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다음은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사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임사체험(臨死體驗·Near Death Experience)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과학뉴스 사이트인 라이브 사이언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Out-Of-Body Experience Research Center)’ 연구 결과를 인용, ‘임사체험은 자각몽(自覺夢·Lucid Dreaming)의 일종’이라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각몽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으로,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이하생략”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는가,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얼마 전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의 기사가 났지만 이어령 박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깊이 고뇌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늙고 병들어 치매증세를 보이며 쇠약해져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곧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는 영적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 땅, 곧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은 죄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가운데 넣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진리요 사실인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길도 생명도 아버지의 집도 모두 허탕이요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여정도 따지고 보면 진리의 문제요 사실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이 사실과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고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리 위에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싸움은 진리 싸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세상적 판단의 손가락질과 과학과 지식의 안개 속에서 증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죽음의 너머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씨름을 일평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 하였는지요? 평생 예수 믿다가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죽어봐야 알지”라는 불신앙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택한 자만이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1:13). 빌라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인도 위험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으면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진리 편에 서지는 못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참으로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진리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기록을 보면서 이미 예정된 바에 따라 빌라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진리에 속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두려움과 아울러 만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내가 믿을 수 있다는 것, 영원한 생명, 구원을 받았다는 것,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내가 진리에 속하였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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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 24-25]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돈과 재물이 풍족하고 명예와 즐거움이 있으면 만족스러운 인생인가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힘써 살고 나이 들면 은퇴해서 넉넉한 재산과 연금을 가지고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조개껍질 모으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 같이 생각되는 세상입니다. 영적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고 삶만 풍요하고 평안하면 만족스러운 인생이라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이 좀 잘 살게 되자 효도관광 붐이 일어났습니다. 시골 아낙네들이 관광버스 안에서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익숙해졌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인생이 끝나기 전에 하루라도 더 구경 가고 놀아야 한다고 그분들은 관광버스 안이 떠나가도록 소리치고 흐느끼며 노래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사실 하나도 즐겁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길에서 진리를 알지 못 하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는 채 구경 다니며 떠들고 논다고 해서 만족해지고 인생이 더 기뻐질 리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인생,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 하고 방황하는 인생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없는 사이에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노래하며 춤추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40일 동안 하나님도 아니 보이고 모세도 아니 보이자 불안해져서 아니 보이시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모세 대신 아론을 의지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마시고 춤추며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 속에는 불안과 허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마시고 더욱 소리 높여 큰 소리로 노래하며 춤추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허무와 슬픔을 이기지 못 하여 먹고 마시고 뛰어놀며 돈과 명예의 우상을 의지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경험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마음속 불안감과 죄책감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도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뛰놀며 즐겁게 노래하는 것은 가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마시고 더욱 소리질러 노래하고 펄쩍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정작 기쁘고 즐거운 것은 원수들이었을 것입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앞으로 돌아와 소리치며 웃고 떠들며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 손뼉을 쳤을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길로 빠져드는 것이 통쾌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40일 후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동족이 우상 앞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고 ‘방자하여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것은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조롱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까지도 조롱하였는지 모릅니다. “헤헤, 하나님, 내가 따먹으라는 선악과 열매는 잘도 먹던데,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어도 안 먹네요.” 그래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뜨렸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빻아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마시게 했고, 동족에게 칼을 겨누고 레위지파로 하여금 3,000 명이나 도륙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방자하여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은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처럼 풍족한 문명 속에서 부요함을 누리며 하나님을 떠나 사는 모든 사람들이 원수들의 조롱거리일 것입니다. 복음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떠나 물질의 풍요와 삶의 즐거움을 성공한 인생이라 여기며 사는 모든 인생들이 원수들의 조롱거리일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그럴수록 더욱 강렬한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오락과 즐거움을 넘어 더욱 강렬한 쾌락을 추구하고 인생의 허무와 불안을 이기기 위하여 마약까지 하는 인생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오늘날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길에서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것 같고 시험이 닥칠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시험은 결코 물질의 시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며 들의 생축도 내 것이라,’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시험은 믿음의 시험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시험은 오직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있어 끝내 이겨내어야 하는 믿음의 시험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떠난다면 어떠한 부귀영화와 노래와 춤도 우리를 허망함과 두려움에서 건져내지 못 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우리는 결코 원수의 조롱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평안하며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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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펌" 참고하세요)
"여호와의 증인, 인간사회를 ‘사탄 세상’ 규정… 국가 의무 거부"

헌법재판소가 지난 28일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종교적 병역기피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결정하면서 여호와의증인 교리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병역거부자의 99.2%가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가르침이 병역을 거부토록 했을까. 이들은 헌재 결정 이후 “군 산하 대체복무는 안 된다”며 집총거부와 병역거부에 이어 대체복무 기관까지 입맛대로 요구하는 등 국가와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여호와의증인은 그들의 책자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에서 인간 사회를 ‘사탄의 세상’으로 해석한다. 사탄의 세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로 ‘정부’와 ‘상업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사탄의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 악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 1일 “병역을 거부하고 반국가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이 교리적으로 정부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들은 사탄의 권세를 상징하는 국가권력을 따르지도, 국가 의무에 복종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탁 교수는 “그들에게 참된 정부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뿐”이라며 “이 왕국은 마지막 때에 세상 정부를 대체할 것이며 이는 모든 지상 국가들의 전복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국가(國歌)나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수혈 거부 등도 여호와의증인이 갖고 있는 반국가적·반사회적 면모를 드러내는 대표적 특징들이다. 이들의 반국가적 태도는 헌재의 대체복무제 도입 결정 후에도 확인됐다. 여호와의증인 관계자는 29일 한 언론을 통해 “대체복무 기관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라며 “군 산하에 있어서는 안 되고 순수 민간 대체복무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태도는 여호와의증인이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여호와의증인은 무엇을 믿습니까’와 정면 배치된다. 이들은 이 글에서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의 권위를 존중한다”며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납부하며 공공복지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협조한다”고 명시했다.

여호와의증인은 병역거부 등 국가 체제와의 갈등으로 세계 곳곳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여호와의증인을 ‘급진적 활동과 연계된 단체’로 규정해 법인 해산과 활동 금지 조치가, 스위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여호와의증인) 서적 전시대 설치 및 포교를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 C T 러셀에 의해 시작된 여호와의증인은 1872년 창립된 ‘국제성서연구자협회’가 전신이다. 삼위일체를 거짓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예수는 피조물에 불과하며 성령은 인격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가르친다. 1914년 예수가 영으로 재림했다고 주장한다.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간의 영혼은 사망하면 끝난다고 가르친다.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73841

*****여호와의 증인의 언어 오해, 그들의 잘못된 성경해석*****

<“아들”의 뜻>
성경에 기록된 “아들”의 뜻은 문자 그대로 “아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성경을 떠나서라도 아들은 아들이다.
아버지와 똑같은 아들 말이다.
사람의 아들이면 사람, 소의 아들이면 소, 돼지의 아들이면 당연히 돼지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아들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원래 뜻이다.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사상도 마찬가지다.
“아들”이란 “아버지 안에서 나온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어(語)에는 할아버지니 조상이니, 손자, 자손이란 단어가 없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벤”이고 ‘아버지’는 “아브”이다.
히브리사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이 “하나”라는 의미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다 “아브라함의 벤(아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인 자신들이 “하나”라고 믿는다.
자신들을 아브라함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옛날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들어 있었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 그들도 함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민사상이다.

<아들임을 주장하시는 예수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주장하신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사상에 의하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히브리사상에 따라 자신들을 아브라함과 하나라고 믿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이것이 무슨 말씀이겠는가?
바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뜻이요, 자신이 하나님과 같다는 뜻이요 자신이 곧 하나님, 아들 하나님이라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고 한 것이다.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을 읽어보라.
얼마나 여러 번 예수님은 자신이 아들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계시는가?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신이 심판주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또 보여 달라 하느냐?”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친다.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고 하신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돌로 쳐 죽일 일이다.
“이 사람아, 큰일 날 소리 말게. 나더러 하나님이라니!” 했어야 옳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신다.
심판을 할 능력(하나님과 동일한 전지전능, 초월성)이 없다면 맡긴다고 맡겨지겠는가?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이 없으시다면 주신다고 주어지겠는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삼위일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신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인가?
하나님의 이름이면 됐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족하단 말인가?
왜 건방지게(?) 아들의 이름을 끼워 넣느냐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라.
영어성경을 봐도 좋다. 헬라어 원어성경이면 더 좋다.
“이름”이 단수로 써져 있는가, 복수로 써져 있는가?
왜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성령의 이름으로 따로따로 말하지 않고
또는 “이름들”이라고 복수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단수인가?

그렇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합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주체로 지칭하고 계신 것이다.
세 분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뜻인 것이다.
바로 삼위일체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의 증거, 사도들의 고백, 예수님은 하나님>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다름 아닌 아들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본체, 곧 본질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사람의 모습, 종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고 순종하고 복종하시는 성구들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보다 못 하다, 낮은 존재다,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보라는 아이디를 쓰는 여호와의 증인 분은 좌측에 여호와, 우측에 예수라고 써넣고 여러 가지를 늘어놓고 비교를 하면서 예수님이 열등하신 분이라고 열심히 주장한다.)

로마서 9장 5절을 보라.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멘”으로 강조하면서 밝히고 있다.

디모데전서 3장 15-16절을 보라.
“......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디도서 2장 13절을 보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직접 자신을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예수님>
생각해보라.
누가 감히 하나님 아닌 자에게 영광을 돌리는가?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일을 허락하시겠는가?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지 자기가 가로채서 받을 수 있겠는가?
“아무에게도 영광과 찬송을 주지(빼앗기지) 아니 하시겠다” 하신 하나님 아니신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의 앞에 엄위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고.... 그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였음에도 그 엄위하신 모습과 영광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된다.

그런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처음이요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의 다른 표현, 곧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직접 자신이 죽었다가 산 자, 곧 예수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일곱 뿔과 일곱 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신 어린양으로 나오시기도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밝히 보여주는 말씀이신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 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이단이다.
도무지 삼위일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인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문자 그대로 유일신, 한 분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인가? 그 정체가 무엇인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해답을 “미가엘 천사”에서 찾았다.
성경 이곳저곳을 끌어다 꿰어 맞추어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천사에게는 신성이 없다.
신성이란 영어로 Divinity, 곧 “하나님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신성을 확대해석하여 천사도, 마귀도 귀신도 신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한자어의 귀신 신(神)자를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신성(하나님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신 분은 에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말할 것이다.
미가엘 천사장을 하나님이 높이셔서 하나님으로 만들었다고.
그리고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었다고......
그럴까?
만일 그렇다면 미가엘 천사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설사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지위를 양위 받았다 쳐도 자신을 가리켜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어찌 만들어진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어찌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자리를 이어받겠는가?
어찌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여호와의 증인들은 정신 차려라. 당신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예수님을 천사로 만들어 모독하고 있다.
그러고도 구원이 있을 줄 아는가?

.
(2010년에 케이시애틀에 올렸던 글입니다)

10. 여호와의 증이들이여, 당신의 아들은 개, 돼지인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천사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
다시금 말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 뜻이 전혀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아들”은 만들어진 아들, 양자 삼은 아들이다.

그들은 예수는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 최초의 피조물은 미가엘 천사장이고 미가엘 천사장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사를 만들어서 아들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과 다른 종류의 아들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사람인데 아들은 사람이 아닌 아들 말이다.
혹 당신들은 개나 돼지를 데려와서 뛰어난 이름을 주고 당신의 아들로 삼았는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주셨을 것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
왜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당신과 똑같기 때문이다.
당신에게서 나온 당신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개나 돼지를 아들삼고 귀여워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당신들은 하나님이 천사 한 마리를 붙들어다 아들로 삼으셨다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다른 종류라고 말하는가?
당신에게는 당신과 똑같은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정작 자신은 자신과 같은 아들이 없어서 천사 따위를 만들어서 아들로 삼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후사로 삼으셔야 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천사를 데려다가 아들 삼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능멸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여, 어찌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여호와의 증인, 당신들은 욥기 1장을 들고 나와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욥기 1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의 하나님의 권속들을 폭넓게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이 옳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무수히 많아야 하고 “독생자, Only Begotten Son"이 수없이 많아지는 모순이 생길 것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아들은 아들이어야 한다.
히브리어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아들을 뜻한다.

천사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장 14절을 보라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 땅에서 우리가 부리는 것은 동물들이다.
가축들이다. 소, 말, 개, 돼지........
하늘에서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은 천사들이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네 생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
독수리 같고, 소 같고, 사자 같고, 사람 같은 형상을 가진 천사들. 
그들은 날개를 갖고 있다.
날개를 갖고 있는 그룹, 스랍, 네 생물......
천사들은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부리는 동물들인 것이다.

666을 뭐라고 하는가? 짐승의 수라고 한다.
왜 짐승이라고 하는가? 왜 용이요 옛뱀이라 하는가?
하늘의 짐승인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땅에 내려온 것이다.
하늘짐승이 땅에서 하나님 노릇 하려는 게 사단이요 마귀들인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여.
예수님을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잘못인지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라니!
이것은 당신의 아들을 개, 돼지라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능멸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이러고서 구원 받을 생각 말라.

.
(2010년 케이시애틀에 올렸던 글입니다)

9년이 지났군요. 지금은 떠나왔지만 시애틀엔 이단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 여호와의 증인들.....
2009년, 케이시애틀 웹사이트 기독교게시판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몰려들어 자기들이 믿는 것이 참기독교이며 정통교회들이 믿는 삼위일체는 잘못 된 교리라고 주장하는 글들로 도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단일신이며 예수님은 피조물, 즉 미가엘 천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제가 나서서 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올렸습니다.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의 뒷거래"
만일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님이 미가엘 천사라면 이랬을 거라는 코믹 단막극.
생각이 나서 그 글을 퍼다가 여기 올려봅니다.
한 번 읽어 보세요.

글제목: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의 더러운 뒷거래 (여호와의 증인교리 반박 시리즈 종결편)

이 글로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한 반박시리즈를 일단 마치고자 합니다.
만일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예수님이 미가엘 천사라면,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픽션으로 재구성하여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예언도 거짓말입니다.
이사야서 9장에서 아들을 주신 바 되었다는 둥, 임마누엘이라는 둥, 그 이름이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떠벌린 것도 몽땅 거짓말이요 쇼였습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은 “천사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시당초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줄 의사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니시니 아들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 주시겠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나누실 뜻도 없었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니니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님은 나누거나 느낄 수조차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면 아들이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실 때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도 함께 고통을 당하시겠지만(한 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십자가에 달린 놈만 혼자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미가엘 천사를 시켜서 대신 피 흘리게 하는 게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거짓사랑입니다.

......... 단막극.........
짜짜아아안~ 막이 열리고 (픽션으로 본 뒷거래 전말)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를 부르셨습니다.
"이보게, 미가엘"
"예, 하나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자네, 세상에 내려가 십자가에서 좀 죽어 주어야겠네."
"아니, 하나님, 제가 왜 그 끔찍한 십자가에 죽습니까? 저는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어떻게 죽습니까? 천사는 죽을 수가 애시당초 없지 않습니까?"
"아닐세. 자네가 사람이 되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가 죽어주는 시늉만 하면 되네."
"싫습니다. 저는 그리 못 하겠습니다.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하나님도 아시잖습니까?"
"뭐라고? 싫다? 못 하겠다? 자네 지금 내게 반항하는 건가? 혼나고 싶은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반항이라뇨. 하나님께 감히 반항했다간 무저갱 영창에 들어가려고요?"

"짜아식, 알긴 아는군.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런데 자네에게 거저 부탁하는 거 아닐세.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삼위일체가 아니니 아들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아들을 내어주어 죄인들을 구원하겠다고 큰소리치고 구약성경에다 약속은 해 놨는데, 십자가에 죽어줄 아들이 애시당초 없단 말일세. 그러니 어쩌겠나? 그러니 자네가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죽어준다면 내가 자네를 진짜로 아들로 삼고 자네에게 나의 모든 권세를 양위하겠네. 즉 자네가 하나님이 된단 말일세. 그리고 십자가에 죽는 시늉만 잘 한다면 하나도 안 아프게 해 줌세. 자, 내 제안 어떤가?"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지.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나?"
"제게 하나님을 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주신단 말이죠?"
"그렇다니까... 하나님인 나를 못 믿겠다는 건가? 정 못 믿겠으면 자네 말고 가브리엘 한테 부탁해 볼까 하는데."
"아니, 아닙니다. 믿습니다. 믿슙니다. 미쓥니다. 믿고 말고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하고 말고요.
아,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다니...
그런데 하나님, 제가 하나님이 되면 하나님은 어떡하시려고요?"
"내 걱정은 말게. 이젠 은퇴하고 편히 쉬어야지."

그렇게 미가엘 천사는 하나님과 비밀거래 뒷거래 계약을 했습니다.
이번 일만 잘 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물려받는다니, 아니 하나님이 된다니 이게 어딥니까? 루시퍼 녀석이 그토록 탐내다가 쫓겨나서 마귀가 된 그 하나님 자리를 이 미가엘이 차지하다니, 꿈만 같습니다. 가브리엘 녀석도 이젠 끽소리 못 하겠지요.

그래서 미가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본소양과 주의사항을 교육받고 마리아의 몸에 들어가 (삼위일체가 아니니 성령이 있을 턱이 없고, 성령이 없으니 성령의 역사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예수가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을 빙자하여 인간의 몸에 기어들어가 인간의 탈을 쓰고 기어 나온 셈입니다.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의 가치를 높여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할 수 있을 만큼 값을 올렸습니다.
천하인간의 죄를 다 담당시키려면 그만큼 대속물의 값이 나가야 하니까 부르는 게 값이니 값을 막 올린 거죠.
그렇지만 천사 한 마리가 온 세상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다니, 이건 순 거품, 버블 값입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시켜서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 나팔을 불게 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소리치게 하였습니다.
어린양은 무슨 어린양입니까? 천사가 둔갑한 어린양이지요.
요단강에서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는 비둘기 한 마리 보내어서 성령인 것처럼 꾸미고 (삼위일체가 아니니 성령이 있을 리 없지만요) 입체음향시설을 동원하여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이 울리는 효과음도 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깜빡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된 미가엘 천사는 "아버지는 내게 심판을 맡기셨다"느니,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니 참 양식이니 하면서 사람들에게 뻥을 마구 쳤습니다.
돌팔이 의사처럼 병자도 고치고, 제멋대로 죄도 사해주고, 죽은 자를 살리는 마술도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바다 위를 걷는 마술 쇼 버라이어티 쇼도 연출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시름 놓았습니다.
미가엘 천사가 천연덕스럽게 아들 역할을 잘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가엘 천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한 것도 다 쇼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로서가 아니라 이번 일만 잘 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삼고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승계해 주겠다는 뒷거래에 따른 미가엘 천사의 영특한 쇼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하신 골치 아픈 약속을 손도 안 대고 코푸는 식으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미가엘 천사가 다 알아서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을 담당, 아니 담당하는 것처럼 감쪽같이 연기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는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만일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미가엘이라는 한 마리 천사였다는 사실이 인간들에게 발각된다면 하나님은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가엘 천사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신 게 아니라, 애시당초 천사란 죽지 않기 때문에 죽은 체 숨죽이고 사흘 동안 있다가 무덤의 무거운 돌문을 제치고 기어 나온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던 로마병사들이 기절초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이야 천사장 미가엘에게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임무수행을 마친 미가엘 천사는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이 미가엘을 우편에 앉히고 권력위양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약속을 안 지켰다간 미가엘이 뭐라고 나발을 불고 떠들어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된 미가엘 천사는 밧모섬에 귀양 간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서 "내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구라를 쳤습니다.
미가엘 천사가 처음이요 나중이라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의 뒷거래는 완전범죄로 영원히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거의 2,000 년 가까이 숨겨져 오던 이 비밀이 19 세기에 이르러 그만 러셀과 러더포드라는 똑똑한 인간들에 의하여 눈치채지고 말았습니다. 러셀과 러더포드는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닌데 어째서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냐는 의문을 가지고 비밀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미가엘 천사라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러셀과 러더포드는 여호와의 증인 모임을 만들고 이 비밀을 폭로하고 “파수대”, “깨어라” 책자로 떠들어대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둘씩 짝을 지어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걸고 성경공부하자면서 사람들을 끌어다가 "예수는 미가엘 천사다!"라고 천기를 누설하는 나팔을 불어대고 있습니다.
 
더구나 케이시애틀 자유게시판에 친구, 참숭배, 학자, 로고, gnews, 신앙인, 바보 등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몰려 들어와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다, 예수는 미가엘 천사다!"라고 떠벌리는 바람에 여호와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의 더러운 뒷거래가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입장이 참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상, "여호와의 증인이 믿는 예수는 미가엘 천사였다"를 재구성해 본 픽션이었습니다.

......................................................................

이상으로 기마켜의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한 반박 씨리즈를 마치겠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저의 글 총 11편의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잘못 된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지 못 합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이나 잡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아닌 하나님은 세상 잡신도 해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결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존재방식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것은 잘못 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이단교리를 믿는 것은 마치 이리를 어미라고 믿고 따라가는 새끼양이나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은 부디 올바른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예수를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금이라도 그 잘못을 깨우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께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넷 공간이지만 여러 명이 무더기로 달려드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거의 혼자 상대한 격렬한 논쟁 끝에 마지막으로 이 글을 올리자 여호와의 증인들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반박글을 읽고 그들 여호와의 증인들이 회개하고 바른 신앙으로 돌아왔는지 저는 알지 못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처음 불러내셨을 때, 아브람에게 믿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아비집을 떠나기는 했는데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하란으로 갔다가 다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가기는 했는데..., 기근이 들자 굶어죽을까봐 '하나님의 지시하신 곳'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갈대아 우르가 가까웠다면 아마 갈대아 우르로 돌아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의 행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비겁하고 가련하고 한심한 사내의 모습입니다. 그 비겁함으로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아내 사라가 바로왕에게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재앙이 얼마나 크고 무서웠던지 바로가 놀라서 사라를 돌려주고 그들을 빨리 떠나 보내려고 금과 은, 육축과 노비를 아브람에게 잔뜩 안겨주고 잔뜩 지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이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한 마디 꾸중도 안 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아브람의 믿음이 조금 자랍니다. 그래서 조카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조카 롯이 붙잡혀갔을 때 318인 거느리고 쫓아가 찾아오는 대단한 용감성도 발휘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믿음은 연약하기만 하였습니다. 15장을 보십시오. 그돌라오멜을 쳐부수고도 아브람은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람은 여전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자식 없이 죽는 것이 더욱 두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제게 씨를 안 주셨습니다. 이 하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저의 후사입니다, 씨를 안 주시니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자식보다 못 하단 말입니까? 그런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한 마디 꾸지람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여 주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런데 여기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 참 희한한 일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니까 믿었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더 희한한 것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믿은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밤하늘 별을 보고 믿은 것이 어째서 의가 되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을 찾아봅시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약속의 자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6)

하나님께서 그 날 밤 밤하늘 별을 보여 주실 때 하나님은 "네 자손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자손"이라고 단수형으로 말씀하셨답니다. 아브라함은 "아니, 하나님. 후손들이라고 하셔야 맞잖아요. 하나님은 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히브리어 문법을 잘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날 밤 아브람에게 밤하늘 별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손 가운데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이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별을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저렇게 하늘 가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 가득한 예수 그리스도....
그것이 산산히 부서져 흩어질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생명으로 구원 받을 수많은 성도들,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인지, 온 우주 가득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찬송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브람은 그 말씀을 그대로 그냥 믿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되고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참 이상하다 싶습니다. 아니, 웃긴다 싶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시는 것을 보면 믿음 없는 아브람을 불러내셔서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억지로 믿음을 주시고 억지춘향으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니 말입니다.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시고 억지로 끌고 나와 억지로 입을 벌려 믿음을 먹이시는 것처럼 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 억지로 이끌려 나와 억지로 먹이시는 믿음을 받아먹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녀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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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대표적으로 두 곳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애끓는 통곡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먹힌 것이라고 생각하고 염소 피 묻은 아들의 채색 옷을 부둥켜안고 머리를 풀고 굵은 베옷을 입고 애곡하였습니다. "내가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그 울음과 그 모습이 너무 처절하게 광야를 적십니다.

다윗왕은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요압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목 놓아 울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아비인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악한 아들 압살롬이 죽었는데도 다윗은 이토록 애절하게 아들을 부르며 통곡합니다. 그 통곡이 사람들의 가슴을 찢는 듯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그 아픔과 슬픔을 나타내신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그 시간 하늘에 캄캄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성전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아픔의 나타남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8장 32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슴을 찢고 아들을 내어주셨으나 아끼지도 아니하셨고, 망설이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 보다 우리를 더 귀하게 여기셨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더욱 사랑하셨다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만일 아들이 더 귀하고 우리가 덜 귀했다면 하나님은 아들을 아까워하셨을 것이고 혹 내어주시면서도 아파하고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최소한 생색이라도 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귀하신 독생자를 벌레 같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서슴없이 아낌없이 내어주실 수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완전하시며 실수가 없으시고 후회도 없으신 분입니다. 잘못된 결정이나 손해를 보는 판단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노름판에서 상대가 무슨 패를 가졌는지도 모르고, 주식시장에서 상장주식이 우량기업의 주식인지 부실한 회사의 주식인지, 뭔지도 모르면서 귀중한 전 재산을 거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틀림없고 확실해야 모든 것을 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슴없이 아낌없이 그 아들을 내어주시는 올인(All-In)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미 먼 훗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며 영광과 찬송이 될 것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서슴없이 주저없이, 망설임 없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습니다. 도대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리 하실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선뜻 가슴을 찢어 아들을 내어주시며, 그 아픔과 슬픔과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넘으실 수 있으며, 그 아픔과 슬픔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내색조차 하지 않으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 구원 받은 후사들이 온 우주를 찬송으로 가득 채울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 받을 후사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보기만 해도 자지러질만큼 기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하고, 안절부절 못 할 정도로 사랑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귀한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그 고통을 내색조차 아니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

우리 인간들에게는 감각과 감정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생물에게 주어진 감각과 감정은 진화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진화론자들은 무기물질과 물이 태양의 빛과 열을 받아 광합성을 일으켜 유기물질이 생겨나고 이 유기물질들이 결합하여 DNA와 생명체가 생겨났다는 가설을 신봉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DNA가 상상을 초월하는 작은 크기의 30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단백질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무려 200여종의 다양한 핵산, 아미노산의 질서정연한 결합체라는 사실은 자연적이고 우연한 진화에 의한 생명기원설을 반박하기에 충분합니다.

진화론자들은 물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물에 비친 햇빛이 무기물질을 변화시켜 유기물질을 만들고, 그 유기물질들이 결합, 연합하여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가설을 신봉합니다. 그러나 물은 물에 섞인 것들을 녹이고 흩어서 분산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수 백 종류의 핵산, 아미노산이 물 속에서 한 자리에서 생성되어 30억 개가 질서정연하게 조립, 연결되어 DNA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수분이 있으면 다 녹아서 흩어져 버리고 물이 없으면 말라붙어 버립니다. 물속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다는 가설은 억지입니다. 

좋습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대로 물에서 그런 식으로 DNA가 생겨나고 또 원시생명체가 생겨났다고 칩시다. 그러나 생명이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생명이란 어떤 현상도 아니요 유형적 존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전기작용도 아니고, 화학작용이나 물리작용도 아니고, 형체도 없고 부피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도대체 생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미세한 조직이 생겨난다고 해도 그것이 살겠습니까? 저절로 생명이 생기겠습니까? 죽은 세포가 도로 살아나지도 못 하는데 어떻게 생명이 저절로 생겨난단 말입니까? DNA가 생기고 생명체조직이 생겨나면 저절로 생명이 부여되거나 생긴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약적 억지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생명운동과 감각과 감정의 문제입니다. 처음 생겨난 생명체가 생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는 생명운동이 필요합니다. 먹고 배설하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고 이를 산소와 결합시켜 에너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먹기 위하여는 먹고자 하는 의욕이 필요합니다. 아무 의욕이나 감각이 없이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조그만 생명체에도 주어진 먹고 생존하려는 본능과 생명활동은 결코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든지, 뜨겁게 느껴지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라든지, 부드럽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든지, 맛으로 독성을 구별하는 능력도 생명체가 저절로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도대체 뜨겁다, 차갑다 하는 개념조차 있을 턱이 없을 테니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억지는 계속됩니다. 그렇게 생명활동을 시작한 생명체가 분열하여 그 개체수가 증가하는 현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이를 단순히 "분열", “진화”라는 말 한 마디로 비판 없는 맹신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열이라니요? 쪼개면 죽어버려야 하는데 어떻게 분열하여 똑같은 개체로 늘어나서 다시 살아난단 말입니까? 이보다 신기한 마술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신비한 생명체의 분열증식의 신비한 과정은 전혀 설명조차 않고 '분열'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니 진화론자들은 참으로 뻔뻔스러운 양심불량자들입니다. 생명체의 분열 뿐 아니라 생식과 온갖 생명작용이 온통 신비인데 진화론자들은 전혀 이를 설명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에게 주어진 감각과 감정은 더욱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감성과 이성은 모든 다른 생명체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놀라운 지적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영적세계를 감지하고 영원을 추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자, 이제부터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슬픔, 사랑과 그리움, 분노와 질투까지도, 모든 감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랑이 많은 사람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한의 것입니다.
슬픔과 아픔과 분노와 격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격정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감정도 하나님이 근원이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인자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자비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를 진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질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때로 욱하는 성질을 낼 때가 많습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새파랗게 화를 내는 것 말입니다.
저는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감정을 분출하시고 새파랗게 화를 내시며 욱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보았습니다.
모세를 길에서 만나 죽이시려고 하신 것도 그런 한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복지까지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실로에다 처박아(?)놓고 각기 소견에 선한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수백년 동안 실로에서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일부 신실한 백성들은 일 년에 한 차례 실로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겨우 일 년에 한 차례 말입니다. 마치 마지 못 해 일년에 한 번 성탄예배에 나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엘가나와 그 아내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의하여 모멸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먼저 먹고 가로채고 빼앗았으며 수종 드는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멸 받던 하나님의 법궤는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까지 강제동원됩니다. 그 날 이스라엘 보병 3만이 추풍낙엽처럼 블레셋 족속에게 엎드러집니다. 수 백 년 동안 홀대받던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 해결사로 투입되자 지금까지 참으셨던 하나님의 분노는 폭발하였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 당하고 법궤는 빼앗기고 엘리 제사장은 그 소식을 듣고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고 그 며느리는 고통중에 아들을 낳고 죽어갑니다. 엘리 제사장 집안은 하루에 멸문지화를 당하였습니다.

법궤가 탈취당하여 간 곳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에서 하나님은 다곤신상을 치시고 불레셋 족속을 독종과 재앙으로 치심으로 진노하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놀란 블레셋 족속들은 금으로 독종과 쥐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하고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더러운 낯짝들을 어디다 들이미는 거냐?”
그리고 20년 후 사울왕이 죽고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이 법궤를 모시고자 했을 때, 이번에는 소가 뛰는 바람에 수레가 흔들리자 법궤를 붙잡았던 웃사를 치셔서 그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감히 나를 붙잡아?”

기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려 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이렇게 표독하리만치 신경질적인 반응에 놀라서 법궤를 모시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머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벧에돔과 그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다윗왕은 다시금 법궤를 모셔오게 되는데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춤을 추었던지 옷이 내려가 벌거벗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을 지니셨는지를 생각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조그만 행동에까지 웃고 우시고 토라지시는 것을 생각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을 슬프게 만들어드리는 일을 쉽게 저질러 버립니다.
못 본 체 외면하고, 무시하고, 내버려둡니다. 
자녀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뒷방에 내팽개쳐두었다가 한 주일에 겨우 한 번 주일예배에 마지 못 해 나갑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욱 섬세하시고 더욱 예민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노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 분과 더욱 가까이 교제하십시오.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이십니다.
한없이 다정다감하시고 사랑 많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이 그분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근원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 17-18]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해범위 밖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 분이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분이시고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분으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맞습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맞고, 이해가 안 된다고요? 당연합니다.
삼위일체는 신비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이해 못 합니다.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클로버 잎으로, 전구, 빛, 에너지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그 속에 있고 그 속에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고, 물과 얼음, 수증기 식이나 또 다른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구약에서는 성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 승천하신 다음은 성령님으로 오셨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다 틀렸습니다. 인간이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알아듣게 설명했다면 그 순간 그 설명은 엉터리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히브리어로 "브레싯 바라 엘로힘 브 샤마임,브 하 에레츠"입니다. 하나님이 "엘"이 아니라 '엘로힘', 하나님들, 복수(複數, Plural))로 되어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하시고는
바로 뒷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자기’라는 단수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했다가 다시 '나'라고 했다가 하시니 듣는 사람이 헷갈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유대인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또 필사할 때 점 하나, 획 하나도 빼지 않고 하나님을 엘로힘, 복수 그대로 표기하고, '우리', '나'를 그대로 기록한 것도 생각해보면 참 기이한 일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여 주시면서 자기가 죄 사할 권세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다음 도마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을 때 말없이 그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 그 분이 아니라면 도마를 꾸짖으셨어야 옳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바로 그 분이었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그 영광 앞에 사도요한은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처음이요 나중’, ‘알파와 오메가’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신비로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한 분이시면서 세 분, 세 분이시면서 한 분, 그 삼위일체는 오직 하나님만의 능력이며 존재방식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우리가 아는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다른 존재나 우상, 세상의 잡신 중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아닌 하나님은 세상 신들, 잡신들이 따라 할 수 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떤 세상신도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성령님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실 수 있으며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분,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한 분 참신이십니다.

감히 하나님을 설명할 생각 마십시오. 그대로 믿으십시오.

[마태복음 4:12-22]
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사야 9:1-6]
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마태복음 4장 후반부를 보면, 주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세례요한이 잡혔다는 것을 들으신 다음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셨다가 다시 바닷가 가버나움에 옮겨가서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한 이사야 9장에 기록된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9장에는 마태복음 기자가 인용한 예언이 1,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은 우리가 성탄절 때마다 듣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메시아 탄생의 예언입니다.
그 가운데 3-5절에 미디안 족속이 ‘군인의 갑옷과 복장이 불에 지푸라기같이 타 없어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예언이 아울러 나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 적 없으십니까?
왜 그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주님을 좇아갔을까요?
그들에게 벌써 그런 큰 믿음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남다른 풍모와 권위, 광채,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 무슨 최면술 같은 것 때문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모습의 사람이셨으니까요. 또한 예수님이 그런 방법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을 리도 없고요. 그렇다면 왜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은 주님이 부르시자마자 달려갔을까요?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미드라쉬를 가지고 외우고 교육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옮겨가서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말한 대로 “흑암과 사망 가운데 앉은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치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자가 일어나는 큰 역사가 함께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이 나고 예수의 이름이 알려지자 그들은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기드온 같은 해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머지않아 이사야의 예언대로 미디안을 물리친 기드온처럼 로마군인의 갑옷과 옷을 항아리에 숨긴 횃불로 섶같이 사르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이 부르자 주저 없이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 또한 아들들을 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고 ‘아들들아, 어서 가거라, 가서 한 자리하고 출세해라’ 하고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나중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아들들의 자리를 부탁하는 치맛바람을 일으켰고 다른 제자들은 그 인사청탁에 분해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왕이 되실 것이라는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승천을 앞둔 순간에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사도행전 1:6).

그런 기대를 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 그 중에서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반석 위에 세워질 교회와 천국열쇠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청천벽력(파란하늘에 날벼락) 같았을 것입니다.
특히 수제자로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영의정 자리는 자기 것이라고 내심 여겨온 베드로가 받은 충격은 더 컸을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만류합니다.
그 베드로를 주님은 ‘마귀야 물렀거라.’ 하고 꾸짖으십니다.
영의정이 되고 싶어 주님의 십자가사역을 만류하니 마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세계관, 가치관은 그렇게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넘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나라’ 약속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우주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시킬 영웅으로, 자신들에게 한 자리씩 앉혀주실 주군(主君)으로 믿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음의 너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의 너머, 요단강 건너에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땅의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주님을 믿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고서는 누구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못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예수 믿는다면서도 이 땅의 목숨, 이 땅의 삶에 매여 허덕이며 삽니다.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의 구주로 보다는 이 땅의 형통을 위한 구주로 만들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매달렸던 제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순간입니다.
우리의 이 땅의 삶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 땅의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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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5]
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40년 동안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면서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왕자시절의 화려한 생활도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고, 아무도 기억해 주는 이도 없이 잊혀졌고,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도다.”라고 짓고 탄식하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세상이 잊어버리고 모두가 버렸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미국 땅에 살아가는 많은 이민자들도 그럴 것입니다. 고국을 떠나온 지 너무나 오래 되어 잊힌 사람처럼 낯선 땅에서 외로운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잊어버렸다 해도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광야의 떨기나무는 가시나무, 아카시아, 싯딤나무, 조각목 등으로 불리는, 작고, 뒤틀리고, 가시까지 달린, 그야말로 불쏘시개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나무입니다. 성경은 가시떨기나무를 징벌과 저주받은 죄인의 상징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불이 붙으면 메마른 땅의 가시떨기나무는 금방 타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떨기나무는 사라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모세는 그것이 너무나 기이하여 구경하겠다고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죄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죄인은 죽고 소멸되어야 맞습니다. 아무도 그 영광 앞에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시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기이한 일입니다.

심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실까요? 가시떨기나무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들은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한 여인도 심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성부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면 모세는 절대로 온전치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떨기나무를 소멸하지 않고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가시떨기나무가 불타지 아니한 것은 성자 하나님이 가시떨기나무 대신 불타고 계셨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성경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49). 그러나 그 불로 심판하시지 아니하시고 대신 죄를 태워 죄인을 정결케 하여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속죄제물로 태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은 악한 죄인들입니다. 주님은 그 가시에 찔리며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떨기 같은 죄인들, 가시 같은 죄악으로 찌르는 죄인들이 원래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이사야 43:21, 엡 1:13). 주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신 것은 “너희가 나를 떠나 죄인이 되었을지라도 너희는 나의 흘리는 피로 죄를 벗고 다시 나의 영광이요 찬송, 곧 나의 면류관이 되라. 너희는 영원히 나의 면류관이다.”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에게 보이신 가시떨기나무 불꽃은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실 주님이셨습니다. 잃어버리고 잊혀져버린 광야의 악한 가시떨기나무 같은 죄인, 나를 찾아오신 주님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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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

시편 51편에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온 때에”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상한 심령”은 어떤 심령일까요? “상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말로는 부패해서 썩어서 상한 것도 “상했다,” 다치고 부서진 것도 “상했다,” 하는데, 여기에서는 부서져서(broken) 상한 것을 말합니다.
깨끗하고 싱싱한 고기를 칼로 자르고 저민 것 같은 상한 심령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편 51편 17절이 말하는 “상한 심령”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야바 대제사장 집에서부터 빌라도 법정과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고소와 주먹질과 침뱉음과 매질 등, 말할 수 없는 부당한 대우와 곤욕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한 마디의 항변이나 반항도 하지 않으십니다. 빌라도가 심히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자기들의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기도까지 하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인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끝까지 참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인내라는 것, 참는다는 것은 화가 나고, 속상하고, 복수심과 증오심, 악과 독이 치밀어 오르는데도 꾹 눌러 참고, 인내한다는 뜻이 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받으실 희생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희생제물이 되려면 악과 독이 아예 없어야 합니다.
사과나 복숭아를 찔러도 “아얏, 왜 찔러!” 독과 악이 아니라 달콤한 사과즙, 복숭아 즙이 나오고, 싱싱한 횟감 물고기를 회칼로 저며 놓아도 향긋한 맛이 나듯이 말입니다.
개나 호랑이 같은 동물이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은 정결하지 못 한 탓도 있지만, 잡아 보십시오, 반항하고 악을 쓰며 “두고 보자, 지옥에 가서라도 이 원수는 갚을 거다.”는 듯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 같은 동물은 목을 찌르고 매달아 죽여도 고통으로 버둥거리며 피를 흘릴 뿐 악독과 원망은 아예 할 줄을 모릅니다.

어떠한 인간도 부당하게 학대와 조롱을 받으며 죽임당한다면 악과 독, 원망과 저주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물은 칼로 상하고 죽임당해야 드려질 수 있습니다.
심령도 상함 받고 죽임당해야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의 심령은 상함 받고 죽임당할 때 악과 독과 원망이 터져 나오고 부패와 죄가 풍겨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인간들의 악한 취급에 마음이 상하였는데도 참으셨다면,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데 누르고 인내하셨다면,
그런 식으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셨다면,
이 속죄제사는 무효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대속물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하나 없고 흠도 점도 없는, 그 심령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심령은
악한 인간들의 배반과 욕설과 조롱과 침 뱉음과 채찍질과 못 박음을 당하며 부서지고 찢기고 저며져서
향기로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영원히 죽게 된 죄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직 뱀의 머리를 밟고 구원하실 구세주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야기입니다.
양과 소를 잡아 태워드리는 구약시대의 제사도 십자가에로 오실 속죄제물, 주님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도, 엘리야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말라기도,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은 오실 주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세주의 오심을 외쳐 알릴 광야의 소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40:3, 5)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말3:1)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 곧 마지막 선지자로 세례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매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의 소리가 되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요단강에서 자기에게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왕을 비판하였다가 옥에 갇히게 됩니다.

주님은 이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참 이상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하시고서는 금방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 중 메시아를 직접 본 선지자는 세례요한 뿐입니다.
그는 황송하게도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 그 분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선지자, 모든 사람 중에서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서 얼마나 크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아느냐로 정해집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많이 알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복음은, 천국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어린아이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예수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알지 못 하는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예수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최후의 선지자로 메시아를 직접 만났으며 그 분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은 따라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루시는 구원사역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잡혀서 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하고 여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도대체 왜 광야의 소리로 외친 자신이 옥에 갇혀 죽게 생겼는데도 구해내지 못 하시는 건지, 도대체 구세주 그리스도가 맞긴 맞는지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그런 질문을 해온 세례요한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구원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하여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끝내 모른 채 그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구에 의하여 헤롯왕에게 목 잘려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요한이 알지 못 했던 것을 압니다. 세례요한이 듣지 못 한 것, 보지 못 한 것을 듣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는지, 참혹한 십자가의 사건과 또 부할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례요한보다 큰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는 우리보다 작은 세례요한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로 허리를 동이고 있을 테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다가와 물을 것입니다.
“집사님, 장로님,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우리 주님이 어떻게 구원을 하셨나요?
저는 그것이 너무 궁금했는데, 그놈 헤롯이 내 목을 잘라가는 바람에.....“

여러분은 그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님, 주님은 은 삼십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팔렸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 집에서 밤새 맞고 침뱉음 당하고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유월절 아침에 빌라도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채찍질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군병들은 그 아래에서 주님의 겉옷을 제비 뽑았습니다.
사람들은 머리를 비웃으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신을 구원하여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주님은 목이 마르다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소리 지르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로마군병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주님은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

세례요한은 울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왜 로마군을 우박으로 쳐부수고 바다에 빠뜨려 없애버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고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세례요한과 같이 울면서 그 이야기를 또 자세히, 또 자세히 되풀이해야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준비 되셨습니까?
세례요한 만날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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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5: 1-10]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

사도요한은 울었습니다. 울어도 크게 울었습니다. 왜 울었습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책, 안팎으로 써져있고 일곱 인으로 봉한 책, 그 책의 인이 하나씩 뜯어질 때마다 무서운 심판과 재앙이 시작될 텐데, 그 책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안 보인다고 사도요한은 크게 운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과 재앙이 시작될 두루마리의 인을 뗄 자가 없다고 운 것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이 영원히 이대로 계속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속히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시기를 바라십니까? 물론 무서운 환난을 즐거워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대로 아무 일 없이 평안하게 계속되기를 누구보다도 원하는 자는 사단일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지 아니하고 세상이 평온 가운데 이대로 계속된다면 주님의 오심을 바라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들은 영원히 억울하게 잠든 채 남아있을 것이고 죄악과 사망과 사단의 지배는 영원히 신나게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모든 악과 사망과 슬픔이 사라지고 주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왕 노릇하는 완전한 그의 나라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안일과 평안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안일함과 이 세상의 평온이 이대로 계속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사단의 바람대로 기도하는 꼴이 됩니다. 주님이 오시고 심판이 이루어지면 그들은 무저갱에 떨어지고 영원히 타는 유황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자신들의 통치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계속되도록 세상의 희락과 편안과 즐거움을 제공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요, 영원히 후사로 다스리고 왕 노릇 하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속히 오심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안일과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유대의 사자, 다윗의 뿌리, 이기신 어린양 예수님이 그 인봉된 책을 취하자 천군천사들이 기뻐하고 환호합니다.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던 영광의 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기도의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올려 드립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이 속히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성도들의 기도일 것입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주님이 오시리라 하신 그 약속을 믿고 땅 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이 온 세상에 편만하기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며 기도한 성도들과 십자가 군병들의 기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혹시 하나님의 뜻은 제쳐두고 자신의 안일과 형통과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바라는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 기도는 금 대접에 담기는 향내 나는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된 신부들인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속히 오심을 위하여 울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금대접에 담기는 향내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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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 장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
 
창세기 4장,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입니다.
형제가 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인류최초의 형제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말 성경 7절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가인의 행실이 좋지 못 하고 아벨의 행실이 착했기 때문이라고 흔히 해석되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만일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골라서 받으신 이유가 ‘착한 행실’ 때문이었다면 4장 앞머리에 가인과 아벨의 행실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실은 우리말 성경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 ‘토브’는 ‘착하다, 선하다’라는 뜻과 아울러 ‘옳다, 맞다’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라는 해석도 원어의 뜻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이 대목은 “바른 제물을 드렸다면 왜 그 제사가 들려지지 않았겠느냐?”라고 해석해야 보다 원뜻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가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는 가인의 행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인이 드린 제물이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 대목의 주제는 "행실"이 아니라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드린 제물은 땅의 소산이었고 아벨이 드린 제사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었습니다.
제물에 들여진 노력과 정성으로 보자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고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 그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물이 빈둥빈둥 양떼를 치다가 자기도 덩달아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물에 비하여 훨씬 값지고 받아들여질 만한 것일 것입니다. 가인이 분노하였던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가인은 자신의 피땀을 흘려 거둔 땅의 소산이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될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형 가인이 제사를 드린다니까 자기도 덩달아 드린 (4절) 제물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어린양이었던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였던 것입니다.
제사가 죄인 된 인간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의식(儀式)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오직 어린양 제물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공로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가시덤불을 헤친 수고도, 지극한 정성도, 간절한 열망도 아닙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성이나 공로나 봉사나 헌금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것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문에 죄가 엎드릴 것입니다. (7절 참조)
그렇게 되면 세상에 나가면서 바로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는(이기는) 길은 오직 바른 제물, 곧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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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15-16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잉태의 고통을 여자에게 주십니다.
인간의 육체적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이 출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와에게 주어진 그 잉태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잉태의 고통이 저주라면 하나님은 하와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선악과 사건으로 정작 가장 큰 고통을 당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품안의 독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가슴을 찢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대속물, 속죄제물로 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찢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 고통을 어찌 잉태의 고통에 비기겠습니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그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뭉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의 머리를 뭉개겠다는 것은 뱀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진노를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뱀에게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후손은 어떻게 와야 합니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와야 합니다.
여자의 몸을 통하여 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
그 여자의 후손은 이제 선악과를 따먹고 영원히 죽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오직 여자의 후손, 메시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을 주신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하와야, 내가 너무나 고통스럽구나. 이 고통을 너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느냐?"
잉태의 고통은 여자의 후손을 내어주실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고통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영광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여자의 후손을 오시게 하는 고통입니다.

먼 훗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남자들에게 할례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에다 합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거기에다 할례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왕이면 등짝이나 가슴이나 이마에 칼로 십자가를 그으라 하시면 얼마나 폼 나겠습니까?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자르는 할례, 그것은 여자의 후손의 약속, 독생자의 약속, 아들의 약속의 표였던 것입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진노하실 때마다 그 할례의 흔적을 보시고 “참 그렇지. 내가 이 백성들에게 아들을 내어주기로 했지!” 하면서 독생자를 보내실 약속을 기억하고 진노를 참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잉태하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실 때마다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내가 죄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했었지.”
그리하여 잉태의 고통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때가 차매 여자의 후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그 잉태의 고통 즐겨 받은 많은 여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라가 그렇습니다. 90세에 기어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아와 라헬이 그랬습니다. 서로 더 낳으려고 경쟁을 했습니다.
다말이 그랬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생으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해서까지 아들을 낳고 기어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는 길은 이와 같이 여자들의 잉태의 고통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잉태의 고통으로 난 그 길을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의 마지막 길목은 잉태의 고통에 비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울부짖으며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기어이 죄인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통 없이 구원의 기쁨만을 누리는 것이 축복일까요?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만 잉태의 고통을 주셨을까요?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기쁨만 주셨을까요?

그리스도의 신부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 순결? 믿음?
아닙니다. 신부의 가장 중요한 자격요건은 잉태하는 것입니다. 낳는 것입니다.
잉태하지 못 하고 낳지 못 하는 여자는 석녀(石女)입니다. 신부가 될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은 신약성도들, 교회들,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더욱 잉태의 고통, 복음으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수고를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은 거저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 죽어야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생명을 낳고 살리는 일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치러야 하는 잉태의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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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앞서 52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며 수군거렸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60절에서는 제자들까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수군거림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망가뜨리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이나 고린도후서 12장 20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수군수군하는 것을 심각한 죄악과 교회의 분열증세로 말씀합니다. 그 수군수군하는 것이 지금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리고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물으십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 Son of Man, 다니엘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보았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 바로 나, 그 인자가 승천하는 것을 보면 어찌하려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쯤 힌트를 주면 아무리 둔한 자라도 왠만하면 눈치를 채고 정답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나 먹통같은 무리들은 알아듣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이상 설명을 못 하십니다. 인자, 곧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을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실 것을, 그렇게 살과 피를 내어주실 것을 더는 말씀하지 못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 말씀을 영혼이 중요하지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원론적,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서, 아니 앞서 5장에서부터, 아니 7장, 8장.... 계속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유대인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고난과 죽임의 십자가 대속에 관하여는 비밀에 두신 채 자신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참 생명의 떡’으로 계속하여 주장하고 계시고 유대인들은 도대체 알아먹지 못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도중에 영혼은 중요하고 육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면 이는 중심 주제를 벗어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영혼이 중요하냐, 육신이 중요하냐의 주제를 놓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 영생의 문제, 너희가 어떻게 하면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영어성경이나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는 것도 유용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가 NIV 영어성경에는 “The Spirit gives life.”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문자 S Spirit입니다. 즉 ‘영’이라는 주어입니다. 곧 ‘영이 생명을 주신다.’입니다.
헬라어를 보면 “토 프뉴마 에스틴 토 쏘포이운.” “살게 하는 것, 살리는 자는 영이시다.”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지금 주님은 “영이 살린다. 육은 무익하다, 못 살린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살리시지 인간은 못 살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영,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너희를 살게 하실 분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신, 곧 그저 인간일 뿐이라면, 스승이거나 선지자라면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종교들은 생명을 살리거나 주지 못 합니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만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말씀이 영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심 같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생명을 주신 것 같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 같이 그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역사는 성령, 곧 Spirit에 의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토록 설명을 하셔도 안 믿는 자는 안 믿습니다. 슬프게도 많은 제자들이 떠나갑니다.

주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
그런데 과연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이렇게 대답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도대체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보내신 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때는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께 붙어있음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 나와 앉아 이 말씀 듣고 계십니까?
어떻게 여러분은 주님 앞으로 나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셨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주님의 말씀이 생명인 줄 미리 깨달아 알고 나오셨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 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과 손길에 이끌려 나오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나와 계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수님께 보내신 자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도 "어렵도다." 하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4)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가 그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부터 택하시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의 택한 나의 자녀들에게 너는 가서 생명의 살과 피를 먹여 그들을 살리라.” 
그래서 주님은 오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그 귀하신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울며 그 살과 피를 먹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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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52-55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생명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에게 갈등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주님은 불을 땅에 던지려 왔노라 하시고 주님의 말씀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 빛과 어두움, 생명과 사망 간의 영적전쟁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영어성경을 보니 'sharp'라고 되어 있지요? sharp한, 날카로운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다툼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살을 먹으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 유대인들을 강퍅하다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의문과 다툼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기 살과 피를 먹으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예수님을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 다툼입니다.
그 다툼은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설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친절하시고 훌륭하신 선생이신 예수님이 왜 여기에서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아니 하시는 것일까요?
“이보게, 다투지들 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너희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어야 한단다. 너희를 살리려면 그 길밖에 없단다. 그것을 믿는 것이 곧 내 살과 피를 먹는 거란다,” 왜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시지 않느냐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화목제물입니다.
그 때문에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어주시는 것 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먹지 않고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도 없고 생명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이 이루기까지 그 말씀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

예수님이 그 비밀을 처음, 조금 밝히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을 때 교회와 천국열쇠를 말씀하시고 비로소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만류하였고 주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은 그 비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을 유대인들에게 설명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멸시 당하시고, 배척당하시고, 욕설과 침뱉음 당하시고, 채찍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며 목마름과 고통 속에서 죽임 당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다 해도 유대인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것은 지금은 이들이 알아듣지 못 한다 해도 이 유대인들 가운데에 나중에 믿음으로 구원 받을 자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과 부활승천 후에야 비로소 깨닫고 통곡하며 주님 앞에 엎드릴 자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훗날 이 성경의 기록을 보고 믿음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영생을 얻어야 할 저와 여러분 같은 신약성도들 때문일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우리가 받아먹는 주님의 살과 피는 만나와 전혀 다릅니다.
만나처럼 배고픔이나 해결하고 육신의 생명이나 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주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과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오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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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52-55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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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에게 갈등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주님은 불을 땅에 던지려 왔노라 하시고 주님의 말씀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 빛과 어두움, 생명과 사망 간의 영적전쟁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영어성경을 보니 'sharp'라고 되어 있지요? sharp한, 날카로운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다툼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살을 먹으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 유대인들을 강퍅하다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의문과 다툼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기 살과 피를 먹으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예수님을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 다툼입니다.
그 다툼은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설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친절하시고 훌륭하신 선생이신 예수님이 왜 여기에서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아니 하시는 것일까요?
“이보게, 다투지들 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너희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어야 한단다. 너희를 살리려면 그 길밖에 없단다. 그것을 믿는 것이 곧 내 살과 피를 먹는 거란다,” 왜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시지 않느냐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화목제물입니다.
그 때문에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어주시는 것 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먹지 않고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도 없고 생명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이 이루기까지 그 말씀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

예수님이 그 비밀을 처음, 조금 밝히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을 때 교회와 천국열쇠를 말씀하시고 비로소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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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지금 주님은 그 비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을 유대인들에게 설명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멸시 당하시고, 배척당하시고, 욕설과 침뱉음 당하시고, 채찍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며 목마름과 고통 속에서 죽임 당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다 해도 유대인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것은 지금은 이들이 알아듣지 못 한다 해도 이 유대인들 가운데에 나중에 믿음으로 구원 받을 자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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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전혀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주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과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오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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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6:48-49)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시면서 시험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무슨 시험이었습니까?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만나를 먹으면서 믿음은 버렸습니다.
열 정탐군의 말을 듣고 ‘우리가 메뚜기로구나, 다 죽는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울면서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리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군사들이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 만나를 먹었으면 그 만나가 믿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만나를 그렇게 먹고도 그 만나가 전혀 믿음이 되지 못 한 것입니다.

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시며 만나와 비교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식량은 되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나를 40년 동안 먹었어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만나는 예수님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살과 피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주님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을 살리는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이해라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도 그것이 믿음이 되지 못 하고 생명이 되지 못 한다면 만나를 먹고 광야에 엎드러진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 딱 한 번 믿으면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고 천국시민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럴까요?
그럴 것 같으면 만나도 일회용으로, 딱 한 번만 먹으면 평생 다시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만나를 내려주셨으면 딱 한 번 내려주시기만 해도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백성들도 편하고 하나님도 편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만나를 매일같이 가나안 들어갈 때까지 지겹도록 40년 동안이나 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딱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실 능력이 없으셔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 납니다. 예수 믿어 새 생명 얻습니다.
그런데 딱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겁니까?
만나를 딱 한 번 먹으면 가나안 들어가는 믿음이 되고
예수 딱 한 번 믿으면 천국 가기까지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 생명의 떡은 매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내 안에서 믿음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0년 세월 만나를 매일매일 먹은 것 처럼 매일매일 말씀을 먹고 날마다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날마다 말씀을 먹어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매일 먹기 싫어합니다.
40년 동안 지겹게 먹기는 더더욱 싫어합니다.
어떻게든 일회용으로 딱 한 번 먹고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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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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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던 그들이 다시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전날 예수님이 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시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배를 저어 오병이어의 잔치가 벌어졌던 곳으로 다시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이리저리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로 배를 저어 가버나움으로 돌아왔더니 거기에 예수님이 와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랍비님, 언제 여기로 오셨습니까?”

아침부터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12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노를 저어 왕복하고 산에 올라가 헤매기까지 했으니 그들은 땀깨나 흘렸을 것이고 헛수고 했다는 생각에 약도 오르고 화도 많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짐승처럼 처먹고 배때기가 부른 까닭이로다.”라는, 그런 뉘앙스입니다.
생명은 찾지 아니하고 썩을 양식을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니니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주님은 다시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 ‘인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땅에 납작 엎드려야 옳습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인자’는 육신을 입고 오실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말세의 환상 가운데 인자를 봅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사도요한은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인자 같은 이, 곧 예수님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는 유대인들은 “인자”라는 소리를 듣고도 끄떡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당신이 인자라면 시시하게 오병이어 기적 같은 거 말고 모세처럼 만나를 내려 보시오.'라는 뜻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오병이어 같은 일회성 이벤트 말고 날마다 만나를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이 무리를 보면서 여러분은 혹시 “저런 악한 사람들 같으니라구.”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 같습니까?
그 악한 무리들, 유대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 때도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조차 안 믿었는데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해서 예수님을 믿었을 것 같으냐 말입니다.
제자들이 온전히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오신 다음이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눈앞에 오셨다 해도 스스로 믿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놀라운 표적을 보고 오병이어를 받아먹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붙잡을 지혜를 가진 인간도 없습니다.
만일 자기 힘, 자기 지혜로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서 ‘내가 믿어서, 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노라고 자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히 말합니다. "자랑할 수 없느니라." "없나니 하나도 없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Total Depravity)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있기 때문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성령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죄로 죽어있는 자의 눈을 열어 보게 하고 귀를 열어 듣게 하는 일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던 그 때, 수면 위를 운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음성이 메아리쳐 울릴 수 있게 하신 성령님, 그 성령님께서 우리의 죽어있는 마음 위를 운행하심으로 닫힌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귀로 들어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울리게 함으로써 믿음으로 이끌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알지 못 하였고 영생을 얻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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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무리, 그런 믿음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풀밭 위에 앉히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속마음을 알지도 못 하는 제자들....,
자신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풀밭 위에다 앉히고
그리고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십니다.
원대로 나누어주십니다. 달라는대로, 먹고 싶은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어떻게 나누어 주셨을까요?
떡과 물고기를 한 사람에게 주고 나면 똑같은 떡과 물고기가 또 생기고 또 생기고.... 그랬을까요?
떡과 물고기가 뻥튀기처럼 펑펑 생겨나고, 뭉실뭉실 커지고, 뭉게뭉게 부풀어났을까요?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복음서 어디에도 그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 건 궁금해 하지 마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하다면 왜 안 적었겠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천국에 가면 알아보고 싶은 궁금 리스트에 올려 놨습니다.

11절을 보면 축사하시고, 감사기도, 축복기도 하시고 나누어 주셨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디아도켄, NIV영어성경을 보면 distributed, 나누어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4장 19절을 보면 좀 다릅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답니다.
떼어, broke, 부수어, 뜯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다시 무리에게 떼어서, 뜯어서 나누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떼어내고, 잘라내고, 부수어내어 나누어 주어도 끝없이 남아있는 떡과 물고기...
오히려 더 커지고 불어났는지 그러고도 제자들에게 열 두 광주리가 가득하게 남은 떡과 물고기....

떼어서 나누는 것은 성찬식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떼어서, 그 생명을 나누어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
천주교는 성찬식할 때 보면 신도가 무릎을 살짝 꿇고 앉으면 신부나 사제가 동그란 조각을 입에 넣어 주지요.
루터교회의 성찬식도 비슷합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날에는 많은 개신교 교회들도 천주교, 루터교회와 마찬가지로 그릇에다 조그많고 납작한 빵 조각들인지 빵 동전들인지를 담아서 한 개씩 집어들도록 하여 성찬식을 합니다만, 
저는 한 개의 큰 빵이나 떡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떡을 떼어내면서 “내가 지금 내가 살겠다고 주님의 몸을 내 손으로 떼어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가지사 이것이 내 피라 하셨습니다.
떡은 떼고, 포도주는 잔에 담아 주셨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마14:19)
마태복음14장 19절을 보면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면서 떡을 떼어서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떼어져서 제자들의 손에 나누어졌을 때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광주리 가득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풍성하게, 원대로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살리는 참생명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이 놀랍고 두려운 광경 앞에 엎드려 떨며 울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먹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실컷 배부르게 먹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예수님을 붙잡아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붙잡아 임금으로 세우면 식량난 하나는 깨끗이 해결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토록 풍성한 성찬식을 베푸신 다음 혼자 쓸쓸히 산으로 피해 떠나시는 주님......
그 무리 중에도, 제자 중에도, 아무도 참 떡, 참 생명이신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따라 산으로 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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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1-4)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2절을 보니 큰 무리가 따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라고 써져 있습니까?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니라.’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거나 따르기 때문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르침을 받고 배우려고 해서도 아닙니다. “봄이니라.” 곧 “구경함이라.”입니다.

우리 어릴 적 시골엔 별 구경거리가 없었습니다. 그 땐 TV도 없고 영화관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시골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온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동네어귀에 장대에다 확성기를 달아서 세우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틀어댔습니다. “동춘 서커스, 와서 보시라, 기가 막히는 곡예, 원숭이쇼도 있습니다.”
병을 고치겠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신기한 구경꺼리였던 셈이지요.

3절을 보니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4절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필이면 유대명절인 유월절에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 산에 오르시고 수많은 무리들이 그리로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그들 자신이 왜 그리로, 예수님께로 몰려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께서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몰려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유월절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출애굽 유월절, 그 밤에 양을 잡아 피를 문에 바르고 구워서 먹는....
요한복음 기자는 지금 그들이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먹으려고 몰려오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6:5-7)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5절을 보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십니다.
몰려오고 있는 무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 예수님의 그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유월절 어린양이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이를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표적을 구경하려고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찢어 주셔야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결국 유대인들은 어린양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게 되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 채찍질하여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 피를 뿌리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태양으로 예수님을 구웠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실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한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에게 먹이신 기적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표적과 축복에 맞추어놓고 보면 이 사건이 갖는 참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미리 아셨다는 것이 어떤 아이가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왔고, 그걸 내어놓을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능력을 발하셔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뻥튀기를 하실 것을 미리 계획하셨다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병이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유월절 어린양이신 자신을 온 세상 죄인들에게 나누어 먹이시는 예표의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참 떡,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빌립을 시험코자 함이라.... 무슨 시험요?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제자라면 최소한 스승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빌립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백 데나리온....... 큰 돈입니다. 품꾼 200명의 일당입니다.
오천명을 먹여야 하니, 조금씩만 준다 해도, 한 사람당 도시락 오천원씩만 잡아도 이천오백만원, 맥도널드 햄버거 샌드위치를 Meal로 하나씩 나누어주려면 7~8만불은 있어야 합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빼고도 말입니다.
삼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의 대답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었습니다.
주판이 좌르르 튕기고 계산기가 도르륵 돌아간 것입니다.

(요6:8-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이번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주판부터 튕기고 머리부터 굴리는 빌립 보다는 낫습니다. 그거라도 찾아내어 주님께 가지고 왔다는 사실이 매우 기특합니다. 그런데 그 안드레의 믿음 역시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니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선생님,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믿음도 혹시 이 정도 수준 아닙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렇게 능력 없고 보잘것없습니까?
지금 우리가 가진 복음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온 인류의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뒤집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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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31-32]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하나님과 동등하냐?”고 살기등등하게 따지고 덤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똑 같다.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시니 나도 죽은 자를 살린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

심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맡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판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모든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심판은 생사화복의 주관자, 천국과 지옥의 주관자, 우주의 주재자, 곧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심판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다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죽이고 살리는 일까지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하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벌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이는 유대인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등등하게 덤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계속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면서 하신 “증거”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판주시라면 그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기적과 표적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행하신다면 그것은 참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표적을 행하셨다면 진작 마귀가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드시고 성전에서 뛰어내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병고침과 살리심과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증거는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다만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자요 광야의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시고 그 보내심의 증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마침내 그를 증거하셨습니다.
증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자,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눈을 치켜뜨고 죽이겠다고 덤비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명백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증거는 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미칠 노릇입니다. 증거를 보이지 않으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광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 38년 된 병자를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으니 예삿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네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전능자로 나타내셨다면 얼마나 통쾌하고 속시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엎드렸을 것이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람,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 세상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마 16:16).
증거 없이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주의 비밀입니다. 그 믿음이 구원의 열쇠입니다.
믿음은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믿는 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네가 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에게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증거를 보여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같이 된 사람 데리고 와서 보여라. 아니면 네가 선악과 먼저 따먹어 봐라. 어디 하나님과 같이 되는지 보자.”
아담과 하와가 진작 이렇게 증거를 요구할 정도로 총명하고 영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없이 뱀의 말을 믿어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렇게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들, 유대인들이 뒤늦게 똑똑해져서(?) 정작 예수님의 말씀에는 안 속겠다고 증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똑똑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아, 그 때 뱀을 못 박아 죽여 버렸었더라면, 그걸로 뱀탕 만들어 남편과 나누어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ㅋㅋ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 아니 죄인들에게,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고 정작 믿어야 할 것은 믿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이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경 또한 예수님이 쓰시거나 보이시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쓰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가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이 막상 눈앞에 오셨는데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말씀이 너희 속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체험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기적을 요구하고 초자연적인 기도응답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해 주시면 믿겠습니다, 하지도 마십시오. 그것이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과 응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 나서 믿겠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말씀을 믿으십시오. 말씀이 증거입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 말씀,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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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9-10]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 38년이나 죽치고 누웠던 병자를 고친 일로 분란이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이 시비를 건 것입니다.
무슨 시비를 걸었느냐, 병 고침을 받은 자에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시비를 건 겁니다.

만일 이런 시비를 걸어온다면 저라면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그럼 제가 멀쩡해졌는데 안식일이라고 거기 계속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런데 이 친구, 대답하는 거 보세요.
“저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습니다.”
안식일 범한 죄의 원인을 예수님에게 떠넘깁니다. 비겁합니다.

생각나는 거 없습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남에게 떠넘기는 것, 이게 죄인의 야비하고 비겁한 모습인가 봅니다.

그런데 당당하지 못 하고 비겁하고 야비하면 오히려 더 책 잡힙니다.
꼬투리를 잡은 유대인들이 계속 다그칩니다. "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이 친구 우물쭈물합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님이 그 후에 성전에서 그 비겁한 자에게 나타나셔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병 고치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변화 없이 병만 고침 받으면 그것은 더욱 죄를 짓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38년 동안 중풍병자로 있을 때 못 해 본 짓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고침 받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못 하고 주님을 위해 쓰지 못 한다면, 그가 하게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그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일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분, 38년 동안 절망 속에 있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분이 주님이신 것을 그 사람이 모른다면 그 사람의 고침 받은 다음의 삶이 어떻게 되겠으며 그 고침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주님은 숨어서, 어두움 속에서 선행이나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병이나 고치는 것이 주님이 오신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들로 주님을 믿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님 자신을 드러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말씀에서 안식일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의 제4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 8-11)

주님께서 오셨을 당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심으로 유대인들과 정면충돌을 하신 것입니다.
제칠일안식일교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우리 정통기독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왜 하필이면 그 안식일에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에 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까요?
다른 날에 오셨어도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셔서 유대인들로부터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비난을 받고 미움을 사셨을까요?
결국 이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아닙니까?
구태여 그렇게 하셔서 분란을 일으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신 것 맞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고 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함께 안식하자고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죄로 인하여 쉬지 못 하게, 안식을 못 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때로부터 하나님도 쉬지 못 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구원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사역은 창조사역보다 훨씬 더 험악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집이 망가져 엉망이 되면 차라리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고치는 것 보다 낫습니다.
하나님께도 깨끗이 싹 쓸어버리고 새로 창조하시는 편이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신 일은 원수 된 죄인을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엉망이 되어버린 죄인들을 다시 고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가슴을 찢는 고통과 처절한 피눈물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그 고통스러운 사랑의 일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안식일과 명절의 규례를 정해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섬기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리고 모든 유대인의 명절의 참뜻은
구세주, 메시아, 주님이 오실 때 죄악과 저주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날을 기다리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안식일은 장차 오실 주님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이 오시면 폐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식이요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안식일을 깨뜨리셔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전도 무너뜨리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안식일과 성전을 가지고 안식일의 주인이시요 참성전이신 주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지켜온 안식일과 성전제사와 율법들이 자신들이 쌓아온 공로요 근거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들을 버릴 수가 없었고
그것을 허무시는 주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진짜 안식일과 진짜 성전을 십자가에 달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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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참말로 계신다면 어디 내 앞에 데리고 와 봐요!!"
“하나님이 공중에 나타나시거나 뉴욕 하늘이나 버즈 칼리파 꼭대기에 천사들을 보내서 나팔을 불게 하시면 사람들이 놀라서 다 하나님을 믿을 게 아닌가! 이 세상 되어가는 꼴 보면 하나님은 없는 게 분명해.”
글쎄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하나님 없는 거 같네요.

성경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죄인이 되어 모든 인간, 죄인들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면
뱀이 하나님께 뭐라고 할까요?
“이 뱀의 말은 듣기만 하고도 믿던데.... 하나님은 안 보고는 못 믿겠다는군요. 후후후.”

하나님은 절대로 안 나타나실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까지는.
공중에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불고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아무것도 안 보이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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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놀라운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단순히 좋은 복된 소식만이 아닙니다. 
이 복음에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만물이 그 말씀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즉, 복음이 선포되고 예수 이름이 선언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복음에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묶인 자를 풀어내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한 절망과 멸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천국으로 옮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흑암의 세력을 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단 마귀의 권세를 멸하고 죄와 사망의 결박에서 풀어내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피 묻은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입니다.
어찌 능력이 없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믿는 자에게서, 그리고 교회에서 이 놀라운 복음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능력,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믿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자의 믿음을 의식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음의 능력이 복음 전하는 자의 믿음에 좌우되고, 어떤 사람이 어떻게 전하느냐애 따라 달라지고, 전하는 사람에 따라 역사가 나타나기도 안 나타나기도 한다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목소리가 기어들고 움츠러들고 부끄러워져서 예수님의 “전하라.” 하신 명령에 따르지 못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우리는 내 믿음이 부족해서 능력이 아니 나타날까 두려워 복음을 내 안에 가두어 놓고 전파를 막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 엄청난 능력의 복음을 말입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데 아무 걸림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잘못 된 생각과 오해에 걸리고 우리 마음 안에 갇혀서 그 능력이 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나의 믿음과 능력에 따라 역사가 일어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지 못 하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기를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신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믿음을 걷어치워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비켜서고 복음의 능력이 나가서 드러나고 주님의 이름이 역사하도록 길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우주를 움직이고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전합시다.
우리의 믿음이 없더라도, 내게 아무 능력 없더라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전하라.” 하신대로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역사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입을 통하여서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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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 기업가 바스 란스돌프(Bas Lansdorp)가 2023년까지 화성에 지구인을 보내는 ‘마스 원(Mars one) 프로젝트’를 추진한답니다. 처음에 4명을 보내고 그 후 2년마다 4명씩 더 보내는 식으로 보낸답니다. 지난 4월 22일부터 화성으로 갈 희망자를 모집했는데 불과 2주일 사이에 7만 8천 명이 지원을 했답니다. 화성까지 가는데만 약 8개월이 걸리고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편도우주여행인데도 말입니다. 지원한 희망자는 미국인이 1만 7천 324명, 중국인이 1만 241명, 그 다음으로 영국인이 3,581명이랍니다. 지구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가, 놀랍습니다. 

화성까지 지구인들을 싣고 날려 보낼 우주선은 우주정거장까지 화물을 싣고 오가던 무인 우주왕복선 드래건(용)호를 개조해서 사용할 것이랍니다. 화성에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기술력이 지금은 없기 때문에 화성에 가면 거기에서 살든지 죽든지 해야 한답니다. 

소요경비는 약 6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데 란스돌프는 이 경비를 “마스 원 프로젝트” 전세계 TV중계권 판매로 충당할 것이라고 한답니다. 화성 우주인들이 화성으로 출발하여 도착하고 화성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전 과정을 TV로 생생하게 중계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마스-원 프로젝트는 올 8월 31일까지 화성 이주희망자 지원을 받고 전세계 300개 지역에서 1차로 50~100명씩 선발하고 다시 네 차례의 선발과정을 거쳐 28~40명을 선발한 다음 7년 동안 우주인 훈련을 시킬 예정이랍니다.


	화성 거주지 상상도/Mars one 제공

화성에 우주인 정착촌이 건설된 상상도를 보면 근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원추형 우주선 단독주택들이 줄을 지어 이어져 있고, 사다리인지 계단인지도 보이고, 앞에는 태양광발전설비가 펼쳐져 있고, 자동차 같은 것도 서 있고 흰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들도 보입니다. 
멋있어 보입니까? 지구로부터 아득히 먼 우주공간의 별천지가 환상적으로 보입니까? 당신도 화성 우주인으로 지원해 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화성은 태양으로부터 1.52 AU(1 AU는 지구-태양 간 거리, 1억 5천만 킬로미터), 즉 태양으로부터 약 2억 3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타원의 궤도를 686.98일 (1.88년)에 한 바퀴씩 공전하고 있습니다. 화성은 지구보다 훨씬 작습니다. 지름이 6,794 ㎞로 지구지름의 절반이 약간 넘고, 질량은 지구의 10분의 1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화성표면의 중력은 지구의 0.38배에 불과합니다. 체중이 3분의 1 정도로 줄어드니까 헤비급 체중을 가진 사람도 화성에서는 몸이 가벼워져서 날아갈 듯 한 기분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화성의 자전주기는 지구와 아주 비슷한 긴 24시간 37분입니다. 또 자전축의 기울기도 지구가 23.5도인데 비하여 25도로 아주 비슷하여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의 변화도 지구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지만 낮에는 기온이 25도 가까이 올라가고 밤에는 영하 110도까지 떨어집니다. 하늘에는 감자처럼 생긴 조그만 달이 두 개나 떠다닙니다.  

화성의 대기는 지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대기라 할 것도 없습니다. 뭐, 진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성분은 95% 탄산가스입니다. 오존층이 없고 자기장도 없으므로 태양광선의 자외선이 살인광선처럼 대기를 통과하고 우주로부터 방사능 입자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더러 먼지폭풍도 분답니다. 만일 인간이 우주복 없이 화성의 대기 속으로 나선다면 화성의 낮은 대기압이 고성능 진공소제기처럼 달려들어 호흡과 혈액의 산소와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뽑아내어 인간의 몸을 순식간에 북어처럼 말려버릴 것입니다. 우주선 주거공간에 그대로 머문다 할지라도 우주방사선을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화성에서는 화성의 지표면에 놓여있는 것이 다를 뿐 우주정거장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주복을 입고 밖에 나오는 것 말고는 그저 거주 공간 안에 전자게임이나 하면서 갇혀 있는 것밖에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지구와의 무선통신이나 인터넷이 가능하긴 하겠지만 지구와 화성 사이를 전파가 오가는데 몇 십 분이나 걸리니 그것도 문제입니다.

지구로부터 가져갈 수 있는 식량이나 물이 얼마나 될지, 화성에 도달할 때까지 좁은 우주선 안에 갇혀 캄캄한 우주공간을 8개월 동안 날아가는 동안 우주인들이 정신적 고통과 우주방사선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무중력상태가 가져올 무기력증과 골다공증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 인간관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화성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식량과 물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화성의 혹독한 환경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불의의 사고는 없을지, 과연 정착이 가능할지.....

화성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트루먼 쇼’ 같은 흥미로운 TV중계가 아니라 화성우주여행과 화성착륙의 위험한 순간들과 화성에서 우주인들이 하루하루 당하는 고통과 비극, 인간의 무모한 실험결과를 TV중계로 지켜봐야 할지, 란스돌프가 인류의 이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통하여 거부와 유명인사가 될 수 있을지 화성 우주인 프로젝트라는 인간들의 악한 호기심을 이용한 살인쇼를 벌인 희대의 악마로 지탄 받을지를 지켜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무덤으로는 화성이 최고일 겁니다. 화성에서 죽으면 절대 안 썩을 겁니다. 하루 한 번씩 영하 110도 냉동에다, 95% CO2(탄산가스) 밀봉방부에다, 생물도 없고, 박테리아 같은 세균도 없고, 태양 자외선, 감마선, 우주 방사선이 항상 완전멸균소독을 계속할 테니까요.

지구에 매장지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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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마젤란 망원경.....


우주를 살필 지름 25미터가 넘는 거대한 반사망원경이
칠레 아타카마사막 라스캄파나스라는 청정지역에 건설된답니다.
1조원이나 드는 이 프로젝트를 한국을 포함하여 11개국이 참여하는 거대마젤란망원경기구(Giant Magellan Telescope Organization: GMTO)가 추진중이랍니다.

이 반사망원경은 지름이 8.4미터에 달하는 대형 반사경 일곱 개를 붙여서 조합하는데 초정밀 가공기술이 필요한 반사망원경을 제작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가졌던 가장 정밀한 우주망원경은 지구궤도 640 km 상공에 쏘아올려진 허블 망원경이었습니다. 이 획기적인 허블망원경으로 인하여 인류는 우주 저편 머나먼 공간을 훨씬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대마젤란망원경은 지구상에 설치되는데도 워낙 망원경이 거대하여 우주의 빛을 모아 허블 망원경의 10배에 달하는 선명한 영상을 제공할 거라고 합니다. 우주과학자들이 흥분하며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우주에는 천 억 개가 넘는 은하(Galaxy)가 존재하며 은하들은 보통 천 억 개의 항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항성 주위를 도는 혹성들, 위성들을 합한다면 도대체 우주공간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어떤 과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무려 700 해(亥) 개랍니다. 지구상의 모든 바닷가, 강가, 사막의 모래알을 합한 숫자 보다 많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의 수는 60조(兆)에서 100조(兆)라고 합니다.
새끼손가락 끄트머리 정도(1 cc) 부피 안에 10억 개의 세포가 들어있는 셈입니다.
세포의 지름은 1,000분의 1 밀리미터 정도이고요.
그리고 이 세포의 가운데 들어있는 세포핵 안에는 DNA가 들어 있습니다.
DNA는 약 30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들, 아네닌, 티민, 구아닌, 시토닌이라는 네 종류, A-T-G-C 염기들이 이중나선으로 연결되고 접혀져서 염색체를 이룹니다. 너무나 작아서 30억 개나 되는데도 세포핵 속에 차지하는 부피가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체의 DNA 단백질 알갱이 수는 얼마나 될까요?
100조 곱하기 30억 = 3,000 해(亥).....
끝 간 데 모를 저 우주공간의 모든 별들의 숫자 보다 우리 몸 안의 DNA 알갱이가 훨씬 더 많군요.
그 많은 DNA 알갱이를 어떻게 조합하여 무슨 정보를 어떻게 입력시켜 놓았기에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별 위에 생겨나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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