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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5)교리적 관점에서 본 WCC 부산총회 | ||||||
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조직신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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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핵심은 WCC 신학…성경 진리보다 가시적 일치 집착하는 태도 반드시 수정돼야
1.WCC의 이중적 횡보
WCC 문제는 일차적으로 진리의 문제이다. 곧 교회가 바로 서느냐 넘어지느냐의 문제이다. 문제의 핵심은 WCC의 신학에 있다. WCC는 소위 근대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수행한다는 미명하에 진리를 묻지 않고 무차별적인 기구적, 조직적 교회 연합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무분별한 성경비평을 일삼고, 세속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원천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우리가 WCC에 대한 경각심을 드높이고 이를 적극 반대하는 이유는 이 행사가 성경무오(聖經無誤)를 믿고 참 교리에 서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대다수 한국교회 성도들을 미혹하여 이성주의, 세속주의, 다원주의에 물들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왜냐하면 거짓 교훈은 누룩과 같이 속히 번져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마 16:6).
한국교회의 다수를 점하는 보수적인 교단들과 성도들은 부산총회를 반대하는 입장을 누누이 천명해 왔다. 우리는 WCC의 총회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WCC 자체를 성경적인 단체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WCC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횡보를 즉각 중지하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미명하에 오히려 교회의 분열과 성도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을 이제 그만 그쳐야 할 것이다. 그들이 먼저 할 일은 한국교회 분열에 대한 역사적 회개이지, 섣부른 잔칫집 초대가 아니다. 2. “다른 복음”도 “복음적”이라고 끌어안는 WCC WCC는 성경을 전통(傳統) 혹은 전통화(傳統化)의 산물로 본다. 성경은 교회와 개인의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서 상대적인 권위만 가질 뿐이므로 그것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 66권만을 정경(正經)으로 보는 데에도 부정적이다.
WCC는 “에큐메니칼 성경해석학”을 주창하면서, 성경기록을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으로, 그리고 성경을 그 해석학적 작업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치는 해석자의 수준과 체험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해석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는 성경의 상황적 의미를 그들은 “전통”이라고 부른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은 오직 전통의 형태로만 작용한다.
WCC에 있어서, 성경은 여전히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는 미완성·미해결의 책이다. 그들에게는 성경의 절대적 진리도, 그것으로부터 나온 보편적 교리도 없다. 그들은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또한 성경에는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완전한 구원교리가 담겨있다는 사실(딤후 3:16; 계 22:18~19)을 인정하지 않는다.
WCC의 입장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성부는 사랑의 하나님, 성자는 은혜의 하나님, 성령은 능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각각의 위격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그리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된다. WCC에 의하면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위격은 부인되고 서로 간의 관계만 남게 된다.
WCC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교회들의 협의회”라고 본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단지 가시적 형태의 교회 즉 조직적이며 기구적인 교회에만 제한된다.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토대를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성도 서로간의 가시적 친교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교회의 비밀을 아예 제거해 버렸다(엡 5:32).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선택과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성취를 외면하고 개개인의 주관적 신념과 공동체적 소망만을 교회에 남겨 두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몸”이라고 정의하는데 더 익숙하다(엡 4:12).
WCC 신학의 모호성은 성례에서 극에 달한다. 그들은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의 표징-물 혹은 씻음-이 제시하는 의미를 “성(性)이나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의 장벽이 극복되는 새로운 인간성에로의 해방”에서 찾는다. 그들이 세례를 “문화화”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또한 WCC는 성찬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물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양극단의 오류에 빠져있다. 이러한 오류 역시 성찬을 통하여 가시적인 교제를 강조하는데 기인한다. WCC가 말하는 “성찬적 사건”은 “에큐메니칼 사건”을 뜻한다. 그들에 따르면, 성찬의 핵심적 가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총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그 표징이 떡과 잔일 필요가 없으며, 굳이 그 의미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WCC의 입장을 ‘성례적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교회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요 17:21). WCC는 교회의 본질을 사람의 교제에서 찾는다. 서로 모여서 하나가 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의 여하함은 묻지 않는다.
WCC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성도의 교제보다 WCC를 축으로 삼는 교회의 가시적·조직적·기구적 연합과 일치를 추구한다. 그들은 이를 “협의회적 교제(conciliar fellowship)”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궁극적 목적은 “협의회적 공동체(conciliar community)”를 형성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라 WCC가 머리가 되는 기구이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적은 WCC에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는데 있다.
WCC의 이러한 목적으로 인해 종교다원주의가 필히 따르게 된다. 1990년에 작성된 <바르 선언문>에서 WCC는 창조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일반은총이 보편적이듯이 구원의 은총도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시여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승화될 때 그 가치가 구현된다고 말한다. 즉 십자가는 구원의 유일한 한 길이 아니라 많은 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WCC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도 그들이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이 개념은 그저 명칭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듯해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어도 하나님이 하시기만 하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활동을 통하여서 선교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선교의 인간화(humanization)”를 추구한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국내 민중신학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WCC는 그 태동에 있어서부터 동방의 정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이에 영국의 성공회가 더하여지고 성경비평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종하던 유럽의 루터란들과 개혁교단들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편승하던 미국의 일부 교단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되었다. WCC의 외연이 획기적으로 확장된 것은 옛 소련과 동구 공산권 교회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속한 군소교단들 그리고 다수의 오순절 교회들이 참여하면서 부터였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WCC는 특정 교단의 권익을 성경적 진리보다 앞세우고, 공산권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제3세계의 사회운동에 있어서 폭력이라도 불사하는 등 세속적인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WCC는 기본적인 조항에 대한 형식적인 고백만 있으면 실제적인 교리의 차이가 있더라도 어떤 교단이라도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각 교회가 교리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극단적인 세속주의, 다원주의, 심지어 신은 죽었다는 사신신학(死神神學)을 좇더라도 문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 어떻게 믿는지는 거론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하여 성경의 진리가 기준이 되지 못하고 정치적인 논리나 세속적인 가치가 전면에 부각된다.
진리가 다르고 성경의 가르침에 바로 서있지 않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무분별하게 모이기만 힘쓰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수단이 될 뿐이다. WCC야말로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지으시고 운행하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과연 자격을 갖추지도 않은, 진리에 서 있지 않은 연합과 일치를 기뻐하시겠는가?
WCC를 준비하고 있는 유치측의 최근 횡보를 보면 가히 의아스러움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들은 실상은 감춘 채, 전혀 비본질적인 행사들을 과대 홍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총회에서 다루어질 민감한 의제들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하고, 그저 역대 개최지를 순회하며 땅이나 밟고, 통일열차를 운행한답시고 분주하며, 마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잔칫집 흉내만 내고 있다. 이러한 행사들은 식전행사 정도에 불과한 것이지, WCC 총회가 다룰 의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다만 이러한 점에 비추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동안 있었던 역대 총회들의 흐름과 최근의 몇몇 준비 문건을 고려할 때 부산총회는 이전의 어느 총회에서보다 성경의 가르침과 정통 교리에서 더욱 멀리 일탈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WCC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지만 교회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고 세속적이고 기구적인 활동을 주로 삼는다. 그러므로 WCC에 참여하거나 WCC를 돕는 것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된다고 할 것이다. 빛과 어두움, 의와 불법, 진리와 비진리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계시거든(요 14:17), 이방의 습속을 행하며 초혼제를 벌이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믿고 아는 자라고 할 것인가(요 17:3)? 어찌 그곳에 모인 자들을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인가(롬 8:9; 행 11:26)?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진리 가운데로만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거늘(요 1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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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 교수(총신대·교회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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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문서’ 근거한 새로운 선교 지침 예고했지만 이전의 낡은 선교 이해 답습
WCC의 정체성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WCC 10차 총회 한국준비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자료집에서 정병준은 이 WCC의 발달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 교회 협의회(이하 WCC)를 탄생시켰고 WCC는 개신교 선교 운동으로 출발해서 개신교회와 동방정교회를 포함하는 세계적인 기독교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간략한 진술에 통해 기독교 역사에 표출된 WCC의 기본 성격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WCC는 개신교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하지만 WCC는 특히 개신교 내에서의 종교 개혁이후의 교회 분열 현상을 회복하는 데 그 목표를 둔 교회 운동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WCC라는 역사적인 세계 교회 기구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던 지도자들은 “에큐메니칼 운동 전반에 보다 더 효과적인 자기 표현의 기구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WCC는 교회연합 운동이다. 그것은 2012년 1월 현재 전 세계 140개국에 349개의 교회들과 5억 8000만의 신자를 가진 교회연합 기구이다. 동방정교회는 그 시작부터 회원이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는 WCC 내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회원교회로만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12억의 인구를 가진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절반 밖에 안 되는 신자를 가진 WCC에 회원 교회로 가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부산 총회의 개막식에서 교황의 영상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보듯이 로마 가톨릭 교회는 WCC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셋째, WCC는 우선적으로 선교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WCC는 다음의 세 흐름의 조합의 형태로 구성된 것이다. 1937년에 영국 땅인 옥스퍼드에서 생활과 봉사 국제 대회와 동년에 에딘버러에서 신앙과 직제 세계 회의가 통합을 결정하였다. 그 이듬해인 1938년에 우트레히트에서 세계교회협의회 헌법 초안을 마련하여 WCC를 출범시킬 계획이었으나 2차 세계 대전으로 10년이 지난 1948년에 이르러서야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WCC 제 1차 총회가 개최됨으로 WCC가 출현한 것이다. 이 WCC에 국제선교위원회(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연합한 것은 1961년 인도의 뉴델리 총회에서였다. IMC의 합류는 늦었다지만 그래도 WCC는 선교운동이었던 1910년 에딘버러 대회에서 그 역사적 연원을 찾는다. 따라서 WCC의 선교 이해는 그것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현재의 WCC은 그 본래 의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1, 2차 총회 기간 사이에 WCC 내에 이미 “하나님의 선교”와 같은 변질된 선교 이론이 유포되었다. WCC의 이런 경향은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간의 신학적인 충돌을 야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전쟁으로 WCC의 근본 성격을 더 조사해 볼 겨를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한국 장로교회는 김현정과 명신홍 목사를 제 2차 총회인 에반스톤 총회에 파견하면서 WCC의 신학사상에 관한 자세히 보고할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해서 신학사상에 관하여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한국교회 내에 일찍부터 WCC의 정체성에 관한 신학적 견해차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서의 WCC 이슈는 교권적 사안이기 전에 이미 신학적인 이슈로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교회 내에서 WCC의 정식 멤버십을 갖게 된 것도 초기가 아닌 제 3차 뉴델리 총회(1961)에 가서야 기독교 장로회 교단이 가입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로부터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한국 교회에는 여전히 WCC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WCC가 적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을 준 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의 안위가 풍전등화와 같을 때 WCC의 중앙 위원회는 북한의 도발을 성토하면서 UN의 참여를 독려했을 뿐만 아니라 UN을 통해서 들어온 구호품 보다 더 많은 양의 물품들을 회원국들의 협조를 받아서 한국에 전달해 주었다 한다. 또한 이번 총회 개막전 행사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고려하여 독일에서 출발하여 러시아를 거쳐서 그리고 북한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는 평화 열차나 평화 협정과 같은 행사들도 기획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국민으로서는 WCC의 이런 면들이 매우 고마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 교회적인 입장에서의 그런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WCC는 일차적으로 교회 운동을 표방하는 기구이기에, 그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고려가 우선적이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WCC의 선교관에서는 어느덧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선교의 의미가 퇴색하고 사회구조적인 불의한 구조 개선을 시도하는 등의 사회 운동적 혹은 사회 윤리적 해석을 강조하게 되었다. 로마의 속박 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했지만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적 구원자로서의 본질에 충실하셨던 점을 기억할 때인 것이다.
WCC 10차 총회의 진행과 관련해서는 기본 프로그램 외에 개최 나라와 또 그 나라가 속한 대륙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에 따라서 특색 있는 장외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이러한 장외프로그램으로는 8차 총회 개최국 짐바브웨 하라레에서는 ‘파다레’(Padare)가, 그런가 하면 9차 총회가 열린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는 ‘무치롱’(Muchirao)이 운영되었다. 금년 부산 총회에서는 한국적 의미를 살려서 ‘마당’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마당 프로그램을 통해서 세계 교회가 갖고 있는 다양한 경험을 전시하며 나누고 토론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전시와 토론의 장이 기독교의 전통적인 경건에서의 이탈의 현장이 되곤 하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파다레’와 ‘무치롱’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의 ‘토착화’란 미명하에 이방 문화적인 요소들의 무분별한 허용의 결과 종교다원주의적 분위기의 확산으로 이어지곤 우려되는 것이다.
이번 WCC 총회의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와 치유를 주소서!’이다. 매 총회의 주제는 개최국과 그 개최국이 속한 대륙의 특수한 상황들의 고려 하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원래 한국준비위원회 측의 주제 제안은 ‘삼위 일체 하나님, 생명, 평화, 치유’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 교회들에서 ‘정의’를 제안해서 결국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와 치유를 주소서!’가 이번 총회의 주제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그 형식이 사회적 구조적인 악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선교의 기본 개념의 도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번 부산 총회에서는 또한 WCC의 갱신된 선교 선언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1961년에 WCC와 IMC가 통합된 이래로 WCC의 선교와 전도 위원회(이하 CWME)에서 나온 WCC의 공식적인 선교와 전도 지침서로는 1982년의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적 확언’이라는 문서가 있었다. 그 이후 30년 동안의 지구상의 환경과 인간과 교회의 변화를 감안하여 갱신된 WCC의 선교 이론에 기초한 새로운 선교와 전도의 지침서가 이번에 부산 총회에 상정되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 지침서는 제 9차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 후 CWME 멤버들이 새로운 선교와 전도의 확언을 세우기 위해서 작업을 하였고 이 작업의 결과물이 2012년 3월에 마닐라에서 개최된 CWME 위원회에 제출되어 검토하였다.(이후에는 ‘마닐라 문서’). 이 마닐라 문서는 ‘에큐메니칼적 확언’(1982)에 비해서 훨씬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적 보편주의로 선교의 관점이 이동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선교를 개인 간, 공동체 간, 국가 간, 그리고 우주적 차원의 생명신학 틀 안에서 고려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의 전통적인 선교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의 이동이라는 양상을 가졌다면, 마닐라 문서는 지구상의 환경파괴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현상 하에서는 환경과 인간과 교회가 ‘주변부’에서의 ‘중심’으로의 이동이라는 선교의 패턴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마닐라 문서에서는 ‘불의 숨결’로써의 ‘변혁적 영성’을 의미하는 성령의 선교를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기독교의 보편적 개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적 다원화와 다변화 가운데서 종교간 대화와 교차 문화적 의사소통을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두 지침서들(1982년& 2012년) 모두 1960년대 이후로 WCC의 선교이론으로 자리매김을 한 ‘하나님의 선교’ 신학적 강조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 이론이 그리 평가되듯이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으며 교회야말로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가장 분명한 지상의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에서의 교회의 역할이 너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강조와 예수의 유일성에 관한 주장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선포로서의 선교 이해는 이미 낡은 것으로 간주되어 버리는 것이다.
1961년에 WCC의 선교가 너무 약화되었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WCC와 IMC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였던 그 당시의 IMC 총무였던 레슬리 뉴비긴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WCC의 종교 다원주의적 경향과 타문화 선교의 쇠퇴를 확인하면서 이전의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였다한다. 30여년이 지난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뉴비긴은 WCC가 너무 종교 다원주의 경향이 심화된 나머지 그리스도 중심적 연합체라는 주장에 크게 반하여 사실상 연합정신의 구심점을 상실했노라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뉴비긴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기가 아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인간의 죄와 용서, 고통과 평안 그리고 죽음과 삶을 확인하는 유일한 장소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부산 총회 개최와 관련하여 한국에서의 WCC 이슈는 참된 복음이 무엇이며 또 진정한 선교가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다시 성찰하게 한다. WCC가 ‘가시적 교회 연합’에만 집착한 나머지 바른 신학, 바른 교리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거기에는 종교개혁자들의 ‘Sola’(오직)로 대변되는 바른 진리 표방은 물론이고 박형룡 박사도 지적하듯이“명백히 정의된 신학”마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런 WCC의 경향성은 바른 ‘진리 회복’을 목표로 출발한 개신교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지난 500년의 역사를 허사로 돌리는 격이 된다. 차제에 WCC라는 신학적인 이슈와 관련하여 형성된 최근의 한국 교회의 신학적 지형도를 바라보면서 바른 신학의 보수를 위한 보수주의자들의 단합과 협력의 필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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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환 교수(대신대 신대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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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인류평화 증진 위한 노력 강조했으나 지나치게 ‘싸우는 교회’ 부각
WCC 총회의 중심 의제는 사회참여 문제에 두고 있다. 이번 글에는 WCC가 공식적인 대회들을 통해 밝힌 사회참여에 대한 평가와 WCC의 주장이 세계교회에 미친 공헌점과 문제점에 대하여 논의하고, 개혁주의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1)제1차 총회는 ‘교회와 사회관계’, ‘사회의 무질서’ 그리고 ‘국제적 무질서’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에 대하여 논의했다. 총회는 첫째, 기술 발달에 기인한 권력의 광대한 집중의 원인을 분석하고, 둘째, 경제 영역에서 자본주의자들의 사적 소유권은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정의에 근거하여 억제되고 분배되어야 하고, 셋째, 사회에는 자유와 공공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하며, 정치 경제 권력자들의 힘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제2차 총회에서는 3개 분과의 주제가 사회참여와 관련된 주제였다. 총회는 책임적 사회구현을 요구하면서 첫째,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대량살상무기 생산과 전쟁 반대, 둘째, 총회는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을 반대했다. 따라서 총회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치우쳤다.
3)제3차 총회는 교회의 사명이 사회참여에 있음을 강조했다. 첫째, 교회는 독재정권에 복종해서는 안 되며, 둘째, 국제문제교회위원회는 국제적인 경제협력, 유엔의 개발원조, 공정한 무역정책, 주요 공산품의 가격안정, 개발에 대한 훈련과 연구 그리고 인구 억제 등에 대해 언급했다.
4)웁살라 총회는 질서와 평화에 기초한 책임사회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이전 방식 보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Rapid Social Change)를 바라며 혁명신학에로 전향했다. 사회참여에 대한 급진적 변화는 첫째, 경제정의와 식량문제로 제3세계에서 발생하는 기아와 비인간화의 해결을 위해 실제적 대안과 함께 교회가 ‘혁명적인 것’을 시도할 것, 둘째, 모든 전쟁에 대해 양심적으로 반대할 것과 셋째, 미국의 월남 전쟁 개입을 반대했고, 나이지리아 내전의 배후세력을 강하게 정죄했다. 따라서 WCC는 영혼 구원과 사회참여를 총체적으로 다루어 오는 과정에서 신학과 실천을 균형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급진적 사회참여 사상을 강조했다.
5)제5차 총회에서 사회참여에 대해 토의한 5분과의 주제는 ‘구조악 해방을 위한 투쟁’이였다. 총회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위한 교회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며, ‘구조악 해방을 위한 투쟁’을 다룬 토의에서는 그리스도를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자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과 구조적 악으로부터의 해방자로 정의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의 사회참여에 대한 대리적 직분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기울어졌다.
6)밴쿠버 총회의 8가지 주제들 가운데 4개가 사회참여와 관련된 주제였다. 그 주제들은 ‘참여를 위한 움직임’, ‘공동체 속에서의 나눔과 삶’, ‘평화와 생존 위협에 대한 대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 이었다. 평화와 생존의 위협 문제를 다룬 논의에서는 교회들이 대량 파괴 또는 무차별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무기와 관련된 어떤 분쟁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을 요청했다.
7)캔버라 총회는 사회 참여와 관련된 주제들을 논의하면서 국가 간의 빈부의 격차, 위기에 처한 피조세계의 질서, 난민들과 이민자들의 문제, 인종차별 그리고 여성인권 등의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1분과에서는 ‘정의, 평화, 생태보존’(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JPIC)이란 주제로 서울 대회에서 채택한 경제정의 실현과 생태보존 등에 관한 10가지 강령을 교회마다 실천해야 할 WCC 운동으로 선언했다.
8)제8차 총회는 21세기 인류 공동체에 부각된 세계화 문제와 함께 주된 관심을 사회참여에 두었다. 총회는 복음적인 회심보다 세계의 변화에 대한 능동적 참여와 사회적 변화를 통한 인간적 삶을 추구했다. 캔버라 총회와 JPIC(1990) 총회 이후에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Justice, Peace and Creation) 분과를 두어 이산화탄소 배출을 축소시키고, 성차별을 폐지하고, 신학교육을 받은 여성 지도자 임명, 여성에 대한 폭력 제거,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책임성을 요구했다.
9)제9차 총회는 2개 분과에서 사회정의와 경제윤리에 대하여 토의했다. ‘가난 없는 세상’이란 주제 하에 인간이 만든 체계적인 구조들이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탐욕으로 억압과 착취와 불의의 구조가 생겨났고, 지구 자체의 생존이 위협받는 시점에 와있다고 성토했다. 총회는 군사독재로 신음하는 나라들을 향한 폭력 극복에 대한 논의와, 빈부 격차와 폭력과 핵무기로 인하여 생명이 위협받고 고통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교회는 비폭력을 지지해야 하며, 전쟁에 참가를 거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1)사회참여와 관련된 WCC의 공헌점에 대한 평가:WCC가 역사적 과정에서 세계 교회 앞에 드러낸 공헌점은 없는가? 첫째, WCC가 타종교와 연대하여 사회정의와 인류평화 증진에 공동행동을 취하자는 노력이 공헌점이다. 둘째, WCC가 타종교에 대한 윤리적 덕목과 가치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타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점이다. 셋째, WCC는 총회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 인종과 성(性)차별 폐지 그리고 문맹자들에 대한 교육지원을 강조했다.
2)사회참여와 관련된 WCC의 문제점에 대한 평가:첫째, WCC의 근본적 문제점은 복음으로 죄와 죽음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하는 최우선 사명을 간과하고 사회참여만을 추구하며, 교회의 사회책임만을 강조하여 성경 계시의 근본적인 목적에서 벗어났다. 둘째, WCC는 사회참여를 요구하면서 인종차별 폐지에 대항하여 투쟁을 강조한다. 5차 총회는 사회의 구조악에 대항하는 투쟁을 위해 폭력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성차별과 인종차별 폐지와 인권을 위한 투쟁적 사회참여를 외쳤다. 셋째, WCC는 빈곤자들에 대한 경제적 구제를 총회 때마다 강조하며, 그들을 위한 투쟁을 외쳤다. WCC가 잘못된 사회구조의 해방을 말했지만 개인적인 삶의 변화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넷째, WCC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종교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적 사회참여를 유도했다. 다섯째, WCC는 경제적 참여에 일치를 주장한다. WCC는 국가의 경제활동이 탈중앙집권화 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 주어야 한다는 긍정성도 보였지만 교회가 국가의 경제활동과 노조운동과 경제적 약자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하면서 착취에 항거하여 노동자를 위한 인간다운 환경조성을 위하여 싸우는 노조운동을 교회는 환영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투쟁을 통해 구조악을 제거하려는 일치운동은 바르지 못하며, 구조적 해방을 위한 폭력의 정당성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1)개혁주의 관점에서 사회참여의 의의(意義)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은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인정한다. 2)개혁주의의 사회 참여에 대한 교리적 토대는 첫째, 하나님만이 인간과 세상의 절대 주권자라는 신학과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교리와 셋째, 사회참여는 인간의 구원 교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교리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의로운 법도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 한다. 3)개혁주의의 사회 참여에 대한 방법은 첫째, 개혁주의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직업에로의 소명(vocation)을 가지고 그 분야에서 사회참여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전(全) 교회 공동체의 사회참여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 각자에게 주신 은사(spiritual gift)를 통해 교회에 주신 사명을 수행하게 하신다. 4)사회·정치적 참여에 대한 요구와 전망에 대한 개혁주의 관점은 첫째, 개혁주의 교회는 WCC가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인권운동,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운동, 경제적 가난으로부터의 구제운동 등에 참여할 때 국가가 할 일과 교회가 참여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둘째,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여 세금납부와 같은 의무들을 이행하며(롬 13:1~7), 국가의 평안을 위해 기도할 것(렘 29:7)을 권면한다. 셋째, 국가는 종교 활동이 자유롭게 행해지도록 환경과 조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넷째, 국가의 관리들은 선량한 자에게 보상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벌을 가하도록 허락하셨다(롬 13:3). 이러한 것들이 국가와 국민 사이에서 이행되어야 할 상호 책임이요 의무이다.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용어가 의미하듯이 전 세계, 전 교회들 간의 관계와 일치 그리고 선교와 사회참여에 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는 WCC의 교회 일치운동을 수용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치운동에 대한 신학적이고 신앙적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한 ‘교회들의 대화, 협력 그리고 공동의 증거’라는 전제에서가 아니라 신학적 일치, 신앙고백적 일치 그리고 믿음의 일치가 선행되어야 함을 개혁주의는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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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2)WCC의 사회윤리 문제(동성애) 비판 | |||||||||
한수환 교수(광신대·조직신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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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로 인식, ‘회원으로 수용’ 주장은 종교적 행위 아닌 정치적 통합시스템
흥미로운 점은 1938년 네덜란드 우트레이트(Utrecht)에서 14명의 위원들에 의해 논의, 수정, 작성된 WCC 헌법의 기본원칙 제1조이다. 거기에서 “WCC는 한 하나님과 아들, 성령의 영광을 위해 공동의 소명을 함께 실현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고 정하면서, 이런 “기본원칙에 동의를 표명하는 교회들을 WCC 회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규정했다. 이 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도신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어떤 모임이든, 단체이든 상관없이 전부 회원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는 점이다. 이 의도는 WCC가 기독론보다는 신론을 가지고 기독교의 ‘통합’이라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겠다는 의도이다. 말하자면 기독론 없는 신론을 배경으로 하는 교회운동이 WCC의 밑바닥인 셈이다.
이를 위해 WCC는 개별성과 개인성의 가치보다 보편성 내지 집단성이 강조되는 운동의 형태를 가시화시킨다. 그 예로 오로지 믿음으로 주어지는 개인 영혼의 변화나 회심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 질병과 빈곤문제, 인간해방이나 사회정의 등과 같은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특히 1968년 웁살라 총회에서는 “보편성(Catholicity)이 교회의 예배, 참된 인간성 회복을 위한 증거, 봉사, 삶 등 여러 측면에서 표현되어야 한다”고 결정했으며 1975년 나이로비 총회에 가서는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교회들까지 수용해야 한다고 ‘보편성’의 원리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나아가서 1978년 인도의 뱅갈로에서 있었던 신앙과 직제위원회 보고서는 ‘하나의 희망을 나눔’이라는 제목으로 신앙고백들이 일치하지 않는 로마 가톨릭교회나 비성경적 세속적 연합운동과도 적극적으로 협력사업을 벌였다. 무엇보다 제 3세계의 저개발과 가난 인권 성차별주의 인종주의를 포함한 사회 정치 경제 문제 더불어, 핵무기 자연파괴와 지배계급횡포, 인권운동 신분제도 등 소위 사회 구조악 제거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성애 문제는 340개 회원 교단 960명과 5000여명의 옵서버가 모인 짐바브웨의 하라레(Harare)에서 개최한 제8차 WCC 총회(1998년)에서 구체적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UFMCC 교파가 1983년 캐나다 밴쿠버 총회와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캔버라 총회에 옵저버(Observer)를 파견하였고 1998년 제 8차 하라레 WCC 총회에까지 회원들을 파송하였다. WCC는 이미 동성애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1993년 11월에 2000명의 여성들이 참석했던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리-이메이징(Re-Imaging)’ 대회를 적극 후원도 했다. 그 대회에 참석한 연사들 중 대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는데, 대략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 무리는 자신들의 동성애를 자축했을 때 주위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과연 기독교가 기독론 없는 신론으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루어 왔던가? 역사적으로 2000년간의 수많은 신학적 논쟁도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라는 기독론에 기인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을 무시하고 신론에 만족하는 선교의 길은 종교다원주의의 길뿐이다.
WCC의 두 번째 문제는 개인성을 간과한 사회구원인데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인가? 한 인격을 천하의 가치에 비유하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비하면, WCC는 정치지도지나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려는 오지랖 넓은 행동들로 비친다. 교회의 본 사명은 외적인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의 내면의 변화에 있다는 이 간단한 진리를 WCC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사회 구조변화나 빈곤퇴치로 대신한다면 열심당원이었던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와 다를 바가 있는가?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공생애를 사신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그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
세번째 문제인 동성애자들을 사회적 약자로 보고 회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WCC의 주장은 기독교를 사회구원의 종교로 이끌려는 일종의 정치적 통합시스템이지, 결코 종교적인 행위로 비치지 않는다. 외형은 기독교라는 얼굴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성경에 그렇게 저주하고 금지하는 동성애까지 용납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얼굴을 가진 정치시스템이 분명하다.
동성애도 최근의 의학 자료에 따르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때로는 동성애가 유전과 선천적인 병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인식이 되어, 자칫하면 인간 본능의 ‘자연적 성향’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이 병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곡해에서 기인된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와 치료가 충분히 가능하며 현대 의학적 도움을 통해 꾸준한 노력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의학은 이런 점에서 창조질서를 세우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교회는 이런 일반은총의 도움과 아울러 인간 자신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바르게 세움으로 이 질병에서 자유하도록 도와야 한다. 교회는 이런 자들을 내치기 보다 사랑과 배려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다고 동성애 자체를 ‘자연’으로 보거나 태어날 때부터 생긴 질병으로 이해하는 행위는 죄이다. 성의 왜곡은 왜곡일 뿐이지, 결코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을 옹호하여 회원으로 삼는다면 다른 문제들도 함께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매춘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 일반 교회에서 적응 못하고 자신들끼리 모여서 교파를 만들어서 WCC에 가입하겠다고 하면 그들 역시 소수의 억압된 자로서 간주하고 WCC가 받아줄 것이 아닌가? 과연 선교가 성경의 핵심인가? 기독론과 교리나 신조들을 간과한 선교를 성경과 전통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예수 시대에도 동성애자나 매춘이나 가난한 자나 억압받는 자나 인권을 유린당한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외형적으로 대항하라고 선교의 사명을 주시지 않았다.
교리나 신조 없는 선교는 일종의 선교중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개인 내면의 변화를 무시한 집단적 외적인 힘의 선교는 오히려 기독교를 정치화시켜 나중에는 종교가 신이 되는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4)역사적 관점에서 본 WCC부산총회 전망 (0) | 2013.1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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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3)WCC 사회참여 정책 비판과 전망 (0) | 2013.11.02 |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1)WCC의 비기독교적 기독론과 구원론 비판 (0) | 2013.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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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0)WCC의 교회론 비판 (0) | 2013.10.31 |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1)WCC의 비기독교적 기독론과 구원론 비판 | ||||||
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조직신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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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 존재 사실상 방치하거나 거부…교회 본질 ‘가시적 친교’서 찾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참 교회는 한 분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심을 고백한다. 각각의 위격은 서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인격이시며,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니시고 고유한 사역을 감당하시나, 항상 함께 일하신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에 관해서 WCC는 단지 외양(外樣)적인 고백만 일삼고 있을 뿐, 이를 사실상 방치하거나 거부하고 있다.
WCC는 자신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325년, 381년)의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따르고 있다고 공표하고 있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는 자유분방하며, 그나마 정통 기독론을 선포한 칼케돈 신경(451년)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WCC는 성자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유일하신 중보자로 여기지 않고, 단지 성부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한 사자(使者) 정도로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서 누구든지 그와 유사한 영적 사업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보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암암리에 표출해왔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진리, 다른 길, 다른 복음은 없다(요 14:6; 갈 1:7).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만이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요 8:32), 거룩하게 한다(요 17:17). WCC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대적이며 불가항력적으로 시여(施輿)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 땅에 오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상대적이며 일반적인 것으로 치부될 뿐이다.
WCC는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머리로 여기는 무형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지상의 기구적, 조직적 교회 즉 가시적인 유형교회에만 집착한다. 이러한 WCC에 의하면 결국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Christless Church),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만 남게 된다. 진리를 묻지 않고 그저 모이기만 힘쓰는 WCC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고전 1:23), 곧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벧전 2:8)가 될 뿐이다. 2. 정통 구원론을 부인:다른 복음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자신을 향기로운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엡 5:2)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요 19:30), 그것을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셨다(롬 3:22). 그러므로 주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하나이다(엡 4:5).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천하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행 4:12).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으므로(엡 5:25), 그 은혜의 선물을 분량대로 받은 우리가 그의 몸 된 교회가 되었다(엡 4:7, 12). 따라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오직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만 그곳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마 18:20). 이렇듯 그리스도가 없다면, 은혜도, 은사도, 구원도, 교회도 없거늘, WCC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떠난, 그리스도가 없는 인류의 연합과 일치를 외치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자신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21). 그러나 WCC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WCC라는 기구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추구하고 있다.
WCC는 우리가 받은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사실에는(롬 8:9) 관심을 갖지 않는다. WCC에는,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 친히 사신다는 사실에는(요 14:16-17, 갈 2:20) 별로 주목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종교성 정도로 성령의 역사와 작용을 취급하는 경향이 현저히 드러난다. 그들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뿐만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出來)는 사실을 부인한다(요 14:26; 15:26; 행 2:33).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와 다름없이 성령의 강림을 받았으되(눅 3:22), 그 “충만함”이 있었다는 점에서만 구별될 뿐이다(눅 4:1).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는 한 특출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모범이 될 뿐,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세주는 될 수 없으시다.
보혜사 성령은(요 14:26) 아무 일한 것이 없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轉嫁)해주심으로써(롬 4:6)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와 상속자로 삼아 주시는 양자의 영이시다(롬 8:15, 17). 그러므로 이를 받음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다(롬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그들의 총회 석상에서 온갖 영을 불러들이는 일종의 굿판을 벌인 정현경의 초혼제조차도 용납하였다. 이는 그들이 성령을 단지 범신론자들이 말하는 영적 생기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방증(傍證)이 된다.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외치지만, 몸이 하나라는 사실도,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엡 4:4). 한 성령의 도움이 없이 어찌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교회가 한 교회로 평안히 서 갈 수 있었겠는가(행 9:31)? 3. 한 그리스도, 한 성령, 한 교회를 부인 WCC는 성경의 진리 가운데 에큐메니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묻지 않고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이 신학적이며 교리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교리가 바로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 교리가 바로서지 못하면 교회는 넘어진다.
교회의 ‘하나 됨’은 교리의 ‘하나임’에 기초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상 추구된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교회가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공의회들이 그러했다. 종교개혁이 ‘오직 성경으로’ 라는 원리를 제일로 삼은 것은 성경의 진리 가운데서 교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회복시키고자 함에 있었다.
주님을 나눌 수 없듯이 교회도 나눌 수 없다(고전 1:13). 교회가 하나인 것은 오직 교리 안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자격을 갖춘 일치(a qualified unity),’ ‘진리 가운데의 일치(a unity-in-the-truth)’여야 한다. WCC는 교리에 관한 고백은 하지만 교리 그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들이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은 성경 비평주의,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에 젖어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非)성경적이며 반(反)교리적이다.
WCC는 연합이 아니라 타협을, 일치가 아니라 공존을 추구할 뿐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이 말하는 “협의회적 교제”를 통하여 “협의회적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상의 모든 교회를 WCC의 조직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WCC는 교회의 일치를 넘어서 인류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것은 교회의 확장이라기보다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화를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참되다(갈 1:6~9). 오직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 배운 것만을 자랑한다(고전 4:7; 딤후 3:14). 교회는 성경적 진리를 온전하게 붙들고자 했을 때 오히려 편협하지 않았으며 교회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다. 그들은 그것이 양보할 수 없는 진리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은 다원주의나 혼합주의로 자신의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신 적이 결코 없으셨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일치는 그것이 진리 가운데 이루질 때만 평강이 된다. 그 진리는 참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 자신이다(요 14:6). 교회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엡 4:15). 교회가 받은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롬 8:9; 빌 1:19). 그러므로 교회도, 진리도, 성령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교회의 본질을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두고 그 가운데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에큐메니즘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다.
교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무분별하게 모이기만 힘쓰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오늘날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 그것은 WCC 자체이다. 한국교회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WCC는 선교를 가로막고, 교회를 해치는 일을 주도하고 있다. 제10차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목하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이를 분명히 방증하고 있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WCC 총회에서는 “세상의 소망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모여서 무려 두 주일을 논쟁한 후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부인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보고도 WCC에 가입하기를 원하여 이탈을 감행한 일군(一群)의 교회가 이번 WCC 부산총회를 기화로 마치 한국교회의 대표라도 되는 양 버젓이 행색하고 있으니 어찌 개탄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과연 비진리(非眞理)에 이끌려 당을 지어 나간 유파(流波)가 추호의 가책도 없이 한국교회를 들먹이며 연합과 일치를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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