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9. 고난 주간 금요 설교] 왜 십자가인가 | ▶설교 본문
2013.03.30 10:22
 

십자가인가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비록 한절이지만 너무 영광스럽고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 의로운 자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다.”

 

오늘 간단한 한절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여 성령의 구원의 역사,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불의와 미움과 죄악을 제거하는 복음의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인가? 답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시기위함입니다.

무엇을 대신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의로운 예수께서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뜻은 대신 죄값을 지불하셨다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까?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화목 제물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Redemption) 또는 속죄(Atonement)라고 합니다.

 

한번 세상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재판관이 간음죄, 살인죄, 도둑, 사기, 유괴 등의 무서운 죄악들을 무조건 용서한다면 어떨 같습니까?

 

유괴 살인범이 잡혀왔습니다. 재판관이 유괴 살인범을 보니 젊은 사람인데 앞길이 창창합니다. 이에 징역 30년을 선고하자니 너무나 불쌍해서 갑자기 법정에서 유괴 살인범을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 나는 사랑이 많다. 죄를 졌구나.  그래 그럴 있지. 내가 용서하마. 이제 그만 집에 가라.’

이후 재판관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간음범, 방화범, 도둑놈, 강도 , 어떠한 죄수에 대해서도 너희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불쌍해서 안되겠다라고 하면서 전부 풀어 주며 용서한다면 어떨 같습니까?  

 

만일 이러한 재판관이 있다면 그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이요,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로 재판관을 제거하려 것입니다. 그러한 재판관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사회의 공의가 살아날 것입니다.

 

사람 세계도 그러한데 만일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관이시라면 절대로 죄를 그냥 묵인하고 지나가실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면, 그러면서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상 하나님일 없으며 또한 의롭고 거룩한 재판관의 자리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근거 없이 무조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없습니다. 만일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상 거룩한 분이 되실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온유의 하나님, 오래참으시는 하나님, 겸손한 하나님 그러나 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품으로 거룩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죄의 가장 반대편에 서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어떤 죄라도 그냥 지나갈 없습니다. 이유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냥 지나가는 순간 하나님의 완전하신 공의와 거룩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재판관으로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형벌하셔야 공의와 거룩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공의롭고 의로우실 아니라 사랑이시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려면 동시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방법은 죄는 벌하셔야 하고 우리는 살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성상 죄인이요 날때 부터 죄성을 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모든 행위들, 생각하는 모든 것들, 뱉어내는 모든 말들에는 언제나 죄로 가득찰 밖에 없습니다.

 

신문을 보면 하루라도 죄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살인, 음란, 술취함, 방탕, 마약 중독, 폭행, 변태 , 인간이 있는 곳에는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지독한 죄인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지독히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주의 백성들의 죄를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계획을 갖게 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공의한 벌을 내리고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용서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은 대속(Substitution) 입니다. , 누군가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의 대속 계획은 사실 창세 전에 이루어진 일이고, 그리고 구약 때에도 많은 부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를 보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히브리인입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로서 신실한 사람이요, 모든 인류의 찬란한 영웅입니다. 그는 모든 믿는 이들의 믿음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대속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자녀가 전혀 없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아들은 너의 후손이 것이다.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것이다. 아들이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는 너의 마음 속에 한없는 기쁨과 웃음을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마른 벌써 수십년째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음해 사라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말로 표현 못할 기쁨 가운데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는데, 아들은 사실 언젠가 땅에 오실 메시야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나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아!”

, 부르십니까? 주님!”

네가 사랑하는 너의 독생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너에게 보여줄 곳으로 가라.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탁을 하시는 지는 없지만,  그러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니 분명히 어떠한 기적을 통해 이삭을 살릴 것이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1:17-19).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증거합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지 이유를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위로 가득차고 아주 거친 곳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입니다.  후에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곳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산이기도 합니다.

 

모리아 산은 거칠고 흉악한 산이었습니다. 젊은 이삭이 나무 장자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보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위하여 타오르는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으로 올라 갔을 이삭이 질문합니다.

아버지! 장작도 있고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나요?”

 

아브라함은 눈물로 가슴이 막힙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발언을 합니다.

나의 아들아!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셨단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마침내 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산의 꼭대기였습니다.

이삭! 손을 내밀어라.”

이삭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손을 밧줄로 묶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늙은 노인이었습니다. 반면 이삭은 힘이 철절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아무 때라도 아버지를 밀어내고 거부할 있는 힘을 가진 상태입니다. 분명히 그럴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순종하는 아들이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상황은 얼마든지 발버둥치고 거부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손을 묶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나는 생명을 스스로 주노니 누가 나의 생명을 취함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합니다. 모습 역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던 예수님의 고백을 듣는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칼을 들고 이삭을 향하여 걸음 나섭니다. 순간에 이삭은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정신적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고통만큼이나 고통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머금은 ,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아들의 가슴을 향하여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급하게 외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마음을 알았다. 네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구나

 

아브라함이 내리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드니 수양 한마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고 수풀에 뿔이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양을 취하고 이삭 대신 양으로 내게 번제로 드리라.”

 

사실, 그날 아브라함도 모리아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양은 하나님의 정하신 장소에서 아브라함과 정하신 때에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양을 보며 기쁨을 감출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다시 살아난 이삭을 안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구나

아브라함은 당장 양을 잡고, 대신 이삭을 붙들고 얼싸 안으며 기쁨에 겨워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들 이삭 역시 자신 대신 나타난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며 한없이 기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양을 잡으면서, 양의 피를 흘리면서 깨달았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하여 어린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삭 대신 번제를 드릴 대속의 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과정을 통하여 양은 상징일 뿐이며 실제로는 이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메시야의 날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대속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의 특별한 장소를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이 나의 아들 이삭을 대속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모세 때에는 출애굽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양을 알려 주셨습니다. 수천수만의 양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유월절 희생양으로 드려졌습니다.

 

유월절 날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하신 심판이 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로 바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지나가서 생명을 구원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피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

또한 대속의 진리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양을 따로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을 유월절 양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여 길렀습니다.

어디서 유월절 양들을 따로 길렀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유월절 양을 길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예루살렘 지경에서 목자들이 양을 칩니다.

이들은 어떤 양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바로 유월절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성탄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작은 양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짜 유월절 양이었습니다.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월절 양들이 많지만, 지금 예루살렘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기는  유월절 양입니다. ‘ 유월절 희생양입니다.

 

세례 요한이 양을 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외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때도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감람산에 오르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동문을 지나십니다.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가실 때에 무리들이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할렐루야! 다윗의 자손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동시에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한 유월절 양들도 정확히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없이 많은 유월절 양들이 베데스다 연못 곁의 양의 지나고 있었습니다( 3:32, 12:39). 

 

갈보리 산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도 오르시고, 실제 예루살렘에서 길려진 유월절 양들도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양을 검사합니다. 유월절 양은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합니다.

동시에 제사장들과 심지어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비난하고, 묻고, 따지고, 조사하면서 어디 흠이 있나 찾으려고 온갖 심문을 하지만 아무 죄나 흠을 찾을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법을 대표하는 로마 법정의 총독 빌라도에게까지 끌려가 흠이 있나 조사를 당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고백합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아무 흠도 발견할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완전하고 흠이 없는 유월절 양으로서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3, 지금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사람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아 죽이는 시간입니다. 시간에 로마 병정들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었습니다. 장소도 예루살렘이요, 시간도 같습니다.

 

그리고 산은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모리아 산입니다.

내가  산에서 내가 준비하리라.”

여호와 이레!

바로 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고통과 범벅 속에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예수께서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19:30).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내가 지불하였다.”

 

제사장들은 이제 이상 성전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상 동물 유월절 양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그림자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림자로 상징되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계획은 끝난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용서할 있게 되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어린양을 의지하는 자마다 아무리 불의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대속 제물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하여 그들을 의롭다 하실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을 믿는 자들마다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나아올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관례에 따라 무리의 요구에 따라 죄인 하나를 풀어줄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의로운 예수를 석방하길 원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에 넘기기로 결정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빌라도는 의도적으로 무서운 죄수 하나를 무리들 앞에 거론합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거론하였습니다.

 

바라바는 도둑이며 반역자, 살인자, 악한 자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바라바는 너무 무섭고 잔인한 악독한 죄수이기에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자신있게 질문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들 군중이 악명 높고 무서운 바라바보다는 분명히 예수를 사면하여 것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희 무리들아! 너희는 누구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누구를 석방하랴!”

그러나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군중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사주를 받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 바라바를 놓아주라!” 외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줘? 그러면 예수를 어떻게 하랴?

, 예수의 형벌이 결정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 십자가에 박으라.”

 

따라서 예수는 도둑놈이요, 반역자요, 살인자요, 온갖 악을 행한 무서운 죄수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에 박히게 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를 잡아 십자가에 달아 멥니다. 그런데 곳에는 세개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세개의 십자가는 사실, 정확시 세명의 강도를 십자가에 박으려고 의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옆에는 무서운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정확히 바라바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리자, 훼불을 군병 하나가 깊은 로마의 감옥으로 내려갑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지납니다. 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냄새가 아주 퀴퀴합니다. 한참 어두운 복도를 지난 군병 간수가 드디어 어떤 독방으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창을 들고 키를 들고 방간을 하나 엽니다.

 

안을 들여다 보니, 인생 동안 내내 무서운 악을 행함으로 얼굴이 흉악하기가 말로 없는 어떤 남자가 벽을 향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수는 군병을 보자 기겁을 하며 귀퉁이로 기어서 숨어들어갑니다.

 

훼불을 군병이 가까이 남자에게 가서 훼불을 얼굴에 비치며 말합니다.

바라바야! 일어나라. 이제 시간이 됐다.”

싫다! 나는 이곳이 좋다. 나를 내버려 두라!”

군병을 피하여 기겁하여 도망치는 바라바!!!

이때 군병이 외칩니다. “이놈 조용히 해라. 이놈아. 내가 간수로 있는 동안 같은 행운아는 처음이다. , 죽지 않게 되었다. 너는 십자가 상에서 죽지 않게 되었단 말이다. 생전에 너처럼 행운아는 처음 본다.”

아니, 군졸 나으리?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없는데요.”

이리 나와 ! 나쁜 . 너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놈인데, 세상에 이럴 수가!”

군병은 바라바를 끌고 복도로 나와 멀리 갈보리 언덕이 보이는 곳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저기 보이지. 언덕. 보여 안보여?  저기 갈보리 언덕의 세개의 십자가가 보이냐! 그리고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 보여 안보여? 원래 이놈아 십자가는 너의 자리 아니냐? 십자가는 너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너를 곳에 못으로 박으려고 만들어 십자가이지. 그러나, 너는 이제 자유자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대신 자리에 달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사건 이후에 바라바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을 정확히 전개해 나가고 계시는데 모든 전개의 내용이 바로 대속을 알려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죄많고 불의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바로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라바를 등장시키셔서 우리가 바라바인 것을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바라바는 도둑놈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도둑놈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까?

 

바라바는 반역자였습니다. 우리도 반역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반역하며 살아갑니까?

바라바는 살인자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살인자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야 말로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무서운 죽음에 넣은 주인공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까?

 

바라바는 죄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 앞에서 영원한 죄값을 치러야 죄수들입니다. , 영적으로 하면 바라바는 바로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로 여겨지는 챨스 스펼전 목사님께서 임종하시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목사님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때, 챨스 스펄젼 목사님께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소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인간 역사 속에서 최고의 신학자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박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에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을 만분지 일이라도 이해할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의 육체적인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로마 군병들이 채찍하며 고문을 가합니다. 그들의 고문은 상상할 없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채찍은 끝이 갈쿠리로 되어 있어서 사람의 살점을어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당시의 게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놓고자신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으로 간주한 후에 모든 악독한 말들과 무서운 폭행을 가하는 게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모독합니다. 굴밤을 때립니다. 곤봉으로 예수님을 후려 갈리고,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선지자라면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실컷 장난을 하며 게임을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갈보리 , , 모리아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손을 옆으로 후에 대못을 박습니다. 예수님 머리에는 조롱의 표시로 가시 면류관을 씌우더니,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 이제 십자가를 들어올립니다.

이때 모든 몸의 무게가 발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발로 견디지 않으면 십자가의 고통이 몸에 이르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발로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못에 박힌 발이 몇분 견디지 못하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몸의 무게는 박힌 발에서 손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면 손이 고통을 덜어보려고 힘을 다하지만 역시 몇분 견디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후 십자가의 고통은 온몸에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많이 고통을 받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의도적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로마 법을 어긴 가장 악한 죄수들에게 가장 고통을 주어 공의를 세우겠다고 개발한 형벌이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형을, execution , ex: out of: cross: 십자가:   ex-cruciating! 인간의 모든 것이 튀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십자가의 형벌은 율법의 저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 앞에서 인간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숨을 없습니다. 심한 현기증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옵니다. 구역질과 견딜 없는 구토와 함께 몸의 모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몸에 있는 모든 땀이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는   안에 있는 모든 액체가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몸에 고통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시간에 또한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22:42).

이는 예수님이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을 말합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가 기도하는 중에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 같이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땀이 핏방울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몇년 미국의 권위 있는 의사가 의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할 사람의 피가 구멍을 통하여 흐를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땀이 피가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함께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받으시는 잔에는 모든 죄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로 부터의 인류가 지은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잔에 담겨 있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값이 예수님의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살인죄, 변태, 도적질, 거짓말, 폭행, 사탄 숭배, 우상 숭배, 욕설, 남의 등을 , 언약을 깨뜨림, 유괴, 음란, 마약 등등,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지실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루시는 대속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사건으로써 그분의 마시는 잔에 우리의 모든 죄를 넣고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메네 기도에서 정신적 고통이 너무 무거운지라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잔이 무엇입니까? 잔은  인류 역사 가운데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는 형량인 것입니다.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땀이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릴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안에 영원히 계셨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영원토록 한번도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 , 그가 대속하여 담당할 잔으로 인하여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잔의 형벌을 담당하셔야 하는 죄수가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잔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 공의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영적인 고통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지옥 자체의 고통입니다. 사람의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수천 수백만의 지옥의 고통을 홀로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차마 장면을 수가 없어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셔서 하늘이 어두워 지고 바람과 태풍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장막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가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루신 단번의 제사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Once-for-All. 이번 한번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끝났습니다. 구속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Once-For-All)이라는 용어는 법정 용어입니다. 죄에 대하여 내가 치루었다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법적으로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계획대로 맘껏 역사하실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영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답은 때문입니다. 대신에 ….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공의로우신 법을 만족시키셔야 했는데,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영원토록 나의 죄로 인한 죄값을 갚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갚으셨습니다. 아니 내가 지은 죄의 수백배, 수천배를 갚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완전한 자유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에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최고 법정에서의 선포입니다. 누구도 법정의 선포를 바꿀 자가 없습니다. 이는 한번 선포되면서 영원히 바뀔 없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 8:38-39).

 

바울이 외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6-17).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기쁨을 소유하라고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 축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치도 않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보혈만을 믿고 언제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되시길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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