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키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오병이어 말씀을 전하는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하고 오천이었더라.” 하는 대목에서 한 여자성도가 발딱 일어나더니 “아니, 성경에서 왜 여자는 빼요? 여자는 사람 아닙니까?” 하고는 휑 나가 버리더랍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참 여자들의 한이 서린 것 같습니다. 우선 여자들은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저 누구 엄마, 무슨 댁으로 불렸습니다. 저의 조모님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백부님 이름으로 누구 엄마, 친정인 하회의 지명으로 화회댁으로 불리웠을 것입니다. 지금도 족보와 호적, 그리고 묘비에 조부님 이름 옆에 “하회 유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칠거지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아내를 쫓아내는 일곱 가지 악행이라는 겁니다. 시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아들이 없거나, 음탕하거나, 질투를 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하는 일곱 가지 중 하나라도 범했을 경우 여자를 좇아내는 겁니다.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삼불출이라 하여 내쫓아도 갈 곳이 없거나,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전에는 가난했다가 살림을 일으킨 경우는 쫓아낼 수 없도록 하였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의 처 이씨(李氏)가 (이 분도 이름이 없군요.)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나이가 거의 일흔이 되었는데 남편이 계집종을 총애하자 이를 질투하여 계집종을 움 속에 가두고 학대하여 굶겨 죽였답니다. 세종임금은 사간원에서 이맹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받고 그를 귀양 보냈으나 그의 부인은 벌하지 않았습니다. 사헌부에서는 부인 이씨가 자식도 없고 질투가 심하여 계집종을 잔인하게 죽여 칠거(七去) 중 이거(二去)를 범했으니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삼불거를 인용하여 '전에는 빈천하다가 나중에 부귀해지면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함께 삼년상(三年喪)을 입었으면 버리지 못한다.'면서 부인을 이혼시킬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역시 세종임금은 착하고 어질고 총명한 명군(名君)이요 특히 여자에게 너그러웠던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래라는 여자도 자식 못 낳은 채 늙었고, 몸종 하갈이 잉태하자 하갈과 싸우고 남편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이 욕은 당신이 먹어야 옳도다.” 하고 따졌으니 칠거지악 중 이거(二去) 내지 삼거(三去)를 범한 셈입니다. 그러나 드센 사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라는 항복선언을 받아내고 배가 불렀을 하갈을 쫓아냅니다. 그야말로 남편을 공처가로 만든 순악질 여사요 당찬 여장부요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 보내고 사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광야에서 돌아온 하갈을 맞아들이고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키우며 13년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99세 때, 사래가 89세, 때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걸어 흠이 없으라,” 하시고 “너는 아브라함이다. 열국의 아비다. 내가 대대로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할례를 받으라....”고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때 사래가 곁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래가 이를 보고 들었다면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남편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거칠고 메마른 가나안 땅에 와서 하마터면 바로왕의 왕비, 아비멜렉의 아내가 될 뻔도 했던 위기(기회?)를 넘기며 고생했는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 것으로 만족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가, 결국 자신의 자리에는 몸종 하갈이 들어와 앉고 자신의 자식 대신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뻐꾸기 새끼처럼 자신의 안방에 들어앉아 자라나고 후사가 되는 것인가, 자식을 낳지 못 하는 것 때문에 결국 이대로 구세주의 계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 하고 죽어 사라져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구원의 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는 이미 늙었고 아무런 힘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사라라 하라. 열국의 어미가 되리라.” 아브라함이 기가 막혀 웃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살게 하시지요. 하나님도 주책이시군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사람 웃기지 마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너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삭, “웃긴다”고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의 계보로 삼으시려고 그 아내 사래도 부르신 것입니다. 사래를 부르신 것은 사래가 가진 생식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래를 통하여 행하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그 역사를 이루실 것을, 할망구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일"을 사라를 통하여 보이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의 사래들이여. 그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불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그대를 통하여 많은 영적자녀들이 나고 열국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대들을 일으켜 새 이름을 주시고 힘 주시고 낳게 하실 것입니다. 그대들의 가진 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일어나 웃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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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를 하고서도


     (창세기 17장)

창세기의 장(章)이 거듭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씩 조금씩 계시하시며 아브람에게 믿음을 넣어주시고 그 믿음을 이끌어 키워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 주시며 “후손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는데도 아브람이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면서 증표를 요구하자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준비하여 쪼개놓게 하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횃불로 지나시며 또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일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이 삼년 공생애의 주님을 예표하고 비둘기가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면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그 사이를 지나시면서 하나님의 목숨을 거는 약속을 하신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아브라함은 솔개를 쫓다가 지쳐 자빠져(? 실례^^) 깊이 잠들고 하나님 혼자서 목숨을 건 약속을 하신 셈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데도 아브람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지 못 하고 몸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제 갈 길로 간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그리고 뻐꾸기 새끼 이스마엘을 기르며 13년을 보냈습니다.  

그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오셔서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제 갈 길로 가지 말고 하나님 앞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이미 하셨던 약속을 또다시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손이 번성하고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을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 원하나이다.” 하고 불신을 버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고 사라가 전혀 믿지 못 하는데도 하나님은 또다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도록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인간이 잊어버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 약속을 깨고 버리는 악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인간이란 약속과 믿음의 상대가 애당초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잊어버리시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고 금방 변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그래서 잊지 않게 몸에다 표시를 하라는 것인가 봅니다. 하나님은 왜 남자의 양피를 베는 할례를 명하셨을까요? 인간의 신체는 하나님의 너무나 신비롭고 완벽한 작품이어서 무엇을 베어내거나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몸에서 쓸데없는 한 부분을 잘라 버리라고 한다면 어디를 잘라내시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라낼 곳이 없습니다. 우리 몸 어느 한 부분도 불필요한 것이 없고 어느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걸작품인 인간의 몸을 훼손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상하는 것 뿐 아니라 무엇을 그리는 것(문신)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신체에서 일부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잘라내어 ‘브릿트“, 곧 언약의 표시를 해야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요? 어디를 잘라내는 것이 신체의 훼손이나 변형도 없고 부작용도 없고 외부로 흔적도 안 남을까요? 그래서 남자의 성기의 껍질을 자르라 하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화장실 갈 때마다 보고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왜 남자에게만 할례를 하라 하셨는가? 이것은 성차별이 아닌가,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이슬람 교도들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한다고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다음 주신 잉태의 고통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며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먼 훗날 오셔서 뱀의 머리를 밟고 우리를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며 여자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잉태의 고통을 당하며 자식을 낳을 때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이러한 약속의 표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더 귀하게 여기셨는지 여자에게 약속의 표를 먼저 주신 셈입니다. 하긴 여자가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귀하고 연약한 그릇(벧전 3:7)이니까요.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을 통하여 남자들에게도 약속의 표, 곧 양피를 베는 할례를 명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할례를 받으면 나을 때까지 걸음도 걷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긴 하지만(세겜의 학살사건에서 보듯이) 잉태의 고통에는 비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 역시 인간이 하는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약속, 아들을 내어주실 약속이었습니다. 한 쪽은 기껏 양피를 베는 것이었지만 한 쪽은 아들을 내어주어 쪼개는 불평등 약속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집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남자들의 할례는 시작되었습니다. 억지로 몸에다 약속을 표시하는 할례를 한 셈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했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든든히 붙잡았을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받고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였습니다. 결국은 앗수르에, 바벨론에 멸망 당하였습니다. 참 할 수 없는 인간인가 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기나긴 암흑의 세월이 지난 다음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은 오셨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아들의 약속'을 지키시었고 마침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 마음(심비)에 새기는 언약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키신 약속, 그 아들의 피의 약속을 말입니다. 십자가, 그 참혹한 광경, 그 피로 마음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언약을 말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여러분은 육의 심비에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아로새겨진 언약의 할례를 갖고 계십니까?
이 약속마저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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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조차 없는 믿음의 계보

 

 2년이 지나도 세월호 사고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300명 넘는 생명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그들의 교주 유병언을 피신시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구원파의 교리는 “죄사함의 비밀”과 “의인됨”입니다. 구원파 박옥수 목사가 즐겨 하는 단골메뉴 설교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상죄를 지우는 안수를 하였고 그 죄를 지시고 주님은 3년 동안 돌아다니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누구든지 이것을 깨달으면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오른손의 죄가 왼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오른손에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보세요. 여러분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죄가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지요. 죄가 넘어갔다면 죄가 없지요. 이것을 믿으면 죄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없는 사람은 무엇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의 코드만 꽂으면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가고 자신은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설교는 특히 구원의 확신이 없는 연약한 기성교회 교인들에게 잘 먹혀 들어갑니다. 이 비밀을 깨닫기만 하면 의인이 된다니, 그것이 죄사함의 비밀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충격이며 감격이겠습니까? 구원파들이 기성교인들을 공략할 때 잘 써먹는 말이 있습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질문들입니다. 그 질문들 앞에 믿음이 연약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기성교회 교인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요한의 세례가 인류의 죄를 예수님께 떠넘긴 안수식이었을까요? 그들의 “죄사함의 비밀이니 거듭남의 비밀”이란 요한의 세례를 "죄 넘기기 안수"로 바꾼 교묘한 말장난으로 만들어내는 착각과 모순의 교리입니다.

 그들은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의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의인이 구원을 의미하는 동의어는 아닙니다.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스스로 의인이 되고 스스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깨달았으니 나는 의인이 되었고 무조건 구원 받았다.“니, 자기가 무슨 심판자입니까? 그들이 말하는 ”깨달았으니 죄사함 받은 의인 되었고, 의인 되었으니 구원 받았다."는 것은 제멋대로 생각, “아전인수(我田引水)”입니다. 제맘대로 죄를 씻고 의인이 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야 한다면 하나님이 의인에게 복종이라도 하셔야 한다는 말인가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디까? 설사 당신이 의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구원하고 말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제가 뭘 깨달았다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하다니,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죄인이었던 자가 박옥수, 유병언이 설교 한 번 듣고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의인이라면서 하나님 앞에 나서서 얼굴을 쳐들고 구원을 마음대로 결정하다니, 구원파란 실로 뻔뻔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죄사함의 비밀"을 모르고 의인이 되지 못 한 기성교회 교인들이 금수, 곧 짐승들입니다. 유병언이 죽었지만 지금도 구원파 교인들은 그들만의 이 믿음과 비밀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구원파 교리가 어떻게 소위 똑똑한 사람들에게까지 먹혀드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구원파 이야기가 좀 길었군요. 아무튼 구원,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 받는 자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창세 전에 택하시고 택하신 자를 부르시고 아들을 내어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후손의 약속, 즉 그리스도의 약속을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를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지나신 것은 하나님이셨지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영원히 변함없고 변개함 없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의 뜻이나 행위로 변경되거나 달라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약속하셨으니 아브람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전망이나 예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예감조차 없는 깜깜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나 사래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란땅을 떠날 때 65세였던 사래는 그 사이에 76세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 하늘의 별 같아지리라 하셨건만 할머니에게 후손이라니, 다 늙어빠진 두 사람에게 후손이란 그야말로 아무런 전망도 없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 한 사래는 자신의 몸종 애굽여자 하갈을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자기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돕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풍습으로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주어 후사를 잇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며 주인이 뜻대로 사용할 수 있고 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낳는 자녀도 자신의 자녀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래는 '이것이 아무래도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하여 그렇게 한 것일 것입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기로 한 사래의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수락하는 아브람.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그러나 씻을 수 없는 아픔과 후환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루실 일을 자신들의 일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갈이 잉태하면서 바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잉태함을 알자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조그만 공로나 우월함으로도 즉각 교만함이 드러나는 죄악 된 존재입니다. 화가 난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따집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의 말이 맞습니다. 사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이라면 하나님과 아브람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준 것뿐입니다. 아브람은 대답합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여종과 짝지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부부는 한 몸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한 몸이며 이들의 잘못 된 결정과 행동은 그들의 공동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 한 행동의 결과, 곧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아니, 결정적인 잘못은 한 몸 아닌 몸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사를 얻겠다고 합방한 아브라함에게 있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믿음조차 없었고 계보로의 자격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보를 통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요?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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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같은 기나긴 기다림

 

하나님은 아브람만을 구원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구원을 이루시려고, 그 혈통을 그리스도의 계보로 만드시고 마침내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그 후손으로 보내시려고, 그리하여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려고 아브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믿음을 심고 믿음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아브람의 후손들”의 믿음이 아니라 “한 후손, 곧 그리스도”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보이시며 “너의 한 후손이 저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후손들이”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한 후손,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흘러내려 온 세상을 뒤덮고 그 살과 피를 먹고 생명을 얻은 자들이 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될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마 아브람은 하나님이 왜 ‘너의 후손들’이라고 하시지 않고 ‘너의 한 후손’이라고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그냥 믿었습니다. “아니, 후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왜 한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져 묻지 않고 그냥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셈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증표를 요구하는 아브람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과 비둘기를 준비하게 하시고 그 쪼갠 사이로 지나시는 확실한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음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신 아브람과 그 후손들에게 즉각적인 복과 영광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왜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신 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기나긴 400년 세월의 고난을 받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지 못 합니다. 아픔과 슬픔을 당해보지 않고 어찌 짐작만으로 알 수 있으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 어찌 배고픔과 삶의 무게를 알며, 죄악과 병과 죽음과 사랑과 이별의 고통을 당해보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의 의미와 아픔과 슬픔과 죽음의 무서움을 알겠습니까? 인생에 고통이 없다면 즐거움과 기쁨 또한 없을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과 멸망의 무서움을 모른다면 생명의 감격과 구원의 감사도 모를 것입니다. 애굽의 고통 없이 그대로 가나안 땅을 얻어서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하나님 없는 무서움, 죄악과 죽음, 원수의 핍박과 저주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그들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죽음과도 같았던 사백년의 기나긴 압제가 없었더라면, 혹은 그 압제가 그저 몇 년이나 몇 십 년 잠시 지나가는 맛보기였다면, 열 가지 재앙으로 원수들을 징치하고 그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유월절의 감격과 홍해의 기적도 그들에게 큰 감사가 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사백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요? 애굽의 종이 되어 채찍질당하며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죽고, 또 손자가 죽고.... 아무 소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세월,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신 것만 같은, 떠나버리시고 영영 다시는 오시지 않을 것 같은, 하나님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계시지도 않는 것 같은 고통과 침묵 속에서, 오직 믿음만을 붙잡고 대대로 죽어가고 묻혀지고 썩어지고 사라져가야 하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백성들은 얼마나 지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의심하였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통의 사백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나긴 기다림은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습니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 말입니다. “사백 년 동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기다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만 '젖과 꿀이 흐른 가나안 땅'의 복이었다면 그렇게 기다리게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복이었기 때문에 사백년을 기다리게 하신 것일 것입니다. 고통을 아는 자만이, 슬픔을 아는 자만이, 생명을 갈구하는 자만이 죽음과 같은 기다림을 그리스도의 소망으로 이겨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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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 속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곧 예표(豫表), 그리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고 이를 위하여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고 게다가 늙어서 쓸 만한 구석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도우심과 쓰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아브람이 복을 받은, 또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후손이 아닙니다.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 곧 구세주의 계보로 쓰임 받으려고 불러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복을 받을 자격, 복의 근원이 될 자격,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기는커녕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도 못 했고 예수님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코앞의 후사 걱정, 아들 없이 죽는 걱정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이시면서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은 ‘후손들’이 아닌 ‘후손’, 단수명사였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후손을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후손'은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굳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고 믿었더라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그제야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을 요구하는가 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거신 하나님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은 이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히브리어로 ‘브릿트’하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브람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개가 내려앉을 때 쫓았습니다. 그러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났습니다. 히브리어 “브릿트”는 같은 발음이지만 ‘쪼개다’라는 단어도 되고 ‘약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도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짐승을 쪼개어놓고 그 사이를 함께 지나면서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그 짐승처럼 쪼개어져 죽임당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목숨을 거는 약속인 셈입니다. 거기를 하나님이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리로 함께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그 복을 받을 당사자인 아브람은 자빠져(?) 잠자고 하나님 혼자서 ‘하나님의 목숨을 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왜 삼년 된 희생물들일까요? 그것들은 삼년 공생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새는 왜 쪼개지 아니하였을까요? 비둘기는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솔개는 왜 덤벼들었을까요? 솔개는 훼방하고 의심케 하는 사단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쫓는 것은 아브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는 횃불, 한없이 뜨거운 사랑과 ‘열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그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을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실 약속이었습니다. 아들을 쪼개어 지성소의 장막을 가르고 부르신 자들이 그리로 지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실 것을, 죄인들이 피 흘려 죽으신 그 아들의 몸을 지나면서 그 피로 모든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복되게 하실 것을 아브람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걸 이해했을까요? 못 했겠지요. 그러나 그 광경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일평생 한시도 잊지 못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피가 흐르는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의 예표였기 때문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평생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그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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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믿음 없는 자에게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할 만큼 비겁하고 연약하던 아브람이 318명의 가신들과 동지들로 적을 파하고 조카 롯과 인민들을 구출하고 빼앗겼던 모든 재물을 되찾아 왔습니다. 겁쟁이 아브람이 믿음과 용기로 나설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멜기세덱을 예수님의 예표로, 소돔왕을 세상임금의 예표로, 그리고 아브람을 그들 앞에 개선장군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이상 중에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입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했기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후사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바로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후사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벌레도, 나무도, 꽃도, 모든 동식물도...., 산 것들은 다 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씨를 퍼뜨리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게 생명이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 모든 사람들은 사람도 그렇게 후사를 남겨야 자신의 생명이 이어져 내려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것, 대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 보다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함께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얘, 너는 이제부터 나와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하시는데도, “얘, 그런 게 이젠 문제가 아냐. 내가 있으면 다 해결 돼. 너에게 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니?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아니?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다.” 하고 말씀하시는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하는 아브람은 눈앞에 닥친 문제, 후사가 없이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 앞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으면 다른 아무것도 더 필요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 있으면 어떤 고난도, 환난도,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람에게 화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꾸지람하지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아, 그런 거 걱정 마라. 네 몸에서 후사가 난다니까.” 여전히 이해하지 못 하고 믿지 못 하는 아브람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이끌어 밖으로 나가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절을 보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믿지 못 하고 두려워하는 아브람, 답답하고 속 터지는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다. 네 몸에서 후사가 날 거야, 저 별들 봐라, 저렇게 된다니까......” 어르고 달래고 가르치고 보여주시며 일일이 설명한 끝에 아브람이 믿으니 그 작은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믿음을 집어넣어주시고 이끌어주시고 나서 그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을 기뻐하시며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억지춘향’이요 ‘엎드려 절 받기’입니다.

아브람더러 뭐랄 거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믿음 있었습니까? 우리가 아브람보다 나은 게 있었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듣고 성경말씀들과 수많은 선지자와 전도자의 가르침을 받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보면서도, 또 하나님의 먹이시고 입히시고 공급하시는 기이한 일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며 수없이 말씀하시며 가르치시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믿음으로 세우고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아,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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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쌓은 단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흔히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람이 위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에 살고 있던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들의 나이는 이미 75세, 65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결코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일 자녀가 여럿 있고 유복하고 풍족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아무리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어도 그 말씀을 믿고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한 자에게 하나님이나 천국은 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애통한 자에게야 하나님과 천국은 절실한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과 애통함이 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찾아오시려고 주시는 고난이요 가난과 애통이라면 그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그들의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세상에 아무 소망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도착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곳 땅은 헷 족속 가나안 족속이 차지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갑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 당대에 가나안 땅을 아니 주시고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브람은 왜 하나님의 이 말씀에 아무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을까요?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하나님, 약속이 틀리잖아요. 하나님 믿으면 복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손에게 주시려면 왜 벌써 저를 불러내어 이 고생 시키십니까?”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자손’이지만 히브리 원문은 ‘아들’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진리와 구원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상입니다. 아브람의 아들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은 아브람 자신에게 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사는 한 아브라함 자신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게 살아계시면 하나님이 내게 살아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못 들어보았느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안 보이니 죽었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 노릇을 하시는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산 사건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동편으로 옮기고 다시 남방으로 옮겨 가면서도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이 쌓았던 것은 자신들을 위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는 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쌓은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단이었습니다. 높이 쌓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이 쌓아봐야 하늘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궁핍하고 형통하지 못 한 아브람과 사래를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뜻이, 그들의 가나안의 삶, 그 여정과 고통과 외로움과 기다림의 세월을 창세기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이끌려 나온 자들에게 무엇을 위하여 살며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을 말씀하려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작은 단을 쌓기 원합니다. 이 광야같은 인생길, 어디에 가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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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에서 나온 자들

 

1년이라는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입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일곱 식구는 방주로 들어갔고 7일 후인 2월 17일에 홍수가 땅에 덮였습니다. 비는 40 주야를 내렸고 물이 더 많아져 150일 동안 창일하여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덮였고 땅위의 모든 생물들이 죽었습니다. 홍수 5개월 후인 7월 17일(제헌절?)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10월 1일(국군의 날?)에 이르러서야 물에 잠겼던 산봉우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다음이라니까 11월 10일 쯤(추수감사절 무렵?)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냈으며 다시 비둘기를 내보내었더니 앉을 곳이 없어 되돌아왔고, 다시 7일 후에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감람 잎사귀를 물고 왔고, 다시 7일 뒤에 내보냈더니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여러 날들을 보내고 이듬해의 첫날, 곧 노아가 601세 되는 해 정월 초하루(설날)에 방주 뚜껑을 열고 보니 땅위의 물이 걷혔고, 다시 두 달 가까이 지난 2월 27일에 이르러서야 땅이 말랐고,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노아의 가족과 방주의 모든 생물들에게 상륙을 허락하셨습니다. 참으로 길고도 긴 1년 하고도 17일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노아네 여덟 식구와 방주에 탄 모든 생물들에게 그 1년 17일의 시간은 어땠을까요?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인 가운데 그들만 구원을 얻었으니 기쁘고 감격스러웠을까요? 넘실거리는 물결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방주 안에서 그들은 구원감사 선상파티를 하면서 즐거워했을까요? 위로부터 한 규빗에 낸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방주 안이 밝았을까요? 방주 안에 기름과 향유로 등불을 밝히고 좋은 음식과 식사와 편안한 생활을 했을까요? 새들과 짐승들이 넓은 방주 안을 마음대로 다니며 놀았을까요? 식량은 충분하였을까요? 맛은 있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낮과 밤도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어두운 방주 안, 잣나무를 깎아 만든, 역청이 안팎으로 칠해진, 삼층(삼층천?)으로 나누어지고 간으로 막힌 방주 안의 좁은 공간에 갇혀서 그들은 갑갑함과 공포와 고통과 배고픔과 온갖 악취를 견디며 1년을 보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과 모든 생물들은 마치 곰이 동면(겨울잠)하듯이 그 안에서 죽은 듯이 지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주 안이 난리법석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1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방주에서 나오는 날, 그들은 1년 17일의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통과하여 마침내 새 생명을 얻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1년 17일 동안 방주 안에서 견뎌내지 못 하고 다 죽었을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죄의 삯인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구원은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우리 대신 죽으심, 곧 참혹한 고통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노아의 방주는 나무로 만들어 석청을 발랐습니다. 십자가도 나무로 만들어졌고 거기에 주님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죽고 새 생명을 얻어 거듭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던 그들을 홍수가 씻어간 새 땅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다시금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시며 복을 주셨습니다. 새 창조요, 새 피조물이요, 새 하늘과 새 땅과도 같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감격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 것을 아시면서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아니 하시겠다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새로워지고 달라져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달라진 그것은 그들이 방주에 들어갔다가 방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인간성이 달라지고 성품이 거룩하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확실한 달라진 것은 예수 믿었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렇게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죄로 인하여 홍수를 당한 땅이 에덴동산 시절과 같이 온전히 회복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고 거듭났다 할지라도,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온전한 성품과 완전한 거룩함을 회복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예수 믿었다 하여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음 같이 성도의 앞길도 광야와 같은 연단과 환난이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쉬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들입니다.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음 같이 이어지는 광야와 같은 연단과 환난의 길을 우리는 주와 함께 걸으며 그 앞에 서기까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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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에서 나온 자들

1년이라는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입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일곱 식구는 방주로 들어갔고 7일 후인 2월 17일에 홍수가 땅에 덮였습니다. 비는 40 주야를 내렸고 물이 더 많아져 150일 동안 창일하여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덮였고 땅위의 모든 생물들이 죽었습니다. 홍수 5개월 후인 7월 17일(제헌절?)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10월 1일(국군의 날?)에 이르러서야 물에 잠겼던 산봉우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다음이라니까 11월 10일 쯤(추수감사절 무렵?)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냈으며 다시 비둘기를 내보내었더니 앉을 곳이 없어 되돌아왔고, 다시 7일 후에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감람 잎사귀를 물고 왔고, 다시 7일 뒤에 내보냈더니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여러 날들을 보내고 이듬해의 첫날, 곧 노아가 601세 되는 해 정월 초하루(설날)에 방주 뚜껑을 열고 보니 땅위의 물이 걷혔고, 다시 두 달 가까이 지난 2월 27일에 이르러서야 땅이 말랐고,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노아의 가족과 방주의 모든 생물들에게 상륙을 허락하셨습니다. 참으로 길고도 긴 1년 하고도 17일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노아네 여덟 식구와 방주에 탄 모든 생물들에게 그 1년 17일의 시간은 어땠을까요?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인 가운데 그들만 구원을 얻었으니 기쁘고 감격스러웠을까요? 넘실거리는 물결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방주 안에서 그들은 구원감사 선상파티를 하면서 즐거워했을까요? 위로부터 한 규빗에 낸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방주 안이 밝았을까요? 방주 안에 기름과 향유로 등불을 밝히고 좋은 음식과 식사와 편안한 생활을 했을까요? 새들과 짐승들이 넓은 방주 안을 마음대로 다니며 놀았을까요? 식량은 충분하였을까요? 맛은 있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낮과 밤도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어두운 방주 안, 잣나무를 깎아 만든, 역청이 안팎으로 칠해진, 삼층(삼층천?)으로 나누어지고 간으로 막힌 방주 안의 좁은 공간에 갇혀서 그들은 갑갑함과 공포와 고통과 배고픔과 온갖 악취를 견디며 1년을 보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과 모든 생물들은 마치 곰이 동면(겨울잠)하듯이 그 안에서 죽은 듯이 지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주 안이 난리법석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1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방주에서 나오는 날, 그들은 1년 17일의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통과하여 마침내 새 생명을 얻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1년 17일 동안 방주 안에서 견뎌내지 못 하고 다 죽었을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죄의 삯인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구원은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우리 대신 죽으심, 곧 참혹한 고통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노아의 방주는 나무로 만들어 석청을 발랐습니다. 십자가도 나무로 만들어졌고 거기에 주님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죽고 새 생명을 얻어 거듭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던 그들을 홍수가 씻어간 새 땅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다시금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시며 복을 주셨습니다. 새 창조요, 새 피조물이요, 새 하늘과 새 땅과도 같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감격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 것을 아시면서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아니 하시겠다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새로워지고 달라져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달라진 그것은 그들이 방주에 들어갔다가 방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인간성이 달라지고 성품이 거룩하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확실한 달라진 것은 예수 믿었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렇게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죄로 인하여 홍수를 당한 땅이 에덴동산 시절과 같이 온전히 회복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고 거듭났다 할지라도,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온전한 성품과 완전한 거룩함을 회복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예수 믿었다 하여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음 같이 성도의 앞길도 광야와 같은 연단과 환난이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쉬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들입니다.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음 같이 이어지는 광야와 같은 연단과 환난의 길을 우리는 주와 함께 걸으며 그 앞에 서기까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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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것인가, 아니 믿을 것인가?

 

그러니까 170 여년 전입니다. 뉴욕의 침례교회 평신도였던 윌리엄 밀러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날수를 계산하여 마지막 날이 1844년에 온다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추종자들과 함께 흰옷을 입고 산에 올라가 휴거를 기다렸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밀러의 추종자들과 엘렌 지 화이트는 기존교회를 이탈하여 1860년 무렵 제칠일안식일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칠일안식일교회는 1905년 무렵 한국에도 전파되어 오늘날 삼육재단, 삼육병원, 삼육대학, 삼육두유 등과 함께 20만이 넘는 신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제칠일안식일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믿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92년에도 한국이 시한부종말론으로 떠들썩했습니다. 이장림씨가 주도한 다미선교회 신도들은 흰옷을 입고 1992년 10월 28일 자정을 맞이하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이장림씨 자신은 종말을 믿지 않고 신도들이 헌납한 돈을 챙기고 1993년 5월 만기의 사채까지 사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검찰은 이장림을 사기혐의로 입건하였습니다. 2012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온 세계가 다시 종말론에 휩싸였습니다. 이번에는 고대 마야인의 달력이 2012년에 끝난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고 갖가지 소설들과 ‘딥 임팩트’, “2012년” 같은 영화까지 나오고, 미국에서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진 패밀리라디오 헤럴드 캠핑 목사님은 노아의 홍수사건에 나오는 날짜들을 가지고 2012년 10월 21일이 인류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또다시 예언하였으나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었다고 하여 심판도 없고 종말은 영영 아니 올까요? 심판과 종말은 있습니다.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시기를 알지 못 할 뿐입니다.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

노아의 홍수에 관하여는 논쟁이 많습니다. 과연 노아의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도 있고, 노아의 홍수사건이 실제의 사건이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지구 전체에 노아의 홍수를 일으킬 만큼의 물이 없다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지구상 곳곳에 홍수의 흔적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랜드캐년이 수천만 년에 걸친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일시에 흘러내린 엄청난 홍수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터키의 해발 5,160 미터의 아라랏산 해발 4,000미터 기슭의 만년설 아래에서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촬영된 영상과 함께 구체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는가 하면 이를 착오이거나 조작된 것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진리는 분명 하나일 텐데 인간들은 왜 다른 시각과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다투는 것일까요? 세상에는 왜 속 시원한 대답과 증거는 없고 온갖 추측과 주장과 대립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이러한 혼란과 다툼들을 보고만 계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종말의 예표입니다. 세상이 노아의 홍수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의 증거가 분명하게 보이게 하시지 않으신 것은 믿음을 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믿는 자는 아니 보여도 믿고 안 믿는 자는 보여도 안 믿습니다.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형제들에게 보낸다고 해도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을 것이며,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과 능력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다윈의 진화의 증거일 뿐인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홍수를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비도 오지 않는 맑은 하늘 아래 산위에다 잣나무를 베어다가 방주를 짓는 노아를 사람들은 비웃었을 것이고, 노아는 사람들에게 홍수를 대비하라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돌아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홍수가 저들을 쓸어갈 때까지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들을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믿어야 할 증거가 너무 많고 안 믿는 자에게는 못 믿을 이유가 넘치게 많은 시대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허구의 신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믿는 자에게는 생명과 소망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꾸며낸 인물이거나 과대망상 정신이상자입니다. 똑같이 보면서도 믿는 자에게는 보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니 보입니다.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신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때에야 비로소 온 세상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홍수에 쓸려가듯 쓸려갈 것입니다. '믿을 것인가, 아니 믿을 것인가', 바야흐로 우리는 노아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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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비웃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심판을 하지 않으신다면 악은 영원히 득세하고 마귀는 영원히 신나고 억울한 자는 영원히 억울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공간에 악이 존재하고 지속되도록 허용하거나 놔두신다면 하나님은 그 악을 위하여 우주의 일부를 창조하여 제공하신 꼴이 되어버리실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시고 죄를 용납하지 못 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세계에서 악을 반드시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온 세상의 죄악을 말갛게 씻어버릴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 주시는 예표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길이가 300 규빗, 너비가 50 규빗, 높이가 30 규빗인데 이를 미터단위로 환산하면 길이 135미터, 너비 22.5미터, 높이 13.5미터의 길고 조금 납작한 축구장보다 약간 더 큰 거대한 상자모양의 삼층 배가 됩니다. 잣나무로 지으라 하셨습니다.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라 하셨습니다. 거친 잣나무를 베고 켜고 다듬어 배를 짓는 일이나 역청을 구해 와서 방주의 안팎을 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며칠이나 몇 달, 몇 해로 끝날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일평생을 몸 바쳐 일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고 어느 한 부분, 한 구석이라도 빠뜨리거나 소홀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고, 대충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를 지은 장소도 바닷가나 강가가 아닌 땅위였을 것이고 비도 아직 안 내리는 때였으니 당시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하는 일은 아까운 시간과 노력과 돈과 인생을 허비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미친 짓이었을 것이니, 어쩌면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에게는 그들의 조롱과 비웃음과 모멸을 이기는 일이 방주를 짓는 일보다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그렇게 험난하고 멀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스티로폼 박스나 구명보트 하나씩 만들어서 타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조롱 속에서 거칠고 무거운 잣나무를 베어 와서 고뱅이들을 잘라내고 다듬고 길이와 폭을 빈틈없이 맞추어 방주를 짓고 석청을 안팎으로 빈틈없이 바르는 일은 가시밭길, 죽음과도 같은 고난과 형극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멋진 백향목이나 적송이나 전나무 같은 좋은 목재 놔두고 거칠고 고뱅이 많은 잣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역청으로 방주의 안팎을 칠하라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가시떨기 조각목으로 언약궤를 만들라고 명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황금으로 언약궤를 싸라 하시고 또 그 위에 속죄소를 두고 피를 뿌리게 하셨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노아처럼 잣나무를 베어다 역청을 발라가며 구원의 방주를 짓지는 않습니다. 가시떨기나무로 법궤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습니다. 방주의 재료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거친 잣나무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메마른 가시나무 조각목은 바로 우리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쳐서 다듬고 맞추고 십자가의 보혈을 안팎에 발라야 합니다.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해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그 방주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 노아 자신과 그의 처, 그리고 그 자녀들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심판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고 조롱하는 세상 속에서, 세상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여기는 십자가를 지고, 세상이 이해하지 못 하는 일, 저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평생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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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는 줄


지구와 또 모든 혹성들이 수십 억 년 한결같이 태양을 돌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인력 때문입니다.
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줄 같이 잡아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별도 물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변함도 없습니다.
전기자기력은 중간에 철판 같은 것을 넣으면 차단됩니다.
그러나 인력은 어떠한 장애물이나 다른 별이 중간에 끼어도 차단되지 않습니다.
만일 인력이 가로 막히거나 차단될 수 있다면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끼어들어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지구는 태양으로부터의 인력을 잠시 덜 받게 되어 흔들거려야 합니다.
반대로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를 가로막아 개기월식에 일어날 때는
달이 출렁,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야 합니다.
만일 인력이 차단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인력차단판을 설치해놓고 그 위에서 하늘높이 뛰어 오르고
그 위에서 쉽게 로켓도 쏘아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력을 차단하거나 그 강도를 변화시키거나 그 방향을 굴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인력이 한 순간이라도 그 세기가 변하거나 방향이 휘거나 끊어졌었더라면
지구와 또 모든 혹성들은 이미 오래 전에 태양으로부터 튕겨져나가 흩어져 우주의 미아가 되어 제멋대로 가버렸을 것입니다.

사랑의 띠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잡아매는 줄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우리에게서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랑의 강도가 변한 적도 없습니다.
휜 적도 없고 방향이 바뀐 적도 없습니다.
만일 한 순간이라도 그랬더라면
우린 이미 옛날에 다 하나님으로부터 튕겨져 나가 뿔뿔히, 먼지조각처럼 흩어지고 허무와 멸망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띠 안에서 우리는 왜 불안해 하고
그 사랑의 띠로 하나 되지 못 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 하고 다투는 것일까요?

가인은 왜 아벨을 쳐 죽였을까?

 

세월이 흐른 후에”라고 되어 있으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몇 십 년인지 몇 백 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인은 가시덤불을 헤치며 땀 흘려 농사지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덩달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열납(기쁘게 받으심)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그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벨은 선을 행하는 착한 자였고 가인은 행위가 악한 자였을까요? 이 문제는 성경학자들 사이에도 많은 주장과 해석, 그리고 논쟁이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구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 마치 가인이 선을 행치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 하고 제물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흘로 암 헤이티브 쓰야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흘로’ 아니, ‘암’ 만일, ‘헤이티브’, 만일 네가 바로 하면, ‘쓰야트’, 들릴 것이다. 받아들여질 것이다. 즉 ‘만일 네가 바로 한다면 왜 안 받아 올려지겠느냐?’입니다. “바로 한다면”은 그냥 “바로 한다면‘입니다. 이것을 “행동을 바로 한다면”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제사를 바로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지금 가인의 행위를 놓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사와 제물을 놓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가인이 선행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면 창세기 기록자가 이 대목 어딘가에 “가인은 행실이 좋지 못 하고 아벨은 선행을 하였더라.” 하는 식으로 가인과 아벨의 행실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제사와 예배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행위입니까? 복을 비는 아부행위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제사로 섬겨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에게 제사를 요구하시겠습니까? 더구나 죄인 된 인간이 제사를 드린다고 하나님이 얼씨구나 달려와서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제사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죄인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인간에게 남겨주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요 방법’이었습니다. 제사란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고 더럽혀진 죄인을 아주 버리지 않으셨다는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은 죄의 구렁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줄이요 다리였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죄인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생명과 소망의 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제사는 먼 훗날 오실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의 제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은 여자의 후손의 약속,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징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인간이 노력하여 땅에서 거둔 소출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가인이 왜 그렇게 분해 하고 안색이 변하였을까요? 왜 격분하여 동생을 때려 죽였을까요? 아벨이 착하고 행실이 선했다면 과연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감히 그렇게 화를 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가인은 열심히 밭 갈고 노력하는 성실한 자였고 아벨은 빈둥거리며 양이나 치는 놈팽이 같은 나쁜 녀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기에 가인이 “아니, 너 같은 나쁜 놈이??” 분이 나고 참을 수 없어 아벨을 때려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튼 가인은 못 나가고 아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은 제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어린양 제물입니다. 나의 노력도,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나를 정케 하는 것은, 나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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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고 원수가 되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풍요와 즐거움과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가시덤불과 고통 속에 살다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애처로워 내어쫓지 못 하시고 에덴동산에 그냥 두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들이 영생나무 실과를 먹고 영원히 살게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는 구원할 방법도, 회복할 방법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내어 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진심, 하나님의 속마음까지는 알지 못 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들어가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빼앗겨 비참한 처지로 내몰린 인생의 바닥에서 감사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때 존귀하던 자가 급전직하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며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면 대개의 경우 분노하고 원망하기 마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 가운데서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시며 먼 훗날 구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동침하매’가 아니라 ‘야다’, ‘알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때도 사용하는 이 단어를 아담과 하와의 동침에 사용한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여호와로 남자를 얻었다.’ NIV 영어성경은 'With the help of the Lord I have brought forth a man.' 곧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내가 한 남자를 얻었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남편과 동침하여, 내가 열 달 동안 임신하여, 내가 고통을 겪으며, 내가 아들을 낳았다.’ 곧 ‘내가 내 힘으로 수고하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도우사 남자(아들)를 얻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고백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수고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끈을 붙잡고 기다리는 그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도우사 아들을 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을 기대하며 아들이 태어난 것을 얼마나 기뻐하며 얼마나 기대하였을까요? 그러나 그 아들은 하와가 바라고 기대하고 믿었던 구세주의 계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죄의 상처를 더욱 깊게 하고 인간의 죄를 더욱 크게 하고 동생을 죽임으로써 믿음의 줄까지 끊어버리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그 불순종과 타락의 범죄는 아담과 하와의 기대와 같이 잠시잠깐의 고난, 그들 당대의 고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곧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죄는 온 세상을 검게 물들이고, 온 세상을 사단마귀의 손아귀에 집어넣고 온 세상을 수천 년 동안 죽음과 절망의 고통에 밀어 넣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찢김 당하셔야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끔찍한 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죄,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끔찍한지를 잘 알지 못 합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였다는 것을,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죽임 당하지 않으시면 안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세상을 덮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는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원망하면서 정작 온 세상을 뒤덮은 공허와 혼돈, 흑암의 깊은 곳, 더러운 죄가 이룬 가시덤불과 사망의 깊은 바다를 헤치고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셔서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셔야 하는 아픔을, 아들을 그렇게 내어주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그 고통을 헤아리지 못 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와 그 아들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입으로는 ‘하늘의 두루마리, 바다의 먹물’을 노래하면서도 미쳐 깨닫지 못 하고 느끼지 못 합니다. 이와 같이 또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도 잘 알지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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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고 원수가 되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풍요와 즐거움과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가시덤불과 고통 속에 살다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애처로워 내어쫓지 못 하시고 에덴동산에 그냥 두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들이 영생나무 실과를 먹고 영원히 살게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는 구원할 방법도, 회복할 방법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내어 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진심, 하나님의 속마음까지는 알지 못 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들어가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빼앗겨 비참한 처지로 내몰린 인생의 바닥에서 감사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때 존귀하던 자가 급전직하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며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면 대개의 경우 분노하고 원망하기 마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 가운데서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시며 먼 훗날 구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동침하매’가 아니라 ‘야다’, ‘알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때도 사용하는 이 단어를 아담과 하와의 동침에 사용한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여호와로 남자를 얻었다.’ NIV 영어성경은 'With the help of the Lord I have brought forth a man.' 곧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내가 한 남자를 얻었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남편과 동침하여, 내가 열 달 동안 임신하여, 내가 고통을 겪으며, 내가 아들을 낳았다.’ 곧 ‘내가 내 힘으로 수고하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도우사 남자(아들)를 얻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고백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수고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끈을 붙잡고 기다리는 그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도우사 아들을 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을 기대하며 아들이 태어난 것을 얼마나 기뻐하며 얼마나 기대하였을까요? 그러나 그 아들은 하와가 바라고 기대하고 믿었던 구세주의 계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죄의 상처를 더욱 깊게 하고 인간의 죄를 더욱 크게 하고 동생을 죽임으로써 믿음의 줄까지 끊어버리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그 불순종과 타락의 범죄는 아담과 하와의 기대와 같이 잠시잠깐의 고난, 그들 당대의 고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곧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죄는 온 세상을 검게 물들이고, 온 세상을 사단마귀의 손아귀에 집어넣고 온 세상을 수천 년 동안 죽음과 절망의 고통에 밀어 넣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찢김 당하셔야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끔찍한 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죄,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끔찍한지를 잘 알지 못 합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였다는 것을,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죽임 당하지 않으시면 안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세상을 덮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는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원망하면서 정작 온 세상을 뒤덮은 공허와 혼돈, 흑암의 깊은 곳, 더러운 죄가 이룬 가시덤불과 사망의 깊은 바다를 헤치고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셔서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셔야 하는 아픔을, 아들을 그렇게 내어주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그 고통을 헤아리지 못 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와 그 아들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입으로는 ‘하늘의 두루마리, 바다의 먹물’을 노래하면서도 미쳐 깨닫지 못 하고 느끼지 못 합니다. 이와 같이 또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도 잘 알지 못 합니다.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


[히브리서 6: 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더러 교회들이 지키는 절기들이 참 많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신년예배부터 시작하여 설날(구정), 부활절이 다가오면 사순절이라 하여 40일 금식기도, 종려주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 부활절이 끝나면 오순절, 어린이날, 어머니날, 아버지날, 초막절, 맥추절, 여름성경학교, 야외예배, 전교인 수련회, 부흥회, 사경회, 바자회까지, 가을에는 추석에다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이 다가오면 대림절인지 대강절, 그리고 성탄절, 그리고 송구영신예배.... 이렇게 참 절기와 행사가 많습니다. 언젠가 일년 내내 이러한 절기와 행사를 이어가면서 목회자의 목회 프로그램과 설교원고를 아예 붕어빵 식으로 만들어서 나누어주는 목회자 모임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기 우리가 빌려 쓰는 이 미국교회도 행사들이 일 년 내내 줄줄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지금으로부터 400 여 년 전, 1622년 11월 11일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온 102 명의 청교도들, 그 해 겨울을 넘기면서 절반이나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죽고 살아남은 그들이 2년 후엔가 자기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청하고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나중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로 제정함으로써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30 여 년 전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들이 이 추수감사절을 한국에 보급하였고, 이것이 추석을 지키는 농경사회이던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아 한국교회에도 뿌리내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도시화, 산업화로 인하여 더 이상 농경사회도 아닌 한국에서 무슨 추수감사냐, 추수감사절이 축복 좋아하는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우려내는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있고 폐지하자는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성경은 추수감사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추수감사절이라는 명칭은 없지만 성경은 명백히 하나님 앞에서 추수 절기를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 출애굽기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한 해의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신명기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 말씀들을 보면 추수절기를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구약시대의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약의 절기를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말씀과 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잇대어 재해석하고 이를 기쁨으로 지키고 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 위에 파종을 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햇빛과 이른 비, 늦은 비로 열매 맺게 하시어 우리로 거두게 하신 은혜를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추수는 땅에서 나는 곡식이나 열매,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거두고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추수는 이 땅에서 마지막 때에 거두실 영원한 영혼의 추수일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나고 기뻐 뛰며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간 다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양식은 따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시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추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알곡을 천국창고에 모아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태울 것이라 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옥토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원수가 덧뿌린 가라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하시고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한(예리한) 낫을 휘두르는 추수군 천사도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히브리서 6장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밭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작물을 내는 복 된 밭을 말씀하며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타락한 밭이 버림당하며 불사름 당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밭 가는 자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밭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작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추수감사절 풍성한 가을걷이를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지만 밭 가는 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거두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알곡과 같은 성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열매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 궁창에서 영원히 빛날 천국의 영혼들로 인하여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뿌리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들의 피, 독생자의 생명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찢어 뿌리신 처절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밭 가는 자 되신 하나님이 거두시고 기뻐하시는 채소와 알곡이 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요 1:12). 그리스도의 살과 피, 그 처절한 고통의 사랑을 우리 가슴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비, 늦은 비와 같이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초보에 머무르지 않고 단단한 식물을 소화하며,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것" 같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쉬임없이 흡수하여, 무럭무럭 자라는 밭의 작물과 같이, 배움의 정진(精進: 힘을 다 하여 그리스도의 나아감)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으르도록 나아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햇살과 폭풍우를 이겨내는 것 같이 고난과 연단을 이겨내는 인내요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이 마지막 때에 '받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작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알곡 되기 원합니다.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 (NIV)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구분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네 생물을 따서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복음, 누가복음은 사람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확연히 다른 점은 복음서 첫머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말씀, 로고스, 곧 하나님과 함께 계신 창조주 성자하나님으로, 생명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흡사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로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성자하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었으나 사람들은 그 빛을 깨닫지 못 하였고,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1장 12절) 그런데 바로 다음절 13절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말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선 이 13절 말씀은 구원이 인간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인간이 구원받고 싶다고 구원 받고,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택하심에 의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는 “엑 데우 에게네세산”,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산하시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출산은 피를 흘리고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피, 곧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피를 흘리면서 그 아들을 내어주시는 고통이 들어 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 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피, 곧 하나님의 생명이 고통의 출산을 통하여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1장 12절만 암송하여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13절 말씀에 얼마나 처절한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과 인내가 담겨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여기에 얼마나 극적이며 장엄한 구원의 역사가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가슴을 찢고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손에 아들을 넘기셨으며 참혹한 십자가에서 그의 살을 찢어지고 그의 피는 십자가 나무를 타고 대지에 흘러내렸습니다. 그 살과 피는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마다 먹고 마심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살과 피는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떡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이 2,000년 전 전이므로 그렇게 절박하거나 현실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 한 번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다니 나는 그 속에 포함되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노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에고 에이미, I am", 항상 현재형으로 계시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께서는 잊어버리시거나 기억이 희미해지는 일이 없습니다. 우주탄생부터 지금까지, 아니 영원토록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그 십자가 사건은 바로 지금 일어나는 생생한 현재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 사람이 십자가 아래 엎드려 회개하며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의 십자가의 고통, 피를 흘리며 출산하는 그 고통을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다시금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죄악을 담당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을 다시금 당하고 피 흘리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낳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내가 너를 낳았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 단 한 번 십자가 사건으로 무더기로,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영어로 읽어 보십시오(헬라어 원문으로 읽으면 더욱 분명합니다).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낳으신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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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좇아 걸으라.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사도바울께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부탁으로 들립니까, 권유로 들립니까, 명령으로 들립니까?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말인데 듣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존댓말과 반말이 있는 우리말은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도 다르게 들려지기도 합니다.

우리말 성경들을 좀 인용해 보겠습니다.
- 개역한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개역개정: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공동번역: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육체의 욕정을 채우려 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 새번역: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내가 하는 말입니다만 여러분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번역본마다 다르지요?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은 똑같이 명령어로 “행하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존댓말을 사용하여 정중하게 권면하는 어투입니다. 부탁하고 설득하는 어조입니다. ‘행하라’가 아니라 ‘살아가십시오. 사십시오.’로 달라져 있습니다.
영어성경은 어떨까요? 영어성경을 몇 가지 살펴보면 NIV는 ‘성령으로 살아라.’이고, KJV와 NASB는 ‘성령 안에서 걸으라, 성령으로 걸으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은 ‘행하라’는 명령이고, 어떤 번역은 부드럽게 ‘사십시오.’ 권유하며 부탁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레고 데, 프뉴마티 페리파데이테 카이 에피두미안 사르코스 우메 텔레세테. 그러나 내가 말한다, 성령으로(성령에 의해) 걸으라. 그러면 육신의 욕심으로 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가깝다 싶습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제가 보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정녕 죽으리라.’와 마찬가지로 분명하고 단호한 명령과 결과에 대한 경고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헬라어 ‘페리파데이테’는 ‘행하라’가 아니라 ‘걸어라’가 맞습니다. 우리말 "행(갈 行)"은 한자말로서 길을 길 가는 것도 행(行)이고 일하는 것도 행(行)입니다. 가는 목적지를 가리킬 때도 행(行)을 사용하여 서울행, 부산행으로 씁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 행(行)을 설명이나 구별없이 사용하여 혼란과 오해의 소지를 주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 17장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때 “행하여”는 무슨 행위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내 앞에서 걸어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게로 오라’ 하셨고 ‘내 앞에서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대적들을 치셨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악한 일을 행치 않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기 위하여 힘쓰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을 좇아 걸어가면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므로 수고함도 힘씀도 애씀도 없이 포도나무의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너는 성령을 좇아(성령의 명하심에 복종하여) 걸어라.” 사도바울의 말씀은 그 말씀입니다. 그러나 엄한 명령입니다. 성령을 따라 걸으십시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좇아 걷지 못 하고 육체의 요구에 따라 욕심을 좇아 걷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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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지금 갈라디아서 5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시편을 잠시 찾아가 보겠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합니다(시 113, 134, 135편). 시편기자가 말하는 ‘여호와의 종’은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무슨 뜻입니까? 종은 주인에게 속해 있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인 줄 알고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종의 속성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결과를 보면 돈과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 쾌락이나 집착 같은, 자신을 종으로 삼은 그 무엇인가를 위하여 일평생 허덕이며 살아온 꼴이 됩니다. 피조물이며 종 체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육신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인간을 교묘히 조종하여 마귀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또 하나의 기능은 바로 그것입니다. 울타리와 줄처럼 가두고 묶어서 율법의 종이 되게 함으로써 죄악과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율법의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온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사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풀어내어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코 인간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내신 것입니다. 그 자유는 물론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고, 자신도 모르게 누구에겐가, 무엇에겐가 종이 되려고 하는 종의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놔놓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모두가 육체의 종이 되어 육체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함으로 서로의 종이 되라.”

신명기 15장에는 ’만일 동족 히브리 남자나 여자가 너에게 팔려 종이 되어 육년을 섬겼다면 제칠년에는 놓아 자유케 하라, 그를 빈손으로 가게 말고 풍성히 주어 보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만일 종이 너와 네 집을 사랑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진정한 종은 막강한 권력이나 강제적인 힘에 굴복하여 되는 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원하여 되는 종입니다. 그 송곳이 무엇이며, 문은 무엇이며, 귀는 무엇이며, 뚫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만유의 주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고, 목숨까지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마치 문에다 대고 송곳으로 똟은 것처럼 십자가에 손과 발, 그리고 가슴까지 뚫림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사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 자유케 하신 주님께 이제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육체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고 순종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그 사랑, 그 순종으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새 율법, 새 계명이라 하십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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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가 무엇인가?

뜨거운 한 여름 낮, 한 할머니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신작로를 걷고 계셨습니다. 지나가던 트럭기사가 그 할머니가 측은하여 짐칸에 태워드렸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기사가 뒤를 돌아보니 그 할머니 트럭 짐칸에서 여전히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계신 겁니다. 흔들리는 트럭 짐칸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계시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할머니, 그 짐 내려놓으세요.” 그 할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아이구, 제가 탄 것만도 미안한데 짐까지 어떻게......”

우습습니까? 무지해서 저지르는 실수가 실수로 끝난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무지해서였다 해서 용서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 때문에 사고라도 난다면 그 사고가 모르고 그런 것이라고 할머니를 봐 줄 것 같습니까? 사고는 인정사정 없습니다. 하와가 속아서 따먹었다 해서 그 범죄가 돌이켜질 수가 있습니까? 죄는 인정사정 없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도 죄요, 속는 것도 죄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이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모르는 것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속아서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무지하냐고 꾸짖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가 율법으로 되돌아가 할례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파멸시키는 무지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아느냐?’고 힐문합니다. 할례를 받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진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요, 복음을 버리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버리고 도로 멍에를 메고 율법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려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원래 할례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후손을 약속하신 다음 아브람이 ‘제가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표(證票)를 달라고 하자 아브람으로 하여금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그것들을 쪼개도록 하셨습니다. 쪼개는 것은 히브리어로 "브릿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브릿트 한 고기를 지키느라 솔개를 쫓았습니다. 그리고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쪼개는 것, 곧 ‘브릿트’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브릿트'는 똑같은 발음으로 '쪼개다, 가르다, 자르다.'라는 뜻과 '약속하다'라는 뜻을 가지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가 쪼갠다, 아니, 약속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는 지켜야 할 게 없고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기를 쪼개는 "브릿트"를 하고 하나님은 약속하는 "브릿트"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밤하늘 별과 같은 무수히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나남과 "브릿트"를 해 놓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 하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브릿트 한 소와 염소와 새를 솔개는 쫓았지만 까마귀가 오서 다 쪼아먹어 버린 모양입니다. 그 때가 아브라함이 86세 되던 해였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과 ‘열국의 어미’ 사라로 고치시고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허어, 이거 나만 '브릿트'하고 나만 약속한 꼴이 됐구나, 너 '브릿트' 다시 해야겠다.. 이번엔 어디다 브릿트 할까? 그래, 아들의 약속이니까 거기에다 브릿트 하자."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후손을 기다리는 하나님과 약속한 백성이라는 표시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 그저 후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16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의미하신 후손은 '단수'의 아들, 곧 온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손, 곧 그리스도를 기다리겠다는 '브릿트' 약속인 할례는 율법과 함께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의 상징이 되고 말았고,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버리고 떠나 도로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올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인 할례가 그리스도를 떠나 율법으로 되돌아가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으로 악용되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일찍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하신 주님의 경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베어버리기(브릿트)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 거짓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한 저주입니다.

"브릿트".......,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두 브릿트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빼앗아가려는 모든 잘못된 가르침과 미혹과 이단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브릿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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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목 법궤

 

 

성경에 나오는 조각목이 무슨 나무인지 아십니까? 저는 처음에 무슨 예술가들이 조각(彫刻)하는 데 쓰는 나무인줄 알았습니다. 한자로 풀어보면 조각목(棗角木)은: 대추나무 조, 뿔 각, 나무 목: 그러니까 대추나무처럼 가시가 돋아나고 뿔처럼 단단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은 아카시아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중동지방 광야에 자생하는 나무입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리고 더위와 추위, 바람에 뒤틀려 있습니다. 단단하게 굳어 깎고 다듬기도 어렵습니다. 세상의 먼지바람 속에 시달리고 강퍅해진 악한 인간들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려진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뒤틀린 가시나무를 깎아 법궤, 분향단, 번제단, 널판 등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그 죄인들로 성도를 만드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심 같다 싶습니다.

법궤는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 길이가 2규빗 반이면 불과 110 센티미터 남짓, 어린아이가 들어가 누우면 딱 맞을 작은 사이즈입니다. 조각목을 깎고 다듬어 만들되 정금으로 싸되 안팎으로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달되 이편에 두 고리, 저편에 두 고리를 달고,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빼내지 말고 꿰어서 두고 증거판을 그 속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위에 속죄소를 두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소는 조각목 없이 정금으로만 만들었습니다. 그 크기는 길이 2규빗 반, 너비 1규빗 반으로 법궤의 크기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정금으로 만든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연하여 마주 보며 덮도록 하였습니다.

법궤는 지성소에 모셔졌습니다. 누구든지 함부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성소 분향단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임 당했습니다. 지성소에는 1년 1차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릴 때만 들어갔습니다. 먼저 제사장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정결케 한 다음 온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의 옷자락에 달린 방울소리로 지성소에 들어간 제사장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와 성막을 옮겨가며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들어서자 범람하던 물이 멈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실로에 두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법궤를 모시고 나갔다가 블레셋에 죽임 당하고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의 전에 법궤를 두었더니 다곤 신상이 동강나고 목이 잘라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금독종 다섯 개를 만들어 제를 올리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 법궤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들여다보다가 (오만) 70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후일에 다윗이 법궤를 모셔오려고 할 때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를 붙잡았다가 웃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랫동안 법궤는 두려우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져 왔습니다. 과연 법궤는 단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갖습니다. 우선 싸이즈가 너무 작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명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 물속 무엇이든 어떤 형상도 만들고 섬기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법궤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거나 모시고 섬기는 것을 명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또 속죄소를 그 위에 두게 하신 것입니다. 법궤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위를 속죄소로 덮으라는 것은 정말 너무 이상한 일입니다. 또 그룹천사입니다. 보호라니요. 누가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호한단 말입니까? 법궤가 하나님이라면 그룹들, 네 생물과 천사들은 법궤 아래에 들어가서 법궤를 떠받드는 모양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각목 법궤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법궤와 싸이즈가 똑같은 속죄소는 조각목이 아닌 정금입니다. 속죄소는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피 흘려 대속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참혹한 피흘림의 속죄를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고 눈물로 옹위하였을 것입니다. 그 속죄소 아래 조각목 법궤는 그 약속, 그 증거의 말씀, 그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품어안고 속죄소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될,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실 성도, 곧 우리일 것입니다. 애굽에서 죽어 누웠던, 소망없이 썩어가던 관이 하나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하여 법궤로 바뀌는 것입니다. 악하고 쓸모없는 조각목이 황금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법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택정하사 가시떨기나무 같은 죄인이던 우리를 다듬어 법궤 되게 하시고, 모든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함과 부족함과 흠을 정금으로 싸 온전하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천군천사로 지켜 인도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애굽의 관 같던 당신, 가시떨기 조각목 같던 당신, 이제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와 법궤가 되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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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떨기나무 불꽃

 

더러 교회들이 수련회 가서 관 속에 들어가는 이벤트를 한다고 하더군요.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면 관 두껑이 닫히고 못을 꽝꽝 박는 망치질 소리가 울리고... 그렇게 한 동안 깜깜한 관 속에 누워 죽음과 절망, 인생의 허무함,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실감나게(?) 느낀다고 그러더군요. 그렇지만 혹 폐쇄공포증이나 심장질환이 있으신 분은 조심해야겠다 싶네요. 창세기는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 다시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관 속에 집어넣으시고 대못을 꽝꽝 박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려 430년 동안 놔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리신 것도 아닌데 그렇게 430년 동안 고통과 슬픔 속에 말입니다.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로공주의 아들, 왕자의 신분으로 40년, 그러나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게르솜을 낳고 40년 동안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구나.” 탄식하며 양을 치는 아무 희망도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산 호렙의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신기한 광경을 보려고 다가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좋은 나무 놔두고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신 것일까요? 가시떨기나무는 소망도 없고 소용도 없이 메마른 광야에 버려진 볼품도 쓸모도 없고 불쏘시개로나 쓰이는 저주 받은 나무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그런 가시떨기나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가시떨기나무 같은 모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며 살인자로 쫓기는 몸, 속절없이 늙어가는 몸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양이나 쳐야하는 신세..... 그 마음은 40년 세월 속에 절망과 울분, 체념과 원망으로 돋아나고 자라난 무수한 가시들로 가득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다 불모지에 버려진 가시나무들입니다. 날마다 아픔과 슬픔의 가시, 미움과 원망의 가시, 체념과 절망의 가시를 돋우고 메마른 광야에서 발악하듯 살아가는 가시떨기나무들.... 조그만 이파리 하나마다 그 이파리 하나도 새에게 먹히우지 않겠다고 가시를 세우고, 그 가시로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삶. 그러면서도 애절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인생, 평생 노래 한 번 부르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 가장 길고 뾰족한 가시에 자신의 가슴을 찔리우고 일생에서 가장 슬프게, 가장 아름답게 운다는 가시나무새 같은, 그러나 아무리 슬피 울고 아무리 목 놓아 운다 해도 아무도 들어주는 이,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들, 슬픈 존재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불로 오셨습니다. 심판의 불로 오셨다면 가시떨기나무들은 불살라져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불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불이 붙은 가시떨기나무들로 광야를, 온 세상을 불타게 하려고 오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앞에 모세는 순종함으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가시떨기나무 같은 우리들, 관 속에 드러누워 430년 동안 썩은 것 같던 우리를 영광스러운 법궤,  세상을 태우는 복음의 불덩어리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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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을 빼앗기면

 

인간의 삶과 짐승의 삶을 구별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言語)입니다.
동물의 의사소통을 위한 소리도 일종의 말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 말입니다.
성경은 “말이 곧 영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삶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사람도 짐승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라, 그러면 네가 형통하리라. 네가 밟는 땅을 다 주리라.” 하십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계명을 지킨다는 것,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내 안에 지킨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계명을 지키려 노력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칼과 총 앞에서 지켜 목숨을 버렸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이 왜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뱀이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계명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무슨 짓이든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계명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빼앗으려는 자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는 단단하고 견고한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공동체에서 떨어져 홀로 있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주님의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밖에 버려져 마를 수밖에 없고 사단의 공격목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견고하지 못 했던 하와는 신앙공동체인 아담으로부터도 떨어져 있었으므로 쉽게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리라.”는 꼬드김에 넘어갔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선악과는 얼마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정말 멋집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면 더욱 신이 날 것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멋지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이요, 나무가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달고 멋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달콤한 선악과, 하나님 없는 멋진 삶을 맛 본 하와의 꼬드김에 믿음 약한 하와를 권면하고 지켜주어야 할 아담마저 넘어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두 사람은 이제 사람일까요, 아니면 머리 좋은 짐승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인간은 짐승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사단의 조종을 받으며 사니 짐승보다도 못 한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여기고 뱀의 말을 좇은 아담과 하와는 곧 타락이라는 절망에 부닥치게 됩니다.
눈이 밝아져 스스로를 돌아보니, 하나님의 사랑의 굴레인 말씀,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그 간단한 계명을 버리고 나니, 얼마나 부끄럽고 두려운 존재로 변했습니까?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두르고 숲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의 문제가 무화과 잎 같은 걸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결과가 이처럼 비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주신 말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주님 다시 주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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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을 이룰지어다.


교통사고로 하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며 매일같이 휠체어에 태워서 밀고 다니는 남편이 있습니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변함없이 사랑하며 수발드는 아내가 있습니다. 동부에 살고 있는 제가 아는 한 부부는 불치의 근육무력증(루게릭 병)에 걸려 뼈만 남은 아들을 돌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아내를 위하여, 남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신 아들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인간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인 줄 압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잘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은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자신의 죄도, 그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소경은 진흙을 바른 눈을 실로암 못에 씻음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예비하신 도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지음받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쓰임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교사로, 순교자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주권과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고 부르심을 거부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며 그래서 당연히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자신이 행복하고 만족하지 못 하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고, 상대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 하면 헤어지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대로 가정을 깨어버리고 자기와 한 몸인 배우자를 내어버리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 갈라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평생을 헤매다가 후회하면서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요 하나님을 떠난 악한 인간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미리 선을 보이지도 않으셨고 사귀거나 고르거나 본인들이 결정하게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서로에게 서로를 주셨고 이 둘의 행복의 바탕이 되어 주셨고 관계의 근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부부와 가정의 행복의 바탕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동산과, 부부관계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단 한가지의 사건으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사건 하나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행복, 하나님이 없는 평안은 없습니다. 죄인 된 우리 인간의 결혼이나 삶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결코 회복되지 못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한 몸이 되게 하시면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라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상대를 위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상대에게 자신을 주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에 행복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구원의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 험한 땅에 오셨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우리에게 자신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몸을 이루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를 삼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려고 오셨다니 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비밀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한 몸이 되시려고, 우리를 신부로 삼으시려고 피를 흘려 우리를 깨끗케 하시 말씀으로 정결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면 마귀가 아무리 참소한다 해도 우리를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혼인을 거룩하게 여기십시오.
그리스도의 신부로 정결하십시오.
구원과 생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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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어떤 부자가 실험을 했단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돈 10달러씩을 나누어 주었단다.
“아니, 이 돈을 왜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으세요.”
시간이 흐르자 처음엔 돈을 받으며 어색해하고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나중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나누어주기를 중단하였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항의를 하였다.
“왜 돈 안 주십니까?”

생각할수록 빛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선물인가?
몇 푼 돈 따위와 비기겠는가?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에게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만일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감사할 줄을 모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어 가신다면 어찌 될까?

이 세상의 아름다운 빛을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은 불행이라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이 불행이 아니라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축복이다.

소경이며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하나님께서 사흘만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인자한 설리번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습, 들판과 숲, 나무와 풀과 꽃의 모습, 타오르는 저녁놀을 보아두고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 된 일인지.

유명한 맹인가수 챨스 레이는 말년에 개안수술을 받더라도 빛에 노출된 시신경이 몇 분 안에 망가져서 도로 맹인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도로 소경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을 볼 수만 있다면, 몇 분이 아니라 몇 초만이라도 내 딸의 모습을 보고 내 기억 속에, 내 마음 속에 담을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겠습니다.”  

2004년 봄 강원도 험준한 산골짜기 6.25 전적지에서 52년 만에 발굴된 국군장병의 유골은 은박지에 꼭꼭 싼, 아마도 약혼녀이거나 아내였을 한 여인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있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격전지에서 틈틈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얼마나 그 여인을 그리워했을까?

“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모습을 내게 담아 둘 수 있다면.....”
인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빛이 있고 눈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존재로 나타날 수 없고 인생도 시간도 우주만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빛이 있음으로 존재는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빛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가 있음으로 비로소 만유는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주는 우주를 보는 자에게 지음 받은 것이 분명하다.
빛은 우주를 보기 위한 것이요 우주만유를 지으신 자와 우주만유를 인식할 수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과학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은 하나님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주만유가 그 인식해주는 자가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하나님을 인식해 주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광활한 우주, 캄캄한 어둠 속에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하나님 홀로 계신다면 하나님이신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지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존재, 빛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유를 함께 바라보면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또한 지으셨을 것이다.
거울처럼, 사진처럼 하나님을 인식 속에, 마음속에 담는 존재,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은 그래서 만드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모습을 담은 존재가 얼마 살지 못 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금방 빛바래거나 삭아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을 알아주고 교제 나누는 벗이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직접 자신의 영원한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이 영원히 살도록 '생령'으로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였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대신 하나님같이 된 자신을 담았다.
자신의 심령 사진틀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야 할 마음에 자신의 욕심과 죄악을 담음으로써 더럽혀지고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은 자신의 욕심과 물질, 명예와 쾌락을 담고 멸망길로 향하였고 결국 그런 것들을 조종하는 마귀의 모습을 담기까지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이다.
빛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모습이 지워져버린 심령에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보이는 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에 담으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그 모습, 그 생명을 담은 자는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일이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하였고 그 빛 안에 생명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생명을 얻지 못 하였다.
사람들은 그 빛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그 빛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

마지막 날 심판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빛, 그 모습이 담겨진, 그리스도의 빛에 다시 곱게 감광된 마음들을 거두시는 것일 것이다.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 곧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하나님의 모습으로 다시금 심령을 회복한 자들은 거두시고 여전히 더러운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모습을 담은 타락한 영혼들은 소각로, 곧 영원히 타는 유황 불못에 던져 넣으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이 그 소각장에 던져졌는데 타 없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지금 그대의 눈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오래전에 올렸던 글을 리바이벌 했습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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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창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6절을 보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히브리어 원어는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우리’라고 자신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에 가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영어로 “His own image”, 단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복수로 말씀하셨다가 단수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토씨하나 안 빼고,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다 기록해야 했던 모세나, 또 성경을 필사했던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라 하셨다가 ‘나’라고 하시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라고 하신 것은 여기 뿐 아닙니다. 창세기 3장 22절, 11장 7절, 이사야서 6장 8절에서도 ‘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수이면서도 복수이시고 복수이시면서도 단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거듭거듭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고 하십니다. 영어성경은 “our imag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양대로”, 영어성경은 ‘our like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도 눈, 코, 입, 귀가 있고, 수염이 나고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다 했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했는데, 우리와 똑같이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뜻인가? 학자들 간에는 논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품을 말한다, 그 성품을 말한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위엄을 말한다, 영원불멸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한다, 등등........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세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전혀 낯설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 자신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계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실 때마다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여기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같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만일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달랐다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실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26절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는 히브리어 원어로는 ‘우리가 아담을 만들고’입니다. 단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복수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말 성경은 단수 ‘그’로 되어 있음)
왜 금방 단수로 말씀하셨다가 금방 복수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지금은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만을 만드시지만 그 아담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갈비뼈로 아담 속에 들어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갈비뼈를 꺼내어 하와를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제야 비로소 아, 여자를 안 만들었네, 생각이 나서 하와가 필요하겠다 싶으셔서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그들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은 이미 그 속에 하와를 하나로, 한 몸으로 만드신 것이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하와를 끄집어내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셔서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까지도 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허리 속에는 이미 후손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통하여 수가 늘어나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는 그를 지으시지만 그는 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이면서 여럿, 즉 한 분이면서 세 분,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신 형상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유일신 여호와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알라신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하나 뿐인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혼자 군림하는 유일신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으신 하나님, 성령님 없으신 독불장군 하나님의 형상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 곧 세 분이면서 한 분, 한 분이면서 세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오해와 잘못된 교리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 하여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삼위일체 아닌 신(神)은 아무 신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홀로 있는 독불장군 같은 인간도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독처하는 것이 선하지 못 합니다.
기독교는 수양이나 도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너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혼자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누르고 여자가 남자를 밟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저 잘 났다고 혼자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짓지만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 같이 그가 그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제자삼아 복음으로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가 되어 자기 혼자 중심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찢어지고 갈라지고 부서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된 것입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갈라버리는 것입니다.
분열시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고 저 여자입니다. 아닙니다, 뱀입니다. 뱀이 그랬습니다.”
혼자가 되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죄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전쟁과 다툼과 폭력과 추악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고 믿으십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여전히 이전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순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데는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마귀의 형상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힘써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산상수훈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면 뭣 하러 이렇게 가르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얼마나 이 말씀을 하시는지 보십시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가서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때리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
-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을 닮는 것은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골고루 똑같이 해를 비취시고 비를 내리시는 속없는 하나님,
할 줄 아는 게 사랑밖에 없어서 사랑밖에는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찾아오셔서 원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사 생명을 주신 예수님
그 하나님을 닮기 위해, 그 예수님을 닮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축복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누리도록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이러한 축복을 회복할 게 아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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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

 

빛이 무엇일까요?
빛은 파동일까요, 입자일까요?
빛이 파동이라면 수많은 빛들이 충돌과 간섭을 일으켜 엉망이 될 것이고
빛이 입자라면 입자의 수에는 제한이 있을 테니 어디에서나 보이고 아무리 멀어도 보일 턱이 없겠지요.
그래서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다 가졌다 하여 "Duality"로 정의를 합니다.
그러나 "Duality"라는 정의로 빛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과학자들도 빛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못 합니다.

모든 것을 밝히고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직진하는 빛.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라 질량이 무한대로 치솟아 물질세계의 어떠한 것도 넘을 수 없는 벽,
가시광선, 400 옹스트롬으로부터 750 옹스트롬 사이의 파장대에서 무지개 일곱색깔의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빛은 신비입니다.
피조세계의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성역입니다.

아무튼 그 빛이 왜 있을까요?
빛이 있어야 우주의 천체들이 운행하고 빛이 없으면 별들이 "아, 어두워. 보여야 가지." 하고 멈추나요?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 우주의 모든 천체에게는 빛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빛은 그것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광활한 우주가 있으면 뭣 하겠습니까?
그것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존재, 곧 생명체가 없다면 우주 또한 아무 존재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존재는 그 존재를 의식하는 주체가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빛이 있다는 사실은 우주만유가 의식을 가진 생명체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광활한 우주공간에 하나님 혼자 계시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이라고 인정해주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위대한 창조사역을 하시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홀로 지으시고 하나님 홀로 보신다면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습니까?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는 이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찬송케 하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 그 분의 하신 위대한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그래서 하나님은 빛부터 만드셨을 것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드러나고 나타나며, 창조주이든 피조물이든 서로의 존재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우주만유를 우리와 함께 바라보며 나누기 위한 것일 겁니다.
“우와,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걸 다 만드셨어요? 굉장하다, 멋지다. 우리 하나님 최고다!” 우리의 이런 감탄에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빛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창조사역일 것입니다.

빛을 지으신 하나님은 빛을 기뻐하시고, 그리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니 하나님은 나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계속 나누어 가시며 나누신 다음 창조사역을 행하십니다.
왜 굳이 나누시는 것일까요?

좋은 것을 나쁜 것과 함께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더러운 것과 함께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빛 가운데서만 창조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베소서 1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창조와 구원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어둠 가운데서는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허하고 혼돈한 상태에서는, 혼합되고 뒤섞인 상태에서는 창조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택하신 자로 불러내어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어둠 가운데서 불러내셔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빛 가운데 나오셨습니까?
빛 가운데 행하고 계십니까?
빛 되신 예수 안에 속해 계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알지 못 하던 때, 그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절망 가운데 있었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아름답게 시작될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당신께 임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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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브레싯 바라 엘로힘 하 샤마임 브엣 하 에레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은 성경의 서두에 선포되는 첫 말씀이며, 여호와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히브리어 “브레싯”은 “처음에, 시작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In the beginning,’ 헬라어로는 “엔 아르케”입니다.
“바라”는 “창조하다. 무에서 유를 짓다”라는 뜻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임’이 끝에 붙어서 복수(複數, plural)입니다.
하나님이 여럿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럿이신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여럿? 여럿이신 한 분 하나님? 이게 말이 돼?” 이런 의문이 들었을 텐데 유일신사상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기록하고 필사할 때 일점일획도 빼거나 더 하지 않고 복수명사인 “엘로힘”을 그대로 기록하고 또 필사한 것입니다.

“엘로힘”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대인들은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창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두 말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단순한 유일신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샤마임”도 끝에 ‘임’이 붙은 복수명사 “하늘들”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the heavens, 복수로 써져 있습니다. 궁창, 하늘, 삼층천을 의미할 수도 있고, 끝없는 우주공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에레츠”는 땅입니다. 땅은 단수(單數, singular)입니다. 지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럿이신 한 분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 이 말씀이 성경의 기초입니다.
어떤 거대한 빌딩도 기초 없이 세워질 수 없듯, 성경도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믿음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도 공중누각(空中樓閣; 공중에 지은 집)이 되고 맙니다.
아니,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기꾼, 도적으로 여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건물의 기초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뒤덮이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보라가 쳐도 끄떡없는 건축물이 그 기초를 증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믿지 않거나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 분의 창조주이심은 그 지으신 피조세계,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과 엄위가 증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창세기 기록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시비하고 부정하려 합니다.
말씀으로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다니 터무니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기록을 근거로 우주와 지구의 탄생이 6천 년 전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6천년전이라니 터무니없다고 말합니다.
굳세게 6천년전 6일창조를 주장하는 분들은 성경무오설을 내세우고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로 틀렸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첫머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사역을 보여주시려고 창세기를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1절 다음에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라고 땅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1절과 2절 사이에는 기록되지 않은 긴 시간과 엄청난 사건이 생략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간격이론(間隔理論, Gap Theory)"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1절에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과 2절 사이에 긴 세월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 중에 루시퍼를 위시한 천사들의 3분의 1이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고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에서 패배한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나 마귀가 되었고 그 하늘전쟁의 결과로 땅이 망가져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에 덮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격이론” 역시 하나의 설(說)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밝히지 아니한 사실을 억지로 추리해내거나 상상해서 믿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만유를 어떻게 만드셨는가를 알아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비밀에 두신 것을 억지로 풀다가 실족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알게 되겠지요.
그보다 우리는 성경이 창조실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려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예수님의 말씀)

요한복음 1장을 읽어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창세기와 매우 흡사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우주만유를 함께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이 아들 하나님이 빛으로, 그 안에 생명을 담아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 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살리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지 못 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 같아서 성령의 깨우치심 없이는 눈앞에 오신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그래서 빛이 있기 전에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두움에 갇힌 죄인의 마음 위를 운행하실 성령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성령님이 죄인의 마음을 여시는 것으로 시작되며 창세기에서 창조사역은 성령님이 수면 위를 운행하심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는 첫머리부터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의 마음 위를 성령님이 운행하실 때 마음을 여십시오.
당신에게도 생명의 빛, 예수님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그 풍성하신 역사, 창세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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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장)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지난 번 말씀이 "이게 무슨 소리냐?"였습니다.
앞서 52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이게 무슨 소리냐?",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며 수군거렸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60절에서는 제자들까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며 또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수군거림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망가뜨리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이나 고린도후서 12장 20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수군수군하는 것을 심각한 죄악과 교회의 분열증세로 말씀합니다. 그 수군수군하는 것이 지금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리고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물으십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 Son of Man, 다니엘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보았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 바로 나, 그 인자가 승천하는 것을 보면 어찌하려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쯤 힌트를 주면 아무리 둔한 자라도 왠만하면 눈치를 채고 정답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나 먹통같은 무리들이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이상 설명을 못 하십니다. 인자, 곧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을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실 것을, 그렇게 살과 피를 내어주실 것을 더는 말씀하지 못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 말씀을 우리말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영혼이 중요하지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원론적,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서, 아니 앞서 5장에서부터, 아니 7장, 8장.... 계속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유대인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고난과 죽임의 십자가 대속에 관하여는 비밀에 두신 채 자신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참 생명의 떡’으로 계속하여 주장하고 계시고 유대인들은 도대체 영 알아먹지 못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도중에 영혼은 중요하고 육신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고 말씀하셨다면 이는 중심 주제를 벗어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영어성경이나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는 것도 유용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가 NIV 영어성경에는 “The Spirit gives life.”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문자 S Spirit입니다. 즉 ‘영’이라는 주어입니다. 곧 ‘영이 생명을 주신다.’입니다.
헬라어를 보면 “토 프뉴마 에스틴 토 쏘포이운.” “살게 하는 것, 살리는 자는 영이시다.”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지금 주님은 “영이 살린다. 육은 무익하다, 못 살린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살리시지 인간은 못 살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영,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너희를 살게 하실 분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신, 곧 인간이라면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종교들은 생명을 살리거나 주지 못 합니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만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리신단 말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심 같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생명을 주신 것 같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 같이
그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토록 설명을 하셔도 안 믿는 자는 안 믿습니다.
슬프게도 많은 제자들이 떠나갑니다.

주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
그런데 과연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이렇게 대답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도대체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보내신 자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께 붙어있음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 나와 앉아 이 말씀 듣고 계십니까?
어떻게 여러분은 주님 앞으로 나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셨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주님의 말씀이 생명인 줄 알고 나오셨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 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과 손길에 이끌려 나오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나와 계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수님께 보내신 자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도 "어렵도다." 하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4)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가 그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부터 택하시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저들이 나의 택한 나의 자녀들이다. 너는 가서 너의 살과 피를 먹여 그들을 살리라.”  
그래서 주님은 오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그 귀하신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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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먹기 싫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6:48-4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시면서 시험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무슨 시험이었습니까?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열 정탐군의 말을 듣고 ‘우리는 메뚜기다, 다 죽는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울면서 돌아섰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군사들이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 만나를 먹었으면 그 만나가 믿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만나를 그렇게 먹고도 그 만나가 전혀 믿음이 되지 못 한 것입니다.

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시며 만나와 비교하셨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도 그것이 믿음이 되지 못 하고 생명이 되지 못 한다면 만나를 먹고 광야에 엎드러진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 없을 것이란 말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딱 한 번 믿으면 주님의 생명을 가진 것이 되고, 그러면 천국시민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럴까요?
그럴 것 같으면 만나도 일회용으로, 딱 한 번만 먹으면 평생 다시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만나를 내려주셨으면 딱 한 번 내려주시기만 해도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백성들도 편하고 하나님도 편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만나를 매일같이 가나안 들어갈 때까지 지겹도록 40년 동안이나 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딱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실 능력이 없으셔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 납니다. 예수 믿어 새 생명 얻습니다.
그런데 딱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겁니까?
만나를 딱 한 번 먹으면 가나안 들어가는 믿음이 되고
예수 딱 한 번 믿으면 천국 가기까지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 생명의 떡은 매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내 안에서 믿음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0년 세월 만나를 매일매일 먹은 것 처럼 매일매일 말씀을 먹고 날마다 날마다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날마다 말씀을 먹어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매일 먹기 싫어합니다.
40년 동안 지겹게 먹기는 더더욱 싫어합니다.
어떻게든 일회용으로 딱 한 번 먹고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혹시 광야에 엎드러지는 건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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