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말씀은 성경 첫머리, 첫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안 믿어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주는 원래 있었고
우연히 생명체가 생겨나서 진화했으며
우리 인간은 그 우연과 진화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만일 우주가 원래 있었고 우리가 우연히 생겨난 생명체가 진화한 고등동물이라면
성경 첫머리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거짓말이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도 아니면서 수 억 년 고생해서 진화한 우리에게 가만히 다가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거짓말하는 사기꾼이 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니라.” 하신 성경의 첫머리 말씀을 믿지 못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사기꾼 거짓말쟁이, 가짜 하나님, 악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천지를 지은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요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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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애가 3장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죽임당하는 참혹함을 어디에 비기겠습니까? 예레미야 애가는 나라가 짓밟히고 백성이 죽임당하고 예루살렘성이 훼파당한 그 참혹한 현장에서 부르짖는 애통의 노래입니다. 5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 애가는 각장마다 각 절이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첫 글자를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에 맞추어 22절까지로 되어 있는데 3장만은 첫 글자를 세 번씩 반복하여 모두 66절로 되어 있습니다. 이 예레미야 애가를 통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따른 슬픔과 비통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자가 바로 예레미야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자는 내로다.” 예레미야를 대표로 삼고 본보기로 삼으셨는지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매로 예레미야를 치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치신 그 고통을 토로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둠 속에 자기를 집어 넣으시고, 자주자주 치시고,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고, 뼈를 꺾으시며, 쓰디쓴 담즙과 수고로 둘러싸고, 나가지 못 하게 하시고, 사슬을 무겁게 하시고, 사자같이 곰같이 엎드려 기다리시고, 내 몸을 찢으시고, 활을 당겨 내 허리(킬레야: 콩팥, 신장)를 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고,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시고, 조약돌로 이를 꺾으시고 재로 덮으셨다는 것입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기도를 물리치시고 들으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부르짖습니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도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죄 없이 버림 받아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의 토로는 그 고통과 슬픔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 고통과 재난, 쑥과 담즙을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합니다. 그 고통을 마음의 중심에서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22절,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며,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심하고 고통이 크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난당한 백성들에게, 그리고 또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40-41절).” 주께서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인하여 우리를 살육하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시고, 구름으로 스스로를 가리고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우리를 열방 가운데 던져 모든 대적들이 입을 벌려 우리를 삼키고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며. 내 눈에서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고, 대적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지고 우리의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우리가 멸절되었다고 해도 오직 우리가 부를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를 돌아보시고 건지시고 신원하시며 보수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죽어 없어진 것 같이 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의 흐름은 예레미야애가 전체(1-5)의 흐름과 상통합니다. 처절한 슬픔과 고통을 토로하며 예레미야애가 5장 끝부분은 그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오직 주께로 돌아가겠다고 하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버리셨다고,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크다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고 던지시며 설사 우리를 버리신다 해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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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보니엠’이라는 흑인 보컬그룹이 있었습니다. 70년대 후반이니까 40여년 거의 된 것 같은데 지금도 기억나는 히트곡은 ‘바벨론 강가(By the River of Babylon)'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 의미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냥 특색 있는 팝송으로만 생각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바벨론 강가 거기에 우리 앉아, 아아, 우리는 슬피 울었네, 우리가 시온을 기억할 때.....”, 바로 시편 137편 앞부분이었습니다. 그 노래 가사에는 시편 137편처럼 “에돔 자손을 치소서, 멸망할 바벨론아,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하는 바벨론과 에돔을 향한 원망과 복수와 저주의 소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137편을 생각하면서 다시 들으니 단조롭고 경쾌하게 흐르는 음률과 흑인 특유의 음색 가운데 예루살렘을 훼파당하고 수천 리 머나먼 바벨론에 끌려와 원수들에게 종살이하며 그들을 위하여 비파와 수금을 타며 노래할 것을 강요당하는 비참한 상황에서 ’내가 어찌 원수들을 즐겁게 하려고 주의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차라리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어다,‘ 강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시온성을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애곡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한 때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구가했던 이스라엘은 타락하고 분열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차례로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를 보내 그들이 우상숭배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셨지만, 한 때는 히스가야와 요시아를 통하여 신앙의 회복이 잠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끝내 멸망의 길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흩어버렸고 바벨론은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쳐 죽이고 그 눈을 뽑고 사슬에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죽게 하였고 귀인들은 죽여 버리고 빈천한 자들만 포도원 농사를 위하여 남겨 두었으며 예루살렘을 모조리 파괴하고 성전의 모든 금, 은, 놋을 모두 뜯어서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이 때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의 숫자는 겨우 4,600 명에 불과했다고 예레미야 52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예루살렘은 황폐한 채 버려져 있었고 요단강 동편에 살던 에돔 족속이 슬금슬금 들어와 유대땅을 차지하고(이 족속에게서 나중 헤롯왕이 나옵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 일부는 애굽으로 내려가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나중 이들에 의하여 헬라어성경 칠십인역이 번역됩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도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의 처참한 파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예레미야서도 그 말미에 그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애가(哀歌)란 애통하는 노래란 뜻입니다, 1장의 1절부터 22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머리글자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아름답고 영화롭던 예루살렘이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임당하고, 잡혀가고, 유린당하고, 손을 벌려도 도와주는 이 없고, 목 놓아 울어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이 없고, 보물을 먹을 것으로 바꾸고도 굶주리는 비참한 기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없고 도움도 없는 처참한 상황을 애통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하소합니다. 백성들이 패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징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통하게 우리를 돌아보며 말합니다.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관계가 없다니요? 우리에게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패역과 멸망과 고통 가운데 우리 인간 모두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은혜를 베푸시지만 패역한 인간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멸망길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오랜 침묵과 어두움을 거쳐 하나님은 끝끝내 구원사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한 때 기독교의 땅이었던 유럽, 로마 가톨릭의 암흑의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한 때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신앙을 회복하기도 하였지만. 다시 신대륙 미국에서 신앙의 불길과 선교의 횃불이 타오르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 선교의 불길이 한국과 아시아로 옮겨가기도 했고 다시 아프리카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인류역사 전체,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우상을 따라 멸망길로 달려가던 이스라엘과 유다와 오늘날 시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싶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인간은 그럴까요? 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시대의 패역과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오늘날 인류의 모습은 어째서 그렇게도 닮아 있으며 그렇게도 변함이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인간들은 그러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다음에야 비로소 강가에 수금을 걸어놓고 통곡하게 되는 할 수 없는 존재들일까요? 심판의 그 날에는 울어도 소용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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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와 떡의 약조

 

홍수가 나서 물이 밀려 내려오는데 강 아래에 대책 없이 앉아 있으면 쓸려 내려갈 것입니다. 산불이 나서 타들어오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타 죽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주님께서는 누가 망대를 쌓으려면 먼저 앉아서 망대를 쌓는데 드는 돈과 자기가 가진 돈을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가진 군사는 일만인데 이만의 군사를 거느린 왕이 쳐들어온다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승산이 없으면 빨리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대책 없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린다면 미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미련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세상이라는 뜨뜻한 욕조에 느긋이 들어앉아 즐기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두워가고 멸망과 심판이 다가오는데도 빛을 찾고 진리를 찾고 자신의 생명길을 찾는 고민은 없습니다.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고민하거나 두려움 가운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습니다.

기브온 족속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그들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의 칼날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와 아이를 진멸한 것을 듣고 대책을 강구하고 머리를 짜내어 묘수를 찾아내었습니다. 사신의 모양을 꾸미고 낡은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해어지고 찢어진 가죽포도주 부대와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본진이 있는 길갈로 찾아와 화친조약을 맺자고 청합니다. 여호수아가 누구냐고 묻자 그들은 멀리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무리는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속아 그들과 불가침 화친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삼일 뒤에 그들이 바로 가까운 곳에 사는 진멸대상인 기브온 거민이라는 알게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맹세 때문에 그들을 어찌하지 못 하고 살려 주어야 하게 됩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종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물 긷는 자와 나무 패는 자들이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다섯 왕들이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을 치려고 쳐들어오자 여호수아는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가서 기브온 족속을 구해내는데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우박을 적군에게 퍼부어 죽게 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 온종일 해가 지지 않도록 하여 그들을 진멸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도망쳐 굴 속에 숨었던 가나안 족속의 다섯 왕을 쳐 죽여 나무에 매답니다.

설사 기브온 족속이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과 맺은 약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브온 족속에게 손을 대지 못 하게 하셨고 그 약조를 깨뜨리지 못 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을 나타내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은 포도주와 떡이었습니다. 그들의 포도주는 낡은 가죽주머니에 담기고 그들의 떡은 마르고 곰팡이가 났지만 주님의 보혈을 의미하는 포도주, 주님의 살을 의미하는 떡은 결코 변질되지 않으며, 주님의 언약은 영원히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멸당해야 할 기브온 족속이고 거짓말로 속임수를 쓴 교활하고 악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 예수와 발음이 비슷함) 앞에 포도주와 떡의 언약을 들고 나아온 그들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훗날 다윗왕 때에 혹심한 기근이 삼년이나 계속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왕 때 사울과 그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학살한 죄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기브온 족속에게 학살과 학대를 자행한 일곱 사람을 끌어내어 기브온 족속에게 내어주어 목매어 달게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진노가 그치고 기근이 그쳤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 편에 속해야 삽니다. 어떻게 해서든 메시아의 계보에 속해야 생명을 얻습니다. 말세의 징조와 심판의 그림자가 가까울수록 말입니다. 거기엔 도덕과 체면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갔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을 숨겨주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했으며 메시아의 계보에 속하게 됩니다. 룻은 죽기 살기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랐고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밧세바는 남편을 배신한 부정한 여자로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체면을 생각하고 도덕을 지켰더라면 그들에게는 결코 구원이 주어지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모든 기준을 뛰어넘는 최고지선(最高至善)입니다. 우물쭈물 따질 일이 아닙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살고 봐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의 생명을 구원해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아이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일까요? 아간의 죄가 그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간은 가나안 땅을 더럽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더럽히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범죄는 결코 저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훔쳐서 숨기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죄요, 약속을 믿지 않는 죄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요, 예수님을 우습게 여기고 더럽히는 죄인 것입니다. 한국교계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아간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요? 믿는다는 자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지켜보고 계신다고 믿는다면 절대로 저지를 수 없는 음란의 범죄까지 저지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목회자가 말입니다. 또 많은 성도들이 이 정도쯤이야 하고 작은 범죄라 얕보고 저지르는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보면 별 것도 아닌 아간의 조그만 범죄에 하나님은 극렬하게 진노하셨습니다. 온 이스라엘을 버리실 정도로 말입니다. 아간을 불태우고 돌로 덮어 깨끗이 제하자 비로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성 공격계획을 자세히 지시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아이성 거민을 진멸하되 물건과 가축은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리고는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지만 아이성은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한 아이성 뒤에 매복하라 하시고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공격하도록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여리고성에서는 그저 여리고성을 도는 것과 나팔을 길게 불 때 소리 지르는 것밖에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런데 조그만 아이성에서는 무기를 잡고 스스로 예비하여 밤에 성 뒤에 매복하고 뜨거운 광야를 달리고 맹렬한 전투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자가 작은 토끼 한 마리 잡을 때도 전력을 다 하는 것처럼 아무리 복음과 생명을 위하여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있을 수많은 전투에 능히 이길 수 있는 군사로 세우고, 싸우고 쟁취함으로 승리를 얻고 맛볼 수 있도록 훈련하신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전지시에 따라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아이성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거짓 패하여 광야길로 도망쳤습니다. 기세가 오른 아이성 거민들은 성문을 열어놓은 채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맹추격하였습니다. 메튜 헨리 주석에서는 ‘마치 패배하는 것 같았으나 궁극적 승리를 거둔 여호수아의 싸움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해 사단에게 패배한 듯 하였으나 부활하심으로 완전하고도 영원한 승리를 거둔 그리스도의 위업을 예표해 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매복하였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단숨에 아이성으로 달려들어 점령하고 성읍에 불을 놓았습니다. 도망하는 체 하던 군사들이 돌이켜 아이 군사들에게 달려들고 매복하였던 복병들이 또 아이성 군사들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단창과 아이성의 불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사기충천, 그러나 아이성 거민에게는 경악과 절망과 혼란을 주었을 것입니다. 아이성의 군사들은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당황하고 두려웠을까요? 그야말로 통쾌한 승리의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단창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끝까지 내려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로 따르던 아이 모든 거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여자, 노인,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진멸시켰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방족속들의 포로에 대해서는 여자와 아이들은 살려주고 종이나 아내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민 31:17,18; 신 21:10-14). 그러나 가나안 족속은 본 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이도록 명해졌습니다(신 20:16,17). 성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던 여자, 노인, 어린아이까지 이처럼 남김없이 살육하고 아이성 왕을 나무에 매달기까지 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속성에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일삼던 가나안 거민의 죄악을 철저하게 미워하신다는 점과 아울러 우상숭배의 결과는 곧 사망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사람의 선하고 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냐 우상숭배의 백성이냐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그 날 천국에서는 단 한 사람의 죄인도 단 한 사람의 우상숭배 백성도 허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순결한 그리스도의 몸, 그 살과 피로 들어가는 천국 땅, 하나님의 나라의 예표인 가나안 입성에는 단 한 점의 오물도 허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경히 여기지 마십시오. 아간의 죄를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가 나아가는 길과 우리의 마음에서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진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어떠한 것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우리는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떨림과 두려움과 거룩함입니다. 그 일, 곧 우리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은 조그만 아이성 전투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전력을 다 하는 것 같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전력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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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점의 오물도 허용할 수 없다!

 

 

앞서 말한대로 여리고성은 해발 마이너스 250 여 미터의 낮은 곳에 있고 이스라엘 백성이 진군하는 방향인 벧엘은 약 16 킬로미터 거리에 해발 400 여 미터의 높은 곳에 있습니다. 표고차 650 미터 정도의 오르막길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리 올라가는 도중에 아이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땅이 비옥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큰 성을 이루었던 여리고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그만 성입니다. 여호수아는 늘 하던 방식대로 미리 정탐을 보내어 아이성을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돌아온 정탐군들은 아이성이 작으므로 모든 사람을 수고롭게 할 게 아니라 이삼천 명만 보내면 능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말대로 삼천 명 가량의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 륙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습니다.

간혹 여호수아가 조그만 아이성을 우습게 여기고 전쟁에 임했기 때문에 패한 것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첫 절부터 명확하게 그 이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것은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 즉 온전히 바친 물건을 빼돌려 숨긴 범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교만하거나 자만했던 것 때문도 아닙니다. 이삼천 명의 군사가 너무 적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패배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놀라고 당혹하고 슬퍼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하고 비통하게 고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지파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유다 지파가 뽑혔고, 세라 족속이 뽑혔고, 삽디 가족이 뽑혔고, 아간이 뽑혔습니다. 성경은 제사장이나 여호수아가 제비뽑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뽑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흰 보좌 심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셨지만 가나안 땅에서 새로이 출발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에 대해서 극렬하게 분노하시는 것으로 시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죄에 왜 이렇게 극렬하게 진노하셨을까요? 아간의 탐심과 도적질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의 것을 훔쳤기 때문에 화가 나신 것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과 순종을 요구하신 것일까요?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신다는, 극단적인 공동체의 순결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적으로 완전하고 거룩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밭 판 돈 일부를 숨겼다가 죽임당하는 것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완전무결과 거룩함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패역하고 부족하고 죄많은 것을 모르셨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빼놓고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 생명, 곧 독생자의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점 죄악도 흠도 없는 거룩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 독생자의 몸, 거기에 한 점의 흠도 더러움도 허용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습게, 경홀히 여김 받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감히 주님의 몸, 그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순종함으로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입니다.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
.

나팔소리 길게 울리거든 외치라.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 사해(死海)입니다. 캘리포니아 데쓰밸리(Death Valley)의 Bad Water도 해수면 보다 85 m 정도 낮다고 하는데 사해는 바다표면보다 무려 400 미터 이상 낮습니다. 그곳은 공기가 400 미터나 더 두꺼운 셈입니다. 그래서 태양빛의 자외선이 땅에 닿지를 못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썬크림을 바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물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갈 곳이 없고 증발하여 아주 짠 소금물이 되었고 사람의 몸이 둥둥 뜹니다. 여리고는 그리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강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시 바다표면보다 250 미터 가량 낮습니다. 여리고는 요단강이 흘러내리면서 쌓은 흙으로 너른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기름진 토질 덕분에 오렌지, 바나나, 대추야자 등 열대과일이 풍성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여름엔 메마르고 무덥지만 겨울과 봄에는 수많은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로 거대한 향수 항아리에 담겨 있는 듯 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무너진 여리고성이 실제로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성경의 기록이 틀림없다고 믿은 고고학자들의 끈질긴 발굴작업이 1868년부터 무려 100년 동안 이루어졌고 이로써 여리고성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여리고성은 외벽과 내벽 등 두 겹으로 되어 있으며 외벽은 5 m 정도 높이의 기초 성벽 위에 두께 2 m, 높이 7 m의 진흙벽돌 벽으로 세워졌고 내벽은 높이가 14 m 정도 되는 둑 위에 다시 높이 솟아오른 내성벽의 구조로 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이중성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항아리에 담긴 채 불에 탄 곡식과 여러 가지 유물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고 남은 성벽이 있는데 그 자리는 기생 라합의 집이 있던 성벽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튼튼하게 쌓은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진 것일까요? 성경은 제사장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함께 함성을 지를 때 성벽이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를 여리고성의 고유진동수가 나팔소리와 고함소리가 만들어낸 진동수와 일치하여 공명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때마침 지진이 일어나 성벽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라는 것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입구에 버티고 선 여리고성....., 성경에 기록된 이 여리고성의 의미에 대하여는 수많은 해석과 설교가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맞닥뜨리는 고난이다, 축복을 받기 위하여 넘어야 하는 시험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고 그래서 오직 기도로만 넘을 수 있는 고비다, 한 주일 날짜에 비추어 엿새 동안 한 바퀴, 그리고 주일에는 일곱 바퀴, 즉 하나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드리는 주일예배로 하나님이 복 주시고 응답하신다, 무장한 군사가 앞서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궤가 가고, 일곱 제사장의 나팔이 울리고, 그 뒤를 백성들이 불평 없이 조용히 따르는 질서와 순종, 등등...

아무튼 가나안 땅 입구, 거기에 여리고성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은 백성들로 다시금 할례를 하게 하셨고, 애굽의 수치가 물러가게 하셨고,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보내셔서 여호수아에게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하셨고, 백성들로 하여금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을 따라 엿새 동안 매일 한 바퀴씩, 그리고 일곱째 날에 일곱 바퀴를 돌게 하신 다음 일곱 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함성을 지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여리고성 가나안 족속에게는 닥쳐온 심판의 함성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리고성 앞에 섰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례를 새롭게 하고 우리에게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 떠나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매일 입을 닫고 침묵과 경건으로 하나님 앞에 서며 그 말씀을 우리 안에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생명의 복음에 대하여 외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어두운 세상의 견고한 진들이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침몰, 안산 단원고교 학생을 포함, 3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세월호가 구원파 이단 유병언의 청해진해운 소속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구원파 신도들의 맹신적 복종과 헌신을 통하여 온갖 교묘하고 야비한 수단을 동원, 재산을 축적해온 유병언의 파렴치한 행태가 밝혀지면서 세상을 아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원파는 무엇인가요?

박신찬-유병언 계열, 박옥수 계열, 그리고 이요한 계열로 나누어지는 그들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어째서 그들은 구원파에 몸을 담고 평생토록 교주 유병언에게 충성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구원파에 구원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가급적이면 짧게, 간략하게 간추려 이 문제에 대하여 쓰고자 합니다.


1. 구원파 교리

구원파의 교리는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고 구원의 핵심을 깨달아야 비로소 온전히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믿음의 비밀,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고 이를 입으로 시인할 때 그 사람은 진실로 모든 죄를 벗은 의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구원파의 핵심교리이다.


2. 구원파의 교리가 먹혀드는 이유

구원파의 교리가 먹혀드는 이유는 바로 “아하!” 하고 깨달을 때 오는 충격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크리스천들은 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은 이를 선포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구원을 받아 거듭나도 별다른 변화나 감동이 없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 확 달라지고 마음이 뜨겁고 기쁨으로 펄쩍펄쩍 뛰고 삶이 뒤집어지면 좋겠는데 믿기 전이나 믿음 후에나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마음에 의심이 생기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 지은 죄는 용서되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가, 예수 믿고 다시 죄를 지으면 도로 구원을 잃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과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교인들이 구원파의 밥이다.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연약한 크리스천들에게 다가가서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하고 물어 혼란스럽고 두렵게 만든 다음 “죄사함의 비밀”과 “의인으로 거듭나는 감격”을 가르쳐 깨닫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죄사함 받고 의인으로 거듭난” 그 감격에 일평생 구원파의 충성된 신도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구원파가 생겨나고 날뛰게 만든 것은 성도를 바로 세우지 못 하는 기성교회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이란 기쁨, 감동, 감격이나 확신, 징표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가 없어진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성도가 죄를 지었다고 도로 지옥으로 끌려간다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죄의 능력을 이기지도 못 한다는 말이냐, 성도가 구원을 얻지 못 한다면 예수님이 헛 죽으신 것이냐고 확실히 가르치지 못 하고, 바른 믿음 위에 확고히 세우지 못 했기 때문이다.  


3. 죄사함의 비밀, 의인으로의 거듭남

구원파가 가르치는 “죄사함의 비밀, 의인으로 거듭남”의 교리에는 교묘하고 무서운 함정이 들어있다. 그것은 “말씀 살짝 비틀기와 바꾸기”다. 그들은 죄의 해결에 있어 “안수”와 “전가”를 이용한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하여 세상 죄,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박옥수).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되묻는다. “이 손에 있던 죄가 안수를 통해 어린양에게 옮겨졌다면 이 손에 죄가 남아있습니까?” 그리고 답한다. “그럴 수가 없지요.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넘겨지지 않고 남는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 믿음의 코드를 꽂으십시오. 마음으로 당신의 죄를 예수님께 안수하십시오. 자, 이제 당신의 모든 죄는 한 점도 남김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러고서는 이어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죄가 남김없이 예수님께 넘어갔다면 죄인이 그냥 죄인으로 남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죄가 넘어갔다면 죄가 없는 사람, 곧 의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의인입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비밀입니다. 당신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모든 죄가 사해졌다니, 의인이 되었다니, 구원의 확신이 없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감동이겠는가?


4. 교묘한 비틀기와 바꾸기

잠깐!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파의 교묘한 말 비틀기(왜곡)를 끄집어내어야 한다.

과연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예수님께 안수하였는가?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무슨 자격으로? 세례요한이 무슨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 어린양에게 안수하는 대제사장? 예수님은 세상죄를 안수 받은 죄인이 되어 삼년동안 공생애?

말도 안 되는 왜곡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구원파는 바로 ‘우리 죄를 지시고’를 이용, 세례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안수 받은 ‘죄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해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신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아니면 죄 없으신 어린양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는가?

죄인 예수의 피는 더러운 죄인의 피인가, 흠 없는 어린양의 피인가?  

또 물어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려고 오셨는가? 우리를 죄의 저주, 곧 사망에서 구하려고 오셨는가?

당신은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가는가, 아니면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없는 몸을 속죄제물로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받으셨다. 만족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죄 없고 흠 없는 예수 어린양 제물을 만족하게 받으시고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푸시고 용서하셨다는 증거이다. 그렇다. 모든 죄인들이 용서받은 것이다. 이것이 대속(代贖 Redemption)이다.

구원파는 이 대속교리를 “죄속함”, 아니 “죄씌움 교리”로 바꾸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리고 죄인들이 의인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 게 아니라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고 말았으니 용서고 뭐고가 있을 수도 없다. 


5. 의인이 되었으

자, 어쨌든 구원파 교인들은 감격 속에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거듭난 의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안다, 진짜로 의인이 되지는 못 한 것을. 여전히 죄인의 속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말(言語)’이다. 말의 능력.... 하나님은 ‘네 입으로 말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대로 된다는 것이다. 입으로 시인하면 시인될 것이요 부인하면 부인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 ‘의인 됨’을 지킨다.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를 죄라고 하면 죄가 된다. 그러나 죄가 아니라고 하면 죄가 아니다. 말대로 되기 때문이다. 의인이 죄를 지을 수 없다. 의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 의인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죄가 아니다.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입으로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한 죄가 아닌 것이다.  

구원파에서 늘 다그치는 이러한 가르침이 너무하다 싶었는지 이요한이라는 사람이 구원파에서 뛰쳐나와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단체를 만들면서 좀 다른 교리를 만들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영적구원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이 아직도 사단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영혼만 구원 받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초대교회 때 교회를 어지럽힌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二元論)적 이단사상이다. 이요한의 그 외의 가르침은 박신찬-유병언이나 박옥수 계열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연예인 유진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저희 교회는 기독교복음침레회와 뿌리는 같지만 구원파와는 무관해요. 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어이없고 안타깝다.


6. 구별과 종말론

이단의 공통된 행태는 자신들만이 진리에 속하고 구원을 받은 특별한 무리라고 구별하고 기성교회를 멀리하거나 심지어 공격한다는 점이다. 기성교회는 구원받지 못 한 어리석은 무리요, 타락한 종교집단이요, 그들이 구원해 내어야 할 선교의 대상이다. 거짓선지자들이 누룩을 뿌리고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 기성교회는 심지어 바벨론이요 음녀이다. 그들은 십사만사천에 속한다. 신천지가 그렇고 구원파도 그렇고 많은 이단들이 그렇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종말론이 대단히 중요하다. 임박한 종말과 심판. 모든 교회들이 무너지고 무화과 잎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떨어지는 그 두려운 날 그들은 들림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을 받아들여 유럽공동체가 단일국가로 이어지고 중동의 평화협정과 전쟁이 지구최후의 아마겟돈 전쟁과 칠년환난, 천년왕국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가르친다. 이러한 종말론이 압박감과 공포분의기를 조성하여 신도들이 이탈하지 못 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한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해석하는 이단성도 유사하다 할 것이다.    


7. 구원파에 구원이 있을까?

구원파는 명백히 이단이다. 그런데 이단이라도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그들의 믿음에 다소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된 생각이다. 이단이 무서운 것은 아주 작은 차이, 사소한 견해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차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차이를 가져오는 데 있다.

아들을 죽이려는 도적이 있다. 그 아들은 어두운 광야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바로 그 때 다른 쪽에 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 둘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나 하나는 아버지고 하나는 도적이다. 비슷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닌 도적을 따라간다면 그 아들은 죽게 될 것이다.

사단의 모습은 광명한 천사이다. 그의 말은 달콤하고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는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처럼 매끄럽다.


예수님을 죄인 만들어 죽이고 자기들은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그들,

의인이 된 그들이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가 있을까?

구원파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

 



(짧게 쓰려고 노력했는데도 길어졌네요. 아무튼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2014. 5. 9, 이응한 목사)






하필이면 여리고성 코앞에서

 

 

40년 광야생활 끝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섭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을 보니까 모맥(밀과 보리)을 거두는 시기에 요단강은 물이 많아 언덕에 넘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봄, 초여름이 되면 북쪽의 헐몬산 눈이 녹아내린 물이 갈릴리 호수를 채우고 계속 흘러서 사해로 흘러갑니다. 언약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메고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섰을 때 물이 끊어지고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은 강바닥에서 돌 열 두 개를 취하여 길갈에 세웠습니다. 5장 1절을 보니까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단강을 말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네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앞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첫 번째 성 여리고, 길갈에서 여리고까지는 빤히 보이는 2마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길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거기서 할례를 하라 하시는 것입니까? 창세기 34장에 세겜 족속에게 할례 받으라 해놓고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 가서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할례를 받으면 며칠 동안은 아파서 어기적거려야 합니다. 꼼짝 못 합니다. 그런데 적이 빤히 보이는 길갈에서 하나님은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꼼짝없이 다 당하게 될 텐데 말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라는 표요, 하나님의 언약의 표입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너를 번성케 하리라 약속을 하시고,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라고 고쳐 주시고, 가나안땅을 후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손대대로 할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할례가 영원한 언약의 징표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하려면 진작 광야에서 할 것이지, 여리고성을 빤히 눈앞에 두고 할례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힘보다도, 무기나 군대보다도,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표시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리고 성을 앞두고 계십니까? 어려운 일을 앞두고 계십니까? 힘든 고비, 무서운 적을 앞두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다시금 할례를 받으십시오. 마음의 할례를 새롭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님의 소유라는 증표를 새롭게 확인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면, 우리가 주님의 소유라면 하나님이, 주님이 우리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이튿날, 그러니까 정월 15일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고 만나가 그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땅 소산을 먹었다면 무엇을 어떻게 먹었겠습니까? 광야에서 이제 가나안 땅에 막 들어온, 농사도 짓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두어 먹은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농사지은 보리와 밀을 거두어서 무교병을 만들고 또 볶아서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사사기를 보면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했을 때 미디안 백성들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어놓은 농사를 싹쓸이해 먹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위 굴과 바위구멍에 숨어서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이처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지나자 이제 40년 동안 광야에서 안식일을 빼고 매일같이 내렸던 만나는 그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싸우고 차지하고 빼앗고 탈취하여서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어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의 곡식은 주님의 살과 피, 영원한 생명의 떡입니다. 그것은 침노하는 자, 싸우는 자, 곧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자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우는 자로 이기게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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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 애굽 안에, 관 안에

 

창세기 강해에 거의 2년 걸린 것 같습니다. 창세기가 50장까지로 이루어져 있으니 한 주에 한 장씩 해도 1년, 두 주에 한 장씩 진행해도 2년이 걸립니다. 창세기 강해를 첫 장부터 끝장까지 마친다고 무슨 특별한 일이 되겠습니까마는 창세기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이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신앙의 가장 근본과 기초에 관한 책이라 할 것이며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그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떠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 속에서 그 타락하여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을 다시 부르시고, 부르심 받은 택한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고,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져가는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책입니다. 창세기는 우리말(한자어)로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은 Genesis, 곧 내력과 족보의 이야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하여 50장에 이르러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탄생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는 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여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마칩니다. 영어성경은 “In the beginning"에서 시작하여 ”in a coffin in Egypt", 즉 “시작 안에서”로 시작하여 “애굽 안, 관 안에서”로 끝납니다. 히브리어로는 “브 레싯”으로 시작하여 “브 에돈, 브 미스라임”으로 끝납니다. 시작 안에서 탄생하여 관 안에 눕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나고 걷다가 죽어 관 안에 드러눕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모든 인생들이 일평생 걷기만 하다가 죽어서 관 안에 눕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허망이요 허무요 비극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을 만드시고 그런 인간들이 일평생 걷다가 죽어 묻히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무능력한 하나님 노릇을 하신다면 그것 또한 비극이요 희극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 끝나는 존재로 내버려 두지 아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찾아오시고 부르사 소망으로 생명의 길을 향하여 걷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과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온 야곱은 이제 숨을 거두며 조상이 누운 곳,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묻힌 가나안 땅 막벨라굴에 자신을 눕혀달라고 명합니다. 또한 요셉은 훗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실 때 자신의 해골을 가나안 땅으로 메어가라고 명합니다. 그 명령대로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고 훗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셉의 해골을 메고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 세겜에 그를 장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눈을 감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 앞에서 걸어가게 하신 그들이 땅 속에서, 관 속에서 영원히 썩어 없어지게 하지 않으실 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새 생명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언젠가 오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릴 때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을 믿고 눈을 감고 그 땅 속에 그 관 안에 평안히 누운 것입니다.

창세기는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 즉 성도가 어떻게 죽을 것을 말씀하는 성경입니다. 성도가 무엇을 믿고 무엇 안에 눈을 감고 누울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짧은 인생, 죽음을 두려워 일생을 종노릇하며 실낱같은 목숨을 붙잡고 바둥거리다 가는 자들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공포와 멸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영원을 바라보는 자에게 죽음은 안식이요 영원에 잇닿은 통로요 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애굽 안에, 관 안에” 영원을 꿈꾸며 누운 것입니다.

야곱이 아브라함, 사라, 이삭이 누운 막벨라 굴에 눕고 야곱이 애굽에서 관 안에 누웠듯이
성도는 “믿음 안에, 주 안에” 소망을 안고 눕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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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 천년을 하룻밤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광야에서 25년을 행하게 하신 다음 이삭을 주셨으며 이삭의 기다림을 지나 야곱에 이르러 열 두 아들로 열 두 지파의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열 두 아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죄를 범한 르우벤이나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시므온과 레위까지도 말입니다. 이들 열 두 지파로 나라를 이루게 하시었으며 유다의 계보를 통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이요 택하심이요 은혜 베푸심이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부끄럽고 흠 많은 죄인들을 불러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사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로 삼으시고 주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아들들을 축복하기를 마치고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메어다가 아브라함이 헷 사람에게서 산 막벨라 굴,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레아가 잠들어 있는 그 굴에 장사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147년 일생을 하나님 앞에서 걸어온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다 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 이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그 모든 잠든 자를 일으키실 먼 훗날, 그 날까지 긴 기다림 속으로 잠들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죽자 요셉은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을 맞추고 그 수종의사에게 명하여 향재료를 그 아비의 몸에 넣게 합니다. 사십일 동안 향재료를 넣고 애굽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곡을 하였으며 바로의 허락과 분부로 온 집안과 바로의 궁의 신하들과 장로들과 군사들로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옮겨 헤브론,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성대하게 장사합니다.

(그로부터 3,50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 이 막벨라 굴 위에는 건물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건물의 절반은 유대인들의 기도처소로, 절반은 무슬림들의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지하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의 무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다림입니다.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아브라함은 광야를 행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를 주시기까지 기다렸습니다. 이삭은 광야에서, 장막에서 기다렸습니다. 야곱은 일생 동안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길을 걸으며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실로가 오시기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교회도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는 막벨라 굴에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곧 그들과 함께 누워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그리스도는 언제나 다시 오실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는 천사도 모르고 그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께서만 아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는 땅속에 누워 지금쯤 기다림에 지쳐 있을까요? 우리보다 앞서간 수많은 성도들도 기다리며 지루해 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아무리 긴 시간도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시는 순간, 마치 방금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것처럼 아무리 긴 시간도 하룻밤처럼, 잠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의 생각, 우리 편에서 보는 기준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길게 느껴지는 아득한 세월도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십억 년, 수백억 년 우주의 역사 가운데 우리 인류의 역사는 하룻밤이요 순간일 뿐입니다. 시간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시간이란 다만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긴 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천년, 만년, 억년, 수십억년, 아무리 긴 시간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시면 그만입니다. 영생이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수 만 년, 수 백 만년이 아닙니다. 수 백 억년 수 천 억년도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끝이 없는 영원이란 긴 시간입니다. 우리의 영생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도 잠 든 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도 곧 같은 약속 안에서 잠들어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천년을 하룻밤같이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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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 아버지의 축복

 

“Jacob Blesses His Sons", 오늘 말씀에 NIV 영어성경은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하다"라고 소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147년 동안 걸어온 인생길을 마감하는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야곱 자신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험하고 거친 나그네길을 걸어온 야곱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산 다음 180세에 죽었습니다. 눈이 어두운 채 참 오래 산 셈입니다. 계산을 해보면 이삭이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고 했으니 이삭은 에서와 야곱이 120세 되었을 때 죽은 셈입니다.

또 계산을 해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때가 17세였고, 애굽총리 된 때가 30세, 7년 풍년과 다시 2년의 흉년 뒤에 아버지 야곱을 만났을 때가 39세, 곧 22년 후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야곱이 바로에게 '나그네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했으니 이삭이 죽은 것은 야곱이 식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기 10년 전, 야곱이 120세 때라는 계산이 됩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할아버지 이삭을 보고 자랐을 것이고 요셉이 보디발의 감옥에 갇혀 있고 바로의 두 관원장이 투옥될 무렵 이삭이 세상을 떴을 것이라는 계산이 됩니다. (제가 쓸데없는 계산을 했나요?)

이제 야곱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불러 모으고 아들들에게 후일에 당할 일들을 이르며 축복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르우벤부터 시작하여 세 아들에게는 축복이 아닌 저주라 해야 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그러나 이어서 말합니다. ‘물의 끓음 같아 탁월치 못 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라.’ 아버지에게는 맏아들이야말로 가장 큰 기대와 사랑을 쏟는 대상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아버지에게 결코 용서 받지 못 할 죄를 저질렀고 그리하여 축복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어서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바로 세겜에서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살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혀 아버지를 모멸하였고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를 포함한 온 집안을 잔혹한 살인군단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리하여 위로 삼형제가 그들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아버지의 축복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십계명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이웃에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십계명을 간단히 정리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습게 여기고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모를 공경하였다면 결코 저지를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없다 하고 인륜을 저버리는 자에게 천국은 없을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더불어 함께 살던 이웃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추호의 용서도 없는 잔혹한 복수로 되갚은 것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이 셋이 저지른 범죄가 십계명, 주님의 계명을 범하는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지 못 한 축복은 그 다음 아들인 유다에게 쏟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향한 엄청난 사랑과 축복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이겠습니까? 순종함으로 쏟아질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그리고 엄청난 예언이 그에게로 더 하여 떨어집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이 예언은 메시아가 유다의 계보를 따라 오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에게도 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부끄러운 그 실족을 생명을 잇는 계보, 그리스도의 계보로 사용하셨습니다.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할 때 그를 죽이지 말고 팔자고 하여 요셉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칠년 기근 때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을 때 베냐민을 도로 데리고 돌아오지 못 하면 자기의 아들을 죽이라고 하면서 야곱을 설득함으로써 온 가족을 기아로부터 건져낸 셈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기이하게도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이어서 야곱은 다른 아들들에게 축복을 이어갑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할 것이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갓은 도리어 적의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야곱은 이렇게 열 두 아들들의 장래를 말하고 축복합니다. 평화와 풍요가 축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보기에는 이게 축복인지 뭔지 분간이 안 갑니다. 싸움은 이어지고 이스라엘의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끝까지 피흘리며 싸워야 할 것을 예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결국 온 이스라엘, 르우벤, 시므온, 레위 지파까지도 메시아의 축복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과 축복의 기도를 놓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연구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피투성이와 싸움의 축복입니다. 죄악으로부터 인류를 살리시려 피 흘려 죽으시려 유다 족속을 통하여 오실 메시아의 예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기까지 애굽에서,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피흘려 싸워 반드시 살아야 하며 반드시 이겨내어서 그 생명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죄 많고 흠 많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마침내 싸워 이기듯, 어쩌면 죄 많고 흠 많은 죄인들의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세상과 피 흘려 믿음의 싸움을 싸워 이기는 것, 그것이 우리의 축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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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 복 된 인생

 

 

만일 이 세상 삶이 전부라면, 인생의 부귀영화가 복이라면, 일평생을 나그네로 고생하며 살아온 야곱의 삶은 결코 복 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길은 130세 될 때까지 험난한 고난길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그토록 붙잡았지만,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복 주신다 약속하셨지만, 130세가 되도록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생전에 이루어지고 누린 것은 없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을 섬기며 고생하여 얻은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어버리고 라헬이 낳은 요셉마져 악한 짐승에게 먹혀서 죽고 눈물로 보내는 세월 끝에 극심한 기근까지 닥쳐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아들들을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보냈더니 애굽 총리가 아들들을 염탐 간첩으로 몰아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라헬이 낳다가 죽은 베냐민까지 내어놓으라 하니 어쩌면 야곱은 무슨 운명이 이다지도 가혹한가고 한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놓고 나서 야곱은 또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밤을 지새웠겠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야곱의 인생은 복된 인생도 형통한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복된 사람이었고 야곱의 인생길은 복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고 야곱의 그 험한 인생길, 나그네길을 통하여 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일평생을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고 일평생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쓰임 받았으니 이 보다 복된 사람, 이 보다 복된 삶이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가장 복 된 자요 자신의 삶이 가장 복 된 인생이라는 이 사실을 130세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고 애굽이라는 생각지도 못 했던 곳에서 자손들의 번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147세가 된 이제 복 된 야곱은 복 된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복 된 약속 안에서 잠들게 될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라면 죽음도 복 된 죽음일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야곱은 이제 빈손으로 죽지만 가장 큰 복을 안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 복 된 믿음을 품고 잠들 것입니다. 야곱은 자녀들에게 분부합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나의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야곱은 이제 거기 에브론의 밭 굴에 부여조와 함께 누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릴 그 날까지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죽는 것이 복 된 죽음이요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캄캄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을 가지고 담대하게 죽음 너머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품에 뛰어들어 안기는 것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후반은 그러한 믿음의 선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복된 것은 그들이 고난당하고 죽임 당할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말씀)를 붙잡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캄캄한 가운데서도 버리지 않고 믿음만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복 된 삶의 마침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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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8) "나도 안다, 내 아들아."

 

야곱이 애굽에 와서 17년이 지나 147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눈도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147년을 살았으니 오래 산 셈입니다. 그러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 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 좋은 일일까요?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도 “이 땅에서 너희 연수가 길리라.” 하시며 부모공경에 대한 복으로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969세를 산 므두셀라의 인생이 성경에 오래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래 살면 어떻게 될까요? 오래 살면 결국은 육신이 허물어지고 기운이 쇠하여질 것입니다. 육신이 무너지고 기운이 쇠하여지면 이 땅에서의 삶의 미련도 없어지고 죽음의 두려움도 사그라지고 괴로운 인생길을 어서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 쉬고 싶어지게 될 것 같다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만 그러나 그저 오래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 하고 죽음의 너머를 알지 못 한다면 이 땅의 삶은 여전히 미련으로 남고, 죽음, 곧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두려운 공포로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약속 받은 것, 그리하여 평안히 하나님의 품에 안길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떠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복 중에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과 또 죽음의 너머를 두려워합니다.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쳤고 이 세상에 오래 남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자손대대로 자기를 기억하고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죽어서도 혼령이 제사상에 찾아올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렇게 이름이라도 세상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유럽의 유명관광지에다 자기 이름을 새기기도 한다지요. 북한의 독재자는 금강산, 묘향산의 거대한 바위들마다 자신의 이름을 깊이 파서 새겨놓았습니다. 심각한 자연훼손입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떠나지 못 하고 금수산궁 유리관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 지은 죄와 악행이 하늘에 사무치는 것을 알아서인지 죽음이 두렵고 이 세상 떠나기가 어려워서인지 썩어가는 육신에 방부제와 알콜을 쳐바르고 유리관 속에 누워서 버티는 가증하고 가련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다 불못에 던지우고 그들이 쌓아올린 것은 다 소멸되고 재와 같이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조상에게로, 또 하나님께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옴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 복을 허락하시고 약속하신 약속, 영원한 약속 말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후손과 약속의 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 말입니다. 야곱은 그 약속을 붙잡고 그 조상이 장사된 곳, 막벨라굴에 레아도 장사하고 또 자신도 그곳에 장사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회상합니다. 밧단아람을 떠나 남편을 따라 아버지가 계시는 브엘세바로 돌아가는 도중에 에브랏, 곧 하나님의 떡집 베들레헴 길에서 베냐민을 낳고 죽어 그곳 길가에 묻힌 라헬을 말입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가련한 라헬이지만 그 통곡과 절절한 사모가 묻힌 그곳 베들레헴에서는 먼 훗날 메시야가 탄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는 라헬을 통하여 나타낸 그 아픔과 슬픔과 애통과 소망과 생명의 그 길 베들레헴의 그 길로 아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이 낳은 요셉, 그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품에 안고 입 맞추고 이들을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손을 어긋맞겨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오른손으로 축복하고 장자 므낫세를 왼손으로 축복합니다. 요셉이 이를 지적하자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고 하면서 계속 에브라임을 앞세워 축복합니다. 야곱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곱 자신이 에서의 동생으로 둘째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사실이었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기 살기로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았습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았고 장자권을 붙좇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받은 축복을 품어안고 천리길 외삼촌 집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켰습니다. 그 야곱이 지금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손을 어긋맞겨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둘째였기 때문에 둘째를 축복한 것이었을까요? 둘째를 장자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지레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목숨을 걸고 붙잡으라고 권면하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소털에 속아 아버지가 축복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야곱이 목숨을 걸고 붙잡은 것이 바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의 회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이기를 바라시나요? 무엇을 붙잡고 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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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7) 목자의 삶, 나그네의 삶

    7년 기근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을 떠나 야곱 일가가 모두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고센 땅에 도착합니다. 요셉은 형들 중 다섯을 택하여 바로를 알현하게 합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습니다, “너희 생업이 무엇이뇨?” 한국에서는 누구를 만나 인사를 나눌 때 옛날에는 어디에 사는 아무개, 누구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고, 요즈음은 대개 자신의 소속회사나 신분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끼리 어느 아파트 몇 평짜리에 사는지로 신분(?)과 등급과 써클이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이들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생업을 묻습니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로 결정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이 같은 질문을 하실지 모릅니다.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 그 때 “저는 이렇게 이런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외다.” 그런 다음 야곱이 바로에게 나아가 축복합니다. 아하, 그렇군요. 목자가 축복의 권세를 가진 사람, 천하의 바로까지 축복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로군요. (영어성경은 축복의 인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게 그거 아닌가요?)

    축복인지 축복인사인지가 끝난 후 바로가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나이인가 봅니다. 오래 살고 보아야겠군요. 야곱이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조상의 연수에 미치지 못 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보세요. 바로 앞에서 야곱의 대답은 ‘목자’였으며 ‘나그네’였습니다. 그리고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목자는 집이 없습니다. 양떼를 몰며 양떼와 함께 이동하며 장막에 기거합니다. 그 삶이 그리 평안하지는 못 합니다. 때로는 뜨거운 태양 아래 목마르고, 때로는 험악한 폭풍우에 부닥치며, 때로는 추위와 더위와 싸우며 때로는 악한 짐승을 지팡이와 막대기로 쫓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일백삼십 년을 살았다고 야곱은 대답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 인간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험하고 거친 세상 가운데서 악한 자들이 잡아먹고 삼키려고 노립니다. 양들은 악한 자들의 올무에 걸리고 구덩이에 빠지며 위험과 환난에 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시 28:9).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며 목자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도다.” 하시며 거칠고 험악한 나그네의 삶을 몸소 사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 17)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 귀한 직업이 목자인데, 그러나 애굽사람들은 그들에게 고센 땅, 좋은 땅 라암세스를 주긴 했지만 목축을 가증히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목자를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목자를 따르려 하지도 않고, 목자의 삶을 살려고도 않고, 나그네의 삶은 더욱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초라한 장막 보다는 웅장한 집을 짓고 거하며, 거칠고 힘든 삶 보다는 안온하고 풍족한 삶을 살기 원하며, 재산을 모으며, 명예와 권력을 좇으며, 좋은 것. 즐거운 것들을 좇으며, 영원히 죽지 않고 이 땅에 살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땅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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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46) 형통만이 축복일까요?

      [창 46: 1-4]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

      야곱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찾아 이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 아들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이 극심한 기근에서 자신과 모든 식솔들을 건져낼 막강한 실력자가 되어 있다니 꿈만 같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모든 소유와 식솔들을 이끌고 출발하여 아브라함부터 살아왔던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립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이상중에 야곱에게 나타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애굽에 내려가시겠고 먼 훗날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너의 눈을 감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의 일생과 그 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야곱은 차자(次子)였습니다. 형 에서가 장자(長子)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샀고 염소고기와 털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여 외사촌 라반의 집에서 뼈 빠지는 고생을 하였고, 네 아내로부터 열 두 아들을 얻었으나 외삼촌과 외사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형 에서가 온다는 두려움에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으며, 세겜에 주저앉았다가 엄청난 일을 당하였고, 아버지의 집이 가까운 베들레헴 길가에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다음에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었고 지금까지 한탄과 아픔 속에 세월을 보내었으며 다시 극심한 기근을 당하였습니다. 어쩌면 130세가 된 지금까지 그의 일생은 고난과 아픔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열 두 방백을 낳았고 번성하였습니다. 그 동안 이삭은 에서와 이삭 둘만 얻었을 뿐입니다. 에서는 열 한 족장을 낳았고 유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네 아내로부터 열 두 아들을 얻기는 했지만 7년의 수고를 수일처럼 여겼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또 요셉을 잃은 아픔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과연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편이시고 자기를 지키시고 사랑하신다고 확실히 믿었을까요? 혹시 형이 허기진 틈을 타서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고 염소고기와 염소털로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그 야비한 사기행위를 하나님이 과연 용서하셨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불안해하고 의심하지는 않았을까요? 어쩌면 자신이 일평생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신다고 해서 형통과 번영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이 번성하고 에서가 형통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야곱을 택하셨고 야곱의 일평생 야곱을 떠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일평생은 험한 세월, 나그네길이었습니다.

      형통만 좋아하지 마십시오. 야곱의 일생을 보면 어쩌면 형통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저주요 고난이야말로 죽자 사자 하나님을 붙잡게 만든 축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신의 나그네길은 어떤가요? 고난 속에서 하나님만 붙잡는 축복을 누리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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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45) 해후

       

      양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짐짓 모르는 체 하면서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게 하고, 은잔을 자루에 숨겨 넣었다 적발하는 방법으로 베냐민을 돌려보내려 하지 않은 요셉, 그 요셉의 속마음은 어땠을까요? 자기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인 형제들을 용서할 수 없는 미움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동생 베냐민을 향한 사랑.... 그 가슴은 얼마나 격한 감정들로 소용돌이 쳤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냉정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드디어 요셉의 가슴은 더 이상 견뎌내지 못 하고 터져버리고 맙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격정을 억제하지 못 하여 물러가라고 소리치고 형제들 앞에서 방성대곡을 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억제하고 눌러왔던 요셉의 가슴을 터뜨렸습니까? 그것은 유다가 요셉에게 들려준 아버지 야곱의 이야기,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두 아들 중 형을 잃어버리고 남은 막내아들을 생명처럼 아끼는 아버지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이 결탁되어 하나가 되었고 그 아들을 데리고 가지 못 하면 아버지는 죽을 것이라는 그 애절한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 앞에, 그 사랑 앞에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의 가슴은 아버지로 의하여 터져버린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이게 모든 것을 밝힙니다.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나이까?” 형들이 놀라서 뭐라고 대답을 못 합니다. “내게 가까이 오소서.” 형들이 가까이 가니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 그리고 요셉은 아직 흉년이 오년이나 더 남아 있으니 속히 가나안으로 올라가 아버지 야곱과 모든 식솔들을 모셔오라고 말합니다.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또 형제들과 입 맞추며 안고 웁니다.

      이 소식이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에게 전해지자 그들도 기뻐합니다. 바로는 수레와 노새들과 양식과 온갖 좋은 것으로 준비하여 아버지와 식솔들을 모셔오라고 명합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가나안으로 올라가 아버지에게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고 애굽 땅 총리가 되어 있더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이 황당한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합니다.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눈물을 금할 수 없는 감격적인 해후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얼마나 오랫동안 슬퍼하며 지냈습니까? 또 남은 베냐민마저 잃어버리는 줄 알고 얼마나 애를 태웠습니까? 형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버리고 나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살며 또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겠습니까? 요셉은 또 미움과 그리움과 고통의 긴 세월을 살며 아버지 야곱이 살아계시리라고 꿈엔들 믿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모든 고통과 슬픔이 한꺼번에 녹아내리고 사라지는 것 같은 감격적인 해후!
      아, 우리가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악과 고통을 벗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우리를 구하신 주님 앞에 나아갈 때도 이처럼, 아니 이보다 더욱 감격적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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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44) 아버지의 슬픔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고 열 한 형제는 도로 요셉의 앞에 끌려옵니다. 요셉은 그렇게 형제들을 끌어다 놓고 베냐민을 놔두고 다른 형제들만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요구합니다. 그토록 베냐민을 보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베냐민을 함께 데리고 돌아가지 못 한다면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될까요? 유다가 요셉에게 다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애달픈 아들 사랑 이야기를 말입니다.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 어미의 끼친 것은 그 뿐이므로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말하자면 그 형이 없어진 다음 베냐민이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요셉에게 그 간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우리가 아비에게 돌아갈 때 아이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우리가 아비를 죽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율법은 한 아내만을 인정합니다. 특히 그 아내의 형제를 취하는 것을 금합니다. (레18: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지니라. 그런데 레아와 라헬은 형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좀 잔인한 이야기 같습니다만, 두 사람 중 누가 야곱의 진정한 아내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곱은 오직 라헬을 아내로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을 연애하여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하면서 7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이 첫날밤에 야곱에게 들여보낸 것은 레아였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결국 형제인 두 아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두 아내의 투기와 아들낳기 경쟁으로 인하여 그들의 몸종인 빌하와 실바까지 모두 네 명의 아내를 두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직 라헬만을 사랑하고 라헬만을 아내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레아는 총이 없으므로(사랑 받지 못 하므로) 이를 보시고 하나님은 레아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고 아들을 많이 낳습니다. 무려 여섯 명이나 낳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뒤늦게 요셉을 낳았고, 브엘세바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고 죽습니다. 슬픈 여인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아내는 오직 라헬이었습니다.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힙니다. ‘이 아이가 진정한 내 아들이다, 내 장자다, 내 상속자다.’라는 무언의 선포나 같습니다. 그 일로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또 요셉의 꿈 이야기를 인하여 더욱 미워하게 되며 결국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자 아버지 야곱의 사랑은 고스란히 그 동생 베냐민으로 향하게 됩니다.

      유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27절)” 아버지 야곱은 다른 아들들에게도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다.’고 말했다면 다른 아내는 아내가 아니요 다른 아들들은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에게는 라헬만이 아내요 요셉과 베냐민만이 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왜 레아에게 야곱의 아들을 무려 여섯 명이나 낳게 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레아는 “남편 없는 자”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남편 없는 자가 더 많은 자녀를 낳습니다. 또 그 남편 없는 자를 통하여 여자의 후손, 메시아가 오는 것입니다.

      좌우간 야곱이 일편단심 라헬만을 아내로 사랑한 것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리고 야곱으로 볼 때 지금 자기 아내가 낳은 아들은 베냐민이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야곱의 독자인 것입니다. 그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이 없어지면 아비도 죽을 것입니다. 흰 머리로 슬피 음부에 내려갈 것입니다. 아비와 아이의 생명이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생명이 결탁된 아버지의 고통, 그것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고통의 예표일 것입니다. 아, 그러나 어찌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고통에 비하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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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44) 요셉의 은잔
       
      20년이 더 지난 다음 한 상(床)이 아니고 요셉 따로 열 한 형제 따로 차린 상이었지만 열 두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서 그렇게 다 모였습니다. 요셉의 정체를 까맣게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열 두 형제가 다 모인 줄도 모른 채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다른 형제의 다섯 배나 주면서 애틋한 사랑을 나타내었지만 형제들이나 베냐민은 요셉이 왜 그러는지 그 마음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해후 아닌 해후, 만찬 아닌 만찬, 잔치 아닌 잔치를 마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마음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그렇게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도 모르는 채 주님을 떠나 세상 가운데로 돌아가는지요.

      요셉은 그 청지기에게 명하여 양식을 각 사람의 자루에 가득 채우고 그들이 가지고 온 돈도 도로 그 자루에 넣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신의 은잔을 몰래 넣게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그들을 떠나보냅니다. 그리고 사람을 뒤따라 보내어 왜 은잔을 도적질하여 가느냐고 누명을 씌워 다그치고 자루를 뒤져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찾아낸 다음 그들을 도로 끌고 옵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도적질한 죄를 뒤집어쓰고 요셉의 집으로 되끌려 온 것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그토록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잔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기도 하며 자신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집어넣어 보낸 것입니다.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마시지 않을래? 네가 떠나가면 나는 누구와 마시겠느냐? 내가 이제 누구와 즐거워하며 잔을 나누겠느냐? 네가 떠나가면 나는 이 은잔이 필요 없다. 그러니 이 은잔을 가지고 가라.” 그런 마음이었을까요?

      복음서(마26, 막14, 눅 22장)에는 주님이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성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떡을 떼어 나누어주시며 ‘이것이 내 살,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 하셨고,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은 내 피, 새 언약’이라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가룟 유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에는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그 자리에서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어 유다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보십시오, 요셉의 앞에 앉아 함께 마신 형제들이 몇 명입니까? 주님과 함께 피의 언약의 잔을 나눈 제자의 수가 몇입니까? 똑같이 열 한 명입니다. 이런 것까지 일치하는 것이 어찌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은 것은 자신의 마음, 자신의 사랑, 자신의 기쁨을 넣은 것입니다. 다시 만나기 전에는 다시 즐겁게 마실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면서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은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 주님의 심장, 주님의 생명을 우리의 자루에 넣으신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은 요셉이 그의 가장 아끼는 은잔을 자기의 자루 속에 넣은 것을 모르는 채 떠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은잔을 훔친 도적이 되어 도로 끌려 왔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채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주님의 잔을 훔친 도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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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43장) 누구인지 모른다면

      젊은 시절 주님을 몰랐을 때 성경은 고리타분한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기심에서 창세기 1장 첫머리를 읽어보았을 때 느낀 것은 무슨 종잡을 수 없는 황당하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무슨 마술이야?" 그런데 나중에 어떤 분이 성경보다 더 재미있는 책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제가 예수 믿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읽어나간 성경은 제가 읽은 제일 재미있는 소설책 보다 더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대하소설을 넘는 장대한 초대하소설이요 우주처럼 장엄한 희곡이며 어떤 사랑의 편지보다도 더 강렬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이 미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세겜과 도단까지 먼 길을 찾아온 그를 죽이려다가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 그 형제들로 인하여 타국에 끌려가 종이 되고 감옥에 갇히는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는 천하제일의 권세의 자리에 오른 요셉의 드라마틱한 삶, 그리고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닥친 극심한 가뭄과 기근, 그 형제들이 애굽총리가 된 요셉 앞에 나타나고, 그가 요셉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형제들과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도록 만드는 미움과 사랑의 줄다리기, 이러한 소설 아닌 소설의 줄거리와 구성은 어떤 소설가나 극작가도 흉내 내지 못 할 것입니다.
       
      야곱이 기근 속에서도 죽어도 못 보내겠다던 베냐민을 결국 포기하고 형제들에게 딸려 보냄으로 드디어 요셉은 베냐민을 만나보게 됩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온 것을 보고 그들을 모두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긴 요셉의 의도를 알지 못 하는 형제들은 지난 번 곡식자루에 넣어져 있던 돈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자리에 나온 요셉 앞에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합니다.
       
      요셉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너희 아버지 노인이 평안하시냐, 생존하셨느냐.’고 안부를 확인합니다. 베냐민을 가리켜 ‘이 아이가 너희의 작은 동생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소자여,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는 아우 베냐민을 인하여 마음이 타는 것을 누르지 못 하고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제들의 연회, 식사자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요셉 따로, 형제 따로, 아직 연합되지 못 하고 하나 되지 못 한 잔치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만나기는 했으나 아직 참으로 만나지는 못 한 채 말입니다.
       
      그들은 식사자리에서 요셉의 앞에 나이 순서대로 앉혀집니다. 그들을 모두 알지 못 하고서야 어찌 열 한 형제들을 모두 나이 순서대로 틀림없이 앉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애굽 총리의 정체를 알지 못 하는 그들은 이 일을 다만 이상하게 여길 뿐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식물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의 다섯 배나 주었습니다. 이 역시 베냐민에게만 왜 특별히 그러는지 그들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의 앞에 앉아서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아시는데 내가 주님을 모른다면 즐거워하는 것도 참 즐거워하는 것이 아닐 터이요 주님과의 만남도 참 만남이 아닐 것입니다. 요셉이 타는 듯 하는 마음으로 급히 안방을 찾아 울고 나왔어도 그 형제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모른다면 주님의 마음이 어떠신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며 애태우며 울고 계신지도 까맣게 모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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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43장) 잃게 되면 잃으리라.

      “애증(愛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증오”라는 말이지요.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에게 견딜 수 없이 불타오르는 사랑과 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증오의 감정을 동시에 가졌다면, 마음속에 그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감정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주제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막히게 잘 만든 소설이나 영화라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애증의 스토리, 그 참혹한 십자가의 피로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성경에 비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된 인간을 얼마나 미워하셨는지, 그러나 또한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기에 아들을 내어 주셨는지, 이보다 처절한 애증의 스토리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요셉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요? 열일곱 살 앳된 나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브엘세바에서 세겜, 그리고 다시 도단까지, 그 먼 길을 형들을 찾아갔는데 그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리고는 노예로 팔아버린 그 일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울부짖는 동생에게 잔혹하게 그 일을 해치운 형들, 그리하여 아버지를 영영 다시 볼 수없는 먼 곳에서 비참한 노예생활과 옥살이를 해야 했던 긴 세월, 그렇게 꽃다운 나이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 일이 어찌 잊어질 수 있겠습니까?
       
      요셉은 그 형들을 다그쳐 정탐일 것이라고 하면서 붙잡아 삼일동안 가두었지만 그 정도로 그 사무친 원한이 풀릴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을 다시 잡아 결박하여 가둔다고 마음이 가벼워지거나 위로가 될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향한 불타는 그리움과 사랑이 더욱 회오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원망스럽고 미운 형들이라 할지라도 한 핏줄이요 지금 기근으로 고통 받으며 식량을 구하러 온 그들을 매몰차게 내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혼자 방에 들어가 남모르게 울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남겨두게 하고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말째 동생을 데리고 다시 돌아오라 하면서 그 속에 그들이 가지고 온 돈뭉치와 식량을 채운 자루들을 지워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가 말째 동생을 데리고 오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 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결코 보내려고 하지 않고 형들은 식량을 구하러 내려오지를 못 합니다.
       
      말째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것, 숨겨놓은 가장 귀한 것,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놓으라는 요셉의 요구는 요셉이 당한 고통, 요셉이 겪은 배신과 버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릅니다. 야곱의 베냐민에 대한 집착은 가장 귀한 것은 내어놓지 않으려는 죄인 된 인간의 심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 할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요셉보다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고 요셉에 비할 바 아닌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귀한 것, 가장 아까운 것만은 숨기고 내어놓지 못 하고 포기하지 못 하면서 헛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가장 아까운 것을 포기하지 못 한다면, 주님 앞에 내어놓지 못 한다면 생명을 얻지 못 할 것입니다. 다시 애굽에서 가져온 식량마저 떨어져 갑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을 포기하지 못 합니다. 보다 못 한 유다가 말합니다. “아버지, 베냐민을 포기하세요,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두 번 갔다 왔으리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포기해야 삽니다. 그 포기와 내려놓음은 일찍 할수록 좋습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고통만 더 할 뿐입니다.
       
      계속되는 기근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붙잡고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준비하라.” 그들은 유향(myrrh), 꿀, 향품, 몰약, 비자(피스타치오 너트), 파단행(아몬드) 같은 가나안 땅의 소산과 귀한 선물을 준비하고 돈(은)도 배나 준비해서 다시 애굽으로 향하게 됩니다. 야곱은 모릅니다, 그 아들들도 모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여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님, 곧 구세주에게 드린 예물과 비슷한 예물을 준비하였다는 사실을.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 하면서 말합니다, “네 아우도 데리고 가라. 잃게 되면 잃으리라.”

      ‘잃게 되면 잃으리라’는 야곱의 말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던 에스더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나의 생명을 포기하고 온전히 맡기는 일입니다. 이러한 결단 없이는 아무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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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되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 ‘형들의 곡식단이 절하더이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더이다,’ 한 그 꿈으로 인해 형들이 죽이려고 하고 노예로 팔고 염소피에 적신 채색옷으로 아버지를 속였던 그 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그 꿈이 이 20년도 더 지나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 그 계획과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신 꿈과 약속도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7년 풍년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극심한 가뭄과 기근이 닥치자 온 세상이 굶주리고 가나안 땅의 야곱의 식솔들도 마찬가지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각국 백성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들어가고 요셉에게로 가는데 가나안의 이스라엘 아들들은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나 봅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돈 주고 사오는 것으로 7년 기근을 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그들 모두가 그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돈 주고 생명을 사올 수도, 환난을 피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구세주에게로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길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아버지 야곱의 강권으로 요셉의 열 형제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라헬이 낳고 죽은, 요셉이 없어진 다음 생명처럼 아끼는 요셉의 동복동생 베냐민은 함께 보내지 않습니다. 구세주 앞에, 생명을 위하여 주님 앞에 나오면서도 가장 귀한 것, 아끼는 것은 챙겨놓고 숨겨놓고 나오는 셈입니다.
       
        아무튼 이리하여 요셉의 형 열 사람은 양식을 사러 애굽에 내려가 애굽총리 요셉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 절하던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모르는 체 하면서 심문을 합니다.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를 엿보러 왔느니라.” 형들은 두려워하며 대답합니다. “내 주여 아니니이다.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형들은 요셉을 향하여 ‘주’라고 부르고 자신들을 ‘종’이라고 낮추어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독실한 사람들이며 한 아버지의 아들들로 열 두 형제이고 한 형제는 없어졌고 막내는 가나안 집에 두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꼬투리를 잡아 “너희들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너희들은 정탐들이다.”고 다그칩니다. 그들을 삼일동안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한 사람만 갇히고 다른 사람들은 양식을 가지고 돌아갔다가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형제들이 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여 이 곤욕을 당하는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한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르우벤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형제들은 애굽총리가 알아듣지 못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요셉은 그들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다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방에 들어가 혼자 울고 시므온을 잡아 결박하고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냅니다. 첫째 형을 잡아 가두는 것이 맞겠지만 그 첫째형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듣고 둘째형을 잡아 가둔 것 같습니다. 요셉은 하인들에게 명하여 형제들이 가져온 돈은 도로 자루에 넣고 양식을 넣었습니다. 이를 모르고 돌아가던 그들이 객점에서 자루 하나를 풀었다가 양식과 돈이 함께 들어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또한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자루에 돈이 그대로 들어있고 양식도 들어있는 것을 보고 모두가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돈을 주고 양식을 사왔다고 생각했지만 그 양식은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가서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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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41장) 땅에 생명을 주는 자


      오늘 말씀 37절을 보니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꿈 해석과 7년 풍년 뒤에 닥칠 7년 흉년을 대비하자는 요셉의 계획을 좋게 여기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만일 바로나 바로의 신하들이 요셉의 7년 흉년 예언과 요셉이 제안한 ‘범국가적 식량저장계획’을 허투루 여기고 비웃었다면, 나일강 푸른 물이 도도히 흐르는데 7년 기근이라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혹세무민 하는 황당한 예언 집어치우라고 하면서 요셉을 도로 감옥에 집어 넣어버렸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러나 바로와 신하들은 요셉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그를 애굽총리로 세웠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복음을 외면하고 어두움 가운데로 달려가는 이 세상이 걱정됩니다.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치리자로 높이 세웠습니다. 자기의 인장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어주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수레에 그를 태웠습니다. 버금수레란 두 번째 되는 수레이지만 첫 번째에 뒤지지 않는 수레라는 뜻입니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쳐 모두 엎드리라 하였습니다. 애굽 말로 ‘사브낫바네아’, 곧 ‘땅을 살리는 자, 땅에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의 새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혼인시켜 제사장의 사위의 신분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였고, 애굽을 구원할 구세주로 믿었고, 실질적인 왕으로 삼았으며 제사장으로 세운 셈입니다. 노예생활과 옥살이로부터, 마치 죽음에서 부활한 것 같은 요셉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모든 무릎이 그 앞에 엎드러지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애굽총리로 세움 받은 때 그의 나이 삼십 세였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와 같으니 이 일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애굽 온 땅을 순찰하고 풍년으로 남는 식량을 거두어 각 성에 저축하게 하였습니다. 일곱 해 풍년에 거두어 저장한 곡물이 바다모래와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요셉의 아내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노예로 팔려와 감옥에서 고생하던 요셉으로서는 이 일과 이 기간이 꿈과 같았을지 모릅니다. 그는 맏아들의 이름을 ‘므낫세’, ‘잊다’로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과 아버지의 집 일을 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 ‘창성’으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미국 땅에서의 삶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창성했으면 좋겠습니다.

      53절에 이르니 이제 하나님이 요셉을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7년 풍년이 지나고 흉년이 닥칩니다. 모든 나라에 기근이 닥치나 애굽 땅에는 곡식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55절을 보니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들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합니다. 7년이나 풍년이 들었어도 한 해 농사지어 한 해 먹는, 환난의 날에 대비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단 한 해도 버티지 못 하는 무서운 흉년이 닥친 것입니다. 바로 왕은 백성들에게 요셉에게 가서 요셉이 이르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천하의 모든 주린 자들이 요셉의 앞에 이르러 식물을 구하고 요셉이 명하는 대로 합니다. 마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심 같고 모든 주리고 목마른 자들 죽게 된 자들이 그 앞에 나아와 엎드려 생명을 구하는 모습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가진 우리에게도 이러한 역사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주린 기갈로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비틀거리며 헤매던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우리 앞에 나아오는 역사 말입니다.

      (창세기 41장) 관원장들의 꿈, 바로의 꿈

        여러 해 전 작고한 대통령께서 그런 말을 했다 하여 말이 많았지만 사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대부분 한창 젊은 나이에 군대에 가서 3년 동안(지금은 단축되었지만) 시쳇말로 ‘썩다가’ 옵니다. 저도 3년 썩고 왔습니다. 한창나이에 3년 군대생활이 얼마나 큰 희생과 손실을 요구하는지요. 그 3년 군생활이 인생을 뒤집어놓고 바꾸어 버립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다가 감옥에 갇혀 어느덧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무려 13년 오랜 세월을 “푹 썩은” 것입니다. 젊은 피가 끓는 한창나이를 몽땅 그렇게 보내었으니 얼마나 분하고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절대로 좋게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이끄셨습니다.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모든 살림과 재정을 맡았고 감옥에서도 전의가 감옥의 모든 잡다한 업무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요셉을 종살이로, 감옥살이로 연단하고 훈련하신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애굽총리가 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숙해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였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알게 하심을 따라 해몽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꿈 해석을 한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여 바로에게 잔을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머리가 잘리고 나무에 매달려 새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이 석방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탁을 넣었습니다. 요셉이 아직도 사람을 의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만일 요셉의 부탁을 받은 술관원장이 힘을 써서 요셉을 그 감옥에서 꺼내 주었더라면 요셉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방인과 불신자에게도 계시하시고 역사하시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답은 ‘하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강퍅하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셨고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풀을 먹게 하셨고, 고레스를 들어 나라들을 굴복케 하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자카리아스라는 분은 힌두교인이었지만 기이한 환상 가운데서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교인들이 꿈이나 환상 가운데, 혹은 이상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기독교로 귀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역사하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꿈은 일곱 살찐 소와 일곱 흉악한 소, 일곱 충실한 이삭과 일곱 마른 이삭의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다가올 일곱 해의 풍년과 일곱 해의 흉년의 예고였습니다. 또 그것은 심판의 날, 환난의 날, 7년 환난을 예표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예고는,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환난을 피할 수 있는 길, 면할 수 있는 길을 또한 예비하고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애굽과 온 천지에 내리실 일곱 해 풍년과 일곱 해 흉년, 그 재앙으로부터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셉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바로의 꾼 꿈을 듣고 그제야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해내었습니다. 관원장의 말을 듣고 바로는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옥에서 이끌어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요셉으로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들을 수 있었고 또 그 요셉을 총리로 세워 7년 흉년을 대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온갖 고난을 받고 지하의 감옥에까지 내려갔다가 애굽에서 가장 높은 총리의 자리에 올라 만인을 구하는 요셉의 이야기는 이 땅에 오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만유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관원장들에게와 바로에게 꿈으로 보여주신 것이 그들을 살게 하려 하심이듯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계시하신 것은 모든 죄인들을 살리려 하심입니다. 만일 살리려 하지 않으셨다면 꿈으로 미리 알리시거나 계시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계시된 그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옥으로부터 이끌어 내십시오. 그를 높이 세우십시오. 그에게서 들으시고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 발 아래 엎드리십시오.

      (창세기 40장) 나를 생각하소서

        형제들에게 배신당하여 노예로 팔려 애굽땅에 끌려가 종살이 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곳에서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까지 갇혔습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감옥에서 썩다가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영어(囹圄)의 몸입니다. 요셉은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하고 암담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기를 이 험악한 곳에서 건져주시지 않으시는지, 왜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지 의심과 원망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사람의 보기에 좋은 길이라 할지라도 좋지 않은 길일 수 있고 사람의 보기에 좋지 않은 길일지라도 좋은 길일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험한 길일지라도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로 인한 누명이 없고 옥에 갇히지 않고 보디발의 신임을 받으며 계속 형통하였다면 요셉이 언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애굽 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인도하심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왕에게 죄를 범하고 요셉이 갇혀있는 보디발 집의 옥에 투옥됩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하도록 하였고 요셉은 그들을 섬겼습니다. 바로 왕에게 지은 죄가 아무것도 없는 요셉이 바로 왕에게 범죄하여 진노를 산 죄인들을 섬기는 셈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0:28/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꿈이니 그들이 알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술 관원장의 꿈은 포도나무의 꿈이었습니다.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술 관원장은 그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손에 드렸습니다. 이 꿈에 대하여 요셉은 세 가지는 사흘이라, 사흘 안에 바로가 술관원장의 전직을 회복하여 전과 같이 바로의 잔을 받드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꾼 꿈은 흰 떡 세 광주리가 머리 위에 있고 그 윗 광주리에는 바로를 위하여 만든 여러 가지 요리가 있는데 새들이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꿈이 사흘 안에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의 목을 베고 나무에 달 것이며 새들이 그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의 꿈은 요셉이 해석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을 이루어가시면서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계십니다. 포도나무는 주님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돋아나는 연한 순은 주님의 모습 같습니다. 포도를 따서 즙을 내는 것은 주님의 몸이 깨어지고 피와 물을 쏟으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싶습니다. 오직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나아가는 자만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떡은 세상의 물질이요 각종 요리는 자기의 공로, 자기의 의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요셉은 굴 관원장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우편 강도가 주님께 부탁하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눅23: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우편강도가 주님께 한 그 부탁을 요셉이 술관원장에게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술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창세기 40장)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시면서 동시에 보내셨습니다. 복을 주시고 함께 하시며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만 부르시고 보내시며 아브라함 한 사람만 복 주시려 하셨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하신 약속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 속에, 허리에 있는 아들들, 여기에 있는 우리 믿음의 후손들까지도 다 포함될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부르시고 가라 하신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부르시고 보내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 아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가라 하셨는데 요셉은 참으로 기막힌 방법으로 부르시고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부르심을 입고 또 이곳 미국땅에까지 보내심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고 지키신 것처럼, 야곱을 보내시고 지키시고 복 주신 것처럼, 또 요셉을 보내시고 지키시고 복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부르시고 보내시고 복 주시고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복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잃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을 하나님의 것이 아닌 자기의 것으로 챙겨 가지고 하나님 눈앞에서 피하는 것입니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챙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숨었습니다. 모든 복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복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사 43:21).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시 23:3).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복은 저주로 바뀐다는 사실, 복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복이 인간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인간이 복을 받는 것을 시기하며 참소합니다. 또한 사단은 인간이 받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고 끊으려고 우리에게 시험이 옵니다. 성도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시험이 없다면 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 마귀가 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욥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복을 왜 받을 자격이 없는 욥에게 부어 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욥의 속에 있는 믿음, 순전한 사랑을 나타내어 욥에게는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어 보이시고 욥이 결코 하나님을 떠나거나 놓지 않을 것을 자랑하려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나타내는 자,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1~2)

        요셉에게는 무서운 시험이 닥쳐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믿는 요셉,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그에게 그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그러나 그 뒤에 닥친 억울한 누명과 부당한 투옥은 정말 어려운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이대로 평생을 감옥에서 썩다가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투옥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자에게 닥쳐야 하는 형벌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 것, 어떤 상황,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붙잡는 것은 피 흘리는 싸움입니다. 사단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변명하지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만 붙잡고 견디면 반드시 이길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곳으로부터 끌어내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주님의 모습,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실 것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

      (창세기 39장)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라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기록 속에 얼마나 많은 아픔이 담겨 있을까요? 피 묻은 채색옷을 보고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혀 먹힌 줄만 알고 슬퍼하는 아버지 야곱의 통곡이 애굽으로 끌려가는 그의 귀에 들렸을 리 만무합니다. 하필이면 애굽으로 끌려가는 길이 아버지의 집이 저만치 보이는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은 이십 개에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던 그의 가슴은 얼마나 멍들었을까요? 아버지의 사랑 속에 애지중지 자라온 열 일곱 살 소년 요셉은 채색옷을 벗기우고 신발을 벗기우고 그 먼 길을 걸어 애굽으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중동의 뜨거운 광야길을 끌려가며 그는 얼마나 울었을까요? 그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을까요?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 낮은 땅에 오시어 온 세상 죄인의 질고를 지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비아돌로로사’, 주님께서 홍포를 벗기우시고 채찍질 당하시며 피투성이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맨발로 걸어가신 그 길에는 주님의 핏방울이 알알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요셉을 노예로 샀습니다. 돈을 얼마나 주었는지, 은 몇 개를 주고 샀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죽이지 말고 팔자고 제안하여 형제들이 은 이십 개에 요셉을 이방인의 손에 판 것은 가룟 유다가 은 삼십 개에 주님을 팔고 그들이 로마인의 손에 주님을 넘긴 것과 닮아 있습니다.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 로마의 총독 빌라도...., 빌라도의 아내는 저 죄없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였고,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주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 넘기워 죽임당하셨고 요셉은 죄 없이 애꿎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주님의 양편에는 두 강도가 달렸고 요셉에게는 바로의 두 관원이 꿈의 해몽을 부탁하였습니다. 한 편은 생명을 잃었고 다른 한 편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옥에서 풀려나와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애굽을 통치하는 총리의 자리에 오르고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해내는 요셉의 이야기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고 온 백성을 구원하시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어질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보셨고 모든 사정을 아셨고 모든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그렇습니다,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하였을까요? 어떻게 요셉은 그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여늬 사람 같았으면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가.’라고 원망하고 반항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말씀하시고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내셨기 때문에 요셉이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은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붙잡았다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 요셉은 행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은근하고 비밀스러운 유혹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었고 어떠한 고통의 순간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므로 끝내 십자가의 그 고통을 이기셨을 것입니다. 아,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 버림당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버림당하신 것입니다.

        완전함은 무엇이며 완전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브람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걸어서) 완전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고난, 어떠한 고통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완전함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모습, 욥의 모습을 통하여 한 순간이라도, 어떠한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떠나지 않는 완전함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버림당하심으로 그 완전함, 그 의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습니까? 광야 가운데, 역경 가운데 걷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아니하는 어두움 속을 걷고 있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이겨내십시오. 우리는 할 수 없어도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으므로,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여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8장) 시동생 대신 시아버지

       

        마태복음 1장 첫머리는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로부터 “낳고, 낳고”가 이어지는데 원어를 보면 “낳고”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고(헬라어 에겐네센, 영어 fathered)”입니다. 낳는 것은 여자의 몫이요 공급하고 지키는 것은 남자의 몫입니다. 이름과 명분은 남자의 몫이요 실속과 생명은 여자의 몫입니다. 한국에는 칠거지악이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 하면 쫓겨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런 풍습이 없었습니다. 사라나 라헬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이를 못 낳으면 종을 사용하여 아들을 낳아도 됩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을 양자 삼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여자가 아들을 낳거나 만들거나 구하거나 해서 남편에게 주면 남편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아버지가 되고, fathered"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 풍습에 의하여, 율법에 의하여 요셉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의 적법하고 당당한 육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는 네 사람의 여자가 나옵니다. 사라, 리브가, 레아 같은 쟁쟁한(?) 주연급 여성 성경인물들이 아닙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이렇게 네 명의 여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여인이라는 점, 정상적이고 순탄한 과정을 거치지 못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8장의 다말입니다.

        다말은 유다가 맏아들 엘의 아내로 취한 가나안땅 여자, 곧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하여 여호와께서 죽이심으로 다말은 과부가 됩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오늘날 수혼제도라고 부르는 풍습법대로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 동침하여 형을 위하여 아들을 낳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오난은 자기의 씨가 형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싫어서 땅에다 설정을 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오난도 죽이십니다. 유다는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 셀라도 죽게 될까봐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셋째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는데도 혹시 또 죽을까봐 다말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다말은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늙어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어 유다도 홀아비가 됩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의 친정이 있는 딤나로 양털 깎는 자에게 갔을 때 사건이 벌어집니다. 다말은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합니다. 화대로 염소새끼를 받기로 하고 그 증거로 유다의 도장과 근과 지팡이를 맡아 놓고 동침합니다. 잉태하게 됩니다. 자신이 며느리와 동침한 것을 꿈에도 몰랐던 유다는 며느리가 행음하여 잉태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자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다말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어놓으며 이것들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 때 유다는 말합니다. “그는 나 보다 옳도다.”

        유다는 왜 며느리 다말이 옳다고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여자는 생명의 유업을 잇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을 크게 하시고 언젠가는 오실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여자는 여자의 후손, 곧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고통하며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여인이든 여자가 아들을 낳지 않는다면 구세주는 오지 못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 것, 그것은 모든 여자의 권리요 의무이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혼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다말을 구세주의 계보를 잇는 생명의 유업의 여자로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은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까지 죽을까봐 다말에게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고, 여자의 후손이 오실 계보를 끊으려 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코 아들을 낳아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야 하는 다말은 목숨을 건 결단을 하였고,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잉태한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아들 셀라를 아끼려다 자신이 며느리에게 들어가 잉태하게 한 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로 말미암아 쌍둥이 두 아들을 낳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먼저 밖으로 나온 아이의 손에 산파가 붉은 실을 맵니다. 그런데 그 손이 도로 들어가고 다른 아이가 먼저 태어납니다. “어찌하여 먼저 터치고 나오느냐?” 하고 그 이름을 ‘베레스’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손에 붉은 실을 맨 세라가 나옵니다. 그들도 태중에서 그리스도의 계보, 장자의 계보를 붙잡으려고 싸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계보가 부끄러운 불륜의 계보라고 말합니다. 구세주의 족보라면 뭔가 근엄하고 거룩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보는 근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인류, 악하고 부끄럽고 추하고 연약한 죄인들의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악 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신묘한 약도 겉에 발라야 소용없습니다. 주사기를 통하여 핏줄 속에 들어가야 효력을 발합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살리려고 그렇게 죄인의 혈통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만일 다말이 가만 앉아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 이름은 성경에, 그리스도의 계보에 없었을 것입니다. 베레스가 세라를 제치고 먼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이름도 계보에 기록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진리를 붙잡아 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도덕, 윤리, 체면의 문제가 아닙니다. 점잖게 가만 앉아서 되는 일도 아니고, 누가 대신 해주는 일도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내가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상은 달음박질하는 자의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오직 하나님을 붙잡는 것, 이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창세기 37장) 아버지의 통곡

       

      (창 37:33-35)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삼하18:31)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자녀가 먼저 죽거나 눈앞에서 자녀가 죽는 것을 보는 심정이 어떠할까요? 성경에는 몇 군데 그런 참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광야에서 하갈이 이스마엘이 목말라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 하고 우는 장면이나, 입다가 무모한 서원을 하였다가 딸을 죽게 하는 장면도 안타깝지만 가장 끔찍한 장면은 그 아들들이 모조리 눈앞에서 참살당하고 자신은 두 눈이 뽑힌 다음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는 시드기야가 아닐까 합니다. 아들이 죽임당하는 것, 그것은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잔혹한 형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이 낮은 땅에 내려와 악한 죄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가장 극악한 처형도구인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슬퍼하셨다거나 아파하셨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두 군데에 아버지의 통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야곱의 통곡, 다른 하나는 다윗의 통곡. 이 두 대목을 저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단 한 번도 눈물을 내비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나타내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통곡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늙은 야곱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압살롬을 피하여 다윗 왕과 그 신하들은 황급히 도망하였고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으로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만일 쉴 틈을 주지 않고 그 뒤를 추격하자는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되었다면 다윗은 압살롬의 손에 거의 틀림없이 잡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새의 모략에 의하여, 또 여러 돕는 손길과 암몬족속에 의하여 다윗은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납니다. 전열을 정비한 다윗과 백성들은 뒤쫓아 온 압살롬 군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성에 머물고 다윗의 부하들은 전장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출전하는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원수가 된 아들을 오히려 걱정하는 못난(?) 아비의 모습입니다.

      에브라임 수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다윗 군대는 압살롬 군대를 패배시킵니다.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그의 자랑인 긴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대롱대롱 상수리나무에 매달리고 맙니다. 요압의 부하는 다윗의 부탁대로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가서 보고합니다. 그런데 요압은 작은 창 세 개를 들고 가서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그 부하들은 에워싸고 압살롬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너무나 애절하고 처절한 다윗의 통곡에 승전한 다윗의 군사들은 풀이 죽고 마음이 슬퍼서 슬금슬금 죄지은 사람들 같이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다윗은 얼굴을 감싸 안고 계속 슬피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보다 못 한 요압이 다윗에게 따집니다. “왕이시어, 그럼 우리가 몽땅 죽고 압살롬이 이겼어야 하는 겁니까? 백성들 앞에 이 무슨 망발이십니까?” 그제야 다윗은 마음을 추스르고 백성들 앞에 나섭니다.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왕의 통곡.....,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며 참 슬프고도 착잡한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윗은 패역한 아들,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압살롬마져 사랑하여 그 죽음 앞에 통곡하였는데, 이를 어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세 개의 창에 가슴을 찔려 죽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하나님의 통곡을 나타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우리에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고통을 모릅니다. 그러나 원수 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품안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셔야 했던 그 아픔과 그 고통이 하나님께는 없었을까요?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죄인들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하나님의 눈에서 어찌 피눈물이 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 순간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고통과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 사랑과 기쁨이 범벅이 되어 또한 하나님의 가슴은 얼마나 큰 통곡으로 미어졌겠습니까?

      요셉을 잃어버리고 애곡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며,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의 통곡을 들으며, 우리는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통곡하시며 세상의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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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37장) 아들을 죽이고서 아버지 집에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우리가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들은 동생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맏형 르우벤이 죽이지는 말자 하여 그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앉아 음식을 먹었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은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요? 아버지의 집을 떠나 형들을 찾아 세겜으로, 다시 도단으로 그 먼 길을 오면서 제대로 먹기나 했을까요?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으로부터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유다가 형제들에게 동생을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자고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은 이십 개를 받고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깁니다. 이스마엘 족속은 요셉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노예로 넘깁니다.

        르우벤은 동생을 죽이는 악한 죄인들에게 남아있는 한 가닥 양심인지도 모릅니다. 그 양심이 돌아와 보니 큰일 났습니다.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꼬.” ‘나는, 나는’ 두 번이나 ‘나는’을 반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없는데 어떻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양심이 있다면 대답해 보십시오. 아버지께 범죄한 자가 어찌 아버지에게 낯을 들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 계신 천국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버지를 속이기로 합니다. 양심을 속이기로 합니다.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십니다. 그리고 그걸 아버지에게 가지고 갑니다. 죄 없는 수염소가 애꿎게 희생을 당하고 피 흘려 죽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아들의 옷을 보고 아버지는 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합니다.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나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고 애곡합니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내 아들에게로 가리라.” 지금 세상이라면 DNA 검사해보면 금방 탄로날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까맣게 속았습니다. 그렇게 피 묻은 옷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죄를 지은 아들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뻔뻔스럽게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아들의 피를 들고, 피 묻은 아들의 옷을 가지고 돌아갈 것입니다. 그 아들을 죽이고서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야곱은 모르고 속았으나 하나님은 아시고 속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속아주시려고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의 피를 들고, 그의 의의 옷을 입고, 담대하게, '잘 했다,' 칭찬까지 받으며, 면류관까지 쓰고 영원히 아버지 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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