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2:17-18]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취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한고로 유다 왕 요아스가 그 열조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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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왕국의 악한 왕비 아달랴가 왕의 씨를 진멸할 때 요아스는 갓난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급한 중에 고모 여호세바가 훔쳐내고 고모부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에 숨겨 6년 동안 길러져서 일곱 살에 유다왕국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요아스는 여호와의 전에 드려지는 은을 거두어 퇴락한 전을 수리하고 여호와의 신앙을 다시 세우는 선한 왕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요아스의 치적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요아스는 치리 마지막에 가서는 아람왕 하사엘이 쳐들어오자 전과 궁의 온갖 금붙이 값나가는 것들을 모조리 갖다 바치는 나약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중상을 입은 채 신하들에게 죽임당합니다.

요아스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열왕기에는 요아스의 마지막 행적이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역대하 24장을 보면 고모부 여호야다 제사장이 130세로 죽자 요아스왕은 유다방백들에게 회유당하여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던 고모부가 죽자 부하들에게 휘둘려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 하는 한 마디로 줏대가 없고 마음약한 어른아이, 겁쟁이 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하여 이를 경고하셨으나 유대방백들의 모략대로 스가랴를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로 쳐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스가랴가 누구입니까? 자기를 구출해낸 은인 고모부 여호야다의 아들, 곧 요시아 자신의 고종사촌입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부하들이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악행을 저지르도록 방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남유다왕국과 요아스왕을 아람왕 하사엘을 들어 징벌하십니다. 역대하 24장을 보면 하사엘이 적은 군대로 쳐들어왔으나 하나님께서 유다의 대군을 그 손에 붙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과 궁의 보물이 약탈당하고 요아스는 중상을 입은 체 궁에서 배반한 신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비겁한 왕의 비참한 최후였던 셈입니다.

앞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타락’을 선과 악, 성품이 착한가 나쁜가 하는 것으로 구분지어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선하지 못 한 성품 뿐 아니라 연약함, 어리석음, 미련함, 두려워함, 교만함, 무지 같은 것을 포함합니다. 세상에는 “몰라서 지은 죄이니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통할 수도 있지만 심판대 앞에서는 어리석고 몰라서 속임 당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몰라서, 속아서 이단에 넘어가 잘못 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변명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몰라서, 속아서 그랬다는 변명이 통한다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부터 죄가 아닐 것입니다.

몰라서 저지른 죄도 문제이지만 겁이 많아 두려워서 믿음을 버린 죄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두려워서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하는 죄를 하나님은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목 잘리는 게 무서워서, 사자가 두려워서, 끔찍한 기름가마 때문에, 목을 겨눈 총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믿음을 버렸다는 변명이 통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순교자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유황불못에 던지우는 자들의 명단입니다. 믿지 않는 자, 살인자, 행음자 보다 먼저, 맨 앞에 “두려워하는 자”가 나옵니다. 민수기 13장, 14장의 사건, 가데스바네아에서 열 정탐군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랑하다가 엎드러져 죽었으며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외친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두려움이란 타락한 인간 죄성의 가장 밑바탕인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기에 믿음은 귀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담대한 용기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진정한 믿음은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죄성인 두려움을 밟아 이기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두려움 없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원합니다. 우리를 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같은 마귀의 이빨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원합니다. 두려움 앞에 너무나 연약한 우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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