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사무엘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대부분의 설교는 암소에 초점을 맞추어 성도들에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암소처럼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혹은 암소의 최후에 초점을 맞추어 암소처럼 하나님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공동체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설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제 멋대로’의 설교라 하겠다.  

 구속사적 입장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 말씀을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는 매우 부패한 상태이다. 성경은 언제나 한 사회의 영적 부패를 설명할 때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를 묘사한다. 그래서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제사장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사무엘상에서도 사회의 영적 부패와 상태를 알리기 위하여 엘리 제사장,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이 나온다. 특히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는 언약궤 자체를 우상시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매우 못마땅하시기에 자신의 영광을 가리시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블레셋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신다. 이는 수천수만 명의 생명을 잃더라도 그들에게 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셨던 것이다. 

 한편 블레셋 백성들은 전쟁을 이긴 후 언약궤를 빼앗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도 승리한 줄 알았다. 자신들이 믿는 다곤 신이 승리를 준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언약궤가 들어온 이후 블레셋에는 재앙이 온다. 그들이 믿는 다곤 신이 매일 자빠져서 팔이 부러지고 목이 부러진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언약궤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주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참 신이며 역사하는 신이며 살아계신 전능자인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온 발상이 새끼를 낳은 두 암소에게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만일 두 암소가 함께 이스라엘을 향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이라고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 사건이 바로 벧세메스의 암소 사건이다.   

 신앙은 실체를 향한 신앙이 있고 그림자를 향한 신앙이 있다. 보이는 것은 그림자이고 보이지 않으시는 인격체는 실체이다. 영원한 실체는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없다. 그림자를 향한 신앙은 마침내 허무함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실체를 향한 신앙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보이는 언약궤에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는 미신이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종교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반드시 만났다고 볼 수 없다.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차고 다닌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미신적 행위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대치해 버린다면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궤를 들고 그 언약궤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믿고 전쟁에 나가는 종교적 행위와 똑같다.  

 두 마리 암소는 각각 새끼를 두고 있었다. 두 마리가 본성으로 벧세메스를 향하여 갈 수 없다. 암소의 본성에 의하면 새끼에게로 가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암소를 이끌어 벧세메스로 가게 하신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유 없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왜 기적을 행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주길 바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하나님 그분을 대치하여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더욱 분명하게 하시기 위하여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셨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다. 나아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즉, 우리 대신에 죄 값을 치러주시고 우리를 주의 피로 사셔서 참으로 자유롭게 하셨다는 말이다. 왜 이러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는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참된 사랑으로 반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주를 향한 사랑 가운데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주신 계명에 순종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 하나님께서 맘껏 우리를 축복하시며 사랑하시도록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과 순종을 통하여 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아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스데반 황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는 믿음  (0) 2013.04.10
인간의 욕망에 관한 고찰  (0) 2013.04.09
왜 십자가인가?  (2) 2013.03.31
각자의 죄성  (0) 2013.03.30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0) 2013.03.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