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은목사(삼일교회, 부산)

 

1.들어가는 글

  C.S.Lewis- 현대교회의 선지자인가? 아니면 현대교회를 와해시키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인가? 그의 책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간부마귀(Screwtape)가 부하마귀 (Wormwood)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며, 구원받은 영혼이라도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타락시킬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귀띰해 주고 있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C.S.Lewis가 현대교회를 와해시킬 지도 모르는, “트로이의 목마”일 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음해이고 모독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간부마귀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런 간부마귀의 글을 상상해 내고 있는 C.S.Lewis의 그 생각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An important spiritual law is here involved. I have explained that you can weaken his prayers by diverting his attention from the Enemy Himself to his own states of mind about the Enemy.” 인간(이나 크리스챤)의 입장에서 이 조언을 해석하자면, 하나님(the Enemy) 그 분 자신에게서 관심을 돌려 그 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마음, 어떤 심리,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는 우리 인간 자신의 감정과 느낌, 혹은 믿음의 정도 등에 대해서 신경을 쓰도록 유혹하면 인간의 영혼은 약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C.S.Lewis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인간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주의하지 말고 바로 하나님 그 분에게 초점을 맞춰라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조언을 루이스 자신이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그의 감정, 곧 신을 향한 열정(Sehnsucht)에 정당한 선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그의 하나님 그 분에게서 집중시켜야 할 그것에서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그런 감정과 느낌에 신경을 지나치게 써서 그의 작품활동들은 하지 않았을까? 어쩜, 이런 비판을 그의 글에 적용시켜서 해부하는 것은 너무 엄격한 일인 지도 모른다. 어쩜, 스쿠르테이프의 또 다른 조언인,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보다도 그의 글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을 받을 수 있고, 어쩜 비판되어야 할 요소가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로서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그의 글을 비평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요, 어쩜,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인지도 모르겠다. 변명이 아니길 스스로에게 바란다.

 

  더욱이나, 그의 글들이 전혀 비판 없이(사실, 어느 정도 비판되고 있는 지 몰라서 하는 얘기이다) 수용되고 있는 현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이런 비판이 하나 정도, 아니, 균형 잡을 만큼 개진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마땅히 싸워야 할 그 싸움이 아닐까?(고린도후서10:4-5). C.S.Lewis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그 분 앞에서 초라한 미물일 뿐이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그리고, C.S.Lewis도… 

 

2. C.S.Lewis와 나

 

 우리 나라에서 C.S.Lewis가 소개된 것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전 CCC총재였던 김준곤목사가 1970년대에 번역한 “고통의 문제”라는 책부터일 것이다. 아마도 전남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김목사가 문학공부를 하는 중에 그 문학을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터이고, 그러다가 옥스포드대학에서 중세시대의 영문학에 조예가 있었던 영문학교수로 연구생활과 문학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C.S.Lewis에 대해서 듣게 되었을 것은 어쩜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그가 신앙의 회의를 극복하면서 적어내는 기독교변증적인 저서들은 김준곤목사의 신앙에 확신을 심어주는데 일조하였음에 분명하다. 필자가 국내에서 대학생활과 신학수업을 받던 중에는 간혹 외국에서 공부한 분들이 설교 중에나 글을 통해서 C.S.Lewis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여겨 왔었었다. 간혹 Lewis의 글에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는 데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언급해 주는 사람도 전혀 없었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채로 영국에 오게 된 것이 1997년이니까 바로 다음 해 1998년에 있었던 영국내에서의 C.S.Lewis의 탄생 100주년기념행사들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었다.

 

  그래서 계획 하나를 세웠다. C.S.Lewis에 대해서 나름대로 연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앞으로 하게 될 공부와는 별도로 영국에서의 유학의 부산물로 하게 되는 이런 연구는 보람된 것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먼저, 그의 책들을 구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책들은 이곳의 채리티 숍이나 헌 책방 같은 곳에서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나니아시리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녀들의 영어공부를 위해서 그 책들을 모두 읽게 하였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Out of the Silent Planet, Perlandra(Voyage to Venus), That Hideous Strength]가 있는 것도 발견하였다. 쉬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모두 탐독하였다. 신앙과 관련된 책자들이 있는 것도 발견하였다. Mere Christianity를 읽고 The Problem of Pain등을 읽은 것은 당연하였다. 그 외의 그의 책들(Miracles나 Beyond Christianity 등)을 탐독하고, 그의 자서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의 글들을 이런 저런 주제들을 따라서 편집한 책(예, C.S.Lewis on Scripture)들을 구하고 그의 문학과 신학사상들을 평하고 있는 책자들을 입수하여 읽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수집해 놓은 그의 책, 그에 관한 책들 모두가 50여권이 넘는다.

 

  하지만 궁금하게 여겨왔던 것은, 그의 글들이 “역사적 전통적 칼빈주의신학”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글들에 대해서  거의 찬양일색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상한 부분이 자꾸만 드러나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궁금증은 더하여져 갔다. 계속 비판적 관심을 갖고 그의 책들과 관련된 글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탄생기념 100주년이 되던 해에 입수하게 된 글이, Tony Baxter란 사람의 “The enigma of C.S.Lewis”라는 글이었다(The Journal of the Christian Research Network, winter 1998, issue 4, pp.30-31). 그의 글의 논지는, 첫째, 복음주의자들과 로마캐톨릭 연합운동에 C.S.Lewis의 글들(Billy Graham의 신학과 함께)이 그 중심축에 놓여 있다는 것, 천주교인들도 개신교인들과 똑같이 C.S.Lewis의 글에 대해서 대환영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 Christianity Today나 Alpha Course같은 프로그램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애호되고 있는 작가라는 것이 그의 enigma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짧기도 했고, 그렇게 설득력이 없었다. 로마캐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운동 그 자체에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학적인 설득이었었다.

 

  한 편으로는 C.S.Lewis의 책들을 읽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신학을 비평하는 자료들을 찾아가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순례였었다. 존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흉내내면서도, 천로역정의 “기독도”가 “천국”을 향해서 “순례”를 하는 것과는 달리, C.S.Lewis의 정신적 탐구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The Pilgrim’s Regress”라는 소설은, 일종의 “순례”를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류의 “순례”이고 그 모티브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번연의 “순례”는 “장망성”으로부터 “천국”을 향한 직선적 순례라고 한다면, 루이스의 “순례”는 “장망성”으로부터 다시 “장망성”으로 되돌아오는 그러면서 그 “장망성”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순환적 순례라고나 할까….존번연의 순례의 신앙적 의미와는 다른 일종의 인식론적 순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개의 순례를 대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스타일이나 강조점들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본질적”인 어떤 “차이”를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꼭 꼬집어 내어서 표현하기가 어려웠던 셈이다.

 

  그러면서 그의 문학과 신앙활동의 중심모티브로서 작용하는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Joy(즐거움)이고 Sehnsucht(열망)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1974년에 발간되고 다시 1997년에 재발간된 C.S.Carnell이라는 사람의 Bright Shadow of Reality: Spiritual Longing in C.S.Lewis(Wm.B.Eerdmans 출간)라는 책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상하게 글이 처음에는 예상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논문쓰려고 한 것이 아닌데, 무어 이리 인용하는 책들이 많아질까?)

 

각설하자.

 

지금도, C.S.Lewis와 관련된 책, Audo/Video 테이프들을 만나게 되면, 누구보다도 반가워하면서 구입을 하고 있는 필자이다. 그러면서, 아래에 제기하는 몇 가지 문제점들로 인해서 그의 책들과 사상들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것을 또한 말하고 싶다. 이런 견해에 이르게 된 일련의 과정을 잠시 먼저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3. C.S.Lewis사상의 비평적 이해를 위한 조감도

 

. 근본주의와 모더니즘의 중간쯤

 

  영문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문학이론은 “신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쯤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황무지>등의 시로 유명한 T.S.Eliot 등의 “신비평”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면서 그 이전의 낭만주의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취하여고 하는 것을 보아서 그렇다고 평할 수가 있다. 그의 유럽중세영문학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이런 견해를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그의 문학이론은 사실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깊히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의 신학사상에 초점을 맞춰서 비평하기로 한다.

 

  한 마디로 그의 신학사상은 근본주의도 아니고, 모더니즘(현대주의)도 아니라고 해야겠다. 먼저, 그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1953년에 Corbin Carnell이라는 사람에게 쓴 요나서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분명해 진다: “…the whole Book of Jonah has to me the air of being a moral romance, a quite different kind of thing from, say, the account of King David or the New Testament narratives, not pegged, like them, into any historical situation”(quoted in Christensen, C.S.Lewis on Scripture, pp.104-5). 요나서는 역사서와는 전혀 다른 일종의 소설이라고 하는 얘기다. 영문학자로서, 성경의 기록을 일종의 문학서로 보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기록을 역사와 무관한 소설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견해는 1959년에 표현된 그의 견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는 이때 캠브릿지대학생들에게 행한 강의 중에서 요나서는 유대인의 유머감각을 곁들인 “a fictional story”라고 단언한다(Fern-Seed and Elephants, p.108). 이런 그의 견해는 욥기나 에스더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Lewis on Scripture, pp.106-7).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주의(modernism)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가 성경을 문학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인간적인 저작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거룩함과 경건함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일종의 a sacred text인 셈이다. 이런 입장에 견지해서 그는 불트만의 비신화화신학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이론은, “신화”가 무엇인 지에 대해서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한 것이라고 C.S.Lewis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해서 루이스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다른 항목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는 최소한 예수의 “신화”는 “신화중의 신화”로서 “사실”이라는 것이다. “신화중의 신화”? ? 참 묘한 표현이다. 하지만, 불트만이 성경에서 기록된 예수의 기적조차 “신화”로 묘사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니, 루이스의 예수의 기적이, 그리고 예수라는 인물이 “신화 중의 신화”라는 견해는 무언가 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강 이 정도 해두어야 계속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C.S.Lewis는 회심 이후 평생토록 “기적”을 믿어왔다. 그래서 <Miracles>라는 책까지 썼다. 그의 아내 Joy의 죽음 앞에서 이것에 대해서 잠시 회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을 그의 책에서 보여주는 바도 있지만, 그의 공식적인 견해는 그래도 여전히 기적을 믿는 초자연주의자였다. 기적이 없다고 하는 자연주의에 반대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초자연주의는 성경적인 초자연주의라고 하기에는 좀 묘하다.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환상적 세계”로서의 초자연세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요정과 귀신들, 영계의 존재들과 인간세계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이고(나니아의 “환상”세계를 생각해 보라!), 이런 작품세계는 중세의 기사와 영웅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낭만주의”와도 연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자인 Ritschl이나 Stauss, 그리고 20세기의 Harnack같은 이들을 비판한다. 성경의 초자연주의를 변호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쩜 자신의 작품세계를 변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초자연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짐직 하다.

하여튼 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의 견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비판을 좀 더 들어보자.

 

이런 그의 어중간한 견해에 대해서 비판의 메스를 댄 사람이 있다. 뜻밖에도 그는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써서 장안의 지가를 올렸던 바로 J.A.Robinson이다.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는 루이스의 바로 사영리식 논리를 비판한다. 사영리식 논리란, 곧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증으로서 사영리전도법을 제창한 빌브라이트가 이용하는 방식인데, 그 논리방식을 제창한 사람들 중에 제기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C.S.Lewis로서 <Mere Christianity>에서이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는데, 만일 그런 주장이 거짓이어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는 분명히, 미친 사람이든지, 종교사기꾼이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미친 사람이 아니고, 또한 종교사기꾼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자신이 주장한 그 주장대로 하나님이시라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에 대해서 로빈슨주교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로빈슨의 책을 어딘가 두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찾아지면 구체적으로 인용하면서 비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조감도에서 요약하는 바는, 그의 신학은 근본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다른 말로 하자면, 근본주의적 입장에서도 비판될 수 있고, 자유주의 입장에서도 비판될 수 있는 그 중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속해 있었던 영국국교인 성공회의 신학적 입장과 어쩌면 아주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신학적 입장을 “균형잡힌 신학”으로 평가하느냐 아니면, “어중간한 신학”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질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 그의 견해를 필자는 “신복음주의”신학으로 규정한다.

 

이런 규정을 좀 더 이해하려면 솔직히 “신복음주의”와 “복음주의”간의 논쟁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논쟁을 이해하려면 또 다른 글 한 편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선 정말 말 그대로 간단히 몇 자로 스케치해 본다. 먼저, 미국의 신학적 상황 속에서 프린스톤신학교가 좌경화되는 것에 반기를 들고 G. Machen등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운 것이 1930년대. 이것에 대해서 그러한 입장을 “근본주의”로 평가하고는 그들이 평가한 “근본주의”가 지향하고 있는 “복음주의”라는 것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복음주의”라는 뜻으로서의 “신복음주의”를 제창하는 사람은 바로 보스턴제일장로교회의 목사였던 오켕카이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 칼 헨리,챨스 풀러 등과 더불어서 풀러신학교를 세운 것이 바로 1940년대. 우리나라로서는 아직 일제시대의 어두움 속에 휩싸여 있던 핍박의 세월이었었다. 옥중성도들의 신앙의 절개를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싸우고 있었던 그 세월.

 

루이스가 있었던 영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루이스가 기독교변증가로서 작품활동을 하던 1930어간부터 혜성같이 등장한 설교자가 바로 로이드 존스목사,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Bash Camp로 불리어지는 존 스토트목사의 활동은 나락으로 전락되어가던 영국복음주의교회에 일종의 영양제주사를 놓아주었다고나 할까. 이제 지성인도 보수적인 기독교인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준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 당시 미국의 빌리그래함의 전도대회가 런던 등에서 개최가 되고, 영국의 보수적인 신앙인들과의 연계 속에서 활동하기를 원했던 그 당시의 바람들이 결합이 되어서 세워지는 신학교가 바로 “런던바이블칼리지”(1944년개교,현재의 이름은 London School of Theology)이다.    문제는, 이들이 “근본주의”에 대항해서 일어나게 된 “신복음주의운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흐름에서 결국 빠져나오게 되고, 독자적인 노선을 선포하는데(1970 년대 초에 London Theological Seminary설립), 이것을 전후로 해서 존스토트목사와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은 이미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런 중에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복음주의”라는 신학적 선언에서 “신”자를 빼어버리게 된다. “신”정통주의 등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염두에 두었던 셈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근본주의”자들로 규정한 그 사람들의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자신들도 채용하게 되면서,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개념에는 큰 혼동이 오게된다. 이런 혼동에는 사실, 미국에서의 “신복음주의자들”의 약진이 야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G.M.Marsden이 쓴 Reforming Fundamentalism(Wm.Eerdmans, 1987)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는 C.S.Lewis의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신복음주의적 신학적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에서는 “런던바이블칼리지”계열에서는 C.S.Lewis의 입장이 거의 비판없이 소개되고 있고, 로이드 존스목사의 신학입장에 더욱 공감하는 사람들은 C.S.Lewis의 입장에 대해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영국의 C.S.Lewis의 책자들을 소개하는데 앞장섰던 학교가 바로 Wheaton College이다. 1960년대에 루이스가 미국에 대대적으로 소개되는데, 이 학교가 앞장 섰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당시 휫튼 칼리지는, 여전히 19세기말엽의 프린스톤신학과 특별히 B.B. Warfield의 신학을 자신들의 신학적 맨터들로 삼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신학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고도 할 수 있는 C.S.Lewis의 신학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학적 분별력이 해이해지는 현상을 이 당시부터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비판은 그의 계시론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 그의 계시론과 (신)플라톤주의

 

루이스는 무엇을 “계시”라고 보는가? 그의 성경에 관한 입장들을 수집해서 책으로 편집한 Christenson에 의하면, 여섯 가지의 유형의 “계시”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Mere Christianity에 의하면, 보편적인 양심, 이방세계에서 개진되어진 선한 소원들, 유대교의 선택, 그리고 성육신, 이 네가지가 소개되고 있고,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는 “열망”(Sehnsucht)라는 것과 the numinous(이것은 어떻게 번역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R.Otto의 <The idea of Holiness>이라는 책에 자세히 이 개념이 소개되고 있다. 혹자에 의하면, 이 누미누스를 ‘idea’로 이해해서 번역하는 것은 그야말로 Otto의 누미누스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비평하기도 한다)라는 것 두 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Sehnsucht라는 것이다. 이것은 Mere Christianity에서만 아니라, The Pilgrim’s Regress에도 또 다시 등장하고 있고, 루이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계시”의 유형에 대한 그의 입장이 보여주는 바는, “성경”을 하나님의 유일하신 자기계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 성경이란 하나님을 가르키고(pointing) 있는 계시의 여러 방편들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야말로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하는 바르트의 신학과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의 계시이해는 우리 인간의 계시에 대한 체험(영적 조명)과 하나님에 대한 계시 그 자체와의 구분을 적절하게 시도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앞의 서론에서 지적한 것 같이, 스쿠르테이프의 자기 부하마귀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을 상상해 낼 수는 있었어도 그런 조언을 자기에게까지 적절하게 적용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루이스가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일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그가 개진해 온 계시의 유형들을 하나 하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그가 지향했던 입장이 바로 철학적 관념주의(philosophical idealism)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이런 관념주의는 고전적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적인 용어들을 띤 채로 그의 작품들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플라톤주의는 영국의 정신사를 조그만 고찰하게 되면, 플라톤주의가 영국적 상황에서 개진되었던 캠브릿지 플라톤주의(특별히 17세기의 헨리 모어의 철학)나 18세기의 버클리주교의 관념주의와도 연결된다는 것을 쉽게 간파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그 계시를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루이스의 “계시론”을 이해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할까? 루이스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든 지 하나님의 자유하심 같은 개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념하길 바란다. 그의 답은, 인간의 마음과 상상력에 남겨져 있는 그 흔적(물론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것이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또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플라톤주의적인 표현을 통해서 말하자면, 예수란 그에게 있어서 있어서 육체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오신 일종의 플라톤적인 Demiurge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중요한 개념인 “Transposition”( or transvaluation)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에 대해서는 그가 스쿠르테이프의 편지 후기라고 할 수 있는 <Screwtape Proposes a Toast and Other Pieces>(London: Collins Fount Paperbacks, 1965)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책의 설명을 참고해서 간략히 여기에 소개한다.

 

루이스는 영적 세계의 영역이 물질적인 세계의 영역보다 더 중요한 일차적 실재(reality)라고 본다. 이 두 세계는 서로 상응하지만(coinhere), 위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영적 영역이 상위에 있다는 것이다. 곧 가치가 보다 나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서부터 플라톤주의의 냄새가 난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상위에 있는 영적 세계의 것(혹은 존재)가 하위의 것인 물질세계로 상위의 가치와 부요함을 상실하지 않은 채로 옮겨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transposition, 혹은 transvaluation의 문제이다. 루이스는 상위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 하위의 영역으로 어떤 가치가 <전이>(transposition)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의 “상상력”(imagination)이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성례”(sacrament)라고 한다. 이런 성례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나니아시리즈의 마지막 책인 the Last Battle의 마지막 부분(14장)에서 아슬란(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의 이름)이 말하기를,”Come further in! Come further up!”와 같은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적인 것이 자연적으로 변형되는 것이 “성육신”이고, 자연적인 영적인 것으로 변형된 것이 바로 “승천”인 셈이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연세계란 영적 세계의 그 실재가 희미해진 일종의 상징과 같은 것인데, 그 기원을 바로 영적 실재에 두고 있는 일종의 그림자가 된다. 나니아시리즈의 가장 마지막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그림자세계”이다. 자연세계, 물질세계를 이렇게 “그림자세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Shadowland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자세계를 벗어나서 further in, further up 해서 “이상세계”인 영적 세계로 나아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 곧 바로 나니아시리즈의 기본주제인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사상이 바로 고전적 플라톤주의의 아류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천국과 지옥을 대비시키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소설, <The Great Divorce>에서 “천국”의 실재를 묘사하기를 “solidity”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과 루이스가 묘사하는 “천국”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루이스의 작품을 이해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다. 여섯 가지 유형의 계시들

 

 1) 보편적인 양심

 

 서구의 철학사 중에서 헬레니즘을 플라톤주의와 그와 대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보편적 관념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플라톤주의와는 달리 오히려 구체적인 개체를 강조한다. 자연주의적 물질주의를 배격하는 루이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혐오할 것은 당연하다. 계시를 수납할 수 있는 인간의 기능을 그는 양심이라고 보고 이런 양심이 문화를 초월해서 인간사회에 보편적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를 그는 그의 책, The Abolition of Man이라는 책에서 개진하는데, 곧 인간의 마음 속에 도덕적으로 선한 그 무엇이 내재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도”(Tao)라고 한다. 그렇다고 원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부인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것을 마땅할 만큼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안에 내재하는 그 보편적 도덕적 욕구를 강조한다. Mere Christianity의 아주 중요한 논지가 바로 이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주자학적 논쟁 가운데서 “4단7정논쟁”과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낀다[4단이 무엇이며, 7정이 무엇인가? 이 글을 계속 읽어가기 전에 그것부터 알아보기를 부탁한다. 이황, 기대승, 이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고, 경기도 지방과 경상도지방의 오랫 숙원을 만나게 되고, 어쩜, 예장신학과 기장신학의 차이의 한민족적 뿌리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5천원짜리와 천원짜리 지폐의 차이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무 지나친 얘긴가? ㅎㅎㅎ). 인간 안에 선함을 원하는 것(4단)은 있는데, 그것이 왜 선하지 않은 것(7정)으로 표출되느냐 하는 것으로 유학에서 오랫동안 토론해 왔다. 루이스는, 여기서, 4단의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4단으로서의 보편적 윤리감각이 발현된 결과가 바로 “종교”라고 한다. 그의 종교이론이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 종교(기독교)와는 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보편적 양심이 활동해서 “종교”를 발생시킬 가능성에 대한 인정…..이것은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동굴 속의 인간이 그림자를 보고는 동굴 밖을 상상하고는 그 동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과도 비슷하다. 그런 사람이 “철학자”라고 하는 것인데, 평범한 사람은 벗어나지 못하지만, 특별한 어떤 사람이 “영감”이 (스스로?) 넘쳐서 자신 안, 물질 안, 그림자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참된 실재(reality)로서의 영원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4단7정논쟁이 있었던 유교 자체 내에서는 “4단7정”이라는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가능했었을 런 지 몰라도, “왜” 4단이 7정이 되는가 하는 근원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유교적 틀 자체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독교의 복음의 틀을 전승받은 루이스인데도, 그런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Mere Christianity에서 이런 보편적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그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왜 그런 도덕법을 인간이 달성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책들이 강조되고 있는, 알파코스 같은 프로그램들이 결국은 “이빨빠진 복음”(Teethless Gospel)으로 불려지는 것도 어떰 이런 루이스신학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알파코스에 이빨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혀만 있으면 안된다. 복음에는 이빨이 있어야 한다.  

 

 2) 이방세계에서 개진되어진 선한 소원들:신화

 

 위에서 언급한 플라톤의 비유에 나오는 동굴 속의 사람들에게 얼른거리는 동굴 벽의 그림자, 곧 이상세계의 흔적이 바로 루이스에게서는 신화이다.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선한 꿈”은 곧 이상세계의 반영으로서의 꿈인 것이다. 루이스는 실로 유럽의 신화들에 대해서 굉장한 매력을 느낀다. 그의 친구인 톨킨(“반지의 제왕”저자)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런 지식들은 심화되어진다. 그의 소설이 환타지 소설에 분류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루이스는 의외로 “신화”에 긍정적인 기능을 부여한다. 이방종교의 신화는 “거짓된 것”이 아니고 “미완성의 것”이다. 기독교는 “완성된” 신화가 되는 것이다. 그의 소설 The Pilgrim’s Regress를 보면, 이들 이방종교의 신화들도 반쪽 계시를 담지하고 있는 아주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선택된 유대인들(The Shepahrd)의 계시도 반쪽일 뿐이다. 두 개가 합해져야만 온전한 계시가 된다는 것이 루이스의 견해이다. 이런 “신화”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로 인해서 “예수는 신화중에 신화요, 참된 신화”라는 그의 견해가 나오게 된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신화”란 일반적인 용례로 사용되는 “거짓에 근거한” 이야기란 뜻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루이스의 모든 주장들을 오해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화는 거짓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근거하고, 실재에 근거한 것인데, 그것을 단지 “희미하게”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화들 간의 차이는 단지 이 “희미함의 정도”간의 차이이다. 그 중에 가장 희미하지 않은 것이, 가장 실재에 가까운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종교의 “신화”는 일종의 “형식”이다. 그 형식에 담고 있는 “내용”이 곧 “진리”라고 한다. 모든 종교가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신화중의 신화”인 기독교의 진리가 없이는 그래도 구원이 없다. 이런 구분을 하기 때문에, 그래도 루이스는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타종교에 대한 공박도 없기 때문에, 비판을 해도, 너무나 부드럽게, 섬세하게, 어루만져 주기 때문에, 그래서, 인기가 있는 것이다.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을 자는 깨달을 진저! 

 

 3)유대교의 선택

 

  이방종교에게 주어진 것이 “신화”라고 한다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율법이다. 십계명이다. 루이스는 이런 계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이방종교의 “신화”와는 다른 또다른 형태의 영적 현실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 이런 율법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신화”이든, “영적 현실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율법”이든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유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계시의 정도에 있어서의 이러한 차이는 바로 신플라톤주의의 “유출”개념과 깊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을 이스라엘의 선택과 연관시켜서 루이스가 자세히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4) 누미너스

 

 루돌프 오토가 쓴, “성(혹은 거룩)의 개념”이란 책에 루이스가 강한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오트는 “거룩”(성)을 “누미너스”로 설명한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 속 깊은 곳에 있는 공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두려움과 외경감을 말한다. 우리가 “신성”을 경험하게 될 때에 이런 두려움의 외경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누미너스”이다. 절간에 들어서면 사천왕상이 서있고 아수라들이 둘러서 있는 그 뭐랄까 으스스한 느낌의 오싹함, 그것이 “누미너스”이다. 명동성당에 들어가서, 촛불이 얼른얼른한 가운데서 오색찬연한 스테인즈글라스를 통해서 비춰지는 현묘하게 흩어지는 빛들의 산란 앞에서 다가오는 그 뭐랄까 말할 수 없는 신비감, 그것이 “누미너스”이다. 저녁무렵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깔려오기 직전 그렇게 다가오는 어둠과 더불어 먼산의 하늘끝을 물들이고 있는 그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장미빛의 낙조 앞에서 왠 지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경험을 해 본적이 있는가? 그대는 바로 “누미너스”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밤하늘의 깜깜한 창공 넘어에서 나의 존재를 묻고, 이 우주의 존재를 물어보는 마음. 아니, 그것도 물어볼 여유가 없도록 압도해 오는 그 어떤 감격을 체험한 적이 없는가? 바로 누미너스를 체험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누미너스는 구원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오토는 물론 예수를 알게 되는 경험도 이 누미너스로 표현하기 때문에, 언듯 보면, 기독교인의 복음적인 중생체험에 대해서 올바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체험분석은 분명하지가 않다. 이 누미너스와 인간의 죄의 본성에 대한 체험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도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죄의 본성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체험은 오토의 누미너스체험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공통적인 요소가 있지만, 그 누미너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체험이다. 중생한 자의 하나님체험은, 중생하지 못한 자도 함께 체험하는 누미너스와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감미로움”이 동반된다.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 분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중생을 통한 하나님체험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솔직히 여기선 바로 루이스의 조언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그 분에게서 그 분에 대한 어떤 체험에 대한 관심의 전향은 바로 간부마귀의 부하마귀에게 주는, 인간 영혼의 유혹을 위한 최대전략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일이다.

 

 참, 이런 누미너스의 체험은, 루이스의 소설 중에서, 가령 예를 들자면, 나니아시리즈 중에서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비버들(beavers)이 여주인공 루시에게 아슬란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He’s wild, you know. Not like a tame lion.” 아니면, <Voyage to Venus(Perelandra)>라는 소설에서 한 인물을 통해서 말하는, “suppose you struggle through to the good and find that it also is dreadful?”와 같은 구절에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누미너스가 어떻게 (신)플라톤주의와 연결되는가?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런 누미너스의 체험이 중생한 자의 것과 비중생자의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이다. 누미너스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종의 계시가 되는 것이다. 누가 이 계시에 반응할 것인가? 계시의 시여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계시에 대해서 반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반응의 여부를 결정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 자체 내에 그런 반응의 결정적인 주체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의 Sehnsucht(열망)이다. 

 

 5) 열망(Sehnsucht)

 

 실상, 우리 안에 있는 영원에의 동경이 바로 이런 Sehnsucht이다. 루이스는 이런 동경심, 일종의 노스탈지어로서 Sehnsucht를 이해한다. 머언 나라로부터 나팔소리가 들리는데 그 나팔소리를 희미하게 듣고는 그 나라에 대해서 동경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이런 “열망”이다. 우리가 이렇게 “열망”, 혹은 “동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영원”세계가 있는 것이라고 증명했었던 사람들이 중세의 신학자들이기도 했었다. 이런 논증을 루이스가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는 이런 인간내부에 있는 영원을 향한 갈망을 무지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의 Joy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자신의 회심의 동기를 이런 Joy로 설정한다. 그래서 그의 책을 <Surprised by Joy>라고 붙였다. 이것은 Joy라는 한 여인과의 우연챦은 만남에 주어지는 Joy와 더불어서 그의 인생이 추구해 온 영원의 추구에 있어서 만나게 되는 우연챦은 Joy를 이중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Sehnsucht란 이런 기쁨(Joy) 자체로부터 오는 기쁨의 메아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기쁨을 맛본 사람이 그 기쁨을 더욱 소망하면서 갈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쁨(Joy)에 대한 갈증(Sehnsucht)가 바로 플라톤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에로스”(Eros)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에로스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나마, A.Nygren의 책 <아가페 & 에로스>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해 두었거니와, 결코 육체적이고 정욕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지하기 바란다. 그렇기만 하다면, 결코 기독교의 복음에서 제시되는 “아가페”와 결코 혼동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부터 주어지는 “아가페”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자기희생적이고 자기부인”의 동기가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능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서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에로스”는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서 뻗어올라가려고 하고 초월하려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경건하고, 거룩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동경하는 그 모든, 인간으로부터 발원하는 그 모든 욕구가 바로 “에로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거룩을 도모하고, 경건을 소망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에로스”로 말미암은 것인 지, “아가페”로 말미암은 것인 지 헷갈릴 수가 있다(이런 구분에 관한 것은, 실로, 청교도신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인데, 이런 구분에 대해서 탁월했던 사람이 죠나단 에드워드이다. 그의 책 <The Religious Affections>나 <Charity and Its Fruits>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여기서 Charity는 “아가페”라는 말의 에드워드 시대의 영어번역이다. Love라는 말로는 번역될 수 없는 것이 “아가페”이다. 그만큼 Love라는 말은 타락했고, 에로스적인 요소를 너무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루이스의 Sehnsucht가 에로스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의 어린이를 위한 동화, 나니아시리즈의 마지막 권 The Last Battle에 나오는 어떤 대목에서, 이 세상을 묘사하면서, Lord Digory가 표현하는 대사를 보면 그것이 분명해진다: “It was only a shadow or a copy of the real Narnia….It’s all in Plato, all in Plato: bless me, what do they teach them at these schools!” Shadowland의 개념이 바로 플라톤주의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 그 Narnia세계에 대한 동경도 또한 바로 에로스의 발현인 셈이다. 기독교복음의 위장된 에로스의 표출, 곧 Sehnsucht인 것이다.

 

 6) 성육신한 그리스도

 

 앞에서 필자는 루이스의 그리스도는 플라톤철학의 Demeriuge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이다. 물질은 천하기 때문에, 정신이 직접 물질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바로 이런 중간적인 존재를 통해서 정신세계가 물질세계로 유출되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는, 루이스에게 있어서, 이방종교의 불완전한 신화의 계시와, 유대종교의 불완전한 율법과 규칙들의 계시가 완전히 충분하게 계시된 것이다. 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죽어가는 신의 불완전한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감을 통해서 완전해 져서 참된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신화의 애매모호함과 희미함이 제거되어지고 이제는 하나님이 역사적 실재 속으로 걸어들어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주 정통적인 믿음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영적인 세계로부터 물질적인 세계로의 전이<transposition>와 초자연주의적인 플라톤철학의 핵심구조가 여기서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표현은 정통적이다. 하지만, 성육신이해의 골간이 되는 그 구조는 플라톤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곧, 그의 성육신은 정통적인 신조와 고백들이 표현해 온, 위격간의 통일(hypostatic union), 인간의 육신(살과 피)과 신성(하나님되심)을 취하시게 되는 것(assumption)등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신성 속으로 삼키워져 버리고 그 인간본성이 신성화되어져 버렸다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기 보다는, 피조물이 완전한 전이를 통해서 순수한 영혼이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예수는 우리와 똑같다고 하는 의미로서의 인간이 되었다기 보다는, 물질성을 취하여서 그것을 더 놓은 상위의 실제세계로 전이시킴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의 참 인간이 아니고 그래서 신적인 존재가 된 인간(divinized man)인 셈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가 동정녀출생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든지, 십자가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다(그의 구속이론은 좀 이상치만). 하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묘사와 표현들을 음미해 보면, 그는 참된 육체(살과 피)를 가지고 있는 God-man이라기 보다는 잠시 인간세계를 방문해서 일시적으로 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이 된 그런 존재이다. 그리스신화에서 등장하는 제우스신이 백조로 현현했다가 다시 제우스신으로 되돌아가는 등의 “신화”의 한 종류라고나 할까? 물론, “신화중의 신화”요, “참신화”라고는 하지만….별로 그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감이다. 이런 염려가 단순히 기우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아동들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 의하면, 하나님은 다른 세계들(worlds, 복수임에 유의할 것)에 또 다른 몸들(bodies)가 있음을 믿는다고 하였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Of course there is one thing Aslan has that Jesus has not ? I mean the body of a lion. (But remember, if there are other worlds and they need to be saved and Christ were to save them as he would ? he may really have taken all sorts of bodies in there which we don’t know about.)’ 물론, 가정법이긴 하지만, 이런 가정법이 가능한 그의 사고구조를 필자는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그 외계인을 위해서 과연 예수가 십자가를 다시 지고선 죽으시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다. 루이스의 어린아이들에게 던진 얘기는 바로 이런 질문에 예수가 다시 죽을 수 있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의 효력에 관한 신학적 의미는 상당히 곡해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에 조그만 한 점 같은 이 땅 위에서의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과연 이 광대한 우주를 회복시키기에 충분한 죽음이었는가? 다른 우주에 있을 지도 모를 그 생물들을 위해서 예수는 다시 죽어야만 할 것인가?

 

답해 보기를 바란다.

 

4. 정리 및 결론

 

C.S.Lewis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영적 거인이고 또한 지성적 거인이다. 그렇지만, 나는 난장이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인 측면에서나 지성적인 면에서나. 그런 면에서, 이런 루이스의 신학사상에 대한 비평이 적절한 것일까? 제대로 평가한 것일까? 어쩜 신학자의 글도 아닌 것을 두고, 신학의 잣대를 댄 것이 너무 잔혹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줍쟎은 신학으로 루이스의 신학을 곡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급한 마음으로 루이스의 신학을 스케취하느라고 생략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힌트만 주고 넘어간 부분들도 있다. 어쩌면 이런 글로 인해서 그런 의문들이 더 많이 생기고 그의 글을 더욱 구체적으로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란다. 읽어보는 가운데, 더 많은 질문이 생길 수도 있고, 스스로 그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루이스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최고이다. 그러면서도 자부해 보는 것은, 루이스의 글에 대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칭찬일조인 세간의 경향에 이런 비판의 소리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루이스의 글의 또 다른 면을 볼 수도 있게 할 것이니까. 어쩌면 루이스가 이런 비평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을까? 자기의 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혹시라도 보다 올바르게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필자를 보고는 싱긋이 웃어주고 잊지 않을까? 아니면 버럭 화를 내면서, 니가 뭘 안다고 내 글을 폄하하고 있느냐고 책망의 눈길을 보낼까?

 

상상해 본다.

 

오히려 어깨를 툭툭치면서, 루이스가 말하길, “Hello, have you really experienced the Narnia?” 어쩜 슬픔의 눈길이 그의 눈망울에 나에 대해서 어려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글의 취지를 오해하고만 있는 내가 불쌍하다는 연민의 그득한 눈망울로. 하지만, 그의 그런 얼굴에 나는 수줍음과 홍조를 띄고는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Jack, I don’t think I have. However, I think I don’t have to experience it, but I believe in Jesus Christ through whom I could experience all in all. You know, Jesus is my reality.” 그러면 루이스의 입가에는 붉은 홍조가 띄워질 것이다. 자기 말이나 내 말이나 그게 그것 같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다른데….ㅎㅎㅎ.

 

 

출처:  삼일교회  http://www.samil.org/zbxe/7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