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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과 제사에 대하여
글: 이문식 목사 (산울교회)
근대화 이후 유교적인 세계관이 그 영향력을 많이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직도 우리나라의 많은 가정에서는 명절 때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또 귀신에게 제의를 행하는 샤머니즘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최근 사주팔자,
혹은 점복을 행하고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등의 무속적 행태가 젊은 세대에게도 더 크게
유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 기독교신앙은 이러한 제사나 샤머니즘적인
무속행위를 엄하게 금하고 있다. 성경은 "대저 이방인에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라고 말한다.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은 헬라어 '다이몬'
(daimonion)을 번역한 것으로서 '타락한 천사'(계12:4)들을 가르키는 것이지 결코
우리 동양인들의 사고처럼 죽은 사람의 혼령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죽은 자의 혼령은 사망 즉시 음부 혹은 낙원으로 가서 주님의 재림때까지
그곳에서 머문다고 말하지, 죽은 자의 혼령이 귀신이 되어 이 세상에서 돌아다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양 세계관에서 말하는 귀신과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은 전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에서 말하는 귀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동양에서 말하는 귀신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혼령, 혹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화와 복을 내리는 정령(精靈)을 가르킨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는
후대에 그 의미가 통합 정돈된것일 뿐, 동양의 여러 사상에 따라 귀신론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진다.
< 무속의 귀신론 >
먼저 한국의 무속사상에서는 사후의 인간은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진다고 본다.
그 중 '혼은 사망 후 유계(幽界)로 가고 백은 땅으로 가서 흩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혼이 한을 품고 현세에 방황할때에 이것이 귀가 되어 재앙이 그 집에
임한다고 보는 것이다. 무속에서는 이런 귀신을 자연신(自然柛)과 구별하여 사령신
(死靈柛)이라고 부른다. 무속에서 '천지신명이시여 일월성신이시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할때에, 이 신들은 자연을 신격화 한것이거나 자연에 내재한다고 믿는 정령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으로서 일종의 자연신 숭배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령신에는
국가나 촌락 공동체 씨족의 시조, 조상의 영이 포함되어져 있는데 이것은 인간신 - 즉,
사령신(死靈神)숭배인 것이다. 대체로, 후손들은 이 조상의 영이 유계에 가도록 잘
섬겨야 집안이 평안하고 후손이 무병장수한다고 생각하며 조상신 숭배를 행하는
것이다. 반면에 여귀(厲鬼), 잡귀(雜鬼), 객귀(客鬼)들은 유족이나 후손에 의하여
가족신으로 모셔지지 못한것들이다. 이들은 그러므로 한(恨)과 원(怨)을 풀지 못하여
유계에 가지 못하고 현세에 떠도는 원귀(寃鬼: 원통한 귀신)가 되어 저주와 재앙,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귀신의 재앙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사람들은
무당이라는 영매(靈媒)를 통하여 이러한 원귀들의 원과 한을 풀어주거나 혹은 무당의
'몸주'를 통하여 이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보통 이런 무당의 몸주들로는 특별히
영험하거나 힘이 있는 존재로 여겨지는 사령이 들어서는데, 주로 영아의 사령과 처녀,
총각의 사령이 들어선다. 그리고 특출한 인물의 사령은 앞날을 예언하고 재앙을
막아주는 영험한 귀신으로 숭배되는데, 이조초에는 고려 말의 억울하게 죽은
최영장군의 영을 몸주로 받은 무당들이 성행하였고 이조말에는 임경업장군의 영을
몸주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무당들이 성행한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불가의 입장>
불가에서는 근본적으로 조상신의 개념이 없다. 불가에서는 사후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나, 사망 즉시 황천길로 떠나 염라부로가서 49일만에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받아 징벌을 받거나 업에 따라 윤회하여 다시 축생이나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이와 같은 업보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득도하여 부처가 되어
이 윤회의 고해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불가에서는 오직 불공만
드릴뿐 죽은 조상신을 가정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조상숭배는 하지 아니한다.
<유가의 입장>
유가에서는 원래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이 대세이다. 원래 원시
유교에서는 하늘이 인격화되면서 상제 또는 천제라는 개념만 있었다. 시경에서는
'천이 은혜를 베풀지 않아 백성들이 눈물바다를 이루는구나'라고 하였고, 또 '어째서
천으로부터 벌을 받는지 내 죄는 무엇인지 알길이 없네'라고 하였다. 즉 원시
유가에서는 하늘 신 개념은 있었어도 조상신 개념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중국왕실에서
큰 공이 있고 지위가 높은 성왕들에게만 제사가 드려졌는데 이것을 조(祖)라고 하였다.
또 국가나 촌락에서 큰 덕이 있는 사람에게 만 제사를 드렸는데, 이를 종(宗)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조와 종은 그 제사의 성격이 결코 조상신과 연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 때에 이르러 혈통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민간에 성행하여
자리를 잡았다. 당시 이와같은 제사예법의 문란을 한탄하던 공자는 '조상신(神)에게
드리는 제사만 효의 연장으로서 인정'하였을 뿐(論語 泰篇), '다른 귀에게 드리는 제사는
도에 맞지 않으며 복록를 구하는 것으로 아첨과 다름없다'(論語 爲篇)고 비판하였다.
더 나아가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기겠으며 삶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論語 先篇)라고 하였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論語 雍篇)고 권고하였다
이처럼 유가는 효의 연장으로서 조상신 숭배를 마지 못해 허락하였을 뿐, 샤머니즘적인
기복의 동기에서 귀신숭배를 하는 것을 금하였다. 특히, 조선 초 성리학자인 정도전은
그의 책 '삼봉집'(三峰集)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사람이 죽으면 혼기(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으로 내려가니 자연으로 흩어짐이다. 사후 혼기와
체백이 다시 합하여 생명이 될 수 없다는 이치 또한 명백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고,
남효은은 그의 책 '추강집'(秋江集)의 '귀신론'(鬼神論)에서 '사람이 죽어서 형체가 이미
소멸되면 이(理)는 이(理)대로 기(氣)는 기(氣)대로 돌아가니, 어디에 그 마음이 있고
그 형상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처럼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은 그 내세론에 있어서
귀신의 존재를 현저히 부정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서경덕은 그의 책
'화담집'(花潭集)의 '귀신 사생론'(鬼神 死生論)에서 '비록 일편촉향의 기(氣)라도 그것이
면전에서 흩어지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여기는 마침내 흩어지지 아니한다'라고
함으로써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희미한 단초를 놓았다. 즉 음정(陰精) 및 기(氣)의
활동체로서의 귀신을 인정하고 사후 제사의 필요를 설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람이 죽은 사람의 혼령을 의미하는 귀신을 숭배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샤머니즘의 영향 탓이지 불가나 유가의 영향은 아니다. 비록 유가에서
'효의 표현'으로서 조상제사를 허락하였으나, 이조차도 유교의 고유한
전통이라기보다는 중국의 고대신앙으로부터 유래한 것일뿐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제사가 유교의 산물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유교가 한 역할은 중국 민속의 제사를 효의 차원에서 예법으로 확립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초에는 일부 사대부층에 속하는 사람들만 조상제사를 지냈으나
조선 말 철종때에 이르러 전 국민의 약 7할 정도가 양반이 되버리는 신분해체의 상황이
도래하면서, 제사가 어느덧 전 국민에게 보편화된 것이다.
(안점식, 「세계관과 영적전쟁」P141)
<기독교와의 충돌>
이처럼 조상숭배가 보편화된 조선말에 드디어 제사문제는 기독교와 유교사이의 큰
갈등으로 대두되었다. 1791년 정조 신해년에 정약용의 외종이었던 진산(珍山)사람
윤지충과 권상연이 그들의 천주교 신앙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는
사건이 생겼다. 이들은 관원에게 체포되어 패륜외도의 사상에 물들어 혹새무민케하는
자로서 멸기난상의 죄목에 해당된다고 고발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신해교난). 그후
1801년 이승훈,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등 여섯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으며, 권철신,이가화는 옥사되었고, 정약용,정약전은 유배되는 대박해, 소위
신유교난이 일어났다. 때에 순조 원년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그 하교문에서 '사람이
사람됨은 人倫이 있기 때문이요, 나라가 나라됨은 敎化가 있어서 인데, 이제 저 西學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人倫도 헐어 파괴시키고, 敎化에 반역하여 스스로 되놈과
짐승으로 돌이키게 한다'라며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한마디로 조선말의 유교체제는 기독교의 조상신 숭배 금지 및 제사 폐지를 유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효를 무너트리는 패륜의 행위로 본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효는 기독교인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하면서도, 한국사회의 제사는 참된 효행의
표현이 아니라 귀신(다이몬)의 궤계에 속아 효를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논박하여왔다.
그렇다면 성경의 귀신론은 무엇인가?
이미 말한 것처럼 성경은 현세에 횡행하는 조상신이란 '조상의 사후의 영'이 아니고
사탄과 그 악령들이 조상의 이름과 모습과 형태를 흉내내어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중국 민간에서 연원된 잘못된 내세관에 근거하여 유교에까지 들어온 이
샤머니즘적인 조상신 숭배를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성경은 이처럼 사람들이 사탄과 악령들에게 속아 악령들을 그들의 조상신으로
착각하여 제사의식에 참여할때에, 악령(다이몬)과 영적 교류를 하게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한다(고전10:20-22). 칼빈은 '성찬시 마치 우리가 입으로 포도주를
마시는것과 똑같이 영혼은 진정 그 피 가운데서 친교를 나눈다'는 영적 임재설 또는
교통설을 제시했는데 레온 모리스(
쉽게 우상숭배한다는 점을 이용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상에게 희생제사를 드릴 때
그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중립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사실 악한
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와의 영적 교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라고
경고한다. 영국의 유명한 성경학자 버클레이(Berklay) 박사도 고린도 주석에서
말하기를 "마귀들과 악령들은 언제나 사람의 몸에 들어가려고 숨어 기다리고 있었으며
실제로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하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 영들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에 머물러 있다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을까?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이 제사의 실체를 밝히 파악하게된
한국 기독교인들이 효행과 제사참여를 명백하게 분리하며 평소의 효행을 강조하되
제사행위에 대해서는 그 참여를 금지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결론이다. 신명기
32:15-17절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 곧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라고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0:14절과 20절에서는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 대저
이방인에게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다.
<한국교회의 교훈>
그래서 1897년 4월 14일자 「죠선 크리스도인 회보」의 '우상론'에서는 "슬프다! 세상
사람의 우상을 숭배함이여! 당장에 살아있는 부모의 뜻을 순종치 아니하고 근심을
끼치다가, 부모가 죽은후에 그 신주에게 제사를 지내며 효도를 다한다하는 사람은
재주있는 장색에게는 절하지 아니하고, 그가 만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라고 하였고 1897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는 "제사를 금지하고 장례는
엄숙 간편하게 하도록 지도 할것이요 장례나 제사시 음식 차려놓고 배불리 먹는 것을
금한다."고 결의하였다.
이처럼 복음이 전파될때에 복음은 항상 복음을 수용하는 민족이나 부족의 고유한 종교
혹은 내세관과 충돌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와 종교를
분리하여 문화적 내용(효)이 복음의 합당한 것이면 기꺼이 수용하고 그 종교적 형식
(제사)이 복음에 합당치 아니할때에는 마땅히 어떠한 댓가를 치루더라도 그것을
수용해서는 아니된다. 만일 이를 수용시에는 종교적 혼합주의로 굴러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한국교회는 조상제사를 폐하는 대신에 효의 개념은
깊이 수용하여 추도예배라고 하는 새로운 효의 종교적 형식을 창조적으로
제안권면하는 것이다.
하여, 다음과 같이 교우들은 행함이 마땅하다.
① 평소에 효를 행하고 가문의 여러 친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형제와
동기간에 화목하는데 앞장서야한다.
② 되도록 제사 장소를 피하고 악한 영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노력하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혹은 불신 가족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덕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제사 장소에
있게 되는 경우에는 악령과의 접촉을 단절하기 위하여 평소보다도 더욱 성령에
충만하여 기도에 힘써야한다.
③ 동시에 그 과정이 치열한 영적 전쟁임을 의식하고 가족과 일가친척이 악한 영과의
교제에 빠지지 않도록 간절히 중보 기도하여야만 한다.
④ 추도예배를 드릴시에는 고인의 사진을 세우는 것 외에 향촉이나 음식이나 제사상을
차리지 않도록 하고 엄숙하고 단정하게 고인의 덕성과 인품과 선행과 신앙을 되돌아
보며 생전의 당부와 유언과 교훈을 되새기면서 온가족이 서로 화목하고 더욱 힘써
하나님을 섬겨 땅에서만의 가족이 아니라 하늘의 가족이 되도록 서로 권면하여야한다.
⑤ 추도예배시 불신 친지나 가족의 비웃음을 받지 않기 위하여, 잘 준비된
'추도예배순서지' 및 '생전의 부모님의 육성 녹음Tape나 영상'등을 준비하고,
'부모님께 행하지 못한것과 형제간에 우애를 더 깊이 못한 것을 깊이 회개하며,
새롭게 가족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등'준비된 기도와 설교말씀을 잘 준비하여
깊은 감동을 주도록 노력해야한다.
⑥ 추도예배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온 식구가 함께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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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인 기독교 신앙으로는 충분치 않다./존 칼빈 단지 교인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신자라고 불리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어떻게 영화롭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자.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참으로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사도바울은 “거짓된 정욕으로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 는 교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자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은 복음에 대해서 아무리 유창하고도 수다스럽게 떠든다 해도 마침내 거짓되고 위험스러운 위선적인 신앙임이 드러나고야 만다.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라 생활의 교리이다. 그것은 이성과 기억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복음이전 영혼에 자리 잡고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야 비로소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을 그침으로써 증명해 보이도록 하자. 그리고 그들로 그들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무가치한 제자들이 아님을 스스로 보이도록 하라.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지식에 첫 번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구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태도에 깊이 스며 들지 못하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백해무익할 것이다. 철학자들은 인생의 요령을 체득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궤변가에 지나지 않는 자들을 바르게 정죄하고 그들의 단체로부터 불명예스럽게 추방한다. 훨씬 정당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입술로만 복음을 외치고 그들의 마음은 텅텅 빈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야만 한다. 참된 신자들의 확신과 애정과 풍성한 생명력과 비교할 때 철학자들의 충고는 냉냉하며 생명력을 이미 상실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개혁주의 마을 '좐 칼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2013. 11. 13. 04:29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대장쟁이 ㆍ 2013-11-12 (화) 13:41 ㆍIP: 173.xxx.141 ㆍ조회: 10 열왕기하 20장 1절을 보니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너의 신변을 정리하라, 너는 죽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앗수르는 쳐들어오고 히스기야는 아직 한창 때인 39세입니다.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을 기억하여 주소서.’ 기도하며 심히 통곡합니다. 제가 젊은 시절 좋아했던 칸초네 ‘물망초’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날 잊지 말아라.” 하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가사입니다. 어쩌면 구원은 ‘물망초’ 가사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잊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시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나를 기억하신다면 사랑이 한이 없으신 그 하나님은 내가 죄악에 빠져 영원히 죽는 것을 견디지 못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편강도는 주님께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부탁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병석에서 벽을 향하고 돌아누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편지를 펴놓고 한 기도와 죽을병에 걸려 벽을 향하고 통곡하며 드린 기도는 오늘날에도 간절한 기도, 응답 받는 기도의 모본으로 많이 인용됩니다. 이사야 38장 14절을 보면 히스기야는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간장을 에는 것 같은 너무나도 간절하고 애처로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를 쳐다보며 애처롭게 우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 도저히 안 들어주시고는 못 배기실 것 같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그 뜻과 계획을 바꾸시는 이야기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며 ‘아, 응답 받으려면 나도 이렇게 기도해야겠구나.’ 하고 히스기야의 기도만을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 오늘날 이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더 중요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히스기야 같은 믿음의 사람을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을병 드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기도하게 하시고 다시 15년을 살리신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단순히 기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금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구원에 관한 책,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서 앗수르 산헤립 왕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가려는 원수마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젊은 나이에 죽을병이 든 것은 어느 누구도 심판과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며 제비같이, 학같이, 비둘기같이 애처롭게 쳐다보며 울부짖을 때 들으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멸망의 무서움, 죽음의 두려움,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 구원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생명과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있습니까? 죄악과 지옥권세 앞에서 두려워 떨며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눈이 쇠하도록 주님을 바라보며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심령의 애통함이 있습니까? 자녀의 합격이나 사업의 형통 따위를 놓고 히스기야처럼 애절하게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생명과 영혼의 구원을 놓고,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놓고 히스기야처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영표 해그림자를 10도나 거꾸로 되돌리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십도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성경은 10눈금(10 step)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0눈금이 어느 정도인지, 몇 시간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해 그림자를 거꾸로 되돌리면서 히스기야가 3일 만에 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3일 만에 다시 살 것이라 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살려주시면 되지, 왜 히스기야에게 삼일의 약속을 하시면서 우주질서를 깨뜨리고 태양을 거꾸로 되돌리는 그런 엄청난 역사를 보여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우주만유의 창조주이시며 주재자이심을 밝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생명구원의 약속, 곧 삼일의 약속은 우주의 운행질서 보다 더 우선하며 태양의 운행보다 더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것은 우주만유의 창조보다 더욱 큰 사건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약속은 태양의 운행보다 확실하며 복음은 우주의 운행질서 보다 더 우선합니다. 에이든 토저2013. 11. 13. 03:39
새 생명체로 거듭나고 성장하라
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영원히 그 생명을 이어간다. 거듭남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사역이다. 거듭남은 이성적인 추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사건이다. 거듭남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는 심리학자는 없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날이 이르면, 자신이 거듭남의 기적이 없이 단지 기독교 신앙을 정신적으로 동의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계문명의 시대와 더불어 도래한 ‘인스턴트 기독교’는 기독교적인 삶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새 신자가 갓난아이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발육을 위해 적절한 양분섭취와 운동이 필요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성장의 능력을 지닌 갓난아이와 같다. 따라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성장이 둔화되거나 발육이 지체되기도 하고, 또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건강하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신자의 영적 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
자기애를 믿음으로 위장하지 말라
우리는 죄를 제거하지 않고 세련되게 위장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가지 죄를 다른 죄로 바꿔치기 했을 뿐인데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회개를 장소의 변화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한때 는 먼 타국의 돼지치기들과 어울리며 죄를 짓고 살다가 지금은 왼견상 훨씬 더 깨끗하고 존경할만한 경건한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더라도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불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교만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영향 아래 이른바 자긍심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하나님의 가증스럽게 여기는 자기애를 도모하면서도 겉으로는 성경말씀으로 위장해 교묘하게 그 실체를 숨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럴 경우에는 문제가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더욱 깊이 숨어든다. 험담을 일삼고 문제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면 ‘영적 조언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전과 다름없이 강한 호기심과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그대로인 것을 보게 된다. 즉 외양만 변했을 뿐 내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 침투해 중상과 분열을 조장하고 신자들을 연약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기 행각으로 인정되는 사업수완도 그리스도인이 기도한 뒤에 적용한 경우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하나님이 그일에 함께 동참하신다는 증거로 크게 선전된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사례는 죄가 그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외양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세련되게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참 믿음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하지만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 요즘처럼 큰 인기를 누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믿음을 인간의 도덕적, 영적, 경제적 질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한다. 강한 믿음만 있다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신념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믿음의 가치를 부르짖는다.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믿으며 된다. 이런 현실의 배후에는 믿음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는 우주의 절대적인 힘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도사리고 있다. 믿음만 있으면 절망, 공포, 패배, 실패 등이 사라지고 희망, 자신감, 자기통제를 비롯해 전쟁과 사랑과 스포츠와 사업과 정치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진리를 믿을 때만 믿음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거짓을 믿으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단지 ale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믿어야만 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우리 인간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전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수 없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종교는 바로 여기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분에 대해 말한 모든 증거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영접한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날조되거나 우리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참 믿음은 언제나 복종을 요구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신념에만 귀를 기울이는 감상적인 믿음의 청산가리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자기의 신념을 믿은 믿음은 거짓믿음이다. 그런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둠 속에서 두 동간난 다리를 건너겠다고 차를 몰고 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은 혁명이다
초창기 루터교 신자들은 “믿음은 사람을 동요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교리가 요즘에는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바울과 루터가 말한 믿음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온통 뒤흔들 뿐 아니라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믿음은 최종적인 권한을 지닌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삶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결정하게 한 뒤 하나님이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종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소곳한 태도로 영혼 구원에 열중하는 전도자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며 믿음을 갖게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믿음은 사람들을 동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하게 해준다. 그런 믿음은 자아의 표면을 깨끗이 닦아주고 자긍심을 회복시켜 준다. 기독교가 장난삼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오직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사람만이 진정한 성경적 신앙의 소유자라고 자신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믿음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의속죄사역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교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는 진술문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도 일종의 믿음이기는 하지만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는데 그칠 뿐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참 믿음은 거짓을 말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도적적인 완전함 위에 다른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을 뜻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은 회개하는 영혼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일 뿐 감각이나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자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믿음은 기적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실 때 믿음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행동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믿음과 도적적인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믿음의 본질은 도덕적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주님으로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하며 결국에는 거짓으로 드러날 뿐이다. 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순종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허락하신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는 항상 순종이 뒤따른다.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에 이르는 그릇된 교리를 피하려다가 우리는 순종이 없는 구원을 말하는 극단에 치우쳤다.
믿음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홉 걸음을 다가오신다. 하지만 마지막 열 걸음을 떼어놓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지만 우리 대신 회개하실 수는 없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 신종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날숨과 들숨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를 우리의 친구로, 그분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로, 그분의 길을 우리의 길로, 그분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으로, 그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 세상에 새 생명을 얻지 못하게 속이는 마귀의 책략이 설치되어 있다. 맡기는 믿음으로 포장해 겉으로는 아무런 위험도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을 노리는 계책이 설치되어 곳을 하나 예로 들자면, 바로 기도다. 하나님이 항상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승낙’은 물론 ‘거절’도 응답이고, 또 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논리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불순종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데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반드시 하나님이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A.W 토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지를 펴놓고 올린 기도2013. 11. 13. 03:01
편지를 펴놓고 올린 기도
[왕하 19: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의 전에 펴놓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당시 중동의 패권자였습니다. 중동지역의 모든 나라들을 쳐서 정복하고 굴복시켰습니다. 열왕기하 18장, 19장에는 그가 정복한 하맛, 아르밧, 스발와임, 헤나, 아와, 고산, 하란, 레십, 들라살 등 많은 나라들과 성읍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정복한 나라의 왕들을 갈고리로 코를 꿰고 입에 재갈을 먹여서 소처럼 끌고 가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아가고 이리저리 흩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잔인한 산헤립의 침공을 두려워한 히스기야는 유다 성읍들을 견고히 수축하고, 특히 예루살렘에는 기혼샘으로부터 1,750 피트(약 525 미터)에 이르는 지하수로를 파서 성 안 실로암 못으로 연결하는 대공사를 하여 침공에 대비하였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지하수로는 ‘히스기야의 수로’로 불리며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한 코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헛수고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나온 바와 같이 애굽과 내통하였다가 앗수르의 보복을 당하고 앗수르왕에게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은을 다 바치고 기둥에 입힌 금까지 다 벗겨서 갖다 바치고도 앗수르 군대장관 랍사게로부터 모욕을 당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에워싼 산헤립의 부하 랍사게는 ‘탈 사람이 있다면 말 이천 필을 내겠다, 내기하자. 너희 신이 너희를 건지겠느냐.’ "내 주 앗수르 대왕이 나를 보내 너희들로 자기 대변을 먹고 소변을 마시게 하려..." 하면서 히스기야와 유다백성들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는 것 같이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궁내대신과 서기관과 장로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앗수르 군대에 붙이지 않겠으며 그들이 오히려 본국으로 돌아가 죽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앗수르 왕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보내 ‘너의 하나님이 내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해낼 수 있을 줄 아느냐, 열방의 어떤 신이 자기나라를 건졌는가?’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훼방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산헤립의 편지를 펴놓고 부르어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교만한 산헤립의 코를 갈고리로 꿰고 입에 자갈을 먹여 오던 길로 끌어 되돌아가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처녀 딸 이스라엘이 저들을 비웃으며 예루살렘의 딸이 머리를 흔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들은 히스기야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하룻밤에 산헤립의 18만 5천 군대를 송장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산헤립은 돌아가 두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유명한 한 대목입니다. 통쾌하기도 합니다. 하룻밤에 18만 5천 대군을 송장으로 만들어버린 천사의 그림을 그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만 관심을 두기 쉽습니다. 기도제목을 적은 종이를 펴놓고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신 말씀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히스기야가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편지를 펴놓고 기도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응답하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앗수르 왕이 하나님을 훼방했다 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것은 ‘나와 내 종 다윗’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세게, 열심히 해서, 편지를 펼쳐놓고 기도해서 하나님을 내게로 끌어와 나를 도우시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여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움직여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은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종 다윗"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냐, 진화냐(Creation VS Evolution)2013. 11. 13.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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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발냄새2013. 11. 13. 01:45
예수님의 발냄새
일본 선교를 위해 규슈 지방에 있는 후쿠오카 역 근처 작은 공원에 갔을 때였습니다.
한인 교회 목사님이 세례를 베푸시는 사진 한 장도 끼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너무 좋아하시면서 다시 숙소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할아버지는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약 5만 원어치 정도의 오렌지를 사오셨습니다. 답례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조별로 천 엔씩 헌금을 지출하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이번에는 약 10만 원어치 정도 되는 밤을 사오신 것입니다.
저는 혼자 남아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할아버지 숙소로 갔습니다. 비라도 오면 빗물이 철철 넘쳐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어디를 가도 계속 할아버지 모습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예요. 빨리 양말 벗으세요.” “사실은 발이 너무 더러워서 그래요.” 발 곳곳에 하얀 가루가 겹겹이 쌓여 있었고, 발톱과 발가락 사이사이에는 시커멓게 때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해주는구나. 정말 고맙다!” 초라한 노숙자 할아버지와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때부터 할아버지 발에서 떨어진 하얀 부스러기는 향기 나는 꽃가루 같았습니다.
약 40분 정도가 지나서야 손톱 발톱 정리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할아버지 집이 이렇게 작아 보여도 천국에서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큰 집에서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할아버지와 헤어진 후, 사역자들과 약속한 6시에 후쿠오카 역으로 갔습니다.
손은 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역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예배 시간에 그날 만난 할아버지와 함께하시던 예수님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자신도 노숙자인 처지에 더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을 위해 살고 있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병든 신앙을 소유하고 살았는지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나눔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요13:4-5) -사모님 사모님 방에서 옮긴 글입니다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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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를 멍들게 하는 적들(5)- 부족한 구원관
한국 교회의 성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세계 교회사 가운데 한국 교회와 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단기간에 세계 교회의 중심 멤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특별히 1907년에 일어난 부흥은 한국 교회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부흥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난 곳에 교회는 견고하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서구 교회의 침체기에 한국 교회는 계속하여 성장하였습니다. 서구 교회는 전후 세대들이 교회를 이탈하여 무신론자가 되거나 동양종교에 심취하여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난무할 때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착실하게 준비시켰습니다. 비록 일제의 핍박을 받는 과정과 6.25라고 하는 전쟁의 상처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보호하셨습니다. 한국 땅에 흘려진 순교자들의 피가 헛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열매 맺게 하여 주셨습니다.
한국 교회는 60-90년까지 30년 동안 서국 교회 수백 년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교회가 방방곡곡에 세워지고, 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자와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교회는 성도들로 북적 거렸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높아만 갔습니다. 사회의 중요한 곳에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상은 높아만 같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가 되면서 한국 교회는 침체기를 겪게 되고, 마침내 하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를 향한 기대치가 바닥으로 치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약 16%만 교회를 신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을 살렸던 한국 교회가 동네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너누마 서글픈 모습이 지금의 자화상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이면에는 성화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습니다. 성화가 없는 신앙은 샤머니즘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종교로 전락하여 버렸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진리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는 의롭게 됨과 거룩함의 균형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실수는 거룩한 삶에 대한 강조를 왜곡한 것입니다. 신앙의 축복이 성공에 있음을 너무나 강조하였습니다. 물론 어려운 시기를 이겨야 하는 시대적 아픔이 있기는 하였으나 복음은 거짓 없이 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구원의 참된 의미가 종합적임을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칭의와 성화의 종합적인 사역입니다. 물론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칭의는 영원합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칭의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살게 합니다. 성화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가져옵니다. 성화가 없는 칭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러한 성화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한국 교회의 슬픔은 칭의는 있는데 성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현실 속에 나타는 것은 바로 교인의 성장 없는 교회의 성장입니다. 성도들은 삶의 영역에서 변화가 없는데 교회는 날마다 커져만 갑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모이기는 하는데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장의 삶의 문제만을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이름만 기독교이지 샤머니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나이다’ 신앙에 머문 한국 교회는 더욱 개인주의로 달려갔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야 할 사랑과공의가 잘 보이지 않고 세속적인 냄새만 풍겼습니다. 여전히 교회의 크기가 중요하고, 큰 교회는 다니는 것이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인의 장점인 정직과 헌신은 점점 사라지고 고집과 부정과 이기심이 그리스도인들의 별명이 되어갔습니다. 정말 듣기 싫은 소리이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성화는 시간이 갈 수 록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입니다. 신앙은 성화 즉 변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마치 아이일 때는 자기중심적이지만 성인이 되면 이웃을 배려하게 됩니다. 미성숙한 성도는 자기중심적이지만, 성숙한 성도는 공동체 중심적이 됩니다. 신앙이 자라면 생각이 자랍니다. 이기적인 존재에서 이타적인 존재로의 살아갑니다. 그렇게 성품의 변화가 옵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열매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화에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공과 부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그의 나라와 의입니다. 성공과 부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는지는 그의 거룩한 삶에서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단지 윤리적인 정직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죄 죽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영적인 일입니다. 죄를 죽이는 일이 없이는 결코 거룩함에 이룰 수 없습니다. 죄 죽임은 오직 의롭게 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게 합니다. 죄를 죽이는 일이 바로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러한 죄 죽임의 모습이 반드시 동반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반드시 죄 죽임의 자리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죄에 굴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굴복 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온전함을 보여주는 것이고 동시에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러한 죄 죽임의 가르침이 너무 빈약합니다. 구원 받은 백성의 삶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자신감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종교 생활을 잘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의롭게 된 자로서 죄 죽임의 자리에 날마다 서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고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죄를 죽이는 일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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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WCC 부산 총회 유치2013. 11. 10. 12:16
한국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WCC 부산 총회 유치
WCC 부산총회가 임박했다. 교계 한 편에서는 총회준비에 한창인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반대운동이 더욱 극렬해지고 있다. 부산총회가 개최되는 동안 집회장소 안팎에서 거센 반대 시위와 집회가 예상된다. 교회연합을 목적으로 한다는 총회가 극심한 분열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WCC 총회를 유치하여 한국교회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이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치부를 온 세계에 드러내는 꼴이 되었다. WCC 총회 한국 대회장을 맡은 김삼환 목사는 “세계 교회들 너무 궁금해 하죠. 한국교회 잘 되는 비결 뭐냐고”라고 했는데, 세계교회는 거대하고 화려한 외형에 가려진 한국교회의 허접한 실상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며 이렇게 내실 없이 외적으로 비대해진 비결이 무엇인지 심히 궁금해 할 것이다. WCC 입장에 대한 찬반을 논하기 전에 WCC 총회를 한국에 유치한 자체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최소한의 역사의식과 판단력만 있어도 WCC 총회를 한국에 유치할 경우 이런 소동이 일어날 것을 불 보듯 뻔한데 그만한 분별력도 없는 자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행세를 하며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교회를 연합하려는 선한 뜻이 아니라 세계적인 연합단체를 끌어드리는 업적 세우기와 한국교회의 허세를 과시하고픈 허욕이 부른 결과이다. ... 1959년 한국의 장로교회는 WCC 참여문제로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는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그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장로교단 간의 긴밀한 교류와 연합을 위한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갑자기 WCC 총회를 끌어드림으로써 이 모든 화합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과거보다 더 극심한 분열과 대립의 양상을 초래하였다. 한국교회역사를 더 후진시킨 셈이다. 사전에 이런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고 논의함이 없이 너무도 졸속으로 WCC 부산총회 유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찬반의 입장을 모두 수렴해서 조율해보고 반대 측의 동의를 끝내 얻지 못해 극렬한 충돌이 예상되면, WCC 총회 유치를 포기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그나마 분열을 막는 연합의 차선책이었다. WCC의 신학입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보수 측 교회들을 향해 그들의 신앙양심을 거슬러 WCC총회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며 그러지 않는 그들을 향해 폐쇄적이고 분파적이며 수구 꼴통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연합의 이름으로 범하는 또 다른 독단이고 횡포이다. WCC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측이 서로가 이해하고 확신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최소한 서로를 존중해야하며, 각자의 신학적인 입장과 신앙양심에 반하여 행동할 것을 강압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견해는 묵살된 채 일방적으로 개최되는 WCC 부산총회에 대해 반발하는 이들의 심정도 이해는 하지만, 역 앞이나 공공장소에서 극렬한 반대 시위와 집회를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난맥상을 이 사회에 그대로 노출하여 교회의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된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벌려놓은 분열의 불씨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될 뿐이다. 교인들에게 왜 WCC 총회를 반대하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것으로 족하다. WCC에서 심각하게 문제되는 부분만을 극대화하여 거기에 참여하고 동의하는 교회들은 제 2의 신사참배를 한 배도자들인 것처럼 극단적으로 매도하여 교인들을 선동하는 태도는 한국교회를 완전히 두 동강 나게 할 수 있는 지혜롭지 못한 행위이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더 심하게 균열되지 않도록 모두 슬기로운 마음과 기도의 손을 모아야 할 때이다. 교계 지도자들도 이왕에 깔아놓은 멍석이니 의식 없이 털썩 주저앉을 일이 아니다. 어느 편에 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한국교회가 침몰해가는 위기상황에 이런 분열과 대립을 가져온 과오에 대해 심각한 자성과 회개가 있어야 하며 이렇게 찢겨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다시 화합하기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이런 기본 의식이 없는 자들을 어찌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박영돈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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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ㆍ 2013-11-08 (금) 17:34 ㆍIP: 1.xxx.17 ㆍ조회: 17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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