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는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가?>

기독교 신자는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십일조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십일조는 신약시대에서는 폐지된 구약의 율법인가?
(여기 또 하나의 뜨거운 감자를 올립니다.)


1. 십일조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

일반적으로 기독교신자들이 ‘십일조’ 하면 떠올리는 것이 말라기 3장 말씀이다.

(말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것이요 이를 드리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이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를 하늘 문을 열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자신을 시험하라고까지 하면서 약속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유물로, 또한 교회의 헌금강요 내지 치부수단으로 매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그럴까?


2. 구약시대 십일조의 시작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처음 정하신 것은 민수기 18장에서이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말씀 그대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아 회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레위지파는 성막에서 섬기도록 구별되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다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만 레위인들에게는 분배되는 땅이 없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거주지로 삼고 제물로 드릴 짐승을 간수할 성읍 주위의 조그만 땅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기업이다. 그들에게 나의 십일조를 돌린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민수기 맨 앞으로 돌아가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20세 이상의 남자를 다 세도록 하셨는데 여기에서 레위지파는 빠진다.
그리고 3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지파 중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를 다 세도록 명령하신다. 세었더니 22,000 명이다.
다음은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난 남자를 생후 일 개월 이상으로 모두 세라고 명령하신다. 세었더니 22,273명이다.
레위인 남자의 수보다 이스라엘 자손 처음 난 남자의 수가 273명 많다.

하나님은 모든 처음 난 남자, 곧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라 주장하셨고, 이 뿐 아니라 생축의 처음 난 것과 곡식과 열매의 처음 거둔 것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기 민수기 3장에서 보면 그 장자들을 도로 돌려주는 대신 레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겠다고 하시면서 교환하고 계신다.
그리고 돌려주실 장자가 레위인보다 273명 더 많으니까 한 사람에 오 세겔씩 돈으로 계산하여 1,365세겔을 받아 챙기신다.
너무하시다. 대충 넘어가시지 않으시고 그걸 돈으로 계산해 다 받으시다니.


3. 장자의 의미, 레위인의 의미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장자를 유난히 푸대접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선 다윗이 말째 아들이다.
메시아의 계보인 유다는 넷째다.
야곱도 동생이다.
하나님은 장자혐오증에라도 걸리셨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장자혐오증에 걸리셨다.
인류의 장자인 아담은 선악과사건을 저질러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선사했다.
아담과 하와의 장자인 가인은 동생 아벨을 때려죽였다.
가인이 한다는 소리가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였다.
하나님의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였을 것이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렇지 않은가? 형이 동생을 지켜주어야지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그렇다. 못 된 인간의 맏아들은 형 노릇을 못 했다.
동생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때려죽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장자(장자권)를 압류하고 자신의 아들을 인간들에게 살려내는 맏형으로 내어주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형이 되셨다.
그렇다. 성경 여러 곳에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시편 22편과 히브리서 2장을 보라. 그는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형제가 되셨다 하지 않는가.

광야에서의 성막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그 구원하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 곧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막은 하늘의 참된 성소의 그림자이다.
그런데 태초부터 그 하늘의 참된 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자가 계셨지 않은가? 누구인가?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
하나님은 그 장자를 내어주신 것이다.

하늘에서 아버지를 섬기시던 맏아들을 내어주셨으니,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장자(장자권)를 몰수하고 “장자는 내 것이다. 모든 처음 난 것은 내 것이다.” 주장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민수기 3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를 되돌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대신 레위인을 택하여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돌려주신 장자가 더 많은 만큼 오 세겔씩 돈으로 쳐서 받으신 것이다.
이렇게 셈에 철저하신 것은 단 하나의 생명도 허투루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자신의 아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다가 그 아들을 내어주시고 광야에 내려와 성막 가운데 계시면서 레위인들로부터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완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십일조의 의미

레위인들이 기업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려면 형제들에게서 십일조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도 그렇다.
만일 십일조가 없었다면 2000년간 교회가 어떻게 지탱되어 올 수 있었겠으며 선교사는 어떻게 보내며 복음이 과연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그건 구약시대 이야기고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고 레위인이 따로 없고 그래서 십일조도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십일조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내어야 한다.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이유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가나안 땅은 천국의 예표이다.
신약성도들은 십일조 낼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자는 천국 땅을 분배받지 않을 모양이지?

왜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아서 레위인들에게 돌리셨는가?
민수기 18:21절 말씀은 레위인들의 섬김의 대가(갚음)라 하셨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의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것처럼
천국을 분배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 십일조는 하늘성소에서 섬기시던 아들의 몫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죄인들에게(이스라엘 백성에게) 내어주시고 대신 회막에서 레위인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니 황송하게도 레위인이 그 십일조를 받게 된 셈이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하나님은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셨고 아들에게 다 주셨다.
아버지의 것은 다 아들의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아들에게로 상속된다.
당연히 천국은 아들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천국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그 생명, 그 살과 피, 아니 그 아들 되심, 후사 되심, 상속권을 몽땅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아들이 십자가에서 찢어주신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까지 분배받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십일조를 내었는데
영원한 하늘의 약속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아들 됨을 받은 우리가
후사가 된 우리가 십일조를 안 내다니?


5.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아브라함이 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는가?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제사장, 곧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바로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드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십일조의 예표이며 모형인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사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고 서원한다.
아비 집은 영원한 구원의 처소요 안식의 처소요 천국의 예표이다.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 그것은 장자 에서가 물려받게 되어 있으며, 죄(?)를 범하고 도망가는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에 평안히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득한 훗날의 소망이다.
이 장면은 마치 재산을 팔아 타국으로 떠나는 탕자나 하나님을 떠나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한 신세의 야곱이 “제게 아비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신다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 곧 주님의 소유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오면” 하는 것과도 같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의 십일조가 레위인들이 아직 허리 속에 있을 때 있었던 일로 아브라함, 야곱, 레위인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멜기세덱, 곧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라고 풀이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비의 집, 가나안 땅, 곧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갈 자가 드리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6. 십일조는 주님께 드리는 것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일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구원을 얻은 신약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의 모형이요 예표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히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In the one case, the tenth is collected by men who die; but in the other case, by whom is declared to be living. (NIV)

동사가 현재시제이므로 우리말 성경에 ‘받았느니라’는 ‘받느니라’라고 해야 옳다.
즉 구약시대에는 죽을 자들, 곧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았으나, 신약시대에는 살았다고 선언된 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일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십일조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십일조를 받으실 분이 분명해진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십일조는 신약에서 이루어질 십일조의 예표인 것이다.


7. 십일조는 성도의 신앙이요 힘이요 자랑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십일조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 십일조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십일조는 천국생명을 얻은 성도의 표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리는 것은 예배이다. 찬양이다. 이것은 입술로 드리는 것이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리는 것은 삶이다. 거룩한 산 제사(롬12:1-2)다. 이것은 거룩한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다.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몸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입으로 때우고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입으로, 몸으로가 아닌 현찰로 드려야 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이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요 이를 안 드리는 것은 도적질이라는 말씀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없다.
구약시대에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훔쳐 먹는 것이었지만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주님의 생명을 훔쳐 먹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교회들이 재물로 타락하고 성도들의 믿음의 고백인 십일조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해도 십일조는 성도의 거룩하고 당연한 의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십일조와 헌금의 잘못된 쓰임과 교회의 대형화와 개교회주의에 의한 헌금독점현상은 인간들의 문제이며 고쳐야 할 문제이지 십일조 자체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반기독교, 반교회인사들이 마치 십일조가 교회의 부패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면서 십일조 무용론 내지 해악론을 펴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십일조 없는 교회, 십일조 없는 기독교가 과연 힘이 있겠는가?
십일조 없이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어갈 수 있겠는가?

십일조 안 드리는 성도는 천국 못 간다는 뜻 절대로 아니다.
구원은 십일조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축복의 조건도 아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을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는 일종의 거래이자 기복신앙의 전형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가 없다.
십일조가 성도에게 지워지는 책임이요 의무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그러한 의무를 지우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슨 조건을 걸거나 바라면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다.

그러나 주님의 살과 피, 그 생명을 받은 성도는 스스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원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옳다.
아니 참으로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자는 자원하여 주님을 섬기며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 십삼조, 아니 가진 모두를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일 가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십일조는 천국백성의 자랑스러운 의무요 표요 힘이요 자랑이다.
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군대의 보급선이다.
아름다운 드림이 하나님나라,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세우고 이기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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