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苦痛)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모든 동물은 자신에게 닥친 극심한 고통을 피하건 줄일 재주가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고통이 그렇게 싫은데도 왜 모든 동물들이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는지 그 모순성을 설명하지 못 합니다.

생각해보면 고통 없이 탄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산고(産苦)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고 부모님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1969년에 제이거와 에반스(Zager and Evans)가 부른 유명한 노래 서기 2525년(In the Year 2525)에는 먼 미래에 인류는 출산의 고통 없이 기다란 유리관 아래에서 아들과 딸을 집어올 것이라는 가사가 들어있는데, 글쎄요, 고통 없이 공장의 시험관으로 만들어 데려오는 자녀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울까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동물의 자식을 사랑하는 눈물겨운 모성애는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하셨습니다. 흔히 이 잉태하는 고통을 저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정작 더 큰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잃은 것도 고통이지만 죄악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내어 주셔야 할 하나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미리 막지 못 하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아담과 하와의 배반과 이로 인한 잉태의 극심한 고통과 가슴을 찢고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는 하나님의 더욱 극심한 고통을 통하여 인류를 재창조(再創造), 다시 낳으시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를 “하나님이 낳으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흙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어 아무런 고통 없이 탄생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과연 얼마나 큰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배반과 잃음, 사랑과 증오, 희생과 고통, 눈물과 피흘림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자식, 죽었던 자식을 다시 얻었을 때의 기쁨과 진정한 사랑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를 위하여 그 고통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눈물로 찬송합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울면서 찬양합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나,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송축합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고통 가운데서 살고 있을지라도 더욱 큰 고통을 통하여 나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영원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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