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훼방죄와 맹세에 관한 고민과 답변]
어젯밤 어느 성도님으로부터 신앙상담을 구하는 메일이 왔습
니다. 어느 날 (군대)후임과 대화 가운데 어떤 사소한 일에 하
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 그 일을
생각해보니 자신이 성령을 훼방한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싶
어서 최근에 너무 불안하고 두려워서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고
민의 내용이었습니다. 혹시 이와 유사한 고민을 하는 분들이
있지는 않을까 하여 청년에게 보낸 답신을 공유합니다. 작게
마나 신앙에 도움이 되는 분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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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군인이시군요?
우선 힘겨운 군복무 중에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둔 자로 살고
자 애쓰는 님에게 주 안에 안부와 격려를 보냅니다.

메일로나마 님의 마음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허나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령훼방죄와는
전연 관련 없는 일이니 너무 무섭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
을 드립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님의 고민은 본질적으로 말씀과 교리(신
앙고백)에 대한 빈약한 이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여, 님의 고민과 관련하여 앞으로 님이 진
리를 배우고 확신함에 있어서 염두해야 할 두 가지 점을 간단
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훼방죄에 대한 오해와 참 의미
성령모독죄라고도 불리는 성령훼방죄는 공관복음에 모두 기
록되어 있습니다(마 12:32; 막 3:28,29; 눅 12:10). 그리고
사도 바울 쓴 서신에도 한 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딤전
1:13). 그만큼 신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고의든, 무지든간에) 유독 한국 교회
에서는 이 구절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해석과 적용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나 부흥사들이 주로 신자들에
게 자신의 말(교훈)을 강요하고자 할 때 이들 본문이나 성령
훼방죄라는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또한 신자들의 행동이 자
신의 신앙적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할 때도 그것을 성령
훼방죄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들은 목사
나 부흥사의 말에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거나 혹은 조금만 양
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나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경우에 자
신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훼방죄를 범한 것은 아닌가 하
는 깊은 영적 자괴감과 치명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
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령훼방죄를 이러한 방식으로 가
르치거나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본의를 벗어난 일입니다. 성
경에서 말하는 성령훼방죄란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를 가리
킵니다.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극단적인 최절정에 이른
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향해 도
리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그 일을 한 것이라면 악
의적인 증오와 야멸찬 조롱으로 일관한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이 죄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바리새인의 지적은 단
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궁금증이나 예수님에 관한 인식의
부족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
나님의 영으로 행하신 권능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세와 정
사를 파하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
의 아들이며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사단의 앞잡이로 칭하
며,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마귀적인 사역으로 폄훼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만 그리스도에 대한 반발이 아닙니다. 그를 세상에
구원을 이룰 자로 보내신 하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을 적용하
시는 성령에 대한,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뜻을 증오하고 배
척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무서원 죄에 대하여 이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하시면서 이 죄는 세상뿐 아니
라 오는 세상(심판의 때에 맞게 될 영원한 세상)에서도 사하
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죄는 일반적인 자범죄와 성도들이 여러 가지 방식
으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며 감소되며 심지어 중단될 때가
있는 상황에서 범하는 죄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또한 무지와
태만과 교만과 거짓말같은 죄의 본성적인 성품으로부터 야기
된 여려 형태의 죄와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성도라
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를 범하
게 되며, 지독한 시험과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러한 죄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사역을 전면적으로 부
정하며, 모든 불신앙과 양심의 가책을 초월하여 하나님에 대
해 고의적이며 악의적이고 최종적으로 범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성령훼방죄는 모든 죄의 절정이기에 모든 면
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와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
로 이 죄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뚜렷한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은
결코 이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죄사함을 받았으며, 설령 죄 가운에 있거나 구원의 확신
이 흔들리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복됨
으로써 마침내 견인하시는 은혜를 입어 구원의 완성을 경험
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당신의 자녀를 결코 이러한 두려운 죄악 가운데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죄를
들어 말씀하실 때, 그 가운데 내포된 성도를 향한 위로의 메시
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크고 심각한 죄라 할지라도
성령훼방죄만 아니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일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훼방죄가 아니라면 어떤 경우에도
죄사함을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악마적인 악으로서 너무
나 불신앙적이고 뻔뻔스럽게 사악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은총
을 가리며,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의도와 행
위를 서슴지 않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
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부
요한 은총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효력은 우리가 무엇을 했다거나 무
엇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되거나 변경되는 것이 아닙니
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신실하시며 인자하시며 불변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님의 행동은 결코 성령훼방죄라 할 수 없습니다.
님이 두려움과 자책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님의 심령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따라
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죄에 대해 근심하며, 죄로부터 자
신을 분리시키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거듭난 자
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므로, 이번 일로 인해 오히
려 하나님께 더욱 진실히 나아가며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을 탐구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과 더 깊고 풍성한 교제 가운데
거하며, 성령과 말씀에 의지하여 거룩한 일을 사모하며 행하
며,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로서 장성해 가는 기회
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의 주의사항
님의 전언에 따르면, 어떤 사소한 일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
로 맹세한 일이 마음을 상심케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성령훼방죄가 아니라, 성경적인 맹세가 무
엇인지 잘 모르는데서 발생한 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 간
단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으로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은 사
적인 차원에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 합당한 맹세는 경건한 예
배의 한 요소로서 말씀에 합한 예배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따
라서 이 맹세는 우리의 찬송과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에 합당
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행해져야 하기에, 결코 그 영광스
럽고 두려운 이름을 망령되이 또는 경솔하게 대하는 태도나
방식으로는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맹세는 성령과 말씀의 보증을 받아 행해져
야 합니다. 님이 후임에게 한 말은 합당한 맹세라고 할 수 없
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일에나 함
부로 사용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일을 해서
는 안 됩니다. 맹세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
컫는 것은 세째 계명을 범하는 가증스런 죄악입니다. 이 점을
잘 유의하여 앞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 존귀히 대하며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섬기는 성도가 되시라는 소망을 전하면서
이즘에서 갈무리하고자 합니다.

주 안에 평안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칼빈의 5대교리 첫번째 /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1 강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1.도입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곧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 그리고 보수신학을 칼빈주의의 신학적인 체계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장로교(개혁주의)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보수(保守)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고 하겠습니다.

 

칼빈주의란?  
                                 
  
그렇다면 칼빈주의란 무엇인가요? 칼빈주의를 곡해하는 사람들은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이라고 이해할는지 모르지만 죤 칼빈(John Calvin)은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의 전승과 신앙고백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신학사상을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로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그는 비록 칼빈주의 신학사상 체계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손수 만들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진리를 가장 바르게 깨달은 사람 중 하나였으며 교의(敎義)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바울, 어거스틴등)의 사상을 후대에 가장 바르게 체계를 세워 전달한 사람입니다.

 

  물론 역사적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신앙이 칼빈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칼빈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개혁자들(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등)에 의해 전통적인 신학이 산발적으로 제시됐는데 칼빈이 이를 종합적이고 보다 체계적으로 수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란 칼빈이 처음으로 종합적인 신학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것이지 칼빈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이론을 뉴톤이 처음 발견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뉴톤의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본래는 창조 때부터 존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시작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 의해 신학적 기초가 수립됐으며,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이 되었고, 칼빈에 의해 종합적으로 체계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칼빈을 추종하는 신학자들(벤자민 워필드, 챨스 핫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등)에 의해 꽃이 피었으며, 현재 역사적 개혁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보수 신학자들에 의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된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성경적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곧 성경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사상 체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란 성경에서 시작하여 칼빈이 체계를 세운 것을 후에 신학자들이 집을 지은 것으로 우리는 칼빈주의가 성경을 기초로 한 전통신학이요 보수신학의 기초라고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칼빈주의 신학의 기본원리는 ?하나님 중심사상(God Centered) 성경중심사상(Scripture Centered)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God's Absolute Sovereignty)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기원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형성하게 된 것은 1610년 화란신학교 교수였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가 죽은 뒤, 소위 알미니우스주의자들(Arminians)이라고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의 가르침을 기초로 다섯까지 주요 요점으로 공식화해서 내어놓은 것이 시발점이 됩니다. 그때까지 화란 교회들은 유럽의 다른 주요 개혁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비르크의 신앙고백에 찬동하고 있었으며, 이 고백들은 둘 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철저히 기초한 교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이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성경의 교리적 가르침에 항의(抗議)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표명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 : 이는 인간이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았지만 영적 선을 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 소위 예지(豫知)에 의한 예정(豫定)교리로서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복음에 반응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에 선행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보편적 구속 혹은 일반적 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결국은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적으로 돌아가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값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있을지언정 종래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견해입니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지에 제한을 받음(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generation limited by the human will) : 이는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역사(役事) 하실 때 인간의지에 의해 거부를 당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성령의 뜻이 좌절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자진해서 영생의 생명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한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요지입니다. …은혜에서 떨어 짐(falling from grace) : 이 주장은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조항은 각각의 내용이 담고 있는 교리적 성격상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하나님으로서 일체의 성경적 교리는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편에서의 교리는 다른 한편에서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성경의 자증입니다. 성경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유기적(有機的)으로 연합돼 있습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이 일어나자 화란 정부는 1618년 11월에 화란의 남부지역인 도르트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 129명이 모여 이 문제를 갖고 회의를 시작합니다. 이 회의는 이듬해인 1619년 5월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무려 154회에 이르는 마라톤회의를 거듭한 끝에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조항들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에서 매우 명백히 제시됐고, 프랑스 신학자인 죤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형성된 개혁주의 교리적 입장을 재확인 한 도르트 대회는 알미니안들의 체계에 대결하기 위한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공식화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2.전개

 

  우리가 흔히 칼빈주의의 5대 교리라고 일컫는 내용은 칼빈 개인의 주관적인 교리적 견해에서 나와진 독단적인 성경해석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미 종교개혁자들과 주요 종교회의에 의해 정립된 개혁주의적 성경해석의 차원에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일단의 알미니안들의 교리적 항의를 일축하고 재확인하는 형식으로 나온 성경적 변증의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이들 내용은 ‘구원의 도리’에 집중해서 연관돼 있음이 특징입니다.

  한편 이들 주요 조항들을 영문의 첫 글자를 중심으로 나열했을 때 'TULIP'이라는 글자로 표기되는 바 일명 ‘튤립교리’라고도 부릅니다. 오늘은 이 중 첫 번째 교리인 ‘인간의 전적타락’에 관해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자유의지’ 및 ‘인간의 능력’ 교리의 반동(反動)으로 제시된 교리적 주제임을 쉽게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알미니안파들의 주장에 대한 철저한 부인과 이에 대한 성경적 답변입니다. 우리는 본 강의를 통해 성경이 증언하는 바 인간의 전적타락과 관련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이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전적부패 또는 전적무능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 속에는 한결같이 몇 가지 동일하게 시사하는 신학적 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주제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는 상대적 명제가 아닙니다. 절대적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인데 이는 사람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평가된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절대적 관계에 근거해서 진단된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의 고하와 출신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죄인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정죄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은 처음 무죄자로 창조됩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죄자가 곧 완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자는 무죄할 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짓지도 않는 절대자를 일컫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죄자이지만 불완전한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신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통해 보다 완전하고 온전한 선의 상태로 발전해 나가야 할 시험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시험에서 실패합니다.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것이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사건입니다. 원죄의 기원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죄의 성립은 인간의 내적 욕심의 발로로 야기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요16:9). 이후 아담의 범죄의 죄성(罪性)은 그의 후손들의 본성에 유전적으로 전가(轉嫁)돼 온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선고하는 근본원인을 제공합니다(창2:17, 3:5-6). 롬3:23와 5:12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지적이 바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행위와 이로 인한 후손에게로의 죄의 생득적 전가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후부터 온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됩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롬3:10). 인류의 비극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죄인으로 정죄 당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체의 영적 교제에서 단절돼 영원히 결별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영적 이산가족이 돼 버린 셈입니다. 바로 죄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사59:2입니다.“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후 아담의 원죄는 그의 후손들의 본성 속에 감추어져 온갖 범죄행위의 원인 제공자로 활동하게 되는 바 곧 자범죄(自犯罪)의 근원이 됩니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 만연돼 있는 갖가지 형태의 범죄는 바로 조상으로부터 생득적으로 전수된 원죄의 다양한 외적 표현일 뿐입니다. 설령 일생에 거쳐 행위에 근거한 범죄를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있을지라도 본성적으로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소위 양심(良心)이 고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은 죄인으로 전락한 인간이 현재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유일의 천성적(天性的) 흔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양심마저도 화인(火印) 맞아 그나마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때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요8:1-11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의 얘기가 소개됩니다. 한 무리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다수의 시민들이 이 얘기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고소할 목적으로 이 여인을 잡아 의도적으로 주님께 이끌어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명했다고 하면서 주님의 판결을 요구합니다. 사도 요한은 저들의 요구가 ‘예수님을 시험해서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고 이 사건의 내막에 담긴 실상을 독자들에게 폭로합니다. 어찌했든 예수님은 저들의 요구에 어떤 식으로라도 답변하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다. 만약에 모세의 법대로 죽이라고 하신다면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법을 위반해 스스로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고 죄를 용서하셔서 구원하시는 사랑의 법에 근거해 살려 주라고 하시면 이는 주님 또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을 통해 오신 분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적 규범인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시는 셈이 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잠시 시간을 가지신 후에 살기등등(殺氣騰騰)하고 의기양양한 회중을 향해 일성(一聲)을 발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다시 잠시의 침묵이 흐릅니다. 얼마 후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때의 상황을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회중은 간음한 여인과 비교해서 분명히 현행범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 의의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드러난 죄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주님의 질문 섞인 답변에 어느 누구 한사람도 선뜻 나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회중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일말의 양심이 저들을 여인과 동일한 범죄자로 고발하고 있음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감춰진 죄인‘으로 말입니다. 요한은 이 상황을 해석하면서‘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떠나게 됐다고 기록합니다. 비록 저들이 현행범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자기 양심에 찔려 감히 자신들을 무죄자라고 주장하지 못한 사실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여기서 양심은 바로 주님의 질문 곧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 본성의 실질이 어떠함을 사실적으로 직고(直告)하는 고발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지금 인류를 향해 저들의 실상이 하나님 앞에서 ‘이 여인이나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사실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드러난 죄인이나 감추어진 죄인이나를 막론하고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시선 앞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은 죄인들로 존재할 뿐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 심성의 실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명제 속에는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의 영향은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전(全) 영역에 걸쳐 ‘전인적(全人的) 부패’를 초래한 나머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을 스스로 취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死亡者)라고 정의한다는 지적입니다(롬3:10-12, 엡2:1). 다시 말해 인간의 지정의가 그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교통의 기능을 철저히 상실한 나머지 어떤 자의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롬1:21-23). 이는 처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도의 영적 수준에서 자력으로는 회복불가능의 저급하고 타락한 상태로 전락돼 버렸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창2:17을 보십시오. 선악과 금과법에는 문맥상 조건부적으로 영생과 사망이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이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하셔서 죽음이 즉각적으로 저들에게 임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 구속의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과의 종전 같은 막힘 없는 전인적 교제와 교통은 한 순간에 단절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여느 때와 같이 찾아 오셨지만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음으로서 인격적 교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됨을 봅니다(창3:8-10). 도리어 하나님을 피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영적 죽음 곧 ‘전인적 관계의 단절’이라고 부릅니다.

 

  이후로 아담의 범죄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과의 일체의 정상적인 교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죄(原罪)로 기능하게 됩니다(사59:1-2). 롬3:23과 5:12을 보십시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일하게 죄인인 사실을 증거합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행위로 나타나는 일체의 인간의 자범죄(自犯罪)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원죄의 죄성으로부터 기인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합니다.

 

  엡2:1을 보십시오. 우리의 옛사람의 형편과 처지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들로 판정 받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죽은 자나 방불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과의 마땅한 영적 교제(전12:13)의 단절이 성경적 죽음의 일차적 판정임을 알게 됩니다. 마8:22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친의 장사(葬事)문제로 주님을 즉각적으로 좇기를 주저하는 한 제자를 향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권고하십니다(마8:22, 눅9:60). 여기서 실제로 죽은 자는 두 번째 죽은 자를 가리키며, 첫 번째 죽은 자들이란 비록 현재적으로 살아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통해 주님과 관계도 분깃도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불신자들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원수 된 자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은 여전히 전적부패한 자들로서 결국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로 간주됨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그렇다면 갓난아이들이나 태아들은 어떨까요? 성경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악(邪惡)한 존재라고 정죄합니다. 원죄로 인해 처음부터 죄인으로 잉태되고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시51:5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실토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간의 심성을 고발하면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17:9)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함으로 당시의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 했음을 창세기 저자는 고발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음을 기록합니다(창6:5). 로마서 기자는 이런 인간의 죄악 된 상태를 힐난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3:10). 지금 저자는 인간 상호간의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선의 기준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선의 기준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이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91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해서(원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규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목적)하는 것’을 동기유발로 삼아 행할 때 비로소 선행으로 성립된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전적타락의 두 번째 명제는 사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근원이 원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임을 증거합니다(롬6:23).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히9:27). 왜냐하면 죄는 법정적(法定的) 측면에서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요구하는 바 죽음은 죄 값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며 동시에 형벌이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노령으로 죽는 자연사(自然死)나 각종 병사(病死) 그리고 사고사(事故死)는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의 방식(方式)일 뿐 죽음의 근본 원인(原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의 값으로 사망이 인류에게 불청객으로 찾아온 것입니다(롬6:23). 역사이래 한 번 태어난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원리와 원칙은 지속적으로 유효해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인류를 죽음의 포로로 사로잡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필연적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선고하는 성경의 증언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이며 선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이 안고 있는 명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 죽는 것으로 모든 지상의 삶이 마감되는 줄 압니다. 더 이상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는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요5:28-29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영생(하나님 나라)과 영벌(불못 곧 지옥)의 실질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때 인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를 경유해야 할 것임을 경계시킵니다. 따라서 죽음 후에는 온 인류 앞에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히9:27). 이는 한 번 태어난 생명의 가치는 영생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하사된(창2:7) 탁월한 성격상 영원불멸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법칙이며 원리입니다.

 

  아울러 종말론적 생명의 최후적 거처는 영생과 영벌의 장소로 나뉘어 질 것임을 성경은 지적합니다(계20:15, 21:1, 4). 본문(요5:28-29)은 하나님의 최후적 심판대에 서기 위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사실 부활의 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는 그 신비하고 초자연적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실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사건의 경우를 통해 분명한 실제적 사건으로 소개합니다(롬8:11, 고전15:20-24). 사실상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고전15: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종말론적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보증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에 속해져서 성도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시는 날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15:42-44, 살전4:16-17)). 이미 부활해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체의 영광을 입고서 말입니다. 이토록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남김없이 만족시킨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증거로 작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양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고전15:3-4).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이 부활 후 심판(계20:11-14)에서 제외됨으로 지옥의 다른 설명인 불못의 종말론적 형벌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사면(赦免)됐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요5:24). 이 말은 역(逆)으로 현재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아직 죽음과 그 후의 부활과 심판을 현실로 경험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선취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에 처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요3:18). 복음이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는 것을 통해 필연적 심판(영벌)에서 제외되며 동시에 영생하는 생명에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요5:24).

 

  이런 복음의 내용이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된 사건으로 신기하게도(?)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 믿는 것이 아닌 믿어지는 것입니다. ‘절대적 타자’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이끌림을 받아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자아는 위에서 본대로 이미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자로 존재하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타자(他者)로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다른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이 우리를 위한 대속적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미 죽어버린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를 수납하게 하신다는 얘깁니다.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향한 정상적인 영적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역의 주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의 지상적 사역의 계승자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서 당신의 종말론적 구속사역을 성령님을 통해 진행해 가십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에 대해 원보혜사가 되시며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통해 성령님을 자신의 대리적 파송자로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의 성격은 오직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을 증거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통해 부단히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시며 이를 가능케 하는 일에 집중돼 있습니다(요14:16, 26). 가시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까지도 성령님은 성도들의 심령에 관계하셔서 여전히 영생하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요14:16).

 

3.결론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면전에서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한 무능자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증언합니다. 바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반응할 수 있는 일체의 지정의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들을 일컬어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선고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도 없으며 한결같이 치우쳐 무익하게 됐음을 선포합니다(롬3:11-12). 나아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조차 싫어한다고 지적합니다(롬1:28).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심성이 전적인 타락과 부패로 인해 마땅히 섬길 자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상실된 상태를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시종일관하게 인간의 본질적인 영적 상태를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영적 파산자로 선고를 내립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거듭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을 지적합니다(고전2;14). 그렇습니다. 이제 외부적 타자(他者)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전무할 뿐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의 머리됨으로 인해 온 인류를 부패와 타락으로 몰아가 죄인 되게 함으로서 영적 사망과 육체적 죽음과 최후적 심판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지정의를 발동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일말의 능력조차도 앗아감으로 인류를 하나님 없는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런 교리적 내용들을 일컬어 전적타락, 전적부패 혹은 전적무능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는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적 무능자로 타락한 인생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타자’의 도움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당위(當爲)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 강론에서는 자연히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택정 말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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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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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강만원 > <개혁포럼 시사토론방>

‘하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예수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도 되는 것이 아닌가요?”

느닷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서 한동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댓글 올리신 분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신앙을 솔직히 표현했을 뿐이며,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처럼 거리낌 없이 주장했을 것이다.

생각이 서로 다를 뿐, 틀렸다고 감히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답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럴듯한 논리다.

1)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다
2)예수는 인간이면서 하나님이다
3) 그러므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인간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언뜻 보면 논리의 허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톨릭 신자들은 주저없이 마리아를 ‘성모’로서 신의 반열에 올린다. 인간적인 공경일 뿐 신적인 경배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그에게 위로를 받고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그가 가톨릭의 신일 수 밖에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독교의 종교적인 위상에 대해서 질문하면 어김없이 공경의 의미로서 ‘성모 마리아님’으로 부른다고 하지만, 공경과 경배는 분명히 다르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라’. 성경에서 보듯이 공경은 세상의 부모에게 해당되는 말인 반면에 경배는 신적인 존재에게 해당된다. 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를 대하는 태도는, 내가 보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 또는 신적 존재이다.

성경 어디에 마리아가 승천했고, 성경 어디에 마리아가 신적인 능력과 권세를 부여 받았는가? 성경에 없는 사실을 교리로 세웠다면 이는 종교적인 주장일 뿐 결코 성경의 진리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가 될 수 없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인식하는 신앙은 (일부)가톨릭 신자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전형적인 신앙관이다. 그러나, 예수가 육신을 지닌 인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그런 논리라면, 성부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성모 마리아는 성부 하나님의 아내도 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부, 성자, 성령은 일체이신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성삼위의 어머니도 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에게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로서 신성神性을 부여한 것도 아니고, 그녀의 특별한 영성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 되신 것도 아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육신의 도구였을뿐, 특별한 능력이나 신성 때문에 하나님이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어머니’라는 단어의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주장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분명한 전제가 성립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즉, 마리아의 태에서 예수의 육신이 태어났던 것처럼, 예수의 거룩한 신성이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초월적인 신성도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었을 때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의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라는 말과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형태상 같은 듯 보이지만 하지만 내용상 근본적으로 다르다.

결국 마리아가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존재, 다시말해 ‘성모 하나님’일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신성과는 지극히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다.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여종’의 신분이었던 그녀가 의인이 될 수 있었고, 나아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지 그녀가 본래 거룩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어머니였기 때문이 아니다.

마리아를 굳이 신의 반열에 두려는 가톨릭의 의도는 예수의 거룩한 탄생을 극적으로 미화하려는 종교적 계산 때문이며, 나아가 영지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특별한 관계(?)를 부정하며 인간 예수의 주변에 있었던 유일한 여인으로서 마리아의 위상을 다지려는 의도일 뿐이다.

마리아는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아름다운 여자이다. 또한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서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했고, 예수를 낳았던 그녀의 순종이 없었다면 당연히 예수는 그 때 그 곳에서 ‘나사렛 예수’로 태어나지 못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르면 약혼은 동거만 하지 않을 뿐 혼인과 동일한 법적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약혼한 요셉과 관계를 통해서 아기를 잉태한 것이 아니라면 마리아의 임신은 율법에 따라 간음에 해당하며 투석형에 처해지는 중죄이다.

천사장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전달받은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따랐다(눅1:30-38)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그러나, 마리아의 온전한 순종을 말하면서 희생을 무릅쓰고 예수를 낳았던 순종의 여인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종교적인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탄생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며, 거룩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애써 꾸미고 치장할 때 오히려 본질이 훼손될 뿐이다. 예수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이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거룩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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