권세를 아들에게 주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곡식단이 절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것은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어지고 모든 입과 혀가 주라고 고백할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양 치러 간 열 아들을 찾으려고 사랑하는 그 아들 요셉을 보냅니다. 아버지는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리라.” 하고 말하고 아들은 “내가 그리 하겠나이다.” 하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기럇아르바 헤브론에서 무려 100 킬로미터나 떨어진 세겜, 그 끔찍한 살육극이 벌어졌던 죄악의 땅에 요셉은 형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형들을 찾아 들판을 헤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헤맵니다. 그들이 도망(?)간 도단으로까지 그들을 찾아갑니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 1,900년 전의 일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우리가 그의 옷을 벗기고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찌되나 보자.”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미워하고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일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피를 흘리지 말라, 광야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든 요셉을 구원하여 아버지에게 돌리려 하였습니다. 마치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때려서 놓겠노라.’ 하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썼던 빌라도와 닮아 있습니다. 아무튼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다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넣었습니다. 죽여서 무덤에 던져넣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의 제안으로 은 스무 개를 받고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았습니다. 스가룟 유다가 은 삼십 개를 받고 예수님을 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구덩이에서 끌어내어져 이스마엘족속에 끌려 애굽으로, 보디발의 집을 거쳐 애굽의 감옥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때가 이르러 마침내 그는 그 죽음의 곳에서 나와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워지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과 통치, 모든 무릎이 그 앞에 끓어지고 천하가 그로 인하여 살게 되는 것을, 부활의 주님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알지 못 하면서 벌이는 연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수도 없이 거듭 거듭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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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5장) 라헬의 무덤

 

  “카바르 라헬”, 라헬의 무덤은 예루살렘 남쪽 10 킬로미터쯤, 베들레헴 입구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신작로 같은 길가에 허물어져가는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높이 8, 9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벽에 둘러쳐진 총길이 700 킬로미터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분리장벽의 경계의 검문소, 방탄유리 안에서 여권과 허가증을 요구하고 무장한 군인들과 감시카메라들이 지키며 빨간불, 파란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여러 단계의 회전문을 거쳐야 통과할 수 있는 검문소를 지나 건물 속에 들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세겜의 참극을 일으키고 벧엘로 올라간 그들, 야곱이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과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다음 그들은 벧엘에서 떠나 아버지 이삭이 있는 기럇아르바, 마므레로 향합니다. 그런데 에브랏 베들레헴 길에서 라헬이 난산 끝에 아들을 낳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고통 끝에 아들을 낳고 그 혼이 떠나려 할 때 라헬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고쳐 “베냐민”, ‘내 오른손의 아들’로 부릅니다.

  야곱이 그를 사랑하여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하던 7년을 수일같이 여긴 라헬, 그러나 첫날밤을 언니 레아에게 빼앗기고, 아들을 줄줄이 낳는 언니에게 남편의 사랑을 빼앗길까봐 아들 낳기를 그렇게 소원했던 라헬, 아들을 얻기 위하여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면서 아들 낳기 경쟁을 벌이고, 마침내 자신도 아들 하나, 요셉을 낳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외쳤던 여인, 그러나 그 라헬은 남편을 따라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가는 긴 노정(路程)에서 목적지를 앞두고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가련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31:15)” 마태복음은 헤롯이 베들레헴 일대의 두 살 아래 사내아기들을 모조리 죽인 잔혹한 사건을 놓고 말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2:18)”

  성경은 주님의 증거책입니다. 주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헬의 안타깝고 슬픈 죽음은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피로 물든 길을 넘어 십자가에로 오시는 이야기입니다. 라헬이 낳은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죽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해냅니다. 그리고 라헬이 죽으면서 낳은 베냐민, 사사기를 보면 베냐민 지파는 다른 지파들과 전쟁을 벌여 몰살의 지경에까지 이르는 참혹한 일을 겪습니다. 그 슬픈 여인 라헬의 무덤이 있는 그 베들레헴에서 먼 훗날 마침내 마리아는 십자가에 죽임당할 아들, 예수님을 낳습니다.

  “슬픔의 아들 베노니”, 그것은 십자가에 죽임당할 주님의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내 오른손의 아들”, 그것은 마침내 죄와 슬픔을 딛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실 부활의 주님의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아들을 낳고 고통과 슬픔 가운데 숨을 거둔 라헬은 베들레헴의 구유에 아들을 낳을 마리아, 두 살 아래 모든 사내아이가 죽임당하던 그 어머니들의 통곡, 십자가 앞에서 바로 눈앞에 주님의 죽으심을 보며 고통과 슬픔을 당해야 했던 마리아의 모습, 그 슬프고 아픈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슬프고 사랑스러운 여인 라헬이여.


(창세기 35장) 세겜의 참극(慘劇)

창세기 34장에 기록된 세겜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처참한 살인과 약탈의 이야기도 성경에 나오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 중 하나라 할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의 처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건졌으면 당연히 벧엘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과 십일조를 드리기로 한 약속을 지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곁길로 빠집니다.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겜에 땅을 사고 거기에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참극은 시작됩니다.

딸 디나가 세겜성에 놀러갔다가 하몰의 아들 세겜 추장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그런데 강간을 한 세겜은 강간을 당한 디나에게 반하여 아버지와 함께 야곱에게 와서 무슨 빙물이든지 요구하는대로 드릴테니 딸 디나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서로 통혼하며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혼인의 조건으로 세겜족속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래놓고 세겜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사흘쯤 지나서 아파서 꼼짝 못 할 때 시므온과 레위, 두 아들이 칼을 차고 가서 세겜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약탈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아들들은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서 두려워하는 아버지 야곱에게 말합니다. “더러운 이방인들이 우리 디나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단 말입니까?”

“감히 우리 디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애당초 세겜에는 왜 주저앉아 살았단 말입니까? 아들들이 이런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자 야곱은 이웃마을들이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두려워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거기에 거하며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가족은 이방신상들과 장신구들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리고 옷을 바꾸고 벧엘로 떠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방의 모든 마을들에 두려움을 크게 하셔서 아무도 야곱의 가족을 추격하는 자가 없도록 하십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째서 무슨 빙물이라도 달라는대로 주겠다고 매달리는 착한(?) 청년 세겜과 억울한 죽임을 당한 세겜사람들은 외면하시고 악행을 저지른 야곱일가를 일방적으로 도우시고 보호하시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째서 이 악한 야곱의 아들들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보호하신 것일까요?  

알기 쉽도록 어떤 비유를 하면 좋을까요? 만일 당신의 어린 아들이나 딸이 똥을 쌌다고 칩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아들, 딸을 닦아주려고 깨끗한 화장지나 티슈를 아낌없이 쓸 것입니다. 깨끗하기로 치면 화장지가 훨씬 더 깨끗한데도 말입니다. 만일 당신의 자녀가 누구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상대방이 칼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온다면 당신은 당신의 자녀를 그들에게 내어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얍복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인류구원을 이루셔야 합니다. 깨끗하고 말고나 악하고 착함이나 도덕이나 능력이나 자격이나 상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무조건 야곱이 세상 보다 귀하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세겜족속 보다 천배, 만배, 비교할 수 없도록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세겜족속과 혼인하고 세겜에 주저앉아 그들과 혼합되고 소멸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빼앗기거나 잃을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어주시고 얻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구원받은 자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끼리의 더 착하고 덜 악하고 따위의 도덕기준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원받은 당신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 천배, 만배, 억배, 그보다도 더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들들을 일방적으로 편드시고 보호하셨던 것처럼 당신도 일방적으로 편드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설사 당신이 실수하고 그들이 열배, 백배, 천배 옳았다 해도 말입니다. 어떠한 희생이나 대가를 치르더라도 건져내시고야 말 것입니다. 당신에게 뿌린 독생자의 피 때문에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들이 세겜족속과 통혼하고 그곳에 눌러앉아 살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것이 더욱 큰 비극이요 참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속에 물들지 마십시오. 그들과 섞이거나 혼합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천하보다 귀한 당신 때문에 세겜의 참극 같은 참극을 연출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 너는 내것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이사야 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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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4장) 하나님이 일루 오세요.

 

  야곱이 네 아내와 열 한 아들과 한 딸, 그리고 양, 소 떼를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형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달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밤새도록 씨름하던 얍복강,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던 그 브니엘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 주셨고 야곱은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렀습니다. 벧엘에서 베개 한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서원한 야곱의 서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왔으니 일단 귀향한 것은 맞는데 하나님께 서원했던 벧엘로 가지 않고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기다리는 집으로도 가지 않았습니다.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 거금이라고 할 수 있는 은 일백 개를 주고 땅을 사서 거기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짓고 거기에 눌러앉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거기에서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모르겠습니다. 앞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20년 동안 외삼촌을 섬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라헬을 연애하여 7년을 봉사한 다음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었고 그 이듬해에 맏아들 르우벤이 태어났다고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 밧단아람을 떠날 때 르우벤은 열 서너 살 쯤이었을 것이고 그 아래로 다섯 오빠가 또 태어나고 그 다음 태어났을 디나는 아주 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건은 디나의 나이가 상당히 들었을 때라야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맞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 사건은 그들이 적지 않은 햇수를 세겜땅에 눌러앉아 산 다음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평안히 돌아오게 해 주셨는데 야곱은 서원을 지키지 않고 그곳에 주저앉아 버린 것입니다. 은 일백개를 주고 땅을 사고 그곳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붙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벧엘에서 한 십일조 서원을 지키기 싫어서였을까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에게 얼른 가고 싶지 않아서였을까요? 척박한 고향 땅 보다 세겜이 훨씬 살기 좋고 풍요로운 곳이라서 그랬을까요? ‘뭐, 여기가 더 좋은데 아무 곳이나 단을 쌓으면 되는 거지 꼭 벧엘로 갈 필요가 있나? 온 천지가 하나님 계신 곳인데 어디면 어때.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여기 살자.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오시면 되지‘, 하고 생각한 것일까요? "여기가 좋사오니 하나님이 이리로 오십시오.", 그것이 "엘엘로헤이스라엘"의 뜻일까요?  

  남북전쟁을 통하여 흑인노예를 해방하고 미국을 사실상 통일한 미국 16대 링컨 대통령은 기도하는 대통령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어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가고 있는지를 겸허히 묻는 기도, 그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주시고 내가 가는 길을 도우시고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야곱이 그 땅에 머물지 않고 그 땅을 지나서 하나님께 서원하였던 벧엘로, 그리고 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했더라면 결코 없었을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 사건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가지 않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쯤이면 됐다.’ 하고 반쯤 세상에 걸쳐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나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어디든지 따르며 끝까지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 좋은 곳, 적당한 곳에 주저앉아서 "하나님이 일루 오셔서 나를 도와 주셔야조."가 절대로 참 된 신앙생활일 리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나를 부르시고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자신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세겜인지 세상인지에 주저앉아 '하나님이 일루 오세요' 한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디나의 사건을 허락하신 것처럼 엄청난 사건으로 나를 깨부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창세기 33장) 얍복강을 건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시고 '네가 알아서 돌아가라.'고 야곱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들,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셨고 그 밤에는 야곱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밤새도록 두려움에 휩싸여 그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듯이, 아니 보이는 하나님은 멀게 느껴지고 보이는 두려운 에서는 눈앞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을 매여 종노릇 하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임당할까 봐 아내를 누이라 했습니다. 이삭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애굽군대가 두려워 울부짖었습니다. 가나안 땅 장대한 족속이 두려워 울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씨름한 다음, 아침에 이르러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은 환도뼈 탈골된 다리를 절룩거렸는지, 엉금엉금 기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에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해가 돋았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이젠 피할 수 없습니다. 환도뼈 탈골된 다리로는 가족과 양떼를 데리고 도망갈 수도, 맞서서 싸울 수도 없습니다. 부딪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야곱은 여종을 맨 앞에 세우고 그 다음 레아를 마지막에 라헬과 요셉을 세우고 에서를 마주하여 나아갑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담대하게” 나아가는 모양새입니다.

야곱은 일곱 번 몸을 굽히고 에서에게로 나아갑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숫자라고 일컬어지는 숫자입니다. 에서에게 하나님께 올려야 할 예우와 같은 예우를 갖춘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반갑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400 명을 이끌고 살기등등하게 달려온 에서가 야곱을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입 맞추고 웁니다. 이 무슨 조화인가요? 야곱이 일곱 번이나 몸을 굽히니까 야곱의 그 간절한 모습에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장하시지 않고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에서를 주,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공경의 도를 넘고 비굴과 아부의 수준을 넘어 차라리 경배의 경지입니다. 에서는 반가이 야곱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맞이합니다. 야곱은 형에게 소와 양떼를 선물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뵈오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듯 하다.’고 말합니다. 비굴인지 아부인지 공경인지,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분간이 안 갑니다. 아무튼 극진한 동생의 대접과 선물에 마음이 녹았는지 어쨌는지 에서는 이제 야곱의 앞잡이가 되어 길을 호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제안을 간곡히 거절하고 형 에서를 돌려보냅니다.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해후의 장면을 대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에서를 못 오게 막으시거나 아예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 버려서 야곱에게 평안한 길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야곱이 기어이 형 에서를 만나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반드시 대면할 수밖에 없는 것, 우리 죄인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송사하는 자와 급히 사화하라, 호리도 남김없이 갚으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 반드시 부닥치고 넘어야 하는 것, 반드시 씻어야 하는 것, 그것을 갚게 하시고 부닥치고 넘게 하시고 씻게 하심으로 누구에게서든 원망이 없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의를 세우게 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생명길을 가노라 하는 성도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부모형제로부터 그들과 화목하지 못 하고 오히려 지탄 받고 원망 받는 일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 하고 형제와 화목치 못 하더라도 주님만 섬기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고르반'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그렇게 두려운 형 에서를 기어코 만나 화해케 하신 뜻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아무리 싫고 무섭고 힘들더라도 우리의 에서를 향하여 얍복강을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에서를 어루만지시고 우리의 에서와 화목케 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조력자, 협력자, 앞잡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성결입니다. 원망과 비난을 받으면서 성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모형제와 화목하고 원망과 비난을 없이 하는 것이 성결과 거룩의 첫걸음이라 할 것입니다. 성결한 자라야 하나님과 동행할 것입니다. 어쩌면 야곱의 얍복강은 성결케 하는 강, 세례의 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에서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마엘을 번성케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서를 번성케 하시고 롯의 딸들이 낳은 불륜의 자녀들로도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 보다 저들을 더욱 애틋하고 안타깝게 여기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면 더욱 그들에게 나아가 그들의 손을 붙잡아 생명길로 이끌어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많은 야곱들이 얍복강 건너기 두려워 하고 에서를 피해 도망다니며 주의 일 하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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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장) "내가 졌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해야 무엇을 얻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거저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부터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지구환경과 자연이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지시고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신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워 천사와 씨름한 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가사의 찬송가도 있습니다. 얍복강에서 밤새워 씨름하듯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붙잡고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흔들어 뿌리를 뽑아야 무엇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응답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야곱의 얍복강 씨름사건을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기도의 모델로 설교하시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가나안 땅 네 아비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아내와 자식들을 이끌고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돌아가는 야곱을 지키시고 인도하사 무사히 돌아가게 아니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는데 야곱이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32장 첫 절을 보니 야곱이 길을 떠나자 하나님의 사자들이 왔습니다.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부르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두 장막)‘이라 하였습니다. 자, 하나님의 군대까지 와서 호위하니 무엇이 그들의 앞을 가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야곱이었습니다. 그 이름대로 ‘속이는 자’였고 의심 많은 자였고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노력을 믿고 의지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보다 에서가 무서웠습니다. 에서가 너무나 두려워 하나님의 군대도 미덥지 못 했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꾀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였습니다. 소와 양과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아내들과 자식들을 나누어 강을 건너게 하고 뒤에 남았습니다. 에서의 공격을 당하더라도 절반이라도, 사분의 일이라도 건져 보겠다는 계산입니다.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암염소가 이백, 수염소가 이십, 암양이 이백, 수양이 이십, 젖 나는 약대 삼십, 암소가 사십, 황소가 열, 암나귀가 이십, 그 새끼나귀가 열....... 엄청난 예물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면 과연 이만큼 예물을 준비했을까요? 야곱은 그만큼 하나님 보다도 형 에서를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을 지키려고 온 하나님의 군대가 어처구니없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고도 야곱은 밤새도록 두려움에서 헤어나지를 못 합니다. 얍복강에서 어떤 사람을 붙잡고 밤새도록 씨름합니다.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 하는 것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허벅지뼈)를 쳐서 탈골시킵니다. 그래도 야곱은 악착같이 그를 놓지 않습니다. 그가 날이 밝았으니 자기를 가게 해 달라고 해도 자신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못 가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결국 야곱에게 "내가 졌다."고 하면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고 고쳐주고 그를 축복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과 함께 하시고 야곱과 동행하시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하나님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밤새도록 그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한 것입니다. 그제야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못 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한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에 야곱은 그 곳 이름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 남았다는 것입니다.

  “얍복강의 씨름”, 그것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야곱의 위대한 기도의 모형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조차 어쩌지 못 한 야곱의 불신과 불안이 아니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야곱이 그렇게 붙잡고 씨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야곱을 보호하지 아니하셨을까요? 과연 하나님께서 야곱의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형 에서의 마음을 돌이키시고 야곱 가족을 보호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과연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위대한 자”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일까요? 오히려 “너는 참으로 할 수 없는 자로구나. 내가 졌다.”라는 뜻 아닐까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사41_14-16)"

  인간은 지렁이 같아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싸워주심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 하고, 마음에 평안을 이루지 못 하고, 밤새도록 불안과 고통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얍복강 씨름'하지 마십시오.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야곱은 밤새도록 힘쓰고 애쓰며 죽도록 얻어터지고 환도뼈가 탈골되어 절뚝거리게 되고서야 그걸 깨달았습니다. 그 날 아침 브니엘에 떠오른 해는 그런 야곱을 비추며 웃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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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우주의 종말은 어떻게 될까?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한 지 137억년이 지났다.
앞으로 수백억년, 수천억년, 수조년, 수경년, 수해년......,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우주는 어떻게 될까?
우주의 종말에 대하여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 종말은 없다. 우주는 영원히 존재한다. 정상우주론
- 영원히 죽음을 맞는다. 우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주내부의 모든 존재가 영원한 평형상태에 도달한다. 빅 프리즈(Big Freeze), 빅 립(Big Rip).
- 언젠가는 우주가 팽창을 멈추었다가 도로 수축한다. 그리고 한 점에 모여 붕괴한다. 빅 크런치(Big Crunch)
- 빅뱅과 빅 크런치가 영원히 반복된다. 진동우주론(振動宇宙論)

또한 우주의 끝이 있는가, 없는가, 즉 열린 우주냐, 닫힌 우주냐에 따라 우주의 종말을 둘로 나눈다.

1) 열린 우주의 종말

열린 우주는 공간곡률이 0 또는 음수인 공식에 의한다.
만일 우주가 끝없는 우주, 열린 우주라면 우주는 영원히 팽창하여 열사를 맞이한다. 열사(熱死)란 ‘열이 죽은 상태’, 곧 우주에 생명이나 활동을 이룰 수 있는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 상태,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는 상태, 즉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 상태를 말한다. 모든 것이 분해되어 소립자들만 남은 ‘희미한 우주’가 된다는 뜻이다.
만일 우주가 열린 우주라면, 그래서 최종적으로 열사가 될 우주의 종말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될 것으로 본다.

① 태양과 같이 작은 항성들은 적색거성을 거쳐 백색왜성으로 일생을 마친다. 그러나 거대한 항성들은 중성자별을 거쳐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며 우주공간에 물질들을 뿌린다. 더 큰 별은 블랙홀이 된다.
초신성으로부터 흩어진 물질들은 다시 항성을 이루고 세월이 지나 적색거성을 거쳐 백색왜성이 된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백색왜성들과 블랙홀들만 남게 된다. 결국은 더 이상 항성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항성정지상태가 되기까지는 100,000,000,000,000 년(100조 년)이 걸릴 것이다.

② 블랙홀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성장한다. 백색왜성들도 결국은 블랙홀에 잡혀 빨려 들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블랙홀들이 서로 합쳐지고 거대한 은하들을 삼켜 결국은 거대 블랙홀만 남게 될 것이다. 블랙홀은 그 주위에 강착원반을 형성한다. 강착원반은 X선이나 감마선 같은 방사선을 방출하는데, 이 시기에 우주공간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방사선만 관측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년(동그라미 30 개, 100양 년?)이 걸릴 것이다.
(천, 만, 억, 조, 경, 해, 자, 양, 구, 한, 정, 재, 극.......)

③ 블랙홀들은 은하단 규모로 만들어질 것이다. 하나의 블랙홀이 우주공간의 모든 은하들을 다 삼킬 수는 없고 가까이에 있는 은하계 수 십 개 정도, 즉 은하단을 삼키고는 성장을 중지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우주는 더욱 팽창한다. 은하와 은하 사이, 블랙홀과 블랙홀 사이가 더욱 멀어졌다는 뜻이다. 그런 다음 우주가 더욱 팽창하게 되면 블랙홀 사이의 간격도 더욱 멀어지고 그 멀어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결국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블랙홀들은 서로 멀어지게 될 것이다.

④ 우주는 결국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계속 끝없이 팽창한다. 우주공간에 남아있던 모든 열이 사라지고 온도가 계속 내려가면 블랙홀의 열이 계속 빠져나가며 질량을 잃게 된다. 결국 블랙홀이 질량을 잃고 점점 작아져 증발하게 된다.
우주는 지금 우주의 10,000,000,000,000,000,000 배(1천경 배)로 부피가 늘어난다.
작은 블랙홀이 증발하는 데는 1에 동그라미 67개를 붙인 년수가 걸리고 은하 규모의 거대블랙홀이 모두 증발하는 데는 1에 동그라미 100개(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년이 걸릴 것이다.

⑤ 결국 우주는 무한하게 팽창하고 블랙홀들도 모두 증발되고 우주에는 블랙홀들이 방출한 광자만이 남게 된다. 우주가 무한히 팽창하게 되므로 온도도 절대온도 영(零)도에 무한히 가깝게 냉각된다. 이 극저온상태를 빅 프리즈, 또는 빅 칠(Big Freeze, Big Chill)이라고 부른다.
우주물리학의 대통일이론에 따르면 중입자(바리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성자도 붕괴하게 된다. 결국 모든 물질이 다 흩어져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우주는 종말을 맞게 된다.
영원의 너머로 영원히 아득히........

2) 닫힌 우주의 종말

닫힌 우주는 공간의 곡률이 양수라는 가정에 의한다. 즉 공간이 유한하다는 가정이다. 공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우주가 무한히 팽창할 수는 없고 따라서 언젠가는 팽창을 멈추었다가 점점 수축하게 될 것이다. 벅색왜성과 초신성폭발, 블랙홀의 생성은 일어나겠지만 그들은 이합집산을 거쳐 결국 한 데 모이게 되고 결국은 빅 크런치(Big Crunch)로 끝나게 될 것이다.

3) 우주는 그렇게 끝날 것인가?

우리는 짧게나마 우주가 어떻게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를 살펴보았다.
우주는 그렇게 끝날 것인가?
겨우 80년 살다 갈 인간이 뭐 그런 생각할 필요 있느냐고?
아무튼......,
그러나 우주의 종말에 관하여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인간의 한계, 과학기술의 한계이다.
우주과학자들이 지금 끝없는 우주를 관측하고 있지만 그 관측은 사실 지금의 것이 아니다.

우주과학자들은 적색편이현상을 관측하고 다시 10년이 지난 다음 재차 관측하여 우주의 팽창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100억 광년이 넘는 우주의 반대편을 관측하였다면 그 관측은 어쨌든 100억 년 전의 일이다. 그 100억년이 흐른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 우리는 모른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우주의 종말에 관한 이러한 모든 예측과 이론과 계산은 시간과 공간이 영원불변, 절대적인 것이라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과 공간이 원래부터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또한 영원히 계속될 절대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지구의 종말예상은 맞아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공이 절대적인 것이었다면 빅뱅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이 대장쟁이는 지적하고 싶다.
어째서 과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우주의 출발, 즉 빅뱅 쪽으로는 닫아놓고 종말 쪽으로는 열어놓는가?
우주물리학자들은 논리적 모순에 빠져 있다.
빅뱅에 대하여는 시간과 공간이 그 때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우주의 종말에 대하여는 시간과 공간이 영원절대불변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요 무책임한 편의주의이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이 분명하다.
빅뱅이론이 맞다면. 과학자들도 인정하듯이 시간과 공간이 그 때에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창조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그 시간과 공간은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을 것이며, 그것들이 유한하든지 혹은 무한하든지도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을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정하실 수도 있다.
우주가 팽창한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공간의 한계까지만 가능할 것이요 영원히 팽창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까지만 가능하지 않겠는가?
시간과 공간의 출발로 이루어진 우주를 시간과 공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그 뜻대로 주관하지 못 하시겠는가?

우주과학자들은 동그라미를 수 십 개씩 그려 넣어서 우주가 종말을 맞이한다 말하고 또 동그라미를 100 개씩이나 그려 넣어서 우주를 뭉개고 있다.
피조물임에 분명한 시간과 공간에다 영원절대성을 부여하여 그것들을 하나님의 위에다 올려놓고 그것으로 우주를 찢고 뭉개는 우주물리학자들은 어쩌면 하나님조차 그렇게 찢고 뭉개버리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 모든 죄인들의 속성이기에.......


슬픈 여인 라헬

 

 낙엽은 떨어지고 나무는 죽어서 썩어지고 모든 생물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도 누가 죽으면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어디로 돌아갔단 말입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까?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면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인생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그 불어넣으신 숨결로 살게 하셨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인생의 해답이요, 목적이요, 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 하게 붙잡습니다.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 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징조를 보이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 24:32, 막 13:28).” 지혜로운 자는 징조로 깨달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뿐이겠습니까? 날마다 저녁이 되면 핏빛 같은 저녁노을, 해마다 가을이 되면 타오르는 붉은 단풍이 마지막 심판의 날을 말해 주는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야곱은 돌아가야 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의 불평의 소리와 라반의 안색이 야곱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 징조입니다. 그런 징조가 없었다면 야곱은 평생 라반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라반의 집에 먹혀 이름조차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쌔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창31:18-21)”

  그런데 그들은 몰래 떠났습니다. 라헬은 아비 라반의 우상 드라빔을 훔치고 야곱은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야 이를 알게 된 라반은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을 뒤쫓아 마침내 요단강 동편 길르앗 산에서 야곱일행에게 이르렀습니다. 마치 바로 왕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치 세상이, 마귀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 하게 붙잡고자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밤에 라반의 꿈에 현몽하셔서 라반으로 하여금 야곱에게 손을 대지 못 하게 금하셨습니다. 홍해 바다에 애굽군대를 수장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 하게 하시는(요일 5:18)’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라반은 야곱에게 ‘네가 너의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좋은데 어찌하여 내 드라빔을 훔쳐갔느냐’고 말합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것을 까맣게 모르는 야곱은 누구든지 드라빔을 훔친 자는 죽임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라반은 야곱 가족의 장막을 뒤졌으나 라헬이 약대안장 밑에 깔고 앉은 드라빔은 끝내 찾아내지 못 합니다. 야곱은 드라빔을 찾아내지 못 한 라반을 거꾸로 질책합니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창31:41-42)” 두 사람은 돌을 세우고 불가침(不可侵) 맹약을 합니다. 그리고 라반은 딸들과 외손주들에게 입 맞추고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야곱과 야곱의 가족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라헬이 아비의 우상 드라빔을 훔쳐서 가지고 간 것도 지키신 것일까요? 드라빔을 숨긴 채, 우상을 품은 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는 자는 이 세상의 아무리 아까운 것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야곱의 입으로 ‘누구든지 드라빔을 훔친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한 대로 라헬은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가는 도중 베들레헴 길에서 베냐민을 낳고 죽게 됩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혹시 나에게도 버리지 못 한 드라빔이 있을까 돌아 보아집니다.

여기는 우리 머물 곳 아니네.

(창 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만일 이 세상의 삶이 에덴동산처럼 풍요롭고 평안하고 걱정도 아픔도 슬픔도 없다면 누가 하늘에다 소망을 두겠습니까? 만일 야곱에게 외삼촌 라반이 끝까지 잘 해주고 보살펴주었더라면 야곱과 아내들이 그곳을 떠나려 했겠습니까? 아마 평생 떠나지 못 하고 눌러앉아 살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서원한 것조차 아무 효력을 발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만일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을 갚으려고 떠나고자 했다면 십중팔구 아내들과 아이들이 가려면 당신 혼자 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이 시작됩니다.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아 거부가 되었다고 눈을 흘기기 시작합니다. 외삼촌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로 불안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들로 불러내어 의논합니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 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으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으나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노라. 그가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는 것이 점 있는 것이요,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는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라.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들을 빼앗아 내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해하지 못 하게 금하시고 편을 드사 양떼를 빼앗아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자기에게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다고 고합니다. 이에 아내들도 아버지가 딸들인 자기들을 팔고 자기들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딸들을 외인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고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아버지로부터 빼앗아서 야곱에게 주신 것은 자기들과 자식들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핍박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인지도 모릅니다. 핍박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우리를 지켜주지 못 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양떼를 빼앗아 주신 능력의 하나님이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의 핍박쯤이야 왜 막지 못 하시겠습니까?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주님께 속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므로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핍박을 당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핍박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기라 하셨습니다. 아버지 라반에게서 난 혈육일지라도 레아와 라헬은 더 이상 그 아버지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요 야곱과 함께 야곱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떠나야 할 백성인 것입니다. 핍박은 구별된 자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증거인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섬겨도 죽음으로 보답합니다. 율법은 아무리 순종하고 지켜도 정죄로 되돌려 줍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늘의 참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이 땅은 우리 머물 곳 아니네. 하나님 약속하신 땅으로,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한다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식,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깨달음,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골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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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를 내게 주소서.

 

  야곱이 집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아내와 열 한 아들, 그리고 딸 디나를 데리고 양과 소 두 떼를 이끌고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기까지 몇 년이나 걸렸을까요? 훗날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 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바로왕 앞에 선 때는 아직도 7년 흉년 중 2년이 지나고 아직 5년의 흉년이 더 남아 있을 때입니다.

  창세기 37장을 보면 야곱은 노년에 얻은 아들 요셉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그 요셉은 열 일곱 살 때 형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갔고 보디발을 섬기다가 보디발의 아내로 인하여 집 옥에 갇혔다가 바로의 두 신하의 꿈을 해몽해 준 일로 인하여 풀려나 바로왕 앞에 섰을 때가 30세 때였습니다. 요셉은 바로왕의 꿈을 해몽해 주었고 이때부터 요셉이 애굽총리를 맡아 풍년 7년과 흉년 2년이 지났으므로 이 때 요셉의 나이는 40세 정도라고 계산이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바로에게 자신이 130세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요셉을 낳은 때가 90세 때라는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한 "이십년 동안"이라는 말로 미루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만일 야곱이 90세일 때 라헬이 요셉을 낳았고, 그 때 야곱이 라반에게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면, 그 후 야곱이 자신의 양떼와 소떼를 이루어 100세 무렵, 즉 요셉이 10살 때쯤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났다면,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려 50년 세월을, 반평생을 외삼촌 라반을 섬겼다는 계산이 가능합니다.  

  20년인지 50년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속이고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면서 어떻게든 야곱을 붙잡아 두어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리시는 복을 차지하려는 교활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수십년을 이용당하며 살고 나서, 마침내 그곳을 떠나자 이번에는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마주 오고, 두려움에 떨며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고, 다시 세겜땅에서는 딸이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이 세겜족속 남자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라헬은 아비집에 이르기도 전에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다시 목숨처럼 아끼던 아들 요셉까지 잃었으니 어찌 이 모든 것이 “험악한 세월”이 아니었겠습니까? 어쨌든 야곱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아비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하여 반평생을, 자신의 모든 젊음과 힘과 열정과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는 길은 이렇게도 멀고 험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직 라헬을 연애하여 기쁨으로 이 모든 고난을 감수한 것입니다.

  야곱의 이 “험악한 세월”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여 데리고 가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온갖 고난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아내를 아비 집에 데려가려는 신랑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는 길은 자신의 몸과 목숨을 바쳐야 하는 험한 희생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자신의 품삯으로 태어나는 양의 새끼 중 ‘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앞에서 새끼를 배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인해서이겠지만 희한하게도 아롱지고 점 있고 검은 새끼들이 많이 태어나 야곱은 심히 풍부한 부자가 됩니다.

  더러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해 보면 재미 있습니다. ‘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가 무슨 뜻일까요? ‘푸른 가지’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자신을 ‘푸른 나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눅23:31)” 하셨지요. 야곱이 세워둔 껍질 벗긴 푸른 나무 앞에서 태어난 ‘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는 야곱의 양떼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흠 없는 흰 양 새끼는 라반의 집에 남게 될 것입니다. 껍질 벗기운 푸른 나무 처럼 옷을 벗기우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임을 깨닫고 자복하며 통회하는 아롱지고 점 있고 검은 죄인들은 그 푸른 나무 앞에서 배어지고 다시 거듭 나서 아버지의 집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흰 자가 되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 하는 자, 스스로 의인인 자는 라반의 집에 그냥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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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낳기 경쟁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 하심 같이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라헬을 연애하여 7년의 수고를 수일 같이 여기며 기쁘게 감당하였지만 못 생긴 레아가 먼저 야곱의 처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택하였지만 하나님은 레아를 먼저 택하신 것입니다. ‘총(寵:사랑받음)이 없는’, 즉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 하는’ 레아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레아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룰 아들들이 줄줄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 하였으나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받은 것입니다. 레아는 아들들을 낳으며 이를 인하여 남편 야곱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르우벤’ “보라, 아들이다!”, ‘시므온’ “하나님이 들으셨다.”, ‘레위’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 ‘유다’ “찬송하리라.” 아들들에게 그는 남편을 향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이름들을 지어 줍니다.

  반면에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받는 라헬은 잉태하지 못 합니다. 아들을 줄줄이 낳는 형을 투기하여 남편에게 투정합니다.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투정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지 어째서 사람에게 떼를 씁니까? 태의 상급과 열매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데 남편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이 노하여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이에 라헬은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빌하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단’ “신원, 내 소원을 들으셨다.”로 짓습니다. 빌하가 다시 아들을 낳자 이름을 붙입니다. ‘납달리’ “나의 씨름, 내가 형과 경쟁하여 이겼다.”

  아들을 낳지 못 하는 라헬이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고 이로 인해 남편 야곱의 사랑이 여전히 라헬에게 있는 것을 인하여 그랬는지, 생산을 멈추자 불안하여 그랬는지 레아는 자기도 여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두 아들을 더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행복하기를 원하여 ‘갓’, “행운”, ‘아셀’, “행복”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그리고 큰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캐온 ‘사랑의 묘약’ 합환채를 양보하는 대신 남편과의 잠자리를 차지하여 다시 다섯 번째 아들을 낳고 ‘잇사갈’, “갚아주셨다.”로 짓고 또다시 아들을 낳아 ‘스불론’ “거주함”으로 지어 남편이 자신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딸 디나를 낳습니다. 이렇게 레아는 무려 여섯 아들과 딸 하나를 낳게 됩니다.

  이제 야곱의 네 아내 중에서 아들을 낳지 못 한 건 라헬뿐입니다. 자기소유인 여종이 낳은 아들도 자기 아들이지만 자신이 직접 낳지 못 한 아쉬움과 수치심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를 들으시고 태를 여셨습니다. 그리하여 라헬이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이름을 ‘요셉’ “하나 더”로 지었습니다. 아들을 하나 더 달라는 소원입니다. 나중에 슬프게도 라헬은 베들레헴 길에서 '하나 더' 베냐민을 낳고 죽습니다만 하나님은 라헬에게도 두 아들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슬람은 아내를 네 명까지 허용합니다. 아마 에서가 네 아내를 취한 것과 또 야곱이 네 아내를 얻었던 것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혼인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창 2:24)”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에게 네 아내를 주시고 그들로부터 열 두 아들을 얻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그 전체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는 책(요5:39)’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네 아내를 통하여 주님과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이룰 거룩한 혼인잔치와 새 예루살렘,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豫表)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아내들의 아들 낳기 경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오시기까지 잉태의 고통을 감내하며 생명과 계보를 이어가는 약속의 기다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까지, 앞 다투어 메시아의 계보에 참예하려는 믿음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라면 복음으로 영적 자녀들을 레아와 라헬이 경쟁했듯이 앞다투어 많이 낳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인간의 선택이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전혀 알지 못 했고 전혀 뜻하지도 않았고 다만 질투와 사랑싸움으로 경쟁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속임수 아닙니까.


 옛날 한국에서는 부모가 정해주는 짝과 결혼을 했습니다. 가문을 중시하여 문벌중심으로 혼인을 하기도 했고 정치적, 정략적으로 혼인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삼포니 오포니 하면서 젊은 남녀의 결혼포기, 출산포기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남자는 경제적 능력과 함께 거주할 집을 마련해야 하고 여자는 살림살이 준비와 엄청난 비용부담을 져야 합니다. 거기에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이벤트라 하여 일류호텔 결혼식장에서 불과 한 시간이면 끝날 호화스러운 예식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허리가 휘고 기둥뿌리가 뽑혀집니다. 6.26 전쟁 때 태어나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겪으며 자라 조국근대화의 산업역군으로 땀 흘려 일하면서 그저 사랑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그렇게 빈손으로 만나 허름한 단칸방 아궁이에 연탄불 갈아 넣으며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그렇게 가난을 이겨내며 자식 낳아 길렀던 날이 바로 엊그제인데 걀혼포기, 출산포기로 인구가 줄어들고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머지않아 멸망하게 될 거라니 세계 10대 교역국이 되었다는 잘 사는 대한민국에서 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연애하여 그를 아내로 얻기 위하여 외삼촌에게 7년 동안 봉사를 합니다. 그 7년이 끝나자 야곱은 외삼촌에게 요구합니다. “이제 7년이 지났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들어가겠나이다.” 이제 대가를 지불하였으니 아내를 달라는 것입니다. 아내를 거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신부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 당시 중동의 풍습이었습니다. 오늘날 고이 기른 딸을 시집 보내면서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함께 보내야 하는 한국의 결혼풍속과는 너무나 다르지요? 어떻게 결혼하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신붓감을 돈을 주고 사서 데려오는 게 성경적일까요, 반대로 신부가 혼수를 싸들고 시집오는 게 성경적일까요? 어쩌면 둘 다 아닐 것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주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 성경적이겠지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주신 것 같이 말입니다.

 옛날 한국의 전통방식의 혼례에서는 나무로 만든 기러기가 등장했습니다. 이것을 ‘안(雁)을 드린다.’고 했는데 ‘안(雁)’은 기러기를 뜻합니다. 기러기는 여름이면 머나먼 북쪽으로 날아갔다가 겨울이면 다시 남쪽으로 수천 리를 날아 오가는 철새입니다. 기러기는 한 번 짝이 되면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고 평생을 같이 한다고 합니다. ‘안(雁)을 드린다.’는 것은 한국의 전통혼인예식에서 일평생 헤어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 ‘안(雁)을 드리는’ 구식 결혼식을 버리고 드레스 입고 주례 앞에서 선서하고 반지를 끼워주고 시계를 채워주는 신식 결혼식을 드려서인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이혼율이 높은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약속입니다. 성경은 결혼을 ‘맹약(盟約)’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구원도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약속대로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침에 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입니다. 속은 것입니다. 염소털로 아버지를 속인 야곱이 이번에는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야곱은 ‘나를 속이심이 어찜이니이까?’ 하고 외삼촌에게 따집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은 ‘형 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이 이 지방의 법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법이 아니라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야곱은 다시 7년 봉사를 약속하고 라헬을 둘 째 아내로 얻게 됩니다. 이 사건을 보면 라반이 시키고 레아가 라헬 대신 야곱에게 들어가 신부가 된 속임수가 리브가가 시키고 야곱이 에서 대신 들어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은 것과 꼭 닮아 있습니다. 에서가 아닌 야곱이 애당초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같이 ‘안력이 부족한’ 레아 또한 야곱의 신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속이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훗날 야곱은 또 한 번 속임을 당합니다. 요셉을 팔아먹은 아들들이 요셉의 채색옷에 묻혀온 염소피에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속임수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연출하신 속임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더면 우리에게 결코 구원이란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염소고기와 털로 에서라고 속이고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가는 것과 같이, 못 생긴 레아가 라헬인 것처럼 살며시 신방으로 들어간 것 같이, 아들들이 염소피에 적신 요셉의 옷을 들고 아버지 집에 돌아간 것 같이, 죄인이 어린양의 보혈로 죄를 덮고 그의 의의 옷으로 치장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가는 것이 속임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속임수를 쓰고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도 속아주시는 것이 구원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 속임수를 쓰면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등 뒤에 던지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기억조차 아니하시고 품어주시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그 속임수를 쓰게 하시려고 통곡하시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 구원이 아닌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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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발 들어 올리기' 끝에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사람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필 발, 갈 행’, ‘발행(發行)’이라고 쓰니 이해가 좀 어렵습니다. 우리말로 신문이나 잡지를 ‘발행’하는 것도 똑같은 ‘발행’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영어성경(NIV)을 보니 'Then Jacob continued on his journey.' '그리고 야곱은 그의 여정을 계속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성경 원어 히브리어를 찾아보니 ’브이샤 야콥 라갈라인 브일레크‘, ’야곱이 발 들어올리기를 계속했다.‘고 되어 있네요. ’발 들어올리기를 계속했다.‘, 길을 가는 모습을 발을 계속 들어 올렸다고 표현하니 재미있습니다. 어쨌든 야곱은 부모를 떠나 무려 700 km를 '발 들어올리기'를 계속하여 동방사람들의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There he saw a well in the field." 거기에서 그는 들에 있는 우물을 보았습니다. 그 우물곁에는 양 세 떼가 누워서 목자들이 우물을 덮은 돌을 치우고 물을 먹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물은 히브리어로 ‘브엘’입니다. 돌은 ‘에센’입니다. 우물은 생명수를 담고 있습니다. 돌이 치워지면 양들은 생수를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아내 될 여자를 얻으려고 하란 땅에 왔을 때 리브가를 우물가에서 만난 것을 압니다. 우리는 또 출애굽기를 통하여 반석이 갈라지고 생수가 터져 나오는 것도 읽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이런 광경을 의도적으로 이렇게 묘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석과 그 반석의 깨어짐, 그리고 깨어지고 갈라진 반석을 통하여 흘러나온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압니다. 야곱이 염소고기와 털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으며 집을 떠나 아내를 얻으러 가는 길에 돌(에센)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에 사닥다리와 그 위에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뵙고 이제 하란 땅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는 돌로 덮은 우물곁에서 양떼와 목자들이 기다리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고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이야기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야곱은 거기에서 자기의 외사촌이며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납니다. 야곱은 처음 만나는 라헬이지만 입을 맞추고 소리 높여 울며 자신이 라헬의 고모가 되는 리브가의 아들임을 밝힙니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에게 달려가 고하고 라반이 달려와 야곱을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고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의 모든 이야기를 하고 라반은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고 야곱은 그렇게 외삼촌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외삼촌 라반이 야곱에게 노동을 요구하고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하여 칠년 무료봉사를 제안하면서 야곱이 네 아내와 열 두 아들을 얻게 되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먼 훗날 주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셨을 때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2천리 가까운 머나먼 길을 ‘발 들어올리기’를 계속하여 걸어온 야곱이 마침내 돌 덮힌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 그에게 입 맞추고 소리 높여 우는 모습에서 우리는 길고 험한 여정 끝에 마침내 목숨을 바쳐 사랑할 연인을 만난 감동적인 모습을 봅니다. 우물가에서의 만남, 그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이신 예수님과의 만남, 신랑과 신부의 만남을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기나긴 광야길 끝에서 안식과 생명과 영원한 약속의 땅에 다다른 성도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은 험한 땅에 그런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라헬과 라반이 야곱을 반겨 맞아 집으로 영접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을 맞아들이는 영접의 기쁨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위하여 20년 세월을 일하면서 열 두 아들을 낳게 되지만 우리 주님은 그 귀한 몸을 십자가에 찢으시고 피흘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기나긴 '발 들어 올리기'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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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꿈

 독일이 낳은 걸출한 철학자요 사상가요 극작가인 괴테가 쓴 ‘파우스트’라는 희곡을 보면 주인공 파우스트는 박식한 학자이지만 속세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과 악마가 가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금지된 지식을 교환하는 계약을 하게 됩니다.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또는 메피스토로 불리는 이 악마는 계약기간 동안 흑마술(검은 마술, 黑魔術)로 파우스트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지만, 계약기간이 끝난 후 파우스트의 영혼은 악마 메피스토의 소유가 되고 영원히 저주받게 됩니다(실제 희곡에서는 이 때 천사가 파우스트를 구해내지만).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이 세상 누구도 가져보지 못 한 지위와 명예와 부귀와 권력을 준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로운 삶을 누리게 해 준다면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영원한 지옥에 가시겠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생이래야 고작 70년, 80년인데 지옥의 고통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런 어리석은 거래를 하겠습니까? 이걸 거꾸로 뒤집어서 여쭤볼까요?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억울함과 불태우고 목 잘리는 죽임을 당하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누리는 조건이라면 당신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선뜻 대답 못 하고 망설여집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짧은 이 세상의 복락을 영원한 생명과 맞바꾸고 있습니다.

 야곱은 복을 원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팥죽으로 형의 장자권을 사고 염소가죽으로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복은 어떤 복이었을까요?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축복한 그대로 이 땅에서 하늘과 땅의 기름짐과 권세와 섬김과 소유를 누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된 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고 하는 참된 복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 곧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세상을 건너 하나님의 집에 이르러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아픔과 슬픔을 넘어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쫓겨 집을 떠납니다. 700 km나 떨어진 머나먼 하란 땅 외삼촌댁으로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야곱이 알았을까요? 야곱은 자신이 그토록 받기 원했던 아버지의 축복, 하나님의 복이 그런 고난의 광야길인 줄을 알았을까요?

 야곱은 하란을 향하여 가는 길에 루스라는 곳에서 돌베개를 하고 잠을 잡니다.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에 놓였는데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하나님이 서셔서 야곱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그런데 하나님이 '너와 네 자손에게 땅을 주겠다' 하심이 야곱을 엄청난 부자요 대지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을까요?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받을 복’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참 된 복은 오직 하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늘에 이르는 생명의 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가 헛것이로되 오직 예수님만이 참되고 영원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복을 지금 야곱에게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먼 훗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장 51절).”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다니요? 그렇습니다.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 하늘에 연결된 그 사닥다리가 바로 인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닥다리는 주님입니다. 주님이 달려 피흘리시고 천사들이 안절부절 못 하고 오르락내리락 하던 십자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닥다리는 하늘나라에 이르는 오직 한 길 십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셨습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는 오직 하나 참된 복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것을 야곱은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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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은 없다.

 

만일 에서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만일’은 없습니다. 30절에는 “마치매”, “나가자”, “돌아온지라”, 영어성경을 보니 “FINISHED, LEFT, CAME.”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끝나고 버스 떠난 다음에 왔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염소고기를 들고 염소털로 꾸미고 형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복을 다 받고 난 다음 에서가 돌아온 것입니다. 뒤늦게 돌아온 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갑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사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깜짝 놀란 아버지 이삭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Who are you?” 아들에게 ‘너는 누구냐’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에서가 대답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말합니다.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그 말을 듣고 방성대곡합니다. 영어성경을 보니 ”he burst out with a loud and bitter cry“, ”큰 소리로 비참하게 우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쓰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러나 이삭은 대답합니다.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고,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는 더욱 애통하고 처절하게 울부짖습니다.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남은 복, 찌꺼기 복이라도 빌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대답합니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떨쳐 버리리라.“ 다 끝난 다음에 애통하며 울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끝난 다음에 온 에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날 다 끝난 다음 남겨진 자들의 애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에서는 장자권을 버렸습니다. 잠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바꾸었습니다. 이는 믿음을 세상의 복으로 바꾼 것이요, 영원한 생명 보다는 당장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하다고 바꾼 것입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다 끝난 다음에 달려와서 애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아무리 에서를 사랑한다 해도, 에서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고 싶어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애원해도 그 때는 하나님께서 해 주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은 2등이 없습니다. 미루는 자, 뒤늦게 오는 자에게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이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뒤늦게 애통하며 몸부림쳐봐야 구원의 문이 닫히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나중에, 천천히, 이 다음에가 없단 말입니다.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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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속이기

 창세기 27장은 아버지를 속이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이 나이 들고 눈이 멀어졌습니다. 죽기 전에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기로 마음먹고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달라고 청합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다는 희망에 들떠 사냥을 나갑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에게 들어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대답합니다.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데 형이라고 속이고 아버지에게 나아갔다가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겁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저주는 자기가 받을 테니 너는 아버지에게 들어가 축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염소를 잡아오라고 시킵니다. 그 염소를 잡아 별미를 만들고 염소가죽으로 야곱의 매끈한 목덜미와 손등을 꾸미고 형 에서의 옷을 입혀서 아버지 이삭에게 들여보냅니다.

 야곱이 염소고기를 들고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여.” “내가 여기 있노라. 네가 누구냐?”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별미를 가져왔나이다.”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만져보자.” 아버지 이삭이 야곱의 손을 잡아봅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손을 만져보니 에서의 손이로구나. 옷 냄새를 맡아보니 내 아들 에서가 분명하구나.” 금방이라도 탄로 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가운데 아버지 이삭은 결국 속아 넘어가서 에서인 줄 알고 야곱에게 축복을 하게 됩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가 너의 것이요, 만민이 너를 섬기고 네게 굴복할 것이며, 너는 형제의 주가 되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온갖 좋은 것을 다 부어주는 축복을 합니다. 이렇게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고 나갑니다.

 뒤늦게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들어갑니다. “아버지, 이 별미를 잡수시고 마음껏 이 아들을 축복하소서.” 깜짝 놀란 아버지 이삭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에서,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이삭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합니다. “아까 온 그는 누구였단 말인가? 내가 이미 축복을 하였으니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 에서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합니다. “야곱이 속였습니다.” 아버지를 붙잡고 소리쳐 비통하게 웁니다. “아버지, 내게도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아버지의 빌 복이 그 뿐입니까?”

 우리는 이 장면을 읽으며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도 됩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야곱을 이렇게 속임수를 통하여 축복 받게 하시고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루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속여서 축복 받은 자를 사랑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불의를 허락하신 것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보여주는, 곧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지 남자의 후손이 아닙니다. 후사를 정하는 것은 남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고통과 함께 잉태의 고통을 당하며 아들을 낳는 여자, 생명의 유업을 담당하는 여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라고 해서, 남편이라고 해서 어머니에게서 아내에게서 강제로 아들을 빼앗아 후사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여자에게서 여자의 뜻과 관계없이 강제로 아들을 빼앗아 그리스도의 계보로 삼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자격이나 후사를 세우는 것은 여자에게 그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이삭은 그것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에서를 택하려 하였고 리브가는 계략으로 이를 저지하고 자신이 택한 야곱이 축북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리브가의 계략의 편에 서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장면 자체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를 가리고 주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모사가 된 리브가는 성령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비밀을 가르쳐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애쓰고 힘써서 사냥하여 잡아오는 야생동물이 아니라 염소, 곧 어린양의 살과 피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맏아들의 이름,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에서’가 ‘예수’와 발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린양의 가죽으로 꾸며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맏아들의 옷, 눈 보다 더 흰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나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속아 주실 것입니다. 어루만져 주시고 끌어안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좋은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삭은 모르고 속았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속아주실 것입니다.

 그러시려고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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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삽한 자기 꾀로


‘왕자(王子, Prince)’가 좋긴 좋은가 봅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 그러니까 ‘나는 왕자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 '왕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첫 번째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때, 두 번째 아비멜렉은 이삭 때 등장합니다. 모두 그랄, 애굽으로 가는 길목 바닷가를 다스리는 블레셋 왕입니다. 세 번째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자기 형제 70명을 죽이는 악행 끝에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습니다. 네 번째 아비멜렉은 다윗시대에 제사장으로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닥친 기근을 피하여 사라를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했다가 바로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한 때는 아브라함이 80세 무렵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근으로 인하여 그랄 땅으로 갔다가 또다시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똑같은 실수를 하여 아비멜렉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한 때는 아브라함의 99세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그 실수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얻었고, 이 기사의 바로 앞에는 에서와 야곱의 팥죽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이 기사 뒤에는 에서가 40세에 가나안 족속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80세에 그 실수를 저질렀던 때로부터 최소 60년, 최대 100 년이 지난 다음임니다. 아무튼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데리고 그랄 땅으로 내려가서 자기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죽임당할까 봐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알게 되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데 그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 곧 쓰임 받는 자들에게 형통함과 순적함,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아울러 또한 끊임없는 시련과 연단이 닥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신 자들에게도 위험과 환난이 닥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아무런 어려움이나 고통 없이 주어지는 은혜는 은혜가 되지 못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며 부르짖어 그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동역하기를 원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부름 받은 자들에게 전혀 부름 받을 만 한 자격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 하고 넘어지고 패배합니다. 닥치는 어려움과 환난을 이기지도 못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그릇이 되지도 못 하고 자격도 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조차 없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부르짖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하나님 홀로 알아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도무지 도움 안 되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홀로 ‘여호와의 열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랄에서 담대한 믿음으로 이기지도 못 했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지도 못 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꾀로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스스로 생각해낸 얕은 꾀로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지 아니하셨더라면 그들은 그대로 그 파멸의 구덩이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 하였기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삭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흉년이 닥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이삭이 그랄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하시면서 땅과 자손의 약속을 이삭에게 다시금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쯤 하셨으면 이삭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움 없고 담대하였어야 할 것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지하지 못 하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하였다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비겁한 실수를 는 똑같이 따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화내시거나 꾸지람하시건나 후회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건져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로왕과 아비멜렉을 혼 내시고 아브라함에게 소와 양과 은금과 노비를 주게 하셨습니다. 대적들이 아브라함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찾아와 화친하게 하셨습니다. 이삭에게는 100배를 거두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결국 찾아와 화친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자들이 믿지를 못 합니다. 안 믿는 자들이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아이러니(irony)입니다. 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데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바로와 아비멜렉과 맞서지도 못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못 하고 아내를 누이라 하는 비겁하고 얍삽한 꾀로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저들로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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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잉태한 리브가의 태중에서 쌍둥이 형제가 다투었습니다. 리브가가 하나님께 여쭈자 하나님께서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태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9장 13절은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은 태중에서부터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을까요? 어머니 뱃속에서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잘못이나 지은 죄도 없는데 말입니다.

태어날 때 에서는 몸이 붉었고 이삭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세상에 먼저 나오려고 다투다 에서가 열을 받아서 몸이 붉어졌을까요?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올 정도로 뱃속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장자권을 가지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했을까요? 에서는 사냥을 좋아했고 야곱은 조용히 장막에 머물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잘 잘못이 될 수 있을까요?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배고파 허덕일 때 야곱은 교활하게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의 장자권을 샀습니다. 이 때문에 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기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축복을 차지하고 장자권을 가지려고 수단방법을 안 가린 이삭을 사랑하고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긴 에서를 버리셨을까요? 그렇게 할 것을 만세 전에 이미 아시고 야곱을 택하신 것일까요? 어느 것이 먼저였을까요? 에서가 그랬기 때문에, 또 야곱이 그러한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이미 정하고 택하셨기 때문에 에서는 그런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또 그러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행동으로 구원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만이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고 하나님이 정하신 자들만이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이 버리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주님께 나올 수 없는 것일까요? 참 어려운 신학적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정하시지 않은 인간은 믿어도 구원 못 받느냐, 반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구원 받는 거냐 하는, 자유의지론(알미니즘)과 예정론(칼비니즘)의 두 대립되는 끝없는 쳇바퀴 같은 신학적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모두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이 구원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의 의지나 공로로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거나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인간을 진흙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토기장이는 어떤 진흙은 귀한 명품 도자기로, 어떤 진흙은 천하게 함부로 쓰는 막그릇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진흙은 도자기 굽는 가마재료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진흙이 뭐라고 하거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진흙이 산더미 같이 많아도 토기장이의 손이 닿는 진흙이 도자기나 그릇으로 만들어질 뿐입니다.

우리 조상들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득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는 채 죽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무속신앙을 믿는 나라에 태어나 복음도 못 들어보고 죽어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이곳에 태어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일이 내게 이루어진 것이 기이한 일입니다.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아득한 역사 속에 헤아릴 수 없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 손길이 닿아 구원 받은 것이 말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야곱과 에서를 차별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일이 야곱 같은 나에게 이루어질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한 치도 틀림없이 이루시는 하나님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의 충성된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명을 받고 약대 열 마리에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러 메소보다미아로 떠납니다. 늙은 종이 낙타 열 마리에다가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도적이 출몰할 수도 있는 그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의 아내를 데려오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겁니다.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그 앞에 보내어 지키시며 인도하심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자신의 전부를 거는 이러한 모험은 감히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늙은 종은 순적하게 만나게 하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길을 떠납니다.

 늙은 종은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렀습니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들을 끓렸습니다. 저녁때입니다. 여자들이 물 길러 나올 시간입니다. 그 곳에서 늙은 종은 기도합니다. “이제 이 성읍 처녀들이 물 길러 나오겠네요. 하나님, 그 중 누가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될 사람인지 제게 알려 주십시오. 제가 그 중 한 처녀에게 네가 길어온 그 물을 내게 좀 주라.‘고 청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처녀가 ’아, 그러세요. 이 물을 드세요. 그리고 저 목마른 낙타들이 마실 물도 제가 떠올께요.‘ 하면 그 처녀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처녀인 것으로 알겠습니다.”

 종이 기도를 채 마치기도 전에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 심히 아름답고 순전한 처녀 리브가가 물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우물가로 나옵니다.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길어 물항아리를 채워 메고 올라옵니다. 중동지방의 우물들은 대개 깊은 곳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또 깊은 곳에다 줄에 매단 두레박이나 항아리를 넣어서 길어 올려야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 내려가서 물항아리를 채워 올라오는 일은 상당히 힘이 드는 일입니다. 늙은 종이 리브가에게 달려가서 물을 좀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세요. 이 물을 드세요.” 리브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급히 항아리를 내려 그 종에게 물을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 종이 물을 마시고 나자 ‘약대들도 목이 마르겠군요. 제가 약대들에게도 물을 떠와서 마시게 할께요.’ 하고서는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몇 차례나 깊은 우물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약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합니다. 먼 길을 온 열 마리나 되는 낙타들이 마시는 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늙은 종은 바로 이 처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삭의 배필인 것을 확신합니다. 종은 약대들이 물을 다 마시고 난 다음 반 세겔중(약 두 돈쭝) 금고리 한 개와 열 세겔중(약 40돈쭝) 금팔찌 두 개(총 82돈쭝, 약 320 그램, 약, 11 온스, 요즈음 금 한 돈이 18만원 정도니까 천 오백만원은 되겠군요.)를 그 처녀에게 주며 “누구의 딸이냐? 네 아버지의 집에 내가 묵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처녀는 대답합니다. “저는 저의 할아버지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 리브가입니다. 저희 집에는 낙타에게 먹일 짚과 보리도 많고 묵으실 곳도 있습니다.”

 참으로 한 치도 틀림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먼 길을 온 늙은 종이 우물에 이르렀을 때에 딱 맞춰 수많은 성읍의 여자들 가운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정확히 이삭의 아내가 될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딸 리브가를 우물가에 나오게 하여 딱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늙은 종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여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은 한 치도 틀림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은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자신의 모든 좋은 것을 낙타 열 마리에 실어 늙은 종에게 맡겨 보냄으로써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의 약속에 맡긴 아브라함과 주인의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한 늙은 종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 합니다. 자신의 모든 좋은 것을 낙타에 실어 보내지 못 합니다. "밭 판 돈"을 빼돌려 챙겨놓고 없어도 괜찮을 좋지 못 한 것만 실어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먼저 역사해 주시면 낙타에 실어 보내겠노라고 하나님께 거꾸로 약속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가 좋은 것을 잔뜩 짊어진 낙타가 되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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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내심, 그것이 복입니다.

리브가가 집으로 달려가서 이야기를 하자 오라비 라반이 달려 나와 아브라함의 종에게 이릅니다. 라반이 누이 리브가가 찬 고리와 팔찌를 보고 리브가로부터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에게 한 말을 듣고 달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아브라함의 종을 집으로 영접해 들이고 약대의 짐을 부리고 짚과 보리를 약대에게 주고 아브라함의 종과 그 종자에게 발 씻을 물을 주고 음식을 차려 대접합니다. 라반은 굉장한 부자가 왔다고, 횡재가 굴러들었다고, 대박을 맞았다고 신이 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 아브라함의 종은 말씀드리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 하면서 자신은 아브라함의 종이라는 것과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기를 보내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말합니다. 또 우물가에 이르러 물 길러 나오는 처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면 그 처녀가 자기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준다면 그 처녀는 여호와께서 정하신 이삭의 배필이라고 기도하였더니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나왔고 리브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리브가가 기도한 그대로 자기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주었으며, 더구나 뉘집 딸이냐 물었더니 바로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인도하신 것이라 이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였노라고 진술합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들이 리브가를 나를 따라 이삭의 아내로 보내실 것인지 아니 보내실 것인지 대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라반과 브두엘은 이 일이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자기들은 뭐라고 할 수 없다면서 리브가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뜻대로 이삭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대답합니다. 그제야 아브라함의 종은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낙타에 싣고 온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와 리브가의 오라비와 어머니에게도 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브라함의 종은 자기의 주인에게 빨리 가야겠다고 바로 떠나겠다고 하고, 리브가의 가족들은 리브가를 열흘만이라도 머물며 이별하도록 하게 해 달라고 하는 작은 승강이가 벌어지고, 리브가가 바로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작은 소동이 있은 다음 리브가는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하는 가족의 축복 속에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이르러 이삭을 만나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 그리고 이삭이 모친의 상사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맺음으로써 이삭이 어머니 사라가 죽은 다음 3년 동안 슬픔에 잠겨 있다가 아내를 얻은 기쁨을 얻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은 무려 67절에 이르는 긴 이야기를 여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나이 든 아들을 장가도 못 보내고 사라가 죽은 다음 아들 이삭의 혼처를 놓고 하는 아브라함의 맹세, 한 번 하나님을 따라 나선 자는 절대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단호한 결단이 들어있고, 주인을 목숨을 걸고 섬기는 종의 충성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한 치도 틀림없는 인도하심, 그리고 불러내심을 받은 자의 결단들이 들어 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은 우리 인간적인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결코 복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또 한 사람,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가서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이삭이나 리브가나 그들 모두는 광야에서 떠돌다 광야에서 죽었으며, 나이 늙도록 아들을 낳지 못 했으며, 늦게 낳은 아들의 혼사도 보지 못 하고 죽었으며, 때로는 고통스러웠고, 위험했고, 외로웠고, 슬펐으며,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 속에서 즐기는 소위 인생의 재미나 낙도 누리지 못 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아무것도 이룬 것 없고 아무것도 해놓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끌려 나와 일평생 광야에서 살다가 아들 하나 남겨놓고 죽은 것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복된 자, 복의 근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산 것이 복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한 것이 복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 복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아무 공로, 아무 이루어 놓은 것, 아무 열매 없어도 그것이 복입니다.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찌니라.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나섰습니다. 나이 65세였던 사라도 남편을 따라 함께 나섰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간 가나안 땅 그 척박한 광야에서 자기 땅 한 뼘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62년을 살았습니다. 90세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직 장가도 못 보낸 그 서른일곱 살 노총각 아들 이삭을 남겨놓고 127세에 죽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그냥 살았더라면 고생 안 하고 편히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들도 대도시에서 좋은 학교 보내고 일찌감치 예쁜 아내 만나 장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광야에서 함께 고생만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하나님 때문에 광야에서 아들까지 고생시키고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도 광야의 척박함과 인생의 허무를 절절히 알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 창세기를 출애굽 후 광야에서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외에도 시편 90편을 남겼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너무나도 짧습니다. 죽고 썩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시신을 산에다 묻든 굴속에 넣어 장사하든 세월이 흐르면 썩고 티끌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내셨습니다. 죽어서 티끌로 사라질 존재라면 불러내실 리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것은 사라지고 소멸될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소멸되지 않는 존재라면 언젠가는 소멸될 이 땅도 인간의 영원한 거처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신을 장사한 산도 사라지고 굴도 사라지고 지구도 우주만유도 사라지나 오직 우리의 거처가 되는 것은 모세가 노래한 대로 하나님 한 분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벨라 굴은 인생이 죽어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약속의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표징인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사라였습니다. 이것이 소망 중에 죽는 성도의 모습, 이 세상에서는 별 볼일 없이 죽는 것 같으나 영원한 하늘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잠드는 첫번째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이러한 모습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참 가난하고 서글픈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건만 137세가 되도록 자기 땅 한 뼘 없는 가나안 땅 떠돌이 목자의 신세에 평생을 함께 한 아내 사라는 죽고 하나 뿐인 아들은 마흔 살이 다 되도록 혼자이고 주변에는 이방족속 뿐이니 이러한 홀아비 노총각 부자(父子)의 모습이 복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인들 슬픈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떠나온 것을 후회하지도 않았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안일을 맡아온 늙은 종을 불러 부탁합니다. 종의 손을 자신의 환도뼈 밑에 넣게 하고 맹세하게 합니다.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종이 묻습니다. “여자가 따라오지 않으면 아드님을 모시고 그리로 돌아갈까요?” 가나안땅에 따라 올 여자가 없다면 이삭은 영영 장가를 갈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찌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찌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찌니라.”

설사 아들이 장가를 못 가는 한이 있다 해도 절대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종에게 맹세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말씀하신 그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아들의 아내를 예비하시고 반드시 그 땅을 그 씨에게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돌아가면 끝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전망이 캄캄하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지금까지의 믿음과 순종과 섬김이 헛것이 되고 맙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돌이킬 수 없는 길입니다.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어떠한 고난과 희생이 있더라도, 앞이 아니 보이고 캄캄하다 할지라도,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끝까지 돌이킬 수 없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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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은 400 세겔이나 지불하면서까지

광야....,
인생은 광야, 광야 같은 인생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서 광야를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라는 65세에 남편 아브라함을 따라 본토친척아비 집을 떠나 127세에 죽을 때까지 광야를 벗어나지 못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175세에 죽을 때까지 100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가나안도 지옥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광야도 천국입니다.
당시 중동지방의 장례풍습은 시신을 세마포 같은 천으로 싸서 굴속에다 넣어두는 것입니다. 시신에다 향료를 바르고 방부제를 넣기도 합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나 요셉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공적인 산과 굴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피라미드입니다. 왜 굴 속에다 장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을 바라고 또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지역에서 유력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이 아브라함을 두려워하여 찾아와서 화친을 하였고, 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심고 브엘세바에서 수십년을 살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소유한 땅이 없었습니다. 평생을 광야에서 양떼를 몰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목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서 사라를 장사할 매장지를 사려고 합니다. 그러자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게 돈을 내거나 땅을 살 필요 없이 헷 족속의 묘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사라를 장사하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땅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은 400 세겔을 에브론에게 지불하고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 포함된 밭을 삽니다. 은 400세겔이면 4.1 킬로그램 정도 됩니다. 약 1,200돈(120냥)입니다. 인터넷으로 은 시세를 찾아보니 한 돈(3.75 그램)에 2,550원이더군요. 1,200돈이면 300만원 가량이 됩니다. 금값은 18만 8000원이나 되네요. 금과 은의 값 차이가 많이 나는군요. 요즈음은 은이 별로 귀한 금속이 아니라 값이 싸지만 그 당시에는 은이 금이나 다름 없이 귀했고 비쌌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은 400 세겔은 300만원이 아니라 3,000만원, 3억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밭을 은 17세겔로 샀으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굳이 그 많은 돈을 지불하고 헷 족속의 땅을 사서 자신의 소유로 삼은 다음 사라를 거기다 장사하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우상을 섬기는 그들과 함께 나란히 장사되어 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도, 내 아내도 그들의 땅에, 그들의 묘실에 절대로 함께 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땅, 하나님의 나라에 장사하겠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눕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이며 부활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죽습니다. 다 떠납니다. 그러나 소망 없이 땅에 묻히는 인간이 있고 영원한 소망을 안고 하나님 나라에 묻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망 때문에 믿음 때문에 400 세겔이나 되는 거금을 들여 기어이 땅을 사서 죽은 아내를 장사하는 아브라함이 그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시민이요 이 땅에서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100년이나 광야의 삶, 나그네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광야의 삶, 나그네의 삶을 살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누울 것입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하나님이 백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겁니다. ‘모리아 땅으로 가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치라.’ 아브라함은 속으로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면 제게 하신 약속은 뭐가 됩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무를 쪼개어 나귀에 지워가지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두 사환과 함께 떠납니다. “하나님, 말도 안 되는 말씀하지 마시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하고 엎드려 심중에 웃던 아브라함이 말입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이러한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열심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무를 쪼개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도끼로 나무를 내리칠 때마다 “탁- 탁- 쫙- 쫙-” 아브라함의 가슴도 피를 튀기며 쪼개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랬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실행에 옮깁니다. 사라에게 말하면 분명히 울고 불고 붙잡고 난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 저는 그러려고 했는데 아내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할 핑계가 생길 것인데 말입니다. 모리아 땅까지 삼일길입니다. 먼 길입니다. 그 먼 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고민하며 마음의 싸움을 하였을까요? 한국 속담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그 삼일동안은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사환에게 산 아래에서 기다리도록 합니다. 이삭에게 나뭇짐을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올라갑니다. 흡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과 못과 창을 들고 뒤따르는 로마군병의 모습입니다. 산 아래 기다리도록 할 것 같으면 두 사환은 뭣 하러 거기까지 데리고 왔단 말입니까? 나뭇짐을 두 사환에게 운반하게 하면 이삭이 덜 고생스러울 테고 두 사환으로 나무를 쌓게 하면 아브라함이 편할 텐데 말입니다. 아니, 그 보다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리려고 하면 그 두 사환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느냐고 덤벼들어 뜯어말려 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을 순종하지 못 하게 할 모든 방해물을 제거해 버립니다. 오직 이삭만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오릅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가슴이 찢어지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이 어떤 심정으로 말했는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이 말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진리를 말하고 있으니 기이한 일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건을 놓고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내어주실 것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90세 할망구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시는,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나무를 쌓고 이삭을 눕힙니다. 이삭도 그렇지요. 나무 위에 누우라고 한다고 순순히 누웠을까요? 도망치려고 하고 버둥거리며 반항하지는 혹시 않았을까요? 삼일길을 걷고 또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를 정도면 이삭은 이미 자랄 만큼 자라 늙은 아브라함이 힘으로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그랬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순순히 아버지의 명대로 따랐던 것 같습니다. 어린양의 예표이니 양처럼 순하게 말입니다. 성경은 이삭을 순종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까지의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브라함이 진짜로 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지 않는다면 여태까지의 순종도 다 쇼일 뿐입니다. 참 된 순종은 하나님의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물러선다면 그것은 진실한 순종이 아닙니다. 설마 참말로 그러시지는 않겠지,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쇼겠지, 날 시험해 보고 괜히 그러시는 거겠지..., 하고 하나님의 명령 자체를 거짓된 명령, 쇼로 여기고 거기에 맞장구쳐 드리는 쇼를 하는 거짓순종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은 진짜로 이삭을 잡으려고 칼을 들고 이삭의 심장을 내리 찌르려 했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다급하게 두 번이나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시며 아브라함을 제지하셨습니다.

 참된 순종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1장 1절은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께서’와 ‘그 말씀대로’를 두 번 반복하여 사라를 권고하시고 사라에게 행하셨다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걸고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미쁘신 하나님의 성품과, 그 변개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 함일 것입니다.

‘권고(眷顧)하셨다.’라는 말은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베푸사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시어 사라가 아들을 낳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고 어떻게 행하셨을까요? 앞서 20장에서 그랄왕 아비멜렉이 반하여 데려가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하나님께서는 90세 된 할머니 사라에게 아이를 낳고 젖먹일 수 있는 청년의 젊음을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사라가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될 아브라함도 그렇고요. 여러분도 그럴지 모르지요. 하나님께서 쓰시면 나이 들어도 젊고 건강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100세가 넘으셨는데도 정정하게 복음을 전하고 계신 방지각 목사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란 “정확하게 말씀하신 때가 되어”라는 뜻입니다. 더 이르게도 아니고 더 늦게도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에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이라 하라.” 하신대로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하였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신대로 이름을 예수라 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과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아들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돌려 달라 하시면 돌려드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의 일백세 때요 사라의 구십세 때입니다. 사라가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으리라.’ 하셨을 때 장막문 뒤에서 듣고 웃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라만 웃은 게 아니라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게 하옵소서.” 하면서 엎드려 심중에 웃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웃고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루어지니 또 온 세상이 기가 막혀 웃을 일입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니 말입니다. 그들은 아무 반항도 아니하고 십자가에 맥없이 달려 죽는 자를 비웃었습니다. 그 예수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이 어처구니없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웃음이 아니라 모든 족속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너 같은 죄인, 너 같은 인간이 무슨 구원이냐고 세상이 비웃었을지 모르지만 90세 사라가 이삭을 품에 안고 웃은 것처럼 우리는 지금 예수 믿음을 품에 안고 웃으며, 또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안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웃을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이 손가락질 하면서 웃습니다. 개독교라고 하면서 웃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 하기 때문에, 교회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비웃기도 하겠지만 복음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품에 안고 웃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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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죄악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시련이나 고난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실패와 범죄를 보며 손가락질하거나 비난을 하기 전에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겸허히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사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 하였다가 빼앗기는 똑같은 실수를 두 차례나 반복하는 창피스러운 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랄 땅은 애굽으로 가는 길목, 지중해변 블레셋 지역입니다. 또다시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이곳까지 흘러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도 여럿 있고 이스마엘과 하갈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정한 곳에 집도 없이 장막을 치고 장막을 걷으면서 양과 소들의 뜯을 풀과 마실 물을 따라 계속 이동하는 목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목자의 삶은 양떼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양떼를 이끄는 삶입니다. 나그네의 삶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하신 주님도 목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목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삶을 통하여 진정한 목자로 오실 주님의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과 같은 완전한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하지 못 한 아브라함은 그래서 목자의 삶과 나그네의 삶 가운데서 항상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흔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99세, 89세 영감,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눈이 삐었는지 89세 할머니인 사라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도대체 사라가 얼마나 젊고 아름다워 보였으면 그랬을까요?
저도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찬양대의 찬양이 천국의 합창 같았고 찬양하는 자매들과 형제들의 모습이 천사들과 같이 아름다워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사라도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아비멜렉의 눈에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을까요?

아니, 사라는 그 때 정말 젊고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로 하여금 이삭을 낳게 하기 위하여 젊은 몸으로 만드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젊고 아름답게 하신 사라를 보고 반하여 아비멜렉이 데려갔으니 하나님이 가만 보고 계실 턱이 없습니다. 그 밤에 당장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혼을 내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인 줄만 알고 데려왔고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아베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면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주고 은 천 개를 따로 주면서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내리셨던 진노와 징벌을 푸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그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힌 바 되면, 우리를 사라처럼 젊고 강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으면 창피스럽도록 연약하고 비겁한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악한 자가 손도 못 대게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저들을 우리의 기도에 따라 처치하시고 또 용서하실 것입니다. 실로 저들의 생사화복이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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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려 나온 자

 

 성경을 매우 불경스럽고 더러운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더러운 죄와 저지른 범죄행위를 곧이곧대로 가감 없이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높은 도덕과 인간수양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보는 세상종교의 눈으로 볼 때 성경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책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하여 아이를 낳아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는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롯은 과감히 떨치고 나왔어야 했습니다. 전력을 다 하여 산으로 도망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렸고 천사의 손에 이끌려 겨우 소돔성을 빠져 나왔고, 산으로 도망하는 대신 천사에게 애걸하여 중간의 작은 성 소알에 들어갔습니다. 덕분에 소알성이 멸망을 면했는지 모르지만 롯이 본 소알성은 소돔과 다를 바 없는 죄악 가득한 성이었던가 봅니다. 롯은 그곳에 임할 심판이 두려워 다시 그곳을 나와 산으로 올라가 두 딸과 함께 굴속에 거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 굴속에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예 그곳을 은거지로 삼아 주저앉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 굴속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더라면, 그들이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 돌아갔더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갔더라면 이런 해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굴에 틀어박혔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두 딸은 절망하였을 것입니다. 정혼한 남편들은 멸망한 소돔성에서 죽었고 그들에게는 후사를 낳을 희망이 없다고 여긴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워 취하게 하고 아버지로 인하여 아이를 낳게 되고 그 아이들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술만 아니었더라도 노아가 술 취하여 벌거벗었고 그로 인하여 한 아들을 저주하게 된 것처럼 롯이 취하여 이미 소금기둥으로 변한 아내인지 딸인지 분간 못 하여 딸들과 동침하여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족속이 됩니다. 후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였을 때 모압왕 십볼의 아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발람을 매수합니다. 암몬은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또한 이 두 족속의 우상들, 곧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은 솔로몬 왕의 왕비와 후궁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산당으로 모셔져 유대땅을 더럽히고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하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됩니다.

 롯은 스스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하여, 천사의 손에 의하여 억지로 이끌어냄을 받은 “억지로 성도”의 모형인지도 모릅니다. 롯이 억지로 이끌려 나왔더라도, 그 때부터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붙좇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몸과 마음을 다하여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양다리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나섰으면 뒤돌아보지 말고 소알성으로 타협하지도 말고 굴속에 주저앉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나서는 때부터 군사요 군병이요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해괴한 일을 막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을까요? 노아가 술 마시고, 아브라함이 애굽여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고, 롯의 두 딸이 모압과 암몬을 낳고....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하와의 선악과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죄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은 막지 않으셨습니다. 막는다고, 금한다고, 누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막고 억눌러서 죄인이 안 될 수 있었다면, 금하여 의인이 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은 그 본성이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지 아니하시면 도무지 해결방법이 없는 것이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억지로 이끌려나온 자, 롯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셨다는 말씀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놓고 용서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이미 사랑하셨고 그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억지로 이끌어내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억지로 이끌려 나온 롯들입니다. 죄악의 성으로부터 떠나지 못 하고 머뭇거리다 억지로 이끌려 나와 소알성에 기어들고 굴 속에 머물고 여전히 죄의 열매를 맺기까지 하고 있는 롯들입니다. 그런 나, 그런 죄인을 사랑하사 그 아들의 피로 대속하시고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나를 동역자 삼아 이끌어 가시며 그리스도의 신부, 주님의 형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기이한 은혜를 인하여 송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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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좇아간 결과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5,000 년 가난을 물리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 물질의 풍요가, 온갖 편의와 새로운 오락들이 인간을 잘 살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해 주는 것도,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살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인간은 돈을 좇고 황금은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성은 그 속에서 더욱 사악해지고 더욱 황폐화되어가고 더욱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땅은 이미 저주 받았고 불태우기 위하여 간수된 바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의 풍요를 위하여, 물질의 풍요를 위하여 힘써 일하는 것은 더욱 불태울 것만을 풍성하게 만들 뿐입니다. 인간에게 땅의 것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물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들을 추구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하늘을 바라고 살아야 합니다. 영원을 향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이시며 마지막 때를 보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스도로 온 하늘이 가득한 그 때, 곧 마지막 날을 말입니다. 그렇게 하늘은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마지막 시대에 이 땅에 가득하게 될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소돔을 통하여 롯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네가 좌 하면 나는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리라.” 하던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 물과 초목이 풍성한 땅을 향하여, 부요한 삶을 향하여 따나간 롯이 도달한 곳은 가장 풍요롭고 온갖 편리와 오락이 넘쳐나는 소돔성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롯은 당시의 가장 번성한 도시의 풍요로움을 누렸을지 모르나 결국 오늘 말씀에서 보니 인간세상의 더러움과 타락을 한탄하며 성문에 앉아 무엇인가를 누구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물질의 풍요를 좇아 소돔까지 이르른 롯은 그러한 삶과 인간의 타락한 모습에 환멸과 회의를 느꼈을지 모릅니다. 세상을 좇아 신앙을 떠난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의 길을 돌아보며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이 결코 인간의 공허한 심령을 채워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 롯은 성문 앞에 하염없이 앉았다가 날이 저물 때 그곳에 도착한 두 천사를 보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고 사는 사람은 하늘에서 온 자를 알아보는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장막문에 앉았다가 여호와 하나님 일행을 알아보았듯이 롯은 성문에 앉았다가 천사들을 알아본 것 같습니다. 아니, 알아 보았다기 보다 무엇인가에 강하게 이끌렸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끼리끼리 통한다는 말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도 하늘을 바라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를 인하여 서로 이끌리게 되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와는 또 다른 ‘유유상종’으로 더러운 죄악의 유희를 추구하는 똑같은 인간들끼리 만들어낸 추악한 죄악의 도시 소돔성 입구에서 천사를 반갑게 영접하여 맞아들이는 롯의 모습은 어두운 이 마지막 시대에 악에 물들지 않고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자들끼리 이끌리고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악한 세상은 이들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온 성이 모여서 소리치며 두 사람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강제로 문을 열고 강탈하고 강간하려고 합니다. 이들을 그들과 같은 더러운 동성연애자로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그들과 같은 종류 "유유상종"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은 소돔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땅과 물질을 추구해온 오늘날 이 시대에도 유혹과 강압과 폭력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악의 소굴로 이끌려 들어가는지요. 오늘날 세상은 동성애자들의 끈질기고 추악한 요구에 굴복하여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고 특별한 성적취향자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과 미국이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추악한 본성은 다른 사람들이 저들을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게 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모든 사람들을 자신들과 같게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아니 지금 벌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동성애를 퀴어축제라는 행사로 선전, 선동합니다. 동성애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것도 차별이라 하여 금지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추잡한 동성애, 구강성교, 항문성교를 가르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결국 온 세상을 자신들과 똑같이 더럽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순전한 크리스천들을 용납하지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일어나 크리스천들을 고소하고 잡아다 죽이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말살하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순결한 성도들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추악한 인간의 삶의 모습, 이러한 세상의 흐름은 물질의 부요와 이 땅의 쾌락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소돔의 모습과 오늘날 이 세상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물질의 부요를 좇아갔던 롯이 타락한 소돔성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의하며, 고통해하며 성문에 하염없이 앉았던 모습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급하게 어두워져가는 시대를 살면서 과연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추구하며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살아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 오직 진리를 추구하며 순결한 믿음의 시람으로, 하늘을 향하여, 생명과 영원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 머지않아 온 세상이 달려와 대문을 때려부수며 내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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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도 없었다.

90세가 될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황당한(?) 말씀을 하시고 하나님 일행은 소돔을 향하여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숨기겠느냐 하시면서 소돔으로 가시는 목적을 밝히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후손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시려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살리시려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아끼시며(롬8:32) 무엇을 더 숨기시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밝히신 것은 패역한 소돔을 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비록 양과 소가 많아져 목자들이 다투는 바람에 갈라서긴 했지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올 때 자신을 따라온 자식과 다름없는 혈육이요 그돌라오멜 왕에게 잡혀갔을 때 목숨을 걸고 달려가 구해온 사랑하는 자인데 소돔의 악한 자들과 함께 멸망을 당하다니, 그러도록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에 의인 오십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느냐고 여쭙니다. 아브라함의 얼핏 생각엔 그까짓 의인 50명 쯤이야 없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드려놓고 하나님이 그러마고 대답하시자 아브라함은 아무래도 의인이 50명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 사십오인만 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줄여서 다시 여쭙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러마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사십오인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40인으로 줄여서 말씀드립니다. 다시 삼십인, 이십인, 결국 십인, 열 사람만 있어도 소돔을 멸하시지 않으시겠느냐고 말씀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 십인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말씀을 못 드리고 하나님은 그곳을 떠나가셨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소돔성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의인이 단 열 명도 없었단 말입니까? 저는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목사님의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보라, 소돔이 의인 단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을 보라, 얼마나 많은 죄악과 패역과 어두움이 뒤덮고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으시는 것은 바로 여러분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여러분이 바로 열 명의 의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두워가는 세상, 이 썩어져가는 세상 가운데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 대충 그런 내용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하실 때 말씀하신 ‘의인’, 단 열 명도 없는 그 의인은 어떤 사람을 뜻하는 것일까요? 행실이 바르고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한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일까요? 구제를 하고 자비를 베풀며 사랑으로 섬기는 헌신자일까요? 정의와 공의를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용감한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다. 단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3:10).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 같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사64:6). 자신의 능력으로 의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은 오직 ‘예수 믿는 자’, '예수의 보혈로 죄를 씻은 자',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은 그 믿음이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 별,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을 가진 의인, 그것도 열 명씩이나 소돔에 있었을 턱이 없지요. 하나님의 약속도 없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도 없는 소돔성은 죄인의 속성, 타락의 본성을 따라 짐승과 같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타락한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 열 명이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이 소돔성을 멸하셨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못 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단 한 명의 의인이라도 거기에 있었더라면 그 의인은 그 숨길 수 없는 빛으로 소돔성을 밝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내가 마지막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는 믿는 자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진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단 한 사람의 의인만 있어도 멸하실 수 없으시다면 마지막 심판의 날은 마지막 의인까지도 사라진 다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때에는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 할 그런 끔찍한 환난으로 지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조리 살육당하고 청소될지도 모릅니다. 언제 어떻게 마지막 날이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때에는 모든 족속이 통곡하는 가운데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마태복음 24장). 만일 소돔성의 멸망이 이 세상의 그런 마지막 날을 미리 보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욱 주를 믿는 믿음을 견고히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도 의인도 다 사라지는 땅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의인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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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ㆍ 2016-04-09 (토) 11:09 IP: 100.xxx.137    

(창세기 18장 1-4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앞에서 살펴본 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금 확인하고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고쳐 주신 다음 올라가셨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비롯하여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8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정, 낮 열두시 한낮에 장막문에 앉았다가 맞은편에 선 세 사람을 보고 달려가 영접합니다.

  아브라함은 왜 한낮에 장막문에 앉아 있었으며, 왜 세 사람을 보자 달려가서 영접하였을까요? 히브리서 13장 2절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 땅 남부지역, 나그네로 뜨거운 한낮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곤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나그네의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그 고통과 어려움을 아는 아브라함은 그래서 그들을 보자 달려 나가서 영접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부지중에 대접한 나그네가 알고 보니 하나님과 천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시금 후손을 약속하시고 이름을 고쳐 주시고 할례를 받게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표징인 할례를 한 다음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맞은편에 나타난 세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이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라나타” 주님이 오시기를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장막문에 앉지도 않았을 것이고 앉아서 바라보았어도 알아보지 못 하고 지나쳐 보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세 사람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뵙기 원한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이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소돔을 멸하기 위하여 가는 천사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남은 한 분 여호와(YHWH, 야훼) 앞에 아브라함은 “의인 오십만 있으면 사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간구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 사람 중 둘은 천사이고 한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셨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비밀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렸을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나서 간절히 하나님을 기다렸기에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았다가 한 눈에 알아보고 이들 앞에 달려 나가 땅에 몸을 굽혀(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가지 마옵소서.” 하고 간청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을 극진히 영접합니다. 사라에게는 떡을 굽게 하고 자신은 짐승 떼에 달려가서 살찐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하게 하고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상을 차리고 그들을 나무 아래 모셔서 수종 듭니다. “전심을 다 한 극진한 대접” 이것이 바로 영접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요1;12)”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성을 다 하여 극진히 영접하였는데 우리는 그저 “그 이름을 믿는 것”으로 영접을 대신하니 너무나도 홀대하는 것 같다 싶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그 영접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굉장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접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장막문에서 그 말씀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나이 89세 늙은 사라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 희망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의 웃음을 웃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웃눈구나. 여호와께 능치 못 할 일이 있겠느냐. 내년에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 승인치 않고 안 웃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들에게 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극진히 영접하였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진정 극진히 영접하였습니까? 그 이름을 믿는다 하면서 아직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혹시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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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터키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오병이어 말씀을 전하는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하고 오천이었더라.” 하는 대목에서 한 여자성도가 발딱 일어나더니 “아니, 성경에서 왜 여자는 빼요? 여자는 사람 아닙니까?” 하고는 휑 나가 버리더랍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참 여자들의 한이 서린 것 같습니다. 우선 여자들은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저 누구 엄마, 무슨 댁으로 불렸습니다. 저의 조모님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백부님 이름으로 누구 엄마, 친정인 하회의 지명으로 화회댁으로 불리웠을 것입니다. 지금도 족보와 호적, 그리고 묘비에 조부님 이름 옆에 “하회 유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칠거지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아내를 쫓아내는 일곱 가지 악행이라는 겁니다. 시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아들이 없거나, 음탕하거나, 질투를 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하는 일곱 가지 중 하나라도 범했을 경우 여자를 좇아내는 겁니다.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삼불출이라 하여 내쫓아도 갈 곳이 없거나,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전에는 가난했다가 살림을 일으킨 경우는 쫓아낼 수 없도록 하였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의 처 이씨(李氏)가 (이 분도 이름이 없군요.)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나이가 거의 일흔이 되었는데 남편이 계집종을 총애하자 이를 질투하여 계집종을 움 속에 가두고 학대하여 굶겨 죽였답니다. 세종임금은 사간원에서 이맹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받고 그를 귀양 보냈으나 그의 부인은 벌하지 않았습니다. 사헌부에서는 부인 이씨가 자식도 없고 질투가 심하여 계집종을 잔인하게 죽여 칠거(七去) 중 이거(二去)를 범했으니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삼불거를 인용하여 '전에는 빈천하다가 나중에 부귀해지면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함께 삼년상(三年喪)을 입었으면 버리지 못한다.'면서 부인을 이혼시킬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역시 세종임금은 착하고 어질고 총명한 명군(名君)이요 특히 여자에게 너그러웠던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래라는 여자도 자식 못 낳은 채 늙었고, 몸종 하갈이 잉태하자 하갈과 싸우고 남편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이 욕은 당신이 먹어야 옳도다.” 하고 따졌으니 칠거지악 중 이거(二去) 내지 삼거(三去)를 범한 셈입니다. 그러나 드센 사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라는 항복선언을 받아내고 배가 불렀을 하갈을 쫓아냅니다. 그야말로 남편을 공처가로 만든 순악질 여사요 당찬 여장부요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 보내고 사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광야에서 돌아온 하갈을 맞아들이고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키우며 13년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99세 때, 사래가 89세, 때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걸어 흠이 없으라,” 하시고 “너는 아브라함이다. 열국의 아비다. 내가 대대로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할례를 받으라....”고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때 사래가 곁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래가 이를 보고 들었다면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남편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거칠고 메마른 가나안 땅에 와서 하마터면 바로왕의 왕비, 아비멜렉의 아내가 될 뻔도 했던 위기(기회?)를 넘기며 고생했는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 것으로 만족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가, 결국 자신의 자리에는 몸종 하갈이 들어와 앉고 자신의 자식 대신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뻐꾸기 새끼처럼 자신의 안방에 들어앉아 자라나고 후사가 되는 것인가, 자식을 낳지 못 하는 것 때문에 결국 이대로 구세주의 계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 하고 죽어 사라져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구원의 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는 이미 늙었고 아무런 힘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사라라 하라. 열국의 어미가 되리라.” 아브라함이 기가 막혀 웃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살게 하시지요. 하나님도 주책이시군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사람 웃기지 마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너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삭, “웃긴다”고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의 계보로 삼으시려고 그 아내 사래도 부르신 것입니다. 사래를 부르신 것은 사래가 가진 생식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래를 통하여 행하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그 역사를 이루실 것을, 할망구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일"을 사라를 통하여 보이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의 사래들이여. 그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불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그대를 통하여 많은 영적자녀들이 나고 열국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대들을 일으켜 새 이름을 주시고 힘 주시고 낳게 하실 것입니다. 그대들의 가진 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일어나 웃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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